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실히 약간 어수선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하여 너무 심한 정도는 아니었다. 그저 위생 상태가 서울 시내보다 좀 뒤떨어진 것뿐이었다.이곳은 개발을 거치지 않아 모두 구식 건물들이 들어서 있었다. 거리엔 시장이 열려 있었는데 한 바퀴 돌아보니 물가는 꽤 저렴한 편이었다.이곳은 서울의 가장 끝자락이라 이 골목을 지나가니 넓은 바다가 나타났다.장소월이 잔뜩 흥분한 얼굴로 모래사장에 뛰어 들어가 눈을 감고 깊게 호흡했다.그녀는 슬리퍼를 벗어 던지고 맨발로 모래를 밟았다. 바닷물은 좀 차가웠지만 머리에 쏟아지는 따뜻한 햇살은 그녀로 하여금 편안함을 느끼게 했다.그녀는 바닷가에서 군데군데 보이는 조개를 주우며 천천히 걸어갔다.그때 그녀의 귓가에 노기등등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이봐. 당신 누구야? 여긴 내 구역이라는 거 몰라?”장소월이 몸을 펴고 뒤를 돌아보았다. 레게 헤어스타일에 진한 화장을 덧칠한 여자가 씩씩거리며 그녀에게로 걸어오고 있었다. 팔뚝엔 문신까지 그려져 있었는데 만만치 않은 여자 두목 같은 모습이었다.장소월이 무슨 상황인지 알아채기도 전에 여자가 그녀의 손에 들린 물건을 확 낚아챘다.“넌 어디에서 온 촌년이야? 왜 처음 보는 얼굴이지? 이 가방엔 뭐가 들어있어? 나한테 갖고 와!”“난...”“됐어!”여자는 장소월의 에코백을 거꾸로 들고 안에 있는 물건을 탈탈 털어냈다.“다 쓸데없는 것들이네. 역시 촌년은 촌년이야.”엽시연은 카드놀이에서 진 대가로 바닷가에서 조개를 줍게 된 것이다.그것 때문에 화가 났던 터에 마침 화풀이 할 먹잇감이 나타난 것이다.장소월은 무표정한 얼굴로 바닥에 떨어진 물건과 에코백을 줍고는 그녀와 충돌하기 싫은 마음에 곧바로 자리를 뜨려 했다.하지만 상대는 호락호락 그녀를 놓아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내가 너한테 가라고 했어?”그 말투는 조폭이나 다름없었다.장소월이 물었다.“그럼 어떻게 하고 싶은데요?”엽시연은 손에 들고 있던 삽을 그녀에게 던지며 말했다.“날 만난 건 운이 없었다고 생각해. 나한테
“엽시연, 인대호, 너희들 또 난동을 피우는 거야?’돌연 먼 곳에서 살집이 퉁퉁한 중년 남자가 슬리퍼를 신고 야구방망이를 든 채 걸어왔다.그는 장소월에게 다가가 아래위로 훑어보고는 걱정스레 물었다.“아가씨, 저놈들이 괴롭힌 거예요?”장소월이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옆에 서 있던 엽시연이 못마땅한 듯 얼굴을 일그러뜨렸다.남자는 장소월을 알고 있는 듯 또다시 물었다.“아가씨가 바로 오 아주머니가 서울에서 데려온 사람이에요? 이름이... 소월이라고 했던가?”“장소월이요.”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맞아요. 장소월이었어요. 오늘 오 아주머니가 가기 전 아가씨를 잘 지켜달라고 나한테 신신당부했거든요. 아까는 너무 바빠 신경 쓰지 못했어요. 이제 걱정하지 말아요. 내가 있는 한 이놈들은 아가씨한테 감히 함부로 하지 못할 거예요.“시연아, 너 여자애가 왜 이렇게 사납게 하고 다녀! 그리고 너희들, 자꾸 수업 땡땡이치고 몰려다니며 양아치 짓 할래? 다들 빨리 돌아가. 나한테 혼나기 전에.”엽시연이 짜증스러운 얼굴로 담배를 입에 물었다.“이 뚱땡이 아저씨야, 왜 우리가 하는 일에 끼어드는 거예요? 오지랖 부리지 말고 가던 길 가세요. 나이 먹고 어린 여자나 탐하는 꼴이라니. 흥.”“너 뭐라고 했어? 한마디만 더 하면 네 아빠한테 다 이를 거야.”“진짜 재수 없어.”엽시연이 장소월을 쏘아보며 말했다.“거기 촌년, 너한테 한 말이야.”“대호야, 물건 챙겨, 우린 다른 데로 가자.”인대호 무리 남자들이 바닥에 떨어진 것들을 챙겨 엽시연을 따라 자리를 옮겼다.장소월이 말했다.“고마워요. 아저씨가 없었다면 큰일을 당했을 거예요.”“뭘 이런 간단한 일로 고맙기는. 나와 오 누님은 오랫동안 친구로 지낸 사이예요. 앞으론 이곳에 오지 말아요. 저놈들이 종종 이곳에 나타나 행패를 부리기 때문에 위험해요. 밖에 나가 구경하고 싶다면 내가 다른 곳에 데리고 가줄게요.”장소월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럴게요.”장소월은 바닥에 떨어진 조개를 주워 에코백에
그들도 이곳 식당에 들어오는 듯했다.불길한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얼마 지나지 않아 방문이 열리더니 그들이 우르르 줄지어 들어왔다.“와. 이게 대체 몇 가지야. 평소 우리한텐 왜 이렇게 잘해주지 않은 거야! 뚱땡이 아저씨 사람 차별하는 것 봐.”“배고파 죽겠어. 나한테 젓가락과 그릇을 줘.”“넌 손 없어?”“아가씨... 저쪽으로 좀 가봐요. 나 못 들어가겠어요.”“...”장소월은 의자를 움직여 그에게 길을 내주었다.엽시연은 다리 하나를 올려 그녀의 맞은편 의자를 밟고는 다짜고짜 그녀 앞에 놓여있던 탕수육을 갖고 와 게걸스레 먹기 시작했다.“술이 왔어.”마른 몸집의 남자가 맥주 한 상자를 안고 들어온 뒤 발을 휘저어 문을 닫았다.“내가 해달라고 할 땐 절대 안 해주더니. 너 정말 대단한 여자네!”엽시연이 돌연 장소월을 보며 말했다.“이봐, 촌년, 너 아직 어디에서 왔는지 말하지 않았어. 외지 사람이야?”노란 머리 남자가 말했다.“형님, 딱 봐도 곱게 자란 모범생 같은데 너무 겁주지 말아요.”“왜? 마음 아파? 저렇게 예쁜 여자가 널 거들떠나 볼 것 같아? 저런 여자는 도와줘도 소용없으니까 입 다물어.”장소월이 주전자를 갖고 와 컵에 물을 붓고는 한 모금 들이킨 뒤 컵을 내려놓았다.“난 다 먹었으니까 천천히 드세요.”그녀가 일어서려고 할 때 손 하나가 그녀의 다리를 눌렀다.“급할 게 뭐가 있어요. 좀 더 얘기하다가 가요.”장소월은 그들이 두렵다고 할 수 없었다. 그들은 나쁜 사람인가? 그저 상대하기 껄끄러운 사람으로 보일 뿐이다.진정한 나쁜 사람은 그들과 다르다.그들은 그녀를 겁에 질리게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는 어딘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그 느낌은 그녀가 처음으로 가져보는 것이었다.“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데요?”그녀의 옆에 앉아있던 노란 머리와 녹색 머리 남자 두 명이 그녀의 몸을 훑으며 빙그레 웃고는 말했다.“형님, 이 아가씨는 형님을 무서워하지 않는데요? 이제 형님도 한물갔네요.”“입 다
“죄송해요. 천천히 들어요. 전 바쁜 일이 있어 먼저 갈게요.”장소월은 혼자 지내는 데에 익숙해져 친구라는 건 만들지도, 믿지도 않았다.이번엔 그들도 가는 그녀를 잡지 않았다.장소월이 방을 나섰을 때 현광원이 앞치마를 입고 손엔 요리 한 접시를 든 채 안에서 걸어 나왔다.“아가씨, 이렇게 빨리 다 먹은 거예요? 그놈들이 또 괴롭혔어요?”“아니요.”“너무 신경 쓰지 말아요. 사실 저들도 그리 나쁜 놈들은 아니에요. 그저 장난을 치고 싶어 하는 것뿐이에요.”“저도 알아요. 전 물건을 살 게 있어서 이만 가볼게요.”“알았어요. 내일도 밥 먹으러 와요. 돈은 받지 않을 테니까 마음껏 먹어요.”장소월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장소월은 그곳을 떠난 뒤 몸에 맞는 옷 몇 벌과 신발 몇 개를 샀다. 변방 지역이라 가격은 별로 비싸지 않았다.그녀는 이곳에서 오랜 시간 머무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시간은 빠르게 흘러 어느덧 3개월이 지났다. 그동안 그녀는 줄곧 현광원의 식당에서 종업원직을 맡아 일했다. 식사 제공에 하루 일당 십만 원이었으니 꽤 괜찮은 보수였다.낮엔 손님이 별로 없어 한가했고 밤엔 비교적 바삐 돌아쳐야 했다.처음엔 너무 힘들어 허리, 다리 어느 곳 하나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지만 점차 익숙해졌다.그녀는 지금까지 이런 일을 해본 적이 없었음에도 그리 어려워하지 않았다.그동안은 가질 수 없었던 평온하고 자유로운 나날의 연속이었다.감시도 없고, 통제도 없고, 안락함도 없고, 부드럽고 푹신한 침대도 없고, 예쁜 옷도 없다...장소월은 그렇게 천천히 일반인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본래 하얗고 가냘팠던 손은 물에 담그고 설거지를 한 탓에 껍질이 벗겨지고 거칠어졌다.오 아주머니는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장소월이 이곳 식당에서 일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아마 백윤서를 보살피느라 바쁠 것이다.하지만 이것도 나쁘지 않다. 오 아주머니는 절대 그녀가 이런 일을 하도록 놔두지 않았을 것이니 말이다. 이번 기회에
장표가 크게 소리를 질렀다.“이봐, 장소월 맞지? 주문할 테니까 이쪽으로 와.”장소월은 그릇을 든 채 못 들은 척 그녀와 비슷한 나이의 누군가를 쳐다보았다.그 사람의 이름은 이혜성이었는데 그녀 역시 이곳에 일하는 아르바이트생이었다.장소월은 고소한 듯 웃고 있는 이혜성의 얼굴을 쳐다보고는 몸을 홱 돌려 걸어갔다.“이봐, 주문하겠다고 한 말 못 들었어?”장소월은 접시를 내려놓고 손을 깨끗이 씻은 뒤 메뉴판을 들고 그들에게 걸어갔다.“무슨 요리를 주문하시겠습니까?”그녀가 기록하려 펜과 작은 공책 하나를 가져왔다.다섯 쌍의 눈동자가 그녀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향긋한 먹이를 보는 허기진 늑대와도 같은 역겨운 눈빛에 배 안에 있는 것 모두를 토해낼 것만 같았다.그중 한 명이 말했다.“아가씨, 돈이 부족한 거야? 부족하면 나한테 말해. 이 오빠한텐 돈이 넘쳐나니까.”그가 호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상 위에 올려놓고는 안에서 50만 원을 꺼냈다.“오늘 오빠와 놀아준다면 이 돈은 네 거야.”돌연 귀를 찌르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이혜성이 낸 것이었다.“죄송합니다. 전 이곳의 임시 직원일 뿐 그런 일은 하지 않습니다. 메뉴를 더 주문하시겠어요? 하지 않겠다면 전 가보겠습니다.”“뭐가 그리 바쁘다고 그래. 지금 이 식당에 손님은 우리밖에 없잖아. 얼른 앉아서 오빠들과 술이나 마시자.”뚱뚱한 남자 한 명이 파란색 의자를 자신의 옆으로 끌어당겼다.장소월은 그의 말을 무시해 버린 채 몸을 돌렸다.그때 남자가 책상을 힘껏 내리쳤다.“제기랄, 간사한 년, 고상한 척하기는. 진짜 학생이면 왜 이런 곳에서 그릇이나 나르고 있는 건데!”장소월은 몇 걸음 걷다가 멈춰 선 뒤 호주머니에서 분홍색 다이아몬드가 박힌 고급 브랜드 지갑을 꺼내 학생증을 빼내고는 그들의 눈앞에 가져갔다.“아저씨들, 똑똑히 보세요. 이건 제 학생증이에요. 학생증 사진 속 학생이 바로 저고요. 전 제운 고등학교 3학년 학생이에요. 아시겠죠? 그러니까 앞으로 헛된 말을 지어내지 마세요.
남자가 다른 한 손으로 장소월의 옷을 낚아챘다. 단추를 푸니 안에 있던 하얀색 나시가 드러났다.순간 모든 사람들의 눈빛이 번뜩였다.장소월은 옷깃을 꽉 움켜쥐고 힘껏 그의 손목을 깨물었다.그 통증에 남자는 곧바로 손에 힘을 풀었다.드디어 남자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장소월은 온 힘을 다해 밖으로 도망쳤다. 그때 어둠 속에서 그녀는 누군가를 보고 화들짝 놀랐다. 검은색 티셔츠를 입고, 목엔 은색 목걸이를 걸었으며, 한 손은 외투 호주머니에 넣고, 다른 한 손엔 담배를 든 강용이 걸어오고 있는 게 아니겠는가.그 외에도 더 있었다. 백윤서, 엽시연...장소월은 백윤서가 이곳에 왜 왔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유를 막론하고 절대 그녀에게 자신이 이곳에 있다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았다.강용은 고개를 숙이고 백윤서와 말하고 있었으니 아마 그녀를 보지 못했을 것이다. 장소월은 다급히 반대 방향으로 집을 향해 도망쳤다.“제기랄, 그년 빠르기도 하네.”장소월은 멈추지 않고 곧장 집으로 달려갔다. 집에 도착하니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고 온몸은 땀에 흠뻑 젖어있었다. 그녀는 다리에 힘이 풀려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한참 뒤에야 안정을 되찾은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샤워를 하러 화장실로 들어갔다.저녁 12시, 침대에 누워 잠들었던 장소월이 식은땀을 흘리며 잠에서 깨어났다.그녀는 꿈속에서 예전에 그녀를 괴롭혔던 변태 망나니를 만났다.애써 잊으려 했던 기억이 또다시 그녀의 머릿속에서 떠다니기 시작한 것이다. 순간 그때의 광경이 또렷이 눈앞에 그려졌다.그녀는 어두운 방 안에서 이불을 푹 뒤집어썼다. 이루 말할 수 없는 답답함이 가슴을 짓눌렀다.당시의 끔찍한 광경이 또다시 나타난 것이다...장소월은 오 아주머니가 집에서 가져다준 핸드폰을 꺼내 처음으로 전원을 켰다.문자 알림음이 끊임없이 울렸다. 거의 모두 강영수가 보내온 것이었다. 13일 동안, 백 개를 훌쩍 넘는 개수였다.대부분은 그녀에게 무엇을 하고 있는지, 어디에 있는지, 왜 답장을 하지 않는지
전연우는 다른 번호를 눌렀다.“일 좀 처리해줘...”지시를 마치고 전연우는 마지막으로 장소월에게 전화를 걸었다.휴대전화너머로 차가운 안내음만이 들렸다.“고객님 전화기의 전원이 꺼져있습니다. 잠시 후 다시...”새벽3시.장소월이 묵고 있는 집의 문을 두드렸다.“문 열어. 내가 왔어. 빨리 문 열어...”장소월은 귀를 막고 캄캄한 나머지 손을 내밀어도 보이지 않을 천장을 보고 있었다.이범의 한밤중의 소란은 몇 번째인지 모를 지경이다.저번에 빨래를 널었는데 속옷을 잃어버렸다. 다음날 그녀는 아래층 쓰레기통에서 그것을 보았다.그녀는 이곳에서 평온하게 살 수 있을 줄 알았는데….이대로 가다간, 그녀는 자신이 언젠가 미쳐버릴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이범은 이곳에서 유명한 건달이고 옆집에 사는 성 아주머니의 아들이다...장소월은 문을 열지 않았고 한참 지나서야 그는 떠났다...드디어 조용함을 되찾았다.이날 밤, 장소월은 결코 편안히 자지 못했다. 날이 밝아 깨어나 보니 이미 12시가 넘었다.장소월은 베란다로 갔고 냄비에는 갈비찜, 제육볶음, 잡채가 있었다...그녀는 세탁이 끝난 빨래를 베란다에 걸어 놓았다.한창 빨래를 널고 있는데 문득 맞은편 오랫동안 사람이 살지 않던 집에 불이 켜지는 걸 보았다.여기 아파트들은 서로 가까이 있어 커튼을 치지 않으면 창문을 통해 안의 방을 볼 수 있는 구조이다.맞은편 창문이 갑자기 열렸다.장소월은 바로 베란다에서 담배를 피고 있는 강용을 보았다. 두 사람은 시선을 마주쳤다.장소월은 빠르게 반응하여 마지막 옷 한 벌을 빠르게 걸어놓고는 다가가 가스레인지를 끄고 집 안으로 들어가 베란다의 문과 커튼을 닫았다.그녀는 연한 색의 슬립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안에는 아무것도 입지 않았다.장소월은 바로 옷을 갈아입고 밖에서 놓여있는 요리들을 들고 들어와 밥을 먹기 시작했다.오늘 장소월은 가게에 가지 않을 예정이다. 그녀는 강용과 백윤서가 언제 떠날 예정인지 모르기 때문이다.그녀는 백윤서한테 그녀가 이곳
평소라면 잃어버렸으면 잃어버렸지, 다시 재발급받으면 된다고 생각하겠지만 이번에는 다르다.등기본이 없기에 그녀는 신분증을 재발급받을 수 없고 장가네로 가고 싶지 않다.장소월도 인내심이 있는 편이 아니고 평소에 어느 정도 눈 감아 준 것만으로도 충분히 잘 대해 준 것이다.예전의 성격대로라면, 장소월은 바로 휴지통을 그녀의 머리에 덮어버렸을 것이다.“이혜성, 그 지갑 안에는 우리 엄마의 사진이 있어. 나한테는 아주 중요해. 그리고 그 안에 신분증... 돈을 갖고 싶은 거면 너한테 줄게. 다른 건 어차피 너에게 중요하지도 않잖아. 그러니 나한테 돌려줘!”이혜성은 옆에 있는 쓰레기통을 발로 걷어찼고 안에 있던 쓰레기가 모두 굴러 나왔다.“장소월, 너 지금 무슨 뜻이야? 네가 지갑을 잃어버린 게 나랑 뭔 상관인데? 난 네 지갑을 가진 적이 없어. 무슨 근거로 나를 모함하는 건데? 못 믿겠으면 경찰에 신고해!”그녀의 목소리는 가게 전체가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컸다.장소월은 짜증이 나서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이혜성... 나 평소에 너 건드리지 않았지? 그 핸드크림을 가지고 싶다면, 너한테 줄게. 지갑 돌려줘. 그러면 그냥 없던 일로 할게.”“장소월, 난 네 지갑을 가진 적이 없어. 너 왜 날 모함하는 건데!”주인아저씨는 홀의 소리를 듣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라 재빨리 걸어 나왔다.“무슨 일이야? 너 근무시간이 저녁 시간대 아니야? 오늘 왜 이렇게 일찍 왔어?”장소월은 숨기려 하지 않았다.“아저씨, 저 지갑을 잃어버렸는데 안에 아주 중요한 사진이 있어요. 그리고 제 신분증도 있고요... 오늘 원래 사직하고 할머니한테 가려고 했는데 신분증이 없어서 티켓을 구매할 수가 없어요.”“왜 그래? 갑자기 왜 가는 거야?”어제저녁 발생한 일을 얘기하고 싶지 않았다. 회상하면 그녀의 마음이 더 불편해질 뿐이다.일을 크게 키우고 싶지도 않다.장소월은 얼버무려 말했다.“그냥 집에 가고 싶어서요. 아저씨, 경찰에 신고해서 제 지갑 좀
죽 한 그릇을 먹여주는데 무려 20분이나 걸렸다.소민아는 그에게 수면 촉진 성분이 들어있는 약을 가져다주었다. 신이랑이 침대에 누워 그녀의 손을 잡았다.“나랑 같이 있어 줘요. 안 가면 안 돼요?”소민아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알겠어요. 뭐든 이랑 씨가 몸을 다 회복한 다음 얘기해요.”옆에 앉아 신이랑이 잠드는 것을 지켜보던 중 핸드폰에 배터리가 없다는 것을 알아챈 그녀는 천천히 손을 빼냈다. 하지만 신이랑은 그녀의 움직임을 느끼기라도 했는지 불안한 얼굴로 다시 눈을 떴다. 소민아는 환자를 보살피는 게 이렇게까지 어려운 일인지는 정말 몰랐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침대에 엎드려 잠시 잠을 청했다.창밖에서 부슬부슬 내리던 비가 드디어 그쳤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돌연 불어온 차가운 바람에 그녀가 어깨를 움츠렸다.그때, 그녀의 귀에 미세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눈을 뜬 순간, 어둠 속에서 그림자 하나가 휙 지나갔다.“기성은 씨, 당신이에요?”대답이 들려오지 않자 소민아는 자신을 잡고 있던 신이랑의 손을 풀고는 바로 일어나 남자를 쫓아갔다. 그녀가 뒤에서 그를 끌어안은 순간 복도의 센서 등이 환하게 어둠을 밝혔다. 바깥 희미한 가로등 아래에선 차가운 바람이 불고 있었다.“제가 문자 그렇게 많이 보냈는데 왜 답장 안 했어요?”“이거 놔요.”“설명해주기 전엔 놓지 않을 거예요.”작게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에 기성은은 소민아의 손을 잡고 바로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소민아는 벽을 더듬어 조명을 켜려다 말했다.“따라와요.”이후 그녀는 옆쪽 간병인 방으로 그를 데려갔다. 그의 손가락을 만져보니 얼음처럼 차가웠다.“잠시만 기다려요. 제가 뜨거운 물 가져올게요.”소민아는 따뜻한 물을 가져온 뒤 그가 손으로 감싸게 하고는 그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갰다.“조금만 기다려요. 곧 따뜻해질 거예요.”두 사람은 함께 침대에 앉아 서로를 바라보았다. 눈앞에 분명 기성은이 살아 숨 쉬고 있었지만, 자신과 그사이에 커다란 벽이 있다는 느낌을
하지만 기성은은 못 본 척 시선을 피해버렸다.문이 닫힌 지 얼마 되지 않아 거의 숨이 끊어진 것 같은 사람이 병실에서 던져져 벽에 강하게 부딪혔다. 그 충격에 피를 한 움큼 토해냈다.소민아는 너무 놀라 들고 있던 음식까지 바닥에 떨어뜨렸다.“형님, 바깥에 사람이 있습니다.”“이런 우연이 있나. 오늘 아침 만났던 여자잖아.”소민아는 그들이 다가오자 빠르게 반응하며 말했다.“일부러 들으려고 한 건 아니에요. 그냥 지나가던 중이었어요.”적잖은 시선이 그녀의 몸을 아래위로 훑고 지나갔다. 그중 한 명이 말했다.“작두, 이 여자 누군지 알아?”작두라고 불리는 남자가 아래턱을 문지르며 걸어 나오고 있는 남자를 보며 말했다.“형님, 이년 어떻게 처리할까요? 대체 얼마나 들었는지 모르겠네요.”기성은은 검은색 가죽 신발을 신고 무거운 발걸음을 내디뎠다.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낯선 그의 모습에 소민아는 돌연 덜컥 겁이 났다.그녀는 어찌할 바를 몰라 자리에 굳어버렸다. 기성은은 소민아 앞에 걸어와 손가락으로 땅에 떨어진 음식 주머니를 줍고는 그녀에게 건네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입 간수 잘해요. 얼마를 들었든, 얼마를 보았든 한 글자라도 발설하면 그 후과 스스로 책임져야 할 거예요.”소민아는 머리를 푹 숙이고 다급히 대답했다.“네... 알겠어요.”기성은이 말했다.“너희 둘은 이곳에서 잘 지키고 있어.”“네, 형님.”“왜 계속 서 있어요? 안 가요?”소민아에게 하는 말이었다.소민아는 머리도 돌리지 않고 한 방향으로만 뛰어갔다. 얼마 후 병실에서 한 명이 더 나왔다.서철용이 담배 한 대를 손가락에 낀 채 말했다.“손이 너무 거치네요. 목숨이 간당간당해요. 죽이더라도 내 병원에서 죽이면 안 되죠.”소민아는 병실에 돌아와서도 얼이 빠진 채 멍하니 앉아있었다. 침대 쪽에서 인기척이 들려와서야 정신을 차리고 다가가 상황을 살폈다.신이랑은 언제 깨어났는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움직이지 말아요. 바늘이 빠지면 안 돼요.”새벽 12시, 복도의
간호사가 이마를 찌푸리며 말했다.“남자친구분 잘 지켜보셨어야죠. 링거액이 다 떨어졌잖아요. 지금 병원이 너무 바빠서 저희 간호사들도 병실 하나하나 다 신경 쓸 수는 없어요.”소민아가 미안함에 말했다.“서류를 가지러 회사에 다녀왔어요. 그런데... 저 이분 여자친구 아니고 비서예요.”간호사가 말했다.“환자분이 의식을 잃은 상태로 계속 가족분의 이름을 부르고 계세요. 얼른 가보세요. 환자분을 혼자 오래 두면 안 돼요.”소민아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네, 알겠어요.”소민아가 병실에 들어가 보니 신이랑은 눈을 뜨고 누워있었다. 그녀가 다급히 들고 있던 물건을 내려놓고 다가갔다.“이랑 씨, 깼어요? 몸은 좀 괜찮아졌어요?”신이랑은 흐릿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손을 뻗자 소민아는 얼른 그의 손을 잡아 이불 속에 넣어주었다.“푹 쉬어요. 제가 옆에 있으니까 불편한 게 있으면 부르고요.”“가, 가지 말아요.”그는 꽉 잡은 손을 좀처럼 놓지 않았다.“이랑 씨, 저 아직 처리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았어요. 내일 보내줘야 해요.”신이랑이 머물고 있는 곳은 VIP 병실이라 주방에 모든 시설들이 구비되어 있었다. 그녀는 전화로 죽 두 그릇을 주문한 뒤... 일에 열중하기 시작했다.저녁 10시, 신이랑의 체온은 많이 안정되었다. 본래 몸이 좋지 않긴 했지만, 이렇게 하룻밤 사이에 정신을 잃고 쓰러지기까지 하다니.소민아는 견딜 수 없을 정도의 배고픔이 느껴지고 나서야 자신이 아직 죽을 받아오지 않았다는 것이 떠올랐다.지금 시간엔 병원에도 사람이 별로 없을 것이다. VIP 병동은 무서울 정도로 으스스하고 고요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 보니 프런트에 놓은 음식은 이미 차갑게 식어 있었다.음식을 들고 다시 위로 올라가려고 엘리베이터 쪽으로 가던 중, 왼쪽 코너 쪽 병실에서 익숙한 사람의 모습이 그녀의 시선을 끌었다.기성은이 왜 여기에?소민아는 다시 핸드폰을 꺼내 확인했다. 병원에 왔으면서 왜 그녀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았단 말인가.
신이랑은 아무런 예고도 없이 그녀의 몸 위에 쓰러지고 말았다. 소민아는 몸을 뒤로 젖히며 그를 껴안았다. 그의 정상적이지 않은 체온을 느낀 그녀가 다급히 그의 이름을 불렀다.“신이랑 씨!”그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으니 소민아는 잠시 그를 부축해 소파에 눕힐 수밖에 없었다.“열이 왜 이렇게 나는 거예요?”소민아가 핸드폰을 켜고 구급차를 부르려 한 순간, 그 뜨거운 손이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생명줄이라도 되는 듯 힘껏 움켜쥐고 놓지 않았다.소민아는 통화를 마친 뒤 손을 뻗어 그의 이마에 가져갔다.“구급차가 곧 올 거예요. 조금만 참아요.”소민아는 착잡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조금 전 금방 들어왔을 때 그가 했던 말을 그녀는 모두 똑똑히 들었었다.자신을 좋아해 달라던 그 말까지도...소민아는 신이랑이 자신과 같은 사람을 좋아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신이랑처럼 좋은 사람은 응당 예쁘고 부드럽고 현숙한 주가은 같은 부잣집 아가씨와 어울린다고 생각했었다. 기성은에게 들은 바로는 신이랑의 신분도 실은 그리 간단하지만은 않다. 그의 가족들 또한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신이랑은 구급차에 앉아 함께 병원으로 들어갔다.신이랑은 열이 39도, 아니 40도까지 치솟아 올랐다.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결과가 어땠을지 상상도 하기 힘들었다.신이랑은 해열제 주사를 맞은 뒤 이어 링거를 꽂고 침대에서 깊이 잠들어 있었다. 그녀는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 옆에서 노트북으로 일을 하기 시작했다.소민아는 그렇게 하루종일 병원에서 그를 보살폈다. 저녁 여섯 시가 되니 배가 고파와 병원 슈퍼마켓으로 향했다. 그때, 여자보다 더 여자같이 생긴 하얀색 옷차림의 남자가 마스크를 하고 그녀의 옆으로 스쳐 지나갔다.소민아는 의아함에 천천히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그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어디에선가 본 것처럼 익숙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하지만 지금 바로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다.그녀는 내려갔던 김에 서류를 가지러 다시 회사에 돌아갔다. 신이랑이
소민아는 기성은의 팔짱을 끼고 친밀하게 손을 잡고는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갔다.“오늘 어디에 가는 거예요? 언제 돌아와요? 퇴근할 때 저 픽업할 수 있어요?”기성은이 대답했다.“상황 봐서요. 매일 오늘처럼 한가한 건 아니거든요.”소민아가 불만이 가득 섞인 표정으로 말했다.“기성은 씨 이젠 회사에도 안 나가잖아요. 대체 뭐 하느라 그렇게 바쁜 거예요? 어제 저랑 사귀어보겠다고 했잖아요. 그럼 절 첫 순위에 올려놓아야 하는 거 아닌가요? 아니면 솔직히 말해봐요. 뭘 하러 가는 건지!”그가 하는 일은 대부분 사람들에게 알려져서는 안 되는 것이다. 하여 당연히 그녀에게 알려줄 수 없었다.대표님이 의식불명으로 누워계시니 그 또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송시아는 회사를 통째로 집어삼키려 움직이기 시작했다. 때문에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눈앞의 일을 최대한 빨리 처리하는 것이다.그에게 있어 소민아는 부담이고 약점일 뿐이다. 어떤 말은 솔직히 말할 수 없으니 그저 그녀의 열정이 자연적으로 꺼져갈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민아 씨 앞가림이나 잘해요.”기성은이 결국 뱉어낸 말은 그 한 마디였다.지금은 출근 시간이라 차가 꽤 막혔다. 소민아는 선명히 뾰로통해진 얼굴로 손에 요구르트를 들고 앉아있었다.이번 생에 기성은이 그녀를 달래주는 날이 오긴 할까.그들은 출근 시간 10분을 남겨두고 성세 그룹 맞은편에 도착했다. 회사에 뛰어 들어간다면 3분이면 충분히 출근 도장을 찍을 수 있다.“아직도 뭘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기성은이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린 순간, 소민아가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 그의 입가에 키스했다.“일 끝나면 전화해요. 성은 씨가 절 데리러 오든, 제가 성은 씨한테 가든 같이 있어요, 우리.”기성은은 그 키스에 깜짝 놀라 자리에서 굳어버렸다.소민아는 안전벨트를 풀고 바람을 맞받아 몸을 움츠리고 회사 안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시간 맞춰 도착해 지각은 하지 않았다.소민아가 뒤돌아보니 기성은은 아직 그 자리에
침대에서 뒹구는 법이라곤 없는 기성은은 그녀가 계속 잠을 청하려 하자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소민아가 단번에 그를 끌어당겨 침대에 눕혔다.“아직 여섯 시밖에 안 됐단 말이에요. 출근 시간까지 한 시간이 넘게 남았어요. 조금 더 자요.”“소민아 씨!”기성은은 이렇게까지 머리 아프게 만드는 사람은 종래로 만나본 적이 없다. 소민아가 강제로 기성은의 팔을 끌어당겨 팔베개를 시켰다.기성은의 차가운 목소리가 내려앉았다.“남녀가 유별하다는 말 몰라요? 소민아 씨, 선 지켜요.”소민아는 눈을 감고 태연하게 그의 말을 받아쳤다.“이봐요, 아저씨. 지금이 조선 시대인 줄 알아요? 어떻게 그렇게 보수적일 수가 있어요? 여자친구 사겨본 적 있기는 해요?”기성은은 도저히 팔을 빼낼 수가 없었다.“내가 못해본 것 같아요?”소민아가 몸을 돌려 그와 눈을 맞추었다.“그 주가은 씨랑은 어떤 사이에요? 정장은 왜 벗어준 거예요? 추워 보여서 그랬어요?”소민아가 손가락으로 총 모양을 만들어 그의 이마에 가져갔다.“얼른 솔직히 말해봐요. 주가은 씨랑 대체 무슨 관계인 거예요? 어젯밤... 기성은 씨 만나러 집에 왔었어요. 제가 우리 두 사람이 사귀기로 했다니까 얼굴이 확 어두워져서 돌아갔고요.”소민아는 자세히 그의 얼굴 표정을 살폈다. 더 캐묻지도, 화를 내지도 않는 것이 별다른 느낌이 없는 듯했다.그가 말하려 하지 않자 소민아가 말을 이어갔다.“연애할 줄 모르겠으면 제가 가르쳐줄게요. 가장 중요한 건 성실해야 한다는 거예요. 빨리 얘기해요.”기성은이 은하수를 담은 듯 반짝거리는 그녀의 눈동자를 피하며 말했다.“주가은은 서울시 시장 딸이에요. 얼마 전 주지웅이 주가은을 대표님에게 소개해주려고 저녁 식사 자리를 만들었는데 대표님이 못 가게 되셔서 내가 대신 갔었어요.”“그날 엘리베이터에서 주가은의 뇌전증이 발작했고, 내가 마침 거기에 있어서 도와줬었죠.”너무 조용하다는 생각에 내려다보니 소민아는 어느새 또다시 잠들어 있었다.기성은이 천천히 팔을 빼내고 침대에
“제 아빠는 데릴사위였어요. 부모님 두 분 모두 과학자여서 매일 연구원에서만 지냈어요. 그래서 전 태어나자마자 고모 댁에 보내졌죠. 엄마아빠의 유전자를 이어받아서인지 별로 노력을 들이지 않고도 서울대에 입학했어요...”소민아의 말이 채 끝나지 않았을 때 옆에 놓아두었던 핸드폰이 진동했다. 신이랑이 걸어온 전화였다.“이랑 씨도 오겠다고 했던 걸 깜빡했어요. 잠깐만 기다려요. 전화 받고 올게요.”기성은이 깊은 눈동자로 아직 그녀의 온기가 남아있는 의자를 바라보았다. 그의 과거는...암흑 그 자체이다.그는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몰랐다. 그가 살았던 곳은 음산하고 차디찬 지하실이었다. 그곳에선... 명령에 따라 앞뒤 가리지 않고 손에 칼을 들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그야말로 나라의 관리가 손닿지 않는 혼란의 세상이었다.누군가 그랬다. 어머니는 기생이고, 아버지는... 마약범이라고. 하여 그는 태어난 뒤 바로 버려졌고, 그래서 이름도 없는 거라고...그의 머릿속 첫 기억은 음습하기 그지없는 시궁창이었다.그때의 참담한 경험이 지금 그의 모습을 만들었다. 모든 사람들이 그를 아무 감정 없는 기계 같다고 입을 모아 말한다...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은 그와는 전혀 상관없는 것이었다.그의 인생을 바꿔준 한 사람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말이다.바로 전연우다!당시 기성은은 변경에서 마약 거래를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전연우를 만났고, 그가 다치고 베이고 수많은 죽을 고비를 넘기며 기성은을 변경 시궁창에서 빼냈다.전연우가 말했다.“나한테 목숨 빚졌으니까 앞으로 나 따라다녀.”“네.”“지금 이름은 너한테 어울리지 않아. 앞으로는 기성은이라고 바꿔.”“네.”...소민아는 신이랑과 함께 설영우를 만나 일정을 조율하고 계약서까지 작성했다.일을 끝내고 나니 날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차갑게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소민아가 신이랑을 아파트 아래까지 배웅한 뒤 걸음을 멈추었다.“왜요?”신이랑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소민아는 숨기지 않고 말했다.
“현실에 부합되지도 않는 쓸데없는 상상하지 말아요. 소민아 씨한테 어울리는 사람은 신이랑이에요. 가서 일이나 열심히 해요, 내 체면 떨어뜨리지 말고.”결과야 어찌 됐든 소민아는 기성은이 키워온 사람이다.소민아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정말 저한테 하고 싶은 말 없어요? 마지막으로 물을게요. 정말 없어요?”“저에 대한 이랑 씨 마음 저도 알고 있어요. 하지만... 난...”“기성은 씨를 좋아한단 말이에요!”문밖에 서 있던 설영우가 호기심이 가득 담긴 표정으로 들어왔다.“어머나, 형한테도 드디어 봄이 왔네요. 여자한테 고백을 다 받다니요!”소민아는 얼마나 어렵게 용기를 내어 그 말을 내뱉었는지 모른다. 한 달 내내 찾아다녔던 소설 작가가 지금 이 순간 기성은에게 형이라고 부르며 나타날 줄이야.“꺼져.”설영우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소민아 씨, 전 이만 갈게요. 형과 얘기 끝나면 문자 주세요. 바로 올라올게요.”소민아는 솔직하고 좋고 싫음이 분명한 사람이다. 실은 그녀 또한 알지 못했다. 대체 왜 하필이면 성격도 나쁜 그 사람에게 마음을 빼앗기게 되었는지 말이다.얼굴이 조금 반반한 것 외엔 별다른 장점도 없다.“제가 방금 했던 말 들었어요?”기성은이 말했다.“소민아 씨 같은 귀찮은 사람이랑 사귀어서 나한테 좋은 게 뭔데요? 아까 내가 했던 말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모양이네요.”기성은이 와인 냉장고로 걸어가 와인을 한 병 꺼냈다. 그를 따라 소민아의 시선도 옮겨졌다.소민아가 그의 뒤를 쫓아가며 말했다.“하지만 좋아하는 사람한테 진심을 고백해야 맞는 거 아닌가요? 저도 제가 충동적이라는 거 알아요. 하지만 저에게도 눈이 있고 생각이라는 게 있어요. 나더러 신이랑에게 붙어있으라는 거 날 보호하기 위해 한 말이라는 게 느껴진다고요. 기성은 씨도 날 좋아하잖아요. 그런데 왜 자꾸 절 밀어내려고만 해요? 정말 이해가 안 돼요.”기성은이 말했다.“정말 황당한 생각이네요. 이용가치가 떨어진 물건을 더 남겨서 뭘 하겠어요?”기성은이 고개를
기성은이 다급히 셔츠를 몸에 걸쳤다.“누가 마음대로 들어오라고 했어요! 나가요!”소민아는 순간 하려던 말까지 잊어버렸다. 그녀는 겁에 질린 얼굴로 문밖으로 나와 손으로 가슴을 짓누르며 크게 심호흡했다. 머릿속에 기성은의 몸에 덕지덕지 새겨진 흉터들이 떠올랐다.기성은은 대표님의 비서가 아니었던가?비서에게 어떻게 저렇게 많은 상처가 생길 수가 있지?또한 모두 칼에 찔린 자상이었다. 지금 이 시대에 누가 칼을 휘두르고 다닌단 말인가.대체... 그는 무슨 일을 겪었던 걸까.기성은은 욕실에서 거울로 자신을 비추어 보았다. 오래전부터 지금까지 일어났던 모든 일이 머릿속에 생생하게 떠올랐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 눈 깜빡할 사이에 10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어떤 일은 뇌 속에 박혀버린 것처럼 한번 또 한 번 반복적으로 재생되어 그로 하여금 끊임없이 떠올리게 만들었다.기성은이 깨끗한 잠옷으로 갈아입고 욕실에서 나왔다. 아직 집에 남아있는 소민아를 향해 그가 차갑게 입을 열었다.“언제까지 있을 생각이에요?”소민아가 주방에서 젓가락 두 쌍을 가져오며 아무 일도 없었던 듯 태연한 표정으로 말했다.“식자재는 기성은 씨가 사긴 했지만 음식을 만든 건 저예요. 기성은 씨를 기다리느라 저도 한 입도 못 먹었어요. 아무리 그래도... 손님한테 밥은 먹이고 보내야 하지 않겠어요? 그리고 기성은 씨를 만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회사 일 때문에 이곳에 온 거예요. 마침 같은 아파트에 제가 맡은 소설 작가님이 살고 계시거든요. 그분이 집에 돌아오시면 드라마 제작 세부 사항에 관해 상의해야 해요.”“가서 침대 옆에 있는 핸드폰 가져와요.”소민아는 말없이 그의 말대로 핸드폰을 가져다주었다. 그녀의 시선이 기성은의 헐렁한 옷소매 안으로 드러난 상처에 닿았다. 그녀는 깜짝 놀랐다. 왜 지금까지 한 번도 그의 손목에 이토록 깊은 흉터가 있다는 걸 알지 못했단 말인가.“...지금 이쪽으로 와.”그 한마디 말을 끝으로 기성은은 전화를 끊었다.“설영우 곧 올 거예요.”소민아의 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