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밥 안 먹었죠? 이건 제가 대표님에게 드린 건데, 한 그릇이 남았으니 괜찮다면 드세요. 수고스럽겠지만 심지안 씨를 잘 돌봐줘요.”정욱은 들어오는 도윤지를 보고 테이블 위에 있는 초밥 세트를 손에 쥐고 건넸다.작은 구름 모양의 마크가 붙어 있는 정교한 손잡이가 상자 위에 나란히 놓여 있었다.도윤지는 이 가게가 제경에서 유명한 일식집인 것을 알고 있었다. 가게의 식재료는 모두 당일 외국에서 공수해 오는데, 가격도 음식 퀄리티만큼 비쌌다. 정욱이 준 이 도시락만 해도 10만 원 이상일 것이었다.도윤지는 한 번 가서 먹어봤던 기억을 떠올리며, 괜히 시큰둥한 표정을 지으며 도시락을 건네받았다.“고맙습니다.”정욱은 웃으며 말했다.“참, 저번에 연구소에 왔을 때 미안했어요. 제가 너무 조급해서 태도가 좀 별로였죠.”도윤지는 눈썹을 약간 치켜세웠다가, 다시 표정을 숨겼다.“그랬었나요? 벌써 잊어버렸어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그렇다면 다행이네요. 지안 씨가 아플까 봐 걱정되네요, 주삿바늘을 뽑을 때 좀 살살해 주세요.”도윤지는 정욱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그가 도시락까지 챙겨준 것은 심지안에게 잘해 달라고 부탁하기 위함이었다.‘그렇지 않았다면 눈길조차 주지 않았을 거야…’다른 환자의 보호자가 이렇게 챙겨주었다면 그녀는 기뻤을 것이다. 그러나 심지안에게는 깊은 질투만 느꼈다.약을 갈고 나서 성연신은 눈을 치켜들고 도윤지가 떠나는 쪽을 흘겨보았다.이때 정욱이 급히 설명했다."대표님, 뭔가 언짢아 보여서 듣기 좋은 말 몇 마디 했습니다.”정욱은 보광 그룹이 발전하기 전부터 성연신과 함께 해왔고, 성연신이 처음에 만인의 존경을 받는 인물이 아니었을 때부터 그의 곁에 있었다.창업 초기에는 항상 어려움이 많았다. 성연신의 오른팔로서 정욱은 다양한 상황에서 다양한 사람을 만난 때로는 자존심을 내려놓고 때로는 아부도 해야만 했다. 그러다 보니, 정욱은 그런 것에 개의치 않게 되었고, 성격이 좋고 나쁨을 떠나서 상대방의 기분이 좋고 나쁨을 한눈에
정욱은 어째서인지 눈앞의 여자가 수상하다고 느꼈다. 그녀가 무엇을 잘못했는지는 구체적으로 형용할 수 없었다. 그래서 계속해서 그녀를 주시하고 있었다.도윤지는 그의 눈빛을 눈치채고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제가 무슨 실수라도 한 건가요? 왜 계속 저를 쳐다보시는 거죠?”정욱은 머쓱하게 웃으며 아무 일 아니란 듯 말했다.“아니... 다름이 아니라... 너무 예뻐서 눈을 뗄 수 없었어요.”정욱은 속으로 자기 뺨을 후려갈겼다.‘양심 없는 짓이야! 눈 뜨고 거짓말하는 것보다 더 양심 없는 짓이야! 벼락 맞지는 않겠지?’도윤지는 어안이 벙벙해져서 얼굴에 수줍음을 띠고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그녀는 자신이 심지안보다 뒤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고작 비서 따위는 성이 차지 않았다.“정욱 씨, 무슨 소리예요!”진유진은 언제 왔는지, 그녀는 병실 입구에 서서, 두 손을 허리에 짚고, 화난 얼굴로 그에게 소리쳤다. 그녀는 거의 그 자리에서 정욱을 때릴 뻔했다.‘예뻐? 어디가 예뻐! 어젯밤에 고백해 놓고 오늘 바로 딴 여자에게 작업이야? 이런 미친X!’정욱은 진유진의 눈빛을 마주치자, 순식간에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스스로도 이 상황을 해명할 길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괜한 소리를 해서... 이제 어떡하지?’도윤지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지만, 오히려 허영심이 배가 되었다. 일부러 가슴을 펴고 진유진 앞을 지나가는 것은 소리 없는 자랑 같았다.“화내지 마세요, 전 이런 타입을 좋아하지 않아요. 걱정하지 마세요.”진유진은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그녀는 정욱을 내보내고 혼자 심지안을 보살피려 했다.정욱은 어쩔 수 없이 병실에서 나갔다.진유진은 의자를 끌고 심지안의 병상 곁으로 가서 하소연했다.토라진 눈빛으로 링거 튜브에 공기가 있는 것을 힐끗 쳐다보더니, 그녀는 사람을 찾기 위해 엉덩이를 의자에서 떼고 문 쪽으로 향하다가 밖에서 성연신과 부딪혔다.그녀는 링거 튜브를 짚으며 말했다.“때마침 잘 왔네요. 빨리 의료진을 불러요. 링거
엄 교수님은 상황을 알고 노발대발했다. 그는 기본적으로 이것이 도윤지의 소행이라고 확신했지만, 한편으로는 도윤지가 그런 일을 했다는 것을 믿기 어려워했다.CCTV를 확인해 보니, 도윤지가 수액을 갈기 전에 약국에 다녀온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니 진실은 명백했다.곧 도윤지는 성연신 앞에 강제로 끌려왔다."왜 이러시는 거예요! 이거 놔요!”도윤지는 고집이 세서 큰 재난이 닥친 상황에서도 자신의 계획이 탄로 난 줄 모르고 당당하게 소리쳤다.그녀가 이렇게 당당할 수 있었던 것은 심지안에게 아무런 위급상황도 일어나지 않았고, 병실의 경보장치도 울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기껏해야 뭔가를 발견했을 수도 있겠지만, 심지안이 멀쩡하니 그걸 인정하지 않으면 그만이라 생각했다.엄 교수님은 한걸음에 그녀 앞으로 달려가 엄숙하게 물었다.“심지안 씨의 수액에서 정상 용량의 몇 배가 넘는 진정제가 검출됐는데, 어떻게 된 일이야?”“교수님, 저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릅니다.”그녀는 겁에 질린 듯 고개를 가로저으며 병상의 멀쩡한 심지안을 바라보았다.“그리고 심지안 씨는 지금 멀쩡하지 않나요?”“그건 성연신 대표님이 일찍 발견했기 때문이지! 아니었으면 심지안 환자는 지금 당장...”엄 교수는 말하다 멈췄다. 환자가 견딜 수 있는 범위를 초과하는 다량의 진정제를 주사하면 당장 죽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의대생인 도윤지가 그런 상식을 모를 리가 없었다.“그러면 심지안 씨는 운이 좋았네요.”그녀는 능청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진유진은 화가 나서 그녀의 뺨을 여러 번 때렸다.도윤지는 뺨이 얼얼해졌지만 무고한 척하며 말했다.“당신 미쳤어요? 이거 폭행인 거 아니에요?”정욱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CCTV 화면을 그녀 앞에 두고 재생했다.“엄 교수님께서는 오늘 하루 동안 지안 씨 말고는 진정제를 처방받은 환자는 없다고 했어요. 약국에 가서 여분의 진정제를 어디에 쓰려고 챙긴 겁니까? 또한, 지안 씨의 수액은 오직 당신만이 접촉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살인
일부러 사고를 낸 운전기사는 아주 노련하고 뛰어난 기술로 도윤지의 두 다리를 정확하게 노렸다.도윤지는 5미터나 날아가 그 자리에서 혼수상태에 빠졌다. 그렇게 앞으로 휠체어를 타야만 하는 운명이 되었다.민채린은 이 광경을 지켜보며 얼마 전 성연신과 통화했을 때 느꼈던 그의 냉정하고 단호한 태도를 떠올렸다. 방금 도윤지가 연구소에서 내동댕이쳐지는 것을 직접 목격하기까지 했으니, 많은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턱을 만지작거리며 잠시 깊은 생각에 잠겼다.도윤지는 별로 인상 깊지 않았지만, 전에 같은 대학에 다녔기에 얼굴은 익었다. 게다가 고청민은 대학시절 학교에서 워낙 유명했던 인물이라 대충 어떤 사이인지 짐작이 갔다. 도윤지, 그녀도 소민정처럼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민채린은 심리 연구소로 들어가 엄 교수와 인사를 나누고 나서야 방금 일어난 모든 일을 알게 되었다.민채린은 크게 체감하지 못했지만, 엄 교수의 수준은 세계 정상급이니, 심지안은 기껏해야 3일 안에 깨어날 것이라 장담했다. 하지만 얼마나 빨리 의식을 되찾을지는 온전히 그녀에게 달려 있었다.최면술은 정의하기 어려운 의술이었다. 아무리 강한 사람이라도 꼭두각시로 조종될 가능성이 컸고, 조종자가 무엇을 시키든 무조건 따르게 되었다.어떤 면에서 보면, 고청민은 심지안을 최면에 걸리게 하면서 그에게 불리한 기억만을 잊게 하려고 했을 뿐, 그녀를 직접 사랑에 빠지게 만들지는 않았다. 이런 면에서 보면, 최면술이 결국 자신을 속이는 것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만약 정말로 최면술을 이용해 심지안을 그에게 완전히 헌신적인 상태로 만들었다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슬픈 일이었을 것이다.민채린은 시간을 확인하고 심지안이 있는 진료실로 갔다.“다들 잘 지냈어요?”성연신은 민채린이 어젯밤의 불쾌한 일을 모두 잊고 그런 일은 없었던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자리에 앉는 것을 보고 눈썹을 치켜올렸다.“여긴 왜 온 거죠?”“사실 딱히 이유는 없어요.”민채린은 새로 한 네
고청민이 병에 걸릴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녀는 갑작스럽게 충격으로 걷잡을 수 없는 두근거림을 느꼈다. 희귀암은 전 세계에 100명도 없을 수 있는데, 하필이면 그녀가 가장 아끼는 친구가 걸리다니...민채린은 도저히 그를 구할 수 없었고, 기껏해야 병세를 늦출 수 있을 뿐이었다.앞으로 그녀는 그가 화학요법으로 항암치료를 하는 모습을 직접 보게 될 것이다. 탈모가 되어 머리카락이 모두 빠지고, 몸이 수척해지며, 각종 기능이 교란되고 파괴될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제 겨우 스무 살 남짓한 젊은 나이에 한창때였다.제경을 떠나면서도 민채린은 자신이 고청민을 구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때로는 슬펐다. 한의학도 물론 좋지만, 희귀암을 치료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화학요법으로 하는 항암치료였다.E국에 이 분야의 의학 전문가가 있다고 들었고, 그녀는 그곳에서 배우고 싶어 했다.성연신은 눈을 내리깔아 눈 밑의 표정 변화를 감췄다.“안 되는 건 아니지만, 당신의 성의를 봐야겠습니다.”솔직히 말해서, 성연신은 고청민을 정말로 철저하게 짓밟을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성동철이 절대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민채린은 눈꺼풀이 떨리며, 의혹이 섞인 눈으로 성연신을 바라보았다.“간단해요, 남자 한 명을 구워삶아 주세요.”“누구 말입니까?”민채린이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너무 못생긴 남자는 곤란한데요?”그녀는 노는 것을 좋아하고 개방된 섹스 문화를 즐기지만, 아무 남자나 갖고 놀지는 않았다.“채린 씨도 아는 사람입니다.”“네?”“하지원의 오빠,하지웅이요.”민채린은 어리둥절했다.“하지웅을 유혹하라고요?”“네.”최근 며칠 동안 이사회의 사람들이 이미 협박받았다는 것을 증언하기로 동의했지만, 그들이 전매한 계약서를 누군가가 가져와야 했다.‘계약서는 하지웅의 손에 있을 것이다. 물론, 고청민 손에 있을 가능성도 있어...’“당신 제정신이에요? 하지웅과 고청민은 한 편이에요. 제가 고청민과 친구인데, 제가 하지웅을 꼬시
“그래요... 채린 씨 말이 맞네요.”정욱이 옆에서 보기에도 고청민이 심지안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대표님이 심지안과 얽힌 지 5년, 고청민이 심지안을 쫓아다닌 시간도 적지 않지... 사랑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오랜 시간을 한 사람에게 낭비하지 않았을 거니까.’“그러니까 성연신 씨 말대로라면, 제가 하지웅을 꼬시는 것은 오히려 고청민을 도와주는 셈이겠네요?”민채린은 성연신을 보며 다소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반박할 수는 없었다.곰곰이 생각해 보니, 고청민이 세움 그룹을 하씨 집안에 넘길 리는 없었다. 세움 그룹이 성씨 가문으로 돌아가는 것은 시간문제였으니, 조금 일찍 돌려받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미리 고청민과 의사를 조율할 필요가 있었다.만약 고청민이 허락하면 그녀도 동의할 의향이 있었다.“몇 시간만 생각할 시간을 주세요.”성연신은 민채린의 마음을 꿰뚫어 보았지만, 별다른 말 없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민채린이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진유진과 정욱도 일을 보러 떠났다.시간이 지나 성우주의 방과 시간이 되었고, 그는 방과 후 활동을 마친 후 저녁 8시 반쯤 연구소에 도착할 예정이었다.정말로, 8시 반이 막 지나자마자, 치료실 문이 열리고 작은 그림자가 조용히 들어왔다.성우주는 귀족 학교의 교복을 입고, 목에는 파란 넥타이를 맸으며, 얼굴은 귀엽고 앳된 모습으로 마치 드라마에서 나온 어린 스타 같았다.그는 심지안이 조용히 누워있는 모습을 보자마자 눈가가 빨개졌지만, 눈물을 참으려고 애쓰며 조심스럽게 심지안의 링거 맞은 손을 잡았다.“엄마, 우주 왔어요. 아빠가 곧 깨어날 거라고 했어요. 제가 ‘호’ 하고 아픈 곳에 마법의 바람을 불어줄게요, 그러면 안 아플 거예요.”맑은 목소리에는 울음이 섞여 있었지만, 애써 강한 척하며 너무 슬픈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했다. 엄마가 꿈속에서 울음 섞인 소리를 듣고 걱정할까 봐 겁이 났던 것이었다.성연신은 가슴이 찌릿했고, 큰 손으로 성우주의 작은 머리
“아빠가 엄마에게 해 준 것처럼, 나도 할 수 있어요.”성우주는 지난 5년 동안 엄마에게 주지 못했던 사랑을 채워주고 싶어 했다. 만약 심지안이 이 말을 들을 수 있었다면, 틀림없이 감동해서 울컥했을 것이다.분명 심지안이 엄마로서 우주에게 함께하지 못했던 시간을 보상해야 할 일이었지만, 우주는 너무나도 어른스럽고 이해심이 깊어서 자신이 엄마를 보살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때문에 성우주를 '이해심이 깊다'는 말로만 표현하기에는 너무 부족했다.성연신은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연구소의 규정에 따르면 병실마다 밤에는 단 한 명의 보호자만 상주할 수 있다고 해. 아빠는 엄마를 도와 여러 가지 일을 할 수 있고, 음식도 먹일 수 있지만, 우주는 아직 힘이 너무 약해서 그런 일을 할 수 없잖아. 억지로 하려다 보면 엄마를 다치게 할 수도 있어.”성우주는 작은 주먹을 꽉 쥐고, 침대에 누워있는 심지안을 바라보며 결국 타협했다.“그러면 아빠가 꼭 엄마를 잘 돌봐주세요. 저는 내일 다시 올게요.”성연신은 미소를 지으며 속으로 생각했다.'내일? 지안 씨가 깨어난다면 이 녀석은 헛걸음하게 될 거야.'그러나 곧 심지안에게 ‘자극적인’ 행동해야 그녀를 깨우는 데 도움이 된가는 생각에 성연신의 눈빛은 더 깊어졌다. 자극적이면서도 그녀를 다치게 하지 않는 것은 사실 쉽지 않았다.오래 생각한 끝에 한 가지 방법이 떠올랐다. 성연신은 병실 문을 잘 닫고 심지안을 안아 자기 무릎 위에 앉혔다.그는 심지안이 과거에 특정한 행동에 큰 반응을 보였던 것을 기억했다...큰 손을 천천히 그녀의 엉덩이에 올리고 깊게 숨을 들이쉬며 목소리를 낮췄다.“지안 씨, 미안해요...”말을 마치고 손을 높이 들었다가 강하게 내리쳤다.“짝!”그 소리가 병실에 울려 퍼졌다.심지안은 예쁜 얼굴을 갑자기 찌푸리고, 입술을 불만스럽게 오므렸다. 비록 혼수상태에 있었지만 그녀의 강한 불만이 느껴졌다.성연신은 효과가 있음을 보고 내심 기뻤다. 이어서 큰 손으로 심지안의 엉덩
심지안은 원래 성연신에게 화를 내고 있었지만, 그의 시선과 마주치자, 심장이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두근두근 뛰었다. 특히 방금 두 사람이 그렇게 친밀한 행동을 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참, 정말 얼굴만 잘생기면 다야?’인제 와서 발뺌하는 건, 마치 다 해놓고 책임지기 싫어하는 여우 같았다!“에헴... 저는 괜찮아요.”심지안은 불편한 듯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땀이 좀 나서 몸이 끈적끈적할 뿐이었다.성연신은 여전히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그는 그녀의 이불을 잘 덮어주며 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엄 교수를 불러올 테니까, 우선 움직이지 말고 좀 쉬어요.”“네”심지안은 고분고분 대답하고 그가 나가는 모습을 지켜봤다.진료실 안은 따뜻한 조명의 빛이 구석구석까지 비추고 있었고, 몸을 덮고 있는 이불은 부드럽고 편안하며, 약간의 상쾌한 향이 느껴졌다. 매우 익숙한 냄새였다.심지안은 이불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자신이 누워있는 침대의 시트와 베개가 모두 이탈리아 명품 브랜드의 것임을 알아차렸다. 성씨 가문의 주방에 있는 것과 같은 브랜드였다.‘아... 잠깐, 이거 성연신이 쓰던 거잖아. 나를 편하게 해 주기 위해 집에서 이불까지 가져온 거야?’심지안은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연신 씨가 언제부터 이렇게 세심했던 거지?’“심지안 씨, 대표님이 연구소와 병원이 비슷하다고 하시면서, 기본 제공되는 이불이 깨끗하지 않고 소독약 냄새가 난다고 해서 특별히 집에서 가져오라고 하셨어요.”정욱이 언제 문 앞에 서 있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차리고 설명해 주었다.“대표님께서는 지안 씨가 조금이라도 불편하면 안 된다고 걱정하셨어요. 지안 씨를 아주 소중하게 여기고 있어요.”심지안은 시선을 내리며 담담하게 말했다.“네, 저에게 진 빚이 있으니, 잘해주는 게 당연하죠.”정욱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말에 동의했다.“맞아요, 그렇게 말씀하시는 게 맞습니다. 그러니 대표님께 한 번 더 기회를 주셔서, 지안 씨 곁
흥분을 가라앉힌 후, 심지안은 자신이 5년 전 해외에서 살았던 작은 별장과 흡사한 곳에 있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외부 경관이 달라 의아해하며 말했다.“5년 전과 똑같은 별장을 지었어요?”고청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짓다가 기침을 몇 번 하며 대답했다.“맞아요. 거의 차이가 없죠?”심지안은 방 안의 모든 물건을 둘러보며 고청민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은 조금 부드러워졌고, 마치 그를 가족으로 생각했던 시절로 돌아간 듯했다.“어떻게 하지원을 설득했어요?”그녀는 고청민이 하지원을 이용하여 완벽한 알리바이를 만든 것에 의아함을 감추지못했다.“한마디 했더니 바로 승낙했어요.”고청민은 미소를 지었다.하지원은 이처럼 온 마음을 다해 고청민을 따랐다.심지안은 복잡한 마음으로 물었다.“하지원 씨에게 미안하지 않아요?”고청민은 아무런 감정 없이 말했다.“보상해 줄 거예요.”‘보상? 어떻게 보상할 건데? 여자의 청춘을 어떻게 보상할 건데...’심지안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반박하지 않았다.하지원에게는 그저 사랑이었으니까...“밤새 아무것도 안 먹어서 배고프죠? 지안 씨가 좋아하는 비빔면을 준비해 뒀어요. 게살 비빔면이요.”고청민은 웃으며 심지안에게 말했다.“지안 씨가 분명 좋아할 거예요.”심지안은 배가 고파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식탁에 다가가기 전, 그녀는 게살 비빔면의 향긋한 냄새를 맡았다.고청민은 게살 비빔면을 그녀 앞에 놓고 기대에 찬 눈빛으로 말했다.“먹어요. 제철 대게는 정말 맛있거든요.”심지안은 망설임 없이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그의 말대로 정말 맛있었다. 커다란 게살이 면과 어우러져 입안 가득 풍미를 더했다.고청민의 뜨거운 시선에 심지안은 불편해하며 말했다.“청민 씨도 먹어요. 나만 보지 말고...”고청민은 미소를 지으며 젓가락을 들어 면을 집어 먹으려 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기침이 그를 멈추게 했다.연달아 몇 번의 기침이 멈추지 않았다. 점차 그의 가냘프고 쇠약한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기침이 점점 심해지자 그
집에 돌아온 후, 성연신은 성우주를 재우고 나서 긴급한 회사 업무를 처리했다. 일을 마치고 나니, 이미 새벽 3시가 넘어 있었다.성연신은 심지안에게 전화를 걸어 고청민의 상황을 물어볼까 했지만, 숙면을 방해할까 봐 포기했다.다음 날 아침, 성연신은 일찍 깨어났다. 시계를 보니 6시 30분이었다. 그는 심지안이 오늘 세움의 신제품 출시 준비로 일찍 출근할 거로 생각하고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물으려 했다.이때 손이 미끄러져 휴대폰을 바닥에 떨어뜨렸고, 주어 보니 액정이 나가 있었다.갑작스러운 실수에 그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깨진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며 불안감이 스며들었다.성연신은 다른 휴대폰으로 심지안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결국 부재중으로 받지 않았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성씨 가문으로 출발했다.성씨 가문에 도착했을 때, 성동철은 막 깨어나서 정원에서 산책 중이었다.성연신으로부터 두 사람이 지난밤 함께 있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 성동철은 고청민이 출발 직전에 했던 말이 떠올라 이마를 찡그렸다.‘그 녀석이 설마...’성연신은 성동철의 표정이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급하게 물었다.“어르신, 혹시 지안 씨가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어쩌면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네.”“어디죠?”“해외에 있을 가능성이 크네.”성연신은 눈썹을 찡그리며 물었다.“무슨 말씀입니까?”성동철은 고청민이 출발 전에 했던 특별한 부탁을 성연신에게 말해주고, 동시에 고청민에게 전화를 걸었다.성연신은 주먹을 꽉 쥐고 심지안에게 계속 전화를 걸었다. 한참의 신호음 끝에 전화가 연결되었다.“지안 씨, 어디에 있어요?”“성연신 대표님, 접니다.”고청민의 평온한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고, 성연신의 신경을 자극했다.성연신은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이 자식아, 지안 씨를 어디로 데려간 거야?”“우리는 해외에 있어요. 안전하니까 걱정하지 마세요.”고청민은 계속해서 말했다.“지안 씨를 며칠만 빌리는 셈이에요. 너무 무리한 일은 하지 않을 테니, 흥분하지 마세요
“네. 할아버지, 그러니 제발 막지 말아 주세요.”“지금 나와 상의하는 게 아니라 통보하는 거구나!”“할아버지, 용서해 주세요.”성동철은 입을 열었다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한순간에 십 년은 늙은 것처럼 보였고, 무력한 눈으로 먼 곳을 바라보았다.한참 후에야 그는 천천히 말했다.“해외 전문가와 이미 연락을 취했으니, 너는 안심하고 치료에 전념해라. 우리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고청민은 그의 고집을 읽고 눈을 깜빡였다. 긴 속눈썹이 갑자기 젖어 들었다.사실, 그도 할아버지와 몇 년 더 함께하고 싶었다.집에 돌아오니, 성동철이 연락한 해외 전문가로부터 답변이 도착해 있었다. 그들은 신의라 불리는 의사가 이미 고청민을 치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자신들이 개입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고청민은 낙담하지 않고 오히려 성동철을 안심시키며 주제를 돌렸다.“할아버지, 해외로 며칠 다녀오고 싶어요. 오랫동안 여행을 못 갔어요.”“안 돼. 네 몸 상태로는 그렇게 멀리 갈 수 없어!”성동철은 단호히 거절했다. 그는 아직 민채린의 스승에게 도움을 청해 볼 생각을 하고 있었다.그러나 고청민은 말했다.“민채린이 해외에 있어요. 그녀가 옆에 있으면 할아버지도 안심하실 거예요.”“민채린?”성동철의 얼굴에 희미한 희망의 빛이 떠올랐다.“그렇다면 민채린의 스승에게 직접 찾아갈 수 있는 거니?”“제 병에 대해 이미 채린이의 스승님께 여쭤봤어요.”“결과는 어땠니?”“스승님께서 알려줄 수 있는 것은 모두 알려 주셨어요. 하지만 정말 치료하기 어려운 병이래요.”성동철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실망을 느꼈다.결국, 그는 손을 흔들며 말했다.“그래. 가고 싶다면 가도 좋아. 다른 환경에서 지내는 것이 네 몸에도 좋을 거다.”게다가 민채린이 옆에 있으니, 문제가 생기더라도 신속히 치료할 수 있을 것이다.“오늘 바로 떠나려고 해요.”“이렇게 갑자기?”“그냥 즉흥적으로 생각한 거예요. 가고 싶을 때 가야죠.”고청민은 말하며 눈치를 보지 않았다
30분 후, 성동철과 고청민이 병실에서 나왔다. 성동철은 걱정스럽게 잔소리를 늘어놓았다.“의사가 병원에 며칠 더 있으라 했잖니? 왜 말을 안 들어? 적어도 또 무슨 일이 생기면 이렇게 급하게 서두르지 않아도 되잖아. 치료 시간을 늦출 수도 있다고...”고청민은 미소를 지었다. 그의 창백한 얼굴은 햇살처럼 부드러워 보였다.“괜찮아요. 집에 있는 의료 장비로도 충분해요.”성동철은 한숨을 쉬며 더 이상 고집하지 않았다.‘집에 있는 것도 나쁘지 않지. 집에 있으면 이 녀석을 더 볼 수 있잖아...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 일이고...’성동철은 운전기사에게 차를 병원 앞에 대라고 지시했다. 전화를 끊고 나서 그는 병원 입구의 벤치가 비어 있는 것을 보고 주변을 둘러보며 의아해했다.“지안이 여기 앉아 있지 않았니? 어디 갔지?”고청민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고운 속눈썹은 한껏 아래로 드리워 있었다. 눈에 감춰진 복잡한 감정이 보이지 않게 덮여 있는 것 같았다.“그리고 지원이도 보이지 않네. 네가 전화를 걸어 연락해 봐. 이제 집에 가야 한다고...”성동철은 난처한 표정으로 고청민에게 말하며, 심지안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전화는 계속 부재중이었다.고청민은 하지원에게 전화를 걸지 않고 바로 말했다.“지원이 오빠가 찾으러 왔어요. 아마도 지안 씨는 갑자기 일이 생겨서 간 것 같아요. 저희 먼저 집에 가죠.”성동철은 방금 의사가 자신에게 따로 했던 말들이 머릿속에 가득 차 있었다. 그는 빨리 집에 가서 외국의 의료 전문가들을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그래. 우리라도 먼저 가자.”‘성연신이 지안이를 데려갔을 수도 있어. 어쨌든 지안이는 다 큰 어른이니까 큰 문제는 없을 거야.’넓은 승용차 안에서, 고청민이 갑자기 성동철에게 말했다.“할아버지, 제가 죽으면 제 심장을 지원이에게 주세요.”어차피 죽으면 남겨둘 이유가 없으니, 필요한 사람에게 주는 것이 덕을 쌓는 일일 것이다.성동철은 얼굴빛이 변하며 호통쳤다.“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심지안은 차가운 눈빛으로 하지원을 바라보며 말했다.“모든 사람이 자기를 좋아하지도 않는 상대방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인생을 바칠 수 있는 것은 아니야.”심지안은 사랑의 위대함에 감탄했지만, 그런 희생정신을 가질 수는 없었다.하지원은 심지안의 말을 정확하게 알아듣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왜냐하면 난 인간미가 있고, 지안 씨는 없으니까요. 임시연이 당신 앞에서 죽었을 때, 살아있던 한 생명이 죽었는데도 지안 씨는 아무런 감정을 느낄 수 없는 사람인 것처럼 무관심했잖아요.”심지안은 갑자기 고개를 들어 지금까지의 무심한 태도를 거두고, 날카로운 시선으로 하지원을 쳐다보며 목소리를 높였다.“맞아요. 임시연은 내 아이를 훔치고, 내 남자를 빼앗고, 내 결혼을 망쳤어요. 게다가 여러 번 나를 죽이려고 했었죠. 이번에 죽은 사람이 임시연이 아니었다면, 다음번에 죽을 사람은 나일 수도 있어요. 지금 임시연이 죽어서 폭죽이라도 터뜨리고 싶은 마음이니까, 자기 일 아니라고 그런 쉬운 소리 하지 마세요!”처음에는 임시연의 죽음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꼈지만, 곧 심지안은 깨달았다. 임시연의 죽음은 자신과 아무 상관이 없으며, 그녀는 죽어 마땅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임시연은 살아서 더 많은 사람을 해치려 했기에 어쩌면 이렇게 죽는 것이 더 나은 상황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원은 심지안의 큰 목소리에 깜짝 놀라 얼굴이 창백해졌고, 잠시 말을 잃었다.“지원 씨는 사랑을 위해 모든 걸 희생할 수 있을지 몰라도, 난 아니에요. 날 냉정하다고 생각해도 좋아요.”심지안은 하지원과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하지원도 불쌍한 사람일 뿐이었다. 심지안은 자리에서 일어나 병실로 들어가려 했다. 한 발을 내딛자, 하지원이 다시 말을 걸었다.“정말로 청민 선배를 도와줄 생각이 없는 거예요? 사람 하나 구한다고 생각해 줘요... 평생 고마워할게요.”심지안은 잠시 멈칫했지만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그건 도움을 청하는 게 아니라 도덕적 강요에요.”심지안은 친구로
성동철은 깜짝 놀라 지팡이도 잊은 채 급히 움직였다. 카펫에 걸려 넘어질 뻔했지만, 한순간도 지체하지 않고 휘청거리며 2층으로 올라갔다.집사는 구급차를 부르기 위해 전화를 걸었고, 남은 하인들은 손님들을 휴식 공간으로 안내했다. 연회 내내 활기찼던 분위기가 갑자기 혼란스럽고 긴장된 분위기로 바뀌었다.심지안은 찡그린 얼굴로 성동철의 뒤를 따라 고청민의 방으로 들어갔다.커튼은 빛 한 줄기도 들어오지 못하게 꽉 닫혀 있었지만, 문을 열자 짙은 피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하인이 먼저 한 발 앞으로 나서서 전원 스위치를 켜자, 방 안은 갑자기 밝아졌다.우드톤 가구들이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옷들도 정리되어 소파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심지안은 방 안을 둘러보았지만, 고청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심지안은 약간 열려 있는 화장실 문을 바라보며, 눈빛이 어두워졌다.이때, 하지원이 화장실을 가리키며 말했다.“안에 있어요.”성동철은 떨리는 손으로 화장실 문을 열었다. 안은 엉망진창이었다. 바닥에는 붉은 핏자국이 가득했다.고청민은 욕조 안에 누워 있었다. 옷은 물에 젖어 축축하게 몸에 붙어 있었고, 두 손은 욕조 가장자리에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머리는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었고, 입가에는 피가 묻어 있어 원래 창백한 피부가 더욱 하얗게 보였다.고청민은 말라비틀어진 채 생기가 전혀 없는 모습이었다.성동철은 이마에 땀을 흘리며 손가락을 고청민의 코 밑에 대어 보았다. 그는 길게 숨을 내쉬며 하인들에게 소리쳤다.“구급차가 일찍 도착할 수 없을지도 모르니, 빨리 차에 태워서 병원으로 데리고 가!”하인들은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조심스럽게 고청민을 욕조에서 꺼냈다.심지안은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겁에 질린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심장이 빨리 뛰었다. 그녀는 혼이 나간 하지원을 바라보았다.“청민 씨... 어쩌다 이렇게 된 거죠? 왜 이렇게 피를 많이 흘린 건가요?”이 상황이 마치 자살을 암시하는 것 같았지만, 하지원은 그 말을 입 밖에
심지안은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했다.“말 좀 해봐요. 정말 시연 씨가 죽길 바란 거예요? 시연 씨가 죽으면 속 시원할 것 같았냐고요!”변석환은 심지안에게 소리쳤다. 울부짖는 변석환의 두 눈은 심하게 충혈되어 무섭게 보였다. 그리고 그의 큰 목소리는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변요석과 성연신이 먼저 달려왔다. 성연신은 심지안을 보호하며 변석환을 몇 걸음 뒤로 밀어냈다. 성연신의 행동은 냉담하면서도 약간의 분노가 섞여 있었다.“지안 씨 앞에서 임시연 그 여자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마. 다시 한번 실수하면 내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하하하! 살인범을 감싸고 도는 건가요?”변석환이 큰 소리로 웃으며 말을 이었다.“맞아요. 시연 씨의 죽음에는 당신과 심지안 씨도 책임이 있어요.”“퍽!”변요석은 변석환의 얼굴을 한 대 때렸다. 순간 정적이 흘렀다.“정신 차려. 임시연은 원래 죽어 마땅한 여자야! 더 이상 나를 창피하게 만들지 마!”변석환은 변요석을 바라보며, 맞은 얼굴을 손으로 문지르며 중얼거렸다.“원래 죽어야 했고... 맞아... 나를 속이고 이용했어... 죽어 마땅한 여자야...”하지만 변석환은 스스로 왜 이렇게 고통스러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잠을 잘 수도, 밥을 먹을 수 없었다.임시연이 죄를 지었음을 알고 있었지만, 변석환은 여전히 너무나도 힘들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녀를 미워하면서도 그녀가 죽기를 바라지 않았다.변요석은 주변에 지켜보는 눈이 많다는 것을 의식하며 분노를 억누르고 변석환에게 경고했다.“지금 당장 성씨 가문을 떠나. 네가 정신 차리고 지안 씨에게 사과할 준비가 되면... 그때 돌아와.”변석환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듯 비틀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순간, 사람들 사이로 문득 익숙한 그림자를 본 것 같았다.변석환은 그 그림자를 쫓아갔지만,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변석환은 한참 동안 멍하니 서 있었고, 그제야 그것이 자신의 착각임을 깨달았다.살아 있는 사람은 죽은 사람보다 더 큰 고통을 겪는다. 임시
자책하는 심지안을 보는 성연신은 가슴이 아픈 듯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당연히 아니죠. 임시연의 죽음은 지안 씨와 아무 상관없어요. 그러니까 혼자 그런 생각 하지 마요.”심지안도, 성연신도, 그 누구도 임시연이 거기서 뛰어내릴 거라고는 생각 못 했을 것이다.임시연이 심지안 앞에서 그리고 성원 그룹에서 죽은 건 심지안과 성연신에게 트라우마를 남겨주기 위해서였다.만약 제가 잘못되어 죽는다 해도 살아있는 사람들도 마음이 편하진 않을 테니까 그걸 노리고 뛰어내렸던 것 같다.성연신도 놀라긴 했지만 직접 본 게 아니니 그리 큰 충격은 받지 않았는데 문제는 심지안이었다.물론 임시연도 죽을 줄은 모르고 뛰어내렸겠지. 그냥 크게 다쳐서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게 감옥에 있는 것보단 나으니까 뛰어내린 걸 텐데 이렇게 죽어버려서 심지안만 힘들어하고 있었다.심지안은 공허한 눈으로 성연신을 보며 웃어보려 했지만 표정이 잔뜩 굳어있어서 웃는 게 우는 것보다 더 이상했다.“당신 말이 맞아요. 임시연은 천벌 받아서 죽은 건데 내가 기뻐하는 게 맞죠.”“그래요, 안 뛰어내렸어도 경찰한테 잡혀서 자유롭진 못했을 거예요.”성연신은 심지안의 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내가 지안 씨더러 임시연 잡아놓으라고 한 거잖아요. 귀신이 되어도 날 찾아올 거니까 지안 씨는 아무 걱정 하지 마요.”그때 오지석이 사실은 사람들을 데리고 올라오려 했지만 임시연이 미리 눈치를 채고 송준에게 도움을 청할까 봐 성연신이 말렸었는데 임시연이 이렇게 극단적인 사람인 줄 알았더라면 심지안을 절대 혼자 놔두지 않았을 것이다.“알겠어요.”긴장이 풀렸는지 심지안이 눈을 살짝 감으며 말했다.“나 아까 제대로 못 쉬어서 좀 잘래요.”“그래요, 내가 옆에 있을게요.”“네, 할아버지랑 우주한테는 나 병원에 있단 말 하지 마요.”“네.”가족들이 괜히 걱정할까 봐 신신당부를 하고서야 심지안은 침대에 누웠다.제 앞에 앉아있는 듬직한 성연신을 보니 안심이 되는지 그렇게 천천히 잠에 빠져들었다.한편 성연신은
그렇게 회의실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어버렸다.누구는 임시연을 구하겠다고 1층으로 달려 내려가고 누구는 창가에 기대어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아직 살아있어요!"그 모습을 보고 있던 심지안은 사람들의 인영이 환영처럼 눈 앞을 스쳐지나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머리도 어지럽고 귀에 까지 이명이 들려 온 세상이 흐릿하게 보였다.임시연이 뛰어내리는 결말을 예상해본적은 없었는데, 3층이 아주 높진 않지만 그렇다고 낮은 층수도 아니었다.조금 정신을 차린 심지안은 사람들의 질책이 담긴 시선을 느꼈다. 그들은 저들끼리 수군대며 심지안을 힐끔힐끔 보고 있었다."사모님도 너무 하시지, 어떻게 사람을 뛰어내릴 때까지 몰아붙여? 저러면 밤에 악몽 안 꾸나?""그리고 왜 자꾸 연다빈 씨한테 임시연이라고 하는 거야? 너무 간 거 아니야?""다빈 씨가 죽기라도 하면 어떡해? 그럼 사모님이 살인자 되는 거야?""다빈 씨가 귀신 돼서 사모님한테 복수하겠다고 찾아올 것 같아요."그 말을 듣고 있던 심지안은 이마에 힘을 주며 소리질렀다."내가 몰아붙인 거 아니고 본인이 뛰어내린 거야. 나랑 상관 없다고."심지안의 호통에 수군거림은 사라졌지만 그녀를 보는 시선은 여전히 매정했다.다들 "연다빈"에게 일이 생기면 심지안 책임으로 돌릴 준비가 되어있는 듯 싶었다.심지안은 애써 심호흡을 하며 현기증을 이겨내려 했다. 그리고 구급차를 부르려고 뒤를 돌 때 마침 이곳으로 뛰어오는 성연신과 오지석을 발견했다.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있는 성연신이 빠르게 다가와 심지안의 어깨를 잡으며 주드럽게 다독였다."괜찮아, 내가 왔잖아. 내가 알아서 할게."속눈썹이 떨릴 정도로 긴장하고 있던 심지안은 마침 다가오는 성연신을 보고 무슨 말이 라도 하려고 입을 벌렸지만 말을 채 내뱉기도 전에 다리에 힘이 풀리며 쓰러져 버리고 말았다.---시간이 조금 흘러 심지안이 눈을 뜬 곳은 병원이었다.흰 벽과 소독약 냄새, 그리고 핸드폰에서 흘러나오는 성원 그룹 직원 자살 사건은 임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