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월은 바로 이미주 3인방이 꾸민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번 그녀들과 말다툼을 한 것 말고는 장소월은 도무지 다른 사람이 떠오르지 않는다.여자 화장실. 세 여학생은 화장실에서 화장을 고치고 나비넥타이를 정리하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미주는 흥겨운 노래도 흥얼거렸다.허여빈이 입을 열었다.“오늘 기분 좋아 보이는데.”이미주는 치마를 정리하며 웃으면서 말했다.“나쁘지 않아. 좋다고 할 수 있지.”유진은 계속 대화를 이어갔다.“내가 그룹 톡방에 올린 사진 봤어?”“봤어, 나 완전 맘에 들어. 우리 유진이 계속 파이팅 해.”유진은 입가에 있는 립스틱을 정리하며 말했다.“나 전부터 장소월이 꼴 보기 싫었어. 걔네 오빠가 잘생겨서 봐줬을 뿐, 아니면 저번에 이미 손을 썼지.”이미주는 손을 세면대에 올리고 얘기했다.“그 저번 자선 파티에서 봤던 도도한 남자? 그 사람이 쟤네 오빠였어?”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아빠 말로는 그 남자는 그냥 장해진이 키우고 있는 강아지래. 저번에 누가 큰돈을 들여서 스카우트하려고 했는데 끄덕도 없었고 돈을 줘도 싫다고 해서 여자를 품에 안겨줬거든. 그런데 저녁에 바로 그 여자를 쫓아버렸대. 이렇게 뭘 모르는 남자는 정말 처음 봤어. 그리고 제일 화가 나는 건, 내가 저번에 술대접을 했거든. 나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는 거 있지.”“강아지 한 마리일 뿐인데, 도대체 누구한테 보여주려고 쇼하는 건지. 쳇!”“내가 듣기로는 그 전연우가 장소월 보다 백윤서를 더 신경 쓴대. 어릴 때부터 고아원에서 나온 고아들이고 쓰레기도 함께 주워 먹기도 했대. 그런데 그 사람... 울 아빠는 나한테 그 사람과 가까이 지내지 말라고 주의를 주셨는데 왜 그런지에 대해서는 말해주지 않았어...”허여빈은 또 어깨를 으쓱거렸다.“나 저번에 바에서 그 사람을 봤어. 잘생기긴 했지만 나이가 좀 많아서... 난 아저씨보다 연하가 좋아.”이미주는 갑자기 이 남자에게 관심이 생겼다.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 바로 도전이다. 가질
강남 개인병원.전연우는 학교의 전화를 받고 백윤서가 병원에 입원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미팅은 절반 밖에 진행이 되지 않았지만 후반부의 미팅은 기성은에게 맡기고 황급히 병원으로 향했다.백윤서는 영양액 링거를 맞고 있었고 얼굴이 창백해진 채 병상에 누워 있었다. 전연우를 본 그녀는 마치 잘못을 한 어린 소녀 같이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하였고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오... 오빠... 죄송해요. 또 폐를 끼쳤네요.”전연우는 백윤서 얼굴의 상처를 보고 깊은 눈동자에 쉽게 알아채지 못할 냉기가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의사는 뭐래?”“별일 아니에요, 그냥 가벼운 찰과상이에요. 생리가 와서 몸이 좀 불편할 뿐이지. 의사 선생님이 따뜻한 물을 많이 마시면 좋아질 거라고 했어요.” 그때 한 삼십 대 중반의 중년 여성이 들어왔고 약물 리스트를 손에 들고 있었다.“백윤서 학생 오빠 맞으시죠?”전연우는 그녀를 알고 있다. 입학한 날 그녀를 본 적이 있다.“네.”“백윤서 학생 오빠 분, 따라오세요. 할 말이 있어요.”병실 밖, 신정음은 어제저녁 발생 한 일에 대하여 전연우에게 모두 얘기해줬고 양측의 학부모와 협의할 것이라고 얘기했다. 그리고 이 일은 이 학교 학생뿐만 아니라 제운고등학교 학생들과도 연루되어 있다고 얘기했다.신정음은 그에게 예전에도 이런 일이 발생한 적 있지만 일부 압력에 못 이겨 결국 흐지부지 끝났다고 얘기했다...그 이유는 다들 성인이니 잘 알고 있다.일을 크게 만들면 더 복잡해지고 걷잡을 수 없게 된다.전연우의 눈빛은 차가워졌다.“그러니 선생님 뜻은 이 일을 덮어버리고 싶다는 거죠? 이게 선생님으로서 보여줘야할 태도인가요?”신정음은 담담하게 얘기했다.“상대방 학부모와 얘기를 나눠 봤는데 그 비용이 얼마든 모두 책임지고 감당하겠대요. 그리고 고여경 학생도 진심으로 백윤서 학생에게 사과를 했어요. 만약 이 해결방법이 마음에 안 든다면 학교로 돌아가셔서 다시 함께 의논을 해봐도 좋아요.”전연우는 손목에 찬 시계를 보며
조용한 병실, 주머니 속 휴대폰이 진동하며 울렸다. 전연우는 무음모드를 클릭했고 확인해 보니 장해진한테서 걸려온 전화였다. 전연우는 병실을 걸어 나가 전화를 받았다.“아버지...”“소월이가 학교에서 사고를 쳤다고 하는데 가서 무슨 일인지 확인해 봐.”장해진의 말투는 좀 화난 것 같았다.“소월이요? 네... 알겠습니다.”전연우의 말투는 온화한 편이지만 안색은 굳어 있었다.장해진은 전화를 끊었고 지금 백윤서가 병원에 있어서 그는 떠날 수 없다.전연우는 기성은에게 전화를 걸었고 상대방은 빠르게 전화를 받았다.“대표님.”“회사 일은 언제쯤 끝나요?”기성은:“미팅이 방금 끝났어요.”전연우:“지금 바로 제운고등학교로 가주세요.”기성은:“소월 아가씨가 또 사고를 친 거예요?”전연우:“해결을 다 하시면 데리고 아파트로 와주세요.”기성은:“네, 대표님!”소월 아가씨가 사고를 친 것도 하루 이틀이 아니다.그러나 장소월은 이번에 너무 도가 지나쳤다. 하필 이때 학교에서 사고를 쳤고 심지어 상대방 3명은 기업 오너의 아가씨이고 아직 세 건의 계약에 사인을 하지 않은 상태라 이제 계약은 가망이 없는 일이다.저번에 치마 한벌 때문에 방 씨 그룹 아가씨와 싸워 수십억 원에 달하는 계약이 물 건너갔다. 장소월은 언제면 셈이 들어 회장님, 대표님의 걱정을 덜어 드릴 수 있을까?장소월이 사고를 칠 때마다 뒷 처리는 대표님의 몫이니 말이다.기성은은 제운고등학교에 도착했고 익숙하게 교장실 옆에 있는 회의실로 찾아갔다.회의실은 투명 유리문이라 안쪽 상황이 보이는데 방음이 잘 돼서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기성은은 들리지 않았다.들어오자마자 이렇게 강렬한 장면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장소월은 이미 회의 테이블에 올라가 한 여학생의 머리카락을 덥석 잡았다.이 장면을 목격한 기성은은 바로 한숨을 내뱉었다대표님은 술을 얼마나 마셔야 회장님의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을까?만약 회장님이 직접 나선다면 장소월은 반 죽은 목숨일 것이다.그때 엘리베이터에서
“난 또 누군가 했네. 기 비서님, 회장님은? 그집 딸이 우리 딸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는데 비서님이 와서 이 일을 대충 해결하려고 하는 모습은, 우리를 너무 무시하는 거 아니야?”“사모님, 그럴 리가요. 저는 문제를 해결하려고 왔어요. 소월 아가씨 문제에 관하여, 여러분에게 사과를 드립니다. 사모님 세 분이 어떠한 보상을 원하시든지, 회장님께서 최대한 만족시켜 드리겠다고 얘기했어요.”기성은은 장소월 얼굴에는 긁힌 핏자국이 있는데 좀 심각해 보였고 머리도 헝클어져 있다는 걸 발견했다. 그러나 상대방의 상태도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았다.평소대로라면 장소월이 사고를 치면 항상 전연우가 온다. 이번에 기성은이 온 걸 보고 장소월도 전연우가 백윤서를 위로하러 갔다고 짐작했다. 필경 그녀가 다쳤으니 전연우는 분명히 마음 아파했을 것이다.이 씨 집안 사모님은 차갑게 웃었다.“돈? 지금 우리를 뭐로 보고? 그 작은 회사가 어디서 감히. 지금 장해진이 당장 와서 내 앞에서 무릎을 꿇고 사과를 하지 않는 다면, 난 바로 이 사실을 내 남편에게 얘기를 해서 그쪽 회사와의 협업을 취소시킬 거야. 내 기억이 맞다면, 요즘 프로젝트를 하나 맡긴 것 같은데 바로 회사를 바꿀 거야. 그 정도 일을 할 수 있는 회사는 널리고 널렸으니.”기성은은 사과를 하였다.“사모님, 일단 노여움을 푸세요. 미주 아가씨와 소월 아가씨 모두 아직 학생이잖아요. 친구 사이의 투닥거림도 정상적인 일이고요. 만약 이 일 때문에 저희 두 회사의 협업에 영향을 준다면 저희의 화목함에 타격을 안겨 주는 거잖아요.”여자는 탁자를 힘껏 두드리며 엄격한 목소리로 말했다.“이미 영향을 안겨 줬어. 그러니 당장 장해진에게 전화를 해서 오라고 해!”이미주는 쌀쌀맞게 웃으며 말했다.“누가 이 교양이 없는 촌놈이랑 친구라고 했어? 촌놈이 연 회사가 얼마나 좋겠어...교양이 없이 감히 날 때려? 장소월, 누가 너한테 그런 용기를 준 거야? 오늘 이곳에서 무릎 꿇고 머리 숙여 사과를 하여도 난 널 용서하지 않을
옆에서 이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놀라운 비밀을 알게 된 것 같은 표정을 지었고회의실의 분위기가 갑자기 이상해졌다.이미주도 이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장소월,허튼소리 하지 마.”장소월은 담담하게 그녀를 바라보았고 사람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허 씨, 유 씨 집안 사모님은 더욱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구체적으로 이야기해볼까?”사모님은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닥쳐! 그만해! 장소월, 너 감히 날 협박해? 장해진이 도대체 너에게 얼마나 얘기해 준거야?”“헐, 진짜였어!”유진은 놀라서 입을 막아버렸다. 유 씨 집안 사모님은 황급히 유진의 입을 막아버리고 그녀를 째려보았다.세 가문 중, 이 씨 집안의 세력은 가장 강하고 나머지 두 사람은 들러리 같은 존재에 불과하다.이미주는 믿기지 않는 듯 옆 사람을 바라보았다.“엄마, 이건 무슨 소리야? 그 아이 정말 죽었어? 그 뒤로 어떻게 해결했어? 엄마...왜 음주운전을 한 거야... 그럴 리가 없어... 헛소리를 하고 있는 게 분명해...”자신을 제일 사랑해 주는 엄마 때문에 누군가가 생을 마감했다는 사실을 그녀는 받아들일 수 없다... 심지어 음주운전이라니, 그건 명백한 범죄이다!장소월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유진 옆에 앉아있는 사모님을 바라보았다.“그리고 유 사모님... 3년 전 남편 분께서...”“그만... 소월 학생, 이 일은 이만 이쯤에서 마무리하는 걸로 해. 내가 유진이를 제대로 교육시키지 않아 이렇게 억울함을 당하게 하고...”유 씨 집안 사모님은 착용하고 있던 팔찌를 빼서 장소월의 손에 쥐어주었다.“아줌마가 대신 여기서 사과할게...”“선생님들, 저희 유진이가 오늘 몸이 좀 안 좋아서 이만 가봐야 할 것 같아요.”유진은 이유도 모른 채 어머니의 손에 끌려갔고 머리가 하얘졌다. ‘설마... 엄마 아빠도...’유 씨 집안이 떠나자 허 씨 집안 사모님도 장소월이 그들의 비밀을 얘기할까 봐 말 몇 마디 하고는 허여빈을 데리고 떠났다. 떠나기 전 손에 들고 있던 파텍 필립
사무실 안.비서는 회의실에서 방금 보고한 일을 계속 보고하였다. 한 글자도 빠짐없이 모든 보고를 마쳤다.장소월을 제외한 모든 당사자가 자리에 있었다.“... 도련님, 그때 발생한 일은 이러합니다.”강영수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비서는 한쪽으로 물러났다.순간 분위기가 차가워졌다.소파에 앉아있는 세 명의 사모님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있었다.강영수는 강한 포스를 뿜고 있어 공기 속 보이지 않는 무형의 위압력으로 모든 사람을 짓눌렀다. 주변의 공기마저 희박하게 느껴졌다.“반 시간, 위의 계약서에 사인이 적혀 있는 걸 난 봐야겠어.”“네, 대표님.”그는 강영수의 새 비서 신준수이다.그러하다. 강영수가 집을 나서기로 결심한 순간, 그는 그의 소유였던 모든 것들을 되찾기로 결심했다.그래야만 그는 그녀를 보호할 수 있다.모든 사람들은 입을 열지 못하고 가만히 있었다. 분명 회사일인데 강영수가 왜 그녀들을 찾아왔는지 알 수가 없다. 그녀들은 사모님일 뿐, 회사 일은 그녀들이 관리하지 않는다.이때 누군가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강영수 도련님, 회사일은 제가 운영하지 않지만... 왜 갑자기 협업을 해제하는 지알 수 있을까요?”“이건 당신이 물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니야.”강영수는 차갑게 말 한마디 남기고 사무실을 떠났다.이것은 해외에서 새로 개발한 과학 기술 휠체어로, 버튼을 누르면 휠체어가 자동으로 움직일 수 있다.원래대로라면 지금 강영수는 병원에서 수술을 받아야 하는데... 그녀가 괴롭힘을 당했다는 걸 듣고...지체 없이 바로 왔다.사무실 밖, 강영수는 여자의 울음소리를 들었다.안에서 하염없이 울고 있는 그녀를 바라보았다.회의실 문이 닫히지 않았던 터라, 강영수는 안으로 들어갔고 장소월은 아직 그를 발견하지 못했다.“왜 울어?”오늘 그의 목소리는 유난히 부드러웠다.코를 훌쩍이며 흐느끼는 소리가 뚝 그쳤고 깃털 같은 속눈썹에는 눈물방울이 맺혔다. 눈은 촉촉하게 젖어 있었고 그녀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 다가온 그를 멍
“네, 대표님...”기성은은 전화를 끊지 않고 휴대폰을 바로 주머니에 넣었다.전연우는 주방으로 걸어가 물 한잔을 부었다. 전화를 끊으려고 하는데 갑자기... 휴대폰 너머로 장소월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그녀를 제외하고, 다른 남자가 있었다...“더 이상 누구도 널 괴롭히지 않을 거야... 울지 마...”그의 손은 따뜻했다.그리고 그녀도 마음도, 점점 따뜻해졌다.그는 처음으로 그녀에게 이런 말을 건네준 사람이다.전연우는 종래로 그녀가 슬플 때 위로를 해주지 않는다. 오히려 그녀의 울음소리에 마음이 심란해진다고 저 멀리 가서 울라고 한다.“혹시... 기대도 돼?”장소월의 목소리는 떨렸다.강영수는 입가에 살짝 미소를 띠고 그녀를 향해 두 손을 뻗었다.“언제 어디서나 기꺼이.”하여 기성은이 들어올 때 장소월이 한 남자의 품에 안겨서 울고 있는 걸 목격했다...이를 본 기성은은 진퇴양난으로 어찌해야 할지 몰라하였다.전연우는 울음소리를 듣고 눈빛이 어두워졌다.…장소월의 얼굴에 약을 발랐고 손에 약봉지를 들고 있었는데, 그가 사다 준 것이다.이번이 그들의 세 번째 만남인데, 상대방을 끌어안고 울어 그의 가슴 쪽 옷을 적셔버렸다. 더욱 수치스러운 것은 바로 그녀의 콧물이다....이 일 외에 장소월은 매 맞는 걸 피하지 못한다는 걸 눈치챘기에...그녀는 기성은에게 드라이브를 부탁했다.차 안에서 장소월이 물었다.“오늘 일을 아버지가 알게 될까요?”기성은은 백미러를 통해 그녀를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소월 아가씨, 만약 섭섭한 일이 있으시면 대표님한테 얘기하세요. 겉으로는 신경 쓰지 않는 척 하지만, 추후에 소월 아가씨 대신 일 처리를 진행할 거예요.”장소월은 차 안에 앉아 해변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지금 서울시와 명주시의 경계에 있다.그녀의 방에 그림이 걸려있는데 바로 이곳을 그린 것이다. 엄마가 그린 그림이다...“... 그냥 귀찮게 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요. 평소에... 이미 많이 바쁘시잖아요.”“기 비서님, 이
장소월은 차디찬 타일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녀는 얼굴에 있는 손톱에 긁힌 상처를 타일에 비추어 보았다. 손으로 조심스레 만지니 온몸을 파고드는 듯한 통증이 퍼져나갔다.서재에는 은은한 향이 풍기고 있었는데 숨을 크게 들이쉬니 코를 찌르는 자극에 얼굴이 찌푸려졌다.그때, 문밖에서 점점 가까워지는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곧바로 허리를 곧게 펴고 긴장감에 옷깃을 꼭 부여잡고는 자신에게 내려질 벌을 기다렸다.얼마 지나지 않아 방문이 열렸고 장해진이 걸어들어왔다. 전연우와 백윤서도 그 뒤를 따랐다.“네가 오늘 뭘 잘못했는지 알겠어?”장해진이 장소월의 곁을 지나친 뒤 향 세 개를 집어 불을 붙이고는 이마 앞에 올리고 세 번 연속 허리를 굽혔다.장소월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녀의 시선 속 차가운 전연우의 분위기는 그녀로 하여금 호흡을 내뱉는 것조차 힘들게 만들었다.그녀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친구와 분란을 일으키는 게 아니었어요.”장해진은 벽에 걸어두었던 대나무 가지를 잡아들고는 장소월의 앞으로 걸어가 그녀의 앞에 내리꽂았다.장소월은 겁에 질려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장해진의 목소리가 그녀의 머리 꼭대기에서 들려왔다.“계약 세 개에 18억, 내가 개인적으로 넣은 돈까지 합치면 도합 20억이야. 소월아, 오늘은 회초리를 드는 게 맞지 않겠어?”전연우의 뒤에 서 있던 백윤서는 너무나도 겁을 먹은 나머지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뒤로 몇 발자국 물러서 전연우의 뒤에 완전히 숨어버렸다.“맞습니다. 모두 다 저 소월이의 잘못입니다. 잠시 저 자신을 통제하지 못해 그들과 충돌을 일으켰습니다. 아버지께서 옳으십니다. 매를 드시겠다면 달 게 맞을게요.”“뒤 돌아!”장소월은 무릎을 움직여 몸을 돌렸다. 지금은 아무도 그녀를 구하지 못한다. 전연우?장소월은 종래로 그에게 기대를 했던 적이 없다.장해진이 손에 들고 있던 대나무를 높이 들어 올린 뒤 힘껏 휘둘렀다. 첫 번째, 그녀는 긴장감에 온몸이 경직돼 아픔을 느끼지 못했다. 두 번째
죽 한 그릇을 먹여주는데 무려 20분이나 걸렸다.소민아는 그에게 수면 촉진 성분이 들어있는 약을 가져다주었다. 신이랑이 침대에 누워 그녀의 손을 잡았다.“나랑 같이 있어 줘요. 안 가면 안 돼요?”소민아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알겠어요. 뭐든 이랑 씨가 몸을 다 회복한 다음 얘기해요.”옆에 앉아 신이랑이 잠드는 것을 지켜보던 중 핸드폰에 배터리가 없다는 것을 알아챈 그녀는 천천히 손을 빼냈다. 하지만 신이랑은 그녀의 움직임을 느끼기라도 했는지 불안한 얼굴로 다시 눈을 떴다. 소민아는 환자를 보살피는 게 이렇게까지 어려운 일인지는 정말 몰랐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침대에 엎드려 잠시 잠을 청했다.창밖에서 부슬부슬 내리던 비가 드디어 그쳤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돌연 불어온 차가운 바람에 그녀가 어깨를 움츠렸다.그때, 그녀의 귀에 미세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눈을 뜬 순간, 어둠 속에서 그림자 하나가 휙 지나갔다.“기성은 씨, 당신이에요?”대답이 들려오지 않자 소민아는 자신을 잡고 있던 신이랑의 손을 풀고는 바로 일어나 남자를 쫓아갔다. 그녀가 뒤에서 그를 끌어안은 순간 복도의 센서 등이 환하게 어둠을 밝혔다. 바깥 희미한 가로등 아래에선 차가운 바람이 불고 있었다.“제가 문자 그렇게 많이 보냈는데 왜 답장 안 했어요?”“이거 놔요.”“설명해주기 전엔 놓지 않을 거예요.”작게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에 기성은은 소민아의 손을 잡고 바로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소민아는 벽을 더듬어 조명을 켜려다 말했다.“따라와요.”이후 그녀는 옆쪽 간병인 방으로 그를 데려갔다. 그의 손가락을 만져보니 얼음처럼 차가웠다.“잠시만 기다려요. 제가 뜨거운 물 가져올게요.”소민아는 따뜻한 물을 가져온 뒤 그가 손으로 감싸게 하고는 그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갰다.“조금만 기다려요. 곧 따뜻해질 거예요.”두 사람은 함께 침대에 앉아 서로를 바라보았다. 눈앞에 분명 기성은이 살아 숨 쉬고 있었지만, 자신과 그사이에 커다란 벽이 있다는 느낌을
하지만 기성은은 못 본 척 시선을 피해버렸다.문이 닫힌 지 얼마 되지 않아 거의 숨이 끊어진 것 같은 사람이 병실에서 던져져 벽에 강하게 부딪혔다. 그 충격에 피를 한 움큼 토해냈다.소민아는 너무 놀라 들고 있던 음식까지 바닥에 떨어뜨렸다.“형님, 바깥에 사람이 있습니다.”“이런 우연이 있나. 오늘 아침 만났던 여자잖아.”소민아는 그들이 다가오자 빠르게 반응하며 말했다.“일부러 들으려고 한 건 아니에요. 그냥 지나가던 중이었어요.”적잖은 시선이 그녀의 몸을 아래위로 훑고 지나갔다. 그중 한 명이 말했다.“작두, 이 여자 누군지 알아?”작두라고 불리는 남자가 아래턱을 문지르며 걸어 나오고 있는 남자를 보며 말했다.“형님, 이년 어떻게 처리할까요? 대체 얼마나 들었는지 모르겠네요.”기성은은 검은색 가죽 신발을 신고 무거운 발걸음을 내디뎠다.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낯선 그의 모습에 소민아는 돌연 덜컥 겁이 났다.그녀는 어찌할 바를 몰라 자리에 굳어버렸다. 기성은은 소민아 앞에 걸어와 손가락으로 땅에 떨어진 음식 주머니를 줍고는 그녀에게 건네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입 간수 잘해요. 얼마를 들었든, 얼마를 보았든 한 글자라도 발설하면 그 후과 스스로 책임져야 할 거예요.”소민아는 머리를 푹 숙이고 다급히 대답했다.“네... 알겠어요.”기성은이 말했다.“너희 둘은 이곳에서 잘 지키고 있어.”“네, 형님.”“왜 계속 서 있어요? 안 가요?”소민아에게 하는 말이었다.소민아는 머리도 돌리지 않고 한 방향으로만 뛰어갔다. 얼마 후 병실에서 한 명이 더 나왔다.서철용이 담배 한 대를 손가락에 낀 채 말했다.“손이 너무 거치네요. 목숨이 간당간당해요. 죽이더라도 내 병원에서 죽이면 안 되죠.”소민아는 병실에 돌아와서도 얼이 빠진 채 멍하니 앉아있었다. 침대 쪽에서 인기척이 들려와서야 정신을 차리고 다가가 상황을 살폈다.신이랑은 언제 깨어났는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움직이지 말아요. 바늘이 빠지면 안 돼요.”새벽 12시, 복도의
간호사가 이마를 찌푸리며 말했다.“남자친구분 잘 지켜보셨어야죠. 링거액이 다 떨어졌잖아요. 지금 병원이 너무 바빠서 저희 간호사들도 병실 하나하나 다 신경 쓸 수는 없어요.”소민아가 미안함에 말했다.“서류를 가지러 회사에 다녀왔어요. 그런데... 저 이분 여자친구 아니고 비서예요.”간호사가 말했다.“환자분이 의식을 잃은 상태로 계속 가족분의 이름을 부르고 계세요. 얼른 가보세요. 환자분을 혼자 오래 두면 안 돼요.”소민아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네, 알겠어요.”소민아가 병실에 들어가 보니 신이랑은 눈을 뜨고 누워있었다. 그녀가 다급히 들고 있던 물건을 내려놓고 다가갔다.“이랑 씨, 깼어요? 몸은 좀 괜찮아졌어요?”신이랑은 흐릿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손을 뻗자 소민아는 얼른 그의 손을 잡아 이불 속에 넣어주었다.“푹 쉬어요. 제가 옆에 있으니까 불편한 게 있으면 부르고요.”“가, 가지 말아요.”그는 꽉 잡은 손을 좀처럼 놓지 않았다.“이랑 씨, 저 아직 처리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았어요. 내일 보내줘야 해요.”신이랑이 머물고 있는 곳은 VIP 병실이라 주방에 모든 시설들이 구비되어 있었다. 그녀는 전화로 죽 두 그릇을 주문한 뒤... 일에 열중하기 시작했다.저녁 10시, 신이랑의 체온은 많이 안정되었다. 본래 몸이 좋지 않긴 했지만, 이렇게 하룻밤 사이에 정신을 잃고 쓰러지기까지 하다니.소민아는 견딜 수 없을 정도의 배고픔이 느껴지고 나서야 자신이 아직 죽을 받아오지 않았다는 것이 떠올랐다.지금 시간엔 병원에도 사람이 별로 없을 것이다. VIP 병동은 무서울 정도로 으스스하고 고요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 보니 프런트에 놓은 음식은 이미 차갑게 식어 있었다.음식을 들고 다시 위로 올라가려고 엘리베이터 쪽으로 가던 중, 왼쪽 코너 쪽 병실에서 익숙한 사람의 모습이 그녀의 시선을 끌었다.기성은이 왜 여기에?소민아는 다시 핸드폰을 꺼내 확인했다. 병원에 왔으면서 왜 그녀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았단 말인가.
신이랑은 아무런 예고도 없이 그녀의 몸 위에 쓰러지고 말았다. 소민아는 몸을 뒤로 젖히며 그를 껴안았다. 그의 정상적이지 않은 체온을 느낀 그녀가 다급히 그의 이름을 불렀다.“신이랑 씨!”그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으니 소민아는 잠시 그를 부축해 소파에 눕힐 수밖에 없었다.“열이 왜 이렇게 나는 거예요?”소민아가 핸드폰을 켜고 구급차를 부르려 한 순간, 그 뜨거운 손이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생명줄이라도 되는 듯 힘껏 움켜쥐고 놓지 않았다.소민아는 통화를 마친 뒤 손을 뻗어 그의 이마에 가져갔다.“구급차가 곧 올 거예요. 조금만 참아요.”소민아는 착잡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조금 전 금방 들어왔을 때 그가 했던 말을 그녀는 모두 똑똑히 들었었다.자신을 좋아해 달라던 그 말까지도...소민아는 신이랑이 자신과 같은 사람을 좋아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신이랑처럼 좋은 사람은 응당 예쁘고 부드럽고 현숙한 주가은 같은 부잣집 아가씨와 어울린다고 생각했었다. 기성은에게 들은 바로는 신이랑의 신분도 실은 그리 간단하지만은 않다. 그의 가족들 또한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신이랑은 구급차에 앉아 함께 병원으로 들어갔다.신이랑은 열이 39도, 아니 40도까지 치솟아 올랐다.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결과가 어땠을지 상상도 하기 힘들었다.신이랑은 해열제 주사를 맞은 뒤 이어 링거를 꽂고 침대에서 깊이 잠들어 있었다. 그녀는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 옆에서 노트북으로 일을 하기 시작했다.소민아는 그렇게 하루종일 병원에서 그를 보살폈다. 저녁 여섯 시가 되니 배가 고파와 병원 슈퍼마켓으로 향했다. 그때, 여자보다 더 여자같이 생긴 하얀색 옷차림의 남자가 마스크를 하고 그녀의 옆으로 스쳐 지나갔다.소민아는 의아함에 천천히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그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어디에선가 본 것처럼 익숙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하지만 지금 바로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다.그녀는 내려갔던 김에 서류를 가지러 다시 회사에 돌아갔다. 신이랑이
소민아는 기성은의 팔짱을 끼고 친밀하게 손을 잡고는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갔다.“오늘 어디에 가는 거예요? 언제 돌아와요? 퇴근할 때 저 픽업할 수 있어요?”기성은이 대답했다.“상황 봐서요. 매일 오늘처럼 한가한 건 아니거든요.”소민아가 불만이 가득 섞인 표정으로 말했다.“기성은 씨 이젠 회사에도 안 나가잖아요. 대체 뭐 하느라 그렇게 바쁜 거예요? 어제 저랑 사귀어보겠다고 했잖아요. 그럼 절 첫 순위에 올려놓아야 하는 거 아닌가요? 아니면 솔직히 말해봐요. 뭘 하러 가는 건지!”그가 하는 일은 대부분 사람들에게 알려져서는 안 되는 것이다. 하여 당연히 그녀에게 알려줄 수 없었다.대표님이 의식불명으로 누워계시니 그 또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송시아는 회사를 통째로 집어삼키려 움직이기 시작했다. 때문에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눈앞의 일을 최대한 빨리 처리하는 것이다.그에게 있어 소민아는 부담이고 약점일 뿐이다. 어떤 말은 솔직히 말할 수 없으니 그저 그녀의 열정이 자연적으로 꺼져갈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민아 씨 앞가림이나 잘해요.”기성은이 결국 뱉어낸 말은 그 한 마디였다.지금은 출근 시간이라 차가 꽤 막혔다. 소민아는 선명히 뾰로통해진 얼굴로 손에 요구르트를 들고 앉아있었다.이번 생에 기성은이 그녀를 달래주는 날이 오긴 할까.그들은 출근 시간 10분을 남겨두고 성세 그룹 맞은편에 도착했다. 회사에 뛰어 들어간다면 3분이면 충분히 출근 도장을 찍을 수 있다.“아직도 뭘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기성은이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린 순간, 소민아가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 그의 입가에 키스했다.“일 끝나면 전화해요. 성은 씨가 절 데리러 오든, 제가 성은 씨한테 가든 같이 있어요, 우리.”기성은은 그 키스에 깜짝 놀라 자리에서 굳어버렸다.소민아는 안전벨트를 풀고 바람을 맞받아 몸을 움츠리고 회사 안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시간 맞춰 도착해 지각은 하지 않았다.소민아가 뒤돌아보니 기성은은 아직 그 자리에
침대에서 뒹구는 법이라곤 없는 기성은은 그녀가 계속 잠을 청하려 하자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소민아가 단번에 그를 끌어당겨 침대에 눕혔다.“아직 여섯 시밖에 안 됐단 말이에요. 출근 시간까지 한 시간이 넘게 남았어요. 조금 더 자요.”“소민아 씨!”기성은은 이렇게까지 머리 아프게 만드는 사람은 종래로 만나본 적이 없다. 소민아가 강제로 기성은의 팔을 끌어당겨 팔베개를 시켰다.기성은의 차가운 목소리가 내려앉았다.“남녀가 유별하다는 말 몰라요? 소민아 씨, 선 지켜요.”소민아는 눈을 감고 태연하게 그의 말을 받아쳤다.“이봐요, 아저씨. 지금이 조선 시대인 줄 알아요? 어떻게 그렇게 보수적일 수가 있어요? 여자친구 사겨본 적 있기는 해요?”기성은은 도저히 팔을 빼낼 수가 없었다.“내가 못해본 것 같아요?”소민아가 몸을 돌려 그와 눈을 맞추었다.“그 주가은 씨랑은 어떤 사이에요? 정장은 왜 벗어준 거예요? 추워 보여서 그랬어요?”소민아가 손가락으로 총 모양을 만들어 그의 이마에 가져갔다.“얼른 솔직히 말해봐요. 주가은 씨랑 대체 무슨 관계인 거예요? 어젯밤... 기성은 씨 만나러 집에 왔었어요. 제가 우리 두 사람이 사귀기로 했다니까 얼굴이 확 어두워져서 돌아갔고요.”소민아는 자세히 그의 얼굴 표정을 살폈다. 더 캐묻지도, 화를 내지도 않는 것이 별다른 느낌이 없는 듯했다.그가 말하려 하지 않자 소민아가 말을 이어갔다.“연애할 줄 모르겠으면 제가 가르쳐줄게요. 가장 중요한 건 성실해야 한다는 거예요. 빨리 얘기해요.”기성은이 은하수를 담은 듯 반짝거리는 그녀의 눈동자를 피하며 말했다.“주가은은 서울시 시장 딸이에요. 얼마 전 주지웅이 주가은을 대표님에게 소개해주려고 저녁 식사 자리를 만들었는데 대표님이 못 가게 되셔서 내가 대신 갔었어요.”“그날 엘리베이터에서 주가은의 뇌전증이 발작했고, 내가 마침 거기에 있어서 도와줬었죠.”너무 조용하다는 생각에 내려다보니 소민아는 어느새 또다시 잠들어 있었다.기성은이 천천히 팔을 빼내고 침대에
“제 아빠는 데릴사위였어요. 부모님 두 분 모두 과학자여서 매일 연구원에서만 지냈어요. 그래서 전 태어나자마자 고모 댁에 보내졌죠. 엄마아빠의 유전자를 이어받아서인지 별로 노력을 들이지 않고도 서울대에 입학했어요...”소민아의 말이 채 끝나지 않았을 때 옆에 놓아두었던 핸드폰이 진동했다. 신이랑이 걸어온 전화였다.“이랑 씨도 오겠다고 했던 걸 깜빡했어요. 잠깐만 기다려요. 전화 받고 올게요.”기성은이 깊은 눈동자로 아직 그녀의 온기가 남아있는 의자를 바라보았다. 그의 과거는...암흑 그 자체이다.그는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몰랐다. 그가 살았던 곳은 음산하고 차디찬 지하실이었다. 그곳에선... 명령에 따라 앞뒤 가리지 않고 손에 칼을 들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그야말로 나라의 관리가 손닿지 않는 혼란의 세상이었다.누군가 그랬다. 어머니는 기생이고, 아버지는... 마약범이라고. 하여 그는 태어난 뒤 바로 버려졌고, 그래서 이름도 없는 거라고...그의 머릿속 첫 기억은 음습하기 그지없는 시궁창이었다.그때의 참담한 경험이 지금 그의 모습을 만들었다. 모든 사람들이 그를 아무 감정 없는 기계 같다고 입을 모아 말한다...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은 그와는 전혀 상관없는 것이었다.그의 인생을 바꿔준 한 사람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말이다.바로 전연우다!당시 기성은은 변경에서 마약 거래를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전연우를 만났고, 그가 다치고 베이고 수많은 죽을 고비를 넘기며 기성은을 변경 시궁창에서 빼냈다.전연우가 말했다.“나한테 목숨 빚졌으니까 앞으로 나 따라다녀.”“네.”“지금 이름은 너한테 어울리지 않아. 앞으로는 기성은이라고 바꿔.”“네.”...소민아는 신이랑과 함께 설영우를 만나 일정을 조율하고 계약서까지 작성했다.일을 끝내고 나니 날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차갑게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소민아가 신이랑을 아파트 아래까지 배웅한 뒤 걸음을 멈추었다.“왜요?”신이랑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소민아는 숨기지 않고 말했다.
“현실에 부합되지도 않는 쓸데없는 상상하지 말아요. 소민아 씨한테 어울리는 사람은 신이랑이에요. 가서 일이나 열심히 해요, 내 체면 떨어뜨리지 말고.”결과야 어찌 됐든 소민아는 기성은이 키워온 사람이다.소민아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정말 저한테 하고 싶은 말 없어요? 마지막으로 물을게요. 정말 없어요?”“저에 대한 이랑 씨 마음 저도 알고 있어요. 하지만... 난...”“기성은 씨를 좋아한단 말이에요!”문밖에 서 있던 설영우가 호기심이 가득 담긴 표정으로 들어왔다.“어머나, 형한테도 드디어 봄이 왔네요. 여자한테 고백을 다 받다니요!”소민아는 얼마나 어렵게 용기를 내어 그 말을 내뱉었는지 모른다. 한 달 내내 찾아다녔던 소설 작가가 지금 이 순간 기성은에게 형이라고 부르며 나타날 줄이야.“꺼져.”설영우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소민아 씨, 전 이만 갈게요. 형과 얘기 끝나면 문자 주세요. 바로 올라올게요.”소민아는 솔직하고 좋고 싫음이 분명한 사람이다. 실은 그녀 또한 알지 못했다. 대체 왜 하필이면 성격도 나쁜 그 사람에게 마음을 빼앗기게 되었는지 말이다.얼굴이 조금 반반한 것 외엔 별다른 장점도 없다.“제가 방금 했던 말 들었어요?”기성은이 말했다.“소민아 씨 같은 귀찮은 사람이랑 사귀어서 나한테 좋은 게 뭔데요? 아까 내가 했던 말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모양이네요.”기성은이 와인 냉장고로 걸어가 와인을 한 병 꺼냈다. 그를 따라 소민아의 시선도 옮겨졌다.소민아가 그의 뒤를 쫓아가며 말했다.“하지만 좋아하는 사람한테 진심을 고백해야 맞는 거 아닌가요? 저도 제가 충동적이라는 거 알아요. 하지만 저에게도 눈이 있고 생각이라는 게 있어요. 나더러 신이랑에게 붙어있으라는 거 날 보호하기 위해 한 말이라는 게 느껴진다고요. 기성은 씨도 날 좋아하잖아요. 그런데 왜 자꾸 절 밀어내려고만 해요? 정말 이해가 안 돼요.”기성은이 말했다.“정말 황당한 생각이네요. 이용가치가 떨어진 물건을 더 남겨서 뭘 하겠어요?”기성은이 고개를
기성은이 다급히 셔츠를 몸에 걸쳤다.“누가 마음대로 들어오라고 했어요! 나가요!”소민아는 순간 하려던 말까지 잊어버렸다. 그녀는 겁에 질린 얼굴로 문밖으로 나와 손으로 가슴을 짓누르며 크게 심호흡했다. 머릿속에 기성은의 몸에 덕지덕지 새겨진 흉터들이 떠올랐다.기성은은 대표님의 비서가 아니었던가?비서에게 어떻게 저렇게 많은 상처가 생길 수가 있지?또한 모두 칼에 찔린 자상이었다. 지금 이 시대에 누가 칼을 휘두르고 다닌단 말인가.대체... 그는 무슨 일을 겪었던 걸까.기성은은 욕실에서 거울로 자신을 비추어 보았다. 오래전부터 지금까지 일어났던 모든 일이 머릿속에 생생하게 떠올랐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 눈 깜빡할 사이에 10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어떤 일은 뇌 속에 박혀버린 것처럼 한번 또 한 번 반복적으로 재생되어 그로 하여금 끊임없이 떠올리게 만들었다.기성은이 깨끗한 잠옷으로 갈아입고 욕실에서 나왔다. 아직 집에 남아있는 소민아를 향해 그가 차갑게 입을 열었다.“언제까지 있을 생각이에요?”소민아가 주방에서 젓가락 두 쌍을 가져오며 아무 일도 없었던 듯 태연한 표정으로 말했다.“식자재는 기성은 씨가 사긴 했지만 음식을 만든 건 저예요. 기성은 씨를 기다리느라 저도 한 입도 못 먹었어요. 아무리 그래도... 손님한테 밥은 먹이고 보내야 하지 않겠어요? 그리고 기성은 씨를 만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회사 일 때문에 이곳에 온 거예요. 마침 같은 아파트에 제가 맡은 소설 작가님이 살고 계시거든요. 그분이 집에 돌아오시면 드라마 제작 세부 사항에 관해 상의해야 해요.”“가서 침대 옆에 있는 핸드폰 가져와요.”소민아는 말없이 그의 말대로 핸드폰을 가져다주었다. 그녀의 시선이 기성은의 헐렁한 옷소매 안으로 드러난 상처에 닿았다. 그녀는 깜짝 놀랐다. 왜 지금까지 한 번도 그의 손목에 이토록 깊은 흉터가 있다는 걸 알지 못했단 말인가.“...지금 이쪽으로 와.”그 한마디 말을 끝으로 기성은은 전화를 끊었다.“설영우 곧 올 거예요.”소민아의 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