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실히 약간 어수선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하여 너무 심한 정도는 아니었다. 그저 위생 상태가 서울 시내보다 좀 뒤떨어진 것뿐이었다.이곳은 개발을 거치지 않아 모두 구식 건물들이 들어서 있었다. 거리엔 시장이 열려 있었는데 한 바퀴 돌아보니 물가는 꽤 저렴한 편이었다.이곳은 서울의 가장 끝자락이라 이 골목을 지나가니 넓은 바다가 나타났다.장소월이 잔뜩 흥분한 얼굴로 모래사장에 뛰어 들어가 눈을 감고 깊게 호흡했다.그녀는 슬리퍼를 벗어 던지고 맨발로 모래를 밟았다. 바닷물은 좀 차가웠지만 머리에 쏟아지는 따뜻한 햇살은 그녀로 하여금 편안함을 느끼게 했다.그녀는 바닷가에서 군데군데 보이는 조개를 주우며 천천히 걸어갔다.그때 그녀의 귓가에 노기등등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이봐. 당신 누구야? 여긴 내 구역이라는 거 몰라?”장소월이 몸을 펴고 뒤를 돌아보았다. 레게 헤어스타일에 진한 화장을 덧칠한 여자가 씩씩거리며 그녀에게로 걸어오고 있었다. 팔뚝엔 문신까지 그려져 있었는데 만만치 않은 여자 두목 같은 모습이었다.장소월이 무슨 상황인지 알아채기도 전에 여자가 그녀의 손에 들린 물건을 확 낚아챘다.“넌 어디에서 온 촌년이야? 왜 처음 보는 얼굴이지? 이 가방엔 뭐가 들어있어? 나한테 갖고 와!”“난...”“됐어!”여자는 장소월의 에코백을 거꾸로 들고 안에 있는 물건을 탈탈 털어냈다.“다 쓸데없는 것들이네. 역시 촌년은 촌년이야.”엽시연은 카드놀이에서 진 대가로 바닷가에서 조개를 줍게 된 것이다.그것 때문에 화가 났던 터에 마침 화풀이 할 먹잇감이 나타난 것이다.장소월은 무표정한 얼굴로 바닥에 떨어진 물건과 에코백을 줍고는 그녀와 충돌하기 싫은 마음에 곧바로 자리를 뜨려 했다.하지만 상대는 호락호락 그녀를 놓아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내가 너한테 가라고 했어?”그 말투는 조폭이나 다름없었다.장소월이 물었다.“그럼 어떻게 하고 싶은데요?”엽시연은 손에 들고 있던 삽을 그녀에게 던지며 말했다.“날 만난 건 운이 없었다고 생각해. 나한테
“엽시연, 인대호, 너희들 또 난동을 피우는 거야?’돌연 먼 곳에서 살집이 퉁퉁한 중년 남자가 슬리퍼를 신고 야구방망이를 든 채 걸어왔다.그는 장소월에게 다가가 아래위로 훑어보고는 걱정스레 물었다.“아가씨, 저놈들이 괴롭힌 거예요?”장소월이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옆에 서 있던 엽시연이 못마땅한 듯 얼굴을 일그러뜨렸다.남자는 장소월을 알고 있는 듯 또다시 물었다.“아가씨가 바로 오 아주머니가 서울에서 데려온 사람이에요? 이름이... 소월이라고 했던가?”“장소월이요.”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맞아요. 장소월이었어요. 오늘 오 아주머니가 가기 전 아가씨를 잘 지켜달라고 나한테 신신당부했거든요. 아까는 너무 바빠 신경 쓰지 못했어요. 이제 걱정하지 말아요. 내가 있는 한 이놈들은 아가씨한테 감히 함부로 하지 못할 거예요.“시연아, 너 여자애가 왜 이렇게 사납게 하고 다녀! 그리고 너희들, 자꾸 수업 땡땡이치고 몰려다니며 양아치 짓 할래? 다들 빨리 돌아가. 나한테 혼나기 전에.”엽시연이 짜증스러운 얼굴로 담배를 입에 물었다.“이 뚱땡이 아저씨야, 왜 우리가 하는 일에 끼어드는 거예요? 오지랖 부리지 말고 가던 길 가세요. 나이 먹고 어린 여자나 탐하는 꼴이라니. 흥.”“너 뭐라고 했어? 한마디만 더 하면 네 아빠한테 다 이를 거야.”“진짜 재수 없어.”엽시연이 장소월을 쏘아보며 말했다.“거기 촌년, 너한테 한 말이야.”“대호야, 물건 챙겨, 우린 다른 데로 가자.”인대호 무리 남자들이 바닥에 떨어진 것들을 챙겨 엽시연을 따라 자리를 옮겼다.장소월이 말했다.“고마워요. 아저씨가 없었다면 큰일을 당했을 거예요.”“뭘 이런 간단한 일로 고맙기는. 나와 오 누님은 오랫동안 친구로 지낸 사이예요. 앞으론 이곳에 오지 말아요. 저놈들이 종종 이곳에 나타나 행패를 부리기 때문에 위험해요. 밖에 나가 구경하고 싶다면 내가 다른 곳에 데리고 가줄게요.”장소월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럴게요.”장소월은 바닥에 떨어진 조개를 주워 에코백에
그들도 이곳 식당에 들어오는 듯했다.불길한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얼마 지나지 않아 방문이 열리더니 그들이 우르르 줄지어 들어왔다.“와. 이게 대체 몇 가지야. 평소 우리한텐 왜 이렇게 잘해주지 않은 거야! 뚱땡이 아저씨 사람 차별하는 것 봐.”“배고파 죽겠어. 나한테 젓가락과 그릇을 줘.”“넌 손 없어?”“아가씨... 저쪽으로 좀 가봐요. 나 못 들어가겠어요.”“...”장소월은 의자를 움직여 그에게 길을 내주었다.엽시연은 다리 하나를 올려 그녀의 맞은편 의자를 밟고는 다짜고짜 그녀 앞에 놓여있던 탕수육을 갖고 와 게걸스레 먹기 시작했다.“술이 왔어.”마른 몸집의 남자가 맥주 한 상자를 안고 들어온 뒤 발을 휘저어 문을 닫았다.“내가 해달라고 할 땐 절대 안 해주더니. 너 정말 대단한 여자네!”엽시연이 돌연 장소월을 보며 말했다.“이봐, 촌년, 너 아직 어디에서 왔는지 말하지 않았어. 외지 사람이야?”노란 머리 남자가 말했다.“형님, 딱 봐도 곱게 자란 모범생 같은데 너무 겁주지 말아요.”“왜? 마음 아파? 저렇게 예쁜 여자가 널 거들떠나 볼 것 같아? 저런 여자는 도와줘도 소용없으니까 입 다물어.”장소월이 주전자를 갖고 와 컵에 물을 붓고는 한 모금 들이킨 뒤 컵을 내려놓았다.“난 다 먹었으니까 천천히 드세요.”그녀가 일어서려고 할 때 손 하나가 그녀의 다리를 눌렀다.“급할 게 뭐가 있어요. 좀 더 얘기하다가 가요.”장소월은 그들이 두렵다고 할 수 없었다. 그들은 나쁜 사람인가? 그저 상대하기 껄끄러운 사람으로 보일 뿐이다.진정한 나쁜 사람은 그들과 다르다.그들은 그녀를 겁에 질리게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는 어딘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그 느낌은 그녀가 처음으로 가져보는 것이었다.“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데요?”그녀의 옆에 앉아있던 노란 머리와 녹색 머리 남자 두 명이 그녀의 몸을 훑으며 빙그레 웃고는 말했다.“형님, 이 아가씨는 형님을 무서워하지 않는데요? 이제 형님도 한물갔네요.”“입 다
“죄송해요. 천천히 들어요. 전 바쁜 일이 있어 먼저 갈게요.”장소월은 혼자 지내는 데에 익숙해져 친구라는 건 만들지도, 믿지도 않았다.이번엔 그들도 가는 그녀를 잡지 않았다.장소월이 방을 나섰을 때 현광원이 앞치마를 입고 손엔 요리 한 접시를 든 채 안에서 걸어 나왔다.“아가씨, 이렇게 빨리 다 먹은 거예요? 그놈들이 또 괴롭혔어요?”“아니요.”“너무 신경 쓰지 말아요. 사실 저들도 그리 나쁜 놈들은 아니에요. 그저 장난을 치고 싶어 하는 것뿐이에요.”“저도 알아요. 전 물건을 살 게 있어서 이만 가볼게요.”“알았어요. 내일도 밥 먹으러 와요. 돈은 받지 않을 테니까 마음껏 먹어요.”장소월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장소월은 그곳을 떠난 뒤 몸에 맞는 옷 몇 벌과 신발 몇 개를 샀다. 변방 지역이라 가격은 별로 비싸지 않았다.그녀는 이곳에서 오랜 시간 머무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시간은 빠르게 흘러 어느덧 3개월이 지났다. 그동안 그녀는 줄곧 현광원의 식당에서 종업원직을 맡아 일했다. 식사 제공에 하루 일당 십만 원이었으니 꽤 괜찮은 보수였다.낮엔 손님이 별로 없어 한가했고 밤엔 비교적 바삐 돌아쳐야 했다.처음엔 너무 힘들어 허리, 다리 어느 곳 하나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지만 점차 익숙해졌다.그녀는 지금까지 이런 일을 해본 적이 없었음에도 그리 어려워하지 않았다.그동안은 가질 수 없었던 평온하고 자유로운 나날의 연속이었다.감시도 없고, 통제도 없고, 안락함도 없고, 부드럽고 푹신한 침대도 없고, 예쁜 옷도 없다...장소월은 그렇게 천천히 일반인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본래 하얗고 가냘팠던 손은 물에 담그고 설거지를 한 탓에 껍질이 벗겨지고 거칠어졌다.오 아주머니는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장소월이 이곳 식당에서 일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아마 백윤서를 보살피느라 바쁠 것이다.하지만 이것도 나쁘지 않다. 오 아주머니는 절대 그녀가 이런 일을 하도록 놔두지 않았을 것이니 말이다. 이번 기회에
장표가 크게 소리를 질렀다.“이봐, 장소월 맞지? 주문할 테니까 이쪽으로 와.”장소월은 그릇을 든 채 못 들은 척 그녀와 비슷한 나이의 누군가를 쳐다보았다.그 사람의 이름은 이혜성이었는데 그녀 역시 이곳에 일하는 아르바이트생이었다.장소월은 고소한 듯 웃고 있는 이혜성의 얼굴을 쳐다보고는 몸을 홱 돌려 걸어갔다.“이봐, 주문하겠다고 한 말 못 들었어?”장소월은 접시를 내려놓고 손을 깨끗이 씻은 뒤 메뉴판을 들고 그들에게 걸어갔다.“무슨 요리를 주문하시겠습니까?”그녀가 기록하려 펜과 작은 공책 하나를 가져왔다.다섯 쌍의 눈동자가 그녀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향긋한 먹이를 보는 허기진 늑대와도 같은 역겨운 눈빛에 배 안에 있는 것 모두를 토해낼 것만 같았다.그중 한 명이 말했다.“아가씨, 돈이 부족한 거야? 부족하면 나한테 말해. 이 오빠한텐 돈이 넘쳐나니까.”그가 호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상 위에 올려놓고는 안에서 50만 원을 꺼냈다.“오늘 오빠와 놀아준다면 이 돈은 네 거야.”돌연 귀를 찌르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이혜성이 낸 것이었다.“죄송합니다. 전 이곳의 임시 직원일 뿐 그런 일은 하지 않습니다. 메뉴를 더 주문하시겠어요? 하지 않겠다면 전 가보겠습니다.”“뭐가 그리 바쁘다고 그래. 지금 이 식당에 손님은 우리밖에 없잖아. 얼른 앉아서 오빠들과 술이나 마시자.”뚱뚱한 남자 한 명이 파란색 의자를 자신의 옆으로 끌어당겼다.장소월은 그의 말을 무시해 버린 채 몸을 돌렸다.그때 남자가 책상을 힘껏 내리쳤다.“제기랄, 간사한 년, 고상한 척하기는. 진짜 학생이면 왜 이런 곳에서 그릇이나 나르고 있는 건데!”장소월은 몇 걸음 걷다가 멈춰 선 뒤 호주머니에서 분홍색 다이아몬드가 박힌 고급 브랜드 지갑을 꺼내 학생증을 빼내고는 그들의 눈앞에 가져갔다.“아저씨들, 똑똑히 보세요. 이건 제 학생증이에요. 학생증 사진 속 학생이 바로 저고요. 전 제운 고등학교 3학년 학생이에요. 아시겠죠? 그러니까 앞으로 헛된 말을 지어내지 마세요.
남자가 다른 한 손으로 장소월의 옷을 낚아챘다. 단추를 푸니 안에 있던 하얀색 나시가 드러났다.순간 모든 사람들의 눈빛이 번뜩였다.장소월은 옷깃을 꽉 움켜쥐고 힘껏 그의 손목을 깨물었다.그 통증에 남자는 곧바로 손에 힘을 풀었다.드디어 남자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장소월은 온 힘을 다해 밖으로 도망쳤다. 그때 어둠 속에서 그녀는 누군가를 보고 화들짝 놀랐다. 검은색 티셔츠를 입고, 목엔 은색 목걸이를 걸었으며, 한 손은 외투 호주머니에 넣고, 다른 한 손엔 담배를 든 강용이 걸어오고 있는 게 아니겠는가.그 외에도 더 있었다. 백윤서, 엽시연...장소월은 백윤서가 이곳에 왜 왔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유를 막론하고 절대 그녀에게 자신이 이곳에 있다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았다.강용은 고개를 숙이고 백윤서와 말하고 있었으니 아마 그녀를 보지 못했을 것이다. 장소월은 다급히 반대 방향으로 집을 향해 도망쳤다.“제기랄, 그년 빠르기도 하네.”장소월은 멈추지 않고 곧장 집으로 달려갔다. 집에 도착하니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고 온몸은 땀에 흠뻑 젖어있었다. 그녀는 다리에 힘이 풀려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한참 뒤에야 안정을 되찾은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샤워를 하러 화장실로 들어갔다.저녁 12시, 침대에 누워 잠들었던 장소월이 식은땀을 흘리며 잠에서 깨어났다.그녀는 꿈속에서 예전에 그녀를 괴롭혔던 변태 망나니를 만났다.애써 잊으려 했던 기억이 또다시 그녀의 머릿속에서 떠다니기 시작한 것이다. 순간 그때의 광경이 또렷이 눈앞에 그려졌다.그녀는 어두운 방 안에서 이불을 푹 뒤집어썼다. 이루 말할 수 없는 답답함이 가슴을 짓눌렀다.당시의 끔찍한 광경이 또다시 나타난 것이다...장소월은 오 아주머니가 집에서 가져다준 핸드폰을 꺼내 처음으로 전원을 켰다.문자 알림음이 끊임없이 울렸다. 거의 모두 강영수가 보내온 것이었다. 13일 동안, 백 개를 훌쩍 넘는 개수였다.대부분은 그녀에게 무엇을 하고 있는지, 어디에 있는지, 왜 답장을 하지 않는지
전연우는 다른 번호를 눌렀다.“일 좀 처리해줘...”지시를 마치고 전연우는 마지막으로 장소월에게 전화를 걸었다.휴대전화너머로 차가운 안내음만이 들렸다.“고객님 전화기의 전원이 꺼져있습니다. 잠시 후 다시...”새벽3시.장소월이 묵고 있는 집의 문을 두드렸다.“문 열어. 내가 왔어. 빨리 문 열어...”장소월은 귀를 막고 캄캄한 나머지 손을 내밀어도 보이지 않을 천장을 보고 있었다.이범의 한밤중의 소란은 몇 번째인지 모를 지경이다.저번에 빨래를 널었는데 속옷을 잃어버렸다. 다음날 그녀는 아래층 쓰레기통에서 그것을 보았다.그녀는 이곳에서 평온하게 살 수 있을 줄 알았는데….이대로 가다간, 그녀는 자신이 언젠가 미쳐버릴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이범은 이곳에서 유명한 건달이고 옆집에 사는 성 아주머니의 아들이다...장소월은 문을 열지 않았고 한참 지나서야 그는 떠났다...드디어 조용함을 되찾았다.이날 밤, 장소월은 결코 편안히 자지 못했다. 날이 밝아 깨어나 보니 이미 12시가 넘었다.장소월은 베란다로 갔고 냄비에는 갈비찜, 제육볶음, 잡채가 있었다...그녀는 세탁이 끝난 빨래를 베란다에 걸어 놓았다.한창 빨래를 널고 있는데 문득 맞은편 오랫동안 사람이 살지 않던 집에 불이 켜지는 걸 보았다.여기 아파트들은 서로 가까이 있어 커튼을 치지 않으면 창문을 통해 안의 방을 볼 수 있는 구조이다.맞은편 창문이 갑자기 열렸다.장소월은 바로 베란다에서 담배를 피고 있는 강용을 보았다. 두 사람은 시선을 마주쳤다.장소월은 빠르게 반응하여 마지막 옷 한 벌을 빠르게 걸어놓고는 다가가 가스레인지를 끄고 집 안으로 들어가 베란다의 문과 커튼을 닫았다.그녀는 연한 색의 슬립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안에는 아무것도 입지 않았다.장소월은 바로 옷을 갈아입고 밖에서 놓여있는 요리들을 들고 들어와 밥을 먹기 시작했다.오늘 장소월은 가게에 가지 않을 예정이다. 그녀는 강용과 백윤서가 언제 떠날 예정인지 모르기 때문이다.그녀는 백윤서한테 그녀가 이곳
평소라면 잃어버렸으면 잃어버렸지, 다시 재발급받으면 된다고 생각하겠지만 이번에는 다르다.등기본이 없기에 그녀는 신분증을 재발급받을 수 없고 장가네로 가고 싶지 않다.장소월도 인내심이 있는 편이 아니고 평소에 어느 정도 눈 감아 준 것만으로도 충분히 잘 대해 준 것이다.예전의 성격대로라면, 장소월은 바로 휴지통을 그녀의 머리에 덮어버렸을 것이다.“이혜성, 그 지갑 안에는 우리 엄마의 사진이 있어. 나한테는 아주 중요해. 그리고 그 안에 신분증... 돈을 갖고 싶은 거면 너한테 줄게. 다른 건 어차피 너에게 중요하지도 않잖아. 그러니 나한테 돌려줘!”이혜성은 옆에 있는 쓰레기통을 발로 걷어찼고 안에 있던 쓰레기가 모두 굴러 나왔다.“장소월, 너 지금 무슨 뜻이야? 네가 지갑을 잃어버린 게 나랑 뭔 상관인데? 난 네 지갑을 가진 적이 없어. 무슨 근거로 나를 모함하는 건데? 못 믿겠으면 경찰에 신고해!”그녀의 목소리는 가게 전체가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컸다.장소월은 짜증이 나서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이혜성... 나 평소에 너 건드리지 않았지? 그 핸드크림을 가지고 싶다면, 너한테 줄게. 지갑 돌려줘. 그러면 그냥 없던 일로 할게.”“장소월, 난 네 지갑을 가진 적이 없어. 너 왜 날 모함하는 건데!”주인아저씨는 홀의 소리를 듣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라 재빨리 걸어 나왔다.“무슨 일이야? 너 근무시간이 저녁 시간대 아니야? 오늘 왜 이렇게 일찍 왔어?”장소월은 숨기려 하지 않았다.“아저씨, 저 지갑을 잃어버렸는데 안에 아주 중요한 사진이 있어요. 그리고 제 신분증도 있고요... 오늘 원래 사직하고 할머니한테 가려고 했는데 신분증이 없어서 티켓을 구매할 수가 없어요.”“왜 그래? 갑자기 왜 가는 거야?”어제저녁 발생한 일을 얘기하고 싶지 않았다. 회상하면 그녀의 마음이 더 불편해질 뿐이다.일을 크게 키우고 싶지도 않다.장소월은 얼버무려 말했다.“그냥 집에 가고 싶어서요. 아저씨, 경찰에 신고해서 제 지갑 좀
눈물이 예고도 없이 뚝뚝 흘러내렸다. 소민아는 무표정한 얼굴로 눈물을 닦으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렇게 허망하게 죽었다는 거 믿지 않아요. 3년 뒤에도 돌아오지 않으면, 내가 기성은 씨 찾으러 갈 거예요. 당신이 어디에 있든 상관없어요!”“기성은 씨, 당신이 죽었다는 말은 절대 믿을 수 없어요.”은밀하게 감춰진 공간에서 두 남자가 감시 카메라에 잡힌 화면을 보고 있었다.한 남자가 비웃으며 말했다. “진짜 이 여자, 기성은 형 너무 좋아하나 봐. 한 달 동안 열 번 넘게 찾아왔어. 곧 결혼식까지 한다는데, 남편은 아무 말도 안 하나?”다른 남자가 컵라면을 들고 다가와 말했다. “그러게. 성은이 형도 참, 여자를 너무 몰라...”소민아는 침대에 누워 한참을 울다가 저도 모르게 잠들어 버렸다.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오후였다. 휴대폰에 도착해 있는 수많은 문자 메시지와 전화를 확인하고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아빠 엄마가 왔어. 어디 있어? 민아야, 전화해. 너무 걱정돼.]아빠 엄마가 돌아오셨다고?소민아는 깊이 생각할 겨를도 없이 서둘러 아파트를 나섰다.그녀가 막 아래층으로 내려왔을 때, 빨간색 람보르기니 한 대가 그녀 옆에 멈춰 섰다. 창문이 천천히 내려가고, 송시아가 선글라스를 벗으며 말했다. “타, 동생.”소민아는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나는 당신 동생이 아니에요.”송시아가 말했다. “이미 소씨 집안에 이야기해 뒀으니까 그쪽 사람들도 내가 간다는 거 알고 있어. 지금 나 말고는 아무도 네가 여기에 있다는 걸 몰라. 지금 차에 타면 시간 낭비 없이 일찍 도착할 거야.”소민아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 나 감시하는 거예요?”송시아는 빙그레 웃기만 할 뿐 대답은 하지 않았다.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녀는 심지어 일부러 소민아를 유혹하듯 말했다. “차에 타면 기성은에 대해 알려줄게.”그 단 한마디에 소민아는 바로 조수석에 탔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예요!” 시선을 떨어뜨리니 약
“민아야, 난 기성은을 제거할 생각은 접었었어. 너 때문에 기성은을 살려두기로 했거든. 내 말을 못 믿겠다면, 영상도 있으니까 봐. 물론 기성은이 죽지 않았을 1퍼 센트의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어.”차가운 밤바람 속에서 소민아는 마치 얼음에 갇힌 듯한 기분이었다. 마치 지옥에 떨어진 것 같이 절망적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도저히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그 사람이 어떻게 죽을 수가 있어?분명히 약속했잖아, 꼭 돌아오겠다고. 그런데 왜 송시아의 입에서 폭발로 죽었다는 말이 나오는 걸까.전화기 너머 송시아는 아무런 대답도 듣지 못했다. 바닥에 무언가 쿵 떨어지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신이랑이 소민아를 찾아왔을 때, 그의 눈에 손에 휴대폰을 든 채 바닥에 쓰러져 있는 여자가 들어왔다.신이랑은 그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했다. 바닥에 떨어진 휴대폰을 주워 살펴보니 마지막으로 통화한 사람은 송시아였다.신이랑의 부드럽고 온화하던 눈빛이 순식간에 차갑게 가라앉았다.신이랑은 그녀의 몸에 이상이 생긴 건 아닌지 걱정되어 곧바로 병원으로 데려갔다.검사를 마친 뒤 간호사가 말했다. “축하드려요. 아내분께서 임신 6주 차예요. 아마 최근에 좀 피곤해서 쓰러지신 것 같아요. 그리고 저혈당 증세도 약간 있기는 하지만 다른 문제는 없으니까 집에 가서 몸에 좋은 음식을 챙겨주시면 돼요.”신이랑은 아직 침대에 누워 링거를 맞고 있는 소민아를 바라보며 물었다. “아이는 괜찮나요?”간호사가 말했다. “정확한 상태는 초음파 검사를 해야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냥 푹 쉬면 돼요. 아이에겐 별문제 없을 거예요.”신이랑의 눈동자에 어둠이 내려앉았다. “알겠습니다.”소민아가 눈을 떴을 땐 어느새 아침 7시 30분이었다. 생체 시계가 작동한 시간이었다. 그녀는 침대 옆에 엎드려 있는 사람을 보고는 아무 알 없이 그저 눈물만 하염없이 흘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베개는 눈물로 흥건히 젖어 들었다. 신이랑은 잡고 있던 소민아의
위층으로 돌아가자, 도우미가 방에서 나오며 말했다. “아가씨, 방은 이미 정리해 두었습니다.”“네.”도우미는 손님방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았다. 당연히 두 사람이 함께 잘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소민아는 방으로 들어가 침대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있는 방을 보고 입을 열었다.“이랑 씨...” .소민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신이랑이 말을 가로챘다. “괜찮아요. 난 바닥에서 자면 돼요.”소민아가 말했다. “제 말은 그게 아니라... 오늘 밤엔 이랑 씨가 이 방에서 자요. 난 현아 언니 방에서 자면 돼요.”소민아는 침대 옆으로 걸어가 자신이 항상 베고 자던 베개를 들었다. 그녀가 신이랑의 옆을 지나칠 때, 그의 입에서 살짝 섭섭한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민아 씨... 이제 나랑 같은 공간에 있는 것조차 싫은 거예요?”“아니에요, 이랑 씨. 그냥 이랑 씨가 바닥에서 자면 몸에 안 좋을까 봐 걱정돼서 그래요. 의사 선생님이 냉기를 쐬면 두통이 재발하니까 조심하라고 했잖아요.”신이랑은 부드러움으로 가득 차 있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알잖아요. 난 그런 거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걸요. 매일 밤 차가운 바닥에서 자도, 민아 씨와 함께 있을 수만 있다면 난 행복해요.”소민아는 베개를 안은 손에 꽉 힘을 주었다. 마음이 조금 약해지긴 했지만... 결국 거절했다. “이랑 씨, 저 아직은 적응이 안 돼서 그래요. 시간을 좀 줄 수 있어요?”신이랑은 잠시 침묵하더니, 작게 한 마디 내뱉었다. “그래요.”“고마...워요...”소민아는 어쩌다 보니 신이랑과의 결혼을 결정했고, 어느새 혼인신고까지 마쳤다.기성은과의 약속을 먼저 어기는 사람이 그녀 자신일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3년... 고작 얼마나 지났다고!소민아는 옆방 소현아의 방으로 간 뒤에도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한참을 뒤척이다가 침대 끝에 베개를 내려놓고, 발코니로 나가 밤하늘을 바라보았다.그녀는 갑자기 방향을 잃은 듯 방황했다. 앞으로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 너무나도
소민아도 고모의 말씀대로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이미 뼈에 사무치게 경험해봤고,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도 깨달았다. 그녀는 기성은을 좋아하지 않을 수도, 그와 함께하지 않을 수도 없다.예전 회사에서는 시끄럽게 다투기가 일쑤였고, 그럴 때마다 그에게 벌컥 화를 내며 영원히 눈앞에서 꺼져버리라고 소리치곤 했었다. 하지만 한참이 지나서야 깨달았다. 이미 자신의 모든 마음과 몸을 그에게 맡겼다는 것을.그와 행복하게 잘 살고 싶었다. 앞으로 그 어떤 험난한 일이 닥친다 할지라도 상관없었다. 예전처럼 그의 옆에서 비서로 일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지금 생각해보니, 예전엔 가장 싫어했던 일들을 지금은 간절히 바라고 또 바라고 있다.기성은 씨, 지금 대체 어디에 있는 거예요?3년 뒤면 돌아올 거라고 약속했었잖아요. 기성은 씨는 날 속였어요.할 수만 있다면, 당신과 함께 과거로 돌아가 화도 내지 않고 다정히 잘 지내고 싶어요.명세진이 말했다. “요즘 서울은 너무 흉흉해. 앞으로 밖에 나갈 때 조심해야겠어. 하, 현아는 지금 어떻게 지내는지 모르겠네. 그 바보 같은 놈이 혹시나 길을 잃어버리고 헤매다가 납치라도 당하면 어떻게 해.”소민아는 명세진으로부터 핸드폰을 건네받고 뉴스를 보고 있었다. 서울에서 인신매매를 하던 암시장 유흥업소 세 곳이 경찰에 발각되었다는 소식이었다. 대량의 금지된 마약 물품이 발견되었고, 면북으로 팔려갈 뻔한 백여 명의 여자들이 구조되었다고 한다.사진에는 젊고 아름다운 여성들이 차에서 내리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운전기사는 국경을 넘어 도주하려 했지만, 결국 남운 국경 수비대에 붙잡혔다. 마지막으로 밝혀진 정보로는 약물에 완전히 중독되어 몰래 면북 지대로 넘어갈 계획이었다고 한다.그 아래에는 한 소녀가 길거리에서 납치를 당했는데, 경찰이 발견했을 때에는 이미 장기가 적출된 채 싸늘한 시신이 되어 있었다는 기사가 실려있었다.곧이어 휴대폰에 면북 범죄 조직 사이에서 싸움이 발생했고, 납치된 사람들이 본국으로 송환되고 있
명세진이 말했다.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게 결혼인데, 결혼식을 안 하다니 말이 안 돼. 남들이 알면 비웃을 거야.”신이랑의 입꼬리가 축 내려앉았다. 그가 확연히 실망한 듯한 어조로 말했다. “괜찮아요. 전 뭐든 민아 씨 뜻에 따를 거예요.”“이게...” 두 사람 모두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으니 명세진 역시 더는 강요할 수 없었다.“결혼식 안 하고 싶으면 안 해도 돼. 하지만 양가 식구들이 함께 모이는 식사 자리는 빼놓을 수 없지.”소민아는 이번에는 거절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어요. 이미 다음 달로 식사 약속을 잡아놨어요. 그때 아빠 엄마랑 같이 오세요. 그럼 이 일은 일단 이렇게 마무리하죠.”“그래... 너랑 이랑이 둘 다 괜찮으면, 고모도 더 이상 할 말이 없지. 너희 둘이 알아서 결정해.”“참, 민아야, 혹시 현아한테 요즘 전화해 본 적 있어? 이상하네. 평소 같으면 매일 집에 전화했을 텐데, 요즘 들어 갑자기 연락이 끊겼어. 게다가... 예전 전화번호로 전화해 봐도 통화가 안 돼.”소민아가 말했다. “오는 길에 이미 전화해 봤는데 연결이 안 됐어요. 하지만 무슨 일이 생기진 않았을 거예요. 바쁜 일이 있는 거겠죠.”명세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럴 수도 있겠지. 위험하지는 않을 테지만, 현아 몸 상태가 걱정돼. 애가 혹시나 병이 더 악화되면 우리까지 못 알아보게 될까 봐.”소민아는 명세진이 걱정하는 모습을 보고 어렵게 말을 꺼냈다. “나중에 어떻게든 현아 언니랑 연락할 수 있도록 해볼게요.”“그래, 오늘 쉬는 날이면 여기서 자고 가. 마침 빈방도 있잖아.”소민아는 거절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저녁 식사를 마친 뒤, 소민아는 명세진과 함께 뒷마당을 산책했고, 신이랑은 회사에서 돌아온 소정국과 거실에서 장기를 두었다.소민아가 명세진의 팔짱을 끼고 걷고 있었다. “넌 기성은이라는 사람을 좋아했잖아? 왜 갑자기 마음을 바꾼 거야? 혹시 다퉜어?”“민아야, 결혼은 평생을 좌우하는 일이
“혹시 나한테 불평하는 거야?”강지훈은 돌연 발작이라도 하듯, 제 몸 위에 있던 여자를 거칠게 밀쳐냈다. “점점 더 기고만장해지는군!”천효연은 풀썩 주저앉았지만, 상처 입거나 괴로운 기색은 전혀 얼굴에 드러내지 않았다. 오히려 요염하게 몸을 비틀며 두 무릎으로 기어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고는 유혹적인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며 앵두 같은 붉은 입술을 벌려 남자의 손가락을 천천히 빨아들였다. 남자의 눈에서 분노가 서서히 사라지는 것을 느끼자 그녀의 행동은 더더욱 과감해졌다. 혀를 움직여 남자의 바지 지퍼를 내리기 시작했다...강지훈은 허리 아래 매혹적인 자태의 여자를 무표정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천효연 같은 여자는 전문적으로 남자를 유혹하는 훈련을 받는다. 태생적으로도 요물과 같아서 단 한 번의 눈빛만으로도 모든 남자의 욕망을 자극하고 사로잡는다.강지훈은 여자의 머리채를 잡아채, 엄청난 크기의 물건을 그녀의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천효연은 입을 벌려 온몸으로 받아들였다.몇 번이고 반복되는 거칠기 그지없는 행위...마침내 절정에 이르자, 천효연은 마치 처음 경험해본 황홀한 맛인 듯 몽롱한 눈으로 남자를 쳐다보며 혀를 내밀어 그의 손가락을 빨았다.강지훈은 그녀의 하얗고 부드러운 얼굴에 바로......소민아는 몇 번이나 전화를 걸었지만, 여전히 연결이 되지 않았다. 평소라면 소현아는 전화벨이 울린 지 3초 안에 빠르게 받곤 했었는데 말이다.신이랑은 손에 선물을 든 채 그녀를 위로했다. “불안하면 나랑 같이 가봐요.”소민아는 생각할 틈도 없이 바로 고개를 저었다. “그냥 안 가는 게 나을 것 같아요. 그런 곳은 한 번 가본 것만으로도 충분해요.”그녀는 지난번 북경 감옥에 갔을 때, 하마터면 돌아오지 못할 뻔했다. 황량하기 그지없는 데다 깊은 산속을 뚫고 가야 하는 곳이라 일반적인 차는 전혀 드나들지 않는다. 자칫 잘못했다간 그곳에서 목숨을 잃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그야말로 고역이었다. 인터넷에 떠도는 끔찍한 소문들이 전혀 허황된 것은 아니었다.
미경이 말했다.“현아 아가씨는 정말 괜찮은 사람인 것 같아요. 효연 아가씨랑은 완전히 달라요. 이렇게 마음이 넓은 여자는 처음 봤어요. 송시아보다도 훨씬 나아요. 그 여자는 별장에 오자마자 왕이라도 된 듯 우리한테 이래라저래라 시켰잖아요.”규영은 한숨을 내쉬었다. “맞아요.”“일단 좀 더 지켜봐야 할 것 같아요. 주인님이 전화를 받지 않으니 우리도 연락하지 말아요. 혹시라도 주인님이 눈치챌지도 모르잖아요.”미경은 고개를 끄덕였다.그 주사는 석 달에 한 번씩 맞는 것으로, 뇌의 핏덩이를 녹여준다고 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다.북경 감옥은 밤이 되면 기이한 정적이 감돌았고, 가끔 늑대 울음소리도 들려오곤 했다.사방이 막혀 있는 격투장 안, 강지훈은 상처투성이인 몸으로 내려와 부관이 건네준 수건을 받았다. 링 위에는 온몸에 피를 뒤집어쓴 남자가 눈을 부릅뜬 채로 숨통이 끊겨 있었다.이건 북경 감옥의 규칙이었다. 이긴 자는 다시 탈출할 기회를 얻지만, 패배한 자에게는 오직 죽음만이 주어질 뿐이다.강지훈은 몸에 묻은 피를 닦으며 말했다. “아직 소식이 없어?”부관이 묻지 않아도 소장이 말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소장님, 겨우 3일밖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벌써 여섯 번째 물으시는 겁니다. 그렇게 걱정되신다면 직접 가서 확인해 보시는 게 어떠십니까?”“마침 소장님이 조사하고 있는 일도 그쪽에서 단서를 찾았다고 합니다.”겨우 3일밖에 되지 않았나?강지훈은 손에 든 물건을 던져 버리고 검은색 군복을 입고 사무실로 들어갔다. 차가운 사무실은 온기 하나 없이 썰렁했고, 벽엔 부자연스러운 그림 하나만이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그건 소현아가 이곳에 왔을 때 그린 그림이었다.강지훈은 책상 앞에 앉아 다리를 꼬고 담배를 꺼내 물었다. 부관이 라이터로 그의 손가락 사이에 있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쪽에서 전화 안 왔어?”부관이 대답했다.“얼마 전 감옥 설비에 문제가 생겼을 때, 탈옥을 시도한 놈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다행
전화가 연결되지 않으니 그들은 어쩔 수가 없었다. 효연 아가씨가 돌아온 탓에 현아 아가씨가 주인님의 총애를 잃게 된 걸까? 주인님의 여자 교체 속도는 그들 또한 잘 알고 있었다. 효연 아가씨를 제외하고 주인님이 진심으로 마음을 쏟았던 여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남자들은 늘 새로운 여자를 탐하기 마련이다. 게다가 소현아는 어린아이처럼 순진하고 천진난만해서 심통을 부리며 주인님과 싸우기 일쑤였다.어쩌면 그녀에게 싫증이나 눈앞에서 치워버리고 싶은 마음에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핑계를 댔는지도 모른다. 보아하니 현아 아가씨는 결국 주인님에게 버려진 듯하다.현아 아가씨와 효연 아가씨는 정말이지 비교할 가치도 없다. 주인님뿐만 아니라 그들 또한 효연 아가씨보다 더 아름다운 여자를 본 적이 없었다.만약 어르신께서 소현아의 임신 사실을 알지 못했다면, 두 사람이 이토록 애써 그녀를 비밀리에 보호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소현아가 수술대에 실려 간 뒤, 주인님에게 연락이 닿지 않으니 어쩔 수 없이 규영이 수술 동의서에 서명했다. 그래야만 소현아가 치료를 받을 수 있으니 말이다.의사가 수술대에 누워 있는 소현아의 머리에 주사기 바늘을 가까이 가져가 천천히 정맥에 주사했다. 소현아는 겁에 질려 침대에서 몸부림치며 소리쳤다. “뭐 하는 거예요! 나 주사 안 맞을 거예요! 이거 놔요!”규영과 미경은 소현아의 팔다리를 누르며 안심시켰다. “현아 아가씨, 조금만 참으세요. 곧 좋아질 거예요. 병이 나으면 우리 집에 갈 수 있어요.”집에 간다는 말을 듣자 소현아는 조금씩 진정되었다. 어쩌면 약물의 영향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녀는 눈꺼풀이 무거워지면서 졸음이 쏟아졌고, 주변의 소리도 점점 줄어들었다.규영이 물었다. “이 약 뱃속 태아에게 영향을 주진 않겠죠?”요셉 의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약은 임상 시험을 거쳐 임신부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으로 확인됐습니다.”미경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아이가 무사하면 됐어요.”소현아의 뱃속 아기에게 조금의 문
소현아는 비행기 안에서 과일과 고단백 식단을 먹으며 모든 것이 신기한 듯 둘러보고 있었다. 도우미들은 임신한 그녀를 정성껏 돌보며, 최대한 간식은 그녀가 찾지 못하도록 깊게 숨겼다. 과자 같은 음식은 복중 태아에게 좋지 않기 때문이었다.규영이 말했다.“....지금 상황으로는 가능한 한 하루라도 더 숨기는 수밖에 없겠어요. 하지만 이번에도 얼마나 오래 머무를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제발 아기가 무사히 태어나야 할 텐데요.”미경도 걱정스러운 마음에 한숨을 쉬었다. “만약 주인님이 우리가 몰래 어르신을 돕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우린 뼈도 추리지 못할 거예요.”“일단 상황 봐가면서 대처해요. 그래도 다행히 아가씨의 임신 사실은 결국 숨길 수 있었잖아요.”소현아는 손에 들고 있던 딸기를 입에 집어넣으며 말했다. “규영 씨, 우리가 했던 내기, 내가 이긴 거 맞죠? 내가 아기 가졌다는 거 강지훈한테 들키지 않았잖아요. 나한테 주겠다고 약속한 거 줄 때 되지 않았어요?”“아가씨, 걱정하지 마세요. 목적지에 도착하면 드릴 거예요. 절대 실망시키지 않을게요.”임신 후 소현아는 하루에도 몇 번씩 잠을 자곤 했다. 비행기에서도 배불리 먹고 난 뒤 바로 잠들었다.깨어났을 때는 이미 러시아 국제공항에 도착한 뒤였다.강지훈이 미리 준비해 둔 사람들이 세 사람을 차에 태워서 시골에 있는 한 별장으로 향했다. 끝없이 펼쳐진 들판에는 라벤더 꽃이 가득 피어 있었다. 소현아는 목에 두른 스카프를 던져 버리고 라벤더 밭으로 달려가 풀썩 주저앉았다. 규영과 미경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서둘러 달려가 그녀를 붙잡았다. 심하게 넘어지기라도 하면, 배 속의 아이를 지키지 못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아가씨, 짐을 정리하고 나면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아야 합니다. 이제 우리밖에 없으니, 더 이상 숨길 필요 없습니다.”소현아는 그들의 부축을 받아 일어서며 말했다.“알았어요.”운전기사는 러시아 현지에서 오랫동안 살고 있는 한국인이었고, 강지훈이 심어 놓은 감시카메라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