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월도 자신이 말을 너무 많이 해서 사람들이 지루해할까 봐 걱정할 때도 있었다.전시장 안에는 에어컨이 있어 그리 춥지 않았다.그림을 보면서 장소월은 디테일을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에드워드는 그녀에게 기쁨 그 이상의 충격을 주었다.이 그림들은 죽은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듯한 온도를 전달하고 있었다…풍경화든 인물화든 매우 사실적이었다…이 그림들은 모두 액자가 씌워져 있었고 사방에 경비원들이 지키고 있어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게 하고 있다. 그 이유는 여기 있는 그림들이 걸작이 되어 경매장에서 고가로 경매될 수 있기 때문이다.“이 화가의 그림들은 전부 다 훌륭하지 않아?”“마음에 들어?”“내가 여덟 살 때 장난치다가 어머니의 책장에 올라갔다가 넘어져 책더미에 파묻혔는데, 그때 책에서 떨어진 그림이 다름 아닌 에드워드 씨의 그림이었어. 지금도 그 그림의 제목이 ‘꿈의 세계’인 것을 선명하게 기억해.”“그건 내가 본 것 중에 가장 아름다운 오로라였어. 밤하늘을 가르는 광선이 극한의 추위 속에서 눈부시게 몽환적이었어. 어떤 붓으로도 극도로 차가운 북극의 공기 속의 그런 장면을 묘사하기는 어렵지만, 오직 에드워드만이 해냈어. 그분은 정말 놀라워!”“하지만 사진으로만 봤을 뿐, 직접 본 적이 없어서 아쉬워. 정말 훌륭할 것 같아.”강영수가 말했다.“볼 수 있을 거야. 네가 원하는 건 모두 이룰 수 있을 거야.”장소월은 곧바로 생각에서 빠져나왔다.“시간이 많이 지났으니 이젠 상관없어. 전시회에 와서 직접 그림을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이미 행복해.”그들은 1층을 다 둘러보았고 2층에 더 있었다.“화장실 갈래?”“…”강영수는 웃으면서 말했다.“도와주겠다면 난 마다하지 않아.”장소월은 순식간에 얼굴이 붉어졌다.‘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야?’장소월은 다급히 말했다.“나, 난… 직원분한테 도… 도와달라고 말할게…”너무 창피하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괜찮아. 장난친 거야. 난 아직 괜찮으니까 너 먼저 화장실 다녀와.”강영
장소월은 화장실에서 나와 수돗물을 켜고 손을 씻었다. 강용 옆에 있던 여자를 생각하자 그녀의 얼굴이 낯설지 않은 것 같았다. 어디서 본 듯한 얼굴이었다.그런데 백윤서와 강용은 사귀는 사이 아니던가?강용은 왜 또 새 여자친구를 사귀었지?아니다, 어젯밤 백윤서와 전연우가 껴안고 있던 걸 보아, 두 사람은 아마 사귀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강용이 버림받았다는 뜻이다.도원 어촌에서 강용은 그녀의 맞은편에 머물렀었고 장소월은 두 사람이 키스하는 것을 목격했었다.그런데 장소월도 두 사람이 정말 입술을 닿았는지 알 수 없었다.어쨌든 그녀의 자리에서 봤을 때 정말 키스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장소월도 그들 사이에 또 다른 일이 있었는지는 알지 못했다.그녀는 자신과 상관없는 일에 관심 끄고 더 이상 관여하지 않기로 했다.장소월은 재빨리 손을 씻고 휴지 두 장을 뽑아 손을 닦은 다음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그런 다음 그녀는 휴게실로 갔다.장소월이 문 앞으로 갔을 때 휴게실 안에 사람들이 강영수를 둘러싸고 있는 것을 보았다.그들이 왜 여기 있는 걸까?서문정과 다른 친구들이었다.제운고등학교 6반 학생들.예쁘장하게 생긴 여학생들이 강영수를 둘러싸고 있었는데 그들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강영수는 입꼬리가 올라간 채 그들과 말하고 있었다.서문정은 곧 장소월을 발견하고 놀라서 소리쳤다.“소월아! 여기서 만나네! 너… 너 왜 여기 있어? 부반장한테 들었는데 너 이번 학기에 학교에 안 온다고 하던데, 진짜야?”장소월은 강영수의 호기심이 가득한 눈빛을 느꼈다.장소월은 무심한 듯 걸어가면서 말했다.“그래! 이런 우연이 있네, 여기서 다 만나다니.”서문정만 장소월에게 신경 쓰고 지켜볼 뿐, 다른 학생들은 고개를 돌렸고 아무도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지 않았다.장소월은 옆에 조용히 서 있는 백윤서에게 인사를 건넸다.“윤서 언니.”백윤서는 어젯밤의 어색한 상황이 떠올라 장소월을 어떻게 대면해야 할지 다소 당황스러워했다.어제 장소월은 그녀가 전연우에게 했
이때 강용의 모습은 마치 자신만만하던 사자가 동물 트레이너를 보고는 사람들이 쓰다듬고 있는 고양이가 된 것 같았다.강영수는 사람들 앞에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지금 서서히 강한 그룹의 경영권을 잡고 있지만 외부인들이 보기에 그는 모습을 숨기는 신비한 존재였다.그들은 아마 방금 휠체어를 타고 있던 사람이 누구인지 모를 것이다.하지만 허철과 방서연은 알고 있었다.그 사람은 서울 강가네에서 배양한 상속자 강영수였다.몇 년 전의 교통사고는 강영수의 다리를 앗아갔고 그 후로 그는 사라졌다.그 해의 강영수는 현재의 강용보다 훨씬 뛰어났다.두 사람은 정말 똑같이 거칠고 오만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하지만 지금 강영수는 이전보다 못했지만 그들에게 주는 느낌은 이전보다 훨씬 더 무서웠다.눈빛만으로도 강용을 충분히 제압할 수 있었다.강용은 강영수의 배다른 동생이다. 하지만 강가네에서 그의 아버지를 제외하고 누구도 강용의 존재를 인정해 주지 않았다.왜냐하면 강용의 어머니는 평범한 신분이었고 예전에는 연기자였다… 연기자 출신이니까 강가네는 그의 어머니를 더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그들은 이 사람이 얼마나 무자비한지 알고 있다.지난번에 장소월이 사고를 당했을 때, 강영수는 강용이 사람을 시켜 일을 저지른 줄로 알고 있었다.그래서 그는 사람을 시켜 바에 있는 강용의 손을 부러트리고 사람을 끌고 차에 올라탔다…당시 일이 진행되고 있을 때 룸 안에는 그들 세 사람뿐이었다.지금도 허철과 방서연은 그 순간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장소월과 강영수가 멀리 가고 나서야 허철은 감히 입을 열었다.“장소월은 저 사람과 어떻게 아는 사이야?”“용아, 지난번에 일은 그냥 이렇게 지나갈 거야?”목소리는 낮았지만 휴게실에 있는 사람들도 그 말들을 들었고 무슨 이야기인지 이해하지 못했다.강용은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고 라이터를 돌리며 미소를 지었다.“재밌네.”두 사람이 그림 전시회를 다 둘러보고 나니 벌써 오후 한 시였다.장소월은 그녀의 눈을 바라보다가 그들이 점심
그림 전시회는 오후 3시에 끝났다.백윤서는 국제전시센터 밖에 주차된 낯익은 차를 바라보았다.그녀는 재빨리 조수석 문을 열고 차에 앉았다.“오빠… 언제 왔어요? 왜 전화 안 했어요? 오빠가 온 걸 미리 알았으면 내가 일찍 나왔을 텐데, 그럼 이렇게 오래 기다릴 필요 없었는데.”기성은에게 백윤서의 수업 스케줄 사본이 있기 때문에 그는 오늘 그녀가 교외 활동으로 그림 전시회를 보러 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전연우는 비행기에서 내린 지 얼마 안 되어 근처를 지나가던 중이었고, 그래서 가는 길에 그녀를 데리러 왔다.전연우가 말했다.“괜찮아.”백윤서가 말했다.“오빠, 그 프로젝트는 어떻게 됐어요?”전연우가 대답했다.“계약서에 사인했어.”“축하해요! 오빠가 이 프로젝트 때문에 일주일 넘게 잠도 잘 못 자고 고생했잖아요. 드디어 이제 잠시 쉴 수 있게 되었네요.”차가 시동이 걸리고 전연우가 말했다.“윤아, 안전벨트 매.”백윤서는 깜짝 놀라며 그의 말에 얌전하게 말했다.“아, 깜빡했네요.”그녀는 재빨리 안전벨트를 맸다. 예전에는 전연우가 늘 그녀의 안전벨트를 매는 것을 도왔다.백윤서는 그가 피곤해하는 것을 보고 조용히 앉아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전연우는 차를 돌렸고 마치 누군가 길을 건너려고 하는 것을 보았는데 그 익숙한 모습은 장소월 같았다.그녀는 몸을 숙여 휠체어를 탄 사람의 옷과 스카프를 정리해 주었다. 허리까지 오는 길이의 약간 곱슬한 긴 머리는 어깨에 흘러내렸다. 장소월은 생수병 뚜껑을 열고 그 남자에게 물을 마시도록 했다.전연우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녀의 모든 움직임을 지켜보면서 얇고 차가운 입술을 앙다물었는데 그 선은 더욱 차가워 보였다.차 안에는 범상치 않은 분위기가 서서히 퍼지면서 불쾌감이 스며들었다.백윤서도 그 모습을 보고 말했다.“오늘 학교에서 전시회를 보는 활동을 조직했는데 소월이가 친구랑 같이 왔더라고요. 그런데 그 사람의 다리를 보니… 장애인 같았어요.”전연우는 그 순간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장소월을
그가 이 사람들을 데려온 것일까?왜?복수를 위한 그의 계획 때문에… 그래서 미리 그에게 접근한 걸까?전생에 그들은 적어도 결혼까지 했었다.지금은… 전연우는 그녀에게 살 기회를 줄 생각이 없었다.그때 도원 어촌에서 그녀에게 접근한 사람도 그가 찾은 사람이 아니었을까?만약 그가 한 짓이 맞다면 왜 그녀를 도와서 그녀를 괴롭힌 사람들을 혼줄을 내줬던 걸까?지금 그는 누구에게 보여주려고 이러고 있는 걸까?그래서 오늘 전연우는 그녀가 굴욕적으로 죽는 것을 보려고 하는 걸까?그렇다면.지난번에는 왜 그녀가 바다에서 죽게 내버려 두지 않고 구해준 걸까!전연우, 장해진이 도대체 당신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왜 당신은 그 사람에 대한 증오를 전부 나한테 뒤집어씌우는 거야.난 분명 아무 짓도 안 했어!그들의 손은 장소월의 옷을 계속 찢고 있었다.흰 재킷은 이미 벗겨져 있었다.장소월의 저항은 그들에게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쯧, 두 성인 남자가 여기서 여자를 갖고 즐기고 있는데, 전연우… 넌 아무 반응이 없냐?”서철용의 시선이 그의 하체를 향했고 그는 사악하게 웃고 있었는데 입술은 악마 같은 붉은 핏빛이 번져 있는 듯했다.“유감이야… 오늘 밤이 지나면 이 어린 소녀는 곧 여자가 될 거야!”“하지만 잘했어. 장소월이 강가네 가문으로 들어가면 우리 계획은 더 실행하기 어려워질 거야. 장소월… 같은 여자는 앞으로 많을 거니까 아쉬워할 필요 없어.”전연우의 검은 눈동자는 밤처럼 어두웠다.하지만 그들의 생각대로 일이 진행되지는 않았다.장소월은 힘껏 그들을 밀어냈고, 그중 한 명은 칼을 꺼내 위협하면서 들이대려고 했지만 장소월이 손으로 튕겨내면서 칼은 땅에 떨어졌고 그녀의 팔은 베여 상처가 났다.피가 줄줄 흘러내렸고 장소월은 팔을 가린 채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두 남자는 그녀를 쫓아 달려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전화를 받았다.“쫓아가지 않아도 돼.”장소월은 얼마나 달렸는지 그녀가 누가 아직도 쫓아 오나 황급히 뒤돌아보았을 때
밤이 되자 달은 흐린 구름에 가려 밝았다가 어두워졌다.짙은 구름은 장소월의 기분처럼 답답하고 숨이 막혔다.그녀는 마치 방금 괴롭힘을 당하고 버려진 고양이처럼 갈 곳을 몰라 길거리를 떠도는 것 같았다.이렇게 넓은 곳에서 장소월은 어디가 자신의 집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그는 어둠 속에서 걸어 나왔다. 장소월은 그의 대답을 듣지 못했고 휴대폰으로 바람 소리만 들었다.무겁고 힘 있는 발소리를 듣자, 장소월은 소리가 나는 방향을 바라보았고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눈물을 통해 그를 바라보았을 때 그의 검은 모습조차도 비현실적이었다.휴대폰을 귀에 대고 있었는데 그가 가까이 오자 장소월은 무력하게 휴대폰을 떨어트렸고 팔의 피도 마른 것 같았다.피를 많이 흘린 탓에 장소월의 얼굴은 창백했고 이제 그녀는 절망으로 가득 찼다.장소월은 전연우의 바지를 움켜쥐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왜요? 연우 오빠, 제가 뭘 잘못했길래 저한테 이러는 거예요?”난 당신을 너무 사랑하는데 당신은 왜 나를 계속 가슴 아프게 만들어?“소월아, 사람은 가끔 너무 똑똑하다고 자신만만하면 안 돼!”전연우는 몸을 숙이고 한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꼬집었다.“강가네를 이용해서 장씨 가문을 벗어나고 싶었어? 왜 너는 항상 그렇게 순진해?”“전연우, 당신이 나 안 좋아하는 거 알아요. 난 이미 포기했어요. 도대체 나한테 뭘 더 바라는 거예요? 처음부터 내가 죽기를 바랐다면 왜 매번 날 구해준 거예요? 난 이미 충분히 고통스러워요… 제발 부탁인데 이제 날 그만 괴롭혀요, 네?”전연우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차갑게 쏘아붙였다.“오빠라고 불러!”“당신은 내 오빠가 아니에요! 예전에 나한테 잘해준 거 다 가짜잖아요! 당신은 내 오빠가 될 자격이 없어요!”장소월은 발버둥 치며 소리를 질렀다. 두려움은 이미 지나갔고 이제 슬픔과 분노, 그리고 자신의 운명에 저항할 수 없다는 절망감만이 남아있었다.“앞으로 강가네 누구에게도 가까이 가지 마. 내 말을 듣지 않으면 어떤 결과가 있을지 알잖아…
그녀를 안은 순간.갑자기 전연우의 코끝에 하얗고 차가운 무언가가 내려와 그의 체온에 녹아내렸다.그가 고개를 들어보니... 언제부터인지 거위 깃털 같은 눈이 내리고 있었다.눈은 땅에 떨어져 한동안 머물다가 녹았다.장소월이 여덟 살 때 전연우는 처음으로 장씨 집안에 들어왔다. “오빠, 봐요. 눈이 내리고 있어요!”열한 살 장소월이 말했다.“오빠, 밖에 나가서 눈사람 만들까요? 소월이는 오빠를 제일 좋아해요!”열여덟 살 장소월.“오빠, 올해도 서울에 눈이 오면 오빠한테 고백할 테니, 나랑 사귀어요!”소월아, 네가 잘못한 게 아니야!단지 네가 장씨 가문에서 태어났다는 게 잘못된 거야.지금 네가 겪는 고통은 시작에 불과해......장소월은 얼마나 오랫동안 어둠 속에서 정처 없이 걸었는지 모른다.영혼이 없는 꼭두각시처럼 느껴지면서 자신의 육체가 조종당하고 있다고 느낀 그녀는 눈앞에 밝은 빛이 나타나자 그것을 향해 걸어갔다.의식이 천천히 돌아왔다.“습~” 침대에 누워 있던 사람은 차가운 숨을 들이마셨다.눈앞의 회색 천장을 바라보며 낯설지만 익숙한 동백꽃의 은은한 향기를 맡았다.장소월은 침대 왼쪽에 검은 스웨터를 입은 차분한 기질의 전연우를 보았다. 그의 얼굴은 부드러운 선이 선명했고 그의 몸에서 어두운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그를 보고 있으니 어떤 비현실적인 느낌이 들었다. 이것은 환각일까?그는 왜 여기 있는 걸까?“연우 도련님, 소월 아가씨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요? 멀쩡했는데 어떻게 또 다치셨어요? 어제는 분명 멀쩡했는데?”아줌마의 목소리였다.“일어났네요...”아줌마는 설탕물 한 그릇을 손에 들고 다가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아가씨, 괜찮아요?”“가만히 계세요, 연우 도련님이 상처를 처리하고 계세요.”전연우는 마취제 없이 그녀의 상처를 꿰매고 있었다.백윤서는 그녀가 움직일까 봐 다른 한 손을 누르고 있었다.“오빠, 우리 그냥 소월이를 병원에 데려가요.”장소월의 손은 주먹을 꽉 쥐었다. 너무 아파서 팔의 살이
“상처가 이렇게 깊다니... 도련님께서 밤늦게 돌아오지 않는 아가씨가 걱정되어 마중을 나갔으니 망정이지 더 큰 일이라도 생겼으면 어쩔 뻔했어요!”장소월이 웃으며 말했다.“그냥 넘어진 거예요.”“뭐라고요? 고작 넘어진 것뿐인데 이렇게 크게 다쳤다고요?”“춤 연습을 할 때 주의하지 않아 긁혔어요.”아주머니가 이마를 찌푸리며 말했다.“안 되겠어요. 어르신에게 말씀드려 학원을 바꿔 달라고 해야겠어요. 어떻게 선생님이라는 작자가 책임감 없이 이렇게까지 다칠 때까지 가만히 놔둘 수가 있어요! 그런 사람이 무슨 선생이에요!”장소월은 순간 마음이 따뜻해졌다. 그녀가 다칠 때마다 가장 먼저 걱정해주는 사람은 항상 오 아주머니이다.“아주머니, 전 정말 괜찮아요. 집사님께 전화해 절 데리러 오라고 해주세요.”백윤서가 말했다.“소월아, 오늘은 너무 늦었으니까 이곳에서 하룻밤 자고 내일 가. 널 혼자 이 시간에 보낸다면 나와 오빠가 마음이 놓이지 않을 것 같아.”장소월은 설탕물을 반 컵 마시고 나니 한결 괜찮아졌다.“참, 이렇게나 늦은 시간까지 저녁도 안 먹었죠? 배고플 테니까 내가 국수를 말아 줄게요.”장소월은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그제야 그녀는 여긴 전연우의 방이라는 걸 알아차렸다.“별로 배가 고프지 않아요.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백윤서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소월아, 네 집처럼 편히 있어. 나와 오빠가 널 보살펴 주는 건 당연한 일이야. 국수가 먹고 싶지 않으면 오빠한테 다른 걸 사 오라고 할까?”장소월은 너무 시끄러워 머리가 지끈거렸다.이곳은 그녀의 것이 아닌 백윤서와 전연우의 집이다.때문에 이곳에 머무르는 건 그녀에게 불편함만 안겨줄 뿐이다.장소월은 긴 머리를 늘어뜨린 채 고개를 숙여 자신이 입고 있는 옷을 내려다보았다. 백윤서의 것이었다.언제 그녀에게 옷을 갈아입혔는지는 알 수 없었다.그녀의 지갑과 핸드폰도 모두 침대 옆 탁자 위에 놓여있었다.“나 좀 쉬면 돼. 나한테 신경 쓸 필요 없어.”전연우가
신이랑의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그래요.”소민아는 회사에 돌아가 주차장에서 차를 세우던 도중 캡모자를 눌러쓰고 은밀하게 움직이는 남자 한 명을 발견했다. 소민아는 차에서 내리지 않고 그의 행동을 살펴보았다.얼마 후 남자가 전화를 걸었다.“누님, 그 여자 위치 찾았어요. 사진도 있고요. 전 지금 지하주차장에 있어요.”소민아는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것 같았다. 송시아가 찾는 그 여자?소월 언니다!송시아가 이렇게나 빨리 소월 언니를 찾았다고?그... 그럴 리가 없다!3분 뒤, 송시아가 엘리베이터에서 걸어 나오자 남자는 그녀에게 서류 봉투 하나를 건네주었다.“누님, 그 여자 어떻게 처리할 거예요? 몰래...”그가 손가락으로 목을 베는 동작을 취했다.소민아는 빠르게 핸드폰을 꺼내 두 사람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급할 필요 없어. 넌 일단 돌아가 내 전화 기다리고 있어. 너무 쉽게 죽게 하면 안 되지.”“알겠어요. 그럼... 누님, 저희한테 줄 수고비는... 저희들 요즘 전국을 휘젓고 다니고 해외에까지 나가느라 정말 힘들었어요.”송시아는 바로 핸드폰을 꺼내 남자에게 돈을 이체해주었다.“이건 수고비의 3분의 1이야. 나머지는 일이 다 끝나면 줄게. 너희들 고생한 거 잊지 않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걱정하지 마십시오, 누님. 저희들 절대 누님을 실망시키지 않을 거예요.”두 사람의 거래가 끝나자 지하주차장엔 다시 고요함이 내려앉았다. 소민아는 씩씩거리며 차에서 내려가 대표 사무실로 향하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소민아가 벌컥 문을 열었을 때, 송시아는 서류 봉투를 뜯고 있었다. 그녀는 소민아를 보고는 다시 서류 봉투를 닫아 옆에 놓아두었다.“언니한테 무슨 할 말 있는 거야?”“아까 지하주차장에서 만났던 그 남자 누구예요? 송시아 씨, 이번엔 또 누굴 죽이려는 거예요! 왜 꼭 그렇게 사람을 죽여야만 하는 건데요! 아무도 당신을 이기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송시아가 웃으며 그 서류 봉투를 들고 일어섰다. 그녀는 소민아 앞에서
소민아는 며칠 더 휴가를 주겠다는 신이랑의 배려를 거절했다. 다음 날 회사에 나와보니 신이랑은 여느 때처럼 아침 일찍부터 사무실에 나와 있었다.그는 피곤한 듯 이마를 꾹꾹 누르고 있었다. 신이랑이 고개를 드니 눈에 가득 퍼진 실핏줄이 보였다. 소민아는 바로 가방을 내려놓고는 걱정스레 다가갔다.“이랑 씨, 두통이 또 발작한 거예요? 약은 먹었어요?”신이랑은 고개를 저었다. 한눈에 봐도 예전 두통 때문에 힘들어하던 그 모습이었다.소민아는 손을 뻗어 그의 이마를 만지려다가 허공에서 멈춰 섰다.“제가 병원 예약해 둘 테니까 가봐요. 이렇게 참는 것만이 방법은 아니에요. 오늘 스케줄은 오후에 예정된 중문 시리즈 사람과의 미팅밖에 없어요. 지금 병원에 가면 그전에 돌아올 수 있을 거예요.”소민아는 이제 신이랑의 스케줄도 기억하고 있었다. 예전엔 항상 신이랑이 먼저 말했고, 장소가 어디든 그녀는 따라가기만 했었는데 말이다.지금의 소민아는 정말 예전과 많이 달라졌다.신이랑이 말했다.“그럴 필요 없어요. 나 괜찮아요.”소민아는 시간을 확인하고는 바로 핸드폰을 들고 신경내과에 예약했다.“편집장님, 30분 뒤로 예약해 뒀어요. 얼른 물건 챙겨서 나랑 같이 가요.”소민아의 말투도 조금 사나워졌다.신이랑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알았어요.”소민아는 부하 직원에게 남은 일을 맡겨두고는 차를 몰고 신이랑과 함께 병원으로 향했다.소민아가 운전하다가 물었다.“혹시 어젯밤 샜어요? 의사 선생님 말씀 잊었어요? 수술 뒤엔 몸을 잘 챙겨야 한다고 했잖아요. 잠을 제대로 안 자는 건 건강 회복에 치명적이에요.”눈을 감고 있던 신이랑은 그녀의 말을 들으니 몸이 훨씬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어젯밤 신수지가 왔었는데 보기 싫어서 호텔로 옮겼어요. 난 신수지가 싫어요.”소민아가 그를 쳐다보며 물었다.“신수지가 이랑 씨를 왜 찾아가요? 동생 아니었어요?”신이랑이 눈을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친 순간, 소민아는 그가 뭘 말하려는
막무가내인 그녀의 모습을 신이랑은 더는 참아낼 수가 없어 단호히 말했다.“현실을 제대로 자각하세요. 난 절대 신수지 씨와 결혼하지 않아요. 당신 집안의 도움은 더더욱 필요 없고요. 성세 그룹에 들어간 건 민아 씨를 위해서예요. 민아 씨가 없어도 난 당신들과 얽히지 않을 거예요.”“계속 여기에 있고 싶으면 있어요.”신이랑은 바로 서재에 걸어 들어가 중요한 서류들을 챙기고는 노트북 가방에 넣었다. 그 모습을 본 신수지는 얼른 달려가 그의 팔을 잡았다.“어디에 가려고요? 오빠, 가지 말아요. 내가 그렇게 싫어요?”“내가 오빠를 좋아하는 것 때문에?”신이랑은 바로 그녀의 손을 뿌리쳐버렸다.“자신을 비참하게 만드는 일 하지 말아요.”신이랑은 물건을 들고 바로 떠나버렸다.신수지는 그의 뒤를 쫓아가며 소리쳤다.“오빠!”신이랑은 이미 엘리베이터를 타고 자리를 떴다.신수지는 분노에 차올라 발을 동동 굴렀다.“이게 다 소민아 때문이야. 너만 없었다면 오빠도 날 멀리하지 않았을 거라고!”신이랑은 차를 몰고 집에서 나가 한 호텔 방에 체크인했다.신수지는 엉엉 울며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유연홍은 자신의 귀한 딸이 울며 들어오자 얼른 뛰어가 달랬다.“왜 그래, 수지야? 누가 너 괴롭혔어? 엄마한테 말해.”유연홍은 신수지의 옆에 앉아 휴지로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엄마! 저 신이랑한테 갔었는데 쫓겨났어요. 밥 한 끼 같이 먹겠다고 하루종일 바쁘게 돌아쳤는데...”“절 완전히 무시하더라고요.”“욕까지 했어요! 대체 제가 그 여자보다 못한 게 뭐예요? 그 여잔 나보다 나이도 많고 예쁘지도 않잖아요.”유연홍이 그녀를 달랬다.“수지야, 네가 이랑이를 찾아간 일 절대 아빠가 알게 하시면 안 돼. 아빠는 이미 이랑이를 집에 돌아오게 할 방법을 찾으셨어. 이랑이가 집에 들어오기만 하면 엄마가 어떻게든 널 받아들이게 할게.”“그러니까 지금은 너무 밀어붙이면 안 돼. 알겠니?”그 말에 신수지는 다운되었던 기분이 많이 괜찮아졌다.“하지만 오빠 마음
소민아가 다시 깊게 잠이 들자 명세진은 도우미와 함께 방에서 나가 계단 입구에서 전화를 받았다. 그녀가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송시아 씨?”“사모님.”명세진이 이마를 찌푸렸다. “송시아 씨, 난 전에도 말했어요. 민아가 송시아 씨를 인정하고 싶다고 하면 저희는 막지 않겠다고요. 하지만 다른 수단으로 우리 집안에 무언가를 할 생각이라면, 지금 명확히 알려줄게요. 우린 그리 만만한 사람들이 아니에요. 앞으로는 전화하지 말아요. 아니면 경찰에 신고할 거예요.”말을 마친 그녀는 단호히 전화를 끊어버렸다.송시아는 사무실에 앉아 꺼져버린 핸드폰을 바라보고 있었다. 순식간에 그녀의 얼굴에 싸늘함이 번뜩였다.소씨 가문이 계속 서울에서 버티고 있으면 그녀가 소민아의 마음속에 들어갈 자리는 생기지 않는다. 절대 이대로 소씨 가문이 서울에서 뿌리를 내리고 살게 하면 안 된다.소씨 가문이 줄 수 있는 건 그녀도 얼마든지 줄 수 있다. 줄 수 없는 것 또한 충분히 가능하다.송시아가 온 힘을 쏟아 이 자리에 오른 건 동생에게 가장 행복한 삶을 선물해주기 위함이었다.소민아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녀는 반드시 동생을 신씨 가문 안주인 자리에 앉힐 것이다.‘장소월... 네 목숨을 끊지 않는 건 다 민아를 위해서야. 영원히 꼭꼭 숨어있는 게 좋을 거야. 아니면... 절대 너한테 자비 따위 베풀지 않아.’송시아는 또 신이랑에게 문자를 보냈다...그때... 신이랑은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이었다. 핸드폰이 진동해 문자를 확인해 본 순간, 그의 이마가 찌푸려졌다. 집에 도착하니 안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신이랑은 바로 핸드폰을 집어넣고 지문으로 문을 열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깨끗하게 정돈된 오피스텔 안에 불청객 한 명이 앉아 있었다. 신수지가 머리를 묶고 앞치마를 한 채 문 쪽을 쳐다보며 말했다.“오빠, 왔어요?”신이랑이 이마를 찌푸리며 그녀를 쳐다보다가 시선을 밥상 위 차려진 음식으로 옮겼다.“열쇠 누구한테 받은 거예요?”신수지가 배시시 웃으며 말했
도우미가 말했다.“민아 아가씨가 돌아오셨어요. 그런데 제가 방금 방에 가보았는데 두통이 다시 재발한 것 같았어요.”명세진의 얼굴이 바로 굳어졌다.“민아는요? 지금 어디에 있어요? 민아한테 무슨 얘기 했어요?”“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약만 가져다드렸어요. 얼굴색이 정말 안 좋았어요.”명세진의 얼굴엔 걱정이 가득했다.“내가 올라가 볼게요. 오늘 저녁엔 민아가 좋아하는 음식들 많이 만들어요.”“네, 사모님.”명세진은 소민아를 줄곧 자신의 친딸로 생각하며 키워왔다. 소현아와 소민아 모두 소씨 가문의 소중한 딸이다. 실제 언니는 소현아였지만, 평소엔 동생인 소민아가 언니처럼 소현아를 챙겼다.명세진은 소민아의 마음이 다치지 않도록 평소 그녀에게 더 관심을 쏟기도 했다.명세진은 방으로 올라가 조용히 문을 열었다. 침대에서 잠들어 있는 소민아를 본 그녀는 조심스레 다가갔다.소민아는 악몽에 시달리고 있는지 베개가 흥건해지도록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안 돼요... 나 데려가지 말아요...”“오... 오지 마...”“언... 언니...”“언니... 어디에 있는 거예요!”명세진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며 손수건으로 이마 위 식은땀을 닦아주었다.“괜찮아. 괜찮아. 고모가 여기에 있어.”명세진은 따뜻하게 이불을 덮어 주고는 예전 소민아를 집에 갓 데려왔을 때처럼 침대 옆에 앉아 밤새 그녀를 토닥여 주었다.슬프게 흐느끼던 소민아는 한참을 다독인 뒤에야 천천히 울음을 그쳤다.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올려 주는 명세진의 얼굴엔 걱정이 가득했다. 아이를 갓 집에 데려왔을 때를 그녀는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다.영양실조로 살집 하나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말라 있었다. 일주일 동안이나 의식을 되찾지 못해 병원에서도 다시 살지 못할 거라고 했었다.이후, 다행히 그녀는 목숨을 지켜냈고 천천히 몸을 회복했다.비록 예전의 기억을 잃어버리긴 했지만,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아주 영리하고 총명한 아이였다. 학교에서의 수업도 교과서 한 번만 읽으면 바로 익히는
세면대 위에 놓아둔 핸드폰이 진동해 살펴보니 신이랑이 보내온 문자였다.[며칠 집에서 쉬어요. 회사 일은 내가 알아서 할게요.]소민아의 머릿속에 신이랑과 결혼하면 다시는 범죄를 저지르지 않을 거라던 송시아의 말이 다시 떠올랐다.소월 언니 집안에 관한 일은 고모부로부터 들은 적이 있다. 당시 장씨 집안의 지위는 어마어마하게 높았다고 한다. 서울에서 높은 권세를 누리고 있는 가문들조차도 장씨 집안에겐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암암리에 수많은 극악무도한 짓을 저질렀다.한 사람의 목숨은 단 한마디 말로 가볍게 좌지우지되는 것이었다. 소씨 집안은 명함도 내밀지 못했고, 서울에서 난다긴다하는 명문가 집안도 장해진 앞에선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송시아가 저지른 범죄도 그들과 그리 다르진 않을 것이다.소민아는 갑자기 밀려온 어지러움 때문에 정신이 아찔해졌다. 세면대를 지탱하지 않았다면 바닥에 쓰러졌을 것이다. 그녀의 머릿속에 낯설고도 생생한 기억이 펼쳐졌다.울음소리 가득한 어두운 지하실...남자 한 명이 그녀 앞에 쪼그리고 앉아 그녀에게 만두 하나를 쥐여주었다. 6, 7세 남짓한 어린 여자아이는 허겁지겁 만두를 입에 구겨 넣었다...머리가 깨질 것만 같아 이마를 감싸 쥐었다. 곧이어 참을 수 없는 두통이 밀려왔다.고통을 견디며 30초 정도 지내 보내니 그제야 통증이 조금씩 가라앉았다.그곳은 대체 어디일까. 왜 그녀 기억 속엔 없었던 걸까...그 남자는 누구지?왜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거지?도우미가 깨끗이 세척한 옷을 들고 들어왔다가 이상한 모습의 소민아를 보고는 다급히 다가와 물었다.“아가씨, 왜 그러세요? 또 머리가 아픈 거예요? 제가 약 가져다드릴게요.”소민아는 어렸을 때 자주 두통을 앓았었다. 하지만 이미 오랫동안 발병하지 않았다.도우미가 얼른 약을 꺼내 소민아에게 가져다주었다.약을 입에 넣고 물로 삼키니 두통이 많아 가라앉았다.도우미가 말했다.“아가씨, 계속 불편하시면 병원에 가보세요.”소민아가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그녀가 신이랑과 결혼만 하면 송시아는 더는 다른 사람을 해치지 않을 거라고 했었다.“왜 그렇게 보는 거예요? 네?”소민아는 뒤로 몇 걸음 물러서 신이랑과 거리를 넓혔다.“난 괜찮으니까 먼저 돌아가요. 잠깐 어지러워서 그랬어요.”“그래요. 내가 차로 데려다줄게요.”“아니에요. 회사와 내가 가려는 곳은 반대 방향이에요. 지금은 근무 시간이잖아요. 이랑 씨 일에 영향 줄 수는 없어요.”소민아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마음속에서부터 그를 천천히 멀리하기 시작했다.그 변화를 느낀 신이랑의 얼굴에 감출 수 없는 실망감이 어렸다.“민아 씨, 무슨 일 있었던 거예요? 아니면 송시아가 또 기성은 씨로 협박한 거예요? 뭐든 상관없으니까 나한테 말해요. 내가 도와줄게요.”소민아는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보았다.‘신이랑 씨, 대체 왜 나한테 이렇게 잘해주는 거예요?’‘이건 친구에게 베푸는 호의가 아니잖아요! 그보단... 다른 관계...’소민아는 그에게 똑똑히 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이랑 씨, 여긴 불편하니까 차에 가서 얘기할까요?”“그래요. 내가 캐리어 들어줄게요.”신이랑은 소민아의 짐을 들고 그녀와 함께 주차장으로 향했다. 차에 올라탄 뒤 그가 물었다.“나한테 할 얘기 있어요?”“이랑 씨, 우린 친한 친구 맞죠? 이랑 씨도 송시아처럼 나쁜 사람으로 변하진 않을 거죠?”신이랑은 잠시 당황했다가 이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민아 씨, 나쁘게 변하든 아니든 절대 민아 씨를 해치진 않을 거예요!”신이랑이 그녀에게 하는 약속이었다.“민아 씨 생각엔 내가 그런 사람으로 변할 것 같아요?”소민아는 그를 믿는 게 맞는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송시아의 말로는 신이랑은 앞으로 정계에 입성할 것이고 기성은의 위협이 될 거라고 한다. 그녀는 목구멍까지 올라왔던 말을 다시 삼켜버렸다.결국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기성은이 그녀에게 신신당부한 말도 있었기 때문이었다.“서울에 돌아가면 그 누구의 말도 믿으면 안 돼요.”“이랑 씨는요? 회사에서 유일하게
소민아의 눈동자에서 빛이 점점 꺼져가고 있었다. 너무 괴로워 목구멍에서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당신 생각이에요, 아니면 이랑 씨 생각이에요?”송시아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민아야, 그 말을 이랑 씨가 들었다면 얼마나 섭섭해할까. 줄곧 신이랑은 나랑 다르다고 말해왔으면서, 지금 신이랑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거야?”“내가 했던 말 잊었어?”“신이랑은 널 위해 본가에까지 들어갔어!”송시아가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내뱉었다.“신이랑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너만을 위해 살았어!”“핸드폰 확인해봐. 신이랑이 너한테 문자를 얼마나 많이 보냈는지.”비행기에서 내린 뒤 그녀는 핸드폰을 무음으로 설정해 놓았다. 기성은의 문자 외에 다른 건 확인할 시간이 없었다.송시아가 걸어 나가며 말했다.“일단 씻고 내려와서 밥 먹어. 저녁에 서울로 돌아갈 거야.”소민아가 핸드폰을 꺼내 보니 베터리가 없어 꺼진 상태였다. 충전선을 꼽고 전원을 켜니 송시아의 말처럼 신이랑으로부터 적잖은 문자가 와 있었다.40개가 넘는 문자 중 대부분이 그녀가 어디에 있는지 묻는 내용이었다. 말투에서 그녀에 대한 걱정이 고스란히 묻어나오고 있었다. 그가 이럴수록 소민아는 그에게 죄책감이 느껴지고 부담감이 더해갔다.오후 3시 식사를 마치고 짐 정리를 한 다음, 비행기에 올라탔다.소민아는 창밖으로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송시아가 그녀 옆에 앉아 눈을 감고는 말했다.“보지 마. 아무리 봐도 기성은은 너랑 같이 여길 떠나지 않아.”“기성은은 애초부터 이 더러운 곳에 더 어울리는 사람이었어. 네가 아무리 애써도 뼛속 깊이 새겨진 비천함은 변하지 않아.”소민아가 말했다.“당신은 얼마나 고귀한 사람이길래 그런 말을 하는 거예요? 당신도 예전엔 이처럼 악랄한 환경에서 살았었다는 거 잊지 말아요.”송시아가 들뜬 말투로 말했다.“이 세상 사람들에겐 모두 등급이 있어. 전연우가 아니었다면 기성은은 아직도 여기에서 굴러다녔을 거야. 참, 내가 알려줬었나? 기성은의 아버지는 지독
“그때가 되면 소씨 가문도, 그리고 언니도... 기성은 하나 때문에 무너져버릴 수 있어.”송시아가 가장 잘하는 게 바로 사람의 가장 여린 약점을 건드리는 것이다. 그 몇 마디 말에 소민아는 패닉에 빠져버렸다.“그... 그럴 리가 없어요! 기성은 씨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요. 신이랑 씨도 당신 말처럼 기성은 씨를 해치지 않을 거고요. 당신 입에서 나온 말은 한 글자도 믿지 않을 거예요.”송시아가 더더욱 그녀를 몰아붙였다.“민아야, 내가 예전에도 말했었잖아. 장씨 가문은 서울 지하조직 수장이었다고. 그 인간들이 무슨 짓을 했었는지 알기나 해? 당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장해진이 죽길 바랐을까. 전연우가 없었다면 장소월은 목숨을 부지하지도 못했을 거야.”“그동안 장씨 집안, 남원 별장을 지켰던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해?”“장씨 집안은 전연우와 기성은이 지탱하고 있었던 거야. 장소월은 다른 사람에게 기대어야만 살 수 있는 기생충에 불과해.”“장씨 집안이 끝나버린 지금, 기성은은 장씨 집안의 뒤처리를 해주려고 저렇게 고생하고 있는 거야.”“장씨 집안이 저지른 죄를 모아 신고하면 목숨이 몇백 개라도 모자라거든.”소민아는 더는 참지 못하고 두 손으로 귀를 막았다.“됐어요. 그만 해요. 소월 언니를 벌레 보듯 하고 있는데... 소월 언니는 아무것도 몰라요. 무슨 근거로 모든 잘못을 소월 언니에게 뒤집어씌우는 거예요? 내가 보기에 소월 언니는 당신보다 훨씬 더 좋은 사람이에요. 적어도 다른 사람을 해치진 않았으니까요!”“만약 내가 당신 동생이 아니었다면 어떤 방식으로 날 해치우려고 했어요? 난 저번 하마터면 당신 손에 철저히 망가질 뻔했어요.”송시아는 화가 나 이마를 찌푸렸다.“장소월이 착하다고? 그래! 장소월은 어렸을 때부터 걱정하나 없이 온실 속에서 자란 사람들의 부러움을 한몸에 받는 귀한 집 아가씨였어. 착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민아야... 우리한테 제일 필요 없는 게 바로 착함이야. 장소월처럼 살았다면 난 이미 일찌감치 죽은 목숨이었을 거야.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