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 오시기 전에 미리 연락하지 그러셨어요.”심지안은 놀라지 않았다. 아침에 메모를 남겼으니 성동철이 와서 따지는 건 당연한 일이라 생각했다.근데 성동철은 화도 내지 않고 느긋하게 말했다.“말해보렴.”심지안은 의자를 찾아서 앉았다.“청민 씨가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해요?”“어느 방면에서?”“인품이요.”성동철은 그녀를 보면서 진지하게 말했다.“만약에 청민이 인품에 문제가 있었다면 세움 주얼리 경영권을 그 애한테 온전히 넘기지 않았겠지. 지안이 너도 알다시피 난 걔를 친손자처럼 키웠어. 그쪽으로는 걱정하지 않아도 돼.”“사람은 변해요.”“나한테 빙빙 돌려 말하지 말고 핵심만 말하렴.”“알고 지낸 지 그렇게 오래됐는데 고청민이라는 사람을 모르겠어요. 겉모습만 보이는 것 같다고요. 다정하고 매너 있고 젠틀하죠. 말도 안 되게 완벽해요. 하지만 단점은 없나요?”성동철은 별안간 깨닫고 가볍게 웃었다.“사람은 당연히 단점이 있지. 하지만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는 완벽한 모습을 내보려고 노력하기 마련이지.”심지안은 고개를 저었다. 고청민을 그가 키웠으니 고청민에게 있는 콩깍지가 자신보다 심해서 말이 통하지를 않았다.게다가 증거도 없는 상황에서 그녀의 말을 믿을 리도 없었다.그녀는 바로 요구사항을 말했다.“할아버지, 결혼을 뒤로 미룰 수 있을까요?”“안 돼. 청첩장은 이미 내보냈어. 지안아, 말 들어.”성동철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익숙함에 속아 소중함을 잊지 말렴. 청민이가 너한테 잘해주는 건 내 눈에도 보인다.”성동철이 봤을 때, 고청민의 교우관계가 성연신보다 깨끗했다. 적어도 주변에 임시연 같은 여자는 없었다.여자가 시집가는 건 손에 물 묻히지 않기 위해서인데 고청민은 그런 점을 만족시켜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심지안은 어이가 없어서 이마를 짚었다. 틀린 말이 아니라 반박할 수가 없었다.“저한테 시간을 주세요. 저희 엄마가 왜 가출했는지 아시죠? 다른 사람이 자기 인생 통제하는 게 싫어서잖아요. 할아버지 뜻은 알아들었어요.
아니나 다를까 그녀는 낮에 배광 중신에 갔었다....저녁에 심지안은 일부러 먼저 퇴근해서 고청민을 기다리지 않았다.심지안은 차를 세우자마자 약을 달이는 고용인이 약을 광주리째로 버리려는 걸 발견했다.“어머. 멀쩡한 걸 왜 버려요?”고용인은 광주리를 내려놓고 공손하게 말했다.“도련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이젠 필요하지 않다고요.”심지안은 눈썹을 위로 올리면서 말했다.“환자가 다 낫지 않았는데 왜 필요 없다는 거죠?”고용인은 난처해했다.“저도 모르겠습니다. 도련님이 돌아오시면 물어보시죠.”심지안은 다락방에 가서 홍지윤의 건강 상태를 살폈다. 오늘 약을 먹지 않아 상태가 눈에 띄게 나빠졌다.민채린의 말로는 치료 기간 동안 잠깐이라도 약을 중단하면 치료시간은 두 배로 늘어난다고 했었다. 중요한 건 재발할 우려도 높다는 것이었다.심지안은 안절부절못하면서 그저 단순하게 중간에서 무슨 실수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하고 바로 고청민에게 연락했다.벨소리가 두 번 울리기도 전에 고청민이 전화를 받았다.“홍지윤 씨의 약이 끊겼던데 무슨 일이에요?”“아무 일 아니에요.”심지안은 입술을 깨물고 그의 어투에서 이상한 점을 느꼈다.“지안 씨. 제가 민채린을 모셔 온 건 홍지윤 치료를 위해서예요. 온전히 당신을 위해서, 기쁜 마음으로 당신한테 이 모든 걸 했다고요. 만약 당신이 이걸 당신과 성연신 사이의 연결고리로 생각하고 다시 연락하기 시작한다면 홍지윤을 계속 치료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제가 말했었죠. 한 번은 용서해도 두 번은 용서 못 한다고요. 제 말 기억 했어요?”심지안은 핸드폰을 쥔 손에 힘이 자꾸 들어갔다.“저 미행했어요?”고청민은 쓰게 웃었다.“아뇨.”“그럼, 제가 성연신 찾아간 건 어떻게 아는데요?”“갑자기 웨딩드레스 입어보러 안 가고, 결혼도 미루고. 모든 게 다 평소랑 다르잖아요. 다른 사람이라도 의심하지 않겠어요?”심지안은 몇 초 동안 침묵했다.“당신은 언제 돌아오는데요?”“반 시간 뒤요.”기다리는 시간 동안 심지안은
고청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심지안을 지긋이 바라봤다.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아내려는 듯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몸을 약간 기울여 그녀와 눈을 맞췄다. 얼굴에서 그 어떤 감정도 읽어낼 수 없었다.“지안 씨. 솔직하게 말해 줘요.”심지안은 억지로 냉정을 유지하려고 했다. 본인 자신도 등 뒤에서 흐르는 식은땀을 의식하지 못했다. 그녀는 용기를 내서 그와 시선을 마주치고 되물었다.“이게 솔직한 거예요. 왜 저 안 믿어줘요?”“당신은 이랬다저랬다 하는 사람이 아니잖아요. 계획 밖의 문제를 만난 게 아니라면요.”“결혼이 무서워진 건 문제에 속하지도 않는다는 거에요?”심지안은 상처받은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말랑한 목소리는 듣는 사람의 보호 욕구를 자극했다.“할아버지가 저 이해 못 해주는 건 그렇다 쳐도 어떻게 당신까지...”고청민은 이 말을 듣고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것 같았다. 그는 그녀를 품에 안고 부드럽게 말했다.“그럼, 아침에는 왜 보광 중신에 갔는데요?”“성연신 씨랑 약속 잡아서 결혼식 전에 성연신 할아버지 뵈러 가려고 했어요. 저한테 잘해주셨거든요. 저를 가족처럼 대해주셨는데 결혼식 전에 말씀드리는 건 당연한 일이잖아요.”심지안은 온몸이 굳어서 어색하게 그의 가슴에 기댔다.듣기엔 가짜 같아도 어쩔 수 없이 성수광을 방패막이로 써야 했다.고청민은 눈빛이 미묘해졌다.“성수광 씨한테 전화로 말해도 되잖아요.”“어르신이라서 스마트폰을 잘 안 써요. 집 전화번호는 진작에 삭제했죠.”심지안은 화제를 전환하기 위해 일부러 궁금한 척 물었다.“듣기로는 우주가 세움에 저 찾으러 왔다던데요?”“네.”고청민은 숨기지 않았다.“대여섯살 되는 애가 혼자 찾아왔을 리는 없고 성연신이 시킨 거 같더라고요. 당신 대신해서 거절했어요. 귀찮은 일 줄이려고요.”이 말은 꽤 조리 정연하고 자상한 것 같았다.심지안은 눈을 반짝였다.“고용인한테 계속 홍지윤 씨의 약 달여주라고 해요. 사람 목숨 구하는 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데요. 물론 그녀의 죄가 많
이튿날 아침, 하늘은 더없이 맑았다.성우주는 발꿈치를 들고 먼 곳을 바라보다가 의아해서 중얼거렸다.“아빠. 고모 왜 아직도 안 와요?”약속 시간은 9시였는데 이미 9시 반이었다.성연신은 눈을 가늘게 뜨고 확신하는 목소리로 말했다.“오늘 안 올 거야.”“왜요?”성우주의 잘생긴 얼굴이 갑자기 어두워졌다.그리고 성연신의 핸드폰이 울리자, 성우주는 빠르게 다가와서 같이 보려고 했다.당연하게도 심지안이 건 통화였다.“갑자기 일이 생겨서 못 갈 거 같아요. 미안해요.”성우주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아빠를 봤다.“아빠는 어떻게 그렇게 잘 맞춰요? 고모랑 미리 연락 했어요?”“아니.”“그럼 왜...”“꼬맹이 주제에 무슨 질문이 그렇게 많아?”성연신의 목소리는 차가웠지만 자세히 보면 얇은 입술이 미묘한 호선을 그리며 웃고 있었다.성우주는 눈을 깜박이며 눈썹을 움직였다. 유치하고 귀여운 목소리에는 의아함이 넘쳤다.“표정 엄청 이상해요. 저한테 숨기는 일 있죠?”누가 바람 맞고 화를 내기는커녕 기뻐한단 말인가? 특히 아빠처럼 늘 차가운 사람이 말이다.성연신은 큰 손을 그의 머리 위에 올려두고 가볍게 쓰다듬었다. 그러고는 즐거운 듯이 말했다.“안 오는 게 좋은 거야.”이건 심지안 마음속에 그가 있고 성씨 가문을 중요시 생각한다는 거였다.심지안은 잘 알 것이다. 만약 송석훈이 성연신 엄마의 상황을 알게 된다면 성씨 집안과 비밀 조직에 한바탕 피바람이 불 건 당연지사였다. 어린 나이의 성우주는 그 깊은 뜻을 알아듣지 못하고 그저 고개를 숙여 일부러 준비해 입은 정장을 보며 순간 실망했다.그럼 자기는 괜히 꾸민 거 아닌가?하지만 실망은 실망이고 그는 심지안에게 미운 마음은 들지 않았다.이상하기도 하지.사실 성우주도 그의 아빠같이 시간 약속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고 시간을 지키지 않는 친구들에게는 두 번의 기회를 주지 않아 왔다.하지만 심지안에게는 그렇게 화가 나지 않았다.성연신은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성우주를
다락방에 씨씨티비가 있어서 다락방만 나오면 홍지윤에게 아무거나 물어볼 수 있었다.성연신을 바람맞히고 나서 사흘이 지났다.사흘 동안 그는 고청민과 웨딩드레스 매장에 가서 웨딩드레스를 예약하고 결혼식에 관한 다른 일에는 아무 의견도 내비치지 않았다.원래 예정대로 5월 6일에 진행하기로 했는데 지금 4월 20일이었다.16일 남았다.그녀에겐 시간이 없었다. 머리 위에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칼이 떠 있는 기분이다. 같은 침대를 쓰는 게 사람인지 귀신인지도 모를 느낌이었다.긴장과 황망함이 거대한 파도가 되어 그녀를 덮쳤다. 오늘의 행동을 숨기고 고청민이 안심하게 하기 위해 그녀는 일부러 세움에 가지 않았다.민채린은 상관없다는 듯이 손을 내저었다.“마음대로 하세요. 제 직책은 병을 치료하는 것뿐이에요.”“저 대신 고용인한테 말 좀 전해줘요. 저는 돌아가서 옷부터 갈아입을게요.”심지안은 웃으면서 물에 젖은 옷을 털어냈다.“그래요.”민채린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그녀는 넘쳐흐르는 기쁨을 억누르면서 안방으로 갔다.“잠시만요.”그때 민채린이 그녀를 불렀다.심지안은 뜨끔해서 잠깐 멈칫하고 당황하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무슨 일이죠?”“성연신 전처가 누군지 알아요?”민채린은 빨간 입술을 재밌다는 듯이 올리면서 도발하듯이 물었다.“그 사람이 예뻐요, 아니면 제가 더 예뻐요?”심지안은 입이 벌려졌다. 이걸 물을 줄 생각도 못 했지만 평온하게 대답했다.“당신이 더 예뻐요.”민채린은 만족해서 흥얼거리며 돌아가서 고용인을 불렀다.고용인이 휠체어를 밀고 3층에서부터 홍지윤을 데리고 나오는 걸 보고, 심지안은 두근거리는 심장을 억지로 내려 앉히며 가장 빠른 속도로 옷을 갈아입었다.다시 나왔을 때, 민채린은 이미 운전해서 떠난 뒤였다.심지안과 홍지윤의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고용인으로부터 휠체어를 넘겨받았다.“제가 하죠.”고용인은 휠체어를 넘겼지만,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먼저 들어가 보세요. 혼자 있기에 적적해서요. 돌아갈 때 부를게요
“저도 몰라요...”심지안은 손에 힘을 더 주면서 더 초조해졌다.“아직도 나를 속여요? 살기 싫어졌나 봐?”“켁...”목에 졸려오면서, 홍지윤은 기침을 참지 못했다. 창백한 얼굴은 어느새 보라색으로 변했다. 얼마 지나지 않으면 질식할 것 같았다. 그녀는 최선을 다해서 발버둥 쳤지만, 빌어먹을 몸뚱아리에는 힘이 조금도 들어가지 않았다.그 순간 그녀는 가장 가치 있는 정보가 비밀 조직의 비밀도 아니고, 고청민도 아니고, 심지안과 성연신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라는 걸 깨달았다.만약 입 밖에 꺼내면 고청민은 그녀를 살려두지 않을 것이었다.어떻게 해도 죽는다면 지금 타협할 필요도 없었다.홍지윤도 일반인이 아니다. 비밀 조직으로부터 버려지는 일까지 겪어본 사람이었다. 그녀는 마음을 독하게 먹고 입을 꾹 다물어버렸다.심지안은 그 꼴을 보고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이를 꽉 깨물었다.“그래요. 그럼 만족시켜 드릴게요.”두 사람은 모두 도박을 하고 있었다. 모두 상대방이 그럴 용기는 없으리라는 도박을 말이다.심지안은 자기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 순간만큼은 마음속의 악마가 머리를 쳐들어, 진심으로 홍지윤을 죽여버리고 싶었다.만약 비밀 조직 사람들이 아니었다면 왜 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친자식과 떨어져야 했겠는가.홍지윤의 호흡이 짧아지면서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두렵지 않다는 건 거짓말이었다.하지만 도박할 수밖에 없었다.고청민, 성연신, 심지안. 이 셋 중 심지안의 역할이 가장 중요했다.심지안을 손에 넣으면 다른 두 남자는 모두 심지안 말을 들을 게 뻔했다.숨이 적어지면서 눈앞이 깜깜해져 모든 게 둥둥 떠오르는 것 같았다. 홍지윤의 몸도 이미 한계였다.더 버티면 죽는다.“도련님, 돌아오셨네요.”멀리서 고용인의 소리가 들리자 심지안은 손이 떨렸다. 겨우 남은 이성으로 홍지윤을 놓아줬다.홍지윤은 숨을 몰아쉬면서 공포에 싸여 심지안을 쳐다봤다. 다시 공격할까 봐 무서워서 급하게 말했다.“아이가 어디 있는지 알려줄 수는 없어도 다
홍지윤은 그녀의 기척이 너무 커서 고청민이 올까 봐 무서워 쭉 화원을 쳐다보고 있었다. 다행히 고청민은 차를 고용인에게 맡기고 이미 올라갔다.홍지윤은 한숨을 내쉬었다.“고청민한테 저 좀 잘 봐달라고 해줘요. 그리고 외국으로 도주하고 나면 아이 어딨는지 알려줄게요. 어때요?”심지안은 그녀를 보면서 말했다.“난 지금 아이가 어느 도시에 있는지 알아야겠어.”홍지윤은 이를 악물었다.“제경에 있어요. 지금 당신을 속이면 저도 곱게 죽진 못하겠죠.”...고용인은 홍지윤을 데리고 다락방에 돌아갔다. 심지안은 돌아가서 얼굴을 씻어냈다. 차가운 물이 피부에 닿자, 현실감 있는 아픔이 느껴졌다.이불 안에 들어가자 분명히 따뜻했지만, 그 어떤 온도도 느낄 수 없었다.저녁이 되고 고청민이 그녀를 밥 먹으라고 부르러 왔다가 열이 나는 걸 발견했다.하얀 피부가 비정상적으로 붉어졌고 푸딩처럼 말랑하던 입술이 갈라졌다. 몸을 옹송그리고 침대에 누워있는 그녀는 상처 입은 강아지 같았다.고청민은 마음이 아파서 다정하게 물었다.“아픈데 왜 저한테 말을 안 했어요?”심지안은 그제야 눈을 떴다. 차가운 눈동자에는 안개가 낀 것 같았다. 그녀는 고청민이 왜 이렇게 변했는지 너무 알고 싶었다.세움의 재산을 가로채기 위해서라면 그럴 필요가 없었다.그녀가 나서지 않으면 누구도 고청민과 뺏지 않을 것이었다.그녀에게 잘해준 건 쭉 가짜였나? 아니면 그녀가 쭉 그를 제대로 알지 못했던 것인가.고청민은 심지안의 눈을 바라보면서 그녀가 많이 아픈 줄 알고 마음이 급해져서 몸을 돌려 전담 의사를 부르러 직접 갔다.의사가 와서 진료를 보고 말했다.“도련님. 아가씨는 괜찮으세요. 그저 감기라서 약만 드시면 됩니다.”“주사를 맞을 필요는 없나요?”“그럴 필요는 없어요. 약만 잘 드시면 내일이면 나을 겁니다.”고청민은 의사가 남기고 간 약을 쥐고 다정하게 심지안을 일으켜 앉혔다.심지안은 그와의 스킨십을 밀어내면서 약을 받아 입에 넣고 삼켜버렸다.고청민은 어리둥절했다.“배고파요
심지안은 김민수의 SNS를 끝까지 다 봤지만 발견한 건 많지 않았다. 유일하게 의심 가는 점은 그의 딸의 이목구비와 홍지윤이 했던 말이었다.심지안은 자기 생각이 맞다고 생각했다.그 여자애는 김민수와 임시연의 아이였다.사진만 봐서는 나이가 많아 보이지 않았다. 많아 봤자 여섯 살 좌우인 모양새였는데 임시연이 성연신에게 붙어 다닌 건 오 년쯤이었다.그 뒤로 심지안은 잘 숨기고 다녔다. 회사를 가는 횟수를 줄여 고청민과의 만남을 줄였다.그녀는 결혼 전에 솔로 파티를 즐기고 싶다 핑계를 대고 진유진을 성씨 가문 별장에 데리고 와서 며칠 놀게 했다.그리고 심지안은 매일 고청민에게 일정을 보고했다. 연속 사흘을 그렇게 보내고 나니 그녀는 고청민이 더는 의심을 하지 하지 않을 거로 생각했다.점심에 진유진과 밥을 먹고 두 사람은 검색해 낸 김민수의 주소로 향했다.아파트 단지의 보안이 엄격해서 카드가 있어야만 들어갈 수 있었다.진유진과 심지안은 차에서 한참 동안 기다리다가 마침내 김민수가 여자애를 데리고 간식 사러 나온 걸 발견했다.“내가 내려가 볼게. 사진도 몇장 찍을게.”진유진이 말했다.“이거 써.”심지안은 모자와 선글라스를 건넸다.그녀는 김민수와 몇 번만 만났었다. 김민수는 고청민의 측근으로서 심지안이 낯설지 않을 것이다.진유진은 모자와 선글라스를 건네받고 김민수 방향으로 다가갔다.그녀는 은밀한 위치를 찾아서 김민수가 아이에게 간식을 골라주는 틈을 타서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찍었다.진유진은 차에 돌아와서 기쁘게 심지안에게 말했다.“말도 마. 그 여자애 청순하고 순진해 보이는 게, 확실히 임시연이랑 닮았어. 근데 좀 멍청해 보여.”말을 들은 심지안은 급하게 방금 찍은 사진을 살펴봤다.작은 얼굴에 아이 같은 천진함과 영특함은 보이지 않고 대신 어리벙벙하게 멍청한 모양새였다. 게다가 쭉 손가락을 빨고 있었다.심지안은 머뭇거리다가 말했다.“얘 뭔가 이상해.”진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나도 그렇게 생각해. 아예 내려서 김민수랑 물어보자.
흥분을 가라앉힌 후, 심지안은 자신이 5년 전 해외에서 살았던 작은 별장과 흡사한 곳에 있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외부 경관이 달라 의아해하며 말했다.“5년 전과 똑같은 별장을 지었어요?”고청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짓다가 기침을 몇 번 하며 대답했다.“맞아요. 거의 차이가 없죠?”심지안은 방 안의 모든 물건을 둘러보며 고청민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은 조금 부드러워졌고, 마치 그를 가족으로 생각했던 시절로 돌아간 듯했다.“어떻게 하지원을 설득했어요?”그녀는 고청민이 하지원을 이용하여 완벽한 알리바이를 만든 것에 의아함을 감추지못했다.“한마디 했더니 바로 승낙했어요.”고청민은 미소를 지었다.하지원은 이처럼 온 마음을 다해 고청민을 따랐다.심지안은 복잡한 마음으로 물었다.“하지원 씨에게 미안하지 않아요?”고청민은 아무런 감정 없이 말했다.“보상해 줄 거예요.”‘보상? 어떻게 보상할 건데? 여자의 청춘을 어떻게 보상할 건데...’심지안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반박하지 않았다.하지원에게는 그저 사랑이었으니까...“밤새 아무것도 안 먹어서 배고프죠? 지안 씨가 좋아하는 비빔면을 준비해 뒀어요. 게살 비빔면이요.”고청민은 웃으며 심지안에게 말했다.“지안 씨가 분명 좋아할 거예요.”심지안은 배가 고파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식탁에 다가가기 전, 그녀는 게살 비빔면의 향긋한 냄새를 맡았다.고청민은 게살 비빔면을 그녀 앞에 놓고 기대에 찬 눈빛으로 말했다.“먹어요. 제철 대게는 정말 맛있거든요.”심지안은 망설임 없이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그의 말대로 정말 맛있었다. 커다란 게살이 면과 어우러져 입안 가득 풍미를 더했다.고청민의 뜨거운 시선에 심지안은 불편해하며 말했다.“청민 씨도 먹어요. 나만 보지 말고...”고청민은 미소를 지으며 젓가락을 들어 면을 집어 먹으려 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기침이 그를 멈추게 했다.연달아 몇 번의 기침이 멈추지 않았다. 점차 그의 가냘프고 쇠약한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기침이 점점 심해지자 그
집에 돌아온 후, 성연신은 성우주를 재우고 나서 긴급한 회사 업무를 처리했다. 일을 마치고 나니, 이미 새벽 3시가 넘어 있었다.성연신은 심지안에게 전화를 걸어 고청민의 상황을 물어볼까 했지만, 숙면을 방해할까 봐 포기했다.다음 날 아침, 성연신은 일찍 깨어났다. 시계를 보니 6시 30분이었다. 그는 심지안이 오늘 세움의 신제품 출시 준비로 일찍 출근할 거로 생각하고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물으려 했다.이때 손이 미끄러져 휴대폰을 바닥에 떨어뜨렸고, 주어 보니 액정이 나가 있었다.갑작스러운 실수에 그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깨진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며 불안감이 스며들었다.성연신은 다른 휴대폰으로 심지안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결국 부재중으로 받지 않았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성씨 가문으로 출발했다.성씨 가문에 도착했을 때, 성동철은 막 깨어나서 정원에서 산책 중이었다.성연신으로부터 두 사람이 지난밤 함께 있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 성동철은 고청민이 출발 직전에 했던 말이 떠올라 이마를 찡그렸다.‘그 녀석이 설마...’성연신은 성동철의 표정이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급하게 물었다.“어르신, 혹시 지안 씨가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어쩌면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네.”“어디죠?”“해외에 있을 가능성이 크네.”성연신은 눈썹을 찡그리며 물었다.“무슨 말씀입니까?”성동철은 고청민이 출발 전에 했던 특별한 부탁을 성연신에게 말해주고, 동시에 고청민에게 전화를 걸었다.성연신은 주먹을 꽉 쥐고 심지안에게 계속 전화를 걸었다. 한참의 신호음 끝에 전화가 연결되었다.“지안 씨, 어디에 있어요?”“성연신 대표님, 접니다.”고청민의 평온한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고, 성연신의 신경을 자극했다.성연신은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이 자식아, 지안 씨를 어디로 데려간 거야?”“우리는 해외에 있어요. 안전하니까 걱정하지 마세요.”고청민은 계속해서 말했다.“지안 씨를 며칠만 빌리는 셈이에요. 너무 무리한 일은 하지 않을 테니, 흥분하지 마세요
“네. 할아버지, 그러니 제발 막지 말아 주세요.”“지금 나와 상의하는 게 아니라 통보하는 거구나!”“할아버지, 용서해 주세요.”성동철은 입을 열었다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한순간에 십 년은 늙은 것처럼 보였고, 무력한 눈으로 먼 곳을 바라보았다.한참 후에야 그는 천천히 말했다.“해외 전문가와 이미 연락을 취했으니, 너는 안심하고 치료에 전념해라. 우리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고청민은 그의 고집을 읽고 눈을 깜빡였다. 긴 속눈썹이 갑자기 젖어 들었다.사실, 그도 할아버지와 몇 년 더 함께하고 싶었다.집에 돌아오니, 성동철이 연락한 해외 전문가로부터 답변이 도착해 있었다. 그들은 신의라 불리는 의사가 이미 고청민을 치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자신들이 개입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고청민은 낙담하지 않고 오히려 성동철을 안심시키며 주제를 돌렸다.“할아버지, 해외로 며칠 다녀오고 싶어요. 오랫동안 여행을 못 갔어요.”“안 돼. 네 몸 상태로는 그렇게 멀리 갈 수 없어!”성동철은 단호히 거절했다. 그는 아직 민채린의 스승에게 도움을 청해 볼 생각을 하고 있었다.그러나 고청민은 말했다.“민채린이 해외에 있어요. 그녀가 옆에 있으면 할아버지도 안심하실 거예요.”“민채린?”성동철의 얼굴에 희미한 희망의 빛이 떠올랐다.“그렇다면 민채린의 스승에게 직접 찾아갈 수 있는 거니?”“제 병에 대해 이미 채린이의 스승님께 여쭤봤어요.”“결과는 어땠니?”“스승님께서 알려줄 수 있는 것은 모두 알려 주셨어요. 하지만 정말 치료하기 어려운 병이래요.”성동철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실망을 느꼈다.결국, 그는 손을 흔들며 말했다.“그래. 가고 싶다면 가도 좋아. 다른 환경에서 지내는 것이 네 몸에도 좋을 거다.”게다가 민채린이 옆에 있으니, 문제가 생기더라도 신속히 치료할 수 있을 것이다.“오늘 바로 떠나려고 해요.”“이렇게 갑자기?”“그냥 즉흥적으로 생각한 거예요. 가고 싶을 때 가야죠.”고청민은 말하며 눈치를 보지 않았다
30분 후, 성동철과 고청민이 병실에서 나왔다. 성동철은 걱정스럽게 잔소리를 늘어놓았다.“의사가 병원에 며칠 더 있으라 했잖니? 왜 말을 안 들어? 적어도 또 무슨 일이 생기면 이렇게 급하게 서두르지 않아도 되잖아. 치료 시간을 늦출 수도 있다고...”고청민은 미소를 지었다. 그의 창백한 얼굴은 햇살처럼 부드러워 보였다.“괜찮아요. 집에 있는 의료 장비로도 충분해요.”성동철은 한숨을 쉬며 더 이상 고집하지 않았다.‘집에 있는 것도 나쁘지 않지. 집에 있으면 이 녀석을 더 볼 수 있잖아...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 일이고...’성동철은 운전기사에게 차를 병원 앞에 대라고 지시했다. 전화를 끊고 나서 그는 병원 입구의 벤치가 비어 있는 것을 보고 주변을 둘러보며 의아해했다.“지안이 여기 앉아 있지 않았니? 어디 갔지?”고청민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고운 속눈썹은 한껏 아래로 드리워 있었다. 눈에 감춰진 복잡한 감정이 보이지 않게 덮여 있는 것 같았다.“그리고 지원이도 보이지 않네. 네가 전화를 걸어 연락해 봐. 이제 집에 가야 한다고...”성동철은 난처한 표정으로 고청민에게 말하며, 심지안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전화는 계속 부재중이었다.고청민은 하지원에게 전화를 걸지 않고 바로 말했다.“지원이 오빠가 찾으러 왔어요. 아마도 지안 씨는 갑자기 일이 생겨서 간 것 같아요. 저희 먼저 집에 가죠.”성동철은 방금 의사가 자신에게 따로 했던 말들이 머릿속에 가득 차 있었다. 그는 빨리 집에 가서 외국의 의료 전문가들을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그래. 우리라도 먼저 가자.”‘성연신이 지안이를 데려갔을 수도 있어. 어쨌든 지안이는 다 큰 어른이니까 큰 문제는 없을 거야.’넓은 승용차 안에서, 고청민이 갑자기 성동철에게 말했다.“할아버지, 제가 죽으면 제 심장을 지원이에게 주세요.”어차피 죽으면 남겨둘 이유가 없으니, 필요한 사람에게 주는 것이 덕을 쌓는 일일 것이다.성동철은 얼굴빛이 변하며 호통쳤다.“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심지안은 차가운 눈빛으로 하지원을 바라보며 말했다.“모든 사람이 자기를 좋아하지도 않는 상대방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인생을 바칠 수 있는 것은 아니야.”심지안은 사랑의 위대함에 감탄했지만, 그런 희생정신을 가질 수는 없었다.하지원은 심지안의 말을 정확하게 알아듣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왜냐하면 난 인간미가 있고, 지안 씨는 없으니까요. 임시연이 당신 앞에서 죽었을 때, 살아있던 한 생명이 죽었는데도 지안 씨는 아무런 감정을 느낄 수 없는 사람인 것처럼 무관심했잖아요.”심지안은 갑자기 고개를 들어 지금까지의 무심한 태도를 거두고, 날카로운 시선으로 하지원을 쳐다보며 목소리를 높였다.“맞아요. 임시연은 내 아이를 훔치고, 내 남자를 빼앗고, 내 결혼을 망쳤어요. 게다가 여러 번 나를 죽이려고 했었죠. 이번에 죽은 사람이 임시연이 아니었다면, 다음번에 죽을 사람은 나일 수도 있어요. 지금 임시연이 죽어서 폭죽이라도 터뜨리고 싶은 마음이니까, 자기 일 아니라고 그런 쉬운 소리 하지 마세요!”처음에는 임시연의 죽음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꼈지만, 곧 심지안은 깨달았다. 임시연의 죽음은 자신과 아무 상관이 없으며, 그녀는 죽어 마땅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임시연은 살아서 더 많은 사람을 해치려 했기에 어쩌면 이렇게 죽는 것이 더 나은 상황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원은 심지안의 큰 목소리에 깜짝 놀라 얼굴이 창백해졌고, 잠시 말을 잃었다.“지원 씨는 사랑을 위해 모든 걸 희생할 수 있을지 몰라도, 난 아니에요. 날 냉정하다고 생각해도 좋아요.”심지안은 하지원과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하지원도 불쌍한 사람일 뿐이었다. 심지안은 자리에서 일어나 병실로 들어가려 했다. 한 발을 내딛자, 하지원이 다시 말을 걸었다.“정말로 청민 선배를 도와줄 생각이 없는 거예요? 사람 하나 구한다고 생각해 줘요... 평생 고마워할게요.”심지안은 잠시 멈칫했지만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그건 도움을 청하는 게 아니라 도덕적 강요에요.”심지안은 친구로
성동철은 깜짝 놀라 지팡이도 잊은 채 급히 움직였다. 카펫에 걸려 넘어질 뻔했지만, 한순간도 지체하지 않고 휘청거리며 2층으로 올라갔다.집사는 구급차를 부르기 위해 전화를 걸었고, 남은 하인들은 손님들을 휴식 공간으로 안내했다. 연회 내내 활기찼던 분위기가 갑자기 혼란스럽고 긴장된 분위기로 바뀌었다.심지안은 찡그린 얼굴로 성동철의 뒤를 따라 고청민의 방으로 들어갔다.커튼은 빛 한 줄기도 들어오지 못하게 꽉 닫혀 있었지만, 문을 열자 짙은 피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하인이 먼저 한 발 앞으로 나서서 전원 스위치를 켜자, 방 안은 갑자기 밝아졌다.우드톤 가구들이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옷들도 정리되어 소파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심지안은 방 안을 둘러보았지만, 고청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심지안은 약간 열려 있는 화장실 문을 바라보며, 눈빛이 어두워졌다.이때, 하지원이 화장실을 가리키며 말했다.“안에 있어요.”성동철은 떨리는 손으로 화장실 문을 열었다. 안은 엉망진창이었다. 바닥에는 붉은 핏자국이 가득했다.고청민은 욕조 안에 누워 있었다. 옷은 물에 젖어 축축하게 몸에 붙어 있었고, 두 손은 욕조 가장자리에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머리는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었고, 입가에는 피가 묻어 있어 원래 창백한 피부가 더욱 하얗게 보였다.고청민은 말라비틀어진 채 생기가 전혀 없는 모습이었다.성동철은 이마에 땀을 흘리며 손가락을 고청민의 코 밑에 대어 보았다. 그는 길게 숨을 내쉬며 하인들에게 소리쳤다.“구급차가 일찍 도착할 수 없을지도 모르니, 빨리 차에 태워서 병원으로 데리고 가!”하인들은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조심스럽게 고청민을 욕조에서 꺼냈다.심지안은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겁에 질린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심장이 빨리 뛰었다. 그녀는 혼이 나간 하지원을 바라보았다.“청민 씨... 어쩌다 이렇게 된 거죠? 왜 이렇게 피를 많이 흘린 건가요?”이 상황이 마치 자살을 암시하는 것 같았지만, 하지원은 그 말을 입 밖에
심지안은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했다.“말 좀 해봐요. 정말 시연 씨가 죽길 바란 거예요? 시연 씨가 죽으면 속 시원할 것 같았냐고요!”변석환은 심지안에게 소리쳤다. 울부짖는 변석환의 두 눈은 심하게 충혈되어 무섭게 보였다. 그리고 그의 큰 목소리는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변요석과 성연신이 먼저 달려왔다. 성연신은 심지안을 보호하며 변석환을 몇 걸음 뒤로 밀어냈다. 성연신의 행동은 냉담하면서도 약간의 분노가 섞여 있었다.“지안 씨 앞에서 임시연 그 여자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마. 다시 한번 실수하면 내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하하하! 살인범을 감싸고 도는 건가요?”변석환이 큰 소리로 웃으며 말을 이었다.“맞아요. 시연 씨의 죽음에는 당신과 심지안 씨도 책임이 있어요.”“퍽!”변요석은 변석환의 얼굴을 한 대 때렸다. 순간 정적이 흘렀다.“정신 차려. 임시연은 원래 죽어 마땅한 여자야! 더 이상 나를 창피하게 만들지 마!”변석환은 변요석을 바라보며, 맞은 얼굴을 손으로 문지르며 중얼거렸다.“원래 죽어야 했고... 맞아... 나를 속이고 이용했어... 죽어 마땅한 여자야...”하지만 변석환은 스스로 왜 이렇게 고통스러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잠을 잘 수도, 밥을 먹을 수 없었다.임시연이 죄를 지었음을 알고 있었지만, 변석환은 여전히 너무나도 힘들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녀를 미워하면서도 그녀가 죽기를 바라지 않았다.변요석은 주변에 지켜보는 눈이 많다는 것을 의식하며 분노를 억누르고 변석환에게 경고했다.“지금 당장 성씨 가문을 떠나. 네가 정신 차리고 지안 씨에게 사과할 준비가 되면... 그때 돌아와.”변석환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듯 비틀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순간, 사람들 사이로 문득 익숙한 그림자를 본 것 같았다.변석환은 그 그림자를 쫓아갔지만,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변석환은 한참 동안 멍하니 서 있었고, 그제야 그것이 자신의 착각임을 깨달았다.살아 있는 사람은 죽은 사람보다 더 큰 고통을 겪는다. 임시
자책하는 심지안을 보는 성연신은 가슴이 아픈 듯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당연히 아니죠. 임시연의 죽음은 지안 씨와 아무 상관없어요. 그러니까 혼자 그런 생각 하지 마요.”심지안도, 성연신도, 그 누구도 임시연이 거기서 뛰어내릴 거라고는 생각 못 했을 것이다.임시연이 심지안 앞에서 그리고 성원 그룹에서 죽은 건 심지안과 성연신에게 트라우마를 남겨주기 위해서였다.만약 제가 잘못되어 죽는다 해도 살아있는 사람들도 마음이 편하진 않을 테니까 그걸 노리고 뛰어내렸던 것 같다.성연신도 놀라긴 했지만 직접 본 게 아니니 그리 큰 충격은 받지 않았는데 문제는 심지안이었다.물론 임시연도 죽을 줄은 모르고 뛰어내렸겠지. 그냥 크게 다쳐서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게 감옥에 있는 것보단 나으니까 뛰어내린 걸 텐데 이렇게 죽어버려서 심지안만 힘들어하고 있었다.심지안은 공허한 눈으로 성연신을 보며 웃어보려 했지만 표정이 잔뜩 굳어있어서 웃는 게 우는 것보다 더 이상했다.“당신 말이 맞아요. 임시연은 천벌 받아서 죽은 건데 내가 기뻐하는 게 맞죠.”“그래요, 안 뛰어내렸어도 경찰한테 잡혀서 자유롭진 못했을 거예요.”성연신은 심지안의 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내가 지안 씨더러 임시연 잡아놓으라고 한 거잖아요. 귀신이 되어도 날 찾아올 거니까 지안 씨는 아무 걱정 하지 마요.”그때 오지석이 사실은 사람들을 데리고 올라오려 했지만 임시연이 미리 눈치를 채고 송준에게 도움을 청할까 봐 성연신이 말렸었는데 임시연이 이렇게 극단적인 사람인 줄 알았더라면 심지안을 절대 혼자 놔두지 않았을 것이다.“알겠어요.”긴장이 풀렸는지 심지안이 눈을 살짝 감으며 말했다.“나 아까 제대로 못 쉬어서 좀 잘래요.”“그래요, 내가 옆에 있을게요.”“네, 할아버지랑 우주한테는 나 병원에 있단 말 하지 마요.”“네.”가족들이 괜히 걱정할까 봐 신신당부를 하고서야 심지안은 침대에 누웠다.제 앞에 앉아있는 듬직한 성연신을 보니 안심이 되는지 그렇게 천천히 잠에 빠져들었다.한편 성연신은
그렇게 회의실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어버렸다.누구는 임시연을 구하겠다고 1층으로 달려 내려가고 누구는 창가에 기대어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아직 살아있어요!"그 모습을 보고 있던 심지안은 사람들의 인영이 환영처럼 눈 앞을 스쳐지나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머리도 어지럽고 귀에 까지 이명이 들려 온 세상이 흐릿하게 보였다.임시연이 뛰어내리는 결말을 예상해본적은 없었는데, 3층이 아주 높진 않지만 그렇다고 낮은 층수도 아니었다.조금 정신을 차린 심지안은 사람들의 질책이 담긴 시선을 느꼈다. 그들은 저들끼리 수군대며 심지안을 힐끔힐끔 보고 있었다."사모님도 너무 하시지, 어떻게 사람을 뛰어내릴 때까지 몰아붙여? 저러면 밤에 악몽 안 꾸나?""그리고 왜 자꾸 연다빈 씨한테 임시연이라고 하는 거야? 너무 간 거 아니야?""다빈 씨가 죽기라도 하면 어떡해? 그럼 사모님이 살인자 되는 거야?""다빈 씨가 귀신 돼서 사모님한테 복수하겠다고 찾아올 것 같아요."그 말을 듣고 있던 심지안은 이마에 힘을 주며 소리질렀다."내가 몰아붙인 거 아니고 본인이 뛰어내린 거야. 나랑 상관 없다고."심지안의 호통에 수군거림은 사라졌지만 그녀를 보는 시선은 여전히 매정했다.다들 "연다빈"에게 일이 생기면 심지안 책임으로 돌릴 준비가 되어있는 듯 싶었다.심지안은 애써 심호흡을 하며 현기증을 이겨내려 했다. 그리고 구급차를 부르려고 뒤를 돌 때 마침 이곳으로 뛰어오는 성연신과 오지석을 발견했다.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있는 성연신이 빠르게 다가와 심지안의 어깨를 잡으며 주드럽게 다독였다."괜찮아, 내가 왔잖아. 내가 알아서 할게."속눈썹이 떨릴 정도로 긴장하고 있던 심지안은 마침 다가오는 성연신을 보고 무슨 말이 라도 하려고 입을 벌렸지만 말을 채 내뱉기도 전에 다리에 힘이 풀리며 쓰러져 버리고 말았다.---시간이 조금 흘러 심지안이 눈을 뜬 곳은 병원이었다.흰 벽과 소독약 냄새, 그리고 핸드폰에서 흘러나오는 성원 그룹 직원 자살 사건은 임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