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영수는 마침 그녀와 반대 방향으로 운전하다가 앞의 신호등에서 유턴했다. 그리고 바로 장소월의 문자를 받았다. 「수야, 너 어디야?」강영수는 그녀의 메시지를 놓칠까 봐 항상 휴대폰을 지니고 다녔다. 그리고 그녀의 문자를 보자마자 바로 답하곤 했다. Comment by 만든 이: 휴대폰을 가까이 지니다-휴대폰을 가까이 했다 등으로는 괜찮지만 늘 지니고 다녔다는 의미에서 ‘가까이'를 빼도 무방Comment by 만든 이: 대답은 직접 육성으로 하는 것문자에는 보통 ‘답하다, 답장하다’하지만 지금 그는 휴대폰을 꺼버렸다. 왕 집사는 백미러로 그를 한번 쳐다보았다. Comment by 만든 이: 왕 집사 = 운전기사?“운전기사가 또 입을 열었다.”만약 동일인물이 아니라면, 본 회차에서 운전기사가 처음 언급되었으니 ‘또’ 삭제.만약 동일인물이라면 인명 통일“소월 아가씨가 보내온 문자입니까? 소월 아가씨가 눈치채신 걸까요?”“아마도 그럴 거야... 하지만 거짓말을 하긴 싫어.”강영수는 부정하지 않았지만 대답도 하지 않았다.시간이 조금 더 흐른 후에, 그가 완전히 자기 힘으로 다시 설 수 있을 때 그녀와 만날 것이다. Comment by 만든 이: 조금만 더 기다리면 ~ 그녀와 만날 것이다.흐름이 어색이렇게 성치 않은 상태로 그녀를 만날 수는 없다. 운전기사가 또 입을 열었다. Comment by 만든 이: ‘이야기하다’는 범위가 좀 더 큼.운전기사가 단순히 질문을 던진 것이니 ‘말했다’ 정도로만 번역“혹시, 소월 아가씨께서 신경 쓰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내가 신경 쓰여서 안 돼. 먼저 돌아가자.”Comment by 만든 이: ‘그렇다고 하더라고’가 없어도 자연스럽게 대화가 이어지므로 삭제강영수가 피곤함 속에서 눈을 감았다. 조금 전에는 매우 위험했다. 강영수가 병원 앞에서 기다리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가버렸더라면.Comment by 만든 이: 앞뒤 라임 통일그렇다면 소월이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그럴 리가요. 오빠가 저를 생각해서 그런 건데요 뭐." 전연우의 시선은 장소월의 옷으로 향했다. 헐렁한 옷은 눈에 띄게 그녀의 가냘픈 몸에 맞지 않았다. 처음 보는 옷이었는데 딱 봐도 남자 옷이었다."오늘은 웬일로 교복을 안 입었네?" 장소월은 옷을 갈아입지 않았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채 그대로 와버렸었다. "아... 아니... 입었어요. 근데 단추가 떨어지는 바람에 다른 사람 옷을 빌려 입은 것뿐이에요. 나중에 다시 돌려줘야 해요." "남자 거야?" 장소월은 딱히 숨길 마음이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네." 전연우는 그저 조용히 입꼬리를 올렸다. 하지만 그런 그의 눈동자에는 초점이 없었고 말투는 왠지 모르게 차갑고 딱딱했다. “연애하는 거야?" "아니요..." 장소월은 서둘러 부인했다. "걔는 그냥 친구의 친구일 뿐이에요." "네 나이에 연애하는 게 뭐 어때서? 사춘기 때는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기 마련이지... 이제 연애 고민 같은 거 생기면 언제든지 오빠를 찾아와.”"네. 알겠어요. 오빠." 전연우와 대화를 할 때마다 그녀는 항상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어야만 했다. 자칫하면 그의 손에 이끌려 그가 미리 파둔 달콤한 함정에 빠질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남원 별장.전연우의 차는 주차장으로 향했다. 장소월은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어 문을 열어보았지만, 자동차 문은 굳게 잠겨져 있었다.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이때 전연우가 갑자기 확 다가왔고 그의 남성적인 체취가 장소월의 코를 찔렀다.그에게서 풍기는 은은한 동백꽃향이 그녀의 코끝을 간지럽혔다. "오빠... 뭐 다른 용건이라도 있어요?" 그러자 전연우는 그녀의 얼굴을 치켜들고 엄지손가락으로 그녀의 부드러운 입술을 살살 문댔다. 그의 손가락에 옅은 핑크빛이 묻어났다. 장소월은 잔뜩 겁에 질려 그대로 경직된 채 움직일 수가 없었다.“립스틱 발랐어?”"아뇨, 아뇨. 제가 전에 산 립글로스가 발색이 되는 거라서요." 장소월은 전연우가 도대체 뭘 어쩌고 싶은지 알 수가 없었다
그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고 그걸 본 장소월은 정신이 번쩍 들어 그를 밀쳐냈다. "이제 그만 해요!" 그녀는 마음이 몹시도 심란했다. 전연우가 다시 자세를 고쳐 앉았고 그녀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이젠 오빠도 거부하는 거야?”장소월은 호흡을 가다듬고 그녀의 까만 짧은 치마를 꽉 부여잡으며 말했다. “제가 전에 말했듯이 오빠는 그냥 오빠일 뿐이에요. 앞으로 다시는... 이런 이상한 짓 하지 마세요. 만약 윤서 언니가 알게 된다면 언니가 분명 많이 속상해할 거예요.”‘양다리를 걸치려고 하다니. 전연우, 전생에 내가 집에서 네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때도 다른 여자랑 차 안에서 이딴 짓을 하고 있었던 거야?’장소월은 이미 그에게 일말의 감정도 남아있지 않았다.그는 백윤서를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사랑하지 않았다. 송시아를 놓고 봐도 그랬다. 그녀에겐 백윤서와 비슷한 면이 많았지만, 전연우는 그녀를 단지 아이를 만드는 수단으로만 여겼었다.한때 그를 온 마음으로 사랑했던 그녀였지만 마지막엔 결국 그에게 비참하게 버려지고 말았다.그녀는 너무나 두려웠다.전연우는 싸늘하게 식어버린 눈빛으로 말했다. "철 들었네, 우리 소월이. 미안해. 오빠 때문에 많이 당황했지? 저번 일도 그렇고 다 사과할게.”"괜찮아요... 이미 다 잊어버렸어요!" “그래... 아무 일도 없었던 거로 하자." 전연우가 차 문을 열자마자 장소월은 황급히 도망쳐 나왔다.장소월은 현관문으로 들어서자마자 마침 보라색 비단 잠옷을 입고 계단에서 내려오는 강만옥과 마주쳤다. “소월아, 이제 온 거니? 너희 아빠는 저녁에 회식이 있어서 조금 늦게 온다던데. 일단 우리끼리 먼저 밥을 먹자.”장소월은 입맛이 하나도 없었기에 음식 생각이 날 리가 없었다.강만옥을 마주쳤을 때도 장소월의 머릿속에는 온통 오늘 하루 동안 그녀와 전연우가 차 안에서 함께 했던 장면들뿐이었다.속이 울렁거리고 토하고 싶은 충동까지 느껴질 정도로 거부감이 들었다.장소월이 안 먹겠다고 말
“넌 장소월이 이미 다 알고 있을 거라는 생각은 안 들어? 전연우, 모든 걸 다 신중히 여기는 네 성격대로면 장소월이 우리 일을 알게 만들고 싶진 않겠지. 아니면 설마 지금 저 여자한테 손을 못 대겠다는 건 아니겠지? 내가 도와주기라도 해야 하려나? ”강만옥은 요염하게 붉고 매혹적인 입을 살짝 내밀고 손을 턱에 받치며 눈웃음을 짓고 말했다. “자기야, 너도 알겠지만, 나는 연적에 대해서는 한 번도 봐준 적이 없어."“만약 그녀가 정말 강영수와 사귀고 결혼까지 한다면... 안그래도 장가네한테 못살 정도로 잡혀 사는데 강가네까지 합류하면 너 정말 감당할 수 있겠어?"전연우는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티슈로 입을 닦았다. “내 일이야. 네가 이래라저래라 할 일이 아니라고. 신발이나 똑바로 신어.”강만옥은 민망하단듯이 웃으며 그의 종아리에 올려놓고 있던 발을 옮겼다.전연우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아까 몰고 온 아우디차를 다시 끌고 장가네 주차장을 빠져 나왔다....장소월은 8시도 채 안 돼서 잠에 들었다.강영수와는 다시 연락하지 않았고 그녀도 딱히 상관하지 않았다. 오늘 마주쳤던 그 사람은 강영수가 아니였을 테니까 말이다.만약 진짜 강영수 였다면 그녀의 문자에 답장을 안 했을 리가 없었다.까만 외투는 이미 아줌마가 깨끗이 씻어놓고 그녀의 방 베란다에서 말리고 있었다.아줌마는 교복도 다시 단추를 달아놓고 그녀의 침대 머리맡에 고이 두었다. 그녀는 밤새 제대로 자지도 못했고 그저 끊임없이 악몽만 꿀 뿐이었다.그녀는 꿈에서 자신의 화를 풀기 위해 장소월을 방에 가둬두고 있는 전연우를 보았다.장소월은 손발아 쇠사슬로 꽁꽁 감긴 채 침대의 머리맡에 묶여있었다.그의 눈빛은 그가 봐도 공격적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소월아, 너는 내 와이프잖아. 근데 네가 어떻게 다른 남자를 좋아해...”시계를 보니 겨우 6시였다.바로 샤워하고 책도 보다가 7시 반이 되어서 학교로 출발했다.그 뒤로 거의 일주일 동안은 그나마 평화로웠다. 적어도 전연우는 마주치지 않았으니
그녀가 잘못 보지 않았다면 이 사람들은 분명 방서연, 허철, 그리고...강용이다!장소월은 자기 자가용 바로 옆에 서서, 맞은 편에서 그녀를 향해 걸어오는 사람들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들이 맞았다.장소월은 깜짝 놀랐다. ‘백윤서가 언제부터 강용과 어울려 다닌거지?’두 사람의 사이는 매우 좋아 보였다.장소월은 상상하기도 싫었다.백윤서는 전연우를 좋아했었는데?전연우는 그녀가 강용과 노는 걸 알기나 할까?하지만... 백윤서가 누구랑 놀던 장소월과는 큰 상관이 없어 보였다. 장소월 그들의 일이라면 알고 싶지도 않았고 털끝 하나 엮이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다시 고개를 돌리며 차에 올라타려 할 때 강용 팔에 새겨져 있는 문신이 눈에띄었다.분명 전생에 본 것 같이 익숙한 문신이었다.너무나도 익숙했지만 더 이상 아무리 노력해봐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이때 허철은 맞은 켠 승용차 옆에 멍하니 서 있는 장소월을 향해 소리쳤다. “강용아, 저기 서 있는 사람 장소월 아니야? 쟤 지금 널 보는 거 같은데? 내가 보니까 장소월 쟤 무조건 너한테 관심 있어.”“봐. 저런 원망스럽고 짜증에 찬 눈빛을 하고 있잖아. 분명 또 질투가 났지. 뭐.”강용이 무심하게 그쪽을 바라보았을 때 장소월은 이미 차 안에 들어간 뒤였다.백윤서 역시 그 검은 승용차는 장가네가 전문 장소월을 마중하기 위해 마련한 차라는걸 알고있었다. 두 학교는 그저 거리 하나만 사이에 두고 있었는데 차이는 하늘과 땅의 차이라고 할정도이었다. “소월이? 너희 소월이를 알아?” 백윤서는 아주 단아했다. 그뿐만 아니라 청순하고 아름다웠다. 인간 세상의 때가 묻지 않은 선녀 같은 그녀는 긴 머리를 땋아 한쪽에 걸치고 있었고 하얀 드레스를 입고 강용의 옆에 우아하게 서 있었다. 허철은 눈썹을 찌푸리며 백윤서를 바라봤다. “누님도 장소월을 알아?”백윤서는 고개를 끄덕이었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소월이랑 함께 어린 시절을 보냈어. 근데 좀 지나서 내가 많이 아픈 바람에 해외에 나가서 치
그... 그... 이제 생각해 보니 전연우의 강박에 못 이겨 투신한 그 사람이 바로 강용이었다! 그의 손에 새겨진 문신 때문에 그녀는 알아볼 수 있었다.강용이 강 씨 그룹을 관리하고 있을 때 한번 큰 교통사고가 났었는데 그때 절벽에서 추락하고 모든 사람이 생존자는 한 명도 없다고 여기고 있었다. 강용 역시 그 교통사고로 사망한 줄 알았었다. 그 뒤로 강가네는 여자로 바꿔 회사를 관리시켰지만 피크타임은 그리 길지 못했다.강용이 사고를 당한 지 2년 뒤 강가네에서는 큰 폭발이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 강가네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 후 강 씨 그룹은 베일에 싸인 의문의 사람에게 인수당했다. 그 사람의 이름이 뭐였는지 장소월은 가물가물해 기억해 내지 못했다.그 사람은 정말 신비스러웠다. 단 한 번도 진짜 얼굴을 보여준 적이 없었고 전연우는 그가 얼굴의 화상흉터로 항상 가면을 쓰고 다닌다고 했었다.그때 장소월이 유일하게 기억한 것이 바로 그의 손에 있던 문신이었다. 성격도 난폭해 그의 눈에 든 여자는 모두 그와 밤을 보내고 절반 죽어서 나왔었다.그 문신은 강용의 몸에 있던 문신과 완전히 일치했다.이제 보니 그 사람은 강용이었다.하지만 만약 강용이 그때 사고로 죽지 않았다고 해도 그가 강 씨 그룹을 인수할 만큼 많은 자금이 어디에서 났을까?큰 의문이었다.장소월은 또 이 새로운 의문점을 생각해 보았다.강가네는 서울시 경제의 핵심을 틀어쥐고 있었다. 전연우는 어떻게 흔적 하나 남기지 않고 그런 강가네를 집어삼켰을까?장소월은 그 시절 기억의 퍼즐을 곰곰이 맞춰보았다. 전연우가 장가네를 통제하고 반년도 채 걸리지 않은 사이에 강 씨 그룹의 새로운 대표, 다시 말해 사고 이후 정체를 숨기고 지낸 강용과 손을 잡는 데 성공했다.그 시절 전연우는 장 씨 그룹의 거액을 빼앗았다. 당시 모든 주주가 불만을 가지고 떠나려 했었는데 그 이유는 회사가 체결한 모든 계약이 그룹 경제에 구멍을 내고 자칫 소홀히 하면 언제든지 장 씨 그룹
장소월이 무용 학원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니 이미 저녁 9시였다. 차에서 내렸을 때 그녀는 다리가 부러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절뚝이며 걸어오자 아줌마가 얼른 와 자초지종을 물었다. “아이고, 어쩌다 이렇게 다친 거예요? 얼른 소파에 앉아요. 제가 주물러 드릴게요.”기사님과 아줌마는 그녀를 부축하고 소파에 앉혔고 가방은 옆에 두었다.“이건 분명 근육이 다친 걸 거예요. 제가 물파스 들고 올게요. 잠시만 기다리세요.”집에는 항상 약상자가 구비되어 있었다. 아줌마는 얼른 물파스를 들고 왔다. “아니, 아가씨 선생님은 아가씨가 다친 걸 몰랐대요? 정말 바보 같네요. 봐봐요. 아픈 데는 어디예요?”아줌마는 장소월의 다리를 잡고 자기의 무릎에 올려두며 물었다.장소월은 앉아 있다 보니 이미 많이 나아진 상태였다. “선생님을 탓할 건 아니에요. 제가 훈련강도를 좀 높여서 했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넘어져서 좀 다쳤어요.”장소월은 까만색 스타킹을 벗었고 아줌마는 물파스를 꼼꼼히 발라주며 종아리도 함께 주물러 줬다.“어때요? 많이 낫죠?”장소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주 괜찮아졌어요.”거실을 한번 쭉 둘러본 장소월은 다시 입을 열었다. “근데 강만옥 이모는요? 아빠도 집에 안 계시는 거예요?”“강만옥 님은 연우 도련님과 있을 거예요. 연우 도련님도 돌아오신 지 얼마 되지 않는데 아마 지금쯤 잠에 드셨을 거예요.”장소월의 얼굴빛이 말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괴이했다. 그녀는 이 일을 장해진한테 말을 꺼내야 하나 고민이었다. 그렇지 않으면...그녀는 차라리 기숙사 생활을 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하지만 장소월은 장해진이 그녀를 기숙사로 보내는 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전연우는 요즘 장가네로 자주 왔다. 장소월은 아무리 곰곰이 생각해 봐도 이유를 알 수 없었다.종아리와 허벅지 안쪽까지 모두 물파스를 바르고 난 뒤 장소월은 치마를 내려 다시 정돈했다. “아줌마 내가 이미 약을 다 닦아 놓았으니까 얼른 먼저 들어가 쉬어요.”“저는 선생이 돌
말이 끝나기 무섭게 소월은 황급히 4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같은 공간에 더 있다가는 인생이 조기에 종영할 포스였다. 곧이어 위층에서 비명이 들렸다. “앗!”전연우는 소리 나는 방향을 따라 위로 쳐다보며 참 요란하게도 올라간다고 생각했다. 소리를 들어보니 많이 다친듯하다.검은 줄무늬 잠옷을 입고 있는 탓인지 오늘따라 전연우는 더 차가워 보였다. 카리스마가 그를 휘감았다. 위층에서 소리가 더 이상 안 들리자, 강만옥의 머리채를 잡아당기더니 말했다. “남자 부족해? 없으면 없다고 말하지. 내가 원하는 만큼 준비해 줄 수 있는데.”강만옥은 머리가 너무 아파서 지끈거려 연기고 뭐고 다 집어치웠다. 술에 취하긴커녕 정신이 맑았다. “진심이에요? 이 손을 놓으세요, 너무 아프다고요!”날 선 공기를 감지한 강만옥은 전연우의 손을 잡으면서 그의 기색을 살폈다. 강력한 위압감에서 나오는 포스로 진짜 화냈다는 것을 알 수 있다.전연우는 머리카락을 넘겨주는 척하다가 둘만 들리는 소리로 말했다. “한 번만 다시 그 더러운 몸뚱어리로 내 침대에 기어오르기만 하면 이렇게 쉽게 끝나지 않을 거야. 몇 명한테 더 당해봐야 정신 차리지...”경고인지, 협박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 상대를 헷갈리는 화법을 구사하며 차갑게 말했다. 강만옥은 그의 어두운 눈동자를 가만히 보고 있자니, 긴장감에 마른침을 삼켰다. 그러다가 문뜩 뭔가 생각난 듯 피식 웃었다. “그러든지요... 근데 그전에 한 번만이라도 나랑 해볼 생각은 없어요? 한 번으로는 부족할 거고... 그때 되면 내 목숨도 당신한테 바칠 수 있는데...”“미쳤구나!” 전연우는 발을 들어 그녀를 옆으로 차버렸다. “정신 차리게 도와줄게.”눈빛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이미 한 번쯤은 죽었을 것이다. 몸을 풀고 나서 정신이 혼미한 여자를 끌고 방으로 직진했다. 문을 발로 걷어차자 쾅 하고 닫혔다.욕실의 샤워기를 틀고 머리를 물속에 밀어 넣었다.한 번, 두 번......소월은 오늘 어쩜 이렇게 재수가 없을 수 있냐며 투덜거리며
소현아가 말하는 사람은 아마 유월일 것이다. 혹시 그녀의 존재 때문에 강영수가 무언가를 기억해낸 것일까? 그렇다. 지금 강영수는 유월과 결혼한 상태다. 그녀가 계속 옆에 있는 것은 그들의 관계에 악영향만 끼칠 뿐이다. 집에 도착한 뒤, 장소월은 소현아를 자신의 방으로 데려갔다. “현아야, 오늘 밤엔 우선 여기서 자. 옷장 안에 옷도 좀 있으니까 샤워하고 갈아입어. 난 내려가서 저녁 준비할게.” 소현아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 장소월이 아래층으로 내려가 냉장고를 뒤져 재료를 찾고 있을 때, 강용이 들어왔다. “정말 저 바보를 데리고 다닐 생각이야?” “강용, 현아 그렇게 말하지 마. 어렸을 때 병을 앓는 바람에 그렇게 된 거잖아.” 강용은 어깨를 위로 쭉 올렸다가 내리며 말했다. “알았어. 네가 이렇게까지 끔찍하게 감싸는데 내가 어떻게 뭐라 하겠어. 하지만 소현아는 다시 돌려보내는 게 낫지 않아? 쟤랑 같이 있으면 너무 위험해. 자칫하면 우리 위치가 강지훈에게 노출될 수도 있어!” “너도 알다시피 전연우랑 강지훈은 한통속이나 다름없어. 전연우가 해외에 얼마나 큰 세력을 가지고 있는지 알아? 재산 대부분을 해외로 넘긴 상태야. 국내 성세 그룹이 망하더라도 전연우는 눈도 깜짝하지 않을 거라고.” “윗선에서 일찌감치 막지 않았다면, 지금쯤 성세 그룹은 아마 성세 글로벌 그룹이 되어 있었을 거야.” “그리고 네가 모르는 게 하나 있어.” 장소월은 채소를 썰다 멈추고 물었다. “그게 뭔데?” “전연우는 이미 회사를 팔아넘겼어!” “무슨 뜻이야?” “몰랐어? 전연우는 아주 오래전에 나라에 회사 지분을 넘겼어. 그래서 송시아가 아무리 서울을 헤집고 다녀도 전연우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거야. 그리고 전연우가 요구한다면, 언제든 지분과 회사 통제권을 되돌려받을 수 있다고 하더라고.” “하지만 한낱 성세 그룹 따위는 해외에 두고 있는 재산의 백 분의 일도 안 돼. 지금까지 해외에서 수도 없이 많은 기업들을 인수했거든. 나중에 집안
장소월은 낙일 마을에 길을 잃은 친구가 있으니, 빨리 와서 데려가라는 전화를 받았다. 친구? 낙일 마을에 그녀의 친구가 있었던가?장소월은 강용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경찰서로 향했다. 그녀가 상황파악도 채 하지 못했을 때, 누군가 뛰어와 그녀를 꽉 껴안았다. “소월아, 소월아, 소월아... 드디어 찾았어. 너무 좋아!” 익숙한 목소리에 장소월은 화들짝 놀랐다. “현아? 어떻게 여기까지 찾아온 거야?” “그 바보 아가씨?” 차를 세우고 내리자마자 그 광경이 강용의 눈앞에 펼쳐졌다. “강용...” 소현아는 배시시 웃으며 강용을 향해 뛰어갔다. 반가운 마음에 와락 껴안으려 했지만, 그는 팔을 쭉 내밀어 그녀의 이마를 밀었다. 소현아는 키가 작은지라 아무리 팔을 휘저어도 겨우 강용의 옷자락만 잡을 수 있었다. “강용, 너도 보고 싶었어. 한 번 안아보자.” 강용은 눈썹을 씰룩이며 말했다. “난 순결한 몸이라서 말이야. 아무나 만지면 안 돼. 몇 년 만에 보는 건데... 소월아, 얘 왜 그사이에 더 멍청해진 것 같냐?” 장소월은 강용을 노려보며 말했다. “강용, 현아한테 그렇게 말하지 마.” 이어 고개를 돌려 경찰에게 말했다. “현아는 확실히 제 친구 맞아요. 폐를 끼쳐서 죄송했습니다. 이제 현아 데려갈게요.” 장소월은 소현아와 함께 뒷좌석에 앉았다. 소현아는 장소월의 팔짱을 끼고 그녀의 품속을 파고들었다. “소월아... 네 몸에서는 여전히 좋은 향기가 나는구나. 정말 보고 싶었어! 이렇게 멀리까지 놀러 왔으면서 왜 난 안 데리고 온 거야?” “현아야, 말해봐. 여긴 어떻게 왔어? 넌 서울에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소현아가 대답했다.“응! 근데 강지훈이 나 바보라고 싫다면서 치료받으라고 여기에 쫓아 보냈어. 날 감시하라고 도우미 두 명까지 보냈고. 나 겨우 도망쳐 나온 거야. 소월아, 나도 데리고 가면 안 돼? 그 사람들한테 다시 잡혀가면 끝이야. 나 밥도 못 먹게 하고, 밤마다 수갑으로 묶어놓고 채찍으로 때리기까지 한단 말이야.
민선화는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그들 또한 지금처럼 변한 유월의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었으니 말이다. 대문이 굳게 닫혔다. 해이는 문밖에 서서 힘겹게 말했다. “나한테 조금만 시간을 줘. 모든 걸 똑똑히 알고 난 뒤 다시 올게. 만약 그 여자와 나 사이에 정말 무슨 일이 있었다면, 그것 또한 너한테 다 얘기할게.” 소현아는 바닥에 떨어진 닭 다리를 주웠다. 방금 전 유월이 던진 의자가 그녀를 향해 날아오는 바람에 깜짝 놀라 손에 들고 있던 닭 다리를 떨어뜨렸던 것이다. 그녀는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먼지를 털어내며 말했다.“떨어진 지 3초 안 지났으니까 먹어도 괜찮아.” 밖에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자, 유월은 문을 열었다. 텅 비어버린 마당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갔어... 정말 가버렸어!” 넋이 나간 채 멍하니 서 있는 유월의 모습에 민선화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다가가 말했다. “유월아, 왜 그래? 유월아...” “유월아, 엄마 무섭게 이러지 마!” “유월아, 제발 말 좀 해 봐!” “언니... 왜 그래요.” 민선화가 유월에게 손을 뻗은 순간, 그녀는 갑자기 정신을 잃고 쓰러져버렸다. 모두가 깜짝 놀라 허둥지둥 그녀에게 달려갔다. 희미하게나마 어둠을 비추던 달빛이 사라졌다. 달님은 어디론가 숨어버린 듯했고, 짙은 먹물 같은 하늘에는 별빛조차 보이지 않았다. 밤은 점점 더 깊어져 갔지만, 강영수에게는 절대 잠들지 못할 밤이었다... “오늘 밤엔 일단 여기서 자요. 내가 내일... 장소월 씨한테 데려다줄게요.” “네, 강영수 씨.” 소현아는 기지개를 켜고 침대에 몸을 뉘운 뒤 몇 초도 채 지나지 않아 바로 깊이 잠들었다. 강영수는 문밖에 앉아 아궁이에 불을 지폈다. 이 집은 그가 유월과 함께 살려고 지어놓은 신혼집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시각, 유월을 향한 그의 마음은 자신도 모르게 변화하고 있었다. 도대체 무엇이 바뀌었는지 그 또한 알 수 없었다... 규영과 미경은 밤새도록 낙일 마을에서
“아이고, 이게 무슨 일이야! 해이야, 이 사람 도대체 누구야? 이 여자가 한 말이 정말 사실이야? 송 선생님이 아니라 장소월이였다고? 그리고 오늘 친정으로 돌아오는 날인데 왜 너 혼자 돌아온 거야? 유월이는 어쩌고?” 소현아는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풍성하게 차려진 식탁에서 닭 다리 두 개를 집어 들고 해이 뒤로 몸을 숨겼다. “너무 무서워.” 소현아의 몸은 온통 흙투성이였다. 진흙탕에 넘어져 울먹거리고 있던 차에 마침 순찰을 돌고 있던 경찰에게 발견되었다. 그렇게 그녀는 그들과 함께 경찰서로 향했다. 그녀가 찾으려는 사람에 대해 설명하자, 경찰은 곧바로 이곳으로 그녀를 데려왔다. 이곳에서 해이를 본 소현아는 분명 소월이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녀를 쫓아내려 했지만, 소현아는 얼굴에 철판을 깔고 그곳에 눌러앉았다. 다행히 낙일 마을 사람들은 모두 선하고 순박했고, 치안도 좋은 편이었기에 소현아는 무사히 지낼 수 있었다. 해이는 뛰쳐나간 유월을 쫓아가지 못하고 먼저 처가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소현아를 다시 만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부모님의 질문에 그는 아무런 답도 할 수 없었다. “저도 모르겠어요. 저 역시 그 답을 찾고 있어요. 유월이는 괜찮을 거예요.” “시간이 늦었는데 아직도 돌아오지 않고 있잖아. 거기 멍하니 서 있지 말고 얼른 나가서 찾아봐.” “찾을 필요 없어요!” 돌연 유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가 돌아온 것이다. 유월은 문턱을 넘어 들어와 벽에 걸려있던 그림을 집어 던졌다. “장소월은 네 약혼녀고 저 여자도 널 아는 친구라잖아. 다들 널 찾아왔는데 우리 집에서 뭐 하는 거야! 당장 우리 집에서 나가. 그리고 우리 결혼은 오늘부터 없던 일로 해. 나 양유월, 아무리 남자가 좋아도 남이 버린 걸 주워서 같이 살진 않아. 다른 여자와 결혼까지 한 남자는 더더욱 싫어.” “나가! 다 나가라고!” “너무 무서워! 소월이 그림...” 소현아는 내던져진 그림을 보고 재빨리 뛰어나갔다. 액자 유리는
규영과 미경은 재빨리 그녀를 부축하며 물었다. “사모님, 어디 아프세요? 지금 당장 병원에 가요!” “혹시 여기가 아픈 거예요?” 규영이 소현아의 아랫배에 손을 올렸다. 행여 아이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주인님은 그들을 절대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소현아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응가 마려워요.” 미경은 곧바로 가방에서 휴지를 꺼내 건넸다. “사모님, 이 근처에는 화장실이 없어요. 정 급하시면 저쪽 구석에서 볼일 보세요. 저희가 망봐드릴게요.” 소현아는 휴지를 받아들고 나무 뒤로 달려갔다. “잘 지켜봐야 해요. 아무도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해요. 안 그러면 나 화낼 거예요.” “알겠습니다, 사모님.” 소현아는 고개를 빼꼼 내밀고 입을 가린 채 큭큭 웃어댔다. “내가 바보라고? 너희들이야말로 바보야.” 소현아는 재빨리 시내로 돌아가 다시 그곳으로 향했다. 그녀는 손에 든 사진을 보여주며 물었다. “혹시 이 사람 못 봤어요? 제 언니인데, 언니가 사라졌어요.” 사람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저었다. “못 봤어요, 본 적 없어요.” 소현아는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물었지만 아무런 성과도 없었다. 그렇게 어느덧 밤이 되었고, 그곳 지리에 익숙지 않은 그녀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 채 헤매고 있었다. 10분 뒤, 규영과 미경도 소현아가 사라졌다는 것을 알아챘다. 주변을 다 찾아보았지만 그녀는 좀처럼 보이지가 않았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희미한 가로등 불빛만이 빛나고 있었다. 미경이 울먹이며 말했다. “사모님이 사라지셨어. 이제 어떻게 해!” “주인님이 아시면 분명 우릴 가만두지 않으실 거야. 우리 그냥 주인님께 얘기하자” “안 돼... 안 돼. 절대 주인님이 알게 해선 안 돼.” “노부인께선 사모님 배 속에 있는 아이가 무사히 태어나기를 바라셔. 만약 주인님께서 아시면 틀림없이 아이를 없애려 하실 거야. 노부인의 명령을 완수하지 못하면 우리는 살아남을 수 없어. 사모님은 복이 많은 사람이니까, 아이와 함께 무사히 계실 거야
“저를 아세요?” 소현아는 눈앞의 남자가 왜 이런 이상한 질문을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당연히 알죠! 예전 소월이가 괴롭힘을 당하고 쓰러졌을 때, 제가 병원에 데려다줬었잖아요. 당신은 저한테 정말 고맙다고 하면서 꼭 인사를 하고 싶다고 했고요. 그리고 학교에서 소월이를 잘 챙겨주라고 부탁도 했잖아요. 저 당신 말대로 잘했어요. 다른 사람들이 소월이 괴롭히려고 하면 제가 다 막아줬다니까요. 그런데 소월이랑 결혼식 앞두고 어디에 가셨던 거예요? 그 후로 소월이도 사라져 버렸어요.”“저 소월이를 얼마나 찾아다녔는지 몰라요...”“됐어요! 그만 해요!” 유월이 갑자기 발작하듯 소리쳤다.해이는 그 자리에 굳은 듯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순간, 그의 머릿속에 조각난 기억들이 스쳐 지나가며 격렬한 두통을 유발했다.규영과 미경은 눈앞의 남자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눈치채고는 무슨 문제가 생기는 건 아닐까 두려워 서둘러 변명했다.“선생님, 아가씨... 정말 죄송합니다. 저희 사모님께서 머리를 좀 다치셔서 가끔 헛소리를 할 때가 있어요. 마음에 두지 않으셔도 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사모님, 이제 가시죠. 밖에 비도 그쳤어요.”두 사람은 소현아를 반강제로 끌고 나갔다. 하지만 소현아의 입술은 멈출 줄을 몰랐다. “헛소리 아니에요. 다 사실이란 말이에요. 하지만 당신한텐 이제 기회가 없을 거예요, 소월이는 이미 다른 놈이랑 결혼했거든요.”규영은 재빨리 소현아의 입을 틀어막고 서둘러 그곳에서 벗어났다.유월은 넋이 나간 표정으로 멍하니 서 있는 해이를 바라보았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그런 그의 모습을 보니 불안한 마음에 돌연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너 지금 나랑 결혼한 걸 후회하는 거야?”해이는 미간을 찌푸린 채 그녀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녀를 바라보는 해이의 눈빛이 변해버렸다. 그의 눈동자엔 더이상 예전의 부드러움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변하고 있다. 그 여자가 낙일 마을에 온 이후부터 그의 마음은 점점 예전과 달라지고 있었다.해이
“제 과거에 대해선 여전히 말해주고 싶지 않은 거죠? 그리고 아까 옆에 있던 그 사람 저랑 많이 닮았던데, 혹시 저 그 사람과도 아는 사이인가요?” “지나간 일은 그냥 과거에 묻어두는 게 나을지도 몰라. 네 옆에는 이제 유월 씨가 있잖아. 나는 네가 위험에 처하는 걸 원치 않아. 네가 무사하게 살아가기를 바랄 뿐이야. 그 사람이 너에게 빚진 것들은 앞으로 내가 모두 갚아줄게.” 정말 그런 날이 올 수 있을까... 널 원래의 강영수로 되돌릴 수만 있다면, 난 기꺼이 내 목숨도 내던질 거야. 내가 너한테 큰 빚을 졌어... “소월아!” 강용의 목소리였다.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시선을 돌려보니, 우산을 든 강용이 다급한 표정으로 그녀를 찾고 있었다. 강영수와 가까워지자 강용은 애써 마음속 두려움을 누르려 그의 시선을 피했다. 과거 강영수는 그에게 자비 따위 베풀지 않았었다. 다리를 분질러 놓았을 때엔 2주가 넘도록 병원 신세를 져야만 했다. “아주 잠깐 눈을 뗐는데, 고새를 못 참고 사라져?” 장소월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만하고 물기부터 닦아. 그리고 얼른 집에 가서 옷 갈아입어야 해. 감기 걸리면 안 되잖아.” 강용은 우산을 든 채로 그녀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네가 닦아줘!” 한 번 던져본 농담이었지만, 장소월은 정말로 휴지로 그의 이마에 묻은 빗물을 닦아주었다. “기분 좋아?” 강용은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너무 좋아.” “만족해?”“만족하지, 그럼 만족하고말고.” “이제 가자.” 장소월은 옆에 서 있는 해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난 이만 갈게.” “네.” 강용의 차는 멀지 않은 곳에 주차되어 있었다. 그가 들고 있는 우산은 대부분 장소월에게 치우쳐 있었기에, 강용의 어깨는 흥건히 젖어 있었다. 차에 탄 뒤 강용이 그녀에게 깨끗한 담요를 건네주었다.“우선 이걸로 닦아, 감기 걸리지 않게.” “혹시 괜찮다면, 깨끗한 옷이 있으니까 여기서 갈아입어. 내가 차에서 내려줄 테니까.” 장소월은 담담하
두 명의 익숙한 시선이 장소월에게 고정되었다. “...아가씨, 내가 뭘 사 왔는지 봐봐.”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장소월이 고개를 돌려보니 선글라스를 낀 강용이 탕후루 두 개를 들고 서 있었다. 그녀는 두 사람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강용에게 다가가 말했다. “어디에서 산 거야?” 강용은 유월의 곁에 있는 남자를 차마 쳐다볼 수가 없어 탕후루를 장소월에게 건네준 뒤 홱 뒤돌아 가 버렸다. 장소월은 그들을 향해 옅은 미소를 지었다. 전에 어떤 모순이 있었든, 어쨌든 서로 알고 지내던 사이였기에 길에서 마주친 그들을 못 본 척할 수는 없었다. 장소월이 멀어진 뒤, 유월은 멍한 표정으로 서 있는 해이의 팔을 세게 꼬집었다. “뭘 봐. 왜 아직도 보고 있어. 이미 저 멀리 갔잖아. 도대체 누가 네 와이프야? 차라리 그냥 저 여자한테 가 버리지 그래!” “그 여자가 아니라, 옆에 있던 남자. 익숙한 얼굴이었어. 전에... 어디선가 봤던 것 같아.” “됐어. 더이상 생각하지 마. 오늘은 친정으로 돌아가야 하잖아. 부모님께 무슨 선물을 사드릴지나 생각해.” 유월은 무언가 두려웠는지 급히 그의 생각을 끊어놓았다. 강용은 자연스럽게 장소월의 뒤쪽으로 걸어갔다. 그녀가 그를 보며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아직도 영수가 무서워?” “무서운 게 아니야. 핏줄이 짓누른다고 해야 하나.” 장소월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답 괜찮네.” “내가 형을 구해 낙일 마을에 데려오고 난 뒤 며칠 후, 형은 혼자서 몰래 병원을 뛰쳐나갔어. 그러다 다행히 저 집안사람들을 만나서 잘 지내게 된 거야. 돈으로 보상을 하겠다고 했는데도 한사코 거절하더라고” “유월 씨네 가족 말하는 거야?” 강용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어쩌다 보니 저 둘을 맺어준 꼴이 됐네.” “차라리 잘 됐지 뭐. 형이 아무것도 기억 못 하니까 난 당분간 편히 살 수 있겠어. 형이 뭐라도 기억해내면 나 죽여버릴지도 모르잖아!” 담담하게 이런 말들을 쏟아내는 걸 보니, 강용은 과거의
온웅정은 그녀를 살펴보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나는 사람을 치료할 때 다른 사람이 옆에 있는 걸 좋아하지 않네. 자네 혼자 들어오고, 저 버릇 없는 녀석은 밖에서 기다리게 하게.” “어이, 늙은이, 내가 누군지 알아요?” 장소월이 소리쳤다. “강용!” 강용은 주머니에서 담배 한 대를 꺼내 입에 물었다. “알았어. 밖에서 기다릴 테니까 무슨 일 있으면 바로 불러. 저 영감이 널 속이려고 하면 내가 대신 혼내줄게.”“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날뛰는 망둥이 같은 놈.” 장소월은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 “강용, 어른한테 그렇게 무례하게 굴면 안 돼. 밖에 나가서 산책 좀 하고 있어. 나중에 여기서 다시 만나자.” “알았어.” 장소월은 그를 따라 내당으로 들어갔다. “앉게. 손은 이쪽에 올려놓고.” 장소월은 그가 시키는 대로 움직였다. 온웅정은 그녀의 맥을 30초 정도 짚고 난 뒤 손을 내려놓았다. “...심장 박동이 좀 불규칙하네. 이곳 환경이 몸에 안 맞는 건가?” “몸에 큰 이상은 없으니, 돌아가서 푹 쉬고, 일찍 자고, 맛있는 거 많이 먹으면 금방 나을 걸세.” 장소월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제가 알고 싶은 건 그게 아닙니다. 제가 아이를 가질 수 있을지... 그게...” “아이를 가질 수 있을지 없을지는, 자네가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난 그런 건 봐줄 수 없네. 자네가 마음의 매듭을 풀지 못하고 계속 이 상태로 살아간다면, 누구도 자네를 구할 수 없네. 자네의 가슴엔 기가 꽉 막혀 있어...” “오랫동안 억누르고 밤에 잠도 제대로 못 자니, 몸이 망가질 수밖에.” “스스로에게 물어보게. 제대로 쉬어 본 지가 얼마나 되었는가?” “전에 내가 처방해 준 약을 먹고도 효과를 보지 못했나?” 장소월은 고개를 저었다. “... 저는 아직 기회가 있을 줄 알았습니다.” 그녀의 얼굴에는 감출 수 없는 슬픔이 드리워져 있었다. “지금까지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걸세. 자네처럼 운 좋은 사람도 많지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