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월은 바로 이미주 3인방이 꾸민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번 그녀들과 말다툼을 한 것 말고는 장소월은 도무지 다른 사람이 떠오르지 않는다.여자 화장실. 세 여학생은 화장실에서 화장을 고치고 나비넥타이를 정리하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미주는 흥겨운 노래도 흥얼거렸다.허여빈이 입을 열었다.“오늘 기분 좋아 보이는데.”이미주는 치마를 정리하며 웃으면서 말했다.“나쁘지 않아. 좋다고 할 수 있지.”유진은 계속 대화를 이어갔다.“내가 그룹 톡방에 올린 사진 봤어?”“봤어, 나 완전 맘에 들어. 우리 유진이 계속 파이팅 해.”유진은 입가에 있는 립스틱을 정리하며 말했다.“나 전부터 장소월이 꼴 보기 싫었어. 걔네 오빠가 잘생겨서 봐줬을 뿐, 아니면 저번에 이미 손을 썼지.”이미주는 손을 세면대에 올리고 얘기했다.“그 저번 자선 파티에서 봤던 도도한 남자? 그 사람이 쟤네 오빠였어?”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아빠 말로는 그 남자는 그냥 장해진이 키우고 있는 강아지래. 저번에 누가 큰돈을 들여서 스카우트하려고 했는데 끄덕도 없었고 돈을 줘도 싫다고 해서 여자를 품에 안겨줬거든. 그런데 저녁에 바로 그 여자를 쫓아버렸대. 이렇게 뭘 모르는 남자는 정말 처음 봤어. 그리고 제일 화가 나는 건, 내가 저번에 술대접을 했거든. 나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는 거 있지.”“강아지 한 마리일 뿐인데, 도대체 누구한테 보여주려고 쇼하는 건지. 쳇!”“내가 듣기로는 그 전연우가 장소월 보다 백윤서를 더 신경 쓴대. 어릴 때부터 고아원에서 나온 고아들이고 쓰레기도 함께 주워 먹기도 했대. 그런데 그 사람... 울 아빠는 나한테 그 사람과 가까이 지내지 말라고 주의를 주셨는데 왜 그런지에 대해서는 말해주지 않았어...”허여빈은 또 어깨를 으쓱거렸다.“나 저번에 바에서 그 사람을 봤어. 잘생기긴 했지만 나이가 좀 많아서... 난 아저씨보다 연하가 좋아.”이미주는 갑자기 이 남자에게 관심이 생겼다.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 바로 도전이다. 가질
강남 개인병원.전연우는 학교의 전화를 받고 백윤서가 병원에 입원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미팅은 절반 밖에 진행이 되지 않았지만 후반부의 미팅은 기성은에게 맡기고 황급히 병원으로 향했다.백윤서는 영양액 링거를 맞고 있었고 얼굴이 창백해진 채 병상에 누워 있었다. 전연우를 본 그녀는 마치 잘못을 한 어린 소녀 같이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하였고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오... 오빠... 죄송해요. 또 폐를 끼쳤네요.”전연우는 백윤서 얼굴의 상처를 보고 깊은 눈동자에 쉽게 알아채지 못할 냉기가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의사는 뭐래?”“별일 아니에요, 그냥 가벼운 찰과상이에요. 생리가 와서 몸이 좀 불편할 뿐이지. 의사 선생님이 따뜻한 물을 많이 마시면 좋아질 거라고 했어요.” 그때 한 삼십 대 중반의 중년 여성이 들어왔고 약물 리스트를 손에 들고 있었다.“백윤서 학생 오빠 맞으시죠?”전연우는 그녀를 알고 있다. 입학한 날 그녀를 본 적이 있다.“네.”“백윤서 학생 오빠 분, 따라오세요. 할 말이 있어요.”병실 밖, 신정음은 어제저녁 발생 한 일에 대하여 전연우에게 모두 얘기해줬고 양측의 학부모와 협의할 것이라고 얘기했다. 그리고 이 일은 이 학교 학생뿐만 아니라 제운고등학교 학생들과도 연루되어 있다고 얘기했다.신정음은 그에게 예전에도 이런 일이 발생한 적 있지만 일부 압력에 못 이겨 결국 흐지부지 끝났다고 얘기했다...그 이유는 다들 성인이니 잘 알고 있다.일을 크게 만들면 더 복잡해지고 걷잡을 수 없게 된다.전연우의 눈빛은 차가워졌다.“그러니 선생님 뜻은 이 일을 덮어버리고 싶다는 거죠? 이게 선생님으로서 보여줘야할 태도인가요?”신정음은 담담하게 얘기했다.“상대방 학부모와 얘기를 나눠 봤는데 그 비용이 얼마든 모두 책임지고 감당하겠대요. 그리고 고여경 학생도 진심으로 백윤서 학생에게 사과를 했어요. 만약 이 해결방법이 마음에 안 든다면 학교로 돌아가셔서 다시 함께 의논을 해봐도 좋아요.”전연우는 손목에 찬 시계를 보며
조용한 병실, 주머니 속 휴대폰이 진동하며 울렸다. 전연우는 무음모드를 클릭했고 확인해 보니 장해진한테서 걸려온 전화였다. 전연우는 병실을 걸어 나가 전화를 받았다.“아버지...”“소월이가 학교에서 사고를 쳤다고 하는데 가서 무슨 일인지 확인해 봐.”장해진의 말투는 좀 화난 것 같았다.“소월이요? 네... 알겠습니다.”전연우의 말투는 온화한 편이지만 안색은 굳어 있었다.장해진은 전화를 끊었고 지금 백윤서가 병원에 있어서 그는 떠날 수 없다.전연우는 기성은에게 전화를 걸었고 상대방은 빠르게 전화를 받았다.“대표님.”“회사 일은 언제쯤 끝나요?”기성은:“미팅이 방금 끝났어요.”전연우:“지금 바로 제운고등학교로 가주세요.”기성은:“소월 아가씨가 또 사고를 친 거예요?”전연우:“해결을 다 하시면 데리고 아파트로 와주세요.”기성은:“네, 대표님!”소월 아가씨가 사고를 친 것도 하루 이틀이 아니다.그러나 장소월은 이번에 너무 도가 지나쳤다. 하필 이때 학교에서 사고를 쳤고 심지어 상대방 3명은 기업 오너의 아가씨이고 아직 세 건의 계약에 사인을 하지 않은 상태라 이제 계약은 가망이 없는 일이다.저번에 치마 한벌 때문에 방 씨 그룹 아가씨와 싸워 수십억 원에 달하는 계약이 물 건너갔다. 장소월은 언제면 셈이 들어 회장님, 대표님의 걱정을 덜어 드릴 수 있을까?장소월이 사고를 칠 때마다 뒷 처리는 대표님의 몫이니 말이다.기성은은 제운고등학교에 도착했고 익숙하게 교장실 옆에 있는 회의실로 찾아갔다.회의실은 투명 유리문이라 안쪽 상황이 보이는데 방음이 잘 돼서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기성은은 들리지 않았다.들어오자마자 이렇게 강렬한 장면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장소월은 이미 회의 테이블에 올라가 한 여학생의 머리카락을 덥석 잡았다.이 장면을 목격한 기성은은 바로 한숨을 내뱉었다대표님은 술을 얼마나 마셔야 회장님의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을까?만약 회장님이 직접 나선다면 장소월은 반 죽은 목숨일 것이다.그때 엘리베이터에서
“난 또 누군가 했네. 기 비서님, 회장님은? 그집 딸이 우리 딸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는데 비서님이 와서 이 일을 대충 해결하려고 하는 모습은, 우리를 너무 무시하는 거 아니야?”“사모님, 그럴 리가요. 저는 문제를 해결하려고 왔어요. 소월 아가씨 문제에 관하여, 여러분에게 사과를 드립니다. 사모님 세 분이 어떠한 보상을 원하시든지, 회장님께서 최대한 만족시켜 드리겠다고 얘기했어요.”기성은은 장소월 얼굴에는 긁힌 핏자국이 있는데 좀 심각해 보였고 머리도 헝클어져 있다는 걸 발견했다. 그러나 상대방의 상태도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았다.평소대로라면 장소월이 사고를 치면 항상 전연우가 온다. 이번에 기성은이 온 걸 보고 장소월도 전연우가 백윤서를 위로하러 갔다고 짐작했다. 필경 그녀가 다쳤으니 전연우는 분명히 마음 아파했을 것이다.이 씨 집안 사모님은 차갑게 웃었다.“돈? 지금 우리를 뭐로 보고? 그 작은 회사가 어디서 감히. 지금 장해진이 당장 와서 내 앞에서 무릎을 꿇고 사과를 하지 않는 다면, 난 바로 이 사실을 내 남편에게 얘기를 해서 그쪽 회사와의 협업을 취소시킬 거야. 내 기억이 맞다면, 요즘 프로젝트를 하나 맡긴 것 같은데 바로 회사를 바꿀 거야. 그 정도 일을 할 수 있는 회사는 널리고 널렸으니.”기성은은 사과를 하였다.“사모님, 일단 노여움을 푸세요. 미주 아가씨와 소월 아가씨 모두 아직 학생이잖아요. 친구 사이의 투닥거림도 정상적인 일이고요. 만약 이 일 때문에 저희 두 회사의 협업에 영향을 준다면 저희의 화목함에 타격을 안겨 주는 거잖아요.”여자는 탁자를 힘껏 두드리며 엄격한 목소리로 말했다.“이미 영향을 안겨 줬어. 그러니 당장 장해진에게 전화를 해서 오라고 해!”이미주는 쌀쌀맞게 웃으며 말했다.“누가 이 교양이 없는 촌놈이랑 친구라고 했어? 촌놈이 연 회사가 얼마나 좋겠어...교양이 없이 감히 날 때려? 장소월, 누가 너한테 그런 용기를 준 거야? 오늘 이곳에서 무릎 꿇고 머리 숙여 사과를 하여도 난 널 용서하지 않을
옆에서 이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놀라운 비밀을 알게 된 것 같은 표정을 지었고회의실의 분위기가 갑자기 이상해졌다.이미주도 이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장소월,허튼소리 하지 마.”장소월은 담담하게 그녀를 바라보았고 사람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허 씨, 유 씨 집안 사모님은 더욱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구체적으로 이야기해볼까?”사모님은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닥쳐! 그만해! 장소월, 너 감히 날 협박해? 장해진이 도대체 너에게 얼마나 얘기해 준거야?”“헐, 진짜였어!”유진은 놀라서 입을 막아버렸다. 유 씨 집안 사모님은 황급히 유진의 입을 막아버리고 그녀를 째려보았다.세 가문 중, 이 씨 집안의 세력은 가장 강하고 나머지 두 사람은 들러리 같은 존재에 불과하다.이미주는 믿기지 않는 듯 옆 사람을 바라보았다.“엄마, 이건 무슨 소리야? 그 아이 정말 죽었어? 그 뒤로 어떻게 해결했어? 엄마...왜 음주운전을 한 거야... 그럴 리가 없어... 헛소리를 하고 있는 게 분명해...”자신을 제일 사랑해 주는 엄마 때문에 누군가가 생을 마감했다는 사실을 그녀는 받아들일 수 없다... 심지어 음주운전이라니, 그건 명백한 범죄이다!장소월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유진 옆에 앉아있는 사모님을 바라보았다.“그리고 유 사모님... 3년 전 남편 분께서...”“그만... 소월 학생, 이 일은 이만 이쯤에서 마무리하는 걸로 해. 내가 유진이를 제대로 교육시키지 않아 이렇게 억울함을 당하게 하고...”유 씨 집안 사모님은 착용하고 있던 팔찌를 빼서 장소월의 손에 쥐어주었다.“아줌마가 대신 여기서 사과할게...”“선생님들, 저희 유진이가 오늘 몸이 좀 안 좋아서 이만 가봐야 할 것 같아요.”유진은 이유도 모른 채 어머니의 손에 끌려갔고 머리가 하얘졌다. ‘설마... 엄마 아빠도...’유 씨 집안이 떠나자 허 씨 집안 사모님도 장소월이 그들의 비밀을 얘기할까 봐 말 몇 마디 하고는 허여빈을 데리고 떠났다. 떠나기 전 손에 들고 있던 파텍 필립
사무실 안.비서는 회의실에서 방금 보고한 일을 계속 보고하였다. 한 글자도 빠짐없이 모든 보고를 마쳤다.장소월을 제외한 모든 당사자가 자리에 있었다.“... 도련님, 그때 발생한 일은 이러합니다.”강영수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비서는 한쪽으로 물러났다.순간 분위기가 차가워졌다.소파에 앉아있는 세 명의 사모님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있었다.강영수는 강한 포스를 뿜고 있어 공기 속 보이지 않는 무형의 위압력으로 모든 사람을 짓눌렀다. 주변의 공기마저 희박하게 느껴졌다.“반 시간, 위의 계약서에 사인이 적혀 있는 걸 난 봐야겠어.”“네, 대표님.”그는 강영수의 새 비서 신준수이다.그러하다. 강영수가 집을 나서기로 결심한 순간, 그는 그의 소유였던 모든 것들을 되찾기로 결심했다.그래야만 그는 그녀를 보호할 수 있다.모든 사람들은 입을 열지 못하고 가만히 있었다. 분명 회사일인데 강영수가 왜 그녀들을 찾아왔는지 알 수가 없다. 그녀들은 사모님일 뿐, 회사 일은 그녀들이 관리하지 않는다.이때 누군가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강영수 도련님, 회사일은 제가 운영하지 않지만... 왜 갑자기 협업을 해제하는 지알 수 있을까요?”“이건 당신이 물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니야.”강영수는 차갑게 말 한마디 남기고 사무실을 떠났다.이것은 해외에서 새로 개발한 과학 기술 휠체어로, 버튼을 누르면 휠체어가 자동으로 움직일 수 있다.원래대로라면 지금 강영수는 병원에서 수술을 받아야 하는데... 그녀가 괴롭힘을 당했다는 걸 듣고...지체 없이 바로 왔다.사무실 밖, 강영수는 여자의 울음소리를 들었다.안에서 하염없이 울고 있는 그녀를 바라보았다.회의실 문이 닫히지 않았던 터라, 강영수는 안으로 들어갔고 장소월은 아직 그를 발견하지 못했다.“왜 울어?”오늘 그의 목소리는 유난히 부드러웠다.코를 훌쩍이며 흐느끼는 소리가 뚝 그쳤고 깃털 같은 속눈썹에는 눈물방울이 맺혔다. 눈은 촉촉하게 젖어 있었고 그녀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 다가온 그를 멍
“네, 대표님...”기성은은 전화를 끊지 않고 휴대폰을 바로 주머니에 넣었다.전연우는 주방으로 걸어가 물 한잔을 부었다. 전화를 끊으려고 하는데 갑자기... 휴대폰 너머로 장소월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그녀를 제외하고, 다른 남자가 있었다...“더 이상 누구도 널 괴롭히지 않을 거야... 울지 마...”그의 손은 따뜻했다.그리고 그녀도 마음도, 점점 따뜻해졌다.그는 처음으로 그녀에게 이런 말을 건네준 사람이다.전연우는 종래로 그녀가 슬플 때 위로를 해주지 않는다. 오히려 그녀의 울음소리에 마음이 심란해진다고 저 멀리 가서 울라고 한다.“혹시... 기대도 돼?”장소월의 목소리는 떨렸다.강영수는 입가에 살짝 미소를 띠고 그녀를 향해 두 손을 뻗었다.“언제 어디서나 기꺼이.”하여 기성은이 들어올 때 장소월이 한 남자의 품에 안겨서 울고 있는 걸 목격했다...이를 본 기성은은 진퇴양난으로 어찌해야 할지 몰라하였다.전연우는 울음소리를 듣고 눈빛이 어두워졌다.…장소월의 얼굴에 약을 발랐고 손에 약봉지를 들고 있었는데, 그가 사다 준 것이다.이번이 그들의 세 번째 만남인데, 상대방을 끌어안고 울어 그의 가슴 쪽 옷을 적셔버렸다. 더욱 수치스러운 것은 바로 그녀의 콧물이다....이 일 외에 장소월은 매 맞는 걸 피하지 못한다는 걸 눈치챘기에...그녀는 기성은에게 드라이브를 부탁했다.차 안에서 장소월이 물었다.“오늘 일을 아버지가 알게 될까요?”기성은은 백미러를 통해 그녀를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소월 아가씨, 만약 섭섭한 일이 있으시면 대표님한테 얘기하세요. 겉으로는 신경 쓰지 않는 척 하지만, 추후에 소월 아가씨 대신 일 처리를 진행할 거예요.”장소월은 차 안에 앉아 해변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지금 서울시와 명주시의 경계에 있다.그녀의 방에 그림이 걸려있는데 바로 이곳을 그린 것이다. 엄마가 그린 그림이다...“... 그냥 귀찮게 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요. 평소에... 이미 많이 바쁘시잖아요.”“기 비서님, 이
장소월은 차디찬 타일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녀는 얼굴에 있는 손톱에 긁힌 상처를 타일에 비추어 보았다. 손으로 조심스레 만지니 온몸을 파고드는 듯한 통증이 퍼져나갔다.서재에는 은은한 향이 풍기고 있었는데 숨을 크게 들이쉬니 코를 찌르는 자극에 얼굴이 찌푸려졌다.그때, 문밖에서 점점 가까워지는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곧바로 허리를 곧게 펴고 긴장감에 옷깃을 꼭 부여잡고는 자신에게 내려질 벌을 기다렸다.얼마 지나지 않아 방문이 열렸고 장해진이 걸어들어왔다. 전연우와 백윤서도 그 뒤를 따랐다.“네가 오늘 뭘 잘못했는지 알겠어?”장해진이 장소월의 곁을 지나친 뒤 향 세 개를 집어 불을 붙이고는 이마 앞에 올리고 세 번 연속 허리를 굽혔다.장소월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녀의 시선 속 차가운 전연우의 분위기는 그녀로 하여금 호흡을 내뱉는 것조차 힘들게 만들었다.그녀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친구와 분란을 일으키는 게 아니었어요.”장해진은 벽에 걸어두었던 대나무 가지를 잡아들고는 장소월의 앞으로 걸어가 그녀의 앞에 내리꽂았다.장소월은 겁에 질려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장해진의 목소리가 그녀의 머리 꼭대기에서 들려왔다.“계약 세 개에 18억, 내가 개인적으로 넣은 돈까지 합치면 도합 20억이야. 소월아, 오늘은 회초리를 드는 게 맞지 않겠어?”전연우의 뒤에 서 있던 백윤서는 너무나도 겁을 먹은 나머지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뒤로 몇 발자국 물러서 전연우의 뒤에 완전히 숨어버렸다.“맞습니다. 모두 다 저 소월이의 잘못입니다. 잠시 저 자신을 통제하지 못해 그들과 충돌을 일으켰습니다. 아버지께서 옳으십니다. 매를 드시겠다면 달 게 맞을게요.”“뒤 돌아!”장소월은 무릎을 움직여 몸을 돌렸다. 지금은 아무도 그녀를 구하지 못한다. 전연우?장소월은 종래로 그에게 기대를 했던 적이 없다.장해진이 손에 들고 있던 대나무를 높이 들어 올린 뒤 힘껏 휘둘렀다. 첫 번째, 그녀는 긴장감에 온몸이 경직돼 아픔을 느끼지 못했다. 두 번째
배은란은 희미하게 의식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정신을 잃기 전 일들을 떠올리며 그녀는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고마워. 근데 나 배 안 고파.”그녀는 정말로 조금의 배고픔도 느껴지지 않았다. 또한 더는 서철용의 도움을 받고 싶지도 않았다.서철용은 여전히 같은 자세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이미 장 선생에게 장기 기증자를 알아봐 달라고 했어. 서민용 안 죽어. 오히려 지금은 네가 문제야. 이러다가는 그놈보다 먼저 저세상에 가게 될 수도 있어.”“그놈이 죽으면 넌 죽도록 슬퍼하겠지. 하지만 네가 먼저 죽으면, 그놈은 어떤 반응을 보일 것 같아?”배은란은 여전히 입술을 깨물고 있었지만, 눈빛은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내가 알아서 먹을게.”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밥그릇을 잡으려 팔을 뻗었다.하지만 손가락 끝이 그릇에 닿은 순간, 너무 뜨거워 화들짝 놀랐다.다행히 서철용이 재빨리 그릇을 잡아채 죽이 침대 시트에 쏟아지는 불상사는 막을 수 있었다.“입 벌려.” 서철용이 명령했다.배은란은 머뭇거리다가 결국 입술을 움직였다.천천히 죽을 한 숟가락씩 삼키자 억눌렸던 허기가 밀려왔다.그제야 배은란은 자신이 얼마나 오랫동안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했는지 깨달았다.“네가 이렇게 네 몸을 엉망으로 망치면, 서민용이 네가 안쓰러워서라도 깨어날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서철용이 조롱 섞인 목소리로 비꼬며 말했다.배은란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그녀는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변명하듯 중얼거렸다.“그런 거 아니야. 그저 며칠 동안 너무 바빠서 깜빡했을 뿐이야...”서철용은 밥그릇을 내려놓았다.“밥 먹는 것조차 잊어버리는 정신으로 대체 무슨 수로 서민용을 돌보겠다는 거야?”배은란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전에도 잘해왔어. 다만 요즘은 마음이 너무 불안해서 그래...”그녀는 말끝을 흐리며 자신도 모르게 깨끗이 비워진 그릇을 쳐다보았다. 배가 너무 고파 조금 더 먹고 싶었다.서철용은 그런 그녀의 속마음을 단번에 알아차렸다.“조금 있다가 다시 먹어
그를 몇 초 동안 뚫어지게 바라보던 배은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민용 씨? 당신이 어떻게...” 서민용이 일어서 걷고 있었다! 이런 서민용의 모습을 본 게 언제였던가! 가득 피어오른 흥분감에 배은란은 또다시 눈물이 왈칵 차올라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서민용은 천천히 그녀 곁으로 다가와 부드럽게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점점 더 울보가 되어가네. 울지 마. 네가 우는 거 보고 싶지 않아.” 배은란은 힘껏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손을 꽉 잡았다. 그가 혹시라도 사라져 버릴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서민용은 오히려 웃으며 그녀 곁에 앉았다. “미안해. 늘 당신 힘들게 해서.” 배은란은 간신히 울음을 참으며 말했다. “아니야. 당신만 옆에 있다면, 난 늘 행복해.” 서민용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너 거짓말할 때 티 난다는 거 거 알아?”배은란은 부인하고 싶었지만,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서민용의 눈빛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자.” 서민용은 그녀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배은란도 순순히 그를 따라 일어섰다. 그가 어디로 가는지,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조심스럽게 그의 뒤를 따라갔다.서민용은 일부러 걸음을 늦춰 그녀가 따라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녀와 나란히 걸었다. “너 산책하는 거 좋아했잖아. 예전 회사 다닐 때 몰래 빠져나가서 바람 쐬던 거 기억나.” 과거 이야기를 꺼내니 배은란의 머릿속에 그때의 추억이 떠올랐다. 서민용은 그녀의 손을 잡고 오랫동안 걸으며 예전 추억들을 귓가에 속삭여주었다.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을 때 서민용이 발걸음을 멈췄다. “기분 좀 나아졌어?” 배은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에 어렴풋한 불안감이 느껴져 그의 손을 힘껏 붙잡았다.서민용은 그녀를 안심시키듯 웃으며 말했다. “나 어디도 안 가. 배가 좀 고프네. 넌 여기 앉아서 쉬고 있어. 내가 뭐 좀 사 올게.”너무나도 진실된 그의 미소에 배은란은 넋이 나간 사람처럼 손을 놓고 말았다. 길가 벤치
“민용 씨... 민용 씨, 나 이제 어떻게 해야 해...”그녀는 고개를 들어 창밖을 바라보았다. 순간 강한 햇빛이 눈에 쏟아져 들어와 정신을 잃고 쓰러져버렸다.쿵 하는 소리에 서철용이 몸을 돌렸다. 창백한 얼굴로 바닥에 쓰러져 있는 배은란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배은란?”그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그는 곧바로 달려가 그녀를 안아 들었다.“심각한 영양실조입니다. 적어도 사흘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은 것 같아요.”검사를 마친 후, 주치의가 말했다.서철용 또한 흰 가운을 입고 침대 옆에 서 있었다. 준수한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그는 배은란의 모든 검사 과정에 참여했다.그녀의 몸 상태를 파악하고 나니 서철용은 더 이상 화를 낼 마음이 들지 않았다.반송장 같은 사람 때문에 자신을 이렇게까지 망가뜨린 것이다.조금만 늦게 발견했더라면, 그녀가 서민용보다 먼저 갔을지도 모른다!“서 선생님...”주치의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서철용은 그를 힐끗 쳐다보고는 몸을 돌려 병실을 나섰다.그는 복도에 나와 조심스럽게 병실 문을 닫고 나서야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일이야?”“마음을 바꾸셨습니까?” 주치의가 물었다.그는 명확하게 말하지 않았지만, 무엇을 묻고 있는지 서철용은 알고 있었다.서철용은 병실 문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다른 방법 없잖아? 모두 살거나, 모두 죽거나 둘 중 하나잖아. 배은란은 지금 목숨을 담보로 날 압박하고 있어.”눈앞에 있는 이 사람은 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하는 천재 의사다. 모든 면에서 자신보다 훨씬 뛰어난 이 사람에게 주치의는 연민을 느끼고 있었다.“저와 서 선생님은 모두 의사입니다. 서 선생님은 저보다 더 잘 아실 겁니다. 이 치료는 정말 무의미한 것이라는 걸요.”서철용은 손을 들어 그의 말을 제지했다.“장기 이식 알아봐. 무슨 수를 써서라도.”서민용이 살고 싶어 한다면, 전신 모든 장기 이식을 진행해야 한다.수술이 성공한다 해도, 그저 신체
복도를 따라 걷고 또 걸어 마침내 끝에 다다랐다.서철용은 창가에 멈춰 섰고, 뒤따르던 발걸음 소리 역시 멎었다.어느샌가 주치의는 자리를 비켜 둘만의 공간을 만들어 주었다.“줄곧 내 곁에 있었던 거지? 내가 당신 찾고 있다는 거 뻔히 알면서 왜 나타나지 않았던 거야? 전화는 왜 계속 받지 않은 건데?”배은란의 감정은 차츰 가라앉았지만, 눈동자는 여전히 파도처럼 일렁이고 있었다.서철용은 몸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은 그늘에 잠겨 어딘가 음울해 보였다.“그 답이 너한테 그렇게 중요해?”배은란은 미간을 찌푸렸다.서철용은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서민용 말고 너에게 소중한 건 없어?” 그날 그는 도우미 아주머니에게 전화를 받고 빌라로 달려가 창백한 얼굴을 한 소망이를 본 순간 마음이 무너져내리는 듯했다. 배은란은 온통 서민용에게만 신경을 쏟을 뿐, 두 아이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모두 그가 보살피며 키운 아이들이었기에, 아무리 배은란을 사랑한다고 해도 불만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책망 어린 그의 말에 배은란의 눈빛이 흔들렸다. “난... 민용 씨 상태가 어떤지 당신도 알고 있잖아. 정말 다른 데에 관심을 가질 여력이 없어...”서철용은 미간을 찌푸렸다. 순간 서민용이 정말 그렇게나 소중한 존재인지 따져 묻고 싶어졌다. 하지만 그동안 그녀가 겪었던 절망을 떠올린 순간 마음속으로 답을 내렸다. 그는 씁쓸함에 입술을 비틀었다.서철용의 질책에 배은란의 가슴에 끓어올랐던 분노가 죄다 죄책감으로 변해버렸다.하지만 여전히 서민용의 처지는 잊지 않았다. “제발 부탁이야. 민용 씨를 다시 한 번만 살려줘. 그 사람이 깨어나면 네가 시키는 건 뭐든지 할게.” 서철용은 그녀를 꿰뚫어 보는 듯 바라보며 물었다. “뭐든지? 예전처럼 나랑 살기라도 할 거야?”배은란의 얼굴에 거부감이 스쳤다. 하지만 잠시 침묵한 후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람이 모르게만 한다면.” 그녀에게는 자신보다 서민용의 목숨이 더 중요했다. 그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온 건 그녀가 기대했던 목소리가 아니었다. “배은란 씨, 저예요. 죄송해요. 혹시 주무시는 걸 깨운 건 아닌가요?” 장소월의 말에는 미안함이 가득했다. 배은란은 발신자 번호를 다시 확인하고서야 장소월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니에요. 마침 일어나려던 참이었어요. 무슨 일로 전화하셨어요? 혹시 철용 씨 소식 있나요?” 장소월은 왜 그녀가 이토록 애타게 서철용을 찾으려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서 선생님은 최근 해외로 나가신 것 같아요. 저도 연락이 안 돼요. 혹시 급한 일이 있으시면 제가 도와드릴 수도 있어요.” 서철용이 해외로 나갔다는 말을 들은 순간, 배은란은 마음속에 거대한 절망감이 내려앉았다. “저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그 사람뿐이에요.” 그 말에 장소월은 말문이 막혀버렸다. “최대한 연락해 볼게요.” 배은란은 감사 인사를 전하며 그녀에게 물었다. “저한테는 무슨 일로 전화하셨어요?” 장소월이 물었다. “저희 혹시 예전에 아는 사이였나요? 저를 아시는 것 같은데, 저는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아서요.”배은란의 표정이 굳어버렸다. 장소월의 반응은 그녀가 최면에 걸렸던 시절을 떠올리게 했다. 하지만 당시 그녀는 단지 서철용을 서민용으로 착각했을 뿐,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어쩌면 그녀가 쓸데없는 생각을 한 것일 수도 있다. 또한 그녀는 지금 다른 사람의 일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멀리서 두 번 정도 뵌 적이 있어요. 기억 못 하시는 것도 당연해요.” 장소월은 아, 하고 짧게 대답했다. 어딘가 조금 실망한 듯했다. 배은란은 잠시 망설이다가 그녀에게 물었다. “그때 전 대표님과 사이가 안 좋아 보였는데, 지금은 화해하신 건가요? 소월 씨한테 잘 해주시나요?” 장소월은 웃으며 대답했다.“네. 지금은 저한테 너무 잘 해줘요.”배은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네요. 두 분 행복하시길 바라요. 그리고 혹시 서철용 씨를 찾으시면 꼭 저에게 연락해 주세요.” 장소월도 웃으며 말했다.“배
중환자실 안.서민용은 생기를 잃은 채 침대에 누워있었다.서철용은 무균복으로 완전 무장한 채 옆문으로 들어왔다.병실 침대에 누워있는 서민용을 보며, 그는 비웃듯 입술을 말아 올렸다.“서민용, 너 정말 잔인하구나.”“눈 좀 뜨고 봐봐. 배은란이 너 때문에 자신을 얼마나 망가뜨렸는지. 너 그 여자 사랑한다고 했잖아. 네 사랑하는 방식은 고작 이런 거야?”“내가 널 살리려고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지, 배은란이 널 낫게 하려고 얼마나 헌신했는지 알기나 해? 대체 무슨 낯으로 이 꼴로 누워있는 거야? 이 세상에 너보다 이기적인 사람은 없을 거야!”침대에 누워있는 남자의 호흡은 여전히 평온했고, 동공에는 어떤 움직임도 없었다.서철용의 시선이 천천히 모니터링 기기들을 지나 침대 머리맡의 심전도 기기에 닿았다.“너 다 듣고 있다는 거 알아.”“넌 지금 그 여자에게 짐이 될까 봐 두려워하고 있잖아. 하지만... 네가 죽으면 그 여자는 너 따라 죽을 수도 있어. 그건 왜 두려워하지 않는 거야? 내가 왜 그 여자 네 곁으로 보냈다고 생각해? 지난번 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 여자는 널 따라가겠다고 했어! 네가 살아있다는 것을 몰랐더라면, 아마 너보다 먼저 저세상에 가 있었을 거야!”서철용은 한 마디 한 마디 이를 악물고 뱉어냈다.시선은 심전도 기기에서 서민용의 얼굴로 다시 돌아갔다.잠시 서민용을 도와 그의 숨통을 끊고 싶다는 충동이 느껴졌다!차라리 배은란에게 다시 최면을 걸어 평생 서민용을 기억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지금 이토록 자신을 괴롭히는 것보단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서민용, 너 대체 원하는 게 뭐야! 이렇게 죽어서 배은란에게 평생 기억되고 싶은 거야?”“똑똑히 말해 줄게. 너 죽으면, 나는 즉시 배은란에게 최면을 걸어 영원히 너라는 사람을 지워버릴 거야. 네 바람은 절대 이루어지지 않아!”서민용은 그의 말에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서철용은 포기하지 않고 심전도 기기를 뚫어지라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래프의 선은 규칙적으로 오르내릴
“선생님, 민용 씨 어떻게 됐나요?” 의사는 눈에 띄지 않게 멀리 서 있는 사람을 힐끗 쳐다봤다. 남자는 그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말없이 자리를 떠났다. 그제야 주치의는 배은란에게 말했다. “살려냈습니다. 다만 제가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환자 본인에게 삶에 대한 의지가 별로 없습니다. 수술은 그저 생명을 유지하기만 할 뿐입니다. 나머지는 환자 스스로에게 달렸습니다.”살았다는 말에 배은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후 조심스럽게 의사에게 물었다. “그럼... 민용 씨는 얼마나 더 기다릴 수 있을까요? 만약 서철용 선생님을 찾을 수 있다면요.” 주치의는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그녀를 몇 초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 질문 대한 제 답은 조금 전과 같습니다. 얼마나 기다릴 수 있을지는, 전적으로 환자분의 의지에 달려 있습니다.” 배은란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씁쓸하게 고개를 숙였다. 주치의는 잠시 침묵하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이런 말씀 드려도 될지 모르겠지만... 가족분도 아셔야 합니다. 환자분은 지금 돌아가신 것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요.” “아니에요.” 배은란은 무의식적으로 반박했다. 주치의는 안타까운 듯 고개를 저었다. 더 이상 설득하면 안 될 것 같았다. “오늘 밤은 중환자실에서 경과를 지켜볼 겁니다. 일찍 쉬세요.”서민용이 중환자실에 있는데, 배은란이 어떻게 잠들 수 있겠는가? 그녀는 중환자실 복도에 앉아, 창문을 통해 침대에 누워있는 서민용을 바라보았다.분명 그녀가 줄곧 옆에서 보살펴주었음에도, 서민용은 너무나 야위어 마치 종잇장 같았다. 고요한 침묵 속에서, 그녀의 휴대폰이 울렸다. 배은란의 눈에 한 줄기 희망이 피어올랐다. 휴대폰을 꺼내 집에서 걸려온 전화라는 걸 확인한 순간, 그녀의 눈에 깃들었던 희망이 죄책감으로 변해버렸다. “엄마, 어디에요? 아빠도 없고, 둘이 놀러 간 거예요?”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왔다. 배은란은 마음이 저릿해졌다. 아이들을 마
배은란이 병원에 돌아왔을 때는 이미 캄캄한 밤이 되어있었다. 기진맥진한 몸을 이끌고 병실 문 앞으로 걸어간 그녀는, 한참 동안 자리에 서서 감정을 추스른 후에야 미소를 지으며 문을 열었다. 설령 서민용이 지금 의식을 잃고 혼수상태에 있다고 해도, 만신창이가 된 모습으로 는 그와 만나고 싶지 않았다. “민용 씨, 나 왔어...” 그 순간, 텅 비어 있는 병실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배은란의 눈동자에 공포가 스쳐 지나갔다. “민용 씨, 민용 씨!” 몇 초간 마음을 가다듬은 뒤에야 겨우 다리에 힘이 들어갔다. 그녀는 비틀거리며 병실 밖으로 뛰쳐나가 의사를 찾았다. 하지만 사무실 안에도 아무도 없었다. 배은란은 너무 당황한 나머지 한참 동안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그녀는 마지막 희망을 품고 응급실 쪽으로 달려갔다. 응급실에는 빨간 등이 켜져 있었고, 문은 굳게 닫혀 있었으며, 복도는 무섭게 조용하기만 했다. 그 광경에 배은란은 눈앞이 아찔해지고 다리에 힘이 풀려 의자에 풀썩 주저앉았다.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서민용이 저 안에서 사경을 헤매고 있음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간호사 한 명이 복도를 지나갔다. 배은란은 절망적인 심정으로 그녀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317호 병실 환자 저 안에 있나요?” 간호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환자분 보호자시죠? 여기에 서명해 주세요.” 배은란의 심장이 멎는 듯했다. 엄청난 공포감에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고, 구역질까지 날 것 같았다. “제가 그 사람 와이프입니다.” 그녀는 불편함을 애써 참으며 간호사가 건네주는 종이와 펜을 떨리는 손으로 받아들고 한 글자 한 글자 꼼꼼히 읽어 내려갔다. 눈물이 한 방울 한 방울 종이 위에 떨어졌다.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방해가 될까 봐, 배은란은 소리도 내지 못하고 입을 틀어막은 채 온몸이 떨릴 정도로 흐느꼈다. “환자분은 아직 치료 중이세요. 모든 가능성이 다 존재하는 상황입니다.” 간호사는 너무나 슬퍼하는 그녀를 위
“서 대표님은 자리에 안 계십니다. 급한 일이 있으시면 전화로 연락해 보십시오.” 안내 데스크에서 용건을 설명하자 돌아온 대답은 그러했다. 믿을 수 없는 말에 배은란의 동공이 흔들렸다. “그럼 언제 돌아오는데요? 여기서 기다릴게요!”직원은 미소를 지으며 단호히 말했다.“죄송하지만, 그건 대표님의 사생활이라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저는 그 사람의...” 다급한 마음에 배은란은 자기도 모르게 ‘형수’라고 말할 뻔했다. 하지만 순간 회사 사람들이 그녀와 서철용 사이의 일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을 거란 생각이 뇌리에 스쳤다. 하여 입 밖으로 내뱉으려던 말을 다시 삼켜버렸다. “여기 잠깐 앉아 있어도 될까요?” 그녀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직원은 정중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따뜻한 차를 내어주었다. 배은란은 회사에서 계속 서철용을 기다렸지만, 퇴근 시간인 오후 5시가 되도록 그의 그림자조차 볼 수 없었다. 직원이 다시 따뜻한 물을 가져다주었다. 배은란은 고개를 들어 애써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오후 내내 폐를 끼쳤네요. 혹시 서철용 씨가 돌아오면 꼭 저에게 연락해 주세요. 여기 제 연락처입니다.” 그녀는 자신의 번호를 적고 지친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퇴근 시간이라 교통 체증이 심했고, 한참을 기다린 후에야 겨우 택시를 잡을 수 있었다. “어디로 모실까요?” 택시 기사가 그녀에게 물었다. 배은란은 잠시 침묵하다가, 서씨 본가 주소를 불렀다. 택시는 천천히 출발했다. 배은란은 뒷좌석에 앉아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낯선 풍경을 바라보았다. 마음속에 비통함이 내려앉았다. 그녀는 서철용과 오랫동안 뒤섞여 지냈었다. 하지만 연락이 끊겨버리니 그를 어디에서 찾아야 할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그녀가 알고 있는 곳이라곤 회사와 서씨 본가, 두 곳이 전부였다. 서철용이 본가에 드나드는지조차 알 수 없었지만, 그저 운에 맡길 수밖에 없었다. 서씨 본가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날이 어두워져 있었다. 배은란은 두려움에 한참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