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월이 망설임 없이 바다에 뛰어든 것은 확실히 그의 예상 밖이었다.다른 사람으로 변한 것 같은 장소월, 도대체 무엇이 그녀에게 이런 변화를 안겨 주었을까?아니면, 그녀가 무엇인가를 알게 된 걸까?그녀가 이 씨 집안을 반격할 때부터 전연우는 이상함을 감지했다.만약 정말 그렇다면, 그는 그녀를 남겨둘 수 없다.강씨 집안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기회는 더욱이 주지 않을 것이다.백윤서는 전연우가 자료를 챙겨서 떠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에게 그동안 도원 마을에 있었던 일에 대하여 조금도 묻지 않았다. 그가 이런 태도를 보일수록 백윤서는 전연우가 자신을 신경 쓰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전연우의 서재 테이블에서 사진 더미를 볼 때까지 말이다. 사진을 본 백윤서는 머리가 터질 듯이 아파졌다. 장소월이 장가네를 떠난 시간 동안, 전연우는 장소월에 대하여 결코 무관심한 태도가 아니라 오히려 사람을 붙여 그녀를 감시하였다.만약 장소월에게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았다면 전연우는 친히 도원마을로 오지 않았을 것이다.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전연우와 같이 크면서 힘든 일도 같이 겪었다. 그들은 서로 가장 친한 사이이고 유일한 가족이라고 할 수 있다.그녀가 해외에 있는 몇 년 동안, 백윤서는 전연우가 점점 낯선 존재가 되었고, 예전과 달라졌다는 걸 느꼈다.그녀는 그를 잃을까 봐 정말 두렵다.전연우는 회사로 돌아가 회의를 마치고 회의실을 나서자 기성은으로부터 걸려 온 전화를 받았다.기성은은 비용을 지불하고 손에 명세서를 들고 보고했다.“아가씨는 방금 수혈을 마쳤고 복부의 상처도 봉합했습니다. 그 외에 다른 내상은 없습니다. 하지만... 열이 39.8도까지 올라가 일주일간 입원해야 합니다.”그는 마음속으로 제발 그더러 남아서 장소월을 돌보라고 하지 말라고 기도하였다.그럴바에는 그는 죽음을 선택할 것이다.전연우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시간을 보니 오후 4시 30분이었다.“밤낮으로 돌봐줄 수 있는 간병인을 찾아.”“네.”전화를 끊은 후, 기성은은 자신이 뭔가
그의 눈빛은 마치 그녀를 잡아먹기라도 할 듯 사나웠다.장소월은 차마 그와 눈을 마주칠 수 없어 침대 한 켠에 앉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그녀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와 오빠의 보살핌 속에서만 살았다는 생각에 집 밖 세계도 한 번쯤은 경험해보고 싶었어요. 오빠... 죄송해요...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거예요. 다시는 성질을 부리지도 않을게요.”지금 전연우와 맞서는 건 현명한 선택이 아니다.전연우는 이미 26살인 데다 장해진은 일찍 퇴직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그가 확실히 회사를 물려받고 권력을 꿰찬다면 그녀는 도마 위의 생선이 되어 절대 그의 손아귀를 벗어날 수 없게 된다.그녀는 절대 전연우를 이길 수 없다. 장수월은 일찍 깨달았어야 했다. 장씨 가문에서 도망칠 수 없다면 집안의 말에 고분고분 따를 수밖에 없다는 걸 말이다.전연우와 결혼하지만 않는다면 전생의 비극은 시작되지 않을 것이다.“아빠는 저더러 대학을 졸업한 뒤 결혼하라고 하셨어요. 전 그 말씀에 따를 거예요. 하지만 결혼 상대에 대해선... 오빠, 남편감은 제 손으로 선택할 수 있도록 아빠를 설득해 주실 수 있어요? 불행한 결혼생활을 보내고 싶진 않아요.”전연우의 눈동자에 순간 어둠이 비쳤다. 이어 그는 이내 미소를 짓더니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소월아, 넌 아직 어려서 그런 것들은 생각할 필요 없어. 지금은 몸조리나 잘해. 앞으로의 일은 앞으로 다시 얘기하면 돼.”할 수만 있다면 장소월은 정말이지 그의 뺨에 힘껏 따귀를 날려버리고 싶었다. 그녀가 소리쳤다.“이 모든 상황은 다 오빠가 만든 거잖아요. 내 앞에서 뭣 하러 좋은 사람인 척하는 거예요? 내 계획은 모두 오빠로 인해 망가져 버렸단 말이에요.”어린 새가 겨우 날개를 얻었건만, 이제 그 어린 새는 마지막 털 하나까지 깡그리 뽑혀버렸다.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전연우 씨, 검사는 이미 마쳤습니다. 백윤서 씨는 괜찮으세요. 병원비만 지불하고 가면 될 것 같아요.”장소월의 눈에 간호
다음 날, 장소월의 체온은 내려가기는커녕 더 높이 치솟아 올랐다. 그녀의 맑은 눈에 진주 같은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그녀는 괴로움에 몸부림쳤다. 만약 간호사가 일찍 발견하지 않았다면 정신을 잃었을지도 모른다.기성은이 고용한 간병인은 오늘 점심에야 도착한다. 장소월을 보살피는 데에 익숙해진 오 아주머니는 이른 아침 그녀에게 깨끗이 세척한 옷을 가져다주러 병원에 도착했다. 힘들어하는 그녀의 모습에 오 아주머니는 몰래 눈물을 훔쳤다. 이럴 줄 알았다면 장소월을 그곳에 머물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이 아이는 어릴 적부터 고생이라는 건 모르고 자라지 않았던가. 오 아주머니는 후회를 금할 길이 없었다.링거를 맞고 나서야 체온이 조금 내려갔다.하지만 침대에 누워 있는 사람의 의식은 좀처럼 돌아오지 않았다.오 아주머니는 돌아가야 했기에 병원에서 줄곧 그녀를 보살펴 줄 수 없었다. 하여 조심해야 할 게 무엇인지, 어떤 음식을 먹어야 하고 어떤 음식을 피해야 하는지를 자세히 간병인에게 알려주었다.장소월은 하루 내내 잠을 자고 나서야 의식을 되찾았다.서른 살 남짓한 여자 간병인이 마 죽 한 그릇을 들고 들어와 장소월에게 먹였다.하지만 몇 입 먹지도 않았음에도 장소월은 돌연 위가 뒤집어지는 듯한 메슥거림에 먹은 것을 모두 토해냈다.죽에 넣고 함께 끓은 마가 채 익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간병인은 다급히 휴지통을 갖고 와 장소월의 입 쪽에 가져갔다. 손으로 등을 두드려주는 그녀의 얼굴엔 짜증스러움이 가득 섞여 있었다.장소월이 다 토해내자 간병인이 그녀에게 물 한 컵을 건넸다.“이 죽, 더 드실 거예요?”장소월이 기진맥진해져 창백해진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버리세요.”오 아주머니가 만들어 준 것 외 다른 음식은 쉬이 넘어가지 않는 그녀였다. 아마 위가 이미 익숙할 대로 익숙해져 다른 음식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다.그녀는 돌연 오 아주머니가 해준 쿠키가 먹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오 아주머니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오랫동안 그녀를
그 말은 장소월에게 크나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그녀가 임신을 못 했던 게 자궁 기형 때문이었단 말인가?장소월은 얼마나 전연우의 아이를 갖고 싶었는지 모른다. 아이만 생긴다면 그는 더는 다른 여자를 찾지 않을 테니 말이다.하지만... 아이가 그토록 어렵게 세상에 왔음에도 전연우는 장소월을 수술대에 눕히고 아이를 지워버렸다.전생에서 장소월은 차 사고로 인해 2주 동안 병상에 누워있었다. 몸을 회복한 후 검사를 받았고 그 검사결과는 전연우가 가져갔다.전연우는 왜 그녀에게 모두 다 정상이라고 알려줬을까?만약 전연우가 그녀에게 숨기지 않았다면 그녀는 일찌감치 병원에 가서 치료받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그녀가 품었던 아이가 죽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전연우의 속셈을 알아차리니 장소월은 손발이 얼음장같이 차가워졌고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그가 송시아와 결혼했던 건 후손을 원했던 게 아니었다.전연우가 갖고 싶었던 건... 오직 송시아와 낳은 아이였을 뿐이다.당시 그녀가 위암에 걸렸던 건 자궁암이 전이되었기 때문이다. 암을 발견했을 땐 이미 말기에 다다라 있었다.이제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전연우는 사실 모두 다 알고 있었다! 그녀가 암에 걸려 외롭고도 고통스럽게 병원에서 죽어갈 것이라는 것도 말이다.그녀가 죽는다고 해도 시체조차 관여하지 않을 것이다.그는 장소월이 죽기보다 못한 삶을 살며 시들어 가는 걸 지켜보고 싶었을 뿐이다.하여 전생의 결혼기념일 날, 전연우는 송시아와의 관계를 밝히고 두 사람의 아이까지 데려왔다.그녀에게 충격을 주기 위해서 말이다!전연우... 이 지독한 놈!정말이지... 너무나도 지독하다.전생의 매시간, 매 순간을 떠올릴 때마다 장소월은 심장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그때의 고통은 이번 생에서도 해소할 길이 없다.전생의 기억을 갖고 다시 태어나 살아가는 건 정말 죽는 것보다도 더 고통스럽다.마침 장소월의 병실을 지나가던 간호사가 가슴을 부여잡고 있는 장소월을 보고는 걱정되는 마음에 다가갔다.“장소월 씨, 왜
차라리 이렇게 고통 속에서 죽는 게 나을 것 같다!전생에서 그녀는 어리석어 전연우의 진짜 속셈을 알아채지 못했다.지금 이 시간, 자세히 되돌아볼 때마다 영원히 치유될 수 없는 상처가 더 깊게 새겨지는 것 같았다.눈에선 끊임없이 눈물이 흘러내렸지만 조금의 소리도 내지 않았다.그녀가 무표정하게 굳은 얼굴로 눈물을 닦아냈다.“괜찮아요. 조금 전 벌레가 눈에 들어가서요.”간호사는 이상하다는 듯 장소월을 쳐다보았다. 병원에 무슨 벌레가 있단 말인가?설마 미친 건 아니겠지!간호사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은 채 절반가량 남은 링거액을 보고는 속도를 늦추었다.간호사는 병실 문을 닫은 뒤 장소월의 주치의에게 달려가 그녀의 정신 상태를 알렸다.군림 공천 회관.여긴 80년대 때부터 운영해 오던 곳이었는데 여전히 8, 90년대의 인테리어를 유지하고 있었다.2층 룸, 건장한 체격의 남자가 커다란 창문을 통해 1층에서 노래를 하는 여자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여자는 꽃무늬 붉은 색 원피스를 입고 여우 털목도리를 두르고 있었다. 긴 파마머리에, 귀엔 반짝반짝 빛나는 귀걸이를 걸고 있었는데 조명이 비추니 그녀의 백옥같은 피부, 맑은 눈동자, 그리고 매끄럽고 눈부신 몸매가 환히 드러났다. 노래를 부르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강만옥이었다.소파 위엔 서철용이 짙게 화장을 덧칠하고 짧은 원피스를 입은 두 미녀를 양팔로 껴안고 앉아있었다. 그의 셔츠는 단추가 몇 개 풀어져 있었는데 가슴팍엔 여자의 빨간 립스틱 자국이 찍혀있었다.“네 동생 말이야. 내가 손을 쓰기도 전에 거의 미쳐가고 있대. 쯧... 너 정말 마음이 아프지도 않아?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내 수하가 매일 지켜봤는데 혼자 몰래 눈물만 흘린대. 그 말을 듣고 마음이 찢어지는 줄 알았다니까! 그토록 냉정하게 눈 하나 깜빡이지 않는 건 단연코 너밖에 없을 거야!”서철용이 여자가 먹여주는 포도를 먹고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너 잊었어? 난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라는 거. 모르면 입 다물어.”전연우가 손
“애초에 그 약은 네가 나한테 먹이라고 부탁한 거잖아. 장소월은 네 계획 중 일부분 아니야? 장소월을 무너뜨리고 장해진이 제 손으로 자신의 딸을 감옥에 보내는 모습을 지켜보겠다며. 만약 장소월의 재미를 보려는 거라만 내가 먼저...”서철용이 게걸스럽게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너만 괜찮다면 우리 둘이... 같이 해도 돼. 우린 친구잖아. 그런데 말이야... 난 지금까지 네가 여자 몸에 손대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너 설마 거기에 문제라도 있는 거야?”전연우가 차갑게 굳은 얼굴로 쏘아붙였다.“한마디만 더 하면 벙어리로 만들어 버릴 테니까 알아서 해.”서철용의 가는 뱀눈에 붉은 핏줄이 서렸고 피라도 물든 듯한 붉은 입술은 비열하게 위로 곡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그가 어깨를 들썩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왜? 싫어? 전연우, 너 이런 모습 처음이야!”“...”장소월을 떠올리니 전연우는 손에 움켜쥐었던 모래가 걷잡을 수 없이 유실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마음속 어딘가 커다란 구멍이 뚫렸고 어떻게 메워야 할지 알 길이 없었다.늘 어딘가 찝찝한 기분이었다.“10년이나 같이 있더니 정이라도 들었어? 우리 내기 하나 할까? 네가 장소월을 사랑하게 될지 아닐 지로 말이야. 네가 이기면 이 군림 공천 회관의 10퍼센트 주식을 넘겨주고 네가 언제든 수족으로 부릴 수 있는 부하가 될게.”전연우가 소파 위에 걸쳐놓은 정장 외투를 입은 다음 단추를 채우며 말했다.“심심해?”“왜? 무서워?”옷을 다 입은 전연우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를 쏘아보았다.“네 생각에 너와 장소월 중 누가 더 살아있을 가치가 높은 것 같아? 장소월을 건드리고 싶다면 마음대로 해. 하지만 장해진에게 걸리지 않는 게 좋을 거야. 걸리면 누가 더 비참하게 죽을지 너도 잘 알고 있겠지?”전연우가 말을 마친 뒤 걸음을 옮겼다. 한 발자국 한 발자국 걸을 때마다 살얼음 같은 분위기는 점점 더 사람으로 하여금 오금이 저려오게 만들었다.돌연 그가 문 앞에서 걸음을 멈춘 뒤 서철용을 보며
강만옥이 고개를 끄덕였다.“네.”장해진이 그녀의 가늘고 부드러운 다리를 쓰다듬으며 무언가 짚이는 게 있는 듯 말했다.“마음대로 하라고 해! 회사에서 대부분 일을 연우가 도맡아 하잖아. 가끔 나와 스트레스를 푸는 것도 괜찮지 뭐. 왜 갑자기 그놈한테 관심을 갖게 된 거야? 그 작은 머리로 무슨 생각을 하는 건데?”평소 의심이 많은 장해진의 질문에 강만옥이 조심스레 말했다.“전 그저 전연우도 이곳에 있다는 걸 알려드리고 싶었을 뿐이에요. 혹여 이후 회장님께서 알게 된다면 제 입장이 난처해질까 봐요. 제가 일부러 숨겼다고 오해하시면 어떻게 해요.”장해진이 그제야 찌푸렸던 이마를 폈다. 이어 그녀의 목을 확 끌어안고는 그 위에 진득하게 뽀뽀했다.“알았어! 내일 나랑 같이 쇼핑하러 갈래? 사고 싶은 거 있으면 다 사!”“두 사람 대체 뭐라 소곤거리는 거야? 우리가 들으면 안 되는 거라도 있어?”“얘기할 게 뭐가 있겠어. 침대 위 일이겠지!”“아가씨, 시간 있을 때 우리 해진이 몸보신 좀 시켜줘요.”마음속의 말을 장난으로 내뱉는 건 지극히 일반적인 일이다....복부의 상처에 딱지가 앉아 시도 때도 없이 느껴지는 간지러움 때문에 견딜 수가 없었다. 직접 손을 대 긁을 수도 없으니 장소월은 너무나도 괴로웠다.의사가 흉터가 남을 거라고 했으나 그녀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그녀는 침대에서 내려간 뒤 간병인을 보냈다. 이제 더 이상 다른 사람의 손길을 필요로 하지 않다는 생각에 말이다.저번 전연우가 한 번 다녀간 이후 오 아주머니 외에 아무도 그녀를 찾아오지 않았다.그들에게 있어 그녀는 아무런 소용도 없는 사람이다. 오 아주머니는 장소월이 바깥 음식을 입에 맞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늦은 시간 집에서 음식을 가져왔다.병원에 입원해 시간을 보내니 움직임 없이 가만히 누워있었음에도 살이 찌기는커녕 몇 킬로나 야위었다.누군가 병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창가에 앉아 책을 보던 장소월이 자리에 앉은 채 창밖을 쳐다보았다.“들어오세요.”문이 열리자 검
장소월이 책을 놓고 다가가자 경호원이 도시락을 열었다. 3층 도시락이었다.첫 층은 케이크, 두 번째 층엔 탕수육 몇 조각, 세 번째 층엔 야채 영양죽이 들어있었다.장소월은 자신의 병을 알게 된 그날부터 매일 밤 입원 병동 아래 정자에서 홀로 눈물을 훔쳤다.그가 어이없다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왜 매번 당신을 만날 때마다 울고 있는 거예요?”장소월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순간 그녀는 그의 눈동자 속에 어려있는 안타까움을 볼 수 있었다.그가 부드럽고도 조심스레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그는 그녀가 만난 사람 중 가장 따뜻한 사람이다. 비록 그가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말이다.장소월은 그녀에게 이런 따뜻함을 안겨주는 사람이 낯선 사람이 될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그날 이후 그는 종종 그녀를 찾아왔고 끼니마다 사람을 보내 그녀를 챙겼다. 가장 신기한 건... 그는 장소월이 무슨 음식을 좋아하는지 속속들이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장소월은 그가 왜 자신에게 이토록 잘해주는지 알 수가 없었다....경호원이 설명했다.“케이크는 도련님께서 아가씨댁 이모님한테 배워 만드신 거예요. 탕수육도 마찬가지고요... 도련님께서 난생처음으로 요리하신 거니 맛이 별로여도 정성만큼은 알아주세요. 만약 정말 넘기기 힘드시다면 억지로 드시지 않아도 됩니다.”장소월이 물었다.“왜 세 조각밖에 없는 거죠?”경호원이 대답했다.“소월 아가씨의 몸은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기 때문에 고기는 많이 드시면 안 됩니다. 다 나으시면 반드시 몸보신을 시켜주겠다고 도련님께서 약속하셨습니다.”‘그랬구나.’장소월은 경호원이 건네준 젓가락을 받아 탕수육을 집어먹었다. 그녀가 입안에서 몇 번 씹더니 돌연 멈추었다. 하지만 이내 표정을 감추고 다시 꼭꼭 씹고는 천천히 삼켰다.장소월은 그의 호의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오 아주머니를 제외하고 그녀에게 음식을 만들어 준 사람은 아무도 없다.장소월은 죽과 탕수육을 모두 비우고 난 뒤 남은 케이크는 저녁에 먹으려고
죽 한 그릇을 먹여주는데 무려 20분이나 걸렸다.소민아는 그에게 수면 촉진 성분이 들어있는 약을 가져다주었다. 신이랑이 침대에 누워 그녀의 손을 잡았다.“나랑 같이 있어 줘요. 안 가면 안 돼요?”소민아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알겠어요. 뭐든 이랑 씨가 몸을 다 회복한 다음 얘기해요.”옆에 앉아 신이랑이 잠드는 것을 지켜보던 중 핸드폰에 배터리가 없다는 것을 알아챈 그녀는 천천히 손을 빼냈다. 하지만 신이랑은 그녀의 움직임을 느끼기라도 했는지 불안한 얼굴로 다시 눈을 떴다. 소민아는 환자를 보살피는 게 이렇게까지 어려운 일인지는 정말 몰랐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침대에 엎드려 잠시 잠을 청했다.창밖에서 부슬부슬 내리던 비가 드디어 그쳤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돌연 불어온 차가운 바람에 그녀가 어깨를 움츠렸다.그때, 그녀의 귀에 미세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눈을 뜬 순간, 어둠 속에서 그림자 하나가 휙 지나갔다.“기성은 씨, 당신이에요?”대답이 들려오지 않자 소민아는 자신을 잡고 있던 신이랑의 손을 풀고는 바로 일어나 남자를 쫓아갔다. 그녀가 뒤에서 그를 끌어안은 순간 복도의 센서 등이 환하게 어둠을 밝혔다. 바깥 희미한 가로등 아래에선 차가운 바람이 불고 있었다.“제가 문자 그렇게 많이 보냈는데 왜 답장 안 했어요?”“이거 놔요.”“설명해주기 전엔 놓지 않을 거예요.”작게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에 기성은은 소민아의 손을 잡고 바로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소민아는 벽을 더듬어 조명을 켜려다 말했다.“따라와요.”이후 그녀는 옆쪽 간병인 방으로 그를 데려갔다. 그의 손가락을 만져보니 얼음처럼 차가웠다.“잠시만 기다려요. 제가 뜨거운 물 가져올게요.”소민아는 따뜻한 물을 가져온 뒤 그가 손으로 감싸게 하고는 그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갰다.“조금만 기다려요. 곧 따뜻해질 거예요.”두 사람은 함께 침대에 앉아 서로를 바라보았다. 눈앞에 분명 기성은이 살아 숨 쉬고 있었지만, 자신과 그사이에 커다란 벽이 있다는 느낌을
하지만 기성은은 못 본 척 시선을 피해버렸다.문이 닫힌 지 얼마 되지 않아 거의 숨이 끊어진 것 같은 사람이 병실에서 던져져 벽에 강하게 부딪혔다. 그 충격에 피를 한 움큼 토해냈다.소민아는 너무 놀라 들고 있던 음식까지 바닥에 떨어뜨렸다.“형님, 바깥에 사람이 있습니다.”“이런 우연이 있나. 오늘 아침 만났던 여자잖아.”소민아는 그들이 다가오자 빠르게 반응하며 말했다.“일부러 들으려고 한 건 아니에요. 그냥 지나가던 중이었어요.”적잖은 시선이 그녀의 몸을 아래위로 훑고 지나갔다. 그중 한 명이 말했다.“작두, 이 여자 누군지 알아?”작두라고 불리는 남자가 아래턱을 문지르며 걸어 나오고 있는 남자를 보며 말했다.“형님, 이년 어떻게 처리할까요? 대체 얼마나 들었는지 모르겠네요.”기성은은 검은색 가죽 신발을 신고 무거운 발걸음을 내디뎠다.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낯선 그의 모습에 소민아는 돌연 덜컥 겁이 났다.그녀는 어찌할 바를 몰라 자리에 굳어버렸다. 기성은은 소민아 앞에 걸어와 손가락으로 땅에 떨어진 음식 주머니를 줍고는 그녀에게 건네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입 간수 잘해요. 얼마를 들었든, 얼마를 보았든 한 글자라도 발설하면 그 후과 스스로 책임져야 할 거예요.”소민아는 머리를 푹 숙이고 다급히 대답했다.“네... 알겠어요.”기성은이 말했다.“너희 둘은 이곳에서 잘 지키고 있어.”“네, 형님.”“왜 계속 서 있어요? 안 가요?”소민아에게 하는 말이었다.소민아는 머리도 돌리지 않고 한 방향으로만 뛰어갔다. 얼마 후 병실에서 한 명이 더 나왔다.서철용이 담배 한 대를 손가락에 낀 채 말했다.“손이 너무 거치네요. 목숨이 간당간당해요. 죽이더라도 내 병원에서 죽이면 안 되죠.”소민아는 병실에 돌아와서도 얼이 빠진 채 멍하니 앉아있었다. 침대 쪽에서 인기척이 들려와서야 정신을 차리고 다가가 상황을 살폈다.신이랑은 언제 깨어났는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움직이지 말아요. 바늘이 빠지면 안 돼요.”새벽 12시, 복도의
간호사가 이마를 찌푸리며 말했다.“남자친구분 잘 지켜보셨어야죠. 링거액이 다 떨어졌잖아요. 지금 병원이 너무 바빠서 저희 간호사들도 병실 하나하나 다 신경 쓸 수는 없어요.”소민아가 미안함에 말했다.“서류를 가지러 회사에 다녀왔어요. 그런데... 저 이분 여자친구 아니고 비서예요.”간호사가 말했다.“환자분이 의식을 잃은 상태로 계속 가족분의 이름을 부르고 계세요. 얼른 가보세요. 환자분을 혼자 오래 두면 안 돼요.”소민아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네, 알겠어요.”소민아가 병실에 들어가 보니 신이랑은 눈을 뜨고 누워있었다. 그녀가 다급히 들고 있던 물건을 내려놓고 다가갔다.“이랑 씨, 깼어요? 몸은 좀 괜찮아졌어요?”신이랑은 흐릿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손을 뻗자 소민아는 얼른 그의 손을 잡아 이불 속에 넣어주었다.“푹 쉬어요. 제가 옆에 있으니까 불편한 게 있으면 부르고요.”“가, 가지 말아요.”그는 꽉 잡은 손을 좀처럼 놓지 않았다.“이랑 씨, 저 아직 처리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았어요. 내일 보내줘야 해요.”신이랑이 머물고 있는 곳은 VIP 병실이라 주방에 모든 시설들이 구비되어 있었다. 그녀는 전화로 죽 두 그릇을 주문한 뒤... 일에 열중하기 시작했다.저녁 10시, 신이랑의 체온은 많이 안정되었다. 본래 몸이 좋지 않긴 했지만, 이렇게 하룻밤 사이에 정신을 잃고 쓰러지기까지 하다니.소민아는 견딜 수 없을 정도의 배고픔이 느껴지고 나서야 자신이 아직 죽을 받아오지 않았다는 것이 떠올랐다.지금 시간엔 병원에도 사람이 별로 없을 것이다. VIP 병동은 무서울 정도로 으스스하고 고요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 보니 프런트에 놓은 음식은 이미 차갑게 식어 있었다.음식을 들고 다시 위로 올라가려고 엘리베이터 쪽으로 가던 중, 왼쪽 코너 쪽 병실에서 익숙한 사람의 모습이 그녀의 시선을 끌었다.기성은이 왜 여기에?소민아는 다시 핸드폰을 꺼내 확인했다. 병원에 왔으면서 왜 그녀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았단 말인가.
신이랑은 아무런 예고도 없이 그녀의 몸 위에 쓰러지고 말았다. 소민아는 몸을 뒤로 젖히며 그를 껴안았다. 그의 정상적이지 않은 체온을 느낀 그녀가 다급히 그의 이름을 불렀다.“신이랑 씨!”그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으니 소민아는 잠시 그를 부축해 소파에 눕힐 수밖에 없었다.“열이 왜 이렇게 나는 거예요?”소민아가 핸드폰을 켜고 구급차를 부르려 한 순간, 그 뜨거운 손이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생명줄이라도 되는 듯 힘껏 움켜쥐고 놓지 않았다.소민아는 통화를 마친 뒤 손을 뻗어 그의 이마에 가져갔다.“구급차가 곧 올 거예요. 조금만 참아요.”소민아는 착잡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조금 전 금방 들어왔을 때 그가 했던 말을 그녀는 모두 똑똑히 들었었다.자신을 좋아해 달라던 그 말까지도...소민아는 신이랑이 자신과 같은 사람을 좋아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신이랑처럼 좋은 사람은 응당 예쁘고 부드럽고 현숙한 주가은 같은 부잣집 아가씨와 어울린다고 생각했었다. 기성은에게 들은 바로는 신이랑의 신분도 실은 그리 간단하지만은 않다. 그의 가족들 또한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신이랑은 구급차에 앉아 함께 병원으로 들어갔다.신이랑은 열이 39도, 아니 40도까지 치솟아 올랐다.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결과가 어땠을지 상상도 하기 힘들었다.신이랑은 해열제 주사를 맞은 뒤 이어 링거를 꽂고 침대에서 깊이 잠들어 있었다. 그녀는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 옆에서 노트북으로 일을 하기 시작했다.소민아는 그렇게 하루종일 병원에서 그를 보살폈다. 저녁 여섯 시가 되니 배가 고파와 병원 슈퍼마켓으로 향했다. 그때, 여자보다 더 여자같이 생긴 하얀색 옷차림의 남자가 마스크를 하고 그녀의 옆으로 스쳐 지나갔다.소민아는 의아함에 천천히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그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어디에선가 본 것처럼 익숙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하지만 지금 바로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다.그녀는 내려갔던 김에 서류를 가지러 다시 회사에 돌아갔다. 신이랑이
소민아는 기성은의 팔짱을 끼고 친밀하게 손을 잡고는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갔다.“오늘 어디에 가는 거예요? 언제 돌아와요? 퇴근할 때 저 픽업할 수 있어요?”기성은이 대답했다.“상황 봐서요. 매일 오늘처럼 한가한 건 아니거든요.”소민아가 불만이 가득 섞인 표정으로 말했다.“기성은 씨 이젠 회사에도 안 나가잖아요. 대체 뭐 하느라 그렇게 바쁜 거예요? 어제 저랑 사귀어보겠다고 했잖아요. 그럼 절 첫 순위에 올려놓아야 하는 거 아닌가요? 아니면 솔직히 말해봐요. 뭘 하러 가는 건지!”그가 하는 일은 대부분 사람들에게 알려져서는 안 되는 것이다. 하여 당연히 그녀에게 알려줄 수 없었다.대표님이 의식불명으로 누워계시니 그 또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송시아는 회사를 통째로 집어삼키려 움직이기 시작했다. 때문에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눈앞의 일을 최대한 빨리 처리하는 것이다.그에게 있어 소민아는 부담이고 약점일 뿐이다. 어떤 말은 솔직히 말할 수 없으니 그저 그녀의 열정이 자연적으로 꺼져갈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민아 씨 앞가림이나 잘해요.”기성은이 결국 뱉어낸 말은 그 한 마디였다.지금은 출근 시간이라 차가 꽤 막혔다. 소민아는 선명히 뾰로통해진 얼굴로 손에 요구르트를 들고 앉아있었다.이번 생에 기성은이 그녀를 달래주는 날이 오긴 할까.그들은 출근 시간 10분을 남겨두고 성세 그룹 맞은편에 도착했다. 회사에 뛰어 들어간다면 3분이면 충분히 출근 도장을 찍을 수 있다.“아직도 뭘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기성은이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린 순간, 소민아가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 그의 입가에 키스했다.“일 끝나면 전화해요. 성은 씨가 절 데리러 오든, 제가 성은 씨한테 가든 같이 있어요, 우리.”기성은은 그 키스에 깜짝 놀라 자리에서 굳어버렸다.소민아는 안전벨트를 풀고 바람을 맞받아 몸을 움츠리고 회사 안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시간 맞춰 도착해 지각은 하지 않았다.소민아가 뒤돌아보니 기성은은 아직 그 자리에
침대에서 뒹구는 법이라곤 없는 기성은은 그녀가 계속 잠을 청하려 하자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소민아가 단번에 그를 끌어당겨 침대에 눕혔다.“아직 여섯 시밖에 안 됐단 말이에요. 출근 시간까지 한 시간이 넘게 남았어요. 조금 더 자요.”“소민아 씨!”기성은은 이렇게까지 머리 아프게 만드는 사람은 종래로 만나본 적이 없다. 소민아가 강제로 기성은의 팔을 끌어당겨 팔베개를 시켰다.기성은의 차가운 목소리가 내려앉았다.“남녀가 유별하다는 말 몰라요? 소민아 씨, 선 지켜요.”소민아는 눈을 감고 태연하게 그의 말을 받아쳤다.“이봐요, 아저씨. 지금이 조선 시대인 줄 알아요? 어떻게 그렇게 보수적일 수가 있어요? 여자친구 사겨본 적 있기는 해요?”기성은은 도저히 팔을 빼낼 수가 없었다.“내가 못해본 것 같아요?”소민아가 몸을 돌려 그와 눈을 맞추었다.“그 주가은 씨랑은 어떤 사이에요? 정장은 왜 벗어준 거예요? 추워 보여서 그랬어요?”소민아가 손가락으로 총 모양을 만들어 그의 이마에 가져갔다.“얼른 솔직히 말해봐요. 주가은 씨랑 대체 무슨 관계인 거예요? 어젯밤... 기성은 씨 만나러 집에 왔었어요. 제가 우리 두 사람이 사귀기로 했다니까 얼굴이 확 어두워져서 돌아갔고요.”소민아는 자세히 그의 얼굴 표정을 살폈다. 더 캐묻지도, 화를 내지도 않는 것이 별다른 느낌이 없는 듯했다.그가 말하려 하지 않자 소민아가 말을 이어갔다.“연애할 줄 모르겠으면 제가 가르쳐줄게요. 가장 중요한 건 성실해야 한다는 거예요. 빨리 얘기해요.”기성은이 은하수를 담은 듯 반짝거리는 그녀의 눈동자를 피하며 말했다.“주가은은 서울시 시장 딸이에요. 얼마 전 주지웅이 주가은을 대표님에게 소개해주려고 저녁 식사 자리를 만들었는데 대표님이 못 가게 되셔서 내가 대신 갔었어요.”“그날 엘리베이터에서 주가은의 뇌전증이 발작했고, 내가 마침 거기에 있어서 도와줬었죠.”너무 조용하다는 생각에 내려다보니 소민아는 어느새 또다시 잠들어 있었다.기성은이 천천히 팔을 빼내고 침대에
“제 아빠는 데릴사위였어요. 부모님 두 분 모두 과학자여서 매일 연구원에서만 지냈어요. 그래서 전 태어나자마자 고모 댁에 보내졌죠. 엄마아빠의 유전자를 이어받아서인지 별로 노력을 들이지 않고도 서울대에 입학했어요...”소민아의 말이 채 끝나지 않았을 때 옆에 놓아두었던 핸드폰이 진동했다. 신이랑이 걸어온 전화였다.“이랑 씨도 오겠다고 했던 걸 깜빡했어요. 잠깐만 기다려요. 전화 받고 올게요.”기성은이 깊은 눈동자로 아직 그녀의 온기가 남아있는 의자를 바라보았다. 그의 과거는...암흑 그 자체이다.그는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몰랐다. 그가 살았던 곳은 음산하고 차디찬 지하실이었다. 그곳에선... 명령에 따라 앞뒤 가리지 않고 손에 칼을 들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그야말로 나라의 관리가 손닿지 않는 혼란의 세상이었다.누군가 그랬다. 어머니는 기생이고, 아버지는... 마약범이라고. 하여 그는 태어난 뒤 바로 버려졌고, 그래서 이름도 없는 거라고...그의 머릿속 첫 기억은 음습하기 그지없는 시궁창이었다.그때의 참담한 경험이 지금 그의 모습을 만들었다. 모든 사람들이 그를 아무 감정 없는 기계 같다고 입을 모아 말한다...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은 그와는 전혀 상관없는 것이었다.그의 인생을 바꿔준 한 사람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말이다.바로 전연우다!당시 기성은은 변경에서 마약 거래를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전연우를 만났고, 그가 다치고 베이고 수많은 죽을 고비를 넘기며 기성은을 변경 시궁창에서 빼냈다.전연우가 말했다.“나한테 목숨 빚졌으니까 앞으로 나 따라다녀.”“네.”“지금 이름은 너한테 어울리지 않아. 앞으로는 기성은이라고 바꿔.”“네.”...소민아는 신이랑과 함께 설영우를 만나 일정을 조율하고 계약서까지 작성했다.일을 끝내고 나니 날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차갑게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소민아가 신이랑을 아파트 아래까지 배웅한 뒤 걸음을 멈추었다.“왜요?”신이랑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소민아는 숨기지 않고 말했다.
“현실에 부합되지도 않는 쓸데없는 상상하지 말아요. 소민아 씨한테 어울리는 사람은 신이랑이에요. 가서 일이나 열심히 해요, 내 체면 떨어뜨리지 말고.”결과야 어찌 됐든 소민아는 기성은이 키워온 사람이다.소민아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정말 저한테 하고 싶은 말 없어요? 마지막으로 물을게요. 정말 없어요?”“저에 대한 이랑 씨 마음 저도 알고 있어요. 하지만... 난...”“기성은 씨를 좋아한단 말이에요!”문밖에 서 있던 설영우가 호기심이 가득 담긴 표정으로 들어왔다.“어머나, 형한테도 드디어 봄이 왔네요. 여자한테 고백을 다 받다니요!”소민아는 얼마나 어렵게 용기를 내어 그 말을 내뱉었는지 모른다. 한 달 내내 찾아다녔던 소설 작가가 지금 이 순간 기성은에게 형이라고 부르며 나타날 줄이야.“꺼져.”설영우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소민아 씨, 전 이만 갈게요. 형과 얘기 끝나면 문자 주세요. 바로 올라올게요.”소민아는 솔직하고 좋고 싫음이 분명한 사람이다. 실은 그녀 또한 알지 못했다. 대체 왜 하필이면 성격도 나쁜 그 사람에게 마음을 빼앗기게 되었는지 말이다.얼굴이 조금 반반한 것 외엔 별다른 장점도 없다.“제가 방금 했던 말 들었어요?”기성은이 말했다.“소민아 씨 같은 귀찮은 사람이랑 사귀어서 나한테 좋은 게 뭔데요? 아까 내가 했던 말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모양이네요.”기성은이 와인 냉장고로 걸어가 와인을 한 병 꺼냈다. 그를 따라 소민아의 시선도 옮겨졌다.소민아가 그의 뒤를 쫓아가며 말했다.“하지만 좋아하는 사람한테 진심을 고백해야 맞는 거 아닌가요? 저도 제가 충동적이라는 거 알아요. 하지만 저에게도 눈이 있고 생각이라는 게 있어요. 나더러 신이랑에게 붙어있으라는 거 날 보호하기 위해 한 말이라는 게 느껴진다고요. 기성은 씨도 날 좋아하잖아요. 그런데 왜 자꾸 절 밀어내려고만 해요? 정말 이해가 안 돼요.”기성은이 말했다.“정말 황당한 생각이네요. 이용가치가 떨어진 물건을 더 남겨서 뭘 하겠어요?”기성은이 고개를
기성은이 다급히 셔츠를 몸에 걸쳤다.“누가 마음대로 들어오라고 했어요! 나가요!”소민아는 순간 하려던 말까지 잊어버렸다. 그녀는 겁에 질린 얼굴로 문밖으로 나와 손으로 가슴을 짓누르며 크게 심호흡했다. 머릿속에 기성은의 몸에 덕지덕지 새겨진 흉터들이 떠올랐다.기성은은 대표님의 비서가 아니었던가?비서에게 어떻게 저렇게 많은 상처가 생길 수가 있지?또한 모두 칼에 찔린 자상이었다. 지금 이 시대에 누가 칼을 휘두르고 다닌단 말인가.대체... 그는 무슨 일을 겪었던 걸까.기성은은 욕실에서 거울로 자신을 비추어 보았다. 오래전부터 지금까지 일어났던 모든 일이 머릿속에 생생하게 떠올랐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 눈 깜빡할 사이에 10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어떤 일은 뇌 속에 박혀버린 것처럼 한번 또 한 번 반복적으로 재생되어 그로 하여금 끊임없이 떠올리게 만들었다.기성은이 깨끗한 잠옷으로 갈아입고 욕실에서 나왔다. 아직 집에 남아있는 소민아를 향해 그가 차갑게 입을 열었다.“언제까지 있을 생각이에요?”소민아가 주방에서 젓가락 두 쌍을 가져오며 아무 일도 없었던 듯 태연한 표정으로 말했다.“식자재는 기성은 씨가 사긴 했지만 음식을 만든 건 저예요. 기성은 씨를 기다리느라 저도 한 입도 못 먹었어요. 아무리 그래도... 손님한테 밥은 먹이고 보내야 하지 않겠어요? 그리고 기성은 씨를 만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회사 일 때문에 이곳에 온 거예요. 마침 같은 아파트에 제가 맡은 소설 작가님이 살고 계시거든요. 그분이 집에 돌아오시면 드라마 제작 세부 사항에 관해 상의해야 해요.”“가서 침대 옆에 있는 핸드폰 가져와요.”소민아는 말없이 그의 말대로 핸드폰을 가져다주었다. 그녀의 시선이 기성은의 헐렁한 옷소매 안으로 드러난 상처에 닿았다. 그녀는 깜짝 놀랐다. 왜 지금까지 한 번도 그의 손목에 이토록 깊은 흉터가 있다는 걸 알지 못했단 말인가.“...지금 이쪽으로 와.”그 한마디 말을 끝으로 기성은은 전화를 끊었다.“설영우 곧 올 거예요.”소민아의 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