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이 요동치자 장소월 복부의 상처가 다시 벌어졌다.너무 아팠다.그녀는 쓰러지지 않으려고 애써 참았다.장소월은 정신이 혼미해졌고 시선은 점점 흐릿해졌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그녀는 더 이상 그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문득, 장소월은 몸을 앞으로 숙였고 눈을 감고 있던 전연우가 무엇인가를 느낀 듯 눈을 갑자기 뜨고는 재빨리 한 손으로 그녀를 받았다.그녀의 몸에 손에 닿자마자 이상함을 감지했다. 그녀의 몸은 너무 뜨거웠다.전연우는 미간을 찌푸렸다.“병원까지 얼마나 걸려?”“방금 수리를 마친 길이라 지금 좀 막혀요. 최소 한 시간은 걸릴 것 같아요.”백윤서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고는 깜짝 놀랐다.“오빠, 소월이 피 엄청 많이 흘렸어요.”전연우는 그녀에게 양복 외투를 덮어주었다. 그녀가 입고 있었던 옅은 색의 옷은 이미 피로 물들어 있었다.‘이 지경인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차 세워. 기성은, 약상자 가져와.”기성은은 길가에 차를 세우고 재빨리 트렁크에서 약상자를 꺼냈다. 안에는 자주 사용하는 약들이 담겨 있었다.전연우는 장소월의 옷 단추를 풀고 옷자락을 걷어 올리고는 그녀의 복부에 있는 거즈를 바꿔서 한쪽에 버렸다.지혈처리를 해주었다.상처 처리를 마친 뒤, 장소월은 이미 완전히 기절했다.이러다간 출혈이 심해져 쇼크로 인해 죽게 될 것이다...백윤서는 백미러를 통해 뒤에서 발생하고 있는 일들을 보면서 치맛자락을 꽉 잡았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녀의 눈에서 알 수 없는 감정이 드러났다.길이 뚫린 후, 삼십 분도 지나지 않아 기성은은 빠르게 운전하여 강남 개인병원에 도착했다.장소월은 수술실로 들어갔고 기성은은 병원에 남아있었다. 전연우는 백윤서를 데려다주고 겸사겸사 회의 자료도 가지러 갔다. 이따 다시 회사에 돌아가서 회의도 해야 한다.백윤서는 문밖에 서 있었고 전연우는 서재 휴식실에서 샤워를 마치고 나왔다. 촉촉하게 젖은 머리에서 물방울이 떨어졌고 마른 수건으로 닦고 있었다.여느 때처럼 검
장소월이 망설임 없이 바다에 뛰어든 것은 확실히 그의 예상 밖이었다.다른 사람으로 변한 것 같은 장소월, 도대체 무엇이 그녀에게 이런 변화를 안겨 주었을까?아니면, 그녀가 무엇인가를 알게 된 걸까?그녀가 이 씨 집안을 반격할 때부터 전연우는 이상함을 감지했다.만약 정말 그렇다면, 그는 그녀를 남겨둘 수 없다.강씨 집안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기회는 더욱이 주지 않을 것이다.백윤서는 전연우가 자료를 챙겨서 떠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에게 그동안 도원 마을에 있었던 일에 대하여 조금도 묻지 않았다. 그가 이런 태도를 보일수록 백윤서는 전연우가 자신을 신경 쓰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전연우의 서재 테이블에서 사진 더미를 볼 때까지 말이다. 사진을 본 백윤서는 머리가 터질 듯이 아파졌다. 장소월이 장가네를 떠난 시간 동안, 전연우는 장소월에 대하여 결코 무관심한 태도가 아니라 오히려 사람을 붙여 그녀를 감시하였다.만약 장소월에게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았다면 전연우는 친히 도원마을로 오지 않았을 것이다.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전연우와 같이 크면서 힘든 일도 같이 겪었다. 그들은 서로 가장 친한 사이이고 유일한 가족이라고 할 수 있다.그녀가 해외에 있는 몇 년 동안, 백윤서는 전연우가 점점 낯선 존재가 되었고, 예전과 달라졌다는 걸 느꼈다.그녀는 그를 잃을까 봐 정말 두렵다.전연우는 회사로 돌아가 회의를 마치고 회의실을 나서자 기성은으로부터 걸려 온 전화를 받았다.기성은은 비용을 지불하고 손에 명세서를 들고 보고했다.“아가씨는 방금 수혈을 마쳤고 복부의 상처도 봉합했습니다. 그 외에 다른 내상은 없습니다. 하지만... 열이 39.8도까지 올라가 일주일간 입원해야 합니다.”그는 마음속으로 제발 그더러 남아서 장소월을 돌보라고 하지 말라고 기도하였다.그럴바에는 그는 죽음을 선택할 것이다.전연우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시간을 보니 오후 4시 30분이었다.“밤낮으로 돌봐줄 수 있는 간병인을 찾아.”“네.”전화를 끊은 후, 기성은은 자신이 뭔가
그의 눈빛은 마치 그녀를 잡아먹기라도 할 듯 사나웠다.장소월은 차마 그와 눈을 마주칠 수 없어 침대 한 켠에 앉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그녀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와 오빠의 보살핌 속에서만 살았다는 생각에 집 밖 세계도 한 번쯤은 경험해보고 싶었어요. 오빠... 죄송해요...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거예요. 다시는 성질을 부리지도 않을게요.”지금 전연우와 맞서는 건 현명한 선택이 아니다.전연우는 이미 26살인 데다 장해진은 일찍 퇴직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그가 확실히 회사를 물려받고 권력을 꿰찬다면 그녀는 도마 위의 생선이 되어 절대 그의 손아귀를 벗어날 수 없게 된다.그녀는 절대 전연우를 이길 수 없다. 장수월은 일찍 깨달았어야 했다. 장씨 가문에서 도망칠 수 없다면 집안의 말에 고분고분 따를 수밖에 없다는 걸 말이다.전연우와 결혼하지만 않는다면 전생의 비극은 시작되지 않을 것이다.“아빠는 저더러 대학을 졸업한 뒤 결혼하라고 하셨어요. 전 그 말씀에 따를 거예요. 하지만 결혼 상대에 대해선... 오빠, 남편감은 제 손으로 선택할 수 있도록 아빠를 설득해 주실 수 있어요? 불행한 결혼생활을 보내고 싶진 않아요.”전연우의 눈동자에 순간 어둠이 비쳤다. 이어 그는 이내 미소를 짓더니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소월아, 넌 아직 어려서 그런 것들은 생각할 필요 없어. 지금은 몸조리나 잘해. 앞으로의 일은 앞으로 다시 얘기하면 돼.”할 수만 있다면 장소월은 정말이지 그의 뺨에 힘껏 따귀를 날려버리고 싶었다. 그녀가 소리쳤다.“이 모든 상황은 다 오빠가 만든 거잖아요. 내 앞에서 뭣 하러 좋은 사람인 척하는 거예요? 내 계획은 모두 오빠로 인해 망가져 버렸단 말이에요.”어린 새가 겨우 날개를 얻었건만, 이제 그 어린 새는 마지막 털 하나까지 깡그리 뽑혀버렸다.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전연우 씨, 검사는 이미 마쳤습니다. 백윤서 씨는 괜찮으세요. 병원비만 지불하고 가면 될 것 같아요.”장소월의 눈에 간호
다음 날, 장소월의 체온은 내려가기는커녕 더 높이 치솟아 올랐다. 그녀의 맑은 눈에 진주 같은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그녀는 괴로움에 몸부림쳤다. 만약 간호사가 일찍 발견하지 않았다면 정신을 잃었을지도 모른다.기성은이 고용한 간병인은 오늘 점심에야 도착한다. 장소월을 보살피는 데에 익숙해진 오 아주머니는 이른 아침 그녀에게 깨끗이 세척한 옷을 가져다주러 병원에 도착했다. 힘들어하는 그녀의 모습에 오 아주머니는 몰래 눈물을 훔쳤다. 이럴 줄 알았다면 장소월을 그곳에 머물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이 아이는 어릴 적부터 고생이라는 건 모르고 자라지 않았던가. 오 아주머니는 후회를 금할 길이 없었다.링거를 맞고 나서야 체온이 조금 내려갔다.하지만 침대에 누워 있는 사람의 의식은 좀처럼 돌아오지 않았다.오 아주머니는 돌아가야 했기에 병원에서 줄곧 그녀를 보살펴 줄 수 없었다. 하여 조심해야 할 게 무엇인지, 어떤 음식을 먹어야 하고 어떤 음식을 피해야 하는지를 자세히 간병인에게 알려주었다.장소월은 하루 내내 잠을 자고 나서야 의식을 되찾았다.서른 살 남짓한 여자 간병인이 마 죽 한 그릇을 들고 들어와 장소월에게 먹였다.하지만 몇 입 먹지도 않았음에도 장소월은 돌연 위가 뒤집어지는 듯한 메슥거림에 먹은 것을 모두 토해냈다.죽에 넣고 함께 끓은 마가 채 익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간병인은 다급히 휴지통을 갖고 와 장소월의 입 쪽에 가져갔다. 손으로 등을 두드려주는 그녀의 얼굴엔 짜증스러움이 가득 섞여 있었다.장소월이 다 토해내자 간병인이 그녀에게 물 한 컵을 건넸다.“이 죽, 더 드실 거예요?”장소월이 기진맥진해져 창백해진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버리세요.”오 아주머니가 만들어 준 것 외 다른 음식은 쉬이 넘어가지 않는 그녀였다. 아마 위가 이미 익숙할 대로 익숙해져 다른 음식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다.그녀는 돌연 오 아주머니가 해준 쿠키가 먹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오 아주머니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오랫동안 그녀를
그 말은 장소월에게 크나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그녀가 임신을 못 했던 게 자궁 기형 때문이었단 말인가?장소월은 얼마나 전연우의 아이를 갖고 싶었는지 모른다. 아이만 생긴다면 그는 더는 다른 여자를 찾지 않을 테니 말이다.하지만... 아이가 그토록 어렵게 세상에 왔음에도 전연우는 장소월을 수술대에 눕히고 아이를 지워버렸다.전생에서 장소월은 차 사고로 인해 2주 동안 병상에 누워있었다. 몸을 회복한 후 검사를 받았고 그 검사결과는 전연우가 가져갔다.전연우는 왜 그녀에게 모두 다 정상이라고 알려줬을까?만약 전연우가 그녀에게 숨기지 않았다면 그녀는 일찌감치 병원에 가서 치료받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그녀가 품었던 아이가 죽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전연우의 속셈을 알아차리니 장소월은 손발이 얼음장같이 차가워졌고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그가 송시아와 결혼했던 건 후손을 원했던 게 아니었다.전연우가 갖고 싶었던 건... 오직 송시아와 낳은 아이였을 뿐이다.당시 그녀가 위암에 걸렸던 건 자궁암이 전이되었기 때문이다. 암을 발견했을 땐 이미 말기에 다다라 있었다.이제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전연우는 사실 모두 다 알고 있었다! 그녀가 암에 걸려 외롭고도 고통스럽게 병원에서 죽어갈 것이라는 것도 말이다.그녀가 죽는다고 해도 시체조차 관여하지 않을 것이다.그는 장소월이 죽기보다 못한 삶을 살며 시들어 가는 걸 지켜보고 싶었을 뿐이다.하여 전생의 결혼기념일 날, 전연우는 송시아와의 관계를 밝히고 두 사람의 아이까지 데려왔다.그녀에게 충격을 주기 위해서 말이다!전연우... 이 지독한 놈!정말이지... 너무나도 지독하다.전생의 매시간, 매 순간을 떠올릴 때마다 장소월은 심장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그때의 고통은 이번 생에서도 해소할 길이 없다.전생의 기억을 갖고 다시 태어나 살아가는 건 정말 죽는 것보다도 더 고통스럽다.마침 장소월의 병실을 지나가던 간호사가 가슴을 부여잡고 있는 장소월을 보고는 걱정되는 마음에 다가갔다.“장소월 씨, 왜
차라리 이렇게 고통 속에서 죽는 게 나을 것 같다!전생에서 그녀는 어리석어 전연우의 진짜 속셈을 알아채지 못했다.지금 이 시간, 자세히 되돌아볼 때마다 영원히 치유될 수 없는 상처가 더 깊게 새겨지는 것 같았다.눈에선 끊임없이 눈물이 흘러내렸지만 조금의 소리도 내지 않았다.그녀가 무표정하게 굳은 얼굴로 눈물을 닦아냈다.“괜찮아요. 조금 전 벌레가 눈에 들어가서요.”간호사는 이상하다는 듯 장소월을 쳐다보았다. 병원에 무슨 벌레가 있단 말인가?설마 미친 건 아니겠지!간호사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은 채 절반가량 남은 링거액을 보고는 속도를 늦추었다.간호사는 병실 문을 닫은 뒤 장소월의 주치의에게 달려가 그녀의 정신 상태를 알렸다.군림 공천 회관.여긴 80년대 때부터 운영해 오던 곳이었는데 여전히 8, 90년대의 인테리어를 유지하고 있었다.2층 룸, 건장한 체격의 남자가 커다란 창문을 통해 1층에서 노래를 하는 여자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여자는 꽃무늬 붉은 색 원피스를 입고 여우 털목도리를 두르고 있었다. 긴 파마머리에, 귀엔 반짝반짝 빛나는 귀걸이를 걸고 있었는데 조명이 비추니 그녀의 백옥같은 피부, 맑은 눈동자, 그리고 매끄럽고 눈부신 몸매가 환히 드러났다. 노래를 부르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강만옥이었다.소파 위엔 서철용이 짙게 화장을 덧칠하고 짧은 원피스를 입은 두 미녀를 양팔로 껴안고 앉아있었다. 그의 셔츠는 단추가 몇 개 풀어져 있었는데 가슴팍엔 여자의 빨간 립스틱 자국이 찍혀있었다.“네 동생 말이야. 내가 손을 쓰기도 전에 거의 미쳐가고 있대. 쯧... 너 정말 마음이 아프지도 않아?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내 수하가 매일 지켜봤는데 혼자 몰래 눈물만 흘린대. 그 말을 듣고 마음이 찢어지는 줄 알았다니까! 그토록 냉정하게 눈 하나 깜빡이지 않는 건 단연코 너밖에 없을 거야!”서철용이 여자가 먹여주는 포도를 먹고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너 잊었어? 난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라는 거. 모르면 입 다물어.”전연우가 손
“애초에 그 약은 네가 나한테 먹이라고 부탁한 거잖아. 장소월은 네 계획 중 일부분 아니야? 장소월을 무너뜨리고 장해진이 제 손으로 자신의 딸을 감옥에 보내는 모습을 지켜보겠다며. 만약 장소월의 재미를 보려는 거라만 내가 먼저...”서철용이 게걸스럽게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너만 괜찮다면 우리 둘이... 같이 해도 돼. 우린 친구잖아. 그런데 말이야... 난 지금까지 네가 여자 몸에 손대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너 설마 거기에 문제라도 있는 거야?”전연우가 차갑게 굳은 얼굴로 쏘아붙였다.“한마디만 더 하면 벙어리로 만들어 버릴 테니까 알아서 해.”서철용의 가는 뱀눈에 붉은 핏줄이 서렸고 피라도 물든 듯한 붉은 입술은 비열하게 위로 곡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그가 어깨를 들썩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왜? 싫어? 전연우, 너 이런 모습 처음이야!”“...”장소월을 떠올리니 전연우는 손에 움켜쥐었던 모래가 걷잡을 수 없이 유실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마음속 어딘가 커다란 구멍이 뚫렸고 어떻게 메워야 할지 알 길이 없었다.늘 어딘가 찝찝한 기분이었다.“10년이나 같이 있더니 정이라도 들었어? 우리 내기 하나 할까? 네가 장소월을 사랑하게 될지 아닐 지로 말이야. 네가 이기면 이 군림 공천 회관의 10퍼센트 주식을 넘겨주고 네가 언제든 수족으로 부릴 수 있는 부하가 될게.”전연우가 소파 위에 걸쳐놓은 정장 외투를 입은 다음 단추를 채우며 말했다.“심심해?”“왜? 무서워?”옷을 다 입은 전연우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를 쏘아보았다.“네 생각에 너와 장소월 중 누가 더 살아있을 가치가 높은 것 같아? 장소월을 건드리고 싶다면 마음대로 해. 하지만 장해진에게 걸리지 않는 게 좋을 거야. 걸리면 누가 더 비참하게 죽을지 너도 잘 알고 있겠지?”전연우가 말을 마친 뒤 걸음을 옮겼다. 한 발자국 한 발자국 걸을 때마다 살얼음 같은 분위기는 점점 더 사람으로 하여금 오금이 저려오게 만들었다.돌연 그가 문 앞에서 걸음을 멈춘 뒤 서철용을 보며
강만옥이 고개를 끄덕였다.“네.”장해진이 그녀의 가늘고 부드러운 다리를 쓰다듬으며 무언가 짚이는 게 있는 듯 말했다.“마음대로 하라고 해! 회사에서 대부분 일을 연우가 도맡아 하잖아. 가끔 나와 스트레스를 푸는 것도 괜찮지 뭐. 왜 갑자기 그놈한테 관심을 갖게 된 거야? 그 작은 머리로 무슨 생각을 하는 건데?”평소 의심이 많은 장해진의 질문에 강만옥이 조심스레 말했다.“전 그저 전연우도 이곳에 있다는 걸 알려드리고 싶었을 뿐이에요. 혹여 이후 회장님께서 알게 된다면 제 입장이 난처해질까 봐요. 제가 일부러 숨겼다고 오해하시면 어떻게 해요.”장해진이 그제야 찌푸렸던 이마를 폈다. 이어 그녀의 목을 확 끌어안고는 그 위에 진득하게 뽀뽀했다.“알았어! 내일 나랑 같이 쇼핑하러 갈래? 사고 싶은 거 있으면 다 사!”“두 사람 대체 뭐라 소곤거리는 거야? 우리가 들으면 안 되는 거라도 있어?”“얘기할 게 뭐가 있겠어. 침대 위 일이겠지!”“아가씨, 시간 있을 때 우리 해진이 몸보신 좀 시켜줘요.”마음속의 말을 장난으로 내뱉는 건 지극히 일반적인 일이다....복부의 상처에 딱지가 앉아 시도 때도 없이 느껴지는 간지러움 때문에 견딜 수가 없었다. 직접 손을 대 긁을 수도 없으니 장소월은 너무나도 괴로웠다.의사가 흉터가 남을 거라고 했으나 그녀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그녀는 침대에서 내려간 뒤 간병인을 보냈다. 이제 더 이상 다른 사람의 손길을 필요로 하지 않다는 생각에 말이다.저번 전연우가 한 번 다녀간 이후 오 아주머니 외에 아무도 그녀를 찾아오지 않았다.그들에게 있어 그녀는 아무런 소용도 없는 사람이다. 오 아주머니는 장소월이 바깥 음식을 입에 맞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늦은 시간 집에서 음식을 가져왔다.병원에 입원해 시간을 보내니 움직임 없이 가만히 누워있었음에도 살이 찌기는커녕 몇 킬로나 야위었다.누군가 병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창가에 앉아 책을 보던 장소월이 자리에 앉은 채 창밖을 쳐다보았다.“들어오세요.”문이 열리자 검
서철용 또한 한때는 모든 것이 돌이킬 수 없는 파국으로 치닫고 있다고 생각했기에, 그토록 서민용의 목숨에 집착했던 것이다.하지만 서민용의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버린 후, 장영우의 한마디가 그의 마음을 두드렸다.그동안 배은란은 이미 아이들과 깊은 정을 나누고 있었다.주로 서철용이 아이들을 돌보던 예전과는 달랐다. 당시의 배은란은 아이들에게 무관심했고 애정 또한 별로 없었다.하지만 그가 떠난 후 아이들은 배은란의 손에 맡겨졌다.그가 아이들을 데리고 나갔다가 돌아왔을 때, 걱정과 초조함에 어쩔 줄 몰라 하던 그녀의 모습은 거짓이 아니었다.서철용이 떠나면 아이들을 맡아줄 사람이 없기에 배은란은 그들을 위해 남을 수밖에 없다.서철용 또한 감히 그런 위험한 모험을 시도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가 눈을 떴을 때는 이미 해외로 향하는 비행기 안이었다. 장영우가 독단으로 그를 비행기에 실은 뒤에야 통보했던 것이다.지난 2년간 해외에서 그는 그녀와 아이들의 걱정에 마음이 타들어 가는 듯했다. 그래도 다행히 장영우가 꾸준히 배은란과 아이들의 근황을 알려주었기에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다.“이젠 배은란 나한테 맡겨. 내가 잘 보살필게. 하지만 그 여자가 너 그리워하고 있으니까 가끔씩 꿈에 보러 가줘. 또 그 토끼 인형처럼 눈이 새빨개지도록 우는 건 보고 싶지 않으니까.”서철용은 후련한 듯 묘비에 새겨진 얼굴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네가 나보다도 더 그 여자가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바랄 거라고 믿어.”몸을 돌려 떠나려던 찰나, 언제부터 뒤에 서 있었는지 모를 그녀가 눈에 들어왔다. 서철용은 난처한 얼굴로 내디뎠던 발을 다시 거두어들였다.“은란아, 언제 왔어?”배은란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동자엔 아직 당황한 기색이 남아있었지만, 이내 감정을 감추고 그를 지나쳐 묘비 앞으로 걸어갔다.“민용 씨는 당신 보고 싶어 하지 않을 거야. 다시는 오지 마.”소망이가 머리핀을 떨어뜨렸다며 다시 가지러 가겠다고 떼를 썼었다. 배은란은 아이들을 멀리서 기다리게 하
3년 후.서민용의 무덤 앞.배은란은 그의 묘비를 조심스럽게 쓰다듬고 있었다.“미안해, 민용 씨. 나 약속 못 지켰어. 민용 씨는 이미 떠났겠지? 떠나기 전에 나 원망 안 했어? 하지만... 나도 어쩔 수가 없었어.”3년 전, 그녀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서민용을 따라가려고 했었다.다른 데엔 아무런 미련도 없었지만, 죄 없는 두 아이를 차마 혼자 남겨둘 수가 없었다.배은란은 처음에 아이들을 서철용에게 맡길 생각이었다. 어쨌든 아이들은 서철용의 핏줄인 데다 그를 많이 따르기도 했으니 말이다.하지만 그녀는 병원에 갔다가 서철용이 해외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중이라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두 아이를 보낼 곳이 없어졌다.서철용은 서씨 집안 친자식이 아니다. 때문에 그 사람들이 아이들을 키워줄 리 만무했다.더 정확히 말하자면, 서씨 집안은 이 두 아이를 증오하기도 모자랄 것이다.어린 두 아이가 마음에 걸린 배은란은 어쩔 수 없이 이곳에 남아 하루하루 정성껏 돌봐주었다. 틈틈이 병원에 가서 서철용이 돌아왔는지도 확인했다.그렇게 눈 깜짝할 사이에 3년이 흘렀지만, 서철용에게선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그동안 아이들은 점점 더 철이 들어갔다.“엄마, 아빠 옛날에 이렇게 생겼었어요?”소망이가 묘비에 붙어 있는 사진을 가리키며 물었다.배은란은 한동안 침묵하다가 마침내 고개를 저었다. “얘들아, 이분은 너희 아빠가 아니야. 하지만 엄마가 사랑했던 사람이란다... 너희는...”그녀는 아이들에게 서민용을 어떻게 부르라고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그 호칭이 무엇이든 서민용이 싫어할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었다.“아저씨, 저 기억나요!”소망이의 눈이 반짝였다. “예전에 오빠랑 저와 자주 놀아주셨어요!”배은란은 목이 메었다. 아이가 서민용을 서철용과 헷갈려 하고 있는 것이다.소원이는 옆에서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하지만 제가 기억하는 아저씨는 저렇게 안 생겼는데...”“아니야! 저 얼굴 맞아! 내가 분명히 봤어! 어제도 꿈에 나왔는데 엄마 잘 돌봐주라고 하
“대체 무슨 일이야! 서 선생님, 미쳤어요? 손 앞으로 안 쓸 거예요?!”배은란은 복도에 서서 안에서 벌어지는 소동을 듣고 있었다. 간간이 서철용의 분노에 찬 고함 소리도 들려왔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소리는 절망적인 흐느낌으로 변해갔다.이젠 가망이 없다는 것을 배은란도 느낄 수 있었다.그녀의 눈에서 빛이 조금씩 꺼져갔다. 그녀는 맥없이 터덜터덜 응급실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민용 씨...”그녀의 눈동자엔 온통 싸늘하게 식어버린 서민용의 모습만 가득 차 있었다.저기에 누워있는 사람이 정말 서민용이란 말인가?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그 사람은 분명...배은란의 시야가 점점 흐릿해져 갔다.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그녀는 곧바로 손을 들어 서둘러 눈물을 닦아냈다.울면 안 된다. 서민용은 그녀가 우는 걸 싫어하기에 그에게 이런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다.방 안에서 전해져오는 흐느낌 소리에 배은란은 얼이 빠진 듯한 얼굴로 그곳을 바라보았다.서철용은 장영우와 남자 간호사에게 붙들린 채 끌려 나오고 있었다.그녀와 시선이 마주친 순간, 격렬하게 몸부림치던 서철용의 몸짓이 멈추었다. 그의 눈에는 절망만이 가득했다.서민용의 장례식은 간소하게 치러졌다.먹구름이 하늘을 덮친 우중충한 날, 배은란은 두 아이를 데리고 조용히 그를 묻었다.“민용 씨, 기다려. 곧 당신 찾아갈게.”납골당에서 나오던 중, 갑자기 바람이 불어오더니 꽃잎 하나가 그녀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배은란은 발걸음을 멈추고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엄마, 우세요?”소원이가 그녀를 바라보았다.배은란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냥... 눈에 먼지가 들어가서 그래.”소원이는 그녀를 한참 동안 빤히 쳐다보았다.엄마는 분명 울고 있으면서 왜 인정하지 않는 걸까?“소원아, 소망아, 너희들 철용 삼촌 좋아해?”배은란은 마음속의 죄책감을 억누르며 아이들에게 물었다.두 아이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해요. 엄마 다음으로 삼촌이 제일 좋아요.”
“이미 호흡이 멈췄습니다.”장영우는 비교적 침착하게 서민용의 상태를 확인했다.전신 마비인 몸으로 손가락 하나밖에 움직일 수 없는 사람이 대체 얼마나 독한 마음을 먹었으면 자신의 목을 졸라 자살할 수 있었겠는가.어쩌면 이런 극단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마지막 자존심을 지킨 것일 수도 있다.그 말에 배은란은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몸부림치며 울음을 터뜨렸다.“응급실로 옮겨서 CPR 시행해!”서철용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지시했다.장영우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서 선생님, 고인의 뜻도 존중해 주셔야 합니다. 더 이상 괴롭히지 마세요.”옆에 늘어뜨린 서철용의 손에 시퍼런 핏줄이 솟아올랐다.“CPR 준비하라고 했어! 지금 바로 시작해!”그는 자신의 허락 없이는 누구도 서민용의 목숨을 거두어 갈 수 없다고 분명히 말했었다!서민용 자신조차도 안 된다!서철용은 몸을 돌려 빠르게 걸어 나갔다.아직 깁스를 하고 있는 그의 왼손과 흐느껴 울고 있는 배은란을 번갈아 보며, 장영우는 고개를 저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미쳤어, 하나같이 다 미쳤어.’“장 선생님...” 간호사가 망설이며 그의 의견을 물었다.장영우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서 선생님 말씀대로 해.”시도라도 해보지 않는다면, 이 두 사람은 영원히 서민용을 놓을 수 없을 것이다.“보호자분, 부디 힘내세요.”장영우는 병실을 나서며 배은란의 등을 다독이며 위로했다.응급실 빨간 등은 꼬박 한 시간 동안 켜져 있었다.배은란은 온몸을 바들바들 떨며 복도에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문이 열리는 순간, 그녀는 즉시 일어나 달려갔다. 저번처럼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났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을 거라 기대하면서 말이다.하지만 장영우는 난처함이 가득한 표정으로 그녀를 향해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보호자분, 들어가서 서 선생님 좀 말려 주세요. 선생님을 말릴 수 있는 분은 보호자분밖에 없습니다.”배은란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한순간 절망감에 숨이 막혀 질식할 것만 같았다.너무나도 안타까운 모
장영우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서철용의 깁스에 물이 닿아 흐물흐물해진 탓에 어쩔 수 없이 다시 깁스를 해야 했다.다행히 두 사람은 모두 의사다. 장영우는 그 자리에서 직접 빠르게 서철용의 팔을 고정해 주었다.“서민용은 회복 잘하고 있어? 수술은 언제쯤 할 수 있을 것 같아?”장영우가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빨리 돌아가시고 싶으세요?”서철용은 전혀 개의치 않는 듯했다.“갑자기 죽는 것보단 죽을 날 미리 알아두는 게 낫잖아.”장영우가 대답했다.“안심하세요. 살 시간 많을 것 같아요.”서철용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썹을 치켜올렸다.“배은란 씨가 간병인까지 고용해 지극정성으로 보살피고 있는데도 서민용 씨의 수치는 날이 갈수록 나빠지고 있습니다. 정말 삶에 대한 의지가 없는 것 같습니다. 검사 결과를 보니까 식사는 하지 않고, 영양제로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있더라고요. 이런 식으로 하다가는 몇 달이 걸릴지, 몇 년이 걸릴지 알 수 없습니다.”그 말에 서철용의 미간이 약간 찌푸려졌다.장영우는 말을 이어갔다.“그 사람은 이미 살겠다는 의지를 상실했습니다. 선생님께서 심장을 주신다고 해도 얼마 지나지 않아 죽고 말 겁니다. 다 아시면서 왜 그렇게 고집을 부리시는 겁니까? 계속 이러시면 선생님에게도, 배은란 씨에게도, 또 서민용 씨에게도 그저 고통만 안겨줄 뿐입니다.”정영우는 세 사람의 상황을 가장 객관적이고도 구체적으로 지켜본 사람이었다. 그 역시 서민용에게 연민을 느끼고 있었다.서철용은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리며 고개를 들고 지시했다. “이틀 더 지켜봐. 계속 음식 거부하면 코로 주입해.”서민용의 목숨은 그가 허락하지 않는 한, 그 누구도 거두어갈 수 없다.서민용 본인조차도 안 되는 일이다.장영우가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환자분은 의식을 갖고 계신데, 그렇게 하면...”서철용의 얼음장같이 차가운 눈빛에 장영우는 뒷말을 채 잇지 못했다.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사무실 문 앞에서 급박한 발소리가
서철용의 몸엔 아직 물기가 남아 있었다. 하반신에 간단히 수건 한 장만 두른 상태였다. 자세 때문인지 멀리서 보면 서철용이 배은란을 품에 안고 있는 것 같았다.배은란의 얼굴엔 긴장감이 역력했다. 그녀는 자리에 굳어 선 채 숨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했다.그녀는 이미 서철용의 알몸을 수차례 보았었고, 심지어 더 친밀한 행동도 함께 했었다.하지만 그땐 어쩔 수 없었다.지금 이런 모습을 보고 있으니... 어제 서민용이 자신의 손바닥에 한 획 한 획 써 내려갔던 글자가 떠올랐다. 그녀의 온몸에선 서철용에 대한 경계심이 감돌고 있었다.“장영우 선생인 줄 알았어. 가져올 필요 없어. 나 다 씻었어.”아침은 남자의 성욕이 가장 왕성해지는 시간이다. 배은란의 향기를 맡으니 저도 모르게 몸이 반응했다. 그는 황급히 뒤로 물러서서 휴게실로 돌아가 가운을 걸쳐 입고 나서야 다시 사무실에 나왔다.배은란은 책상 옆에 서 있었다.“무슨 일로 왔어?”서철용은 이마를 짚으며 약간 잠긴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배은란은 약간 발그스름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민용 씨 죽 끓일 때 겸사겸사 갈비탕도 좀 끓였어. 당신 상처에 좋을 것 같아서.”서철용은 그제야 책상 위에 놓인 도시락통 두 개를 발견했다.하나는 그의 갈비탕, 다른 하나는 당연히 서민용의 것이었다.“겸사겸사라...” 그는 입꼬리를 비틀며 말했다.“알았어. 안심해. 오해하지 않을게. 넌 그저 내가 너 때문에 다친 게 마음에 걸릴 뿐이겠지.”그 말은 오히려 배은란에게 더욱 선명하게 상기시켜 주었다.“당신 상처...”조금 전 듣기론 상처에 물이 닿은 것 같았다. 지금은 서철용이 가운을 입고 있어 확인하기 어려웠다.“안 죽어. 나 의사잖아. 내가 알아서 해.” 서철용은 아래턱을 쳐들고 말했다. “근데 움직이는 건 좀 불편해. 국 좀 따라줘.”배은란은 국을 따른 뒤, 서민용을 오랫동안 간호해왔던 습관대로 저도 모르게 숟가락을 들고 그에게 먹여주려고 했다. 하지만 다행히 곧
“민용 씨, 미안해. 내가... 오늘 좀 일이 있어서 늦었어.”배은란은 침대 머리맡에 놓인 죽 그릇을 들고 조심스럽게 그에게 먹여주었다.“오늘 밸런타인데이래. 이런 날 일찍 와서 당신과 함께 보냈어야 했는데, 전부 내 잘못이야. 몇 시간 뒤면 밸런타인데이 지나가. 나한테 말 좀 해줄래?”배은란은 그가 자신과 소통할 수 있도록 한 손을 그의 손 옆에 가져갔다.서민용은 손가락 끝으로 한 글자 한 글자 써 내려갔다.[괜찮아.]배은란의 손가락이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살짝 움츠러들었다. 그녀는 몇 초 동안 서민용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당황한 듯 재빨리 다른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민용 씨, 뭐라도 좀 먹어. 당신 몸 회복되면 내년에는 우리 같이...”서민용은 평소 같지 않게 식사에 협조적인 모습을 보였다.죽 한 그릇이 바닥을 보이자 배은란은 너무 기뻐 눈물까지 흘릴 뻔했다.“민용 씨, 당신도 빨리 낫고 싶은 거지? 나도 알아. 지금은 많이 힘들겠지만... 곧 괜찮아질 거야. 정말이야...”배은란의 목소리가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떨려왔다.서민용의 정서에 영향을 끼치고 싶지 않아, 그녀는 억지로 이를 악물고 눈물을 참아냈다. 이후 마음이 진정되자 미소를 지으며 최근 있었던 소소한 일상들을 그에게 이야기해주었다.서민용은 따뜻하고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없이 모두 들어주었다.밤이 깊어졌다. 배은란은 병실에서 그와 함께 밤을 보내고 싶었다.하지만 서민용은 그녀에게 돌아가라고 했다.배은란은 잠시 생각하다가 결국 그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서민용은 이제야 간신히 음식을 먹으려 하고 있다. 그녀가 직접 죽을 끓여주면 좀 더 많이 먹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별장으로 돌아온 배은란은 잠이 든 지 두세 시간 만에 일어나 죽을 끓이기 시작했다. 좁쌀에 으깬 호박을 넣고 약한 불로 천천히 끓였다.냉장고에는 며칠 전에 사놓은 갈비와 옥수수도 조금 남아 있었다. 배은란은 그것들을 모두 꺼내 갈비탕을 끓였다.자신 때문에 다친 서철용을 나 몰라라 할 수는
병원으로 향하는 길, 배은란의 시선은 줄곧 그의 팔에 고정되어 있었다.서철용은 감각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심하게 다쳤지만, 그녀의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니 마음속으로 얄팍한 욕심이 피어올랐다.그녀는 그를 걱정하는 걸까, 아니면 서민용의 수술을 앞두고 있는 그의 팔을 걱정하고 있는 걸까?아마 후자일 것이다.그를 미워할 시간도 모자랄 테니 말이다.병원에 도착하여 치료를 마친 후, 배은란은 긴장한 얼굴로 의사에게 물었다. “얼마나 지나야 회복될까요? 이 사람 의사인데, 나중에 팔을 쓰는 데 지장이 있지 않을까요?”“관리만 잘하면 두 달 안에 거의 완전히 회복될 수 있고, 의사 생활에 별문제는 없을 겁니다.” 의사가 설명했다.그 말에 배은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네요. 감사합니다.”서철용은 팔에 깁스를 한 채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의 옆에 서 있었다.병원을 나서는 길에서도 여전히 수심에 가득 찬 얼굴을 하고 있는 배은란을 본 그는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안심해. 이 팔 못 쓰게 된다고 해도 서민용에게는 아무 일 없을 거야.”배은란은 멍하니 있다가 고개를 들어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당신은 내 머릿속에 민용 씨 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녀가 약간 화가 난 듯 물었다.서철용이 되물었다. “그럼 아니야?”서민용 때문이 아니었다면, 그녀는 서철용을 쳐다보기라도 했을까?“아직 이른 시간이니까 지금 돌아가면 서민용이랑 저녁밥 먹을 시간은 충분하겠네. 밸런타인데이라 더욱 같이 있어 주고 싶었을 텐데 잘됐어.”서철용이 비웃음 섞인 어조로 말했다.차는 보험 회사에 견인되어 갔고, 두 사람은 길가에서 택시를 잡았다.배은란은 입술을 앙다문 채 그의 깁스한 왼손을 바라보았다.“난 단순히 당신 상처 걱정하면 안 되는 거야?”서철용은 분명 그녀를 구하려다 다친 것이다. 그것도 정말 절체절명의 순간에 말이다.방금 전 그 장면을 떠올리자, 배은란은 또다시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듯했다.서철용은 고개를 돌려 꿰뚫어 보듯 그녀를
배은란이 시큰둥한 표정으로 말했다. “토끼가 왜? 귀엽기만 하잖아.”서민용은 웃으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자기더러 귀엽다고 말하는 사람은 처음 보네.”배은란은 너무 당황해 귀까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서민용은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확실히 귀엽긴 해. 울지 않을 때는 토끼보다 더 귀여워.”배은란은 얼른 화제를 돌리고 싶어 새빨개진 얼굴로 인형 가격을 물었다.서민용은 잠시 생각하더니 모른다고 말했다.당시 그녀는 서민용의 다정함에 푹 빠져 자세한 상황은 알지 못했다.하지만 방금 서철용이 했던 말...그때 그 인형 서철용이 샀었나?그렇다면 왜 서민용이 그녀에게 전해준 걸까?그녀는 서철용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몇 번이나 묻고 싶었지만, 결국 의미 없다는 생각에 말을 삼켰다.쇼핑몰에서 반나절을 보낸 후 해가 저물어갈 무렵이 되어서야 서철용은 차를 몰고 그녀를 병원에 데려다주었다.“서민용 이제 말은 해?”돌아가는 길, 서철용이 갑자기 물었다.그는 줄곧 배은란에게 관심을 두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러다 보니 서민용의 상태에도 관심을 끊고 모두 장 선생에게 일임했다.배은란은 잠시 멈칫하다가 고개를 저었다.“말도 못 하는 사람이 어지간히 속을 썩였나 보네. 왜, 그놈이 너 무시했어?”서철용은 제멋대로 추측하며 서민용에 대한 불만을 쏟아냈다.“그놈 복에 겨웠네. 누군 아무리 원해도 같이 있지 못하는데, 고마운 줄도 모르고.”“조만간 내가 그놈 옆에 누워 있으면, 너희 둘...”분명 내 염장 지르겠지?서철용은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듯 미간을 찌푸리고 다시 말을 삼켰다.배은란은 예민한 촉으로 무언가 감지했다.“무슨 말이야?”그가 서민용 옆에 눕는다니?다소 앞뒤가 맞지 않는 그의 말에 배은란은 어리둥절했다. 하지만 서철용의 반응에 짜증이 밀려왔다.서철용은 입꼬리를 비틀며 말했다. “농담한 거야. 몰라서 그래? 내가 매일 서민용을 질투하느라 미칠 지경이라는 거.”그 말은 성공적으로 배은란의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배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