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해... 내가 감정 조절을 잘 못해.”무섭게 얼어붙었던 눈빛이 금방 사라졌고 백윤서는 다시 순수하고 미안함이 가득한 표정으로 서문정을 바라보았다.“정말... 미안해, 내가 일부러 그렇게 심한 말 한 게 아니야. 지금 우리는 같이 살지 않아. 내가 소월이한테 네가 했던 말을 전해줄게. 네가 마음에 두지 않았으면 좋겠어.”서문정은 그녀를 이상하게 쳐다보았다. 백윤서에 대해 가졌던 좋은 감정은 모두 사라졌다.감정 조절을 잘 못한다고? 변명은 잘하네, 솔직하게 말해서 더 이상 아닌 척할 수 없는 거겠지...백윤서는 방금 6반으로 왔을 때 누구에게나 잘해주고 연약한 모습을 보여주면서 다른 사람들의 보호 욕구를 불러일으켰었다...이제 서민정이 떠나자 룸에는 아무도 남지 않았다...원래의 활기찬 분위기는 사라졌다.처음엔 분위기가 괜찮았는데 백윤서도 상황이 왜 이렇게 변했는지 이유를 몰랐다.천하일성에서 나온 장소월은 악기와 서예를 배우러 갔고 마지막에는 댄스 학원도 갔다...장소월은 댄스에 소질이 없었다. 하느님은 그녀에게 누구보다 유연한 몸을 주었지만 그녀는 포인트를 잘 잡지 못했다. 거울 앞에 서서 보니 그녀는 자신이 춤추는 모습이 괴물 같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그래도 가장 고통스러운 건 스트레칭이었다. 3개월간 연습하지 않았다. 저녁 8시 30분이 되어서야 연습실에서 나온 장소월은 온몸이 지쳐서 바닥에 드러누웠고 하마터면 구급차를 부를 뻔했다. 심지어 차라리 여기서 밤을 새우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정 집사는 백윤서를 데리러 가서 장소월은 할 수 없이 택시를 타고 돌아가야 했다.그녀는 두꺼운 검은 코트를 입고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택시에 타서 누워 눈을 감자 곧 잠이 들었다.택시 기사가 돌아보면서 물었다.“아가씨, 아직 어디로 가는지 말 안 했어요! 아가씨...”“남원별장이요.”장소월은 바로 창문에 기대어 잠이 들었다.남천 그룹.“대표님, 1시간 30분 후에 맨체스터로 출발하는 비즈니스석 티켓을 샀습니다. 30분 후에 출발하면 됩
전연우는 백윤서를 안고 가서 조수석에 앉히고 안전벨트를 매주었다. 바텐더는 백윤서의 가방을 그에게 건네주었다.“손님, 이 아가씨가 손님 여자친구 맞죠? 혼자서 술을 너무 많이 드시더라고요. 하마터면 이상한 사람들한테 추행당할 뻔했어요. 여자친구분이 너무 예쁜데 앞으로는 혼자 위험하게 나오게 하지 마세요.”전연우는 아무 말 없이 지갑에서 지폐 몇 장을 꺼내 팁으로 줬다. 그리고 바에서 나와 차 앞쪽을 지나 운전석에 앉았고 재빨리 그 자리를 떠났다.가든 아파트에 도착하자 전연우는 차에서 내려 시계를 확인했다. 아직 한 시간 이상 남아 있어서 너무 늦지 않았다.전연우는 백윤서를 부축하여 차에서 내렸고 백윤서는 나른하게 그의 품에 기대어 있었다.“나 돌아가지 않을래. 술 더 마실래…”“윤아, 그만해. 너 내일 학교 가야 해.”백윤서는 갑자기 어디서 힘이 나왔는지 전연우를 밀어내고 휘청거리며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녀는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고 전연우는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윤아, 오늘 무슨 일 있었지.”백윤서는 고개를 저었지만 전연우는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고여있는 것을 보았다.“연우 오빠, 내가 외국에서 돌아오지 말았어야 했나요… 아니… 난 애초에 구조되지 말았어야 했어요. 그러면… 내 마음이 이렇게 괴롭지 않았을 텐데.”“왜 내가 가는 곳마다 다들 나를 싫어할까요… 연우 오빠, 나한테 뭐가 부족한 게 있나요? 오빠… 난 내가 오빠한테 짐만 되는 것 같아요. 아무 도움이 안 되잖아요.”백윤서는 눈물이 계속 흘러내리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울었다.“넌 아무것도 할 필요 없어. 다른 사람의 생각에 신경 쓸 필요도 없고. 넌 네가 맞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면 돼. 윤아… 넌 아직 어려서 걔한테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전부 내가 다 너한테 줄게. 다시는 너 혼자 내버려 두지 않아.”“연우 오빠~”백윤서는 앞으로 가서 전연우의 품에 안겼다.“나한테는 이제 오빠밖에 없어요. 나중에 나 버리면 안 돼요, 알았죠? 오빠도 나를 버린다면 윤이
그들은 서로 사랑하고 있었다.장소월은 전생에 백윤서를 죽게 만들었다.그래서 전연우가 그녀를 그렇게 원망했었다.모든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은 그녀였다…그녀의 잘못이었다…장소월은 졸음을 잊고 창밖 풍경을 바라보다가 바람이 불어와 추위에 코트를 단단히 감쌌다…시간이 너무 빨리 지났다! 어느새 6개월이 지났고 한 달 정도 더 지나면 새해가 된다.기사는 백미러로 뒤에 앉은 장소월을 보더니 창문을 닫았다.30분 후 남원별장에 도착했다.앞에 서서 보니 별장은 조금의 빛도 없이 어두웠다.길 한쪽의 희미한 가로등 그늘 아래 날벌레 몇 마리가 날아다니고 있었다.예전에는 아무리 늦게 집에 돌아와도 누군가 불을 켜놓고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그리고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따뜻한 국수 한 그릇을 만들어 주기도 했다.이제 그녀가 집에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사람은 사라졌다.가끔 장소월은 너무 외로워서 세상에 자신만 홀로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다행히도 장소월은 이 모든 것이 익숙해진 지 오래였다.그녀는 두 손을 모으고 입김을 불고는 가방에서 열쇠를 꺼내 문을 열고 추운 집 안으로 들어갔다.요즘 장소월은 매일 밥 먹고 잠자고 학원 가는 간단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그녀는 집에 늦게 들어오기 때문에 장해진을 만날 기회가 적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장해진은 강만옥과 함께 태국으로 휴가를 떠났다.전연우도 해외 출장을 가야 했다.장소월이 집에 돌아올 때면 밤 10시가 거의 다 되었다.심지어 그녀는 이미 지금의 공부 강도에 익숙해졌고 잘 추지 못하던 춤도 이제는 쉽게 따라갔다. 역시 남자는 독기를 불러일으키는 데에 도움이 된다.연습이 끝나면 다음에는 대회와 자격시험들이 이어졌다…그녀가 완성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고, 아직 제운고등학교의 중간고사도 보러 가지 못했다.학교에서 전화가 걸려 와 거실의 유선전화가 울렸다. 청소 중이던 은경애가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 누구세요?”“실례지만 장소월 학생 있나요?”“이리 줘요!”마침 위층에
오늘은 마침 그림 전시회를 보는 날이다.장소월은 잊지 않고 일찍 일어나서 씻고 흰색 캐시미어 울 재킷과 검은색 긴 니트 스커트를 입었다. 오늘은 기온이 0도까지 내려가 추워서 안에 두꺼운 스타킹도 신었다.요즘 서울의 날씨는 롤러코스터처럼 불규칙적이었다. 별장 화단에 서리가 내리고 나뭇잎은 어제까지 푸르렀는데 하룻밤 사이에 벌써 빨갛게 물들었다.장소월은 하얗게 얼어붙은 서리를 보기만 해도 추웠다.그녀는 고개를 숙여 얼굴을 스카프에 묻었고 뺨은 벌써 약간 붉어졌다.오늘 눈이 올지도 모르겠다.택시가 오자 장소월은 재빨리 문을 열고 들어가 자리에 앉았다.장소월은 다른 사람을 기다리게 하는 것이 싫어서 30분 일찍 출발했다. 그녀가 도착했을 때 이미 전시장 입구에는 긴 줄이 있었고 사람들은 손에 티켓을 들고 있었다. 장소월이 도착한 지 10분 만에 리무진 한 대가 들어왔다.차 안에서 강영수는 창밖으로 하얀 옷을 입은 장소월이 추워서 계단을 오르내리는 모습을 보고 입꼬리를 치켜올렸다.“여기서 내릴게요!”진봉이 말했다.“네, 도련님.”발이 얼 정도로 추운 줄 알았으면 그녀는 양말을 한 켤레 더 신었을 텐데라고 생각했다.“소월아…”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자 장소월은 고개를 돌렸다. 오 집사와 휠체어에 탄 사람이었다.강영수는 미소를 지었다.“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장소월이 말했다.“아니야, 나도 방금 도착했어. 그럼 우리 들어가자.”“소월 아가씨…“오부연이 그녀를 불러 세웠다.“저희는 들어가지 않을 테니 도련님을 잘 보살펴 주셨으면 합니다.”진봉은 눈치를 보고 전화 받는 척 돌아섰고 오 집사도 자리를 떠났다.강영수만 남았다…“부탁해.”“괜찮아. 이렇게 입으면 춥지 않아? 오늘 눈 올 수도 있어! 손이 차갑지?”장소월은 마치 엄마처럼 잔소리를 하며 그의 손을 만졌는데 얼음장 같았다.“장갑 안 했을 줄 알고 내가 하나 더 챙겼어.”장소월은 가방에서 검은색 가죽 장갑을 꺼냈다. 그것은 그녀가 예전에 전연우에게 선물하려고
장소월도 자신이 말을 너무 많이 해서 사람들이 지루해할까 봐 걱정할 때도 있었다.전시장 안에는 에어컨이 있어 그리 춥지 않았다.그림을 보면서 장소월은 디테일을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에드워드는 그녀에게 기쁨 그 이상의 충격을 주었다.이 그림들은 죽은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듯한 온도를 전달하고 있었다…풍경화든 인물화든 매우 사실적이었다…이 그림들은 모두 액자가 씌워져 있었고 사방에 경비원들이 지키고 있어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게 하고 있다. 그 이유는 여기 있는 그림들이 걸작이 되어 경매장에서 고가로 경매될 수 있기 때문이다.“이 화가의 그림들은 전부 다 훌륭하지 않아?”“마음에 들어?”“내가 여덟 살 때 장난치다가 어머니의 책장에 올라갔다가 넘어져 책더미에 파묻혔는데, 그때 책에서 떨어진 그림이 다름 아닌 에드워드 씨의 그림이었어. 지금도 그 그림의 제목이 ‘꿈의 세계’인 것을 선명하게 기억해.”“그건 내가 본 것 중에 가장 아름다운 오로라였어. 밤하늘을 가르는 광선이 극한의 추위 속에서 눈부시게 몽환적이었어. 어떤 붓으로도 극도로 차가운 북극의 공기 속의 그런 장면을 묘사하기는 어렵지만, 오직 에드워드만이 해냈어. 그분은 정말 놀라워!”“하지만 사진으로만 봤을 뿐, 직접 본 적이 없어서 아쉬워. 정말 훌륭할 것 같아.”강영수가 말했다.“볼 수 있을 거야. 네가 원하는 건 모두 이룰 수 있을 거야.”장소월은 곧바로 생각에서 빠져나왔다.“시간이 많이 지났으니 이젠 상관없어. 전시회에 와서 직접 그림을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이미 행복해.”그들은 1층을 다 둘러보았고 2층에 더 있었다.“화장실 갈래?”“…”강영수는 웃으면서 말했다.“도와주겠다면 난 마다하지 않아.”장소월은 순식간에 얼굴이 붉어졌다.‘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야?’장소월은 다급히 말했다.“나, 난… 직원분한테 도… 도와달라고 말할게…”너무 창피하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괜찮아. 장난친 거야. 난 아직 괜찮으니까 너 먼저 화장실 다녀와.”강영
장소월은 화장실에서 나와 수돗물을 켜고 손을 씻었다. 강용 옆에 있던 여자를 생각하자 그녀의 얼굴이 낯설지 않은 것 같았다. 어디서 본 듯한 얼굴이었다.그런데 백윤서와 강용은 사귀는 사이 아니던가?강용은 왜 또 새 여자친구를 사귀었지?아니다, 어젯밤 백윤서와 전연우가 껴안고 있던 걸 보아, 두 사람은 아마 사귀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강용이 버림받았다는 뜻이다.도원 어촌에서 강용은 그녀의 맞은편에 머물렀었고 장소월은 두 사람이 키스하는 것을 목격했었다.그런데 장소월도 두 사람이 정말 입술을 닿았는지 알 수 없었다.어쨌든 그녀의 자리에서 봤을 때 정말 키스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장소월도 그들 사이에 또 다른 일이 있었는지는 알지 못했다.그녀는 자신과 상관없는 일에 관심 끄고 더 이상 관여하지 않기로 했다.장소월은 재빨리 손을 씻고 휴지 두 장을 뽑아 손을 닦은 다음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그런 다음 그녀는 휴게실로 갔다.장소월이 문 앞으로 갔을 때 휴게실 안에 사람들이 강영수를 둘러싸고 있는 것을 보았다.그들이 왜 여기 있는 걸까?서문정과 다른 친구들이었다.제운고등학교 6반 학생들.예쁘장하게 생긴 여학생들이 강영수를 둘러싸고 있었는데 그들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강영수는 입꼬리가 올라간 채 그들과 말하고 있었다.서문정은 곧 장소월을 발견하고 놀라서 소리쳤다.“소월아! 여기서 만나네! 너… 너 왜 여기 있어? 부반장한테 들었는데 너 이번 학기에 학교에 안 온다고 하던데, 진짜야?”장소월은 강영수의 호기심이 가득한 눈빛을 느꼈다.장소월은 무심한 듯 걸어가면서 말했다.“그래! 이런 우연이 있네, 여기서 다 만나다니.”서문정만 장소월에게 신경 쓰고 지켜볼 뿐, 다른 학생들은 고개를 돌렸고 아무도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지 않았다.장소월은 옆에 조용히 서 있는 백윤서에게 인사를 건넸다.“윤서 언니.”백윤서는 어젯밤의 어색한 상황이 떠올라 장소월을 어떻게 대면해야 할지 다소 당황스러워했다.어제 장소월은 그녀가 전연우에게 했
이때 강용의 모습은 마치 자신만만하던 사자가 동물 트레이너를 보고는 사람들이 쓰다듬고 있는 고양이가 된 것 같았다.강영수는 사람들 앞에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지금 서서히 강한 그룹의 경영권을 잡고 있지만 외부인들이 보기에 그는 모습을 숨기는 신비한 존재였다.그들은 아마 방금 휠체어를 타고 있던 사람이 누구인지 모를 것이다.하지만 허철과 방서연은 알고 있었다.그 사람은 서울 강가네에서 배양한 상속자 강영수였다.몇 년 전의 교통사고는 강영수의 다리를 앗아갔고 그 후로 그는 사라졌다.그 해의 강영수는 현재의 강용보다 훨씬 뛰어났다.두 사람은 정말 똑같이 거칠고 오만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하지만 지금 강영수는 이전보다 못했지만 그들에게 주는 느낌은 이전보다 훨씬 더 무서웠다.눈빛만으로도 강용을 충분히 제압할 수 있었다.강용은 강영수의 배다른 동생이다. 하지만 강가네에서 그의 아버지를 제외하고 누구도 강용의 존재를 인정해 주지 않았다.왜냐하면 강용의 어머니는 평범한 신분이었고 예전에는 연기자였다… 연기자 출신이니까 강가네는 그의 어머니를 더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그들은 이 사람이 얼마나 무자비한지 알고 있다.지난번에 장소월이 사고를 당했을 때, 강영수는 강용이 사람을 시켜 일을 저지른 줄로 알고 있었다.그래서 그는 사람을 시켜 바에 있는 강용의 손을 부러트리고 사람을 끌고 차에 올라탔다…당시 일이 진행되고 있을 때 룸 안에는 그들 세 사람뿐이었다.지금도 허철과 방서연은 그 순간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장소월과 강영수가 멀리 가고 나서야 허철은 감히 입을 열었다.“장소월은 저 사람과 어떻게 아는 사이야?”“용아, 지난번에 일은 그냥 이렇게 지나갈 거야?”목소리는 낮았지만 휴게실에 있는 사람들도 그 말들을 들었고 무슨 이야기인지 이해하지 못했다.강용은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고 라이터를 돌리며 미소를 지었다.“재밌네.”두 사람이 그림 전시회를 다 둘러보고 나니 벌써 오후 한 시였다.장소월은 그녀의 눈을 바라보다가 그들이 점심
그림 전시회는 오후 3시에 끝났다.백윤서는 국제전시센터 밖에 주차된 낯익은 차를 바라보았다.그녀는 재빨리 조수석 문을 열고 차에 앉았다.“오빠… 언제 왔어요? 왜 전화 안 했어요? 오빠가 온 걸 미리 알았으면 내가 일찍 나왔을 텐데, 그럼 이렇게 오래 기다릴 필요 없었는데.”기성은에게 백윤서의 수업 스케줄 사본이 있기 때문에 그는 오늘 그녀가 교외 활동으로 그림 전시회를 보러 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전연우는 비행기에서 내린 지 얼마 안 되어 근처를 지나가던 중이었고, 그래서 가는 길에 그녀를 데리러 왔다.전연우가 말했다.“괜찮아.”백윤서가 말했다.“오빠, 그 프로젝트는 어떻게 됐어요?”전연우가 대답했다.“계약서에 사인했어.”“축하해요! 오빠가 이 프로젝트 때문에 일주일 넘게 잠도 잘 못 자고 고생했잖아요. 드디어 이제 잠시 쉴 수 있게 되었네요.”차가 시동이 걸리고 전연우가 말했다.“윤아, 안전벨트 매.”백윤서는 깜짝 놀라며 그의 말에 얌전하게 말했다.“아, 깜빡했네요.”그녀는 재빨리 안전벨트를 맸다. 예전에는 전연우가 늘 그녀의 안전벨트를 매는 것을 도왔다.백윤서는 그가 피곤해하는 것을 보고 조용히 앉아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전연우는 차를 돌렸고 마치 누군가 길을 건너려고 하는 것을 보았는데 그 익숙한 모습은 장소월 같았다.그녀는 몸을 숙여 휠체어를 탄 사람의 옷과 스카프를 정리해 주었다. 허리까지 오는 길이의 약간 곱슬한 긴 머리는 어깨에 흘러내렸다. 장소월은 생수병 뚜껑을 열고 그 남자에게 물을 마시도록 했다.전연우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녀의 모든 움직임을 지켜보면서 얇고 차가운 입술을 앙다물었는데 그 선은 더욱 차가워 보였다.차 안에는 범상치 않은 분위기가 서서히 퍼지면서 불쾌감이 스며들었다.백윤서도 그 모습을 보고 말했다.“오늘 학교에서 전시회를 보는 활동을 조직했는데 소월이가 친구랑 같이 왔더라고요. 그런데 그 사람의 다리를 보니… 장애인 같았어요.”전연우는 그 순간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장소월을
죽 한 그릇을 먹여주는데 무려 20분이나 걸렸다.소민아는 그에게 수면 촉진 성분이 들어있는 약을 가져다주었다. 신이랑이 침대에 누워 그녀의 손을 잡았다.“나랑 같이 있어 줘요. 안 가면 안 돼요?”소민아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알겠어요. 뭐든 이랑 씨가 몸을 다 회복한 다음 얘기해요.”옆에 앉아 신이랑이 잠드는 것을 지켜보던 중 핸드폰에 배터리가 없다는 것을 알아챈 그녀는 천천히 손을 빼냈다. 하지만 신이랑은 그녀의 움직임을 느끼기라도 했는지 불안한 얼굴로 다시 눈을 떴다. 소민아는 환자를 보살피는 게 이렇게까지 어려운 일인지는 정말 몰랐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침대에 엎드려 잠시 잠을 청했다.창밖에서 부슬부슬 내리던 비가 드디어 그쳤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돌연 불어온 차가운 바람에 그녀가 어깨를 움츠렸다.그때, 그녀의 귀에 미세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눈을 뜬 순간, 어둠 속에서 그림자 하나가 휙 지나갔다.“기성은 씨, 당신이에요?”대답이 들려오지 않자 소민아는 자신을 잡고 있던 신이랑의 손을 풀고는 바로 일어나 남자를 쫓아갔다. 그녀가 뒤에서 그를 끌어안은 순간 복도의 센서 등이 환하게 어둠을 밝혔다. 바깥 희미한 가로등 아래에선 차가운 바람이 불고 있었다.“제가 문자 그렇게 많이 보냈는데 왜 답장 안 했어요?”“이거 놔요.”“설명해주기 전엔 놓지 않을 거예요.”작게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에 기성은은 소민아의 손을 잡고 바로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소민아는 벽을 더듬어 조명을 켜려다 말했다.“따라와요.”이후 그녀는 옆쪽 간병인 방으로 그를 데려갔다. 그의 손가락을 만져보니 얼음처럼 차가웠다.“잠시만 기다려요. 제가 뜨거운 물 가져올게요.”소민아는 따뜻한 물을 가져온 뒤 그가 손으로 감싸게 하고는 그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갰다.“조금만 기다려요. 곧 따뜻해질 거예요.”두 사람은 함께 침대에 앉아 서로를 바라보았다. 눈앞에 분명 기성은이 살아 숨 쉬고 있었지만, 자신과 그사이에 커다란 벽이 있다는 느낌을
하지만 기성은은 못 본 척 시선을 피해버렸다.문이 닫힌 지 얼마 되지 않아 거의 숨이 끊어진 것 같은 사람이 병실에서 던져져 벽에 강하게 부딪혔다. 그 충격에 피를 한 움큼 토해냈다.소민아는 너무 놀라 들고 있던 음식까지 바닥에 떨어뜨렸다.“형님, 바깥에 사람이 있습니다.”“이런 우연이 있나. 오늘 아침 만났던 여자잖아.”소민아는 그들이 다가오자 빠르게 반응하며 말했다.“일부러 들으려고 한 건 아니에요. 그냥 지나가던 중이었어요.”적잖은 시선이 그녀의 몸을 아래위로 훑고 지나갔다. 그중 한 명이 말했다.“작두, 이 여자 누군지 알아?”작두라고 불리는 남자가 아래턱을 문지르며 걸어 나오고 있는 남자를 보며 말했다.“형님, 이년 어떻게 처리할까요? 대체 얼마나 들었는지 모르겠네요.”기성은은 검은색 가죽 신발을 신고 무거운 발걸음을 내디뎠다.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낯선 그의 모습에 소민아는 돌연 덜컥 겁이 났다.그녀는 어찌할 바를 몰라 자리에 굳어버렸다. 기성은은 소민아 앞에 걸어와 손가락으로 땅에 떨어진 음식 주머니를 줍고는 그녀에게 건네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입 간수 잘해요. 얼마를 들었든, 얼마를 보았든 한 글자라도 발설하면 그 후과 스스로 책임져야 할 거예요.”소민아는 머리를 푹 숙이고 다급히 대답했다.“네... 알겠어요.”기성은이 말했다.“너희 둘은 이곳에서 잘 지키고 있어.”“네, 형님.”“왜 계속 서 있어요? 안 가요?”소민아에게 하는 말이었다.소민아는 머리도 돌리지 않고 한 방향으로만 뛰어갔다. 얼마 후 병실에서 한 명이 더 나왔다.서철용이 담배 한 대를 손가락에 낀 채 말했다.“손이 너무 거치네요. 목숨이 간당간당해요. 죽이더라도 내 병원에서 죽이면 안 되죠.”소민아는 병실에 돌아와서도 얼이 빠진 채 멍하니 앉아있었다. 침대 쪽에서 인기척이 들려와서야 정신을 차리고 다가가 상황을 살폈다.신이랑은 언제 깨어났는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움직이지 말아요. 바늘이 빠지면 안 돼요.”새벽 12시, 복도의
간호사가 이마를 찌푸리며 말했다.“남자친구분 잘 지켜보셨어야죠. 링거액이 다 떨어졌잖아요. 지금 병원이 너무 바빠서 저희 간호사들도 병실 하나하나 다 신경 쓸 수는 없어요.”소민아가 미안함에 말했다.“서류를 가지러 회사에 다녀왔어요. 그런데... 저 이분 여자친구 아니고 비서예요.”간호사가 말했다.“환자분이 의식을 잃은 상태로 계속 가족분의 이름을 부르고 계세요. 얼른 가보세요. 환자분을 혼자 오래 두면 안 돼요.”소민아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네, 알겠어요.”소민아가 병실에 들어가 보니 신이랑은 눈을 뜨고 누워있었다. 그녀가 다급히 들고 있던 물건을 내려놓고 다가갔다.“이랑 씨, 깼어요? 몸은 좀 괜찮아졌어요?”신이랑은 흐릿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손을 뻗자 소민아는 얼른 그의 손을 잡아 이불 속에 넣어주었다.“푹 쉬어요. 제가 옆에 있으니까 불편한 게 있으면 부르고요.”“가, 가지 말아요.”그는 꽉 잡은 손을 좀처럼 놓지 않았다.“이랑 씨, 저 아직 처리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았어요. 내일 보내줘야 해요.”신이랑이 머물고 있는 곳은 VIP 병실이라 주방에 모든 시설들이 구비되어 있었다. 그녀는 전화로 죽 두 그릇을 주문한 뒤... 일에 열중하기 시작했다.저녁 10시, 신이랑의 체온은 많이 안정되었다. 본래 몸이 좋지 않긴 했지만, 이렇게 하룻밤 사이에 정신을 잃고 쓰러지기까지 하다니.소민아는 견딜 수 없을 정도의 배고픔이 느껴지고 나서야 자신이 아직 죽을 받아오지 않았다는 것이 떠올랐다.지금 시간엔 병원에도 사람이 별로 없을 것이다. VIP 병동은 무서울 정도로 으스스하고 고요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 보니 프런트에 놓은 음식은 이미 차갑게 식어 있었다.음식을 들고 다시 위로 올라가려고 엘리베이터 쪽으로 가던 중, 왼쪽 코너 쪽 병실에서 익숙한 사람의 모습이 그녀의 시선을 끌었다.기성은이 왜 여기에?소민아는 다시 핸드폰을 꺼내 확인했다. 병원에 왔으면서 왜 그녀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았단 말인가.
신이랑은 아무런 예고도 없이 그녀의 몸 위에 쓰러지고 말았다. 소민아는 몸을 뒤로 젖히며 그를 껴안았다. 그의 정상적이지 않은 체온을 느낀 그녀가 다급히 그의 이름을 불렀다.“신이랑 씨!”그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으니 소민아는 잠시 그를 부축해 소파에 눕힐 수밖에 없었다.“열이 왜 이렇게 나는 거예요?”소민아가 핸드폰을 켜고 구급차를 부르려 한 순간, 그 뜨거운 손이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생명줄이라도 되는 듯 힘껏 움켜쥐고 놓지 않았다.소민아는 통화를 마친 뒤 손을 뻗어 그의 이마에 가져갔다.“구급차가 곧 올 거예요. 조금만 참아요.”소민아는 착잡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조금 전 금방 들어왔을 때 그가 했던 말을 그녀는 모두 똑똑히 들었었다.자신을 좋아해 달라던 그 말까지도...소민아는 신이랑이 자신과 같은 사람을 좋아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신이랑처럼 좋은 사람은 응당 예쁘고 부드럽고 현숙한 주가은 같은 부잣집 아가씨와 어울린다고 생각했었다. 기성은에게 들은 바로는 신이랑의 신분도 실은 그리 간단하지만은 않다. 그의 가족들 또한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신이랑은 구급차에 앉아 함께 병원으로 들어갔다.신이랑은 열이 39도, 아니 40도까지 치솟아 올랐다.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결과가 어땠을지 상상도 하기 힘들었다.신이랑은 해열제 주사를 맞은 뒤 이어 링거를 꽂고 침대에서 깊이 잠들어 있었다. 그녀는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 옆에서 노트북으로 일을 하기 시작했다.소민아는 그렇게 하루종일 병원에서 그를 보살폈다. 저녁 여섯 시가 되니 배가 고파와 병원 슈퍼마켓으로 향했다. 그때, 여자보다 더 여자같이 생긴 하얀색 옷차림의 남자가 마스크를 하고 그녀의 옆으로 스쳐 지나갔다.소민아는 의아함에 천천히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그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어디에선가 본 것처럼 익숙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하지만 지금 바로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다.그녀는 내려갔던 김에 서류를 가지러 다시 회사에 돌아갔다. 신이랑이
소민아는 기성은의 팔짱을 끼고 친밀하게 손을 잡고는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갔다.“오늘 어디에 가는 거예요? 언제 돌아와요? 퇴근할 때 저 픽업할 수 있어요?”기성은이 대답했다.“상황 봐서요. 매일 오늘처럼 한가한 건 아니거든요.”소민아가 불만이 가득 섞인 표정으로 말했다.“기성은 씨 이젠 회사에도 안 나가잖아요. 대체 뭐 하느라 그렇게 바쁜 거예요? 어제 저랑 사귀어보겠다고 했잖아요. 그럼 절 첫 순위에 올려놓아야 하는 거 아닌가요? 아니면 솔직히 말해봐요. 뭘 하러 가는 건지!”그가 하는 일은 대부분 사람들에게 알려져서는 안 되는 것이다. 하여 당연히 그녀에게 알려줄 수 없었다.대표님이 의식불명으로 누워계시니 그 또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송시아는 회사를 통째로 집어삼키려 움직이기 시작했다. 때문에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눈앞의 일을 최대한 빨리 처리하는 것이다.그에게 있어 소민아는 부담이고 약점일 뿐이다. 어떤 말은 솔직히 말할 수 없으니 그저 그녀의 열정이 자연적으로 꺼져갈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민아 씨 앞가림이나 잘해요.”기성은이 결국 뱉어낸 말은 그 한 마디였다.지금은 출근 시간이라 차가 꽤 막혔다. 소민아는 선명히 뾰로통해진 얼굴로 손에 요구르트를 들고 앉아있었다.이번 생에 기성은이 그녀를 달래주는 날이 오긴 할까.그들은 출근 시간 10분을 남겨두고 성세 그룹 맞은편에 도착했다. 회사에 뛰어 들어간다면 3분이면 충분히 출근 도장을 찍을 수 있다.“아직도 뭘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기성은이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린 순간, 소민아가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 그의 입가에 키스했다.“일 끝나면 전화해요. 성은 씨가 절 데리러 오든, 제가 성은 씨한테 가든 같이 있어요, 우리.”기성은은 그 키스에 깜짝 놀라 자리에서 굳어버렸다.소민아는 안전벨트를 풀고 바람을 맞받아 몸을 움츠리고 회사 안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시간 맞춰 도착해 지각은 하지 않았다.소민아가 뒤돌아보니 기성은은 아직 그 자리에
침대에서 뒹구는 법이라곤 없는 기성은은 그녀가 계속 잠을 청하려 하자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소민아가 단번에 그를 끌어당겨 침대에 눕혔다.“아직 여섯 시밖에 안 됐단 말이에요. 출근 시간까지 한 시간이 넘게 남았어요. 조금 더 자요.”“소민아 씨!”기성은은 이렇게까지 머리 아프게 만드는 사람은 종래로 만나본 적이 없다. 소민아가 강제로 기성은의 팔을 끌어당겨 팔베개를 시켰다.기성은의 차가운 목소리가 내려앉았다.“남녀가 유별하다는 말 몰라요? 소민아 씨, 선 지켜요.”소민아는 눈을 감고 태연하게 그의 말을 받아쳤다.“이봐요, 아저씨. 지금이 조선 시대인 줄 알아요? 어떻게 그렇게 보수적일 수가 있어요? 여자친구 사겨본 적 있기는 해요?”기성은은 도저히 팔을 빼낼 수가 없었다.“내가 못해본 것 같아요?”소민아가 몸을 돌려 그와 눈을 맞추었다.“그 주가은 씨랑은 어떤 사이에요? 정장은 왜 벗어준 거예요? 추워 보여서 그랬어요?”소민아가 손가락으로 총 모양을 만들어 그의 이마에 가져갔다.“얼른 솔직히 말해봐요. 주가은 씨랑 대체 무슨 관계인 거예요? 어젯밤... 기성은 씨 만나러 집에 왔었어요. 제가 우리 두 사람이 사귀기로 했다니까 얼굴이 확 어두워져서 돌아갔고요.”소민아는 자세히 그의 얼굴 표정을 살폈다. 더 캐묻지도, 화를 내지도 않는 것이 별다른 느낌이 없는 듯했다.그가 말하려 하지 않자 소민아가 말을 이어갔다.“연애할 줄 모르겠으면 제가 가르쳐줄게요. 가장 중요한 건 성실해야 한다는 거예요. 빨리 얘기해요.”기성은이 은하수를 담은 듯 반짝거리는 그녀의 눈동자를 피하며 말했다.“주가은은 서울시 시장 딸이에요. 얼마 전 주지웅이 주가은을 대표님에게 소개해주려고 저녁 식사 자리를 만들었는데 대표님이 못 가게 되셔서 내가 대신 갔었어요.”“그날 엘리베이터에서 주가은의 뇌전증이 발작했고, 내가 마침 거기에 있어서 도와줬었죠.”너무 조용하다는 생각에 내려다보니 소민아는 어느새 또다시 잠들어 있었다.기성은이 천천히 팔을 빼내고 침대에
“제 아빠는 데릴사위였어요. 부모님 두 분 모두 과학자여서 매일 연구원에서만 지냈어요. 그래서 전 태어나자마자 고모 댁에 보내졌죠. 엄마아빠의 유전자를 이어받아서인지 별로 노력을 들이지 않고도 서울대에 입학했어요...”소민아의 말이 채 끝나지 않았을 때 옆에 놓아두었던 핸드폰이 진동했다. 신이랑이 걸어온 전화였다.“이랑 씨도 오겠다고 했던 걸 깜빡했어요. 잠깐만 기다려요. 전화 받고 올게요.”기성은이 깊은 눈동자로 아직 그녀의 온기가 남아있는 의자를 바라보았다. 그의 과거는...암흑 그 자체이다.그는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몰랐다. 그가 살았던 곳은 음산하고 차디찬 지하실이었다. 그곳에선... 명령에 따라 앞뒤 가리지 않고 손에 칼을 들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그야말로 나라의 관리가 손닿지 않는 혼란의 세상이었다.누군가 그랬다. 어머니는 기생이고, 아버지는... 마약범이라고. 하여 그는 태어난 뒤 바로 버려졌고, 그래서 이름도 없는 거라고...그의 머릿속 첫 기억은 음습하기 그지없는 시궁창이었다.그때의 참담한 경험이 지금 그의 모습을 만들었다. 모든 사람들이 그를 아무 감정 없는 기계 같다고 입을 모아 말한다...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은 그와는 전혀 상관없는 것이었다.그의 인생을 바꿔준 한 사람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말이다.바로 전연우다!당시 기성은은 변경에서 마약 거래를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전연우를 만났고, 그가 다치고 베이고 수많은 죽을 고비를 넘기며 기성은을 변경 시궁창에서 빼냈다.전연우가 말했다.“나한테 목숨 빚졌으니까 앞으로 나 따라다녀.”“네.”“지금 이름은 너한테 어울리지 않아. 앞으로는 기성은이라고 바꿔.”“네.”...소민아는 신이랑과 함께 설영우를 만나 일정을 조율하고 계약서까지 작성했다.일을 끝내고 나니 날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차갑게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소민아가 신이랑을 아파트 아래까지 배웅한 뒤 걸음을 멈추었다.“왜요?”신이랑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소민아는 숨기지 않고 말했다.
“현실에 부합되지도 않는 쓸데없는 상상하지 말아요. 소민아 씨한테 어울리는 사람은 신이랑이에요. 가서 일이나 열심히 해요, 내 체면 떨어뜨리지 말고.”결과야 어찌 됐든 소민아는 기성은이 키워온 사람이다.소민아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정말 저한테 하고 싶은 말 없어요? 마지막으로 물을게요. 정말 없어요?”“저에 대한 이랑 씨 마음 저도 알고 있어요. 하지만... 난...”“기성은 씨를 좋아한단 말이에요!”문밖에 서 있던 설영우가 호기심이 가득 담긴 표정으로 들어왔다.“어머나, 형한테도 드디어 봄이 왔네요. 여자한테 고백을 다 받다니요!”소민아는 얼마나 어렵게 용기를 내어 그 말을 내뱉었는지 모른다. 한 달 내내 찾아다녔던 소설 작가가 지금 이 순간 기성은에게 형이라고 부르며 나타날 줄이야.“꺼져.”설영우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소민아 씨, 전 이만 갈게요. 형과 얘기 끝나면 문자 주세요. 바로 올라올게요.”소민아는 솔직하고 좋고 싫음이 분명한 사람이다. 실은 그녀 또한 알지 못했다. 대체 왜 하필이면 성격도 나쁜 그 사람에게 마음을 빼앗기게 되었는지 말이다.얼굴이 조금 반반한 것 외엔 별다른 장점도 없다.“제가 방금 했던 말 들었어요?”기성은이 말했다.“소민아 씨 같은 귀찮은 사람이랑 사귀어서 나한테 좋은 게 뭔데요? 아까 내가 했던 말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모양이네요.”기성은이 와인 냉장고로 걸어가 와인을 한 병 꺼냈다. 그를 따라 소민아의 시선도 옮겨졌다.소민아가 그의 뒤를 쫓아가며 말했다.“하지만 좋아하는 사람한테 진심을 고백해야 맞는 거 아닌가요? 저도 제가 충동적이라는 거 알아요. 하지만 저에게도 눈이 있고 생각이라는 게 있어요. 나더러 신이랑에게 붙어있으라는 거 날 보호하기 위해 한 말이라는 게 느껴진다고요. 기성은 씨도 날 좋아하잖아요. 그런데 왜 자꾸 절 밀어내려고만 해요? 정말 이해가 안 돼요.”기성은이 말했다.“정말 황당한 생각이네요. 이용가치가 떨어진 물건을 더 남겨서 뭘 하겠어요?”기성은이 고개를
기성은이 다급히 셔츠를 몸에 걸쳤다.“누가 마음대로 들어오라고 했어요! 나가요!”소민아는 순간 하려던 말까지 잊어버렸다. 그녀는 겁에 질린 얼굴로 문밖으로 나와 손으로 가슴을 짓누르며 크게 심호흡했다. 머릿속에 기성은의 몸에 덕지덕지 새겨진 흉터들이 떠올랐다.기성은은 대표님의 비서가 아니었던가?비서에게 어떻게 저렇게 많은 상처가 생길 수가 있지?또한 모두 칼에 찔린 자상이었다. 지금 이 시대에 누가 칼을 휘두르고 다닌단 말인가.대체... 그는 무슨 일을 겪었던 걸까.기성은은 욕실에서 거울로 자신을 비추어 보았다. 오래전부터 지금까지 일어났던 모든 일이 머릿속에 생생하게 떠올랐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 눈 깜빡할 사이에 10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어떤 일은 뇌 속에 박혀버린 것처럼 한번 또 한 번 반복적으로 재생되어 그로 하여금 끊임없이 떠올리게 만들었다.기성은이 깨끗한 잠옷으로 갈아입고 욕실에서 나왔다. 아직 집에 남아있는 소민아를 향해 그가 차갑게 입을 열었다.“언제까지 있을 생각이에요?”소민아가 주방에서 젓가락 두 쌍을 가져오며 아무 일도 없었던 듯 태연한 표정으로 말했다.“식자재는 기성은 씨가 사긴 했지만 음식을 만든 건 저예요. 기성은 씨를 기다리느라 저도 한 입도 못 먹었어요. 아무리 그래도... 손님한테 밥은 먹이고 보내야 하지 않겠어요? 그리고 기성은 씨를 만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회사 일 때문에 이곳에 온 거예요. 마침 같은 아파트에 제가 맡은 소설 작가님이 살고 계시거든요. 그분이 집에 돌아오시면 드라마 제작 세부 사항에 관해 상의해야 해요.”“가서 침대 옆에 있는 핸드폰 가져와요.”소민아는 말없이 그의 말대로 핸드폰을 가져다주었다. 그녀의 시선이 기성은의 헐렁한 옷소매 안으로 드러난 상처에 닿았다. 그녀는 깜짝 놀랐다. 왜 지금까지 한 번도 그의 손목에 이토록 깊은 흉터가 있다는 걸 알지 못했단 말인가.“...지금 이쪽으로 와.”그 한마디 말을 끝으로 기성은은 전화를 끊었다.“설영우 곧 올 거예요.”소민아의 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