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월은 혼자 생각했다.‘무서운 사람이 아니네. 게다가 웃으니까 엄청나게 잘 생겼잖아.’“이젠 괜찮으니까 무서워할 필요가 없어요. 어디로 가세요? 제가 모셔다드릴게요.”장소월은 손으로 눈물을 닦으면서 말했다.“괜찮아요.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저의 집 기사님도 곧 올 거예요.”강영수는 웃으며 답했다.“그냥 지나가다가 우연히 도왔을 뿐인데 괜찮습니다. 기사님이 올 때까지 함께 기다려 드릴게요. 제운고등학교 학생이세요?”장소월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 맞습니다.”경호원은 불량청년들에게 빼앗긴 지갑을 되돌려 받고는 장소월에게 두 손으로 공손히 가져다주었다.“아가씨, 여기 지갑 다시 되돌려 받았습니다.”조금 전 장소월은 겁에 질린 바람에 자신을 괴롭히려던 불량청년들이 어디로 잡혀갔는지 눈여겨보지 못했다.강영수가 장소월을 관심하며 물었다.“뭐 없어진 거 없는지 확인해보세요.”장소월은 지갑을 받고 강영수 말대로 확인해보았다. 신분증과 학생증을 포함해서 잃어버린 것이 없이 다 그대로였다.“잃어버린 거 없이 다 그대로예요.”“아까 그 사람들 어디로 갔어요?”“이런 일이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사람 시켜서 경찰서로 넘겼어요.” 강영수는 이제야 장소월의 찢긴 옷을 발견했다.“저기요, 옷들이 다...”장소월은 강영수의 말을 듣고서야 옷이 다 찢겨져 새하얀 피부가 드러나고 속옷도 아슬아슬 보일락 말락 한 걸 알아차렸다. 그리고 황급히 두 손으로 가렸다.장소월은 얼굴이 뜨거워졌다. 전생과 이번 생의 나이를 합하면 강영수의 할머니가 될 만도 한데 이런 상황에 막상 부딪히니 부끄러워지는 건 마찬가지였다.강영수는 차창 너머로 검은 외투 하나를 건네어 주면서 말했다.“이 옷은 돌발 상황을 위해 차에 보관해 두었던 것이에요. 한 번도 입지 않은 깨끗한 옷이니 괜찮다면 먼저 입고 계시는게 좋을 것 같네요. 그렇다고 이대로 있을 수는 없잖아요?”장소월은 입술을 깨물고 강영수 손에 그려진 문신과 외투를 보면서 고민하다가 끝내는 외투를 받아 걸쳤다.
강영수는 마침 그녀와 반대 방향으로 운전하다가 앞의 신호등에서 유턴했다. 그리고 바로 장소월의 문자를 받았다. 「수야, 너 어디야?」강영수는 그녀의 메시지를 놓칠까 봐 항상 휴대폰을 지니고 다녔다. 그리고 그녀의 문자를 보자마자 바로 답하곤 했다. 하지만 지금 그는 휴대폰을 꺼버렸다. 왕 집사는 백미러로 그를 한번 쳐다보았다. “소월 아가씨가 보내온 문자입니까? 소월 아가씨가 눈치채신 걸까요?”“아마도 그럴 거야... 하지만 거짓말을 하긴 싫어.”강영수는 부정하지 않았지만 대답도 하지 않았다.시간이 조금 더 흐른 후에, 그가 완전히 자기 힘으로 다시 설 수 있을 때 그녀와 만날 것이다. 이렇게 성치 않은 상태로 그녀를 만날 수는 없다. 운전기사가 또 입을 열었다. “혹시, 소월 아가씨께서 신경 쓰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내가 신경 쓰여서 안 돼. 먼저 돌아가자.”강영수가 피곤함 속에서 눈을 감았다. 조금 전에는 매우 위험했다. 강영수가 병원 앞에서 기다리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가버렸더라면.그렇다면 소월이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상상하기도 싫었다. 그는 또 천천히 눈을 떴다. 차가운 빛이 맴도는 시선이 한층 더 예리해졌다. “경찰서에 얘기해둬. 그 세 사람, 내 허락 없이는 풀어주지 말라고.”“네, 도련님.”장소월은 답장을 받지 못하자 문자를 더 보내지 않았다. 아까 그 소년은 강영수가 아닌 모양이었다. 강영수였다면 그녀를 모르는 척할 리가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장소월은 천성 빌딩에 있는 피아노 학원에 왔다. 장소월은 1대1 개인 교습을 선택했다. 이 곡은 그녀가 백번은 넘게 친 곡이기에 배우는 것도 빨랐다. 세 시간 정도의 연습 시간이 지나고, 어느새 하늘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정 집사가 그녀를 데리러 왔을 때, 장소월은 그녀를 데리러 온 사람이 정 집사가 아니라 전연우라는 것을 알았다. 피아노를 너무 오랫동안 연습해서 손가락 마디가 조금 아파왔다. 차 창문이 내려간 후 전연우를 본 장소월은 머뭇거리며 차
"그럴 리가요. 오빠가 저를 생각해서 그런 건데요 뭐." 전연우의 시선은 장소월의 옷으로 향했다. 헐렁한 옷은 눈에 띄게 그녀의 가냘픈 몸에 맞지 않았다. 처음 보는 옷이었는데 딱 봐도 남자 옷이었다."오늘은 웬일로 교복을 안 입었네?" 장소월은 옷을 갈아입지 않았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채 그대로 와버렸었다. "아... 아니... 입었어요. 근데 단추가 떨어지는 바람에 다른 사람 옷을 빌려 입은 것뿐이에요. 나중에 다시 돌려줘야 해요." "남자 거야?" 장소월은 딱히 숨길 마음이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네." 전연우는 그저 조용히 입꼬리를 올렸다. 하지만 그런 그의 눈동자에는 초점이 없었고 말투는 왠지 모르게 차갑고 딱딱했다. “연애하는 거야?" "아니요..." 장소월은 서둘러 부인했다. "걔는 그냥 친구의 친구일 뿐이에요." "네 나이에 연애하는 게 뭐 어때서? 사춘기 때는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기 마련이지... 이제 연애 고민 같은 거 생기면 언제든지 오빠를 찾아와.”"네. 알겠어요. 오빠." 전연우와 대화를 할 때마다 그녀는 항상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어야만 했다. 자칫하면 그의 손에 이끌려 그가 미리 파둔 달콤한 함정에 빠질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남원 별장.전연우의 차는 주차장으로 향했다. 장소월은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어 문을 열어보았지만, 자동차 문은 굳게 잠겨져 있었다.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이때 전연우가 갑자기 확 다가왔고 그의 남성적인 체취가 장소월의 코를 찔렀다.그에게서 풍기는 은은한 동백꽃향이 그녀의 코끝을 간지럽혔다. "오빠... 뭐 다른 용건이라도 있어요?" 그러자 전연우는 그녀의 얼굴을 치켜들고 엄지손가락으로 그녀의 부드러운 입술을 살살 문댔다. 그의 손가락에 옅은 핑크빛이 묻어났다. 장소월은 잔뜩 겁에 질려 그대로 경직된 채 움직일 수가 없었다.“립스틱 발랐어?”"아뇨, 아뇨. 제가 전에 산 립글로스가 발색이 되는 거라서요." 장소월은 전연우가 도대체 뭘 어쩌고 싶은지 알 수가 없었다
그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고 그걸 본 장소월은 정신이 번쩍 들어 그를 밀쳐냈다. "이제 그만 해요!" 그녀는 마음이 몹시도 심란했다. 전연우가 다시 자세를 고쳐 앉았고 그녀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이젠 오빠도 거부하는 거야?”장소월은 호흡을 가다듬고 그녀의 까만 짧은 치마를 꽉 부여잡으며 말했다. “제가 전에 말했듯이 오빠는 그냥 오빠일 뿐이에요. 앞으로 다시는... 이런 이상한 짓 하지 마세요. 만약 윤서 언니가 알게 된다면 언니가 분명 많이 속상해할 거예요.”‘양다리를 걸치려고 하다니. 전연우, 전생에 내가 집에서 네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때도 다른 여자랑 차 안에서 이딴 짓을 하고 있었던 거야?’장소월은 이미 그에게 일말의 감정도 남아있지 않았다.그는 백윤서를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사랑하지 않았다. 송시아를 놓고 봐도 그랬다. 그녀에겐 백윤서와 비슷한 면이 많았지만, 전연우는 그녀를 단지 아이를 만드는 수단으로만 여겼었다.한때 그를 온 마음으로 사랑했던 그녀였지만 마지막엔 결국 그에게 비참하게 버려지고 말았다.그녀는 너무나 두려웠다.전연우는 싸늘하게 식어버린 눈빛으로 말했다. "철 들었네, 우리 소월이. 미안해. 오빠 때문에 많이 당황했지? 저번 일도 그렇고 다 사과할게.”"괜찮아요... 이미 다 잊어버렸어요!" “그래... 아무 일도 없었던 거로 하자." 전연우가 차 문을 열자마자 장소월은 황급히 도망쳐 나왔다.장소월은 현관문으로 들어서자마자 마침 보라색 비단 잠옷을 입고 계단에서 내려오는 강만옥과 마주쳤다. “소월아, 이제 온 거니? 너희 아빠는 저녁에 회식이 있어서 조금 늦게 온다던데. 일단 우리끼리 먼저 밥을 먹자.”장소월은 입맛이 하나도 없었기에 음식 생각이 날 리가 없었다.강만옥을 마주쳤을 때도 장소월의 머릿속에는 온통 오늘 하루 동안 그녀와 전연우가 차 안에서 함께 했던 장면들뿐이었다.속이 울렁거리고 토하고 싶은 충동까지 느껴질 정도로 거부감이 들었다.장소월이 안 먹겠다고 말
“넌 장소월이 이미 다 알고 있을 거라는 생각은 안 들어? 전연우, 모든 걸 다 신중히 여기는 네 성격대로면 장소월이 우리 일을 알게 만들고 싶진 않겠지. 아니면 설마 지금 저 여자한테 손을 못 대겠다는 건 아니겠지? 내가 도와주기라도 해야 하려나? ”강만옥은 요염하게 붉고 매혹적인 입을 살짝 내밀고 손을 턱에 받치며 눈웃음을 짓고 말했다. “자기야, 너도 알겠지만, 나는 연적에 대해서는 한 번도 봐준 적이 없어."“만약 그녀가 정말 강영수와 사귀고 결혼까지 한다면... 안그래도 장가네한테 못살 정도로 잡혀 사는데 강가네까지 합류하면 너 정말 감당할 수 있겠어?"전연우는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티슈로 입을 닦았다. “내 일이야. 네가 이래라저래라 할 일이 아니라고. 신발이나 똑바로 신어.”강만옥은 민망하단듯이 웃으며 그의 종아리에 올려놓고 있던 발을 옮겼다.전연우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아까 몰고 온 아우디차를 다시 끌고 장가네 주차장을 빠져 나왔다....장소월은 8시도 채 안 돼서 잠에 들었다.강영수와는 다시 연락하지 않았고 그녀도 딱히 상관하지 않았다. 오늘 마주쳤던 그 사람은 강영수가 아니였을 테니까 말이다.만약 진짜 강영수 였다면 그녀의 문자에 답장을 안 했을 리가 없었다.까만 외투는 이미 아줌마가 깨끗이 씻어놓고 그녀의 방 베란다에서 말리고 있었다.아줌마는 교복도 다시 단추를 달아놓고 그녀의 침대 머리맡에 고이 두었다. 그녀는 밤새 제대로 자지도 못했고 그저 끊임없이 악몽만 꿀 뿐이었다.그녀는 꿈에서 자신의 화를 풀기 위해 장소월을 방에 가둬두고 있는 전연우를 보았다.장소월은 손발아 쇠사슬로 꽁꽁 감긴 채 침대의 머리맡에 묶여있었다.그의 눈빛은 그가 봐도 공격적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소월아, 너는 내 와이프잖아. 근데 네가 어떻게 다른 남자를 좋아해...”시계를 보니 겨우 6시였다.바로 샤워하고 책도 보다가 7시 반이 되어서 학교로 출발했다.그 뒤로 거의 일주일 동안은 그나마 평화로웠다. 적어도 전연우는 마주치지 않았으니
그녀가 잘못 보지 않았다면 이 사람들은 분명 방서연, 허철, 그리고...강용이다!장소월은 자기 자가용 바로 옆에 서서, 맞은 편에서 그녀를 향해 걸어오는 사람들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들이 맞았다.장소월은 깜짝 놀랐다. ‘백윤서가 언제부터 강용과 어울려 다닌거지?’두 사람의 사이는 매우 좋아 보였다.장소월은 상상하기도 싫었다.백윤서는 전연우를 좋아했었는데?전연우는 그녀가 강용과 노는 걸 알기나 할까?하지만... 백윤서가 누구랑 놀던 장소월과는 큰 상관이 없어 보였다. 장소월 그들의 일이라면 알고 싶지도 않았고 털끝 하나 엮이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다시 고개를 돌리며 차에 올라타려 할 때 강용 팔에 새겨져 있는 문신이 눈에띄었다.분명 전생에 본 것 같이 익숙한 문신이었다.너무나도 익숙했지만 더 이상 아무리 노력해봐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이때 허철은 맞은 켠 승용차 옆에 멍하니 서 있는 장소월을 향해 소리쳤다. “강용아, 저기 서 있는 사람 장소월 아니야? 쟤 지금 널 보는 거 같은데? 내가 보니까 장소월 쟤 무조건 너한테 관심 있어.”“봐. 저런 원망스럽고 짜증에 찬 눈빛을 하고 있잖아. 분명 또 질투가 났지. 뭐.”강용이 무심하게 그쪽을 바라보았을 때 장소월은 이미 차 안에 들어간 뒤였다.백윤서 역시 그 검은 승용차는 장가네가 전문 장소월을 마중하기 위해 마련한 차라는걸 알고있었다. 두 학교는 그저 거리 하나만 사이에 두고 있었는데 차이는 하늘과 땅의 차이라고 할정도이었다. “소월이? 너희 소월이를 알아?” 백윤서는 아주 단아했다. 그뿐만 아니라 청순하고 아름다웠다. 인간 세상의 때가 묻지 않은 선녀 같은 그녀는 긴 머리를 땋아 한쪽에 걸치고 있었고 하얀 드레스를 입고 강용의 옆에 우아하게 서 있었다. 허철은 눈썹을 찌푸리며 백윤서를 바라봤다. “누님도 장소월을 알아?”백윤서는 고개를 끄덕이었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소월이랑 함께 어린 시절을 보냈어. 근데 좀 지나서 내가 많이 아픈 바람에 해외에 나가서 치
그... 그... 이제 생각해 보니 전연우의 강박에 못 이겨 투신한 그 사람이 바로 강용이었다! 그의 손에 새겨진 문신 때문에 그녀는 알아볼 수 있었다.강용이 강 씨 그룹을 관리하고 있을 때 한번 큰 교통사고가 났었는데 그때 절벽에서 추락하고 모든 사람이 생존자는 한 명도 없다고 여기고 있었다. 강용 역시 그 교통사고로 사망한 줄 알았었다. 그 뒤로 강가네는 여자로 바꿔 회사를 관리시켰지만 피크타임은 그리 길지 못했다.강용이 사고를 당한 지 2년 뒤 강가네에서는 큰 폭발이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 강가네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 후 강 씨 그룹은 베일에 싸인 의문의 사람에게 인수당했다. 그 사람의 이름이 뭐였는지 장소월은 가물가물해 기억해 내지 못했다.그 사람은 정말 신비스러웠다. 단 한 번도 진짜 얼굴을 보여준 적이 없었고 전연우는 그가 얼굴의 화상흉터로 항상 가면을 쓰고 다닌다고 했었다.그때 장소월이 유일하게 기억한 것이 바로 그의 손에 있던 문신이었다. 성격도 난폭해 그의 눈에 든 여자는 모두 그와 밤을 보내고 절반 죽어서 나왔었다.그 문신은 강용의 몸에 있던 문신과 완전히 일치했다.이제 보니 그 사람은 강용이었다.하지만 만약 강용이 그때 사고로 죽지 않았다고 해도 그가 강 씨 그룹을 인수할 만큼 많은 자금이 어디에서 났을까?큰 의문이었다.장소월은 또 이 새로운 의문점을 생각해 보았다.강가네는 서울시 경제의 핵심을 틀어쥐고 있었다. 전연우는 어떻게 흔적 하나 남기지 않고 그런 강가네를 집어삼켰을까?장소월은 그 시절 기억의 퍼즐을 곰곰이 맞춰보았다. 전연우가 장가네를 통제하고 반년도 채 걸리지 않은 사이에 강 씨 그룹의 새로운 대표, 다시 말해 사고 이후 정체를 숨기고 지낸 강용과 손을 잡는 데 성공했다.그 시절 전연우는 장 씨 그룹의 거액을 빼앗았다. 당시 모든 주주가 불만을 가지고 떠나려 했었는데 그 이유는 회사가 체결한 모든 계약이 그룹 경제에 구멍을 내고 자칫 소홀히 하면 언제든지 장 씨 그룹
장소월이 무용 학원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니 이미 저녁 9시였다. 차에서 내렸을 때 그녀는 다리가 부러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절뚝이며 걸어오자 아줌마가 얼른 와 자초지종을 물었다. “아이고, 어쩌다 이렇게 다친 거예요? 얼른 소파에 앉아요. 제가 주물러 드릴게요.”기사님과 아줌마는 그녀를 부축하고 소파에 앉혔고 가방은 옆에 두었다.“이건 분명 근육이 다친 걸 거예요. 제가 물파스 들고 올게요. 잠시만 기다리세요.”집에는 항상 약상자가 구비되어 있었다. 아줌마는 얼른 물파스를 들고 왔다. “아니, 아가씨 선생님은 아가씨가 다친 걸 몰랐대요? 정말 바보 같네요. 봐봐요. 아픈 데는 어디예요?”아줌마는 장소월의 다리를 잡고 자기의 무릎에 올려두며 물었다.장소월은 앉아 있다 보니 이미 많이 나아진 상태였다. “선생님을 탓할 건 아니에요. 제가 훈련강도를 좀 높여서 했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넘어져서 좀 다쳤어요.”장소월은 까만색 스타킹을 벗었고 아줌마는 물파스를 꼼꼼히 발라주며 종아리도 함께 주물러 줬다.“어때요? 많이 낫죠?”장소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주 괜찮아졌어요.”거실을 한번 쭉 둘러본 장소월은 다시 입을 열었다. “근데 강만옥 이모는요? 아빠도 집에 안 계시는 거예요?”“강만옥 님은 연우 도련님과 있을 거예요. 연우 도련님도 돌아오신 지 얼마 되지 않는데 아마 지금쯤 잠에 드셨을 거예요.”장소월의 얼굴빛이 말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괴이했다. 그녀는 이 일을 장해진한테 말을 꺼내야 하나 고민이었다. 그렇지 않으면...그녀는 차라리 기숙사 생활을 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하지만 장소월은 장해진이 그녀를 기숙사로 보내는 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전연우는 요즘 장가네로 자주 왔다. 장소월은 아무리 곰곰이 생각해 봐도 이유를 알 수 없었다.종아리와 허벅지 안쪽까지 모두 물파스를 바르고 난 뒤 장소월은 치마를 내려 다시 정돈했다. “아줌마 내가 이미 약을 다 닦아 놓았으니까 얼른 먼저 들어가 쉬어요.”“저는 선생이 돌
“서 대표님은 자리에 안 계십니다. 급한 일이 있으시면 전화로 연락해 보십시오.” 안내 데스크에서 용건을 설명하자 돌아온 대답은 그러했다. 믿을 수 없는 말에 배은란의 동공이 흔들렸다. “그럼 언제 돌아오는데요? 여기서 기다릴게요!”직원은 미소를 지으며 단호히 말했다.“죄송하지만, 그건 대표님의 사생활이라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저는 그 사람의...” 다급한 마음에 배은란은 자기도 모르게 ‘형수’라고 말할 뻔했다. 하지만 순간 회사 사람들이 그녀와 서철용 사이의 일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을 거란 생각이 뇌리에 스쳤다. 하여 입 밖으로 내뱉으려던 말을 다시 삼켜버렸다. “여기 잠깐 앉아 있어도 될까요?” 그녀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직원은 정중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따뜻한 차를 내어주었다. 배은란은 회사에서 계속 서철용을 기다렸지만, 퇴근 시간인 오후 5시가 되도록 그의 그림자조차 볼 수 없었다. 직원이 다시 따뜻한 물을 가져다주었다. 배은란은 고개를 들어 애써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오후 내내 폐를 끼쳤네요. 혹시 서철용 씨가 돌아오면 꼭 저에게 연락해 주세요. 여기 제 연락처입니다.” 그녀는 자신의 번호를 적고 지친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퇴근 시간이라 교통 체증이 심했고, 한참을 기다린 후에야 겨우 택시를 잡을 수 있었다. “어디로 모실까요?” 택시 기사가 그녀에게 물었다. 배은란은 잠시 침묵하다가, 서씨 본가 주소를 불렀다. 택시는 천천히 출발했다. 배은란은 뒷좌석에 앉아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낯선 풍경을 바라보았다. 마음속에 비통함이 내려앉았다. 그녀는 서철용과 오랫동안 뒤섞여 지냈었다. 하지만 연락이 끊겨버리니 그를 어디에서 찾아야 할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그녀가 알고 있는 곳이라곤 회사와 서씨 본가, 두 곳이 전부였다. 서철용이 본가에 드나드는지조차 알 수 없었지만, 그저 운에 맡길 수밖에 없었다. 서씨 본가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날이 어두워져 있었다. 배은란은 두려움에 한참을
하루 종일 기다렸지만, 서철용에게선 연락이 오지 않았다.배은란은 잠자리에 누워서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수시로 휴대폰을 꺼내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예상했던 것처럼, 실망과 절망만 반복되었다.배은란은 이불 속으로 파고들어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그녀는 문득 깨달았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그녀와 서철용 관계의 주도권은 줄곧 서철용에게 있었다는 것을.감정적으로는 그녀가 우위에 있었을지 모르지만, 다른 모든 면에서 그녀는 약자의 입장이었다.서철용이 일방적으로 연락을 끊은 지금, 그녀는 그를 어떻게 찾아야 할지조차 알지 못했다.배은란은 눈물로 흐릿해진 시야로 휴대폰 연락처를 뒤적였다.연락처 목록이 거의 바닥을 보일 때까지, 서철용을 알 만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찾지 못했다.포기하려던 찰나, 연락처 맨 밑에서 누군가의 이름을 발견했다.장소월이었다.최면에 걸려 있던 동안, 서철용과 함께 몇 번 만난 적이 있는 여자였다.배은란은 늘 그 시절의 기억을 애써 밀어냈었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이 떠올려야 했다.기억 속 장소월이라는 여자는 서철용과 예사로운 관계가 아닌 듯했다.그녀라면 서철용의 소식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배은란은 빨리 원하는 답을 얻고 싶은 마음에 시간조차 잊은 채 전화를 걸었다.한참을 기다려도 통화연결음만 들려올 뿐이었다.하지만 얼마 후, 드디어 전화가 연결되었다.“여보세요, 누구세요?”장소월의 목소리는 흐릿하고 몽롱한 것이 갓 잠에서 깬 듯했다.배은란은 뒤늦게 깨달았다. 지금은 새벽 2시라는 것을.“장소월 씨, 저 배은란이에요. 늦은 시간에 전화해서 정말 미안해요. 혹시 최근에 철용 씨와 연락하신 적 있으신가요?”배은란은 진심으로 자책하며 사과했다.그녀의 휴식을 방해한 것에 대한 미안함도 있었지만, 그녀가 혹여 화가 나 서철용의 행방을 알려주지 않을까 봐 그 두려운 마음이 더 컸다.장소월의 목소리에는 당혹스러움이 가득했다.“배은란 씨? 저희 아는 사이인가요?”배은란은 잠시 당황했다. 그녀가 자신을 잊어버렸을 거라는
그 후... 배은란은 그의 죽음을 알게 되었다.과거가 눈앞에서 재현되자 배은란은 절망감에 휩싸여버렸다. 순간 눈앞이 캄캄해지며 정신을 잃고 말았다.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그녀는 병실에 누워 있었다. 햇살이 창문을 통해 그녀의 얼굴에 쏟아졌다. 배은란은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은 뒤에야 무슨 일이 있었는지 떠올렸다.“민용 씨!”그녀는 서민용을 찾아가려고 벌떡 일어났다.몸을 일으켜보니 서민용이 두 눈을 감은 채 바로 옆 침대에 누워 있었다. 환자복까지 입고 있으니 더욱 허약하고 초췌해 보였다.배은란의 눈에서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손바닥으로 입을 힘껏 틀어막았지만, 신음 소리는 손가락 틈새로 새어 나오고 있었다.한참을 울고 나서야 간신히 감정을 추스를 수 있었다.“민용 씨, 또 날 버리려는 거야? 혹시 내가 요즘 뭐 잘못한 거 있어? 그랬다면 미안해. 정말 조심했는데...”“민용 씨, 혹시 이렇게 사는 게 너무 재미없어서 그래? 하지만... 난 정말 당신 없이는 안 돼. 제발 이러지 마. 응?”“내가 너무 이기적이었지? 마지막으로 한 번만 나 용서해 주면 안 돼? 당신 깨어나면, 우리 가족 행복하게 살자.”그녀는 손가락 끝으로 그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지고는 붉어진 눈으로 몸을 일으켰다.“배은란 씨, 지금 뭐하시는...”의사가 회진을 돌다가 병실 밖으로 나온 그녀를 보고 걱정스럽게 말했다.배은란은 생명의 동아줄이라도 된 듯 그의 팔을 붙잡았다. “서철용은 어디에 있어요? 선생님은 알고 계시죠? 그 사람이 민용 씨를 돌보라고 시킨 거잖아요.”의사는 동정 어린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서 선생님과는 이미 연락이 끊겼습니다. 저희도 그분의 소식을 들은 지 오래되었습니다.”배은란의 눈에는 절망감이 가득했다. “그럴 리 없어요. 선생님은 분명 알고 있을 거예요. 민용 씨를 살릴 수 있는 사람은 그 사람뿐이에요. 제발 말해 주세요. 무엇을 원하시든 다 드릴게요.”의사는 그녀의 손을 뿌리치고 짧게 대답했다.
학창 시절의 서철용은 그녀를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쳤지만, 배은란은 결코 알지 못했다...회상 끝....시간은 빠르게 흘러 눈 깜짝할 사이에 어느새 거의 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배은란의 헌신적인 간호 덕분에 서민용의 상태는 눈에 띄게 호전되었다.모든 것이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는 듯했다.아침, 배은란은 여느 때처럼 따뜻한 물에 수건을 적셔 서민용의 몸을 닦아주었다.얼굴을 다 닦아주었는데도 서민용은 여전히 깨어나지 않았다.“민용 씨?” 배은란은 왠지 모르게 불안함이 엄습했다.서민용은 하루 24시간 침대에 누워 있었지만, 몸이 불편해 잠은 거의 자지 못했다. 하여 매일 아침 배은란이 오면 그는 눈을 뜨고 옅은 미소를 머금은 채 그녀가 늘어놓는 사소한 이야기들을 듣곤 했었다.하지만 오늘은... 배은란이 조심스럽게 그의 눈가를 건드려 보았다.서민용은 깨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민용 씨, 빨리 일어나 봐. 나 놀리는 거 아니지? 이런 장난 재미없어.”배은란의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감히 서민용의 얼굴에서 손을 떼지 못했다.그의 피부엔 여전히 따뜻한 체온이 감돌고 있었고, 숨소리도 고르게 나고 있었다.불러도 깨지 않다는 것 외에는, 잠자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몇 번을 시도해도 서민용이 미동도 하지 않자 배은란은 덜컥 겁이 나 주치의에게 연락했다.주치의의 제안에 따라, 배은란은 서민용을 병원에 데려가 검사를 받게 했다.병실 안은 각종 기계들로 가득했고, 네다섯 명의 전문의들이 침대 주위에 모여 있었다.배은란은 문 앞에 서서 망가진 목각인형이라도 된 것처럼 의사들에 의해 제멋대로 주물러지는 서민용을 지켜보았다. 인간의 존엄성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배은란은 마음이 저릿해지고 눈가도 따끔거렸다.한때는 누구보다 밝고 명랑한 사람이었는데...의식이 깨어있다면, 이 수치스러운 상황에 얼마나 괴로워할까?어쩌면, 죽음만이 편안해지는 유일한 길일지도 모른다.하지만 그녀는 정말이지 그가 없이는 이 세상을 살아나
그는 사장과 여자를 데리고 옥상으로 올라갔다. 두 사람은 서로 쳐다보기만 할 뿐 감히 그에게 다가가지 못했다. 서철용은 그들을 쳐다보며 입꼬리를 차갑게 끌어올렸다.“당신들 내가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궁금하지 않아?” 서철용은 덤덤히 입을 열었다. 그의 말투에는 자신감과 비웃음이 묻어나오고 있었다. “어제 바에서 배은란을 구한 사람이 바로 나였거든.”여자와 사장은 그 말을 들은 순간 얼굴이 창백해졌다. 배은란을 구한 이가 서철용이었을 줄은 정말이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게다가 그가 직접 찾아와서 따져 물을 줄이야.“당신... 뭘 하려는 거예요?” 여자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서철용은 그녀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몸을 돌려 사장을 쳐다보았다. “어떻게 해야 할지 알고 있겠지?” 서철용의 어조는 냉담하고 단호했다. 사장은 서철용의 뜻을 바로 알아차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여자 앞으로 걸어가 한번 깊게 심호흡을 하고는 팔을 들어 올려 따귀를 후려쳤다. 여자는 반응할 틈도 없이 가격을 당하고 중심을 잡지 못한 채 비틀거렸다. 그녀의 뺨은 순식간에 붉게 부어올랐고, 눈에는 충격과 분노가 가득했다.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사장을 노려보았다.“당신... 당신이 감히 날 때려?” 여자는 분노에 차올라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그 목소리에는 공포와 불안감이 가득 차 있었다. 사장은 그녀의 분노 따위는 아랑곳하지도 않은 채 경멸과 혐오감이 깃든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이 여자가 바로 모든 일의 원흉이다. 사장을 시켜 배은란에게 약을 먹이도록 한 사람 또한 이 여자다. 지금, 그녀는 반드시 자신이 저지른 짓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만 한다.“당신... 당신들 두고 봐. 내가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야!” 여자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는 몸을 돌려 옥상을 떠나려고 했다. 하지만 그녀에게 떠날 기회를 줄 리 없는 서철용이었다. 그는 곧바로 여자의 옷을 낚아채 옥상 난간 옆으로 끌고 갔다.“당신 뭐 하려는 거예요?” 여자
“누구시죠? 왜 여기 계시는 거죠?” 사장이 약간 당황한 듯 물었다. 그녀는 서철용과 일면식이 없을뿐더러 그가 왜 이곳에 나타났는지도 알 수 없었다.“서철용이라고 합니다. 당신과 이야기 좀 하고 싶어서요.” 냉담하고 단호한 서철용의 어조에 사장은 저도 모르게 두려움을 느꼈다. 그녀는 서철용의 의도는 알지 못했지만,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위험한 기운만큼은 선명히 느낄 수 있었다. 하여 함부로 그의 화를 돋우지 않고 최대한 침착함을 유지하며 그의 목적을 알아내려고 애썼다.서철용은 군더더기 없이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그는 사장에게 왜 배은란에게 약을 먹였는지, 왜 그녀를 해치려 했는지 따져 물었다.사장은 처음에는 부인하려 했지만, 서철용의 눈빛이 너무나 날카로워 도저히 거짓말을 할 수가 없었다. 하여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다. 누군가 그렇게 하도록 시켰고, 어쩔 수 없이 따랐다고 해명했다.“다른 사람이라고요?” 서철용은 코웃음을 쳤다. “어제 문 앞에서 서민용의 번호를 따가려던 그 여자 말인가요?” 그는 사장을 노려보며 물었다. 진작부터 그 여자가 수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서민용을 바라볼 때 눈에서 묘한 분위기를 풍겼지만, 배은란을 향할 때는 심한 적개심을 드러냈었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서민용은 수상한 점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그걸 어떻게 아세요?” 사장은 깜짝 놀란 표정으로 서철용을 바라보았다. 사장에게 그런 짓을 시킨 사람은 확실히 그 여자였다. 그녀는 이 술집의 단골손님이라 사장과의 관계도 꽤 좋은 편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서철용이 어제 이곳에 왔었던 걸 기억해내지 못했다. 서철용 정도 외모의 남자라면 잊어버렸을 리가 없는데 말이다.“그 여자 오늘 또 와요?” 서철용은 사장의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고 말했다. “네. 매일 옵니다.” 사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그 여자가 저한테 시킨 거예요. 저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어요.” 서철용의 눈치를 살피는 그녀의 눈동자는 두려움으로 가득 차
그는 바 문이 열리기만을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한시라도 빨리 자신의 계획을 시작하고 싶었다. 그는 주호걸이 자신을 이해해 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설령 그가 주호걸을 무시한다고 해도, 주호걸은 전혀 개의치 않을 것이다.대략 10분 정도 지나자, 주호걸이 바 문 앞에 나타났다. 그가 다니는 학교는 이 근처에 있었으니, 자연히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는 야구 모자를 눌러쓴 남자를 쳐다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서철용은 온몸에서 위험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아직 밥 안 먹었지.” 그는 손에 든 빵을 서철용에게 내밀었다. 그는 서철용에 대해 익히 잘 알고 있다. 주말 이 시간이면 분명 한창 꿈나라에 빠져있었을 그가 오늘은 술집 문 앞에 나타났다. 그가 하는 모든 행동은 오로지 배은란을 위한 것이다. 하지만 이런 그를 배은란이 알아주기나 할까.“입맛 없어. 먹고 싶지 않아.” 서철용은 고개를 저었다. 그는 음식이라곤 조금도 입에 대고 싶지 않았다.“아무것도 안 먹으면 무슨 힘으로 싸우려고?” 서철용이 거절했지만, 주호걸은 손을 거두지 않고 여전히 빵을 들고 있었다. 서철용은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 주호걸의 말에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든 그는 빵을 받아들고 순식간에 먹어치웠다.그 후에도 계속 술집 문을 뚫어지라 쳐다보고 있었다.“그렇게 쳐다보면 누가 감히 문을 열겠어?” 주호걸이 난처한 표정으로 서철용에게 말했다. 문 앞에 서서 빤히 쳐다보고 있는 이런 상황에서 누가 감히 가까이 다가오겠는가?게다가 서철용의 오늘 차림새는... 그를 모르는 사람이라면 분명 도둑으로 취급했을 것이다.서철용이 고개를 돌려 주호걸을 바라보았다. 주호걸의 말이 옳다. 그의 생각이 짧았다. 그는 옆으로 살짝 떨어진 곳에 있는 잘 보이지 않는 으슥한 장소로 옮겼다. 이곳이라면 아무도 그를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그는 이곳에서 하루 종일 기다렸다. 드디어 3시쯤 되었을 때, 익숙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술집 사장이었다! 배은란의 물에 장난질을 쳐놓
한편, 서철용은 곧장 학교로 돌아가지 않고 배은란이 일하는 바로 향했다.그는 어제 일어났던 모든 일을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봤었다. 배은란이 잘못한 것도 없이 억울함을 당하도록 내버려 둘 수 없었다.만약 그가 적시에 나타나지 않았다면, 배은란에게 어떤 끔찍한 일이 일어났을지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서민용도 다시 배은란을 찾아가지 않았으니, 서철용이 그곳에 있었던 건 그야말로 천만다행이었다.아직 낮시간이라 바는 문을 열지 않았다.하지만 그는 다른 곳에 가고 싶지 않아 계속 그곳에 머물렀다.그때 휴대폰이 울렸다.주호걸에게서 걸려온 전화였다.“여보세요.” 서철용은 냉담한 어조로 전화를 받았다.지금의 그는 누구에게도 좋은 태도를 보일 수 없었다. 주호걸을 포함해서 말이다.하지만 만약 배은란이 말을 걸어온다면, 아마 다른 모습일 것이다.“어디야?” 전화기 너머에서 주호걸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는 서철용을 찾으려 수없이 반복해 전화를 걸었지만, 좀처럼 연결되지 않았다.서철용의 학교는 그와 멀리 떨어져 있었음에도 그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곧장 그곳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서철용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어젯밤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는 당연히 알고 있었다. 줄곧 서철용 곁에 있었으니 말이다.서철용이 배은란을 데리고 떠난 후, 그는 집으로 돌아갔다. 이후 두 사람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지 못할뿐더러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으니 말이다.그는 단지 지금 서철용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싶을 뿐이었다. 그가 해서는 안 될 짓이라도 저질렀을까 봐 걱정이 태산이기 때문이었다.“바에 있어.” 서철용은 주호걸에게 솔직하게 말했다.어차피 그에게는 숨길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어제 바에서 일어났던 모든 일을 주호걸은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봤었다. 계속 주호걸에게 말하지 않는다면, 그는 아마 바로 찾아올 것이다.그렇게 되면, 그의 계획을 망칠 수도 있다.또한 그와 주호걸 사이에는 아무런 비밀도 없다. 무엇을
어젯밤은 너무나도 뜨겁고 격렬했다.왜 그런 일들이 일어났는지,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다만 깨어있는 상태에서는 부끄러워서 입 밖에 내뱉기가 어려울 뿐이었다.“은란아, 깼어?” 서민용은 배은란을 바라보며 말했다.그는 배은란에게 어젯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지 않았다. 그녀의 곁에 있어 주지 못했던 자신에게 잘못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하여 이런 상황에서는 아예 말을 꺼내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응.” 배은란은 행복한 미소가 번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는 후회하지 않았다. 어젯밤의 일이 없었다면, 언제 서민용과 그런 일을 하겠는가.“너 주려고 아침밥 사 왔는데, 다 식었네.” 서민용이 탁자 위에 놓인 음식을 쳐다보며 말했다.“지금 먹을게.” 배은란이 웃으며 말했다.그녀는 서민용이 아침 일찍 일어나 그녀를 위해 사 온 음식이라고 생각했다.물론 어젯밤 그가 이곳에 없었다는 건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은란아, 술집 아르바이트는 그만두는 게 좋겠어.” 서민용이 배은란을 바라보며 말했다.그는 어젯밤 내내 술집에서 일하는 것은 너무 위험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어제 어떤 여자가 그에게도 접근하지 않았던가. 배은란의 안전은 더더욱 장담할 수가 없다.그는 더 이상 어제와 같은 상황이 발생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어.” 배은란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도 이제 더는 술집에서 일하고 싶지 않았다. 어제 만약 서민용이 없었다면,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상상조차 하기 힘들었다.하지만 다행히 서민용이 적시에 와주었기에, 큰 화는 면할 수 있었다.그리고 그 사장 역시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챘다.전에는 사장이 좋은 사람이라고만 생각했었다. 하여 술집에서 일하는 것이 떳떳하지는 못해도 위험하지는 않을 거라 여겼다.하지만 지금 다시 떠올려보니, 어제 사장이 그녀를 바라보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그녀의 물에 문제가 있었다는 걸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었다.그녀는 혹시나 그런 일이 발생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