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실 건요? 뭐 마실래요?”장소월이 말했다.“아뇨, 따뜻한 물 한 잔이면 돼요.”“이야, 소월이 아니니? 오랜만이야!”조용한 분위기에서 갑자기 불쾌한 목소리가 울려 퍼져 시선을 옮겨 보니, 장소월은 눈빛이 흔들리면서 당황하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오, 오빠...”날카로운 눈빛의 전연우가 위압적인 분위기를 풍기며 들어왔다.“수업 끝났어?”전연우가 장소월에게 남긴 트라우마가 너무 커서 그를 본 순간 장소월은 당황하고 겁이 난 나머지 하마터면 설명을 늘어놓을 뻔했다.전생의 전연우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지만 소유욕이 강해 소름 끼칠 정도로 그녀에게 집착했었다.장소월은 마음속으로 자신을 욕했다.‘야, 장소월! 너 진짜 너무 약한 거 아니야? 지금 너희는 평범한 오빠 동생 사이일 뿐이야. 왜 아직도 이렇게 그를 무서워하는 거야! 철 좀 들어!’장소월은 고개를 끄덕였다.“네, 방금 끝나서 선생님과 같이 밥 먹으러 왔어요.”온주원은 자리에서 일어나 전연우에게 손을 내밀었다.“안녕하세요. 전 온주원이라고 합니다. 소월 씨의 골프 선생님이에요.”전연우는 그와 간단히 악수하고 말했다.“전연우입니다. 소월이 오빠예요.”한 명은 전 씨이고 한 명은 장 씨라...온주원은 더 묻지 않았다.“마침 이렇게 만났는데 같이 앉아서 식사하시죠. 저랑 소월 씨도 방금 왔어요.”전연우는 장소월을 힐끗 보더니 말했다.“아닙니다. 약속이 있어서요.”서철용은 옆에서 이 상황을 지켜보다가 말했다.“아니야, 연우야! 어쩌다가 이렇게 소월이랑 같이 식사할 기회가 생겼는데, 그리고... 윤서가 도착하려면 아직 멀었어. 뭘 그리 급하다고...”“맞지, 소월아?...”제운고등학교에서 이곳까지 오려면 30분밖에 걸리지 않고, 점심시간은 두 시간이었다.장소월은 갑자기 무언가 떠올랐다.오늘은 백윤서의 생일이고 장소월의 생일은 다음 주 12일이다. 즉, 12월 12일이다. 그들의 생일은 정확히 일주일 간격이었다.매년 그녀의 생일은 소박했는데 아줌마가 그녀에게 케이크와
“오빠...”장소월은 무언가를 더 말하려고 했지만 전연우는 차갑게 말을 내뱉었다.“마음대로 해.”말을 마치고 그는 돌아서서 떠났다.온주원은 장소월이 긴장한 모습을 보고 말했다.“앉아요. 멀지 않아서 아직 시간이 넉넉해요.”장소월은 마음이 불편한 채 다시 자리에 앉았고 웨이터가 디저트를 들고 왔다.온주원은 방금 전 분위기에서 뭔가 이상한 것을 감지했다.그는 더 묻지 않고 다른 화제로 돌렸다. 천하일성의 모든 엔터테인먼트 프로그램을 소개하고 흥미로운 이야기도 하면서 그녀를 즐겁게 해주었다.어떤 사람들은 기분이 얼굴에 그대로 나타나는데, 장소월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아주 쉽게 그녀가 마음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추측할 수 있었다.백윤서의 생일이라고 같은 반 친구들이 많이 왔다...백윤서는 장소월과 같은 학교라는 것 외에도 한 가지 더 말하지 않은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장소월과 같은 6반으로 전학한 것이다.이번에 온 사람들 중에는 강용도 있었다.백윤서는 여학생들에게 둘러싸여 장난치고 웃으면서 룸으로 들어가느라 장소월이 눈에 띄게 창가 자리에 앉아 중년 남성과 이야기 나누고 있는 모습을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하지만 뒤에서 천천히 걸어 들어오던 강용은 그녀를 한눈에 알아보았다.방서연과 허철도 오랫동안 장소월을 보지 못하다가 그녀가 이곳에 있다는 사실에 매우 놀랐다.“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허철이 말했다.“백윤서는 장소월의 언니잖아. 그런데 이번 생일 파티에 초대를 안 했다고? 하긴 그래... 장소월 같은 성격의 사람을 누가 반기겠어!”“아니... 그런데 평소에는 정말 몰랐는데, 이번 시험에서 장소월 1등 했잖아. 1반에서도 5등 안에 들고, 이 년이 무슨 꼼수를 부린 거 아니야?”허철은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장소월이 6반에서 얼마나 심하게 괴롭힘당했는지 잊지 마! 쟤가 반을 바꾸려고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성적을 받는 것도 충분히 이해돼.”두 사람은 동시에 강용을 바라보았는데 그는 라이터를 손
“며칠 못 봤는데 너 좋아 보인다!”강용은 고개를 숙여 금속 라이터를 들고 있었고 그의 눈동자에 붉고 파란 불꽃이 비쳐 기분을 알 수가 없었다.엘리베이터는 이미 12층에 있었고 곧 도착할 것 같았다.온주원은 내려가는 버튼을 누르고 물었다.“아는 사이에요?”“안 친해요.”장소월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따라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다.허철은 폭소하며 말했다.“용아, 장소월은 널 신경도 안 쓰는데?”방서연은 강용의 어깨를 톡톡 두드리고 아무 말 없이 미소를 지으며 룸 안으로 곧장 걸어 들어갔다.강용은 알 수 없는 미소를 짓고 손에 든 라이터의 덮개를 닫았다.“무정한 놈.”10층의 룸은 웃음소리로 북적거렸다.꽃, 풍선, 케이크, 양초...원래는 저녁에 생일 파티를 열려고 했지만 전연우가 오늘 밤 12시에 출발해서 해외로 출장 가야 하기 때문에 점심에 파티를 열 수밖에 없었다...생일 축하 노래를 부른 후 백윤서는 케이크를 한 조각 잘라서 모두가 보는 앞에서 창문 앞에 서 있는 전연우에게 가져다주었다.“연우 오빠, 이 첫 번째 케이크는 오빠에게 줄게요. 오늘 바쁜데도 시간 내서 내 생일 파티에 와줘서 너무 고마워요.”전연우는 원래 단 음식을 싫어하지만 그래도 케이크를 받았다. 그는 시선을 옮겨 장소월이 차에 올라타는 모습을 보고 무표정하게 돌아섰다. 그의 눈빛에 불쾌한 기색이 역력했다.“저녁엔 정 집사가 데려다주실 거야. 난 회사로 가봐야 해.”전연우는 차 키를 들고 떠나려고 했고 그때 그는 케이크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연우 오빠...”백윤서는 그를 부르며 테이블 위에 놓인 케이크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실망한 듯했다.곧바로 한 여학생이 와서 그녀를 위로해 주었고 백윤서는 케이크를 한 조각 더 잘라 강용에게 주었다.강용은 거만하게 소파에 앉아 두 발을 테이블에 올려놓고 있었는데 백윤서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 다리를 내렸다. 그리고 그는 포크로 케이크를 한 입 맛보고는 하마터면 토할 뻔했다.“여자들은 진짜 이상한 거 좋아한
“미안해... 내가 감정 조절을 잘 못해.”무섭게 얼어붙었던 눈빛이 금방 사라졌고 백윤서는 다시 순수하고 미안함이 가득한 표정으로 서문정을 바라보았다.“정말... 미안해, 내가 일부러 그렇게 심한 말 한 게 아니야. 지금 우리는 같이 살지 않아. 내가 소월이한테 네가 했던 말을 전해줄게. 네가 마음에 두지 않았으면 좋겠어.”서문정은 그녀를 이상하게 쳐다보았다. 백윤서에 대해 가졌던 좋은 감정은 모두 사라졌다.감정 조절을 잘 못한다고? 변명은 잘하네, 솔직하게 말해서 더 이상 아닌 척할 수 없는 거겠지...백윤서는 방금 6반으로 왔을 때 누구에게나 잘해주고 연약한 모습을 보여주면서 다른 사람들의 보호 욕구를 불러일으켰었다...이제 서민정이 떠나자 룸에는 아무도 남지 않았다...원래의 활기찬 분위기는 사라졌다.처음엔 분위기가 괜찮았는데 백윤서도 상황이 왜 이렇게 변했는지 이유를 몰랐다.천하일성에서 나온 장소월은 악기와 서예를 배우러 갔고 마지막에는 댄스 학원도 갔다...장소월은 댄스에 소질이 없었다. 하느님은 그녀에게 누구보다 유연한 몸을 주었지만 그녀는 포인트를 잘 잡지 못했다. 거울 앞에 서서 보니 그녀는 자신이 춤추는 모습이 괴물 같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그래도 가장 고통스러운 건 스트레칭이었다. 3개월간 연습하지 않았다. 저녁 8시 30분이 되어서야 연습실에서 나온 장소월은 온몸이 지쳐서 바닥에 드러누웠고 하마터면 구급차를 부를 뻔했다. 심지어 차라리 여기서 밤을 새우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정 집사는 백윤서를 데리러 가서 장소월은 할 수 없이 택시를 타고 돌아가야 했다.그녀는 두꺼운 검은 코트를 입고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택시에 타서 누워 눈을 감자 곧 잠이 들었다.택시 기사가 돌아보면서 물었다.“아가씨, 아직 어디로 가는지 말 안 했어요! 아가씨...”“남원별장이요.”장소월은 바로 창문에 기대어 잠이 들었다.남천 그룹.“대표님, 1시간 30분 후에 맨체스터로 출발하는 비즈니스석 티켓을 샀습니다. 30분 후에 출발하면 됩
전연우는 백윤서를 안고 가서 조수석에 앉히고 안전벨트를 매주었다. 바텐더는 백윤서의 가방을 그에게 건네주었다.“손님, 이 아가씨가 손님 여자친구 맞죠? 혼자서 술을 너무 많이 드시더라고요. 하마터면 이상한 사람들한테 추행당할 뻔했어요. 여자친구분이 너무 예쁜데 앞으로는 혼자 위험하게 나오게 하지 마세요.”전연우는 아무 말 없이 지갑에서 지폐 몇 장을 꺼내 팁으로 줬다. 그리고 바에서 나와 차 앞쪽을 지나 운전석에 앉았고 재빨리 그 자리를 떠났다.가든 아파트에 도착하자 전연우는 차에서 내려 시계를 확인했다. 아직 한 시간 이상 남아 있어서 너무 늦지 않았다.전연우는 백윤서를 부축하여 차에서 내렸고 백윤서는 나른하게 그의 품에 기대어 있었다.“나 돌아가지 않을래. 술 더 마실래…”“윤아, 그만해. 너 내일 학교 가야 해.”백윤서는 갑자기 어디서 힘이 나왔는지 전연우를 밀어내고 휘청거리며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녀는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고 전연우는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윤아, 오늘 무슨 일 있었지.”백윤서는 고개를 저었지만 전연우는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고여있는 것을 보았다.“연우 오빠, 내가 외국에서 돌아오지 말았어야 했나요… 아니… 난 애초에 구조되지 말았어야 했어요. 그러면… 내 마음이 이렇게 괴롭지 않았을 텐데.”“왜 내가 가는 곳마다 다들 나를 싫어할까요… 연우 오빠, 나한테 뭐가 부족한 게 있나요? 오빠… 난 내가 오빠한테 짐만 되는 것 같아요. 아무 도움이 안 되잖아요.”백윤서는 눈물이 계속 흘러내리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울었다.“넌 아무것도 할 필요 없어. 다른 사람의 생각에 신경 쓸 필요도 없고. 넌 네가 맞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면 돼. 윤아… 넌 아직 어려서 걔한테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전부 내가 다 너한테 줄게. 다시는 너 혼자 내버려 두지 않아.”“연우 오빠~”백윤서는 앞으로 가서 전연우의 품에 안겼다.“나한테는 이제 오빠밖에 없어요. 나중에 나 버리면 안 돼요, 알았죠? 오빠도 나를 버린다면 윤이
그들은 서로 사랑하고 있었다.장소월은 전생에 백윤서를 죽게 만들었다.그래서 전연우가 그녀를 그렇게 원망했었다.모든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은 그녀였다…그녀의 잘못이었다…장소월은 졸음을 잊고 창밖 풍경을 바라보다가 바람이 불어와 추위에 코트를 단단히 감쌌다…시간이 너무 빨리 지났다! 어느새 6개월이 지났고 한 달 정도 더 지나면 새해가 된다.기사는 백미러로 뒤에 앉은 장소월을 보더니 창문을 닫았다.30분 후 남원별장에 도착했다.앞에 서서 보니 별장은 조금의 빛도 없이 어두웠다.길 한쪽의 희미한 가로등 그늘 아래 날벌레 몇 마리가 날아다니고 있었다.예전에는 아무리 늦게 집에 돌아와도 누군가 불을 켜놓고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그리고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따뜻한 국수 한 그릇을 만들어 주기도 했다.이제 그녀가 집에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사람은 사라졌다.가끔 장소월은 너무 외로워서 세상에 자신만 홀로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다행히도 장소월은 이 모든 것이 익숙해진 지 오래였다.그녀는 두 손을 모으고 입김을 불고는 가방에서 열쇠를 꺼내 문을 열고 추운 집 안으로 들어갔다.요즘 장소월은 매일 밥 먹고 잠자고 학원 가는 간단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그녀는 집에 늦게 들어오기 때문에 장해진을 만날 기회가 적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장해진은 강만옥과 함께 태국으로 휴가를 떠났다.전연우도 해외 출장을 가야 했다.장소월이 집에 돌아올 때면 밤 10시가 거의 다 되었다.심지어 그녀는 이미 지금의 공부 강도에 익숙해졌고 잘 추지 못하던 춤도 이제는 쉽게 따라갔다. 역시 남자는 독기를 불러일으키는 데에 도움이 된다.연습이 끝나면 다음에는 대회와 자격시험들이 이어졌다…그녀가 완성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고, 아직 제운고등학교의 중간고사도 보러 가지 못했다.학교에서 전화가 걸려 와 거실의 유선전화가 울렸다. 청소 중이던 은경애가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 누구세요?”“실례지만 장소월 학생 있나요?”“이리 줘요!”마침 위층에
오늘은 마침 그림 전시회를 보는 날이다.장소월은 잊지 않고 일찍 일어나서 씻고 흰색 캐시미어 울 재킷과 검은색 긴 니트 스커트를 입었다. 오늘은 기온이 0도까지 내려가 추워서 안에 두꺼운 스타킹도 신었다.요즘 서울의 날씨는 롤러코스터처럼 불규칙적이었다. 별장 화단에 서리가 내리고 나뭇잎은 어제까지 푸르렀는데 하룻밤 사이에 벌써 빨갛게 물들었다.장소월은 하얗게 얼어붙은 서리를 보기만 해도 추웠다.그녀는 고개를 숙여 얼굴을 스카프에 묻었고 뺨은 벌써 약간 붉어졌다.오늘 눈이 올지도 모르겠다.택시가 오자 장소월은 재빨리 문을 열고 들어가 자리에 앉았다.장소월은 다른 사람을 기다리게 하는 것이 싫어서 30분 일찍 출발했다. 그녀가 도착했을 때 이미 전시장 입구에는 긴 줄이 있었고 사람들은 손에 티켓을 들고 있었다. 장소월이 도착한 지 10분 만에 리무진 한 대가 들어왔다.차 안에서 강영수는 창밖으로 하얀 옷을 입은 장소월이 추워서 계단을 오르내리는 모습을 보고 입꼬리를 치켜올렸다.“여기서 내릴게요!”진봉이 말했다.“네, 도련님.”발이 얼 정도로 추운 줄 알았으면 그녀는 양말을 한 켤레 더 신었을 텐데라고 생각했다.“소월아…”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자 장소월은 고개를 돌렸다. 오 집사와 휠체어에 탄 사람이었다.강영수는 미소를 지었다.“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장소월이 말했다.“아니야, 나도 방금 도착했어. 그럼 우리 들어가자.”“소월 아가씨…“오부연이 그녀를 불러 세웠다.“저희는 들어가지 않을 테니 도련님을 잘 보살펴 주셨으면 합니다.”진봉은 눈치를 보고 전화 받는 척 돌아섰고 오 집사도 자리를 떠났다.강영수만 남았다…“부탁해.”“괜찮아. 이렇게 입으면 춥지 않아? 오늘 눈 올 수도 있어! 손이 차갑지?”장소월은 마치 엄마처럼 잔소리를 하며 그의 손을 만졌는데 얼음장 같았다.“장갑 안 했을 줄 알고 내가 하나 더 챙겼어.”장소월은 가방에서 검은색 가죽 장갑을 꺼냈다. 그것은 그녀가 예전에 전연우에게 선물하려고
장소월도 자신이 말을 너무 많이 해서 사람들이 지루해할까 봐 걱정할 때도 있었다.전시장 안에는 에어컨이 있어 그리 춥지 않았다.그림을 보면서 장소월은 디테일을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에드워드는 그녀에게 기쁨 그 이상의 충격을 주었다.이 그림들은 죽은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듯한 온도를 전달하고 있었다…풍경화든 인물화든 매우 사실적이었다…이 그림들은 모두 액자가 씌워져 있었고 사방에 경비원들이 지키고 있어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게 하고 있다. 그 이유는 여기 있는 그림들이 걸작이 되어 경매장에서 고가로 경매될 수 있기 때문이다.“이 화가의 그림들은 전부 다 훌륭하지 않아?”“마음에 들어?”“내가 여덟 살 때 장난치다가 어머니의 책장에 올라갔다가 넘어져 책더미에 파묻혔는데, 그때 책에서 떨어진 그림이 다름 아닌 에드워드 씨의 그림이었어. 지금도 그 그림의 제목이 ‘꿈의 세계’인 것을 선명하게 기억해.”“그건 내가 본 것 중에 가장 아름다운 오로라였어. 밤하늘을 가르는 광선이 극한의 추위 속에서 눈부시게 몽환적이었어. 어떤 붓으로도 극도로 차가운 북극의 공기 속의 그런 장면을 묘사하기는 어렵지만, 오직 에드워드만이 해냈어. 그분은 정말 놀라워!”“하지만 사진으로만 봤을 뿐, 직접 본 적이 없어서 아쉬워. 정말 훌륭할 것 같아.”강영수가 말했다.“볼 수 있을 거야. 네가 원하는 건 모두 이룰 수 있을 거야.”장소월은 곧바로 생각에서 빠져나왔다.“시간이 많이 지났으니 이젠 상관없어. 전시회에 와서 직접 그림을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이미 행복해.”그들은 1층을 다 둘러보았고 2층에 더 있었다.“화장실 갈래?”“…”강영수는 웃으면서 말했다.“도와주겠다면 난 마다하지 않아.”장소월은 순식간에 얼굴이 붉어졌다.‘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야?’장소월은 다급히 말했다.“나, 난… 직원분한테 도… 도와달라고 말할게…”너무 창피하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괜찮아. 장난친 거야. 난 아직 괜찮으니까 너 먼저 화장실 다녀와.”강영
“엄마, 소민아가 우리 집 며느리 되는 거 막아주면 안 돼요?”유연홍이 말했다. “안심해, 설령 소민아가 우리 집에 들어온다고 해도, 내가 가만히 두지 않을 거야.”공들여 쌓은 탑을 남에게 넘겨줄 수는 없다. 그녀는 신이랑이 아무리 청렴하고 깨끗한 사람이라도 여자의 유혹은 뿌리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서울에서 가장 호화로운 펜트하우스.한 채 가격이 몇백억 원에 달한다. 설사 돈을 마련할 수 있다고 해도 아무나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신군회는 풍만한 가슴을 드러내고 있는 여자의 다리에 누워있었다. 여자는 보라색 레이스 잠옷 차림에 매혹적인 향기를 풍기고 있었다. 웨이브 진 긴 머리카락은 여자의 봉긋 솟아오른 가슴 위로 흩어져 있었다. “오빠, 나 보러 온 지 너무 오래됐어요.”“오늘 만두를 좀 빚어놨는데, 먹을래요?”신군회가 물었다. “요즘 낯선 사람이 찾아온 적 없어?”“오빠 말대로 요즘은 밖에 나가지도 않았어요. 혹시 내가 다른 남자라도 만날까 봐 걱정하는 거예요?”“제가 아무리 간이 배 밖으로 나왔더라도 그런 일은 못 해요.”신군회는 여자가 손수 껍질을 벗긴 포도를 먹고 있었다. 여자가 입가로 포도를 가져가자 신군회는 여자의 손가락을 깨물었다. 여자가 애교 섞인 목소리로 손가락을 빼내며 말했다. “부끄러워요.”“어디 좀 볼까, 조금 커졌나.”신군회는 겉으로는 점잖은 사람처럼 보였지만, 실은 정반대였다.그 역시 여느 부패한 정치 인사들처럼 뒤에서는 돈세탁을 통해 불법적으로 수많은 돈을 벌어들였다.신군회는 여자와 노는 데도 능했다. 하지만 그렇게 많은 여자와 잠자리를 했어도 임신한 여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거실에서 거의 30분 동안 뒹굴거린 후, 천미연은 머리카락이 땀에 흥건히 젖은 채 거친 숨을 몰아쉬며 소파에 누워있었다. 신군회는 곧바로 베개를 그녀의 허리 뒤에 받쳐 엉덩이를 들어 올렸다.“여보, 이번에도 임신 못 하면 어떻게 해요? 그 지긋지긋한 한약은 더 이상 마시고 싶지 않아요.”“마시기 싫어도 마셔야
“오...오빠...”신수지는 다급하게 신이랑의 손을 잡으려 했지만, 살결이 닿기도 전에 그는 매정히 떠나버렸다.그 모습을 본 신군회는 화가 치밀어 올라 다시 팔을 들어 신수지의 뺨을 힘껏 내리쳤다. “네가 하는 짓이 다 그렇지.”“지금 날 때렸어요? 감히 날 때려요? 왜 때리는 거예요? 억지로 예의를 갖춰줘서 그렇지, 아빠는 아무것도 아니잖아요. 우리 엄마가 당신을 좋아하지 않았으면, 당신은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 거예요. 친아빠도 이렇게 때린 적은 없다고요!”“여기는 엄마 집이지, 당신 집이 아니에요. 당장 나가요!”신군회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매서워졌다. “한 번 더 말해 봐.”“말하면 어쩔 건데요! 당신은 우리 집 돈이 탐나 엄마와 결혼한 거잖아요. 엄마가 아니었다면, 당신은 이 집에 발도 못 들였어요. 우리 집에 들어오기 위해서 당신은 아내와 아들까지 버렸잖아요.”“닥쳐!” 신군회의 가장 아픈 곳을 잔인하게 후벼 파는 말이었다. 그는 눈을 부릅뜨고 팔을 들어 그녀의 뺨을 또다시 내리쳤다. 이번에는 제대로 통제하지 못해 거의 온 힘을 실어 매를 들었다.신수지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그녀의 얼굴에는 선명한 손자국이 남아 있었고, 입가에는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딸의 퉁퉁 부어오른 얼굴과 시퍼렇게 멍든 자국을 본 순간, 유연홍은 다급히 달려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신군회의 뺨을 후려갈겼다. “당신이 감히 내 딸을 때려요? 신군회 씨,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내 딸을 때려요? 이 집에서 당신은 꼭 필요한 존재는 아니라는 거 몰라요?”신이랑은 현관 밖에 서서 그들의 소동을 들으며 냉담한 표정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신수지는 코를 훌쩍이며 얼굴을 감싸고,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감히 나한테 손을 대다니요. 당장 외할아버지에게 말할 거예요. 외할아버지가 알면 당신 가만히 안 둘 거예요!”신군회가 말했다. “그럴 필요 없어. 유연홍, 이혼하고 싶으면 언제든 좋아. 네 딸이 또다시 내 일을 망치면, 그땐 절대 용서하지
소민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알겠습니다.”“그래요. 저녁에는 다른 인터넷 소설 사이트 CEO들과 식사 약속이 있어요. 민아 씨도 함께 가요.”“네.”소민아의 기존 사무실은 편집장 사무실 밖으로 옮겨졌다. 그녀는 책상에 앉아 신이랑에게서 온 문자 메시지를 보고 있었다.[부모님께서 웨딩 촬영할 곳을 몇 군데 골라주셨는데, 시간이 좀 촉박해서요. 민아 씨가 보고 마음에 드는 곳이 있으면 말해줘요.]소민아는 메시지를 대충 훑어보고는 휴대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러다가 엄마가 그녀에게 해준 신이랑과의 과거 이야기가 생각났다. 그녀의 꿈속에 나온 남자아이가 혹시 신이랑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녀는 대화창을 열어 그에게 답장을 보냈다.[세 번째 곳이요. 지금은 일 때문에 바쁘니까 퇴근하고 얘기해요.][그래요. 퇴근 시간에 맞춰 데리러 갈게요.]신이랑의 공무원 합격은 이미 내정되어 있었다. 필기시험에서 10등 안에만 들면, 면접은 두말할 것 없이 통과할 것이다.그때에야 비로소 정계에 진출하는 진정한 출발점에 서게 되는 것이다.신이랑이 메시지를 보내고 있을 때, 신군회가 정장 차림에 위풍당당하게 걸어왔다. “오늘 별다른 일 없으면, 나랑 같이 사람들 좀 만나러 가자. 나중에 공무원이 되면, 다 너한테 도움이 될 사람들이니까.”신군회는 현재 막강한 실권을 쥐고 있다. 그 자리에까지 올라온 사람들이라면, 모두 자기만의 인맥이 형성되어 있을 것이다.“흥미 없어요.”신군회가 그를 불러세웠다. “나중에 넌 틀림없이 내 자리를 이어받아야 할 거야. 이제 물러설 퇴로는 없어. 신이랑, 아버지가 너무 지나치다고 생각하지 마. 다 너를 위해서 하는 거니까.”“권력을 직접 손에 쥐고 있을 때만이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거 명심해.”그때 아래층에서 여자의 목소리와 꽃병이 깨지는 소리가 함께 들려왔다. “어제 나 없을 때 오빠랑 소민아 결혼식 상의 한 거예요? 엄마, 나 도와준다고 했잖아요. 왜 약속을 안 지켜요. 오빠가 소
결혼식 날짜는 다음 주로 급하게 결정되었다. 소민아는 성대하게 치를 생각도, 외부에 알릴 생각도 없었다. 양가 친척들만 초대해 간단히 식사 한 끼 하는 것으로 마무리할 생각이었다.모든 상의를 끝낸 뒤 밥을 먹고 돌아갈 때, 엄마 아빠의 눈에는 신이랑에 대한 흐뭇함이 흘러넘치고 있었다.처음 선을 봤을 때 엄마 아빠가 소개한 사람이었으니, 당연히 흠잡을 데가 없었을 것이었다.고모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그녀와 기성은의 관계를 알지 못했다.명세진은 소민아의 불편함을 눈치채고는 손을 잡고 달랬다.“민아야, 내가 보기에 이랑이도 나쁘지 않아. 나와 네 고모부도 사랑 없이 강제로 정략결혼을 했었어. 처음엔 싫었지만, 고모부가 나한테 잘해주니까 그냥 이렇게 사는 것도 좋겠구나 싶었어. 여자에게는 항상 자신을 생각해 주고 사랑해 주는 남자가 제일이야.”“이랑이는 인물도 좋고, 집안도 좋고, 너한테도 잘하잖아. 어떤 사람들은 평생 죽을 때까지도 그런 남자 못 만나.”소민아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 알아요, 고모. 걱정하지 마세요. 이랑 씨랑 잘 지낼게요.”그녀는 단지 그들을 안심시키고 싶어서 그런 말을 했을 뿐이다.차 안, 소민아는 엄마의 팔짱을 끼고 그녀에게 기대며 물었다.“엄마, 궁금한 게 있어요. 이랑 씨랑 몇 번 만나지도 않았는데, 왜 저한테 그렇게 잘해줬을까요? 이해가 안 돼요. 왜 저에게 무조건적으로 잘해주는 거죠?”소희연이 말했다. “그 일은 아주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해. 우리가 너를 구해왔을 때부터, 너와 이랑이는 이미 알고 지내던 사이였어. 하지만 그때 너는 너무 많이 다쳐서 기억의 일부를 잃어버렸어. 그때... 이랑이에 관한 기억도 함께 잊어버린 거야.”그랬던 거야?소민아가 물었다. “엄마, 그럼 저랑 이랑 씨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줄 수 있어요? 정말 하나도 기억이 안 나요.”소민아는 요즘 들어 자주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그녀의 꿈속에서 상처투성이의 거지 소녀가 어두컴컴한 구
소민아가 말했다. “현아 언니는 그냥 치료받으러 간 것뿐이에요. 고모, 걱정하지 마세요. 아무 일 없을 거예요.”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지금으로서는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수밖에 없다.현재 소씨 집안 또한 활시위를 떠난 화살과 같았다.신씨 본가에 도착해보니 소민아의 부모님은 이미 그곳에 와 있었다.신이랑은 소민아에게 다가가 부드러운 눈빛으로 사랑을 가득 담아 말했다. “오느라 수고했어요.”소민아는 입꼬리를 살짝 들어 올리며 답했다. “괜찮아요. 들어가죠.”그녀는 신이랑이 잡으려고 하는 손을 못 본 척 앞으로 걸어갔다. 방금 그녀가 지었던 미소는 어쩔 수 없이 짜낸 억지 미소나 다름없었다.“엄마, 언제 돌아오셨어요? 왜 저한텐 얘기 안 하셨어요?”소희연이 말했다. “네 아빠랑 내가 이랑이한테 전화했어. 너에게 서프라이즈를 해주고 싶었거든. 네 아빠는 이랑이를 정말 많이 좋아해. 예전에 선봤을 때부터 엄청 기뻤는데 정말 너희 둘이 이렇게 잘 될 줄은 몰랐어.”“너희 아빠랑 난 너무 기쁜 마음에 며칠 동안 잠도 제대로 못 잤어. 정말 잘했어, 우리 딸.”소민아가 소파에 앉자 도우미가 차를 가져왔다. “사모님, 차 드세요...”갑자기 바뀐 호칭에 소민아는 너무 어색해 대꾸도 하지 않았다.신이랑이 그녀 옆에 앉아 말했다. “내가 작성한 하객 명단이에요. 빠진 사람은 없는지 확인해 봐요.”빠진 사람이라... 어떻게 없을 수가 있겠는가. 그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 그녀가 가장 아끼는 친구들은 아무도 오지 못한다. 소월 언니, 그리고 현아 언니...이런 결혼식이라면, 차라리 오지 않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당신이 결정하면 돼요.”“알겠어요.”“...이번 민아의 결혼식 비용은 전부 제가 부담할게요.” 송시아는 가방에서 카드 한 장을 꺼내며 말했다. “이건 한도가 없는 카드예요. 제가 대학 졸업하고 나서부터 지금까지 오직 민아만을 위해 모아온 결혼 적금이에요.”소민아는 아무 말도 없이 눈을 내리깔고 생각에 잠겨 있었다.
소민아는 계속해서 기성은의 목숨을 빌미로 자신에게 신이랑과의 결혼을 강요하는 송시아에게 치를 떨었다. 지난번 면북에 갔을 때, 소민아는 송시아가 그곳에서 누리는 권세를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했다. 그곳 사람들은 그녀에게 깍듯이 예의를 갖추었고, 심지어 존경의 눈빛을 보내기도 했다. 무서운 상상이지만, 어쩌면 그 폭발 사고가 그녀와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소민아는 답답함에 주먹을 꽉 말아 쥐고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녀는 눈물을 글썽이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마음속 울렁거림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집에 도착한 뒤, 소민아는 차에서 내렸고 송시아도 뒤따라 함께 거실로 들어왔다.명세진이 소민아를 맞이했다.“민아야, 이 녀석아, 어디 갔었어? 이랑이는...”소정국은 심장을 움켜쥐며 소파에서 일어났다. 문밖에 나타난 송시아를 보자 모든 사람들의 낯빛이 어두워졌다.소정국이 소민아에게 다가가 말했다. “민아야, 이리 와.”소민아가 그의 말에 따라 걸어가자 명세진은 그녀의 손을 잡아당겨 자신의 등 뒤로 숨겼다. “당신이 여긴 왜 온 거예요. 여기엔 당신 반기는 사람 아무도 없으니까 당장 나가요.”송시아는 선글라스를 벗고 태연하게 웃으며 말했다. “민아는 제 여동생이에요. 하나밖에 없는 언니로서, 여동생 결혼 준비는 당연히 함께해야죠. 물론, 그동안 여동생을 키워주신 것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결혼 비용은 전부 제가 부담하겠습니다. 아, 그리고 결혼 이후 비용까지 모두 책임질게요.”명세진은 난처한 표정으로 소정국을 바라보았다. 세 사람이 함께 서 있는 모습은 영락없는 단란한 한 가족이었다. 송시아는 누가 봐도 낯설기 짝이 없는 외부인이었다.모두가 침묵하며 입을 다물고 있을 때, 소민아가 돌연 입을 열었다. 소민아를 꽉 잡고 있던 명세진의 손은 땀으로 흥건해져 있었다. “예전엔 당신 협박에 못 이겨서 억지로 신이랑과 결혼하려고 했었어요. 하지만 이제 마음을 굳혔어요. 신이랑과 이혼할 거예요. 더 이상 당신 뜻대로 하고 싶지 않아요.”소민아와 신이랑이 사
눈물이 예고도 없이 뚝뚝 흘러내렸다. 소민아는 무표정한 얼굴로 눈물을 닦으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렇게 허망하게 죽었다는 거 믿지 않아요. 3년 뒤에도 돌아오지 않으면, 내가 기성은 씨 찾으러 갈 거예요. 당신이 어디에 있든 상관없어요!”“기성은 씨, 당신이 죽었다는 말은 절대 믿을 수 없어요.”은밀하게 감춰진 공간에서 두 남자가 감시 카메라에 잡힌 화면을 보고 있었다.한 남자가 비웃으며 말했다. “진짜 이 여자, 기성은 형 너무 좋아하나 봐. 한 달 동안 열 번 넘게 찾아왔어. 곧 결혼식까지 한다는데, 남편은 아무 말도 안 하나?”다른 남자가 컵라면을 들고 다가와 말했다. “그러게. 성은이 형도 참, 여자를 너무 몰라...”소민아는 침대에 누워 한참을 울다가 저도 모르게 잠들어 버렸다.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오후였다. 휴대폰에 도착해 있는 수많은 문자 메시지와 전화를 확인하고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아빠 엄마가 왔어. 어디 있어? 민아야, 전화해. 너무 걱정돼.]아빠 엄마가 돌아오셨다고?소민아는 깊이 생각할 겨를도 없이 서둘러 아파트를 나섰다.그녀가 막 아래층으로 내려왔을 때, 빨간색 람보르기니 한 대가 그녀 옆에 멈춰 섰다. 창문이 천천히 내려가고, 송시아가 선글라스를 벗으며 말했다. “타, 동생.”소민아는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나는 당신 동생이 아니에요.”송시아가 말했다. “이미 소씨 집안에 이야기해 뒀으니까 그쪽 사람들도 내가 간다는 거 알고 있어. 지금 나 말고는 아무도 네가 여기에 있다는 걸 몰라. 지금 차에 타면 시간 낭비 없이 일찍 도착할 거야.”소민아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 나 감시하는 거예요?”송시아는 빙그레 웃기만 할 뿐 대답은 하지 않았다.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녀는 심지어 일부러 소민아를 유혹하듯 말했다. “차에 타면 기성은에 대해 알려줄게.”그 단 한마디에 소민아는 바로 조수석에 탔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예요!” 시선을 떨어뜨리니 약
“민아야, 난 기성은을 제거할 생각은 접었었어. 너 때문에 기성은을 살려두기로 했거든. 내 말을 못 믿겠다면, 영상도 있으니까 봐. 물론 기성은이 죽지 않았을 1퍼 센트의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어.”차가운 밤바람 속에서 소민아는 마치 얼음에 갇힌 듯한 기분이었다. 마치 지옥에 떨어진 것 같이 절망적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도저히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그 사람이 어떻게 죽을 수가 있어?분명히 약속했잖아, 꼭 돌아오겠다고. 그런데 왜 송시아의 입에서 폭발로 죽었다는 말이 나오는 걸까.전화기 너머 송시아는 아무런 대답도 듣지 못했다. 바닥에 무언가 쿵 떨어지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신이랑이 소민아를 찾아왔을 때, 그의 눈에 손에 휴대폰을 든 채 바닥에 쓰러져 있는 여자가 들어왔다.신이랑은 그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했다. 바닥에 떨어진 휴대폰을 주워 살펴보니 마지막으로 통화한 사람은 송시아였다.신이랑의 부드럽고 온화하던 눈빛이 순식간에 차갑게 가라앉았다.신이랑은 그녀의 몸에 이상이 생긴 건 아닌지 걱정되어 곧바로 병원으로 데려갔다.검사를 마친 뒤 간호사가 말했다. “축하드려요. 아내분께서 임신 6주 차예요. 아마 최근에 좀 피곤해서 쓰러지신 것 같아요. 그리고 저혈당 증세도 약간 있기는 하지만 다른 문제는 없으니까 집에 가서 몸에 좋은 음식을 챙겨주시면 돼요.”신이랑은 아직 침대에 누워 링거를 맞고 있는 소민아를 바라보며 물었다. “아이는 괜찮나요?”간호사가 말했다. “정확한 상태는 초음파 검사를 해야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냥 푹 쉬면 돼요. 아이에겐 별문제 없을 거예요.”신이랑의 눈동자에 어둠이 내려앉았다. “알겠습니다.”소민아가 눈을 떴을 땐 어느새 아침 7시 30분이었다. 생체 시계가 작동한 시간이었다. 그녀는 침대 옆에 엎드려 있는 사람을 보고는 아무 알 없이 그저 눈물만 하염없이 흘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베개는 눈물로 흥건히 젖어 들었다. 신이랑은 잡고 있던 소민아의
위층으로 돌아가자, 도우미가 방에서 나오며 말했다. “아가씨, 방은 이미 정리해 두었습니다.”“네.”도우미는 손님방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았다. 당연히 두 사람이 함께 잘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소민아는 방으로 들어가 침대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있는 방을 보고 입을 열었다.“이랑 씨...” .소민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신이랑이 말을 가로챘다. “괜찮아요. 난 바닥에서 자면 돼요.”소민아가 말했다. “제 말은 그게 아니라... 오늘 밤엔 이랑 씨가 이 방에서 자요. 난 현아 언니 방에서 자면 돼요.”소민아는 침대 옆으로 걸어가 자신이 항상 베고 자던 베개를 들었다. 그녀가 신이랑의 옆을 지나칠 때, 그의 입에서 살짝 섭섭한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민아 씨... 이제 나랑 같은 공간에 있는 것조차 싫은 거예요?”“아니에요, 이랑 씨. 그냥 이랑 씨가 바닥에서 자면 몸에 안 좋을까 봐 걱정돼서 그래요. 의사 선생님이 냉기를 쐬면 두통이 재발하니까 조심하라고 했잖아요.”신이랑은 부드러움으로 가득 차 있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알잖아요. 난 그런 거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걸요. 매일 밤 차가운 바닥에서 자도, 민아 씨와 함께 있을 수만 있다면 난 행복해요.”소민아는 베개를 안은 손에 꽉 힘을 주었다. 마음이 조금 약해지긴 했지만... 결국 거절했다. “이랑 씨, 저 아직은 적응이 안 돼서 그래요. 시간을 좀 줄 수 있어요?”신이랑은 잠시 침묵하더니, 작게 한 마디 내뱉었다. “그래요.”“고마...워요...”소민아는 어쩌다 보니 신이랑과의 결혼을 결정했고, 어느새 혼인신고까지 마쳤다.기성은과의 약속을 먼저 어기는 사람이 그녀 자신일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3년... 고작 얼마나 지났다고!소민아는 옆방 소현아의 방으로 간 뒤에도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한참을 뒤척이다가 침대 끝에 베개를 내려놓고, 발코니로 나가 밤하늘을 바라보았다.그녀는 갑자기 방향을 잃은 듯 방황했다. 앞으로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 너무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