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그... 이제 생각해 보니 전연우의 강박에 못 이겨 투신한 그 사람이 바로 강용이었다! 그의 손에 새겨진 문신 때문에 그녀는 알아볼 수 있었다.강용이 강 씨 그룹을 관리하고 있을 때 한번 큰 교통사고가 났었는데 그때 절벽에서 추락하고 모든 사람이 생존자는 한 명도 없다고 여기고 있었다. 강용 역시 그 교통사고로 사망한 줄 알았었다. 그 뒤로 강가네는 여자로 바꿔 회사를 관리시켰지만 피크타임은 그리 길지 못했다.강용이 사고를 당한 지 2년 뒤 강가네에서는 큰 폭발이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 강가네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 후 강 씨 그룹은 베일에 싸인 의문의 사람에게 인수당했다. 그 사람의 이름이 뭐였는지 장소월은 가물가물해 기억해 내지 못했다.그 사람은 정말 신비스러웠다. 단 한 번도 진짜 얼굴을 보여준 적이 없었고 전연우는 그가 얼굴의 화상흉터로 항상 가면을 쓰고 다닌다고 했었다.그때 장소월이 유일하게 기억한 것이 바로 그의 손에 있던 문신이었다. 성격도 난폭해 그의 눈에 든 여자는 모두 그와 밤을 보내고 절반 죽어서 나왔었다.그 문신은 강용의 몸에 있던 문신과 완전히 일치했다.이제 보니 그 사람은 강용이었다.하지만 만약 강용이 그때 사고로 죽지 않았다고 해도 그가 강 씨 그룹을 인수할 만큼 많은 자금이 어디에서 났을까?큰 의문이었다.장소월은 또 이 새로운 의문점을 생각해 보았다.강가네는 서울시 경제의 핵심을 틀어쥐고 있었다. 전연우는 어떻게 흔적 하나 남기지 않고 그런 강가네를 집어삼켰을까?장소월은 그 시절 기억의 퍼즐을 곰곰이 맞춰보았다. 전연우가 장가네를 통제하고 반년도 채 걸리지 않은 사이에 강 씨 그룹의 새로운 대표, 다시 말해 사고 이후 정체를 숨기고 지낸 강용과 손을 잡는 데 성공했다.그 시절 전연우는 장 씨 그룹의 거액을 빼앗았다. 당시 모든 주주가 불만을 가지고 떠나려 했었는데 그 이유는 회사가 체결한 모든 계약이 그룹 경제에 구멍을 내고 자칫 소홀히 하면 언제든지 장 씨 그룹
장소월이 무용 학원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니 이미 저녁 9시였다. 차에서 내렸을 때 그녀는 다리가 부러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절뚝이며 걸어오자 아줌마가 얼른 와 자초지종을 물었다. “아이고, 어쩌다 이렇게 다친 거예요? 얼른 소파에 앉아요. 제가 주물러 드릴게요.”기사님과 아줌마는 그녀를 부축하고 소파에 앉혔고 가방은 옆에 두었다.“이건 분명 근육이 다친 걸 거예요. 제가 물파스 들고 올게요. 잠시만 기다리세요.”집에는 항상 약상자가 구비되어 있었다. 아줌마는 얼른 물파스를 들고 왔다. “아니, 아가씨 선생님은 아가씨가 다친 걸 몰랐대요? 정말 바보 같네요. 봐봐요. 아픈 데는 어디예요?”아줌마는 장소월의 다리를 잡고 자기의 무릎에 올려두며 물었다.장소월은 앉아 있다 보니 이미 많이 나아진 상태였다. “선생님을 탓할 건 아니에요. 제가 훈련강도를 좀 높여서 했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넘어져서 좀 다쳤어요.”장소월은 까만색 스타킹을 벗었고 아줌마는 물파스를 꼼꼼히 발라주며 종아리도 함께 주물러 줬다.“어때요? 많이 낫죠?”장소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주 괜찮아졌어요.”거실을 한번 쭉 둘러본 장소월은 다시 입을 열었다. “근데 강만옥 이모는요? 아빠도 집에 안 계시는 거예요?”“강만옥 님은 연우 도련님과 있을 거예요. 연우 도련님도 돌아오신 지 얼마 되지 않는데 아마 지금쯤 잠에 드셨을 거예요.”장소월의 얼굴빛이 말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괴이했다. 그녀는 이 일을 장해진한테 말을 꺼내야 하나 고민이었다. 그렇지 않으면...그녀는 차라리 기숙사 생활을 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하지만 장소월은 장해진이 그녀를 기숙사로 보내는 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전연우는 요즘 장가네로 자주 왔다. 장소월은 아무리 곰곰이 생각해 봐도 이유를 알 수 없었다.종아리와 허벅지 안쪽까지 모두 물파스를 바르고 난 뒤 장소월은 치마를 내려 다시 정돈했다. “아줌마 내가 이미 약을 다 닦아 놓았으니까 얼른 먼저 들어가 쉬어요.”“저는 선생이 돌
말이 끝나기 무섭게 소월은 황급히 4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같은 공간에 더 있다가는 인생이 조기에 종영할 포스였다. 곧이어 위층에서 비명이 들렸다. “앗!”전연우는 소리 나는 방향을 따라 위로 쳐다보며 참 요란하게도 올라간다고 생각했다. 소리를 들어보니 많이 다친듯하다.검은 줄무늬 잠옷을 입고 있는 탓인지 오늘따라 전연우는 더 차가워 보였다. 카리스마가 그를 휘감았다. 위층에서 소리가 더 이상 안 들리자, 강만옥의 머리채를 잡아당기더니 말했다. “남자 부족해? 없으면 없다고 말하지. 내가 원하는 만큼 준비해 줄 수 있는데.”강만옥은 머리가 너무 아파서 지끈거려 연기고 뭐고 다 집어치웠다. 술에 취하긴커녕 정신이 맑았다. “진심이에요? 이 손을 놓으세요, 너무 아프다고요!”날 선 공기를 감지한 강만옥은 전연우의 손을 잡으면서 그의 기색을 살폈다. 강력한 위압감에서 나오는 포스로 진짜 화냈다는 것을 알 수 있다.전연우는 머리카락을 넘겨주는 척하다가 둘만 들리는 소리로 말했다. “한 번만 다시 그 더러운 몸뚱어리로 내 침대에 기어오르기만 하면 이렇게 쉽게 끝나지 않을 거야. 몇 명한테 더 당해봐야 정신 차리지...”경고인지, 협박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 상대를 헷갈리는 화법을 구사하며 차갑게 말했다. 강만옥은 그의 어두운 눈동자를 가만히 보고 있자니, 긴장감에 마른침을 삼켰다. 그러다가 문뜩 뭔가 생각난 듯 피식 웃었다. “그러든지요... 근데 그전에 한 번만이라도 나랑 해볼 생각은 없어요? 한 번으로는 부족할 거고... 그때 되면 내 목숨도 당신한테 바칠 수 있는데...”“미쳤구나!” 전연우는 발을 들어 그녀를 옆으로 차버렸다. “정신 차리게 도와줄게.”눈빛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이미 한 번쯤은 죽었을 것이다. 몸을 풀고 나서 정신이 혼미한 여자를 끌고 방으로 직진했다. 문을 발로 걷어차자 쾅 하고 닫혔다.욕실의 샤워기를 틀고 머리를 물속에 밀어 넣었다.한 번, 두 번......소월은 오늘 어쩜 이렇게 재수가 없을 수 있냐며 투덜거리며
10초 정도 지났다. 자고 있던 소월은 밝은 빛에 눈을 찡그렸다. 꿈인지 생시인지 비몽사몽이고 있는데 앞에 누군가 쳐다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 사람을 보는 순간 눈이 번쩍 떠졌고 너무 놀란 나머지 자기도 모르게 발을 움츠렸다. 빠르게 옷을 정리하고 몸은 어느새 반듯하게 자세를 고쳐 앉은 채 조심스럽게 물어봤다. “연우 오빠께서 이 시간에 어쩐 일로...”‘아놔, 방금 뭐라고 했지?’ 소월은 이불을 꼭 잡고 파르르 떨었다. 전연우는 그런 그녀를 말없이 쳐다봤다. 방안에 정적만이 흘렀다. 소월이는 목석처럼 꼼짝하지 않고 있었다. 이 분위기를 견딜 수 없어 소월이가 또 한 번 긴장 서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어... 언제 들어왔어요?”전연우는 아무 말도 못 들은 듯 그저 손바닥을 보고 있었다. 손에는 아직 바르다만 파스가 남아 있다. “발 내밀어, 마사지 해줄게.”그리고 소월을 쳐다봤다. 그윽한 눈빛, 소월이에게는 너무 따갑게 느껴져 바로 머리를 저으며 거절했다. “괜찮아요, 아줌마가 이미 처리해 줬어요. 내일이면 괜찮아질 거예요.”그녀의 생각지 못한 거절에 연우는 인상을 구겼다. “말 들어, 다시 얘기하게 만들지 말고.”소월은 곧 꼬리를 내렸다. 더 이상 심기를 건드려서 좋을 게 없었다. 적어도 지금은 타협하는 게 좋다. 이렇게 계속 거절하다가...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아니, 감당할 수 없다.전생에서부터 이렇게 지내왔기에 너무나도 익숙했다. 연우의 모든 요구를 소월은 들어줘야 했는데 ‘절대복종’이라고 해도 과하지 않다. 아무리 떼를 쓰고 아가씨 행세를 부려도 그의 손바닥에서는 꼼짝도 못 한다.수습 불가능한 사태를 방지하려면 먼저 굽히고 들어가는 게 최선이다. 천천히 이불속에서 발을 꺼내고 앞으로 내밀었다. 그녀의 발은 뽀얗고 관리를 잘 받은 예술품이다. 핑크색 네일아트와도 너무 조화로웠다. 부잣집에서 태어난 소월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흠잡을 데 없이 고급스러운 아우라가 풍겼다.연우는 자연스럽게 부어오른 발목을 가져
침대에서 내려와 슬리퍼를 신었다. 신기하게도 발목의 통증은 사라지고 이미 다 나은 듯하다.어제저녁, 전연우가 몇 시에 자기 방에서 나갔는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언제 잠들었는지조차 모르겠다. 다시 깨어났을 때 이미 다음 날이었다.어젯밤 강만옥이 술에 취해 전연우의 방에서 나온 모습은 아직도 생생하다. 그 장면을 생각하니, 소월은 심장이 쿵쾅거렸다. 가방을 메고 위층에서 일부러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등교 시간이 점점 다가오자, 소월은 그제야 방문을 열고 나왔다. 아래층으로 내딛는 발은 천근만근 추를 매단 듯 힘겨웠다.소월은 살금살금 도둑고양이처럼 내려왔다. 오늘따라 거실에는 사람이 없었고 고요함만 맴돌았다. 그녀는 서둘러 식탁 위에 놓여있는 토스트 몇 개를 집어 들고 도망칠 준비를 했다. 마침 아줌마가 부엌에서 나왔다. “아가씨, 뭐 하는 거예요? 누가 보면 자기 집 아닌 줄 알겠어요. 먼저 앉아서 아침 드세요. 저는 올라가서 연우 도련님 부를게요.”소월은 재빠르게 받아쳤다. “저를 신경 쓰지 마세요, 오늘은 대충 먹을게요. 못다 한 과제가 있어서 바로 나가봐야 해요. 저 먼저 가요. 오늘도 수고 많으십니다.” “아가씨, 그것만 드시면 어떻게 해요. 조금 더 드세요.”“...”“아가씨, 잠시만요. 우유 챙겨 드릴게요.”아줌마가 급히 냉장고에서 우유를 꺼냈다. 대문까지 쫓아갔지만, 소월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무슨 일인데요.” 위층에서 느릿느릿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연우는 넥타이를 매고, 슈트를 팔에 걸친 채 계단을 따라 내려왔다.“아가씨께서 빵 두 조각만 드시고 가셨어요. 오늘 우유도 안 챙겼는데... 아직 어려서 많이 드셔야 하는데...” 아줌마가 조심스럽게 말했다.연우는 고개를 돌려 창문 밖을 내다보았다. 차에 올라타는 소녀의 뒷모습뿐, 짙은 눈동자 속으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전연우는 간단히 아침 식사를 마치고 회사로 돌아갔다.9시가 다 되어 간다. 강만옥은 아직 식사하러 내려오지 않았다. 아줌마는 무슨 일이라도 일어났을까 봐
어딘가에서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야. 장소월, 너 그 봉투 새로 산 거 맞아? 내 기억으로는 얼마 전에 죽은 쥐가 들어가 있었는데... 설마 같은 봉투? 그걸 계속 쓴다고? 전염병이라도 걸리겠어.” 여자 세 명이 걸어왔다. 몸매는 그나마 괜찮은 편이지만 얼굴에 화장품을 몇 층이나 덧발랐는지 본연의 얼굴이 보이지 않을 지경이다. 그들은 소월 쪽으로 걸어와서 도시락을 한번 보더니 싫은 표정을 지었다.“제운고에서 도시락 싸 오는 사람은 너밖에 없을걸? 그냥 솔직히 말해봐. 설마 돈이 모자라? 돈 없으면 우리한테 얘기해주지. 적어도 사오천 만원은 빌려줄 수 있는데.”다른 두 명도 같이 맞장구를 쳤다. “그러게 말이야. 문정아, 너도 참 보기 안쓰럽다. 얘가 너 쳐다도 안 보는데 뭐 하러 옆에서 붙어 있냐. 이런 쓰레기랑 가까이해서 좋을 게 없어. 멀리해야 너한테도 좋을 거야. 이 언니의 충고다.”소월은 가방을 다 정리하고 그제야 책상을 치며 일어섰다. “말 다 했어? 너희들 방금 그 쓰레기 소리 다시 말해봐. 나한테 하는 소리야?”소월은 화를 잘 내지 않는 성격이다. 화를 내지 않는다고 해서, 그녀가 화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세 사람을 한 번씩 훑어봤다. “기회 줄 때 실컷 말해봐. 쓰레기라고? 너희들 온 김에 하나씩 따져보자. 이미주, 너희 집은 건자재사업 하고 있지? 그리고 너. 허여빈, 유진... 너희 셋 다 집안 사업이 엮여있는 걸 내가 모른다고 생각해? 2년 전 도원빌딩 사고 기억하는지 모르겠네. 당시 너희 셋 집안이 손을 잡고 개발한 사업인데... 원가를 줄여보려고 원자재에 손댔잖아. 후에 그 건물들은 전부 부실 공사가 돼버렸고.”“그때 사람 3명이나 죽었는데... 누가 뒤처리해 줬는지 내가 다시 생각나게 도와줘?”소월은 세 사람의 안색이 변하는 것을 보고 계속했다. “어떻게, 더 자세하게 말해줄 수도 있는데.”이미주는 자신이 처한 위치를 잘 파악 못하고 있다. “헛소리 그만해. 그 사람들이 실수로 떨어져 죽었는데 우리 책임이라니? 장소월,
강영수가 학교에 오자고 한 이유는 그녀를 만나고 싶어서였다. 수술의 성공 여부는 영수한테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앞에 서 있는 소녀가 소년이 일어설 수 있는 동력이자 힘이다.강영수는 물끄러미 눈앞의 소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가늘고 긴 머리카락은 바람 속에서 부드럽게 나부끼고 그의 심장을 간질거렸다. 뒷모습마저 눈을 뗄 수가 없다. “여기서 잠시만 기다리세요...”“알겠습니다. 도련님, 조심해서 다녀오세요.”소월은 벤치에 앉아 점심을 먹고 있었다. 틈틈이 호숫가 풍경도 감상했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온도, 딱 기분 좋을 만치 불어오는 바람, 상쾌하게 번지는 풀 내음, 아줌마가 정성껏 챙겨주신 도시락까지... 그야말로 완벽한 점심이었다. 역시 아줌마 솜씨를 따라올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감탄한다.누군가 장소월의 신경을 거스르며 검은 그림자가 시야에 들어왔다.제대로 눈여겨보니 지난번 병원에서 만난 잘생긴 ‘만찢남’이었다.하지만 다리가...눈길을 사로잡은 무언가가 더 있었다. 긴 소매 밑에 숨겨진 신비한 푸른 문신이 어렴풋이 보였고, 목깃 밑에도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소년의 휠체어가 불과 몇 걸음 거리서 멈춰 섰다. 바람이 불면서 강영수의 갈라진 앞머리 사이로 봉긋하고 반질반질한 이마가 드러났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소년은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안녕, 이렇게 또 만나네.”차분한 목소리가 듣기 좋은 선율로 들려왔다. 장소월은 입술이 벌어진 것도 모른 채 멍한 눈으로 앞에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너무 민망해서 재빨리 입속의 밥을 삼켰다. “안녕! 아참, 지난번 옷은 이미 빨아서 집에 널어놨어! 근데 너도 제운고 다녀? 전에 마주친 적 없는 거 같은데...”강영수는 그녀가 말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입꼬리가 싱긋 올라갔다. “질문이 너무 많은 거 아니야... 어느 거부터 먼저 대답해 줄까.”그는 몇 초를 생각하더니 차근차근 말했다. “먼저 첫 번째 질문. 옷은 서둘러 돌려주지 않아도 돼. 다음번에 만날 때 직접 돌려줘...”“둘째, 제
호숫가 맞은편에서 서너 명이 걸어오는 중이다. 거리가 떨어져 있지만 허철은 한눈에 벤치에 앉아 있는 장소월을 알아봤다. 그녀는 두 발이 불구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들리지 않았다.단지 장소월의 얼굴에는 때때로 환한 미소를 지었고, 보는 사람을 설레게 했다.백윤서가 그들 사이에서 걷고 있었고, 그 옆에는 룸메이트인 엽청하다. 둘은 팔짱 끼고 앞에서 걷고 뒤에는 강용 등이 따라오고 있었다.엽청하는 처음 보는 광경에 경악하며 주변의 경치를 탐욕스럽게 바라보았다. “와, 여기가 말로만 듣던 제운고구나! 너무 예쁘다! 윤서야, 여기 백조 호수는 우리 학교 축구장보다 더 큰 거 같아...”“응, 진짜 크네. 나같은 길치는 여기서 혼자 다니다가 길 잃을지도 몰라.” 백윤서는 짧게 농담했다.허철이 팔꿈치로 방서연을 치며 저쪽을 보라고 손짓했다.방서연은 손길 따라 쳐다봤다. 다름 아닌 장소월이다.근데 옆에 있는 남자는 누구지?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이다.설마 강용이 자기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고 대역을 구한 것은 아니겠지?대역을 찾는다고 해도 사지가 멀쩡한 사람을 찾아야지, 어디서 걸을 수도 없고 휠체어를 탄 사람을 찾아왔는지...장소월... 너란 사람 도통 모르겠다....“선배, 오늘 저랑 많은 대화 해줘서 너무 감사해요.”그때 왕집사가 다가와 몸을 굽혀 강영수의 귀에 대고 무언가를 말했다. 시선은 어딘가를 향했고 미간을 찌푸렸다. “알겠어...”고개를 들어 장소월을 바라볼 때는 여전히 밝은 얼굴에 환산 미소를 띠었다. 봄날에 창문 따라 비춰 들어온 따스한 햇볕 같았다. “미안, 급한 일이 있어 먼저 가봐야 할 거 같아.”장명월은 손사래를 쳤다. “에이, 괜찮아요...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 보니 시간 가는 줄도 몰랐네. 오히려 내가 선배에게 고마워해야 하는 거죠."“그럼... 먼저 갈게...” 영수는 너무 아쉬워했다. 마지막까지 애틋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네, 가세요.” 소월은 일어나
미경이 말했다.“현아 아가씨는 정말 괜찮은 사람인 것 같아요. 효연 아가씨랑은 완전히 달라요. 이렇게 마음이 넓은 여자는 처음 봤어요. 송시아보다도 훨씬 나아요. 그 여자는 별장에 오자마자 왕이라도 된 듯 우리한테 이래라저래라 시켰잖아요.”규영은 한숨을 내쉬었다. “맞아요.”“일단 좀 더 지켜봐야 할 것 같아요. 주인님이 전화를 받지 않으니 우리도 연락하지 말아요. 혹시라도 주인님이 눈치챌지도 모르잖아요.”미경은 고개를 끄덕였다.그 주사는 석 달에 한 번씩 맞는 것으로, 뇌의 핏덩이를 녹여준다고 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다.북경 감옥은 밤이 되면 기이한 정적이 감돌았고, 가끔 늑대 울음소리도 들려오곤 했다.사방이 막혀 있는 격투장 안, 강지훈은 상처투성이인 몸으로 내려와 부관이 건네준 수건을 받았다. 링 위에는 온몸에 피를 뒤집어쓴 남자가 눈을 부릅뜬 채로 숨통이 끊겨 있었다.이건 북경 감옥의 규칙이었다. 이긴 자는 다시 탈출할 기회를 얻지만, 패배한 자에게는 오직 죽음만이 주어질 뿐이다.강지훈은 몸에 묻은 피를 닦으며 말했다. “아직 소식이 없어?”부관이 묻지 않아도 소장이 말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소장님, 겨우 3일밖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벌써 여섯 번째 물으시는 겁니다. 그렇게 걱정되신다면 직접 가서 확인해 보시는 게 어떠십니까?”“마침 소장님이 조사하고 있는 일도 그쪽에서 단서를 찾았다고 합니다.”겨우 3일밖에 되지 않았나?강지훈은 손에 든 물건을 던져 버리고 검은색 군복을 입고 사무실로 들어갔다. 차가운 사무실은 온기 하나 없이 썰렁했고, 벽엔 부자연스러운 그림 하나만이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그건 소현아가 이곳에 왔을 때 그린 그림이었다.강지훈은 책상 앞에 앉아 다리를 꼬고 담배를 꺼내 물었다. 부관이 라이터로 그의 손가락 사이에 있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쪽에서 전화 안 왔어?”부관이 대답했다.“얼마 전 감옥 설비에 문제가 생겼을 때, 탈옥을 시도한 놈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다행
전화가 연결되지 않으니 그들은 어쩔 수가 없었다. 효연 아가씨가 돌아온 탓에 현아 아가씨가 주인님의 총애를 잃게 된 걸까? 주인님의 여자 교체 속도는 그들 또한 잘 알고 있었다. 효연 아가씨를 제외하고 주인님이 진심으로 마음을 쏟았던 여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남자들은 늘 새로운 여자를 탐하기 마련이다. 게다가 소현아는 어린아이처럼 순진하고 천진난만해서 심통을 부리며 주인님과 싸우기 일쑤였다.어쩌면 그녀에게 싫증이나 눈앞에서 치워버리고 싶은 마음에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핑계를 댔는지도 모른다. 보아하니 현아 아가씨는 결국 주인님에게 버려진 듯하다.현아 아가씨와 효연 아가씨는 정말이지 비교할 가치도 없다. 주인님뿐만 아니라 그들 또한 효연 아가씨보다 더 아름다운 여자를 본 적이 없었다.만약 어르신께서 소현아의 임신 사실을 알지 못했다면, 두 사람이 이토록 애써 그녀를 비밀리에 보호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소현아가 수술대에 실려 간 뒤, 주인님에게 연락이 닿지 않으니 어쩔 수 없이 규영이 수술 동의서에 서명했다. 그래야만 소현아가 치료를 받을 수 있으니 말이다.의사가 수술대에 누워 있는 소현아의 머리에 주사기 바늘을 가까이 가져가 천천히 정맥에 주사했다. 소현아는 겁에 질려 침대에서 몸부림치며 소리쳤다. “뭐 하는 거예요! 나 주사 안 맞을 거예요! 이거 놔요!”규영과 미경은 소현아의 팔다리를 누르며 안심시켰다. “현아 아가씨, 조금만 참으세요. 곧 좋아질 거예요. 병이 나으면 우리 집에 갈 수 있어요.”집에 간다는 말을 듣자 소현아는 조금씩 진정되었다. 어쩌면 약물의 영향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녀는 눈꺼풀이 무거워지면서 졸음이 쏟아졌고, 주변의 소리도 점점 줄어들었다.규영이 물었다. “이 약 뱃속 태아에게 영향을 주진 않겠죠?”요셉 의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약은 임상 시험을 거쳐 임신부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으로 확인됐습니다.”미경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아이가 무사하면 됐어요.”소현아의 뱃속 아기에게 조금의 문
소현아는 비행기 안에서 과일과 고단백 식단을 먹으며 모든 것이 신기한 듯 둘러보고 있었다. 도우미들은 임신한 그녀를 정성껏 돌보며, 최대한 간식은 그녀가 찾지 못하도록 깊게 숨겼다. 과자 같은 음식은 복중 태아에게 좋지 않기 때문이었다.규영이 말했다.“....지금 상황으로는 가능한 한 하루라도 더 숨기는 수밖에 없겠어요. 하지만 이번에도 얼마나 오래 머무를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제발 아기가 무사히 태어나야 할 텐데요.”미경도 걱정스러운 마음에 한숨을 쉬었다. “만약 주인님이 우리가 몰래 어르신을 돕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우린 뼈도 추리지 못할 거예요.”“일단 상황 봐가면서 대처해요. 그래도 다행히 아가씨의 임신 사실은 결국 숨길 수 있었잖아요.”소현아는 손에 들고 있던 딸기를 입에 집어넣으며 말했다. “규영 씨, 우리가 했던 내기, 내가 이긴 거 맞죠? 내가 아기 가졌다는 거 강지훈한테 들키지 않았잖아요. 나한테 주겠다고 약속한 거 줄 때 되지 않았어요?”“아가씨, 걱정하지 마세요. 목적지에 도착하면 드릴 거예요. 절대 실망시키지 않을게요.”임신 후 소현아는 하루에도 몇 번씩 잠을 자곤 했다. 비행기에서도 배불리 먹고 난 뒤 바로 잠들었다.깨어났을 때는 이미 러시아 국제공항에 도착한 뒤였다.강지훈이 미리 준비해 둔 사람들이 세 사람을 차에 태워서 시골에 있는 한 별장으로 향했다. 끝없이 펼쳐진 들판에는 라벤더 꽃이 가득 피어 있었다. 소현아는 목에 두른 스카프를 던져 버리고 라벤더 밭으로 달려가 풀썩 주저앉았다. 규영과 미경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서둘러 달려가 그녀를 붙잡았다. 심하게 넘어지기라도 하면, 배 속의 아이를 지키지 못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아가씨, 짐을 정리하고 나면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아야 합니다. 이제 우리밖에 없으니, 더 이상 숨길 필요 없습니다.”소현아는 그들의 부축을 받아 일어서며 말했다.“알았어요.”운전기사는 러시아 현지에서 오랫동안 살고 있는 한국인이었고, 강지훈이 심어 놓은 감시카메라이기도 했다.
서울 공항으로 향하는 헬리콥터가 북경 감옥을 떠난 후, 침대 위의 남녀는 다시 격렬하게 사랑을 나누기 시작했다.천효연은 온몸을 부르르 떨며 절정에 달했다. 그 오르가즘은 너무나도 자극적이라 저도 모르게 계속해서 남자를 원했다.“지훈 씨, 계속...”“이제 아무도 우리를 방해할 수 없어요.”여자의 팔과 가슴에는 남자가 남긴 붉은 자국들이 가득했다.강지훈은 침대에 누워 여자를 들어 올려 자신의 몸 위에 앉혔다. “이제 네가 알아서 해.”점심시간이 되어서야, 두 사람은 모든 힘을 쏟아낸 뒤 침대에 기대어 잠들었다.오후 3시, 강지훈은 깨어나 샤워를 한 뒤 샤워 가운을 입고 바깥으로 나갔다. 맞은편 방문을 열려고 한 순간, 도우미가 소현아의 방에서 옷을 정리하고 나오며 말했다. “주인님, 현아 아가씨는 이미 떠나셨습니다.”“방금 소식이 들어왔는데, 이미 비행기에 탔고 내일쯤 도착할 거라고 합니다.”강지훈이 물었다.“지금 뭐 하는 거야?”도우미가 쭈뼛거리며 말했다. “아가씨가 당분간 돌아오지 않을 것 같아서, 옷을 정리해 놓으려고 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먼지가 쌓일 테니까요.”강지훈은 싸늘하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도우미 뒤에 있는 방을 바라보았다. 소현아의 방은 깨끗하게 비워져 있었고, 옷장과 화장대 위의 물건들, 그리고 항상 바닥에 흩어져 있던 과자들마저 말끔히 치워져 있었다. 생기라곤 찾아볼 수 없었던 예전의 그 공허한 방으로 되돌려져 있었다. 강지훈은 발걸음을 옮겨 방으로 들어갔다. 더 이상 소현아 특유의 체취는 느낄 수 없었고, 청량한 공기 청정제 향만 남아있을 뿐이었다.“방에 있던 물건은 어디 있어?”도우미는 침대에 향한 강지훈의 시선을 알아채고는 곧바로 대답했다. “아가씨께선 인형이 없으면 잠을 자지 못한다며 물건을 거의 다 챙겨 떠났습니다. 남긴 거라곤 옷 몇 벌이 전부입니다.”강지훈이 차갑게 말했다.“내 허락 없이 누가 마음대로 소현아 물건을 만지라고 했어?”그 한마디에 도우미는 순식간에 겁에 질려 고개를 숙였다.
두 도우미는 서로 눈을 마주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사실 소현아의 임신 사실을 그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들은 강지훈의 사람이 아니라 강씨 가문에서 보낸 강지훈을 감시하라는 임무를 맡은 사람들이었다. 임신 사실을 강씨 어르신에게 보고했을 때, 어떤 일이 있어도 배 속의 아이를 지키라는 명령이 내려왔었다. 그 아이는 강씨 가문의 유일한 핏줄이니 어떤 사고도 용납할 수가 없었다.만약 주인님이 배 속의 아이에 대해 알게 된다면, 분명히 아이를 지키지 못할 것이다.지금은 다행히도 아기가 석 달이 넘어 안정기에 접어들었다. 강지훈이 일 때문에 바빠 별장을 떠나 있을 때, 그들은 몰래 소현아에게 유산 방지 주사를 놓아 아이가 무사히 태어날 수 있도록 노력했다.러시아에서 최고의 뇌 전문의를 섭외하고 난 다음 날, 두 도우미는 모든 짐을 챙겨 소현아와 함께 해외 치료를 떠났다.새벽, 헬리콥터가 착륙했다. 소현아는 손에 인형을 안고 잠이 덜 깬 모습으로 말했다. “규영 씨, 미경 씨, 우리 어디 가는 거예요!”규영이 말했다. “현아 아가씨, 주인님께서 아주 재미있는 곳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지금 거기로 가는 겁니다.”소현아는 자신이 쫓겨났다는 사실도 알지 못한 채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요? 우리 어디 가는 거예요? 그 나쁜 놈도 같이 가요?”“주인님은 할 일이 있으셔서 저희에게 먼저 가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준비가 다 되면 주인님도 오실 겁니다.”소현아는 뒤돌아 계단을 바라보았다.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했지만, 그다지 실망하지는 않았다. 강지훈은 항상 바빠서 별장에 없는 날이 더 많으니까. “그럼 그렇게 해요. 하지만 난 며칠만 있다가 돌아와야 해요! 내 동생이 곧 결혼하거든요. 난 언니니까 반드시 결혼식에 참석해야 해요.”규영과 미경은 서로 얼굴을 마주 보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 측은한 마음에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네.”소현아가 헬리콥터에 올라타자 헬리콥터는 천천히 하늘로 날아올랐다...방 안, 남자가
소현아가 지금까지도 나오지 않는다는 건 확실히 이상한 일이었다. 예전엔 아무리 심통을 부렸어도, 내버려 두다가 식사 때가 되어 부르면 두말없이 내려오곤 했었다. 마음에 품었던 앙금을 절대 다음 날까지 가져가지 않았고 주인님과 화해하는 것도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하지만 지금은 너무나도 조용하다. 게다가 오늘 밤엔 주인님 분부로 아가씨가 좋아하는 요리를 만들었는데도 아무 반응이 없다. 분명히 방에서 무슨 일이 생긴 것이다.도우미가 말했다. “평소대로라면 배고프면 스스로 나오셨을 텐데, 지금은 아무리 불러도 미동도 없으십니다.”천효연은 강지훈에게 아주 적합한 애인이었다. 아름다운 외모와 몸매 외에도 강지훈의 곁에서 오랫동안 머물 수 있었던 이유는 남자의 다른 여자들을 용납할 줄 알았기 때문이다.북경 감옥에 사적으로 지어진 별장은 강지훈이 혼자 거주하는 곳으로, 그녀 외에는 아무도 드나든 적이 없었다. 때문에 외국에서 돌아와 그 바보를 보았을 때, 약간 놀랍다는 생각도 들었다.천효연은 강지훈의 입술에 키스하며 말했다. “먼저 방에 돌아가서 씻을게요. 밤에 와요.” 그녀는 사람을 홀리는 매혹적인 눈빛으로 강지훈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떼고는 혼자 방으로 돌아갔다.강지훈은 발로 문을 걷어찼다. 쾅 하는 굉음과 함께 남자는 성큼성큼 방으로 들어섰다. 아무도 없는 방안을 본 그의 눈동자에 분노가 스쳤다.강지훈은 곧바로 창가로 가서 그녀가 뛰어내린 건 아닌지 확인했다.“주인님, 아가씨 여기 계십니다.” 도우미가 드레스룸 바닥에 누워 있는 소현아를 발견했다.소현아는 벽에 기대어 손에 먹다 남은 과자를 든 채 잠들어 있었다. 어렴풋이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듣고 눈을 떠보니 눈에 칼자국이 있는, 무섭게 생긴 남자가 보였다.소현아는 꿈속이라고 여기며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왜 꿈에도 이 나쁜 놈이 나오는 거지? 싫어, 난 소월이랑 강용이랑 같이 놀 거야. 소월아, 지난번에 하던 이야기 아직 안 끝났잖아. 나중에 그 사람 어떻게 됐어?”“물 뿌려서
얼마나 오랫동안 키스했는지, 소현아는 머리가 먹먹해지고 입술이 얼얼해졌다. 급기야 뇌에 산소가 부족해 하마터면 쓰러질 뻔했다.“네가 어리다는 이유로 내가 널 어떻게 하지 못한다고 생각하지 마. 앞으로 다시 내 앞에서 그 자식 이름 꺼내기만 해봐. 내가 그놈 뼈도 못 추리게 만들어 버릴 거야”소현아는 갑자기 악 하고 소리를 질렀다. “나 더러워졌어.”그녀는 눈에 눈물이 맺힌 채 온 힘을 다해 남자를 밀어냈다. “앞으로 다른 여자랑 뽀뽀한 뒤에 나한테 하지 말아요.”“진짜 더러워!” 소현아는 입에 묻은 침을 닦으며 위층으로 뛰어 올라갔다.“소현아! 거기 서!”소현아는 결코 멈추지 않고, 빠르게 위층으로 뛰어 올라가 방문을 잠갔다. 그리고는 밖에서 열지 못하도록 물건으로 문을 막아 놓기도 했다.그녀는 자신의 얼굴에 묻은 그의 침이 역겨워 욕실에서 물을 틀었다. 하지만 그때, 코에서 갑자기 피가 흘러나왔다. 머릿속은 뒤죽박죽이 되어 윙윙거렸고, 이상한 이명까지 들려왔다. 갑자기 밀려온 극심한 두통에 소현아는 제대로 반응하지도 못하고 정신을 잃었다.저녁 식사가 준비된 뒤, 도우미들은 위층에서 그녀가 내려오기를 기다렸지만 한참이 지나도 감감무소식이었다.“주인님, 아가씨 방문이 계속 닫혀 있고, 아무리 두드려도 반응이 없습니다.”“신경 쓰지 마.”그 짧은 말에 도우미들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밤이 깊어지고, 식탁에 놓인 음식들은 모두 치워졌다.천효연은 강지훈의 품에 안겨서 그에게 체리를 먹여주었다. “지훈 씨, 맛있어요?”강지훈은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네 절반만도 못해.”“지훈 씨는 날 놀리기만 한다니까요.”“돌아갈 생각 없어요? 돌아가지 않을 생각이라면, 난 여기서 영원히 당신과 함께할 살 거예요.”어느덧 시계가 9시를 가리키고 있었지만, 위층에서는 여전히 아무런 인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평소 같으면 배가 고프다며 내려왔을 텐데 말이다.오늘 처음으로 허기까지 참아내며 강인한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천효연은 남자의 마
도우미들은 정말로 그녀의 배짱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그런 장면을 보면 분명히 울고불고 난리를 칠 것이라고 생각했다. 눈앞에서 내 남자가 다른 여자와 엉켜있는 모습을 보고 어떤 여자가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녀는 화를 내기는커녕 오히려 전혀 신경 쓰지 않는 표정이었다.뇌를 다쳐서 마음이 넓어진 건가.소현아는 손에 들고 있던 꽃빵을 내려다보았다. 밖에서 먹어본 적이 없는 것이다. 그녀가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두 명의 도우미 역시 더는 위층에 머물러 있을 수 없어 소현아를 따라 아래로 내려갔다.천효연은 남자의 허리에 다리를 감고, 그의 목에 두 손을 두른 채로 말했다. “지훈 씨, 왜 그래요? 그 여자 때문에 분위기 망치면 안 돼요. 우리 방으로 들어가요, 네?”소현아는 냉장고에서 마구마구 음식을 꺼내기 시작했다. 그녀의 손에 쥐어져 있는 아이스크림을 본 도우미는 경악하며 얼른 빼앗아갔다. “아가씨, 의사 선생님께서 당분간 차가운 것을 드시면 안 된다고 하셨잖아요. 다른 걸 드시는 건 어떠세요? 제가 해드릴게요.”소현아가 말했다.“하지만 너무 오랫동안 못 먹었어요. 딱 몇 입만 먹을게요.”도우미는 그녀의 배를 쳐다보며 단호하게 거절했다. “아가씨, 제발 저희를 힘들게 하지 마세요. 지난번에 차가운 음식을 몰래 드셨다가 배가 얼마나 아팠는지 잊으셨어요?”그 말에 소현아는 머쓱하게 손을 놓으며 말했다. “그럼... 안 먹을게요.”“배고프시면 제가 국수라도 끓여 드릴게요.”소현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주...주인님!” 도우미 중 한 명이 계단에서 내려오는 남자를 보고 즉시 고개를 숙였다.강지훈은 샤워 가운을 걸치고 냉랭하고 차가운 분위기를 풍기며 들어왔다. 소현아를 돌보던 두 명의 도우미는 눈치를 보다가 자리를 비켜주었다.소현아는 도우미들을 붙잡으며 말했다. “나한테 국수 끓여 주기로 했잖아요? 왜 가요, 언제 돌아와서 끓여 줄 거예요?”굳은 표정으로 다가오는 강지훈을 본 소현아는 덜컥 겁이 났다. 매번 이런
도우미들은 그런 광경에 익숙한 듯 두 사람이 편히 사랑을 나눌 수 있도록 자연스럽게 자리를 비켜주었다.소파 위에서 천효연은 떨어지기 싫은 마음에 긴 다리를 남자의 허리에 감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완전히 힘이 빠진 상태였다.“지훈 씨, 나...”“당신한테 아이 낳아주고 싶어요...”단추가 하나씩 풀리고 검은색 군복이 바닥으로 내던져졌다. 군데군데 남아있는 흉터와 혹독한 훈련으로 다져진 탄탄한 근육이 드러났다. 그는 소파에 파묻힌 여자에게 맹렬한 공세를 퍼부었다.여자의 비명은 고통스러웠지만, 동시에 만족스러운 쾌락을 담고 있었다.하늘이 점점 어두워지고 있을 때, 소현아는 두 시간 정도 잠들었다가 깨어났다. 밖에서 도우미들은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얼굴을 붉히며 서로 눈치만 볼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소현아는 갑자기 배가 고파 음식을 먹고 싶어졌다. 문을 연 순간, 도우미들은 모두 화들짝 놀랐다. “현아 아가씨, 왜 나오셨어요? 빨리 다시 들어가세요.”침대 머리맡에 있던 꽃빵 두 개를 들고나온 그녀가 둥글게 불러온 배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배고파서 아래층에 내려가서 뭐 좀 먹고 싶어요.”도우미들은 눈썹을 찌푸렸다. “주인님께서 아래층에서 중요한 일을 상의하고 계시니, 현아 아가씨는 잠시만 기다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하지만 저 지금 배고프단 말이에요. 물도 마시고 싶고요.”머리가 망가진 사람은 역시 다르네.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뭘 의미하는지 모르는 건가?그렇게 오랫동안 약을 먹었지만, 좋아질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현아 아가씨, 지금은 주인님께서 바쁘게 일하고 계시니 조금만 더 기다리세요. 끝나면 뭐든 다 해드릴게요.”“정말 너무들 하네요! 그냥 내려가서 뭐 좀 먹겠다는 것뿐이잖아요. 무슨 일이 있어도 안 본 척할게요, 약속해요.” 소현아는 순진무구한 눈으로 도우미들을 바라봤다. 그 순수한 눈빛을 마주하니 누구도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그때, 밑에서 급히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