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월은 차디찬 타일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녀는 얼굴에 있는 손톱에 긁힌 상처를 타일에 비추어 보았다. 손으로 조심스레 만지니 온몸을 파고드는 듯한 통증이 퍼져나갔다.서재에는 은은한 향이 풍기고 있었는데 숨을 크게 들이쉬니 코를 찌르는 자극에 얼굴이 찌푸려졌다.그때, 문밖에서 점점 가까워지는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곧바로 허리를 곧게 펴고 긴장감에 옷깃을 꼭 부여잡고는 자신에게 내려질 벌을 기다렸다.얼마 지나지 않아 방문이 열렸고 장해진이 걸어들어왔다. 전연우와 백윤서도 그 뒤를 따랐다.“네가 오늘 뭘 잘못했는지 알겠어?”장해진이 장소월의 곁을 지나친 뒤 향 세 개를 집어 불을 붙이고는 이마 앞에 올리고 세 번 연속 허리를 굽혔다.장소월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녀의 시선 속 차가운 전연우의 분위기는 그녀로 하여금 호흡을 내뱉는 것조차 힘들게 만들었다.그녀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친구와 분란을 일으키는 게 아니었어요.”장해진은 벽에 걸어두었던 대나무 가지를 잡아들고는 장소월의 앞으로 걸어가 그녀의 앞에 내리꽂았다.장소월은 겁에 질려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장해진의 목소리가 그녀의 머리 꼭대기에서 들려왔다.“계약 세 개에 18억, 내가 개인적으로 넣은 돈까지 합치면 도합 20억이야. 소월아, 오늘은 회초리를 드는 게 맞지 않겠어?”전연우의 뒤에 서 있던 백윤서는 너무나도 겁을 먹은 나머지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뒤로 몇 발자국 물러서 전연우의 뒤에 완전히 숨어버렸다.“맞습니다. 모두 다 저 소월이의 잘못입니다. 잠시 저 자신을 통제하지 못해 그들과 충돌을 일으켰습니다. 아버지께서 옳으십니다. 매를 드시겠다면 달 게 맞을게요.”“뒤 돌아!”장소월은 무릎을 움직여 몸을 돌렸다. 지금은 아무도 그녀를 구하지 못한다. 전연우?장소월은 종래로 그에게 기대를 했던 적이 없다.장해진이 손에 들고 있던 대나무를 높이 들어 올린 뒤 힘껏 휘둘렀다. 첫 번째, 그녀는 긴장감에 온몸이 경직돼 아픔을 느끼지 못했다. 두 번째
장소월이 힘겹게 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때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아주머니가 곧바로 그녀에게 다가갔다.“아가씨... 괜찮아요?”장소월이 창백해진 얼굴로 말했다.“난... 난 괜찮아요. 걱정하지 마세요. 이모, 혹시 진통제 있으세요?”그녀의 목소리는 점점 더 가늘어졌다. 간신히 마지막 글자까지 내뱉은 그녀는 정신을 잃고 바닥에 풀썩 주저앉아 버렸다.구석에 숨어 그 광경을 지켜보던 강만옥은 장소월이 쓰러진 순간 몸을 돌려 아래층으로 내려갔다.그녀는 장소월의 등 뒤에 나 있는 상처를 똑똑히 보았다. 아버지가 딸에게 어떻게 저렇게 지독하게 할 수 있단 말인가.다음 날, 장소월이 잠에서 깨어났을 땐 이미 점심시간이 되어있었다.엎드려 누우니 등에서 저릿함이 느껴졌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공기 중에 드러난 등을 힐끗 보고는 이불을 당겨 등을 덮으려 했다. 그때 누군가 이불을 잡아당겼다.“움직이지 마. 약 발라주고 있잖아.”장소월은 화들짝 놀라며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이어 다급히 이불로 감싸고 몸을 일으켜 앉았다.“여긴 내 방이야! 왜 허락도 없이 들어와!”그녀가 처음으로 벌컥 화를 내며 그에게 말했다.전연우의 한 손엔 하얀색 연고가 들려있었고 다른 한 손 손가락엔 아직 다 쓰지 못한 연고가 발라져 있었다.“오빠라고 안 해?”“전연우, 난 오빠의 동생이야! 옷도 입지 않고 있는 내게 어떻게!”그는 봤을 것이다. 틀림없이 봤을 것이다!벽에 걸린 시계는 1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 시간엔 아주머니는 보통 반찬거리를 사러 시장에 나간다. 장해진은 손님 접대를 하거나 출장을 나갔을 것이다. 또한 오늘은 휴일이 아니니 집에 아무도 없다는 걸 알고 이렇게 함부로 행동하는 것이다.“소월아, 너 말하는 태도가 왜 그래?”장소월은 저도 모르게 그의 말에 반박했다.“내 태도가 어때서? 난 이제 어린아이가 아니야. 마음대로 내 방에 들어오지 마.”전연우가 불만스러운 듯 이마를 찌푸리고 차가운 눈으로 장소월을 쳐다보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방문을 나
전연우가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강만옥이 케이크를 사 들고 들어왔다. 그녀는 장소월의 상처를 힐끗 살피고 마음에도 없는 걱정의 말 몇 마디 하고는 방으로 돌아갔다.장소월은 진통제를 먹었음에도 통증이 너무 심해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끊임없이 악몽에 시달려 식은땀에 온몸이 흠뻑 젖었지만 엎드린 채 몸을 움직일 수도 없어 잠을 자는 걸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시간이 길어지니 가슴에서까지 통증이 느껴져 밑에 베개를 가져다 놓았다.그녀는 이제 18살밖에 되지 않았으니 너무 풍만한 것도 마냥 좋은 일만은 아니다.시계를 보니 아직 3시 반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장소월은 침대에서 일어나 화장실에 들어갔다. 그녀는 단추를 풀고 옷을 벗은 뒤 가로세로 처참하게 그어져 있는 상처를 살펴보았다. 다른 곳은 조금 붉게 부어올라 있었는데 어제에 비해선 많이 회복된 것 같았다.조금 전 식은땀을 흘린 데다 날씨까지 무더우니 꿉꿉함 때문에 견딜 수가 없었다. 하여 그녀는 상처를 피해 간단히 샤워했다.잠옷을 갈아입은 뒤 베란다에 나가서 시원한 바람에 몸을 맡겼다.오늘 밤의 달은 유난히 밝았다.맞은편 별장 3층은 불이 꺼져있는 상태였다. 장소월은 이미 오랜 시간 동안 그를 보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예전엔 희미한 뒷모습이라도 보였건만, 지금은 대체 어디에 갔을까.그저 그가 다시는 나쁜 생각을 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강남 병원.수술 시작부터 끝날 때까지 장장 여섯 시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강영수는 전신 마취 때문에 아직 의식을 찾지 못했고 두 다리는 붕대로 감아져 있었다.왕 집사가 물었다.“선생님, 저희 도련님의 상태는 어떤가요?”주치의가 대답했다.“현재 상황으로 봐선 수술은 성공적입니다. 하지만 수술 뒤 후유증에 대한 위험을 배제할 수 없으니 한동안은 병원에 입원해 지켜봐야 합니다.”“그럼... 회복되는 데는 얼마나 걸릴까요?”“환자의 몸 상태로 봐선 완전히 회복하려면 아마 3, 5년 정도는 걸릴 것 같아요. 꽤 긴 시간이긴 하지만 수술에
장소월은 두 다리를 감싸 안은 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핸드폰에 시선을 고정하고 눈만 깜빡거리고 있었다.잠시 고민한 뒤 지극히 일반적인 걱정스러운 문자를 보냈다.「뜨거운 물 많이 마시고 푹 쉬어. 약 먹는 것도 잊지 말고.」「알았어.」「일찍 자. 잘 자.」「너도 잘 자.」사실 지금 다시 생각해 보니 그녀와 강영수도 굳이 만날 필요는 없는 것 같았다.처음부터 장소월은 그저 단순히 그를 구하고 싶었을 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었다.그 이유는... 그녀는 늘 이곳을 떠나 새로운 삶을 살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앞으론 아마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이곳을 떠나야만 장씨 가문으로부터, 송시아로부터 벗어나 오로지 그녀만의 삶을 살아 나갈 수 있다. 강영수는 그녀의 계획 내 사람이 아니다. 그와 더 깊은 관계로 발전한다면 오히려 마지막엔 부담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장소월이 길게 하품했다. 그녀는 방에 돌아가 침대에 누워 앞으로의 아름다운 일상을 그리며 잠이 들었다.집에서 며칠 휴식을 취하니 상처는 거의 회복되었다.아침, 장소월이 아직 꿈나라에서 헤매고 있을 때 누군가 그녀의 방문을 두드렸다.“아가씨, 이만 일어나 내려와서 식사하세요.”장소월이 희미한 정신을 부여잡고 말했다.“조금만 더 잘게요.”“아가씨 한 명만 빼고 모두 모이셨어요. 어서 내려와요.”그 말을 들은 장소월은 정신이 번쩍 들었는지 곧바로 이불을 박차고 일어났다.“알겠어요. 금방 내려갈게요.”옷을 껴입고 세수를 마치기까지 1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그녀는 허리를 짚고 빠른 걸음으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사람들이 밥상 옆에 질서정연하게 앉아있었다. 전연우와 백윤서도 와있었다.오늘은 주말이라 백윤서는 회사에 나가지 않았다.무겁게 가라앉은 분위기에 장소월은 더는 가까이 가고 싶지 않았다. 그날 그녀가 전연우를 오해해 화를 낸 이후 며칠이 지났음에도 전연우는 여전히 그녀를 없는 사람 취급했다.그녀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애써 옮겨 강만옥의 옆자
“너 지금 내 말에 반기를 드는 거야?”장해진의 눈썹이 깊게 찌푸려졌다.장소월이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는 듯 말했다.“먼저 말을 바꾼 건 아빠잖아요. 아빠... 전 이제 어른이에요. 뭐든 다 아빠 마음대로 결정하는 건 아니지 않아요? 전 아빠의 꼭두각시가 아니에요.”“틀렸어!”장해진이 손에 쥐고 있던 젓가락을 밥상 위에 내려놓았다.“나한테 이렇게 맞서라고 널 키운 줄 알아? 지금 누가 널 먹여 살리고 있는지 잊으면 안 돼! 내 말대로 하지 않겠으면 내가 번 돈 한 푼도 쓰지 마!”장소월의 눈까풀이 파르르 떨려왔다.“그럼 이 집에 살지 않고, 아빠의 돈 한 푼도 쓰지 않는다면 제 일에 정말 간섭하지 않으시겠어요?”“기고만장이 하늘을 찌르는구나! 저번 매를 맞은 거로 모자라? 죽고 싶으면 계속 그렇게 반항해!”장해진이 화를 벌컥 내며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띠를 풀었다.그가 장소월에게 이렇게까지 크게 화를 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강만옥이 다급히 그를 막았다.“이러지 말아요. 소월인 그저 홧김에 마음에도 없는 말을 뱉은 것뿐이에요. 걱정하지 말아요... 내가 잘 타이를게요. 소월아, 얼른 아빠한테 죄송하다고 말씀드려!”장소월이 말했다.“제가 왜 그래야 하죠? 그냥 절 때려죽이세요! 제가 왜 사사건건 꼭두각시 인형처럼 아빠의 말대로 행동해야 하는 건데요!”“너 뭐라고 했어? 다시 한번 말해봐!”장해진이 손에 움켜쥔 허리띠를 휘두르려고 한 순간 강만옥이 중간에 끼어들어 겨우 그를 막아 세웠다.아주머니가 황급히 장소월을 타일렀다.“아가씨, 그만 해요. 어르신은 다 아가씨를 위하는 마음에 이러시는 거잖아요.”“날 위한다고요? 항상 날 위한다고 하면서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건 해준 적이 없어요. 대체 어떤 아버지가 이럴 수 있어요? 엄마가 아직 계셨다면 난 절대 그토록 멍청하게 행동하지 않았을 거예요.”장해진이 걸어와 힘껏 그녀의 뺨이 내리쳤다.“네 엄마는 간사하고 천박한 쓰레기 년이야. 그 배에서 태어난 널 목
아마 어딘가의 구석에 숨어있을 것이다.하지만 그때, 백윤서가 커다란 화물차 앞에 서 있는 사람을 가리켰다.“오빠, 소월이에요.”전연우가 속도를 늦추었다. 정체불명의 차에 오르고 있는 장소월의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세상에. 어떻게 모르는 사람의 차에 올라탈 수 있어요? 설마 무슨 일이 생기는 건 아니겠죠? 우리 신고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전연우가 의미를 알 수 없는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괜찮아. 상관할 필요 없어.”“정말 이렇게 놔둔다고요?”전연우는 운전에만 집중할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화물차는 빠르게 달려 그들의 시선 속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백윤서는 차의 속도가 뚜렷하게 빨라지고 있음을 느끼고는 살짝 겁이 나 전연우에게 속도를 늦추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가 화물차를 쫓고 있다는 생각에 참을 수밖에 없었다.그들이 십자로에 도착했을 때 신호등이 빨간불로 바뀌었다. 전연우는 아랑곳하지 않고 액셀을 밟아 계속하여 달렸다. 하지만 코너를 돌고 나니 화물차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오빠... 우리 놓쳤어요. 이제 어떻게 해요?”백윤서가 당황스러운 얼굴로 전연우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너무나도 차가워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오싹하게 만들기까지 했다.‘장소월, 너 도대체 무슨 짓을 벌이려는 거야!’...장소월은 백미러로 전연우의 차를 성공적으로 따돌렸음을 확인했다.그녀는 이번 기회에 전연우에게 자신은 한다면 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려주고 싶었다.백윤서의 일로 그녀는 이미 상처를 받았다. 또다시 괴롭힌다면 그 아픔은 견디기 어려울 만큼 불어날 것이다.그녀를 태워준 사람은 물건을 운송하는 기사님이었는데 그의 아내와 함께였다.두 사람은 모두 정이 넘치는 착한 사람들이었다.장소월이 아버지와 싸우고 어머니를 찾으러 간다는 말을 듣자 곧바로 그녀를 차에 태웠다.40여 분 뒤, 장소월은 한 낡은 건물 앞에 도착했다.그들 부부와 작별 인사를 마친 후 그녀는 기억을 더듬으며 십자로를 건넜다. 지하에서 풍겨오는 오
이곳은 오 아주머니가 밖에서 세를 맡아 살고 있는 월세 몇십만 원 정도 하는 집이었다.남쪽을 향하고 있어 채광은 아주 좋았다. 만약 오 아주머니의 이 방이 없었다면 그녀는 정말 길가에 나앉았을 수도 있다.이번은 두 번째로 이곳에 오는 것이었는데 첫 번째는 전연우가 몰래 백윤서에게 공주 원피스를 사준 것 때문에 왔었다.그는 종래로 그녀에게 사준 적이 없다.그녀가 발견한 뒤 난리를 피우며 자신에게도 사달라 요구했지만 전연우는 더더욱 그녀에게 윽박질렀었다.공주가 어떻게 그런 억울함을 견뎌내겠는가.장소월은 화가 나 홧김에 집을 나가버렸다.그때가 바로 처음 가출한 날이었다. 그녀가 백윤서의 치마를 갈기갈기 찢어버린 탓에 전연우가 그녀를 달래지 않고 화를 냈기 때문이었다.오 아주머니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분노에 씩씩거리고 있는 그녀를 데리고 이곳에 왔었다.당시 그녀는 이곳 지저분한 환경에 적응하지 못해 결국 집으로 돌아갔다. 상류사회의 삶에 너무나도 익숙해져 있었으니 말이다.아주머니가 말을 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절대 이곳을 찾지 못할 것이다.이것도 나쁘지 않다. 대학 졸업은 못 하겠지만 밖에 나가 돈을 벌며 살면 되는 것 아니겠는가.장소월은 걸레에 물을 묻혀 먼지가 앉은 책상을 닦아내고 침대 시트를 간 다음 바깥 화분에 물을 주었다.일을 마친 뒤 그녀는 아주머니의 옷을 들고 샤워를 하러 화장실로 들어갔다.상처에 물이 닿으니 또다시 통증에 얼굴이 찌푸려졌다. 이곳엔 뜨거운 물이 없어 찬물로 씻을 수밖에 없었다.이어 그녀는 누렇게 색이 바랬지만 깨끗한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닦아냈다.장씨 집안을 떠나니 지금까지 맛보지 못했던 자유가 느껴졌다.침대에 누운 지 얼마 되지 않아 저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깨어났을 땐 이미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배에선 끊임없이 꾸르륵 꾸르륵 소리가 새어 나왔다.그녀는 침대에서 일어나 면을 삶은 뒤 간단히 간장에 비벼 먹었다.상황이 이렇게까지 되었음에도 장소월은 힘들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배를 채울 먹을
“역시 난 이모가 제일 좋아요!”장소월이 방긋 웃으며 앞으로 걸어가 오 아주머니를 껴안았다.그러고는 기대에 찬 얼굴로 그녀의 손에 들려있는 도시락을 받아안고 작은 밥상 옆에 자리 잡고 앉았다.“편히 잘 살면 되지 왜 뛰쳐나왔어요? 어르신과 도련님이 모두 걱정하고 있다는 거 모르는 거예요? 오늘 밤에만 여기에서 자고 내일은 돌아가요.”“날 설득할 필요 없어요. 돌아가지 않을 테니까요. 그들의 눈엔 난 아무런 소용도 없는 사람이니 걱정하지도 않을 거예요.”아주머니는 싱크대에 놓여있는 냄비와 간장을 발견했다. 그녀가 없으니 저토록 간략하게 먹은 것이다.고귀하신 아가씨가 왜 이런 고초를 겪어야 한단 말인가.오 아주머니는 가슴이 아파졌다. 어릴 적부터 그녀가 성장하는 과정을 모두 지켜봤으니 자신의 딸과도 같아 마음이 저릿해진 것이다.“아가씨, 점심으로 이걸 먹은 거예요?”장소월이 허겁지겁 탕수육을 집어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집에 반찬거리가 없어 면을 삶아 먹었어요. 간장을 너무 많이 나서 좀 짜더라고요. 그리고... 이모, 이 간장 변한 거 아닌가요? 먹을 때 맛이 좀 이상하던데.”오 아주머니는 장소월에게 다가가 손가락으로 이마를 살짝 밀며 말했다.“유통기한도 안 봤어요? 먹고 배탈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그래요. 이제 먹지 말아요. 내일 내가 집에 데려다줄 테니까 어르신한테 죄송하다고 말씀드리세요. 그러면 이번 일은 별 탈 없이 넘어갈 거예요.”장소월이 움직이던 젓가락을 멈추고 단호히 말했다.“전 이미 돌아가지 않겠다고 말했어요. 계속 가라고 등을 떠민다면 지금 바로 이 집에서 나가겠어요.”그녀가 젓가락을 내려놓고 문밖을 향해 걸어갔다.아주머니는 다급히 일어서 그녀를 막아 세웠다.“돌아가지 않으면 어떻게 할 건데요? 설마 평생 이런 보잘것없는 곳에서 살려고요?”“왜 안 되는데요?”“이런 어지럽고 낡은 곳이 뭐가 좋다고요. 아가씨, 제 말 들으세요. 우리 함께 돌아가요, 네?”“이곳이 뭐가 어때서요? 이모까지 절 내쫓으면 전 정말 갈
죽 한 그릇을 먹여주는데 무려 20분이나 걸렸다.소민아는 그에게 수면 촉진 성분이 들어있는 약을 가져다주었다. 신이랑이 침대에 누워 그녀의 손을 잡았다.“나랑 같이 있어 줘요. 안 가면 안 돼요?”소민아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알겠어요. 뭐든 이랑 씨가 몸을 다 회복한 다음 얘기해요.”옆에 앉아 신이랑이 잠드는 것을 지켜보던 중 핸드폰에 배터리가 없다는 것을 알아챈 그녀는 천천히 손을 빼냈다. 하지만 신이랑은 그녀의 움직임을 느끼기라도 했는지 불안한 얼굴로 다시 눈을 떴다. 소민아는 환자를 보살피는 게 이렇게까지 어려운 일인지는 정말 몰랐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침대에 엎드려 잠시 잠을 청했다.창밖에서 부슬부슬 내리던 비가 드디어 그쳤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돌연 불어온 차가운 바람에 그녀가 어깨를 움츠렸다.그때, 그녀의 귀에 미세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눈을 뜬 순간, 어둠 속에서 그림자 하나가 휙 지나갔다.“기성은 씨, 당신이에요?”대답이 들려오지 않자 소민아는 자신을 잡고 있던 신이랑의 손을 풀고는 바로 일어나 남자를 쫓아갔다. 그녀가 뒤에서 그를 끌어안은 순간 복도의 센서 등이 환하게 어둠을 밝혔다. 바깥 희미한 가로등 아래에선 차가운 바람이 불고 있었다.“제가 문자 그렇게 많이 보냈는데 왜 답장 안 했어요?”“이거 놔요.”“설명해주기 전엔 놓지 않을 거예요.”작게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에 기성은은 소민아의 손을 잡고 바로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소민아는 벽을 더듬어 조명을 켜려다 말했다.“따라와요.”이후 그녀는 옆쪽 간병인 방으로 그를 데려갔다. 그의 손가락을 만져보니 얼음처럼 차가웠다.“잠시만 기다려요. 제가 뜨거운 물 가져올게요.”소민아는 따뜻한 물을 가져온 뒤 그가 손으로 감싸게 하고는 그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갰다.“조금만 기다려요. 곧 따뜻해질 거예요.”두 사람은 함께 침대에 앉아 서로를 바라보았다. 눈앞에 분명 기성은이 살아 숨 쉬고 있었지만, 자신과 그사이에 커다란 벽이 있다는 느낌을
하지만 기성은은 못 본 척 시선을 피해버렸다.문이 닫힌 지 얼마 되지 않아 거의 숨이 끊어진 것 같은 사람이 병실에서 던져져 벽에 강하게 부딪혔다. 그 충격에 피를 한 움큼 토해냈다.소민아는 너무 놀라 들고 있던 음식까지 바닥에 떨어뜨렸다.“형님, 바깥에 사람이 있습니다.”“이런 우연이 있나. 오늘 아침 만났던 여자잖아.”소민아는 그들이 다가오자 빠르게 반응하며 말했다.“일부러 들으려고 한 건 아니에요. 그냥 지나가던 중이었어요.”적잖은 시선이 그녀의 몸을 아래위로 훑고 지나갔다. 그중 한 명이 말했다.“작두, 이 여자 누군지 알아?”작두라고 불리는 남자가 아래턱을 문지르며 걸어 나오고 있는 남자를 보며 말했다.“형님, 이년 어떻게 처리할까요? 대체 얼마나 들었는지 모르겠네요.”기성은은 검은색 가죽 신발을 신고 무거운 발걸음을 내디뎠다.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낯선 그의 모습에 소민아는 돌연 덜컥 겁이 났다.그녀는 어찌할 바를 몰라 자리에 굳어버렸다. 기성은은 소민아 앞에 걸어와 손가락으로 땅에 떨어진 음식 주머니를 줍고는 그녀에게 건네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입 간수 잘해요. 얼마를 들었든, 얼마를 보았든 한 글자라도 발설하면 그 후과 스스로 책임져야 할 거예요.”소민아는 머리를 푹 숙이고 다급히 대답했다.“네... 알겠어요.”기성은이 말했다.“너희 둘은 이곳에서 잘 지키고 있어.”“네, 형님.”“왜 계속 서 있어요? 안 가요?”소민아에게 하는 말이었다.소민아는 머리도 돌리지 않고 한 방향으로만 뛰어갔다. 얼마 후 병실에서 한 명이 더 나왔다.서철용이 담배 한 대를 손가락에 낀 채 말했다.“손이 너무 거치네요. 목숨이 간당간당해요. 죽이더라도 내 병원에서 죽이면 안 되죠.”소민아는 병실에 돌아와서도 얼이 빠진 채 멍하니 앉아있었다. 침대 쪽에서 인기척이 들려와서야 정신을 차리고 다가가 상황을 살폈다.신이랑은 언제 깨어났는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움직이지 말아요. 바늘이 빠지면 안 돼요.”새벽 12시, 복도의
간호사가 이마를 찌푸리며 말했다.“남자친구분 잘 지켜보셨어야죠. 링거액이 다 떨어졌잖아요. 지금 병원이 너무 바빠서 저희 간호사들도 병실 하나하나 다 신경 쓸 수는 없어요.”소민아가 미안함에 말했다.“서류를 가지러 회사에 다녀왔어요. 그런데... 저 이분 여자친구 아니고 비서예요.”간호사가 말했다.“환자분이 의식을 잃은 상태로 계속 가족분의 이름을 부르고 계세요. 얼른 가보세요. 환자분을 혼자 오래 두면 안 돼요.”소민아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네, 알겠어요.”소민아가 병실에 들어가 보니 신이랑은 눈을 뜨고 누워있었다. 그녀가 다급히 들고 있던 물건을 내려놓고 다가갔다.“이랑 씨, 깼어요? 몸은 좀 괜찮아졌어요?”신이랑은 흐릿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손을 뻗자 소민아는 얼른 그의 손을 잡아 이불 속에 넣어주었다.“푹 쉬어요. 제가 옆에 있으니까 불편한 게 있으면 부르고요.”“가, 가지 말아요.”그는 꽉 잡은 손을 좀처럼 놓지 않았다.“이랑 씨, 저 아직 처리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았어요. 내일 보내줘야 해요.”신이랑이 머물고 있는 곳은 VIP 병실이라 주방에 모든 시설들이 구비되어 있었다. 그녀는 전화로 죽 두 그릇을 주문한 뒤... 일에 열중하기 시작했다.저녁 10시, 신이랑의 체온은 많이 안정되었다. 본래 몸이 좋지 않긴 했지만, 이렇게 하룻밤 사이에 정신을 잃고 쓰러지기까지 하다니.소민아는 견딜 수 없을 정도의 배고픔이 느껴지고 나서야 자신이 아직 죽을 받아오지 않았다는 것이 떠올랐다.지금 시간엔 병원에도 사람이 별로 없을 것이다. VIP 병동은 무서울 정도로 으스스하고 고요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 보니 프런트에 놓은 음식은 이미 차갑게 식어 있었다.음식을 들고 다시 위로 올라가려고 엘리베이터 쪽으로 가던 중, 왼쪽 코너 쪽 병실에서 익숙한 사람의 모습이 그녀의 시선을 끌었다.기성은이 왜 여기에?소민아는 다시 핸드폰을 꺼내 확인했다. 병원에 왔으면서 왜 그녀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았단 말인가.
신이랑은 아무런 예고도 없이 그녀의 몸 위에 쓰러지고 말았다. 소민아는 몸을 뒤로 젖히며 그를 껴안았다. 그의 정상적이지 않은 체온을 느낀 그녀가 다급히 그의 이름을 불렀다.“신이랑 씨!”그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으니 소민아는 잠시 그를 부축해 소파에 눕힐 수밖에 없었다.“열이 왜 이렇게 나는 거예요?”소민아가 핸드폰을 켜고 구급차를 부르려 한 순간, 그 뜨거운 손이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생명줄이라도 되는 듯 힘껏 움켜쥐고 놓지 않았다.소민아는 통화를 마친 뒤 손을 뻗어 그의 이마에 가져갔다.“구급차가 곧 올 거예요. 조금만 참아요.”소민아는 착잡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조금 전 금방 들어왔을 때 그가 했던 말을 그녀는 모두 똑똑히 들었었다.자신을 좋아해 달라던 그 말까지도...소민아는 신이랑이 자신과 같은 사람을 좋아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신이랑처럼 좋은 사람은 응당 예쁘고 부드럽고 현숙한 주가은 같은 부잣집 아가씨와 어울린다고 생각했었다. 기성은에게 들은 바로는 신이랑의 신분도 실은 그리 간단하지만은 않다. 그의 가족들 또한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신이랑은 구급차에 앉아 함께 병원으로 들어갔다.신이랑은 열이 39도, 아니 40도까지 치솟아 올랐다.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결과가 어땠을지 상상도 하기 힘들었다.신이랑은 해열제 주사를 맞은 뒤 이어 링거를 꽂고 침대에서 깊이 잠들어 있었다. 그녀는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 옆에서 노트북으로 일을 하기 시작했다.소민아는 그렇게 하루종일 병원에서 그를 보살폈다. 저녁 여섯 시가 되니 배가 고파와 병원 슈퍼마켓으로 향했다. 그때, 여자보다 더 여자같이 생긴 하얀색 옷차림의 남자가 마스크를 하고 그녀의 옆으로 스쳐 지나갔다.소민아는 의아함에 천천히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그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어디에선가 본 것처럼 익숙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하지만 지금 바로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다.그녀는 내려갔던 김에 서류를 가지러 다시 회사에 돌아갔다. 신이랑이
소민아는 기성은의 팔짱을 끼고 친밀하게 손을 잡고는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갔다.“오늘 어디에 가는 거예요? 언제 돌아와요? 퇴근할 때 저 픽업할 수 있어요?”기성은이 대답했다.“상황 봐서요. 매일 오늘처럼 한가한 건 아니거든요.”소민아가 불만이 가득 섞인 표정으로 말했다.“기성은 씨 이젠 회사에도 안 나가잖아요. 대체 뭐 하느라 그렇게 바쁜 거예요? 어제 저랑 사귀어보겠다고 했잖아요. 그럼 절 첫 순위에 올려놓아야 하는 거 아닌가요? 아니면 솔직히 말해봐요. 뭘 하러 가는 건지!”그가 하는 일은 대부분 사람들에게 알려져서는 안 되는 것이다. 하여 당연히 그녀에게 알려줄 수 없었다.대표님이 의식불명으로 누워계시니 그 또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송시아는 회사를 통째로 집어삼키려 움직이기 시작했다. 때문에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눈앞의 일을 최대한 빨리 처리하는 것이다.그에게 있어 소민아는 부담이고 약점일 뿐이다. 어떤 말은 솔직히 말할 수 없으니 그저 그녀의 열정이 자연적으로 꺼져갈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민아 씨 앞가림이나 잘해요.”기성은이 결국 뱉어낸 말은 그 한 마디였다.지금은 출근 시간이라 차가 꽤 막혔다. 소민아는 선명히 뾰로통해진 얼굴로 손에 요구르트를 들고 앉아있었다.이번 생에 기성은이 그녀를 달래주는 날이 오긴 할까.그들은 출근 시간 10분을 남겨두고 성세 그룹 맞은편에 도착했다. 회사에 뛰어 들어간다면 3분이면 충분히 출근 도장을 찍을 수 있다.“아직도 뭘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기성은이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린 순간, 소민아가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 그의 입가에 키스했다.“일 끝나면 전화해요. 성은 씨가 절 데리러 오든, 제가 성은 씨한테 가든 같이 있어요, 우리.”기성은은 그 키스에 깜짝 놀라 자리에서 굳어버렸다.소민아는 안전벨트를 풀고 바람을 맞받아 몸을 움츠리고 회사 안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시간 맞춰 도착해 지각은 하지 않았다.소민아가 뒤돌아보니 기성은은 아직 그 자리에
침대에서 뒹구는 법이라곤 없는 기성은은 그녀가 계속 잠을 청하려 하자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소민아가 단번에 그를 끌어당겨 침대에 눕혔다.“아직 여섯 시밖에 안 됐단 말이에요. 출근 시간까지 한 시간이 넘게 남았어요. 조금 더 자요.”“소민아 씨!”기성은은 이렇게까지 머리 아프게 만드는 사람은 종래로 만나본 적이 없다. 소민아가 강제로 기성은의 팔을 끌어당겨 팔베개를 시켰다.기성은의 차가운 목소리가 내려앉았다.“남녀가 유별하다는 말 몰라요? 소민아 씨, 선 지켜요.”소민아는 눈을 감고 태연하게 그의 말을 받아쳤다.“이봐요, 아저씨. 지금이 조선 시대인 줄 알아요? 어떻게 그렇게 보수적일 수가 있어요? 여자친구 사겨본 적 있기는 해요?”기성은은 도저히 팔을 빼낼 수가 없었다.“내가 못해본 것 같아요?”소민아가 몸을 돌려 그와 눈을 맞추었다.“그 주가은 씨랑은 어떤 사이에요? 정장은 왜 벗어준 거예요? 추워 보여서 그랬어요?”소민아가 손가락으로 총 모양을 만들어 그의 이마에 가져갔다.“얼른 솔직히 말해봐요. 주가은 씨랑 대체 무슨 관계인 거예요? 어젯밤... 기성은 씨 만나러 집에 왔었어요. 제가 우리 두 사람이 사귀기로 했다니까 얼굴이 확 어두워져서 돌아갔고요.”소민아는 자세히 그의 얼굴 표정을 살폈다. 더 캐묻지도, 화를 내지도 않는 것이 별다른 느낌이 없는 듯했다.그가 말하려 하지 않자 소민아가 말을 이어갔다.“연애할 줄 모르겠으면 제가 가르쳐줄게요. 가장 중요한 건 성실해야 한다는 거예요. 빨리 얘기해요.”기성은이 은하수를 담은 듯 반짝거리는 그녀의 눈동자를 피하며 말했다.“주가은은 서울시 시장 딸이에요. 얼마 전 주지웅이 주가은을 대표님에게 소개해주려고 저녁 식사 자리를 만들었는데 대표님이 못 가게 되셔서 내가 대신 갔었어요.”“그날 엘리베이터에서 주가은의 뇌전증이 발작했고, 내가 마침 거기에 있어서 도와줬었죠.”너무 조용하다는 생각에 내려다보니 소민아는 어느새 또다시 잠들어 있었다.기성은이 천천히 팔을 빼내고 침대에
“제 아빠는 데릴사위였어요. 부모님 두 분 모두 과학자여서 매일 연구원에서만 지냈어요. 그래서 전 태어나자마자 고모 댁에 보내졌죠. 엄마아빠의 유전자를 이어받아서인지 별로 노력을 들이지 않고도 서울대에 입학했어요...”소민아의 말이 채 끝나지 않았을 때 옆에 놓아두었던 핸드폰이 진동했다. 신이랑이 걸어온 전화였다.“이랑 씨도 오겠다고 했던 걸 깜빡했어요. 잠깐만 기다려요. 전화 받고 올게요.”기성은이 깊은 눈동자로 아직 그녀의 온기가 남아있는 의자를 바라보았다. 그의 과거는...암흑 그 자체이다.그는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몰랐다. 그가 살았던 곳은 음산하고 차디찬 지하실이었다. 그곳에선... 명령에 따라 앞뒤 가리지 않고 손에 칼을 들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그야말로 나라의 관리가 손닿지 않는 혼란의 세상이었다.누군가 그랬다. 어머니는 기생이고, 아버지는... 마약범이라고. 하여 그는 태어난 뒤 바로 버려졌고, 그래서 이름도 없는 거라고...그의 머릿속 첫 기억은 음습하기 그지없는 시궁창이었다.그때의 참담한 경험이 지금 그의 모습을 만들었다. 모든 사람들이 그를 아무 감정 없는 기계 같다고 입을 모아 말한다...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은 그와는 전혀 상관없는 것이었다.그의 인생을 바꿔준 한 사람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말이다.바로 전연우다!당시 기성은은 변경에서 마약 거래를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전연우를 만났고, 그가 다치고 베이고 수많은 죽을 고비를 넘기며 기성은을 변경 시궁창에서 빼냈다.전연우가 말했다.“나한테 목숨 빚졌으니까 앞으로 나 따라다녀.”“네.”“지금 이름은 너한테 어울리지 않아. 앞으로는 기성은이라고 바꿔.”“네.”...소민아는 신이랑과 함께 설영우를 만나 일정을 조율하고 계약서까지 작성했다.일을 끝내고 나니 날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차갑게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소민아가 신이랑을 아파트 아래까지 배웅한 뒤 걸음을 멈추었다.“왜요?”신이랑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소민아는 숨기지 않고 말했다.
“현실에 부합되지도 않는 쓸데없는 상상하지 말아요. 소민아 씨한테 어울리는 사람은 신이랑이에요. 가서 일이나 열심히 해요, 내 체면 떨어뜨리지 말고.”결과야 어찌 됐든 소민아는 기성은이 키워온 사람이다.소민아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정말 저한테 하고 싶은 말 없어요? 마지막으로 물을게요. 정말 없어요?”“저에 대한 이랑 씨 마음 저도 알고 있어요. 하지만... 난...”“기성은 씨를 좋아한단 말이에요!”문밖에 서 있던 설영우가 호기심이 가득 담긴 표정으로 들어왔다.“어머나, 형한테도 드디어 봄이 왔네요. 여자한테 고백을 다 받다니요!”소민아는 얼마나 어렵게 용기를 내어 그 말을 내뱉었는지 모른다. 한 달 내내 찾아다녔던 소설 작가가 지금 이 순간 기성은에게 형이라고 부르며 나타날 줄이야.“꺼져.”설영우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소민아 씨, 전 이만 갈게요. 형과 얘기 끝나면 문자 주세요. 바로 올라올게요.”소민아는 솔직하고 좋고 싫음이 분명한 사람이다. 실은 그녀 또한 알지 못했다. 대체 왜 하필이면 성격도 나쁜 그 사람에게 마음을 빼앗기게 되었는지 말이다.얼굴이 조금 반반한 것 외엔 별다른 장점도 없다.“제가 방금 했던 말 들었어요?”기성은이 말했다.“소민아 씨 같은 귀찮은 사람이랑 사귀어서 나한테 좋은 게 뭔데요? 아까 내가 했던 말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모양이네요.”기성은이 와인 냉장고로 걸어가 와인을 한 병 꺼냈다. 그를 따라 소민아의 시선도 옮겨졌다.소민아가 그의 뒤를 쫓아가며 말했다.“하지만 좋아하는 사람한테 진심을 고백해야 맞는 거 아닌가요? 저도 제가 충동적이라는 거 알아요. 하지만 저에게도 눈이 있고 생각이라는 게 있어요. 나더러 신이랑에게 붙어있으라는 거 날 보호하기 위해 한 말이라는 게 느껴진다고요. 기성은 씨도 날 좋아하잖아요. 그런데 왜 자꾸 절 밀어내려고만 해요? 정말 이해가 안 돼요.”기성은이 말했다.“정말 황당한 생각이네요. 이용가치가 떨어진 물건을 더 남겨서 뭘 하겠어요?”기성은이 고개를
기성은이 다급히 셔츠를 몸에 걸쳤다.“누가 마음대로 들어오라고 했어요! 나가요!”소민아는 순간 하려던 말까지 잊어버렸다. 그녀는 겁에 질린 얼굴로 문밖으로 나와 손으로 가슴을 짓누르며 크게 심호흡했다. 머릿속에 기성은의 몸에 덕지덕지 새겨진 흉터들이 떠올랐다.기성은은 대표님의 비서가 아니었던가?비서에게 어떻게 저렇게 많은 상처가 생길 수가 있지?또한 모두 칼에 찔린 자상이었다. 지금 이 시대에 누가 칼을 휘두르고 다닌단 말인가.대체... 그는 무슨 일을 겪었던 걸까.기성은은 욕실에서 거울로 자신을 비추어 보았다. 오래전부터 지금까지 일어났던 모든 일이 머릿속에 생생하게 떠올랐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 눈 깜빡할 사이에 10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어떤 일은 뇌 속에 박혀버린 것처럼 한번 또 한 번 반복적으로 재생되어 그로 하여금 끊임없이 떠올리게 만들었다.기성은이 깨끗한 잠옷으로 갈아입고 욕실에서 나왔다. 아직 집에 남아있는 소민아를 향해 그가 차갑게 입을 열었다.“언제까지 있을 생각이에요?”소민아가 주방에서 젓가락 두 쌍을 가져오며 아무 일도 없었던 듯 태연한 표정으로 말했다.“식자재는 기성은 씨가 사긴 했지만 음식을 만든 건 저예요. 기성은 씨를 기다리느라 저도 한 입도 못 먹었어요. 아무리 그래도... 손님한테 밥은 먹이고 보내야 하지 않겠어요? 그리고 기성은 씨를 만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회사 일 때문에 이곳에 온 거예요. 마침 같은 아파트에 제가 맡은 소설 작가님이 살고 계시거든요. 그분이 집에 돌아오시면 드라마 제작 세부 사항에 관해 상의해야 해요.”“가서 침대 옆에 있는 핸드폰 가져와요.”소민아는 말없이 그의 말대로 핸드폰을 가져다주었다. 그녀의 시선이 기성은의 헐렁한 옷소매 안으로 드러난 상처에 닿았다. 그녀는 깜짝 놀랐다. 왜 지금까지 한 번도 그의 손목에 이토록 깊은 흉터가 있다는 걸 알지 못했단 말인가.“...지금 이쪽으로 와.”그 한마디 말을 끝으로 기성은은 전화를 끊었다.“설영우 곧 올 거예요.”소민아의 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