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고 그걸 본 장소월은 정신이 번쩍 들어 그를 밀쳐냈다. "이제 그만 해요!" 그녀는 마음이 몹시도 심란했다. 전연우가 다시 자세를 고쳐 앉았고 그녀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이젠 오빠도 거부하는 거야?”장소월은 호흡을 가다듬고 그녀의 까만 짧은 치마를 꽉 부여잡으며 말했다. “제가 전에 말했듯이 오빠는 그냥 오빠일 뿐이에요. 앞으로 다시는... 이런 이상한 짓 하지 마세요. 만약 윤서 언니가 알게 된다면 언니가 분명 많이 속상해할 거예요.”‘양다리를 걸치려고 하다니. 전연우, 전생에 내가 집에서 네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때도 다른 여자랑 차 안에서 이딴 짓을 하고 있었던 거야?’장소월은 이미 그에게 일말의 감정도 남아있지 않았다.그는 백윤서를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사랑하지 않았다. 송시아를 놓고 봐도 그랬다. 그녀에겐 백윤서와 비슷한 면이 많았지만, 전연우는 그녀를 단지 아이를 만드는 수단으로만 여겼었다.한때 그를 온 마음으로 사랑했던 그녀였지만 마지막엔 결국 그에게 비참하게 버려지고 말았다.그녀는 너무나 두려웠다.전연우는 싸늘하게 식어버린 눈빛으로 말했다. "철 들었네, 우리 소월이. 미안해. 오빠 때문에 많이 당황했지? 저번 일도 그렇고 다 사과할게.”"괜찮아요... 이미 다 잊어버렸어요!" “그래... 아무 일도 없었던 거로 하자." 전연우가 차 문을 열자마자 장소월은 황급히 도망쳐 나왔다.장소월은 현관문으로 들어서자마자 마침 보라색 비단 잠옷을 입고 계단에서 내려오는 강만옥과 마주쳤다. “소월아, 이제 온 거니? 너희 아빠는 저녁에 회식이 있어서 조금 늦게 온다던데. 일단 우리끼리 먼저 밥을 먹자.”장소월은 입맛이 하나도 없었기에 음식 생각이 날 리가 없었다.강만옥을 마주쳤을 때도 장소월의 머릿속에는 온통 오늘 하루 동안 그녀와 전연우가 차 안에서 함께 했던 장면들뿐이었다.속이 울렁거리고 토하고 싶은 충동까지 느껴질 정도로 거부감이 들었다.장소월이 안 먹겠다고 말
“넌 장소월이 이미 다 알고 있을 거라는 생각은 안 들어? 전연우, 모든 걸 다 신중히 여기는 네 성격대로면 장소월이 우리 일을 알게 만들고 싶진 않겠지. 아니면 설마 지금 저 여자한테 손을 못 대겠다는 건 아니겠지? 내가 도와주기라도 해야 하려나? ”강만옥은 요염하게 붉고 매혹적인 입을 살짝 내밀고 손을 턱에 받치며 눈웃음을 짓고 말했다. “자기야, 너도 알겠지만, 나는 연적에 대해서는 한 번도 봐준 적이 없어."“만약 그녀가 정말 강영수와 사귀고 결혼까지 한다면... 안그래도 장가네한테 못살 정도로 잡혀 사는데 강가네까지 합류하면 너 정말 감당할 수 있겠어?"전연우는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티슈로 입을 닦았다. “내 일이야. 네가 이래라저래라 할 일이 아니라고. 신발이나 똑바로 신어.”강만옥은 민망하단듯이 웃으며 그의 종아리에 올려놓고 있던 발을 옮겼다.전연우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아까 몰고 온 아우디차를 다시 끌고 장가네 주차장을 빠져 나왔다....장소월은 8시도 채 안 돼서 잠에 들었다.강영수와는 다시 연락하지 않았고 그녀도 딱히 상관하지 않았다. 오늘 마주쳤던 그 사람은 강영수가 아니였을 테니까 말이다.만약 진짜 강영수 였다면 그녀의 문자에 답장을 안 했을 리가 없었다.까만 외투는 이미 아줌마가 깨끗이 씻어놓고 그녀의 방 베란다에서 말리고 있었다.아줌마는 교복도 다시 단추를 달아놓고 그녀의 침대 머리맡에 고이 두었다. 그녀는 밤새 제대로 자지도 못했고 그저 끊임없이 악몽만 꿀 뿐이었다.그녀는 꿈에서 자신의 화를 풀기 위해 장소월을 방에 가둬두고 있는 전연우를 보았다.장소월은 손발아 쇠사슬로 꽁꽁 감긴 채 침대의 머리맡에 묶여있었다.그의 눈빛은 그가 봐도 공격적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소월아, 너는 내 와이프잖아. 근데 네가 어떻게 다른 남자를 좋아해...”시계를 보니 겨우 6시였다.바로 샤워하고 책도 보다가 7시 반이 되어서 학교로 출발했다.그 뒤로 거의 일주일 동안은 그나마 평화로웠다. 적어도 전연우는 마주치지 않았으니
그녀가 잘못 보지 않았다면 이 사람들은 분명 방서연, 허철, 그리고...강용이다!장소월은 자기 자가용 바로 옆에 서서, 맞은 편에서 그녀를 향해 걸어오는 사람들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들이 맞았다.장소월은 깜짝 놀랐다. ‘백윤서가 언제부터 강용과 어울려 다닌거지?’두 사람의 사이는 매우 좋아 보였다.장소월은 상상하기도 싫었다.백윤서는 전연우를 좋아했었는데?전연우는 그녀가 강용과 노는 걸 알기나 할까?하지만... 백윤서가 누구랑 놀던 장소월과는 큰 상관이 없어 보였다. 장소월 그들의 일이라면 알고 싶지도 않았고 털끝 하나 엮이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다시 고개를 돌리며 차에 올라타려 할 때 강용 팔에 새겨져 있는 문신이 눈에띄었다.분명 전생에 본 것 같이 익숙한 문신이었다.너무나도 익숙했지만 더 이상 아무리 노력해봐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이때 허철은 맞은 켠 승용차 옆에 멍하니 서 있는 장소월을 향해 소리쳤다. “강용아, 저기 서 있는 사람 장소월 아니야? 쟤 지금 널 보는 거 같은데? 내가 보니까 장소월 쟤 무조건 너한테 관심 있어.”“봐. 저런 원망스럽고 짜증에 찬 눈빛을 하고 있잖아. 분명 또 질투가 났지. 뭐.”강용이 무심하게 그쪽을 바라보았을 때 장소월은 이미 차 안에 들어간 뒤였다.백윤서 역시 그 검은 승용차는 장가네가 전문 장소월을 마중하기 위해 마련한 차라는걸 알고있었다. 두 학교는 그저 거리 하나만 사이에 두고 있었는데 차이는 하늘과 땅의 차이라고 할정도이었다. “소월이? 너희 소월이를 알아?” 백윤서는 아주 단아했다. 그뿐만 아니라 청순하고 아름다웠다. 인간 세상의 때가 묻지 않은 선녀 같은 그녀는 긴 머리를 땋아 한쪽에 걸치고 있었고 하얀 드레스를 입고 강용의 옆에 우아하게 서 있었다. 허철은 눈썹을 찌푸리며 백윤서를 바라봤다. “누님도 장소월을 알아?”백윤서는 고개를 끄덕이었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소월이랑 함께 어린 시절을 보냈어. 근데 좀 지나서 내가 많이 아픈 바람에 해외에 나가서 치
그... 그... 이제 생각해 보니 전연우의 강박에 못 이겨 투신한 그 사람이 바로 강용이었다! 그의 손에 새겨진 문신 때문에 그녀는 알아볼 수 있었다.강용이 강 씨 그룹을 관리하고 있을 때 한번 큰 교통사고가 났었는데 그때 절벽에서 추락하고 모든 사람이 생존자는 한 명도 없다고 여기고 있었다. 강용 역시 그 교통사고로 사망한 줄 알았었다. 그 뒤로 강가네는 여자로 바꿔 회사를 관리시켰지만 피크타임은 그리 길지 못했다.강용이 사고를 당한 지 2년 뒤 강가네에서는 큰 폭발이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 강가네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 후 강 씨 그룹은 베일에 싸인 의문의 사람에게 인수당했다. 그 사람의 이름이 뭐였는지 장소월은 가물가물해 기억해 내지 못했다.그 사람은 정말 신비스러웠다. 단 한 번도 진짜 얼굴을 보여준 적이 없었고 전연우는 그가 얼굴의 화상흉터로 항상 가면을 쓰고 다닌다고 했었다.그때 장소월이 유일하게 기억한 것이 바로 그의 손에 있던 문신이었다. 성격도 난폭해 그의 눈에 든 여자는 모두 그와 밤을 보내고 절반 죽어서 나왔었다.그 문신은 강용의 몸에 있던 문신과 완전히 일치했다.이제 보니 그 사람은 강용이었다.하지만 만약 강용이 그때 사고로 죽지 않았다고 해도 그가 강 씨 그룹을 인수할 만큼 많은 자금이 어디에서 났을까?큰 의문이었다.장소월은 또 이 새로운 의문점을 생각해 보았다.강가네는 서울시 경제의 핵심을 틀어쥐고 있었다. 전연우는 어떻게 흔적 하나 남기지 않고 그런 강가네를 집어삼켰을까?장소월은 그 시절 기억의 퍼즐을 곰곰이 맞춰보았다. 전연우가 장가네를 통제하고 반년도 채 걸리지 않은 사이에 강 씨 그룹의 새로운 대표, 다시 말해 사고 이후 정체를 숨기고 지낸 강용과 손을 잡는 데 성공했다.그 시절 전연우는 장 씨 그룹의 거액을 빼앗았다. 당시 모든 주주가 불만을 가지고 떠나려 했었는데 그 이유는 회사가 체결한 모든 계약이 그룹 경제에 구멍을 내고 자칫 소홀히 하면 언제든지 장 씨 그룹
장소월이 무용 학원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니 이미 저녁 9시였다. 차에서 내렸을 때 그녀는 다리가 부러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절뚝이며 걸어오자 아줌마가 얼른 와 자초지종을 물었다. “아이고, 어쩌다 이렇게 다친 거예요? 얼른 소파에 앉아요. 제가 주물러 드릴게요.”기사님과 아줌마는 그녀를 부축하고 소파에 앉혔고 가방은 옆에 두었다.“이건 분명 근육이 다친 걸 거예요. 제가 물파스 들고 올게요. 잠시만 기다리세요.”집에는 항상 약상자가 구비되어 있었다. 아줌마는 얼른 물파스를 들고 왔다. “아니, 아가씨 선생님은 아가씨가 다친 걸 몰랐대요? 정말 바보 같네요. 봐봐요. 아픈 데는 어디예요?”아줌마는 장소월의 다리를 잡고 자기의 무릎에 올려두며 물었다.장소월은 앉아 있다 보니 이미 많이 나아진 상태였다. “선생님을 탓할 건 아니에요. 제가 훈련강도를 좀 높여서 했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넘어져서 좀 다쳤어요.”장소월은 까만색 스타킹을 벗었고 아줌마는 물파스를 꼼꼼히 발라주며 종아리도 함께 주물러 줬다.“어때요? 많이 낫죠?”장소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주 괜찮아졌어요.”거실을 한번 쭉 둘러본 장소월은 다시 입을 열었다. “근데 강만옥 이모는요? 아빠도 집에 안 계시는 거예요?”“강만옥 님은 연우 도련님과 있을 거예요. 연우 도련님도 돌아오신 지 얼마 되지 않는데 아마 지금쯤 잠에 드셨을 거예요.”장소월의 얼굴빛이 말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괴이했다. 그녀는 이 일을 장해진한테 말을 꺼내야 하나 고민이었다. 그렇지 않으면...그녀는 차라리 기숙사 생활을 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하지만 장소월은 장해진이 그녀를 기숙사로 보내는 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전연우는 요즘 장가네로 자주 왔다. 장소월은 아무리 곰곰이 생각해 봐도 이유를 알 수 없었다.종아리와 허벅지 안쪽까지 모두 물파스를 바르고 난 뒤 장소월은 치마를 내려 다시 정돈했다. “아줌마 내가 이미 약을 다 닦아 놓았으니까 얼른 먼저 들어가 쉬어요.”“저는 선생이 돌
말이 끝나기 무섭게 소월은 황급히 4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같은 공간에 더 있다가는 인생이 조기에 종영할 포스였다. 곧이어 위층에서 비명이 들렸다. “앗!”전연우는 소리 나는 방향을 따라 위로 쳐다보며 참 요란하게도 올라간다고 생각했다. 소리를 들어보니 많이 다친듯하다.검은 줄무늬 잠옷을 입고 있는 탓인지 오늘따라 전연우는 더 차가워 보였다. 카리스마가 그를 휘감았다. 위층에서 소리가 더 이상 안 들리자, 강만옥의 머리채를 잡아당기더니 말했다. “남자 부족해? 없으면 없다고 말하지. 내가 원하는 만큼 준비해 줄 수 있는데.”강만옥은 머리가 너무 아파서 지끈거려 연기고 뭐고 다 집어치웠다. 술에 취하긴커녕 정신이 맑았다. “진심이에요? 이 손을 놓으세요, 너무 아프다고요!”날 선 공기를 감지한 강만옥은 전연우의 손을 잡으면서 그의 기색을 살폈다. 강력한 위압감에서 나오는 포스로 진짜 화냈다는 것을 알 수 있다.전연우는 머리카락을 넘겨주는 척하다가 둘만 들리는 소리로 말했다. “한 번만 다시 그 더러운 몸뚱어리로 내 침대에 기어오르기만 하면 이렇게 쉽게 끝나지 않을 거야. 몇 명한테 더 당해봐야 정신 차리지...”경고인지, 협박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 상대를 헷갈리는 화법을 구사하며 차갑게 말했다. 강만옥은 그의 어두운 눈동자를 가만히 보고 있자니, 긴장감에 마른침을 삼켰다. 그러다가 문뜩 뭔가 생각난 듯 피식 웃었다. “그러든지요... 근데 그전에 한 번만이라도 나랑 해볼 생각은 없어요? 한 번으로는 부족할 거고... 그때 되면 내 목숨도 당신한테 바칠 수 있는데...”“미쳤구나!” 전연우는 발을 들어 그녀를 옆으로 차버렸다. “정신 차리게 도와줄게.”눈빛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이미 한 번쯤은 죽었을 것이다. 몸을 풀고 나서 정신이 혼미한 여자를 끌고 방으로 직진했다. 문을 발로 걷어차자 쾅 하고 닫혔다.욕실의 샤워기를 틀고 머리를 물속에 밀어 넣었다.한 번, 두 번......소월은 오늘 어쩜 이렇게 재수가 없을 수 있냐며 투덜거리며
10초 정도 지났다. 자고 있던 소월은 밝은 빛에 눈을 찡그렸다. 꿈인지 생시인지 비몽사몽이고 있는데 앞에 누군가 쳐다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 사람을 보는 순간 눈이 번쩍 떠졌고 너무 놀란 나머지 자기도 모르게 발을 움츠렸다. 빠르게 옷을 정리하고 몸은 어느새 반듯하게 자세를 고쳐 앉은 채 조심스럽게 물어봤다. “연우 오빠께서 이 시간에 어쩐 일로...”‘아놔, 방금 뭐라고 했지?’ 소월은 이불을 꼭 잡고 파르르 떨었다. 전연우는 그런 그녀를 말없이 쳐다봤다. 방안에 정적만이 흘렀다. 소월이는 목석처럼 꼼짝하지 않고 있었다. 이 분위기를 견딜 수 없어 소월이가 또 한 번 긴장 서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어... 언제 들어왔어요?”전연우는 아무 말도 못 들은 듯 그저 손바닥을 보고 있었다. 손에는 아직 바르다만 파스가 남아 있다. “발 내밀어, 마사지 해줄게.”그리고 소월을 쳐다봤다. 그윽한 눈빛, 소월이에게는 너무 따갑게 느껴져 바로 머리를 저으며 거절했다. “괜찮아요, 아줌마가 이미 처리해 줬어요. 내일이면 괜찮아질 거예요.”그녀의 생각지 못한 거절에 연우는 인상을 구겼다. “말 들어, 다시 얘기하게 만들지 말고.”소월은 곧 꼬리를 내렸다. 더 이상 심기를 건드려서 좋을 게 없었다. 적어도 지금은 타협하는 게 좋다. 이렇게 계속 거절하다가...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아니, 감당할 수 없다.전생에서부터 이렇게 지내왔기에 너무나도 익숙했다. 연우의 모든 요구를 소월은 들어줘야 했는데 ‘절대복종’이라고 해도 과하지 않다. 아무리 떼를 쓰고 아가씨 행세를 부려도 그의 손바닥에서는 꼼짝도 못 한다.수습 불가능한 사태를 방지하려면 먼저 굽히고 들어가는 게 최선이다. 천천히 이불속에서 발을 꺼내고 앞으로 내밀었다. 그녀의 발은 뽀얗고 관리를 잘 받은 예술품이다. 핑크색 네일아트와도 너무 조화로웠다. 부잣집에서 태어난 소월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흠잡을 데 없이 고급스러운 아우라가 풍겼다.연우는 자연스럽게 부어오른 발목을 가져
침대에서 내려와 슬리퍼를 신었다. 신기하게도 발목의 통증은 사라지고 이미 다 나은 듯하다.어제저녁, 전연우가 몇 시에 자기 방에서 나갔는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언제 잠들었는지조차 모르겠다. 다시 깨어났을 때 이미 다음 날이었다.어젯밤 강만옥이 술에 취해 전연우의 방에서 나온 모습은 아직도 생생하다. 그 장면을 생각하니, 소월은 심장이 쿵쾅거렸다. 가방을 메고 위층에서 일부러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등교 시간이 점점 다가오자, 소월은 그제야 방문을 열고 나왔다. 아래층으로 내딛는 발은 천근만근 추를 매단 듯 힘겨웠다.소월은 살금살금 도둑고양이처럼 내려왔다. 오늘따라 거실에는 사람이 없었고 고요함만 맴돌았다. 그녀는 서둘러 식탁 위에 놓여있는 토스트 몇 개를 집어 들고 도망칠 준비를 했다. 마침 아줌마가 부엌에서 나왔다. “아가씨, 뭐 하는 거예요? 누가 보면 자기 집 아닌 줄 알겠어요. 먼저 앉아서 아침 드세요. 저는 올라가서 연우 도련님 부를게요.”소월은 재빠르게 받아쳤다. “저를 신경 쓰지 마세요, 오늘은 대충 먹을게요. 못다 한 과제가 있어서 바로 나가봐야 해요. 저 먼저 가요. 오늘도 수고 많으십니다.” “아가씨, 그것만 드시면 어떻게 해요. 조금 더 드세요.”“...”“아가씨, 잠시만요. 우유 챙겨 드릴게요.”아줌마가 급히 냉장고에서 우유를 꺼냈다. 대문까지 쫓아갔지만, 소월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무슨 일인데요.” 위층에서 느릿느릿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연우는 넥타이를 매고, 슈트를 팔에 걸친 채 계단을 따라 내려왔다.“아가씨께서 빵 두 조각만 드시고 가셨어요. 오늘 우유도 안 챙겼는데... 아직 어려서 많이 드셔야 하는데...” 아줌마가 조심스럽게 말했다.연우는 고개를 돌려 창문 밖을 내다보았다. 차에 올라타는 소녀의 뒷모습뿐, 짙은 눈동자 속으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전연우는 간단히 아침 식사를 마치고 회사로 돌아갔다.9시가 다 되어 간다. 강만옥은 아직 식사하러 내려오지 않았다. 아줌마는 무슨 일이라도 일어났을까 봐
죽 한 그릇을 먹여주는데 무려 20분이나 걸렸다.소민아는 그에게 수면 촉진 성분이 들어있는 약을 가져다주었다. 신이랑이 침대에 누워 그녀의 손을 잡았다.“나랑 같이 있어 줘요. 안 가면 안 돼요?”소민아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알겠어요. 뭐든 이랑 씨가 몸을 다 회복한 다음 얘기해요.”옆에 앉아 신이랑이 잠드는 것을 지켜보던 중 핸드폰에 배터리가 없다는 것을 알아챈 그녀는 천천히 손을 빼냈다. 하지만 신이랑은 그녀의 움직임을 느끼기라도 했는지 불안한 얼굴로 다시 눈을 떴다. 소민아는 환자를 보살피는 게 이렇게까지 어려운 일인지는 정말 몰랐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침대에 엎드려 잠시 잠을 청했다.창밖에서 부슬부슬 내리던 비가 드디어 그쳤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돌연 불어온 차가운 바람에 그녀가 어깨를 움츠렸다.그때, 그녀의 귀에 미세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눈을 뜬 순간, 어둠 속에서 그림자 하나가 휙 지나갔다.“기성은 씨, 당신이에요?”대답이 들려오지 않자 소민아는 자신을 잡고 있던 신이랑의 손을 풀고는 바로 일어나 남자를 쫓아갔다. 그녀가 뒤에서 그를 끌어안은 순간 복도의 센서 등이 환하게 어둠을 밝혔다. 바깥 희미한 가로등 아래에선 차가운 바람이 불고 있었다.“제가 문자 그렇게 많이 보냈는데 왜 답장 안 했어요?”“이거 놔요.”“설명해주기 전엔 놓지 않을 거예요.”작게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에 기성은은 소민아의 손을 잡고 바로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소민아는 벽을 더듬어 조명을 켜려다 말했다.“따라와요.”이후 그녀는 옆쪽 간병인 방으로 그를 데려갔다. 그의 손가락을 만져보니 얼음처럼 차가웠다.“잠시만 기다려요. 제가 뜨거운 물 가져올게요.”소민아는 따뜻한 물을 가져온 뒤 그가 손으로 감싸게 하고는 그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갰다.“조금만 기다려요. 곧 따뜻해질 거예요.”두 사람은 함께 침대에 앉아 서로를 바라보았다. 눈앞에 분명 기성은이 살아 숨 쉬고 있었지만, 자신과 그사이에 커다란 벽이 있다는 느낌을
하지만 기성은은 못 본 척 시선을 피해버렸다.문이 닫힌 지 얼마 되지 않아 거의 숨이 끊어진 것 같은 사람이 병실에서 던져져 벽에 강하게 부딪혔다. 그 충격에 피를 한 움큼 토해냈다.소민아는 너무 놀라 들고 있던 음식까지 바닥에 떨어뜨렸다.“형님, 바깥에 사람이 있습니다.”“이런 우연이 있나. 오늘 아침 만났던 여자잖아.”소민아는 그들이 다가오자 빠르게 반응하며 말했다.“일부러 들으려고 한 건 아니에요. 그냥 지나가던 중이었어요.”적잖은 시선이 그녀의 몸을 아래위로 훑고 지나갔다. 그중 한 명이 말했다.“작두, 이 여자 누군지 알아?”작두라고 불리는 남자가 아래턱을 문지르며 걸어 나오고 있는 남자를 보며 말했다.“형님, 이년 어떻게 처리할까요? 대체 얼마나 들었는지 모르겠네요.”기성은은 검은색 가죽 신발을 신고 무거운 발걸음을 내디뎠다.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낯선 그의 모습에 소민아는 돌연 덜컥 겁이 났다.그녀는 어찌할 바를 몰라 자리에 굳어버렸다. 기성은은 소민아 앞에 걸어와 손가락으로 땅에 떨어진 음식 주머니를 줍고는 그녀에게 건네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입 간수 잘해요. 얼마를 들었든, 얼마를 보았든 한 글자라도 발설하면 그 후과 스스로 책임져야 할 거예요.”소민아는 머리를 푹 숙이고 다급히 대답했다.“네... 알겠어요.”기성은이 말했다.“너희 둘은 이곳에서 잘 지키고 있어.”“네, 형님.”“왜 계속 서 있어요? 안 가요?”소민아에게 하는 말이었다.소민아는 머리도 돌리지 않고 한 방향으로만 뛰어갔다. 얼마 후 병실에서 한 명이 더 나왔다.서철용이 담배 한 대를 손가락에 낀 채 말했다.“손이 너무 거치네요. 목숨이 간당간당해요. 죽이더라도 내 병원에서 죽이면 안 되죠.”소민아는 병실에 돌아와서도 얼이 빠진 채 멍하니 앉아있었다. 침대 쪽에서 인기척이 들려와서야 정신을 차리고 다가가 상황을 살폈다.신이랑은 언제 깨어났는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움직이지 말아요. 바늘이 빠지면 안 돼요.”새벽 12시, 복도의
간호사가 이마를 찌푸리며 말했다.“남자친구분 잘 지켜보셨어야죠. 링거액이 다 떨어졌잖아요. 지금 병원이 너무 바빠서 저희 간호사들도 병실 하나하나 다 신경 쓸 수는 없어요.”소민아가 미안함에 말했다.“서류를 가지러 회사에 다녀왔어요. 그런데... 저 이분 여자친구 아니고 비서예요.”간호사가 말했다.“환자분이 의식을 잃은 상태로 계속 가족분의 이름을 부르고 계세요. 얼른 가보세요. 환자분을 혼자 오래 두면 안 돼요.”소민아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네, 알겠어요.”소민아가 병실에 들어가 보니 신이랑은 눈을 뜨고 누워있었다. 그녀가 다급히 들고 있던 물건을 내려놓고 다가갔다.“이랑 씨, 깼어요? 몸은 좀 괜찮아졌어요?”신이랑은 흐릿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손을 뻗자 소민아는 얼른 그의 손을 잡아 이불 속에 넣어주었다.“푹 쉬어요. 제가 옆에 있으니까 불편한 게 있으면 부르고요.”“가, 가지 말아요.”그는 꽉 잡은 손을 좀처럼 놓지 않았다.“이랑 씨, 저 아직 처리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았어요. 내일 보내줘야 해요.”신이랑이 머물고 있는 곳은 VIP 병실이라 주방에 모든 시설들이 구비되어 있었다. 그녀는 전화로 죽 두 그릇을 주문한 뒤... 일에 열중하기 시작했다.저녁 10시, 신이랑의 체온은 많이 안정되었다. 본래 몸이 좋지 않긴 했지만, 이렇게 하룻밤 사이에 정신을 잃고 쓰러지기까지 하다니.소민아는 견딜 수 없을 정도의 배고픔이 느껴지고 나서야 자신이 아직 죽을 받아오지 않았다는 것이 떠올랐다.지금 시간엔 병원에도 사람이 별로 없을 것이다. VIP 병동은 무서울 정도로 으스스하고 고요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 보니 프런트에 놓은 음식은 이미 차갑게 식어 있었다.음식을 들고 다시 위로 올라가려고 엘리베이터 쪽으로 가던 중, 왼쪽 코너 쪽 병실에서 익숙한 사람의 모습이 그녀의 시선을 끌었다.기성은이 왜 여기에?소민아는 다시 핸드폰을 꺼내 확인했다. 병원에 왔으면서 왜 그녀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았단 말인가.
신이랑은 아무런 예고도 없이 그녀의 몸 위에 쓰러지고 말았다. 소민아는 몸을 뒤로 젖히며 그를 껴안았다. 그의 정상적이지 않은 체온을 느낀 그녀가 다급히 그의 이름을 불렀다.“신이랑 씨!”그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으니 소민아는 잠시 그를 부축해 소파에 눕힐 수밖에 없었다.“열이 왜 이렇게 나는 거예요?”소민아가 핸드폰을 켜고 구급차를 부르려 한 순간, 그 뜨거운 손이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생명줄이라도 되는 듯 힘껏 움켜쥐고 놓지 않았다.소민아는 통화를 마친 뒤 손을 뻗어 그의 이마에 가져갔다.“구급차가 곧 올 거예요. 조금만 참아요.”소민아는 착잡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조금 전 금방 들어왔을 때 그가 했던 말을 그녀는 모두 똑똑히 들었었다.자신을 좋아해 달라던 그 말까지도...소민아는 신이랑이 자신과 같은 사람을 좋아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신이랑처럼 좋은 사람은 응당 예쁘고 부드럽고 현숙한 주가은 같은 부잣집 아가씨와 어울린다고 생각했었다. 기성은에게 들은 바로는 신이랑의 신분도 실은 그리 간단하지만은 않다. 그의 가족들 또한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신이랑은 구급차에 앉아 함께 병원으로 들어갔다.신이랑은 열이 39도, 아니 40도까지 치솟아 올랐다.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결과가 어땠을지 상상도 하기 힘들었다.신이랑은 해열제 주사를 맞은 뒤 이어 링거를 꽂고 침대에서 깊이 잠들어 있었다. 그녀는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 옆에서 노트북으로 일을 하기 시작했다.소민아는 그렇게 하루종일 병원에서 그를 보살폈다. 저녁 여섯 시가 되니 배가 고파와 병원 슈퍼마켓으로 향했다. 그때, 여자보다 더 여자같이 생긴 하얀색 옷차림의 남자가 마스크를 하고 그녀의 옆으로 스쳐 지나갔다.소민아는 의아함에 천천히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그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어디에선가 본 것처럼 익숙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하지만 지금 바로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다.그녀는 내려갔던 김에 서류를 가지러 다시 회사에 돌아갔다. 신이랑이
소민아는 기성은의 팔짱을 끼고 친밀하게 손을 잡고는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갔다.“오늘 어디에 가는 거예요? 언제 돌아와요? 퇴근할 때 저 픽업할 수 있어요?”기성은이 대답했다.“상황 봐서요. 매일 오늘처럼 한가한 건 아니거든요.”소민아가 불만이 가득 섞인 표정으로 말했다.“기성은 씨 이젠 회사에도 안 나가잖아요. 대체 뭐 하느라 그렇게 바쁜 거예요? 어제 저랑 사귀어보겠다고 했잖아요. 그럼 절 첫 순위에 올려놓아야 하는 거 아닌가요? 아니면 솔직히 말해봐요. 뭘 하러 가는 건지!”그가 하는 일은 대부분 사람들에게 알려져서는 안 되는 것이다. 하여 당연히 그녀에게 알려줄 수 없었다.대표님이 의식불명으로 누워계시니 그 또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송시아는 회사를 통째로 집어삼키려 움직이기 시작했다. 때문에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눈앞의 일을 최대한 빨리 처리하는 것이다.그에게 있어 소민아는 부담이고 약점일 뿐이다. 어떤 말은 솔직히 말할 수 없으니 그저 그녀의 열정이 자연적으로 꺼져갈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민아 씨 앞가림이나 잘해요.”기성은이 결국 뱉어낸 말은 그 한 마디였다.지금은 출근 시간이라 차가 꽤 막혔다. 소민아는 선명히 뾰로통해진 얼굴로 손에 요구르트를 들고 앉아있었다.이번 생에 기성은이 그녀를 달래주는 날이 오긴 할까.그들은 출근 시간 10분을 남겨두고 성세 그룹 맞은편에 도착했다. 회사에 뛰어 들어간다면 3분이면 충분히 출근 도장을 찍을 수 있다.“아직도 뭘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기성은이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린 순간, 소민아가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 그의 입가에 키스했다.“일 끝나면 전화해요. 성은 씨가 절 데리러 오든, 제가 성은 씨한테 가든 같이 있어요, 우리.”기성은은 그 키스에 깜짝 놀라 자리에서 굳어버렸다.소민아는 안전벨트를 풀고 바람을 맞받아 몸을 움츠리고 회사 안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시간 맞춰 도착해 지각은 하지 않았다.소민아가 뒤돌아보니 기성은은 아직 그 자리에
침대에서 뒹구는 법이라곤 없는 기성은은 그녀가 계속 잠을 청하려 하자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소민아가 단번에 그를 끌어당겨 침대에 눕혔다.“아직 여섯 시밖에 안 됐단 말이에요. 출근 시간까지 한 시간이 넘게 남았어요. 조금 더 자요.”“소민아 씨!”기성은은 이렇게까지 머리 아프게 만드는 사람은 종래로 만나본 적이 없다. 소민아가 강제로 기성은의 팔을 끌어당겨 팔베개를 시켰다.기성은의 차가운 목소리가 내려앉았다.“남녀가 유별하다는 말 몰라요? 소민아 씨, 선 지켜요.”소민아는 눈을 감고 태연하게 그의 말을 받아쳤다.“이봐요, 아저씨. 지금이 조선 시대인 줄 알아요? 어떻게 그렇게 보수적일 수가 있어요? 여자친구 사겨본 적 있기는 해요?”기성은은 도저히 팔을 빼낼 수가 없었다.“내가 못해본 것 같아요?”소민아가 몸을 돌려 그와 눈을 맞추었다.“그 주가은 씨랑은 어떤 사이에요? 정장은 왜 벗어준 거예요? 추워 보여서 그랬어요?”소민아가 손가락으로 총 모양을 만들어 그의 이마에 가져갔다.“얼른 솔직히 말해봐요. 주가은 씨랑 대체 무슨 관계인 거예요? 어젯밤... 기성은 씨 만나러 집에 왔었어요. 제가 우리 두 사람이 사귀기로 했다니까 얼굴이 확 어두워져서 돌아갔고요.”소민아는 자세히 그의 얼굴 표정을 살폈다. 더 캐묻지도, 화를 내지도 않는 것이 별다른 느낌이 없는 듯했다.그가 말하려 하지 않자 소민아가 말을 이어갔다.“연애할 줄 모르겠으면 제가 가르쳐줄게요. 가장 중요한 건 성실해야 한다는 거예요. 빨리 얘기해요.”기성은이 은하수를 담은 듯 반짝거리는 그녀의 눈동자를 피하며 말했다.“주가은은 서울시 시장 딸이에요. 얼마 전 주지웅이 주가은을 대표님에게 소개해주려고 저녁 식사 자리를 만들었는데 대표님이 못 가게 되셔서 내가 대신 갔었어요.”“그날 엘리베이터에서 주가은의 뇌전증이 발작했고, 내가 마침 거기에 있어서 도와줬었죠.”너무 조용하다는 생각에 내려다보니 소민아는 어느새 또다시 잠들어 있었다.기성은이 천천히 팔을 빼내고 침대에
“제 아빠는 데릴사위였어요. 부모님 두 분 모두 과학자여서 매일 연구원에서만 지냈어요. 그래서 전 태어나자마자 고모 댁에 보내졌죠. 엄마아빠의 유전자를 이어받아서인지 별로 노력을 들이지 않고도 서울대에 입학했어요...”소민아의 말이 채 끝나지 않았을 때 옆에 놓아두었던 핸드폰이 진동했다. 신이랑이 걸어온 전화였다.“이랑 씨도 오겠다고 했던 걸 깜빡했어요. 잠깐만 기다려요. 전화 받고 올게요.”기성은이 깊은 눈동자로 아직 그녀의 온기가 남아있는 의자를 바라보았다. 그의 과거는...암흑 그 자체이다.그는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몰랐다. 그가 살았던 곳은 음산하고 차디찬 지하실이었다. 그곳에선... 명령에 따라 앞뒤 가리지 않고 손에 칼을 들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그야말로 나라의 관리가 손닿지 않는 혼란의 세상이었다.누군가 그랬다. 어머니는 기생이고, 아버지는... 마약범이라고. 하여 그는 태어난 뒤 바로 버려졌고, 그래서 이름도 없는 거라고...그의 머릿속 첫 기억은 음습하기 그지없는 시궁창이었다.그때의 참담한 경험이 지금 그의 모습을 만들었다. 모든 사람들이 그를 아무 감정 없는 기계 같다고 입을 모아 말한다...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은 그와는 전혀 상관없는 것이었다.그의 인생을 바꿔준 한 사람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말이다.바로 전연우다!당시 기성은은 변경에서 마약 거래를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전연우를 만났고, 그가 다치고 베이고 수많은 죽을 고비를 넘기며 기성은을 변경 시궁창에서 빼냈다.전연우가 말했다.“나한테 목숨 빚졌으니까 앞으로 나 따라다녀.”“네.”“지금 이름은 너한테 어울리지 않아. 앞으로는 기성은이라고 바꿔.”“네.”...소민아는 신이랑과 함께 설영우를 만나 일정을 조율하고 계약서까지 작성했다.일을 끝내고 나니 날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차갑게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소민아가 신이랑을 아파트 아래까지 배웅한 뒤 걸음을 멈추었다.“왜요?”신이랑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소민아는 숨기지 않고 말했다.
“현실에 부합되지도 않는 쓸데없는 상상하지 말아요. 소민아 씨한테 어울리는 사람은 신이랑이에요. 가서 일이나 열심히 해요, 내 체면 떨어뜨리지 말고.”결과야 어찌 됐든 소민아는 기성은이 키워온 사람이다.소민아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정말 저한테 하고 싶은 말 없어요? 마지막으로 물을게요. 정말 없어요?”“저에 대한 이랑 씨 마음 저도 알고 있어요. 하지만... 난...”“기성은 씨를 좋아한단 말이에요!”문밖에 서 있던 설영우가 호기심이 가득 담긴 표정으로 들어왔다.“어머나, 형한테도 드디어 봄이 왔네요. 여자한테 고백을 다 받다니요!”소민아는 얼마나 어렵게 용기를 내어 그 말을 내뱉었는지 모른다. 한 달 내내 찾아다녔던 소설 작가가 지금 이 순간 기성은에게 형이라고 부르며 나타날 줄이야.“꺼져.”설영우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소민아 씨, 전 이만 갈게요. 형과 얘기 끝나면 문자 주세요. 바로 올라올게요.”소민아는 솔직하고 좋고 싫음이 분명한 사람이다. 실은 그녀 또한 알지 못했다. 대체 왜 하필이면 성격도 나쁜 그 사람에게 마음을 빼앗기게 되었는지 말이다.얼굴이 조금 반반한 것 외엔 별다른 장점도 없다.“제가 방금 했던 말 들었어요?”기성은이 말했다.“소민아 씨 같은 귀찮은 사람이랑 사귀어서 나한테 좋은 게 뭔데요? 아까 내가 했던 말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모양이네요.”기성은이 와인 냉장고로 걸어가 와인을 한 병 꺼냈다. 그를 따라 소민아의 시선도 옮겨졌다.소민아가 그의 뒤를 쫓아가며 말했다.“하지만 좋아하는 사람한테 진심을 고백해야 맞는 거 아닌가요? 저도 제가 충동적이라는 거 알아요. 하지만 저에게도 눈이 있고 생각이라는 게 있어요. 나더러 신이랑에게 붙어있으라는 거 날 보호하기 위해 한 말이라는 게 느껴진다고요. 기성은 씨도 날 좋아하잖아요. 그런데 왜 자꾸 절 밀어내려고만 해요? 정말 이해가 안 돼요.”기성은이 말했다.“정말 황당한 생각이네요. 이용가치가 떨어진 물건을 더 남겨서 뭘 하겠어요?”기성은이 고개를
기성은이 다급히 셔츠를 몸에 걸쳤다.“누가 마음대로 들어오라고 했어요! 나가요!”소민아는 순간 하려던 말까지 잊어버렸다. 그녀는 겁에 질린 얼굴로 문밖으로 나와 손으로 가슴을 짓누르며 크게 심호흡했다. 머릿속에 기성은의 몸에 덕지덕지 새겨진 흉터들이 떠올랐다.기성은은 대표님의 비서가 아니었던가?비서에게 어떻게 저렇게 많은 상처가 생길 수가 있지?또한 모두 칼에 찔린 자상이었다. 지금 이 시대에 누가 칼을 휘두르고 다닌단 말인가.대체... 그는 무슨 일을 겪었던 걸까.기성은은 욕실에서 거울로 자신을 비추어 보았다. 오래전부터 지금까지 일어났던 모든 일이 머릿속에 생생하게 떠올랐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 눈 깜빡할 사이에 10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어떤 일은 뇌 속에 박혀버린 것처럼 한번 또 한 번 반복적으로 재생되어 그로 하여금 끊임없이 떠올리게 만들었다.기성은이 깨끗한 잠옷으로 갈아입고 욕실에서 나왔다. 아직 집에 남아있는 소민아를 향해 그가 차갑게 입을 열었다.“언제까지 있을 생각이에요?”소민아가 주방에서 젓가락 두 쌍을 가져오며 아무 일도 없었던 듯 태연한 표정으로 말했다.“식자재는 기성은 씨가 사긴 했지만 음식을 만든 건 저예요. 기성은 씨를 기다리느라 저도 한 입도 못 먹었어요. 아무리 그래도... 손님한테 밥은 먹이고 보내야 하지 않겠어요? 그리고 기성은 씨를 만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회사 일 때문에 이곳에 온 거예요. 마침 같은 아파트에 제가 맡은 소설 작가님이 살고 계시거든요. 그분이 집에 돌아오시면 드라마 제작 세부 사항에 관해 상의해야 해요.”“가서 침대 옆에 있는 핸드폰 가져와요.”소민아는 말없이 그의 말대로 핸드폰을 가져다주었다. 그녀의 시선이 기성은의 헐렁한 옷소매 안으로 드러난 상처에 닿았다. 그녀는 깜짝 놀랐다. 왜 지금까지 한 번도 그의 손목에 이토록 깊은 흉터가 있다는 걸 알지 못했단 말인가.“...지금 이쪽으로 와.”그 한마디 말을 끝으로 기성은은 전화를 끊었다.“설영우 곧 올 거예요.”소민아의 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