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목소리는 확실히 백윤서의 것이다.그도 그럴 것이 백윤서는 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했지 않은가. 전연우는 그녀를 그런 곳에서 학업을 이어 나가게 할 리가 없다.은경애가 장소월을 발견하고는 말했다.“아가씨.”그 말에 백윤서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섰다.“소월아.”백윤서가 장소월을 향해 환히 미소 지었다.“너.. 왜 교복을 입지 않았어? 네가 퇴원했다는 걸 알고 함께 학교에 가려고 왔어. 이제부턴 같은 학교에 다니게 됐으니 잘 부탁해.”이건 운명인가?전생에서의 백윤서도 제운 고등학교에 다녔었다.장소월은 이번 생에서 무언가 바뀌면 모든 사람의 운명도 따라서 바뀔 거라 예상했다.하지만 이제 보니 모든 건 전생과 똑같이 흘러가고 있었다.그럼 백윤서는 죽게 될까?그녀 역시...모든 사람의 운명은 바뀌지 않는다. 모두 처음 결정되었던 결말로 향해가고 있을 뿐.장소월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백윤서가 의아한 듯 물었다.“소월아, 너 괜찮아? 몸이 아직 불편한 거야?”장소월이 덤덤히 말했다.“괜찮아요.”은경애가 말했다.“소월 아가씨, 윤서 아가씨... 어르신께서 내려오시면 식사를 시작하셔도 돼요.”장소월은 주방에서 나온 뒤 컵에 우유를 부었다... 차가웠다.그때 돌연 머릿속에서 오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이런. 아가씨, 아침부터 무슨 찬 우유예요. 제가 따뜻하게 끓여드릴게요.”장해진과 검은색 정장을 입은 전연우가 아래층으로 내려왔다.“이 프로젝트는 보안을 철저히 해야 할 거야. 절대 외부에 새어나가선 안 돼.”전연우가 대답했다.“네. 아버지.”“아가씨, 오 아주머니께서 나가기 전 저에게 신신당부했어요. 아가씨께선 아침에 찬 우유를 드시면 배탈이 난다고요. 이미 우유를 데웠으니까 따뜻한 걸 마시세요.”그 말을 들은 전연우가 조용히 장소월을 힐끗 보고는 이내 시선을 거두었다.장소월이 냉장고 문을 닫고 식탁에 앉으며 말했다.“괜찮아요.”장해진은 자리에 앉은 뒤 한참 동안 전연우와 회사 일을 논의한 뒤에야 장소월에게 관심을
얼굴에 드러나 있는 표정으론 그 감정을 예측할 수 없었다.상품은 손에 방패를 들고 있는 검은색 기사였는데 책상 위에 올려놓으니 사뭇 고급스러워 보였다.“거짓말인지 아닌지 누가 알아. 소월이의 머릿속에 남자만 가득 들어있는 걸 내가 모르는 것도 아니고.”장해진은 그녀의 성적표를 툭 던져버렸다.숟가락을 잡고 있던 장소월의 손에 더더욱 힘이 들어갔다.성적표는 마침 전연우의 발 옆에 떨어졌다.그가 허리를 굽혀 주어보니 거의 모든 과목이 만점이었다.그의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저번 시험에서 장소월은 평균 4, 50점밖에 받지 못했다.정말 이 성적이라면 장해진의 도움 없이도 국내 모든 대학에 입학할 수 있다.그녀의 힘으로 만들어 낸 성적인지, 아니면 다른 꼼수를 썼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그건 오직 그녀 자신만이 알 것이다.몰래 훔쳐본 백윤서는 화들짝 놀랐다.장소월의 모든 과목 성적이 그녀보다 높은 것이다.이 성적은 서울 제2 고등학교에서 전교 3등 안엔 들 것이다.불편한 감정이 백윤서의 가슴속에서 천천히 피어올랐다.그녀는 장소월의 성적이 언제 이렇게 올랐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시험 잘 봤네. 윤서보다 70점이나 높아.”장소월은 그의 말투에 담겨있는 것이 진심 어린 칭찬인지 아니면 그녀가 꼼수를 부렸다고 의심하며 비아냥거리는 것인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하지만 그건 장소월의 관심사가 전혀 아니었다.그들의 눈에 그녀는 그저 아무런 쓸모도 없는 폐기물에 불과하니 말이다.장소월은 아직 이름을 알지 못하는 새로 온 도우미를 보며 말했다.“학교에서 또 전화가 오면 전 한동안 학교에 가지 못한다고 말해주세요. 시합에 관한 일은 전 흥미 없어요. 참가하고 싶지 않아요.”장소월이 숟가락을 내려놓고 몸을 일으켰다.“전 다 먹었어요. 아버지, 천천히 드세요.”오늘의 죽은 좀 딱딱해 장소월은 몇 입만 먹고는 절반이 넘는 양을 남겼다.우유는 모두 비웠다.오지연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네... 알겠어요.”오지연이 마음속으로
장소월은 하얀색 운동복을 입고 머리를 높게 질끈 묶고는 모자를 눌러썼다. 여리여리한 그녀의 몸매는 잔디 위 많은 사람의 시선을 사로잡았다.골프 수업을 맡은 선생님은 예전 우승도 한 적 있는 골프 국가대표 선수였다. 지금은 이미 은퇴했는데 한눈에 봐도 신사의 분위기가 흠씬 풍겨왔다.듣기론 그의 가정형편은 몹시 가난해 아버지는 돈을 벌게 하려는 목적으로 그를 천하일성에 보냈다. 그 후 골프를 접촉하게 되었고 그렇게 전문적인 훈련을 받았다고 한다.수많은 거물이 그의 시합 한번을 보기 위해 먼 길을 마다하지 않는다.그의 수업을 받게 하려고 장해진은 꽤 큰 힘을 썼다.온주원은 뒤에서 장소월을 안고 손으로 골프채를 붙잡았다.“손목에 너무 힘주지 말아요. 긴장을 풀고 마음을 편안하게 먹어요.”장소월은 입술을 깨물고 몸에 힘을 뺐다. 두 사람 사이엔 여전히 처음과 같은 정도의 공간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의 힘을 빌려 골프채를 휘두르니 정확히 구멍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저번보다 아주 좋아졌어요.”장소월이 말했다.“선생님, 과찬이세요. 선생님이 아니었다면 전 평생을 해도 넣지 못했을 거예요.”온주원이 물병을 그녀에게 건네주었다.“소월 씨의 수업은 일주일에 세 번인데 이미 12번이나 빠졌어요. 몸이 안 좋았던 거예요?”장소월이 뚜껑을 열고 한 모금 마시고는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학교 일 때문이에요.”온주원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공부가 가장 중요하죠. 시간 괜찮으면 전에 빠졌던 수업을 모두 보충해 줄게요.”장소월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다른 수업에 영향을 주는 거 아닌가요? 선생님의 수업은 이미 몇 년 뒤까지 예약되어 있잖아요. 선생님 같은 훌륭한 분을 계속 잡아두면 안 되죠.”온주원은 서른 살이 넘은 나이었지만 고작 스무 살 남짓하게 보일 정도로 동안 외모를 갖고 있었다. 또한 그의 말투와 행동 모두 여자들이 좋아하는 요소를 갖고 있어 그와 대화를 나누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졌다.그가 손목시계를 보고 시간을 확인했다.“아직 한
장소월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온주원이 먼저 제안했다.“아직 10분이 남았으니 일단 식사하러 가시죠. 소월 씨... 제가 함께 점심 식사를 하자고 물어도 될지 모르겠습니다.”장소월은 외출할 때 아무것도 먹지 않아서 막 도착했을 때부터 이미 배가 고팠다.“별로 배고프지 않아요.”그 말이 입에서 나오자마자 장소월의 뱃속에서 때아닌 꼬르륵 소리가 새어 나왔다.“꼬르륵.”장소월은 부끄러워서 얼굴이 빨개졌다.온주원은 미소를 지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갑시다! 오늘 소월 씨가 좋아할 만한 디저트가 새로 나왔어요.”골프 캐디는 이미 골프채를 치웠다.“그럼 선생님께 부탁드리겠습니다.”장소월은 발걸음을 옮겨 온주원의 뒤를 따라갔다.천하일성은 골프 외에도 음식과 숙박 등 모든 엔터테인먼트 시설이 통합된 곳이었다.돈만 있으면 거의 모든 서비스를 제공받을 수 있는 곳이었다.“한식 먹을래요, 아니면 양식 먹을래요?”“한식 먹죠.”장소월은 아직 이곳에서 식사를 한 적이 없었다.“그래요.”온주원은 프런트 데스크로 가서 2층에 있는 레스토랑을 예약했다.두 사람은 엘리베이터를 탔고 온주원은 10층 버튼을 눌렀다.엘리베이터는 빠르게 올라갔다.10층에 도착하자마자 온주원은 신사답게 손으로 엘리베이터 문을 막으며 말했다.“자, 가시죠.”장소월이 말했다.“감사합니다.”두 사람은 밟기 좋은 부드러운 페르시아식 카펫이 깔린 조용한 복도를 걸어갔다.레스토랑에 들어서자 웨이터가 곧 두 사람을 반갑게 맞이했다.“온주원 님, 예전과 같은 자로 준비해 드렸습니다.”“네.”창가 자리에 앉아 아래로 내려다보니 무성한 푸른 잔디가 훤히 보이는 풍경은 정말 좋았다.그리고 부드럽고 아름다운 음악도 흘러나왔고 분위기가 조용했다...장소월은 이곳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웨이터가 두 개의 메뉴판을 가져왔는데 가격은 적혀 있지 않았다. 그러나 음식 사진을 보니 요리가 맛있어 보였다.“먹고 싶은 게 있나 한번 봐요.”장소월은 사진을 가
“마실 건요? 뭐 마실래요?”장소월이 말했다.“아뇨, 따뜻한 물 한 잔이면 돼요.”“이야, 소월이 아니니? 오랜만이야!”조용한 분위기에서 갑자기 불쾌한 목소리가 울려 퍼져 시선을 옮겨 보니, 장소월은 눈빛이 흔들리면서 당황하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오, 오빠...”날카로운 눈빛의 전연우가 위압적인 분위기를 풍기며 들어왔다.“수업 끝났어?”전연우가 장소월에게 남긴 트라우마가 너무 커서 그를 본 순간 장소월은 당황하고 겁이 난 나머지 하마터면 설명을 늘어놓을 뻔했다.전생의 전연우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지만 소유욕이 강해 소름 끼칠 정도로 그녀에게 집착했었다.장소월은 마음속으로 자신을 욕했다.‘야, 장소월! 너 진짜 너무 약한 거 아니야? 지금 너희는 평범한 오빠 동생 사이일 뿐이야. 왜 아직도 이렇게 그를 무서워하는 거야! 철 좀 들어!’장소월은 고개를 끄덕였다.“네, 방금 끝나서 선생님과 같이 밥 먹으러 왔어요.”온주원은 자리에서 일어나 전연우에게 손을 내밀었다.“안녕하세요. 전 온주원이라고 합니다. 소월 씨의 골프 선생님이에요.”전연우는 그와 간단히 악수하고 말했다.“전연우입니다. 소월이 오빠예요.”한 명은 전 씨이고 한 명은 장 씨라...온주원은 더 묻지 않았다.“마침 이렇게 만났는데 같이 앉아서 식사하시죠. 저랑 소월 씨도 방금 왔어요.”전연우는 장소월을 힐끗 보더니 말했다.“아닙니다. 약속이 있어서요.”서철용은 옆에서 이 상황을 지켜보다가 말했다.“아니야, 연우야! 어쩌다가 이렇게 소월이랑 같이 식사할 기회가 생겼는데, 그리고... 윤서가 도착하려면 아직 멀었어. 뭘 그리 급하다고...”“맞지, 소월아?...”제운고등학교에서 이곳까지 오려면 30분밖에 걸리지 않고, 점심시간은 두 시간이었다.장소월은 갑자기 무언가 떠올랐다.오늘은 백윤서의 생일이고 장소월의 생일은 다음 주 12일이다. 즉, 12월 12일이다. 그들의 생일은 정확히 일주일 간격이었다.매년 그녀의 생일은 소박했는데 아줌마가 그녀에게 케이크와
“오빠...”장소월은 무언가를 더 말하려고 했지만 전연우는 차갑게 말을 내뱉었다.“마음대로 해.”말을 마치고 그는 돌아서서 떠났다.온주원은 장소월이 긴장한 모습을 보고 말했다.“앉아요. 멀지 않아서 아직 시간이 넉넉해요.”장소월은 마음이 불편한 채 다시 자리에 앉았고 웨이터가 디저트를 들고 왔다.온주원은 방금 전 분위기에서 뭔가 이상한 것을 감지했다.그는 더 묻지 않고 다른 화제로 돌렸다. 천하일성의 모든 엔터테인먼트 프로그램을 소개하고 흥미로운 이야기도 하면서 그녀를 즐겁게 해주었다.어떤 사람들은 기분이 얼굴에 그대로 나타나는데, 장소월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아주 쉽게 그녀가 마음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추측할 수 있었다.백윤서의 생일이라고 같은 반 친구들이 많이 왔다...백윤서는 장소월과 같은 학교라는 것 외에도 한 가지 더 말하지 않은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장소월과 같은 6반으로 전학한 것이다.이번에 온 사람들 중에는 강용도 있었다.백윤서는 여학생들에게 둘러싸여 장난치고 웃으면서 룸으로 들어가느라 장소월이 눈에 띄게 창가 자리에 앉아 중년 남성과 이야기 나누고 있는 모습을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하지만 뒤에서 천천히 걸어 들어오던 강용은 그녀를 한눈에 알아보았다.방서연과 허철도 오랫동안 장소월을 보지 못하다가 그녀가 이곳에 있다는 사실에 매우 놀랐다.“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허철이 말했다.“백윤서는 장소월의 언니잖아. 그런데 이번 생일 파티에 초대를 안 했다고? 하긴 그래... 장소월 같은 성격의 사람을 누가 반기겠어!”“아니... 그런데 평소에는 정말 몰랐는데, 이번 시험에서 장소월 1등 했잖아. 1반에서도 5등 안에 들고, 이 년이 무슨 꼼수를 부린 거 아니야?”허철은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장소월이 6반에서 얼마나 심하게 괴롭힘당했는지 잊지 마! 쟤가 반을 바꾸려고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성적을 받는 것도 충분히 이해돼.”두 사람은 동시에 강용을 바라보았는데 그는 라이터를 손
“며칠 못 봤는데 너 좋아 보인다!”강용은 고개를 숙여 금속 라이터를 들고 있었고 그의 눈동자에 붉고 파란 불꽃이 비쳐 기분을 알 수가 없었다.엘리베이터는 이미 12층에 있었고 곧 도착할 것 같았다.온주원은 내려가는 버튼을 누르고 물었다.“아는 사이에요?”“안 친해요.”장소월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따라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다.허철은 폭소하며 말했다.“용아, 장소월은 널 신경도 안 쓰는데?”방서연은 강용의 어깨를 톡톡 두드리고 아무 말 없이 미소를 지으며 룸 안으로 곧장 걸어 들어갔다.강용은 알 수 없는 미소를 짓고 손에 든 라이터의 덮개를 닫았다.“무정한 놈.”10층의 룸은 웃음소리로 북적거렸다.꽃, 풍선, 케이크, 양초...원래는 저녁에 생일 파티를 열려고 했지만 전연우가 오늘 밤 12시에 출발해서 해외로 출장 가야 하기 때문에 점심에 파티를 열 수밖에 없었다...생일 축하 노래를 부른 후 백윤서는 케이크를 한 조각 잘라서 모두가 보는 앞에서 창문 앞에 서 있는 전연우에게 가져다주었다.“연우 오빠, 이 첫 번째 케이크는 오빠에게 줄게요. 오늘 바쁜데도 시간 내서 내 생일 파티에 와줘서 너무 고마워요.”전연우는 원래 단 음식을 싫어하지만 그래도 케이크를 받았다. 그는 시선을 옮겨 장소월이 차에 올라타는 모습을 보고 무표정하게 돌아섰다. 그의 눈빛에 불쾌한 기색이 역력했다.“저녁엔 정 집사가 데려다주실 거야. 난 회사로 가봐야 해.”전연우는 차 키를 들고 떠나려고 했고 그때 그는 케이크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연우 오빠...”백윤서는 그를 부르며 테이블 위에 놓인 케이크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실망한 듯했다.곧바로 한 여학생이 와서 그녀를 위로해 주었고 백윤서는 케이크를 한 조각 더 잘라 강용에게 주었다.강용은 거만하게 소파에 앉아 두 발을 테이블에 올려놓고 있었는데 백윤서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 다리를 내렸다. 그리고 그는 포크로 케이크를 한 입 맛보고는 하마터면 토할 뻔했다.“여자들은 진짜 이상한 거 좋아한
“미안해... 내가 감정 조절을 잘 못해.”무섭게 얼어붙었던 눈빛이 금방 사라졌고 백윤서는 다시 순수하고 미안함이 가득한 표정으로 서문정을 바라보았다.“정말... 미안해, 내가 일부러 그렇게 심한 말 한 게 아니야. 지금 우리는 같이 살지 않아. 내가 소월이한테 네가 했던 말을 전해줄게. 네가 마음에 두지 않았으면 좋겠어.”서문정은 그녀를 이상하게 쳐다보았다. 백윤서에 대해 가졌던 좋은 감정은 모두 사라졌다.감정 조절을 잘 못한다고? 변명은 잘하네, 솔직하게 말해서 더 이상 아닌 척할 수 없는 거겠지...백윤서는 방금 6반으로 왔을 때 누구에게나 잘해주고 연약한 모습을 보여주면서 다른 사람들의 보호 욕구를 불러일으켰었다...이제 서민정이 떠나자 룸에는 아무도 남지 않았다...원래의 활기찬 분위기는 사라졌다.처음엔 분위기가 괜찮았는데 백윤서도 상황이 왜 이렇게 변했는지 이유를 몰랐다.천하일성에서 나온 장소월은 악기와 서예를 배우러 갔고 마지막에는 댄스 학원도 갔다...장소월은 댄스에 소질이 없었다. 하느님은 그녀에게 누구보다 유연한 몸을 주었지만 그녀는 포인트를 잘 잡지 못했다. 거울 앞에 서서 보니 그녀는 자신이 춤추는 모습이 괴물 같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그래도 가장 고통스러운 건 스트레칭이었다. 3개월간 연습하지 않았다. 저녁 8시 30분이 되어서야 연습실에서 나온 장소월은 온몸이 지쳐서 바닥에 드러누웠고 하마터면 구급차를 부를 뻔했다. 심지어 차라리 여기서 밤을 새우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정 집사는 백윤서를 데리러 가서 장소월은 할 수 없이 택시를 타고 돌아가야 했다.그녀는 두꺼운 검은 코트를 입고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택시에 타서 누워 눈을 감자 곧 잠이 들었다.택시 기사가 돌아보면서 물었다.“아가씨, 아직 어디로 가는지 말 안 했어요! 아가씨...”“남원별장이요.”장소월은 바로 창문에 기대어 잠이 들었다.남천 그룹.“대표님, 1시간 30분 후에 맨체스터로 출발하는 비즈니스석 티켓을 샀습니다. 30분 후에 출발하면 됩
신이랑의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그래요.”소민아는 회사에 돌아가 주차장에서 차를 세우던 도중 캡모자를 눌러쓰고 은밀하게 움직이는 남자 한 명을 발견했다. 소민아는 차에서 내리지 않고 그의 행동을 살펴보았다.얼마 후 남자가 전화를 걸었다.“누님, 그 여자 위치 찾았어요. 사진도 있고요. 전 지금 지하주차장에 있어요.”소민아는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것 같았다. 송시아가 찾는 그 여자?소월 언니다!송시아가 이렇게나 빨리 소월 언니를 찾았다고?그... 그럴 리가 없다!3분 뒤, 송시아가 엘리베이터에서 걸어 나오자 남자는 그녀에게 서류 봉투 하나를 건네주었다.“누님, 그 여자 어떻게 처리할 거예요? 몰래...”그가 손가락으로 목을 베는 동작을 취했다.소민아는 빠르게 핸드폰을 꺼내 두 사람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급할 필요 없어. 넌 일단 돌아가 내 전화 기다리고 있어. 너무 쉽게 죽게 하면 안 되지.”“알겠어요. 그럼... 누님, 저희한테 줄 수고비는... 저희들 요즘 전국을 휘젓고 다니고 해외에까지 나가느라 정말 힘들었어요.”송시아는 바로 핸드폰을 꺼내 남자에게 돈을 이체해주었다.“이건 수고비의 3분의 1이야. 나머지는 일이 다 끝나면 줄게. 너희들 고생한 거 잊지 않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걱정하지 마십시오, 누님. 저희들 절대 누님을 실망시키지 않을 거예요.”두 사람의 거래가 끝나자 지하주차장엔 다시 고요함이 내려앉았다. 소민아는 씩씩거리며 차에서 내려가 대표 사무실로 향하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소민아가 벌컥 문을 열었을 때, 송시아는 서류 봉투를 뜯고 있었다. 그녀는 소민아를 보고는 다시 서류 봉투를 닫아 옆에 놓아두었다.“언니한테 무슨 할 말 있는 거야?”“아까 지하주차장에서 만났던 그 남자 누구예요? 송시아 씨, 이번엔 또 누굴 죽이려는 거예요! 왜 꼭 그렇게 사람을 죽여야만 하는 건데요! 아무도 당신을 이기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송시아가 웃으며 그 서류 봉투를 들고 일어섰다. 그녀는 소민아 앞에서
소민아는 며칠 더 휴가를 주겠다는 신이랑의 배려를 거절했다. 다음 날 회사에 나와보니 신이랑은 여느 때처럼 아침 일찍부터 사무실에 나와 있었다.그는 피곤한 듯 이마를 꾹꾹 누르고 있었다. 신이랑이 고개를 드니 눈에 가득 퍼진 실핏줄이 보였다. 소민아는 바로 가방을 내려놓고는 걱정스레 다가갔다.“이랑 씨, 두통이 또 발작한 거예요? 약은 먹었어요?”신이랑은 고개를 저었다. 한눈에 봐도 예전 두통 때문에 힘들어하던 그 모습이었다.소민아는 손을 뻗어 그의 이마를 만지려다가 허공에서 멈춰 섰다.“제가 병원 예약해 둘 테니까 가봐요. 이렇게 참는 것만이 방법은 아니에요. 오늘 스케줄은 오후에 예정된 중문 시리즈 사람과의 미팅밖에 없어요. 지금 병원에 가면 그전에 돌아올 수 있을 거예요.”소민아는 이제 신이랑의 스케줄도 기억하고 있었다. 예전엔 항상 신이랑이 먼저 말했고, 장소가 어디든 그녀는 따라가기만 했었는데 말이다.지금의 소민아는 정말 예전과 많이 달라졌다.신이랑이 말했다.“그럴 필요 없어요. 나 괜찮아요.”소민아는 시간을 확인하고는 바로 핸드폰을 들고 신경내과에 예약했다.“편집장님, 30분 뒤로 예약해 뒀어요. 얼른 물건 챙겨서 나랑 같이 가요.”소민아의 말투도 조금 사나워졌다.신이랑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알았어요.”소민아는 부하 직원에게 남은 일을 맡겨두고는 차를 몰고 신이랑과 함께 병원으로 향했다.소민아가 운전하다가 물었다.“혹시 어젯밤 샜어요? 의사 선생님 말씀 잊었어요? 수술 뒤엔 몸을 잘 챙겨야 한다고 했잖아요. 잠을 제대로 안 자는 건 건강 회복에 치명적이에요.”눈을 감고 있던 신이랑은 그녀의 말을 들으니 몸이 훨씬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어젯밤 신수지가 왔었는데 보기 싫어서 호텔로 옮겼어요. 난 신수지가 싫어요.”소민아가 그를 쳐다보며 물었다.“신수지가 이랑 씨를 왜 찾아가요? 동생 아니었어요?”신이랑이 눈을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친 순간, 소민아는 그가 뭘 말하려는
막무가내인 그녀의 모습을 신이랑은 더는 참아낼 수가 없어 단호히 말했다.“현실을 제대로 자각하세요. 난 절대 신수지 씨와 결혼하지 않아요. 당신 집안의 도움은 더더욱 필요 없고요. 성세 그룹에 들어간 건 민아 씨를 위해서예요. 민아 씨가 없어도 난 당신들과 얽히지 않을 거예요.”“계속 여기에 있고 싶으면 있어요.”신이랑은 바로 서재에 걸어 들어가 중요한 서류들을 챙기고는 노트북 가방에 넣었다. 그 모습을 본 신수지는 얼른 달려가 그의 팔을 잡았다.“어디에 가려고요? 오빠, 가지 말아요. 내가 그렇게 싫어요?”“내가 오빠를 좋아하는 것 때문에?”신이랑은 바로 그녀의 손을 뿌리쳐버렸다.“자신을 비참하게 만드는 일 하지 말아요.”신이랑은 물건을 들고 바로 떠나버렸다.신수지는 그의 뒤를 쫓아가며 소리쳤다.“오빠!”신이랑은 이미 엘리베이터를 타고 자리를 떴다.신수지는 분노에 차올라 발을 동동 굴렀다.“이게 다 소민아 때문이야. 너만 없었다면 오빠도 날 멀리하지 않았을 거라고!”신이랑은 차를 몰고 집에서 나가 한 호텔 방에 체크인했다.신수지는 엉엉 울며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유연홍은 자신의 귀한 딸이 울며 들어오자 얼른 뛰어가 달랬다.“왜 그래, 수지야? 누가 너 괴롭혔어? 엄마한테 말해.”유연홍은 신수지의 옆에 앉아 휴지로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엄마! 저 신이랑한테 갔었는데 쫓겨났어요. 밥 한 끼 같이 먹겠다고 하루종일 바쁘게 돌아쳤는데...”“절 완전히 무시하더라고요.”“욕까지 했어요! 대체 제가 그 여자보다 못한 게 뭐예요? 그 여잔 나보다 나이도 많고 예쁘지도 않잖아요.”유연홍이 그녀를 달랬다.“수지야, 네가 이랑이를 찾아간 일 절대 아빠가 알게 하시면 안 돼. 아빠는 이미 이랑이를 집에 돌아오게 할 방법을 찾으셨어. 이랑이가 집에 들어오기만 하면 엄마가 어떻게든 널 받아들이게 할게.”“그러니까 지금은 너무 밀어붙이면 안 돼. 알겠니?”그 말에 신수지는 다운되었던 기분이 많이 괜찮아졌다.“하지만 오빠 마음
소민아가 다시 깊게 잠이 들자 명세진은 도우미와 함께 방에서 나가 계단 입구에서 전화를 받았다. 그녀가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송시아 씨?”“사모님.”명세진이 이마를 찌푸렸다. “송시아 씨, 난 전에도 말했어요. 민아가 송시아 씨를 인정하고 싶다고 하면 저희는 막지 않겠다고요. 하지만 다른 수단으로 우리 집안에 무언가를 할 생각이라면, 지금 명확히 알려줄게요. 우린 그리 만만한 사람들이 아니에요. 앞으로는 전화하지 말아요. 아니면 경찰에 신고할 거예요.”말을 마친 그녀는 단호히 전화를 끊어버렸다.송시아는 사무실에 앉아 꺼져버린 핸드폰을 바라보고 있었다. 순식간에 그녀의 얼굴에 싸늘함이 번뜩였다.소씨 가문이 계속 서울에서 버티고 있으면 그녀가 소민아의 마음속에 들어갈 자리는 생기지 않는다. 절대 이대로 소씨 가문이 서울에서 뿌리를 내리고 살게 하면 안 된다.소씨 가문이 줄 수 있는 건 그녀도 얼마든지 줄 수 있다. 줄 수 없는 것 또한 충분히 가능하다.송시아가 온 힘을 쏟아 이 자리에 오른 건 동생에게 가장 행복한 삶을 선물해주기 위함이었다.소민아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녀는 반드시 동생을 신씨 가문 안주인 자리에 앉힐 것이다.‘장소월... 네 목숨을 끊지 않는 건 다 민아를 위해서야. 영원히 꼭꼭 숨어있는 게 좋을 거야. 아니면... 절대 너한테 자비 따위 베풀지 않아.’송시아는 또 신이랑에게 문자를 보냈다...그때... 신이랑은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이었다. 핸드폰이 진동해 문자를 확인해 본 순간, 그의 이마가 찌푸려졌다. 집에 도착하니 안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신이랑은 바로 핸드폰을 집어넣고 지문으로 문을 열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깨끗하게 정돈된 오피스텔 안에 불청객 한 명이 앉아 있었다. 신수지가 머리를 묶고 앞치마를 한 채 문 쪽을 쳐다보며 말했다.“오빠, 왔어요?”신이랑이 이마를 찌푸리며 그녀를 쳐다보다가 시선을 밥상 위 차려진 음식으로 옮겼다.“열쇠 누구한테 받은 거예요?”신수지가 배시시 웃으며 말했
도우미가 말했다.“민아 아가씨가 돌아오셨어요. 그런데 제가 방금 방에 가보았는데 두통이 다시 재발한 것 같았어요.”명세진의 얼굴이 바로 굳어졌다.“민아는요? 지금 어디에 있어요? 민아한테 무슨 얘기 했어요?”“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약만 가져다드렸어요. 얼굴색이 정말 안 좋았어요.”명세진의 얼굴엔 걱정이 가득했다.“내가 올라가 볼게요. 오늘 저녁엔 민아가 좋아하는 음식들 많이 만들어요.”“네, 사모님.”명세진은 소민아를 줄곧 자신의 친딸로 생각하며 키워왔다. 소현아와 소민아 모두 소씨 가문의 소중한 딸이다. 실제 언니는 소현아였지만, 평소엔 동생인 소민아가 언니처럼 소현아를 챙겼다.명세진은 소민아의 마음이 다치지 않도록 평소 그녀에게 더 관심을 쏟기도 했다.명세진은 방으로 올라가 조용히 문을 열었다. 침대에서 잠들어 있는 소민아를 본 그녀는 조심스레 다가갔다.소민아는 악몽에 시달리고 있는지 베개가 흥건해지도록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안 돼요... 나 데려가지 말아요...”“오... 오지 마...”“언... 언니...”“언니... 어디에 있는 거예요!”명세진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며 손수건으로 이마 위 식은땀을 닦아주었다.“괜찮아. 괜찮아. 고모가 여기에 있어.”명세진은 따뜻하게 이불을 덮어 주고는 예전 소민아를 집에 갓 데려왔을 때처럼 침대 옆에 앉아 밤새 그녀를 토닥여 주었다.슬프게 흐느끼던 소민아는 한참을 다독인 뒤에야 천천히 울음을 그쳤다.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올려 주는 명세진의 얼굴엔 걱정이 가득했다. 아이를 갓 집에 데려왔을 때를 그녀는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다.영양실조로 살집 하나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말라 있었다. 일주일 동안이나 의식을 되찾지 못해 병원에서도 다시 살지 못할 거라고 했었다.이후, 다행히 그녀는 목숨을 지켜냈고 천천히 몸을 회복했다.비록 예전의 기억을 잃어버리긴 했지만,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아주 영리하고 총명한 아이였다. 학교에서의 수업도 교과서 한 번만 읽으면 바로 익히는
세면대 위에 놓아둔 핸드폰이 진동해 살펴보니 신이랑이 보내온 문자였다.[며칠 집에서 쉬어요. 회사 일은 내가 알아서 할게요.]소민아의 머릿속에 신이랑과 결혼하면 다시는 범죄를 저지르지 않을 거라던 송시아의 말이 다시 떠올랐다.소월 언니 집안에 관한 일은 고모부로부터 들은 적이 있다. 당시 장씨 집안의 지위는 어마어마하게 높았다고 한다. 서울에서 높은 권세를 누리고 있는 가문들조차도 장씨 집안에겐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암암리에 수많은 극악무도한 짓을 저질렀다.한 사람의 목숨은 단 한마디 말로 가볍게 좌지우지되는 것이었다. 소씨 집안은 명함도 내밀지 못했고, 서울에서 난다긴다하는 명문가 집안도 장해진 앞에선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송시아가 저지른 범죄도 그들과 그리 다르진 않을 것이다.소민아는 갑자기 밀려온 어지러움 때문에 정신이 아찔해졌다. 세면대를 지탱하지 않았다면 바닥에 쓰러졌을 것이다. 그녀의 머릿속에 낯설고도 생생한 기억이 펼쳐졌다.울음소리 가득한 어두운 지하실...남자 한 명이 그녀 앞에 쪼그리고 앉아 그녀에게 만두 하나를 쥐여주었다. 6, 7세 남짓한 어린 여자아이는 허겁지겁 만두를 입에 구겨 넣었다...머리가 깨질 것만 같아 이마를 감싸 쥐었다. 곧이어 참을 수 없는 두통이 밀려왔다.고통을 견디며 30초 정도 지내 보내니 그제야 통증이 조금씩 가라앉았다.그곳은 대체 어디일까. 왜 그녀 기억 속엔 없었던 걸까...그 남자는 누구지?왜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거지?도우미가 깨끗이 세척한 옷을 들고 들어왔다가 이상한 모습의 소민아를 보고는 다급히 다가와 물었다.“아가씨, 왜 그러세요? 또 머리가 아픈 거예요? 제가 약 가져다드릴게요.”소민아는 어렸을 때 자주 두통을 앓았었다. 하지만 이미 오랫동안 발병하지 않았다.도우미가 얼른 약을 꺼내 소민아에게 가져다주었다.약을 입에 넣고 물로 삼키니 두통이 많아 가라앉았다.도우미가 말했다.“아가씨, 계속 불편하시면 병원에 가보세요.”소민아가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그녀가 신이랑과 결혼만 하면 송시아는 더는 다른 사람을 해치지 않을 거라고 했었다.“왜 그렇게 보는 거예요? 네?”소민아는 뒤로 몇 걸음 물러서 신이랑과 거리를 넓혔다.“난 괜찮으니까 먼저 돌아가요. 잠깐 어지러워서 그랬어요.”“그래요. 내가 차로 데려다줄게요.”“아니에요. 회사와 내가 가려는 곳은 반대 방향이에요. 지금은 근무 시간이잖아요. 이랑 씨 일에 영향 줄 수는 없어요.”소민아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마음속에서부터 그를 천천히 멀리하기 시작했다.그 변화를 느낀 신이랑의 얼굴에 감출 수 없는 실망감이 어렸다.“민아 씨, 무슨 일 있었던 거예요? 아니면 송시아가 또 기성은 씨로 협박한 거예요? 뭐든 상관없으니까 나한테 말해요. 내가 도와줄게요.”소민아는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보았다.‘신이랑 씨, 대체 왜 나한테 이렇게 잘해주는 거예요?’‘이건 친구에게 베푸는 호의가 아니잖아요! 그보단... 다른 관계...’소민아는 그에게 똑똑히 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이랑 씨, 여긴 불편하니까 차에 가서 얘기할까요?”“그래요. 내가 캐리어 들어줄게요.”신이랑은 소민아의 짐을 들고 그녀와 함께 주차장으로 향했다. 차에 올라탄 뒤 그가 물었다.“나한테 할 얘기 있어요?”“이랑 씨, 우린 친한 친구 맞죠? 이랑 씨도 송시아처럼 나쁜 사람으로 변하진 않을 거죠?”신이랑은 잠시 당황했다가 이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민아 씨, 나쁘게 변하든 아니든 절대 민아 씨를 해치진 않을 거예요!”신이랑이 그녀에게 하는 약속이었다.“민아 씨 생각엔 내가 그런 사람으로 변할 것 같아요?”소민아는 그를 믿는 게 맞는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송시아의 말로는 신이랑은 앞으로 정계에 입성할 것이고 기성은의 위협이 될 거라고 한다. 그녀는 목구멍까지 올라왔던 말을 다시 삼켜버렸다.결국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기성은이 그녀에게 신신당부한 말도 있었기 때문이었다.“서울에 돌아가면 그 누구의 말도 믿으면 안 돼요.”“이랑 씨는요? 회사에서 유일하게
소민아의 눈동자에서 빛이 점점 꺼져가고 있었다. 너무 괴로워 목구멍에서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당신 생각이에요, 아니면 이랑 씨 생각이에요?”송시아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민아야, 그 말을 이랑 씨가 들었다면 얼마나 섭섭해할까. 줄곧 신이랑은 나랑 다르다고 말해왔으면서, 지금 신이랑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거야?”“내가 했던 말 잊었어?”“신이랑은 널 위해 본가에까지 들어갔어!”송시아가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내뱉었다.“신이랑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너만을 위해 살았어!”“핸드폰 확인해봐. 신이랑이 너한테 문자를 얼마나 많이 보냈는지.”비행기에서 내린 뒤 그녀는 핸드폰을 무음으로 설정해 놓았다. 기성은의 문자 외에 다른 건 확인할 시간이 없었다.송시아가 걸어 나가며 말했다.“일단 씻고 내려와서 밥 먹어. 저녁에 서울로 돌아갈 거야.”소민아가 핸드폰을 꺼내 보니 베터리가 없어 꺼진 상태였다. 충전선을 꼽고 전원을 켜니 송시아의 말처럼 신이랑으로부터 적잖은 문자가 와 있었다.40개가 넘는 문자 중 대부분이 그녀가 어디에 있는지 묻는 내용이었다. 말투에서 그녀에 대한 걱정이 고스란히 묻어나오고 있었다. 그가 이럴수록 소민아는 그에게 죄책감이 느껴지고 부담감이 더해갔다.오후 3시 식사를 마치고 짐 정리를 한 다음, 비행기에 올라탔다.소민아는 창밖으로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송시아가 그녀 옆에 앉아 눈을 감고는 말했다.“보지 마. 아무리 봐도 기성은은 너랑 같이 여길 떠나지 않아.”“기성은은 애초부터 이 더러운 곳에 더 어울리는 사람이었어. 네가 아무리 애써도 뼛속 깊이 새겨진 비천함은 변하지 않아.”소민아가 말했다.“당신은 얼마나 고귀한 사람이길래 그런 말을 하는 거예요? 당신도 예전엔 이처럼 악랄한 환경에서 살았었다는 거 잊지 말아요.”송시아가 들뜬 말투로 말했다.“이 세상 사람들에겐 모두 등급이 있어. 전연우가 아니었다면 기성은은 아직도 여기에서 굴러다녔을 거야. 참, 내가 알려줬었나? 기성은의 아버지는 지독
“그때가 되면 소씨 가문도, 그리고 언니도... 기성은 하나 때문에 무너져버릴 수 있어.”송시아가 가장 잘하는 게 바로 사람의 가장 여린 약점을 건드리는 것이다. 그 몇 마디 말에 소민아는 패닉에 빠져버렸다.“그... 그럴 리가 없어요! 기성은 씨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요. 신이랑 씨도 당신 말처럼 기성은 씨를 해치지 않을 거고요. 당신 입에서 나온 말은 한 글자도 믿지 않을 거예요.”송시아가 더더욱 그녀를 몰아붙였다.“민아야, 내가 예전에도 말했었잖아. 장씨 가문은 서울 지하조직 수장이었다고. 그 인간들이 무슨 짓을 했었는지 알기나 해? 당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장해진이 죽길 바랐을까. 전연우가 없었다면 장소월은 목숨을 부지하지도 못했을 거야.”“그동안 장씨 집안, 남원 별장을 지켰던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해?”“장씨 집안은 전연우와 기성은이 지탱하고 있었던 거야. 장소월은 다른 사람에게 기대어야만 살 수 있는 기생충에 불과해.”“장씨 집안이 끝나버린 지금, 기성은은 장씨 집안의 뒤처리를 해주려고 저렇게 고생하고 있는 거야.”“장씨 집안이 저지른 죄를 모아 신고하면 목숨이 몇백 개라도 모자라거든.”소민아는 더는 참지 못하고 두 손으로 귀를 막았다.“됐어요. 그만 해요. 소월 언니를 벌레 보듯 하고 있는데... 소월 언니는 아무것도 몰라요. 무슨 근거로 모든 잘못을 소월 언니에게 뒤집어씌우는 거예요? 내가 보기에 소월 언니는 당신보다 훨씬 더 좋은 사람이에요. 적어도 다른 사람을 해치진 않았으니까요!”“만약 내가 당신 동생이 아니었다면 어떤 방식으로 날 해치우려고 했어요? 난 저번 하마터면 당신 손에 철저히 망가질 뻔했어요.”송시아는 화가 나 이마를 찌푸렸다.“장소월이 착하다고? 그래! 장소월은 어렸을 때부터 걱정하나 없이 온실 속에서 자란 사람들의 부러움을 한몸에 받는 귀한 집 아가씨였어. 착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민아야... 우리한테 제일 필요 없는 게 바로 착함이야. 장소월처럼 살았다면 난 이미 일찌감치 죽은 목숨이었을 거야.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