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영수가 학교에 오자고 한 이유는 그녀를 만나고 싶어서였다. 수술의 성공 여부는 영수한테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앞에 서 있는 소녀가 소년이 일어설 수 있는 동력이자 힘이다.강영수는 물끄러미 눈앞의 소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가늘고 긴 머리카락은 바람 속에서 부드럽게 나부끼고 그의 심장을 간질거렸다. 뒷모습마저 눈을 뗄 수가 없다. “여기서 잠시만 기다리세요...”“알겠습니다. 도련님, 조심해서 다녀오세요.”소월은 벤치에 앉아 점심을 먹고 있었다. 틈틈이 호숫가 풍경도 감상했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온도, 딱 기분 좋을 만치 불어오는 바람, 상쾌하게 번지는 풀 내음, 아줌마가 정성껏 챙겨주신 도시락까지... 그야말로 완벽한 점심이었다. 역시 아줌마 솜씨를 따라올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감탄한다.누군가 장소월의 신경을 거스르며 검은 그림자가 시야에 들어왔다.제대로 눈여겨보니 지난번 병원에서 만난 잘생긴 ‘만찢남’이었다.하지만 다리가...눈길을 사로잡은 무언가가 더 있었다. 긴 소매 밑에 숨겨진 신비한 푸른 문신이 어렴풋이 보였고, 목깃 밑에도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소년의 휠체어가 불과 몇 걸음 거리서 멈춰 섰다. 바람이 불면서 강영수의 갈라진 앞머리 사이로 봉긋하고 반질반질한 이마가 드러났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소년은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안녕, 이렇게 또 만나네.”차분한 목소리가 듣기 좋은 선율로 들려왔다. 장소월은 입술이 벌어진 것도 모른 채 멍한 눈으로 앞에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너무 민망해서 재빨리 입속의 밥을 삼켰다. “안녕! 아참, 지난번 옷은 이미 빨아서 집에 널어놨어! 근데 너도 제운고 다녀? 전에 마주친 적 없는 거 같은데...”강영수는 그녀가 말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입꼬리가 싱긋 올라갔다. “질문이 너무 많은 거 아니야... 어느 거부터 먼저 대답해 줄까.”그는 몇 초를 생각하더니 차근차근 말했다. “먼저 첫 번째 질문. 옷은 서둘러 돌려주지 않아도 돼. 다음번에 만날 때 직접 돌려줘...”“둘째, 제
호숫가 맞은편에서 서너 명이 걸어오는 중이다. 거리가 떨어져 있지만 허철은 한눈에 벤치에 앉아 있는 장소월을 알아봤다. 그녀는 두 발이 불구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들리지 않았다.단지 장소월의 얼굴에는 때때로 환한 미소를 지었고, 보는 사람을 설레게 했다.백윤서가 그들 사이에서 걷고 있었고, 그 옆에는 룸메이트인 엽청하다. 둘은 팔짱 끼고 앞에서 걷고 뒤에는 강용 등이 따라오고 있었다.엽청하는 처음 보는 광경에 경악하며 주변의 경치를 탐욕스럽게 바라보았다. “와, 여기가 말로만 듣던 제운고구나! 너무 예쁘다! 윤서야, 여기 백조 호수는 우리 학교 축구장보다 더 큰 거 같아...”“응, 진짜 크네. 나같은 길치는 여기서 혼자 다니다가 길 잃을지도 몰라.” 백윤서는 짧게 농담했다.허철이 팔꿈치로 방서연을 치며 저쪽을 보라고 손짓했다.방서연은 손길 따라 쳐다봤다. 다름 아닌 장소월이다.근데 옆에 있는 남자는 누구지?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이다.설마 강용이 자기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고 대역을 구한 것은 아니겠지?대역을 찾는다고 해도 사지가 멀쩡한 사람을 찾아야지, 어디서 걸을 수도 없고 휠체어를 탄 사람을 찾아왔는지...장소월... 너란 사람 도통 모르겠다....“선배, 오늘 저랑 많은 대화 해줘서 너무 감사해요.”그때 왕집사가 다가와 몸을 굽혀 강영수의 귀에 대고 무언가를 말했다. 시선은 어딘가를 향했고 미간을 찌푸렸다. “알겠어...”고개를 들어 장소월을 바라볼 때는 여전히 밝은 얼굴에 환산 미소를 띠었다. 봄날에 창문 따라 비춰 들어온 따스한 햇볕 같았다. “미안, 급한 일이 있어 먼저 가봐야 할 거 같아.”장명월은 손사래를 쳤다. “에이, 괜찮아요...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 보니 시간 가는 줄도 몰랐네. 오히려 내가 선배에게 고마워해야 하는 거죠."“그럼... 먼저 갈게...” 영수는 너무 아쉬워했다. 마지막까지 애틋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네, 가세요.” 소월은 일어나
“너도 알다시피 내가 반에서의 처지가... 나 때문에 너에게 영향 끼치고 싶지 않아...”서문정이 입을 열었다.“낙성은 작은 도시일 뿐인데 거기에는 뭐 하러 갔어? 그런데 그게 중요한 거 아니고 소월아 괜찮아. 네가 나의 친구가 되지 않더라도, 내가 너와 이야기하고 싶을 때 네가 나를 무시하지 않으면 돼.”장소월은 고개를 끄덕였다.“내 공부를 방해하지 않는다면 널 무시하거나 그러지 않을 거야.”“소월아, 너 정말 너무 좋은 사람이야.”서문정은 기뻐하며 그녀를 껴안았다.실은 장소월도 서문정이 왜 그녀와 친구가 되고 싶은지 그 이유를 모르겠다. 그녀는 그들 사이에 깊은 교집합이 있을 만한 일이 없는 걸로 기억하고 있다.그리고 주변에 있는 사람들도 모두 깊지 않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평범한 사이이다.서로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하고 하룻밤이 지나면 서로 모르는 척할 수도 있는 사이이다.장소월이 떠날 때 멀지 않은 곳에서 검은색 데님 쟈켓을 입고 왼손에 깁스를 한 채 서 있는 강용을 보았고 그들에게서 5~600m 떨어진 곳에서 장소월은 발걸음을 멈췄다.강용 무리를 제외하고 장소월은 또 한 명의 오랜 지인‘백윤서’를 봤다. 요즘 백윤서가 그녀 앞에 자주 나타나서 피할 수 조차 없었다.서문정은 그 여자의 뒷모습을 보며 말했다.“우리 앞에 있는 저 사람이 바로 제2중학교에 전학 온 퀸카 백윤서야. 온 지 일주일도 안 됐는데 강용의 마음에 들었대. 지금 둘이 사귀고 있는지는 아직 확실하지 않지만.”“제2중학교에 강용과 친한 사람 몇 명 있는데 얼마 전에 같이 놀 때 저 백윤서도 함께 갔다고 하더라고. 백윤서에게 꽤 잘 나가는 대표님 오빠도 있다고 하던데 친형제는 아니고. 그런데 오빠가 엄청 무서워서 연애를 못하게 한대. 이번에 제2중학교에서 몰래 나와 우리 학교에 온 걸 아마 그 오빠가 아직 모를 거야.”서문정이 말한 그 오빠는 바로 “전연우”이다.장소월은 궁금해 그녀를 보며 물었다.“그런 건 어떻게 알았어?”서문정은 입을 열었다.
강용은 장소월의 옆자리에서 자고 있는 뚱땡이를 발로 찼고 그는 멍하니 고개를 들고는 영문 모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저리로 꺼져.”강용은 입을 열었다.이 뚱땡이의 집은 벼락부자인데 목축업을 하면서 부자가 되었다. 평소에도 별 다른 취미가 없어 장소월이 본 그의 대부분 모습은 자고 있는 모습이다.평소 그의 시험지에도 그가 흘린 침이 가득하다.뚱땡이는 강용을 보고 고개를 갸우뚱거리더니 이내 일어나 자리를 양보했다.강용은 한 손으로 의자를 끌어당기고 장소월 옆에 앉았다. 한 손은 등받이 의자 뒤에 걸치고 다른 한 손은 깁스를 하여 매우 눈에 띄었다. 한정판 명품 운동화를 신고 흔들거리는 모습은 완전히 무식한 부잣집 도련님의 모습이다.“너 백윤서를 알아?”장소월은 펜을 멈췄다.“알아, 백윤서는 우리 아버지가 입양한 딸이고 그녀가 말한 오빠도 우리 아버지가 입양한 사람이야. 그들 모두 나와 혈연관계가 없어.”허철은 비아냥 거리며 말했다.“뭔 입양을 이렇게 많이 했어. 장소월... 혹시 너도 입양된 자식 아니야?”장소월은 그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강용은 바닥을 보며 잠깐 생각에 잠기더니 장소월의 종아리를 발로 찼다.“누가 너에게 이런 걸 물었어?’장소월은 미간을 찌푸렸다.“이런 걸 알고 싶지 않으면 뭘 알고 싶은데? 만약 백윤서에게 구애를 하고 싶어서 나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거면, 미안하지만 난 그렇게 할 수 없어. 그건 너와 그녀 사이의 감정 문제이고 나는 너를 도울 의무가 없어... 이제 수능이 다가오니 너도 인젠 공부에 신경을 써야지.”장소월은 강용의 속마음을 정확히 얘기했고 그는 확실히 백윤서가 마음에 든다. 그러나 그녀에게 도움을 요청하다니. 장소월은 도무지 강용의 생각을 모르겠다.강용은 웃으며 뒷어금니를 핥았고 눈빛은 차가웠다.“지금 나한테 뭐라고 한 거야? 너 따위가 뭔데? 응?”그는 또 그녀의 책상다리를 발로 걷어찼다.“한 마디만 물어볼게. 도와줄 거야 어쩔 거야?”“시간 없어. 도와줄 수 없어.”이것이 바로 그
화학 시험지 한 세트를 다 풀었지만 장소월은 여전히 평정심을 되찾지 못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는 답을 찾을 수가 없다.강용은 도대체 뭘 잘못 먹었나? 아니면 그녀가 무슨 행동을 하여서 그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착각을 안겨줬는가?저번에 그를 도와 물건을 주었고 사진이 찍혀서 오해를 산 건가?장소월은 얼른 휴대폰을 꺼내 학교 블로그를 찾아 저번에 몰래 찍힌 사진을 보려고 하였다. 그 게시물을 아직 제대로 보지 못하였던 지라 그녀는 사람들이 뭐라고 하는지 제대로 볼 예정이다. 장소월이 블로그를 열어 해당 게시물을 찾았는데 그 게시물은 이미 블랙 처리 되어 아예 열리지가 않았다.이때 문자가 왔는데 확인해 보니 서문정이었다.「소월아. 너 정말 대단해. 방금 그 주먹 한방에 강용이 아파서 얼굴이 하얗게 질리더니 네가 가고 나서 의무실로 실려갔어. 그런데 너 조심해. 강용은 반드시 복수를 할 인간이니... 사실 나도 네가 좀 과격했다는 생각이 들었어. 방금 피 흘린 걸 본 것 같아.」「그러게 누가 걔더러 헛소리 하라고 했어? 만약 걔가 한 말이 소문이 나서 아빠가 알게 된다면 난 죽게 될 거야!」「너 정말 강용 안 좋아해??」「왜 다들 내가 걔를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거지? 도대체 왜 그런 오해가 생긴 거지?」「저번에 네가 꽃을 사들고 강용 병문안을 간 사실이 이미 학교에 소문이 퍼졌어. 너 몰랐어? 」「그거랑 내가 걔를 좋아하는 게 무슨 상관이야?」「저번에 있었던 너의 그 사고, 비록 강용이 때린 건 아니지만 강용과 어느 정도 연관성이 있는 문제잖아. 그래서 우리는 네가 강용과 다시는 말을 섞지도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 심지어 네가 퇴학이나 전학 갈 거라고 내기까지 했는데... 그런데 글쎄 꽃까지 선물해 주고... 그래서 우리는 네가 강용을 좋아해서, 자신이 맞은 일은 신경 쓰지 않고 병문안 갔다고 생각 한 거지.」빠르게 그녀는 다시 문자를 보내왔다.「너 정말 강용 안 좋아해?」장소월은 핸드폰 화면을 바라보며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이제야
다행히 제2중학교는 생각보다 엄격하지 않아 간식을 챙길 수는 있다. 다만 수업 중에는 먹을 수 없다. 백윤서는 이 간식들은 누가 그녀의 자리에 놓았는지 모르기에 누구에게 돌려줘야 하는지도 모른다.백윤서는 반 친구들한테 나눠주든지 기숙사로 챙겨가서 룸메이트 6명이서 나눠먹든지 한다.백윤서는 성격도 좋고 잘 웃는 편이고 성적도 좋다. 새로 전학해 왔지만 예전에 해외에서 배운 지식도 까먹지 않아 지난번 시험에서 반에서 1등, 학년 2등을 했다.다른 친구들이 모르는 부분이 있어 그녀에게 물어보면 백윤서도 참을성 있게 가르쳐 준다.필기 자료도 인색하지 않게 친구들에게 빌려주곤 한다.백윤서는 반에서 인기가 많고 선생님들이 생각하는 좋은 학생이다.야간자율학습이 끝나니 벌써 9시 40분이다.백윤서는 책상 위의 물건을 정리하며 말했다.“청하야, 나 화장실 갈 건데 같이 갈래?”“그래, 같이 가.”엽청하는 다가가 백윤서의 팔짱을 꼈다.야간자율학습이 끝난 시간이라 학교에 사람이 별로 없었다.복도에 센서등이 있어서 누군가가 지나가면 머리 위의 불이 자동으로 켜진다.“윤서야,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응.”백윤서가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복도 저편에서 포니테일 머리를 한 사람을 필두로 몇 명이 걸어왔다. 엽청하는 그녀를 알고 있다. 그녀는 바로 학교의 여두목, 고여경이다. 학교에서 모집한 배구 특기생이고 훤칠한 키 덕분에 현재 전문적인 배구 트레이닝을 받고 있다.그런데 그녀들은 왜 여기로 온 걸까? 엽청하의 기억으로는 운동 특기생들은 몇 과목의 수업을 빼고는 대부분 시간은 트레이닝을 받고 있다. 그녀들이 기세등등하게 걸어오는 것을 보면서 엽청하는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175가 넘는 기럭지를 소유한 고여경은 걸어와 고개를 숙여 엽청하에게 물었다.“난쟁아, 물어볼 거 있는데 백윤서는 어디에 있어?”“난... 난 몰라.”엽청하는 그녀의 포스에 놀랐고 그녀가 백윤서를 찾은 이유가 분명히 좋은 일 때문이아니라고 직감했다.그녀는 백윤서가 어디에
엽청하는 방금 머리를 부딪혀 지금 의식을 잃어서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다.고여경은 사진을 휴대폰 연락처에 있는 사람에게 보내고 만족한 표정으로 자리를 떴다. 엽청하를 힐끔 보고는 혐오스러워하며 옆 사람에게 눈짓을 했다.그 사람은 그녀의 뜻을 깨닫고 곧 찬물 한 대야를 들고 와서 정신을 잃은 엽청하의 몸에 끼얹었다.엽청하는 순간 추위에 정신을 차리고 물에 사레가 들려 기침을 여러 번 했다.고여경은 옷매무새가 단정하지 못한 채 바닥에 앉아있는 두 사람을 내려다보았다. 백윤서는 얼굴마저 긁혀 상처가 나있었다.“백윤서, 너도 우리 탓하지 마. 누군가가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했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했기 때문이야. 뭐 당연히 너의 제일 큰 잘못은 강용에게 꼬리를 친 거지.”“강용은 내 친구가 맘에 둔 남자이니... 네가 만약 다시 강용 그리고 걔 친구들과 친하게 지내면 그땐 내 손에 있는 이 소중한 것들을 실수로 전송을 할 수도 있어.”고여경은 자랑하듯 휴대폰을 흔들었다.방금 모욕을 당하고 속살을 들어낸 사진을 그녀들이 모두 찍었다.만약 이 사진들이 인터넷에 퍼지면 백윤서는 아마 계속 살아갈 용기조차 없을 수 있다.고여경이 사람들을 데리고 걸어가다가 갑자기 문어구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돌아서서 백윤서를 바라보며 말했다.“내 친구가 너에게 전해주래. 장소월을 우리가 어떻게 하지 못하지만 만약 장소월이우리를 화나게 하면 그 화를 모두 너에게 풀 거야... 아무리 아파도 참고 견뎌.”“아 맞다, 경찰에 신고할 생각 하지 마. 혹은 선생님에게 얘기해도... 아무 소용이 없어.”백윤서는 그 악마 같은 얼굴을 바라보며 눈빛이 흔들렸다...소... 소월...제운고등학교 학생인 건가?엽청하는 백윤서를 안고 무서움에 눈물을 흘렸다.“윤서야, 어떡해? 그 사진들을 만약 우리 부모님이 보시게 된다면 내가 학교에서 사고를 쳤다고 생각하고 날 때려죽일 거야.”백윤서는 옷매무새를 정리하고는 그녀를 안고 위로해 주었다.“괜찮아, 괜찮아. 무서워하지 마...
의무실. “다행히 큰 문제는 없고 생리 와서 그런 것 같네. 다른 문제는 없어 보이는데 너희 들 얼굴 상처는...”의무실의 선생님은 한편에 서있는 당직 선생님을 힐끔 보았다.당직 선생님은 일어나서 입을 열었다.“성 선생님, 먼저 돌아가세요. 이 두 학생은 제가 책임 질게요.”“그래요, 도 선생님. 그러면 저 먼저 갈게요. 약은 테이블 위에 놓았으니 갈 때 잊지 말고 가져가.”당직 선생님은 오늘날의 훈도과 주임 인도준이다. 배가 불룩하게 나와있고 안경을 쓴 40대의 중년 남자이다. 겉 보기에 사람은 무던하고 성실해 보인다. 의무실에 올 때도 도준 선생님이 백윤서를 업고 온 터라 등 위치의 옷에는 핏자국이 묻어 있었다.백윤서가 생리하는 첫날이면 확실히 반응이 비교적 크다. 예전에 진통제를 상시 휴대하고 다녔는데 이번엔 진통제가 가방안에 있어 미처 꺼내지 못했다.도준은 계속 백윤서를 바라보았고 그녀는 손에 따뜻한 물이 담긴 컵을 든 채 고개를 숙여 생각에 잠겼다.엽청하의 얼굴은 약을 발라 많이 나아졌고 그녀는 가슴 아파하며 백윤서를 보고 있었다.“윤서야, 괜찮아? 내가 널 제대로 보호하지 못해서 네가 괴롭힘을 당한 거야.”백윤서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네 탓 아니야. 다 내 잘못이야. 나 때문에 너까지 이런 일을 당하고.”도준은 시계를 보더니 그녀들에게 얘기했다.“이제 곧 11시이니 우선 돌아가서 쉬어. 오늘 있었던 일은 내가 내일 너희들 담임 선생님께 말할게.”말을 하면서 그는 백윤서가 휴식하고 있는 침대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선생님이 업어서 기숙사까지 데려다줄게.”백윤서는 손에 들고 있는 컵을 꼭 쥐며 말했다.“선생님, 괜찮아요. 저 많이 좋아졌으니 혼자서도 갈 수 있어요.”도준은 계속 자신의 생각을 밀어붙였다.“안 돼. 선생님이 걱정돼서 그래. 업히는 게 불편하면 선생님이 안아서 데려다줄게.”말을 마친 뒤 그는 백윤서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백윤서의 말투는 순간 차가워졌다.“선생님, 제가 말했죠. 저 혼자서 갈 수 있
도우미가 말했다.“민아 아가씨가 돌아오셨어요. 그런데 제가 방금 방에 가보았는데 두통이 다시 재발한 것 같았어요.”명세진의 얼굴이 바로 굳어졌다.“민아는요? 지금 어디에 있어요? 민아한테 무슨 얘기 했어요?”“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약만 가져다드렸어요. 얼굴색이 정말 안 좋았어요.”명세진의 얼굴엔 걱정이 가득했다.“내가 올라가 볼게요. 오늘 저녁엔 민아가 좋아하는 음식들 많이 만들어요.”“네, 사모님.”명세진은 소민아를 줄곧 자신의 친딸로 생각하며 키워왔다. 소현아와 소민아 모두 소씨 가문의 소중한 딸이다. 실제 언니는 소현아였지만, 평소엔 동생인 소민아가 언니처럼 소현아를 챙겼다.명세진은 소민아의 마음이 다치지 않도록 평소 그녀에게 더 관심을 쏟기도 했다.명세진은 방으로 올라가 조용히 문을 열었다. 침대에서 잠들어 있는 소민아를 본 그녀는 조심스레 다가갔다.소민아는 악몽에 시달리고 있는지 베개가 흥건해지도록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안 돼요... 나 데려가지 말아요...”“오... 오지 마...”“언... 언니...”“언니... 어디에 있는 거예요!”명세진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며 손수건으로 이마 위 식은땀을 닦아주었다.“괜찮아. 괜찮아. 고모가 여기에 있어.”명세진은 따뜻하게 이불을 덮어 주고는 예전 소민아를 집에 갓 데려왔을 때처럼 침대 옆에 앉아 밤새 그녀를 토닥여 주었다.슬프게 흐느끼던 소민아는 한참을 다독인 뒤에야 천천히 울음을 그쳤다.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올려 주는 명세진의 얼굴엔 걱정이 가득했다. 아이를 갓 집에 데려왔을 때를 그녀는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다.영양실조로 살집 하나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말라 있었다. 일주일 동안이나 의식을 되찾지 못해 병원에서도 다시 살지 못할 거라고 했었다.이후, 다행히 그녀는 목숨을 지켜냈고 천천히 몸을 회복했다.비록 예전의 기억을 잃어버리긴 했지만,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아주 영리하고 총명한 아이였다. 학교에서의 수업도 교과서 한 번만 읽으면 바로 익히는
세면대 위에 놓아둔 핸드폰이 진동해 살펴보니 신이랑이 보내온 문자였다.[며칠 집에서 쉬어요. 회사 일은 내가 알아서 할게요.]소민아의 머릿속에 신이랑과 결혼하면 다시는 범죄를 저지르지 않을 거라던 송시아의 말이 다시 떠올랐다.소월 언니 집안에 관한 일은 고모부로부터 들은 적이 있다. 당시 장씨 집안의 지위는 어마어마하게 높았다고 한다. 서울에서 높은 권세를 누리고 있는 가문들조차도 장씨 집안에겐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암암리에 수많은 극악무도한 짓을 저질렀다.한 사람의 목숨은 단 한마디 말로 가볍게 좌지우지되는 것이었다. 소씨 집안은 명함도 내밀지 못했고, 서울에서 난다긴다하는 명문가 집안도 장해진 앞에선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송시아가 저지른 범죄도 그들과 그리 다르진 않을 것이다.소민아는 갑자기 밀려온 어지러움 때문에 정신이 아찔해졌다. 세면대를 지탱하지 않았다면 바닥에 쓰러졌을 것이다. 그녀의 머릿속에 낯설고도 생생한 기억이 펼쳐졌다.울음소리 가득한 어두운 지하실...남자 한 명이 그녀 앞에 쪼그리고 앉아 그녀에게 만두 하나를 쥐여주었다. 6, 7세 남짓한 어린 여자아이는 허겁지겁 만두를 입에 구겨 넣었다...머리가 깨질 것만 같아 이마를 감싸 쥐었다. 곧이어 참을 수 없는 두통이 밀려왔다.고통을 견디며 30초 정도 지내 보내니 그제야 통증이 조금씩 가라앉았다.그곳은 대체 어디일까. 왜 그녀 기억 속엔 없었던 걸까...그 남자는 누구지?왜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거지?도우미가 깨끗이 세척한 옷을 들고 들어왔다가 이상한 모습의 소민아를 보고는 다급히 다가와 물었다.“아가씨, 왜 그러세요? 또 머리가 아픈 거예요? 제가 약 가져다드릴게요.”소민아는 어렸을 때 자주 두통을 앓았었다. 하지만 이미 오랫동안 발병하지 않았다.도우미가 얼른 약을 꺼내 소민아에게 가져다주었다.약을 입에 넣고 물로 삼키니 두통이 많아 가라앉았다.도우미가 말했다.“아가씨, 계속 불편하시면 병원에 가보세요.”소민아가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그녀가 신이랑과 결혼만 하면 송시아는 더는 다른 사람을 해치지 않을 거라고 했었다.“왜 그렇게 보는 거예요? 네?”소민아는 뒤로 몇 걸음 물러서 신이랑과 거리를 넓혔다.“난 괜찮으니까 먼저 돌아가요. 잠깐 어지러워서 그랬어요.”“그래요. 내가 차로 데려다줄게요.”“아니에요. 회사와 내가 가려는 곳은 반대 방향이에요. 지금은 근무 시간이잖아요. 이랑 씨 일에 영향 줄 수는 없어요.”소민아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마음속에서부터 그를 천천히 멀리하기 시작했다.그 변화를 느낀 신이랑의 얼굴에 감출 수 없는 실망감이 어렸다.“민아 씨, 무슨 일 있었던 거예요? 아니면 송시아가 또 기성은 씨로 협박한 거예요? 뭐든 상관없으니까 나한테 말해요. 내가 도와줄게요.”소민아는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보았다.‘신이랑 씨, 대체 왜 나한테 이렇게 잘해주는 거예요?’‘이건 친구에게 베푸는 호의가 아니잖아요! 그보단... 다른 관계...’소민아는 그에게 똑똑히 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이랑 씨, 여긴 불편하니까 차에 가서 얘기할까요?”“그래요. 내가 캐리어 들어줄게요.”신이랑은 소민아의 짐을 들고 그녀와 함께 주차장으로 향했다. 차에 올라탄 뒤 그가 물었다.“나한테 할 얘기 있어요?”“이랑 씨, 우린 친한 친구 맞죠? 이랑 씨도 송시아처럼 나쁜 사람으로 변하진 않을 거죠?”신이랑은 잠시 당황했다가 이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민아 씨, 나쁘게 변하든 아니든 절대 민아 씨를 해치진 않을 거예요!”신이랑이 그녀에게 하는 약속이었다.“민아 씨 생각엔 내가 그런 사람으로 변할 것 같아요?”소민아는 그를 믿는 게 맞는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송시아의 말로는 신이랑은 앞으로 정계에 입성할 것이고 기성은의 위협이 될 거라고 한다. 그녀는 목구멍까지 올라왔던 말을 다시 삼켜버렸다.결국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기성은이 그녀에게 신신당부한 말도 있었기 때문이었다.“서울에 돌아가면 그 누구의 말도 믿으면 안 돼요.”“이랑 씨는요? 회사에서 유일하게
소민아의 눈동자에서 빛이 점점 꺼져가고 있었다. 너무 괴로워 목구멍에서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당신 생각이에요, 아니면 이랑 씨 생각이에요?”송시아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민아야, 그 말을 이랑 씨가 들었다면 얼마나 섭섭해할까. 줄곧 신이랑은 나랑 다르다고 말해왔으면서, 지금 신이랑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거야?”“내가 했던 말 잊었어?”“신이랑은 널 위해 본가에까지 들어갔어!”송시아가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내뱉었다.“신이랑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너만을 위해 살았어!”“핸드폰 확인해봐. 신이랑이 너한테 문자를 얼마나 많이 보냈는지.”비행기에서 내린 뒤 그녀는 핸드폰을 무음으로 설정해 놓았다. 기성은의 문자 외에 다른 건 확인할 시간이 없었다.송시아가 걸어 나가며 말했다.“일단 씻고 내려와서 밥 먹어. 저녁에 서울로 돌아갈 거야.”소민아가 핸드폰을 꺼내 보니 베터리가 없어 꺼진 상태였다. 충전선을 꼽고 전원을 켜니 송시아의 말처럼 신이랑으로부터 적잖은 문자가 와 있었다.40개가 넘는 문자 중 대부분이 그녀가 어디에 있는지 묻는 내용이었다. 말투에서 그녀에 대한 걱정이 고스란히 묻어나오고 있었다. 그가 이럴수록 소민아는 그에게 죄책감이 느껴지고 부담감이 더해갔다.오후 3시 식사를 마치고 짐 정리를 한 다음, 비행기에 올라탔다.소민아는 창밖으로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송시아가 그녀 옆에 앉아 눈을 감고는 말했다.“보지 마. 아무리 봐도 기성은은 너랑 같이 여길 떠나지 않아.”“기성은은 애초부터 이 더러운 곳에 더 어울리는 사람이었어. 네가 아무리 애써도 뼛속 깊이 새겨진 비천함은 변하지 않아.”소민아가 말했다.“당신은 얼마나 고귀한 사람이길래 그런 말을 하는 거예요? 당신도 예전엔 이처럼 악랄한 환경에서 살았었다는 거 잊지 말아요.”송시아가 들뜬 말투로 말했다.“이 세상 사람들에겐 모두 등급이 있어. 전연우가 아니었다면 기성은은 아직도 여기에서 굴러다녔을 거야. 참, 내가 알려줬었나? 기성은의 아버지는 지독
“그때가 되면 소씨 가문도, 그리고 언니도... 기성은 하나 때문에 무너져버릴 수 있어.”송시아가 가장 잘하는 게 바로 사람의 가장 여린 약점을 건드리는 것이다. 그 몇 마디 말에 소민아는 패닉에 빠져버렸다.“그... 그럴 리가 없어요! 기성은 씨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요. 신이랑 씨도 당신 말처럼 기성은 씨를 해치지 않을 거고요. 당신 입에서 나온 말은 한 글자도 믿지 않을 거예요.”송시아가 더더욱 그녀를 몰아붙였다.“민아야, 내가 예전에도 말했었잖아. 장씨 가문은 서울 지하조직 수장이었다고. 그 인간들이 무슨 짓을 했었는지 알기나 해? 당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장해진이 죽길 바랐을까. 전연우가 없었다면 장소월은 목숨을 부지하지도 못했을 거야.”“그동안 장씨 집안, 남원 별장을 지켰던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해?”“장씨 집안은 전연우와 기성은이 지탱하고 있었던 거야. 장소월은 다른 사람에게 기대어야만 살 수 있는 기생충에 불과해.”“장씨 집안이 끝나버린 지금, 기성은은 장씨 집안의 뒤처리를 해주려고 저렇게 고생하고 있는 거야.”“장씨 집안이 저지른 죄를 모아 신고하면 목숨이 몇백 개라도 모자라거든.”소민아는 더는 참지 못하고 두 손으로 귀를 막았다.“됐어요. 그만 해요. 소월 언니를 벌레 보듯 하고 있는데... 소월 언니는 아무것도 몰라요. 무슨 근거로 모든 잘못을 소월 언니에게 뒤집어씌우는 거예요? 내가 보기에 소월 언니는 당신보다 훨씬 더 좋은 사람이에요. 적어도 다른 사람을 해치진 않았으니까요!”“만약 내가 당신 동생이 아니었다면 어떤 방식으로 날 해치우려고 했어요? 난 저번 하마터면 당신 손에 철저히 망가질 뻔했어요.”송시아는 화가 나 이마를 찌푸렸다.“장소월이 착하다고? 그래! 장소월은 어렸을 때부터 걱정하나 없이 온실 속에서 자란 사람들의 부러움을 한몸에 받는 귀한 집 아가씨였어. 착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민아야... 우리한테 제일 필요 없는 게 바로 착함이야. 장소월처럼 살았다면 난 이미 일찌감치 죽은 목숨이었을 거야. 네
기성은은 그녀를 별장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내려주고는 차를 몰고 떠났다.소민아가 돌아가 보니 송시아는 밤새 돌아오지 않은 듯했다.송시아가 어디에 갔든 전혀 상관없었다. 그녀는 피로한 몸을 이끌고 씻으러 욕실에 들어가려 했다. 하지만 무언가 생각났는지 다시 방으로 돌아가 베개를 등에 받히고 침대에 누웠다.어리석은 방법일 수도 있지만, 소민아에겐 더는 다른 방도가 없었다.송시아가 돌아왔을 때, 소민아는 깊이 잠들어 있었고, 바닥에선 베개가 나뒹굴고 있었다. 그녀 옷깃에 묻은 자국을 보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었다.송시아의 눈동자가 어두워졌다. 이렇게까지 깊게 빠져버렸다고?신이랑이 기성은보다 못한 게 뭐란 말인가. 왜 하필이면 배경도, 돈도 없는 기성은을 좋아하게 된 걸까.송시아도 밤새 바쁘게 보냈던 지라 바로 욕실에 들어가 씻은 뒤 소민아의 옆에 누웠다.소민아는 오후가 되어서야 잠에서 깨어났다. 옆에 누워있는 여자를 본 순간, 화들짝 놀라 벌떡 일어나 앉았다. 눈동자 속에 감출 수 없는 증오가 피어올랐다.그 움직임에 송시아도 깨어났다.소민아가 말했다.“방이 두 개나 있는데 왜 하필 내 침대에 누운 거예요.”송시아가 웃으며 그녀를 쳐다보았다.“너 예전엔 언니랑 딱 붙어 자는 거 좋아했잖아.”소민아는 그녀에게 더는 관심을 주지 않고 옆에 있던 옷을 들고 욕실에 들어갔다. 그녀는 거울 속 자신을 바라보며 아랫배를 어루만졌다...‘아이가 있든 없든 난 끝까지 당신을 기다릴 거예요.’소민아는 샤워를 마친 뒤 욕실에서 나가 송시아에게 물었다.“우리 언제 돌아가요?”“어젯밤 기성은 만났어? 기성은도 너한테 꽤 마음이 있나 보네.”“묻고 싶었던 건 물어봤어?”“안 물어봤어요.”송시아는 화장대에 앉아 그녀를 힐끗 쳐다보고는 귀걸이를 걸며 말했다.“아무 조건 없이 마음을 줄 정도로 가치가 있는 사람이야? 기성은을 선택하면서 신이랑의 마음이 어떨지는 생각해봤어? 신이랑은 널 위해 제일 돌아가고 싫어하던 본가로 들어갔어.
차가운 밤바람에 체온이 떨어지자 기성은은 그녀를 데리고 은밀한 위치에 멈춰선 차에 올라타고는 히터를 틀었다.소민아는 바로 그의 몸에 올라타고 키스를 퍼부었다. 마음껏 키스한 다음 두 손으로 그의 얼굴을 감싸고 말했다.“기성은 씨, 3년 줄게요. 기다릴 테니까 3년 안에 서울로 돌아와요. 그동안 뭘 하든 상관하지 않을게요. 그냥 3년 후... 나한테 전화 한 통이나 문자 하나만 해줘요.”“기성은 씨만 원한다면 난 당신과 결혼하고 싶어요.”“기성은 씨를 대신해 총괄 비서 자리 잘 지키고 있을게요. 전 대표님이 깨어날 때까지, 그리고 기성은 씨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 거예요.”“말하지 않으면 동의한 걸로 생각할게요.”기성은에게 있어 모든 것이 미지수다. 3년이라...사람에게 얼마나 많은 3년이 있을 수 있을까.“이곳을 떠나면 동의할게요.”소민아는 그의 목덜미를 잡고 말했다.“힘들게 왔는데 허탕을 치면 안 되죠. 날이 밝기 전엔 갈 생각하지 말아요.”소민아가 그의 옷 단추를 풀었다.덜컹덜컹 흔들리는 차 안, 소민아는 거칠게 신음소리를 내뱉고 있었다.얼마가 지났을까, 그녀는 더는 견디지 못하고 기성은의 가슴팍에 엎드려 잠이 들었다.다음날 날이 밝아서야 소민아는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 그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그의 모든 것을 하나하나 머릿속에 새기려는 듯한 모습이었다. 기성은도 그녀의 손길을 느끼고 잠에서 깨어나 눈을 떴다.“송시아도 왔어요. 저 곧 가야 할 것 같아요. 정말... 기성은 씨와 잠시라도 더 함께 있고 싶어요.”기성은이 바깥을 쳐다보니 날은 이미 밝아있었다.“내가 송시아의 동생이라면, 나 미워할 거예요?”기성은이 말했다.“그건 알고 있었어요.”“그럴 줄 알았어요. 다 알고 있었으면서, 왜 나한테 말해주지 않은 거예요?”소민아는 다시 몸을 기울여 그의 가슴에 기댔다. 그의 평온한 심장박동이 그녀에게 안정감을 심어 주었다.“그럼 기성은 씨 생각은 어때요? 제가 그 여자를 언니로 인정해야 할까요? 제 머릿속엔 조각조각 찢어진
“여긴 민아 씨가 올 곳이 아니에요.”“누구랑 같이 왔어요? 지금 당장 그 사람과 함께 돌아가요.”욕실에서 샤워를 마치고 돌아온 소민아는 무표정한 얼굴로 문자 내용을 확인했다.‘이제야 내가 걱정되는 건가? 그동안 수도 없이 문자를 보냈을 때는 줄곧 감감무소식이었다가.’그는 예전과 같이 짧게 몇 글자만 보내왔지만 소민아는 그가 진심으로 자신을 걱정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내가 갈게요.”기성은이 그녀에게 마지막으로 보낸 문자였다.소민아는 바로 핸드폰을 들고 욕설을 퍼부었다.“나쁜 놈, 이제야 올 생각이 들어? 그동안은 대체 뭘 한 건데!”그녀는 거울 속 화장기 없는 자신의 얼굴을 보고는 빠르게 가방에서 화장품을 꺼내 간단히 화장을 했다. 마지막으로 립스틱까지 바르니 웃음이 새어 나왔다. 못 생기진 않았네.그녀가 옷을 갈아입었을 때, 핸드폰이 진동했다.면북의 밤공기는 조금 쌀쌀했기에 그녀는 목도리를 둘렀다.그녀가 문을 나서자 경호원이 막아섰다.“아가씨, 이곳의 밤은 위험합니다. 필요한 게 있으시면 저한테 시키시고 방에만 계십시오. 어디에도 나가면 안 됩니다.”소민아는 눈동자를 한 바퀴 굴리고는 말했다.“그렇군요! 그럼 귤 좀 부탁해도 될까요? 저 귤이 먹고 싶어요.”“알겠습니다.”다른 경호원들도 한 명씩 그녀에게 속아 자리를 비웠다.소민아는 아무도 없는 복도를 뛰어나갔다. 1층 문밖에도 총을 소지한 두 명이 경호하고 있었지만, 그녀가 걸어 나가도 막아서지 않았다.소민아는 핸드폰을 들고 5분도 되지 않은 사이에 기성은이 말했던 강가로 한달음에 뛰어갔다.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어둠이 내려앉은 텅 빈 강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그저 이따금씩 꾸르륵거리는 물고기 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소민아는 다급한 마음에 강에 뛰어들어 그 속에서라도 기성은을 찾아볼 생각을 하고 있었다.그때, 어둠 속에서 남자 한 명이 걸어 나와 그녀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소민아는 화들짝 놀랐다. 휘청이던 몸의 중심을 잡고 살펴보니 눈앞에 건장한
바깥에서 남자들이 우르르 들어와 그들을 둘러쌌다.송시아는 태연한 얼굴로 소민아를 끌어당겨 자신의 등 뒤에 숨겼다. 이어 그의 가슴팍을 힘껏 걷어찼다.“문 대표님, 앞으로는 손 간수 잘하세요. 다음에 또 이런 일이 생기면 그 손이 무사할 수 있을지 저도 장담 못 해요.”송시아는 발을 내려놓고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시간이 늦었네요. 저와 동생은 이만 쉬어야 하니 가볼게요. 식사 계속하세요.”오늘 참석한 손님들은 모두 면북을 관리하는 4대 명문가 가주들이었다. 하지만 처참하게 당하는 문지강을 보고도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했다.그들에게 송시아는 이토록 무시무시한 사람이다.다른 여자들과는 전혀 다르다.문밖까지 걸어갔을 때, 송시아가 걸음을 멈추었다.“언니는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았으니까 너 먼저 돌아가 쉬고 있어. 필요한 거 있으면 경호원한테 얘기하면 돼.”“언니를 위해 나서줘서 정말 기뻤어.”소민아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그녀의 표정을 보니 더더욱 분노가 치밀어올랐다.“권력을 얻기 위해 그동안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예요? 저기 앉아 있는 사람들 좀 봐요. 한눈에 봐도 좋은 사람은 아니잖아요. 왜 저런 나쁜 놈들과 어울려 다니는 거예요?”“지금 갖고 있는 권력과 재산들 다 몸을 팔아서 손에 넣은 거예요? 더럽지도 않아요?”송시아가 웃음을 터뜨렸다.“그러면 안 돼? 예로부터 남자들이 여자를 찾아 쾌락을 누리는 건 지극히 일반적인 일이었어. 남자가 여자들의 젊음과 아름다움을 탐하는데 난 왜 안 돼?”“민아야, 언니도 아무 남자와 접촉하는 게 아니야. 됐어. 이제 이 일은 더는 언급하지 마. 알겠어? 언니... 기분이 안 좋아질 수도 있어.”송시아가 등 뒤 경호원에게 명령했다.“안전하게 데려다줘.”소민아가 말했다.“기성은을 만나게 해준다고 했잖아요.”“며칠 뒤면 만날 수 있을 거야.”소민아는 그녀가 검은색 승용차 안으로 들어가는 걸 지켜보고 있었다. 차 안에 남자 한 명이 있는 것 같았지만 너무 어두운 탓에 얼굴은 제대로 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