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봉을 본 김남주가 손에 들고 있던 사진을 내려놓고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오랜만이야! 강영수.”강영수가 싸늘한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며 한 걸음 한 걸음 걸어왔다.“누가 너한테 돌아오라고 했어? 다시는 내 눈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말했잖아!”김남주가 피식 웃으며 손가락으로 책상을 스르륵 쓸어내리고는 그의 앞에 멈춰 섰다.“날 보고 싶어 했던 건 너잖아? 너 설날 밤 내내 내 곁에서 날 지켜줬었잖아. 잊었어?”“시끄러워. 진봉, 경호팀에 연락해 끌어내. 앞으로 한 발자국도 회사에 들이지 마. 또다시 이 여자를 들어오게 한다면 프런트 직원 모두를 해고시킬 테니까 명심해.”진봉이 말했다.“네. 대표님.”강영수는 더는 그녀를 보고 싶지 않아 몸을 돌려 사무실에서 나왔다.김남주가 그의 뒷모습을 향해 소리쳤다.“영수야, 내가 왜 널 떠났는지 알고 싶지 않아?”그 말에 강영수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동시에 진봉은 김남주의 눈빛에서 무언가 무너지고 있음을 느꼈다.강영수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점점 멀어져가는 강영수의 모습에 김남주는 심장이 찢겨나가는 것 같았다.“강영수, 넌 평생 나한테서 벗어날 수 없을 거야!”진봉이 그녀에게 다가가 말했다.“김남주 씨, 대체 왜 이러시는 거예요. 대표님은 이제야 겨우 괜찮아지셨습니다. 더는 찾아와 힘들게 하지 마세요. 대표님께서 주신 그 돈이면 남은 평생 편히 살 수 있잖아요.”김남주가 다시 선글라스를 쓰고 차갑게 그를 노려보았다.“진봉, 당시 나와 영수가 헤어진 데엔 네 공로도 작지 않았어. 네가 무슨 자격으로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야?”“하지만... 아가씬 다른 남자 때문에 대표님을 버렸잖아요. 대표님께서 예전 아가씨한테 얼마나 잘해줬는지 잘 알 거예요. 지금 사진 속 저 여자분에게도 마찬가지예요. 그러니까 저 여자분에게 다른 마음은 먹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지금의 대표님은 예전처럼 호락호락하지 않아요. 당신은 이제 영원히 대표님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될 수 없어요.”진봉의 말은 모두 사
하지만... 강영수 이 자식 왜 약속을 지키지 않은 거야!김남주는 혼자 외롭게 해외에서 살다가 자신이 고용한 파파라치로부터 사진을 받았다. 강영수가 다른 여자와 다정히 손잡고 있는 모습을 보고 곧바로 귀국해버린 것이다.그녀는 이 모든 것이 진실인지 자신의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해보고 싶었다.조금 전 사무실 책상 위 사진을 본 뒤에야 전부 사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높이 솟아있는 강한 그룹 건물을 올려다보니, 김남주는 눈물이 왈칵 차올랐다.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고 따라서 검은색 아이라인도 천천히 씻겨 내렸다. 얼마나 걸었을까, 김남주는 아예 길바닥에 주저앉아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 지나가던 사람들은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보며 그녀와 멀리 떨어져 지나쳤다.몇 분 뒤, 검은색 승용차가 김남주의 앞에 멈춰 섰다.검은색 정장을 입은 경호원이 차에서 내렸다.“김남주 씨, 사모님께서 김남주 씨가 돌아온 걸 아시고 뵙자고 하십니다. 차에 타세요.”김남주가 마음을 가라앉히고 조수석에 앉아 차에 있는 휴지로 눈물을 닦고는 다시 화장을 했다.“몇 년이나 흘렀는데 그 노친네는 아직도 안 죽었나 봐?”운전기사가 흠칫 놀라며 말했다.“아가씨, 말조심하세요!”김남주는 조금 전 목놓아 울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예전에도 그렇게 말했어. 너희들 대표님도 나한테 뭐라고 못하는데 네가 뭔데 날 꾸짖어!”운전기사는 더이상 말하지 않았다.30분 뒤, 김남주를 태운 차가 강씨 저택에 도착했다.그녀는 익숙하게 안으로 걸어갔다. 그녀가 집안에 들어가려 하자 도우미가 그녀를 멈춰 세웠다.“아가씨, 노부인께서 이쪽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김남주는 아래턱을 빳빳이 올리고 도우미를 따라갔다.검소한 차림의 백발의 노부인이 마당 안 벤치에 앉아 팥죽을 먹고 있었다.“오랜만이에요! 아직 생전이실 줄은 몰랐네요!”노부인은 그녀를 무시해버린 채 계속하여 팥죽을 즐겼다. 그녀가 허허 웃으며 옆에 서 있는 도우미에게 말했다.“소월이의
“넌 졌어.”“우리 강씨 집안은 지금까지 너라는 외부인에게 할 만큼 했어.”노부인이 그녀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넌 여전히 그대로구나. 할 말 끝났으니 이제 가. 아줌마, 손님 가신다.”노부인의 말투는 너무나도 단호했고 눈빛엔 냉담함과 혐오감이 가득했다.노부인은 확실히 김남주가 싫었다. 그 여자가 아니었다면 영수는 학창시절 그토록 많은 고생을 하지 않았을 것이니 말이다.아줌마가 말했다.“네. 사모님.”“아가씨, 이쪽으로 오세요.”김남주는 도저히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어 소리쳤다.“제가 이 일을 영수에게 알려주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요? 당신이 아니었다면 저와 영수의 관계는 지금처럼 망가지지 않았을 거예요.”노부인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5년 전 넌 우리 강씨 집안에 발을 들이지 못했어. 지금도 마찬가지야. 난 절대 네가 또다시 내 손자를 해치게 놔두지 않을 거야.”김남주는 그렇게 강씨 저택에서 쫓겨났다. 위풍당당하던 자태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고 대신 처참히 무너져버린 패배자의 모습만 남아있었다.그녀는 강영수가 이렇게 쉽게 자신에 대한 마음을 놓았다는 것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김남주는 한 번 또 한 번 익숙한 번호에 전화를 걸었지만 돌아오는 건 없는 번호라는 야속한 기계음뿐이었다.그녀가 돌연 얼굴을 굳히더니 누군가에게 문자를 보냈다.「당신과 손잡을게요. 하지만 절대 그 사람을 다치게 하면 안 돼요.」문자를 보내고 발걸음을 뗀 순간,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졌다. 고개를 들어보니 하늘 전체가 어둠에 잠식되어 버린 것 같았다.김남주는 돌아오기 위해 연속 며칠을 제대로 쉬지 못했다. 하여 순간 정신을 잃고 쓰러진 것이다....장소월은 하교할 때가 거의 되어서야 왜 학생들이 이상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았는지 알 수 있었다.소현아가 매점에서 잡지 하나를 사와 그녀에게 가져다주었다. 자신과 강영수가 해성에서 다정히 산책하는 모습이 표지에 담겨있었다.대체 왜 몰래 찍은 것도 모자라 표지에까지 올려 곳곳에 뿌린단 말인가.이제
“재미도 없고 흥미도 없어요.”“연예계에 얼굴을 들이밀었다간 아버지한테 맞아 죽을게 분명해요.”“조선 시대엔 연기하고 노래하는 딴따라가 바로 기생이었잖아.”한결이 멋쩍은 얼굴로 감독님을 바라보았다.감독님이 허허 웃으며 말했다.“네네네. 여러분들은 모두 귀한 집 도련님 아가씨라는 거 알아요. 그저 관심이 있는지 물으러 왔을 뿐이에요. 강요하지 않아요.”그때, 감독님의 눈에 창가 쪽 자리에 앉아있는 장소월이 들어왔다. 순간 그의 눈이 반짝였다.“장소월 씨?”장소월이 펜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네? 절 아세요?”감독님은 반가운 얼굴로 앞으로 걸어갔다.“어떻게 모를 수가 있겠어요. 이번 영화는 강 대표님의 투자로 진행되고 있는걸요. 연기에 관심 있다면 여주인공 역할을 줄게요. 마음에 들지 않는 장면이 있다면 저희가 밤을 새우더라고 수정할 거예요.”장소월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죄송해요. 전 연기엔 관심이 없으니까 다른 사람을 찾아보세요. 도무지 풀리지 않는 문제가 있어서 전 고 선생님의 사무실로 가볼게요.”감독님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알겠어요. 이건 제 명함이에요. 혹시라도 관심이 생기면 언제든 날 찾아와요. 나한테 대본이 아주 많거든요. 오기만 하면 남자 주인공은 소월 씨가 선택할 수 있게 해줄게요.”장소월은 어쩔 수 없이 웃으며 두 손으로 명함을 받았다. 이후 문제집을 안고 교실에서 나갔다.지금까지 그녀와 강영수의 관계를 아는 건 학교 안 사람으로 국한되었다. 하지만 잡지에 실린 이후 웬 감독님이 찾아왔고 이걸 시작으로 한 명씩 더 늘어날 수도 있을 것이다.최근 장소월은 강영수와 함께 학교에 오는 길에서 마스크를 쓰고 은밀히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고 있는 사람을 본 적이 있다. 그녀는 그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의 사생활을 까발리는 파파라치라는 걸 알고 있었다.그녀는 종래로 다른 사람의 가십에 관심을 가진 적이 없다. 하지만 자신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이야기의 주인공이 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녀는 누
장소월도 고개를 끄덕이며 허철에게 인사했다.“참, 2등, 나 이 문제 어떻게 푸는지 모르겠는데 좀 알려줄래?”장소월이 의문스러운 얼굴로 물었다.“왜 자꾸 날 2등이라고 부르는 거야?”단모연이 책을 펼쳐 장소월의 책상에 놓으며 말했다.“우리 이준이는 전교 1등이고 넌 2등이잖아. 그래서 그렇게 부르는 건데?”그런 거였어?장소월이 옆으로 시선을 돌리고는 고개를 저었다.“나도 모르겠어. 전교 1등한테 물어봐.”단모연이 시무룩한 얼굴로 말했다.“이준이는 안 가르쳐줘.”“하지만... 나도 모르겠어. 이준아, 너 이 문제 어떻게 푸는지 알아? 우리한테 가르쳐주면 안 돼?”허이준이 책가방에서 똑같은 문제집을 꺼냈다.“가져가서 봐. 모르겠으면 물어보고.”허이준의 문제집을 살펴본 장소월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너... 벌써 다 푼 거야? 언제 푼 거야? 어떻게 이렇게 빨리 풀 수가 있지?”단모연이 입술을 꽉 깨물고 말했다.“이 미친놈은 문제집을 받은 지 일주일 만에 다 풀었어.”이게 바로 전설 속의 천재라는 건가?장소월은 성적을 올리기 위해 매일 밤 열두 시가 되어서야 침대에 누웠다. 잠이 들기 전 몇 개의 영어 단어를 외우는 것도 잊지 않았다.“쟨 과외도 안 해?”“과외는 무슨 과외야. 중학교 땐 더 미쳤었다니까. 3년 내내 나랑 짝꿍이었는데 매일 수업시간에 잠만 자고서도 시험만 봤다 하면 전교 1등이었어.”“그렇게 대단하다고?”“너희들 무슨 얘기를 그렇게 재밌게 하는 거야? 나도 대화에 낄 수 있을까?”백윤서가 책가방을 안고 교실로 들어왔다.달아올랐던 분위기가 어쩐 일인지 순식간에 차갑게 식어버렸다.장소월이 말했다.“아무것도 아니에요. 문제에 대해 토론했을 뿐이에요. 언니는 왜 온 거예요?”백윤서가 장소월의 옆자리에 앉으며 말했다.“그 감독님이 우리 교실에서 영화를 찍어야 한다고 해서 왔어. 네 책가방도 가져왔는데 빠뜨린 거 없는지 확인해봐.”장소월이 책가방을 받아안았다.“고마워요.”평소라면 장소월은 가장 늦게 하
그저 초췌한 얼굴로 낮은 목소리로 말할 뿐이었다.“네 물건 모두 정리해서 가져가. 그리고... 다시는 오지 마.”방에 들어가 보니 누군가 이미 청소를 해놓은 것처럼 먼지 하나 없이 깨끗했다.그녀는 아무 생각 없이 문을 잠그고 책가방을 내려놓고는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이불을 덮고 침대에 누웠다.바깥에서 싸우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지만 머리가 너무 아파 전혀 관여하고 싶지 않았다. 머리가 깨질 듯한 두통이 얼마간 지속된 후, 그녀는 스르르 잠이 들었다.새벽 한 시.브레이크 소리가 깊은 밤의 적막을 깼다. 강영수가 차에서 내려 집을 올려다보니 거실 불이 아직 켜져 있었다.그가 피곤한 몸을 이끌고 현관에 들어갔을 때 도우미가 의아한 얼굴로 말했다.“도련님, 소월 아가씨와 함께 계신 거 아니었어요?”강영수의 얼굴이 굳었다.“소월이 안 돌아왔어요?”돌연 그에게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도우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네. 아가씨가 운전기사한테 오늘 밖에서 잘 거라고 하셨대요. 그래서 전... 도련님과 함께 있는 줄로 알았어요.”강영수는 병원에서 나온 뒤 핸드폰을 봤었지만 부재중 통화나 읽지 않은 문자 메시지는 와있지 않았다.그가 한 번 또 한 번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으나 줄곧 꺼져있는 상태였다.뼈를 에일 듯한 차가운 분위기가 그의 몸에서 분출되었다.“왜 똑바로 물어보지 않은 거야! 소월이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다들 내 눈앞에서 꺼져버려야 할 거야! 멍하니 서서 뭐 하고 있어! 얼른 나가 찾아보지 않고!”“네... 도련님.”도우미는 강영수가 이토록 불같이 화내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도우미가 나가자 다리가 또다시 발작을 일으키는지 강영수의 몸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그는 소파에 앉아 손으로 이마를 짓눌렀다. 그는 너무나도 무섭고 불안했다. 오늘 김남주에게 가는 게 아니었다.만약 장소월이 그 일을 알게 된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그는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경호원이 학교 부근의 호텔과 술집들을 샅샅이 뒤져보았으나 장소월의
장소월은 아무것도 모르고 잠들어 있겠지만, 강영수는 이미 서울 전체를 뒤집어엎을 수 있을 만큼 미쳐가고 있었다.새벽, 한 줄기의 빛이 창문을 비추며 들어왔다. 조용한 낡은 거리에 자리 잡은 가게들이 하나둘씩 아침 장사를 시작했고 이어 향기로운 음식 냄새가 코를 간지럽혔다.그때, 검은색 고급 세단 몇 대가 줄줄이 들어와 아파트 단지에 멈춰 섰다.오부연이 말했다.“소월 아가씨는 예전 이곳에서 한동안 머무른 적이 있습니다. 제 생각엔 이곳에 있을 것 같습니다.”밤새 한숨도 자지 못해 잔뜩 피곤해진 얼굴의 강영수가 다급히 차에서 내렸다. 낡고 더러운 거리를 보니 이마가 저절로 찌푸려졌다. 소월이가 어떻게 여기에 있을 수 있단 말인가!군데군데 벽이 떨어져 있고 당장이라도 무너져버릴 것만 같은 이 건물에 아직도 사람이 살고 있다니.그때, 장소월은 욕실에서 씻고 나온 뒤 머리카락을 말리고는 어젯밤 더러워진 소파 시트를 벗겨 세탁기에 넣었다.어제는 머리가 너무 아파 거실에서 봤던 장면에 대해 조금도 관여하지 않고 빠르게 잠이 들었었다.하지만 좀 추웠는지 아침에 깨어나 보니 코가 조금 막혔다.그녀는 수술을 한 뒤 몸이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을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그때, 누군가 쾅쾅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장소월은 누구인지 묻지도 않고 문을 열었다.장소월이 반응하기도 전에 강영수가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그녀가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영수야, 나 아파! 너 왜 온 거야?”강영수는 그녀를 본 순간 모든 것을 얻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미안해!”장소월은 그의 말뜻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옆에 서 있는 진봉과 오부연의 모습도 보였다. 아니... 다 데려올 필요는 없었잖아!한동안 그녀를 품에 꼭 끌어안은 뒤에야 강영수가 장소월을 놓아주었다.그녀는 새로운 소파 시트로 교체한 뒤 사람들을 소파에 안내했다. 그녀는 강영수에게 방금 끓인 따뜻한 물을 건네고는 그의 옆에 앉았다.“미안해요. 본의 아니게 여러분들을 걱정시켰네요. 어젯
장소월이 전화를 받고 오니 진봉과 오부연은 이미 나가고 방안엔 두 사람만 남아있었다.강영수는 확연히 어두워진 장소월의 안색을 보고 물었다.“무슨 일 있어?”장소월이 말을 얼버무렸다.“그냥 어젯밤 일을 물으셨어. 아무것도 아니야.”사실 그녀는 장해진에게 호되게 혼이 났다. 갖은 욕설을 모두 들었으니 낯빛이 밝을 리가 없었다.장소월이 말했다.“내가 죽을 끓여뒀는데 같이 먹을래? 아직 이른 시간이니 먹고 나서 조금 잘 수 있을 거야.”강영수가 깊은 눈동자로 지긋이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래.”아침밥을 먹은 뒤, 강영수를 데리고 방으로 들어갔다.방 안은 깨끗이 청소되어 있었고 침대 위엔 눈에 띄는 커다란 인형 하나가 놓여 있었다.장소월이 이불을 정리하며 말했다.“너희 집보단 협소해 좀 불편할 거야. 잠시 눈만 붙여.”강영수가 말했다.“내가 자면 넌 뭘 하려고?”“이왕 깼으니 거실에서 숙제를 하려고.”강영수가 그녀의 손을 잡아당겼다.“나랑 같이 자자.”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장소월은 처음엔 거절하고 싶었으나 그가 밤새 자신을 찾아 헤맸다는 사실이 떠올라 마음이 약해져 고개를 끄덕였다.장소월은 등을 돌리고 침대에 누웠다. 남자의 뜨거운 몸이 등 뒤에서 그녀를 꼭 끌어안았지만 그녀는 인형처럼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알람이 울리자 장소월은 조심스레 침대에서 내려왔다. 강영수는 아직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그녀가 슬리퍼를 신고 문을 나서려고 할 때 책상에 올려놓은 핸드폰이 진동했다. 그녀의 것이 아닌 강영수의 핸드폰이었다.화면을 살펴보니 김남주라는 이름이 떠 있었다.익숙한 이름이었지만 곧바로 생각해내지는 못했다.그녀는 본래 강영수의 잠을 방해할까 봐 전화를 끌 생각이었지만 결국 끄지 않고 거실로 갖고 나왔다.거실 소파에 앉아있던 진봉이 장소월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소월 아가씨.”그의 시선이 장소월이 들고 있는 핸드폰으로 향했다.장소월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문을 가리키며 소곤소곤 말했다.“아직 자고 있어요. 조금 전 누
“괜찮을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 장소월도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강지훈이 정말 온다면 그 사람과 함께 떠날 거야?”소현아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난 그놈 싫어. 현아는 소월이랑 강용한테 아기도 낳아줘야 해.”“그리고 우리 아직 가보지 못한 곳도 많잖아.”“소월아, 네가 그랬지, 다음 목적지는 바닷가라고. 나 데리고 상어 보러 갈 거라고 했잖아.”소현아는 양손에 탕후루를 들고 배시시 웃으며 장소월에게 애교를 부렸다. 그녀의 손에는 탕후루 외에도 체리 몇 개가 더 들려 있었다. 새콤한 것을 좋아하는 임산부를 위해 장소월이 사준 것이었다.“그래. 약속 어기지 않을게.”장소월은 저녁 반찬으로 구이용 고기를 조금 구매했다. 저녁 식사를 준비할 시간이 거의 되어가고 있었다. 그녀가 시장에서 식재료를 사 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갑자기 입구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주변 상인들은 노점도 내팽개치고 사방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심지어 칼에 맞아 쓰러진 사람들도 있었다.장소월은 이런 아수라장을 종래로 본 적이 없었다. 그녀가 들고 있던 장바구니는 일찌감치 다른 사람의 발에 걷어차여 바닥에서 나뒹굴고 있었다. 그녀는 영문도 알지 못한 채 사람들을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앞뒤 출구가 모두 막혀버려 도저히 이곳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그녀가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하고 있을 때, 누군가 그녀를 잡아끌었다. 남자의 얼굴을 확인한 장소월은 깜짝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준 오빠? 어떻게 여기 계세요?”“시장에서 식재료 사는 것 말고 무슨 할 일이 있겠어요?”장소월은 그의 팔에 흐르는 피를 보고 화들짝 놀랐다. “다치셨어요!”얼굴까지 창백한 걸 보니 총상을 입은 것 같았다.“쉿, 조용히 해요.”그들은 어둡고 좁은 틈새에 숨어 몸을 바짝 붙인 채 외부의 공포스러운 총소리를 듣고 있었다. 무섭지 않다면 거짓말일 것이다.틈새가 너무 비좁아 쪼그려 앉을 수 없었기에 일어선 채 그 시간을 견뎌내야 했다.손이준의 옆
장소월은 힘이 풀린 다리를 쳐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녀의 생각이 짧았다. 확실히 부적절한 행동이었다.손이준은 아래층으로 내려가 부엌을 깨끗하게 청소한 뒤 식재료도 사다 놓았다.소현아는 어젯밤 술을 거의 마시지 않았다. 오후 1시가 넘은 시간에 깨어나는 것은 임산부의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그녀는 냄비에 남은 미음 세 그릇을 어젯밤 먹다 남은 반찬과 함께 야무지게 비벼 게눈 감추듯 먹어치웠다.위층에서 내려오는 발소리가 들리자 그녀가 소리쳤다.“소월아, 일어났어?”고개를 돌리고 남자의 음산한 눈빛과 마주친 순간, 그녀는 머리를 푹 숙이고는 테이블 밑으로 파고들기라도 할 듯 몸을 잔뜩 움츠렸다.“냄비에 있던 미음 다 먹었는데, 조금만 더 먹고 싶어서요... 혹시 더 있어요?” 모깃소리만큼이나 작은 목소리였다. 그가 무섭기는 했지만, 식탐을 이기지 못하고 그 말을 내뱉고 말았다.손이준은 그릇을 탁자 위에 놓아주며 말했다.“드세요.”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은 차갑고 쌀쌀한 목소리였다.‘강지훈은 왜 저 멍청이한테 꽂힌 걸까?’보는 눈이 점점 더 형편없어 지고 있나 보다.별이도 먹고 싶다며 손을 뻗었지만, 전연우에게 곧바로 제지당했다. 맞은편 식당에서 전연우는 노트북 컴퓨터 화면을 응시하고 있었다.장소월은 아직도 방에서 내려오지 않은 듯했다.전연우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왜 이 시간까지도 밥 먹으러 내려오지 않는 거지?아침도 먹지 않았고, 점심시간까지 지났다.장소월의 방에서부터 가게까지의 거리는 2분도 채 걸리지 않을 정도로 가까웠다. 가게에 도착한 지 10분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도 그는 또다시 안절부절못하기 시작했다.“이봐.”덥수룩한 머리숱의 남자가 다가왔다.“형님, 무슨 일이십니까?”“시내에 가서 먹을 것 좀 사와. 10분 준다. 많이 사와.”“알겠습니다, 형님.”“아니야! 저 사람들한테...”“그게 좋겠습니다.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장소월은 방에서 전시회에 내놓을 그림 주제를 구상하고 있었다. 연필로 선을 몇 군데 그
“싫어... 싫어. 나 안 돌아갈 거야.” “안 돼, 잡지 마!” “강용, 나 살려줘!”장소월은 종래로 그토록 흐트러진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전연우는 그런 그녀의 모든 행동을 눈에 담고 있었다. 다만 꿈속에서까지 자신을 그토록 두려워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남자의 눈에는 복잡한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전생과 이번 생에 있었던 모든 일들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내려놓을 수 없는 복수심 때문에 그녀를 한번 또 한 번 사무치는 고통 속으로 밀어 넣었다.‘소월아... 내 아내! 넌 영원히 내 여자야...’전연우는 내면의 욕망을 애써 억눌러 술 취해 자고 있는 여자를 탐하지 않았다.한 시간 뒤.전연우는 삽입만 하지 않았을 뿐, 욕망을 모두 해소하고는 그녀에게 옷을 입혔다. 그녀의 몸에는 어떠한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장소월은 온몸이 파도 속에 잠긴 듯했다. 끔찍하게 숨 막히는 순간이 지나면 또다시 숨통이 트이며 살아나는 것 같았다.술에 취한 탓인지 눈을 떠보면 캄캄한 방에서 몸이 위아래로 흔들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그저 꿈이라고만 생각했다.잠시 후 눈앞에 흰빛이 번뜩이더니 의식을 잃고 잠들어 버렸다.다음 날 아침 잠에서 깨어난 장소월은 온몸이 붕 뜬 듯한 느낌이 들었다.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해 보니 벌써 1시 반이었다.가슴 위에 무언가 짓누르고 있는 것 같아 이불을 들춰보니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를 월이가 엎드려 엄지손가락을 빨고 있었다.장소월은 아이가 불편할까 봐 조심스럽게 안아 옆에 눕혔다.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월이를 보고는 이불을 걷어내고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내려와 슬리퍼를 신었다. 하지만 바닥에 발을 디딘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쓰러져버렸다.그때 방문이 열리고 누군가 들어왔다. 다름 아닌 손이준이었다. 그는 손에 그릇을 들고 있었다.“오빠, 여긴 무슨 일로 오셨어요?”“우리 월이는요?”장소월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자고 있어요.”“왜 그래요?”남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강용, 그만 마셔.”양똥 소주는 확실히 독했다. 강용은 겨우 반병 정도밖에 마시지 않았는데도 좀처럼 몸을 가눌 수가 없었다. 반면 소주 한 병을 모두 비운 손이준은 멀쩡한 얼굴로 음식을 먹고 있었다. 만두는 소현아에게 거의 전부 양보했다.소현아가 혼자서 세 그릇이나 비우는 사이, 장소월은 별로 먹지 않아 거의 공복 상태였던 지라 약간의 어지럼증이 느껴졌다. 그녀는 테이블을 짚고 일어서며 소현아에게 말했다. “현아야, 월이 좀 봐줘. 난 강용을 방에 데려다줘야겠어.”“응, 응. 알았어.”장소월이 손을 대기도 전에, 손이준이 어느새 정신을 잃은 채 테이블에 엎어져 있는 강용을 부축했다. “내가 같이 올라갈게요.”“월이는 여기 얌전히 있을 거예요.”장소월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마를 짚었다. “저 괜찮아요. 소파에 가서 잠깐 누워 있으면 돼요. 오빠, 그럼 강용 부탁 드릴게요.”장소월이 소파에 눕자, 별이는 장난감을 들고 다가와 작은 머리를 들이밀고는 그녀의 체취를 맡았다.“엄마... 냄새 좋아.”별이가 손에 들고 있던 장난감을 내팽개치고 장소월의 품에 파고들었다. 조그마한 몸이 그녀의 품에 쏙 들어왔다.아이는 고개를 젖혀 계속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장소월은 어느덧 깊이 잠든 듯했다.소현아는 다정하게 장소월에게 담요를 덮어주고는 소파 옆에 얌전히 앉아 턱을 괴고 잠이 든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소월이 잠들었으니까 내가 지켜줘야 해.’그때, 2층에서 쿵 소리에 이어 거칠게 닫히는 문소리가 들려왔다. 손이준이 술에 취한 강용을 바닥에 내팽개치고는 냉정하게 뒤돌아 방을 나가버린 것이었다. 강용이 다치든 말든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아래층에 내려와 장소월의 옆을 지키고 있는 어리숙한 여자를 본 순간 그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 서늘한 분위기를 느낀 그녀는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이제 올라가도 돼요.”정신이 번쩍 든 그녀는 서둘러 일어서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자러 갈게요.”소현아는 그에게 겁을 먹은 듯 허
소현아는 잔뜩 신이 난 채 원래 자리에 돌아가 그릇을 들고 강용에게 다가갔다. “닭 다리 먹고 싶어.”강용은 손을 뻗어 닭 다리 두 개를 집어주며 말했다. “말 잘 들었으니까 두 개 줄게.”“고마워, 강용.” 소현아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두 볼에 있는 보조개를 드러내며 빙그레 웃어 보였다. 하지만 곧 의아한 듯 접시에 담긴 닭 다리를 세어보더니 말했다. “...아니야. 내가 하나 더 먹으면 소월이 몫이 모자라잖아. 이건 소월이 줘야겠다.”소현아가 자신을 챙기는 모습에 장소월은 마음이 따뜻해졌다. “난 괜찮아.”시장에서 사 온 닭 다리 외에 손수 만든 만두도 준비되어 있었다.그때 월이가 깨어나 장소월에게 다가가 안아달라고 조르며 팔을 뻗었다.손이준은 차가운 얼굴로 아이를 꾸짖었다. “이쪽으로 와.”울먹거리는 아이를 본 장소월은 가엾은 마음에 말했다. “괜찮아요. 제가 먹일게요.”장소월은 젓가락을 내려놓고 아이를 안아 올리려 했지만, 순간 손목에 격렬한 통증이 밀려와 힘이 풀려 아이를 놓칠 뻔했다. 다행히 강용이 재빨리 아이를 잡았다.“괜찮아? 아직 손목 안 나은 거야?”장소월은 통증을 참으며 아이를 받아 안았다. “괜찮아. 고질병이지 뭐.”“미안해, 월아. 많이 놀랐지?”그녀를 올려다보는 월이의 초롱초롱한 눈동자엔 조금의 무서움도 들어있지 않는 듯했다. 오히려 장소월과 놀이를 하고 있는 것 같은 잔뜩 신이 난 모습이었다“오빠, 죄송해요. 예전에 손을 다쳐서 무거운 걸 잘 못 들어요. 하마터면 월이를 떨어뜨릴 뻔했어요.”손이준은 듣는 둥 마는 둥 식탁 위의 음식을 먹으며 대답 대신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장소월은 이상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왜 손이준은 저 아이에게 전혀 관심이 없어 보이는 걸까.식탁 분위기는 소현아와 강용이 주도했다. 강용은 소현아를 즐겁게 해주려고 일부러 장난도 치고 있었다. 그녀가 까놓은 땅콩을 보니 흥이 올라 술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얼마 후 음식점 사장이 맥주 한 상자를 배
규영이 나직이 말했다. “우리 계획이 효과를 본 것 같네. 나중에 현아 아가씨 만나면 꼭 이 일을 잘 마무리할 수 있도록 부탁해야겠어.”미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사실 강지훈은 그 편지를 믿지 않았다. 머릿속에 차 있는 거라곤 먹는 것과 자는 것밖에 없는 여자니까. 처음 그녀를 곁에 둔 건 단지 재미있다고 생각해서였다.편지지 위에 떨어진 눈물 한 방울을 본 순간 차갑기 그지없는 그의 눈동자가 부드러워졌다. 배 속의 아이를 생각하면 묘하게 벅차오르는 듯한 특별한 감정이 들기도 했다.소현아는 사나운 늑대가 쫓아오는 공포스러운 꿈을 꿨다. 죽을힘을 다해 도망쳤지만, 좀처럼 벗어날 수가 없었다.소현아는 급기야 슬프게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때 귓가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바보야, 바보야...” “빨리 일어나! 안 일어나면 만두 다 먹어버린다!”그 말에 소현아는 번쩍 눈을 떴다. 눈앞에 있는 강용을 보자마자 와락 껴안았다. “흐어엉, 강용, 나 악몽 꿨어. 늑대가 우리 아기를 잡아먹으려고 막 쫓아왔어.”갑작스러운 포옹에 강용은 온몸이 굳어버렸다. 그는 그녀의 몸에 닿지 않도록 손을 들어 올리고 당장이라도 밀어내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고 있었다.강용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야, 멍청아. 살살 좀 해. 숨 막혀 죽겠다.”소현아는 훌쩍이며 강용을 놓아주었다. “너무 무서웠어.”강용은 그녀의 슬리퍼를 침대 옆에 가져다 놓았다. “됐어. 꿈일 뿐이야. 내려가서 밥 먹어. 몇 그릇 먹으면 바로 잊혀질 거야.”“옷 제대로 입고 내려와. 밑에서 기다릴게.”“응, 응.”소현아는 신발을 신으며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오늘 강용이 신발 챙겨줬다. 헤헤.’“강용, 잠깐만. 나랑 아기랑 같이 가!”벌써 가버렸을 줄 알았던 강용은 사실 두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눈에 띄게 발걸음을 늦추며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소현아는 그의 옷자락을 붙잡고 조심스레 계단을 내려갔다.배가 점점 불러오면서 걷는 것조차 힘들어지는 것 같았다.두 사람의
과연 정말 그럴까?강지훈이 내뱉은 말, 그리고 소현아 배 속의 아이...소씨 부인을 돌려보낸 후, 규영은 별장 거실로 돌아와 살기를 가득 내뿜고 있는 주인님에게 용기를 내어 다가가 말했다. “주인님, 현아 아가씨는 외국에 있는 동안, 사실 주인님을 많이 그리워했습니다...”“나를?” 어지럽게 흩어졌던 남자의 시선이 다시 한곳에 모였다. 도우미들은 처음 보는 감정이 그의 얼굴에 드러났다.미경도 서둘러 다가가 말했다. “맞습니다! 현아 아가씨는 병원에서 매일 주사를 맞으셨습니다. 주인님도 아시겠지만, 아가씨는 주사 맞는 걸 제일 무서워하십니다. 감기에 걸려 의사가 올 때마다 주인님 품에 숨곤 하셨지요. 현아 아가씨는 주사를 맞을 때마다 늘 주인님의 성함을 부르셨습니다.”“그리고... 현아 아가씨 방에서 주인님에게 쓴 편지 한 통을 발견했습니다.”강지훈은 처음으로 옆에 있는 미인을 무시해 버린 채 그들에게 집중하고 있었다.천효연이 다급하게 그를 불렀다. “지훈 씨.”규영이 건넨 편지를 받은 뒤, 강지훈은 분홍색 봉투를 열었다. 삐뚤빼뚤한 글씨가 눈에 들어오자, 그는 혐오스러운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렸다.[강지훈 씨, 내가 잘못했어요. 사실 당신 없이 사는 거 하나도 즐겁지 않아요. 여기 의사들 매일 나한테 주사를 놔요. 팔이 아파 죽겠다고요! 심지어 머리에도 주사를 놔요. 내가 말을 안 들으면 의사는 화까지 내면서 주사를 놓는 것도 모자라 밥도 안 줘요. 주사 맞고 나면 팔뚝이 멍투성이가 되는데, 지금 글씨 쓰는 것도 아파요.규영과 미경의 말로는 내 배 속에 아기가 생겼대요. 하지만 이 사실을 강지훈 씨한테 말하면 안 된다고 했어요. 지훈 씨는 아기를 싫어하기 때문에.흑흑흑... 그럼 나도 아기 안 낳을래요.강지훈 씨, 이 병원 안엔 재미있는 게 하나도 없어요. 집에 가서 아빠랑 엄마 보고 싶어요. 그리고 민아, 소월이...나 언제 데리러 올 거예요!너무 배고파요!규영과 미경은 또 나한테 먹을 것을 아무것도 안 줬어요.강지훈 씨,
“몰라요.”손이준이 짧게 대답했다.강용은 그를 힐끗 쳐다보았다. 오만하기 그지없는 그의 모습에 더 이상 묻지 않기로 했다.그 멍청이의 일은 더는 미루면 안 된다.강용은 밖으로 나가 자전거 한 대를 빌렸다. 하지만 알아보니 가장 번화한 시내로 가려면 100km도 훌쩍 넘는 거리라 반드시 차가 있어야 한다고 한다. 그는 곧바로 렌터카 매장에 전화해 차를 보내 달라고 부탁했다.다만 차는 내일이나 되어야 도착한다고 한다.오늘 밤 짐을 정리하고 내일 떠나면 될 것이다.두 남자는 아래층 거실에 남아 만두를 빚기 시작했다. 처음엔 조금만 빚어 놓으려고 했건만, 한번 시작하니 한 시간도 훌쩍 넘겨버렸다.서울.강지훈은 소현아의 행적에 대해 조사한 결과를 토대로 러시아 전역을 샅샅이 뒤졌지만, 그녀의 흔적은 찾지 못했다. 최고급 호텔부터 기차역, 심지어 눈에 띄지 않는 지하 클럽까지 그의 세력이 닿지 않는 곳이 없는데도 말이다.어쩌면 무소식이 희소식일 수도 있다.북경 감옥 전체는 살얼음판을 걷듯 바짝 긴장한 상태였다. 강지훈은 평소 가장 아끼던 여자한테조차 흥미를 잃은 듯 보였다.그녀는 남자의 사랑을 잃고 말았다.“소씨 집안 쪽에선 아직 소식 없어?” 강지훈은 왕좌에 앉아 아랫사람들을 내려다보며 물었다.부관이 말했다. “명령하신 대로 소씨 집안을 며칠 동안 지켜봤습니다. 그 사람들은 소현아 씨가 해외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 같았습니다.”“소현아 씨의 아버지는 심장이 좋지 않습니다. 만약 실종 사실을 알게 된다면 버티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그럼 소현아 씨가 돌아와 슬퍼할 테니, 현재 가장 좋은 방법은 소 씨 집안 사람들에게 숨기는 것입니다.”규영과 미경이 밖에서 걸어 들어와 보고했다.“주인님, 소씨 집안 사람들이 또 찾아왔습니다.”강지훈은 미간을 찌푸리며 차가운 눈빛을 번뜩였다. “돌려보내. 그쪽에서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떤 후과가 있을지 알지?”“네, 주인님.”그 바보는 임신한 몸으로 대체 어디까지 도망간 걸까?천
강용 역시 장소월이 우울증 때문에 오랫동안 몰래 항우울제를 복용해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장씨 집안에 있을 때도, 전연우의 곁을 떠나도...그녀의 병은 좀처럼 나아질 줄을 몰랐다.강용에게 있어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은 괴로워하며 눈물 흘리는 장소월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다. 그녀는 이미 너무나 많은 고통을 감내해 왔다.전연우가 그녀에게 남긴 상처와 흉터는 이제 모두 옅어졌지만, 마음속의 상처는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것 같았다.그녀의 손은... 무거운 물건조차 들 수 없을 정도로 망가졌다. 다른 힘든 일은 더더욱 할 수 없다.그녀는 붓을 쥘 때마다 손목이 욱신거렸지만... 그럼에도 그림은 포기하지 않으려 애쓰고 있다.강용은 그녀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의 곁에서 위로의 말을 건네주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다.그녀는 가족도 없이 늘 혼자였다...사실 장소월은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니었다. 처음 만났을 땐 오만하고 도도한 성격의, 모든 이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귀하디귀한 아가씨였는데...그녀는... 이렇게 험난한 가시밭길을 걸어선 안 되는 사람이다.“가끔은 나도 현아처럼 마음 편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해. 현아처럼 아무것도 기억하지 않고, 걱정 없이 살 수 있다면...”“강용... 나 떠나고 싶지 않아... 하지만 혹시라도 버틸 수 없을까 봐 너무 두려워.”강용은 너무 마음이 아파 온몸이 굳어지는 것 같았다. 그는 그녀를 품에 와락 껴안고 온기를 나누어주었다.“아니, 그럴 일 없을 거야. 너한텐 내가 있잖아. 무슨 일이 있어도 난 네 곁에 있을 거야. 네가 원하는 건 뭐든 다 해줄게. 나 현아도 조금도 싫어하지 않아. 정말이야!”“나는 단지 걔가 너한테 자꾸 들러붙는 게 질투 났을 뿐이야.”“소월아, 여기서 지내는 게 불편하면 내일이라도 떠나자. 걸어서라도 가지 뭐.”“강용, 나한테 재앙이라고 했던 송시아의 말이 맞는 것 같아. 내 곁에 있던 사람들은 다 불행해졌어. 너, 강영수, 인시윤, 그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