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월이는...”노원우가 피식 웃으며 그녀의 말을 끊었다.“됐어. 성세 그룹 대표 여동생이라는 말 수도 없이 들었어. 설사 그렇다고 해도 너랑 무슨 상관이 있는데? 널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벌써 왔겠지, 왜 오늘까지 기다려서야 오겠어. 네 주제를 알아야지. 고작 너희 소씨 가문이 어떻게 성세 그룹 아가씨한테 비벼? 어림도 없지. 이제 너희 소씨 집안 지긋지긋해, 역겨워! 퉷!”소현아는 자신이 불구덩이에 들어간 것도 모자라 아빠한테까지 해를 끼치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소현아는 강제로 눌려 앉아 메이크업을 받고는 허줄한 중고 웨딩드레스로 갈아입었다. 그녀의 몸은 온통 시퍼런 멍 자국으로 뒤덮여 있었다.소월아, 대체 언제 날 구하러 올 거야!노원우는 소현아가 대학을 다닐 때 알게 된 가난한 집안 학생이었다.소현아가 혼자 처량하게 휴게실에 웅크리고 앉아있을 때, 옆방에선 남녀가 사랑을 나누는 거친 호흡 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은 소현아의 존재를 완전히 무시하고 있었다.점심 12시 반, 사회자가 파티의 시작을 알렸다.너무 울어 시뻘겋게 퉁퉁 부어올랐던 소현아의 눈은 메이크업으로 말끔히 가렸다. 그녀는 너무나도 겁이 났지만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짓고 남자의 팔짱을 꼈다. 노원우는 역겨운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무대로 걸어가 사회자에게서 마이크를 건네받았다.“오늘 제 가장 행복한 순간을 함께 해주시러 귀한 걸음 해주신 손님 여러분 감사합니다.”노원우가 그윽한 눈빛으로 소현아를 바라보았다.“3년이라는 시간 끝에 드디어 저희가 사랑의 결실을 맺으려 합니다. 반드시 아내와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서로 아끼며 살아갈 것입니다.”노원우가 소현아의 손을 잡고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옆에 서 있던 도우미가 곧바로 검은색 상자를 노원우에게 건네주었다. 뚜껑을 여니 반지가 들어있었다.“2년 전에 준비했던 건데 계속 용기가 없어 말하지 못했어. 오늘 손님들 앞에서 정식으로 너한테 청혼하고 싶어.”“현아야... 나랑 결혼해줄래? 내가 평생 아끼고 사랑해줄
소민아가 온 힘을 다해 때렸던 탓에 노원우의 입안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파티장은 순식간에 사람들의 웅성거림으로 시끄러워졌다.소민아는 곧바로 소현아를 끌고 와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노원우의 얼굴에 던져버렸다.“몇천 원짜리 반지로 누굴 속이려고? 양심도 없는 짐승 같은 자식. 노원우, 너 빈대 같은 더러운 네 가족들 데리고 당장 너희들 판자촌으로 꺼져.”노원우는 손님들의 반응을 살펴보고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그녀에게 경고했다.“소민아, 충고하는데 내 일 방해하지 마.”“방해하겠다면 어쩔 건데? 날 때리기라도 할 거야?”소민아가 턱을 올리고 그와 똑바로 시선을 마주했다.소현아가 그녀를 끌어당겼다.“민아야, 그만해.”“언니, 이제 무서워할 필요 없어. 소월 언니가 지금 이곳으로 오고 있어. 저것들은 모조리 경찰서에 잡혀가 콩밥을 먹을 거야. 지금까지 우리 집안에서 먹고 쓰고 마신 것들 전부 다 토해내게 만들겠어.”“소월이가... 정말 온다고?”“응.”“오긴 뭘 와! 하느님이 온다고 해도 난 원우가 청혼에 성공하는 거 볼 거야. 소현아, 빨리 네 동생 쫓아내지 않고 뭐 하고 있어. 쟤가 뭔데 이렇게 좋은 일을 망쳐! 나 신랑신부가 주는 술을 마시려고 기다리고 있단 말이야!”그다지 비싸지 않은 옷을 입은 아주머니가 소리쳤다. 노원우의 둘째 고모였다.소민아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술을 마시겠다고요? 누가 허락한대요?”그녀는 큰 걸음으로 걸어가 와락 상을 엎어버렸다.둘째 고모는 안타까움에 허벅지를 두드렸다.“아이고, 이런 망둥이 같은 여자를 봤나. 몇백만 원이나 되는 음식을 쏟아버리다니!”일반인 한 달 월급에 달하는 금액이었다.옆에 있던 도우미가 이마를 찌푸리고 노원우의 옆으로 걸어갔다.“형, 빨리 사람을 불러 끌어내! 아니면... 우리 계획이 틀어지잖아. 나 소씨 집안 재산으로 여자친구한테 집을 사주겠다고 약속했단 말이야!”노원우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실은 그는 소민아의 입에서 성세 그룹 사람이 오고 있다는 말을 들은 순간부터 당황
“성세 그룹 대표님과 그 동생분이 오시면 난 공손히 모실 거야. 조금 전 성세 그룹 아가씨가 온다고 했지? 그럼 20분 기다려줄게. 그 안에 오지 않으면 파티 다시 시작할 거야.”“20분이면 20분이지. 누가 널 무서워한다고!”아홉째 이모가 말했다.“누군 높으신 분들 만나본 적 없는 줄 아나! 뭘 그렇게 대단하다고!”열몇 살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가 옆에 있는 누나에게 물었다.“누나, 현아 누나 말이에요. 설마 정말 그 아가씨와 아는 사이인 건 아니겠죠? 난 한 번도 그 사람에 대해 들어본 적 없어요.”“몰라. 나한테 묻지 마!”“누나, 또 현아 누나 옷 훔친 거예요? 말했잖아요. 현아 누나 옷은 현아 누나가 입어야 예쁘다고요. 누나가 입으면 웃겨요.”“입 다물어! 말끝마다 현아 누나 현아 누나. 그렇게 좋으면 소현아 친동생 해! 날 귀찮게 하지 말고.”천하 일성답게 종업원들이 빠르게 달려와 상을 다시 일으켜 세우고 바닥을 깨끗이 치웠다.노원우는 새로 음식을 준비하라고 지시했다.20분... 이미 18분이 지나 2분밖에 남지 않았다.여든 살의 어르신이 지팡이를 짚고 일어섰다.“내가 보기엔 기다릴 필요 없어. 빨리 시작해.”“맞아! 원우야, 할아버지 몸 안 좋으신데 어서 시작해. 느닷없이 나타난 사람이 소란을 부린 것만 해도 창피한 일이야. 이 일이 밖으로 알려진다면 우리 노씨 가문 사람들이 어떻게 얼굴을 들고 다니겠어.”“맞아. 대단한 인물은 무슨. 다 거짓말이야. 돈을 그렇게 많이 냈는데 경비원도 없어? 빨리 사람을 불러 끌어내. 쓸데없는 말 듣고 있지 말고!”소민아는 장소월의 연락처를 받지 못한 걸 후회했다.“성세 그룹 대표님은 나타나지 않으실 것 같네. 당연한 일이지. 그분이 어떤 분인데... 현아야, 안 그래?”“싫어... 싫어... 난 너랑 결혼 안 해!”소현아는 일그러진 얼굴로 그를 향해 소리쳤다.오늘 파티가 끝난 뒤, 그와 혼인신고만 하면 그녀는 반드시 죽게 된다.그녀는 또다시 두려움에 사로잡혔다.노원우는 호텔
호텔 프런트 매니저는 뭔가 잘못되었음을 감지하고 즉시 달려와 살펴보았다. 그는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화들짝 놀랐다.그는 기성은을 보자마자 머리를 조아리며 다가왔다.“기 비서님, 이곳엔 무슨 일이세요?”소민아는 미친 듯이 소리쳤다.“절 찾아온 사람이에요.”그 말을 들은 프런트 매니저는 곧바로 호텔 경비원에게 눈짓을 보냈다. 경비원이 소민아를 놓아주자 그녀는 곧바로 기성은의 곁으로 뛰어갔다.“기 비서님? 소월 언니한테 오신다는 말 못 들었는데...”기성은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소민아는 확실히 놀랐다.하지만 누가 오든 마찬가지였다.기성은은 얼음장같이 차가운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서울엔 성세 그룹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러니 성세 그룹 회장 최측근인 기성은의 등장은 사람들을 당황시키기에 충분했다.성세 그룹과 소씨 가문은 모든 면에서 천지차이다. 그 작고 보잘것없는 소씨 가문에게 어떻게 성세 그룹이라는 뒷배가 있을 수 있겠는가!기성은은 아무 말 없이 소민아를 흘끗 쳐다보았다.“소민아 씨, 아가씨가 도착하려면 아직 시간이 좀 더 필요해요. 대표님께서 저에게 먼저 이쪽으로 와 축하 인사를 전하라고 지시하셨어요.” 기성은이 손을 들어 올리자 뒤에 있던 경호원들은 예쁘게 포장된 선물 상자 몇 개를 들고 왔다. “비싼 선물은 아니지만 진심을 담아 준비했으니 받아주세요.”경호원들이 선물 상자를 하나씩 열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모두 고가의 귀중한 보석과 액세서리였다.손님들은 모두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제 눈이 잘못된 걸까요? 지난주 파리 패션위크에서 모델이 착용했던 4억 원이 넘는 다이아몬드 목걸이 아니에요?”“아직 시중에 나오지도 않았잖아요? 성세 그룹 사람들은 어떻게 저걸 손에 넣은 걸까요?”“네, 구매 예약도 못 했어요.”“그것뿐만이 아니에요. 저 파란색 다이아몬드 반지, 혹시 저번 자선 경매에서 60억에 팔린‘심해의 눈물’ 아니에요?”“소씨 가문과 성세 그룹은 대체 무슨 관계일까요? 이렇게나 쉽게 60억을 내놓다니요!”“그러
경호원이 전연우의 손에서 골프채를 건네받아 옆으로 가져갔다.장소월은 이어폰을 착용하고 안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를 들었다.가장 먼저 소민아가 화를 내며 다투는 목소리가 들렸다.그 목소리...전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그쪽 가족은 아직도 체면이라는 게 있긴 해요? 언니를 위한 선물이라고 말했잖아요. 당신들 뭐 하는 거죠? 두 사람 아직 결혼한 거 아니에요! 이걸 탐낼 자격 없어요. 배은망덕하고 수치심도 없는 뻔뻔한 사람들... 양아치들! 날강도들!”그러자 아주머니 한 명이 소민아에게 손가락질하며 욕설을 퍼부었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다 우리 것이야. 그냥 지금 가져가는 게 나아.”“그래요! 배짱 있으면 가져가요! 감히 손을 댄다면 내가 손모가지를 잘라버릴 거예요.”기성은은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소민아를 바라보았다.소민아가 단호하고도 강인한 표정으로 말했다.“주홍, 와서 우리 물건 다 가져가.”노부인은 탐욕스러운 얼굴로 보석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돈, 돈, 이건 다 돈이다!몇 평생을 살아도 다 쓸 수 없는 거대한 액수의 돈 말이다.“소 비서님, 강도죄 형량이 몇 년인 줄 알아요?”“3년 이상 10년 이하입니다.”“맞아요. 하지만 빠뜨린 게 있어요. 이 물건들의 가치를 고려하면 무기징역으로 처벌당할 수도 있어요. 성세 그룹 물건은 아무나 만질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소현아 씨, 자신의 물건은 앞으로 스스로 잘 관리해야 해요.”소현아는 노원우을 흘끗 쳐다보며 말했다.“내가 말했잖아, 올 거라고.”“지금 당장 네 친척들과 친구들을 데리고 내 집에서 나가! 난 너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아!”둘째 할머니가 눈을 부릅뜨고 일어섰다. “원우야, 저게 무슨 말이야? 그렇게 큰 집에서 우리가 아니면 누구랑 살겠다는 거야? 우릴 쫓아낼 생각을 하다니!"순간 노원우는 백지장처럼 창백해진 얼굴로 감히 한 마디도 내뱉지 못했다.노원우는 매몰차게 등을 돌리고 떠나는 여자를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는 순식간에 공황
“기 비서님, 소월이는 왜 안 왔어요?”기성은이 대답했다. “아가씨는 이미 도착해 대표님과 아래층에서 골프를 치고 계십니다. 대표님께서 파티는 저에게 알아서 마무리하라고 지시하셨으니, 아가씨를 만나고 싶으면 지금 가도 돼요."“그럼 부탁드릴게요. 기 비서님. 감사합니다.”기성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별말씀을요.”노원우가 후회에 가득 찬 얼굴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현아야...”소현아는 치맛자락을 들어 올리며 시선을 돌렸다. “내가 말했잖아. 날 괴롭힌 만큼 벌 받게 될 거라고.” 그녀는 그 마지막 한 마디를 남긴 채, 매정히 돌아서 자리를 떠나버렸다.한 무리의 사람들만 남아 고성을 지르며 언쟁을 벌였다.노원우의 친척들은 급기야 단상으로 올라가 노원우를 원망했다.“원우야, 이게 무슨 일이냐? 현아 쟤 왜 저러는 건데? 네가 좋은 대학에 갈 수 있도록 뒷바라지 해주면 집으로 보답하겠다고 했던 말 잊으면 안 돼!"“이 결혼 대체 하는 거야, 마는 거야?”“맞아! 형, 나 아직도 형이 주겠다던 집만 기다리고 있단 말이야. 신혼집도 없이 어떻게 결혼해?”“이 보석들을 내 딸이 결혼할 때 혼수를 준비하는 데 쓴다면 나중에 부잣집 사위를 맞을 수 있을 텐데... 노원우, 너 말 바꾸면 안 돼!”“다들 닥치세요!”노원우가 소리쳤다.“돈 돈 돈 돈, 돈 빼고 아는 게 있기나 해요?”“소씨 집안을 먼지 한 톨 남기지 않고 탈탈 털어야 그만할 거예요?”소민아의 말이 맞다. 그들은 그저 돈밖에 모르는 기생충들이었다.뒷이어 형사들이 안으로 출동했다. “신고를 받고 왔습니다. 노원우 씨, 당신을 협박 및 감금 혐의로 체포합니다. 당신에겐 변호사를 선임할 수 있고,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는 권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타인의 집에 무단침입해 절도죄를 행한 몇몇 분들도 함께 가주셔야겠습니다.”두 형사는 노원우에게 수갑을 채우고 곧바로 연행했다.뭔가 잘못된 것을 감지한 다른 친척들은 당장 도망치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아
그녀가 또다시 말했다.“고마워.”장소월은 그녀를 향해 걸어갔다.경호원이 막고 있던 손을 내려놓자마자 소현아는 장소월을 와락 껴안았다. 얼마나 세게 안았는지 장소월은 몇 걸음 뒤로 물러나며 하마터면 넘어질 뻔하기까지 했다.소현아는 장소월의 품에 폭 안겨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렸다.“그토록 오랜 시간 동안 대체 어디에 있었던 거야.”“나한테 전화도 안 하고... 나 진짜 죽을 뻔했단 말이야.”그 말은 결코 농담이 아니었다.장소월은 그녀의 목과 등 군데군데 남아있는 검붉은 멍 자국을 발견했다...“민아 씨가 이미 다 말해줬어. 현아야... 미안해... 내가 너무 늦었지.”소현아는 울먹이며 고개를 저었다. “하나도 안 늦었어. 다시 만나게 된 것만으로도 난 행복해. 선물도 많이 받았으니 용서해 줄게."“이제 눈 똑바로 뜨고 다녀야 해. 다시는 그런 나쁜 놈한테 속으면 안 돼!”“그럴 일 없을 거야! 앞으로는... 네가 곁에 있으면 아무도 더 이상 나를 괴롭히지 못해.”노원우는 원래 소씨 집안의 후원을 받는 가난한 집 학생이었다. 소현아도 서울대에서 그를 만나게 될 줄은 전혀 몰랐다. 그에 관한 정보들은 모두 아버지의 프로필에서 봤었다.대학 시절, 소현아는 구석에서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괴롭힘을 당하던 노원우를 우연히 발견하고 그를 도와주었다.그 후... 노원우는 명확한 목적을 갖고 의도적으로 소현아에게 접근했다.노원우는 항상 소현아를 모든 면에서 세심하게 배려하며 정성껏 챙겨주었다.소현아의 아버지 역시 노원우를 딸을 평생 맡길 수 있는 믿음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심지어 두 사람에게 교제를 부추기기도 했다.처음에 소현아는 동의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버지의 병세가 악화되어 신장에 문제가 생기자 선뜻 아버지에게 자신의 신장을 기증한 노원우에게 감동해 그의 마음을 받아주었다.하지만... 그 이후 노원우는 서서히 변해가기 시작했다.소씨 집안에 들어가 살면서 자신의 권위를 이용해 친척들을 모두 집안으로 불러들여 이것저것 일을 맡겼다.처음
끌려가던 사람들은 소현아를 보자마자 얼굴이 흉측하게 일그러졌다.“...소현아! 네가 꾸민 짓이지! 다 너 때문이야!”“잡아가야 하는 건 저 여잔데 왜 우릴 데려가요!”“맞습니다, 형사님. 우리는 모두 아무 잘못도 없는 정직한 사람들입니다! 무슨 착오가 있었을 거예요.”경찰이 그들에게 소리쳤다. “조용히 하세요”“젠장, 이 난장판을 만든 건 저 두 개년들이야. 소현아 기다려. 나오면 절대 가만히 놔두지 않을 거야.”형사는 여전히 화를 내며 욕설을 퍼붓는 아주머니에게 일갈했다. “감옥 생활을 몇 년 더 늘리고 싶은게 아니라면 다들 닥쳐요! 저분은 당신들이 함부로 건드릴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에요.”“뭐 얼마나 대단하다고! 우리보다 돈이 많기나 해요?”장소월은 더 이상 그들을 보고 싶지 않았다. “다른 데로 가자.”“그래.”경찰차가 와 그들을 앉히고 데려가고 나서야 시끄럽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소현아, 거기 서.”장소월과 소현아 앞에 요정 드레스를 입은 소녀가 막아섰다. 소현아 옆에 있는 여자를 본 그녀의 눈에는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소녀는 재빨리 손으로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엄마가 경찰에 끌려간 건 다 너 때문이야. 내가 얼마나 어렵게 대학에 들어갔는지 너도 알잖아. 학교에서 나한테 감옥에 간 엄마가 있다는 걸 알게 되면, 난 앞으로 어떻게 학교를 다녀?”“가능한 한 빨리 집을 나가겠다고 했잖아. 꼭 이렇게 소란을 피워야 만족하겠어?”이제 겨우 몇 살밖에 안 된 꼬마는 소현아의 치마를 붙잡고 울먹였다.“현아 누나, 우리 엄마 괜찮겠죠?”장소월은 마음이 약해져 어쩔 줄 모르는 소현아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악역은 여전히 그녀의 몫인가 보다.장소월은 소현아를 막아서며 차갑게 말했다. “네 엄마가 잘못한 게 없다면 여기서 울 필요 없어. 경찰이 다 명백하게 조사할 거야. 현아한테 말해도 소용없어. 학교는... 이미 초등학교에서부터 배웠잖아. 나쁜 짓을 하면 반드시 그에 해당하는 벌을 받아야 한다고 말이야. 그렇게
서철용의 보기 드문 이성을 잃은 모습이었다. 전연우와 강지훈이 언제부터 이토록 가까워진 걸까?그의 기억 속 강지훈은 여전히 전연우를 주인님이라 부르는 부하였다.북경 감옥.소현아는 아픈 배를 움켜쥐고 침대에 누워 뒹굴고 있었다. 옆에서 도우미는 무릎을 꿇은 채로 약을 들고 있었다. “주인님, 현아 아가씨가 몸이 불편하다며 계속 약을 안 드시겠다고 합니다.”막 바깥에서 들어온 강지훈이 입고 있던 코트를 벗자 옆에 있던 도우미가 자연스럽게 옷을 받아 옷걸이에 걸었다. 검은색 군화가 바닥을 밟는 힘 있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또 무슨 일이야?”엉덩이를 쳐들고 얼굴을 베개에 파묻은 채로 아픈 배를 움켜쥐고 있던 소현아는 강지훈이 나타나자 겁을 먹은 듯 얌전히 자세를 고쳐 앉았다. 노란색 헐렁한 잠옷 차림의 소현아는 동그란 배를 쭉 내밀고 손으로 어루만졌다. “강지훈 씨, 내 배 속에 아기가 있는 것 같아요. 봐봐요, 이렇게 커졌어요.”남자의 차가운 눈빛이 더욱 냉랭해졌다. “어젯밤 약 안 먹었어?”소현아는 천진난만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먹었어요. 만져봐요. 배 속에 아기가 있는 것 같지 않아요? 강지훈 씨, 나 정말 임신한 것 같아요.”강지훈은 여러 도우미들이 보고 있는 앞에서 옷 속으로 손을 넣어 그녀의 배에 손을 얹었다. 허벅지 사이로 야한 속옷이 드러났지만, 도우미들은 이런 광경에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내가 없는 동안 북경 감옥 요리사 솜씨가 좋아졌나 보네. 살이 많이 쪘어.”도우미 중 한 명이 눈을 내리깔고는 애써 불안감을 감추며 조용히 자리를 떠났다.강지훈이 손을 내밀며 말했다. “약 줘.”도우미가 약을 건네주자, 강지훈은 약을 코에 대고 냄새를 맡았다. “이 약 왜 먹는 거야?”그녀가 더듬거리며 좀처럼 대답하지 못하자 옆에 있던 다른 도우미가 나서서 말했다. “이건 현아 아가씨를 위한 소화를 돕는 약입니다. 아가씨께서 어젯밤 야식을 너무 많이 드셔서인지 아침을 잘 못 드셨습니다. 하여 소화불량이 아닌가 싶어
은경애는 새벽에 한 번 일어나 아이를 돌보는 습관이 몸에 배어 있었다. 편의를 위해 바로 옆방 침실에서 잤던 그녀는 옷을 걸친 채로 일어나 별이 방으로 다가갔다. 어떻게 된 건지 활짝 열려있는 문을 본 그녀는 어딘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아이고, 아이고, 아이고... 도련님.”“또 어디에 가신 거예요!”은경애는 급히 아래층으로 뛰어 내려갔다. 계단을 내려서는 순간, 지독한 휘발유 냄새와 가스 냄새가 코를 찔렀다.그제야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순식간에 졸음기가 사라지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큰일 났어요, 빨리 와 보세요! 큰일 났어요!”은경애는 별장의 모든 조명을 켰다. 옆방 침실에서 팔베개를 하고 누워 있던 서철용은 소란스러운 소리에 즉시 눈을 뜨고 옷을 입은 채로 방문을 나섰다. 별장을 가득 메운 불쾌한 냄새가 서철용의 코에도 흘러들어왔다. 코를 막고 계단을 내려가니 1층은 온통 물바다가 되어 있었고, 사고를 친 아이는 서재에서 물장난을 치고 있었다.은경애는 급히 아이를 안아 들었다. “아이고, 우리 도련님, 여기서 뭐 하시는 거예요!”바깥에서 경비를 서던 사람들이 달려왔다. 모두 혹독한 훈련을 거친 경호원들이라 물이 흥건하게 펼쳐져 있는 바닥을 보고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자리를 떴다.지난번에는 부엌에 불을 지르더니, 이번에는 물바다를 만들었네. 좋아, 아주 좋아!“도련님, 밤에 잠도 안 자고, 여기서 뭐 하는 거예요! 아이고!” 은경애는 한 달에 두세 번은 이렇게 멘붕이 오곤 했다. 이 일은 정말이지 너무 고통스러웠다. 장씨 가문에 들어와 갖은 일을 경험했지만, 돈 욕심 때문에 참고 견뎠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아이를 데리고 몇 달 동안 겪었던 고생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혼란스러워 어쩔 줄 모르는 은경애와는 달리 서철용은 침착하게 주변을 살펴보았다. 이 불쾌한 냄새는 도대체 어디서 나는 걸까?그때 서철용의 눈에 구석 쪽 이상하게 고여있는 물이 들어왔다. 그는 걸어가 발로 툭툭 밟아 보았다. 그 순간 아
별이의 울음소리는 그제야 천천히 잦아들었다. 다만 너무 오랜 시간 울었던지라 볼은 붉게 퉁퉁 부어올랐고, 얼굴은 눈물과 콧물 범벅이 되어 있었다.은경애 역시 긴장감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토록 오랫동안 연락이 끊겼던 사람의 목소리를 이렇게 듣게 되다니.은경애의 마음도 편치만은 않았다.장소월은 침대에 앉아 이불을 덮고 말했다. “별아, 엄마야. 엄마 목소리 기억나?”“엄... 엄마...” 별이가 다소 불분명한 발음으로 옹알이를 했다.서철용이 은경애에게 말했다. “아주머니는 일단 나가 계세요. 나중에 부를게요.”“네, 그럼 저는 문 앞에서 기다릴게요. 무슨 일 있으면 불러주세요.”은경애가 나가자 서철용은 휴대폰을 가져가려 했지만, 별이는 작은 손에 힘을 꽉 준 채 단단히 잡고 있었다.장소월은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별이의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비록 선명히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정말로 자신을 엄마로 생각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장소월의 부드러운 목소리는 아이의 울음을 그치게 하는 진정제와도 같았다. “별아, 엄마가 없더라도 경애 아주머니 말씀 잘 들어야 해, 알겠지?”“네...”“밥도 잘 먹고, 잠도 잘 자야 해...”별이가 대답했다. “네...”지금 이 녀석의 얼굴엔 방금 전까지 자지러지게 울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약간의 거만함까지 담겨 있었다.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휴대폰에서 갑자기 소리가 끊겼다. 별이는 휴대폰을 양손으로 잡고 흔들며 말했다. “엄... 엄마.”서철용이 전원 버튼을 누르며 말했다. “꼬맹아, 휴대폰 배터리가 다 돼서 충전해야 해. 안심해. 네 엄마는 아빠가 꼭 찾아올 거야. 네가 있으니까, 두 사람은 절대 헤어질 수 없어.”별이는 이제 막 난 젖니를 드러내며 빙그레 웃어 보이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곯아떨어졌다. 서철용은 빠르게 손을 뻗어 그의 머리를 받쳤다. 만에 하나 어딘가에 부딪히기라도 하면, 경을 치게 될 테니 말이다.서철용은 아이를 눕힌 뒤 방을 나섰다. 시간이 늦었
은경애는 곧바로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그건 말할 수 없어요. 혹시라도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전 대표님이 절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서철용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아주머니, 그 자식을 꽤 믿나 보네요...”“그럼요, 대표님께서 돌아오면 보너스를 주신다고 했어요. 조금만 더 모으면 큰 손주한테 맛있는 것도 많이 사줄 수 있어요.”참으로 보기 드문 진심이고 충심이었다. 주위에 온통 괴물들뿐인 전연우의 곁에 이토록 헌신적인 사람이 있었다니.“말하고 싶지 않다면, 강요하지 않을게요. 전연우가 그렇게 믿는 사람이라면, 나도 아주머니를 믿을 수 있어요.” 서철용은 도우미 아주머니에게 설득되는 날이 올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는 휴대폰을 꺼내 은경애에게 문자를 보여주었다. “자세히 살펴보세요. 우리는 한배를 탄 사람들이에요. 아주머니를 해치는 건 나에게 아무런 이득이 없어요.”은경애는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며 말했다. “뭐라고 쓰여 있는 거예요? 저는 글자를 몰라요.”그 한마디에 서철용은 할 말을 잃고 한동안 침묵하다가 말했다. “그래요. 알겠어요.”누가 알겠는가, 이 남자가 속으로 무슨 꿍꿍이를 숨기고 있을지.남원 별장에는 보일러가 빵빵하게 틀어져 있었다. 서철용은 너무 더워 입고 있던 외투를 벗었다. 은경애가 물었다. “여기에서 주무시려고요? 외부인은 이곳에서 밤을 보낼 수 없어요.”바깥은 이미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의심이 많은 건 좋은데, 너무 지나치면 안 돼요. 내 말까지 믿지 않으면, 나중에 정말로 일이 터졌을 때 아무도 당신들을 도와줄 수 없어요.”은경애는 눈을 가늘게 뜨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대표님께서 똑똑히 말했었다. 강 씨 성을 가진 사람이 오지 않는 한, 누구든 이곳을 떠나서는 안 된다고.눈앞의 남자를 믿을 수는 있지만, 너무 많이 믿어서는 안 된다.은경애는 별장에서 별이를 돌보는 일만 하고 있었고, 식사는 다른 몇 명의 도우미들이 준비해 정해진 시간에 가져다주고 있었다.저녁 식사가 준비된 후
은경애는 시선을 흘끗 돌려 아래층에서 계단을 올라오는 아이를 쳐다보았다. 난간을 잡고 일어서는 별이의 모습을 본 그녀는 화들짝 놀랐다. “아이고, 우리 작은 도련님, 여기서 뭐 하시는 거예요! 비행기 장난감 가지고 놀고 계시지 않았어요? 언제 내려오셨어요?”“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제가 대표님과 아가씨를 무슨 낯으로 뵙겠어요.”서철용이 아이를 바라보았다. 아이도 시선을 맞추며 그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청아하고 맑은 눈빛이었지만, 서철용은 한눈에 절대로 평범하지 않은 아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겨우 몇 살밖에 안 되는 어린 나이인데도 생각이 꽤나 많아 보였다.별이는 손에 사진 한 장을 들고 서철용을 향해 옹알거렸다.아이를 오랫동안 돌본 은경애는 아이의 성격을 잘 알기에, 뭔가 할 말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서철용 앞으로 데려갔다. “도련님, 서 선생님이 마음에 드시는가 봐요. 평소에 집에 외부인이라곤 거의 드나들지 않으니 선생님을 보고 신기한가 보네요.”“도련님, 이분은 도련님의 삼촌이세요. 삼촌이라고 해보세요...”서철용이 눈썹을 치켜올리며 물었다. “벌써 말을 할 줄 알아요?”은경애는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이 아이 정말 신기해요. 너무 똑똑해서 가르쳐주는 건 뭐든 한 번이면 다 따라 한다니까요.”서철용은 숨김없이 말했다. “애가 나이는 어리지만, 속은 그리 간단하지 않은 것 같네요.”별이는 두 팔을 벌려 안아달라며 옹알이를 했다. 은경애가 말했다. “도련님은 아무한테나 안아달라고 하지 않아요. 평소에는 저 말고는 누구도 가까이 못 가게 해요.”서철용이 손을 뻗어 아이를 안았다. “위층으로 올라가서 얘기하자.”방으로 들어간 서철용은 별이의 손에 들린 사진을 받아 들었다. 사진 속에는 장소월이 있었다. “엄마 보고 싶어?”별이는 침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서철용은 아이를 달래며 말했다. “네 엄마는 지금 아주 먼 곳에 있어서 당분간은 돌아올 수 없어. 아빠가 돌아오면, 엄마도 함께 돌아올 거
두꺼운 커튼이 쳐져 있는 빛이 들어오지 않는 어두운 방 안, 침대 위의 남자는 이미 눈을 뜨고 있었지만 아직 팔다리는 전혀 움직일 수가 없었다. 간호사가 다가와 면봉으로 그의 입술에 물을 적셔주었다. 그녀가 방 안에 들어온 서철용을 보며 말했다. “서 선생님, 환자분 상태는 여전히 똑같습니다. 목숨은 건졌고 의식도 있지만, 몸은 움직이지 못합니다.” 서철용이 손을 휘젓자 간호사는 방을 나섰다. 그가 침대 옆에 앉아 말했다. “형, 지금까지 이렇게 제대로 형이라고 불러본 적이 없는 것 같네. 내 말 듣고 있지? 일이 이렇게까지 되고 보니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 같아. 혼수상태로 누워있는 전연우를 보니까 더더욱 그런 생각이 들어. 나 이제 더는 어떠한 아쉬움도 남아 있지 않아.” “난... 서씨 집안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람이야. 물론 아버지의 사생아도 아니야. 우연히 서씨 가문과 연이 닿았고, 서철용이라는 신분을 사칭해 들어가게 된 거야.” “진짜 서철용은 오래전에 죽었어.” “내 진짜 성은 연 씨야. 20년 전, 난 원수에게 살해당했지만, 운 좋게 살아남았어. 그러다 진짜 서철용을 만났는데, 그 사람이 병에 걸려 죽어가면서 서씨 가문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옥패를 넘겨주었어. 그때는 그냥 버틸 수 있을 때까지만 최선을 다하자는 생각이었는데, 어느덧 시간이 이렇게 많이 흘렀네.” “그리고 배은란은... 나 한 번도 건드린 적 없어. 은란이가 낳은 아이 아버지는 형이야.” 침대에 누운 남자는 눈동자를 굴려 옆을 바라보았다. 서철용은 그가 반응을 보이자 고개를 숙이고 웃음을 터뜨렸다. “나 은란이 좋아하는 거 맞아. 하지만 비열한 방법을 쓰면서까지 은란이 마음 얻고 싶지 않아.”“서민용, 치료 잘 받고 형 아내와 아이한테 돌아가...” “형을 저승 문턱에서 데려와 살려놓은 내 수고를 헛되이 하진 말아야지.” 서철용은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섰다. 그는 종래로 서씨 가문의 재산을 탐내지 않았다. 장해진이 죽어 복수가 끝났으니 더 이상 미련이 없
“아, 참, 그리고 그 아이도...” “전연우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그 아이...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만들어 버릴 거야.” “알겠습니다, 송 대표님. 지금 바로 시행하겠습니다. 안심하십시오. 오늘 밤 반드시 일을 성공시킬 겁니다. 절대 실망하지 않으실 거예요.” 상대방은 팔을 걷어붙이고 음흉하게 웃어 보였다. “그럼 전에 얘기했던 회사 주식은...” 송시아는 날카롭게 웃으며 손가락으로 남자의 어깨를 툭 쳤다. “걱정하지 마. 회사 주식은 네가 원하는 만큼 줄게.” “네, 네.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 해가 지면 좋은 소식이 들리실 겁니다.” 남원 별장이 사라지고 아이도 죽으면... 그때쯤이면 하늘 아래 모든 사람들이 이 일을 알게 되겠지. 장소월... 그때까지도 네가 나타나지 않을 수 있을까? 아이까지 내팽개치고 언제까지 숨어있는지 두고 보겠어. 장소월은 마음이 여린 사람이라 자기 아이가 아니더라도 다치는 건 외면하지 못한다. 네가 아무리 꼭꼭 숨어 있어도 상관없어. 내가 널 찾아낼 방법은 수백 가지가 넘으니까. 러시아 국경 밖. 잠을 자던 장소월은 갑자기 가슴에서 전해져오는 강한 통증을 느꼈다. 꿈속에서 별이가 계속 엉엉 울면서 엄마를 부르짖고 있었다... 장소월로 하여금 단 한 순간도 걱정의 마음을 놓지 못하게 한 사람은 전연우 외에도 별이가 더 있었다. 그 아이... 장소월은 왜인지 모르게 줄곧 그 아이가 나오는 꿈을 꾸었었다. 아무도 돌봐주는 사람 없이 혼자 자라고 있다고 생각이 들 때면 마음의 통증이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그녀는 불안한 마음에 휴대폰을 들고 전화를 걸었다. 사무실에서 환자 차트를 보고 있던 서철용은 발신자 이름을 보고는 깜짝 놀라며 전화를 받았다. “소월 씨, 무슨 일이에요? 무슨 일 있어요?” 장소월은 아픈 가슴을 움켜쥐며 말했다. “별이가 잘못되는 꿈을 꿨어요. 혹시 남원 별장에 가봐 줄 수 있어요? 불길한 예감이 들어서 그래요.” 서철용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가 뱉어내며 말했다. “소
밤늦도록 격렬하게 몸을 섞은 후, 송시아는 거친 숨을 헐떡이며 남자의 품에 안겨 침대에 내려놓아졌다. 몸에는 얇은 담요 한 장만 덮여 있을 뿐이었다. 너무나 지쳐버린 그녀는 눈을 감자마자 바로 잠이 들었다. 남자가 떠나고 나서야 텅 빈 반산 별장은 다시 고요해졌다. 송시아가 깨어났을 땐 이미 점심 열두 시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한 손으로 머리를 받치고 잠들어있는 것처럼 옆에 누워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가늘고 긴 손가락이 그의 잘생기고 뚜렷한 이목구비를 쓸어내렸다. 남자는 눈을 감은 채 미동도 하지 않았고, 숨소리마저 희미했다. 그의 모습을 보며 송시아는 자연스럽게 전생을 떠올렸다. 그때 관계를 맺은 뒤에도 송시아는 지금처럼 그의 잠든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는 것을 좋아했다. 하지만 전연우는 너무나도 예민했기에 아무리 피곤해도 깊게 잠들지 못하고 미세한 움직임만 있어도 바로 깨어났다. 때문에 지금처럼 그의 얼굴을 쓰다듬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전연우는 출중한 능력 외에도 가장 큰 장점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수많은 여자를 홀리는 매력적인 얼굴이었다. 지금의 그이든, 50대 중년의 전연우이든, 그는 늘 성숙하고 매력적이었다. 그는 모든 것을 장악하는 지배자의 풍모와 아우라를 지녔고, 그와 같은 사람은 서울 전체를 뒤져봐도 단 한 명도 찾을 수 없었다. 송시아는 그에 대한 병적인 집착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꼬박 두 번의 삶 동안 그녀는 자신의 모든 시간을 그에게 쏟았다. 그와 함께 다시 일어섰고, 그가 모두의 부러움을 한몸에 받는 위치에 오르는 것까지 지켜보았다. 비슷한 나이대의 사람들 중 그 누가 전연우처럼 오로지 자신의 힘만으로 서울 피라미드 꼭대기에 앉을 수 있겠는가. 심지어 국회의원들마저도 그의 눈치를 살핀다. 전연우가 가진 패가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송시아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때 도우미가 문을 두드렸다. “사모님, 점심 식사가 준비되었는데, 들어가도 될까요?” 송시아는 방 안에 어지럽게 흩어진
그녀는 장소월과 전연우가 행복하게 함께 사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연우 씨, 남원 별장이 없어지고, 두 사람의 아이도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나면 마지막은 장소월 차례예요... 장소월까지 죽은 후, 난 영원히 이 별장에서 당신과 함께 살 거예요.” ... 신이랑의 이직 소식이 성세 그룹 전체에 퍼졌다. 그중에서 가장 충격을 받은 사람은 소민아였다. 사무실, 소민아는 손에 회의 자료를 들고 신이랑 앞으로 걸어가 따지듯이 물었다. “왜 회사에서 나가는 거예요? 처음에는 정말 안 믿었는데, 회의하러 잠깐 올라갔다가 와보니 정말 이직한다네요.” “신이랑 씨, 정말 송시아랑 손잡은 거예요?” 신이랑이 말했다. “민아 씨, 내가 본가로 들어가는 건 언제든 일어날 일이었어요. 민아 씨 눈에는 내가 그런 사람으로 보여요? 내가 민아 씨한테 결혼을 강요하려고 이러는 거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렇게 오랫동안 알고 지냈는데도 결국 민아 씨는 날 한 번도 믿지 않은 거네요!” 소민아는 말문이 막혀버렸다. 순간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 당황한 듯한 감정이 눈동자에 비쳤다. 그녀는 이마를 매만지며 말했다. “이랑 씨, 제 말은 그게 아니고... 미안해요. 제가 요즘 감정 기복이 심해서 헛된 생각을 너무 많이 하고 있어요. 그냥 이랑 씨가 왜 갑자기... 회사를 나가는 건지 궁금했을 뿐이에요.” 신이랑이 말했다. “민아 씨, 전에도 말했듯이, 난 구르미 시리즈에 줄곧 머무르지는 않을 거예요. 나한텐 다른 해야 할 일이 있거든요.” 소민아가 말했다. “무슨... 무슨 일인데요? 왜... 지금까지 나한테 말하지 않았어요?” 신이랑은 깊은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난 이미 민아 씨한테 말했었어요. 다만 민아 씨가 내 말을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을 뿐이죠.” “난 이만 갈게요. 나머지 업무는 이미 우림 씨에게 인계했어요. 우림 씨가 내 자리를 대신할 거예요.” 소민아는 그가 떠나는 모습을 보며 복잡한 감정에 휩싸였다. 이 회사에서 유일하게 신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