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실 안.비서는 회의실에서 방금 보고한 일을 계속 보고하였다. 한 글자도 빠짐없이 모든 보고를 마쳤다.장소월을 제외한 모든 당사자가 자리에 있었다.“... 도련님, 그때 발생한 일은 이러합니다.”강영수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비서는 한쪽으로 물러났다.순간 분위기가 차가워졌다.소파에 앉아있는 세 명의 사모님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있었다.강영수는 강한 포스를 뿜고 있어 공기 속 보이지 않는 무형의 위압력으로 모든 사람을 짓눌렀다. 주변의 공기마저 희박하게 느껴졌다.“반 시간, 위의 계약서에 사인이 적혀 있는 걸 난 봐야겠어.”“네, 대표님.”그는 강영수의 새 비서 신준수이다.그러하다. 강영수가 집을 나서기로 결심한 순간, 그는 그의 소유였던 모든 것들을 되찾기로 결심했다.그래야만 그는 그녀를 보호할 수 있다.모든 사람들은 입을 열지 못하고 가만히 있었다. 분명 회사일인데 강영수가 왜 그녀들을 찾아왔는지 알 수가 없다. 그녀들은 사모님일 뿐, 회사 일은 그녀들이 관리하지 않는다.이때 누군가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강영수 도련님, 회사일은 제가 운영하지 않지만... 왜 갑자기 협업을 해제하는 지알 수 있을까요?”“이건 당신이 물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니야.”강영수는 차갑게 말 한마디 남기고 사무실을 떠났다.이것은 해외에서 새로 개발한 과학 기술 휠체어로, 버튼을 누르면 휠체어가 자동으로 움직일 수 있다.원래대로라면 지금 강영수는 병원에서 수술을 받아야 하는데... 그녀가 괴롭힘을 당했다는 걸 듣고...지체 없이 바로 왔다.사무실 밖, 강영수는 여자의 울음소리를 들었다.안에서 하염없이 울고 있는 그녀를 바라보았다.회의실 문이 닫히지 않았던 터라, 강영수는 안으로 들어갔고 장소월은 아직 그를 발견하지 못했다.“왜 울어?”오늘 그의 목소리는 유난히 부드러웠다.코를 훌쩍이며 흐느끼는 소리가 뚝 그쳤고 깃털 같은 속눈썹에는 눈물방울이 맺혔다. 눈은 촉촉하게 젖어 있었고 그녀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 다가온 그를 멍
“네, 대표님...”기성은은 전화를 끊지 않고 휴대폰을 바로 주머니에 넣었다.전연우는 주방으로 걸어가 물 한잔을 부었다. 전화를 끊으려고 하는데 갑자기... 휴대폰 너머로 장소월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그녀를 제외하고, 다른 남자가 있었다...“더 이상 누구도 널 괴롭히지 않을 거야... 울지 마...”그의 손은 따뜻했다.그리고 그녀도 마음도, 점점 따뜻해졌다.그는 처음으로 그녀에게 이런 말을 건네준 사람이다.전연우는 종래로 그녀가 슬플 때 위로를 해주지 않는다. 오히려 그녀의 울음소리에 마음이 심란해진다고 저 멀리 가서 울라고 한다.“혹시... 기대도 돼?”장소월의 목소리는 떨렸다.강영수는 입가에 살짝 미소를 띠고 그녀를 향해 두 손을 뻗었다.“언제 어디서나 기꺼이.”하여 기성은이 들어올 때 장소월이 한 남자의 품에 안겨서 울고 있는 걸 목격했다...이를 본 기성은은 진퇴양난으로 어찌해야 할지 몰라하였다.전연우는 울음소리를 듣고 눈빛이 어두워졌다.…장소월의 얼굴에 약을 발랐고 손에 약봉지를 들고 있었는데, 그가 사다 준 것이다.이번이 그들의 세 번째 만남인데, 상대방을 끌어안고 울어 그의 가슴 쪽 옷을 적셔버렸다. 더욱 수치스러운 것은 바로 그녀의 콧물이다....이 일 외에 장소월은 매 맞는 걸 피하지 못한다는 걸 눈치챘기에...그녀는 기성은에게 드라이브를 부탁했다.차 안에서 장소월이 물었다.“오늘 일을 아버지가 알게 될까요?”기성은은 백미러를 통해 그녀를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소월 아가씨, 만약 섭섭한 일이 있으시면 대표님한테 얘기하세요. 겉으로는 신경 쓰지 않는 척 하지만, 추후에 소월 아가씨 대신 일 처리를 진행할 거예요.”장소월은 차 안에 앉아 해변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지금 서울시와 명주시의 경계에 있다.그녀의 방에 그림이 걸려있는데 바로 이곳을 그린 것이다. 엄마가 그린 그림이다...“... 그냥 귀찮게 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요. 평소에... 이미 많이 바쁘시잖아요.”“기 비서님, 이
장소월은 차디찬 타일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녀는 얼굴에 있는 손톱에 긁힌 상처를 타일에 비추어 보았다. 손으로 조심스레 만지니 온몸을 파고드는 듯한 통증이 퍼져나갔다.서재에는 은은한 향이 풍기고 있었는데 숨을 크게 들이쉬니 코를 찌르는 자극에 얼굴이 찌푸려졌다.그때, 문밖에서 점점 가까워지는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곧바로 허리를 곧게 펴고 긴장감에 옷깃을 꼭 부여잡고는 자신에게 내려질 벌을 기다렸다.얼마 지나지 않아 방문이 열렸고 장해진이 걸어들어왔다. 전연우와 백윤서도 그 뒤를 따랐다.“네가 오늘 뭘 잘못했는지 알겠어?”장해진이 장소월의 곁을 지나친 뒤 향 세 개를 집어 불을 붙이고는 이마 앞에 올리고 세 번 연속 허리를 굽혔다.장소월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녀의 시선 속 차가운 전연우의 분위기는 그녀로 하여금 호흡을 내뱉는 것조차 힘들게 만들었다.그녀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친구와 분란을 일으키는 게 아니었어요.”장해진은 벽에 걸어두었던 대나무 가지를 잡아들고는 장소월의 앞으로 걸어가 그녀의 앞에 내리꽂았다.장소월은 겁에 질려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장해진의 목소리가 그녀의 머리 꼭대기에서 들려왔다.“계약 세 개에 18억, 내가 개인적으로 넣은 돈까지 합치면 도합 20억이야. 소월아, 오늘은 회초리를 드는 게 맞지 않겠어?”전연우의 뒤에 서 있던 백윤서는 너무나도 겁을 먹은 나머지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뒤로 몇 발자국 물러서 전연우의 뒤에 완전히 숨어버렸다.“맞습니다. 모두 다 저 소월이의 잘못입니다. 잠시 저 자신을 통제하지 못해 그들과 충돌을 일으켰습니다. 아버지께서 옳으십니다. 매를 드시겠다면 달 게 맞을게요.”“뒤 돌아!”장소월은 무릎을 움직여 몸을 돌렸다. 지금은 아무도 그녀를 구하지 못한다. 전연우?장소월은 종래로 그에게 기대를 했던 적이 없다.장해진이 손에 들고 있던 대나무를 높이 들어 올린 뒤 힘껏 휘둘렀다. 첫 번째, 그녀는 긴장감에 온몸이 경직돼 아픔을 느끼지 못했다. 두 번째
장소월이 힘겹게 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때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아주머니가 곧바로 그녀에게 다가갔다.“아가씨... 괜찮아요?”장소월이 창백해진 얼굴로 말했다.“난... 난 괜찮아요. 걱정하지 마세요. 이모, 혹시 진통제 있으세요?”그녀의 목소리는 점점 더 가늘어졌다. 간신히 마지막 글자까지 내뱉은 그녀는 정신을 잃고 바닥에 풀썩 주저앉아 버렸다.구석에 숨어 그 광경을 지켜보던 강만옥은 장소월이 쓰러진 순간 몸을 돌려 아래층으로 내려갔다.그녀는 장소월의 등 뒤에 나 있는 상처를 똑똑히 보았다. 아버지가 딸에게 어떻게 저렇게 지독하게 할 수 있단 말인가.다음 날, 장소월이 잠에서 깨어났을 땐 이미 점심시간이 되어있었다.엎드려 누우니 등에서 저릿함이 느껴졌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공기 중에 드러난 등을 힐끗 보고는 이불을 당겨 등을 덮으려 했다. 그때 누군가 이불을 잡아당겼다.“움직이지 마. 약 발라주고 있잖아.”장소월은 화들짝 놀라며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이어 다급히 이불로 감싸고 몸을 일으켜 앉았다.“여긴 내 방이야! 왜 허락도 없이 들어와!”그녀가 처음으로 벌컥 화를 내며 그에게 말했다.전연우의 한 손엔 하얀색 연고가 들려있었고 다른 한 손 손가락엔 아직 다 쓰지 못한 연고가 발라져 있었다.“오빠라고 안 해?”“전연우, 난 오빠의 동생이야! 옷도 입지 않고 있는 내게 어떻게!”그는 봤을 것이다. 틀림없이 봤을 것이다!벽에 걸린 시계는 1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 시간엔 아주머니는 보통 반찬거리를 사러 시장에 나간다. 장해진은 손님 접대를 하거나 출장을 나갔을 것이다. 또한 오늘은 휴일이 아니니 집에 아무도 없다는 걸 알고 이렇게 함부로 행동하는 것이다.“소월아, 너 말하는 태도가 왜 그래?”장소월은 저도 모르게 그의 말에 반박했다.“내 태도가 어때서? 난 이제 어린아이가 아니야. 마음대로 내 방에 들어오지 마.”전연우가 불만스러운 듯 이마를 찌푸리고 차가운 눈으로 장소월을 쳐다보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방문을 나
전연우가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강만옥이 케이크를 사 들고 들어왔다. 그녀는 장소월의 상처를 힐끗 살피고 마음에도 없는 걱정의 말 몇 마디 하고는 방으로 돌아갔다.장소월은 진통제를 먹었음에도 통증이 너무 심해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끊임없이 악몽에 시달려 식은땀에 온몸이 흠뻑 젖었지만 엎드린 채 몸을 움직일 수도 없어 잠을 자는 걸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시간이 길어지니 가슴에서까지 통증이 느껴져 밑에 베개를 가져다 놓았다.그녀는 이제 18살밖에 되지 않았으니 너무 풍만한 것도 마냥 좋은 일만은 아니다.시계를 보니 아직 3시 반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장소월은 침대에서 일어나 화장실에 들어갔다. 그녀는 단추를 풀고 옷을 벗은 뒤 가로세로 처참하게 그어져 있는 상처를 살펴보았다. 다른 곳은 조금 붉게 부어올라 있었는데 어제에 비해선 많이 회복된 것 같았다.조금 전 식은땀을 흘린 데다 날씨까지 무더우니 꿉꿉함 때문에 견딜 수가 없었다. 하여 그녀는 상처를 피해 간단히 샤워했다.잠옷을 갈아입은 뒤 베란다에 나가서 시원한 바람에 몸을 맡겼다.오늘 밤의 달은 유난히 밝았다.맞은편 별장 3층은 불이 꺼져있는 상태였다. 장소월은 이미 오랜 시간 동안 그를 보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예전엔 희미한 뒷모습이라도 보였건만, 지금은 대체 어디에 갔을까.그저 그가 다시는 나쁜 생각을 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강남 병원.수술 시작부터 끝날 때까지 장장 여섯 시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강영수는 전신 마취 때문에 아직 의식을 찾지 못했고 두 다리는 붕대로 감아져 있었다.왕 집사가 물었다.“선생님, 저희 도련님의 상태는 어떤가요?”주치의가 대답했다.“현재 상황으로 봐선 수술은 성공적입니다. 하지만 수술 뒤 후유증에 대한 위험을 배제할 수 없으니 한동안은 병원에 입원해 지켜봐야 합니다.”“그럼... 회복되는 데는 얼마나 걸릴까요?”“환자의 몸 상태로 봐선 완전히 회복하려면 아마 3, 5년 정도는 걸릴 것 같아요. 꽤 긴 시간이긴 하지만 수술에
장소월은 두 다리를 감싸 안은 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핸드폰에 시선을 고정하고 눈만 깜빡거리고 있었다.잠시 고민한 뒤 지극히 일반적인 걱정스러운 문자를 보냈다.「뜨거운 물 많이 마시고 푹 쉬어. 약 먹는 것도 잊지 말고.」「알았어.」「일찍 자. 잘 자.」「너도 잘 자.」사실 지금 다시 생각해 보니 그녀와 강영수도 굳이 만날 필요는 없는 것 같았다.처음부터 장소월은 그저 단순히 그를 구하고 싶었을 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었다.그 이유는... 그녀는 늘 이곳을 떠나 새로운 삶을 살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앞으론 아마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이곳을 떠나야만 장씨 가문으로부터, 송시아로부터 벗어나 오로지 그녀만의 삶을 살아 나갈 수 있다. 강영수는 그녀의 계획 내 사람이 아니다. 그와 더 깊은 관계로 발전한다면 오히려 마지막엔 부담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장소월이 길게 하품했다. 그녀는 방에 돌아가 침대에 누워 앞으로의 아름다운 일상을 그리며 잠이 들었다.집에서 며칠 휴식을 취하니 상처는 거의 회복되었다.아침, 장소월이 아직 꿈나라에서 헤매고 있을 때 누군가 그녀의 방문을 두드렸다.“아가씨, 이만 일어나 내려와서 식사하세요.”장소월이 희미한 정신을 부여잡고 말했다.“조금만 더 잘게요.”“아가씨 한 명만 빼고 모두 모이셨어요. 어서 내려와요.”그 말을 들은 장소월은 정신이 번쩍 들었는지 곧바로 이불을 박차고 일어났다.“알겠어요. 금방 내려갈게요.”옷을 껴입고 세수를 마치기까지 1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그녀는 허리를 짚고 빠른 걸음으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사람들이 밥상 옆에 질서정연하게 앉아있었다. 전연우와 백윤서도 와있었다.오늘은 주말이라 백윤서는 회사에 나가지 않았다.무겁게 가라앉은 분위기에 장소월은 더는 가까이 가고 싶지 않았다. 그날 그녀가 전연우를 오해해 화를 낸 이후 며칠이 지났음에도 전연우는 여전히 그녀를 없는 사람 취급했다.그녀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애써 옮겨 강만옥의 옆자
“너 지금 내 말에 반기를 드는 거야?”장해진의 눈썹이 깊게 찌푸려졌다.장소월이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는 듯 말했다.“먼저 말을 바꾼 건 아빠잖아요. 아빠... 전 이제 어른이에요. 뭐든 다 아빠 마음대로 결정하는 건 아니지 않아요? 전 아빠의 꼭두각시가 아니에요.”“틀렸어!”장해진이 손에 쥐고 있던 젓가락을 밥상 위에 내려놓았다.“나한테 이렇게 맞서라고 널 키운 줄 알아? 지금 누가 널 먹여 살리고 있는지 잊으면 안 돼! 내 말대로 하지 않겠으면 내가 번 돈 한 푼도 쓰지 마!”장소월의 눈까풀이 파르르 떨려왔다.“그럼 이 집에 살지 않고, 아빠의 돈 한 푼도 쓰지 않는다면 제 일에 정말 간섭하지 않으시겠어요?”“기고만장이 하늘을 찌르는구나! 저번 매를 맞은 거로 모자라? 죽고 싶으면 계속 그렇게 반항해!”장해진이 화를 벌컥 내며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띠를 풀었다.그가 장소월에게 이렇게까지 크게 화를 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강만옥이 다급히 그를 막았다.“이러지 말아요. 소월인 그저 홧김에 마음에도 없는 말을 뱉은 것뿐이에요. 걱정하지 말아요... 내가 잘 타이를게요. 소월아, 얼른 아빠한테 죄송하다고 말씀드려!”장소월이 말했다.“제가 왜 그래야 하죠? 그냥 절 때려죽이세요! 제가 왜 사사건건 꼭두각시 인형처럼 아빠의 말대로 행동해야 하는 건데요!”“너 뭐라고 했어? 다시 한번 말해봐!”장해진이 손에 움켜쥔 허리띠를 휘두르려고 한 순간 강만옥이 중간에 끼어들어 겨우 그를 막아 세웠다.아주머니가 황급히 장소월을 타일렀다.“아가씨, 그만 해요. 어르신은 다 아가씨를 위하는 마음에 이러시는 거잖아요.”“날 위한다고요? 항상 날 위한다고 하면서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건 해준 적이 없어요. 대체 어떤 아버지가 이럴 수 있어요? 엄마가 아직 계셨다면 난 절대 그토록 멍청하게 행동하지 않았을 거예요.”장해진이 걸어와 힘껏 그녀의 뺨이 내리쳤다.“네 엄마는 간사하고 천박한 쓰레기 년이야. 그 배에서 태어난 널 목
아마 어딘가의 구석에 숨어있을 것이다.하지만 그때, 백윤서가 커다란 화물차 앞에 서 있는 사람을 가리켰다.“오빠, 소월이에요.”전연우가 속도를 늦추었다. 정체불명의 차에 오르고 있는 장소월의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세상에. 어떻게 모르는 사람의 차에 올라탈 수 있어요? 설마 무슨 일이 생기는 건 아니겠죠? 우리 신고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전연우가 의미를 알 수 없는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괜찮아. 상관할 필요 없어.”“정말 이렇게 놔둔다고요?”전연우는 운전에만 집중할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화물차는 빠르게 달려 그들의 시선 속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백윤서는 차의 속도가 뚜렷하게 빨라지고 있음을 느끼고는 살짝 겁이 나 전연우에게 속도를 늦추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가 화물차를 쫓고 있다는 생각에 참을 수밖에 없었다.그들이 십자로에 도착했을 때 신호등이 빨간불로 바뀌었다. 전연우는 아랑곳하지 않고 액셀을 밟아 계속하여 달렸다. 하지만 코너를 돌고 나니 화물차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오빠... 우리 놓쳤어요. 이제 어떻게 해요?”백윤서가 당황스러운 얼굴로 전연우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너무나도 차가워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오싹하게 만들기까지 했다.‘장소월, 너 도대체 무슨 짓을 벌이려는 거야!’...장소월은 백미러로 전연우의 차를 성공적으로 따돌렸음을 확인했다.그녀는 이번 기회에 전연우에게 자신은 한다면 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려주고 싶었다.백윤서의 일로 그녀는 이미 상처를 받았다. 또다시 괴롭힌다면 그 아픔은 견디기 어려울 만큼 불어날 것이다.그녀를 태워준 사람은 물건을 운송하는 기사님이었는데 그의 아내와 함께였다.두 사람은 모두 정이 넘치는 착한 사람들이었다.장소월이 아버지와 싸우고 어머니를 찾으러 간다는 말을 듣자 곧바로 그녀를 차에 태웠다.40여 분 뒤, 장소월은 한 낡은 건물 앞에 도착했다.그들 부부와 작별 인사를 마친 후 그녀는 기억을 더듬으며 십자로를 건넜다. 지하에서 풍겨오는 오
배은란은 희미하게 의식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정신을 잃기 전 일들을 떠올리며 그녀는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고마워. 근데 나 배 안 고파.”그녀는 정말로 조금의 배고픔도 느껴지지 않았다. 또한 더는 서철용의 도움을 받고 싶지도 않았다.서철용은 여전히 같은 자세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이미 장 선생에게 장기 기증자를 알아봐 달라고 했어. 서민용 안 죽어. 오히려 지금은 네가 문제야. 이러다가는 그놈보다 먼저 저세상에 가게 될 수도 있어.”“그놈이 죽으면 넌 죽도록 슬퍼하겠지. 하지만 네가 먼저 죽으면, 그놈은 어떤 반응을 보일 것 같아?”배은란은 여전히 입술을 깨물고 있었지만, 눈빛은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내가 알아서 먹을게.”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밥그릇을 잡으려 팔을 뻗었다.하지만 손가락 끝이 그릇에 닿은 순간, 너무 뜨거워 화들짝 놀랐다.다행히 서철용이 재빨리 그릇을 잡아채 죽이 침대 시트에 쏟아지는 불상사는 막을 수 있었다.“입 벌려.” 서철용이 명령했다.배은란은 머뭇거리다가 결국 입술을 움직였다.천천히 죽을 한 숟가락씩 삼키자 억눌렸던 허기가 밀려왔다.그제야 배은란은 자신이 얼마나 오랫동안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했는지 깨달았다.“네가 이렇게 네 몸을 엉망으로 망치면, 서민용이 네가 안쓰러워서라도 깨어날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서철용이 조롱 섞인 목소리로 비꼬며 말했다.배은란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그녀는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변명하듯 중얼거렸다.“그런 거 아니야. 그저 며칠 동안 너무 바빠서 깜빡했을 뿐이야...”서철용은 밥그릇을 내려놓았다.“밥 먹는 것조차 잊어버리는 정신으로 대체 무슨 수로 서민용을 돌보겠다는 거야?”배은란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전에도 잘해왔어. 다만 요즘은 마음이 너무 불안해서 그래...”그녀는 말끝을 흐리며 자신도 모르게 깨끗이 비워진 그릇을 쳐다보았다. 배가 너무 고파 조금 더 먹고 싶었다.서철용은 그런 그녀의 속마음을 단번에 알아차렸다.“조금 있다가 다시 먹어
그를 몇 초 동안 뚫어지게 바라보던 배은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민용 씨? 당신이 어떻게...” 서민용이 일어서 걷고 있었다! 이런 서민용의 모습을 본 게 언제였던가! 가득 피어오른 흥분감에 배은란은 또다시 눈물이 왈칵 차올라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서민용은 천천히 그녀 곁으로 다가와 부드럽게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점점 더 울보가 되어가네. 울지 마. 네가 우는 거 보고 싶지 않아.” 배은란은 힘껏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손을 꽉 잡았다. 그가 혹시라도 사라져 버릴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서민용은 오히려 웃으며 그녀 곁에 앉았다. “미안해. 늘 당신 힘들게 해서.” 배은란은 간신히 울음을 참으며 말했다. “아니야. 당신만 옆에 있다면, 난 늘 행복해.” 서민용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너 거짓말할 때 티 난다는 거 거 알아?”배은란은 부인하고 싶었지만,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서민용의 눈빛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자.” 서민용은 그녀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배은란도 순순히 그를 따라 일어섰다. 그가 어디로 가는지,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조심스럽게 그의 뒤를 따라갔다.서민용은 일부러 걸음을 늦춰 그녀가 따라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녀와 나란히 걸었다. “너 산책하는 거 좋아했잖아. 예전 회사 다닐 때 몰래 빠져나가서 바람 쐬던 거 기억나.” 과거 이야기를 꺼내니 배은란의 머릿속에 그때의 추억이 떠올랐다. 서민용은 그녀의 손을 잡고 오랫동안 걸으며 예전 추억들을 귓가에 속삭여주었다.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을 때 서민용이 발걸음을 멈췄다. “기분 좀 나아졌어?” 배은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에 어렴풋한 불안감이 느껴져 그의 손을 힘껏 붙잡았다.서민용은 그녀를 안심시키듯 웃으며 말했다. “나 어디도 안 가. 배가 좀 고프네. 넌 여기 앉아서 쉬고 있어. 내가 뭐 좀 사 올게.”너무나도 진실된 그의 미소에 배은란은 넋이 나간 사람처럼 손을 놓고 말았다. 길가 벤치
“민용 씨... 민용 씨, 나 이제 어떻게 해야 해...”그녀는 고개를 들어 창밖을 바라보았다. 순간 강한 햇빛이 눈에 쏟아져 들어와 정신을 잃고 쓰러져버렸다.쿵 하는 소리에 서철용이 몸을 돌렸다. 창백한 얼굴로 바닥에 쓰러져 있는 배은란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배은란?”그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그는 곧바로 달려가 그녀를 안아 들었다.“심각한 영양실조입니다. 적어도 사흘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은 것 같아요.”검사를 마친 후, 주치의가 말했다.서철용 또한 흰 가운을 입고 침대 옆에 서 있었다. 준수한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그는 배은란의 모든 검사 과정에 참여했다.그녀의 몸 상태를 파악하고 나니 서철용은 더 이상 화를 낼 마음이 들지 않았다.반송장 같은 사람 때문에 자신을 이렇게까지 망가뜨린 것이다.조금만 늦게 발견했더라면, 그녀가 서민용보다 먼저 갔을지도 모른다!“서 선생님...”주치의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서철용은 그를 힐끗 쳐다보고는 몸을 돌려 병실을 나섰다.그는 복도에 나와 조심스럽게 병실 문을 닫고 나서야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일이야?”“마음을 바꾸셨습니까?” 주치의가 물었다.그는 명확하게 말하지 않았지만, 무엇을 묻고 있는지 서철용은 알고 있었다.서철용은 병실 문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다른 방법 없잖아? 모두 살거나, 모두 죽거나 둘 중 하나잖아. 배은란은 지금 목숨을 담보로 날 압박하고 있어.”눈앞에 있는 이 사람은 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하는 천재 의사다. 모든 면에서 자신보다 훨씬 뛰어난 이 사람에게 주치의는 연민을 느끼고 있었다.“저와 서 선생님은 모두 의사입니다. 서 선생님은 저보다 더 잘 아실 겁니다. 이 치료는 정말 무의미한 것이라는 걸요.”서철용은 손을 들어 그의 말을 제지했다.“장기 이식 알아봐. 무슨 수를 써서라도.”서민용이 살고 싶어 한다면, 전신 모든 장기 이식을 진행해야 한다.수술이 성공한다 해도, 그저 신체
복도를 따라 걷고 또 걸어 마침내 끝에 다다랐다.서철용은 창가에 멈춰 섰고, 뒤따르던 발걸음 소리 역시 멎었다.어느샌가 주치의는 자리를 비켜 둘만의 공간을 만들어 주었다.“줄곧 내 곁에 있었던 거지? 내가 당신 찾고 있다는 거 뻔히 알면서 왜 나타나지 않았던 거야? 전화는 왜 계속 받지 않은 건데?”배은란의 감정은 차츰 가라앉았지만, 눈동자는 여전히 파도처럼 일렁이고 있었다.서철용은 몸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은 그늘에 잠겨 어딘가 음울해 보였다.“그 답이 너한테 그렇게 중요해?”배은란은 미간을 찌푸렸다.서철용은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서민용 말고 너에게 소중한 건 없어?” 그날 그는 도우미 아주머니에게 전화를 받고 빌라로 달려가 창백한 얼굴을 한 소망이를 본 순간 마음이 무너져내리는 듯했다. 배은란은 온통 서민용에게만 신경을 쏟을 뿐, 두 아이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모두 그가 보살피며 키운 아이들이었기에, 아무리 배은란을 사랑한다고 해도 불만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책망 어린 그의 말에 배은란의 눈빛이 흔들렸다. “난... 민용 씨 상태가 어떤지 당신도 알고 있잖아. 정말 다른 데에 관심을 가질 여력이 없어...”서철용은 미간을 찌푸렸다. 순간 서민용이 정말 그렇게나 소중한 존재인지 따져 묻고 싶어졌다. 하지만 그동안 그녀가 겪었던 절망을 떠올린 순간 마음속으로 답을 내렸다. 그는 씁쓸함에 입술을 비틀었다.서철용의 질책에 배은란의 가슴에 끓어올랐던 분노가 죄다 죄책감으로 변해버렸다.하지만 여전히 서민용의 처지는 잊지 않았다. “제발 부탁이야. 민용 씨를 다시 한 번만 살려줘. 그 사람이 깨어나면 네가 시키는 건 뭐든지 할게.” 서철용은 그녀를 꿰뚫어 보는 듯 바라보며 물었다. “뭐든지? 예전처럼 나랑 살기라도 할 거야?”배은란의 얼굴에 거부감이 스쳤다. 하지만 잠시 침묵한 후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람이 모르게만 한다면.” 그녀에게는 자신보다 서민용의 목숨이 더 중요했다. 그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온 건 그녀가 기대했던 목소리가 아니었다. “배은란 씨, 저예요. 죄송해요. 혹시 주무시는 걸 깨운 건 아닌가요?” 장소월의 말에는 미안함이 가득했다. 배은란은 발신자 번호를 다시 확인하고서야 장소월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니에요. 마침 일어나려던 참이었어요. 무슨 일로 전화하셨어요? 혹시 철용 씨 소식 있나요?” 장소월은 왜 그녀가 이토록 애타게 서철용을 찾으려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서 선생님은 최근 해외로 나가신 것 같아요. 저도 연락이 안 돼요. 혹시 급한 일이 있으시면 제가 도와드릴 수도 있어요.” 서철용이 해외로 나갔다는 말을 들은 순간, 배은란은 마음속에 거대한 절망감이 내려앉았다. “저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그 사람뿐이에요.” 그 말에 장소월은 말문이 막혀버렸다. “최대한 연락해 볼게요.” 배은란은 감사 인사를 전하며 그녀에게 물었다. “저한테는 무슨 일로 전화하셨어요?” 장소월이 물었다. “저희 혹시 예전에 아는 사이였나요? 저를 아시는 것 같은데, 저는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아서요.”배은란의 표정이 굳어버렸다. 장소월의 반응은 그녀가 최면에 걸렸던 시절을 떠올리게 했다. 하지만 당시 그녀는 단지 서철용을 서민용으로 착각했을 뿐,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어쩌면 그녀가 쓸데없는 생각을 한 것일 수도 있다. 또한 그녀는 지금 다른 사람의 일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멀리서 두 번 정도 뵌 적이 있어요. 기억 못 하시는 것도 당연해요.” 장소월은 아, 하고 짧게 대답했다. 어딘가 조금 실망한 듯했다. 배은란은 잠시 망설이다가 그녀에게 물었다. “그때 전 대표님과 사이가 안 좋아 보였는데, 지금은 화해하신 건가요? 소월 씨한테 잘 해주시나요?” 장소월은 웃으며 대답했다.“네. 지금은 저한테 너무 잘 해줘요.”배은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네요. 두 분 행복하시길 바라요. 그리고 혹시 서철용 씨를 찾으시면 꼭 저에게 연락해 주세요.” 장소월도 웃으며 말했다.“배
중환자실 안.서민용은 생기를 잃은 채 침대에 누워있었다.서철용은 무균복으로 완전 무장한 채 옆문으로 들어왔다.병실 침대에 누워있는 서민용을 보며, 그는 비웃듯 입술을 말아 올렸다.“서민용, 너 정말 잔인하구나.”“눈 좀 뜨고 봐봐. 배은란이 너 때문에 자신을 얼마나 망가뜨렸는지. 너 그 여자 사랑한다고 했잖아. 네 사랑하는 방식은 고작 이런 거야?”“내가 널 살리려고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지, 배은란이 널 낫게 하려고 얼마나 헌신했는지 알기나 해? 대체 무슨 낯으로 이 꼴로 누워있는 거야? 이 세상에 너보다 이기적인 사람은 없을 거야!”침대에 누워있는 남자의 호흡은 여전히 평온했고, 동공에는 어떤 움직임도 없었다.서철용의 시선이 천천히 모니터링 기기들을 지나 침대 머리맡의 심전도 기기에 닿았다.“너 다 듣고 있다는 거 알아.”“넌 지금 그 여자에게 짐이 될까 봐 두려워하고 있잖아. 하지만... 네가 죽으면 그 여자는 너 따라 죽을 수도 있어. 그건 왜 두려워하지 않는 거야? 내가 왜 그 여자 네 곁으로 보냈다고 생각해? 지난번 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 여자는 널 따라가겠다고 했어! 네가 살아있다는 것을 몰랐더라면, 아마 너보다 먼저 저세상에 가 있었을 거야!”서철용은 한 마디 한 마디 이를 악물고 뱉어냈다.시선은 심전도 기기에서 서민용의 얼굴로 다시 돌아갔다.잠시 서민용을 도와 그의 숨통을 끊고 싶다는 충동이 느껴졌다!차라리 배은란에게 다시 최면을 걸어 평생 서민용을 기억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지금 이토록 자신을 괴롭히는 것보단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서민용, 너 대체 원하는 게 뭐야! 이렇게 죽어서 배은란에게 평생 기억되고 싶은 거야?”“똑똑히 말해 줄게. 너 죽으면, 나는 즉시 배은란에게 최면을 걸어 영원히 너라는 사람을 지워버릴 거야. 네 바람은 절대 이루어지지 않아!”서민용은 그의 말에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서철용은 포기하지 않고 심전도 기기를 뚫어지라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래프의 선은 규칙적으로 오르내릴
“선생님, 민용 씨 어떻게 됐나요?” 의사는 눈에 띄지 않게 멀리 서 있는 사람을 힐끗 쳐다봤다. 남자는 그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말없이 자리를 떠났다. 그제야 주치의는 배은란에게 말했다. “살려냈습니다. 다만 제가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환자 본인에게 삶에 대한 의지가 별로 없습니다. 수술은 그저 생명을 유지하기만 할 뿐입니다. 나머지는 환자 스스로에게 달렸습니다.”살았다는 말에 배은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후 조심스럽게 의사에게 물었다. “그럼... 민용 씨는 얼마나 더 기다릴 수 있을까요? 만약 서철용 선생님을 찾을 수 있다면요.” 주치의는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그녀를 몇 초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 질문 대한 제 답은 조금 전과 같습니다. 얼마나 기다릴 수 있을지는, 전적으로 환자분의 의지에 달려 있습니다.” 배은란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씁쓸하게 고개를 숙였다. 주치의는 잠시 침묵하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이런 말씀 드려도 될지 모르겠지만... 가족분도 아셔야 합니다. 환자분은 지금 돌아가신 것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요.” “아니에요.” 배은란은 무의식적으로 반박했다. 주치의는 안타까운 듯 고개를 저었다. 더 이상 설득하면 안 될 것 같았다. “오늘 밤은 중환자실에서 경과를 지켜볼 겁니다. 일찍 쉬세요.”서민용이 중환자실에 있는데, 배은란이 어떻게 잠들 수 있겠는가? 그녀는 중환자실 복도에 앉아, 창문을 통해 침대에 누워있는 서민용을 바라보았다.분명 그녀가 줄곧 옆에서 보살펴주었음에도, 서민용은 너무나 야위어 마치 종잇장 같았다. 고요한 침묵 속에서, 그녀의 휴대폰이 울렸다. 배은란의 눈에 한 줄기 희망이 피어올랐다. 휴대폰을 꺼내 집에서 걸려온 전화라는 걸 확인한 순간, 그녀의 눈에 깃들었던 희망이 죄책감으로 변해버렸다. “엄마, 어디에요? 아빠도 없고, 둘이 놀러 간 거예요?”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왔다. 배은란은 마음이 저릿해졌다. 아이들을 마
배은란이 병원에 돌아왔을 때는 이미 캄캄한 밤이 되어있었다. 기진맥진한 몸을 이끌고 병실 문 앞으로 걸어간 그녀는, 한참 동안 자리에 서서 감정을 추스른 후에야 미소를 지으며 문을 열었다. 설령 서민용이 지금 의식을 잃고 혼수상태에 있다고 해도, 만신창이가 된 모습으로 는 그와 만나고 싶지 않았다. “민용 씨, 나 왔어...” 그 순간, 텅 비어 있는 병실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배은란의 눈동자에 공포가 스쳐 지나갔다. “민용 씨, 민용 씨!” 몇 초간 마음을 가다듬은 뒤에야 겨우 다리에 힘이 들어갔다. 그녀는 비틀거리며 병실 밖으로 뛰쳐나가 의사를 찾았다. 하지만 사무실 안에도 아무도 없었다. 배은란은 너무 당황한 나머지 한참 동안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그녀는 마지막 희망을 품고 응급실 쪽으로 달려갔다. 응급실에는 빨간 등이 켜져 있었고, 문은 굳게 닫혀 있었으며, 복도는 무섭게 조용하기만 했다. 그 광경에 배은란은 눈앞이 아찔해지고 다리에 힘이 풀려 의자에 풀썩 주저앉았다.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서민용이 저 안에서 사경을 헤매고 있음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간호사 한 명이 복도를 지나갔다. 배은란은 절망적인 심정으로 그녀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317호 병실 환자 저 안에 있나요?” 간호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환자분 보호자시죠? 여기에 서명해 주세요.” 배은란의 심장이 멎는 듯했다. 엄청난 공포감에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고, 구역질까지 날 것 같았다. “제가 그 사람 와이프입니다.” 그녀는 불편함을 애써 참으며 간호사가 건네주는 종이와 펜을 떨리는 손으로 받아들고 한 글자 한 글자 꼼꼼히 읽어 내려갔다. 눈물이 한 방울 한 방울 종이 위에 떨어졌다.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방해가 될까 봐, 배은란은 소리도 내지 못하고 입을 틀어막은 채 온몸이 떨릴 정도로 흐느꼈다. “환자분은 아직 치료 중이세요. 모든 가능성이 다 존재하는 상황입니다.” 간호사는 너무나 슬퍼하는 그녀를 위
“서 대표님은 자리에 안 계십니다. 급한 일이 있으시면 전화로 연락해 보십시오.” 안내 데스크에서 용건을 설명하자 돌아온 대답은 그러했다. 믿을 수 없는 말에 배은란의 동공이 흔들렸다. “그럼 언제 돌아오는데요? 여기서 기다릴게요!”직원은 미소를 지으며 단호히 말했다.“죄송하지만, 그건 대표님의 사생활이라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저는 그 사람의...” 다급한 마음에 배은란은 자기도 모르게 ‘형수’라고 말할 뻔했다. 하지만 순간 회사 사람들이 그녀와 서철용 사이의 일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을 거란 생각이 뇌리에 스쳤다. 하여 입 밖으로 내뱉으려던 말을 다시 삼켜버렸다. “여기 잠깐 앉아 있어도 될까요?” 그녀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직원은 정중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따뜻한 차를 내어주었다. 배은란은 회사에서 계속 서철용을 기다렸지만, 퇴근 시간인 오후 5시가 되도록 그의 그림자조차 볼 수 없었다. 직원이 다시 따뜻한 물을 가져다주었다. 배은란은 고개를 들어 애써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오후 내내 폐를 끼쳤네요. 혹시 서철용 씨가 돌아오면 꼭 저에게 연락해 주세요. 여기 제 연락처입니다.” 그녀는 자신의 번호를 적고 지친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퇴근 시간이라 교통 체증이 심했고, 한참을 기다린 후에야 겨우 택시를 잡을 수 있었다. “어디로 모실까요?” 택시 기사가 그녀에게 물었다. 배은란은 잠시 침묵하다가, 서씨 본가 주소를 불렀다. 택시는 천천히 출발했다. 배은란은 뒷좌석에 앉아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낯선 풍경을 바라보았다. 마음속에 비통함이 내려앉았다. 그녀는 서철용과 오랫동안 뒤섞여 지냈었다. 하지만 연락이 끊겨버리니 그를 어디에서 찾아야 할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그녀가 알고 있는 곳이라곤 회사와 서씨 본가, 두 곳이 전부였다. 서철용이 본가에 드나드는지조차 알 수 없었지만, 그저 운에 맡길 수밖에 없었다. 서씨 본가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날이 어두워져 있었다. 배은란은 두려움에 한참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