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욱은 잠깐의 침묵 후에 결단을 내렸다.“좋아. 네 말대로 하자꾸나! 다만 이거 하나만 약조해야 한다. 무슨 일이 생겨도 네 자신의 안전이 최우선이야!”봉구안은 결연한 표정으로 대답했다.“걱정 마세요, 폐하. 꼭 무사히 돌아오겠습니다.”소욱은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만지며 아쉬운 표정으로 말했다.“우리가 다시 만난지 얼마나 지났다고 또 떨어져 지내야 하다니.”상위자로서 참 많은 책임을 져야 하기에 그만큼 포기해야 하는 것도 많았다.봉구안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정색해서 말했다.“잠깐의 헤어짐은 신혼 때의 열정을 되찾게 한다고 합니다. 우린 일반 부부보다 더 많은 신혼을 얻게 된 셈이지요.”그녀는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 귓가에 대고 매혹적으로 속삭였다.“이번에 돌아오면 완벽한 신혼밤을 선사해 드리지요.”그렇게 그녀의 홀림에 홀딱 넘어간 소욱은 그날 밤 황후에게 대장군의 권한을 하사하고 동부로 진군한다는 비밀 첩지를 내리게 되었다.비밀 첩지였기에 봉구안이 황성을 떠난 다음 날까지 아무도 이 사실을 몰랐다.변방 곳곳에 전쟁이 터진 상황에 서왕은 더 이상 소식만 기다릴 수 없었다.그는 전장에 나가 조금이나마 자신의 힘을 보태고 싶었다.그리하여 그는 입궁하여 황제에게 간청을 드릴 생각이었다.소욱도 그에게 중임을 맡길 생각을 갖고 있었다. 동부에는 황후가, 북부에는 맹건이 있는데 유독 남부에만 유능한 장수가 없었다.게다가 남부는 남강과 잇닿아 있고 서왕비 완부옥이 남강 사람이니 서왕을 남부군 수장으로 보내는 것도 이치에 맞았다.한편, 서왕부.완부옥은 남부로 떠날 채비를 마쳤다.동문의 동생인 갈십칠이 왕부 밖에서 대기하고 있었다.그녀는 그래도 양심은 있어 서왕에게 서신을 남겼다.그렇게 조용히 떠나려는데 어찌 알았는지 서왕이 그녀의 앞을 막았다.“왕비.”서왕의 온화한 표정은 그녀가 메고 있는 짐가방을 보고 순식간에 사라졌다.“내 아이를 데리고 어디로 가려는 것이냐!”그는 다급한 마음에 그녀의 팔목을 잡았다.완부옥은
관내경이 죽고 동부 전선을 주관하는 자는 부장 서봉이었다.그는 달려나가려는 병사들을 가로막고 그들에게 호통쳤다.“관 장군께서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잊었느냐! 장군마저 저들의 상대가 안 됐는데 너희가 나가서 뭘 할 수 있겠느냐! 헛된 죽음만 당할 게 뻔하지 않느냐!”서봉도 분노하긴 마찬가지였지만 이는 좋은 방도가 아니었다.성을 나가겠다고 나선 병사들은 평소에도 지시를 안 따르고 충동이 앞서는 인물들이었다.그들은 오히려 서봉의 말에 반박했다.“그럼 이대로 비웃음을 당하고만 있어야 합니까!”“우리 남제군은 나약한 존재가 아닙니다! 죽더라도 관 장군의 시신을 되찾아야 합니다!”“맞습니다! 되찾지 못하더라도 헛된 죽음은 아닙니다! 조유관 안에서 나약한 것 소리 듣는 것보다야 낫지 않습니까!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습니다!”순간 다른 병사들도 동요하기 시작했다.서봉은 상황이 통제를 잃어가자 선동자들을 전부 잡아들일 수밖에 없었다.“군은 상급의 지시에 복종해야 한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조유관을 잘 지키고 성문을 열지 않는 것이다!”병사들 틈에서 불만이 터져나왔다.“당신이 무슨 장군입니까! 우리의 대장군은 관 장군뿐입니다! 장군이 돌아가셨다고 상급이 된 양 하지 마세요!”또 누군가가 소리쳤다.“관 장군은 영웅입니다! 죽더라도 겁쟁이는 되지 않았어요! 우리도 그분처럼 살아야 합니다!”서봉은 그자를 끌어내서 귀뺨을 쳤다.“멍청한 것! 다시 군심을 선동하는 날에는 형벌이 내려질 것이다!”짝!이때 사람들 틈에서 달려나온 한 여인이 서봉의 귀뺨을 쳤다.서봉은 버럭 화를 내려다가 여인의 얼굴을 보고 안색이 급변했다.“형수님….”여인은 다름아닌 관내경의 부인이었다.“서 부장군! 병사들이 틀린 말을 한 건 아니지 않느냐! 내 부군이 영웅이 아니라 말할 셈이냐? 당연히 시신을 되찾아와야 하는 것 아니냔 말이다!”머리에 흰 꽃을 달은 관 부인은 시뻘겋게 충혈된 눈을 하고 기세등등하게 서봉을 노려보고 있었다.“평소에는 내 부군에게 형님이라고 부르며
관 부인은 통증에 오만상을 쓰며 고개를 돌려 자신을 제압한 자를 돌아보았다. 편한 복장을 입은 여인이 날카로운 분위기를 풍기며 서 있었다.관 부인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넌 누구지? 어찌 이렇게 거만을 떨어?”관 부인의 두 아들도 나서서 그녀를 비난했다.“당장 그 손 놓지 못할까! 우리 어머니가 누군 줄 알고!”관씨 모자와 다르게 서봉과 뭇 장령들은 상대의 얼굴을 보고 순식간에 당황하더니 공손히 예를 행했다.“황후마마를 뵙습니다!”관 부인도 순간 당황했다.“뭐? 화… 황후마마?”눈앞의 이 여인이 정말 이 나라의 황후란 말인가!황후가 어쩌다가 동부에 오게 된 걸까? 무릇 황후라면 시위들의 보호를 받으며 황궁에 있어야 마땅했다.관 부인의 두 아들도 당황하긴 마찬가지였다.황후마마라면 북대영의 맹 소장군 아닌가!그들은 곧장 예를 행했다.봉구안은 관 부인의 손을 놓아주고 싸늘한 눈으로 뭇 장령들을 노려보며 물었다.“방금 전에 뭘 하려고 했던 거지?”뭇 장령들은 여전히 분개하며 자신의 입장을 전했다.“황후마마, 관 장군께서는 충직한 장군이셨습니다. 그런 분이 지금 적들의 능욕을 당하고 있는데 저희가 어찌 지켜만 보겠습니까! 나가서 관 장군의 시신을 되찾아와야 합니다!”관 부인의 두 아들들은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래요, 마마. 저 사람들은 아버지를 구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데 서봉 저 사람만 저희를 막고 나가지 못하게 하면서 제 어머니까지 몰아세워 죽게 만들 뻔했습니다.”서봉은 억울했다.그는 비통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황후마마, 저는 단지...”“되었다. 더 말할 필요 없어.”봉구안이 서봉의 말을 잘랐다.다른 사람들은 그녀가 서봉을 처벌하려는 줄 알고 의기양양했지만 그녀에게서 뜻밖의 말이 들려왔다.“너는 장군으로서 병사들을 이끌고 조유관을 지키려 했던 것뿐이니 아무런 잘못이 없다.”“황후마마!”관 부인이 눈물을 흘리며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서봉이 무슨 생각이든 소인은 관심없습니다.
잔뜩 풀이 죽었던 관 부인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봉구안을 바라봤다.그녀는 제 귀를 의심했다.직접 시신을 수습해 오겠다니!관 부인의 두 아들도 당황스럽긴 마찬가지였다.서봉이 다급히 그녀를 말렸다.“황후마마, 그건 아니 됩니다! 동부군이 천만이나 되는데 어찌 마마를 그 위험에 빠뜨리겠습니까! 하물며 마마는 황자를 회임 중이지 않습니까!”뭇 장령들도 정신을 차리고 봉구안을 말렸다.“마마, 심사숙고해 주십시오!”이 나라에 황제가 황후를 얼마나 아끼는지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게다가 황후 태중의 아이는 황제의 첫 아이가 아닌가! 만약 동부에서 변을 당한다면 뒷감당을 누가 한단 말인가!광 부인의 시선이 봉구안의 복부에 닿았다.회임 중인 황후가 먼 길을 달려 이곳 동부까지 왔을 줄은 정말 뜻밖이었다.봉구안은 한번 내린 결정을 굽히지 않는 사람이었다.그녀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분부했다.“장순을 불러오너라.”은이가 공손히 답했다.“예.”조유관에서 십리 떨어진 곳, 대하를 필두로 한 4개국 연맹군이 주둔하고 있었다.주장 막사 안에서 장군들은 향긋한 술과 고기를 즐기고 있었다.상석에는 대하의 주장 단춘이 앉아 있었다.그의 앞에는 통양 구이가 놓여 있었고 그는 한창 칼로 고기를 베서 허겁지겁 입에 넣고 있었다.그의 좌측으로 타국 세 장령들이 앉아 아부를 떨고 있었다.“역시 단 장군입니다. 가장 적은 병력 손실로 남제를 침공하다니. 나중에 남제 요충지를 점령하게 되면 다른 나라들에 자랑해야겠습니다!”“단 장군을 위해 건배합시다! 앞으로 우린 대하만 믿겠습니다!”고기가 지겨워진 단춘은 술 몇 잔을 퍼마시더니 만족스러운 트림을 했다.그는 호탕한 웃음을 터뜨리며 건방지게 말했다.“북연 그 놈들 속셈이야 뻔하지. 비록 같이 남제를 치기로 했지만 북연이 떡을 평등하게 나누려 하진 않을 거야. 교활한 놈들이니까!”“그러니 우리 4개국 연맹이 한마음을 가져야 해.”“조유관 전쟁에서 너무 많은 병사들을 희생할 필요가 없어.”“일대일 전투에서 남
남제가 축경관 전서를 내렸다는 말에 4개국 연합군 모두 건방지다고 생각했다.“단 장군, 남제인들은 정말 상황파악이 안 되는군요!”“우리가 우세이긴 하지만 그래도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합니다! 절대 저들에게 승리를 내어줄 수 없어요!”“그래요, 단 장군! 겨우 관내경을 죽여서 남제군의 사기를 꺾었는데 다시 살아나게 해서는 안 됩니다!”단춘은 얼굴이 불그락푸르락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지금 그의 머릿속에는 전부 남제군이 자신과 자신의 아비를 모욕하던 노래뿐이었다.남제가 축경관을 신청했으니 가장 유능한 장수를 내보내 응전할 것이다!그 시각 남제 군영의 분위기도 별로 좋지 않았다.서봉과 다른 장령들은 수심이 가득한 얼굴이었다.“서 장군, 정말 황후마마를 전장에 내보내야 합니까?”서봉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안 그럼 어쩌갰어? 누가 황후마마를 막을 수 있겠냐고.”한 장령이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말했다.“마마께선 회임 중이잖습니까! 어떻게 전투에 나간단 말입니까! 축경관에서 승리를 거둔다고 해도 만약에 아이가…”“됐어! 재수없는 소리하지 마!”서봉은 짜증스럽게 소리쳤다. 회임한 여인이 전장에 나갔다가 무슨 일이 생길지 상상도 하기 싫었다.하지만 황후에게는 동부군의 지휘권을 담당한다는 황제의 밀서가 있었다.그러니 어찌 명을 거스를 수가 있을까?막사 안.봉구안은 평온한 표정으로 지도를 보고 있었다.“마마, 관 부인께서 알현을 청합니다.”“들라 하라.”봉구안은 고개도 들지 않고 작은 깃발을 들어 조유관 위치에 꽂았다.관 부인은 직접 끓인 닭백숙과 반찬을 들고 막사를 찾아왔다.그녀는 경외심 가득한 눈으로 봉구안을 바라보며 말했다.“마마, 낮에 있었던 일은 소인이 어리석었습니다. 내일이면 전장에 나가실 텐데 좋은 걸 드시고 체력을 보충하셔야지요.”관 부인은 말하면서 봉구안의 배를 살폈다.다들 황후가 회임했다고 하는데 전혀 티가 나지 않았다.봉구안은 그녀가 가져온 도시락을 받으며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마음은 고맙게 받도록 하지
막사 안, 장순이 분개해서 불만을 토로했다.“황후마마, 저들이 정말 그랬다니까요? 저런 이기적인 자들은 동정할 가치도 없어요! 마마께선 자신들의 아버지 시신을 수습하려고 전장에 나가신다는데 마마의 아이가 어떻게 되든 전혀 관심이 없잖아요! 도와줄 필요 없어요!”낮에 말을 너무 한 탓에 장순의 목 상태는 무척 좋지 않았다.얘기를 들은 봉구안은 관씨 모자 세 사람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내일의 전장은 그들을 위한 것도 아니고 관내경 개인을 위한 것도 아니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남제의 승리였다.그녀는 한낱 시신 한구 수습한다고 목숨을 내던질 정도로 바보가 아니었다.4개국 연맹군이 동부군의 기세를 한풀 꺾어놓았으니 반격에서 이겨 그들의 사기를 꺾어야만 했다.장순이 계속해서 말했다.“마마, 귀한 황자님을 회임하신 몸인데 신중을 기하셔야 합니다!”황제는 그의 은인이니 그 역시도 황제의 자식을 지켜주고 싶었다.봉구안이 고개를 들고 말했다.“왜? 날 대신해 네가 전장에 나가려고?”순간 장순은 입을 다물었다.그의 나이 이제 겨우 열살, 키가 말보다 작은 아이인데 어찌 전장에 나간단 말인가!그날 밤, 조유관에만 있는 적미새가 긴 울음소리를 냈다.성을 지키는 병사들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 밖을 경계했다.자진궁.늦은 시간임에도 소욱은 각지의 전보를 읽고 있었다.그의 얼굴에는 피로감이 역력했다.옆에서 시중을 들던 유사양이 조심스레 말했다.“폐하, 옥체도 생각하셔야지요. 시간도 늦었는데 이만 쉬시는 게 어떠신가요?”소욱은 갑자기 현기증이 일며 미간을 확 찌푸렸다.글자를 똑똑히 보려고 눈에 힘을 주었지만 그럴수록 흐릿해질 뿐이었다.그는 전보를 내려놓고 손으로 미간을 문질렀다. 차갑기만 하던 얼굴에 걱정이 가득 서렸다.이 전장이 언제쯤이면 끝날지 예측할 수 없어서 더 갑갑했다.그는 황후에게 미안했다.부군으로서 부인에게 안락한 삶을 제공해야 하건만 그녀는 항상 나라를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었다.동부 상황이 어떤지 걱정도 되었다.고개를 든 소
단춘은 고개를 잔뜩 뺴들고 출전한 남제 전사를 바라보았다.체구가 건장한 것도 아니고 몸이 무척 가벼운 것으로 보아 남제의 부장인 서봉은 아닌 듯했다.‘어디서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자식이 축경관을 도전한 거지?’단춘은 눈을 가늘게 뜨며 자리로 돌아가서 앉았다. 그의 입가에 비웃음 가득한 미소가 지어졌다.첩자를 보내 알아본 결과, 남제 동부에는 관내경과 서봉을 제외하면 인물이라고 할 자가 없었다.출전한 상대가 서봉이 아니라면 남제는 축경관을 완성할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단춘은 자신이 직접 선발한 백명의 무사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말했다.“남제군의 목을 벤 자에게 황금 백냥을 하사하겠다.”무사들은 장창을 들고 전방을 바라보며 사기를 불태웠다.“죽인다! 죽인다! 죽인다!”가면 아래 봉구안의 표정에는 여유가 넘쳤다.그녀는 여기 혼자 나왔지만 등 뒤의 성루에는 천만 수성군이 관전하고 있었다.그들은 주먹을 쥐고 승리가를 부르며 징을 울렸다.부장 서봉은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제발 황후와 태중의 아이가 무사하게 해달라고 하늘에 기도했다.봉구안은 장창을 들고 앞으로 나섰다.이때 바람이 일었다.동부는 북방보다 기후가 따스하지만 모래바람이 불어 사람의 시야를 가렸다.바람이 흙먼지를 일으켰고 봉구안의 긴 머리가 바람에 흩날렸다.그녀는 위축하지 않고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다.말발굽소리가 들려왔다.적군의 첫 번째 도전자였다.광풍이 휘몰아쳐서 모래폭풍 속에서 두 사람이 어떻게 싸우는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그럼에도 단춘은 전혀 긴장하지 않았다.눈 깜짝할 사이에 바람이 그쳤다.남제 대표는 장창을 쥐고 꼿꼿하게 서 있고 옆에는 전마가 서 있었는데 멀지 않은 곳에 대하 무사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아무도 대하의 무사가 어떻게 죽었는지 보지 못했다.게다가 이 짧은 시간 안에 목이 날아간 채로 말에서 떨어지다니.단춘이 눈을 부릅뜨며 중얼거렸다.“이럴 수는 없어.”그가 선발한 무사는 전부 다 정예병들이었다. 상대에게 지더라도 이렇게 짧은 시간 안
도끼는 역량형 무기이지만 도끼날의 곡선은 도끼에 실리는 많은 힘을 손실하게 한다. 날카로운 창은 쉽게 도끼의 방어를 뚫을 수 있다.그래서 창과 도끼가 상극이라는 말이 예로부터 돌고 있었다.병기에 정통한 자라면 다 아는 사실이었다.단춘의 얼굴이 퍼렇게 질렸다.남제에서 나온 어린 장수는 대체 정체가 뭘까?봉구안은 안정적으로 창을 잡고 상대가 가까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공세를 시작했다.장코는 강력한 기류를 느끼고는 바로 도끼를 휘둘렀다. 왼손 도끼는 방어, 오른손 도끼는 공격용이었다.도끼를 휘두르는 그의 모습은 조금 둔해 보여도 진한 살기가 담겨 있었다.하지만 봉구안의 창술이 더 현란했다.두 사람은 십여차례 공격을 주고받았고 지켜보는 사람들이 현기증이 올 정도였다.단춘의 표정은 점점 안 좋아지고 있었다.장코의 쌍도끼는 거의 적수가 없었는데 지금은 상대에게 계속 끌려만 다니면서 역습의 기회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상황이 점점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조유관 성루.북소리가 점점 힘차게 울리며 병사들의 사기를 돋우고 있었다.황후의 창술을 본 병사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북대영의 유명한 명장 맹 소장군답게 그녀의 창술은 가히 따라올 자가 없었다.봉구안은 점점 더 빠르게 공격을 시전했고 장코는 계속해서 뒤로 밀려나고 있었다.쌍도끼의 위력은 그녀를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점점 짜증을 느낀 장코가 소리를 질렀다.“죽여버릴 테다! 악!”아둔한 그는 맹공격밖에 할 줄 아는 게 없었다.봉구안은 날렵하게 피해 후방으로 간 뒤에 창을 휘둘러 그의 허벅지를 찔렀다.그가 뒤돌아서자 그녀의 창은 곧바로 그의 눈앞까지 날아왔다.“악!”상대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예리한 창끝은 쌍도끼 사이의 빈틈을 파고들어 상대의 눈을 찔렀다.극심한 고통에 장코는 도끼 하나를 버리고 본능적으로 손을 피가 철철 흐르는 눈으로 가져갔다.그는 고통에 몸부림치며 도끼를 마구 휘두르며 고함을 질렀다.“남제의 쥐새끼, 죽여 버릴 테다! 피하지 마! 당장 널 가루로 만들어 시체
모용가에 대한 조사는 여전히 제자리걸음이었다.소욱은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모용가를 은밀히 조사하라고 했을 때, 별다른 이상이 없다고 들었느냐.”“갑자기 왜 그 얘길 꺼낸 것이냐? 혹시…”그는 말을 끝맺지 않았지만, 봉구안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그녀는 모용가가 약쟁이 사건과 얽혀 있을 가능성을 의심하고 있었다.봉구안은 단정한 목소리로 답했다.“사형이 약쟁이 사건을 조사하기 시작한 시점은 폐하께서 즉위하신 이후입니다.”“그 말은 곧 선황제께서 돌아가시기 전부터 이미 약쟁이들이 활동하고 있었다는 뜻이지요.”“그 시점을 고려하면, 선황제께서 무언가 눈치채셨을 가능성도 있습니다.”“소첩은 그래서 모용가가 이 사건과 관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다만 어디까지나 제 추측일 뿐, 아직 뚜렷한 증거는 없습니다.”그녀의 말에 담긴 확신은 쉽게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소욱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그렇다면 지금 네 말은… 모용가를 억지로 몰아세우겠다는 것이냐.”농담조였지만, 소욱 역시 마음속으로 봉구안의 의심을 부정하지 못하고 있었다.선황제의 유언은 분명 모용가를 경계하고 있었다.하지만 지금껏 감찰을 맡은 자들이 어떤 흔적도 찾지 못했다는 건, 그들이 그만큼 은밀하게 움직였다는 뜻이었다.그런 점에서 모용가의 행적은 약쟁이들의 수법과 닮아 있었다.그 생각에 이르자 소욱의 눈빛에 서늘한 기운이 스쳤다.“사람을 더 붙이도록 하마. 이번엔 제대로 조사하게 하자.”그날 밤 소욱은 평소처럼 자유각에 머물렀다.궁 안의 일은 이미 손을 놓아도 될 만큼 정돈되어 있었고, 후궁의 일은 태후가 맡아 관리하고 있었다.빈들 또한 조용한 편이었으나, 단 하나. 약쟁이 사건만큼은 태후의 골칫거리였다.태후는 후궁들에게 자중할 것을 명하며, 그 본보기로 현비를 들었다.그날 밤 현비의 시녀 동하가 태후를 찾아와 다급히 울부짖었다.“태후마마, 제발 저희 마마를 살려주십시오!”이미 잠자리에 들었던 태후는 몸을 일으키며
봉구안은 자신이 직접 그려둔 지도를 꺼내어 소욱에게 펼쳐 보였다.“황성을 총타로 삼아 사방에 명령을 내리는 것. 이것이 바로 그들의 지령 경로입니다.”“그들의 평소 수법을 보면, 지금처럼 조정과 무림이 손잡고 그들을 압박하는 상황에서 가장 먼저 할 일은 모든 연락선을 끊고 총타부터 지키는 것이겠지요.”“그러기 위해서는 내부 인물들을 정리하는 게 먼저입니다.”소욱이 그녀의 말을 받아 이었다.“그렇다면 우리가 그 틈을 노려 분타부터 하나씩 무너뜨릴 수 있다는 뜻이로군.”봉구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그녀는 지도 위 몇 군데를 손가락으로 짚었다.“여기 표시된 곳들이 현재 저희가 확인한 그들의 은신처입니다.”“대부분 외진 산골이나 황량한 지역에 자리 잡고 있어요. 죽산진 근처 산속 동굴처럼 말이지요.”“폐하께서도 기억하시겠지요. 예전에 황성 도관 아래에서 많은 약쟁이들을 발견했을 때를요.”소욱은 그 일을 뚜렷이 기억하고 있었다.그때 봉구안은 약쟁이에게 상처를 입었고, 그가 그녀를 등에 업고 간신히 빠져나왔었다.봉구안의 눈빛이 차갑게 식어갔다.“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 도관 자체가 약쟁이의 은신처였을지도 몰라요.”“그리고 기억하시겠지요. 천룡회가 황성을 공격했을 때 약쟁이 대군을 풀었는데, 그 시각이 바로 늦은 밤이었어요.”소욱은 그녀가 전하려는 의미를 곧장 알아차렸다.그는 지도 위에 찍힌 지점들을 살펴보았다.“은신처의 위치와 약쟁이들의 활동 시각을 보면, 그 자들은 어둠 속 환경에 익숙한 존재들이겠구나.”봉구안은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어둡고 외진 곳이야말로 약쟁이들의 은신처로는 가장 알맞은 곳일 거예요.”“저희가 죽산진에서 약쟁이 소굴을 조사했을 때도, 산속 동굴 안은 손을 뻗어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만큼 깜깜했지요.”“강주에서 발견한 은신처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우연이라고 보기엔 너무 겹치는 것들이 많아요.”소욱은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그렇다면… 이 사실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겠느냐?”봉구안은 냉정한 눈빛
봉구안은 놀란 듯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황성에도 홍련초가 자란다고요?"소욱은 곧바로 진지하게 대답했다."누가 심었는지, 얼마나 되는지는 아직 모른다. 서쪽 교외에 사람을 보냈으니 곧 소식이 올 거야."봉구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에 잠겼다.소욱은 그녀의 그릇에 반찬을 더 담으며 말했다."일단 밥부터 먹으렴. 요즘 부쩍 더욱 말라 보이는구나. 아이를 품은 몸이라면 더 잘 챙겨야 하지."하지만 봉구안의 눈빛은 여전히 다른 데 머물러 있었다."혹시… 열무신의 소식은 아직도 없는거죠?"소욱은 묵묵히 고개를 저었다. 그는 서둘러 그녀가 더 걱정하지 않도록 화제를 돌렸다.소탁을 황성으로 데려온 뒤 그는 곧장 태의원을 불러 진찰을 받게 했다. 하지만 상처가 눈에 있는 탓에 회복이 쉽지 않았고 지금은 사실상 눈이 먼 사람처럼 지내고 있었다. 혼자 사는 데 어려움이 컸지만, 하녀를 붙여 주겠다는 제안도 번번이 거절했다.봉구안은 차분하게 물었다."폐태자께서는 지금 어디에 머물고 있나요?""마땅한 집을 하나 찾아 그곳에 머물게 하였다. 혹시나 있을 위험을 대비해 그림자 호위도 붙여 두었다."그가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은 단순한 걱정 때문만은 아니었다. 잠시 뜸을 들이던 소욱이 다시 입을 열었다."예전에 널 시중들던 연상을 혹시 기억하느냐?"봉구안은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되물었다."연상… 기억하죠. 그런데 갑자기 그건 왜 여쭤 보시는 거죠?"소욱은 다소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요 며칠 사이 그 아이가 소탁을 여러 번 찾아갔다는구나. 꽤 신경을 쓰는 듯했다."봉구안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그게 그렇게 문제될 일인가요?""그 아이는 아직 시집을 안 가지 않았느냐."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봉구안은 곧장 말을 끊으며 단호하게 말했다."제가 알기론 연상은 궁을 떠난 뒤 곧장 진가 저택으로 돌아갔습니다. 혼자서 글씨와 그림으로 생계를 꾸려 왔고요. 살림은 넉넉지 않지만 나름대로 삶의 방향은 확실합니다. 진가를 다시 일으켜 세우겠다는 뜻을
녕비는 자기가 무슨 심각한 말을 했는지도 모른 채 해맑게 웃으며 현비를 바라보았다.“언니, 우리 자매처럼 지냈잖아요. 그래서 말인데 남한테 덜미 잡히기 전에 차라리 폐하께 먼저 말씀드리는 게 낫지 않을까요? 어차피 결백한 사람은 당당해도 되는 법이지 않겠어요?”“홍련초는 그 자체로는 죄가 없는 약초예요. 죄가 있는 건 그걸로 독을 만든 자들이죠.”“언니처럼 착한 분이 약쟁이랑 엮일 리가 없잖아요, 그쵸?”그녀의 웃음은 현비의 눈에 유난히 싸늘하고 따갑게 느껴졌다.현비는 얼굴이 희미하게 질려가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녕비, 네가 의심하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해.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맹세컨대 내가 마시는 약은 약쟁이 사건과는 정말 아무 관련도 없어.”녕비는 굳이 대꾸하지 않은 채 조용히 말을 이었다.“제가 언니를 믿느냐 마느냐는 사실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중요한 건 폐하께서 어떻게 생각하시느냐죠.”현비는 한동안 침묵하다가 깊은 숨을 고르고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맞는 말이야.”“자, 할 말은 다 했으니까 전 이만 자녕궁으로 가볼게요. 태후마마께 기도드릴 시간이네요. 굳이 배웅하지 않으셔도 돼요.”녕비가 자리를 뜬 뒤, 곁에 있던 시녀 동하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마마, 녕비 마마 말씀이 틀린 것도 아니에요. 폐하께서 약쟁이 사건을 철저히 조사하고 계시다 하니, 홍련초가 얽히는 일은 아무래도 너무 커요.”현비의 눈빛에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그녀는 그저 이 궁 안에서 살아남고 싶었을 뿐이었다.그녀는 그 어떤 죄도 짓지 않았다. 정말로 아무 잘못도 없었다.“…종이랑 붓을 준비하거라. 폐하를 뵙기 전에 아버지께 먼저 편지를 써야겠다.”“예, 마마.”……그날 밤.자유각.소욱은 이날 밤도 자유각에 머물며 봉구안과 시간을 보내려 했다.그러나 대부분의 시간은 상소문을 검토하는 데 쓰였고 그녀 곁에 있어도 여유를 누릴 틈은 많지 않았다.그는 문서를 펼쳐든 채 농담처럼 말했다.“황제가 된 건, 아마 전생의 업보였던 모양
그해 봉구안은 스스로 천지설산에 올라 자욱화를 채취하려다 목숨을 잃을 뻔하였다. 그때 그녀를 구해준 이가 바로 염 신의였다.그 후 인연이 닿아 둘은 다시 만나게 되었고, 그 무렵 염 신의는 약쟁이 독의 해독제를 연구하고 있었다.이에 봉구안은 그를 황성으로 데려왔다.그는 예전에도 한 차례 해독제를 만들어낸 바 있었으나, 중독자들에게 써보았을 때 뚜렷한 효과는 없었다.하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진정한 해독제가 완성된 것이다.분명 기쁜 소식이었다.“염 신의 말로는, 홍련초 덕분에 그동안 풀지 못했던 원리를 비로소 깨달았다고 합니다.”“이미 중독자들에게 해독제를 복용시켰고 모두 회복되었습니다. 장순의 어머니까지도요.”장순은 아직 어린 유생이었으나, 과거 제후국들이 남제를 포위했을 당시 봉구안이 특별히 데려갔던 소년이었다.그는 적국을 향한 설전에서 통쾌한 활약을 펼친 바 있었다.그의 어머니는 오래전 약쟁이 독에 중독되어, 살아 있으되 정신이 나간 채 살아온 사람이었다.해독제가 생겼다는 건 의심할 여지 없이 경사였다.허나 좋은 일과 화는 언제나 함께 오는 법. 봉구안이 눈짓 하나만 보내도 소욱은 그녀의 속마음을 단박에 알아차렸다.그녀가 입을 떼기도 전, 소욱은 그녀의 팔을 가볍게 두드리며 오백에게 명을 내렸다.“사람을 붙여 염 신의를 철저히 보호하라. 해독제 이야기는 절대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하라.”오백은 곧장 명을 따랐다.밖에서 듣고 있던 진한길은 내심 고개를 갸웃거렸다.‘폐하께서는 왜 이렇게 오백을 쓰시는 걸까?’오백이 물러난 뒤, 소욱은 봉구안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해독제가 완성되었으니 약쟁이 독이 아무리 퍼져도 더는 위협이 되지 못할 것이다.”봉구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해독제는 결정적인 열쇠예요. 폐하, 문득 떠올랐는데… 담대연도 약쟁이 독에 중독된 사람이었죠?”소욱은 손을 들어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그 자에게도 해독제를 줄 것이다. 이제는 마음 놓고 쉴 수 있겠지?”“네.”봉구안도 지쳐
황제는 용좌에 앉아 날카로운 눈빛으로 문무백관을 훑었다.“과인이 황성을 비운 지 몇 달이 되었다. 그 사이 그대들은 더욱 해이해졌구나.”문무백관들은 몸을 낮추고 고개도 들지 못한 채 두려움에 떨었다.소욱은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조정에서 명하여 각지에서 약쟁이 사건을 철저히 수사하라 했거늘. 과인이 묻겠다. 너희는 이 사건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대부분의 신하들은 멍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볼 뿐이었다.사건 수사는 지방 관아의 일 아닌가.그들은 각자 맡은 바 소임을 다하면 되는 줄 알았다.그중 몇몇 관료만이 그나마 성의를 보이며 대답했다.“폐하, 신이 아는 바에 따르면 이 약쟁이 사건은 독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이 독에 중독되면 사람은 이성을 잃고 고통을 느끼지 않게 됩니다. 예전에 천용회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약쟁이로 구성된 군단이 실제로 나타난 바 있습니다. 반드시 철저히 조사해야 할 사안입니다.”“폐하, 신이 들은 바에 따르면 동산국이 비밀리에 약쟁이를 양성하고 있으며, 병력으로 활용하려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 약쟁이 독도 동산국에서 흘러들어온 것일 가능성이 있습니다.”소욱은 아무것도 모르는 이들을 향해 눈빛을 더욱 날카롭게 세웠다.“약쟁이 사건은 백성의 생사뿐 아니라 나라의 존망에도 관련된 일이다. 너희 가문의 안위와도 맞닿아 있다. 그런 상황에서 어찌 이리 무감각할 수 있느냐.”꾸짖음을 들은 관료들은 줄줄이 엎드려 스스로 죄를 청했다.“부끄럽습니다. 부디 노여움을 거두소서.”소욱은 그들을 곧장 벌하지는 않았다.대신 명을 내렸다.“과인이 너희들에게 직접 수사하라 명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스스로를 돌아보라는 것이다. 오늘부터 약쟁이 사건에 연루된 자가 있다면 스스로 고하라. 훗날 과인이 직접 밝혀낸다면 그 자는 반역죄로 다스릴 것이며 구족이 멸문당하게 될 것이다.”이것이 그가 내릴 수 있는 마지막 자비였다.신하들은 모두 고개를 숙였고, 감정은 드러내지 않았다.그중 몇몇은 속삭였다.“폐하께서 이렇게까지 말씀하시는
봉구안이 약쟁이의 본거지가 황성에 있을 것이라 단언한 것은 근거 없는 말이 아니었다.그녀는 남제 전역의 지도를 꺼내어 소욱에게 설명했다.“정말 막다른 길에 몰려야 그들도 허점을 보입니다.”“이번에 문제가 생긴 도시들. 그 위치와 거리로 계산해 보면, 명령이 어디에서 내려졌는지 역산할 수 있어요.”지도 위에는 이미 여러 곳의 약쟁이 거점이 붉게 표시되어 있었다.최근 발생한 약쟁이의 운송 경로와 이동 시간, 중간에서 방향을 바꾼 흔적까지 더하면 본거지가 어느 지역인지 대략 짚어낼 수 있었다.이런 판단력은 전장을 누비는 장수에게 꼭 필요한 자질이었다.봉구안은 시간과 거리의 계산만으로도 적의 주둔지가 어디인지 가늠할 수 있었다.그래야 곧장 본진을 겨냥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소욱은 그녀의 말을 다 듣고 나서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황성이라니… 정말 그곳인가.”역시 등잔 밑이 어두운 법이었다.……그들은 황성으로 돌아오는 길에 잠시 죽산진을 들렸다.황성으로 돌아가기 전 소탁을 보기 위함이었다.보아하니 소탁은 눈에 큰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의원의 치료에도 차도가 없어 실명에 위험까지 있었다.소욱은 그를 데리고 황성으로 돌아가 태의에게 맡기기로 했다.이 작은 죽산진에서는 명의라 할 만한 자를 구하기도 어려웠다.자객의 습격을 떠올린 소탁은 마음이 무거웠다.그는 형인 소욱을 걱정하며 말했다.“약쟁이 때문에 미쳐 돌아가는 자들이 많아졌습니다. 폐하께선 이번 여정 내내 각별히 조심하셔야 합니다.”결국 피를 나눈 형제였기에 자신의 상처보다 제왕의 안위가 더 걱정되었다.봉구안은 하얀 천으로 눈을 가린 소탁을 바라보았다.그 모습이 유난히 연약해 보였다.그녀가 물었다.“열무신은 아직 소식이 없습니까?”소탁은 고개를 저었다.“그 자객을 쫓아 한참을 달아났습니다. 호위들도 따라잡지 못했지요. 혼자서 움직였으니, 살아있다면 다행이고… 혹시 도중에 남긴 흔적이라도 있다면 좋겠습니다.”봉구안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아무리 무공이 뛰어난 자라도,
그 닭장수들은 고문을 당해 사람 꼴이 아니었다.그들은 결국 사실대로 털어놓았다.“목숨만 살려주십시오… 제발 살려만 주십시오! 저희는 정말 모릅니다. 그 닭들을 거래한 뒤, 그걸 어디에 쓰는지도 몰랐습니다.”“누가 높은 값을 제시하길래, 그냥 시키는 대로 했을 뿐입니다.”열무신은 무고한 이를 죽이지 않았다.그들이 실토한 이상 그는 더는 손을 대지 않았다.문을 열고 밖으로 나서자 마침 소탁과 마주쳤다.소탁은 내내 문밖에 서서 안에서 들려오는 말들을 모두 들을 수 있었다.소탁은 성품이 부드럽고 인자했다.이런 고문이나 심문 같은 일은 애초에 잘하지 못했다.황제가 곁에 붙여준 암위들도 제법 실력은 있었지만, 닭장수들을 떨게 할 정도는 아니었다.하지만 열무신은 달랐다.그는 그저 그 자리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마치 지옥불에서 기어나온 귀신 같았다.맑은 날임에도 사람들의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 만큼, 존재감 하나로 공포를 자아냈다.소탁은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보아하니 저들은 그저 도구일 뿐이군요.”열무신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손에 묻은 피를 닦고, 수건을 바닥에 던지듯 놓으며 말했다.“잔챙이들이지. 아무리 캐물어도 쓸만한 정보는 없었습니다.”배후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닭장수 몇 명을 잡아봤자 소용없었다.열무신의 마음엔 짙은 짜증이 피어올랐다.약쟁이의 수법은 치밀하고 조심스러웠다.겹겹이 함정을 깔아놓은 듯, 쉽게 뿌리를 드러내지 않았다.그는 입술을 꾹 다물고 어둡게 눈을 떴다.속이 타들어갔고, 분노를 쏟아낼 데도 없었다.소탁은 그의 좌절과 혼란을 읽고 조심스레 말했다.“오늘 수고 많으셨습니다. 제 집에서 따뜻한 밥이라도 드시고 길을 나서시지요.”그의 말 뜻은, 강주로 돌아가 황제와 황후에게 상황을 전하라는 뜻이었다.하지만 어쩐지 그 말은 사형수에게 마지막 식사를 권하는 것처럼 들렸다.열무신은 입꼬리를 비뚤게 올렸다.“이런 와중에도 밥이 넘어간단 말입니까.”소탁은 전혀 언짢은 기색 없이 부드럽게 웃으며 답했다.“제
봉구안은 자신의 친부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그녀는 몰랐다.그가 한 번 본 것은 절대 잊지 않는 기억력을 지녔고, 내용을 명확히 꿰뚫는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그의 말에 따르면, 어릴 적부터 그런 재능이 있었다고 했다.하지만 점쟁이는 이렇게 말했었다.지나치게 총명하면 오래 못 간다.그래서 그는 일부러 자신의 능력을 억눌렀고, 남 앞에서는 좀처럼 드러내지 않았다.다만 집중만 한다면, 단 한 번 본 것도 전부 기억할 수 있었다.“이 십수 년간 강성에 들어온 외지인들의 성씨, 이름, 무슨 일로 들어왔는지, 머문 날짜까지 모두 기억하고 있습니다.”“우선 가족을 동반하거나, 노약자와 함께 들어온 이들은 제외했습니다. 대부분은 친척을 만나거나 생계를 위해 온 이들이니까요.”“그리고 또 걸러냈습니다. 강주에 지인이 있는 사람들 말이예요. 그런 이들은 약쟁이와 같은 은밀한 조직과는 어울리지 않지요. 저들은 언제나 혼자 움직이니까요.”봉 대인의 말은 모두 일리가 있었다.결국 그의 탁월한 기억력이 있었기에, 수많은 인원을 기억하고 하나하나 대조할 수 있었던 것이다.최근 2년간 입성한 외지인에 대해서는 여관마다 숙박 기록이 남아 있어, 그것도 판단 기준이 될 수 있었다.물론 개인적인 판단이 섞이긴 했지만, 봉구안은 이 명부가 충분히 쓸 만하다고 보았다.봉 대인은 말을 덧붙였다.“폐하, 특히 수상하다 여겨지는 인물들은 모두 붉게 표시해 두었습니다.”소욱은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스럽게 말했다.“알겠다. 만약 이 명부에서 약쟁이의 흔적을 찾아낸다면, 자네는 큰 공을 세운 셈이니라.”그러자 봉구안이 단호하게 나섰다.“설령 단서가 나온다 해도, 그건 시작일 뿐입니다.”“이전에 잡은 자들도 그랬지만, 약쟁이는 각자 다른 방식과 규율을 따르고 있어, 흔적을 따라간다 해도 본거지에 닿기는 어렵습니다.”소욱 역시 같은 생각이었지만, 장인어른에게는 현재 채찍보다는 당근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하지만 봉구안의 태도는 여전히 차가웠다.봉 대인의 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