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리 이렇게 고통 속에서 죽는 게 나을 것 같다!전생에서 그녀는 어리석어 전연우의 진짜 속셈을 알아채지 못했다.지금 이 시간, 자세히 되돌아볼 때마다 영원히 치유될 수 없는 상처가 더 깊게 새겨지는 것 같았다.눈에선 끊임없이 눈물이 흘러내렸지만 조금의 소리도 내지 않았다.그녀가 무표정하게 굳은 얼굴로 눈물을 닦아냈다.“괜찮아요. 조금 전 벌레가 눈에 들어가서요.”간호사는 이상하다는 듯 장소월을 쳐다보았다. 병원에 무슨 벌레가 있단 말인가?설마 미친 건 아니겠지!간호사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은 채 절반가량 남은 링거액을 보고는 속도를 늦추었다.간호사는 병실 문을 닫은 뒤 장소월의 주치의에게 달려가 그녀의 정신 상태를 알렸다.군림 공천 회관.여긴 80년대 때부터 운영해 오던 곳이었는데 여전히 8, 90년대의 인테리어를 유지하고 있었다.2층 룸, 건장한 체격의 남자가 커다란 창문을 통해 1층에서 노래를 하는 여자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여자는 꽃무늬 붉은 색 원피스를 입고 여우 털목도리를 두르고 있었다. 긴 파마머리에, 귀엔 반짝반짝 빛나는 귀걸이를 걸고 있었는데 조명이 비추니 그녀의 백옥같은 피부, 맑은 눈동자, 그리고 매끄럽고 눈부신 몸매가 환히 드러났다. 노래를 부르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강만옥이었다.소파 위엔 서철용이 짙게 화장을 덧칠하고 짧은 원피스를 입은 두 미녀를 양팔로 껴안고 앉아있었다. 그의 셔츠는 단추가 몇 개 풀어져 있었는데 가슴팍엔 여자의 빨간 립스틱 자국이 찍혀있었다.“네 동생 말이야. 내가 손을 쓰기도 전에 거의 미쳐가고 있대. 쯧... 너 정말 마음이 아프지도 않아?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내 수하가 매일 지켜봤는데 혼자 몰래 눈물만 흘린대. 그 말을 듣고 마음이 찢어지는 줄 알았다니까! 그토록 냉정하게 눈 하나 깜빡이지 않는 건 단연코 너밖에 없을 거야!”서철용이 여자가 먹여주는 포도를 먹고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너 잊었어? 난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라는 거. 모르면 입 다물어.”전연우가 손
“애초에 그 약은 네가 나한테 먹이라고 부탁한 거잖아. 장소월은 네 계획 중 일부분 아니야? 장소월을 무너뜨리고 장해진이 제 손으로 자신의 딸을 감옥에 보내는 모습을 지켜보겠다며. 만약 장소월의 재미를 보려는 거라만 내가 먼저...”서철용이 게걸스럽게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너만 괜찮다면 우리 둘이... 같이 해도 돼. 우린 친구잖아. 그런데 말이야... 난 지금까지 네가 여자 몸에 손대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너 설마 거기에 문제라도 있는 거야?”전연우가 차갑게 굳은 얼굴로 쏘아붙였다.“한마디만 더 하면 벙어리로 만들어 버릴 테니까 알아서 해.”서철용의 가는 뱀눈에 붉은 핏줄이 서렸고 피라도 물든 듯한 붉은 입술은 비열하게 위로 곡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그가 어깨를 들썩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왜? 싫어? 전연우, 너 이런 모습 처음이야!”“...”장소월을 떠올리니 전연우는 손에 움켜쥐었던 모래가 걷잡을 수 없이 유실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마음속 어딘가 커다란 구멍이 뚫렸고 어떻게 메워야 할지 알 길이 없었다.늘 어딘가 찝찝한 기분이었다.“10년이나 같이 있더니 정이라도 들었어? 우리 내기 하나 할까? 네가 장소월을 사랑하게 될지 아닐 지로 말이야. 네가 이기면 이 군림 공천 회관의 10퍼센트 주식을 넘겨주고 네가 언제든 수족으로 부릴 수 있는 부하가 될게.”전연우가 소파 위에 걸쳐놓은 정장 외투를 입은 다음 단추를 채우며 말했다.“심심해?”“왜? 무서워?”옷을 다 입은 전연우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를 쏘아보았다.“네 생각에 너와 장소월 중 누가 더 살아있을 가치가 높은 것 같아? 장소월을 건드리고 싶다면 마음대로 해. 하지만 장해진에게 걸리지 않는 게 좋을 거야. 걸리면 누가 더 비참하게 죽을지 너도 잘 알고 있겠지?”전연우가 말을 마친 뒤 걸음을 옮겼다. 한 발자국 한 발자국 걸을 때마다 살얼음 같은 분위기는 점점 더 사람으로 하여금 오금이 저려오게 만들었다.돌연 그가 문 앞에서 걸음을 멈춘 뒤 서철용을 보며
강만옥이 고개를 끄덕였다.“네.”장해진이 그녀의 가늘고 부드러운 다리를 쓰다듬으며 무언가 짚이는 게 있는 듯 말했다.“마음대로 하라고 해! 회사에서 대부분 일을 연우가 도맡아 하잖아. 가끔 나와 스트레스를 푸는 것도 괜찮지 뭐. 왜 갑자기 그놈한테 관심을 갖게 된 거야? 그 작은 머리로 무슨 생각을 하는 건데?”평소 의심이 많은 장해진의 질문에 강만옥이 조심스레 말했다.“전 그저 전연우도 이곳에 있다는 걸 알려드리고 싶었을 뿐이에요. 혹여 이후 회장님께서 알게 된다면 제 입장이 난처해질까 봐요. 제가 일부러 숨겼다고 오해하시면 어떻게 해요.”장해진이 그제야 찌푸렸던 이마를 폈다. 이어 그녀의 목을 확 끌어안고는 그 위에 진득하게 뽀뽀했다.“알았어! 내일 나랑 같이 쇼핑하러 갈래? 사고 싶은 거 있으면 다 사!”“두 사람 대체 뭐라 소곤거리는 거야? 우리가 들으면 안 되는 거라도 있어?”“얘기할 게 뭐가 있겠어. 침대 위 일이겠지!”“아가씨, 시간 있을 때 우리 해진이 몸보신 좀 시켜줘요.”마음속의 말을 장난으로 내뱉는 건 지극히 일반적인 일이다....복부의 상처에 딱지가 앉아 시도 때도 없이 느껴지는 간지러움 때문에 견딜 수가 없었다. 직접 손을 대 긁을 수도 없으니 장소월은 너무나도 괴로웠다.의사가 흉터가 남을 거라고 했으나 그녀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그녀는 침대에서 내려간 뒤 간병인을 보냈다. 이제 더 이상 다른 사람의 손길을 필요로 하지 않다는 생각에 말이다.저번 전연우가 한 번 다녀간 이후 오 아주머니 외에 아무도 그녀를 찾아오지 않았다.그들에게 있어 그녀는 아무런 소용도 없는 사람이다. 오 아주머니는 장소월이 바깥 음식을 입에 맞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늦은 시간 집에서 음식을 가져왔다.병원에 입원해 시간을 보내니 움직임 없이 가만히 누워있었음에도 살이 찌기는커녕 몇 킬로나 야위었다.누군가 병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창가에 앉아 책을 보던 장소월이 자리에 앉은 채 창밖을 쳐다보았다.“들어오세요.”문이 열리자 검
장소월이 책을 놓고 다가가자 경호원이 도시락을 열었다. 3층 도시락이었다.첫 층은 케이크, 두 번째 층엔 탕수육 몇 조각, 세 번째 층엔 야채 영양죽이 들어있었다.장소월은 자신의 병을 알게 된 그날부터 매일 밤 입원 병동 아래 정자에서 홀로 눈물을 훔쳤다.그가 어이없다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왜 매번 당신을 만날 때마다 울고 있는 거예요?”장소월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순간 그녀는 그의 눈동자 속에 어려있는 안타까움을 볼 수 있었다.그가 부드럽고도 조심스레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그는 그녀가 만난 사람 중 가장 따뜻한 사람이다. 비록 그가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말이다.장소월은 그녀에게 이런 따뜻함을 안겨주는 사람이 낯선 사람이 될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그날 이후 그는 종종 그녀를 찾아왔고 끼니마다 사람을 보내 그녀를 챙겼다. 가장 신기한 건... 그는 장소월이 무슨 음식을 좋아하는지 속속들이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장소월은 그가 왜 자신에게 이토록 잘해주는지 알 수가 없었다....경호원이 설명했다.“케이크는 도련님께서 아가씨댁 이모님한테 배워 만드신 거예요. 탕수육도 마찬가지고요... 도련님께서 난생처음으로 요리하신 거니 맛이 별로여도 정성만큼은 알아주세요. 만약 정말 넘기기 힘드시다면 억지로 드시지 않아도 됩니다.”장소월이 물었다.“왜 세 조각밖에 없는 거죠?”경호원이 대답했다.“소월 아가씨의 몸은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기 때문에 고기는 많이 드시면 안 됩니다. 다 나으시면 반드시 몸보신을 시켜주겠다고 도련님께서 약속하셨습니다.”‘그랬구나.’장소월은 경호원이 건네준 젓가락을 받아 탕수육을 집어먹었다. 그녀가 입안에서 몇 번 씹더니 돌연 멈추었다. 하지만 이내 표정을 감추고 다시 꼭꼭 씹고는 천천히 삼켰다.장소월은 그의 호의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오 아주머니를 제외하고 그녀에게 음식을 만들어 준 사람은 아무도 없다.장소월은 죽과 탕수육을 모두 비우고 난 뒤 남은 케이크는 저녁에 먹으려고
백윤서는 몸을 다친 이후엔 학교 기숙사에서 나와 집에 오랫동안 머물렀다.오늘은 보기 드문 전연우의 쉬는 날이다. 하여 백윤서는 그를 졸라 밖에 나왔고 겸사겸사 장소월을 보러 병원에 온 것이다.집에만 박혀있으면 병이 날 수도 있다.그들은 오랜 시간 동안 장소월을 찾아오지 않았다. 대부분은 오 아주머니가 병원으로 와 그녀를 돌봐주었다.그들은 특별히 오 아주머니에게 음식을 많이 준비해달라고 부탁해 병원에 갖고 왔다. 몇 개월 동안 오 아주머니의 보살핌 속에서 야위었던 백윤서의 얼굴에 보기 좋게 살집이 올라 있었다.오늘 백윤서는 일부러 어려 보이게 꾸몄다. 화장기 없는 얼굴에 머리를 곱게 땋아 묶었으며 몸엔 옅은 색의 원피스를 입었다. 전연우와 함께 걸으니 커플이 아닌 삼촌과 조카 사이 같아 보였다.문 앞에 도착한 그들은 병실 안에 낯선 사람 몇 명이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베란다 쪽 익숙한 장소월의 모습이 아니었다면 백윤서는 병실을 잘못 찾은 줄로 알았을 것이다.두 사람을 본 장소월의 얼굴에 당황스러움이 스쳐 지나갔다. “알겠어요. 입에 맞으면 한 번 더 만들어 드릴게요. 안 드시는 음식이 있다면 저한테 알려주시면 돼요.”“소월 씨가 만든 거라면 전 다 좋아요.”“그럼 이만 끊을게요. 오빠가 절 보러 와서요.”“그래요.”장소월은 전화를 끊은 뒤 베란다에서 나와 핸드폰을 경호원에게 돌려주었다.“죄송해요. 한 번 더 오셔야겠네요.”“제가 해야 할 일인걸요.”그가 돌아간 뒤에야 장소월은 전연우와 백윤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공허한 눈빛엔 아무런 감정도 담겨있지 않았다.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지은 옅은 미소조차 부자연스러웠다.“오빠, 윤서 언니, 여긴 무슨 일로 왔어요?”백윤서는 전연우가 말하지 않자 어색함에 앞으로 걸어가 손에 들고 있던 꽃다발을 장소월에게 건넸다.“소월아, 이제야 널 보러 와서 미안해. 얼마 전 모의고사가 있어서 공부하느라... 그리고 연우 오빠는 일이 바빠 맨날 야근했어. 부디 이해해 줘.”장소월은 꽃다발을
그럼 뭘 해야 한단 말인가?그녀의 미래는 이미 일찌감치 그들에게 결정되어 있지 않았던가?순간 들끓는 분노가 가슴속에서 소용돌이쳤다. 장소월은 그 답답함을 어떻게 해소해야 할지 몰라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백윤서는 병실 안 살 얼음장 같은 분위기를 감지하고는 애써 웃으며 말했다.“오빠, 영화 시간 거의 다 되지 않았어요? 빨리 가지 않으면 지각이에요.”그녀가 전연우를 향해 고개를 저으며 더 이상 말하지 말라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백윤서는 그들 두 사람 사이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지 못했다. 그토록 전연우를 따르던 장소월이 왜 돌연 내정해졌고, 심지어 독한 말까지 내뱉는지 말이다.화가 나 있는 전연우는 때로는 그녀도 감당할 수 없이 무섭다.전연우가 그녀의 스케치를 보고는 차가운 눈빛으로 돌변해 말했다.“변한 게 하나도 없네. 3개월 동안 그 고생을 하고도 말이야.”백윤서가 재빨리 전연우의 팔을 잡고 밖으로 나갔다.두 사람이 문 앞까지 걸어갔을 때, 장소월이 바닥에서 찢어진 그림을 주우며 말했다.“전연우...”그 말에 두 사람의 발걸음이 멈췄다.“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어요. 이제 더는... 나한테 강요하지 않으면 안 되나요? 가족들이 저한테 요구했던 일들 난 모두 받아들였어요. 서울대도, 결혼도, 모두 말이에요... 그러니까 남은 3년 동안은 제발 관여하지 말아 주세요.”대체 왜 그녀의 그림까지 찢어발긴단 말인가?전연우, 우리 사이에 남아있었던 티끌만큼의 정도 이젠 깡그리 사라져 버렸어.그들이 돌아간 이후 방 안에 침묵이 내려앉았다.전연우와 너무 맞불을 놓듯 맞선 건가?하지만 한 번 죽기까지 한 그녀가 그를 무서워할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장소월은 도시락통에 들어있는 음식을 깨끗이 비웠다.하지만 30분 뒤, 누군가 또 음식을 가져왔다. 장소월이 배고파할까 봐 그가 다른 식당에서 음식을 사 보낸 것이다.장소월은 이미 배가 꽉 차 있었다. 그럼에도 숟가락을 든 손을 기계적으로 움직여 끊임없이 입안으로 가져갔다.
강한 그룹을 이어받는 과정을 걷고 있는 강영수는 이제 점차 매체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오랫동안 행방이 묘연했던 강한 그룹의 후계자가 다시 세상에 나타났으니 사람들의 관심은 그야말로 뜨거웠다.강영수는 처음 음식을 만들어 본 이후 요리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왼쪽엔 장소월이 만든 쿠키가, 오른손엔 오부연이 사람을 시켜 사 온 요리책이 들려있었다.강영수는 요리책을 열심히 들여다보며 쿠키에 손을 가져갔다.옆에 있던 오부연이 말했다.“도련님, 이미 다 드셨습니다.”강영수가 쳐다보니 이제 부스러기밖에 남지 않았다.“도련님, 요리를 배우시려는 거예요?”오부연이 의문스럽다는 듯 물었다.“소월 아가씨를 위해서요?”그 말이 맞을 것이다.그는 자신의 처지를 떠올리니, 자신과 같이 두 다리를 잃은 남자를 좋아할 여자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그저 장소월이 자신이 만든 음식을 좋아한다면 흔쾌히 요리를 해줄 생각이었다.강영수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쓱 올라갔다.그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그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으려 한다. 하지만 아직 나이 어린 그녀에게 너무 조급히 행동하는 건 아닐까?“도련님.”경호원이 밖에서 걸어들어왔다.강영수가 말했다.“말해.”경호원은 그가 들은 이야기를 한 글자도 빠짐없이 강영수에게 말했다.강영수의 눈동자에 분노가 감돌았다.“소월 씨가 장씨 집안에서 그런 날들을 보내고 있었던 거야?”“도련님, 소월 아가씨를 옆방에 머무르게 하는 건 어떨까요? 쓸데없는 사람들이 찾아오지 못하게 말이에요.”“부담스러워하지 않겠어?”“소월 씨는 이틀 뒤면 퇴원하니 괜찮으실 겁니다.”오부연이 잠시 고민하더니 말했다.“소월 씨는 지금 마음이 불안정합니다. 소월 씨를 편안하게 해줄 방법을 생각하는 게 맞지 않을까요?”“좋은 방법이라도 있어?”“소월 아가씨는 그림을 그리는 걸 좋아하니 틀림없이 전시회도 좋아할 거예요. 제 기억으론 얼마 후 서울에서 에드워드 화가의 전시회가 열려요.”
장소월의 눈에서 반짝반짝 빛이 뿜어져 나왔다.“무슨 서프라이즈인지 알 수 있을까요?”“오시면 알게 될 거예요. 나머지 한 장의 표는 친구분을 초대해 함께 오셔서 사용하시면 돼요.”장소월의 손에 두 장의 표와 에드워드의 친필사인이 그려져 있는 값을 매기기 힘들 정도로 귀한 화첩이 들려있었다.장소월에겐 친구가 없어 이 표를 누구에게 주면 좋을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그때, 그녀의 머릿속에 그 사람이 떠올랐다. 그가 그녀와 함께 가줄지는 아직 모르지만 말이다.저녁 아홉 시, 서늘한 바람이 창문을 타고 불어오던 시간.15층 병동.강영수가 영상 회의를 하고 있을 때 문이 닫히지 않아 밖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소월 씨,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도련님께선 지금 회의 중이십니다.”“바쁘면 방해하지 않을게요. 아저씨, 이 표를 그분에게 전해주세요.”오부연은 그 표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행동이 의외라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장소월은 손에 쥐고 있는 표를 어떻게 강영수에게 줘야 할지 몰라 고민하던 차에 마침 오부연을 만나 그에게 전해주려 했다.그때 진봉이 노트북을 안고 안에서 걸어 나왔다.“장소월 씨, 강 대표님의 회의는 방금 끝났습니다. 지금 들어가시면 돼요.”장소월은 긴장감에 표를 꽉 움켜쥐었다. 안에 다른 사람까지 있었을 줄이야.강 대표님이라고? 성이 강 씨였어?장소월이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진봉이 말했다.“아가씨...”그제야 정신을 차린 장소월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회의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그는 책상 위 서류를 정리하고 있었다. 그녀가 들어오자 서류를 한쪽에 내려놓고는 깊은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너무 바빴던 탓인지 그의 얼굴엔 피곤함이 역력했다.강영수는 걷어 올린 옷소매를 내려 팔뚝의 문신을 감췄다.“날 보러 왔다고요? 무슨 일 있어요? 이쪽으로 와서 앉아요.”장소월이 그의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물어볼 게 있어서요. 일주일 뒤 시간 있어요? 함께 전시회에 가고 싶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