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철수는 몸이 밧줄에 단단히 묶인 채로 송준과 임시연의 대화를 엿들으며 잔뜩 열받은 채 발버둥 쳤다. 그는 아무런 반항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엄청난 후회가 밀려왔고, 얼굴이 붉어지며 지금 당장 이 사람들을 루갈에서 내쫓고 자신이 죽음으로 성연신에게 사죄하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다.“외출 훈련 중인 사람들이 곧 돌아오는지 확인해 봐. 그들이 소식을 미리 알고 도망가면 절대 안 돼.”송준은 시가를 깊이 들이마시며, 눈에는 살기가 번뜩였다.사실 방매향이 죽은 날부터 송석훈은 충격을 받아 성씨 가문을 더 이상 괴롭히지 않기로 결심했고, 비밀 조직의 관리에서 손을 떼고 모든 권한을 송준에게 넘겼다.성수광도 마찬가지였다. 죽은 사람은 돌아올 수 없다는 말이 있기에, 방매향의 자살을 계기로 과거의 원한이 다음 세대로 이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뜻을 알렸다.성수광은 성연신에게 복수를 멈추고 평온한 삶을 살기를 권하며, 이는 방매향의 마지막 소원이라고 말했다.그러자 성연신도 그의 말을 따랐다. 그는 루갈에 비밀 조직에 대한 감시를 철회하도록 명령했고, 일상으로 돌아갔다.하지만 송준은 야망이 큰 사람이었다. 그는 이번 작전을 비밀리에 계획했고, 심지어 송석훈조차 그 사실을 몰랐다.임시연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우리 사람들이 이미 밖을 지키고 있어요. 조금의 움직임만 있어도 알 수 있을 겁니다.”송준은 아무 말 없이 자신감에 찬 눈빛을 보였다.“윙윙윙...”안철수의 휴대폰이 울렸다.안철수는 눈이 크게 뜨며, 입이 봉쇄된 상태로 윙윙거리는 소리를 내어 휴대폰의 진동 소리를 가리려고 했다.송준은 그 소리에 주의를 돌렸고, 안철수를 힐끗 보았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안철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그 순간 송준이 갑자기 고개를 돌리며 책상 위에 놓인 휴대폰을 재빨리 집어 들고 안철수를 향해 흔들며 조롱했다.“바보 같은 놈, 청각장애인인 줄 알았냐? 하하하.”안철수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송준이 일부러 자신을 놀리고 낮잡아 비웃었다는
안철수는 자신이 첫 월급으로 샀던 휴대폰이 산산조각 나는 것을 보며 마음속의 격한 분노를 느꼈다. 그는 이를 악물고 송준을 노려보며, 송준을 천번 만번 죽이고 싶은 심정이었다.그 휴대폰은 이미 단종된 기종이었다!하지만 아무도 그를 신경 쓰지 않았다. 임시연은 분노로 가득 차서 비통해하는 안철수를 음산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했다.“어떡할까요, 여기 남아있는 사람들부터 먼저 죽일까요?”“미친X아!”“네가 감히 나를 죽이면, 난 귀신이 되어서라도 너를 가만두지 않을 거야!”안철수가 발악하는 것을 듣고 있던 송준은 몇 초간 고민하더니 말했다.“성연신이 알게 되었다고 해도 상관없어요. 그의 부하들은 지하 감옥에 감금당해 있고, 외부 훈련 중인 부하들도 무기를 가지고 있지 않으니까요. 게다가 우리는 인질도 있어요. 성연신은 내 상대가 될 수 없어요.”“한번 내기라도 해볼 생각인가요?”“그러지 말아야 할 이유도 없겠죠?”임시연의 얼굴에 불만이 스쳤고, 그녀는 불룩한 배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차라리 지금 확실하게 정리해 버려요. 지금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은 최대한 해결해야 해요.”‘산을 남겨 두면 땔감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잖아? 어쨌든 성연신에게 큰 손실을 입힐 수 있는 선택인데, 안철수는 결국 성연신이 아끼는 유능한 부하이니까!’지금의 임시연은 복수심에 불타올라 더 이상 성연신에게서 사랑을 기대하지 않았다.송준은 냉정하게 임시연을 바라보며 말했다.“당신의 역할은 비밀 조직의 일원일 뿐이에요. 나에게 조언할 자격 따위는 없어요.”임시연은 목이 메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계속해서 지금, 이 순간에 필요한 일을 끝내지 않으면 다시 기회가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임시연의 시선이 천천히 이동해 안철수에게로 향했다.만약 성연신을 죽일 수 없다면, 그의 가장 유능한 부하라도 죽여서 분풀이하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했다.임시연도 자신이 너무 잔인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
어둠 속에서 오직 희미하게 빛나는 휴대폰 화면이 성연신의 얼굴을 밝히고 있었다. 그의 얼굴 윤곽이 옅은 빛으로 덮여 있었다. 그는 눈을 약간 내리깔고, 길고 가는 손가락으로 펜을 꽉 쥔 채 종이 위에 한 획 한 획 계산하며 집중하고 있었다.심지안은 손전등 기능을 켠 휴대폰을 들고 작업하는 성연신을 비추었다. 그녀는 최대한 숨을 죽이며 집중하는 성연신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휴대폰의 손전등 기능을 켰더니, 배터리 소모가 매우 빨랐다. 약 반 시간 정도 지나자, 원래 60-70%였던 배터리가 이제는 10%대로 줄어들었다.심지안의 손바닥은 차가운 땀으로 미끄러웠다. 그녀는 성연신에게 뭔가 말을 해야 하고 싶었지만, 그를 방해할까 봐 걱정되었다.다음 순간, 성연신이 입을 열었다.“계산이 끝났어요.”심지안은 놀라움과 기쁨이 뒤섞인 표정으로 진심으로 칭찬했다.“이렇게 빨리? 정말 대단해요!”‘정말 잘생긴 데다가 지능까지 타고났나 봐, 앞으로 우주가 수학을 못 할까 봐 걱정할 필요가 없겠어!’성연신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100% 정확하다고는 장담할 수 없어요.”심지안은 순간 긴장했지만, 겉으로는 그를 안심시키려 애썼다.“괜찮아요, 우리 운이 그렇게 나쁘지 않을 거예요.”성연신은 잠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평소 냉정한 그의 목소리에도 약간의 긴장감이 묻어났다.“오늘 나와 함께 온 것을 후회하지 않나요?”“물론 후회하지 않아요.”심지안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동시에 힘이 있었다.그녀는 자신이 최면술에서 깨어난 후 병원에서 처음 본 남자가 바로 성연신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두 사람 사이에는 아이가 있었다. 그들은 6년을 알고 지냈지만, 5년 동안 떨어져 있었다. 그들은 너무나 많은 오해를 겪었다. 비록 성연신에게 잘못이 있었지만, 그는 바로잡으려는 자세를 보였다.그래서 심지안은 성연신을 믿기로 했다. 다시 자신을 그에게 맡기기로 했다. 아니, 이건 맡기는 것이 아니라 서로에 대한 신뢰였다.성연신의 입가에 미
송준은 성연신이 어떻게 안으로 들어왔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한 그는 임시연의 제안을 듣지 않은 것을 후회하기 시작했다.송준은 급히 모든 부하를 소집해 철저히 방어하며, 외출 훈련 중인 사람들과 성연신이 합류하지 못하도록 막으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남은 사람들을 데리고 루갈 내부로 들어가 상황을 확인하려 했다.그러나 그는 중요한 한 가지를 놓쳤다. 바로 임시연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것이었다....지하 감옥.성연신은 가능한 한 빨리 안에 갇혀 있던 사람들을 풀어주었다.“대표님!”사람들은 처음엔 충격을 받았고, 얼굴에는 믿기 어렵다는 듯 의아한 표정들을 하고 있었다. 몇몇은 목이 메었다.“대표님, 우리가 무능해서... 비밀 조직이 루갈에 몰래 들어왔습니다.”“그 말은 이제 그만하고, 송준이 신호를 들었을 테니 곧 이쪽으로 올 겁니다. 먼저 무기를 챙기고 나와 합류해요.”“하지만... 우리는... 이렇게 적은 인원으로 싸울 수 있을까요? 대표님, 부디 지안 님과 함께 먼저 나가십시오. 우리가 안전하게 나가실 때까지 목숨 바쳐 보호하겠습니다!”“바보 아니야, 대표님께서 도망치려 했다면 애초에 여기 오지도 않았겠지. 루갈을 지키려는 뜻이 분명하잖아!”“아, 맞네!”성연신은 이마를 짚으며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제 명령에 따르세요. 더 이상 지체하지 말고...”“네, 대표님!”사람들은 빠르게 무기를 챙기기 시작했고, 성연신은 다정한 눈길로 심지안을 바라보며 말했다.“여기서 나를 기다려 줘요.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절대 나가지 말고요. 만약... 내가 두 시간 안에 돌아오지 않으면, 원래 왔던 통로로 나가요. 한순간도 지체하지 말고, 알겠죠?”심지안은 지금의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함께 나가면 성연신에게 짐이 될 것이 분명했기에, 그녀는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 당신도 꼭 조심하고, 무사히 돌아와요.”“네!”성연신은 고개를 숙여 그녀의 이마에 진심 어린 키스를 남겼다.“이번 일이 끝나
차가운 빛이 감도는 칼날이 심지안의 심장을 향해 곧바로 찔러 들어왔다.심지안은 호흡이 거의 멈출 듯했다. 너무나도 갑작스러웠다.두 사람의 거리는 순식간에 가까워졌고,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꽃병으로 방어할 틈도 없었다.가슴 앞의 옷은 이미 상대방의 칼에 스쳐 있었다. 심지안은 연이어 몇 걸음 뒤로 비틀거리며 간신히 피했다.“이 못된 X, 오늘 너는 죽었어!”임시연은 원하던 목적을 이루지 못하자, 소름 끼치는 웃음을 지었다.심지안은 꽃병을 꽉 쥐고 빠르게 머리를 굴려 대응책을 생각하려 애썼다.지금 구조를 요청해서 성연신을 부르는 것은 첫째로 거리가 멀어서 들리지 않을 가능성이 컸고, 둘째로 성연신에게 방해가 될 것 같았다. 게다가 그쪽의 상황도 이곳보다 나을 것 같지 않았다.임시연이 다시 공격하려는 순간, 심지안은 입을 열어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성연신을 시연 씨에게 넘길게. 대신 나를 놔줘!”임시연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불룩한 배가 흔들릴 정도로 크게 웃었다.“나 지금 성연신에게 조금도 희망을 두지 않아. 넌 잘못 짚었어!”그녀는 심지안이 성연신을 설득할 수 있을 거라 믿지 않았고, 그녀가 진심으로 그런 마음을 가질 리 없다고 생각했다.“너 성연신 좋아한 지 오래됐잖아, 포기하지 마.”심지안이 진심으로 설득했다.“너 예쁘고, 또 연예인이잖아. 살인은 범죄야, 한순간의 충동으로 너의 미래를 망치지 마. 난 네가 아까워.”임시연이 비웃으며 말했다.“목숨을 위해서라면 그렇게 쉽게 사랑을 포기할 수 있는 거야?”“살고 봐야 하지 않겠어? 곧 죽을 판에 사랑이 무슨 소용이야.”“하하, 보아하니 너도 성연신에 대한 감정이 그 정도밖에 안 되나 보네. 소민정은 죽기 직전까지도 그 사람하고 결혼하고 싶어 했는데.”심지안은 꽃병을 잡고 있던 손을 덜덜 떨며 말했다.“소민정을 죽였어?”“그래.”임시연의 얼굴에 광기가 번졌다.“걱정하지 마, 곧 너도 따라가게 해줄 테니까.”“어떻게 죽였어? 네가 죽였어?”'철수 씨가 이 소식을
심지안은 어금니를 꽉 깨물며 속으로 생각했다.‘어떻게 해야 하지? 임산부의 배를 공격해도 되려나? 하지만 그녀의 배 속에 있는 아이는 무고한데... 만약 그녀를 제압하지 못하고 오히려 더 자극하게 된다면...’그 사이, 임시연이 들고 있던 칼이 곧 심지안에게 닿을 것 같았다. 심지안은 위험을 감수할 수 없어서 무의식적으로 눈을 감았다.“임시연!”민채린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곧이어 임시연은 뒤통수를 맞고 그대로 기절해 버렸다. 그녀는 손에 있던 칼을 ’쨍그랑’ 소리를 내며 떨어뜨려졌다.심지안은 눈앞에 갑자기 나타난 민채린을 보며 당황했다.“여긴 어떻게 왔어요?”민채린은 무릎을 짚고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안철수한테 몇 번이나 전화했는데 안 받더라고요. 그래서 지안 씨한테도 전화했는데 역시 안 받더라고요. 분명히 무슨 일이 생겼을 거라고 짐작하고 찾아왔어요.”“그런데 어떻게 알고 여기로 찾아온 거예요?”루갈의 주소는 비밀스러웠고, 근처에는 아무도 살지 않았다. 입구도 위장되어 있어서 겉으로는 폐기된 공장처럼 보였지만, 들어가면 완전히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일반 사람들은 여기를 알아차릴 수 없었다. 누군가 그녀에게 알려주지 않았다면...심지안은 끝까지 그녀가 다른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닌지 경계하며 한순간도 눈을 떼지 않고 민채린을 주시했다. 심지안은 계속해서 민채린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 관찰하려 했다.“고청민이 알려줬어요, 정욱도 말해줬고요.”민채린은 심지안의 마음속 걱정을 한눈에 알아차리고는 빠르게 설명했다.“그게 말이에요... 분명히 여러분이 위험에 처했을 거라고 느꼈는데 연락이 안 되니까... 어쩔 수 없이 고청민한테 루갈 위치를 물어봤어요. 고청민은 정확히는 모르겠다고 했지만 대략적인 위치를 말해줬고, 그의 말을 토대로 나는 정욱에게 물어봤어요.”‘고청민...’심지안은 고청민이 루갈의 대략적인 위치를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사람은 너무 많은 꿍꿍이가 있었고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그
민채린은 심지안의 눈 속 깊은 곳에 있는 경계심을 알아차리고 강요하지 않았다. 그녀는 대답한 후, 고개를 돌려 밖으로 떠났다.떠나기 전, 민채린은 임시연을 끈으로 묶인 채 옆 방에 두었다. 혹시 깨어나서 또 난동을 부릴까 봐서였다.얼마 지나지 않아, 민채린은 안철수를 힘겹게 업고 돌아왔다.심지안은 재빨리 다가가 손을 보태 함께 그를 침대에 눕혔다.안철수는 온몸이 피투성이였고, 옷도 피에 흠뻑 젖어 있었다.피는 바지까지 흘러내려 바닥에 뚝뚝 떨어졌다. 짙은 피 냄새가 좁은 방 안을 가득 채우자, 방금까지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던 심지안의 얼굴이 창백해졌다.“연신 씨는요? 연신 씨는 괜찮은 거예요?”심지안이 물었다.민채린은 의료 상자를 열면서 산소마스크를 꺼내 안철수에게 씌웠다. 다행히 루갈에는 의료 장비가 비교적 잘 갖춰져 있었다.“대표님도 조금 다쳤어요. 하지만 심각하지 않으니, 걱정하지 마세요.”민채린은 안철수를 보며 말했다.안철수는 힘겹게 눈을 뜨고, 미안한 표정으로 심지안에게 말했다.“제가 무능해서 루갈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연신 씨는 그냥 가벼운 타박상이잖아요. 근데 이 사람은 제가 제때 찾아가지 않았다면 아마 과다출혈로 이미 죽었을 거예요!”민채린은 화난 듯이 말했지만, 손놀림은 아주 부드러웠고 안철수가 더 아프지 않게 하려고 신경 썼다.안철수는 송준이 들고 있던 무기에 배를 한 번 찔리고, 성연신을 대신해 등을 내어주었다.그 외에도 작은 상처들이 여러 군데 있었다. 그의 원래 피부는 검었지만, 지금은 그 검은 피부가 창백하게 변했고 얼굴은 거의 잿빛에 가까웠다. 언제라도 죽을 사람처럼 보였다.심지안은 굳은 얼굴로 안철수의 출혈이 심한 배를 바라보며 말했다. “차로 병원에 데려다줄게요.”이곳에는 다친 사람들이 많을 것이고, 그녀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다.하지만 안철수는 단호하게 거절했다.“안 돼요, 대표님께 폐를 끼칠 수 없어요.”병원에 가면 경찰이 출동할 것이 분명했고, 대표님이 이
심지안은 숨이 막힐 듯한 답답함에 사로잡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한쪽 팔을 잃는 것은 성연신 같은 자존심 강한 사람에게는 단순한 신체적 결함이 아니라, 심리적으로도 큰 충격을 줄 것이 분명했다.“채린 씨는 뛰어난 의사잖아요. 연신 씨를 구해줘요, 제발...”심지안의 간절한 목소리에 민채린은 잠시 안철수의 상태를 살핀 후, 의료용 장갑 벗으며 조용히 말했다.“시도는 해볼 수 있어요. 하지만 결과를 보장할 수는 없어요.”“그래도 고마워요! 우리가 있는 병원 주소를 알려줄게요.”심지안이 주소를 알려주자, 민채린은 바로 출발 준비를 했다.병원으로 가는 길에 민채린은 고청민을 떠올렸다. 한쪽은 치료를 기다리는 환자, 다른 한쪽은 자기 친구였다.잠시 망설임 끝에 민채린은 고청민에게 전화를 걸었다. 만약 고청민이 성연신을 치료하지 말라고 한다면, 오늘은 가지 않기로 결심했다. 세상에는 환자가 못다 구할 정도로 많지만, 친구는 하나뿐이었다.“뚜... 뚜... 뚜...”통화연결음만 들릴 뿐이었다.“... 현재 전화를 받을 수 없으니, 나중에 다시 걸어주시기를 바랍니다.”고청민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민채린은 전화를 끊고 나서 마음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녀는 원래 의사로서 선행을 베풀고 모든 환자를 치료해야 한다고 배웠다. 그러나 민채린은 단순히 선하기만 한 의사가 아니었다. 그녀는 사람을 구할 때 항상 목적을 두고 있었다.금전적 이득이 없으면 아무리 애원해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뭔가 다르게 느껴졌다. 안철수가 알게 되면 분명히 화를 낼 것이었다.민채린은 힘껏 고개를 저으며 혼란스러운 생각들을 떨쳐내려 애썼다.‘그만 생각하자.'다행히 운전기사의 실력 덕분에 병원까지 막히지 않고 빠르게 도착할 수 있었다.병원장 겸 주치의는 민채린을 보자마자 깜짝 놀라며 말했다.“민채린 씨?”해외에서 주로 활동하던 그녀가 갑자기 오늘 여기에 나타난 이유를 의아해했지만, 곧 성연신이 그녀를 불렀으리라 연상했다.민채린은 긴 머리를 재빨
흥분을 가라앉힌 후, 심지안은 자신이 5년 전 해외에서 살았던 작은 별장과 흡사한 곳에 있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외부 경관이 달라 의아해하며 말했다.“5년 전과 똑같은 별장을 지었어요?”고청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짓다가 기침을 몇 번 하며 대답했다.“맞아요. 거의 차이가 없죠?”심지안은 방 안의 모든 물건을 둘러보며 고청민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은 조금 부드러워졌고, 마치 그를 가족으로 생각했던 시절로 돌아간 듯했다.“어떻게 하지원을 설득했어요?”그녀는 고청민이 하지원을 이용하여 완벽한 알리바이를 만든 것에 의아함을 감추지못했다.“한마디 했더니 바로 승낙했어요.”고청민은 미소를 지었다.하지원은 이처럼 온 마음을 다해 고청민을 따랐다.심지안은 복잡한 마음으로 물었다.“하지원 씨에게 미안하지 않아요?”고청민은 아무런 감정 없이 말했다.“보상해 줄 거예요.”‘보상? 어떻게 보상할 건데? 여자의 청춘을 어떻게 보상할 건데...’심지안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반박하지 않았다.하지원에게는 그저 사랑이었으니까...“밤새 아무것도 안 먹어서 배고프죠? 지안 씨가 좋아하는 비빔면을 준비해 뒀어요. 게살 비빔면이요.”고청민은 웃으며 심지안에게 말했다.“지안 씨가 분명 좋아할 거예요.”심지안은 배가 고파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식탁에 다가가기 전, 그녀는 게살 비빔면의 향긋한 냄새를 맡았다.고청민은 게살 비빔면을 그녀 앞에 놓고 기대에 찬 눈빛으로 말했다.“먹어요. 제철 대게는 정말 맛있거든요.”심지안은 망설임 없이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그의 말대로 정말 맛있었다. 커다란 게살이 면과 어우러져 입안 가득 풍미를 더했다.고청민의 뜨거운 시선에 심지안은 불편해하며 말했다.“청민 씨도 먹어요. 나만 보지 말고...”고청민은 미소를 지으며 젓가락을 들어 면을 집어 먹으려 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기침이 그를 멈추게 했다.연달아 몇 번의 기침이 멈추지 않았다. 점차 그의 가냘프고 쇠약한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기침이 점점 심해지자 그
집에 돌아온 후, 성연신은 성우주를 재우고 나서 긴급한 회사 업무를 처리했다. 일을 마치고 나니, 이미 새벽 3시가 넘어 있었다.성연신은 심지안에게 전화를 걸어 고청민의 상황을 물어볼까 했지만, 숙면을 방해할까 봐 포기했다.다음 날 아침, 성연신은 일찍 깨어났다. 시계를 보니 6시 30분이었다. 그는 심지안이 오늘 세움의 신제품 출시 준비로 일찍 출근할 거로 생각하고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물으려 했다.이때 손이 미끄러져 휴대폰을 바닥에 떨어뜨렸고, 주어 보니 액정이 나가 있었다.갑작스러운 실수에 그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깨진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며 불안감이 스며들었다.성연신은 다른 휴대폰으로 심지안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결국 부재중으로 받지 않았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성씨 가문으로 출발했다.성씨 가문에 도착했을 때, 성동철은 막 깨어나서 정원에서 산책 중이었다.성연신으로부터 두 사람이 지난밤 함께 있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 성동철은 고청민이 출발 직전에 했던 말이 떠올라 이마를 찡그렸다.‘그 녀석이 설마...’성연신은 성동철의 표정이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급하게 물었다.“어르신, 혹시 지안 씨가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어쩌면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네.”“어디죠?”“해외에 있을 가능성이 크네.”성연신은 눈썹을 찡그리며 물었다.“무슨 말씀입니까?”성동철은 고청민이 출발 전에 했던 특별한 부탁을 성연신에게 말해주고, 동시에 고청민에게 전화를 걸었다.성연신은 주먹을 꽉 쥐고 심지안에게 계속 전화를 걸었다. 한참의 신호음 끝에 전화가 연결되었다.“지안 씨, 어디에 있어요?”“성연신 대표님, 접니다.”고청민의 평온한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고, 성연신의 신경을 자극했다.성연신은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이 자식아, 지안 씨를 어디로 데려간 거야?”“우리는 해외에 있어요. 안전하니까 걱정하지 마세요.”고청민은 계속해서 말했다.“지안 씨를 며칠만 빌리는 셈이에요. 너무 무리한 일은 하지 않을 테니, 흥분하지 마세요
“네. 할아버지, 그러니 제발 막지 말아 주세요.”“지금 나와 상의하는 게 아니라 통보하는 거구나!”“할아버지, 용서해 주세요.”성동철은 입을 열었다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한순간에 십 년은 늙은 것처럼 보였고, 무력한 눈으로 먼 곳을 바라보았다.한참 후에야 그는 천천히 말했다.“해외 전문가와 이미 연락을 취했으니, 너는 안심하고 치료에 전념해라. 우리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고청민은 그의 고집을 읽고 눈을 깜빡였다. 긴 속눈썹이 갑자기 젖어 들었다.사실, 그도 할아버지와 몇 년 더 함께하고 싶었다.집에 돌아오니, 성동철이 연락한 해외 전문가로부터 답변이 도착해 있었다. 그들은 신의라 불리는 의사가 이미 고청민을 치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자신들이 개입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고청민은 낙담하지 않고 오히려 성동철을 안심시키며 주제를 돌렸다.“할아버지, 해외로 며칠 다녀오고 싶어요. 오랫동안 여행을 못 갔어요.”“안 돼. 네 몸 상태로는 그렇게 멀리 갈 수 없어!”성동철은 단호히 거절했다. 그는 아직 민채린의 스승에게 도움을 청해 볼 생각을 하고 있었다.그러나 고청민은 말했다.“민채린이 해외에 있어요. 그녀가 옆에 있으면 할아버지도 안심하실 거예요.”“민채린?”성동철의 얼굴에 희미한 희망의 빛이 떠올랐다.“그렇다면 민채린의 스승에게 직접 찾아갈 수 있는 거니?”“제 병에 대해 이미 채린이의 스승님께 여쭤봤어요.”“결과는 어땠니?”“스승님께서 알려줄 수 있는 것은 모두 알려 주셨어요. 하지만 정말 치료하기 어려운 병이래요.”성동철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실망을 느꼈다.결국, 그는 손을 흔들며 말했다.“그래. 가고 싶다면 가도 좋아. 다른 환경에서 지내는 것이 네 몸에도 좋을 거다.”게다가 민채린이 옆에 있으니, 문제가 생기더라도 신속히 치료할 수 있을 것이다.“오늘 바로 떠나려고 해요.”“이렇게 갑자기?”“그냥 즉흥적으로 생각한 거예요. 가고 싶을 때 가야죠.”고청민은 말하며 눈치를 보지 않았다
30분 후, 성동철과 고청민이 병실에서 나왔다. 성동철은 걱정스럽게 잔소리를 늘어놓았다.“의사가 병원에 며칠 더 있으라 했잖니? 왜 말을 안 들어? 적어도 또 무슨 일이 생기면 이렇게 급하게 서두르지 않아도 되잖아. 치료 시간을 늦출 수도 있다고...”고청민은 미소를 지었다. 그의 창백한 얼굴은 햇살처럼 부드러워 보였다.“괜찮아요. 집에 있는 의료 장비로도 충분해요.”성동철은 한숨을 쉬며 더 이상 고집하지 않았다.‘집에 있는 것도 나쁘지 않지. 집에 있으면 이 녀석을 더 볼 수 있잖아...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 일이고...’성동철은 운전기사에게 차를 병원 앞에 대라고 지시했다. 전화를 끊고 나서 그는 병원 입구의 벤치가 비어 있는 것을 보고 주변을 둘러보며 의아해했다.“지안이 여기 앉아 있지 않았니? 어디 갔지?”고청민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고운 속눈썹은 한껏 아래로 드리워 있었다. 눈에 감춰진 복잡한 감정이 보이지 않게 덮여 있는 것 같았다.“그리고 지원이도 보이지 않네. 네가 전화를 걸어 연락해 봐. 이제 집에 가야 한다고...”성동철은 난처한 표정으로 고청민에게 말하며, 심지안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전화는 계속 부재중이었다.고청민은 하지원에게 전화를 걸지 않고 바로 말했다.“지원이 오빠가 찾으러 왔어요. 아마도 지안 씨는 갑자기 일이 생겨서 간 것 같아요. 저희 먼저 집에 가죠.”성동철은 방금 의사가 자신에게 따로 했던 말들이 머릿속에 가득 차 있었다. 그는 빨리 집에 가서 외국의 의료 전문가들을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그래. 우리라도 먼저 가자.”‘성연신이 지안이를 데려갔을 수도 있어. 어쨌든 지안이는 다 큰 어른이니까 큰 문제는 없을 거야.’넓은 승용차 안에서, 고청민이 갑자기 성동철에게 말했다.“할아버지, 제가 죽으면 제 심장을 지원이에게 주세요.”어차피 죽으면 남겨둘 이유가 없으니, 필요한 사람에게 주는 것이 덕을 쌓는 일일 것이다.성동철은 얼굴빛이 변하며 호통쳤다.“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심지안은 차가운 눈빛으로 하지원을 바라보며 말했다.“모든 사람이 자기를 좋아하지도 않는 상대방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인생을 바칠 수 있는 것은 아니야.”심지안은 사랑의 위대함에 감탄했지만, 그런 희생정신을 가질 수는 없었다.하지원은 심지안의 말을 정확하게 알아듣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왜냐하면 난 인간미가 있고, 지안 씨는 없으니까요. 임시연이 당신 앞에서 죽었을 때, 살아있던 한 생명이 죽었는데도 지안 씨는 아무런 감정을 느낄 수 없는 사람인 것처럼 무관심했잖아요.”심지안은 갑자기 고개를 들어 지금까지의 무심한 태도를 거두고, 날카로운 시선으로 하지원을 쳐다보며 목소리를 높였다.“맞아요. 임시연은 내 아이를 훔치고, 내 남자를 빼앗고, 내 결혼을 망쳤어요. 게다가 여러 번 나를 죽이려고 했었죠. 이번에 죽은 사람이 임시연이 아니었다면, 다음번에 죽을 사람은 나일 수도 있어요. 지금 임시연이 죽어서 폭죽이라도 터뜨리고 싶은 마음이니까, 자기 일 아니라고 그런 쉬운 소리 하지 마세요!”처음에는 임시연의 죽음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꼈지만, 곧 심지안은 깨달았다. 임시연의 죽음은 자신과 아무 상관이 없으며, 그녀는 죽어 마땅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임시연은 살아서 더 많은 사람을 해치려 했기에 어쩌면 이렇게 죽는 것이 더 나은 상황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원은 심지안의 큰 목소리에 깜짝 놀라 얼굴이 창백해졌고, 잠시 말을 잃었다.“지원 씨는 사랑을 위해 모든 걸 희생할 수 있을지 몰라도, 난 아니에요. 날 냉정하다고 생각해도 좋아요.”심지안은 하지원과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하지원도 불쌍한 사람일 뿐이었다. 심지안은 자리에서 일어나 병실로 들어가려 했다. 한 발을 내딛자, 하지원이 다시 말을 걸었다.“정말로 청민 선배를 도와줄 생각이 없는 거예요? 사람 하나 구한다고 생각해 줘요... 평생 고마워할게요.”심지안은 잠시 멈칫했지만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그건 도움을 청하는 게 아니라 도덕적 강요에요.”심지안은 친구로
성동철은 깜짝 놀라 지팡이도 잊은 채 급히 움직였다. 카펫에 걸려 넘어질 뻔했지만, 한순간도 지체하지 않고 휘청거리며 2층으로 올라갔다.집사는 구급차를 부르기 위해 전화를 걸었고, 남은 하인들은 손님들을 휴식 공간으로 안내했다. 연회 내내 활기찼던 분위기가 갑자기 혼란스럽고 긴장된 분위기로 바뀌었다.심지안은 찡그린 얼굴로 성동철의 뒤를 따라 고청민의 방으로 들어갔다.커튼은 빛 한 줄기도 들어오지 못하게 꽉 닫혀 있었지만, 문을 열자 짙은 피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하인이 먼저 한 발 앞으로 나서서 전원 스위치를 켜자, 방 안은 갑자기 밝아졌다.우드톤 가구들이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옷들도 정리되어 소파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심지안은 방 안을 둘러보았지만, 고청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심지안은 약간 열려 있는 화장실 문을 바라보며, 눈빛이 어두워졌다.이때, 하지원이 화장실을 가리키며 말했다.“안에 있어요.”성동철은 떨리는 손으로 화장실 문을 열었다. 안은 엉망진창이었다. 바닥에는 붉은 핏자국이 가득했다.고청민은 욕조 안에 누워 있었다. 옷은 물에 젖어 축축하게 몸에 붙어 있었고, 두 손은 욕조 가장자리에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머리는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었고, 입가에는 피가 묻어 있어 원래 창백한 피부가 더욱 하얗게 보였다.고청민은 말라비틀어진 채 생기가 전혀 없는 모습이었다.성동철은 이마에 땀을 흘리며 손가락을 고청민의 코 밑에 대어 보았다. 그는 길게 숨을 내쉬며 하인들에게 소리쳤다.“구급차가 일찍 도착할 수 없을지도 모르니, 빨리 차에 태워서 병원으로 데리고 가!”하인들은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조심스럽게 고청민을 욕조에서 꺼냈다.심지안은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겁에 질린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심장이 빨리 뛰었다. 그녀는 혼이 나간 하지원을 바라보았다.“청민 씨... 어쩌다 이렇게 된 거죠? 왜 이렇게 피를 많이 흘린 건가요?”이 상황이 마치 자살을 암시하는 것 같았지만, 하지원은 그 말을 입 밖에
심지안은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했다.“말 좀 해봐요. 정말 시연 씨가 죽길 바란 거예요? 시연 씨가 죽으면 속 시원할 것 같았냐고요!”변석환은 심지안에게 소리쳤다. 울부짖는 변석환의 두 눈은 심하게 충혈되어 무섭게 보였다. 그리고 그의 큰 목소리는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변요석과 성연신이 먼저 달려왔다. 성연신은 심지안을 보호하며 변석환을 몇 걸음 뒤로 밀어냈다. 성연신의 행동은 냉담하면서도 약간의 분노가 섞여 있었다.“지안 씨 앞에서 임시연 그 여자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마. 다시 한번 실수하면 내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하하하! 살인범을 감싸고 도는 건가요?”변석환이 큰 소리로 웃으며 말을 이었다.“맞아요. 시연 씨의 죽음에는 당신과 심지안 씨도 책임이 있어요.”“퍽!”변요석은 변석환의 얼굴을 한 대 때렸다. 순간 정적이 흘렀다.“정신 차려. 임시연은 원래 죽어 마땅한 여자야! 더 이상 나를 창피하게 만들지 마!”변석환은 변요석을 바라보며, 맞은 얼굴을 손으로 문지르며 중얼거렸다.“원래 죽어야 했고... 맞아... 나를 속이고 이용했어... 죽어 마땅한 여자야...”하지만 변석환은 스스로 왜 이렇게 고통스러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잠을 잘 수도, 밥을 먹을 수 없었다.임시연이 죄를 지었음을 알고 있었지만, 변석환은 여전히 너무나도 힘들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녀를 미워하면서도 그녀가 죽기를 바라지 않았다.변요석은 주변에 지켜보는 눈이 많다는 것을 의식하며 분노를 억누르고 변석환에게 경고했다.“지금 당장 성씨 가문을 떠나. 네가 정신 차리고 지안 씨에게 사과할 준비가 되면... 그때 돌아와.”변석환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듯 비틀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순간, 사람들 사이로 문득 익숙한 그림자를 본 것 같았다.변석환은 그 그림자를 쫓아갔지만,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변석환은 한참 동안 멍하니 서 있었고, 그제야 그것이 자신의 착각임을 깨달았다.살아 있는 사람은 죽은 사람보다 더 큰 고통을 겪는다. 임시
자책하는 심지안을 보는 성연신은 가슴이 아픈 듯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당연히 아니죠. 임시연의 죽음은 지안 씨와 아무 상관없어요. 그러니까 혼자 그런 생각 하지 마요.”심지안도, 성연신도, 그 누구도 임시연이 거기서 뛰어내릴 거라고는 생각 못 했을 것이다.임시연이 심지안 앞에서 그리고 성원 그룹에서 죽은 건 심지안과 성연신에게 트라우마를 남겨주기 위해서였다.만약 제가 잘못되어 죽는다 해도 살아있는 사람들도 마음이 편하진 않을 테니까 그걸 노리고 뛰어내렸던 것 같다.성연신도 놀라긴 했지만 직접 본 게 아니니 그리 큰 충격은 받지 않았는데 문제는 심지안이었다.물론 임시연도 죽을 줄은 모르고 뛰어내렸겠지. 그냥 크게 다쳐서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게 감옥에 있는 것보단 나으니까 뛰어내린 걸 텐데 이렇게 죽어버려서 심지안만 힘들어하고 있었다.심지안은 공허한 눈으로 성연신을 보며 웃어보려 했지만 표정이 잔뜩 굳어있어서 웃는 게 우는 것보다 더 이상했다.“당신 말이 맞아요. 임시연은 천벌 받아서 죽은 건데 내가 기뻐하는 게 맞죠.”“그래요, 안 뛰어내렸어도 경찰한테 잡혀서 자유롭진 못했을 거예요.”성연신은 심지안의 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내가 지안 씨더러 임시연 잡아놓으라고 한 거잖아요. 귀신이 되어도 날 찾아올 거니까 지안 씨는 아무 걱정 하지 마요.”그때 오지석이 사실은 사람들을 데리고 올라오려 했지만 임시연이 미리 눈치를 채고 송준에게 도움을 청할까 봐 성연신이 말렸었는데 임시연이 이렇게 극단적인 사람인 줄 알았더라면 심지안을 절대 혼자 놔두지 않았을 것이다.“알겠어요.”긴장이 풀렸는지 심지안이 눈을 살짝 감으며 말했다.“나 아까 제대로 못 쉬어서 좀 잘래요.”“그래요, 내가 옆에 있을게요.”“네, 할아버지랑 우주한테는 나 병원에 있단 말 하지 마요.”“네.”가족들이 괜히 걱정할까 봐 신신당부를 하고서야 심지안은 침대에 누웠다.제 앞에 앉아있는 듬직한 성연신을 보니 안심이 되는지 그렇게 천천히 잠에 빠져들었다.한편 성연신은
그렇게 회의실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어버렸다.누구는 임시연을 구하겠다고 1층으로 달려 내려가고 누구는 창가에 기대어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아직 살아있어요!"그 모습을 보고 있던 심지안은 사람들의 인영이 환영처럼 눈 앞을 스쳐지나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머리도 어지럽고 귀에 까지 이명이 들려 온 세상이 흐릿하게 보였다.임시연이 뛰어내리는 결말을 예상해본적은 없었는데, 3층이 아주 높진 않지만 그렇다고 낮은 층수도 아니었다.조금 정신을 차린 심지안은 사람들의 질책이 담긴 시선을 느꼈다. 그들은 저들끼리 수군대며 심지안을 힐끔힐끔 보고 있었다."사모님도 너무 하시지, 어떻게 사람을 뛰어내릴 때까지 몰아붙여? 저러면 밤에 악몽 안 꾸나?""그리고 왜 자꾸 연다빈 씨한테 임시연이라고 하는 거야? 너무 간 거 아니야?""다빈 씨가 죽기라도 하면 어떡해? 그럼 사모님이 살인자 되는 거야?""다빈 씨가 귀신 돼서 사모님한테 복수하겠다고 찾아올 것 같아요."그 말을 듣고 있던 심지안은 이마에 힘을 주며 소리질렀다."내가 몰아붙인 거 아니고 본인이 뛰어내린 거야. 나랑 상관 없다고."심지안의 호통에 수군거림은 사라졌지만 그녀를 보는 시선은 여전히 매정했다.다들 "연다빈"에게 일이 생기면 심지안 책임으로 돌릴 준비가 되어있는 듯 싶었다.심지안은 애써 심호흡을 하며 현기증을 이겨내려 했다. 그리고 구급차를 부르려고 뒤를 돌 때 마침 이곳으로 뛰어오는 성연신과 오지석을 발견했다.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있는 성연신이 빠르게 다가와 심지안의 어깨를 잡으며 주드럽게 다독였다."괜찮아, 내가 왔잖아. 내가 알아서 할게."속눈썹이 떨릴 정도로 긴장하고 있던 심지안은 마침 다가오는 성연신을 보고 무슨 말이 라도 하려고 입을 벌렸지만 말을 채 내뱉기도 전에 다리에 힘이 풀리며 쓰러져 버리고 말았다.---시간이 조금 흘러 심지안이 눈을 뜬 곳은 병원이었다.흰 벽과 소독약 냄새, 그리고 핸드폰에서 흘러나오는 성원 그룹 직원 자살 사건은 임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