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봉을 본 김남주가 손에 들고 있던 사진을 내려놓고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오랜만이야! 강영수.”강영수가 싸늘한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며 한 걸음 한 걸음 걸어왔다.“누가 너한테 돌아오라고 했어? 다시는 내 눈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말했잖아!”김남주가 피식 웃으며 손가락으로 책상을 스르륵 쓸어내리고는 그의 앞에 멈춰 섰다.“날 보고 싶어 했던 건 너잖아? 너 설날 밤 내내 내 곁에서 날 지켜줬었잖아. 잊었어?”“시끄러워. 진봉, 경호팀에 연락해 끌어내. 앞으로 한 발자국도 회사에 들이지 마. 또다시 이 여자를 들어오게 한다면 프런트 직원 모두를 해고시킬 테니까 명심해.”진봉이 말했다.“네. 대표님.”강영수는 더는 그녀를 보고 싶지 않아 몸을 돌려 사무실에서 나왔다.김남주가 그의 뒷모습을 향해 소리쳤다.“영수야, 내가 왜 널 떠났는지 알고 싶지 않아?”그 말에 강영수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동시에 진봉은 김남주의 눈빛에서 무언가 무너지고 있음을 느꼈다.강영수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점점 멀어져가는 강영수의 모습에 김남주는 심장이 찢겨나가는 것 같았다.“강영수, 넌 평생 나한테서 벗어날 수 없을 거야!”진봉이 그녀에게 다가가 말했다.“김남주 씨, 대체 왜 이러시는 거예요. 대표님은 이제야 겨우 괜찮아지셨습니다. 더는 찾아와 힘들게 하지 마세요. 대표님께서 주신 그 돈이면 남은 평생 편히 살 수 있잖아요.”김남주가 다시 선글라스를 쓰고 차갑게 그를 노려보았다.“진봉, 당시 나와 영수가 헤어진 데엔 네 공로도 작지 않았어. 네가 무슨 자격으로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야?”“하지만... 아가씬 다른 남자 때문에 대표님을 버렸잖아요. 대표님께서 예전 아가씨한테 얼마나 잘해줬는지 잘 알 거예요. 지금 사진 속 저 여자분에게도 마찬가지예요. 그러니까 저 여자분에게 다른 마음은 먹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지금의 대표님은 예전처럼 호락호락하지 않아요. 당신은 이제 영원히 대표님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될 수 없어요.”진봉의 말은 모두 사
하지만... 강영수 이 자식 왜 약속을 지키지 않은 거야!김남주는 혼자 외롭게 해외에서 살다가 자신이 고용한 파파라치로부터 사진을 받았다. 강영수가 다른 여자와 다정히 손잡고 있는 모습을 보고 곧바로 귀국해버린 것이다.그녀는 이 모든 것이 진실인지 자신의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해보고 싶었다.조금 전 사무실 책상 위 사진을 본 뒤에야 전부 사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높이 솟아있는 강한 그룹 건물을 올려다보니, 김남주는 눈물이 왈칵 차올랐다.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고 따라서 검은색 아이라인도 천천히 씻겨 내렸다. 얼마나 걸었을까, 김남주는 아예 길바닥에 주저앉아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 지나가던 사람들은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보며 그녀와 멀리 떨어져 지나쳤다.몇 분 뒤, 검은색 승용차가 김남주의 앞에 멈춰 섰다.검은색 정장을 입은 경호원이 차에서 내렸다.“김남주 씨, 사모님께서 김남주 씨가 돌아온 걸 아시고 뵙자고 하십니다. 차에 타세요.”김남주가 마음을 가라앉히고 조수석에 앉아 차에 있는 휴지로 눈물을 닦고는 다시 화장을 했다.“몇 년이나 흘렀는데 그 노친네는 아직도 안 죽었나 봐?”운전기사가 흠칫 놀라며 말했다.“아가씨, 말조심하세요!”김남주는 조금 전 목놓아 울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예전에도 그렇게 말했어. 너희들 대표님도 나한테 뭐라고 못하는데 네가 뭔데 날 꾸짖어!”운전기사는 더이상 말하지 않았다.30분 뒤, 김남주를 태운 차가 강씨 저택에 도착했다.그녀는 익숙하게 안으로 걸어갔다. 그녀가 집안에 들어가려 하자 도우미가 그녀를 멈춰 세웠다.“아가씨, 노부인께서 이쪽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김남주는 아래턱을 빳빳이 올리고 도우미를 따라갔다.검소한 차림의 백발의 노부인이 마당 안 벤치에 앉아 팥죽을 먹고 있었다.“오랜만이에요! 아직 생전이실 줄은 몰랐네요!”노부인은 그녀를 무시해버린 채 계속하여 팥죽을 즐겼다. 그녀가 허허 웃으며 옆에 서 있는 도우미에게 말했다.“소월이의
“넌 졌어.”“우리 강씨 집안은 지금까지 너라는 외부인에게 할 만큼 했어.”노부인이 그녀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넌 여전히 그대로구나. 할 말 끝났으니 이제 가. 아줌마, 손님 가신다.”노부인의 말투는 너무나도 단호했고 눈빛엔 냉담함과 혐오감이 가득했다.노부인은 확실히 김남주가 싫었다. 그 여자가 아니었다면 영수는 학창시절 그토록 많은 고생을 하지 않았을 것이니 말이다.아줌마가 말했다.“네. 사모님.”“아가씨, 이쪽으로 오세요.”김남주는 도저히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어 소리쳤다.“제가 이 일을 영수에게 알려주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요? 당신이 아니었다면 저와 영수의 관계는 지금처럼 망가지지 않았을 거예요.”노부인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5년 전 넌 우리 강씨 집안에 발을 들이지 못했어. 지금도 마찬가지야. 난 절대 네가 또다시 내 손자를 해치게 놔두지 않을 거야.”김남주는 그렇게 강씨 저택에서 쫓겨났다. 위풍당당하던 자태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고 대신 처참히 무너져버린 패배자의 모습만 남아있었다.그녀는 강영수가 이렇게 쉽게 자신에 대한 마음을 놓았다는 것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김남주는 한 번 또 한 번 익숙한 번호에 전화를 걸었지만 돌아오는 건 없는 번호라는 야속한 기계음뿐이었다.그녀가 돌연 얼굴을 굳히더니 누군가에게 문자를 보냈다.「당신과 손잡을게요. 하지만 절대 그 사람을 다치게 하면 안 돼요.」문자를 보내고 발걸음을 뗀 순간,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졌다. 고개를 들어보니 하늘 전체가 어둠에 잠식되어 버린 것 같았다.김남주는 돌아오기 위해 연속 며칠을 제대로 쉬지 못했다. 하여 순간 정신을 잃고 쓰러진 것이다....장소월은 하교할 때가 거의 되어서야 왜 학생들이 이상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았는지 알 수 있었다.소현아가 매점에서 잡지 하나를 사와 그녀에게 가져다주었다. 자신과 강영수가 해성에서 다정히 산책하는 모습이 표지에 담겨있었다.대체 왜 몰래 찍은 것도 모자라 표지에까지 올려 곳곳에 뿌린단 말인가.이제
“재미도 없고 흥미도 없어요.”“연예계에 얼굴을 들이밀었다간 아버지한테 맞아 죽을게 분명해요.”“조선 시대엔 연기하고 노래하는 딴따라가 바로 기생이었잖아.”한결이 멋쩍은 얼굴로 감독님을 바라보았다.감독님이 허허 웃으며 말했다.“네네네. 여러분들은 모두 귀한 집 도련님 아가씨라는 거 알아요. 그저 관심이 있는지 물으러 왔을 뿐이에요. 강요하지 않아요.”그때, 감독님의 눈에 창가 쪽 자리에 앉아있는 장소월이 들어왔다. 순간 그의 눈이 반짝였다.“장소월 씨?”장소월이 펜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네? 절 아세요?”감독님은 반가운 얼굴로 앞으로 걸어갔다.“어떻게 모를 수가 있겠어요. 이번 영화는 강 대표님의 투자로 진행되고 있는걸요. 연기에 관심 있다면 여주인공 역할을 줄게요. 마음에 들지 않는 장면이 있다면 저희가 밤을 새우더라고 수정할 거예요.”장소월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죄송해요. 전 연기엔 관심이 없으니까 다른 사람을 찾아보세요. 도무지 풀리지 않는 문제가 있어서 전 고 선생님의 사무실로 가볼게요.”감독님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알겠어요. 이건 제 명함이에요. 혹시라도 관심이 생기면 언제든 날 찾아와요. 나한테 대본이 아주 많거든요. 오기만 하면 남자 주인공은 소월 씨가 선택할 수 있게 해줄게요.”장소월은 어쩔 수 없이 웃으며 두 손으로 명함을 받았다. 이후 문제집을 안고 교실에서 나갔다.지금까지 그녀와 강영수의 관계를 아는 건 학교 안 사람으로 국한되었다. 하지만 잡지에 실린 이후 웬 감독님이 찾아왔고 이걸 시작으로 한 명씩 더 늘어날 수도 있을 것이다.최근 장소월은 강영수와 함께 학교에 오는 길에서 마스크를 쓰고 은밀히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고 있는 사람을 본 적이 있다. 그녀는 그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의 사생활을 까발리는 파파라치라는 걸 알고 있었다.그녀는 종래로 다른 사람의 가십에 관심을 가진 적이 없다. 하지만 자신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이야기의 주인공이 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녀는 누
장소월도 고개를 끄덕이며 허철에게 인사했다.“참, 2등, 나 이 문제 어떻게 푸는지 모르겠는데 좀 알려줄래?”장소월이 의문스러운 얼굴로 물었다.“왜 자꾸 날 2등이라고 부르는 거야?”단모연이 책을 펼쳐 장소월의 책상에 놓으며 말했다.“우리 이준이는 전교 1등이고 넌 2등이잖아. 그래서 그렇게 부르는 건데?”그런 거였어?장소월이 옆으로 시선을 돌리고는 고개를 저었다.“나도 모르겠어. 전교 1등한테 물어봐.”단모연이 시무룩한 얼굴로 말했다.“이준이는 안 가르쳐줘.”“하지만... 나도 모르겠어. 이준아, 너 이 문제 어떻게 푸는지 알아? 우리한테 가르쳐주면 안 돼?”허이준이 책가방에서 똑같은 문제집을 꺼냈다.“가져가서 봐. 모르겠으면 물어보고.”허이준의 문제집을 살펴본 장소월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너... 벌써 다 푼 거야? 언제 푼 거야? 어떻게 이렇게 빨리 풀 수가 있지?”단모연이 입술을 꽉 깨물고 말했다.“이 미친놈은 문제집을 받은 지 일주일 만에 다 풀었어.”이게 바로 전설 속의 천재라는 건가?장소월은 성적을 올리기 위해 매일 밤 열두 시가 되어서야 침대에 누웠다. 잠이 들기 전 몇 개의 영어 단어를 외우는 것도 잊지 않았다.“쟨 과외도 안 해?”“과외는 무슨 과외야. 중학교 땐 더 미쳤었다니까. 3년 내내 나랑 짝꿍이었는데 매일 수업시간에 잠만 자고서도 시험만 봤다 하면 전교 1등이었어.”“그렇게 대단하다고?”“너희들 무슨 얘기를 그렇게 재밌게 하는 거야? 나도 대화에 낄 수 있을까?”백윤서가 책가방을 안고 교실로 들어왔다.달아올랐던 분위기가 어쩐 일인지 순식간에 차갑게 식어버렸다.장소월이 말했다.“아무것도 아니에요. 문제에 대해 토론했을 뿐이에요. 언니는 왜 온 거예요?”백윤서가 장소월의 옆자리에 앉으며 말했다.“그 감독님이 우리 교실에서 영화를 찍어야 한다고 해서 왔어. 네 책가방도 가져왔는데 빠뜨린 거 없는지 확인해봐.”장소월이 책가방을 받아안았다.“고마워요.”평소라면 장소월은 가장 늦게 하
그저 초췌한 얼굴로 낮은 목소리로 말할 뿐이었다.“네 물건 모두 정리해서 가져가. 그리고... 다시는 오지 마.”방에 들어가 보니 누군가 이미 청소를 해놓은 것처럼 먼지 하나 없이 깨끗했다.그녀는 아무 생각 없이 문을 잠그고 책가방을 내려놓고는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이불을 덮고 침대에 누웠다.바깥에서 싸우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지만 머리가 너무 아파 전혀 관여하고 싶지 않았다. 머리가 깨질 듯한 두통이 얼마간 지속된 후, 그녀는 스르르 잠이 들었다.새벽 한 시.브레이크 소리가 깊은 밤의 적막을 깼다. 강영수가 차에서 내려 집을 올려다보니 거실 불이 아직 켜져 있었다.그가 피곤한 몸을 이끌고 현관에 들어갔을 때 도우미가 의아한 얼굴로 말했다.“도련님, 소월 아가씨와 함께 계신 거 아니었어요?”강영수의 얼굴이 굳었다.“소월이 안 돌아왔어요?”돌연 그에게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도우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네. 아가씨가 운전기사한테 오늘 밖에서 잘 거라고 하셨대요. 그래서 전... 도련님과 함께 있는 줄로 알았어요.”강영수는 병원에서 나온 뒤 핸드폰을 봤었지만 부재중 통화나 읽지 않은 문자 메시지는 와있지 않았다.그가 한 번 또 한 번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으나 줄곧 꺼져있는 상태였다.뼈를 에일 듯한 차가운 분위기가 그의 몸에서 분출되었다.“왜 똑바로 물어보지 않은 거야! 소월이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다들 내 눈앞에서 꺼져버려야 할 거야! 멍하니 서서 뭐 하고 있어! 얼른 나가 찾아보지 않고!”“네... 도련님.”도우미는 강영수가 이토록 불같이 화내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도우미가 나가자 다리가 또다시 발작을 일으키는지 강영수의 몸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그는 소파에 앉아 손으로 이마를 짓눌렀다. 그는 너무나도 무섭고 불안했다. 오늘 김남주에게 가는 게 아니었다.만약 장소월이 그 일을 알게 된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그는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경호원이 학교 부근의 호텔과 술집들을 샅샅이 뒤져보았으나 장소월의
장소월은 아무것도 모르고 잠들어 있겠지만, 강영수는 이미 서울 전체를 뒤집어엎을 수 있을 만큼 미쳐가고 있었다.새벽, 한 줄기의 빛이 창문을 비추며 들어왔다. 조용한 낡은 거리에 자리 잡은 가게들이 하나둘씩 아침 장사를 시작했고 이어 향기로운 음식 냄새가 코를 간지럽혔다.그때, 검은색 고급 세단 몇 대가 줄줄이 들어와 아파트 단지에 멈춰 섰다.오부연이 말했다.“소월 아가씨는 예전 이곳에서 한동안 머무른 적이 있습니다. 제 생각엔 이곳에 있을 것 같습니다.”밤새 한숨도 자지 못해 잔뜩 피곤해진 얼굴의 강영수가 다급히 차에서 내렸다. 낡고 더러운 거리를 보니 이마가 저절로 찌푸려졌다. 소월이가 어떻게 여기에 있을 수 있단 말인가!군데군데 벽이 떨어져 있고 당장이라도 무너져버릴 것만 같은 이 건물에 아직도 사람이 살고 있다니.그때, 장소월은 욕실에서 씻고 나온 뒤 머리카락을 말리고는 어젯밤 더러워진 소파 시트를 벗겨 세탁기에 넣었다.어제는 머리가 너무 아파 거실에서 봤던 장면에 대해 조금도 관여하지 않고 빠르게 잠이 들었었다.하지만 좀 추웠는지 아침에 깨어나 보니 코가 조금 막혔다.그녀는 수술을 한 뒤 몸이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을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그때, 누군가 쾅쾅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장소월은 누구인지 묻지도 않고 문을 열었다.장소월이 반응하기도 전에 강영수가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그녀가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영수야, 나 아파! 너 왜 온 거야?”강영수는 그녀를 본 순간 모든 것을 얻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미안해!”장소월은 그의 말뜻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옆에 서 있는 진봉과 오부연의 모습도 보였다. 아니... 다 데려올 필요는 없었잖아!한동안 그녀를 품에 꼭 끌어안은 뒤에야 강영수가 장소월을 놓아주었다.그녀는 새로운 소파 시트로 교체한 뒤 사람들을 소파에 안내했다. 그녀는 강영수에게 방금 끓인 따뜻한 물을 건네고는 그의 옆에 앉았다.“미안해요. 본의 아니게 여러분들을 걱정시켰네요. 어젯
장소월이 전화를 받고 오니 진봉과 오부연은 이미 나가고 방안엔 두 사람만 남아있었다.강영수는 확연히 어두워진 장소월의 안색을 보고 물었다.“무슨 일 있어?”장소월이 말을 얼버무렸다.“그냥 어젯밤 일을 물으셨어. 아무것도 아니야.”사실 그녀는 장해진에게 호되게 혼이 났다. 갖은 욕설을 모두 들었으니 낯빛이 밝을 리가 없었다.장소월이 말했다.“내가 죽을 끓여뒀는데 같이 먹을래? 아직 이른 시간이니 먹고 나서 조금 잘 수 있을 거야.”강영수가 깊은 눈동자로 지긋이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래.”아침밥을 먹은 뒤, 강영수를 데리고 방으로 들어갔다.방 안은 깨끗이 청소되어 있었고 침대 위엔 눈에 띄는 커다란 인형 하나가 놓여 있었다.장소월이 이불을 정리하며 말했다.“너희 집보단 협소해 좀 불편할 거야. 잠시 눈만 붙여.”강영수가 말했다.“내가 자면 넌 뭘 하려고?”“이왕 깼으니 거실에서 숙제를 하려고.”강영수가 그녀의 손을 잡아당겼다.“나랑 같이 자자.”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장소월은 처음엔 거절하고 싶었으나 그가 밤새 자신을 찾아 헤맸다는 사실이 떠올라 마음이 약해져 고개를 끄덕였다.장소월은 등을 돌리고 침대에 누웠다. 남자의 뜨거운 몸이 등 뒤에서 그녀를 꼭 끌어안았지만 그녀는 인형처럼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알람이 울리자 장소월은 조심스레 침대에서 내려왔다. 강영수는 아직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그녀가 슬리퍼를 신고 문을 나서려고 할 때 책상에 올려놓은 핸드폰이 진동했다. 그녀의 것이 아닌 강영수의 핸드폰이었다.화면을 살펴보니 김남주라는 이름이 떠 있었다.익숙한 이름이었지만 곧바로 생각해내지는 못했다.그녀는 본래 강영수의 잠을 방해할까 봐 전화를 끌 생각이었지만 결국 끄지 않고 거실로 갖고 나왔다.거실 소파에 앉아있던 진봉이 장소월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소월 아가씨.”그의 시선이 장소월이 들고 있는 핸드폰으로 향했다.장소월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문을 가리키며 소곤소곤 말했다.“아직 자고 있어요. 조금 전 누
분개하고 있던 천효연의 시야에 문득 옆 방문 앞에 놓인 목욕 가운이 들어왔다.목욕 가운 허리띠에는 검은색 은은한 무늬가 수 놓여 있었는데 누가 봐도 강지훈의 것이었다!강지훈이 그녀를 침대에 버려두고 저 바보 같은 여자를 찾아온 것이다!그 사실을 깨달은 천효연은 그야말로 미칠 지경이었다.강지훈은 바람기가 있긴 했지만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이라고 천효연은 당당히 말할 수 있었다. 하여 그녀는 강지훈이 바깥에서 몇 명의 여자를 만나든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하지만 저 바보 같은 여자가 나타난 이후로, 강지훈은 그녀를 안고 있으면서도 정신이 딴 데 가 있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심지어 그 바보를 위해 그녀에게 손찌검까지 했다!설상가상으로 그 바보는 강지훈의 아이까지 가졌다...천효연은 간신히 벽에 몸을 기댄 채 바닥에 놓인 목욕 가운을 쏘아보았다. 동시에 숨을 죽이고 방 안에서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하지만 한참이 지나도록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도우미가 다가오자 천효연은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일어서 요염한 자태로 몸을 돌려 자리를 떴다.“아.”소현아는 입을 크게 벌리고 미진이 밥을 먹여주기를 기다렸다.그녀도 남의 손을 빌려 밥을 먹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오늘 아침 일어났을 때부터 손목이 끊어질 듯이 아파 어쩔 수가 없었다.아침밥은 강지훈이 직접 먹여주었었다. 하지만 무슨 일이 생겼는지 규영과 미진에게 밥을 먹여주라고 지시하고 서둘러 떠났다.“아가씨, 오늘은 어디 불편한 곳 없으신가요?”어제 주인님의 모습은 너무나 무서웠다. 그가 아이를 해치지는 않았을까, 규영과 미진은 걱정이 태산이었다.그들의 마음을 알 리 만무한 소현아는 고개를 흔들었다가 다시 끄덕였다.“손목이 너무 아파요. 어떡하죠?”두 사람은 안도하며 미소를 띤 채 그녀를 달랬다. “이따가 저희가 마사지해 드리면 괜찮아지실 거예요.”소현아는 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점심 식사를 마친 후, 규영과 미진은 의사의 말에 따라 소현아를 데리고 방안을 걸어 다녔다.
강지훈의 움직임은 이전 그 어느 때보다 격렬했다.소현아는 배가 짓눌리는 느낌에 불안해졌다. 또한 콧속으로 불쾌한 향수 냄새가 흘러들어왔다.“윽...”너무나 불편하니 그만해달라고 강지훈에게 말하고 싶었지만, 그가 입을 틀어막고 있어 다급해진 소현아는 그의 입술을 꽉 깨물어 버렸다.순간 입안에 비릿한 피 냄새가 퍼져나갔다.강지훈이 통증에 약간 뒤로 물러섰다.“강지훈 씨 때문에 아기가 눌렸어요. 그리고 당신한테서 이상한 냄새 나요. 토할 것 같아요.”소현아는 찡그린 얼굴로 몸을 일으켜 앉아 퉤퉤 침을 뱉었다.강지훈의 서늘한 표정을 본 소현아는 토끼처럼 재빨리 배를 감싸 안고 구석으로 도망쳤다.험악한 인상에 입가에 피까지 묻히고 음침한 눈빛을 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사납기 그지없었다.소현아는 겁을 먹고 몸을 웅크렸다.“의사 선생님이 아기 다칠 수도 있다고 이러면 안 된다고 했잖아요. 다른 사람 찾아가서 같이 자요. 하지만 자고 나서는 깨끗하게 씻고 저 찾아와야 해요. 낯선 냄새가 나면 토할 것 같단 말이에요.”그녀가 코를 찡그리며 말했다.“지금 당신 옷에서 이상한 냄새 나요. 도우미 언니들 몸에서 나는 향수 냄새 같아요. 저도 싫고 아기들도 싫어할 거예요.”강지훈은 그녀의 천진난만한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마음속의 욕망은 가라앉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격렬하게 끓어올랐다.눈앞의 이 토끼 같은 여자를 당장이라도 삼켜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그는 몸에 걸치고 있던 목욕 가운을 벗어 던지고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옷 벗으니까 냄새 안 나지? 이리 와.”소현아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안 갈래요. 당신 때문에 아기가 다칠 수도 있으니까 다른 사람 찾아가세요.”강지훈의 눈빛이 험악하게 변했다. “네가 올래, 아니면 내가 갈까?”소현아는 밖으로 도망쳐 나가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하지만 문까지 도착하기도 전에 강지훈에게 붙잡혀 다시 끌려가고 말았다.그의 무릎에 앉혀진 소현아가 또 울먹거리기 시작하자 강지훈이 소리쳤다.“울지 마!”강지훈도 어
“지훈 씨, 아랫부분으로 도와줄게요...”그녀의 말은 파편처럼 흩어져버렸다. 강지훈은 끝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천효연은 더 이상 요염한 표정을 유지할 수 없었다. 너무나 고통스러워 손가락으로 강지훈의 다리를 꽉 움켜쥐어 길게 할퀸 자국까지 남겼다.죽을 것 같이 괴로워하는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면서도 강지훈의 마음속엔 조금의 파동도 일지 않았다.여전히 어딘가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그는 짜증 섞인 얼굴로 천효연의 입에서 물건을 빼내고 그녀를 잡아 벽에 밀어붙인 다음 다시 아래로 밀어 넣었다.질식하기 직전, 천효연은 삽입을 알아차리고 재빨리 허리를 비틀며 그에게 맞춰 움직였다.“지훈 씨, 정말 대단하네요...”강지훈의 붉게 충혈된 두 눈엔 살기가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손에 잡히는 대로 천 조각을 그녀의 입에 쑤셔 넣었다.천효연의 목소리는 입안에 갇혀버렸다. 쾌감에 찡그려졌던 미간이 더욱 깊게 찌푸려졌다.왜 소리를 내지 못하게 하는 걸까? 예전에는 분명 신음소리를 내는 걸 좋아했었는데...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천효연은 기진맥진하여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제서야 강지훈은 그녀의 몸에서 빠져나왔다. 하지만 흥분은 아직도 가라앉지 않았다.그는 침대에 널브러진 여자를 힐끗 보고는 미간을 찌푸린 채 일어나 욕실에서 간단히 씻은 뒤, 침대 머리맡에 놓인 새 잠옷을 아무렇게나 집어 들고 소현아의 방으로 향했다.소현아는 간신히 울음을 그치고 규영과 미진의 보살핌을 받으며 음식을 먹고 있었다.강지훈이 옆에서 방해하지 않으니 밥상에 차려진 맛있는 음식을 와구와구 먹고 있었다.규영과 미진의 얼굴엔 걱정이 가득했다.“아가씨, 오늘 너무 많이 드셨어요. 의사 선생님께서 조금만 드시라고 하셨잖아요...”소현아는 퉁퉁 부은 눈으로 그들을 가련하게 바라봤다.“이번 한 번만 먹을게요. 강지훈 씨가 먹으라고 했어요. 못 믿겠으면 직접 물어보세요.”확실히 강지훈이 시킨 것이다. 하여 더 이상 말을 하진 않았지만, 걱정스러움은 여전히 가시지 않았다.그때 강지훈
소현아의 울음은 좀처럼 멈출 줄을 몰랐다. 강지훈은 잠시 달래주다가 금세 인내심이 바닥났다.그는 탈옥수를 쫓느라 며칠 동안 뜬눈으로 지새웠음에도 부랴부랴 먼 길을 달려 집에 돌아왔다. 한시라도 빨리 이 여자를 품에 안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그녀가 이토록 난동을 부릴 줄이야.“아직도 다 못 울었어?”강지훈은 그녀를 품에 가두고 한 손으로 턱을 쥐어 억지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소현아의 속눈썹은 눈물에 젖어 엉겨 붙어 있었다. 너무 심하게 울어서인지 딸꾹질이 멈추지 않아 괴로워진 그녀는 힘껏 입술을 깨물었다.딸꾹질을 멈추려는 그녀의 생각을 알아챈 강지훈은 손가락을 움직여 그녀의 입술을 벌리고 안에 집어넣었다.조금씩 훌쩍거리던 소현아가 또다시 울음을 터뜨렸다.“당신 싫어요. 당신은 전연우랑 똑같이 나쁜 놈이에요! 소월이한테 갈 거예요. 소월이는 나 굶기지 않을 거라고요...”“흐엉, 소월이가 해주는 밥 먹고 싶어요. 소월이가 만든 밥이 제일 맛있는데...”한참을 울고 나서도 머릿속엔 여전히 먹을 것뿐이다.강지훈은 욱신거리는 관자놀이를 문지르고는 한 손으로 그녀를 안고, 다른 한 손으로 전화를 걸었다.“요리사한테 다시 음식을 만들어 가져오라고 해!”잠시 후 따뜻한 음식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향긋한 냄새를 맡자 소현아의 울음소리가 서서히 멈추었다. 그녀는 강지훈의 몸에서 내려와 식탁에 앉아 천천히 먹기 시작했다. 분명 아까 일이 기분을 상하게 한 듯했다.“주인님, 아가씨께선 임신 중이십니다. 의사 선생님께서 임산부는 정서가 불안정하기에 기분을 잘 살펴줘야 한다고 하셨어요.”규영과 미진은 소현아의 붉어진 눈과 코를 보고 용기를 내어 조심스럽게 강지훈에게 말했다.강지훈은 섬뜩한 눈빛으로 그들을 쏘아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복도에서 여자 도우미가 새 목욕 가운을 들고 안방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한 아름다운 여인이 그녀 앞에 나타나 손에 들린 옷을 빼앗았다.“줘. 내가 가져다줄게.”도우미는 당황스
소현아는 접시를 끌어안고 좀처럼 내려놓지 않았다.“오늘 모처럼 입맛이 돈다고요. 규영 씨, 미진 씨, 저 조금만 더 먹으면 안 될까요? 아주 조금만 먹고 강지훈 씨에게는 말 안 할게요.”규영과 미진의 얼굴에는 난감한 기색이 가득했다.그들 역시 소현아를 좋아하는지라 마음껏 먹게 해주고 싶었지만, 그녀가 힘들어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그녀 때문에 주인님에게 혼나는 건 더더욱 싫었다.“아가씨, 배고프시면 제가 과일 좀 가져다드릴까요? 과일은 아기에게 좋을 거예요.”규영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와 협상했다.소현아는 고기가 가득 담긴 접시를 눈앞에 두고도 먹을 수 없다는 생각에 눈물까지 왈칵 차올랐다.하지만 배에서 또 이상한 느낌이 들기 시작하자 더는 고집을 부리지 못하고 결국 접시를 내려놓았다.“알겠어요. 그럼 과일 많이 먹을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저녁에 배가 고파서 잠이 안 오거든요.”규영과 미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식기를 치우고 과일을 잘라 가져다주었다. 그러고는 맛있게 먹고 있는 소현아의 모습을 지켜보았다.사실 소현아는 살이 잘 찌는 체질은 아니었다. 많이 먹어도 과도하게 뚱뚱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동글동글 귀여운 편이었다. 식사량을 줄이자 며칠 만에 눈에 띄게 체중이 줄어들기 시작했다.밖에서 돌아온 강지훈은 한눈에 그녀의 얼굴이 핼쑥해졌음을 알아챘다. 살이 빠져 더 커진 눈은 전보다 더욱 청순하고 순진무구해 보였다.“그동안 제대로 못 먹었어?”그가 손을 뻗어 뺨을 꼬집었다. 감촉도 예전만큼 부드럽지 않았고 손에 잡히는 살도 별로 없었다.소현아의 얼굴이 그의 손에 일그러졌다. 그녀는 배고픔에 가련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강지훈 씨, 저 배가 너무 고파요. 아기 낳는 거 너무 힘들어요. 그만두면 안 될까요? 아기 그냥 다시 돌아가게 해줘요!”강지훈은 어이없음에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돌아가? 어디로 돌아가?”소현아는 눈알만 이리저리 굴릴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녀 역시 아기가 어디로 돌아갈 수 있는지 알 리
다음 날, 소현아는 배고픔 때문에 잠에서 깨어났다.뱃속에서는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고 두 아기는 불안한 듯 계속 발길질을 하고 있었다.“아가들, 착하지. 의사 선생님께서 많이 먹으면 안 된다고 하셨어. 조금만 참아. 태어나면 엄마가 맛있는 거 많이 사줄게.”소현아는 배를 쓰다듬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두 아기를 달랬다.하지만 아기들은 그녀의 말을 듣지 못했는지 더욱 격렬하게 움직였다.소현아의 배 위에 놓여 있던 강지훈의 손에서도 움직임이 느껴졌다. 그는 깜짝 놀라며 번쩍 눈을 떴다.귓가에 소현아의 억울한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너희들 자꾸 차지 마. 내가 안 먹이는 게 아니잖아. 나도 배고프단 말이야.”강지훈의 눈에서 경계심과 냉기가 사라지고 짜증스러움만 남았다.그는 고개를 숙여 소현아의 배를 툭툭 두드리며 음산하게 경고했다.“너희 둘 얌전히 있어. 말 안 들으면 아주 혼쭐을 내줄 테니까.”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소현아가 그의 손등을 찰싹 내리쳤다.그녀는 씩씩거리며 그를 쏘아보았다.“앞으로는 나랑 같이 자지 말아요. 아기들이 당신 싫다고 계속 차는 거예요. 그리고 당신 말은 들리지도 않으니까 아기들 겁주지 마세요!”강지훈은 손등이 찌릿했지만 화는 내지 않았다.“안 들린다는 거 너도 알아?”소현아는 그의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당신 말은 못 들어도 내 말은 들을 수 있어요. 내 뱃속에 있으니까요.”강지훈은 코웃음을 치며 이불을 걷어 올리고 몸을 일으켜 앉았다. 탄탄한 근육질의 헐벗은 상체가 드러났다. 새로 생긴 상처와 오래된 흉터들이 뒤섞여 있어 섬뜩한 느낌을 자아냈다.소현아는 수없이 봐왔지만 여전히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녀는 손으로 눈을 가린 채 손가락 사이로 몰래 그를 쳐다보았다.“강지훈 씨, 그 나쁜 놈에게 전화했어요? 소월이 저 보러 언제 와요?”이 작은 머릿속에 어젯밤 했던 말이 아직도 남아있을 줄이야.그는 소현아를 등지고 천천히 옷을 입으며 지극히 평온한 말투로 말했다.“전화했어. 전연우가 안 된
강지훈은 언짢은 표정으로 말했다.“알았어. 가 봐.”의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몸을 돌려 방을 나섰다.“강지훈 씨, 의사 선생님이 제가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는다고 했어요.”소현아는 그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웅얼거렸다.맛있는 것을 먹을 수는 없어도, 소월이나 다른 친구들을 만나러 나가는 건 되지 않겠는가?그녀가 민감한 부위를 찌른 탓에 강지훈은 마음속에 짜증이 밀려왔지만 그래도 꾹 참고 고개를 돌렸다.그 눈에선 음산한 기운이 일렁이고 있었다.“그래서 뭘 어쩌겠다는 거야?”또 도망가고 싶다는 건가?그는 이미 한 번 이 토끼를 눈앞에서 놓친 적이 있다. 그런 일은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소현아는 그와 오랜 시간을 함께 보냈던지라, 그가 화가 났다는 것을 금세 알아차리고는 겁을 먹고 몸을 움츠렸다.“그냥 소월이가 보고 싶어요.”장소월과 놀고 싶다는 마음이 보고 싶다는 마음으로 바뀌었다.강지훈은 입꼬리를 서서히 끌어올려 미소를 지었다.“그래. 그럼 북경 감옥으로 불러올까?”그 말을 들은 순간 소현아의 눈이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아까의 우울함은 온데간데없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그녀는 작은 얼굴에 기대감을 가득 실은 채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좋아요, 좋아요! 내가 소월이 집에 놀러 갈 때마다 그 나쁜 놈이 나더러 많이 먹는다면서 자꾸 구박하고 화를 냈어요. 소월이가 여기에 놀러 오면 당신은 절대 그러면 안 돼요. 맛있는 것도 많이 준비해줘야 해요!”강지훈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그래. 장소월이 오기만 한다면.”소현아는 도망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다시 잡혀 왔다. 그런데도 강지훈은 그녀를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게 가두어 두었다.전연우는 어떻겠는가.장소월은 전연우의 시야에서 반걸음도 벗어날 수 없다에 그의 손모가지도 걸 수 있었다.장소월을 오지 못하게 막는 사람은 강지훈이 아닌 전연우가 될 것이다.저 작은 토끼의 화가 전연우를 향하게 하면 될 일이다.소현아는 그의 말에서 조금의 이상함도 느끼지
의사가 도착했을 때, 소현아는 여전히 훌쩍이며 울고 있었다.그녀는 자신이 혹시라도 죽는 건 아닐지 알고 싶어 하면서도 의사를 강력히 거부하고 있었다.의사가 검사를 하려고 다가가자 소현아는 엉덩이만 바깥에 내민 채 계속 강지훈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계속되는 완강한 거부에 의사도 난감해졌다.강지훈은 품 안에 웅크린 작은 토끼를 바라보다가 얼굴을 굳히고 귓불을 잡아 올렸다.“죽을까 봐 무섭다며? 빨리 검사받아봐.”소현아는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흑흑, 너무 무서워요...”강지훈은 미간을 찌푸리며 의사를 힐끗 보고는 말했다.“가운 벗어.”의사가 흰 가운을 벗자 소현아의 거부감이 조금 줄어들었다.검사가 진행되는 내내 강지훈은 눈 한 번 깜빡하지 않고 지켜보았다.의사는 엄청난 압박감과 긴장감에 식은땀까지 흘러나왔다.“어때?”검사가 끝나자 강지훈은 소현아가 다시 그의 품에 안기도록 두 팔을 벌렸다.의사는 식은땀을 닦아내며 말했다.“별문제 없습니다. 최근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를 좀 받으신 것 같습니다. 또한 임신 중에는 음식을 너무 많이 드시면 안 됩니다. 적당히 드시고 꾸준히 운동을 하시는 게 좋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태아가 너무 커져서 출산할 때 힘드실 수 있습니다.”별문제가 없다는 말에 강지훈의 굳었던 얼굴이 조금 풀리기 시작했다.소현아는 못마땅한 얼굴로 강지훈의 품에서 몸을 비틀었다. “하지만 제가 배부르게 먹지 못하면 아기들도 배고플 텐데요.”“드시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조금만 양을 줄이시라는 겁니다. 아니면 출산하실 때 고통스러우실 수 있습니다.”그녀는 가련한 표정으로 촉촉한 눈망울을 반짝이고 있었다.“아기 낳으면 맛있는 거 먹을 수 있는 거죠? 강지훈 씨, 그럼 지금 당장 낳으면 안 될까요? 그러면 내일은 맛있는 것을 먹을 수 있잖아요.”소현아는 예전 창고에 갇혀 하루에 작은 찐빵 하나로 버텼던 때를 떠올렸다. 가끔씩은 찐빵조차도 먹지 못했었다. 당시 그녀는 억지로 잠을 청하며 허기를 버텼다.아기가 뱃속에 있어서 배부
“저 졸려요. 의사가 도착했을 땐 이미 잠들어 있을 테니까 검사 못 받을 거예요!”한동안 강지훈의 대답이 들리지 않자, 소현아는 그가 갔을 거라 생각하고 이불을 살짝 걷어 눈만 내놓고 주위를 살펴보았다.하지만 강지훈의 음산한 눈빛과 정면으로 마주치고 말았다.순간 온몸의 털이 쭈뼛 솟아오르는 느낌에 힘껏 몸을 움츠렸다.“다, 당신 왜 아직도 안 갔어요? 아무 말도 안 하고. 일부러 저 놀라게 하려고 그러는 거죠? 저 안 그래도 바보인데 이러면 더 멍청해질지도 모른다고요!”강지훈은 몸을 기울여 코끝을 그녀의 코에 가져갔다.“괜찮아졌으면 아까 하던 일 마저 해야겠어. 내 몸에 토해놓고 어물쩍 그냥 넘어가려고?”소현아는 이불 속에 온몸을 웅크리고 앉아 동그란 눈만 내놓고 있었다.“토해서 미안해요. 하지만 분명히 불편하다고 말했는데 당신이 억지로 안고 있었던 거잖아요. 꾹 참다가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토한 거예요.”강지훈은 그녀의 속눈썹이 유난히 곱슬거린다는 것을 발견하고 몸을 일으켜 앉아 흥미로운 듯 꼼지락거렸다.소현아는 그가 아직 화가 나 있다는 생각에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비장의 무기를 꺼냈다.“화내지 말아요. 그냥 비긴 거로 해요. 어차피 당신도 제 몸에 더러운 거 묻힌 적 있잖아요. 다음에 또 그랬을 땐 안 때릴게요.”그녀는 강지훈의 하반신을 쳐다보며 마지못해 말했다.강지훈의 움직임이 멈추었다.수 없는 여자들을 겪어봤지만, 이렇게 순진무구한 말투로 그 행동을 당당하게 말하는 여자는 처음이었다.그는 위험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게 다야?”소현아는 얼굴에 경계심을 가득 드러낸 채 더욱 이불 속으로 파고들며 그와의 거리를 두려고 애썼다.“다, 당신 또 뭘 하고 싶은 건데요? 현아 때리면 안 돼요. 뱃속에 아기도 있잖아요. 아기가 무서워할 거예요!”강지훈의 눈에서 장난기가 점차 사라지고 복잡한 감정들이 뒤섞여 피어올랐다.“강지훈 씨, 저에게서 멀리 떨어져 줄래요? 당신 몸에서 이상한 냄새 나요. 토할 것 같아요.”소현아가 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