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 수능인데, 네가 다른 일에 신경 쓰느라 영향받으면 안 되지.”소월이는 들릴 듯 말 듯 한 소리로 진심을 전하듯 낮게 중얼거렸다.“사실 저도 강 선생님을 정말 좋아해요. 학교에서 저를 잘 돌봐주었거든요. 선생님께서 정말 아버지를 따르길 선택한다면, 저도 받아들일 수 있어요.”“그리고, 저 이미 어느 학교에 갈지 결정했으니 강 선생님께서 더 이상 걱정 안 하셔도 돼요.”전연우가 물었다.“그래? 오빠에게 알려줄래?”장소월이 대답했다.“낙성의 사범대를 졸업해서 선생님이 되고 싶어요. 졸업 후에는 먼저 시골 학교에 신청할 거예요.”전연우의 검은 눈동자가 빛났다. 그의 시선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장소월을 고집스레 위아래로 훑었다.“낙성... 너무 멀어. 비행기를 타도 열 시간이 넘게 걸리는데. 소월아, 나는 네가 이렇게 먼 도시에 가는 걸 원치 않아.”“여기서 잘살고 있는데 왜 하필 그렇게 먼 곳까지 가려는 거야.”원치 않는다고?전연우, 너는 원치 않는 게 아니라 내가 네 눈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손바닥 위에 놓고 감시하고 싶은 거겠지.장소월은 미리 생각했던 변명을 거침없이 늘어놓았다.“아줌마가 알려주셨어요. 어머니가 도시의 유능한 지식인이셨고 교육 지원활동을 통해 아버지를 만났대요. 그래서 저도 교사를 하고 싶어졌어요. 또 학생들에게 글을 가르쳐 인재를 양성하는 것도 뜻깊고 재밌는 일일 것 같아요.”“기왕 교사가 될 거, 제일 좋은 사범대학에 다녀야 하지 않겠어요? 서울사범대에 관해 알아봤는데 낙성이 환경이나 자원이 더 좋아요.”“오빠. 오빠는 제 편을 들어줄 거죠? 아버지도 설득해 주세요...”장소월은 괜히 아양을 부리며 전연우의 손을 잡고 이리저리 흔들었다.“오빠... 제발요...”전연우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짜증이 순간 얼굴에 비쳤다가 이내 사라졌다.전연우의 표정을 살피던 장소월은 그제야 그가 가까운 신체접촉을 꺼린다는 것이 생각나 급히 잡았던 손을 놓고 몸을 움츠렸다.“정말 잘 생각해야 해. 일단 서울을 벗어나면, 네 주
장소월은 눈으로 전연우를 배웅했다.문이 닫히자, 소월이는 쿵쾅쿵쾅 방망이질하는 심장을 쓸어내렸다.이제 더 이상 의심하지 않겠지?그녀도 은연중에 계속 암시했었다. 수능이 끝나면 서울을 떠나 멀고도 먼 낙성으로 갈 것이라고.그리고 대학을 졸업하면, 시골의 교육지원에 참가할 것이다. 그의 피의 복수에 조금도 방해되지 않게.전연우는 완전히 그녀를 죽은 사람처럼, 원래 장가에 존재하지 않았듯이 지워버릴 수 있었다.일단 이 집을 떠나기만 하면, 소월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버릴 것이다. 영원히,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이불 위의 얼룩을 보면서 소월이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전연우는 정말이지 작은 것도 꼭 되갚아야 하는 성격이었다. 소월이가 오늘 아침 금방 바꾼 이불 시트를 이 지경으로 만든 것만 봐도.전연우도 그녀더러, 밤에 덮을 이불이 없다는 것이 어떤 기분인지 몸소 느끼게 하고 싶었나 보다.장롱 속의 이불은 모두 오랜 기간 씻지 않은 데다가, 소월이가 또 먼지 알레르기까지 있었으므로 한번 잘못 덮었다가는 한밤중에 병원에 실려 갈 게 뻔했다.이 남자는 정말이지 뒤끝이 길었다.쪼잔한 사람! 속 좁은 고집쟁이!소월이가 이불을 신경질적으로 휙 바닥에 내던졌다. 내일 다시 가져가 씻을 요량으로 두꺼운 외투를 찾아 덮고는, 침대 위에 누웠다.이튿날 아침,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투명한 햇살이 유리 장막을 드리운 듯 밝게 방안에 비쳐 들어왔다.기지개를 켜며 일어난 장소월은 평소와 달리 지끈거리던 머리도, 밤새 괴롭히던 코막힘도 없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언제 생겨났는지 모를 회색 무늬 이불에 덮여있는 자신을 확인하고 소스라치게 놀라 바로 이불을 옆으로 걷어차 버렸다.이 색은, 전연우에게만 있는 것이었다.설마, 전연우가 어젯밤에 몰래 방에 들어온 건가?장소월의 얼굴이 삽시에 창백해졌다. 괜찮았던 머리가 다시금 쿵쿵 울렸다.요즘 전연우가 그녀의 방에 들어오는 일이 잦아졌다.누가 봐도 이건 별로 좋을 일이 아니었다.‘분명 문을
“작년 수능 등급 비율을 봤는데 충분히 저의 성적으로 갈 수 있을 것 같아요. 자신 있어요.”장소월의 말에 장해진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차갑게 말했다.“여기 서울에 남든지, 그게 아니라면 다니지 마. 대학에 붙는 게 무슨 소용이 있다고, 어차피 결국 해야 하는 건 결혼이야. 얼마 뒤에 있을 연회에 같이 가. 만나봐야 할 사람들이 있어.”장소월은 아버지가 이리 말할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 장해진은 여자라는 신분을 존중하지 않았다. 그에게 여자란 그저 후대를 번식하는 데 필요한 도구일 뿐이었다. 결혼 후에는 집에만 있으면서 남편을 섬기고 아들을 떠받들어야 하는 존재였다.“아버지. 지금은 예전과 달라요. 제가 아는 친구들도 이미 외국으로 유학하러 갔어요. 문정이 기억하세요?”장해진이 호기심이 생긴 듯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서창수 딸?”“네. 문정이가 IELTS 준비하겠대요. 유학 후에, 외국에 정착하다 국적도 바꿀 거래요. 아버지, 낙성에 가는 건 외국 유학보다 나은 선택이에요. 적어도 방학하면 돌아올 수 있으니까요.”“나중에 누군가 학력을 물을 때 고등학교라고 대답해야 하는 것만큼 창피한 일이 어디 있겠어요? 저는 아버지에게 부끄러운 딸이 되고 싶지 않아요.”장해진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바로 체면이었다. 흙수저 가정에서 태어나, 배운 것 없어 가방끈이 짧았던 그였기에. 지금의 회사마저 모두 전연우에게 맡기고 있는 터였다.장소월의 이 말이 드디어 장해진의 마음을 조금 움직였다. 그는 불만스럽게 눈살을 찌푸렸다. “꼭 낙성에 가야겠어?”소월이가 힘차게 머리를 끄덕였다. “아버지께서 저를 걱정하시는 건 잘 알아요. 그렇지만 제가 낙성에 가면 할머니도 돌볼 수 있어요! 약속할게요. 절대 아버지에게 폐를 끼치지 않을 거예요.”할머니는 그녀의 최후 패였다. 장해진은 비록 누구에게도 좋은 사람이 아니었지만, 어머니에게만큼은 효자 중 효자였다. 몇 년간 할머니를 서울에 모시려 설득하였지만, 할머니는 한사코 거절하였다. 꼭 낙성의 가난하고 편벽한
집에 방이 많지는 않았다. 장해진이 혼자 조용히 자는 것을 좋아해서, 2층의 서재와 안방은 모두 금지구역이었다.3층에는 장소월과 전연우가, 4층에는 백윤서가 살았었다.지금 소월이더러 3층 방을 내놓으라 하니 소월이는 어쩔 수 없이 5층으로 가야 했다. 이 집안에서 제일 높은 층이기도 했다.그러나 5층의 유일한 좋은 점은 매우 조용하다는 것이었다. 방에는 큰 베란다가 있어 꽃을 기르고, 차를 마시거나 야경을 감상할 수 있었다. 낮부터 밤까지 방에만 있어도 심심하지 않을 만큼 좋은 곳이었다.소월이는 진통제 몇 알을 삼키고 쓴맛에 얼굴을 찡그렸다. 물을 조금 마시고는 곧이어 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이때 아주머니가 흐린 얼굴을 하고 조심스레 들어왔다. “아무리 강만옥이 들어와 산다고 했어도, 방을 아가씨가 옮겨서는 안 되는 거였어요.”장소월은 아주머니의 손을 꼭 잡고 얼굴에 담담한 미소를 띠었다.“사실 이 방에 누가 살든 다 똑같아요. 저는 이곳보다 5층의 방이 더 좋아요. 거기엔 엄마가 그렸던 그림들이 많이 남아있으니까요.”“엄마 사진도요. 혹시 알아요? 엄마가 꿈에 나와줄지. 이미 너무 오래 꿈에서 엄마를 만나지 못했어요.”그곳은 어떤 의미에서는 어머니와 가장 가까운 곳이기도 했다.아줌마는 미안함과 측은함이 뒤섞인 표정을 하고 소월이의 손을 꼭 잡았다. “우리 아가씨, 언제 이리 커서 어른스러워졌어요?”‘왜냐하면 저는 이미 성인이 됐거든요. 아주머니, 저는 사실 많은 걸 알고 있어요... 저에게 조금만 시간을 더 주세요, 나중에 꼭 데리러 올게요.’소월이는 옷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평소 자주 사용하던 작은 물건을 옮겼다.얼마 지나지 않아, 인테리어회사 사람들이 찾아왔다. 소월이가 쓰던 낡은 가구들을 모두 바꾸고 페인트칠했다. 아기자기했던 벽은 창백한 백색으로 바뀌었다.뒤이어 개인 브랜드 의류회사가 대량의 옷과 드레스를 위층으로 올려보냈다.장해진은 종래로 여자에게 인색하게 굴지 않았다. 소월이가 알기로, 장해진과 3년을 교제했던 대
장소월은 눈을 반달 모양으로 접으며 웃으며 말했다.“하나도 억울하게 느껴지지 않아요.”장소월이 자리를 피해준 건 전연우와 강만옥이 더 편하게 교류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주기 위해서였다. “만약 필요한 거 있으면 오빠랑 말하면 돼.”“네, 알겠어요.”전연우가 나간 후 장소월은 이후부터 물 마시러 아래층까지 내려가는 일을 피하려고 아래층에 놓인 주전자를 위층 방으로 가져갔다. 이 또한 전연우와 강만옥 두 사람과 마주치는 걸 어느 정도 피할 수 있었다.Comment by 만든 이: 일정한 정도 - 직역파할 수 있다 - 오타 추정...시간은 물 흐르듯 빨리 지나갔다. 눈 깜짝할 사이에 강만옥이 장가네 집에 머무른 지 벌써 며칠이 지나갔다. 전연우는 완쾌 후 백윤서를 데리고 떠난 뒤로 지금까지 돌아오지 않았고 장해진과 강만옥도 집으로 돌아오는 일이 드물어 장소월은 그들과 만나게 되는 일이 적었다.대부분 시간은 장소월 혼자였다.장소월은 칠팔일 동안 집에서 충분한 휴식을 취하고 학교로 돌아갔다. 예상대로 강만옥이 가르치는 수업 시간이 적어졌다. 강만옥은 음악을 가르쳤는데 전업과가 아니다 보니까 학교에서 수업하면서 만날 일이 드물었다.Comment by 만든 이: 전업? 전공?장소월이 원래 학급으로 돌아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이틀 전에 치른 과목별 모의시험 성적도 하나하나 나오기 시작했다.이번 모의시험 문제들은 전부 선생님들께서 직접 내신 것들이었다.장소월은 이미 세 개 학과에서 이상적인 점수를 따냈다. 문과 평균점수는 백 점, 이과는 90점 정도였다. 서울사범대학교에 입학하기에 아주 충분한 점수였다.장소월에겐 너무 과한 노력도 소용이 없었다. 임시 담임선생님이 학급 등수를 발표할 때 장소월이 학급 5등이라는 것이 밝혀지자 모든 학생은 다 믿기지 않는다는 눈길로 장소월을 바라보았다. 심지어 한 학생은 장소월의 학급 등수의 투명성을 의심했다.“선생님, 거짓말이죠? 꼴찌 5등이 아니라 진짜 우리 학급 5등이란 말씀이세요?”임시 담임선생
장소월은 마지막 수업 시간에 조퇴하고 서울강남병원으로 향했다.장소월은 꽃 한 송이를 쥐고 병원 앞에 멈춰선 택시에서 내렸다. 하지만 장소월이 손에 쥔 꽃은 다름이 아닌 하얀 국화꽃이었다. 사실 장소월도 강용이 어떤 꽃을 좋아하는지 몰라 그냥 눈에 보이는 대로 골라 들고 왔다.주요하게는 장소월이 꽃집에 들어갔을 땐 하얀 국화꽃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어서 하얀 국화꽃밖에 살 수 없었다.Comment by 만든 이: 한국어에서 가장 많이 쓰는 표현 : 꽃집큰맘을 먹은 장소월은 만 원 돈을 내고 하얀 국화꽃 한 송이를 사고는 특별히 사장님에게 이쁘게 포장해 달라고까지 부탁했다.Comment by 만든 이: 큰 맘을 먹고 돈을 내고~고 두 번 중복으로 가독성 하락 우려하여 도치함Comment by 만든 이: ‘한테’보다는 ‘에게’를 쓸 것을 권장.‘한테’는 구어체 느낌이 강함병원에 들어간 후 간호사한테서 강용이 입원하고 있는 병실을 알아낸 장소월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20층으로 올라갔다.Comment by 만든 이: ~하고 같은 이유로 도치“자기야, 뭘 보는 거야?”선글라스를 쓰고 섹시한 옷차림을 한 강만옥은 전연우의 팔짱을 끼고 물었다.Comment by 만든 이: 상황에 따라 다르지만 중국어의 比较를 한국어로 번역했을 때 어색한 경우가 있을 수 있음.이런 상황에서는 ‘비교적’ 생략. 한국어에서는 정도의 부사를 중국어만큼 사용하지 않음.전연우는 아무 말 없이 덤덤하게 시선을 돌리고는 의심했다.‘아까 그 사람 소월인 것 같은데.’Comment by 만든 이: 웹소설 특성상 상관은 없으나‘거’는 ‘것'의 구어체 형식이라는 것 확인 부탁장소월은 엘리베이터에 오른 후 닫히는 엘리베이터 문을 보면서 긴장되어 떨리는 가슴을 움켜잡고는 생각했다.‘전연우가 날 보지 못했겠지?’‘두 사람 정말 간도 크다니까. 만일의 경우라도 사람이 북적이는 병원에서 저러다가 장해진한테 들키면 어쩌려고 저러는 거야. 말썽을 일으키는 게 하나도 무섭지 않은
또 하나의 유리컵이 병실에서부터 던져져 나왔다. 동시에 화가 가득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장소월 너 계속이야?”Comment by 만든 이: 이해 불가장소월은 강용이 내던진 유리컵에 하마터면 맞을 뻔했다. 다행히도 누군가가 끌어당겨 주는 덕분에 피할 수 있었다. 그 사람은 바로 전연우였다. 장소월은 의아한 눈빛으로 전연우를 바라보면서 말했다.“오빠, 오빠가 왜 여기에 있어요?”전연우는 장소월이 다친 곳이 없는지 구석구석 훑어보면서 말했다.“괜찮아? 어디 다친 곳은 없어?”“저 괜찮아요.”병실에 들어가자마자 쫓겨난지라 장소월은 다칠 일도 별로 없었다. 게다가 강용의 상태로서 장소월을 해치려 해도 불가능했다.“오빠는 병원에 무슨 일이세요? 혹시 어디 아프세요?”“별일 아니야. 그냥 위가 좀 불편해서 병원에 잠시 들렀어.”전연우는 미간을 찌푸리면서 물었다.“넌 강용 보려고 병원까지 온 거야?”Comment by 만든 이: 더 줄여서 표현하면 가독성을 높일 수 있음장소월은 말을 더듬거리며 답했다.“오빠...혹시 강용을 저렇게 만든 게 오빠예요?”전연우는 안색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소월이 너도 오빠가 그런 사람으로 보이는 거야?”‘전연우가 아니라고?’‘그러면 누구지?’하지만 진짜 전연우가 한 짓이라면 전연우의 성격상 감추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전연우가 아니라면 인정하지도 않았을 것이다.“아니, 저는 그 뜻이 아니라...”장소월은 전연우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지자 황급히 변명하기 시작했다.“저는 오빠가 저를 위해 복수해주려고 강용을 저렇게 만든 줄로 알고 있었어요. 오빠가 아니라는 걸 저도 이제야 처음 알았어요.”“그럼 소월이 너는 지금 내가 널 위해 복수해주지 않았다고 오빠를 원망하는 거야?”장소월은 놀란 마음과 함께 손까지 흔들어 가며 아니라고 부정했다.“아니요, 절대 그런 뜻이 아니에요...”“알았어, 널 놀리는 거야. 뭘 그렇게 긴장하고 그래. 학교 데려다줄까? 아니면 그냥 집 돌아갈래?”장소월은 전연우가
전연우가 떠난 후 장소월은 버스정류장 앞에서 정 집사가 오길 기다렸다.장소월은 제운고등학교 교복을 입고 있었는데 가슴 쪽에는 금색 방패와 말을 타면서 활을 쏘는 기사의 모습이 새겨진 학교 뱃지가 달려있었다. 조금이나마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는 옷차림이었다.장소월은 사람들이 북적이는 길거리에 혼자 서있었는데 또 눈에 띄게 이쁘장한 얼굴을 가지고 있다 보니 자연스레 불법 분자들의 눈길을 끌었다.Comment by 만든 이: 한국에서 사용하지 않는 표현. 수정 요망非法分子?바로 이때 길거리를 떠도는 세 명의 불량청년이 장소월이 서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2000년이다 보니 길거리에는 아직 블랙박스가 많이 보급되어 있지 않았고 과학기술도 많이 발전되지 않은 상황이라 2012년의 발전상황과 비교했을 때 엄청나게 뒤떨어진 상태였다.불법 사건이 발생했다 해도 전혀 증거를 찾을 수가 없었고 범죄자가 마음먹고 도망쳐 숨어버린다면 찾아낼 확률이 아주 낮았다.불량청년들이 다가오자 장소월은 그들의 눈길을 피해 고개를 숙이고 그들이 그냥 자신을 스쳐 지나가길 바랐다.하지만 맑은 하늘에 날벼락이라고 그들의 목표는 이미 장소월로 정해져 있었다.“어머, 학생 혼자 어디 가는 거야? 오빠들이 데려다줄까?”“상상도 못 했는데 제운고등학교 학생이네. 이 학교 다니는 학생들 집안 배경 다 어마어마하다던데... 학생, 돈 꽤 있을 것 같은데 오빠들 좀 빌려주지 않을래?”장소월은 세 불량청년한테 둘러싸여 빠져나갈 틈조차 없었다. 걸어가는 행인들도 이런 일에 엮이기 싫어 전부 모른 척하고 지나가 버렸다.장소월은 무서운 마음에 저도 모르게 뒷걸음을 치면서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가방에서 검정 여성 지갑 하나를 꺼내 들었다.하지만 지갑을 열기도 전에 불량청년들한테 뺏겼다.그들은 지갑 안에 있는 현금을 세어보더니 눈에서 넘쳐나오는 탐욕을 머금지 못했다.Comment by 만든 이: 탐욕을 머금지 못하다 ?탐욕을 숨기지 못하다?“보기와 다르게 너 엄청
미경이 말했다.“현아 아가씨는 정말 괜찮은 사람인 것 같아요. 효연 아가씨랑은 완전히 달라요. 이렇게 마음이 넓은 여자는 처음 봤어요. 송시아보다도 훨씬 나아요. 그 여자는 별장에 오자마자 왕이라도 된 듯 우리한테 이래라저래라 시켰잖아요.”규영은 한숨을 내쉬었다. “맞아요.”“일단 좀 더 지켜봐야 할 것 같아요. 주인님이 전화를 받지 않으니 우리도 연락하지 말아요. 혹시라도 주인님이 눈치챌지도 모르잖아요.”미경은 고개를 끄덕였다.그 주사는 석 달에 한 번씩 맞는 것으로, 뇌의 핏덩이를 녹여준다고 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다.북경 감옥은 밤이 되면 기이한 정적이 감돌았고, 가끔 늑대 울음소리도 들려오곤 했다.사방이 막혀 있는 격투장 안, 강지훈은 상처투성이인 몸으로 내려와 부관이 건네준 수건을 받았다. 링 위에는 온몸에 피를 뒤집어쓴 남자가 눈을 부릅뜬 채로 숨통이 끊겨 있었다.이건 북경 감옥의 규칙이었다. 이긴 자는 다시 탈출할 기회를 얻지만, 패배한 자에게는 오직 죽음만이 주어질 뿐이다.강지훈은 몸에 묻은 피를 닦으며 말했다. “아직 소식이 없어?”부관이 묻지 않아도 소장이 말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소장님, 겨우 3일밖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벌써 여섯 번째 물으시는 겁니다. 그렇게 걱정되신다면 직접 가서 확인해 보시는 게 어떠십니까?”“마침 소장님이 조사하고 있는 일도 그쪽에서 단서를 찾았다고 합니다.”겨우 3일밖에 되지 않았나?강지훈은 손에 든 물건을 던져 버리고 검은색 군복을 입고 사무실로 들어갔다. 차가운 사무실은 온기 하나 없이 썰렁했고, 벽엔 부자연스러운 그림 하나만이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그건 소현아가 이곳에 왔을 때 그린 그림이었다.강지훈은 책상 앞에 앉아 다리를 꼬고 담배를 꺼내 물었다. 부관이 라이터로 그의 손가락 사이에 있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쪽에서 전화 안 왔어?”부관이 대답했다.“얼마 전 감옥 설비에 문제가 생겼을 때, 탈옥을 시도한 놈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다행
전화가 연결되지 않으니 그들은 어쩔 수가 없었다. 효연 아가씨가 돌아온 탓에 현아 아가씨가 주인님의 총애를 잃게 된 걸까? 주인님의 여자 교체 속도는 그들 또한 잘 알고 있었다. 효연 아가씨를 제외하고 주인님이 진심으로 마음을 쏟았던 여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남자들은 늘 새로운 여자를 탐하기 마련이다. 게다가 소현아는 어린아이처럼 순진하고 천진난만해서 심통을 부리며 주인님과 싸우기 일쑤였다.어쩌면 그녀에게 싫증이나 눈앞에서 치워버리고 싶은 마음에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핑계를 댔는지도 모른다. 보아하니 현아 아가씨는 결국 주인님에게 버려진 듯하다.현아 아가씨와 효연 아가씨는 정말이지 비교할 가치도 없다. 주인님뿐만 아니라 그들 또한 효연 아가씨보다 더 아름다운 여자를 본 적이 없었다.만약 어르신께서 소현아의 임신 사실을 알지 못했다면, 두 사람이 이토록 애써 그녀를 비밀리에 보호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소현아가 수술대에 실려 간 뒤, 주인님에게 연락이 닿지 않으니 어쩔 수 없이 규영이 수술 동의서에 서명했다. 그래야만 소현아가 치료를 받을 수 있으니 말이다.의사가 수술대에 누워 있는 소현아의 머리에 주사기 바늘을 가까이 가져가 천천히 정맥에 주사했다. 소현아는 겁에 질려 침대에서 몸부림치며 소리쳤다. “뭐 하는 거예요! 나 주사 안 맞을 거예요! 이거 놔요!”규영과 미경은 소현아의 팔다리를 누르며 안심시켰다. “현아 아가씨, 조금만 참으세요. 곧 좋아질 거예요. 병이 나으면 우리 집에 갈 수 있어요.”집에 간다는 말을 듣자 소현아는 조금씩 진정되었다. 어쩌면 약물의 영향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녀는 눈꺼풀이 무거워지면서 졸음이 쏟아졌고, 주변의 소리도 점점 줄어들었다.규영이 물었다. “이 약 뱃속 태아에게 영향을 주진 않겠죠?”요셉 의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약은 임상 시험을 거쳐 임신부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으로 확인됐습니다.”미경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아이가 무사하면 됐어요.”소현아의 뱃속 아기에게 조금의 문
소현아는 비행기 안에서 과일과 고단백 식단을 먹으며 모든 것이 신기한 듯 둘러보고 있었다. 도우미들은 임신한 그녀를 정성껏 돌보며, 최대한 간식은 그녀가 찾지 못하도록 깊게 숨겼다. 과자 같은 음식은 복중 태아에게 좋지 않기 때문이었다.규영이 말했다.“....지금 상황으로는 가능한 한 하루라도 더 숨기는 수밖에 없겠어요. 하지만 이번에도 얼마나 오래 머무를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제발 아기가 무사히 태어나야 할 텐데요.”미경도 걱정스러운 마음에 한숨을 쉬었다. “만약 주인님이 우리가 몰래 어르신을 돕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우린 뼈도 추리지 못할 거예요.”“일단 상황 봐가면서 대처해요. 그래도 다행히 아가씨의 임신 사실은 결국 숨길 수 있었잖아요.”소현아는 손에 들고 있던 딸기를 입에 집어넣으며 말했다. “규영 씨, 우리가 했던 내기, 내가 이긴 거 맞죠? 내가 아기 가졌다는 거 강지훈한테 들키지 않았잖아요. 나한테 주겠다고 약속한 거 줄 때 되지 않았어요?”“아가씨, 걱정하지 마세요. 목적지에 도착하면 드릴 거예요. 절대 실망시키지 않을게요.”임신 후 소현아는 하루에도 몇 번씩 잠을 자곤 했다. 비행기에서도 배불리 먹고 난 뒤 바로 잠들었다.깨어났을 때는 이미 러시아 국제공항에 도착한 뒤였다.강지훈이 미리 준비해 둔 사람들이 세 사람을 차에 태워서 시골에 있는 한 별장으로 향했다. 끝없이 펼쳐진 들판에는 라벤더 꽃이 가득 피어 있었다. 소현아는 목에 두른 스카프를 던져 버리고 라벤더 밭으로 달려가 풀썩 주저앉았다. 규영과 미경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서둘러 달려가 그녀를 붙잡았다. 심하게 넘어지기라도 하면, 배 속의 아이를 지키지 못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아가씨, 짐을 정리하고 나면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아야 합니다. 이제 우리밖에 없으니, 더 이상 숨길 필요 없습니다.”소현아는 그들의 부축을 받아 일어서며 말했다.“알았어요.”운전기사는 러시아 현지에서 오랫동안 살고 있는 한국인이었고, 강지훈이 심어 놓은 감시카메라이기도 했다.
서울 공항으로 향하는 헬리콥터가 북경 감옥을 떠난 후, 침대 위의 남녀는 다시 격렬하게 사랑을 나누기 시작했다.천효연은 온몸을 부르르 떨며 절정에 달했다. 그 오르가즘은 너무나도 자극적이라 저도 모르게 계속해서 남자를 원했다.“지훈 씨, 계속...”“이제 아무도 우리를 방해할 수 없어요.”여자의 팔과 가슴에는 남자가 남긴 붉은 자국들이 가득했다.강지훈은 침대에 누워 여자를 들어 올려 자신의 몸 위에 앉혔다. “이제 네가 알아서 해.”점심시간이 되어서야, 두 사람은 모든 힘을 쏟아낸 뒤 침대에 기대어 잠들었다.오후 3시, 강지훈은 깨어나 샤워를 한 뒤 샤워 가운을 입고 바깥으로 나갔다. 맞은편 방문을 열려고 한 순간, 도우미가 소현아의 방에서 옷을 정리하고 나오며 말했다. “주인님, 현아 아가씨는 이미 떠나셨습니다.”“방금 소식이 들어왔는데, 이미 비행기에 탔고 내일쯤 도착할 거라고 합니다.”강지훈이 물었다.“지금 뭐 하는 거야?”도우미가 쭈뼛거리며 말했다. “아가씨가 당분간 돌아오지 않을 것 같아서, 옷을 정리해 놓으려고 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먼지가 쌓일 테니까요.”강지훈은 싸늘하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도우미 뒤에 있는 방을 바라보았다. 소현아의 방은 깨끗하게 비워져 있었고, 옷장과 화장대 위의 물건들, 그리고 항상 바닥에 흩어져 있던 과자들마저 말끔히 치워져 있었다. 생기라곤 찾아볼 수 없었던 예전의 그 공허한 방으로 되돌려져 있었다. 강지훈은 발걸음을 옮겨 방으로 들어갔다. 더 이상 소현아 특유의 체취는 느낄 수 없었고, 청량한 공기 청정제 향만 남아있을 뿐이었다.“방에 있던 물건은 어디 있어?”도우미는 침대에 향한 강지훈의 시선을 알아채고는 곧바로 대답했다. “아가씨께선 인형이 없으면 잠을 자지 못한다며 물건을 거의 다 챙겨 떠났습니다. 남긴 거라곤 옷 몇 벌이 전부입니다.”강지훈이 차갑게 말했다.“내 허락 없이 누가 마음대로 소현아 물건을 만지라고 했어?”그 한마디에 도우미는 순식간에 겁에 질려 고개를 숙였다.
두 도우미는 서로 눈을 마주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사실 소현아의 임신 사실을 그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들은 강지훈의 사람이 아니라 강씨 가문에서 보낸 강지훈을 감시하라는 임무를 맡은 사람들이었다. 임신 사실을 강씨 어르신에게 보고했을 때, 어떤 일이 있어도 배 속의 아이를 지키라는 명령이 내려왔었다. 그 아이는 강씨 가문의 유일한 핏줄이니 어떤 사고도 용납할 수가 없었다.만약 주인님이 배 속의 아이에 대해 알게 된다면, 분명히 아이를 지키지 못할 것이다.지금은 다행히도 아기가 석 달이 넘어 안정기에 접어들었다. 강지훈이 일 때문에 바빠 별장을 떠나 있을 때, 그들은 몰래 소현아에게 유산 방지 주사를 놓아 아이가 무사히 태어날 수 있도록 노력했다.러시아에서 최고의 뇌 전문의를 섭외하고 난 다음 날, 두 도우미는 모든 짐을 챙겨 소현아와 함께 해외 치료를 떠났다.새벽, 헬리콥터가 착륙했다. 소현아는 손에 인형을 안고 잠이 덜 깬 모습으로 말했다. “규영 씨, 미경 씨, 우리 어디 가는 거예요!”규영이 말했다. “현아 아가씨, 주인님께서 아주 재미있는 곳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지금 거기로 가는 겁니다.”소현아는 자신이 쫓겨났다는 사실도 알지 못한 채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요? 우리 어디 가는 거예요? 그 나쁜 놈도 같이 가요?”“주인님은 할 일이 있으셔서 저희에게 먼저 가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준비가 다 되면 주인님도 오실 겁니다.”소현아는 뒤돌아 계단을 바라보았다.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했지만, 그다지 실망하지는 않았다. 강지훈은 항상 바빠서 별장에 없는 날이 더 많으니까. “그럼 그렇게 해요. 하지만 난 며칠만 있다가 돌아와야 해요! 내 동생이 곧 결혼하거든요. 난 언니니까 반드시 결혼식에 참석해야 해요.”규영과 미경은 서로 얼굴을 마주 보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 측은한 마음에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네.”소현아가 헬리콥터에 올라타자 헬리콥터는 천천히 하늘로 날아올랐다...방 안, 남자가
소현아가 지금까지도 나오지 않는다는 건 확실히 이상한 일이었다. 예전엔 아무리 심통을 부렸어도, 내버려 두다가 식사 때가 되어 부르면 두말없이 내려오곤 했었다. 마음에 품었던 앙금을 절대 다음 날까지 가져가지 않았고 주인님과 화해하는 것도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하지만 지금은 너무나도 조용하다. 게다가 오늘 밤엔 주인님 분부로 아가씨가 좋아하는 요리를 만들었는데도 아무 반응이 없다. 분명히 방에서 무슨 일이 생긴 것이다.도우미가 말했다. “평소대로라면 배고프면 스스로 나오셨을 텐데, 지금은 아무리 불러도 미동도 없으십니다.”천효연은 강지훈에게 아주 적합한 애인이었다. 아름다운 외모와 몸매 외에도 강지훈의 곁에서 오랫동안 머물 수 있었던 이유는 남자의 다른 여자들을 용납할 줄 알았기 때문이다.북경 감옥에 사적으로 지어진 별장은 강지훈이 혼자 거주하는 곳으로, 그녀 외에는 아무도 드나든 적이 없었다. 때문에 외국에서 돌아와 그 바보를 보았을 때, 약간 놀랍다는 생각도 들었다.천효연은 강지훈의 입술에 키스하며 말했다. “먼저 방에 돌아가서 씻을게요. 밤에 와요.” 그녀는 사람을 홀리는 매혹적인 눈빛으로 강지훈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떼고는 혼자 방으로 돌아갔다.강지훈은 발로 문을 걷어찼다. 쾅 하는 굉음과 함께 남자는 성큼성큼 방으로 들어섰다. 아무도 없는 방안을 본 그의 눈동자에 분노가 스쳤다.강지훈은 곧바로 창가로 가서 그녀가 뛰어내린 건 아닌지 확인했다.“주인님, 아가씨 여기 계십니다.” 도우미가 드레스룸 바닥에 누워 있는 소현아를 발견했다.소현아는 벽에 기대어 손에 먹다 남은 과자를 든 채 잠들어 있었다. 어렴풋이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듣고 눈을 떠보니 눈에 칼자국이 있는, 무섭게 생긴 남자가 보였다.소현아는 꿈속이라고 여기며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왜 꿈에도 이 나쁜 놈이 나오는 거지? 싫어, 난 소월이랑 강용이랑 같이 놀 거야. 소월아, 지난번에 하던 이야기 아직 안 끝났잖아. 나중에 그 사람 어떻게 됐어?”“물 뿌려서
얼마나 오랫동안 키스했는지, 소현아는 머리가 먹먹해지고 입술이 얼얼해졌다. 급기야 뇌에 산소가 부족해 하마터면 쓰러질 뻔했다.“네가 어리다는 이유로 내가 널 어떻게 하지 못한다고 생각하지 마. 앞으로 다시 내 앞에서 그 자식 이름 꺼내기만 해봐. 내가 그놈 뼈도 못 추리게 만들어 버릴 거야”소현아는 갑자기 악 하고 소리를 질렀다. “나 더러워졌어.”그녀는 눈에 눈물이 맺힌 채 온 힘을 다해 남자를 밀어냈다. “앞으로 다른 여자랑 뽀뽀한 뒤에 나한테 하지 말아요.”“진짜 더러워!” 소현아는 입에 묻은 침을 닦으며 위층으로 뛰어 올라갔다.“소현아! 거기 서!”소현아는 결코 멈추지 않고, 빠르게 위층으로 뛰어 올라가 방문을 잠갔다. 그리고는 밖에서 열지 못하도록 물건으로 문을 막아 놓기도 했다.그녀는 자신의 얼굴에 묻은 그의 침이 역겨워 욕실에서 물을 틀었다. 하지만 그때, 코에서 갑자기 피가 흘러나왔다. 머릿속은 뒤죽박죽이 되어 윙윙거렸고, 이상한 이명까지 들려왔다. 갑자기 밀려온 극심한 두통에 소현아는 제대로 반응하지도 못하고 정신을 잃었다.저녁 식사가 준비된 뒤, 도우미들은 위층에서 그녀가 내려오기를 기다렸지만 한참이 지나도 감감무소식이었다.“주인님, 아가씨 방문이 계속 닫혀 있고, 아무리 두드려도 반응이 없습니다.”“신경 쓰지 마.”그 짧은 말에 도우미들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밤이 깊어지고, 식탁에 놓인 음식들은 모두 치워졌다.천효연은 강지훈의 품에 안겨서 그에게 체리를 먹여주었다. “지훈 씨, 맛있어요?”강지훈은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네 절반만도 못해.”“지훈 씨는 날 놀리기만 한다니까요.”“돌아갈 생각 없어요? 돌아가지 않을 생각이라면, 난 여기서 영원히 당신과 함께할 살 거예요.”어느덧 시계가 9시를 가리키고 있었지만, 위층에서는 여전히 아무런 인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평소 같으면 배가 고프다며 내려왔을 텐데 말이다.오늘 처음으로 허기까지 참아내며 강인한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천효연은 남자의 마
도우미들은 정말로 그녀의 배짱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그런 장면을 보면 분명히 울고불고 난리를 칠 것이라고 생각했다. 눈앞에서 내 남자가 다른 여자와 엉켜있는 모습을 보고 어떤 여자가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녀는 화를 내기는커녕 오히려 전혀 신경 쓰지 않는 표정이었다.뇌를 다쳐서 마음이 넓어진 건가.소현아는 손에 들고 있던 꽃빵을 내려다보았다. 밖에서 먹어본 적이 없는 것이다. 그녀가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두 명의 도우미 역시 더는 위층에 머물러 있을 수 없어 소현아를 따라 아래로 내려갔다.천효연은 남자의 허리에 다리를 감고, 그의 목에 두 손을 두른 채로 말했다. “지훈 씨, 왜 그래요? 그 여자 때문에 분위기 망치면 안 돼요. 우리 방으로 들어가요, 네?”소현아는 냉장고에서 마구마구 음식을 꺼내기 시작했다. 그녀의 손에 쥐어져 있는 아이스크림을 본 도우미는 경악하며 얼른 빼앗아갔다. “아가씨, 의사 선생님께서 당분간 차가운 것을 드시면 안 된다고 하셨잖아요. 다른 걸 드시는 건 어떠세요? 제가 해드릴게요.”소현아가 말했다.“하지만 너무 오랫동안 못 먹었어요. 딱 몇 입만 먹을게요.”도우미는 그녀의 배를 쳐다보며 단호하게 거절했다. “아가씨, 제발 저희를 힘들게 하지 마세요. 지난번에 차가운 음식을 몰래 드셨다가 배가 얼마나 아팠는지 잊으셨어요?”그 말에 소현아는 머쓱하게 손을 놓으며 말했다. “그럼... 안 먹을게요.”“배고프시면 제가 국수라도 끓여 드릴게요.”소현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주...주인님!” 도우미 중 한 명이 계단에서 내려오는 남자를 보고 즉시 고개를 숙였다.강지훈은 샤워 가운을 걸치고 냉랭하고 차가운 분위기를 풍기며 들어왔다. 소현아를 돌보던 두 명의 도우미는 눈치를 보다가 자리를 비켜주었다.소현아는 도우미들을 붙잡으며 말했다. “나한테 국수 끓여 주기로 했잖아요? 왜 가요, 언제 돌아와서 끓여 줄 거예요?”굳은 표정으로 다가오는 강지훈을 본 소현아는 덜컥 겁이 났다. 매번 이런
도우미들은 그런 광경에 익숙한 듯 두 사람이 편히 사랑을 나눌 수 있도록 자연스럽게 자리를 비켜주었다.소파 위에서 천효연은 떨어지기 싫은 마음에 긴 다리를 남자의 허리에 감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완전히 힘이 빠진 상태였다.“지훈 씨, 나...”“당신한테 아이 낳아주고 싶어요...”단추가 하나씩 풀리고 검은색 군복이 바닥으로 내던져졌다. 군데군데 남아있는 흉터와 혹독한 훈련으로 다져진 탄탄한 근육이 드러났다. 그는 소파에 파묻힌 여자에게 맹렬한 공세를 퍼부었다.여자의 비명은 고통스러웠지만, 동시에 만족스러운 쾌락을 담고 있었다.하늘이 점점 어두워지고 있을 때, 소현아는 두 시간 정도 잠들었다가 깨어났다. 밖에서 도우미들은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얼굴을 붉히며 서로 눈치만 볼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소현아는 갑자기 배가 고파 음식을 먹고 싶어졌다. 문을 연 순간, 도우미들은 모두 화들짝 놀랐다. “현아 아가씨, 왜 나오셨어요? 빨리 다시 들어가세요.”침대 머리맡에 있던 꽃빵 두 개를 들고나온 그녀가 둥글게 불러온 배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배고파서 아래층에 내려가서 뭐 좀 먹고 싶어요.”도우미들은 눈썹을 찌푸렸다. “주인님께서 아래층에서 중요한 일을 상의하고 계시니, 현아 아가씨는 잠시만 기다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하지만 저 지금 배고프단 말이에요. 물도 마시고 싶고요.”머리가 망가진 사람은 역시 다르네.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뭘 의미하는지 모르는 건가?그렇게 오랫동안 약을 먹었지만, 좋아질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현아 아가씨, 지금은 주인님께서 바쁘게 일하고 계시니 조금만 더 기다리세요. 끝나면 뭐든 다 해드릴게요.”“정말 너무들 하네요! 그냥 내려가서 뭐 좀 먹겠다는 것뿐이잖아요. 무슨 일이 있어도 안 본 척할게요, 약속해요.” 소현아는 순진무구한 눈으로 도우미들을 바라봤다. 그 순수한 눈빛을 마주하니 누구도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그때, 밑에서 급히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