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행히 제2중학교는 생각보다 엄격하지 않아 간식을 챙길 수는 있다. 다만 수업 중에는 먹을 수 없다. 백윤서는 이 간식들은 누가 그녀의 자리에 놓았는지 모르기에 누구에게 돌려줘야 하는지도 모른다.백윤서는 반 친구들한테 나눠주든지 기숙사로 챙겨가서 룸메이트 6명이서 나눠먹든지 한다.백윤서는 성격도 좋고 잘 웃는 편이고 성적도 좋다. 새로 전학해 왔지만 예전에 해외에서 배운 지식도 까먹지 않아 지난번 시험에서 반에서 1등, 학년 2등을 했다.다른 친구들이 모르는 부분이 있어 그녀에게 물어보면 백윤서도 참을성 있게 가르쳐 준다.필기 자료도 인색하지 않게 친구들에게 빌려주곤 한다.백윤서는 반에서 인기가 많고 선생님들이 생각하는 좋은 학생이다.야간자율학습이 끝나니 벌써 9시 40분이다.백윤서는 책상 위의 물건을 정리하며 말했다.“청하야, 나 화장실 갈 건데 같이 갈래?”“그래, 같이 가.”엽청하는 다가가 백윤서의 팔짱을 꼈다.야간자율학습이 끝난 시간이라 학교에 사람이 별로 없었다.복도에 센서등이 있어서 누군가가 지나가면 머리 위의 불이 자동으로 켜진다.“윤서야,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응.”백윤서가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복도 저편에서 포니테일 머리를 한 사람을 필두로 몇 명이 걸어왔다. 엽청하는 그녀를 알고 있다. 그녀는 바로 학교의 여두목, 고여경이다. 학교에서 모집한 배구 특기생이고 훤칠한 키 덕분에 현재 전문적인 배구 트레이닝을 받고 있다.그런데 그녀들은 왜 여기로 온 걸까? 엽청하의 기억으로는 운동 특기생들은 몇 과목의 수업을 빼고는 대부분 시간은 트레이닝을 받고 있다. 그녀들이 기세등등하게 걸어오는 것을 보면서 엽청하는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175가 넘는 기럭지를 소유한 고여경은 걸어와 고개를 숙여 엽청하에게 물었다.“난쟁아, 물어볼 거 있는데 백윤서는 어디에 있어?”“난... 난 몰라.”엽청하는 그녀의 포스에 놀랐고 그녀가 백윤서를 찾은 이유가 분명히 좋은 일 때문이아니라고 직감했다.그녀는 백윤서가 어디에
엽청하는 방금 머리를 부딪혀 지금 의식을 잃어서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다.고여경은 사진을 휴대폰 연락처에 있는 사람에게 보내고 만족한 표정으로 자리를 떴다. 엽청하를 힐끔 보고는 혐오스러워하며 옆 사람에게 눈짓을 했다.그 사람은 그녀의 뜻을 깨닫고 곧 찬물 한 대야를 들고 와서 정신을 잃은 엽청하의 몸에 끼얹었다.엽청하는 순간 추위에 정신을 차리고 물에 사레가 들려 기침을 여러 번 했다.고여경은 옷매무새가 단정하지 못한 채 바닥에 앉아있는 두 사람을 내려다보았다. 백윤서는 얼굴마저 긁혀 상처가 나있었다.“백윤서, 너도 우리 탓하지 마. 누군가가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했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했기 때문이야. 뭐 당연히 너의 제일 큰 잘못은 강용에게 꼬리를 친 거지.”“강용은 내 친구가 맘에 둔 남자이니... 네가 만약 다시 강용 그리고 걔 친구들과 친하게 지내면 그땐 내 손에 있는 이 소중한 것들을 실수로 전송을 할 수도 있어.”고여경은 자랑하듯 휴대폰을 흔들었다.방금 모욕을 당하고 속살을 들어낸 사진을 그녀들이 모두 찍었다.만약 이 사진들이 인터넷에 퍼지면 백윤서는 아마 계속 살아갈 용기조차 없을 수 있다.고여경이 사람들을 데리고 걸어가다가 갑자기 문어구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돌아서서 백윤서를 바라보며 말했다.“내 친구가 너에게 전해주래. 장소월을 우리가 어떻게 하지 못하지만 만약 장소월이우리를 화나게 하면 그 화를 모두 너에게 풀 거야... 아무리 아파도 참고 견뎌.”“아 맞다, 경찰에 신고할 생각 하지 마. 혹은 선생님에게 얘기해도... 아무 소용이 없어.”백윤서는 그 악마 같은 얼굴을 바라보며 눈빛이 흔들렸다...소... 소월...제운고등학교 학생인 건가?엽청하는 백윤서를 안고 무서움에 눈물을 흘렸다.“윤서야, 어떡해? 그 사진들을 만약 우리 부모님이 보시게 된다면 내가 학교에서 사고를 쳤다고 생각하고 날 때려죽일 거야.”백윤서는 옷매무새를 정리하고는 그녀를 안고 위로해 주었다.“괜찮아, 괜찮아. 무서워하지 마...
의무실. “다행히 큰 문제는 없고 생리 와서 그런 것 같네. 다른 문제는 없어 보이는데 너희 들 얼굴 상처는...”의무실의 선생님은 한편에 서있는 당직 선생님을 힐끔 보았다.당직 선생님은 일어나서 입을 열었다.“성 선생님, 먼저 돌아가세요. 이 두 학생은 제가 책임 질게요.”“그래요, 도 선생님. 그러면 저 먼저 갈게요. 약은 테이블 위에 놓았으니 갈 때 잊지 말고 가져가.”당직 선생님은 오늘날의 훈도과 주임 인도준이다. 배가 불룩하게 나와있고 안경을 쓴 40대의 중년 남자이다. 겉 보기에 사람은 무던하고 성실해 보인다. 의무실에 올 때도 도준 선생님이 백윤서를 업고 온 터라 등 위치의 옷에는 핏자국이 묻어 있었다.백윤서가 생리하는 첫날이면 확실히 반응이 비교적 크다. 예전에 진통제를 상시 휴대하고 다녔는데 이번엔 진통제가 가방안에 있어 미처 꺼내지 못했다.도준은 계속 백윤서를 바라보았고 그녀는 손에 따뜻한 물이 담긴 컵을 든 채 고개를 숙여 생각에 잠겼다.엽청하의 얼굴은 약을 발라 많이 나아졌고 그녀는 가슴 아파하며 백윤서를 보고 있었다.“윤서야, 괜찮아? 내가 널 제대로 보호하지 못해서 네가 괴롭힘을 당한 거야.”백윤서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네 탓 아니야. 다 내 잘못이야. 나 때문에 너까지 이런 일을 당하고.”도준은 시계를 보더니 그녀들에게 얘기했다.“이제 곧 11시이니 우선 돌아가서 쉬어. 오늘 있었던 일은 내가 내일 너희들 담임 선생님께 말할게.”말을 하면서 그는 백윤서가 휴식하고 있는 침대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선생님이 업어서 기숙사까지 데려다줄게.”백윤서는 손에 들고 있는 컵을 꼭 쥐며 말했다.“선생님, 괜찮아요. 저 많이 좋아졌으니 혼자서도 갈 수 있어요.”도준은 계속 자신의 생각을 밀어붙였다.“안 돼. 선생님이 걱정돼서 그래. 업히는 게 불편하면 선생님이 안아서 데려다줄게.”말을 마친 뒤 그는 백윤서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백윤서의 말투는 순간 차가워졌다.“선생님, 제가 말했죠. 저 혼자서 갈 수 있
침대에 누워있는 강서연이 입을 열었다.“네 물건 쓴 것도 아니잖아.”“왜 이렇게 시끄러워. 자고 있잖아.”누군가가 몸을 뒤척이다가 싸우는 소리에 깨서 한마디를 내뱉고 이불로 머리를 덮었다.“괜찮아, 쓰면 썼지. 청하야, 화내지 마. 다 쓰면 오빠가 다시 사줄 거야.”어두컴컴한 환경이라 백윤서의 표정은 잘 보이지 않지만 그녀의 어투에서 불쾌함은 들리지 않아 그냥 흐지부지 끝나버렸다.그녀들의 인상 속 백윤서는 성격이 매우 좋아 남과 거의 사이가 틀어지지 않는다.백윤서는 서랍 안에서 개봉하지 않은 스킨케어 제품을 청하에게 건네주었다.“네 것도 있어. 이거 선물이야. 화내지 말고.”“받을 수 없어. 너무 비싸.”“쉿, 쟤네들 또 깨겠어.”백윤서는 갈아입을 옷을 들고 욕실로 가서 간단히 샤워를 하고 잠옷으로 갈아입고는 핫팩을 붙이고 자려고 하는데 이불속에 온수 주머니 하나가 더 있는 걸 발견했다.엽청하가 샤워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 백윤서는 이미 잠들었다.이튿날, 백윤서는 생리가 와서 아침 달리기를 하지 않았다.아침 달리기가 끝난 뒤, 엽청하는 잠들어 있는 백윤서의 이마를 만져봤는데 그녀의 온몸이 차가웠다. 그녀는 뭔가 이상함을 감지했다....“윤서야, 괜찮아? 선생님한테 가서 얘기할게.”“괜... 괜찮아. 너무 아파서 그래. 진통제 먹으면 돼.”백윤서는 침대에서 힘겹게 일어났고 침대에 다른 사람이 입었던 자신의 잠옷이 놓여있는 걸 보았다. 그녀는 그 옷을 보고 미간을 찌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진통제를 먹고 그녀는 입을 열었다.“오늘 아침 수업 나 참석하기 어려울 것 같아. 담임 선생님께 말 좀 해줘.”“그럼 아침은? 안 먹을 거야?”“괜찮아. 별로 안 먹고 싶어. 청하야, 만약 네가 없었더라면 나 정말 어떡하면 좋을지 몰랐을 거야.”“괜찮아. 쉬고 있어.”화장실에서, 아침 달리기가 끝나고 돌아온 두 사람이 세수를 하고 양치질을 하고 있었다.“엽청하 그 꼬락서니를 봐봐. 맛있는 걸 좀 줬다 아주 노예노릇을 하고 있어.”
장소월은 바닥에 엎질러진 밥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그는 또 왜 미친 짓을 하고 있는 걸까?“강용,너 뭐 하는 거야?”장소월은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고 말없이 웅크려 바닥에 있는 도시락을 주웠다.제대로 잡기도 전에 강용이 발길질을 하여 손에 있던 도시락이 또 떨어졌다.강용은 한 손으로 장소월의 뒷옷깃을 잡아 그녀를 들어 올려 벽에 내동댕이쳤다. 그녀의 목을 조르려고 했지만 장소월의 그 맑은 눈동자를 보고는 또 그녀의 옷깃을 잡고 벽에 밀어버렸다.“너 밖에서 무슨 헛소리를 했어?”장소월의 등이 창턱에 튀어나온 귀퉁이에 찔려 좀 아파왔다. 물보다 더 차가운 눈빛으로 앞에 서있는 사람을 바라보았다.“너 도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강용의 그 좁고 긴 눈에는 얼음보다 더 차가운 기온이 맴돌고 있었다.“너 때문에 백윤서가 맞아서 지금 병원에 입원했어. 네 언니라며? 장소월, 넌 언니를 그런 식으로 대해? 응?”“내 앞에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니. 할 말 있으면 나한테 해. 뒤에서 꼼수 부리지 말고.”“만약 백윤서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널 가만 두지 않을 거야.”장소월은 그의 손등에 있는 핏줄을 보며 만약 이곳에 보는 눈이 많지 않다면 강용이 정말로 이곳에서 자신을 목 졸라 죽였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장소월은 평점심을 유지했다. 각종 풍파를 겪어 본 그녀이기에, 눈앞에 있는 앳된 강용은 전혀 그녀를 놀라게 할 수 없다.하물며 그녀는 이미 한 번 죽은 사람인데 두 번 죽는 것을 두려워하겠는가? 장소월은 호흡이 가빠왔고 움츠러든 그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강... 강용.... 진정해!”방서연이 입을 열었다.“용아, 됐어. 장소월이 백윤서에게 손을 댈 만큼 바보도 아니고 그렇게 할 이유도 없어.”장소월의 얼굴은 빨개졌고 그녀도 강용 몸에서 풍겨 나오는 무시무시한 포악한 기운을 느꼈다.“강... 강용... 아... 아파! 손... 손 놔!”방서연은 계속 말했다.“됐어, 또 일 크게 만들고 싶어서 그래? 저번에
장소월은 바로 이미주 3인방이 꾸민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번 그녀들과 말다툼을 한 것 말고는 장소월은 도무지 다른 사람이 떠오르지 않는다.여자 화장실. 세 여학생은 화장실에서 화장을 고치고 나비넥타이를 정리하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미주는 흥겨운 노래도 흥얼거렸다.허여빈이 입을 열었다.“오늘 기분 좋아 보이는데.”이미주는 치마를 정리하며 웃으면서 말했다.“나쁘지 않아. 좋다고 할 수 있지.”유진은 계속 대화를 이어갔다.“내가 그룹 톡방에 올린 사진 봤어?”“봤어, 나 완전 맘에 들어. 우리 유진이 계속 파이팅 해.”유진은 입가에 있는 립스틱을 정리하며 말했다.“나 전부터 장소월이 꼴 보기 싫었어. 걔네 오빠가 잘생겨서 봐줬을 뿐, 아니면 저번에 이미 손을 썼지.”이미주는 손을 세면대에 올리고 얘기했다.“그 저번 자선 파티에서 봤던 도도한 남자? 그 사람이 쟤네 오빠였어?”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아빠 말로는 그 남자는 그냥 장해진이 키우고 있는 강아지래. 저번에 누가 큰돈을 들여서 스카우트하려고 했는데 끄덕도 없었고 돈을 줘도 싫다고 해서 여자를 품에 안겨줬거든. 그런데 저녁에 바로 그 여자를 쫓아버렸대. 이렇게 뭘 모르는 남자는 정말 처음 봤어. 그리고 제일 화가 나는 건, 내가 저번에 술대접을 했거든. 나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는 거 있지.”“강아지 한 마리일 뿐인데, 도대체 누구한테 보여주려고 쇼하는 건지. 쳇!”“내가 듣기로는 그 전연우가 장소월 보다 백윤서를 더 신경 쓴대. 어릴 때부터 고아원에서 나온 고아들이고 쓰레기도 함께 주워 먹기도 했대. 그런데 그 사람... 울 아빠는 나한테 그 사람과 가까이 지내지 말라고 주의를 주셨는데 왜 그런지에 대해서는 말해주지 않았어...”허여빈은 또 어깨를 으쓱거렸다.“나 저번에 바에서 그 사람을 봤어. 잘생기긴 했지만 나이가 좀 많아서... 난 아저씨보다 연하가 좋아.”이미주는 갑자기 이 남자에게 관심이 생겼다.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 바로 도전이다. 가질
강남 개인병원.전연우는 학교의 전화를 받고 백윤서가 병원에 입원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미팅은 절반 밖에 진행이 되지 않았지만 후반부의 미팅은 기성은에게 맡기고 황급히 병원으로 향했다.백윤서는 영양액 링거를 맞고 있었고 얼굴이 창백해진 채 병상에 누워 있었다. 전연우를 본 그녀는 마치 잘못을 한 어린 소녀 같이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하였고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오... 오빠... 죄송해요. 또 폐를 끼쳤네요.”전연우는 백윤서 얼굴의 상처를 보고 깊은 눈동자에 쉽게 알아채지 못할 냉기가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의사는 뭐래?”“별일 아니에요, 그냥 가벼운 찰과상이에요. 생리가 와서 몸이 좀 불편할 뿐이지. 의사 선생님이 따뜻한 물을 많이 마시면 좋아질 거라고 했어요.” 그때 한 삼십 대 중반의 중년 여성이 들어왔고 약물 리스트를 손에 들고 있었다.“백윤서 학생 오빠 맞으시죠?”전연우는 그녀를 알고 있다. 입학한 날 그녀를 본 적이 있다.“네.”“백윤서 학생 오빠 분, 따라오세요. 할 말이 있어요.”병실 밖, 신정음은 어제저녁 발생 한 일에 대하여 전연우에게 모두 얘기해줬고 양측의 학부모와 협의할 것이라고 얘기했다. 그리고 이 일은 이 학교 학생뿐만 아니라 제운고등학교 학생들과도 연루되어 있다고 얘기했다.신정음은 그에게 예전에도 이런 일이 발생한 적 있지만 일부 압력에 못 이겨 결국 흐지부지 끝났다고 얘기했다...그 이유는 다들 성인이니 잘 알고 있다.일을 크게 만들면 더 복잡해지고 걷잡을 수 없게 된다.전연우의 눈빛은 차가워졌다.“그러니 선생님 뜻은 이 일을 덮어버리고 싶다는 거죠? 이게 선생님으로서 보여줘야할 태도인가요?”신정음은 담담하게 얘기했다.“상대방 학부모와 얘기를 나눠 봤는데 그 비용이 얼마든 모두 책임지고 감당하겠대요. 그리고 고여경 학생도 진심으로 백윤서 학생에게 사과를 했어요. 만약 이 해결방법이 마음에 안 든다면 학교로 돌아가셔서 다시 함께 의논을 해봐도 좋아요.”전연우는 손목에 찬 시계를 보며
조용한 병실, 주머니 속 휴대폰이 진동하며 울렸다. 전연우는 무음모드를 클릭했고 확인해 보니 장해진한테서 걸려온 전화였다. 전연우는 병실을 걸어 나가 전화를 받았다.“아버지...”“소월이가 학교에서 사고를 쳤다고 하는데 가서 무슨 일인지 확인해 봐.”장해진의 말투는 좀 화난 것 같았다.“소월이요? 네... 알겠습니다.”전연우의 말투는 온화한 편이지만 안색은 굳어 있었다.장해진은 전화를 끊었고 지금 백윤서가 병원에 있어서 그는 떠날 수 없다.전연우는 기성은에게 전화를 걸었고 상대방은 빠르게 전화를 받았다.“대표님.”“회사 일은 언제쯤 끝나요?”기성은:“미팅이 방금 끝났어요.”전연우:“지금 바로 제운고등학교로 가주세요.”기성은:“소월 아가씨가 또 사고를 친 거예요?”전연우:“해결을 다 하시면 데리고 아파트로 와주세요.”기성은:“네, 대표님!”소월 아가씨가 사고를 친 것도 하루 이틀이 아니다.그러나 장소월은 이번에 너무 도가 지나쳤다. 하필 이때 학교에서 사고를 쳤고 심지어 상대방 3명은 기업 오너의 아가씨이고 아직 세 건의 계약에 사인을 하지 않은 상태라 이제 계약은 가망이 없는 일이다.저번에 치마 한벌 때문에 방 씨 그룹 아가씨와 싸워 수십억 원에 달하는 계약이 물 건너갔다. 장소월은 언제면 셈이 들어 회장님, 대표님의 걱정을 덜어 드릴 수 있을까?장소월이 사고를 칠 때마다 뒷 처리는 대표님의 몫이니 말이다.기성은은 제운고등학교에 도착했고 익숙하게 교장실 옆에 있는 회의실로 찾아갔다.회의실은 투명 유리문이라 안쪽 상황이 보이는데 방음이 잘 돼서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기성은은 들리지 않았다.들어오자마자 이렇게 강렬한 장면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장소월은 이미 회의 테이블에 올라가 한 여학생의 머리카락을 덥석 잡았다.이 장면을 목격한 기성은은 바로 한숨을 내뱉었다대표님은 술을 얼마나 마셔야 회장님의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을까?만약 회장님이 직접 나선다면 장소월은 반 죽은 목숨일 것이다.그때 엘리베이터에서
죽 한 그릇을 먹여주는데 무려 20분이나 걸렸다.소민아는 그에게 수면 촉진 성분이 들어있는 약을 가져다주었다. 신이랑이 침대에 누워 그녀의 손을 잡았다.“나랑 같이 있어 줘요. 안 가면 안 돼요?”소민아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알겠어요. 뭐든 이랑 씨가 몸을 다 회복한 다음 얘기해요.”옆에 앉아 신이랑이 잠드는 것을 지켜보던 중 핸드폰에 배터리가 없다는 것을 알아챈 그녀는 천천히 손을 빼냈다. 하지만 신이랑은 그녀의 움직임을 느끼기라도 했는지 불안한 얼굴로 다시 눈을 떴다. 소민아는 환자를 보살피는 게 이렇게까지 어려운 일인지는 정말 몰랐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침대에 엎드려 잠시 잠을 청했다.창밖에서 부슬부슬 내리던 비가 드디어 그쳤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돌연 불어온 차가운 바람에 그녀가 어깨를 움츠렸다.그때, 그녀의 귀에 미세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눈을 뜬 순간, 어둠 속에서 그림자 하나가 휙 지나갔다.“기성은 씨, 당신이에요?”대답이 들려오지 않자 소민아는 자신을 잡고 있던 신이랑의 손을 풀고는 바로 일어나 남자를 쫓아갔다. 그녀가 뒤에서 그를 끌어안은 순간 복도의 센서 등이 환하게 어둠을 밝혔다. 바깥 희미한 가로등 아래에선 차가운 바람이 불고 있었다.“제가 문자 그렇게 많이 보냈는데 왜 답장 안 했어요?”“이거 놔요.”“설명해주기 전엔 놓지 않을 거예요.”작게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에 기성은은 소민아의 손을 잡고 바로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소민아는 벽을 더듬어 조명을 켜려다 말했다.“따라와요.”이후 그녀는 옆쪽 간병인 방으로 그를 데려갔다. 그의 손가락을 만져보니 얼음처럼 차가웠다.“잠시만 기다려요. 제가 뜨거운 물 가져올게요.”소민아는 따뜻한 물을 가져온 뒤 그가 손으로 감싸게 하고는 그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갰다.“조금만 기다려요. 곧 따뜻해질 거예요.”두 사람은 함께 침대에 앉아 서로를 바라보았다. 눈앞에 분명 기성은이 살아 숨 쉬고 있었지만, 자신과 그사이에 커다란 벽이 있다는 느낌을
하지만 기성은은 못 본 척 시선을 피해버렸다.문이 닫힌 지 얼마 되지 않아 거의 숨이 끊어진 것 같은 사람이 병실에서 던져져 벽에 강하게 부딪혔다. 그 충격에 피를 한 움큼 토해냈다.소민아는 너무 놀라 들고 있던 음식까지 바닥에 떨어뜨렸다.“형님, 바깥에 사람이 있습니다.”“이런 우연이 있나. 오늘 아침 만났던 여자잖아.”소민아는 그들이 다가오자 빠르게 반응하며 말했다.“일부러 들으려고 한 건 아니에요. 그냥 지나가던 중이었어요.”적잖은 시선이 그녀의 몸을 아래위로 훑고 지나갔다. 그중 한 명이 말했다.“작두, 이 여자 누군지 알아?”작두라고 불리는 남자가 아래턱을 문지르며 걸어 나오고 있는 남자를 보며 말했다.“형님, 이년 어떻게 처리할까요? 대체 얼마나 들었는지 모르겠네요.”기성은은 검은색 가죽 신발을 신고 무거운 발걸음을 내디뎠다.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낯선 그의 모습에 소민아는 돌연 덜컥 겁이 났다.그녀는 어찌할 바를 몰라 자리에 굳어버렸다. 기성은은 소민아 앞에 걸어와 손가락으로 땅에 떨어진 음식 주머니를 줍고는 그녀에게 건네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입 간수 잘해요. 얼마를 들었든, 얼마를 보았든 한 글자라도 발설하면 그 후과 스스로 책임져야 할 거예요.”소민아는 머리를 푹 숙이고 다급히 대답했다.“네... 알겠어요.”기성은이 말했다.“너희 둘은 이곳에서 잘 지키고 있어.”“네, 형님.”“왜 계속 서 있어요? 안 가요?”소민아에게 하는 말이었다.소민아는 머리도 돌리지 않고 한 방향으로만 뛰어갔다. 얼마 후 병실에서 한 명이 더 나왔다.서철용이 담배 한 대를 손가락에 낀 채 말했다.“손이 너무 거치네요. 목숨이 간당간당해요. 죽이더라도 내 병원에서 죽이면 안 되죠.”소민아는 병실에 돌아와서도 얼이 빠진 채 멍하니 앉아있었다. 침대 쪽에서 인기척이 들려와서야 정신을 차리고 다가가 상황을 살폈다.신이랑은 언제 깨어났는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움직이지 말아요. 바늘이 빠지면 안 돼요.”새벽 12시, 복도의
간호사가 이마를 찌푸리며 말했다.“남자친구분 잘 지켜보셨어야죠. 링거액이 다 떨어졌잖아요. 지금 병원이 너무 바빠서 저희 간호사들도 병실 하나하나 다 신경 쓸 수는 없어요.”소민아가 미안함에 말했다.“서류를 가지러 회사에 다녀왔어요. 그런데... 저 이분 여자친구 아니고 비서예요.”간호사가 말했다.“환자분이 의식을 잃은 상태로 계속 가족분의 이름을 부르고 계세요. 얼른 가보세요. 환자분을 혼자 오래 두면 안 돼요.”소민아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네, 알겠어요.”소민아가 병실에 들어가 보니 신이랑은 눈을 뜨고 누워있었다. 그녀가 다급히 들고 있던 물건을 내려놓고 다가갔다.“이랑 씨, 깼어요? 몸은 좀 괜찮아졌어요?”신이랑은 흐릿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손을 뻗자 소민아는 얼른 그의 손을 잡아 이불 속에 넣어주었다.“푹 쉬어요. 제가 옆에 있으니까 불편한 게 있으면 부르고요.”“가, 가지 말아요.”그는 꽉 잡은 손을 좀처럼 놓지 않았다.“이랑 씨, 저 아직 처리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았어요. 내일 보내줘야 해요.”신이랑이 머물고 있는 곳은 VIP 병실이라 주방에 모든 시설들이 구비되어 있었다. 그녀는 전화로 죽 두 그릇을 주문한 뒤... 일에 열중하기 시작했다.저녁 10시, 신이랑의 체온은 많이 안정되었다. 본래 몸이 좋지 않긴 했지만, 이렇게 하룻밤 사이에 정신을 잃고 쓰러지기까지 하다니.소민아는 견딜 수 없을 정도의 배고픔이 느껴지고 나서야 자신이 아직 죽을 받아오지 않았다는 것이 떠올랐다.지금 시간엔 병원에도 사람이 별로 없을 것이다. VIP 병동은 무서울 정도로 으스스하고 고요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 보니 프런트에 놓은 음식은 이미 차갑게 식어 있었다.음식을 들고 다시 위로 올라가려고 엘리베이터 쪽으로 가던 중, 왼쪽 코너 쪽 병실에서 익숙한 사람의 모습이 그녀의 시선을 끌었다.기성은이 왜 여기에?소민아는 다시 핸드폰을 꺼내 확인했다. 병원에 왔으면서 왜 그녀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았단 말인가.
신이랑은 아무런 예고도 없이 그녀의 몸 위에 쓰러지고 말았다. 소민아는 몸을 뒤로 젖히며 그를 껴안았다. 그의 정상적이지 않은 체온을 느낀 그녀가 다급히 그의 이름을 불렀다.“신이랑 씨!”그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으니 소민아는 잠시 그를 부축해 소파에 눕힐 수밖에 없었다.“열이 왜 이렇게 나는 거예요?”소민아가 핸드폰을 켜고 구급차를 부르려 한 순간, 그 뜨거운 손이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생명줄이라도 되는 듯 힘껏 움켜쥐고 놓지 않았다.소민아는 통화를 마친 뒤 손을 뻗어 그의 이마에 가져갔다.“구급차가 곧 올 거예요. 조금만 참아요.”소민아는 착잡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조금 전 금방 들어왔을 때 그가 했던 말을 그녀는 모두 똑똑히 들었었다.자신을 좋아해 달라던 그 말까지도...소민아는 신이랑이 자신과 같은 사람을 좋아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신이랑처럼 좋은 사람은 응당 예쁘고 부드럽고 현숙한 주가은 같은 부잣집 아가씨와 어울린다고 생각했었다. 기성은에게 들은 바로는 신이랑의 신분도 실은 그리 간단하지만은 않다. 그의 가족들 또한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신이랑은 구급차에 앉아 함께 병원으로 들어갔다.신이랑은 열이 39도, 아니 40도까지 치솟아 올랐다.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결과가 어땠을지 상상도 하기 힘들었다.신이랑은 해열제 주사를 맞은 뒤 이어 링거를 꽂고 침대에서 깊이 잠들어 있었다. 그녀는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 옆에서 노트북으로 일을 하기 시작했다.소민아는 그렇게 하루종일 병원에서 그를 보살폈다. 저녁 여섯 시가 되니 배가 고파와 병원 슈퍼마켓으로 향했다. 그때, 여자보다 더 여자같이 생긴 하얀색 옷차림의 남자가 마스크를 하고 그녀의 옆으로 스쳐 지나갔다.소민아는 의아함에 천천히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그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어디에선가 본 것처럼 익숙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하지만 지금 바로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다.그녀는 내려갔던 김에 서류를 가지러 다시 회사에 돌아갔다. 신이랑이
소민아는 기성은의 팔짱을 끼고 친밀하게 손을 잡고는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갔다.“오늘 어디에 가는 거예요? 언제 돌아와요? 퇴근할 때 저 픽업할 수 있어요?”기성은이 대답했다.“상황 봐서요. 매일 오늘처럼 한가한 건 아니거든요.”소민아가 불만이 가득 섞인 표정으로 말했다.“기성은 씨 이젠 회사에도 안 나가잖아요. 대체 뭐 하느라 그렇게 바쁜 거예요? 어제 저랑 사귀어보겠다고 했잖아요. 그럼 절 첫 순위에 올려놓아야 하는 거 아닌가요? 아니면 솔직히 말해봐요. 뭘 하러 가는 건지!”그가 하는 일은 대부분 사람들에게 알려져서는 안 되는 것이다. 하여 당연히 그녀에게 알려줄 수 없었다.대표님이 의식불명으로 누워계시니 그 또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송시아는 회사를 통째로 집어삼키려 움직이기 시작했다. 때문에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눈앞의 일을 최대한 빨리 처리하는 것이다.그에게 있어 소민아는 부담이고 약점일 뿐이다. 어떤 말은 솔직히 말할 수 없으니 그저 그녀의 열정이 자연적으로 꺼져갈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민아 씨 앞가림이나 잘해요.”기성은이 결국 뱉어낸 말은 그 한 마디였다.지금은 출근 시간이라 차가 꽤 막혔다. 소민아는 선명히 뾰로통해진 얼굴로 손에 요구르트를 들고 앉아있었다.이번 생에 기성은이 그녀를 달래주는 날이 오긴 할까.그들은 출근 시간 10분을 남겨두고 성세 그룹 맞은편에 도착했다. 회사에 뛰어 들어간다면 3분이면 충분히 출근 도장을 찍을 수 있다.“아직도 뭘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기성은이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린 순간, 소민아가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 그의 입가에 키스했다.“일 끝나면 전화해요. 성은 씨가 절 데리러 오든, 제가 성은 씨한테 가든 같이 있어요, 우리.”기성은은 그 키스에 깜짝 놀라 자리에서 굳어버렸다.소민아는 안전벨트를 풀고 바람을 맞받아 몸을 움츠리고 회사 안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시간 맞춰 도착해 지각은 하지 않았다.소민아가 뒤돌아보니 기성은은 아직 그 자리에
침대에서 뒹구는 법이라곤 없는 기성은은 그녀가 계속 잠을 청하려 하자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소민아가 단번에 그를 끌어당겨 침대에 눕혔다.“아직 여섯 시밖에 안 됐단 말이에요. 출근 시간까지 한 시간이 넘게 남았어요. 조금 더 자요.”“소민아 씨!”기성은은 이렇게까지 머리 아프게 만드는 사람은 종래로 만나본 적이 없다. 소민아가 강제로 기성은의 팔을 끌어당겨 팔베개를 시켰다.기성은의 차가운 목소리가 내려앉았다.“남녀가 유별하다는 말 몰라요? 소민아 씨, 선 지켜요.”소민아는 눈을 감고 태연하게 그의 말을 받아쳤다.“이봐요, 아저씨. 지금이 조선 시대인 줄 알아요? 어떻게 그렇게 보수적일 수가 있어요? 여자친구 사겨본 적 있기는 해요?”기성은은 도저히 팔을 빼낼 수가 없었다.“내가 못해본 것 같아요?”소민아가 몸을 돌려 그와 눈을 맞추었다.“그 주가은 씨랑은 어떤 사이에요? 정장은 왜 벗어준 거예요? 추워 보여서 그랬어요?”소민아가 손가락으로 총 모양을 만들어 그의 이마에 가져갔다.“얼른 솔직히 말해봐요. 주가은 씨랑 대체 무슨 관계인 거예요? 어젯밤... 기성은 씨 만나러 집에 왔었어요. 제가 우리 두 사람이 사귀기로 했다니까 얼굴이 확 어두워져서 돌아갔고요.”소민아는 자세히 그의 얼굴 표정을 살폈다. 더 캐묻지도, 화를 내지도 않는 것이 별다른 느낌이 없는 듯했다.그가 말하려 하지 않자 소민아가 말을 이어갔다.“연애할 줄 모르겠으면 제가 가르쳐줄게요. 가장 중요한 건 성실해야 한다는 거예요. 빨리 얘기해요.”기성은이 은하수를 담은 듯 반짝거리는 그녀의 눈동자를 피하며 말했다.“주가은은 서울시 시장 딸이에요. 얼마 전 주지웅이 주가은을 대표님에게 소개해주려고 저녁 식사 자리를 만들었는데 대표님이 못 가게 되셔서 내가 대신 갔었어요.”“그날 엘리베이터에서 주가은의 뇌전증이 발작했고, 내가 마침 거기에 있어서 도와줬었죠.”너무 조용하다는 생각에 내려다보니 소민아는 어느새 또다시 잠들어 있었다.기성은이 천천히 팔을 빼내고 침대에
“제 아빠는 데릴사위였어요. 부모님 두 분 모두 과학자여서 매일 연구원에서만 지냈어요. 그래서 전 태어나자마자 고모 댁에 보내졌죠. 엄마아빠의 유전자를 이어받아서인지 별로 노력을 들이지 않고도 서울대에 입학했어요...”소민아의 말이 채 끝나지 않았을 때 옆에 놓아두었던 핸드폰이 진동했다. 신이랑이 걸어온 전화였다.“이랑 씨도 오겠다고 했던 걸 깜빡했어요. 잠깐만 기다려요. 전화 받고 올게요.”기성은이 깊은 눈동자로 아직 그녀의 온기가 남아있는 의자를 바라보았다. 그의 과거는...암흑 그 자체이다.그는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몰랐다. 그가 살았던 곳은 음산하고 차디찬 지하실이었다. 그곳에선... 명령에 따라 앞뒤 가리지 않고 손에 칼을 들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그야말로 나라의 관리가 손닿지 않는 혼란의 세상이었다.누군가 그랬다. 어머니는 기생이고, 아버지는... 마약범이라고. 하여 그는 태어난 뒤 바로 버려졌고, 그래서 이름도 없는 거라고...그의 머릿속 첫 기억은 음습하기 그지없는 시궁창이었다.그때의 참담한 경험이 지금 그의 모습을 만들었다. 모든 사람들이 그를 아무 감정 없는 기계 같다고 입을 모아 말한다...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은 그와는 전혀 상관없는 것이었다.그의 인생을 바꿔준 한 사람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말이다.바로 전연우다!당시 기성은은 변경에서 마약 거래를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전연우를 만났고, 그가 다치고 베이고 수많은 죽을 고비를 넘기며 기성은을 변경 시궁창에서 빼냈다.전연우가 말했다.“나한테 목숨 빚졌으니까 앞으로 나 따라다녀.”“네.”“지금 이름은 너한테 어울리지 않아. 앞으로는 기성은이라고 바꿔.”“네.”...소민아는 신이랑과 함께 설영우를 만나 일정을 조율하고 계약서까지 작성했다.일을 끝내고 나니 날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차갑게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소민아가 신이랑을 아파트 아래까지 배웅한 뒤 걸음을 멈추었다.“왜요?”신이랑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소민아는 숨기지 않고 말했다.
“현실에 부합되지도 않는 쓸데없는 상상하지 말아요. 소민아 씨한테 어울리는 사람은 신이랑이에요. 가서 일이나 열심히 해요, 내 체면 떨어뜨리지 말고.”결과야 어찌 됐든 소민아는 기성은이 키워온 사람이다.소민아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정말 저한테 하고 싶은 말 없어요? 마지막으로 물을게요. 정말 없어요?”“저에 대한 이랑 씨 마음 저도 알고 있어요. 하지만... 난...”“기성은 씨를 좋아한단 말이에요!”문밖에 서 있던 설영우가 호기심이 가득 담긴 표정으로 들어왔다.“어머나, 형한테도 드디어 봄이 왔네요. 여자한테 고백을 다 받다니요!”소민아는 얼마나 어렵게 용기를 내어 그 말을 내뱉었는지 모른다. 한 달 내내 찾아다녔던 소설 작가가 지금 이 순간 기성은에게 형이라고 부르며 나타날 줄이야.“꺼져.”설영우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소민아 씨, 전 이만 갈게요. 형과 얘기 끝나면 문자 주세요. 바로 올라올게요.”소민아는 솔직하고 좋고 싫음이 분명한 사람이다. 실은 그녀 또한 알지 못했다. 대체 왜 하필이면 성격도 나쁜 그 사람에게 마음을 빼앗기게 되었는지 말이다.얼굴이 조금 반반한 것 외엔 별다른 장점도 없다.“제가 방금 했던 말 들었어요?”기성은이 말했다.“소민아 씨 같은 귀찮은 사람이랑 사귀어서 나한테 좋은 게 뭔데요? 아까 내가 했던 말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모양이네요.”기성은이 와인 냉장고로 걸어가 와인을 한 병 꺼냈다. 그를 따라 소민아의 시선도 옮겨졌다.소민아가 그의 뒤를 쫓아가며 말했다.“하지만 좋아하는 사람한테 진심을 고백해야 맞는 거 아닌가요? 저도 제가 충동적이라는 거 알아요. 하지만 저에게도 눈이 있고 생각이라는 게 있어요. 나더러 신이랑에게 붙어있으라는 거 날 보호하기 위해 한 말이라는 게 느껴진다고요. 기성은 씨도 날 좋아하잖아요. 그런데 왜 자꾸 절 밀어내려고만 해요? 정말 이해가 안 돼요.”기성은이 말했다.“정말 황당한 생각이네요. 이용가치가 떨어진 물건을 더 남겨서 뭘 하겠어요?”기성은이 고개를
기성은이 다급히 셔츠를 몸에 걸쳤다.“누가 마음대로 들어오라고 했어요! 나가요!”소민아는 순간 하려던 말까지 잊어버렸다. 그녀는 겁에 질린 얼굴로 문밖으로 나와 손으로 가슴을 짓누르며 크게 심호흡했다. 머릿속에 기성은의 몸에 덕지덕지 새겨진 흉터들이 떠올랐다.기성은은 대표님의 비서가 아니었던가?비서에게 어떻게 저렇게 많은 상처가 생길 수가 있지?또한 모두 칼에 찔린 자상이었다. 지금 이 시대에 누가 칼을 휘두르고 다닌단 말인가.대체... 그는 무슨 일을 겪었던 걸까.기성은은 욕실에서 거울로 자신을 비추어 보았다. 오래전부터 지금까지 일어났던 모든 일이 머릿속에 생생하게 떠올랐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 눈 깜빡할 사이에 10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어떤 일은 뇌 속에 박혀버린 것처럼 한번 또 한 번 반복적으로 재생되어 그로 하여금 끊임없이 떠올리게 만들었다.기성은이 깨끗한 잠옷으로 갈아입고 욕실에서 나왔다. 아직 집에 남아있는 소민아를 향해 그가 차갑게 입을 열었다.“언제까지 있을 생각이에요?”소민아가 주방에서 젓가락 두 쌍을 가져오며 아무 일도 없었던 듯 태연한 표정으로 말했다.“식자재는 기성은 씨가 사긴 했지만 음식을 만든 건 저예요. 기성은 씨를 기다리느라 저도 한 입도 못 먹었어요. 아무리 그래도... 손님한테 밥은 먹이고 보내야 하지 않겠어요? 그리고 기성은 씨를 만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회사 일 때문에 이곳에 온 거예요. 마침 같은 아파트에 제가 맡은 소설 작가님이 살고 계시거든요. 그분이 집에 돌아오시면 드라마 제작 세부 사항에 관해 상의해야 해요.”“가서 침대 옆에 있는 핸드폰 가져와요.”소민아는 말없이 그의 말대로 핸드폰을 가져다주었다. 그녀의 시선이 기성은의 헐렁한 옷소매 안으로 드러난 상처에 닿았다. 그녀는 깜짝 놀랐다. 왜 지금까지 한 번도 그의 손목에 이토록 깊은 흉터가 있다는 걸 알지 못했단 말인가.“...지금 이쪽으로 와.”그 한마디 말을 끝으로 기성은은 전화를 끊었다.“설영우 곧 올 거예요.”소민아의 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