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용 씨... 민용 씨, 나 이제 어떻게 해야 해...”그녀는 고개를 들어 창밖을 바라보았다. 순간 강한 햇빛이 눈에 쏟아져 들어와 정신을 잃고 쓰러져버렸다.쿵 하는 소리에 서철용이 몸을 돌렸다. 창백한 얼굴로 바닥에 쓰러져 있는 배은란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배은란?”그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그는 곧바로 달려가 그녀를 안아 들었다.“심각한 영양실조입니다. 적어도 사흘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은 것 같아요.”검사를 마친 후, 주치의가 말했다.서철용 또한 흰 가운을 입고 침대 옆에 서 있었다. 준수한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그는 배은란의 모든 검사 과정에 참여했다.그녀의 몸 상태를 파악하고 나니 서철용은 더 이상 화를 낼 마음이 들지 않았다.반송장 같은 사람 때문에 자신을 이렇게까지 망가뜨린 것이다.조금만 늦게 발견했더라면, 그녀가 서민용보다 먼저 갔을지도 모른다!“서 선생님...”주치의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서철용은 그를 힐끗 쳐다보고는 몸을 돌려 병실을 나섰다.그는 복도에 나와 조심스럽게 병실 문을 닫고 나서야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일이야?”“마음을 바꾸셨습니까?” 주치의가 물었다.그는 명확하게 말하지 않았지만, 무엇을 묻고 있는지 서철용은 알고 있었다.서철용은 병실 문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다른 방법 없잖아? 모두 살거나, 모두 죽거나 둘 중 하나잖아. 배은란은 지금 목숨을 담보로 날 압박하고 있어.”눈앞에 있는 이 사람은 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하는 천재 의사다. 모든 면에서 자신보다 훨씬 뛰어난 이 사람에게 주치의는 연민을 느끼고 있었다.“저와 서 선생님은 모두 의사입니다. 서 선생님은 저보다 더 잘 아실 겁니다. 이 치료는 정말 무의미한 것이라는 걸요.”서철용은 손을 들어 그의 말을 제지했다.“장기 이식 알아봐. 무슨 수를 써서라도.”서민용이 살고 싶어 한다면, 전신 모든 장기 이식을 진행해야 한다.수술이 성공한다 해도, 그저 신체
그를 몇 초 동안 뚫어지게 바라보던 배은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민용 씨? 당신이 어떻게...” 서민용이 일어서 걷고 있었다! 이런 서민용의 모습을 본 게 언제였던가! 가득 피어오른 흥분감에 배은란은 또다시 눈물이 왈칵 차올라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서민용은 천천히 그녀 곁으로 다가와 부드럽게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점점 더 울보가 되어가네. 울지 마. 네가 우는 거 보고 싶지 않아.” 배은란은 힘껏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손을 꽉 잡았다. 그가 혹시라도 사라져 버릴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서민용은 오히려 웃으며 그녀 곁에 앉았다. “미안해. 늘 당신 힘들게 해서.” 배은란은 간신히 울음을 참으며 말했다. “아니야. 당신만 옆에 있다면, 난 늘 행복해.” 서민용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너 거짓말할 때 티 난다는 거 거 알아?”배은란은 부인하고 싶었지만,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서민용의 눈빛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자.” 서민용은 그녀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배은란도 순순히 그를 따라 일어섰다. 그가 어디로 가는지,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조심스럽게 그의 뒤를 따라갔다.서민용은 일부러 걸음을 늦춰 그녀가 따라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녀와 나란히 걸었다. “너 산책하는 거 좋아했잖아. 예전 회사 다닐 때 몰래 빠져나가서 바람 쐬던 거 기억나.” 과거 이야기를 꺼내니 배은란의 머릿속에 그때의 추억이 떠올랐다. 서민용은 그녀의 손을 잡고 오랫동안 걸으며 예전 추억들을 귓가에 속삭여주었다.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을 때 서민용이 발걸음을 멈췄다. “기분 좀 나아졌어?” 배은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에 어렴풋한 불안감이 느껴져 그의 손을 힘껏 붙잡았다.서민용은 그녀를 안심시키듯 웃으며 말했다. “나 어디도 안 가. 배가 좀 고프네. 넌 여기 앉아서 쉬고 있어. 내가 뭐 좀 사 올게.”너무나도 진실된 그의 미소에 배은란은 넋이 나간 사람처럼 손을 놓고 말았다. 길가 벤치
배은란은 희미하게 의식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정신을 잃기 전 일들을 떠올리며 그녀는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고마워. 근데 나 배 안 고파.”그녀는 정말로 조금의 배고픔도 느껴지지 않았다. 또한 더는 서철용의 도움을 받고 싶지도 않았다.서철용은 여전히 같은 자세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이미 장 선생에게 장기 기증자를 알아봐 달라고 했어. 서민용 안 죽어. 오히려 지금은 네가 문제야. 이러다가는 그놈보다 먼저 저세상에 가게 될 수도 있어.”“그놈이 죽으면 넌 죽도록 슬퍼하겠지. 하지만 네가 먼저 죽으면, 그놈은 어떤 반응을 보일 것 같아?”배은란은 여전히 입술을 깨물고 있었지만, 눈빛은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내가 알아서 먹을게.”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밥그릇을 잡으려 팔을 뻗었다.하지만 손가락 끝이 그릇에 닿은 순간, 너무 뜨거워 화들짝 놀랐다.다행히 서철용이 재빨리 그릇을 잡아채 죽이 침대 시트에 쏟아지는 불상사는 막을 수 있었다.“입 벌려.” 서철용이 명령했다.배은란은 머뭇거리다가 결국 입술을 움직였다.천천히 죽을 한 숟가락씩 삼키자 억눌렸던 허기가 밀려왔다.그제야 배은란은 자신이 얼마나 오랫동안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했는지 깨달았다.“네가 이렇게 네 몸을 엉망으로 망치면, 서민용이 네가 안쓰러워서라도 깨어날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서철용이 조롱 섞인 목소리로 비꼬며 말했다.배은란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그녀는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변명하듯 중얼거렸다.“그런 거 아니야. 그저 며칠 동안 너무 바빠서 깜빡했을 뿐이야...”서철용은 밥그릇을 내려놓았다.“밥 먹는 것조차 잊어버리는 정신으로 대체 무슨 수로 서민용을 돌보겠다는 거야?”배은란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전에도 잘해왔어. 다만 요즘은 마음이 너무 불안해서 그래...”그녀는 말끝을 흐리며 자신도 모르게 깨끗이 비워진 그릇을 쳐다보았다. 배가 너무 고파 조금 더 먹고 싶었다.서철용은 그런 그녀의 속마음을 단번에 알아차렸다.“조금 있다가 다시 먹어
2월 14일 밸런타인데이.장소월, 31세, 암으로 사망.서울 강남병원, 소독수 냄새가 코를 찌른다.「연우야, 오늘 의사선생님이 투석한다고 주사를 놓아주셨는데 너무 아팠어.」「나 곧 죽어. 보러 와 줄 거지?」「제발, 연우야...」장소월이 힘겹게 머리를 돌려 전화기의 메시지 창을 보고 있다. 메시지를 몇 개나 보냈건만 감감무소식이었다. 전연우는 여전히 답장이 없었다...그녀의 손에는 링거 바늘이 꽂혀있었다. 얼굴은 창백했고 몸은 뼈만 남아 앙상했고 두 눈은 안쪽으로 푹 꺼져 있었다.사지는 이미 암 후유증으로 인해 썩어가고 있었다.몸을 까딱할 수 없었기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책임 간호사도 거의 보름 너머 와보지 않았다.원인: 더 이상 치료해도 의미 없음.그녀는 사실 엄살이 많았고 아픈 걸 끔찍이 무서워했다. 암 말기라 그녀는 매일 고통에 시달렸고 전연우에 대한 사랑만이 하루하루를 버틸 수 있는 이유였다.하지만 이 넘쳐나던 사랑이 메말라가자 그녀에게 남은 건 뼈만 남은 몸뚱이였다.장소월은 전화기를 꺼버리고 조용히 죽기를 기다렸다.고통으로 그녀는 의식이 흐릿해졌다. 씁쓸하게 느껴졌다. 안 깐 힘을 다해 전연우와 결혼했고 8년간 그녀는 최선을 다해 좋은 아내가 되려 했다. 모든 걸 다 바쳐 그 사람 곁을 지켰는데 그녀가 얻은 건 무엇인가?사람들은 하나 둘 그녀의 곁을 떠났고 가난 외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그녀가 죽으면 제일 기뻐할 사람이 전연우다. 이제 그는 자유의 몸이다. 더 이상 징그러운 그녀의 얼굴을 보지 않아도 된다.전연우, 드디어 소원대로 송시아와 결혼할 수 있다.8개월 전.전연우의 생일날, 새벽 2시가 넘은 시간이었지만 장소월은 소파에 앉아 그가 돌아오길 기다렸다.테이블 위 그녀가 정성껏 차린 음식들도 이미 차갑게 식어갔다.기다리던 전연우는 오지 않고 비서가 이혼서류를 가져왔다. 비서가 싱겁게 입을 열었다.“사모님, 사장님도 별다른 방법이 없어요. 이렇게 큰 전 씨 집안 산업을 누군가는 물려받아야 되잖아요.”장
새벽 12시.장소월이 악몽에 놀라 벌떡 몸을 일으킨다. 이마엔 땀이 맺혀있다.순간 익숙한 소독제 냄새가 코끝에 스친다. 그녀가 제일 싫어하는 냄새다.장소월은 잠시 멍해졌다. 죽은 거 아니었나?왜 아직 살아있는 거지?‘탈칵’하는 소리와 함께 깜깜했던 병실이 밝아졌다. 눈부신 불빛에 그녀는 눈을 뜰 수가 없었다.남자의 차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악몽이라도 꾼 거야?”긴 다리로 침대 곁에 다가왔다. 큰 체구가 그녀의 왜소한 몸에 비친 빛을 막아주기엔 넉넉했다.“전...전연우?”장소월이 머리를 들어 뼈속까지 증오하는 그 남자의 얼굴을 알아보고는 놀라움에 두 눈이 휘둥그레진다.“다가오지 마!”왜 또 이 악마의 곁으로 돌아온 걸까?그녀는 본능적으로 거부하며 뒤로 물러선다.장소월의 머리는 지금 복잡하기 그지없다. 전연우를 본 순간 크나큰 두려움과 절망이 몰려와 숨이 막혔다.전연우가 멈칫한다. 이내 가느다란 눈은 차가움으로 가득 찬다. 불쾌한 듯 그녀를 쳐다보았고 잘생긴 얼굴이 어두워졌다.“의사 불러줄게.”남자의 차가운 저음이 칼처럼 위험한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문이 쾅 하고 닫기고 나서야 장소월도 긴장이 풀렸다.남자가 떠난 후 방안에 떠돌던 강렬한 압박감도 사라졌다. 장소월은 황급히 이불을 걷어냈다. 순간 째질듯한 아픔이 손목에 전해졌다.손목을 보니 붕대가 감겨져 있었다. 손목을 그은 건가?장소월은 아픔을 견디면서 다른 한 손으로 침대맡의 테이블에서 구식 전화기를 들어 달력을 찾아보았다.시간을 본 순간 장소월은 너무 놀란 나머지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지금은 무려 2000년, 그녀가 18살 되던 그해였다.장소월은 기억을 떠올리려고 애썼다. 그녀는 지금 입원 중이고 손목을 그어 전연우를 협박해 고백을 받아달라는 중인 것 같았다.전연우는 장소월이 10살 되던 해에 장해진이 밖에서 데려온 양자였다.장소월이 그를 사랑한다고 느끼게 된 건 그녀가 15살 되던 해 집에서 키우던 티베탄 마스티프가 갑자기 실성해 그녀한테 달려들어 물
장소월이 가볍게 숨을 들이쉬고는 전연우에게 웃으면서 담담하게 말했다.“오빠, 미안해. 전에는 내가 너무 이기적이었어! 내가 잘못했어. 그렇게 오빠를 궁지로 내몰면 안 되는 거였는데. 이제 깨달았어. 앞으로도 꼭 기억할게. 오빠는 오빠일 뿐이라고.”난리를 피우지도 떼를 쓰지도 않았다. 너무나도 평온한 나머지 아무런 생기 없는 인형 같았다.전연우의 어두운 눈동자가 빛나더니 얇은 입술에 차가운 미소가 걸렸다. 비웃음이었다. 그녀의 새로운 수작인 건가?전연우가 입을 열었다.“알았다니 다행이네. 밤새우지 말고 얼른 쉬어. 내일 데리러 올게.”그러고는 어른처럼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장소월은 피하고 싶었지만 꾹 참았고 수긍하는 듯 머리를 끄덕였다.돌아선 전연우의 눈에 부드러움은 찾아볼 수 없었고 차가움만이 남아 있었다.병실에서 나온 전연우는 주머니에서 하얀 손수건을 꺼내 장소월을 만졌던 손을 닦았다.엘리베이터 앞까지 걸어간 그는 옆에 놓인 쓰레기통에 손수건을 던졌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전연우가 지하 주차장으로 가는 버튼을 누른다.아우디 한 대가 라이트를 킨 채로 있다. 조수석에는 긴 파마머리를 한 여인이 앉아있다. 섹시한 옷차림에 손에는 담배가 들려있다. 야릇한 붉은 입술은 담배연기를 뿜어냈다.여자의 시선은 차에 타는 남자의 잘빠진 몸을 따라 움직였다.“잘 달래줬어?”전연우가 차에 올라 안전벨트를 했다. 그의 눈에 역겨움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곧이어 여자의 손에 들린 담배를 뺏아 창밖으로 던졌다. 그러고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다시는 내 차 안에서 담배 피우지 마.”여자가 매혹적으로 웃어 보이더니 다리를 꼬았다.“안 피면 어린 아가씨 향수 냄새를 어떻게 덮어.”아이라인을 그린 예쁜 눈이 차 안에 놓인 핑크색 향수병으로 향한다. 거기엔 글자가 쓰여있는 스티커도 붙여져 있었다: 장소월 전용 좌석.그녀가 살짝 웃어 보이더니 말한다.“18살밖에 안되는 여자애가 점유 욕은 굉장히 강하단 말이야. 왜? 장가에 데릴 사위로 들어갈 생
택시에 탄 지 한 시간쯤 지나 장가 별장 앞에 멈춰 섰다.장소월은 집으로 들어가 신발을 바꿔 신었다. 아줌마가 그 모습을 보더니 인츰 다가왔다.“아가씨, 왜 혼자에요? 연우 도련님이랑 같이 들어오시는 거 아니었어요?”아줌마는 아직 많이 젊었고 주름이 많지는 않았다.장소월은 대뜸 아줌마를 꼭 끌어안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그녀를 친자식처럼 아껴준 사람은 아줌마뿐이었다.그러나 뒤에는 전연우가 강제로 전가에 남겨 그와 송시아를 모시게 했다.“아줌마, 너무 보고 싶었어.”“어... 저기... 아가씨, 왜 그래요? 혹시 아직 다 안 나으신 건가요?”아줌마가 장소월을 밀어내더니 걱정스레 손을 그녀의 이마에 갖다 댔다.괜찮은 거 같은데?아줌마는 오늘 장소월이 약간 이상해 보였지만 딱히 뭐라 표현할 수는 없었다.“아니 그냥 안아보고 싶었어.”“이제 막 들어왔는데 배 안 고파요? 죽 끓여놨는데 얼른 오세요.”“입맛 없어, 그냥 올라가서 좀 잘래. 점심때 다시 불러줘!”밤을 꼬박 새우고 차를 탔더니 머리가 조금 어지러웠다.“아 맞다, 아가씨, 아까 회장님 전화 오셨는데 집 들어오시면 다시 전화 달라고 했어요. 아가씨한테 하실 말씀이 있어 보였어요. 그리고 이건 회장님 출장 가시기 전에 아가씨께 전달하라고 하신 거예요.”장소월은 실버 쇼핑카드를 건네받고는 머리를 끄덕인다.“응”장해진이 전연우 대신 그녀에게 주는 보상인가?장해진이 무슨 말을 꺼낼지 장소월은 알고 있었고 담담하게 전화를 걸었다.장해진에 대한 그녀의 감정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는 확실히 좋은 아버지였다. 하지만 그것도 허울뿐이었다...그는 사실 좋은 아빠가 아니었다.그녀는 알고 있었다. 장해진이 늘 가업을 물려받을 아들을 갖고 싶어 했다는 것을. 하여 많은 애인을 두고 있었지만 그중 누구도 아들이나 딸을 낳지는 못했다.그래서 결국 전연우를 입양한 거다.나날이 커가고 있는 딸은 장해진에게 정략결혼의 도구일 뿐이었다.이익을 위해서라면 장해진은 수단을 가리지 않았고 자신의
장소월은 저녁을 먹고 일찍 잠에 들었다. 자기 전 그녀는 따듯한 우유 한 잔을 마시곤 했는데 오랫동안 고치지 못한 습관이었다.얇은 커튼 밖 어둠은 유난히 짙었다. 한줄기 라이트가 창문으로 비쳐들었다.타이어가 땅에 마찰되면서 나는 소리가 시끄럽게 귀청을 때렸다.전연우의 아우디 A6은 장해진이 회사에서 그에게 상으로 준 새 차였다.차에서 내려 현관으로 들어왔고 손에 든 차 키를 내려놓았다.날카로운 눈빛으로 한번 훑었지만 익숙한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전에는 항상 가냘픈 모습으로 소파에 앉아 무미건조한 드라마를 보는 누군가가 있었건만 지금은 텅 비어 있었다. 테이블도 평소처럼 간식이 널브러져 있지 않고 깨끗했다.전연우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아줌마가 주방에서 나왔다.“연우 도련님, 저녁 식사하셨나요?”“소월이는?”전연우가 묻는다.“아가씨는 몸이 불편하시다면서 일찍 잠에 드셨어요.”“올라가서 한번 볼게.”전연우가 한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는 위층으로 올라갔다. 얼굴에 피곤한 기색이 어려있었다. 계단을 세 개쯤 올라가더니 발걸음을 멈추고는 말했다.“내일 점심에 윤이 돌아오니까 윤이 좋아하는 음식 몇 개 더 하고.”“네, 알겠습니다, 연우 도련님.”아줌마가 답한다.3층에 도착한 전연우, 손잡이를 돌렸지만 전처럼 열리지 않았다.안에서 잠군 것이다.전연우의 미간이 구겨졌다. 그와 장소월의 방은 모두 3층에 있었고 장해진의 방은 2층이었다. 2층은 평소에 함부로 들어갈 수 없었고 4층은 윤이가 단독으로 쓰고 있었다.예전 같았으면 그는 장소월의 방을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었고 안에서 잠근 적은 없었다.하지만 이번만큼은 그의 예상을 벗어났다. 장소월이 진짜 그에게서 마음을 거둔 것일까?전연우는 문을 두드렸다.“소월아, 자?”악마의 노크 소리에 정소월은 이불 속에 몸을 감추고 귀를 틀어막았다. 대꾸하기가 싫었다.사실 아까 전연우가 차를 끌고 돌아올 때부터 그녀는 소리를 듣고 깨어있었다.전연우는 밖에 집을 하나 샀다. 방 2개에 거실 2개
배은란은 희미하게 의식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정신을 잃기 전 일들을 떠올리며 그녀는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고마워. 근데 나 배 안 고파.”그녀는 정말로 조금의 배고픔도 느껴지지 않았다. 또한 더는 서철용의 도움을 받고 싶지도 않았다.서철용은 여전히 같은 자세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이미 장 선생에게 장기 기증자를 알아봐 달라고 했어. 서민용 안 죽어. 오히려 지금은 네가 문제야. 이러다가는 그놈보다 먼저 저세상에 가게 될 수도 있어.”“그놈이 죽으면 넌 죽도록 슬퍼하겠지. 하지만 네가 먼저 죽으면, 그놈은 어떤 반응을 보일 것 같아?”배은란은 여전히 입술을 깨물고 있었지만, 눈빛은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내가 알아서 먹을게.”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밥그릇을 잡으려 팔을 뻗었다.하지만 손가락 끝이 그릇에 닿은 순간, 너무 뜨거워 화들짝 놀랐다.다행히 서철용이 재빨리 그릇을 잡아채 죽이 침대 시트에 쏟아지는 불상사는 막을 수 있었다.“입 벌려.” 서철용이 명령했다.배은란은 머뭇거리다가 결국 입술을 움직였다.천천히 죽을 한 숟가락씩 삼키자 억눌렸던 허기가 밀려왔다.그제야 배은란은 자신이 얼마나 오랫동안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했는지 깨달았다.“네가 이렇게 네 몸을 엉망으로 망치면, 서민용이 네가 안쓰러워서라도 깨어날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서철용이 조롱 섞인 목소리로 비꼬며 말했다.배은란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그녀는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변명하듯 중얼거렸다.“그런 거 아니야. 그저 며칠 동안 너무 바빠서 깜빡했을 뿐이야...”서철용은 밥그릇을 내려놓았다.“밥 먹는 것조차 잊어버리는 정신으로 대체 무슨 수로 서민용을 돌보겠다는 거야?”배은란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전에도 잘해왔어. 다만 요즘은 마음이 너무 불안해서 그래...”그녀는 말끝을 흐리며 자신도 모르게 깨끗이 비워진 그릇을 쳐다보았다. 배가 너무 고파 조금 더 먹고 싶었다.서철용은 그런 그녀의 속마음을 단번에 알아차렸다.“조금 있다가 다시 먹어
그를 몇 초 동안 뚫어지게 바라보던 배은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민용 씨? 당신이 어떻게...” 서민용이 일어서 걷고 있었다! 이런 서민용의 모습을 본 게 언제였던가! 가득 피어오른 흥분감에 배은란은 또다시 눈물이 왈칵 차올라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서민용은 천천히 그녀 곁으로 다가와 부드럽게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점점 더 울보가 되어가네. 울지 마. 네가 우는 거 보고 싶지 않아.” 배은란은 힘껏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손을 꽉 잡았다. 그가 혹시라도 사라져 버릴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서민용은 오히려 웃으며 그녀 곁에 앉았다. “미안해. 늘 당신 힘들게 해서.” 배은란은 간신히 울음을 참으며 말했다. “아니야. 당신만 옆에 있다면, 난 늘 행복해.” 서민용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너 거짓말할 때 티 난다는 거 거 알아?”배은란은 부인하고 싶었지만,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서민용의 눈빛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자.” 서민용은 그녀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배은란도 순순히 그를 따라 일어섰다. 그가 어디로 가는지,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조심스럽게 그의 뒤를 따라갔다.서민용은 일부러 걸음을 늦춰 그녀가 따라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녀와 나란히 걸었다. “너 산책하는 거 좋아했잖아. 예전 회사 다닐 때 몰래 빠져나가서 바람 쐬던 거 기억나.” 과거 이야기를 꺼내니 배은란의 머릿속에 그때의 추억이 떠올랐다. 서민용은 그녀의 손을 잡고 오랫동안 걸으며 예전 추억들을 귓가에 속삭여주었다.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을 때 서민용이 발걸음을 멈췄다. “기분 좀 나아졌어?” 배은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에 어렴풋한 불안감이 느껴져 그의 손을 힘껏 붙잡았다.서민용은 그녀를 안심시키듯 웃으며 말했다. “나 어디도 안 가. 배가 좀 고프네. 넌 여기 앉아서 쉬고 있어. 내가 뭐 좀 사 올게.”너무나도 진실된 그의 미소에 배은란은 넋이 나간 사람처럼 손을 놓고 말았다. 길가 벤치
“민용 씨... 민용 씨, 나 이제 어떻게 해야 해...”그녀는 고개를 들어 창밖을 바라보았다. 순간 강한 햇빛이 눈에 쏟아져 들어와 정신을 잃고 쓰러져버렸다.쿵 하는 소리에 서철용이 몸을 돌렸다. 창백한 얼굴로 바닥에 쓰러져 있는 배은란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배은란?”그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그는 곧바로 달려가 그녀를 안아 들었다.“심각한 영양실조입니다. 적어도 사흘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은 것 같아요.”검사를 마친 후, 주치의가 말했다.서철용 또한 흰 가운을 입고 침대 옆에 서 있었다. 준수한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그는 배은란의 모든 검사 과정에 참여했다.그녀의 몸 상태를 파악하고 나니 서철용은 더 이상 화를 낼 마음이 들지 않았다.반송장 같은 사람 때문에 자신을 이렇게까지 망가뜨린 것이다.조금만 늦게 발견했더라면, 그녀가 서민용보다 먼저 갔을지도 모른다!“서 선생님...”주치의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서철용은 그를 힐끗 쳐다보고는 몸을 돌려 병실을 나섰다.그는 복도에 나와 조심스럽게 병실 문을 닫고 나서야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일이야?”“마음을 바꾸셨습니까?” 주치의가 물었다.그는 명확하게 말하지 않았지만, 무엇을 묻고 있는지 서철용은 알고 있었다.서철용은 병실 문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다른 방법 없잖아? 모두 살거나, 모두 죽거나 둘 중 하나잖아. 배은란은 지금 목숨을 담보로 날 압박하고 있어.”눈앞에 있는 이 사람은 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하는 천재 의사다. 모든 면에서 자신보다 훨씬 뛰어난 이 사람에게 주치의는 연민을 느끼고 있었다.“저와 서 선생님은 모두 의사입니다. 서 선생님은 저보다 더 잘 아실 겁니다. 이 치료는 정말 무의미한 것이라는 걸요.”서철용은 손을 들어 그의 말을 제지했다.“장기 이식 알아봐. 무슨 수를 써서라도.”서민용이 살고 싶어 한다면, 전신 모든 장기 이식을 진행해야 한다.수술이 성공한다 해도, 그저 신체
복도를 따라 걷고 또 걸어 마침내 끝에 다다랐다.서철용은 창가에 멈춰 섰고, 뒤따르던 발걸음 소리 역시 멎었다.어느샌가 주치의는 자리를 비켜 둘만의 공간을 만들어 주었다.“줄곧 내 곁에 있었던 거지? 내가 당신 찾고 있다는 거 뻔히 알면서 왜 나타나지 않았던 거야? 전화는 왜 계속 받지 않은 건데?”배은란의 감정은 차츰 가라앉았지만, 눈동자는 여전히 파도처럼 일렁이고 있었다.서철용은 몸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은 그늘에 잠겨 어딘가 음울해 보였다.“그 답이 너한테 그렇게 중요해?”배은란은 미간을 찌푸렸다.서철용은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서민용 말고 너에게 소중한 건 없어?” 그날 그는 도우미 아주머니에게 전화를 받고 빌라로 달려가 창백한 얼굴을 한 소망이를 본 순간 마음이 무너져내리는 듯했다. 배은란은 온통 서민용에게만 신경을 쏟을 뿐, 두 아이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모두 그가 보살피며 키운 아이들이었기에, 아무리 배은란을 사랑한다고 해도 불만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책망 어린 그의 말에 배은란의 눈빛이 흔들렸다. “난... 민용 씨 상태가 어떤지 당신도 알고 있잖아. 정말 다른 데에 관심을 가질 여력이 없어...”서철용은 미간을 찌푸렸다. 순간 서민용이 정말 그렇게나 소중한 존재인지 따져 묻고 싶어졌다. 하지만 그동안 그녀가 겪었던 절망을 떠올린 순간 마음속으로 답을 내렸다. 그는 씁쓸함에 입술을 비틀었다.서철용의 질책에 배은란의 가슴에 끓어올랐던 분노가 죄다 죄책감으로 변해버렸다.하지만 여전히 서민용의 처지는 잊지 않았다. “제발 부탁이야. 민용 씨를 다시 한 번만 살려줘. 그 사람이 깨어나면 네가 시키는 건 뭐든지 할게.” 서철용은 그녀를 꿰뚫어 보는 듯 바라보며 물었다. “뭐든지? 예전처럼 나랑 살기라도 할 거야?”배은란의 얼굴에 거부감이 스쳤다. 하지만 잠시 침묵한 후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람이 모르게만 한다면.” 그녀에게는 자신보다 서민용의 목숨이 더 중요했다. 그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온 건 그녀가 기대했던 목소리가 아니었다. “배은란 씨, 저예요. 죄송해요. 혹시 주무시는 걸 깨운 건 아닌가요?” 장소월의 말에는 미안함이 가득했다. 배은란은 발신자 번호를 다시 확인하고서야 장소월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니에요. 마침 일어나려던 참이었어요. 무슨 일로 전화하셨어요? 혹시 철용 씨 소식 있나요?” 장소월은 왜 그녀가 이토록 애타게 서철용을 찾으려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서 선생님은 최근 해외로 나가신 것 같아요. 저도 연락이 안 돼요. 혹시 급한 일이 있으시면 제가 도와드릴 수도 있어요.” 서철용이 해외로 나갔다는 말을 들은 순간, 배은란은 마음속에 거대한 절망감이 내려앉았다. “저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그 사람뿐이에요.” 그 말에 장소월은 말문이 막혀버렸다. “최대한 연락해 볼게요.” 배은란은 감사 인사를 전하며 그녀에게 물었다. “저한테는 무슨 일로 전화하셨어요?” 장소월이 물었다. “저희 혹시 예전에 아는 사이였나요? 저를 아시는 것 같은데, 저는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아서요.”배은란의 표정이 굳어버렸다. 장소월의 반응은 그녀가 최면에 걸렸던 시절을 떠올리게 했다. 하지만 당시 그녀는 단지 서철용을 서민용으로 착각했을 뿐,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어쩌면 그녀가 쓸데없는 생각을 한 것일 수도 있다. 또한 그녀는 지금 다른 사람의 일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멀리서 두 번 정도 뵌 적이 있어요. 기억 못 하시는 것도 당연해요.” 장소월은 아, 하고 짧게 대답했다. 어딘가 조금 실망한 듯했다. 배은란은 잠시 망설이다가 그녀에게 물었다. “그때 전 대표님과 사이가 안 좋아 보였는데, 지금은 화해하신 건가요? 소월 씨한테 잘 해주시나요?” 장소월은 웃으며 대답했다.“네. 지금은 저한테 너무 잘 해줘요.”배은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네요. 두 분 행복하시길 바라요. 그리고 혹시 서철용 씨를 찾으시면 꼭 저에게 연락해 주세요.” 장소월도 웃으며 말했다.“배
중환자실 안.서민용은 생기를 잃은 채 침대에 누워있었다.서철용은 무균복으로 완전 무장한 채 옆문으로 들어왔다.병실 침대에 누워있는 서민용을 보며, 그는 비웃듯 입술을 말아 올렸다.“서민용, 너 정말 잔인하구나.”“눈 좀 뜨고 봐봐. 배은란이 너 때문에 자신을 얼마나 망가뜨렸는지. 너 그 여자 사랑한다고 했잖아. 네 사랑하는 방식은 고작 이런 거야?”“내가 널 살리려고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지, 배은란이 널 낫게 하려고 얼마나 헌신했는지 알기나 해? 대체 무슨 낯으로 이 꼴로 누워있는 거야? 이 세상에 너보다 이기적인 사람은 없을 거야!”침대에 누워있는 남자의 호흡은 여전히 평온했고, 동공에는 어떤 움직임도 없었다.서철용의 시선이 천천히 모니터링 기기들을 지나 침대 머리맡의 심전도 기기에 닿았다.“너 다 듣고 있다는 거 알아.”“넌 지금 그 여자에게 짐이 될까 봐 두려워하고 있잖아. 하지만... 네가 죽으면 그 여자는 너 따라 죽을 수도 있어. 그건 왜 두려워하지 않는 거야? 내가 왜 그 여자 네 곁으로 보냈다고 생각해? 지난번 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 여자는 널 따라가겠다고 했어! 네가 살아있다는 것을 몰랐더라면, 아마 너보다 먼저 저세상에 가 있었을 거야!”서철용은 한 마디 한 마디 이를 악물고 뱉어냈다.시선은 심전도 기기에서 서민용의 얼굴로 다시 돌아갔다.잠시 서민용을 도와 그의 숨통을 끊고 싶다는 충동이 느껴졌다!차라리 배은란에게 다시 최면을 걸어 평생 서민용을 기억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지금 이토록 자신을 괴롭히는 것보단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서민용, 너 대체 원하는 게 뭐야! 이렇게 죽어서 배은란에게 평생 기억되고 싶은 거야?”“똑똑히 말해 줄게. 너 죽으면, 나는 즉시 배은란에게 최면을 걸어 영원히 너라는 사람을 지워버릴 거야. 네 바람은 절대 이루어지지 않아!”서민용은 그의 말에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서철용은 포기하지 않고 심전도 기기를 뚫어지라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래프의 선은 규칙적으로 오르내릴
“선생님, 민용 씨 어떻게 됐나요?” 의사는 눈에 띄지 않게 멀리 서 있는 사람을 힐끗 쳐다봤다. 남자는 그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말없이 자리를 떠났다. 그제야 주치의는 배은란에게 말했다. “살려냈습니다. 다만 제가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환자 본인에게 삶에 대한 의지가 별로 없습니다. 수술은 그저 생명을 유지하기만 할 뿐입니다. 나머지는 환자 스스로에게 달렸습니다.”살았다는 말에 배은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후 조심스럽게 의사에게 물었다. “그럼... 민용 씨는 얼마나 더 기다릴 수 있을까요? 만약 서철용 선생님을 찾을 수 있다면요.” 주치의는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그녀를 몇 초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 질문 대한 제 답은 조금 전과 같습니다. 얼마나 기다릴 수 있을지는, 전적으로 환자분의 의지에 달려 있습니다.” 배은란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씁쓸하게 고개를 숙였다. 주치의는 잠시 침묵하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이런 말씀 드려도 될지 모르겠지만... 가족분도 아셔야 합니다. 환자분은 지금 돌아가신 것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요.” “아니에요.” 배은란은 무의식적으로 반박했다. 주치의는 안타까운 듯 고개를 저었다. 더 이상 설득하면 안 될 것 같았다. “오늘 밤은 중환자실에서 경과를 지켜볼 겁니다. 일찍 쉬세요.”서민용이 중환자실에 있는데, 배은란이 어떻게 잠들 수 있겠는가? 그녀는 중환자실 복도에 앉아, 창문을 통해 침대에 누워있는 서민용을 바라보았다.분명 그녀가 줄곧 옆에서 보살펴주었음에도, 서민용은 너무나 야위어 마치 종잇장 같았다. 고요한 침묵 속에서, 그녀의 휴대폰이 울렸다. 배은란의 눈에 한 줄기 희망이 피어올랐다. 휴대폰을 꺼내 집에서 걸려온 전화라는 걸 확인한 순간, 그녀의 눈에 깃들었던 희망이 죄책감으로 변해버렸다. “엄마, 어디에요? 아빠도 없고, 둘이 놀러 간 거예요?”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왔다. 배은란은 마음이 저릿해졌다. 아이들을 마
배은란이 병원에 돌아왔을 때는 이미 캄캄한 밤이 되어있었다. 기진맥진한 몸을 이끌고 병실 문 앞으로 걸어간 그녀는, 한참 동안 자리에 서서 감정을 추스른 후에야 미소를 지으며 문을 열었다. 설령 서민용이 지금 의식을 잃고 혼수상태에 있다고 해도, 만신창이가 된 모습으로 는 그와 만나고 싶지 않았다. “민용 씨, 나 왔어...” 그 순간, 텅 비어 있는 병실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배은란의 눈동자에 공포가 스쳐 지나갔다. “민용 씨, 민용 씨!” 몇 초간 마음을 가다듬은 뒤에야 겨우 다리에 힘이 들어갔다. 그녀는 비틀거리며 병실 밖으로 뛰쳐나가 의사를 찾았다. 하지만 사무실 안에도 아무도 없었다. 배은란은 너무 당황한 나머지 한참 동안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그녀는 마지막 희망을 품고 응급실 쪽으로 달려갔다. 응급실에는 빨간 등이 켜져 있었고, 문은 굳게 닫혀 있었으며, 복도는 무섭게 조용하기만 했다. 그 광경에 배은란은 눈앞이 아찔해지고 다리에 힘이 풀려 의자에 풀썩 주저앉았다.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서민용이 저 안에서 사경을 헤매고 있음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간호사 한 명이 복도를 지나갔다. 배은란은 절망적인 심정으로 그녀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317호 병실 환자 저 안에 있나요?” 간호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환자분 보호자시죠? 여기에 서명해 주세요.” 배은란의 심장이 멎는 듯했다. 엄청난 공포감에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고, 구역질까지 날 것 같았다. “제가 그 사람 와이프입니다.” 그녀는 불편함을 애써 참으며 간호사가 건네주는 종이와 펜을 떨리는 손으로 받아들고 한 글자 한 글자 꼼꼼히 읽어 내려갔다. 눈물이 한 방울 한 방울 종이 위에 떨어졌다.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방해가 될까 봐, 배은란은 소리도 내지 못하고 입을 틀어막은 채 온몸이 떨릴 정도로 흐느꼈다. “환자분은 아직 치료 중이세요. 모든 가능성이 다 존재하는 상황입니다.” 간호사는 너무나 슬퍼하는 그녀를 위
“서 대표님은 자리에 안 계십니다. 급한 일이 있으시면 전화로 연락해 보십시오.” 안내 데스크에서 용건을 설명하자 돌아온 대답은 그러했다. 믿을 수 없는 말에 배은란의 동공이 흔들렸다. “그럼 언제 돌아오는데요? 여기서 기다릴게요!”직원은 미소를 지으며 단호히 말했다.“죄송하지만, 그건 대표님의 사생활이라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저는 그 사람의...” 다급한 마음에 배은란은 자기도 모르게 ‘형수’라고 말할 뻔했다. 하지만 순간 회사 사람들이 그녀와 서철용 사이의 일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을 거란 생각이 뇌리에 스쳤다. 하여 입 밖으로 내뱉으려던 말을 다시 삼켜버렸다. “여기 잠깐 앉아 있어도 될까요?” 그녀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직원은 정중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따뜻한 차를 내어주었다. 배은란은 회사에서 계속 서철용을 기다렸지만, 퇴근 시간인 오후 5시가 되도록 그의 그림자조차 볼 수 없었다. 직원이 다시 따뜻한 물을 가져다주었다. 배은란은 고개를 들어 애써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오후 내내 폐를 끼쳤네요. 혹시 서철용 씨가 돌아오면 꼭 저에게 연락해 주세요. 여기 제 연락처입니다.” 그녀는 자신의 번호를 적고 지친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퇴근 시간이라 교통 체증이 심했고, 한참을 기다린 후에야 겨우 택시를 잡을 수 있었다. “어디로 모실까요?” 택시 기사가 그녀에게 물었다. 배은란은 잠시 침묵하다가, 서씨 본가 주소를 불렀다. 택시는 천천히 출발했다. 배은란은 뒷좌석에 앉아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낯선 풍경을 바라보았다. 마음속에 비통함이 내려앉았다. 그녀는 서철용과 오랫동안 뒤섞여 지냈었다. 하지만 연락이 끊겨버리니 그를 어디에서 찾아야 할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그녀가 알고 있는 곳이라곤 회사와 서씨 본가, 두 곳이 전부였다. 서철용이 본가에 드나드는지조차 알 수 없었지만, 그저 운에 맡길 수밖에 없었다. 서씨 본가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날이 어두워져 있었다. 배은란은 두려움에 한참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