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연신이 그녀를 응시하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그럼 조사해 볼까요?”“아니요. 이대로 둬요.”위험하지만 않으면 됐지. 비밀조직과 임시연이 뒤에서 음모를 꾸미는 것을 제외하고 그녀에게 앙심을 품은 다른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더 조사하기 귀찮기도 했다. 어차피 곧 임시연을 찾아 옛이야기를 해야 하니까.“윙-”성연신의 핸드폰이 진동하자 가까이 앉아 있던 심지안이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갸웃하여 화면을 바라보았다.이진우가 걸어온 전화였다.“말해.”성연신이 긴 다리를 꼬고는 몸을 뒤로 기댔다.“소민정이 돌아왔어.”이진우의 흥분이 핸드폰을 넘어서 느껴졌다.성연신이 순간 허리를 꼿꼿이 폈다. 얇은 입술이 가볍게 열리고 닫혔다.“바로 갈게.”안철수는 비밀조직의 사람이 또 소란을 피운 줄 알고 자리에서 일어났다.“대표님, 무슨 일입니까?”성연신이 몇초간 침묵을 지키더니 복잡한 표정으로 대답했다.“소민정이 돌아왔대요.”“깨어났답니까?”“네. 미리 말 안 해줬어요.”“잘됐네요!”“깨어나다니 너무 다행이에요.”“빨리 보러 가봅시다!”안철수는 입이 귀에 걸린 채 끊임없이 자리를 왔다 갔다 하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이에 심지안이 물었다.“소민정이 누구예요?”모두가 그녀를 좋아하는 듯했다. 통화 중의 말투를 들어보니 산만한 성격의 이진우도 꽤 진지해 보였다.성연신이 대답했다.“비밀조직의 의료진이에요.”“그뿐이겠어요? 실력은 대단하지 않지만 인내심 있고 착한 사람이에요. 전에 몇 번이나 중상을 입었는데 민정 씨가 밤낮으로 절 돌봐주었었어요.”안철수가 옛 추억을 떠올리며 여인에 대해 설명했는데 그녀에 대한 엄청난 애정이 보였다.심지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그럼 ‘깨어났다’는 건 무슨 뜻이에요?”이에 안철수가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젓더니 조금 다급한 듯 말했다.“그건 말하자면 기니까 나중에 민정 씨 만나면 얘기하기로 해요. 전 먼저 만나러 가봐야겠어요.”심지안이 얼떨떨해하며 대답했다.“네. 알겠어요.”성연
화났다기보다는 사실상 투정에 가까웠다.밤바람에 그녀의 새까만 머리카락이 휘날렸고 예쁜 쇄골라인, 그리고 돋보이는 날씬한 몸매는 눈을 뗄 수 없게 만들었다.성연신이 한쪽 입꼬리를 치켜올리며 대답했다.“당신밖에 모르는 변태?”“...”말문이 막힌 심지안이 몸을 휙 돌려 장원으로 들어갔다.그녀가 시야에서 벗어나서야 성연신은 차를 돌려 루갈로 향했다.차의 시동이 꺼지자마자 멀리서 덩치 작은 한 청순한 모습의 여인이 신이 나서 달려왔다. 그 뒤에선 안철수가 뒤따르며 쉼 없이 외쳤다.“천천히, 천천히요! 아직 격렬한 운동 하면 안 돼요!”소민정은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은 채 헐떡이며 성연신의 차 앞으로 달려왔다. 그리곤 봄날의 햇살처럼 환히 웃어 보였다.“오빠? 오랜만이에요!”성연신의 얼굴에 흐뭇한 웃음이 피어올랐다.“언제 깨어난 거야?”“지난 주요!”소민정이 손가락을 하나하나 펴며 세더니 투정 부렸다.“원래는 일어나자마자 찾아가고 싶었는데, 주치의가 허락해 주지 않아서 며칠 동안 얼마나 지루했던지.”“그래도 건강이 우선이지. 의사 말 잘 듣고. 너도 의료진이니까 잘 알 거 아니야.”막 루갈을 창건했을 때 그들은 비밀조직과 여러 번 전투가 있었다. 한번 상황이 위태로웠을 때 소민정이 성연신을 구하기 위해 몸을 던져 막아주었다.하필 심장이 다치는 바람에 그녀는 그 자리에서 혼수상태에 빠져 병원에 실려 갔었다. 의사는 평생 혼수상태일 거라 했지만, 기적적으로 몇 년 전 깨어난 것이다.“그래도 빨리 보고 싶은걸요.”소민정이 애교 부리며 입을 삐죽였다.“나 건강하게 잘 살아있잖아. 언제든 볼 수 있는 걸.”소민정은 마치호기심 어린 애처럼 그에게 다가가 쉴 새 없이 재잘거렸다.“오빠, 결혼하셨다면서요. 아이도 있다고요?”심지안 얘기만 나오면 성연신의 얼음 같은 눈동자도 부드러워지고 행복한 듯 얼굴이 환해졌다.“응.”성연신의 반응에 소민정의 얼굴에 석연치 않은 감정이 잠시 스쳐 지나갔다.“언제요? 형수님은 분명 꽃처럼 아름다운 외모
그 말에 성연신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이 돈 가지고 남은 생 행복하게 보내. 네가 레오를 위해 한 희생이 너무 많아. 이제 편히 쉬면서 즐겨.”소민정이 루갈에서의 지위는 원로급이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그의 공로는 최고의 존경을 받을 만했다.그리고 루갈의 현재 의료 수준은 거의 완벽했기에 소민정이 있으나 없으나 크게 상관없었다.“싫어요. 전 계속 루갈에 남아 있을 거예요. 절 미워하지 마요. 제발...”소민정이 눈물을 쏟아내며 측은하게 성연신의 팔을 끌어안았다. 그녀의 용모는 임시연이나 심지안처럼 아름답지는 않았으나 평범한 집안의 예쁜 딸처럼 친밀감을 주었다.성연신은 아무렇지 않게 그녀의 손을 뗐다.“미워하는 게 아니야.”“그럼 왜 쫓아내려고 하는 건데요?”“조기 퇴직이라 생각해. 이제 미용도 하고 영화도 보고, 좋은 사람 만나서 가정도 이뤄야지. 어떻게 되든 여기에 있는 것보단 나을 거야.”루갈의 99%는 모두 남자였다. 여자인 그녀가 혼자 남자 소굴에 있는 것도 부적절한 일이었다.“아니요. 가고 싶지 않아요. 쫓아내지만 말아 주세요...”소민정은 빨개진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울먹였다.“남아서 청소하라고 해도 괜찮아요.”“저 고아예요. 가족도 친구도 없다고요. 오빠만이 유일한 가족이었는데.”“루갈을 떠나면 소속감도 없이 제가 어떻게 살아요. 돈이 많아도 마음이 공허할 텐데.”성연신은 눈앞에서 울음을 터뜨리는 여자아이를 바라보며 안철수와 그녀의 처지가 똑같다는 것을 떠올렸다. 두 사람 모두 보육원에서 나온 사람들이었다.그러나 잠시 생각하고는 카드를 소민정의 손에 쥐여주었다.“너 스스로 결정해. 미리 말해두지만 남는다 해도 루갈의 모든 외출 임무에는 참가할 수 없어.”“좋아요. 약속할게요. 오빠.”소민정의 얼굴이 한결 밝아졌다. 그녀는 눈물을 쓱쓱 닦고는 그를 향해 환하게 웃어 보였다.성연신은 더 이상 할 말이 없어 간단히 몇 마디 하고는 자리를 떠났다.몇 걸음 걸어 나왔을 때, 심지안의 메시지가 왔다.[민수 씨 당신 편
그러나 인턴은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전 대표님이 정말 좋아요. 그냥 제 소원 한 번 이뤄준다 치고 비서님 밑으로 옮겨주면 안 될까요? 기회는 제가 직접 쟁취할게요!”성연신은 정말이지 인턴 마음속에서는 백마 탄 왕자님이었다. 비록 둘 사이에 큰 간극이 있긴 해도 시도하지 않고 어떻게 결과를 알겠는가?정욱은 더 이상 인내하지 못하고 따끔하게 한마디 했다.“마지막으로 경고합니다. 두 번 다시 제 앞에서 이런 말 하지 마세요. 회사가 당신을 고용한 것은 일을 하기 위해서이지 상사나 꼬시라고 고용한 것이 아닙니다. 앞으로 또다시 이런 일이 생기면 바로 해고합니다.”인턴은 체면이 서지 않아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얼굴이 붉게 상기된 채 그녀는 고작 비서 따위가 나댄다며 혼잣말로 불평했다.그러나 그녀는 더 이상 정욱을 귀찮게 하지 못했고 풀이 죽어 자리로 돌아갔다.다른 일에 신경이 쏠린 정욱은 이 일을 마음에 두지 않았다. 사무실 문을 두드리고 성연신의 동의를 받은 후에 그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대표님, 한 가지 여쭈고 싶은 게 있습니다.”정욱의 얼굴이 미세하게 구겨졌다. 업무보고를 하려는 것 같지 않았다.성연신이 잠시 하던 일을 내려놓고 그를 올려다보았다.“심지안 씨와 진유진 씨 혹시 어디서괴롭힘당한 거 아닐까요?”정욱이 핸드폰을 꺼내 보여주었고 스크린 속에는 그 몇 명 인플루언서에 대한 기사가 있었다.성연신이 웃음을 터뜨리며 농담했다.“심지안이 걱정되는 거야? 아니면 진유진이 걱정되는 거야?”“제가 어떻게 감히 심지안 씨를 신경 쓰겠어요.”정욱이 황급히 고개를 저으며 부인했다.“그럼 유진이 신경 쓰는 거네. 심지안은 겸사겸사말해 본 거고??”“대표님, 그게 아니라요. 심지안 씨의 안위도 당연히 중요하죠.”난처해진 정욱이 어색하게 해명했다.“진유진 씨는 괜찮습니다.”성연신이 담담히 알려주었다.그 말을 듣고서야 정욱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여전히 마음 놓이지 않은 듯 물었다.“그럼 왜 몸에 상처가 있는
정욱은 대학 시절이 마지막 연애였다. 이미 몇 년이나 지났으니 사랑이 어떤 감정이었던지 잊은 지 오래다.하지만 사랑이 싫다는 건 아니었다.일의 영향을 받은 건지 그는 능률을 따지기 시작했다. 그러니 마음이 있으면 솔직히 말해도 괜찮을 것이다.그는 태연한 표정을 지었고 오히려 진유진이 부끄러워 안절부절못하기 시작했다.“너무 갑작스러운데요...”“당장 대답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냥 제 마음 알려드린 거니까요.”“푹 쉬어요. 전 먼저 가보겠습니다.”“다음에 또 질 나쁜 사람들 마주치면 저한테 전화해요.”비록 대표님처럼 대단하진 않았지만 그도 좋아하는 사람이 괴롭힘당하게 두진 않을 것이다.“그... 언제부터 좋아하게 된 거예요?”“저도 잘 모르겠지만 전부터 호감 있었어요.”나중에 심지안이 외국으로 떠난 후 자연스레 진유진도 그와 연락을 끊었지만 정욱은 그녀를 잊지 못했고 항상 그녀를 떠올렸다.진유진은 억지로 손에 들려진 보양식을 보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비록 나이는 적지 않았고 잘생긴 사람을 원해지만, 이 사람은 그 성씨 자식의 비서인데...정욱이 떠나자 진유진은 사람이 없는 곳을 찾아 이 놀라운 소식을 얼른 심지안에게 알려주었다.심지안은 일찍이 예상하긴 했으나 이렇게 빠르게 행동에 옮길 줄은 몰랐다.그녀는 팩을 하며 슬쩍 물었다.“그럼 넌 어떡할 거야. 받아줄 거야?”솔직히 말하자면 정욱의 조건은 매우 좋았다.단정한 생김새에 직장이 안정적이며 성격도 좋았다.다른 비도덕적인 일에 관심도 없었고 이성과의 교제도 깔끔했다.차도 있고 집도 있었다. 이 조건만으로 이미 80% 이상의 남자는 이길 수 있었다.“에이. 나 정욱 씨한테 아무 감정 없어.”“오호.”그녀의 대답에도 심지안은 놀라지 않았다. 심지안은 그녀를 잘 알고 있다.심지안이 잠시 말을 멈추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부모님 때문에?”진유진이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대답했다.“그렇지. 난 사랑도, 가정도 갈망하지만... 동생을 목숨처럼 아끼는 부모님은 내가 싱글이면 많아
회의실에서 돌아온 성연신은 정욱의 사무실을 지나다 무심코 풀이 죽은 채 책상에 엎드려 늘어져 있는 정욱을 발견했다.“고백에 실패한 건가?”양손을 호주머니에 넣은 채 그가 비아냥거렸다.“...어떻게 아셨어요?”“이마에 떡하니 쓰여 있고만.”정욱이 자기 이마를 문지르며 물었다.“네?”“‘실패자’라고.”정욱이 쓴웃음을 지었다.“사람 속 그만 긁어요.”진유진이 거절할 것은 예상했지만 이렇게 빨리 대답이 올 줄은 몰랐다.조금의 지체도 없이 바로 문자로 하는 답장이라니.“제경에 집 있어?”“없습니다. 저 금관성에서 집 샀는데요.”“차는?”“그냥 한 대가 있긴 한데요...”“얼마짜리?”“1억쯤...”성연신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네가 그렇게 가난해?”진유진과 심지안은 절친이다. 성연신이 자신의 조건으로 정욱의 조건과 비교한다면 당연히 만족할 수 없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자신이 얼마나 잘난 사람인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정욱이 점점 자신을 의심하기 시작했다.“가... 가난한가요?”1억짜리 차는 부자라고는 할 수 없어도 가난과는 거리가 먼 액수였다.“순남 쪽에 내 별장이 있어. 내일 네 걸로 명의를 바꿔주도록 하지. 차는 10억 이상으로 사고 나한테 청구해.”정욱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대표님께서 주신다고요?”“뭐야, 싫어?”“아니요! 절대.”정욱은 차마 양심을 속일 수 없었다. 사 주겠다는데 거절하는 것은 바보나 하는 짓이다.순남은 제경에서도 황금 지역에 속한다. 쇼핑몰에 간다 쳐도 지하철은 어디든 있었고 학세권이기에 아이가 학교로 등교하거나 하교하기에도 편했다.“그래. 유진 씨는 제경에서 출퇴근하는데 네 집은 금관성이니 확실히 불편한 게 많을 거야. 나중에 집문서에 유진 씨 이름도 써넣어도 돼.”“그러니까 대표님 말씀은, 유진 씨가 절 거절한 원인이 제경에 집이 없어서라는 거예요?”성연신이 차갑게 대답했다.“그럼 너랑 월세로 집 찾아서 살겠어?”곰곰이 생각해 본 정욱은 일리가 있는 것 같아 고개
심지안은 임시연에게 아이가 있다는 사실을 안 후의 변석환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너무 궁금했다.그래도 참고 보듬어줄 것인가, 아니면 모질게 버릴 것인가.그녀는 심지어 기대되기까지 했다.성연신: [그래요. 아직 안 자는 거예요?]심지안이 하품을 하고는 답장을 보냈다.[금방 자려고요.]성연신: [청민 씨는 계속 성씨 가문에 있어요? 다른 이상한 기미는 없고요?]심지안: [네. 그건 왜 물어보는 거예요?]성연신은 헐렁한 흰색 가운을 입고 침대 머리맡에 반쯤 기대어 있었다.흠잡을 데 없이 잘생긴 얼굴을 따라 물방울이 또르르 떨어졌고 그 아래로는 탄탄한 복근이 눈에 뜨인다.그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왜 물어보긴, 조금이라도 더 대화하려고 물어보는 거지.만일 우주가 자신의 아버지가 몰래 이렇게 공부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필히 경멸할 것이다.‘흥. 애당초 자신의 책을 깔보던 사람이 누구던가?’성연신이 답장했다.[지안 씨가 괴롭힘이라도 당할까 봐 걱정하는 거죠.]시큰둥한 표정의 얼굴을 마주하지 않은 탓인지 심지안은 문자의 내용이 따뜻하다고 느껴졌다. 그녀 얼굴에도 만족스러운 웃음이 피어올랐다.그녀는 베개를 등 뒤에 깔고는 계속 타자했다.[할아버지께서 사당에 가두고 반성하라 하셨어요. 이 며칠간은 사람들 눈에 뜨이지 않을 거예요.]성연신이 눈을 가늘게 떴다. 무언가 심상치 않았다.[청민 씨가 저항하지 않았다고요? 그대로 가두게 뒀다고요?]심지안이 그의 의중을 이해하지 못하고 대답했다.[네. 청민 씨가 그래도 할아버지에 대해서는 항상 존경해 왔어요. 게다가 할아버지께서 사당에 가두었을 뿐이지 성씨 가문에서 쫓아낸 것도 아니에요. 그래도 마음이 약해진 거겠죠.]고청민을 떠올리는 성연신이 경멸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할아버지께서 고청민에게 아무리 인자하게 굴어도 고청민이 정말 감사해할지는 모르는 일이다.심지안은 고청민이 최근 별다른 낌새가 보이지 않는다고 하나, 자신이 보기에는 불가능한 일이었다.그는 내일 심지안을 만나면 고청민을 더
그 말을 전해 들은 심지안은 마음이 삽시에 따뜻해졌다. 그녀는 김민수에 대한 의심은 모두 잊고 얼굴에 행복한 웃음을 띄웠다.“좋네요. 그럼 이제 제 안전은 다 우주한테 맡기면 되겠어요. 이제 남은 생 행복할 일만 남았네요.”“어린아이한테 어떻게 다 맡기겠어요.”성연신이 사뭇 진지한 태도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저한테 의지해야죠. 제가 지안 씨 남잔데.”심지안이 그를 흘겨보았다.“착각하지 마요. 우린 그냥 친구 사이예요.”우주만 아니었다면 자신은 그를 거들떠 보지도, 상대하지도 않았을 것이다.“친구 사이라면서 돌담집에서 저랑 잔 거예요?”상상도 못 한 주제에 심지안이 깜짝 놀라며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막말하지 마요! 차에 다른 사람도 있는데!”성연신이 그녀의 손을 떼고 그윽하게 바라보았다.“막말? 제가무슨 막말을 했는데요. 알려줘요.”“...”이에 심지안이 아예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행동했다.“잤으면 잔 거죠. 서로 원해서 한 거 가지고, 얻을 거 다 얻어놓고 이렇게 억울한 척 해도 되는 거예요? 염치도 없어요?”“전 보수적인 사람인걸요. 전 처음부터끝까지 지안 씨처럼 속물이진 않았어요.”“성연신!”심지안이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녀가 성난 듯 씩씩거리며 성연신을 바라보았다.성연신은 사악하게 그녀에게 웃어 보였다.“이제 지안 씨 남자라는 거 인정해 줄 거예요?”“꿈도 꾸지 마요!”“곧 인정하게 될 거예요.”그가 더없이 확고한 어투로 말했다.심지안이 앵두 같은 입술을 살짝 내밀고 시큰둥하게 말했다.“한번 해보시든가.”‘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져도 기적은 일어나지 않을 거니까.’이때, 진유진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심지안은 별생각 없이 전화를 받았다.“뭐야. 오늘 출근 안 했어?”“하고 있어. 근데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응?”“어제 내가 정욱 씨 거절했잖아. 오늘 갑자기 찾아왔어.”심지안이 운전에 열중하고 있는 옆의 성연신을 힐끗 보고는 피식 웃었다.“생각보다 집요하시네.”“씁, 그
흥분을 가라앉힌 후, 심지안은 자신이 5년 전 해외에서 살았던 작은 별장과 흡사한 곳에 있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외부 경관이 달라 의아해하며 말했다.“5년 전과 똑같은 별장을 지었어요?”고청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짓다가 기침을 몇 번 하며 대답했다.“맞아요. 거의 차이가 없죠?”심지안은 방 안의 모든 물건을 둘러보며 고청민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은 조금 부드러워졌고, 마치 그를 가족으로 생각했던 시절로 돌아간 듯했다.“어떻게 하지원을 설득했어요?”그녀는 고청민이 하지원을 이용하여 완벽한 알리바이를 만든 것에 의아함을 감추지못했다.“한마디 했더니 바로 승낙했어요.”고청민은 미소를 지었다.하지원은 이처럼 온 마음을 다해 고청민을 따랐다.심지안은 복잡한 마음으로 물었다.“하지원 씨에게 미안하지 않아요?”고청민은 아무런 감정 없이 말했다.“보상해 줄 거예요.”‘보상? 어떻게 보상할 건데? 여자의 청춘을 어떻게 보상할 건데...’심지안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반박하지 않았다.하지원에게는 그저 사랑이었으니까...“밤새 아무것도 안 먹어서 배고프죠? 지안 씨가 좋아하는 비빔면을 준비해 뒀어요. 게살 비빔면이요.”고청민은 웃으며 심지안에게 말했다.“지안 씨가 분명 좋아할 거예요.”심지안은 배가 고파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식탁에 다가가기 전, 그녀는 게살 비빔면의 향긋한 냄새를 맡았다.고청민은 게살 비빔면을 그녀 앞에 놓고 기대에 찬 눈빛으로 말했다.“먹어요. 제철 대게는 정말 맛있거든요.”심지안은 망설임 없이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그의 말대로 정말 맛있었다. 커다란 게살이 면과 어우러져 입안 가득 풍미를 더했다.고청민의 뜨거운 시선에 심지안은 불편해하며 말했다.“청민 씨도 먹어요. 나만 보지 말고...”고청민은 미소를 지으며 젓가락을 들어 면을 집어 먹으려 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기침이 그를 멈추게 했다.연달아 몇 번의 기침이 멈추지 않았다. 점차 그의 가냘프고 쇠약한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기침이 점점 심해지자 그
집에 돌아온 후, 성연신은 성우주를 재우고 나서 긴급한 회사 업무를 처리했다. 일을 마치고 나니, 이미 새벽 3시가 넘어 있었다.성연신은 심지안에게 전화를 걸어 고청민의 상황을 물어볼까 했지만, 숙면을 방해할까 봐 포기했다.다음 날 아침, 성연신은 일찍 깨어났다. 시계를 보니 6시 30분이었다. 그는 심지안이 오늘 세움의 신제품 출시 준비로 일찍 출근할 거로 생각하고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물으려 했다.이때 손이 미끄러져 휴대폰을 바닥에 떨어뜨렸고, 주어 보니 액정이 나가 있었다.갑작스러운 실수에 그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깨진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며 불안감이 스며들었다.성연신은 다른 휴대폰으로 심지안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결국 부재중으로 받지 않았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성씨 가문으로 출발했다.성씨 가문에 도착했을 때, 성동철은 막 깨어나서 정원에서 산책 중이었다.성연신으로부터 두 사람이 지난밤 함께 있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 성동철은 고청민이 출발 직전에 했던 말이 떠올라 이마를 찡그렸다.‘그 녀석이 설마...’성연신은 성동철의 표정이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급하게 물었다.“어르신, 혹시 지안 씨가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어쩌면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네.”“어디죠?”“해외에 있을 가능성이 크네.”성연신은 눈썹을 찡그리며 물었다.“무슨 말씀입니까?”성동철은 고청민이 출발 전에 했던 특별한 부탁을 성연신에게 말해주고, 동시에 고청민에게 전화를 걸었다.성연신은 주먹을 꽉 쥐고 심지안에게 계속 전화를 걸었다. 한참의 신호음 끝에 전화가 연결되었다.“지안 씨, 어디에 있어요?”“성연신 대표님, 접니다.”고청민의 평온한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고, 성연신의 신경을 자극했다.성연신은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이 자식아, 지안 씨를 어디로 데려간 거야?”“우리는 해외에 있어요. 안전하니까 걱정하지 마세요.”고청민은 계속해서 말했다.“지안 씨를 며칠만 빌리는 셈이에요. 너무 무리한 일은 하지 않을 테니, 흥분하지 마세요
“네. 할아버지, 그러니 제발 막지 말아 주세요.”“지금 나와 상의하는 게 아니라 통보하는 거구나!”“할아버지, 용서해 주세요.”성동철은 입을 열었다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한순간에 십 년은 늙은 것처럼 보였고, 무력한 눈으로 먼 곳을 바라보았다.한참 후에야 그는 천천히 말했다.“해외 전문가와 이미 연락을 취했으니, 너는 안심하고 치료에 전념해라. 우리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고청민은 그의 고집을 읽고 눈을 깜빡였다. 긴 속눈썹이 갑자기 젖어 들었다.사실, 그도 할아버지와 몇 년 더 함께하고 싶었다.집에 돌아오니, 성동철이 연락한 해외 전문가로부터 답변이 도착해 있었다. 그들은 신의라 불리는 의사가 이미 고청민을 치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자신들이 개입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고청민은 낙담하지 않고 오히려 성동철을 안심시키며 주제를 돌렸다.“할아버지, 해외로 며칠 다녀오고 싶어요. 오랫동안 여행을 못 갔어요.”“안 돼. 네 몸 상태로는 그렇게 멀리 갈 수 없어!”성동철은 단호히 거절했다. 그는 아직 민채린의 스승에게 도움을 청해 볼 생각을 하고 있었다.그러나 고청민은 말했다.“민채린이 해외에 있어요. 그녀가 옆에 있으면 할아버지도 안심하실 거예요.”“민채린?”성동철의 얼굴에 희미한 희망의 빛이 떠올랐다.“그렇다면 민채린의 스승에게 직접 찾아갈 수 있는 거니?”“제 병에 대해 이미 채린이의 스승님께 여쭤봤어요.”“결과는 어땠니?”“스승님께서 알려줄 수 있는 것은 모두 알려 주셨어요. 하지만 정말 치료하기 어려운 병이래요.”성동철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실망을 느꼈다.결국, 그는 손을 흔들며 말했다.“그래. 가고 싶다면 가도 좋아. 다른 환경에서 지내는 것이 네 몸에도 좋을 거다.”게다가 민채린이 옆에 있으니, 문제가 생기더라도 신속히 치료할 수 있을 것이다.“오늘 바로 떠나려고 해요.”“이렇게 갑자기?”“그냥 즉흥적으로 생각한 거예요. 가고 싶을 때 가야죠.”고청민은 말하며 눈치를 보지 않았다
30분 후, 성동철과 고청민이 병실에서 나왔다. 성동철은 걱정스럽게 잔소리를 늘어놓았다.“의사가 병원에 며칠 더 있으라 했잖니? 왜 말을 안 들어? 적어도 또 무슨 일이 생기면 이렇게 급하게 서두르지 않아도 되잖아. 치료 시간을 늦출 수도 있다고...”고청민은 미소를 지었다. 그의 창백한 얼굴은 햇살처럼 부드러워 보였다.“괜찮아요. 집에 있는 의료 장비로도 충분해요.”성동철은 한숨을 쉬며 더 이상 고집하지 않았다.‘집에 있는 것도 나쁘지 않지. 집에 있으면 이 녀석을 더 볼 수 있잖아...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 일이고...’성동철은 운전기사에게 차를 병원 앞에 대라고 지시했다. 전화를 끊고 나서 그는 병원 입구의 벤치가 비어 있는 것을 보고 주변을 둘러보며 의아해했다.“지안이 여기 앉아 있지 않았니? 어디 갔지?”고청민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고운 속눈썹은 한껏 아래로 드리워 있었다. 눈에 감춰진 복잡한 감정이 보이지 않게 덮여 있는 것 같았다.“그리고 지원이도 보이지 않네. 네가 전화를 걸어 연락해 봐. 이제 집에 가야 한다고...”성동철은 난처한 표정으로 고청민에게 말하며, 심지안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전화는 계속 부재중이었다.고청민은 하지원에게 전화를 걸지 않고 바로 말했다.“지원이 오빠가 찾으러 왔어요. 아마도 지안 씨는 갑자기 일이 생겨서 간 것 같아요. 저희 먼저 집에 가죠.”성동철은 방금 의사가 자신에게 따로 했던 말들이 머릿속에 가득 차 있었다. 그는 빨리 집에 가서 외국의 의료 전문가들을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그래. 우리라도 먼저 가자.”‘성연신이 지안이를 데려갔을 수도 있어. 어쨌든 지안이는 다 큰 어른이니까 큰 문제는 없을 거야.’넓은 승용차 안에서, 고청민이 갑자기 성동철에게 말했다.“할아버지, 제가 죽으면 제 심장을 지원이에게 주세요.”어차피 죽으면 남겨둘 이유가 없으니, 필요한 사람에게 주는 것이 덕을 쌓는 일일 것이다.성동철은 얼굴빛이 변하며 호통쳤다.“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심지안은 차가운 눈빛으로 하지원을 바라보며 말했다.“모든 사람이 자기를 좋아하지도 않는 상대방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인생을 바칠 수 있는 것은 아니야.”심지안은 사랑의 위대함에 감탄했지만, 그런 희생정신을 가질 수는 없었다.하지원은 심지안의 말을 정확하게 알아듣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왜냐하면 난 인간미가 있고, 지안 씨는 없으니까요. 임시연이 당신 앞에서 죽었을 때, 살아있던 한 생명이 죽었는데도 지안 씨는 아무런 감정을 느낄 수 없는 사람인 것처럼 무관심했잖아요.”심지안은 갑자기 고개를 들어 지금까지의 무심한 태도를 거두고, 날카로운 시선으로 하지원을 쳐다보며 목소리를 높였다.“맞아요. 임시연은 내 아이를 훔치고, 내 남자를 빼앗고, 내 결혼을 망쳤어요. 게다가 여러 번 나를 죽이려고 했었죠. 이번에 죽은 사람이 임시연이 아니었다면, 다음번에 죽을 사람은 나일 수도 있어요. 지금 임시연이 죽어서 폭죽이라도 터뜨리고 싶은 마음이니까, 자기 일 아니라고 그런 쉬운 소리 하지 마세요!”처음에는 임시연의 죽음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꼈지만, 곧 심지안은 깨달았다. 임시연의 죽음은 자신과 아무 상관이 없으며, 그녀는 죽어 마땅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임시연은 살아서 더 많은 사람을 해치려 했기에 어쩌면 이렇게 죽는 것이 더 나은 상황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원은 심지안의 큰 목소리에 깜짝 놀라 얼굴이 창백해졌고, 잠시 말을 잃었다.“지원 씨는 사랑을 위해 모든 걸 희생할 수 있을지 몰라도, 난 아니에요. 날 냉정하다고 생각해도 좋아요.”심지안은 하지원과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하지원도 불쌍한 사람일 뿐이었다. 심지안은 자리에서 일어나 병실로 들어가려 했다. 한 발을 내딛자, 하지원이 다시 말을 걸었다.“정말로 청민 선배를 도와줄 생각이 없는 거예요? 사람 하나 구한다고 생각해 줘요... 평생 고마워할게요.”심지안은 잠시 멈칫했지만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그건 도움을 청하는 게 아니라 도덕적 강요에요.”심지안은 친구로
성동철은 깜짝 놀라 지팡이도 잊은 채 급히 움직였다. 카펫에 걸려 넘어질 뻔했지만, 한순간도 지체하지 않고 휘청거리며 2층으로 올라갔다.집사는 구급차를 부르기 위해 전화를 걸었고, 남은 하인들은 손님들을 휴식 공간으로 안내했다. 연회 내내 활기찼던 분위기가 갑자기 혼란스럽고 긴장된 분위기로 바뀌었다.심지안은 찡그린 얼굴로 성동철의 뒤를 따라 고청민의 방으로 들어갔다.커튼은 빛 한 줄기도 들어오지 못하게 꽉 닫혀 있었지만, 문을 열자 짙은 피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하인이 먼저 한 발 앞으로 나서서 전원 스위치를 켜자, 방 안은 갑자기 밝아졌다.우드톤 가구들이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옷들도 정리되어 소파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심지안은 방 안을 둘러보았지만, 고청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심지안은 약간 열려 있는 화장실 문을 바라보며, 눈빛이 어두워졌다.이때, 하지원이 화장실을 가리키며 말했다.“안에 있어요.”성동철은 떨리는 손으로 화장실 문을 열었다. 안은 엉망진창이었다. 바닥에는 붉은 핏자국이 가득했다.고청민은 욕조 안에 누워 있었다. 옷은 물에 젖어 축축하게 몸에 붙어 있었고, 두 손은 욕조 가장자리에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머리는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었고, 입가에는 피가 묻어 있어 원래 창백한 피부가 더욱 하얗게 보였다.고청민은 말라비틀어진 채 생기가 전혀 없는 모습이었다.성동철은 이마에 땀을 흘리며 손가락을 고청민의 코 밑에 대어 보았다. 그는 길게 숨을 내쉬며 하인들에게 소리쳤다.“구급차가 일찍 도착할 수 없을지도 모르니, 빨리 차에 태워서 병원으로 데리고 가!”하인들은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조심스럽게 고청민을 욕조에서 꺼냈다.심지안은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겁에 질린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심장이 빨리 뛰었다. 그녀는 혼이 나간 하지원을 바라보았다.“청민 씨... 어쩌다 이렇게 된 거죠? 왜 이렇게 피를 많이 흘린 건가요?”이 상황이 마치 자살을 암시하는 것 같았지만, 하지원은 그 말을 입 밖에
심지안은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했다.“말 좀 해봐요. 정말 시연 씨가 죽길 바란 거예요? 시연 씨가 죽으면 속 시원할 것 같았냐고요!”변석환은 심지안에게 소리쳤다. 울부짖는 변석환의 두 눈은 심하게 충혈되어 무섭게 보였다. 그리고 그의 큰 목소리는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변요석과 성연신이 먼저 달려왔다. 성연신은 심지안을 보호하며 변석환을 몇 걸음 뒤로 밀어냈다. 성연신의 행동은 냉담하면서도 약간의 분노가 섞여 있었다.“지안 씨 앞에서 임시연 그 여자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마. 다시 한번 실수하면 내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하하하! 살인범을 감싸고 도는 건가요?”변석환이 큰 소리로 웃으며 말을 이었다.“맞아요. 시연 씨의 죽음에는 당신과 심지안 씨도 책임이 있어요.”“퍽!”변요석은 변석환의 얼굴을 한 대 때렸다. 순간 정적이 흘렀다.“정신 차려. 임시연은 원래 죽어 마땅한 여자야! 더 이상 나를 창피하게 만들지 마!”변석환은 변요석을 바라보며, 맞은 얼굴을 손으로 문지르며 중얼거렸다.“원래 죽어야 했고... 맞아... 나를 속이고 이용했어... 죽어 마땅한 여자야...”하지만 변석환은 스스로 왜 이렇게 고통스러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잠을 잘 수도, 밥을 먹을 수 없었다.임시연이 죄를 지었음을 알고 있었지만, 변석환은 여전히 너무나도 힘들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녀를 미워하면서도 그녀가 죽기를 바라지 않았다.변요석은 주변에 지켜보는 눈이 많다는 것을 의식하며 분노를 억누르고 변석환에게 경고했다.“지금 당장 성씨 가문을 떠나. 네가 정신 차리고 지안 씨에게 사과할 준비가 되면... 그때 돌아와.”변석환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듯 비틀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순간, 사람들 사이로 문득 익숙한 그림자를 본 것 같았다.변석환은 그 그림자를 쫓아갔지만,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변석환은 한참 동안 멍하니 서 있었고, 그제야 그것이 자신의 착각임을 깨달았다.살아 있는 사람은 죽은 사람보다 더 큰 고통을 겪는다. 임시
자책하는 심지안을 보는 성연신은 가슴이 아픈 듯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당연히 아니죠. 임시연의 죽음은 지안 씨와 아무 상관없어요. 그러니까 혼자 그런 생각 하지 마요.”심지안도, 성연신도, 그 누구도 임시연이 거기서 뛰어내릴 거라고는 생각 못 했을 것이다.임시연이 심지안 앞에서 그리고 성원 그룹에서 죽은 건 심지안과 성연신에게 트라우마를 남겨주기 위해서였다.만약 제가 잘못되어 죽는다 해도 살아있는 사람들도 마음이 편하진 않을 테니까 그걸 노리고 뛰어내렸던 것 같다.성연신도 놀라긴 했지만 직접 본 게 아니니 그리 큰 충격은 받지 않았는데 문제는 심지안이었다.물론 임시연도 죽을 줄은 모르고 뛰어내렸겠지. 그냥 크게 다쳐서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게 감옥에 있는 것보단 나으니까 뛰어내린 걸 텐데 이렇게 죽어버려서 심지안만 힘들어하고 있었다.심지안은 공허한 눈으로 성연신을 보며 웃어보려 했지만 표정이 잔뜩 굳어있어서 웃는 게 우는 것보다 더 이상했다.“당신 말이 맞아요. 임시연은 천벌 받아서 죽은 건데 내가 기뻐하는 게 맞죠.”“그래요, 안 뛰어내렸어도 경찰한테 잡혀서 자유롭진 못했을 거예요.”성연신은 심지안의 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내가 지안 씨더러 임시연 잡아놓으라고 한 거잖아요. 귀신이 되어도 날 찾아올 거니까 지안 씨는 아무 걱정 하지 마요.”그때 오지석이 사실은 사람들을 데리고 올라오려 했지만 임시연이 미리 눈치를 채고 송준에게 도움을 청할까 봐 성연신이 말렸었는데 임시연이 이렇게 극단적인 사람인 줄 알았더라면 심지안을 절대 혼자 놔두지 않았을 것이다.“알겠어요.”긴장이 풀렸는지 심지안이 눈을 살짝 감으며 말했다.“나 아까 제대로 못 쉬어서 좀 잘래요.”“그래요, 내가 옆에 있을게요.”“네, 할아버지랑 우주한테는 나 병원에 있단 말 하지 마요.”“네.”가족들이 괜히 걱정할까 봐 신신당부를 하고서야 심지안은 침대에 누웠다.제 앞에 앉아있는 듬직한 성연신을 보니 안심이 되는지 그렇게 천천히 잠에 빠져들었다.한편 성연신은
그렇게 회의실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어버렸다.누구는 임시연을 구하겠다고 1층으로 달려 내려가고 누구는 창가에 기대어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아직 살아있어요!"그 모습을 보고 있던 심지안은 사람들의 인영이 환영처럼 눈 앞을 스쳐지나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머리도 어지럽고 귀에 까지 이명이 들려 온 세상이 흐릿하게 보였다.임시연이 뛰어내리는 결말을 예상해본적은 없었는데, 3층이 아주 높진 않지만 그렇다고 낮은 층수도 아니었다.조금 정신을 차린 심지안은 사람들의 질책이 담긴 시선을 느꼈다. 그들은 저들끼리 수군대며 심지안을 힐끔힐끔 보고 있었다."사모님도 너무 하시지, 어떻게 사람을 뛰어내릴 때까지 몰아붙여? 저러면 밤에 악몽 안 꾸나?""그리고 왜 자꾸 연다빈 씨한테 임시연이라고 하는 거야? 너무 간 거 아니야?""다빈 씨가 죽기라도 하면 어떡해? 그럼 사모님이 살인자 되는 거야?""다빈 씨가 귀신 돼서 사모님한테 복수하겠다고 찾아올 것 같아요."그 말을 듣고 있던 심지안은 이마에 힘을 주며 소리질렀다."내가 몰아붙인 거 아니고 본인이 뛰어내린 거야. 나랑 상관 없다고."심지안의 호통에 수군거림은 사라졌지만 그녀를 보는 시선은 여전히 매정했다.다들 "연다빈"에게 일이 생기면 심지안 책임으로 돌릴 준비가 되어있는 듯 싶었다.심지안은 애써 심호흡을 하며 현기증을 이겨내려 했다. 그리고 구급차를 부르려고 뒤를 돌 때 마침 이곳으로 뛰어오는 성연신과 오지석을 발견했다.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있는 성연신이 빠르게 다가와 심지안의 어깨를 잡으며 주드럽게 다독였다."괜찮아, 내가 왔잖아. 내가 알아서 할게."속눈썹이 떨릴 정도로 긴장하고 있던 심지안은 마침 다가오는 성연신을 보고 무슨 말이 라도 하려고 입을 벌렸지만 말을 채 내뱉기도 전에 다리에 힘이 풀리며 쓰러져 버리고 말았다.---시간이 조금 흘러 심지안이 눈을 뜬 곳은 병원이었다.흰 벽과 소독약 냄새, 그리고 핸드폰에서 흘러나오는 성원 그룹 직원 자살 사건은 임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