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연우가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강만옥이 케이크를 사 들고 들어왔다. 그녀는 장소월의 상처를 힐끗 살피고 마음에도 없는 걱정의 말 몇 마디 하고는 방으로 돌아갔다.장소월은 진통제를 먹었음에도 통증이 너무 심해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끊임없이 악몽에 시달려 식은땀에 온몸이 흠뻑 젖었지만 엎드린 채 몸을 움직일 수도 없어 잠을 자는 걸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시간이 길어지니 가슴에서까지 통증이 느껴져 밑에 베개를 가져다 놓았다.그녀는 이제 18살밖에 되지 않았으니 너무 풍만한 것도 마냥 좋은 일만은 아니다.시계를 보니 아직 3시 반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장소월은 침대에서 일어나 화장실에 들어갔다. 그녀는 단추를 풀고 옷을 벗은 뒤 가로세로 처참하게 그어져 있는 상처를 살펴보았다. 다른 곳은 조금 붉게 부어올라 있었는데 어제에 비해선 많이 회복된 것 같았다.조금 전 식은땀을 흘린 데다 날씨까지 무더우니 꿉꿉함 때문에 견딜 수가 없었다. 하여 그녀는 상처를 피해 간단히 샤워했다.잠옷을 갈아입은 뒤 베란다에 나가서 시원한 바람에 몸을 맡겼다.오늘 밤의 달은 유난히 밝았다.맞은편 별장 3층은 불이 꺼져있는 상태였다. 장소월은 이미 오랜 시간 동안 그를 보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예전엔 희미한 뒷모습이라도 보였건만, 지금은 대체 어디에 갔을까.그저 그가 다시는 나쁜 생각을 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강남 병원.수술 시작부터 끝날 때까지 장장 여섯 시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강영수는 전신 마취 때문에 아직 의식을 찾지 못했고 두 다리는 붕대로 감아져 있었다.왕 집사가 물었다.“선생님, 저희 도련님의 상태는 어떤가요?”주치의가 대답했다.“현재 상황으로 봐선 수술은 성공적입니다. 하지만 수술 뒤 후유증에 대한 위험을 배제할 수 없으니 한동안은 병원에 입원해 지켜봐야 합니다.”“그럼... 회복되는 데는 얼마나 걸릴까요?”“환자의 몸 상태로 봐선 완전히 회복하려면 아마 3, 5년 정도는 걸릴 것 같아요. 꽤 긴 시간이긴 하지만 수술에
장소월은 두 다리를 감싸 안은 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핸드폰에 시선을 고정하고 눈만 깜빡거리고 있었다.잠시 고민한 뒤 지극히 일반적인 걱정스러운 문자를 보냈다.「뜨거운 물 많이 마시고 푹 쉬어. 약 먹는 것도 잊지 말고.」「알았어.」「일찍 자. 잘 자.」「너도 잘 자.」사실 지금 다시 생각해 보니 그녀와 강영수도 굳이 만날 필요는 없는 것 같았다.처음부터 장소월은 그저 단순히 그를 구하고 싶었을 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었다.그 이유는... 그녀는 늘 이곳을 떠나 새로운 삶을 살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앞으론 아마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이곳을 떠나야만 장씨 가문으로부터, 송시아로부터 벗어나 오로지 그녀만의 삶을 살아 나갈 수 있다. 강영수는 그녀의 계획 내 사람이 아니다. 그와 더 깊은 관계로 발전한다면 오히려 마지막엔 부담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장소월이 길게 하품했다. 그녀는 방에 돌아가 침대에 누워 앞으로의 아름다운 일상을 그리며 잠이 들었다.집에서 며칠 휴식을 취하니 상처는 거의 회복되었다.아침, 장소월이 아직 꿈나라에서 헤매고 있을 때 누군가 그녀의 방문을 두드렸다.“아가씨, 이만 일어나 내려와서 식사하세요.”장소월이 희미한 정신을 부여잡고 말했다.“조금만 더 잘게요.”“아가씨 한 명만 빼고 모두 모이셨어요. 어서 내려와요.”그 말을 들은 장소월은 정신이 번쩍 들었는지 곧바로 이불을 박차고 일어났다.“알겠어요. 금방 내려갈게요.”옷을 껴입고 세수를 마치기까지 1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그녀는 허리를 짚고 빠른 걸음으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사람들이 밥상 옆에 질서정연하게 앉아있었다. 전연우와 백윤서도 와있었다.오늘은 주말이라 백윤서는 회사에 나가지 않았다.무겁게 가라앉은 분위기에 장소월은 더는 가까이 가고 싶지 않았다. 그날 그녀가 전연우를 오해해 화를 낸 이후 며칠이 지났음에도 전연우는 여전히 그녀를 없는 사람 취급했다.그녀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애써 옮겨 강만옥의 옆자
“너 지금 내 말에 반기를 드는 거야?”장해진의 눈썹이 깊게 찌푸려졌다.장소월이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는 듯 말했다.“먼저 말을 바꾼 건 아빠잖아요. 아빠... 전 이제 어른이에요. 뭐든 다 아빠 마음대로 결정하는 건 아니지 않아요? 전 아빠의 꼭두각시가 아니에요.”“틀렸어!”장해진이 손에 쥐고 있던 젓가락을 밥상 위에 내려놓았다.“나한테 이렇게 맞서라고 널 키운 줄 알아? 지금 누가 널 먹여 살리고 있는지 잊으면 안 돼! 내 말대로 하지 않겠으면 내가 번 돈 한 푼도 쓰지 마!”장소월의 눈까풀이 파르르 떨려왔다.“그럼 이 집에 살지 않고, 아빠의 돈 한 푼도 쓰지 않는다면 제 일에 정말 간섭하지 않으시겠어요?”“기고만장이 하늘을 찌르는구나! 저번 매를 맞은 거로 모자라? 죽고 싶으면 계속 그렇게 반항해!”장해진이 화를 벌컥 내며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띠를 풀었다.그가 장소월에게 이렇게까지 크게 화를 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강만옥이 다급히 그를 막았다.“이러지 말아요. 소월인 그저 홧김에 마음에도 없는 말을 뱉은 것뿐이에요. 걱정하지 말아요... 내가 잘 타이를게요. 소월아, 얼른 아빠한테 죄송하다고 말씀드려!”장소월이 말했다.“제가 왜 그래야 하죠? 그냥 절 때려죽이세요! 제가 왜 사사건건 꼭두각시 인형처럼 아빠의 말대로 행동해야 하는 건데요!”“너 뭐라고 했어? 다시 한번 말해봐!”장해진이 손에 움켜쥔 허리띠를 휘두르려고 한 순간 강만옥이 중간에 끼어들어 겨우 그를 막아 세웠다.아주머니가 황급히 장소월을 타일렀다.“아가씨, 그만 해요. 어르신은 다 아가씨를 위하는 마음에 이러시는 거잖아요.”“날 위한다고요? 항상 날 위한다고 하면서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건 해준 적이 없어요. 대체 어떤 아버지가 이럴 수 있어요? 엄마가 아직 계셨다면 난 절대 그토록 멍청하게 행동하지 않았을 거예요.”장해진이 걸어와 힘껏 그녀의 뺨이 내리쳤다.“네 엄마는 간사하고 천박한 쓰레기 년이야. 그 배에서 태어난 널 목
아마 어딘가의 구석에 숨어있을 것이다.하지만 그때, 백윤서가 커다란 화물차 앞에 서 있는 사람을 가리켰다.“오빠, 소월이에요.”전연우가 속도를 늦추었다. 정체불명의 차에 오르고 있는 장소월의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세상에. 어떻게 모르는 사람의 차에 올라탈 수 있어요? 설마 무슨 일이 생기는 건 아니겠죠? 우리 신고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전연우가 의미를 알 수 없는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괜찮아. 상관할 필요 없어.”“정말 이렇게 놔둔다고요?”전연우는 운전에만 집중할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화물차는 빠르게 달려 그들의 시선 속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백윤서는 차의 속도가 뚜렷하게 빨라지고 있음을 느끼고는 살짝 겁이 나 전연우에게 속도를 늦추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가 화물차를 쫓고 있다는 생각에 참을 수밖에 없었다.그들이 십자로에 도착했을 때 신호등이 빨간불로 바뀌었다. 전연우는 아랑곳하지 않고 액셀을 밟아 계속하여 달렸다. 하지만 코너를 돌고 나니 화물차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오빠... 우리 놓쳤어요. 이제 어떻게 해요?”백윤서가 당황스러운 얼굴로 전연우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너무나도 차가워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오싹하게 만들기까지 했다.‘장소월, 너 도대체 무슨 짓을 벌이려는 거야!’...장소월은 백미러로 전연우의 차를 성공적으로 따돌렸음을 확인했다.그녀는 이번 기회에 전연우에게 자신은 한다면 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려주고 싶었다.백윤서의 일로 그녀는 이미 상처를 받았다. 또다시 괴롭힌다면 그 아픔은 견디기 어려울 만큼 불어날 것이다.그녀를 태워준 사람은 물건을 운송하는 기사님이었는데 그의 아내와 함께였다.두 사람은 모두 정이 넘치는 착한 사람들이었다.장소월이 아버지와 싸우고 어머니를 찾으러 간다는 말을 듣자 곧바로 그녀를 차에 태웠다.40여 분 뒤, 장소월은 한 낡은 건물 앞에 도착했다.그들 부부와 작별 인사를 마친 후 그녀는 기억을 더듬으며 십자로를 건넜다. 지하에서 풍겨오는 오
이곳은 오 아주머니가 밖에서 세를 맡아 살고 있는 월세 몇십만 원 정도 하는 집이었다.남쪽을 향하고 있어 채광은 아주 좋았다. 만약 오 아주머니의 이 방이 없었다면 그녀는 정말 길가에 나앉았을 수도 있다.이번은 두 번째로 이곳에 오는 것이었는데 첫 번째는 전연우가 몰래 백윤서에게 공주 원피스를 사준 것 때문에 왔었다.그는 종래로 그녀에게 사준 적이 없다.그녀가 발견한 뒤 난리를 피우며 자신에게도 사달라 요구했지만 전연우는 더더욱 그녀에게 윽박질렀었다.공주가 어떻게 그런 억울함을 견뎌내겠는가.장소월은 화가 나 홧김에 집을 나가버렸다.그때가 바로 처음 가출한 날이었다. 그녀가 백윤서의 치마를 갈기갈기 찢어버린 탓에 전연우가 그녀를 달래지 않고 화를 냈기 때문이었다.오 아주머니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분노에 씩씩거리고 있는 그녀를 데리고 이곳에 왔었다.당시 그녀는 이곳 지저분한 환경에 적응하지 못해 결국 집으로 돌아갔다. 상류사회의 삶에 너무나도 익숙해져 있었으니 말이다.아주머니가 말을 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절대 이곳을 찾지 못할 것이다.이것도 나쁘지 않다. 대학 졸업은 못 하겠지만 밖에 나가 돈을 벌며 살면 되는 것 아니겠는가.장소월은 걸레에 물을 묻혀 먼지가 앉은 책상을 닦아내고 침대 시트를 간 다음 바깥 화분에 물을 주었다.일을 마친 뒤 그녀는 아주머니의 옷을 들고 샤워를 하러 화장실로 들어갔다.상처에 물이 닿으니 또다시 통증에 얼굴이 찌푸려졌다. 이곳엔 뜨거운 물이 없어 찬물로 씻을 수밖에 없었다.이어 그녀는 누렇게 색이 바랬지만 깨끗한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닦아냈다.장씨 집안을 떠나니 지금까지 맛보지 못했던 자유가 느껴졌다.침대에 누운 지 얼마 되지 않아 저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깨어났을 땐 이미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배에선 끊임없이 꾸르륵 꾸르륵 소리가 새어 나왔다.그녀는 침대에서 일어나 면을 삶은 뒤 간단히 간장에 비벼 먹었다.상황이 이렇게까지 되었음에도 장소월은 힘들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배를 채울 먹을
“역시 난 이모가 제일 좋아요!”장소월이 방긋 웃으며 앞으로 걸어가 오 아주머니를 껴안았다.그러고는 기대에 찬 얼굴로 그녀의 손에 들려있는 도시락을 받아안고 작은 밥상 옆에 자리 잡고 앉았다.“편히 잘 살면 되지 왜 뛰쳐나왔어요? 어르신과 도련님이 모두 걱정하고 있다는 거 모르는 거예요? 오늘 밤에만 여기에서 자고 내일은 돌아가요.”“날 설득할 필요 없어요. 돌아가지 않을 테니까요. 그들의 눈엔 난 아무런 소용도 없는 사람이니 걱정하지도 않을 거예요.”아주머니는 싱크대에 놓여있는 냄비와 간장을 발견했다. 그녀가 없으니 저토록 간략하게 먹은 것이다.고귀하신 아가씨가 왜 이런 고초를 겪어야 한단 말인가.오 아주머니는 가슴이 아파졌다. 어릴 적부터 그녀가 성장하는 과정을 모두 지켜봤으니 자신의 딸과도 같아 마음이 저릿해진 것이다.“아가씨, 점심으로 이걸 먹은 거예요?”장소월이 허겁지겁 탕수육을 집어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집에 반찬거리가 없어 면을 삶아 먹었어요. 간장을 너무 많이 나서 좀 짜더라고요. 그리고... 이모, 이 간장 변한 거 아닌가요? 먹을 때 맛이 좀 이상하던데.”오 아주머니는 장소월에게 다가가 손가락으로 이마를 살짝 밀며 말했다.“유통기한도 안 봤어요? 먹고 배탈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그래요. 이제 먹지 말아요. 내일 내가 집에 데려다줄 테니까 어르신한테 죄송하다고 말씀드리세요. 그러면 이번 일은 별 탈 없이 넘어갈 거예요.”장소월이 움직이던 젓가락을 멈추고 단호히 말했다.“전 이미 돌아가지 않겠다고 말했어요. 계속 가라고 등을 떠민다면 지금 바로 이 집에서 나가겠어요.”그녀가 젓가락을 내려놓고 문밖을 향해 걸어갔다.아주머니는 다급히 일어서 그녀를 막아 세웠다.“돌아가지 않으면 어떻게 할 건데요? 설마 평생 이런 보잘것없는 곳에서 살려고요?”“왜 안 되는데요?”“이런 어지럽고 낡은 곳이 뭐가 좋다고요. 아가씨, 제 말 들으세요. 우리 함께 돌아가요, 네?”“이곳이 뭐가 어때서요? 이모까지 절 내쫓으면 전 정말 갈
오 아주머니가 요리를 하고 있었다. 장소월이 눈을 비비며 시계를 보니 아직 여섯 시, 해도 채 뜨지 않은 시간이었다.“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요? 더 자요. 거의 다 했어요.”장소월은 등 뒤에서 아주머니의 허리를 끌어안고 아래턱을 그녀의 어깨 위에 살포시 얹었다. 나른하고 애교 많은 고양이와 같은 모습이었다.“무슨 맛있는 음식을 하는 거예요?”“기름 연기가 많이 나니까 나가요. 더러워지면 안 되잖아요. 세수 용품을 좀 사 왔어요. 아가씨의 집에 있는 것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저급한 브랜드지만 일단 쓰세요. 오늘 밤 제가 가서 물건들을 가져올게요.”“저급한 브랜드면 뭐가 어때서요. 이모가 사 온 거라면 전 다 좋은걸요.”“쓸데없는 말 하지 말고 가서 씻어요. 이것만 다 하면 완성이에요.”“네.”장소월이 입고 있는 잠옷은 오 아주머니가 입던 낡은 옷이었는데 촌스러운 디자인이라 한눈에 봐도 지긋한 나이를 먹은 사람들이 선호할 만한 옷이었다.하지만 장소월의 몸에 걸쳐지니 더할 나위 없이 멋들어졌다.그녀는 발에 투명한 플라스틱 슬리퍼를 신고 화장실로 들어갔다.세수를 마쳤을 때 오 아주머니는 밥을 먹을 시간도 없어 다급히 문을 나섰다.방 안엔 장소월 혼자만 덩그러니 남아 밥을 먹었다.떠나기 전 아주머니는 학교에 지각하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했다.하지만 그녀는 학교에 가지 않을 계획이었다. 그로 인해 퇴학당한다고 해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그녀는 많이 먹는 편이 아니라 남은 음식을 냉장고에 보관해 두었다.조금 쉬고 난 뒤 그녀는 뭐 더 살 것 있나 주위를 둘러볼 생각이었다. 조금 전 아주머니는 그녀에게 10만 원을 주고 백윤서에게로 갔다.장소월은 에코백을 들고 긴 머리를 집게로 높이 얹었다. 손엔 오이 하나가 들려있었고 몸엔 여전히 오 아주머니의 낡은 옷을 입고 있었다.대체 누가 그 모습을 보고 부잣집 아가씨라고 예상이나 하겠는가.“아가씨, 어디로 가려고요?”장소월이 문을 잠그며 말했다.“주위를 좀 둘러보려고요. 아주머니는 뭘 하러 나가시
확실히 약간 어수선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하여 너무 심한 정도는 아니었다. 그저 위생 상태가 서울 시내보다 좀 뒤떨어진 것뿐이었다.이곳은 개발을 거치지 않아 모두 구식 건물들이 들어서 있었다. 거리엔 시장이 열려 있었는데 한 바퀴 돌아보니 물가는 꽤 저렴한 편이었다.이곳은 서울의 가장 끝자락이라 이 골목을 지나가니 넓은 바다가 나타났다.장소월이 잔뜩 흥분한 얼굴로 모래사장에 뛰어 들어가 눈을 감고 깊게 호흡했다.그녀는 슬리퍼를 벗어 던지고 맨발로 모래를 밟았다. 바닷물은 좀 차가웠지만 머리에 쏟아지는 따뜻한 햇살은 그녀로 하여금 편안함을 느끼게 했다.그녀는 바닷가에서 군데군데 보이는 조개를 주우며 천천히 걸어갔다.그때 그녀의 귓가에 노기등등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이봐. 당신 누구야? 여긴 내 구역이라는 거 몰라?”장소월이 몸을 펴고 뒤를 돌아보았다. 레게 헤어스타일에 진한 화장을 덧칠한 여자가 씩씩거리며 그녀에게로 걸어오고 있었다. 팔뚝엔 문신까지 그려져 있었는데 만만치 않은 여자 두목 같은 모습이었다.장소월이 무슨 상황인지 알아채기도 전에 여자가 그녀의 손에 들린 물건을 확 낚아챘다.“넌 어디에서 온 촌년이야? 왜 처음 보는 얼굴이지? 이 가방엔 뭐가 들어있어? 나한테 갖고 와!”“난...”“됐어!”여자는 장소월의 에코백을 거꾸로 들고 안에 있는 물건을 탈탈 털어냈다.“다 쓸데없는 것들이네. 역시 촌년은 촌년이야.”엽시연은 카드놀이에서 진 대가로 바닷가에서 조개를 줍게 된 것이다.그것 때문에 화가 났던 터에 마침 화풀이 할 먹잇감이 나타난 것이다.장소월은 무표정한 얼굴로 바닥에 떨어진 물건과 에코백을 줍고는 그녀와 충돌하기 싫은 마음에 곧바로 자리를 뜨려 했다.하지만 상대는 호락호락 그녀를 놓아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내가 너한테 가라고 했어?”그 말투는 조폭이나 다름없었다.장소월이 물었다.“그럼 어떻게 하고 싶은데요?”엽시연은 손에 들고 있던 삽을 그녀에게 던지며 말했다.“날 만난 건 운이 없었다고 생각해. 나한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