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럴 리가요. 오빠가 저를 생각해서 그런 건데요 뭐." 전연우의 시선은 장소월의 옷으로 향했다. 헐렁한 옷은 눈에 띄게 그녀의 가냘픈 몸에 맞지 않았다. 처음 보는 옷이었는데 딱 봐도 남자 옷이었다."오늘은 웬일로 교복을 안 입었네?" 장소월은 옷을 갈아입지 않았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채 그대로 와버렸었다. "아... 아니... 입었어요. 근데 단추가 떨어지는 바람에 다른 사람 옷을 빌려 입은 것뿐이에요. 나중에 다시 돌려줘야 해요." "남자 거야?" 장소월은 딱히 숨길 마음이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네." 전연우는 그저 조용히 입꼬리를 올렸다. 하지만 그런 그의 눈동자에는 초점이 없었고 말투는 왠지 모르게 차갑고 딱딱했다. “연애하는 거야?" "아니요..." 장소월은 서둘러 부인했다. "걔는 그냥 친구의 친구일 뿐이에요." "네 나이에 연애하는 게 뭐 어때서? 사춘기 때는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기 마련이지... 이제 연애 고민 같은 거 생기면 언제든지 오빠를 찾아와.”"네. 알겠어요. 오빠." 전연우와 대화를 할 때마다 그녀는 항상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어야만 했다. 자칫하면 그의 손에 이끌려 그가 미리 파둔 달콤한 함정에 빠질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남원 별장.전연우의 차는 주차장으로 향했다. 장소월은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어 문을 열어보았지만, 자동차 문은 굳게 잠겨져 있었다.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이때 전연우가 갑자기 확 다가왔고 그의 남성적인 체취가 장소월의 코를 찔렀다.그에게서 풍기는 은은한 동백꽃향이 그녀의 코끝을 간지럽혔다. "오빠... 뭐 다른 용건이라도 있어요?" 그러자 전연우는 그녀의 얼굴을 치켜들고 엄지손가락으로 그녀의 부드러운 입술을 살살 문댔다. 그의 손가락에 옅은 핑크빛이 묻어났다. 장소월은 잔뜩 겁에 질려 그대로 경직된 채 움직일 수가 없었다.“립스틱 발랐어?”"아뇨, 아뇨. 제가 전에 산 립글로스가 발색이 되는 거라서요." 장소월은 전연우가 도대체 뭘 어쩌고 싶은지 알 수가 없었다
그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고 그걸 본 장소월은 정신이 번쩍 들어 그를 밀쳐냈다. "이제 그만 해요!" 그녀는 마음이 몹시도 심란했다. 전연우가 다시 자세를 고쳐 앉았고 그녀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이젠 오빠도 거부하는 거야?”장소월은 호흡을 가다듬고 그녀의 까만 짧은 치마를 꽉 부여잡으며 말했다. “제가 전에 말했듯이 오빠는 그냥 오빠일 뿐이에요. 앞으로 다시는... 이런 이상한 짓 하지 마세요. 만약 윤서 언니가 알게 된다면 언니가 분명 많이 속상해할 거예요.”‘양다리를 걸치려고 하다니. 전연우, 전생에 내가 집에서 네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때도 다른 여자랑 차 안에서 이딴 짓을 하고 있었던 거야?’장소월은 이미 그에게 일말의 감정도 남아있지 않았다.그는 백윤서를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사랑하지 않았다. 송시아를 놓고 봐도 그랬다. 그녀에겐 백윤서와 비슷한 면이 많았지만, 전연우는 그녀를 단지 아이를 만드는 수단으로만 여겼었다.한때 그를 온 마음으로 사랑했던 그녀였지만 마지막엔 결국 그에게 비참하게 버려지고 말았다.그녀는 너무나 두려웠다.전연우는 싸늘하게 식어버린 눈빛으로 말했다. "철 들었네, 우리 소월이. 미안해. 오빠 때문에 많이 당황했지? 저번 일도 그렇고 다 사과할게.”"괜찮아요... 이미 다 잊어버렸어요!" “그래... 아무 일도 없었던 거로 하자." 전연우가 차 문을 열자마자 장소월은 황급히 도망쳐 나왔다.장소월은 현관문으로 들어서자마자 마침 보라색 비단 잠옷을 입고 계단에서 내려오는 강만옥과 마주쳤다. “소월아, 이제 온 거니? 너희 아빠는 저녁에 회식이 있어서 조금 늦게 온다던데. 일단 우리끼리 먼저 밥을 먹자.”장소월은 입맛이 하나도 없었기에 음식 생각이 날 리가 없었다.강만옥을 마주쳤을 때도 장소월의 머릿속에는 온통 오늘 하루 동안 그녀와 전연우가 차 안에서 함께 했던 장면들뿐이었다.속이 울렁거리고 토하고 싶은 충동까지 느껴질 정도로 거부감이 들었다.장소월이 안 먹겠다고 말
“넌 장소월이 이미 다 알고 있을 거라는 생각은 안 들어? 전연우, 모든 걸 다 신중히 여기는 네 성격대로면 장소월이 우리 일을 알게 만들고 싶진 않겠지. 아니면 설마 지금 저 여자한테 손을 못 대겠다는 건 아니겠지? 내가 도와주기라도 해야 하려나? ”강만옥은 요염하게 붉고 매혹적인 입을 살짝 내밀고 손을 턱에 받치며 눈웃음을 짓고 말했다. “자기야, 너도 알겠지만, 나는 연적에 대해서는 한 번도 봐준 적이 없어."“만약 그녀가 정말 강영수와 사귀고 결혼까지 한다면... 안그래도 장가네한테 못살 정도로 잡혀 사는데 강가네까지 합류하면 너 정말 감당할 수 있겠어?"전연우는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티슈로 입을 닦았다. “내 일이야. 네가 이래라저래라 할 일이 아니라고. 신발이나 똑바로 신어.”강만옥은 민망하단듯이 웃으며 그의 종아리에 올려놓고 있던 발을 옮겼다.전연우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아까 몰고 온 아우디차를 다시 끌고 장가네 주차장을 빠져 나왔다....장소월은 8시도 채 안 돼서 잠에 들었다.강영수와는 다시 연락하지 않았고 그녀도 딱히 상관하지 않았다. 오늘 마주쳤던 그 사람은 강영수가 아니였을 테니까 말이다.만약 진짜 강영수 였다면 그녀의 문자에 답장을 안 했을 리가 없었다.까만 외투는 이미 아줌마가 깨끗이 씻어놓고 그녀의 방 베란다에서 말리고 있었다.아줌마는 교복도 다시 단추를 달아놓고 그녀의 침대 머리맡에 고이 두었다. 그녀는 밤새 제대로 자지도 못했고 그저 끊임없이 악몽만 꿀 뿐이었다.그녀는 꿈에서 자신의 화를 풀기 위해 장소월을 방에 가둬두고 있는 전연우를 보았다.장소월은 손발아 쇠사슬로 꽁꽁 감긴 채 침대의 머리맡에 묶여있었다.그의 눈빛은 그가 봐도 공격적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소월아, 너는 내 와이프잖아. 근데 네가 어떻게 다른 남자를 좋아해...”시계를 보니 겨우 6시였다.바로 샤워하고 책도 보다가 7시 반이 되어서 학교로 출발했다.그 뒤로 거의 일주일 동안은 그나마 평화로웠다. 적어도 전연우는 마주치지 않았으니
그녀가 잘못 보지 않았다면 이 사람들은 분명 방서연, 허철, 그리고...강용이다!장소월은 자기 자가용 바로 옆에 서서, 맞은 편에서 그녀를 향해 걸어오는 사람들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들이 맞았다.장소월은 깜짝 놀랐다. ‘백윤서가 언제부터 강용과 어울려 다닌거지?’두 사람의 사이는 매우 좋아 보였다.장소월은 상상하기도 싫었다.백윤서는 전연우를 좋아했었는데?전연우는 그녀가 강용과 노는 걸 알기나 할까?하지만... 백윤서가 누구랑 놀던 장소월과는 큰 상관이 없어 보였다. 장소월 그들의 일이라면 알고 싶지도 않았고 털끝 하나 엮이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다시 고개를 돌리며 차에 올라타려 할 때 강용 팔에 새겨져 있는 문신이 눈에띄었다.분명 전생에 본 것 같이 익숙한 문신이었다.너무나도 익숙했지만 더 이상 아무리 노력해봐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이때 허철은 맞은 켠 승용차 옆에 멍하니 서 있는 장소월을 향해 소리쳤다. “강용아, 저기 서 있는 사람 장소월 아니야? 쟤 지금 널 보는 거 같은데? 내가 보니까 장소월 쟤 무조건 너한테 관심 있어.”“봐. 저런 원망스럽고 짜증에 찬 눈빛을 하고 있잖아. 분명 또 질투가 났지. 뭐.”강용이 무심하게 그쪽을 바라보았을 때 장소월은 이미 차 안에 들어간 뒤였다.백윤서 역시 그 검은 승용차는 장가네가 전문 장소월을 마중하기 위해 마련한 차라는걸 알고있었다. 두 학교는 그저 거리 하나만 사이에 두고 있었는데 차이는 하늘과 땅의 차이라고 할정도이었다. “소월이? 너희 소월이를 알아?” 백윤서는 아주 단아했다. 그뿐만 아니라 청순하고 아름다웠다. 인간 세상의 때가 묻지 않은 선녀 같은 그녀는 긴 머리를 땋아 한쪽에 걸치고 있었고 하얀 드레스를 입고 강용의 옆에 우아하게 서 있었다. 허철은 눈썹을 찌푸리며 백윤서를 바라봤다. “누님도 장소월을 알아?”백윤서는 고개를 끄덕이었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소월이랑 함께 어린 시절을 보냈어. 근데 좀 지나서 내가 많이 아픈 바람에 해외에 나가서 치
그... 그... 이제 생각해 보니 전연우의 강박에 못 이겨 투신한 그 사람이 바로 강용이었다! 그의 손에 새겨진 문신 때문에 그녀는 알아볼 수 있었다.강용이 강 씨 그룹을 관리하고 있을 때 한번 큰 교통사고가 났었는데 그때 절벽에서 추락하고 모든 사람이 생존자는 한 명도 없다고 여기고 있었다. 강용 역시 그 교통사고로 사망한 줄 알았었다. 그 뒤로 강가네는 여자로 바꿔 회사를 관리시켰지만 피크타임은 그리 길지 못했다.강용이 사고를 당한 지 2년 뒤 강가네에서는 큰 폭발이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 강가네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 후 강 씨 그룹은 베일에 싸인 의문의 사람에게 인수당했다. 그 사람의 이름이 뭐였는지 장소월은 가물가물해 기억해 내지 못했다.그 사람은 정말 신비스러웠다. 단 한 번도 진짜 얼굴을 보여준 적이 없었고 전연우는 그가 얼굴의 화상흉터로 항상 가면을 쓰고 다닌다고 했었다.그때 장소월이 유일하게 기억한 것이 바로 그의 손에 있던 문신이었다. 성격도 난폭해 그의 눈에 든 여자는 모두 그와 밤을 보내고 절반 죽어서 나왔었다.그 문신은 강용의 몸에 있던 문신과 완전히 일치했다.이제 보니 그 사람은 강용이었다.하지만 만약 강용이 그때 사고로 죽지 않았다고 해도 그가 강 씨 그룹을 인수할 만큼 많은 자금이 어디에서 났을까?큰 의문이었다.장소월은 또 이 새로운 의문점을 생각해 보았다.강가네는 서울시 경제의 핵심을 틀어쥐고 있었다. 전연우는 어떻게 흔적 하나 남기지 않고 그런 강가네를 집어삼켰을까?장소월은 그 시절 기억의 퍼즐을 곰곰이 맞춰보았다. 전연우가 장가네를 통제하고 반년도 채 걸리지 않은 사이에 강 씨 그룹의 새로운 대표, 다시 말해 사고 이후 정체를 숨기고 지낸 강용과 손을 잡는 데 성공했다.그 시절 전연우는 장 씨 그룹의 거액을 빼앗았다. 당시 모든 주주가 불만을 가지고 떠나려 했었는데 그 이유는 회사가 체결한 모든 계약이 그룹 경제에 구멍을 내고 자칫 소홀히 하면 언제든지 장 씨 그룹
장소월이 무용 학원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니 이미 저녁 9시였다. 차에서 내렸을 때 그녀는 다리가 부러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절뚝이며 걸어오자 아줌마가 얼른 와 자초지종을 물었다. “아이고, 어쩌다 이렇게 다친 거예요? 얼른 소파에 앉아요. 제가 주물러 드릴게요.”기사님과 아줌마는 그녀를 부축하고 소파에 앉혔고 가방은 옆에 두었다.“이건 분명 근육이 다친 걸 거예요. 제가 물파스 들고 올게요. 잠시만 기다리세요.”집에는 항상 약상자가 구비되어 있었다. 아줌마는 얼른 물파스를 들고 왔다. “아니, 아가씨 선생님은 아가씨가 다친 걸 몰랐대요? 정말 바보 같네요. 봐봐요. 아픈 데는 어디예요?”아줌마는 장소월의 다리를 잡고 자기의 무릎에 올려두며 물었다.장소월은 앉아 있다 보니 이미 많이 나아진 상태였다. “선생님을 탓할 건 아니에요. 제가 훈련강도를 좀 높여서 했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넘어져서 좀 다쳤어요.”장소월은 까만색 스타킹을 벗었고 아줌마는 물파스를 꼼꼼히 발라주며 종아리도 함께 주물러 줬다.“어때요? 많이 낫죠?”장소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주 괜찮아졌어요.”거실을 한번 쭉 둘러본 장소월은 다시 입을 열었다. “근데 강만옥 이모는요? 아빠도 집에 안 계시는 거예요?”“강만옥 님은 연우 도련님과 있을 거예요. 연우 도련님도 돌아오신 지 얼마 되지 않는데 아마 지금쯤 잠에 드셨을 거예요.”장소월의 얼굴빛이 말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괴이했다. 그녀는 이 일을 장해진한테 말을 꺼내야 하나 고민이었다. 그렇지 않으면...그녀는 차라리 기숙사 생활을 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하지만 장소월은 장해진이 그녀를 기숙사로 보내는 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전연우는 요즘 장가네로 자주 왔다. 장소월은 아무리 곰곰이 생각해 봐도 이유를 알 수 없었다.종아리와 허벅지 안쪽까지 모두 물파스를 바르고 난 뒤 장소월은 치마를 내려 다시 정돈했다. “아줌마 내가 이미 약을 다 닦아 놓았으니까 얼른 먼저 들어가 쉬어요.”“저는 선생이 돌
말이 끝나기 무섭게 소월은 황급히 4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같은 공간에 더 있다가는 인생이 조기에 종영할 포스였다. 곧이어 위층에서 비명이 들렸다. “앗!”전연우는 소리 나는 방향을 따라 위로 쳐다보며 참 요란하게도 올라간다고 생각했다. 소리를 들어보니 많이 다친듯하다.검은 줄무늬 잠옷을 입고 있는 탓인지 오늘따라 전연우는 더 차가워 보였다. 카리스마가 그를 휘감았다. 위층에서 소리가 더 이상 안 들리자, 강만옥의 머리채를 잡아당기더니 말했다. “남자 부족해? 없으면 없다고 말하지. 내가 원하는 만큼 준비해 줄 수 있는데.”강만옥은 머리가 너무 아파서 지끈거려 연기고 뭐고 다 집어치웠다. 술에 취하긴커녕 정신이 맑았다. “진심이에요? 이 손을 놓으세요, 너무 아프다고요!”날 선 공기를 감지한 강만옥은 전연우의 손을 잡으면서 그의 기색을 살폈다. 강력한 위압감에서 나오는 포스로 진짜 화냈다는 것을 알 수 있다.전연우는 머리카락을 넘겨주는 척하다가 둘만 들리는 소리로 말했다. “한 번만 다시 그 더러운 몸뚱어리로 내 침대에 기어오르기만 하면 이렇게 쉽게 끝나지 않을 거야. 몇 명한테 더 당해봐야 정신 차리지...”경고인지, 협박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 상대를 헷갈리는 화법을 구사하며 차갑게 말했다. 강만옥은 그의 어두운 눈동자를 가만히 보고 있자니, 긴장감에 마른침을 삼켰다. 그러다가 문뜩 뭔가 생각난 듯 피식 웃었다. “그러든지요... 근데 그전에 한 번만이라도 나랑 해볼 생각은 없어요? 한 번으로는 부족할 거고... 그때 되면 내 목숨도 당신한테 바칠 수 있는데...”“미쳤구나!” 전연우는 발을 들어 그녀를 옆으로 차버렸다. “정신 차리게 도와줄게.”눈빛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이미 한 번쯤은 죽었을 것이다. 몸을 풀고 나서 정신이 혼미한 여자를 끌고 방으로 직진했다. 문을 발로 걷어차자 쾅 하고 닫혔다.욕실의 샤워기를 틀고 머리를 물속에 밀어 넣었다.한 번, 두 번......소월은 오늘 어쩜 이렇게 재수가 없을 수 있냐며 투덜거리며
10초 정도 지났다. 자고 있던 소월은 밝은 빛에 눈을 찡그렸다. 꿈인지 생시인지 비몽사몽이고 있는데 앞에 누군가 쳐다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 사람을 보는 순간 눈이 번쩍 떠졌고 너무 놀란 나머지 자기도 모르게 발을 움츠렸다. 빠르게 옷을 정리하고 몸은 어느새 반듯하게 자세를 고쳐 앉은 채 조심스럽게 물어봤다. “연우 오빠께서 이 시간에 어쩐 일로...”‘아놔, 방금 뭐라고 했지?’ 소월은 이불을 꼭 잡고 파르르 떨었다. 전연우는 그런 그녀를 말없이 쳐다봤다. 방안에 정적만이 흘렀다. 소월이는 목석처럼 꼼짝하지 않고 있었다. 이 분위기를 견딜 수 없어 소월이가 또 한 번 긴장 서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어... 언제 들어왔어요?”전연우는 아무 말도 못 들은 듯 그저 손바닥을 보고 있었다. 손에는 아직 바르다만 파스가 남아 있다. “발 내밀어, 마사지 해줄게.”그리고 소월을 쳐다봤다. 그윽한 눈빛, 소월이에게는 너무 따갑게 느껴져 바로 머리를 저으며 거절했다. “괜찮아요, 아줌마가 이미 처리해 줬어요. 내일이면 괜찮아질 거예요.”그녀의 생각지 못한 거절에 연우는 인상을 구겼다. “말 들어, 다시 얘기하게 만들지 말고.”소월은 곧 꼬리를 내렸다. 더 이상 심기를 건드려서 좋을 게 없었다. 적어도 지금은 타협하는 게 좋다. 이렇게 계속 거절하다가...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아니, 감당할 수 없다.전생에서부터 이렇게 지내왔기에 너무나도 익숙했다. 연우의 모든 요구를 소월은 들어줘야 했는데 ‘절대복종’이라고 해도 과하지 않다. 아무리 떼를 쓰고 아가씨 행세를 부려도 그의 손바닥에서는 꼼짝도 못 한다.수습 불가능한 사태를 방지하려면 먼저 굽히고 들어가는 게 최선이다. 천천히 이불속에서 발을 꺼내고 앞으로 내밀었다. 그녀의 발은 뽀얗고 관리를 잘 받은 예술품이다. 핑크색 네일아트와도 너무 조화로웠다. 부잣집에서 태어난 소월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흠잡을 데 없이 고급스러운 아우라가 풍겼다.연우는 자연스럽게 부어오른 발목을 가져
막무가내인 그녀의 모습을 신이랑은 더는 참아낼 수가 없어 단호히 말했다.“현실을 제대로 자각하세요. 난 절대 신수지 씨와 결혼하지 않아요. 당신 집안의 도움은 더더욱 필요 없고요. 성세 그룹에 들어간 건 민아 씨를 위해서예요. 민아 씨가 없어도 난 당신들과 얽히지 않을 거예요.”“계속 여기에 있고 싶으면 있어요.”신이랑은 바로 서재에 걸어 들어가 중요한 서류들을 챙기고는 노트북 가방에 넣었다. 그 모습을 본 신수지는 얼른 달려가 그의 팔을 잡았다.“어디에 가려고요? 오빠, 가지 말아요. 내가 그렇게 싫어요?”“내가 오빠를 좋아하는 것 때문에?”신이랑은 바로 그녀의 손을 뿌리쳐버렸다.“자신을 비참하게 만드는 일 하지 말아요.”신이랑은 물건을 들고 바로 떠나버렸다.신수지는 그의 뒤를 쫓아가며 소리쳤다.“오빠!”신이랑은 이미 엘리베이터를 타고 자리를 떴다.신수지는 분노에 차올라 발을 동동 굴렀다.“이게 다 소민아 때문이야. 너만 없었다면 오빠도 날 멀리하지 않았을 거라고!”신이랑은 차를 몰고 집에서 나가 한 호텔 방에 체크인했다.신수지는 엉엉 울며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유연홍은 자신의 귀한 딸이 울며 들어오자 얼른 뛰어가 달랬다.“왜 그래, 수지야? 누가 너 괴롭혔어? 엄마한테 말해.”유연홍은 신수지의 옆에 앉아 휴지로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엄마! 저 신이랑한테 갔었는데 쫓겨났어요. 밥 한 끼 같이 먹겠다고 하루종일 바쁘게 돌아쳤는데...”“절 완전히 무시하더라고요.”“욕까지 했어요! 대체 제가 그 여자보다 못한 게 뭐예요? 그 여잔 나보다 나이도 많고 예쁘지도 않잖아요.”유연홍이 그녀를 달랬다.“수지야, 네가 이랑이를 찾아간 일 절대 아빠가 알게 하시면 안 돼. 아빠는 이미 이랑이를 집에 돌아오게 할 방법을 찾으셨어. 이랑이가 집에 들어오기만 하면 엄마가 어떻게든 널 받아들이게 할게.”“그러니까 지금은 너무 밀어붙이면 안 돼. 알겠니?”그 말에 신수지는 다운되었던 기분이 많이 괜찮아졌다.“하지만 오빠 마음
소민아가 다시 깊게 잠이 들자 명세진은 도우미와 함께 방에서 나가 계단 입구에서 전화를 받았다. 그녀가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송시아 씨?”“사모님.”명세진이 이마를 찌푸렸다. “송시아 씨, 난 전에도 말했어요. 민아가 송시아 씨를 인정하고 싶다고 하면 저희는 막지 않겠다고요. 하지만 다른 수단으로 우리 집안에 무언가를 할 생각이라면, 지금 명확히 알려줄게요. 우린 그리 만만한 사람들이 아니에요. 앞으로는 전화하지 말아요. 아니면 경찰에 신고할 거예요.”말을 마친 그녀는 단호히 전화를 끊어버렸다.송시아는 사무실에 앉아 꺼져버린 핸드폰을 바라보고 있었다. 순식간에 그녀의 얼굴에 싸늘함이 번뜩였다.소씨 가문이 계속 서울에서 버티고 있으면 그녀가 소민아의 마음속에 들어갈 자리는 생기지 않는다. 절대 이대로 소씨 가문이 서울에서 뿌리를 내리고 살게 하면 안 된다.소씨 가문이 줄 수 있는 건 그녀도 얼마든지 줄 수 있다. 줄 수 없는 것 또한 충분히 가능하다.송시아가 온 힘을 쏟아 이 자리에 오른 건 동생에게 가장 행복한 삶을 선물해주기 위함이었다.소민아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녀는 반드시 동생을 신씨 가문 안주인 자리에 앉힐 것이다.‘장소월... 네 목숨을 끊지 않는 건 다 민아를 위해서야. 영원히 꼭꼭 숨어있는 게 좋을 거야. 아니면... 절대 너한테 자비 따위 베풀지 않아.’송시아는 또 신이랑에게 문자를 보냈다...그때... 신이랑은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이었다. 핸드폰이 진동해 문자를 확인해 본 순간, 그의 이마가 찌푸려졌다. 집에 도착하니 안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신이랑은 바로 핸드폰을 집어넣고 지문으로 문을 열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깨끗하게 정돈된 오피스텔 안에 불청객 한 명이 앉아 있었다. 신수지가 머리를 묶고 앞치마를 한 채 문 쪽을 쳐다보며 말했다.“오빠, 왔어요?”신이랑이 이마를 찌푸리며 그녀를 쳐다보다가 시선을 밥상 위 차려진 음식으로 옮겼다.“열쇠 누구한테 받은 거예요?”신수지가 배시시 웃으며 말했
도우미가 말했다.“민아 아가씨가 돌아오셨어요. 그런데 제가 방금 방에 가보았는데 두통이 다시 재발한 것 같았어요.”명세진의 얼굴이 바로 굳어졌다.“민아는요? 지금 어디에 있어요? 민아한테 무슨 얘기 했어요?”“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약만 가져다드렸어요. 얼굴색이 정말 안 좋았어요.”명세진의 얼굴엔 걱정이 가득했다.“내가 올라가 볼게요. 오늘 저녁엔 민아가 좋아하는 음식들 많이 만들어요.”“네, 사모님.”명세진은 소민아를 줄곧 자신의 친딸로 생각하며 키워왔다. 소현아와 소민아 모두 소씨 가문의 소중한 딸이다. 실제 언니는 소현아였지만, 평소엔 동생인 소민아가 언니처럼 소현아를 챙겼다.명세진은 소민아의 마음이 다치지 않도록 평소 그녀에게 더 관심을 쏟기도 했다.명세진은 방으로 올라가 조용히 문을 열었다. 침대에서 잠들어 있는 소민아를 본 그녀는 조심스레 다가갔다.소민아는 악몽에 시달리고 있는지 베개가 흥건해지도록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안 돼요... 나 데려가지 말아요...”“오... 오지 마...”“언... 언니...”“언니... 어디에 있는 거예요!”명세진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며 손수건으로 이마 위 식은땀을 닦아주었다.“괜찮아. 괜찮아. 고모가 여기에 있어.”명세진은 따뜻하게 이불을 덮어 주고는 예전 소민아를 집에 갓 데려왔을 때처럼 침대 옆에 앉아 밤새 그녀를 토닥여 주었다.슬프게 흐느끼던 소민아는 한참을 다독인 뒤에야 천천히 울음을 그쳤다.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올려 주는 명세진의 얼굴엔 걱정이 가득했다. 아이를 갓 집에 데려왔을 때를 그녀는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다.영양실조로 살집 하나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말라 있었다. 일주일 동안이나 의식을 되찾지 못해 병원에서도 다시 살지 못할 거라고 했었다.이후, 다행히 그녀는 목숨을 지켜냈고 천천히 몸을 회복했다.비록 예전의 기억을 잃어버리긴 했지만,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아주 영리하고 총명한 아이였다. 학교에서의 수업도 교과서 한 번만 읽으면 바로 익히는
세면대 위에 놓아둔 핸드폰이 진동해 살펴보니 신이랑이 보내온 문자였다.[며칠 집에서 쉬어요. 회사 일은 내가 알아서 할게요.]소민아의 머릿속에 신이랑과 결혼하면 다시는 범죄를 저지르지 않을 거라던 송시아의 말이 다시 떠올랐다.소월 언니 집안에 관한 일은 고모부로부터 들은 적이 있다. 당시 장씨 집안의 지위는 어마어마하게 높았다고 한다. 서울에서 높은 권세를 누리고 있는 가문들조차도 장씨 집안에겐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암암리에 수많은 극악무도한 짓을 저질렀다.한 사람의 목숨은 단 한마디 말로 가볍게 좌지우지되는 것이었다. 소씨 집안은 명함도 내밀지 못했고, 서울에서 난다긴다하는 명문가 집안도 장해진 앞에선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송시아가 저지른 범죄도 그들과 그리 다르진 않을 것이다.소민아는 갑자기 밀려온 어지러움 때문에 정신이 아찔해졌다. 세면대를 지탱하지 않았다면 바닥에 쓰러졌을 것이다. 그녀의 머릿속에 낯설고도 생생한 기억이 펼쳐졌다.울음소리 가득한 어두운 지하실...남자 한 명이 그녀 앞에 쪼그리고 앉아 그녀에게 만두 하나를 쥐여주었다. 6, 7세 남짓한 어린 여자아이는 허겁지겁 만두를 입에 구겨 넣었다...머리가 깨질 것만 같아 이마를 감싸 쥐었다. 곧이어 참을 수 없는 두통이 밀려왔다.고통을 견디며 30초 정도 지내 보내니 그제야 통증이 조금씩 가라앉았다.그곳은 대체 어디일까. 왜 그녀 기억 속엔 없었던 걸까...그 남자는 누구지?왜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거지?도우미가 깨끗이 세척한 옷을 들고 들어왔다가 이상한 모습의 소민아를 보고는 다급히 다가와 물었다.“아가씨, 왜 그러세요? 또 머리가 아픈 거예요? 제가 약 가져다드릴게요.”소민아는 어렸을 때 자주 두통을 앓았었다. 하지만 이미 오랫동안 발병하지 않았다.도우미가 얼른 약을 꺼내 소민아에게 가져다주었다.약을 입에 넣고 물로 삼키니 두통이 많아 가라앉았다.도우미가 말했다.“아가씨, 계속 불편하시면 병원에 가보세요.”소민아가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그녀가 신이랑과 결혼만 하면 송시아는 더는 다른 사람을 해치지 않을 거라고 했었다.“왜 그렇게 보는 거예요? 네?”소민아는 뒤로 몇 걸음 물러서 신이랑과 거리를 넓혔다.“난 괜찮으니까 먼저 돌아가요. 잠깐 어지러워서 그랬어요.”“그래요. 내가 차로 데려다줄게요.”“아니에요. 회사와 내가 가려는 곳은 반대 방향이에요. 지금은 근무 시간이잖아요. 이랑 씨 일에 영향 줄 수는 없어요.”소민아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마음속에서부터 그를 천천히 멀리하기 시작했다.그 변화를 느낀 신이랑의 얼굴에 감출 수 없는 실망감이 어렸다.“민아 씨, 무슨 일 있었던 거예요? 아니면 송시아가 또 기성은 씨로 협박한 거예요? 뭐든 상관없으니까 나한테 말해요. 내가 도와줄게요.”소민아는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보았다.‘신이랑 씨, 대체 왜 나한테 이렇게 잘해주는 거예요?’‘이건 친구에게 베푸는 호의가 아니잖아요! 그보단... 다른 관계...’소민아는 그에게 똑똑히 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이랑 씨, 여긴 불편하니까 차에 가서 얘기할까요?”“그래요. 내가 캐리어 들어줄게요.”신이랑은 소민아의 짐을 들고 그녀와 함께 주차장으로 향했다. 차에 올라탄 뒤 그가 물었다.“나한테 할 얘기 있어요?”“이랑 씨, 우린 친한 친구 맞죠? 이랑 씨도 송시아처럼 나쁜 사람으로 변하진 않을 거죠?”신이랑은 잠시 당황했다가 이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민아 씨, 나쁘게 변하든 아니든 절대 민아 씨를 해치진 않을 거예요!”신이랑이 그녀에게 하는 약속이었다.“민아 씨 생각엔 내가 그런 사람으로 변할 것 같아요?”소민아는 그를 믿는 게 맞는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송시아의 말로는 신이랑은 앞으로 정계에 입성할 것이고 기성은의 위협이 될 거라고 한다. 그녀는 목구멍까지 올라왔던 말을 다시 삼켜버렸다.결국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기성은이 그녀에게 신신당부한 말도 있었기 때문이었다.“서울에 돌아가면 그 누구의 말도 믿으면 안 돼요.”“이랑 씨는요? 회사에서 유일하게
소민아의 눈동자에서 빛이 점점 꺼져가고 있었다. 너무 괴로워 목구멍에서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당신 생각이에요, 아니면 이랑 씨 생각이에요?”송시아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민아야, 그 말을 이랑 씨가 들었다면 얼마나 섭섭해할까. 줄곧 신이랑은 나랑 다르다고 말해왔으면서, 지금 신이랑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거야?”“내가 했던 말 잊었어?”“신이랑은 널 위해 본가에까지 들어갔어!”송시아가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내뱉었다.“신이랑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너만을 위해 살았어!”“핸드폰 확인해봐. 신이랑이 너한테 문자를 얼마나 많이 보냈는지.”비행기에서 내린 뒤 그녀는 핸드폰을 무음으로 설정해 놓았다. 기성은의 문자 외에 다른 건 확인할 시간이 없었다.송시아가 걸어 나가며 말했다.“일단 씻고 내려와서 밥 먹어. 저녁에 서울로 돌아갈 거야.”소민아가 핸드폰을 꺼내 보니 베터리가 없어 꺼진 상태였다. 충전선을 꼽고 전원을 켜니 송시아의 말처럼 신이랑으로부터 적잖은 문자가 와 있었다.40개가 넘는 문자 중 대부분이 그녀가 어디에 있는지 묻는 내용이었다. 말투에서 그녀에 대한 걱정이 고스란히 묻어나오고 있었다. 그가 이럴수록 소민아는 그에게 죄책감이 느껴지고 부담감이 더해갔다.오후 3시 식사를 마치고 짐 정리를 한 다음, 비행기에 올라탔다.소민아는 창밖으로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송시아가 그녀 옆에 앉아 눈을 감고는 말했다.“보지 마. 아무리 봐도 기성은은 너랑 같이 여길 떠나지 않아.”“기성은은 애초부터 이 더러운 곳에 더 어울리는 사람이었어. 네가 아무리 애써도 뼛속 깊이 새겨진 비천함은 변하지 않아.”소민아가 말했다.“당신은 얼마나 고귀한 사람이길래 그런 말을 하는 거예요? 당신도 예전엔 이처럼 악랄한 환경에서 살았었다는 거 잊지 말아요.”송시아가 들뜬 말투로 말했다.“이 세상 사람들에겐 모두 등급이 있어. 전연우가 아니었다면 기성은은 아직도 여기에서 굴러다녔을 거야. 참, 내가 알려줬었나? 기성은의 아버지는 지독
“그때가 되면 소씨 가문도, 그리고 언니도... 기성은 하나 때문에 무너져버릴 수 있어.”송시아가 가장 잘하는 게 바로 사람의 가장 여린 약점을 건드리는 것이다. 그 몇 마디 말에 소민아는 패닉에 빠져버렸다.“그... 그럴 리가 없어요! 기성은 씨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요. 신이랑 씨도 당신 말처럼 기성은 씨를 해치지 않을 거고요. 당신 입에서 나온 말은 한 글자도 믿지 않을 거예요.”송시아가 더더욱 그녀를 몰아붙였다.“민아야, 내가 예전에도 말했었잖아. 장씨 가문은 서울 지하조직 수장이었다고. 그 인간들이 무슨 짓을 했었는지 알기나 해? 당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장해진이 죽길 바랐을까. 전연우가 없었다면 장소월은 목숨을 부지하지도 못했을 거야.”“그동안 장씨 집안, 남원 별장을 지켰던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해?”“장씨 집안은 전연우와 기성은이 지탱하고 있었던 거야. 장소월은 다른 사람에게 기대어야만 살 수 있는 기생충에 불과해.”“장씨 집안이 끝나버린 지금, 기성은은 장씨 집안의 뒤처리를 해주려고 저렇게 고생하고 있는 거야.”“장씨 집안이 저지른 죄를 모아 신고하면 목숨이 몇백 개라도 모자라거든.”소민아는 더는 참지 못하고 두 손으로 귀를 막았다.“됐어요. 그만 해요. 소월 언니를 벌레 보듯 하고 있는데... 소월 언니는 아무것도 몰라요. 무슨 근거로 모든 잘못을 소월 언니에게 뒤집어씌우는 거예요? 내가 보기에 소월 언니는 당신보다 훨씬 더 좋은 사람이에요. 적어도 다른 사람을 해치진 않았으니까요!”“만약 내가 당신 동생이 아니었다면 어떤 방식으로 날 해치우려고 했어요? 난 저번 하마터면 당신 손에 철저히 망가질 뻔했어요.”송시아는 화가 나 이마를 찌푸렸다.“장소월이 착하다고? 그래! 장소월은 어렸을 때부터 걱정하나 없이 온실 속에서 자란 사람들의 부러움을 한몸에 받는 귀한 집 아가씨였어. 착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민아야... 우리한테 제일 필요 없는 게 바로 착함이야. 장소월처럼 살았다면 난 이미 일찌감치 죽은 목숨이었을 거야. 네
기성은은 그녀를 별장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내려주고는 차를 몰고 떠났다.소민아가 돌아가 보니 송시아는 밤새 돌아오지 않은 듯했다.송시아가 어디에 갔든 전혀 상관없었다. 그녀는 피로한 몸을 이끌고 씻으러 욕실에 들어가려 했다. 하지만 무언가 생각났는지 다시 방으로 돌아가 베개를 등에 받히고 침대에 누웠다.어리석은 방법일 수도 있지만, 소민아에겐 더는 다른 방도가 없었다.송시아가 돌아왔을 때, 소민아는 깊이 잠들어 있었고, 바닥에선 베개가 나뒹굴고 있었다. 그녀 옷깃에 묻은 자국을 보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었다.송시아의 눈동자가 어두워졌다. 이렇게까지 깊게 빠져버렸다고?신이랑이 기성은보다 못한 게 뭐란 말인가. 왜 하필이면 배경도, 돈도 없는 기성은을 좋아하게 된 걸까.송시아도 밤새 바쁘게 보냈던 지라 바로 욕실에 들어가 씻은 뒤 소민아의 옆에 누웠다.소민아는 오후가 되어서야 잠에서 깨어났다. 옆에 누워있는 여자를 본 순간, 화들짝 놀라 벌떡 일어나 앉았다. 눈동자 속에 감출 수 없는 증오가 피어올랐다.그 움직임에 송시아도 깨어났다.소민아가 말했다.“방이 두 개나 있는데 왜 하필 내 침대에 누운 거예요.”송시아가 웃으며 그녀를 쳐다보았다.“너 예전엔 언니랑 딱 붙어 자는 거 좋아했잖아.”소민아는 그녀에게 더는 관심을 주지 않고 옆에 있던 옷을 들고 욕실에 들어갔다. 그녀는 거울 속 자신을 바라보며 아랫배를 어루만졌다...‘아이가 있든 없든 난 끝까지 당신을 기다릴 거예요.’소민아는 샤워를 마친 뒤 욕실에서 나가 송시아에게 물었다.“우리 언제 돌아가요?”“어젯밤 기성은 만났어? 기성은도 너한테 꽤 마음이 있나 보네.”“묻고 싶었던 건 물어봤어?”“안 물어봤어요.”송시아는 화장대에 앉아 그녀를 힐끗 쳐다보고는 귀걸이를 걸며 말했다.“아무 조건 없이 마음을 줄 정도로 가치가 있는 사람이야? 기성은을 선택하면서 신이랑의 마음이 어떨지는 생각해봤어? 신이랑은 널 위해 제일 돌아가고 싫어하던 본가로 들어갔어.
차가운 밤바람에 체온이 떨어지자 기성은은 그녀를 데리고 은밀한 위치에 멈춰선 차에 올라타고는 히터를 틀었다.소민아는 바로 그의 몸에 올라타고 키스를 퍼부었다. 마음껏 키스한 다음 두 손으로 그의 얼굴을 감싸고 말했다.“기성은 씨, 3년 줄게요. 기다릴 테니까 3년 안에 서울로 돌아와요. 그동안 뭘 하든 상관하지 않을게요. 그냥 3년 후... 나한테 전화 한 통이나 문자 하나만 해줘요.”“기성은 씨만 원한다면 난 당신과 결혼하고 싶어요.”“기성은 씨를 대신해 총괄 비서 자리 잘 지키고 있을게요. 전 대표님이 깨어날 때까지, 그리고 기성은 씨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 거예요.”“말하지 않으면 동의한 걸로 생각할게요.”기성은에게 있어 모든 것이 미지수다. 3년이라...사람에게 얼마나 많은 3년이 있을 수 있을까.“이곳을 떠나면 동의할게요.”소민아는 그의 목덜미를 잡고 말했다.“힘들게 왔는데 허탕을 치면 안 되죠. 날이 밝기 전엔 갈 생각하지 말아요.”소민아가 그의 옷 단추를 풀었다.덜컹덜컹 흔들리는 차 안, 소민아는 거칠게 신음소리를 내뱉고 있었다.얼마가 지났을까, 그녀는 더는 견디지 못하고 기성은의 가슴팍에 엎드려 잠이 들었다.다음날 날이 밝아서야 소민아는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 그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그의 모든 것을 하나하나 머릿속에 새기려는 듯한 모습이었다. 기성은도 그녀의 손길을 느끼고 잠에서 깨어나 눈을 떴다.“송시아도 왔어요. 저 곧 가야 할 것 같아요. 정말... 기성은 씨와 잠시라도 더 함께 있고 싶어요.”기성은이 바깥을 쳐다보니 날은 이미 밝아있었다.“내가 송시아의 동생이라면, 나 미워할 거예요?”기성은이 말했다.“그건 알고 있었어요.”“그럴 줄 알았어요. 다 알고 있었으면서, 왜 나한테 말해주지 않은 거예요?”소민아는 다시 몸을 기울여 그의 가슴에 기댔다. 그의 평온한 심장박동이 그녀에게 안정감을 심어 주었다.“그럼 기성은 씨 생각은 어때요? 제가 그 여자를 언니로 인정해야 할까요? 제 머릿속엔 조각조각 찢어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