이유영은 늘 어둠 속에서 멍하니 살아왔다. 그래서 아무도 그녀에게 앞으로의 계획에 관해 묻지 않았다.그때 이유영이 무슨 계획을 세울 수 있었겠는가?그저 하루하루를 버텨내는 것만으로도 벅찼던 시절이었다.여진우의 물음은 곧 이유영이 이제 완전히 회복했다는 뜻이었다.“회사에 나가서 일해야지. 근데 난 더 이상 경영은 하고 싶지 않아.”그 말에는 한 점 망설임도 없었다.과거, 여진우가 돌아오기 전까지만 해도 로열 글로벌의 모든 무게가 이유영의 어깨를 짓눌렀다.특히 그때는, 정유라가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어 더더욱 머리가 아팠다.결국 모든 책임을 떠안는 것 외엔 선택지가 없었다.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이제 그녀에겐 오빠가 있고 그 덕에 선택지도 훨씬 많아졌기에 더 이상 예전에 얽매이지 않아도 된다.“뭔가 하긴 해야지.”여진우가 한참 생각한 끝에 말했다.이유영은 곧장 물었다.“그럼 뭐 하면 좋을 것 같아?”“네가 하고 싶은 건?”“네 비서!”그 말에, 여진우는 멍한 표정으로 이유영을 바라봤다.그건 아무리 봐도 재능 낭비였고 아버지가 이유영을 키우기 위해 들인 시간과 노력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그런데 이제 와서 비서를 하겠다고?여진우는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야망이 없네.”생각해 보면 처음으로 동생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 같았다.그 말을 들은 이유영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자신이 원하는 걸 할 자유도 없는 건가?사실 이유영은 높은 자리에 있는 걸 좋아하지 않았는데 그런 위치에 있으면 늘 벼랑 끝에 선 기분이었다.무언가를 감당해야 한다면 그럴 가치가 있을 때 해야 하는 법이다.“회사에 진행 중인 프로젝트가 몇 개 있다던데, 내가 디자인해 볼까?”한참을 고민하던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예전, 청하시에서 로열 글로벌로 정식 복귀하기 전, 오로라 스튜디오를 운영한 적이 있었다.그래서 디자인 분야에 대한 경험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었다.여진우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사람은 무언가 할 일이 있어야
이유영은 앞에 놓인 따뜻한 물을 한 모금 마시며 물었다.“오후에 시간 있어?”“왜?”맞은편에 앉은 남자는 흰색 실내복을 입고 있었지만 온몸에서 고귀하고 우아한 분위기가 흘러나왔다. 그에게서 풍기는 엄격함은 타고난 것이었다.이유영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이혼하려고.”차갑고 냉담한 음성이 떨어지자, 맞은편의 남자는 무의식적으로 숟가락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순간적으로 흔들린 눈빛이 그의 동요를 말해주었지만 그건 아주 잠깐이었다.이내 평온을 되찾고는 별일 아니라는 듯 이유영의 그릇에 정성스럽게 익힌 소고기를 집어주며 말했다.“장난치지 마, 응?”마치 말썽꾸러기 아이를 다독이듯 다정한 목소리였다.그러나 박연준은 알고 있었다. 이유영이 장난을 치는 게 아니라는 걸. 마치 그때의 강이한처럼.이유영은 강이한의 세계에서 한지음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을 때, 미친 듯이 이혼을 요구했었다.그때는 가진 것도 없었지만 단호하게 행동했다.하지만 지금은? 지금, 그녀의 뒤에는 정씨 가문이 있다.이유영의 결심은 박연준에게 거대한 거리감을 안겨주었다. 몸이 멀어지는 건 다시 가까워질 수도 있지만, 마음이 멀어지면 어쩔 수 없었다.이유영은 차가운 눈빛으로 박연준을 바라보며 다시 물었다.“내가 너랑 장난하는 것처럼 보여?”박연준은 쓰디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알아. 난 그럴 자격도 없다는 거.”이제는 화를 내는 것조차 무의미할 정도로 둘 사이에는 감정의 균열이 깊어져 있었다.박연준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그럼, 지금 나랑 이혼하면 어떤 결과가 기다리고 있는지 알아?”과거, 강이한과 이혼하려 했을 때, 강이한은 이유영의 목을 조르며 물었다.“날 떠나면 어떤 결과가 올 것 같아?”전생이든 현생이든, 그 질문은 반복되었다.강이한은 처음부터 이유영이 절대 떠나지 않을 거라고 믿었다.무슨 일이 있어도 이유영은 그의 곁에 남을 거라고 확신했다.그리고 지금, 박연준도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마치 이유영이 하는 모든 선택이 신중해야
정국진은 오랫동안 엔데스 가문을 피해 왔다. 하지만 피하는 것과 관계를 맺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엔데스 가문이 강제로 관계를 맺으려 든다면 상상도 못 할 갈등이 벌어질 것이다.어떻게 분석해 봐도 지금은 이유영이 박연준과 이혼하기에 적절한 시기가 아니었다.하지만 이유영은 여전히 단호한 모습이었다.정씨 가문은 엔데스 가문과 엮이길 원치 않고 이유영과 박연준 역시 마찬가지다.공기가 얼어붙은 듯한 분위기에서 이유영이 무언가 말하려는 순간, 박연준이 먼저 입을 열었다.“적어도 이 시기가 지나서 이혼하자, 응?”그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깊은 애정이 묻어났다.이유영은 박연준이 말하는 '이 시기'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었다. 엔데스 가문의 일이 마무리될 때까지 기다려 달라는 의미였다.하지만 지금, 엔데스 가문의 도장은 사라졌고 전기봉도 행방불명인 상태에서 일이 마무리되려면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릴 터였다.그 도장이 누구에게 발견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하지만 엔데스 가문의 당주 자리는 단순히 도장이나 문서만의 문제가 아니라 명문가들의 지지도 필요했다.즉, 지금 이 상황은 언제 끝날지 모르는 것이다.이유영은 박연준을 깊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물었다.“정씨 가문이 견뎌낼 수 없다고 생각해?”“그럼 너는?”견뎌낼 수 있을까?이유영은 정씨 가문을 그 소용돌이에 끌어들이려 하는 걸까?칼과 포크가 부딪치는 소리가 났고 그녀의 감정이 어떠한지 알 수 있게 되자 박연준은 웃었다.그 눈빛에는 진심 어린 미소가 담겨 있었다.그는 이미 이유영의 선택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지만 그 선택의 이유는 마음을 아프게 했다.이유영은 음식을 천천히 씹으며 입을 열었다.“너랑 그 사람, 대체 무슨 거래를 한 거야?”“누구?”뜻밖의 질문에 박연준은 처음엔 이해하지 못하다 곧 깨달았다.강이한을 말하는 것이었다.“너는 무슨 거래가 있었다고 생각하는데?”박연준은 되묻으며 씁쓸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이유영은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누가 알겠어.”이유영
그가 보고 싶었던 상황이었다.강이한과 이유영이 이런 결말을 맞이하는 것을 그는 오래전부터 예상하고 있었고 어쩌면 계획했던 일인지도 몰랐다.그런데 막상 현실이 되자 숨이 막혔다.어쩌면 연서에 대한 일을 몰랐다면 좀 더 담담했을지도 모른다. 그때는 스스로에게 강이한이 당연히 겪어야 할 일이라고 수없이 되뇌었으니까.하지만 지금은 달랐다.모든 것이 달랐다.“걱정하지 마. 강이한은 다시는 네 앞에 나타나지 않을 거야.”박연준은 이유영을 바라보며 씁쓸한 기색이 감도는 목소리로 말했다.“다시는?”이유영이 낮게 되물었다.“응, 다시는 나타나지 않을 거야.”확신을 담은 목소리가 무겁게 내뱉어졌다.그들은 오랫동안 싸워왔지만 동시에 너무 오랫동안 얽혀 있었기에 서로의 속마음을 너무 잘 아는 사이가 되었다.박연준은 알고 있었다. 강이한처럼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 절대 자기의 비참한 모습을 이유영에게 보일 리 없다는 것을.절대 다시는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이유영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 박연준의 눈에 스치는 슬픔을 보고 눈살을 살짝 찌푸렸을 뿐이다.이유영의 차갑고 어두운 눈빛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누구도 알 수 없었다.그렇게 숨 막히는 식사가 계속되었다.식사 후.이유영이 백산 별장으로 돌아가려는 순간, 박연준이 입을 열었다.“사흘.”“뭐라고?”“내가 있는 사흘 동안, 너는 풍산 그룹에 머물러야 해.”이유영은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보았다.이미 불쾌했던 눈빛이 그 말과 함께 더욱 차갑게 식어갔다.“너무 지나치게 굴지 마.”“엔데스 가문 사람들은 아주 민감해. 착한 사람 하나 없어. 그들이 기회를 잡지 못하게 하려면 사흘 정도는 그렇게 큰 부담이 아니잖아. 아니야?”“나한테는 너랑 같이 있는 일분일초도 숨 막혀.”예의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말투였고 답답했던 박연준의 가슴은 그 말을 듣는 순간 더 깊이 내려앉았다.‘숨 막힌다고?’박연준은 그제가 알았다. 강이한이 말했던 '막막함'이라는 게 무슨 뜻인지.어둠 속에서 힘겹게 버
얼마나 오래됐을까?이 이름을 마주한 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흘렀을까?강이한과 결혼한 지난 3년 동안, 이 이름은 이유영을 끊임없이 괴롭혔다. 다른 여자들과 비교하며 무엇을 하든 만족하지 못했고 이유영을 끝없이 깎아내렸던 이름이었다.감옥 화재 이후로 이유영은 진영숙을 다시는 만나지 못했던 것만 같았다. 그동안 어디서 어떻게 살았는지, 이유영은 알고 싶지도 않았다.어차피 아무 의미 없는 사람이었으니까.강이한과의 관계가 끝나면서 그 사람들은 모두 과거가 되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진영숙이 나타난 것이다.대체 왜?“왜 온 거예요?”이유영은 눈앞이 캄캄해졌고 숨을 깊이 들이쉬며 긴장하고 있었다. 지금도 진영숙과 관련된 이야기는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그때 전화기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강 선생님이 실종되었대요.”강이한이 서주를 떠난 뒤 행방불명이 되었다는 소식. 그 소식이 아무리 멀리 있어도 진영숙이 모를 리 없었다.그리고 결국, 진영숙은 미쳐버릴 듯 강이한을 찾아 헤매다 여기까지 온 것이다.이유영은 평생 진영숙을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진영숙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만약 강이한이 사라지지 않았다면 진영숙은 영원히 이유영을 찾지 않았을지도 모른다.“알았어요.”짧은 대답을 남기고 이유영은 전화를 끊었다.원래 백산 별장으로 돌아가려 했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었다.이유영은 뒤돌아 계단 입구를 바라보았다. 박연준은 이미 위층으로 올라가 있었고 혼자 남아 잠시 생각을 정리하던 이유영은 결국 발길을 돌려 다시 반산월로 향했다....한편, 정씨 가문에서.진영숙은 차가운 눈빛으로 임소미를 바라보았다.“돌아가세요. 그녀는 당신을 만나지 않을 겁니다.”“사모님, 당신도 한 아이의 어머니니까 지금 제 마음을 이해하실 거라고 생각해요.”진영숙은 억눌린 목소리로 말했다.진영숙은 이미 알고 있었다. 오래전부터 이유영의 정체를 알았고 강이한과의 관계에서도 조용히 물러났다.그렇게 조용히 여생을 보낼 줄 알았는데 갑자기 아들이 서주에서 실종
진영숙은 깊이 숨을 들이마신 뒤,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이유영을 만나게 해 주세요. 부탁드립니다.”이유영을 만나겠다고?이유영을 만나는 게 이렇게까지 어려울 줄은 예전 같았으면 상상도 못 했을 일이었다.하지만 이 모든 게 다 누구 탓일까?결국, 이 지경이 된 건 다 진영숙 스스로 자초한 일이었다.“유영이는 당신을 만나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꺼져!”임소미는 단호하게 내뱉었다.임소미는 알고 있었다. 진영숙이 이유영에게 어떤 의미인지, 그리고 지금 이유영에게 그 모든 일이 어떤 기억으로 남아 있는지를.이제 와서 다시 그 악몽 같은 시간을 들추게 할 순 없었다.진영숙과 그 무리는 이유영에게 지우고 싶은 악몽 같은 존재였다.딸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졌기에 어떤 이유로든, 이유영을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게 할 수는 없었다.그때, 진영숙이 떨리는 목소리로 불렀다.“사모님!”“당신은 늘 밑을 짓밟고 위로 올라가려 했어. 그런데 이제 와서 무슨 자격으로 유영이를 찾겠다는 거지?”진영숙은 할 말을 잃었다. 과거를 과거의 진영숙은 이유영을 얼마나 무시하고 업신여겼던가.임소미는 그 심정을 깨닫게 해 줘야 했다. 이제 진영숙 따위가 넘볼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는 걸.진영숙의 얼굴이 창백해졌고 임소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비수처럼 날아와 꽂혔다.할 말이 없었다.진영숙은 한숨을 깊이 내쉬었지만 가슴속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도저히 억누를 수 없었다.결국, 그 감정이 폭발하고 말았다.“제발, 단 한 번만 만나게 해 주세요!”목소리는 애써 억누른 듯했지만 간절함이 묻어났다.임소미가 대답하기도 전에, 진영숙이 다시 말을 이었다.“저는 이제 아무것도 없어요. 알고 계시잖아요!”그래, 아무것도 없었다.아들은 사라졌고 강서희는 감옥에 갇혔다. 이제 아무리 발버둥 쳐도 강서희를 꺼낼 방법이 없었다.임소미는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당신이 그 모든 걸 잃은 게 내 탓은 아니잖아. 그러니까 내가 당신한테 동정심을 가질 이유도 없지, 안 그래?”“왜
진영숙은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것이 결국 이런 소식이라니.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단 말인가? 대체 어쩌다 여기까지 오게 된 걸까?이유영은 끝없이 진영숙을 몰아세웠다.이유영은 강이한을 증오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지난 몇 년간 자신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사실이 원망스러울 것이다.“복수하려면 저한테 하라고 해요. 제가 유영이를 무시하며 두 사람 갈라놓으려고 했어요.”진영숙의 감정은 완전히 통제 불능 상태였다.그렇다. 두 사람 사이를 원수로 만든 장본인은 진영숙이었다. 하지만 사랑했던 두 사람이 철천지원수가 됐을 때, 이토록 잔인하고 무서울 줄은 상상도 못했다.임소미는 진영숙을 묵묵히 지켜보며 생각에 잠겼다.이런 결말을 놀라울 정도로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이유영을 봐서 적어도 이유영의 인생에서는 이 모든 것이 끝난 것과 다름없었다.“아니요,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아직 저한테 복수하지 않았잖아요.”진영숙은 울먹이며 말했다.이제 더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아무것도 원하지 않았다. 오직 강이한만 무사하다면 어떤 결과든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임소미의 눈빛이 어두워졌다.복수라니?“이제 보니 우리와 생각이 너무 다르네요.”복수라니, 말도 안 되는 말이었다.이유영이 강이한에게 한 건 결코 복수가 아니었다.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은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거나 마찬가지였다.“내 아들은 잘못한 게 없어요...”진영숙은 임소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 보였고 혼자 계속 중얼거렸다.이유영에 관한 일에서 강이한은 잘못이 없었다. 단 하나, 그가 저지른 실수가 있다면 과거에 이유영과 함께하려 했던 것뿐이다.누가 뭐라든 듣지 않았고 무슨 일이 있어도 이유영과 함께하겠다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그게 바로 진영숙을 가장 괴롭게 했던 일이었다.그때의 진영숙은 이유영을 철저히 무시하며 그녀의 모든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왜소한 몸을 보며 아이를 제대로 낳을 수나 있을까 의심스러웠고 이런 여자를 며느리로 받아들일 생각
제대로 된 가치관조차 가지지 못한 한심하기 짝이 없는 여자들을 임소미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고 그녀들과 어울리고 싶지 않았다.진영숙은 애절한 목소리로 애원했다.“사모님, 제발 부탁드립니다.”그러나 임소미는 차갑게 쏘아붙였다.“저한테 부탁한다고 달라지는 건 없어요.”“그냥... 어떻게 지내는지만 알고 싶어요.”진영숙이 여태까지 살면서 이렇게까지 처량한 모습을 보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과거에 이유영을 괴롭힐 때는 이유영의 부모가 파리에서 얼마나 높은 지위를 가진 인물인지 상상도 하지 못했다.이유영의 정체를 알게 된 후, 진영숙은 한동안 임소미를 마주할 수 없었는데 그녀는 도저히 얼굴을 들고 임소미를 볼 면목이 없었기 때문이었다.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두 사람의 삶에서 조용히 발을 빼는 것뿐이었다.그랬는데도 불구하고 지금은 어떤가?아들이 사라졌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진영숙은 도저히 현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그저 아들이 무사한지만 알고 싶어요.”그는 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임소미 역시 엄마였다.과거, 이유영과 여진우를 위해 밤마다 하늘에 기도했던 사람인 만큼, 지금 눈앞의 진영숙을 보며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수 없었다.하지만 진영숙이 과거 이유영에게 어떻게 했는지 다시 떠오르자 마음속 분노는 걷잡을 수 없이 치밀어 올랐다.“강이한은 자기 사람들을 데리고 서주를 떠났다고 들었어요. 이제 보니 진영숙 씨는 그렇게 좋은 엄마는 아니었나 보네요.”임소미의 말에 진영숙의 얼굴이 더욱 새하얗게 질렸다.핏기조차 찾아볼 수 없는 그의 얼굴은 충격받은 듯 굳어 있었다.아무리 좋은 엄마가 아니었다고 해도 어떻게 엄마를 버릴 수 있는 걸까?이렇게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는 것이 진영숙에게 어떤 의미인지, 강이한은 모를 것이다.비록 최근 들어 아들 일에 많이 간섭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늘 관심 가졌던 진영숙이었다.이유영 일로 강이한한테 많이 실망하긴 했어도 그래도 결국 친아들 아닌가?아무리 실망하고 원망스러워도 자신의 하나밖
“끼익.”칼과 포크가 접시에서 미끄러지며 날카로운 소리가 나며 순간 레스토랑의 분위기가 일순간 정적에 휩싸이는 듯했다.이유영은 멍한 눈으로 서재욱을 바라보며 되물었다.“뭐라고요? 못 들었어요.”사실은 들렸지만 너무 충격적이었기에 다시 물어본 것이다.공항에서 김연우가 회사를 그만뒀다고 말할 때, 이유영은 단순히 개인적인 사정 때문이라고 생각했지 이런 쪽으로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기에 지금 서재욱의 말은 더 충격적이었다.서재욱은 앞에 놓인 와인잔을 들고는 씁쓸한 표정으로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아마, 그 이전이었을 겁니다.”“그 이전요?”이유영은 더욱 혼란스러웠다.설마 김연우가 임신한 걸 알게 된 시점이, 월이가 서재욱의 딸이라는 소문이 돌기 전이라는 건가?망했다.그렇다면 그녀가 회사를 그만둔 이유는 뻔했다.이유영은 다급하게 말했다.“그럼 제가 가서 설명해야겠어요!”이건 반드시 설명해야 했다. 그녀는 서재욱과 김연우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몰랐고 임신한 사실은 더더욱 몰랐다.이제 와서 모두 되돌릴 수는 없겠지만 만약 그때 제대로 알았더라면 어땠을지 생각하자 죄책감이 들었다.그러나 서재욱은 단호하게 말했다.“설명할 수 없어요.”“왜요?”“회사를 그만두고 사라졌어요.”“...”‘사라졌다고? 잠적했다고?’이건 정말 설명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이유영은 목이 타는 듯한 기분이 들어 앞에 놓인 물을 몇 모금 마셨지만 가슴속의 불안감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그녀는 깊은숨을 들이쉬고 다시 물었다.“그때 김연우 씨가 임신한 걸 몰랐어요?”서재욱은 시선을 피하며 조용히 대답했다.“연우가 회사를 그만둔 지 일주일 뒤에 알았어요. 하지만 그때는 이미 찾을 수가 없었어요.”이제 모든 게 이해되었다.김연우가 임신했을 때, 월이가 서재욱의 딸이라는 소문이 돌았고 그리고 그 일은 순식간에 커졌다.김연우는 청하시로 돌아간 후, 바로 회사를 그만두었고 그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녀는 결국
“맞아요. 껍데기만 남기는 건 매우 위험하죠.”특히 서재욱 같은 사람에게는 더욱 그랬다.그와 얽힌 일들은 이미 너무 많았고 김연우는 그의 가장 가까운 특별 보좌관인 만큼 만약 그들 사이에 불화가 생긴다면 그것은 단순한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서재욱에게도 상당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일이었다.그러니 상대가 스스로 떠나겠다고 결정한 것이라면 서로에게 더 나은 선택일지도 몰랐다.차에 오르려던 순간, 서재욱이 그녀가 운전석으로 가려는 걸 보고 조용히 말했다.“제가 운전할게요.”분명 그녀의 눈을 걱정하고 있는 눈치였다.사실 공항에서 전화를 걸었을 때부터 후회하고 있었다. 그녀의 눈은 수술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아무리 회복이 잘 되었다고 해도 장시간 운전하는 건 여전히 무리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그러나 이유영은 그의 걱정을 읽기라도 한 듯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지금은 시력이 완전히 회복되었어요.”그녀는 자연스럽게 차에 올라탔고 서재욱은 그녀가 능숙하게 운전하는 모습을 보며 한 번 더 물었다.“정말 다 보이는 거 맞아요?”“당연하죠.”이유영은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그녀의 반응을 본 서재욱은 그제야 살짝 안심한 듯했다.운전하면서 이유영이 서재욱을 힐끔 바라보며 물었다.“저녁은 뭐 먹고 싶어요?”“사주시려고요?”서재욱은 농담조로 되물었다.“이 시간에 만났는데, 당연히 같이 식사해야죠.”이유영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서재욱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파리 타워 레스토랑 음식이 괜찮다고 들었어요. 거기로 가죠.”“좋아요.”파리 타워 레스토랑이라면 그녀도 알고 있었는데 그곳에서는 파리의 야경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곳이었다.연인들이 데이트하기 좋은 장소로 유명했고 분위기가 낭만적이어서 많은 인플루언서들이 SNS에 인증사진을 남기는 곳이기도 했다....한편, 박연준은 계속해서 이유영에게 전화를 걸고 있었다.진영숙은 어제부터 지금까지 감정이 극도로 불안정한 상태였다.심지어 그녀 자신도 감정을 통제하지 못
전화 너머로 들려오는 서재욱의 진지하면서도 부드러운 목소리에 이유영은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았다.“그러면 기다리세요!”서재욱은 짧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네.”전화를 끊고 이유영은 책상 위의 도면들을 차곡차곡 정리한 뒤 서랍에 넣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차 키를 집어 들고 그대로 사무실을 나섰다.손목시계를 보니 퇴근 시간이 거의 다 되어가고 있었다. 공항까지 차로 40분은 걸릴 텐데 서재욱을 마중 나갔다가는 저녁 식사를 집에서 함께하지 못할 것 같았다.그녀는 운전석에 앉기 전, 임소미에게 전화를 걸었다.“저녁은 기다리지 마세요.”“일이 너무 바쁜 거 아니야? 이제 겨우 회복했는데 눈을 너무 피곤하게 하면 안 돼.”이유영이 저녁을 먹으러 집에 오지 않겠다고 하자 임소미는 당연히 그녀가 야근하는 줄로만 알았다.본인 회사에서 왜 저렇게까지 바쁘게 일하는 걸까?이유영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야근하는 게 아니에요. 친구가 청하시에 왔어요. 저녁에 같이 식사할 것 같아요.”“그래. 일찍 돌아오고 술은 마시지 마.”임소미는 당부하듯 덧붙였다.솔직히 임소미는 여전히 이유영이 걱정되었다. 아마도 예전에 너무 많은 일을 겪으며 불안감이 커진 탓에 이제는 거의 트라우마처럼 그녀를 걱정하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알겠어요.”전화를 끊고 나서야 이유영은 운전에 집중했다.속도는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안정적으로 유지하며 40분 후, 공항에 도착했다.멀리서도 한눈에 보이는 서재욱은 회색 코트에 감청색 목도리를 두르고 있었고 차분하면서도 온화한 분위기를 풍기며 걸어오고 있었다.그는 이미 이유영을 발견했는지 캐리어를 끌며 자연스럽게 다가왔다.이유영은 그를 향해 한 걸음 다가가며 캐리어를 받으려 하자 서재욱은 부드러운 몸짓으로 자연스럽게 피하며 말했다.“어떻게 여성분께 그런 일을 시킬 수 있겠습니까?”그는 언제 어디서든 여성에게 우선권을 주는 사람이었고 그와 함께 있을 때, 그녀가 먼저 짐을 드는 일은 절대 없었다.이유영은 미소를
임소미는 이제 정말 그런 일들에 더 이상 휘말리고 싶지 않았다.그렇다고 해서 배은망덕한 것은 아니었다.단지 그런 일들을 직접 겪고 나서야 비로소 누군가의 고통과 절망을 온전히 경험해 보지 않고서는 ‘용서’라는 말을 쉽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을 뿐이다.임소미는 조용히 생각했다.만약 이유영이 그 일을 알게 된다면 그녀에게는 단순한 충격이 아니라 더 깊은 고통이 될 것이고 용서니 화해니 하는 문제는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을 것이다.그리고 무엇보다 이유영은 바보가 아니었다.그녀는 이미 뭔가를 감지하고 있었다.서주에서 벌어진 일이 얼마나 거대한 사건이었는데 그걸 전혀 의심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하지만 아무리 의혹을 품고 의심해도 그녀의 생각이 그쪽 방향으로 흘러가지는 않았다.점심 식사 후, 이유영은 곧장 스튜디오로 향했다.로열 글로벌 산하의 회사라 할지라도, 그리고 그 사업이 아버지와 오빠의 것이라 해도 그녀는 일에 대해선 누구보다 엄격하고 철저했다.스튜디오에는 여진우가 직접 선별한 직원들이 몇 명 있었는데 모두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이제 그녀의 새로운 일상이 시작되었다.새로운 사람들, 새로운 작업 환경, 그리고 과거와의 완전한 결별.“윙윙.”휴대폰이 짧게 진동했다.문자 메시지 알림에 이유영이 화면을 확인하자 친구 추가 요청이었다.그녀는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다른 사람이 친구 추가를 하는 걸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지만 굳이 거절할 이유도 없었기에 그대로 승인했다.승낙하는 순간, 상대방이 몇 장의 영수증을 보내왔다.영수증을 보고서야 예전에 부딪혔던 사람이었다는 것이 생각났다. 차 수리가 끝난 모양이었다.“계좌 번호 알려주세요.”이유영은 간단하게 몇 글자를 입력해 보냈고 곧바로 답장이 왔다.“더블루 리버스로 보내주세요.”더블루 리버스?이유영은 다시 눈살을 찌푸렸다.요즘 시대에 계좌 이체가 훨씬 편하지 않은가? 굳이 배송으로 돈을 보내라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그녀는 다시 메시지를 보냈다.“계좌 이체로 하는 게
이유영도 가볍게 웃었다.이런 분위기의 모임은 사람을 자연스럽게 편안하게 해 주었다.그녀는 문득 이곳이 아이들을 위한 유치원이 아니라 엄마들의 산후 우울증을 해소해 주는 공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런가요?”“그렇다니까요. 첫째 하나 키울 때는 정말 수월했는데, 둘째를 낳고 같이 놀아보니까... 결국 아이가 나를 가지고 놀더라고요.”“하하하! 맞아요. 기저귀를 차고 있는 아기들이라고 우습게 보면 안 돼요. 그 아이들은 어른들 자포자기할 때까지 괴롭힌다고요.”자포자기할 때까지? 둘째를 키우는 게 정말 그렇게까지 힘든 일일까?그녀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많은 둘째 엄마들이 화장기 없는 얼굴로 다니는 것을 알아차렸다.첫째만 키울 때도 이미 충분히 바빴을 텐데 둘째까지 생기면 더욱 정신없어지겠지.외출할 때도 분명 급하게 나서는 경우가 많을 것이고 자신을 돌볼 여유조차 없을 것이다.“말씀 듣고 보니 저는 둘째는 절대 안 낳을 것 같아요.”이유영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몇몇 엄마들은 그녀의 말에 공감하며 친근하게 대화를 이어갔다.겉으로는 웃고 떠들었지만 그들의 마음속에 어떤 무게가 자리 잡고 있는지는 누구도 알 수 없었다. 이유영도 마찬가지였다.사실 그녀는 둘째를 낳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니라 둘째를 낳을 기회조차 없었다.솔직히 예전에는 이런 문제를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 보면 정말 많은 것이 변해 있었다.월이는 유치원 생활에 잘 적응하고 있었고 수업이 끝난 후, 차 안에서 아이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엄마, 내일은 일찍 데려다주세요. 오늘은 10분이나 늦었어요.”이유영은 순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요즘 아이들은 시간 개념이 이렇게 빨리 발달하는 걸까?그녀는 월이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말했다.“그래.”그녀의 목소리에는 흐뭇함과 애정이 묻어 있었다.처음에는 혹시 아이가 유치원 생활에 적응하지 못할까 봐 걱정했지만 지금은 완전히 안심할 수 있었다.아이들은 정말 좋아하는 것을 만났을 때만 적극적으로 참여하
“그 여자가 파리에 있는 동안은 조심해. 지혁이를 네 곁에 두는 게 좋겠어.”지혁은 정씨 가문의 정예 경호원 중 한 명이자 실력도 출중한 사람이었다. 그가 곁에 있다면 적어도 해치려는 사람이 함부로 나서지는 못할 것이다.이유영은 짧게 대답했다.“걱정하지 마세요.”“신경 써야 할 때는 신경 써야 해. 진영숙은 착한 사람이 아니야. 내가 보기엔 그래.”“알겠어요.”가족들이 안심할 수 있다면 이유영은 그들이 어떤 결정을 내리든 상관없었다.이유영이 고개를 끄덕이자 임소미도 조금은 안도한 듯했다.“루이스는 어디 있어요?”이유영은 생각에 잠긴 채 물었다.지난번에 루이스가 서주로 갔다고 들었는데, 서주에서 무엇을 하고 있길래 지금 이런 상황에서도 서주에 머무르고 있는 걸까?더군다나 아버지조차 서주 일에 관여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데 굳이 루이스가 남아 있어야 할 이유는 없어 보였다.임소미가 대답했다.“서주에 있어.”“네.”그는 여전히 서주에 있었다.서주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는 더 묻지 않았고 사실 그녀에게는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집에 남자가 있다는 건 좋은 일이었다. 그 덕분에 여자는 그만큼 신경 써야 할 일이 줄어들었으니까.예전에는 모든 책임이 그녀에게만 쏠린 듯한 무게감이 짓눌려 정말 숨이 막힐 것 같았지만 여진우가 돌아온 이후로 이유영은 훨씬 편안해졌다....아이는 이유영과 함께 있을 때 언제나 행복해 보였고 그녀는 아이의 밝은 미소를 보며 위로를 얻곤 했다.“월이야, 엄마랑 같이 유치원 가는 거 어때?”강이한이 일을 벌이면서 정씨 가문은 경계를 강화했지만 결국 이유영은 강이한에게 끌려갔고 그 일이 있고 난 후, 임소미는 혹시나 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걱정하며 집에만 두고 싶어 했다.그렇다고 아이를 언제까지고 집 안에 가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밖이 위험하다고 해서 평생을 감춰 키울 수도 없는 일이었다.어차피 앞으로 가야 할 길은 멀고도 험했다.“좋아요!”아이는 기쁜 표정으로 대답했다.이유영은 살짝 미소
진영숙은 울먹이며 박연준을 바라보았다. 강이한의 숙적으로 알고 있었는데 그가 도와준다니 믿기지 않았다.“정말, 도와줄 거야?”정말 도와줄까?예전에 강이한과 가까웠던 사람들조차 그녀를 도와준 적이 없었다. 그런데 박연준이 정말 도와줄 수 있을까?박연준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당연하죠.”“왜 날 도와주는 건데?”진영숙은 마음이 복잡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바보처럼 행동하고 싶지는 않았다.강이한이 서주에서 모든 것을 박연준에게 맡긴 이유는 무엇일까?도대체 왜 그런 결정을 내린 걸까?서주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확히 알지는 못했지만 강이한이 실종되기 전 서주가 엄청난 혼란에 휩싸였다는 사실만큼은 알고 있었다.각 가문들이 서로 얽히고설켜 도무지 상황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였고 그 혼란의 중심에는 강이한이 있었다.하지만 서주를 장악하려던 강이한이 갑자기 사라질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대체 어디로 간 걸까?그리고 모든 것이 어떻게 박연준에게 넘어간 걸까?“그냥 기다리세요. 곧 소식이 올 겁니다.”박연준은 진영숙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그저 기다리라는 말만 남겼다.진영숙은 순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기다리는 것이 얼마나 잔혹한 일인지 기다려본 사람만이 안다.기약 없이 떠나버린 사람을 찾고 올지 안 올지도 모르는 소식을 기다리며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시간을 견뎌야 하는 일이란 생각만으로도 끔찍했다.이제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을 기다리며 보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는다.그 기다림의 끝에 남은 것은 늘 절망뿐이었다.하지만 지금 기다리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며칠 동안 미친 듯이 강이한을 찾으려고 애썼지만 끊임없이 실패했다.그렇다면 이제 박연준을 믿어야 할까?그를, 정말 믿을 수 있을까?청하시에 있을 때, 박연준은 이유영과 강이한 사이에 엄청난 혼란을 일으켰다. 그런 사람이 정말 자신을 돕겠다고 하는데 그 말을 믿어도 되는 걸까?...이유영은 운전기사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을 데리러 오라고 한 뒤, 바로 백산 별장으로
결국, 그들의 싸움에서 박연준이 이겼다.그렇게 해서 그는 이유영 곁에 남을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그녀가 박연준을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었다.과연 이기는 것이 존재하기나 할까? 사랑에는 승패가 존재하지 않는다.“네 마음속에서 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야?”“그래.”박연준은 아무런 반박도 하지 않았다.이유영은 그를 바라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다만 이해가 안 되는 게 있어.”특히 진영숙에 대한 그의 태도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박연준이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박연준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그의 가슴은 답답하기만 했다.그런 그를 두고 이유영이 다시 돌아서려던 순간 박연준이 그녀를 불러 세웠다.“유영아, 네가 오랫동안 쌓여온 게 많다는 거 알아. 하지만 이렇게까지 함부로 대하면 안 돼.”그녀는 강이한의 어머니다. 그리고 강이한은 이유영을 위해 어떤 일까지 했던가?진영숙의 말처럼 지금 진영숙에게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흥!”이해할 수 없는 강이한의 말에 이유영은 실소를 터뜨렸고 함부로 대하지 말라는 박연준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었다.“그럼, 그 사람들은 날 함부로 대해도 됐다는 거야?”“하지만 모든 걸 잃은 사람이야.”“그건 당연한 결과야.”“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박연준의 목소리가 더욱 강하게 울렸고 이유영은 그저 묵묵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라는 말, 오늘만 몇 번째인가? 하지만 박연준이 몇 번을 강조하던 이유영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이미 오래전부터 차곡차곡 쌓인 원한이었다. 결혼생활 3년 동안 진영숙 곁에서 얼마나 많은 억울함을 삼켜야 했는지 일일이 말할 필요도 없었다.그러나 그 억울함 속에서도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일들도 많았다.이미 갈대로 간 지금 이 상황에서 다시 감정을 억누르는 게 가능하기나 한 것일까?이유영이 과거에 참고 견딘 만큼 그녀는 지금 냉정하고 차갑기만 했다.그들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그녀의 마음속에는 단
진영숙은 이렇게까지 일이 꼬일 줄은 몰랐다. 강이한이 실종되기 전에 무슨 일을 겪었는지조차 모르고 있는다는 사실이 너무 두려웠다.강이한은 대체 무엇을 견뎌낸 걸까?이미 평생 겪을 고통은 다 겪었다고 생각한 진영숙은 자신의 아들도 그런 고통을 감당해야 한다는 사실에 마음이 아팠다.이제 와서 돌아보니 그녀는 참 비참한 인생을 살았다.남편은 오래전에 그녀의 세상에서 사라졌고 이제 아들마저 실종되었다.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지 못했지만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했다.하지만 그들에서 그녀는 대체 어떤 존재였을까? 왜 이렇게 큰일이 벌어졌는데도 그녀만 몰랐을까?아무도 그 이유를 알려주지 않았다. 아니면 그녀는 애초에 그들에서 아무 의미도 없는 존재였던 걸까?“아무도 없는 게 당연하죠.”얼음장 같은 목소리가 공간을 가로질렀다.진영숙이 고개를 들었을 때, 이유영은 이미 등을 돌리고 문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문 앞에 다다른 순간, 이유영의 마지막 한마디가 허공을 가르며 날카롭게 꽂혔다.“저도 어딨는지 몰라요.”그 말을 들은 진영숙은 모든 힘이 빠져 맥없이 바닥에 주저앉았고 눈동자는 텅 빈 허공을 헤매고 있었다.당연하다고?대체 무슨 죄를 지었길래 ‘당연하다’라는 말을 들어야 하는 걸까?그저 자신의 아이들이 잘되기를 바랐을 뿐인데, 왜 모든 것이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그리고 이유영은 정말 강이한의 행방을 모르는 걸까?이유영조차 강이한의 행방을 모른다고 하자 진영숙의 세상은 산산조각이 났다.진영숙은 온몸이 떨렸기 시작했다.‘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절망이 그녀를 한없이 깊은 심연으로 끌어당겼다.과거, 그녀가 이유영에게 얼마나 깊은 절망을 안겨주었던가. 지금 그 절망이 똑같이 되돌아와 그녀를 짓누르고 있었다.심지어 남편을 잃었을 때보다도 더 고통스러웠다.지금 눈앞의 이유영을 마주 보며 그녀는 처음으로 참을 수 없는 고통을 느끼며 가슴이 너무 아팠다.“왜... 왜?”진영숙은 힘없이 중얼거렸다.눈동자는 생기를 잃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