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성은은 검은색 우산을 들고 전연우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전연우는 검은색 정장에, 검은색 외투를 걸친 채, 서늘한 분위기를 풍기며 장소월과 통화를 하고 있었다.의사가 현관으로 들어왔다.기성은이 우산을 접고, 도우미가 전연우가 벗어 놓은 외투를 받아 옷걸이에 걸어놓았다. 기성은으로부터 무언가 지시를 들은 도우미는 계단에 서 있는 여자를 향해 걸어갔다.장소월은 그가 오늘 돌아올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그녀는 차갑게 굳어버린 얼굴로 그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핸드폰을 은경애에게 돌려주고는 아이를 안고 방으로 돌아갔다.별이는 열이 올라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고 온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서철용은 청진기로 아이의 상태를 점검했다. 어젯밤 별이를 데리고 정원 산책을 했던 탓일까.그저 일반적인 기침이라 생각했으나, 이틀이 지나도 전혀 나을 것 같지 않았다. 장소월은 그제야 걱정이 되어 병원에 데려가기로 결심한 것이다.서철용은 의미심장한 눈으로 전연우를 쳐다보다가 장소월에게 말했다.“아이는 괜찮아요. 보통 감기예요. 열이 내리는 주사를 하나 맞으면 돼요.”서철용은 가는 주삿바늘을 아이의 손등에 꽂아 넣었다.장소월이 의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보통 감기라면 약만 먹이면 되지, 왜 주사까지 맞아요?”서철용은 정신을 고도로 집중했는지 대답하지 않았다.전연우가 장소월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걱정하지 마. 철용인 틀리지 않아.”그때 서철용이 말했다.“마음이 놓이지 않으면 병원에 가도 돼요.”“마침 소월 씨 건강 검진 결과도 3일 뒤면 나오니, 그때 별이도 데려오면 되겠네요.”전연우가 말했다.“짐 챙겨. 병원 가자.”장소월은 이유 모를 불안감에 휩싸였다. 두 사람이 무언가 그녀에게 숨기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서철용과 전연우 두 사람이 입을 맞춘다면 그 간악함은 아무도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장소월은 기진맥진한 얼굴로 그의 손을 뿌리쳤다.“나한테 집에서 나가지 말라고 한 건 너야. 그런데 이제 와 또 짐을
“움직이지 마.”돌연 전연우가 차갑게 입을 열었다. 프로젝트 책임자는 그대로 자리에서 얼어버렸다. 그를 제외하고도... 회의실 안 모든 사람들은 겁을 먹고 고개를 숙인 채 숨소리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전연우는 직원들에게 엄격하고 냉정하기로 소문이 자자한 사람이다.단 한마디 말로 회사에서 쫓아낼 수도 있는 사람이다별이는 얌전히 앉아있지를 못하고 작은 손으로 전연우의 머리카락을 잡아 뜯었다. 평소엔 웃음기조차 보이지 않던 냉혈한이 조그만 아이에게 잡혀 어쩔 줄 모르는 모습이라니. 대다수의 사람들은 고개도 들지 못했고, 어쩌다 한 번 그 광경을 본 사람도 감히 웃지 못했다.단번에 쥐죽은 듯 조용해진 회의실에서 전연우가 이마를 찌푸리고 말했다.“계속해!”별이는 젼연우의 목소리에 버튼이 눌렸는지, 엉엉 울어대기 시작했다. 전연우는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바로 기성은에게 건넸다.기성은 역시 종래로 아이를 달래본 적이 없으니,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기성은에게 안겨 문을 나선 순간, 아이는 급기야 자지러지게 울음을 터뜨렸다.비서 휴게실.안에서 흘러나오는 소리가 기성은의 귀에 들어왔다.“대표님이 데리고 온 아이는 누구 아이일까요? 설마... 그 꽃뱀 여자가 낳은 건 아니겠죠? 인씨 집안 아가씨와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벌써 아이를 낳았을 리는 없잖아요.”“누가 알겠어요. 재벌 집에야 어지러운 일투성이죠. 돈 많은 사람 중에 바람을 피우지 않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어요. 하지만 회사에서 일한 지 꽤 되었는데도 대표님께서 아이를 데리고 나오신 건 정말 처음 보네요.”“아이를 안고 있는 대표님 모습 참 보기 좋던데요? 대표님처럼 차가운 사람에게 그런 부드러운 면도 있는지 몰랐어요.”“맞아요. 저도 그렇게 느꼈어요.”그중 긴 파마머리의 여자가 바쁘게 커피를 타고 있는 사람을 보고는 못마땅한 듯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소민아 씨, 대체 뭐 하는 거예요? 커피 몇 잔 타는데 왜 이렇게 오래 걸려요?”소민아가 급히 말했다.“다 됐어요. 지금 나가
그렇게 한두 명씩 모두 도망쳐버렸다.소민아는 마주 오는 사람을 보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기 비서님, 저들이 했던 말은 저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전 새로 들어온 인턴이라 아무것도 모릅니다.”기성은은 오랜 시간 동안 전연우와 함께 있었던지라 전연우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와 흡사한 서늘한 분위기를 갖고 있었기에 회사 사람들 모두 그를 두려워했다.“아이 볼 줄 알아요?”“네?”순간 당황한 소민아가 되물었다.기성은의 눈썹이 찌푸려졌다.“아이 볼 줄 아냐고요. 못 알아들어요?”소민아가 곧바로 대답했다.“압니다. 압니다. 갓 태어난 아이부터 80세 노인까지, 보살피는 건 잘합니다.”그때 기성은의 호주머니에서 핸드폰이 울렸다.별이는 너무 울어 목소리까지 변해버린 뒤에야 간신히 울음을 그쳤다.소민아가 아이를 받아 안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기성은은 급히 자리를 떴다.낯선 냄새를 맡고, 낯선 이의 얼굴을 본 별이는 또다시 울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젠장, 그녀가 알긴 뭘 안단 말인가. 그저 상사에게 잘 보이기 위해 한 말일 뿐인 것을.한 시간 뒤, 전연우는 회의를 끝마쳤다.12시 정각이었다.회의 시간은 본래 두 시간으로 예정되어 있었지만, 아이 때문에 최대한 시간을 단축했다.하지만 전연우가 간과한 점이 하나 있었다...그는 핸드폰을 꺼내 유일하게 저장되어 있는 번호에 전화를 걸었다.장소월이 낮잠을 청하려 침대에 누웠을 때, 도우미가 문을 두드리고 핸드폰을 들고 들어왔다.“아가씨, 대표님이 아가씨와 통화가 되지 않아 집 전화로 연락해 왔어요. 중요하게 할 말이 있으신 것 같아요.”“무슨 일 있으면 잠시 뒤에 전화하라고 해요. 전 지금 쉬어야 해요.”“하지만...”도우미가 난처한 얼굴로 아직 연결되어 있는 전화기를 바라보았다.장소월이 짜증스러운 얼굴로 말했다.“주세요.”“또 무슨 일이야?”그녀가 퉁명스럽게 말했다.전연우가 대표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며 말했다.“오늘 일찍 출발하는 바람에 분유를 못 가져
검은 구름이 걷히고 차도 양옆 나무 사이사이로 햇빛이 내리쬐었다.장소월은 전연우가 아이로 협박해 목적을 이루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다.“안 오면 굶길 거야.”도우미가 곧이곧대로 그녀에게 전한 전연우의 말이었다.전연우는 그녀의 성격에 대해 잘 알고 있다. 이제 이 아이도 전연우가 장소월을 다루는 무기가 되어버렸다.그녀는 옷방에서 가방 하나를 꺼내 아이 물건을 챙겨 넣고는 들고 나왔다.분유를 잊어버린 건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기저귀까지 가져가지 않으면 어찌한단 말인가...이쯤 되니 그가 일부러 놓고 간 건 아닌지 의심이 들었다.흐렸던 날씨는 점차 맑게 개어가고 있었다. 한 시간 정도 지난 뒤, 장소월은 성세 그룹에 도착했다. 운전기사 아저씨가 입구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문 앞에 서서 성세 그룹을 올려다보니, 전생과 똑같은 모습이었다.그녀는 도저히 회사에 오고 싶지 않아 가까운 거리에 있는 로즈 가든에 가져다 놓겠다고 했지만, 전연우는 단칼에 거절해 버렸다.로비에 들어서자마자 프런트에 서 있는 익숙한 사람의 얼굴이 보였다. 예전 남천 그룹에서 일했던 직원이었다.그녀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아가씨? 귀국하신 거예요?”장소월은 예의 있게 웃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안녕하세요.”“아가씨, 대표님 만나러 오신 거죠? 대표님께서 아가씨가 도착하시면 모시고 올라오라고 분부하셨어요.”“괜찮아요. 저 혼자 올라가면 돼요. 몇 층이에요?”“99층입니다.”“고마워요.”“별말씀을요.”프런트 직원은 장소월에게 99층 대표실로 향하는 전용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러주었다.“아가씨, 잠시만 기다리세요. 엘리베이터가 곧 내려올 겁니다.”“네.”프런트 직원이 자리에 돌아가자 다른 직원 하나가 그녀에게 다가갔다.“아가씨요? 난 왜 한 번도 본 적 없죠?”프런트 직원이 장소월을 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저 사람이 바로 제가 저번에 말했던 장씨 집안의 따님이에요. 대표님의 여동생이 되기도 하죠. 그러니까 앞으로 저 사람을 보면 조심해야
장소월은 젓가락을 들고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의 시선을 피했다. 그럼에도 그의 눈동자에서 피어오르는 불꽃은 선명히 느낄 수 있었다.장소월은 베이지색 니트 원피스를 입고 긴 머리카락을 예쁘게 위로 얹어 가늘고 긴 목을 드러내고는 귀 옆으로 잔머리를 늘어뜨렸다. 사람들로 하여금 부드럽고도 편안한 감정을 느끼게 해주는 모습이었다.그녀가 전연우에게 가져다주는 느낌은 바깥 그 어떤 여자도 줄 수 없는 것이었다.그녀가 생선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전연우는 옷소매를 걷어붙이고 세심하게 가시를 바른 뒤 그녀의 그릇에 놓아주었다.“밥 먹을 땐 좀 이러지 않으면 안 돼?”장소월이 그를 노려보고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가슴에서 제멋대로 움직이고 있는 그의 손을 잡았다.전연우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꽤 커졌네.”평소엔 빈틈 하나 없는 고고한 신사인 척하더니, 그녀 앞에선 악랄한 본성을 드러낸다.포장하고 있던 인두겁을 떼어내고 나니, 그저 망둥이처럼 날뛰는 짐승에 지나지 않았다.“전연우, 좀 무겁게 행동하면 안 돼?”전연우가 몸을 가까이 가져가 그녀의 향긋한 머리카락에 코를 파묻었다.“너 침대에선 무거운 거 좋아하던데.”“전연우!”장소월은 혐오가 가득 섞인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꼭 그렇게 역겹게 말을 해야겠어?”장소월은 입맛이 뚝 떨어져 버렸다.그녀는 전연우의 손을 뿌리치고 의자에서 일어나 차갑게 말했다.“난 이미 분유 가져왔어. 먹이든지 말든지 네 마음대로 해. 난 집에 갈 거야.”전연우가 고개를 한쪽으로 비스듬히 기울였다.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 웃는 듯해 보였지만 얼굴엔 어느새 서늘한 기운이 드리워져 있었다. 자신을 등지고 걸어가는 장소월의 모습에 전연우는 느릿하게 단추 두 개를 풀고는 서랍에서 담배 한 대를 꺼내물고 전화기 버튼을 눌렀다.장소월은 방에서 나가려 문고리를 잡았다. 하지만 아무리 밀어도 도저히 열 수가 없었다. 그녀는 화가 치밀어올라 몸을 홱 돌리고는 그를 쳐다보았다.“또 뭘 하려는 거야?”전연우가 퉁명스럽게 몇
차가 CCTV 범위를 벗어나자 돌연 누군가 길옆에서 튀어나왔다. 운전기사는 깜짝 놀라 다급히 브레이크를 밟았고 그 바람에 장소월의 몸이 앞으로 기울여졌다.운전기사가 곧바로 물었다.“소월 아가씨. 괜찮아요?”장소월이 고개를 들어보니 단발머리에 검은색 유니폼을 입고 성세 그룹 사원증을 목에 건 여자였다.두 눈동자가 영리하게 빛나는 수수한 생김새의 사람이었다.그녀가 달려와 창문을 두드리며 뭐라고 입을 벙긋거렸다. 장소월은 그녀의 말이 들리지 않아 창문을 열었다.“아가씨, 몇 분만 시간을 내어주실 수 있나요? 급하게 할 얘기가 있어서요.”운전기사가 말했다.“아가씨, 대표님께서 낯선 사람과 접촉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장소월이 머뭇거리다가 물었다.“이름이 뭐예요?”“전 소민아라고 해요. 저는 모르실 테지만, 제 언니는 분명 아실 거예요. 소현아요.”“타요.”운전기사가 걱정스레 말했다.“소월 아가씨...”“괜찮아요. 잠깐이면 돼요. 아저씨, 잠시 내려주세요.”소민아가 차에 올라탔다.이토록 추운 날에 땀을 뻘뻘 흘리는 그녀의 모습에 장소월은 물을 한 병 쥐여주었다. 건물에서 뛰어나오는 건 봤지만 자신을 찾고 있었다는 건 생각지도 못했다.“천천히 말해봐요.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는데, 현아 지금 잘 지내죠?”소민아는 눈앞의 여자를 멍하니 살펴보았다. 그녀의 얼굴, 머리카락 하나하나까지... 고귀한 기품을 풍기고 있었다.언니의 핸드폰 사진 속에서만 보던 장소월을 직접 만나니 훨씬 더 아름다운 모습이었다.소민아가 얼른 정신을 차리고 입을 열었다.“소월 언니, 현아 언니의 생일 파티에 꼭 갈 거죠?”“그것 때문에 날 찾아온 거예요?”소민아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맞아요. 현아 언니가 꼭 보고 싶어 해요.”그 말을 들은 장소월은 틀림없이 무슨 일이 생겼다는 예감이 들었다.“현아한테 무슨 일 있는 거예요?”소민아는 진지한 얼굴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15분 뒤, 소민아는 일 때문에 회사에 돌아갔다.운전기사는 어두워진 장소
그녀는 기억을 더듬어 4년 전 소현아를 그리기 시작했다.“아가씨, 조금 쉬면서 이 죽을 드세요. 곧 식겠어요.”장소월은 머리도 들지 않고 말했다.“거기 놓아두세요.”은경애는 그림에 집중하는 그녀를 보고는 방해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문을 닫고 자리를 비켜주었다.또 몇 시간이 흐른 뒤, 은경애가 식사를 올려갔을 때에도 장소월은 간단한 한 마디로 돌려보냈다.은경애는 여전히 그대로인 죽을 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다시 들고 내려갔다.저녁 6시 반, 오늘 전연우는 평소보다 일찍 퇴근했다.롤스로이스가 엔진 소리를 내며 안으로 들어왔다.전연우는 한 손으로 아이를 안고 피곤함에 찌든 얼굴로 허리를 굽혀 차에서 내렸다.어두운 색 셔츠 한 편이 축축이 젖어있었다.그가 현관에 들어서자 식은 음식을 다시 데울 준비를 하고 있는 도우미들이 보였다.“소월이는 먹었어요?”전연우의 목소리에 도우미는 깜짝 놀라 하마터면 접시를 떨어뜨릴 뻔했다.“대표님, 소월 아가씨는 외출하고 돌아오신 뒤 계속 화실에 들어가 계십니다. 은 아주머니가 모시러 올라갔지만 내려오지 않으셔서 지금 음식을 데우려고 하던 참이었어요.”“네.”전연우의 얼굴에 그림자가 내려앉았다.도우미는 얼른 음식을 들고 주방에 들어갔다.돌아오는 내내 울음을 그치지 않았던 별이는 이제야 평온한 얼굴로 전연우의 어깨에 기대 잠들어 있었다. 전연우는 아이를 안고 올라가 화실 문을 열었다. 장소월은 옷 군데군데 물감을 묻히고 그림에 열중하고 있었다.“언제까지 그릴 거야?”전연우의 화난 듯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장소월이 약간 머리를 움직이자 대충 묶어두었던 머리카락이 스르륵 풀려내려왔다.“잠깐이면 돼.”“10분 줄 테니까 준비하고 내려와서 나랑 밥 먹어. 아니면 내일 여기 그림 도구들을 모조리 치워버릴 거야.”그 한 마디를 남긴 뒤 전연우는 방으로 돌아갔다.그는 아이를 침대에 눕히고 옷을 벗고는 욕실로 들어갔다. 몇백만 원짜리 셔츠가 가차 없이 휴지통에 버려졌다.장소월은 고민을 거듭하다
저녁 9시 반.아래층 거실, 전연우는 소파에 앉아 운전기사로부터 오늘 장소월에게 있었던 일을 보고받고 있었다.“... 맞습니다. 소월 아가씨께선 그 아가씨와 몇 마디 나누고 돌아온 뒤로 저러고 계십니다.”전연우의 눈동자가 은경애에게로 향했다.“할 말 없어요?”은경애가 말했다.“대표님, 별일 아니에요. 잊으셨어요? 모레가 아가씨 친구 생일 파티잖아요. 친구에게 생일 선물을 주겠다고 그림 그리고 있는 거예요.”전연우가 물었다.“소씨예요?”은경애가 고개를 저었다.“그건 저도 모르겠어요.”전연우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꼬고 있던 다리를 풀고 소파에서 일어섰다.“알겠어요.”그는 곧바로 위층으로 올라갔다.서재 창문 앞, 오늘의 밤하늘을 바라보며 전연우는 전화를 걸었다.3초도 지나지 않아 기성은이 전화를 받았다.“대표님.”“오늘 점심 12시쯤 회사에서 나가 장소월을 만난 직원에 대해 알아봐.”...환하게 조명이 켜져 있는 성세 그룹 비서실.기성은은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부들부들 떨고 있는 여자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조용히 말했다.“대표 비서실에서 일하는 소민아입니다.”전연우는 그녀가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비서실은 기성은의 관할 하에 있는 부서다. 비록 대표 비서실 직원이긴 하지만 평소 전연우와 직접 접촉할 수 있는 사람은 기성은 한 명뿐이다.“대표님, 잠시만요.”기성은이 핸드폰을 소민아에게 건네주었다.“직접 말할래요, 아니면 내가 할까요.”소민아는 기성은이 이렇게 나올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다.“전... 대표님과 얘기하지 못하겠어요. 아시잖아요... 저 겁 많은 거... 전 아직 인턴생이에요. 무서워요...”기성은의 그 차가운 얼굴은 사람들로 하여금 쉽게 다가가지 못하게 만들곤 한다.그는 핸드폰을 다시 가져와 방을 나선 뒤 모든 일을 전연우에게 말했다.기성은의 설명을 듣자 전연우는 마음속에 품고 있던 의심이 사그라들었다.정말 생일 선물을 주려는 것뿐인가?전연우는 기성은에게 한 가지 일을 더 지시했다.“... 반드시
서철용의 보기 드문 이성을 잃은 모습이었다. 전연우와 강지훈이 언제부터 이토록 가까워진 걸까?그의 기억 속 강지훈은 여전히 전연우를 주인님이라 부르는 부하였다.북경 감옥.소현아는 아픈 배를 움켜쥐고 침대에 누워 뒹굴고 있었다. 옆에서 도우미는 무릎을 꿇은 채로 약을 들고 있었다. “주인님, 현아 아가씨가 몸이 불편하다며 계속 약을 안 드시겠다고 합니다.”막 바깥에서 들어온 강지훈이 입고 있던 코트를 벗자 옆에 있던 도우미가 자연스럽게 옷을 받아 옷걸이에 걸었다. 검은색 군화가 바닥을 밟는 힘 있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또 무슨 일이야?”엉덩이를 쳐들고 얼굴을 베개에 파묻은 채로 아픈 배를 움켜쥐고 있던 소현아는 강지훈이 나타나자 겁을 먹은 듯 얌전히 자세를 고쳐 앉았다. 노란색 헐렁한 잠옷 차림의 소현아는 동그란 배를 쭉 내밀고 손으로 어루만졌다. “강지훈 씨, 내 배 속에 아기가 있는 것 같아요. 봐봐요, 이렇게 커졌어요.”남자의 차가운 눈빛이 더욱 냉랭해졌다. “어젯밤 약 안 먹었어?”소현아는 천진난만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먹었어요. 만져봐요. 배 속에 아기가 있는 것 같지 않아요? 강지훈 씨, 나 정말 임신한 것 같아요.”강지훈은 여러 도우미들이 보고 있는 앞에서 옷 속으로 손을 넣어 그녀의 배에 손을 얹었다. 허벅지 사이로 야한 속옷이 드러났지만, 도우미들은 이런 광경에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내가 없는 동안 북경 감옥 요리사 솜씨가 좋아졌나 보네. 살이 많이 쪘어.”도우미 중 한 명이 눈을 내리깔고는 애써 불안감을 감추며 조용히 자리를 떠났다.강지훈이 손을 내밀며 말했다. “약 줘.”도우미가 약을 건네주자, 강지훈은 약을 코에 대고 냄새를 맡았다. “이 약 왜 먹는 거야?”그녀가 더듬거리며 좀처럼 대답하지 못하자 옆에 있던 다른 도우미가 나서서 말했다. “이건 현아 아가씨를 위한 소화를 돕는 약입니다. 아가씨께서 어젯밤 야식을 너무 많이 드셔서인지 아침을 잘 못 드셨습니다. 하여 소화불량이 아닌가 싶어
은경애는 새벽에 한 번 일어나 아이를 돌보는 습관이 몸에 배어 있었다. 편의를 위해 바로 옆방 침실에서 잤던 그녀는 옷을 걸친 채로 일어나 별이 방으로 다가갔다. 어떻게 된 건지 활짝 열려있는 문을 본 그녀는 어딘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아이고, 아이고, 아이고... 도련님.”“또 어디에 가신 거예요!”은경애는 급히 아래층으로 뛰어 내려갔다. 계단을 내려서는 순간, 지독한 휘발유 냄새와 가스 냄새가 코를 찔렀다.그제야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순식간에 졸음기가 사라지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큰일 났어요, 빨리 와 보세요! 큰일 났어요!”은경애는 별장의 모든 조명을 켰다. 옆방 침실에서 팔베개를 하고 누워 있던 서철용은 소란스러운 소리에 즉시 눈을 뜨고 옷을 입은 채로 방문을 나섰다. 별장을 가득 메운 불쾌한 냄새가 서철용의 코에도 흘러들어왔다. 코를 막고 계단을 내려가니 1층은 온통 물바다가 되어 있었고, 사고를 친 아이는 서재에서 물장난을 치고 있었다.은경애는 급히 아이를 안아 들었다. “아이고, 우리 도련님, 여기서 뭐 하시는 거예요!”바깥에서 경비를 서던 사람들이 달려왔다. 모두 혹독한 훈련을 거친 경호원들이라 물이 흥건하게 펼쳐져 있는 바닥을 보고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자리를 떴다.지난번에는 부엌에 불을 지르더니, 이번에는 물바다를 만들었네. 좋아, 아주 좋아!“도련님, 밤에 잠도 안 자고, 여기서 뭐 하는 거예요! 아이고!” 은경애는 한 달에 두세 번은 이렇게 멘붕이 오곤 했다. 이 일은 정말이지 너무 고통스러웠다. 장씨 가문에 들어와 갖은 일을 경험했지만, 돈 욕심 때문에 참고 견뎠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아이를 데리고 몇 달 동안 겪었던 고생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혼란스러워 어쩔 줄 모르는 은경애와는 달리 서철용은 침착하게 주변을 살펴보았다. 이 불쾌한 냄새는 도대체 어디서 나는 걸까?그때 서철용의 눈에 구석 쪽 이상하게 고여있는 물이 들어왔다. 그는 걸어가 발로 툭툭 밟아 보았다. 그 순간 아
별이의 울음소리는 그제야 천천히 잦아들었다. 다만 너무 오랜 시간 울었던지라 볼은 붉게 퉁퉁 부어올랐고, 얼굴은 눈물과 콧물 범벅이 되어 있었다.은경애 역시 긴장감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토록 오랫동안 연락이 끊겼던 사람의 목소리를 이렇게 듣게 되다니.은경애의 마음도 편치만은 않았다.장소월은 침대에 앉아 이불을 덮고 말했다. “별아, 엄마야. 엄마 목소리 기억나?”“엄... 엄마...” 별이가 다소 불분명한 발음으로 옹알이를 했다.서철용이 은경애에게 말했다. “아주머니는 일단 나가 계세요. 나중에 부를게요.”“네, 그럼 저는 문 앞에서 기다릴게요. 무슨 일 있으면 불러주세요.”은경애가 나가자 서철용은 휴대폰을 가져가려 했지만, 별이는 작은 손에 힘을 꽉 준 채 단단히 잡고 있었다.장소월은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별이의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비록 선명히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정말로 자신을 엄마로 생각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장소월의 부드러운 목소리는 아이의 울음을 그치게 하는 진정제와도 같았다. “별아, 엄마가 없더라도 경애 아주머니 말씀 잘 들어야 해, 알겠지?”“네...”“밥도 잘 먹고, 잠도 잘 자야 해...”별이가 대답했다. “네...”지금 이 녀석의 얼굴엔 방금 전까지 자지러지게 울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약간의 거만함까지 담겨 있었다.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휴대폰에서 갑자기 소리가 끊겼다. 별이는 휴대폰을 양손으로 잡고 흔들며 말했다. “엄... 엄마.”서철용이 전원 버튼을 누르며 말했다. “꼬맹아, 휴대폰 배터리가 다 돼서 충전해야 해. 안심해. 네 엄마는 아빠가 꼭 찾아올 거야. 네가 있으니까, 두 사람은 절대 헤어질 수 없어.”별이는 이제 막 난 젖니를 드러내며 빙그레 웃어 보이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곯아떨어졌다. 서철용은 빠르게 손을 뻗어 그의 머리를 받쳤다. 만에 하나 어딘가에 부딪히기라도 하면, 경을 치게 될 테니 말이다.서철용은 아이를 눕힌 뒤 방을 나섰다. 시간이 늦었
은경애는 곧바로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그건 말할 수 없어요. 혹시라도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전 대표님이 절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서철용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아주머니, 그 자식을 꽤 믿나 보네요...”“그럼요, 대표님께서 돌아오면 보너스를 주신다고 했어요. 조금만 더 모으면 큰 손주한테 맛있는 것도 많이 사줄 수 있어요.”참으로 보기 드문 진심이고 충심이었다. 주위에 온통 괴물들뿐인 전연우의 곁에 이토록 헌신적인 사람이 있었다니.“말하고 싶지 않다면, 강요하지 않을게요. 전연우가 그렇게 믿는 사람이라면, 나도 아주머니를 믿을 수 있어요.” 서철용은 도우미 아주머니에게 설득되는 날이 올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는 휴대폰을 꺼내 은경애에게 문자를 보여주었다. “자세히 살펴보세요. 우리는 한배를 탄 사람들이에요. 아주머니를 해치는 건 나에게 아무런 이득이 없어요.”은경애는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며 말했다. “뭐라고 쓰여 있는 거예요? 저는 글자를 몰라요.”그 한마디에 서철용은 할 말을 잃고 한동안 침묵하다가 말했다. “그래요. 알겠어요.”누가 알겠는가, 이 남자가 속으로 무슨 꿍꿍이를 숨기고 있을지.남원 별장에는 보일러가 빵빵하게 틀어져 있었다. 서철용은 너무 더워 입고 있던 외투를 벗었다. 은경애가 물었다. “여기에서 주무시려고요? 외부인은 이곳에서 밤을 보낼 수 없어요.”바깥은 이미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의심이 많은 건 좋은데, 너무 지나치면 안 돼요. 내 말까지 믿지 않으면, 나중에 정말로 일이 터졌을 때 아무도 당신들을 도와줄 수 없어요.”은경애는 눈을 가늘게 뜨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대표님께서 똑똑히 말했었다. 강 씨 성을 가진 사람이 오지 않는 한, 누구든 이곳을 떠나서는 안 된다고.눈앞의 남자를 믿을 수는 있지만, 너무 많이 믿어서는 안 된다.은경애는 별장에서 별이를 돌보는 일만 하고 있었고, 식사는 다른 몇 명의 도우미들이 준비해 정해진 시간에 가져다주고 있었다.저녁 식사가 준비된 후
은경애는 시선을 흘끗 돌려 아래층에서 계단을 올라오는 아이를 쳐다보았다. 난간을 잡고 일어서는 별이의 모습을 본 그녀는 화들짝 놀랐다. “아이고, 우리 작은 도련님, 여기서 뭐 하시는 거예요! 비행기 장난감 가지고 놀고 계시지 않았어요? 언제 내려오셨어요?”“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제가 대표님과 아가씨를 무슨 낯으로 뵙겠어요.”서철용이 아이를 바라보았다. 아이도 시선을 맞추며 그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청아하고 맑은 눈빛이었지만, 서철용은 한눈에 절대로 평범하지 않은 아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겨우 몇 살밖에 안 되는 어린 나이인데도 생각이 꽤나 많아 보였다.별이는 손에 사진 한 장을 들고 서철용을 향해 옹알거렸다.아이를 오랫동안 돌본 은경애는 아이의 성격을 잘 알기에, 뭔가 할 말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서철용 앞으로 데려갔다. “도련님, 서 선생님이 마음에 드시는가 봐요. 평소에 집에 외부인이라곤 거의 드나들지 않으니 선생님을 보고 신기한가 보네요.”“도련님, 이분은 도련님의 삼촌이세요. 삼촌이라고 해보세요...”서철용이 눈썹을 치켜올리며 물었다. “벌써 말을 할 줄 알아요?”은경애는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이 아이 정말 신기해요. 너무 똑똑해서 가르쳐주는 건 뭐든 한 번이면 다 따라 한다니까요.”서철용은 숨김없이 말했다. “애가 나이는 어리지만, 속은 그리 간단하지 않은 것 같네요.”별이는 두 팔을 벌려 안아달라며 옹알이를 했다. 은경애가 말했다. “도련님은 아무한테나 안아달라고 하지 않아요. 평소에는 저 말고는 누구도 가까이 못 가게 해요.”서철용이 손을 뻗어 아이를 안았다. “위층으로 올라가서 얘기하자.”방으로 들어간 서철용은 별이의 손에 들린 사진을 받아 들었다. 사진 속에는 장소월이 있었다. “엄마 보고 싶어?”별이는 침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서철용은 아이를 달래며 말했다. “네 엄마는 지금 아주 먼 곳에 있어서 당분간은 돌아올 수 없어. 아빠가 돌아오면, 엄마도 함께 돌아올 거
두꺼운 커튼이 쳐져 있는 빛이 들어오지 않는 어두운 방 안, 침대 위의 남자는 이미 눈을 뜨고 있었지만 아직 팔다리는 전혀 움직일 수가 없었다. 간호사가 다가와 면봉으로 그의 입술에 물을 적셔주었다. 그녀가 방 안에 들어온 서철용을 보며 말했다. “서 선생님, 환자분 상태는 여전히 똑같습니다. 목숨은 건졌고 의식도 있지만, 몸은 움직이지 못합니다.” 서철용이 손을 휘젓자 간호사는 방을 나섰다. 그가 침대 옆에 앉아 말했다. “형, 지금까지 이렇게 제대로 형이라고 불러본 적이 없는 것 같네. 내 말 듣고 있지? 일이 이렇게까지 되고 보니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 같아. 혼수상태로 누워있는 전연우를 보니까 더더욱 그런 생각이 들어. 나 이제 더는 어떠한 아쉬움도 남아 있지 않아.” “난... 서씨 집안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람이야. 물론 아버지의 사생아도 아니야. 우연히 서씨 가문과 연이 닿았고, 서철용이라는 신분을 사칭해 들어가게 된 거야.” “진짜 서철용은 오래전에 죽었어.” “내 진짜 성은 연 씨야. 20년 전, 난 원수에게 살해당했지만, 운 좋게 살아남았어. 그러다 진짜 서철용을 만났는데, 그 사람이 병에 걸려 죽어가면서 서씨 가문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옥패를 넘겨주었어. 그때는 그냥 버틸 수 있을 때까지만 최선을 다하자는 생각이었는데, 어느덧 시간이 이렇게 많이 흘렀네.” “그리고 배은란은... 나 한 번도 건드린 적 없어. 은란이가 낳은 아이 아버지는 형이야.” 침대에 누운 남자는 눈동자를 굴려 옆을 바라보았다. 서철용은 그가 반응을 보이자 고개를 숙이고 웃음을 터뜨렸다. “나 은란이 좋아하는 거 맞아. 하지만 비열한 방법을 쓰면서까지 은란이 마음 얻고 싶지 않아.”“서민용, 치료 잘 받고 형 아내와 아이한테 돌아가...” “형을 저승 문턱에서 데려와 살려놓은 내 수고를 헛되이 하진 말아야지.” 서철용은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섰다. 그는 종래로 서씨 가문의 재산을 탐내지 않았다. 장해진이 죽어 복수가 끝났으니 더 이상 미련이 없
“아, 참, 그리고 그 아이도...” “전연우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그 아이...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만들어 버릴 거야.” “알겠습니다, 송 대표님. 지금 바로 시행하겠습니다. 안심하십시오. 오늘 밤 반드시 일을 성공시킬 겁니다. 절대 실망하지 않으실 거예요.” 상대방은 팔을 걷어붙이고 음흉하게 웃어 보였다. “그럼 전에 얘기했던 회사 주식은...” 송시아는 날카롭게 웃으며 손가락으로 남자의 어깨를 툭 쳤다. “걱정하지 마. 회사 주식은 네가 원하는 만큼 줄게.” “네, 네.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 해가 지면 좋은 소식이 들리실 겁니다.” 남원 별장이 사라지고 아이도 죽으면... 그때쯤이면 하늘 아래 모든 사람들이 이 일을 알게 되겠지. 장소월... 그때까지도 네가 나타나지 않을 수 있을까? 아이까지 내팽개치고 언제까지 숨어있는지 두고 보겠어. 장소월은 마음이 여린 사람이라 자기 아이가 아니더라도 다치는 건 외면하지 못한다. 네가 아무리 꼭꼭 숨어 있어도 상관없어. 내가 널 찾아낼 방법은 수백 가지가 넘으니까. 러시아 국경 밖. 잠을 자던 장소월은 갑자기 가슴에서 전해져오는 강한 통증을 느꼈다. 꿈속에서 별이가 계속 엉엉 울면서 엄마를 부르짖고 있었다... 장소월로 하여금 단 한 순간도 걱정의 마음을 놓지 못하게 한 사람은 전연우 외에도 별이가 더 있었다. 그 아이... 장소월은 왜인지 모르게 줄곧 그 아이가 나오는 꿈을 꾸었었다. 아무도 돌봐주는 사람 없이 혼자 자라고 있다고 생각이 들 때면 마음의 통증이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그녀는 불안한 마음에 휴대폰을 들고 전화를 걸었다. 사무실에서 환자 차트를 보고 있던 서철용은 발신자 이름을 보고는 깜짝 놀라며 전화를 받았다. “소월 씨, 무슨 일이에요? 무슨 일 있어요?” 장소월은 아픈 가슴을 움켜쥐며 말했다. “별이가 잘못되는 꿈을 꿨어요. 혹시 남원 별장에 가봐 줄 수 있어요? 불길한 예감이 들어서 그래요.” 서철용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가 뱉어내며 말했다. “소
밤늦도록 격렬하게 몸을 섞은 후, 송시아는 거친 숨을 헐떡이며 남자의 품에 안겨 침대에 내려놓아졌다. 몸에는 얇은 담요 한 장만 덮여 있을 뿐이었다. 너무나 지쳐버린 그녀는 눈을 감자마자 바로 잠이 들었다. 남자가 떠나고 나서야 텅 빈 반산 별장은 다시 고요해졌다. 송시아가 깨어났을 땐 이미 점심 열두 시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한 손으로 머리를 받치고 잠들어있는 것처럼 옆에 누워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가늘고 긴 손가락이 그의 잘생기고 뚜렷한 이목구비를 쓸어내렸다. 남자는 눈을 감은 채 미동도 하지 않았고, 숨소리마저 희미했다. 그의 모습을 보며 송시아는 자연스럽게 전생을 떠올렸다. 그때 관계를 맺은 뒤에도 송시아는 지금처럼 그의 잠든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는 것을 좋아했다. 하지만 전연우는 너무나도 예민했기에 아무리 피곤해도 깊게 잠들지 못하고 미세한 움직임만 있어도 바로 깨어났다. 때문에 지금처럼 그의 얼굴을 쓰다듬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전연우는 출중한 능력 외에도 가장 큰 장점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수많은 여자를 홀리는 매력적인 얼굴이었다. 지금의 그이든, 50대 중년의 전연우이든, 그는 늘 성숙하고 매력적이었다. 그는 모든 것을 장악하는 지배자의 풍모와 아우라를 지녔고, 그와 같은 사람은 서울 전체를 뒤져봐도 단 한 명도 찾을 수 없었다. 송시아는 그에 대한 병적인 집착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꼬박 두 번의 삶 동안 그녀는 자신의 모든 시간을 그에게 쏟았다. 그와 함께 다시 일어섰고, 그가 모두의 부러움을 한몸에 받는 위치에 오르는 것까지 지켜보았다. 비슷한 나이대의 사람들 중 그 누가 전연우처럼 오로지 자신의 힘만으로 서울 피라미드 꼭대기에 앉을 수 있겠는가. 심지어 국회의원들마저도 그의 눈치를 살핀다. 전연우가 가진 패가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송시아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때 도우미가 문을 두드렸다. “사모님, 점심 식사가 준비되었는데, 들어가도 될까요?” 송시아는 방 안에 어지럽게 흩어진
그녀는 장소월과 전연우가 행복하게 함께 사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연우 씨, 남원 별장이 없어지고, 두 사람의 아이도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나면 마지막은 장소월 차례예요... 장소월까지 죽은 후, 난 영원히 이 별장에서 당신과 함께 살 거예요.” ... 신이랑의 이직 소식이 성세 그룹 전체에 퍼졌다. 그중에서 가장 충격을 받은 사람은 소민아였다. 사무실, 소민아는 손에 회의 자료를 들고 신이랑 앞으로 걸어가 따지듯이 물었다. “왜 회사에서 나가는 거예요? 처음에는 정말 안 믿었는데, 회의하러 잠깐 올라갔다가 와보니 정말 이직한다네요.” “신이랑 씨, 정말 송시아랑 손잡은 거예요?” 신이랑이 말했다. “민아 씨, 내가 본가로 들어가는 건 언제든 일어날 일이었어요. 민아 씨 눈에는 내가 그런 사람으로 보여요? 내가 민아 씨한테 결혼을 강요하려고 이러는 거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렇게 오랫동안 알고 지냈는데도 결국 민아 씨는 날 한 번도 믿지 않은 거네요!” 소민아는 말문이 막혀버렸다. 순간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 당황한 듯한 감정이 눈동자에 비쳤다. 그녀는 이마를 매만지며 말했다. “이랑 씨, 제 말은 그게 아니고... 미안해요. 제가 요즘 감정 기복이 심해서 헛된 생각을 너무 많이 하고 있어요. 그냥 이랑 씨가 왜 갑자기... 회사를 나가는 건지 궁금했을 뿐이에요.” 신이랑이 말했다. “민아 씨, 전에도 말했듯이, 난 구르미 시리즈에 줄곧 머무르지는 않을 거예요. 나한텐 다른 해야 할 일이 있거든요.” 소민아가 말했다. “무슨... 무슨 일인데요? 왜... 지금까지 나한테 말하지 않았어요?” 신이랑은 깊은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난 이미 민아 씨한테 말했었어요. 다만 민아 씨가 내 말을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을 뿐이죠.” “난 이만 갈게요. 나머지 업무는 이미 우림 씨에게 인계했어요. 우림 씨가 내 자리를 대신할 거예요.” 소민아는 그가 떠나는 모습을 보며 복잡한 감정에 휩싸였다. 이 회사에서 유일하게 신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