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윤서는 몸을 다친 이후엔 학교 기숙사에서 나와 집에 오랫동안 머물렀다.오늘은 보기 드문 전연우의 쉬는 날이다. 하여 백윤서는 그를 졸라 밖에 나왔고 겸사겸사 장소월을 보러 병원에 온 것이다.집에만 박혀있으면 병이 날 수도 있다.그들은 오랜 시간 동안 장소월을 찾아오지 않았다. 대부분은 오 아주머니가 병원으로 와 그녀를 돌봐주었다.그들은 특별히 오 아주머니에게 음식을 많이 준비해달라고 부탁해 병원에 갖고 왔다. 몇 개월 동안 오 아주머니의 보살핌 속에서 야위었던 백윤서의 얼굴에 보기 좋게 살집이 올라 있었다.오늘 백윤서는 일부러 어려 보이게 꾸몄다. 화장기 없는 얼굴에 머리를 곱게 땋아 묶었으며 몸엔 옅은 색의 원피스를 입었다. 전연우와 함께 걸으니 커플이 아닌 삼촌과 조카 사이 같아 보였다.문 앞에 도착한 그들은 병실 안에 낯선 사람 몇 명이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베란다 쪽 익숙한 장소월의 모습이 아니었다면 백윤서는 병실을 잘못 찾은 줄로 알았을 것이다.두 사람을 본 장소월의 얼굴에 당황스러움이 스쳐 지나갔다. “알겠어요. 입에 맞으면 한 번 더 만들어 드릴게요. 안 드시는 음식이 있다면 저한테 알려주시면 돼요.”“소월 씨가 만든 거라면 전 다 좋아요.”“그럼 이만 끊을게요. 오빠가 절 보러 와서요.”“그래요.”장소월은 전화를 끊은 뒤 베란다에서 나와 핸드폰을 경호원에게 돌려주었다.“죄송해요. 한 번 더 오셔야겠네요.”“제가 해야 할 일인걸요.”그가 돌아간 뒤에야 장소월은 전연우와 백윤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공허한 눈빛엔 아무런 감정도 담겨있지 않았다.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지은 옅은 미소조차 부자연스러웠다.“오빠, 윤서 언니, 여긴 무슨 일로 왔어요?”백윤서는 전연우가 말하지 않자 어색함에 앞으로 걸어가 손에 들고 있던 꽃다발을 장소월에게 건넸다.“소월아, 이제야 널 보러 와서 미안해. 얼마 전 모의고사가 있어서 공부하느라... 그리고 연우 오빠는 일이 바빠 맨날 야근했어. 부디 이해해 줘.”장소월은 꽃다발을
그럼 뭘 해야 한단 말인가?그녀의 미래는 이미 일찌감치 그들에게 결정되어 있지 않았던가?순간 들끓는 분노가 가슴속에서 소용돌이쳤다. 장소월은 그 답답함을 어떻게 해소해야 할지 몰라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백윤서는 병실 안 살 얼음장 같은 분위기를 감지하고는 애써 웃으며 말했다.“오빠, 영화 시간 거의 다 되지 않았어요? 빨리 가지 않으면 지각이에요.”그녀가 전연우를 향해 고개를 저으며 더 이상 말하지 말라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백윤서는 그들 두 사람 사이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지 못했다. 그토록 전연우를 따르던 장소월이 왜 돌연 내정해졌고, 심지어 독한 말까지 내뱉는지 말이다.화가 나 있는 전연우는 때로는 그녀도 감당할 수 없이 무섭다.전연우가 그녀의 스케치를 보고는 차가운 눈빛으로 돌변해 말했다.“변한 게 하나도 없네. 3개월 동안 그 고생을 하고도 말이야.”백윤서가 재빨리 전연우의 팔을 잡고 밖으로 나갔다.두 사람이 문 앞까지 걸어갔을 때, 장소월이 바닥에서 찢어진 그림을 주우며 말했다.“전연우...”그 말에 두 사람의 발걸음이 멈췄다.“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어요. 이제 더는... 나한테 강요하지 않으면 안 되나요? 가족들이 저한테 요구했던 일들 난 모두 받아들였어요. 서울대도, 결혼도, 모두 말이에요... 그러니까 남은 3년 동안은 제발 관여하지 말아 주세요.”대체 왜 그녀의 그림까지 찢어발긴단 말인가?전연우, 우리 사이에 남아있었던 티끌만큼의 정도 이젠 깡그리 사라져 버렸어.그들이 돌아간 이후 방 안에 침묵이 내려앉았다.전연우와 너무 맞불을 놓듯 맞선 건가?하지만 한 번 죽기까지 한 그녀가 그를 무서워할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장소월은 도시락통에 들어있는 음식을 깨끗이 비웠다.하지만 30분 뒤, 누군가 또 음식을 가져왔다. 장소월이 배고파할까 봐 그가 다른 식당에서 음식을 사 보낸 것이다.장소월은 이미 배가 꽉 차 있었다. 그럼에도 숟가락을 든 손을 기계적으로 움직여 끊임없이 입안으로 가져갔다.
강한 그룹을 이어받는 과정을 걷고 있는 강영수는 이제 점차 매체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오랫동안 행방이 묘연했던 강한 그룹의 후계자가 다시 세상에 나타났으니 사람들의 관심은 그야말로 뜨거웠다.강영수는 처음 음식을 만들어 본 이후 요리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왼쪽엔 장소월이 만든 쿠키가, 오른손엔 오부연이 사람을 시켜 사 온 요리책이 들려있었다.강영수는 요리책을 열심히 들여다보며 쿠키에 손을 가져갔다.옆에 있던 오부연이 말했다.“도련님, 이미 다 드셨습니다.”강영수가 쳐다보니 이제 부스러기밖에 남지 않았다.“도련님, 요리를 배우시려는 거예요?”오부연이 의문스럽다는 듯 물었다.“소월 아가씨를 위해서요?”그 말이 맞을 것이다.그는 자신의 처지를 떠올리니, 자신과 같이 두 다리를 잃은 남자를 좋아할 여자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그저 장소월이 자신이 만든 음식을 좋아한다면 흔쾌히 요리를 해줄 생각이었다.강영수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쓱 올라갔다.그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그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으려 한다. 하지만 아직 나이 어린 그녀에게 너무 조급히 행동하는 건 아닐까?“도련님.”경호원이 밖에서 걸어들어왔다.강영수가 말했다.“말해.”경호원은 그가 들은 이야기를 한 글자도 빠짐없이 강영수에게 말했다.강영수의 눈동자에 분노가 감돌았다.“소월 씨가 장씨 집안에서 그런 날들을 보내고 있었던 거야?”“도련님, 소월 아가씨를 옆방에 머무르게 하는 건 어떨까요? 쓸데없는 사람들이 찾아오지 못하게 말이에요.”“부담스러워하지 않겠어?”“소월 씨는 이틀 뒤면 퇴원하니 괜찮으실 겁니다.”오부연이 잠시 고민하더니 말했다.“소월 씨는 지금 마음이 불안정합니다. 소월 씨를 편안하게 해줄 방법을 생각하는 게 맞지 않을까요?”“좋은 방법이라도 있어?”“소월 아가씨는 그림을 그리는 걸 좋아하니 틀림없이 전시회도 좋아할 거예요. 제 기억으론 얼마 후 서울에서 에드워드 화가의 전시회가 열려요.”
장소월의 눈에서 반짝반짝 빛이 뿜어져 나왔다.“무슨 서프라이즈인지 알 수 있을까요?”“오시면 알게 될 거예요. 나머지 한 장의 표는 친구분을 초대해 함께 오셔서 사용하시면 돼요.”장소월의 손에 두 장의 표와 에드워드의 친필사인이 그려져 있는 값을 매기기 힘들 정도로 귀한 화첩이 들려있었다.장소월에겐 친구가 없어 이 표를 누구에게 주면 좋을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그때, 그녀의 머릿속에 그 사람이 떠올랐다. 그가 그녀와 함께 가줄지는 아직 모르지만 말이다.저녁 아홉 시, 서늘한 바람이 창문을 타고 불어오던 시간.15층 병동.강영수가 영상 회의를 하고 있을 때 문이 닫히지 않아 밖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소월 씨,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도련님께선 지금 회의 중이십니다.”“바쁘면 방해하지 않을게요. 아저씨, 이 표를 그분에게 전해주세요.”오부연은 그 표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행동이 의외라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장소월은 손에 쥐고 있는 표를 어떻게 강영수에게 줘야 할지 몰라 고민하던 차에 마침 오부연을 만나 그에게 전해주려 했다.그때 진봉이 노트북을 안고 안에서 걸어 나왔다.“장소월 씨, 강 대표님의 회의는 방금 끝났습니다. 지금 들어가시면 돼요.”장소월은 긴장감에 표를 꽉 움켜쥐었다. 안에 다른 사람까지 있었을 줄이야.강 대표님이라고? 성이 강 씨였어?장소월이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진봉이 말했다.“아가씨...”그제야 정신을 차린 장소월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회의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그는 책상 위 서류를 정리하고 있었다. 그녀가 들어오자 서류를 한쪽에 내려놓고는 깊은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너무 바빴던 탓인지 그의 얼굴엔 피곤함이 역력했다.강영수는 걷어 올린 옷소매를 내려 팔뚝의 문신을 감췄다.“날 보러 왔다고요? 무슨 일 있어요? 이쪽으로 와서 앉아요.”장소월이 그의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물어볼 게 있어서요. 일주일 뒤 시간 있어요? 함께 전시회에 가고 싶어서요
이틀 후, 장소월은 퇴원 절차를 마치고 난 뒤 장 씨 저택으로 돌아갔다.그녀가 집에 들어갔을 때 오 아주머니는 아직 보이지 않았다. 그 대신 50세 정도 되어 보이는 몇 명의 낯선 얼굴이 보였는데 모두 새로 온 도우미들이었다.“아가씨, 돌아오셨군요.”장소월이 덤덤히 말했다.“네.”그때 위층에서 강만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나빴어요!”“그래서 이렇게 같이 쇼핑하러 나가는 거잖아.”장소월의 눈에 한정판 가방을 든 채 장해진의 팔짱을 끼고 걸어 내려오는 강만옥의 모습이 들어왔다.강만옥은 장소월을 보고는 급히 손을 거두고 말했다.“소월아, 퇴원한 거야? 마침 네 아버지와 함께 쇼핑하러 가려던 참이었는데 너 필요한 거 있어?”장소월이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없어요.”그러고는 이어 장해진을 불렀다.“아버지.”장해진이 냉담한 말투로 대답했다.“응.”강만옥과 함께 문을 나서던 장해진이 걸음을 멈추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연우와 싸웠어?”장소월은 화들짝 놀랐다. 아버지가 어떻게 알았단 말인가.장소월이 우물쭈물하며 말했다.“아... 아니요.”“그래. 돌아왔으면 얌전히 공부나 해. 또 나가서 내 체면을 떨어뜨리지 말고. 공부 외 흥취 수업은 몇 개월 동안 떨어졌던 부분을 모두 채워. 공부도 못하면서 이런 것들도 못 하면 다른 사람들이 우리 장씨 집안에서 바보가 태어난 줄로 알 테니까!”장소월이 고개를 푹 숙였다.“네. 알겠어요. 아빠.”은경애가 말했다.“아가씨, 식사하세요.”장소월은 그녀의 말에 반응해주지 않은 채 곧바로 위층으로 올라갔다.무시를 당했다고 생각한 은경애가 입을 삐죽거리며 말했다.“귀머거리라도 됐나? 먹기 싫으면 말아. 나 혼자 먹을 거야.”장소월은 돌아오자마자 자신을 방 안에 가두었다. 책상 위에 놓인 익숙한 핑크색 한정판 지갑을 본 장소월은 기쁜 마음에 지갑을 열었다. 안에 있는 모든 물건을 털어냈더니 주민등록증, 학생증... 은행카드까지 있었지만 그 사진만은 보이지 않았다.장소월이 주민등
그 목소리는 확실히 백윤서의 것이다.그도 그럴 것이 백윤서는 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했지 않은가. 전연우는 그녀를 그런 곳에서 학업을 이어 나가게 할 리가 없다.은경애가 장소월을 발견하고는 말했다.“아가씨.”그 말에 백윤서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섰다.“소월아.”백윤서가 장소월을 향해 환히 미소 지었다.“너.. 왜 교복을 입지 않았어? 네가 퇴원했다는 걸 알고 함께 학교에 가려고 왔어. 이제부턴 같은 학교에 다니게 됐으니 잘 부탁해.”이건 운명인가?전생에서의 백윤서도 제운 고등학교에 다녔었다.장소월은 이번 생에서 무언가 바뀌면 모든 사람의 운명도 따라서 바뀔 거라 예상했다.하지만 이제 보니 모든 건 전생과 똑같이 흘러가고 있었다.그럼 백윤서는 죽게 될까?그녀 역시...모든 사람의 운명은 바뀌지 않는다. 모두 처음 결정되었던 결말로 향해가고 있을 뿐.장소월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백윤서가 의아한 듯 물었다.“소월아, 너 괜찮아? 몸이 아직 불편한 거야?”장소월이 덤덤히 말했다.“괜찮아요.”은경애가 말했다.“소월 아가씨, 윤서 아가씨... 어르신께서 내려오시면 식사를 시작하셔도 돼요.”장소월은 주방에서 나온 뒤 컵에 우유를 부었다... 차가웠다.그때 돌연 머릿속에서 오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이런. 아가씨, 아침부터 무슨 찬 우유예요. 제가 따뜻하게 끓여드릴게요.”장해진과 검은색 정장을 입은 전연우가 아래층으로 내려왔다.“이 프로젝트는 보안을 철저히 해야 할 거야. 절대 외부에 새어나가선 안 돼.”전연우가 대답했다.“네. 아버지.”“아가씨, 오 아주머니께서 나가기 전 저에게 신신당부했어요. 아가씨께선 아침에 찬 우유를 드시면 배탈이 난다고요. 이미 우유를 데웠으니까 따뜻한 걸 마시세요.”그 말을 들은 전연우가 조용히 장소월을 힐끗 보고는 이내 시선을 거두었다.장소월이 냉장고 문을 닫고 식탁에 앉으며 말했다.“괜찮아요.”장해진은 자리에 앉은 뒤 한참 동안 전연우와 회사 일을 논의한 뒤에야 장소월에게 관심을
얼굴에 드러나 있는 표정으론 그 감정을 예측할 수 없었다.상품은 손에 방패를 들고 있는 검은색 기사였는데 책상 위에 올려놓으니 사뭇 고급스러워 보였다.“거짓말인지 아닌지 누가 알아. 소월이의 머릿속에 남자만 가득 들어있는 걸 내가 모르는 것도 아니고.”장해진은 그녀의 성적표를 툭 던져버렸다.숟가락을 잡고 있던 장소월의 손에 더더욱 힘이 들어갔다.성적표는 마침 전연우의 발 옆에 떨어졌다.그가 허리를 굽혀 주어보니 거의 모든 과목이 만점이었다.그의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저번 시험에서 장소월은 평균 4, 50점밖에 받지 못했다.정말 이 성적이라면 장해진의 도움 없이도 국내 모든 대학에 입학할 수 있다.그녀의 힘으로 만들어 낸 성적인지, 아니면 다른 꼼수를 썼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그건 오직 그녀 자신만이 알 것이다.몰래 훔쳐본 백윤서는 화들짝 놀랐다.장소월의 모든 과목 성적이 그녀보다 높은 것이다.이 성적은 서울 제2 고등학교에서 전교 3등 안엔 들 것이다.불편한 감정이 백윤서의 가슴속에서 천천히 피어올랐다.그녀는 장소월의 성적이 언제 이렇게 올랐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시험 잘 봤네. 윤서보다 70점이나 높아.”장소월은 그의 말투에 담겨있는 것이 진심 어린 칭찬인지 아니면 그녀가 꼼수를 부렸다고 의심하며 비아냥거리는 것인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하지만 그건 장소월의 관심사가 전혀 아니었다.그들의 눈에 그녀는 그저 아무런 쓸모도 없는 폐기물에 불과하니 말이다.장소월은 아직 이름을 알지 못하는 새로 온 도우미를 보며 말했다.“학교에서 또 전화가 오면 전 한동안 학교에 가지 못한다고 말해주세요. 시합에 관한 일은 전 흥미 없어요. 참가하고 싶지 않아요.”장소월이 숟가락을 내려놓고 몸을 일으켰다.“전 다 먹었어요. 아버지, 천천히 드세요.”오늘의 죽은 좀 딱딱해 장소월은 몇 입만 먹고는 절반이 넘는 양을 남겼다.우유는 모두 비웠다.오지연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네... 알겠어요.”오지연이 마음속으로
장소월은 하얀색 운동복을 입고 머리를 높게 질끈 묶고는 모자를 눌러썼다. 여리여리한 그녀의 몸매는 잔디 위 많은 사람의 시선을 사로잡았다.골프 수업을 맡은 선생님은 예전 우승도 한 적 있는 골프 국가대표 선수였다. 지금은 이미 은퇴했는데 한눈에 봐도 신사의 분위기가 흠씬 풍겨왔다.듣기론 그의 가정형편은 몹시 가난해 아버지는 돈을 벌게 하려는 목적으로 그를 천하일성에 보냈다. 그 후 골프를 접촉하게 되었고 그렇게 전문적인 훈련을 받았다고 한다.수많은 거물이 그의 시합 한번을 보기 위해 먼 길을 마다하지 않는다.그의 수업을 받게 하려고 장해진은 꽤 큰 힘을 썼다.온주원은 뒤에서 장소월을 안고 손으로 골프채를 붙잡았다.“손목에 너무 힘주지 말아요. 긴장을 풀고 마음을 편안하게 먹어요.”장소월은 입술을 깨물고 몸에 힘을 뺐다. 두 사람 사이엔 여전히 처음과 같은 정도의 공간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의 힘을 빌려 골프채를 휘두르니 정확히 구멍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저번보다 아주 좋아졌어요.”장소월이 말했다.“선생님, 과찬이세요. 선생님이 아니었다면 전 평생을 해도 넣지 못했을 거예요.”온주원이 물병을 그녀에게 건네주었다.“소월 씨의 수업은 일주일에 세 번인데 이미 12번이나 빠졌어요. 몸이 안 좋았던 거예요?”장소월이 뚜껑을 열고 한 모금 마시고는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학교 일 때문이에요.”온주원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공부가 가장 중요하죠. 시간 괜찮으면 전에 빠졌던 수업을 모두 보충해 줄게요.”장소월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다른 수업에 영향을 주는 거 아닌가요? 선생님의 수업은 이미 몇 년 뒤까지 예약되어 있잖아요. 선생님 같은 훌륭한 분을 계속 잡아두면 안 되죠.”온주원은 서른 살이 넘은 나이었지만 고작 스무 살 남짓하게 보일 정도로 동안 외모를 갖고 있었다. 또한 그의 말투와 행동 모두 여자들이 좋아하는 요소를 갖고 있어 그와 대화를 나누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졌다.그가 손목시계를 보고 시간을 확인했다.“아직 한
신이랑의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그래요.”소민아는 회사에 돌아가 주차장에서 차를 세우던 도중 캡모자를 눌러쓰고 은밀하게 움직이는 남자 한 명을 발견했다. 소민아는 차에서 내리지 않고 그의 행동을 살펴보았다.얼마 후 남자가 전화를 걸었다.“누님, 그 여자 위치 찾았어요. 사진도 있고요. 전 지금 지하주차장에 있어요.”소민아는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것 같았다. 송시아가 찾는 그 여자?소월 언니다!송시아가 이렇게나 빨리 소월 언니를 찾았다고?그... 그럴 리가 없다!3분 뒤, 송시아가 엘리베이터에서 걸어 나오자 남자는 그녀에게 서류 봉투 하나를 건네주었다.“누님, 그 여자 어떻게 처리할 거예요? 몰래...”그가 손가락으로 목을 베는 동작을 취했다.소민아는 빠르게 핸드폰을 꺼내 두 사람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급할 필요 없어. 넌 일단 돌아가 내 전화 기다리고 있어. 너무 쉽게 죽게 하면 안 되지.”“알겠어요. 그럼... 누님, 저희한테 줄 수고비는... 저희들 요즘 전국을 휘젓고 다니고 해외에까지 나가느라 정말 힘들었어요.”송시아는 바로 핸드폰을 꺼내 남자에게 돈을 이체해주었다.“이건 수고비의 3분의 1이야. 나머지는 일이 다 끝나면 줄게. 너희들 고생한 거 잊지 않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걱정하지 마십시오, 누님. 저희들 절대 누님을 실망시키지 않을 거예요.”두 사람의 거래가 끝나자 지하주차장엔 다시 고요함이 내려앉았다. 소민아는 씩씩거리며 차에서 내려가 대표 사무실로 향하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소민아가 벌컥 문을 열었을 때, 송시아는 서류 봉투를 뜯고 있었다. 그녀는 소민아를 보고는 다시 서류 봉투를 닫아 옆에 놓아두었다.“언니한테 무슨 할 말 있는 거야?”“아까 지하주차장에서 만났던 그 남자 누구예요? 송시아 씨, 이번엔 또 누굴 죽이려는 거예요! 왜 꼭 그렇게 사람을 죽여야만 하는 건데요! 아무도 당신을 이기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송시아가 웃으며 그 서류 봉투를 들고 일어섰다. 그녀는 소민아 앞에서
소민아는 며칠 더 휴가를 주겠다는 신이랑의 배려를 거절했다. 다음 날 회사에 나와보니 신이랑은 여느 때처럼 아침 일찍부터 사무실에 나와 있었다.그는 피곤한 듯 이마를 꾹꾹 누르고 있었다. 신이랑이 고개를 드니 눈에 가득 퍼진 실핏줄이 보였다. 소민아는 바로 가방을 내려놓고는 걱정스레 다가갔다.“이랑 씨, 두통이 또 발작한 거예요? 약은 먹었어요?”신이랑은 고개를 저었다. 한눈에 봐도 예전 두통 때문에 힘들어하던 그 모습이었다.소민아는 손을 뻗어 그의 이마를 만지려다가 허공에서 멈춰 섰다.“제가 병원 예약해 둘 테니까 가봐요. 이렇게 참는 것만이 방법은 아니에요. 오늘 스케줄은 오후에 예정된 중문 시리즈 사람과의 미팅밖에 없어요. 지금 병원에 가면 그전에 돌아올 수 있을 거예요.”소민아는 이제 신이랑의 스케줄도 기억하고 있었다. 예전엔 항상 신이랑이 먼저 말했고, 장소가 어디든 그녀는 따라가기만 했었는데 말이다.지금의 소민아는 정말 예전과 많이 달라졌다.신이랑이 말했다.“그럴 필요 없어요. 나 괜찮아요.”소민아는 시간을 확인하고는 바로 핸드폰을 들고 신경내과에 예약했다.“편집장님, 30분 뒤로 예약해 뒀어요. 얼른 물건 챙겨서 나랑 같이 가요.”소민아의 말투도 조금 사나워졌다.신이랑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알았어요.”소민아는 부하 직원에게 남은 일을 맡겨두고는 차를 몰고 신이랑과 함께 병원으로 향했다.소민아가 운전하다가 물었다.“혹시 어젯밤 샜어요? 의사 선생님 말씀 잊었어요? 수술 뒤엔 몸을 잘 챙겨야 한다고 했잖아요. 잠을 제대로 안 자는 건 건강 회복에 치명적이에요.”눈을 감고 있던 신이랑은 그녀의 말을 들으니 몸이 훨씬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어젯밤 신수지가 왔었는데 보기 싫어서 호텔로 옮겼어요. 난 신수지가 싫어요.”소민아가 그를 쳐다보며 물었다.“신수지가 이랑 씨를 왜 찾아가요? 동생 아니었어요?”신이랑이 눈을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친 순간, 소민아는 그가 뭘 말하려는
막무가내인 그녀의 모습을 신이랑은 더는 참아낼 수가 없어 단호히 말했다.“현실을 제대로 자각하세요. 난 절대 신수지 씨와 결혼하지 않아요. 당신 집안의 도움은 더더욱 필요 없고요. 성세 그룹에 들어간 건 민아 씨를 위해서예요. 민아 씨가 없어도 난 당신들과 얽히지 않을 거예요.”“계속 여기에 있고 싶으면 있어요.”신이랑은 바로 서재에 걸어 들어가 중요한 서류들을 챙기고는 노트북 가방에 넣었다. 그 모습을 본 신수지는 얼른 달려가 그의 팔을 잡았다.“어디에 가려고요? 오빠, 가지 말아요. 내가 그렇게 싫어요?”“내가 오빠를 좋아하는 것 때문에?”신이랑은 바로 그녀의 손을 뿌리쳐버렸다.“자신을 비참하게 만드는 일 하지 말아요.”신이랑은 물건을 들고 바로 떠나버렸다.신수지는 그의 뒤를 쫓아가며 소리쳤다.“오빠!”신이랑은 이미 엘리베이터를 타고 자리를 떴다.신수지는 분노에 차올라 발을 동동 굴렀다.“이게 다 소민아 때문이야. 너만 없었다면 오빠도 날 멀리하지 않았을 거라고!”신이랑은 차를 몰고 집에서 나가 한 호텔 방에 체크인했다.신수지는 엉엉 울며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유연홍은 자신의 귀한 딸이 울며 들어오자 얼른 뛰어가 달랬다.“왜 그래, 수지야? 누가 너 괴롭혔어? 엄마한테 말해.”유연홍은 신수지의 옆에 앉아 휴지로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엄마! 저 신이랑한테 갔었는데 쫓겨났어요. 밥 한 끼 같이 먹겠다고 하루종일 바쁘게 돌아쳤는데...”“절 완전히 무시하더라고요.”“욕까지 했어요! 대체 제가 그 여자보다 못한 게 뭐예요? 그 여잔 나보다 나이도 많고 예쁘지도 않잖아요.”유연홍이 그녀를 달랬다.“수지야, 네가 이랑이를 찾아간 일 절대 아빠가 알게 하시면 안 돼. 아빠는 이미 이랑이를 집에 돌아오게 할 방법을 찾으셨어. 이랑이가 집에 들어오기만 하면 엄마가 어떻게든 널 받아들이게 할게.”“그러니까 지금은 너무 밀어붙이면 안 돼. 알겠니?”그 말에 신수지는 다운되었던 기분이 많이 괜찮아졌다.“하지만 오빠 마음
소민아가 다시 깊게 잠이 들자 명세진은 도우미와 함께 방에서 나가 계단 입구에서 전화를 받았다. 그녀가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송시아 씨?”“사모님.”명세진이 이마를 찌푸렸다. “송시아 씨, 난 전에도 말했어요. 민아가 송시아 씨를 인정하고 싶다고 하면 저희는 막지 않겠다고요. 하지만 다른 수단으로 우리 집안에 무언가를 할 생각이라면, 지금 명확히 알려줄게요. 우린 그리 만만한 사람들이 아니에요. 앞으로는 전화하지 말아요. 아니면 경찰에 신고할 거예요.”말을 마친 그녀는 단호히 전화를 끊어버렸다.송시아는 사무실에 앉아 꺼져버린 핸드폰을 바라보고 있었다. 순식간에 그녀의 얼굴에 싸늘함이 번뜩였다.소씨 가문이 계속 서울에서 버티고 있으면 그녀가 소민아의 마음속에 들어갈 자리는 생기지 않는다. 절대 이대로 소씨 가문이 서울에서 뿌리를 내리고 살게 하면 안 된다.소씨 가문이 줄 수 있는 건 그녀도 얼마든지 줄 수 있다. 줄 수 없는 것 또한 충분히 가능하다.송시아가 온 힘을 쏟아 이 자리에 오른 건 동생에게 가장 행복한 삶을 선물해주기 위함이었다.소민아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녀는 반드시 동생을 신씨 가문 안주인 자리에 앉힐 것이다.‘장소월... 네 목숨을 끊지 않는 건 다 민아를 위해서야. 영원히 꼭꼭 숨어있는 게 좋을 거야. 아니면... 절대 너한테 자비 따위 베풀지 않아.’송시아는 또 신이랑에게 문자를 보냈다...그때... 신이랑은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이었다. 핸드폰이 진동해 문자를 확인해 본 순간, 그의 이마가 찌푸려졌다. 집에 도착하니 안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신이랑은 바로 핸드폰을 집어넣고 지문으로 문을 열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깨끗하게 정돈된 오피스텔 안에 불청객 한 명이 앉아 있었다. 신수지가 머리를 묶고 앞치마를 한 채 문 쪽을 쳐다보며 말했다.“오빠, 왔어요?”신이랑이 이마를 찌푸리며 그녀를 쳐다보다가 시선을 밥상 위 차려진 음식으로 옮겼다.“열쇠 누구한테 받은 거예요?”신수지가 배시시 웃으며 말했
도우미가 말했다.“민아 아가씨가 돌아오셨어요. 그런데 제가 방금 방에 가보았는데 두통이 다시 재발한 것 같았어요.”명세진의 얼굴이 바로 굳어졌다.“민아는요? 지금 어디에 있어요? 민아한테 무슨 얘기 했어요?”“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약만 가져다드렸어요. 얼굴색이 정말 안 좋았어요.”명세진의 얼굴엔 걱정이 가득했다.“내가 올라가 볼게요. 오늘 저녁엔 민아가 좋아하는 음식들 많이 만들어요.”“네, 사모님.”명세진은 소민아를 줄곧 자신의 친딸로 생각하며 키워왔다. 소현아와 소민아 모두 소씨 가문의 소중한 딸이다. 실제 언니는 소현아였지만, 평소엔 동생인 소민아가 언니처럼 소현아를 챙겼다.명세진은 소민아의 마음이 다치지 않도록 평소 그녀에게 더 관심을 쏟기도 했다.명세진은 방으로 올라가 조용히 문을 열었다. 침대에서 잠들어 있는 소민아를 본 그녀는 조심스레 다가갔다.소민아는 악몽에 시달리고 있는지 베개가 흥건해지도록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안 돼요... 나 데려가지 말아요...”“오... 오지 마...”“언... 언니...”“언니... 어디에 있는 거예요!”명세진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며 손수건으로 이마 위 식은땀을 닦아주었다.“괜찮아. 괜찮아. 고모가 여기에 있어.”명세진은 따뜻하게 이불을 덮어 주고는 예전 소민아를 집에 갓 데려왔을 때처럼 침대 옆에 앉아 밤새 그녀를 토닥여 주었다.슬프게 흐느끼던 소민아는 한참을 다독인 뒤에야 천천히 울음을 그쳤다.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올려 주는 명세진의 얼굴엔 걱정이 가득했다. 아이를 갓 집에 데려왔을 때를 그녀는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다.영양실조로 살집 하나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말라 있었다. 일주일 동안이나 의식을 되찾지 못해 병원에서도 다시 살지 못할 거라고 했었다.이후, 다행히 그녀는 목숨을 지켜냈고 천천히 몸을 회복했다.비록 예전의 기억을 잃어버리긴 했지만,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아주 영리하고 총명한 아이였다. 학교에서의 수업도 교과서 한 번만 읽으면 바로 익히는
세면대 위에 놓아둔 핸드폰이 진동해 살펴보니 신이랑이 보내온 문자였다.[며칠 집에서 쉬어요. 회사 일은 내가 알아서 할게요.]소민아의 머릿속에 신이랑과 결혼하면 다시는 범죄를 저지르지 않을 거라던 송시아의 말이 다시 떠올랐다.소월 언니 집안에 관한 일은 고모부로부터 들은 적이 있다. 당시 장씨 집안의 지위는 어마어마하게 높았다고 한다. 서울에서 높은 권세를 누리고 있는 가문들조차도 장씨 집안에겐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암암리에 수많은 극악무도한 짓을 저질렀다.한 사람의 목숨은 단 한마디 말로 가볍게 좌지우지되는 것이었다. 소씨 집안은 명함도 내밀지 못했고, 서울에서 난다긴다하는 명문가 집안도 장해진 앞에선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송시아가 저지른 범죄도 그들과 그리 다르진 않을 것이다.소민아는 갑자기 밀려온 어지러움 때문에 정신이 아찔해졌다. 세면대를 지탱하지 않았다면 바닥에 쓰러졌을 것이다. 그녀의 머릿속에 낯설고도 생생한 기억이 펼쳐졌다.울음소리 가득한 어두운 지하실...남자 한 명이 그녀 앞에 쪼그리고 앉아 그녀에게 만두 하나를 쥐여주었다. 6, 7세 남짓한 어린 여자아이는 허겁지겁 만두를 입에 구겨 넣었다...머리가 깨질 것만 같아 이마를 감싸 쥐었다. 곧이어 참을 수 없는 두통이 밀려왔다.고통을 견디며 30초 정도 지내 보내니 그제야 통증이 조금씩 가라앉았다.그곳은 대체 어디일까. 왜 그녀 기억 속엔 없었던 걸까...그 남자는 누구지?왜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거지?도우미가 깨끗이 세척한 옷을 들고 들어왔다가 이상한 모습의 소민아를 보고는 다급히 다가와 물었다.“아가씨, 왜 그러세요? 또 머리가 아픈 거예요? 제가 약 가져다드릴게요.”소민아는 어렸을 때 자주 두통을 앓았었다. 하지만 이미 오랫동안 발병하지 않았다.도우미가 얼른 약을 꺼내 소민아에게 가져다주었다.약을 입에 넣고 물로 삼키니 두통이 많아 가라앉았다.도우미가 말했다.“아가씨, 계속 불편하시면 병원에 가보세요.”소민아가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그녀가 신이랑과 결혼만 하면 송시아는 더는 다른 사람을 해치지 않을 거라고 했었다.“왜 그렇게 보는 거예요? 네?”소민아는 뒤로 몇 걸음 물러서 신이랑과 거리를 넓혔다.“난 괜찮으니까 먼저 돌아가요. 잠깐 어지러워서 그랬어요.”“그래요. 내가 차로 데려다줄게요.”“아니에요. 회사와 내가 가려는 곳은 반대 방향이에요. 지금은 근무 시간이잖아요. 이랑 씨 일에 영향 줄 수는 없어요.”소민아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마음속에서부터 그를 천천히 멀리하기 시작했다.그 변화를 느낀 신이랑의 얼굴에 감출 수 없는 실망감이 어렸다.“민아 씨, 무슨 일 있었던 거예요? 아니면 송시아가 또 기성은 씨로 협박한 거예요? 뭐든 상관없으니까 나한테 말해요. 내가 도와줄게요.”소민아는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보았다.‘신이랑 씨, 대체 왜 나한테 이렇게 잘해주는 거예요?’‘이건 친구에게 베푸는 호의가 아니잖아요! 그보단... 다른 관계...’소민아는 그에게 똑똑히 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이랑 씨, 여긴 불편하니까 차에 가서 얘기할까요?”“그래요. 내가 캐리어 들어줄게요.”신이랑은 소민아의 짐을 들고 그녀와 함께 주차장으로 향했다. 차에 올라탄 뒤 그가 물었다.“나한테 할 얘기 있어요?”“이랑 씨, 우린 친한 친구 맞죠? 이랑 씨도 송시아처럼 나쁜 사람으로 변하진 않을 거죠?”신이랑은 잠시 당황했다가 이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민아 씨, 나쁘게 변하든 아니든 절대 민아 씨를 해치진 않을 거예요!”신이랑이 그녀에게 하는 약속이었다.“민아 씨 생각엔 내가 그런 사람으로 변할 것 같아요?”소민아는 그를 믿는 게 맞는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송시아의 말로는 신이랑은 앞으로 정계에 입성할 것이고 기성은의 위협이 될 거라고 한다. 그녀는 목구멍까지 올라왔던 말을 다시 삼켜버렸다.결국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기성은이 그녀에게 신신당부한 말도 있었기 때문이었다.“서울에 돌아가면 그 누구의 말도 믿으면 안 돼요.”“이랑 씨는요? 회사에서 유일하게
소민아의 눈동자에서 빛이 점점 꺼져가고 있었다. 너무 괴로워 목구멍에서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당신 생각이에요, 아니면 이랑 씨 생각이에요?”송시아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민아야, 그 말을 이랑 씨가 들었다면 얼마나 섭섭해할까. 줄곧 신이랑은 나랑 다르다고 말해왔으면서, 지금 신이랑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거야?”“내가 했던 말 잊었어?”“신이랑은 널 위해 본가에까지 들어갔어!”송시아가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내뱉었다.“신이랑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너만을 위해 살았어!”“핸드폰 확인해봐. 신이랑이 너한테 문자를 얼마나 많이 보냈는지.”비행기에서 내린 뒤 그녀는 핸드폰을 무음으로 설정해 놓았다. 기성은의 문자 외에 다른 건 확인할 시간이 없었다.송시아가 걸어 나가며 말했다.“일단 씻고 내려와서 밥 먹어. 저녁에 서울로 돌아갈 거야.”소민아가 핸드폰을 꺼내 보니 베터리가 없어 꺼진 상태였다. 충전선을 꼽고 전원을 켜니 송시아의 말처럼 신이랑으로부터 적잖은 문자가 와 있었다.40개가 넘는 문자 중 대부분이 그녀가 어디에 있는지 묻는 내용이었다. 말투에서 그녀에 대한 걱정이 고스란히 묻어나오고 있었다. 그가 이럴수록 소민아는 그에게 죄책감이 느껴지고 부담감이 더해갔다.오후 3시 식사를 마치고 짐 정리를 한 다음, 비행기에 올라탔다.소민아는 창밖으로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송시아가 그녀 옆에 앉아 눈을 감고는 말했다.“보지 마. 아무리 봐도 기성은은 너랑 같이 여길 떠나지 않아.”“기성은은 애초부터 이 더러운 곳에 더 어울리는 사람이었어. 네가 아무리 애써도 뼛속 깊이 새겨진 비천함은 변하지 않아.”소민아가 말했다.“당신은 얼마나 고귀한 사람이길래 그런 말을 하는 거예요? 당신도 예전엔 이처럼 악랄한 환경에서 살았었다는 거 잊지 말아요.”송시아가 들뜬 말투로 말했다.“이 세상 사람들에겐 모두 등급이 있어. 전연우가 아니었다면 기성은은 아직도 여기에서 굴러다녔을 거야. 참, 내가 알려줬었나? 기성은의 아버지는 지독
“그때가 되면 소씨 가문도, 그리고 언니도... 기성은 하나 때문에 무너져버릴 수 있어.”송시아가 가장 잘하는 게 바로 사람의 가장 여린 약점을 건드리는 것이다. 그 몇 마디 말에 소민아는 패닉에 빠져버렸다.“그... 그럴 리가 없어요! 기성은 씨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요. 신이랑 씨도 당신 말처럼 기성은 씨를 해치지 않을 거고요. 당신 입에서 나온 말은 한 글자도 믿지 않을 거예요.”송시아가 더더욱 그녀를 몰아붙였다.“민아야, 내가 예전에도 말했었잖아. 장씨 가문은 서울 지하조직 수장이었다고. 그 인간들이 무슨 짓을 했었는지 알기나 해? 당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장해진이 죽길 바랐을까. 전연우가 없었다면 장소월은 목숨을 부지하지도 못했을 거야.”“그동안 장씨 집안, 남원 별장을 지켰던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해?”“장씨 집안은 전연우와 기성은이 지탱하고 있었던 거야. 장소월은 다른 사람에게 기대어야만 살 수 있는 기생충에 불과해.”“장씨 집안이 끝나버린 지금, 기성은은 장씨 집안의 뒤처리를 해주려고 저렇게 고생하고 있는 거야.”“장씨 집안이 저지른 죄를 모아 신고하면 목숨이 몇백 개라도 모자라거든.”소민아는 더는 참지 못하고 두 손으로 귀를 막았다.“됐어요. 그만 해요. 소월 언니를 벌레 보듯 하고 있는데... 소월 언니는 아무것도 몰라요. 무슨 근거로 모든 잘못을 소월 언니에게 뒤집어씌우는 거예요? 내가 보기에 소월 언니는 당신보다 훨씬 더 좋은 사람이에요. 적어도 다른 사람을 해치진 않았으니까요!”“만약 내가 당신 동생이 아니었다면 어떤 방식으로 날 해치우려고 했어요? 난 저번 하마터면 당신 손에 철저히 망가질 뻔했어요.”송시아는 화가 나 이마를 찌푸렸다.“장소월이 착하다고? 그래! 장소월은 어렸을 때부터 걱정하나 없이 온실 속에서 자란 사람들의 부러움을 한몸에 받는 귀한 집 아가씨였어. 착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민아야... 우리한테 제일 필요 없는 게 바로 착함이야. 장소월처럼 살았다면 난 이미 일찌감치 죽은 목숨이었을 거야.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