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말에 성연신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이 돈 가지고 남은 생 행복하게 보내. 네가 레오를 위해 한 희생이 너무 많아. 이제 편히 쉬면서 즐겨.”소민정이 루갈에서의 지위는 원로급이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그의 공로는 최고의 존경을 받을 만했다.그리고 루갈의 현재 의료 수준은 거의 완벽했기에 소민정이 있으나 없으나 크게 상관없었다.“싫어요. 전 계속 루갈에 남아 있을 거예요. 절 미워하지 마요. 제발...”소민정이 눈물을 쏟아내며 측은하게 성연신의 팔을 끌어안았다. 그녀의 용모는 임시연이나 심지안처럼 아름답지는 않았으나 평범한 집안의 예쁜 딸처럼 친밀감을 주었다.성연신은 아무렇지 않게 그녀의 손을 뗐다.“미워하는 게 아니야.”“그럼 왜 쫓아내려고 하는 건데요?”“조기 퇴직이라 생각해. 이제 미용도 하고 영화도 보고, 좋은 사람 만나서 가정도 이뤄야지. 어떻게 되든 여기에 있는 것보단 나을 거야.”루갈의 99%는 모두 남자였다. 여자인 그녀가 혼자 남자 소굴에 있는 것도 부적절한 일이었다.“아니요. 가고 싶지 않아요. 쫓아내지만 말아 주세요...”소민정은 빨개진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울먹였다.“남아서 청소하라고 해도 괜찮아요.”“저 고아예요. 가족도 친구도 없다고요. 오빠만이 유일한 가족이었는데.”“루갈을 떠나면 소속감도 없이 제가 어떻게 살아요. 돈이 많아도 마음이 공허할 텐데.”성연신은 눈앞에서 울음을 터뜨리는 여자아이를 바라보며 안철수와 그녀의 처지가 똑같다는 것을 떠올렸다. 두 사람 모두 보육원에서 나온 사람들이었다.그러나 잠시 생각하고는 카드를 소민정의 손에 쥐여주었다.“너 스스로 결정해. 미리 말해두지만 남는다 해도 루갈의 모든 외출 임무에는 참가할 수 없어.”“좋아요. 약속할게요. 오빠.”소민정의 얼굴이 한결 밝아졌다. 그녀는 눈물을 쓱쓱 닦고는 그를 향해 환하게 웃어 보였다.성연신은 더 이상 할 말이 없어 간단히 몇 마디 하고는 자리를 떠났다.몇 걸음 걸어 나왔을 때, 심지안의 메시지가 왔다.[민수 씨 당신 편
그러나 인턴은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전 대표님이 정말 좋아요. 그냥 제 소원 한 번 이뤄준다 치고 비서님 밑으로 옮겨주면 안 될까요? 기회는 제가 직접 쟁취할게요!”성연신은 정말이지 인턴 마음속에서는 백마 탄 왕자님이었다. 비록 둘 사이에 큰 간극이 있긴 해도 시도하지 않고 어떻게 결과를 알겠는가?정욱은 더 이상 인내하지 못하고 따끔하게 한마디 했다.“마지막으로 경고합니다. 두 번 다시 제 앞에서 이런 말 하지 마세요. 회사가 당신을 고용한 것은 일을 하기 위해서이지 상사나 꼬시라고 고용한 것이 아닙니다. 앞으로 또다시 이런 일이 생기면 바로 해고합니다.”인턴은 체면이 서지 않아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얼굴이 붉게 상기된 채 그녀는 고작 비서 따위가 나댄다며 혼잣말로 불평했다.그러나 그녀는 더 이상 정욱을 귀찮게 하지 못했고 풀이 죽어 자리로 돌아갔다.다른 일에 신경이 쏠린 정욱은 이 일을 마음에 두지 않았다. 사무실 문을 두드리고 성연신의 동의를 받은 후에 그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대표님, 한 가지 여쭈고 싶은 게 있습니다.”정욱의 얼굴이 미세하게 구겨졌다. 업무보고를 하려는 것 같지 않았다.성연신이 잠시 하던 일을 내려놓고 그를 올려다보았다.“심지안 씨와 진유진 씨 혹시 어디서괴롭힘당한 거 아닐까요?”정욱이 핸드폰을 꺼내 보여주었고 스크린 속에는 그 몇 명 인플루언서에 대한 기사가 있었다.성연신이 웃음을 터뜨리며 농담했다.“심지안이 걱정되는 거야? 아니면 진유진이 걱정되는 거야?”“제가 어떻게 감히 심지안 씨를 신경 쓰겠어요.”정욱이 황급히 고개를 저으며 부인했다.“그럼 유진이 신경 쓰는 거네. 심지안은 겸사겸사말해 본 거고??”“대표님, 그게 아니라요. 심지안 씨의 안위도 당연히 중요하죠.”난처해진 정욱이 어색하게 해명했다.“진유진 씨는 괜찮습니다.”성연신이 담담히 알려주었다.그 말을 듣고서야 정욱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여전히 마음 놓이지 않은 듯 물었다.“그럼 왜 몸에 상처가 있는
정욱은 대학 시절이 마지막 연애였다. 이미 몇 년이나 지났으니 사랑이 어떤 감정이었던지 잊은 지 오래다.하지만 사랑이 싫다는 건 아니었다.일의 영향을 받은 건지 그는 능률을 따지기 시작했다. 그러니 마음이 있으면 솔직히 말해도 괜찮을 것이다.그는 태연한 표정을 지었고 오히려 진유진이 부끄러워 안절부절못하기 시작했다.“너무 갑작스러운데요...”“당장 대답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냥 제 마음 알려드린 거니까요.”“푹 쉬어요. 전 먼저 가보겠습니다.”“다음에 또 질 나쁜 사람들 마주치면 저한테 전화해요.”비록 대표님처럼 대단하진 않았지만 그도 좋아하는 사람이 괴롭힘당하게 두진 않을 것이다.“그... 언제부터 좋아하게 된 거예요?”“저도 잘 모르겠지만 전부터 호감 있었어요.”나중에 심지안이 외국으로 떠난 후 자연스레 진유진도 그와 연락을 끊었지만 정욱은 그녀를 잊지 못했고 항상 그녀를 떠올렸다.진유진은 억지로 손에 들려진 보양식을 보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비록 나이는 적지 않았고 잘생긴 사람을 원해지만, 이 사람은 그 성씨 자식의 비서인데...정욱이 떠나자 진유진은 사람이 없는 곳을 찾아 이 놀라운 소식을 얼른 심지안에게 알려주었다.심지안은 일찍이 예상하긴 했으나 이렇게 빠르게 행동에 옮길 줄은 몰랐다.그녀는 팩을 하며 슬쩍 물었다.“그럼 넌 어떡할 거야. 받아줄 거야?”솔직히 말하자면 정욱의 조건은 매우 좋았다.단정한 생김새에 직장이 안정적이며 성격도 좋았다.다른 비도덕적인 일에 관심도 없었고 이성과의 교제도 깔끔했다.차도 있고 집도 있었다. 이 조건만으로 이미 80% 이상의 남자는 이길 수 있었다.“에이. 나 정욱 씨한테 아무 감정 없어.”“오호.”그녀의 대답에도 심지안은 놀라지 않았다. 심지안은 그녀를 잘 알고 있다.심지안이 잠시 말을 멈추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부모님 때문에?”진유진이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대답했다.“그렇지. 난 사랑도, 가정도 갈망하지만... 동생을 목숨처럼 아끼는 부모님은 내가 싱글이면 많아
회의실에서 돌아온 성연신은 정욱의 사무실을 지나다 무심코 풀이 죽은 채 책상에 엎드려 늘어져 있는 정욱을 발견했다.“고백에 실패한 건가?”양손을 호주머니에 넣은 채 그가 비아냥거렸다.“...어떻게 아셨어요?”“이마에 떡하니 쓰여 있고만.”정욱이 자기 이마를 문지르며 물었다.“네?”“‘실패자’라고.”정욱이 쓴웃음을 지었다.“사람 속 그만 긁어요.”진유진이 거절할 것은 예상했지만 이렇게 빨리 대답이 올 줄은 몰랐다.조금의 지체도 없이 바로 문자로 하는 답장이라니.“제경에 집 있어?”“없습니다. 저 금관성에서 집 샀는데요.”“차는?”“그냥 한 대가 있긴 한데요...”“얼마짜리?”“1억쯤...”성연신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네가 그렇게 가난해?”진유진과 심지안은 절친이다. 성연신이 자신의 조건으로 정욱의 조건과 비교한다면 당연히 만족할 수 없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자신이 얼마나 잘난 사람인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정욱이 점점 자신을 의심하기 시작했다.“가... 가난한가요?”1억짜리 차는 부자라고는 할 수 없어도 가난과는 거리가 먼 액수였다.“순남 쪽에 내 별장이 있어. 내일 네 걸로 명의를 바꿔주도록 하지. 차는 10억 이상으로 사고 나한테 청구해.”정욱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대표님께서 주신다고요?”“뭐야, 싫어?”“아니요! 절대.”정욱은 차마 양심을 속일 수 없었다. 사 주겠다는데 거절하는 것은 바보나 하는 짓이다.순남은 제경에서도 황금 지역에 속한다. 쇼핑몰에 간다 쳐도 지하철은 어디든 있었고 학세권이기에 아이가 학교로 등교하거나 하교하기에도 편했다.“그래. 유진 씨는 제경에서 출퇴근하는데 네 집은 금관성이니 확실히 불편한 게 많을 거야. 나중에 집문서에 유진 씨 이름도 써넣어도 돼.”“그러니까 대표님 말씀은, 유진 씨가 절 거절한 원인이 제경에 집이 없어서라는 거예요?”성연신이 차갑게 대답했다.“그럼 너랑 월세로 집 찾아서 살겠어?”곰곰이 생각해 본 정욱은 일리가 있는 것 같아 고개
심지안은 임시연에게 아이가 있다는 사실을 안 후의 변석환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너무 궁금했다.그래도 참고 보듬어줄 것인가, 아니면 모질게 버릴 것인가.그녀는 심지어 기대되기까지 했다.성연신: [그래요. 아직 안 자는 거예요?]심지안이 하품을 하고는 답장을 보냈다.[금방 자려고요.]성연신: [청민 씨는 계속 성씨 가문에 있어요? 다른 이상한 기미는 없고요?]심지안: [네. 그건 왜 물어보는 거예요?]성연신은 헐렁한 흰색 가운을 입고 침대 머리맡에 반쯤 기대어 있었다.흠잡을 데 없이 잘생긴 얼굴을 따라 물방울이 또르르 떨어졌고 그 아래로는 탄탄한 복근이 눈에 뜨인다.그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왜 물어보긴, 조금이라도 더 대화하려고 물어보는 거지.만일 우주가 자신의 아버지가 몰래 이렇게 공부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필히 경멸할 것이다.‘흥. 애당초 자신의 책을 깔보던 사람이 누구던가?’성연신이 답장했다.[지안 씨가 괴롭힘이라도 당할까 봐 걱정하는 거죠.]시큰둥한 표정의 얼굴을 마주하지 않은 탓인지 심지안은 문자의 내용이 따뜻하다고 느껴졌다. 그녀 얼굴에도 만족스러운 웃음이 피어올랐다.그녀는 베개를 등 뒤에 깔고는 계속 타자했다.[할아버지께서 사당에 가두고 반성하라 하셨어요. 이 며칠간은 사람들 눈에 뜨이지 않을 거예요.]성연신이 눈을 가늘게 떴다. 무언가 심상치 않았다.[청민 씨가 저항하지 않았다고요? 그대로 가두게 뒀다고요?]심지안이 그의 의중을 이해하지 못하고 대답했다.[네. 청민 씨가 그래도 할아버지에 대해서는 항상 존경해 왔어요. 게다가 할아버지께서 사당에 가두었을 뿐이지 성씨 가문에서 쫓아낸 것도 아니에요. 그래도 마음이 약해진 거겠죠.]고청민을 떠올리는 성연신이 경멸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할아버지께서 고청민에게 아무리 인자하게 굴어도 고청민이 정말 감사해할지는 모르는 일이다.심지안은 고청민이 최근 별다른 낌새가 보이지 않는다고 하나, 자신이 보기에는 불가능한 일이었다.그는 내일 심지안을 만나면 고청민을 더
그 말을 전해 들은 심지안은 마음이 삽시에 따뜻해졌다. 그녀는 김민수에 대한 의심은 모두 잊고 얼굴에 행복한 웃음을 띄웠다.“좋네요. 그럼 이제 제 안전은 다 우주한테 맡기면 되겠어요. 이제 남은 생 행복할 일만 남았네요.”“어린아이한테 어떻게 다 맡기겠어요.”성연신이 사뭇 진지한 태도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저한테 의지해야죠. 제가 지안 씨 남잔데.”심지안이 그를 흘겨보았다.“착각하지 마요. 우린 그냥 친구 사이예요.”우주만 아니었다면 자신은 그를 거들떠 보지도, 상대하지도 않았을 것이다.“친구 사이라면서 돌담집에서 저랑 잔 거예요?”상상도 못 한 주제에 심지안이 깜짝 놀라며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막말하지 마요! 차에 다른 사람도 있는데!”성연신이 그녀의 손을 떼고 그윽하게 바라보았다.“막말? 제가무슨 막말을 했는데요. 알려줘요.”“...”이에 심지안이 아예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행동했다.“잤으면 잔 거죠. 서로 원해서 한 거 가지고, 얻을 거 다 얻어놓고 이렇게 억울한 척 해도 되는 거예요? 염치도 없어요?”“전 보수적인 사람인걸요. 전 처음부터끝까지 지안 씨처럼 속물이진 않았어요.”“성연신!”심지안이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녀가 성난 듯 씩씩거리며 성연신을 바라보았다.성연신은 사악하게 그녀에게 웃어 보였다.“이제 지안 씨 남자라는 거 인정해 줄 거예요?”“꿈도 꾸지 마요!”“곧 인정하게 될 거예요.”그가 더없이 확고한 어투로 말했다.심지안이 앵두 같은 입술을 살짝 내밀고 시큰둥하게 말했다.“한번 해보시든가.”‘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져도 기적은 일어나지 않을 거니까.’이때, 진유진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심지안은 별생각 없이 전화를 받았다.“뭐야. 오늘 출근 안 했어?”“하고 있어. 근데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응?”“어제 내가 정욱 씨 거절했잖아. 오늘 갑자기 찾아왔어.”심지안이 운전에 열중하고 있는 옆의 성연신을 힐끗 보고는 피식 웃었다.“생각보다 집요하시네.”“씁, 그
모든 사람에겐 참을 수 있는 최대 한계가 있는 법이다. 심지안에게 있어 최대 한계는 가족과 친구 진유진이었다.그러나 임시연은 감히 진유진을 건드렸다. 한 번 건드렸다고 두 번째가 없는 것이 아니다.그녀는 결코 이번 일을 넘어가 주지 않을 작정이었다.“헐. 기대돼.”진유진이 짓궂게 웃었다. 그녀 역시 임시연 같은 사람에겐 측은함 같은 동정심 따위는 생기지 않았다.악인에게 인자하다는 것은 자신에게 잔인한 것이다.“그럼, 이쪽 일이 끝나면 다시 연락하자.”“좋아. 나중에 만나서 자세히 얘기해.”“부하한테는 꽤 통이 큰 편인가 봐요?”전화를 끊은 심지안이 성연신을 향해 눈을 찡긋했다.심지안은 자신이 없어도 정욱이 연애하고 결혼하면 성연신이 통 크게 무언가 선물할 것을 알고 있었다.이에 성연신이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지안 씨한테는 더 통이 큰 편인데, 아쉽게도 지안 씨가 자꾸 알면서 모르는 척하네요네요.”심지안이 긴 다리를 치켜들며 태연자약하게 대답했다.“전 돈 있어요. 연신 씨가 통 크게 안 해줘도 되는걸요.”“돈이 많은 걸 싫어하는 사람은 없어요.”“맞는 말이에요. 적은 액수의 돈은 부족하지 않은데, 연신 씨가 큰돈은 주지 않으니 저한테 별 의미가 없는 건 당연한 거죠.”운전대를 잡고 있던 성연신의 손이 멈칫하더니 꽤 진지하게 말했다.세움 주얼리보다 보광 중신 보광 중신의 주식이 더 값어치가 있는 것 같은데요.”심지안이 눈을 깜박이더니 안 될 것을 뻔히 알면서 물었다.“그렇죠. 그럼 보광 중신 저한테 양도할 수 있어요?”성연신이 인수하기 전부터 보광 중신은 국제적으로 영향력이 컸다. 그러나 그가 인수하고 전체적으로 관리한 뒤로 한층 더 업그레이드되었다.세움 주얼리는 이에 비하면면 어림도 없이 작은 규모다.“안 될 게 뭐가 있어요. 제 건 모두 지안 씨 거예요. 저도 포함해서.”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말이 더 진심인 법이다.심지안은 한참 동안 그를 응시하다 고개를 홱 돌리며 중얼거렸다.“미쳤나... 보광 중신은 준다면
그때에도 그는 이런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았었다. 멍청이를 바라보는 듯한 동정 어린 눈길. 몹시 불편한 그런 눈빛.“가요, 제발. 저 정말 몸이 불편해서 그래요. 배 속의 아이도 생각 좀 해줘요.”임시연이 목소리를 낮추며 애걸복걸했다.변석환이 그녀의 배를 쓰다듬으며 결국 아이를 위해 타협했다.“그래요. 아버지께 말씀드릴 테니, 돌아가 쉬어요.”“네. 빨리요.”임시연이 소매를 잡아당기며 작게 속삭였다.그러나 이때, 변석환이 몇 발짝 앞으로 나서자 변요석이 먼저 입을 열었다.“오늘 중요한 얘기할 거니까 아무도 먼저 갈 수 없다.”그 한마디 말이 변석환을 속수무책으로 만들었다.임시연은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린 채 입술을 잘근잘근 씹어댔다.“저 정말 몸이 불편해서 병원에 가봐야 할 것 같아요. 빨리 돌아오겠다고 약속할게요.”변요석이 그녀를 유유히 훑어보며 물었다.“줄곧 석환이랑 결혼하고 싶어 하던 거 아니었어?”임시연은 변요석이 자신에 대한 편견이 깊고 그 생각이 바뀔 가능성이 크지 않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심지안이 이곳에 있으니 분명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것이었다.잠시 생각해 보던 그녀가 창백한 얼굴에 억지스러운 웃음을 띄웠다.“제가 변석환씨에게 부족한 사람이라는 것은 잘 압니다만, 우리는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이이기 때문에 저는 재촉하고 싶지 않습니다. 곤란하게 하고 싶지도 않고요.”아무리 아이를 임신하고 있을지언정 자신의 남자를 곤란하게 하고 싶지 않는 말 잘 듣고 착한 예비 며느리임을 과시하려는 말이었다.임시연의 말을 확실하게 이해한 심지안이 눈에 냉소를 띄며 변석환을 바라보았다.임시환은 감동한 듯 살짝 웃었다.“그래. 석환이 잘 생각해 주고 있구나.”그가 표정 변화 없이 이어 말했다.“네 말이 맞지. 넌 석환이와 결혼할 자격이 없어. 왕실에 시집올 자격도.” 하얗게 질렸던 얼굴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변요석이 이렇게까지 자신을 비하할 줄 몰랐기 때문에 그녀는 한사코 입술을 깨물었다. 눈에서는 눈물이 하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