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끼는 역량형 무기이지만 도끼날의 곡선은 도끼에 실리는 많은 힘을 손실하게 한다. 날카로운 창은 쉽게 도끼의 방어를 뚫을 수 있다.그래서 창과 도끼가 상극이라는 말이 예로부터 돌고 있었다.병기에 정통한 자라면 다 아는 사실이었다.단춘의 얼굴이 퍼렇게 질렸다.남제에서 나온 어린 장수는 대체 정체가 뭘까?봉구안은 안정적으로 창을 잡고 상대가 가까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공세를 시작했다.장코는 강력한 기류를 느끼고는 바로 도끼를 휘둘렀다. 왼손 도끼는 방어, 오른손 도끼는 공격용이었다.도끼를 휘두르는 그의 모습은 조금 둔해 보여도 진한 살기가 담겨 있었다.하지만 봉구안의 창술이 더 현란했다.두 사람은 십여차례 공격을 주고받았고 지켜보는 사람들이 현기증이 올 정도였다.단춘의 표정은 점점 안 좋아지고 있었다.장코의 쌍도끼는 거의 적수가 없었는데 지금은 상대에게 계속 끌려만 다니면서 역습의 기회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상황이 점점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조유관 성루.북소리가 점점 힘차게 울리며 병사들의 사기를 돋우고 있었다.황후의 창술을 본 병사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북대영의 유명한 명장 맹 소장군답게 그녀의 창술은 가히 따라올 자가 없었다.봉구안은 점점 더 빠르게 공격을 시전했고 장코는 계속해서 뒤로 밀려나고 있었다.쌍도끼의 위력은 그녀를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점점 짜증을 느낀 장코가 소리를 질렀다.“죽여버릴 테다! 악!”아둔한 그는 맹공격밖에 할 줄 아는 게 없었다.봉구안은 날렵하게 피해 후방으로 간 뒤에 창을 휘둘러 그의 허벅지를 찔렀다.그가 뒤돌아서자 그녀의 창은 곧바로 그의 눈앞까지 날아왔다.“악!”상대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예리한 창끝은 쌍도끼 사이의 빈틈을 파고들어 상대의 눈을 찔렀다.극심한 고통에 장코는 도끼 하나를 버리고 본능적으로 손을 피가 철철 흐르는 눈으로 가져갔다.그는 고통에 몸부림치며 도끼를 마구 휘두르며 고함을 질렀다.“남제의 쥐새끼, 죽여 버릴 테다! 피하지 마! 당장 널 가루로 만들어 시체
단춘은 눈앞의 사람이 맹성주일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열일곱 어린 나이에 호문관 전쟁에서 적군 2만을 죽여 축경관을 세우고 적의 사기를 단숨에 떨어뜨린 맹장!무섭다는 단어가 저절로 나오는 사람이었다.단춘의 눈빛이 흔들리기 시작했다.남은 3개국 장령들도 두려움에 떨기 시작했다.맹성주라면 이 많은 사람을 죽인 게 이해가 됐다.또 한번의 축경관이 완성된다고 해도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람이었다.“단 장군! 더 이상 싸우면 안 됩니다! 상대는 맹성주예요. 우리 애들이 나가도 헛된 죽음이란 말입니다!”“맹성주, 어떻게 맹성주가! 단 장군, 남제군에게 끌려다닐 수는 없습니다!”단춘이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전서를 수락했는데 중도에 물러날 수는 없다! 계속 싸운다! 이 많은 사람들을 상대로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 것 같아? 백 명이 부족하면 천 명이 나가고 만 명이 나가면 된다!”그 순간 그는 광기에 미친 북연 황제와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그와 다른 점이라면 그래도 이성은 남아 있다는 점이었다.타국 장령들이 말렸지만 단춘은 냉소를 지으며 그들에게 말했다.“잊었어? 저 여잔 진작에 장군 직무를 내려놨어. 남제 황제에게 시집가서 지금 회임을 한 몸이야. 회임 중인 여인도 못 쓰러뜨린단 말이냐?”그는 봉구안을 노려보며 병사들에게 말했다.“잘 들어! 이따가 저년의 배를 공격해! 회임을 했다고 했으니 배가 약점일 거야! 아무 생각하지 말고 배만 노려! 저년을 죽일 수 없어도 그 애새끼는 죽게 만들라고!”그제야 병사들의 사기가 좀 돌아온 듯했다.아무리 맹성주가 날고 기는 재주가 있다고 해도 지금은 회임 중인 여인에 불과했다.임산부 하나 못 쓰러뜨릴까?어린 장순은 피 튀기는 장면을 계속 보고 있자니 속이 울렁거렸다.하지만 이곳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그는 오늘 본 것을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황후마마의 풍채를 글로 써서 역사에 길이 남게 할 것이다.전장은 저녁까지 이어졌다.봉구안의 주변으로 점점 많은 시체가 쌓여가고 있었다.단춘
적군은 관내경의 시신을 공터로 운반했다. 벌거벗은 시신 온몸에 채찍 자국이 나 있었다.그 광경을 지켜본 남제군은 분노에 치를 떨었다.죽는 건 머리가 바닥에 떨어지면 끝나는 일이지만 시신이 이 정도로 혹사당했다니 참을 수 없었다.성루에서 두 남제 사병이 관 장군의 옷을 챙겨와서 그의 몸에 입혀주었다.단춘은 봉구안을 매섭게 노려보며 말했다.“황후마마, 태중의 아이는 진작에 유산되었지요?”그게 아니라면 지금까지 싸우면서 이렇게 멀쩡한 게 말이 안 됐다.물론 봉구안이 회임했다는 소식은 처음부터 거짓이라는 것을 그는 모르고 있었다.관내경의 시신은 성루로 올라간 후, 단춘은 자기 사람들의 시신을 돌아보았다.아무리 생각해도 분했다.그래도 더 늦기 전에 멈추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단지 백오십 명 죽었을 뿐이다.남제가 말하는 축경관은 이 정도로는 부족했다.단춘은 음침한 눈으로 조유관 성루를 노려보며 소리쳤다.“철수한다!”이때, 그의 뒤에서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가도 된다는 말은 한 적 없는데?”고개를 돌리자 피칠갑을 한 가면을 쓴 봉구안이 매서운 눈으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순식간에 사방으로 살기가 느껴졌다.단춘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장군! 저기 보십시오!”누군가가 겁에 질린 비명을 질렀다.조유관 성루에서 갑자기 수십개의 등나무 덤불이 굴러떨어졌다.거대한 덤불은 등나무 줄기를 엮어서 만들어진 것으로 크기가 사람 크기만했다.거대한 물체가 그들을 향해 굴러왔다.만약 그냥 덤불이었다면 이 정도로 두렵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이것은 화공의 시작이라는 것을 그들은 직감했다.조유관 같은 방어가 쉬운 고지에서는 더욱 요긴하게 사용되는 병법이었다.등나무 덤불이 적군의 앞으로 굴러가자 남제 사병들은 불화살을 날렸고 순식간에 등나무 덤불에 불이 붙었다.멀리서 바라보면 불바다가 따로 없었다.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 불덤불이 눈앞에 굴러오기 직전에야 단춘은 정신을 차리고 소리쳤다.“철수! 당장 철수하라!”그는 욕설을 퍼부으며 도망쳤다
조유관 밖에서는 적군이 사방으로 흩어지며 도망쳤고, 조유관 안에서는 제군의 북소리가 장엄하게 울려 퍼졌다.불타오르던 등나무 화구가 완전히 타버리자 불길은 사그라들고, 달빛과 별빛이 더욱 또렷이 빛났다.그 빛은 봉구안의 몸을 감싸며 그녀의 마른 체구를 한층 도드라지게 했다.그러나 그녀는 꿋꿋한 소나무처럼 강인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대하국을 선두로 한 사국 연합군이 퇴각한 뒤에야 봉구안은 비로소 피로를 감추지 못하고 바위에 걸터앉았다.살짝 구부린 어깨 아래로 손가락 틈새를 따라 붉은 피가 흘러내렸지만, 아무도 그 상처를 눈치채지 못했다.그녀의 양팔은 도끼에 베였으나, 그녀에게 그것은 사소한 부상에 지나지 않았다.오늘 이후, 사국 연합군은 감히 조유관을 쉽게 넘보지 못할 것이다.그녀에게는 그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었다.“마마, 괜찮으십니까?”마상 덫을 설치했던 병사들이 다가와 걱정스럽게 그녀를 둘러쌌다.봉구안은 흐르는 피를 감추며,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괜찮다.”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전장에 널린 적군의 시신들을 바라보았다.그 눈빛은 차갑고도 담담했다.……사국 연합군 주둔지.단춘은 대군을 이끌고 퇴각하자마자 정찰병들을 불러들였다.정찰병들은 적의 동태를 살피고, 병력 배치와 무기 규모를 파악하는 데 중요한 임무를 맡고 있다.그러나 단춘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내가 조유관을 철저히 감시하고, 제군의 동태를 파악하라고 명했거늘, 도대체 뭘 하고 있었느냐!”“제군이 언제 등나무 화구를 준비했는지, 언제 조유관을 빠져나와 마상 덫을 설치했는지조차 모르다니! 너희들의 임무를 잊은 것이냐!”정찰병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당혹스러워했다.“장군, 등나무 화구는 제군들이 철저히 숨겼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희는 밤낮으로 감시했습니다. 그들이 조유관을 몰래 빠져나갔다니,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맞습니다, 장군! 관내경이 죽은 이후, 조유관 밖으로 단 한 명도 나온 적이 없습니다!”단춘의 얼굴이 순식간에 분노로 일
관 부인은 고개를 들어 봉구안을 올려다보았다.눈물이 채 마르지 않은 얼굴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였다."부검을 하신다고요? 황후마마, 그게 무슨 뜻입니까?"관 부인의 두 아들도 깜짝 놀라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부장 서봉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마마, 설마 관 장군의 죽음에 의혹이 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일반적으로 의문이 없는 죽음이라면 부검을를 하지 않는다.봉구안의 제안에 서봉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봉구안은 장수들의 복잡한 표정을 잠시 살핀 뒤, 침착하게 말했다."나는 장코와 싸워 본 적이 있어 관 장군의 실력을 익히 알고 있다. 만약 두 사람이 정정당당히 맞붙었다면 관 장군이 이렇게 쉽게 패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난 부검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봉구안의 눈빛은 먼지 하나 허용하지 않을 정도로 날카로웠다.특히나 이 군영 안에서는 더욱 그랬다.관내경은 나라를 위해 싸운 훌륭한 장군이었다.그런 그가 의문스럽게 죽은 것도 모자라 무모한 장수라는 오명을 뒤집어쓸 위기에 놓였다.봉구안은 그것이 안타까웠다.장수들은 내심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했다.만약 관 장군의 죽음에 의혹이 있다면, 이는 곧 군영 안에 누군가 장군을 해친 자가 있다는 뜻이 된다.그로 인해 전장에서의 패배가 일어났다면, 그 가능성은 상상만으로도 등골이 오싹할 지경이었다.서봉이 즉시 찬성하며 말했다."마마의 말씀이 옳습니다. 바로 부검 전문가를 부르겠습니다!"그때 한 사람이 스스로 나섰다."황후마마, 소인 서 장군, 제가 부검에 관해 얕은 지식을 갖고 있습니다."봉구안은 그를 바라보았고, 서봉이 급히 설명했다."마마, 이 사람은 군의 강달입니다."그러나 봉구안은 명령을 내리기 전에 강달이 도구를 꺼내 관내경의 시신을 만지려 하자, 단호히 제지했다."부검에 대해 조금 안다고? 전문가가 아니라는 뜻이겠지.""그런 주제에 어찌 함부로 시신을 만지려는 것이냐!"강달은 크게 당황하며 무릎을 꿇었다.봉구안은 단호한 태도를 유지하며 차갑게 말했
관 부인은 늙은 의관의 말에 강하게 반대했고, 큰아들은 감정을 억누르지 못한 채 소리쳤다.“안 됩니다! 아버지께서는 생전에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이런 아버지의 시신을 어찌 훼손하려 하십니까!”막내아들 또한 강력히 맞섰다.“황후마마, 아버지의 온전한 시신을 지켜주십시오! 오장육부를 모두 드러내는 것은 너무도 잔인합니다!”부장 서봉도 머뭇거리며 늙은 의관에게 물었다.“시신을 절개하면 반드시 뭔가를 알아낼 수 있습니까?”늙은 의관은 솔직히 대답했다.“꼭 그렇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관 부인은 더욱 통곡하며 외쳤다.“그렇다면 절대로 시신을 훼손해서는 안 됩니다!”모두가 봉구안을 바라보았다.봉구안은 관내경의 시신을 내려다보았다.하얀 천으로 덮인 시신은 결국 모든 이의 마지막 모습이었다.곁에서 지켜보던 장순은 착잡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만약 황후가 진실을 밝히기 위해 강제로 시신 부검을 진행한다면, 뭔가를 알아내는 것은 다행이겠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으면 관가 사람들의 반발을 살 가능성이 높았다.차라리 여기서 멈추는 것이 낫다고 판단되었다.그렇게 하면 관 장군은 적군에 의해 전사한 것으로 남아 영웅으로 칭송받을 수 있었다.장순은 황후에게 그만두라고 권하려 했다.하지만 봉구안은 먼저 나서서 시신 앞에서 군례를 올렸다.“관 장군, 우리는 오늘 진실을 밝히기 위해 이 자리에 모였네. 가족분들의 심정 또한 충분히 이해하네.”“그래서 시신 부검 여부를 자네에게 맡기려 하네.”그 말에 모두가 놀라며 굳어졌다.관 장군이 직접 결정한다니?황후가 정녕 미친 걸까?이어 봉구안은 동전 하나를 꺼내 들었다.“앞면이 나오면 부검을 진행하고, 뒷면이 나오면 온전한 상태로 장례를 치르겠습니다.”“관 장군, 어서 뜻을 보여주게!”모두가 긴장된 얼굴로 지켜보는 가운데, 봉구안은 동전을 높이 던졌다.동전이 그녀의 손에 떨어지자, 봉구안은 즉시 손으로 덮어 결과를 감췄다.현장은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고요했다.봉구안이 손을 거두자, 드러난
봉구안은 관내경의 죽음에 의문을 품고, 모든 이들 앞에서 의혹을 제기했다. 이는 진실을 밝혀내기 위해 일부러 수를 던진 것이었다.어젯밤, 은삼 일행은 관내경의 시신이 보관된 장막 바깥에서 밤새 경계하며 누구든 드나든 것을 똑똑히 지켜보았다.장막 바깥에는 병사들이 경비를 서고 있었으며, 관 부인과 두 아들, 서봉, 그리고 의관 강달이 차례로 시신이 있는 안으로 들어갔다.장순이 상황을 간결하게 정리했다.“즉, 방금 언급한 다섯 사람이 모두 시신을 손댈 기회가 있었던 거네요!”관 부인은 그 말을 듣자 모욕감을 느낀 듯 격하게 반발했다.“저는 아닙니다! 제가 어찌 남편을 독살했겠습니까? 남편을 잃고 무슨 이득을 보겠다는 겁니까?”그녀는 곧 서봉을 향해 의혹의 화살을 돌리며 강하게 말했다.“서봉이야말로 가장 의심스럽습니다! 남편 아래에서 불만이 쌓였고, 상위직으로 올라가고 싶었던 겁니다! 황후마마, 부디 현명하게 판단해 주십시오!”서봉은 관 부인의 적대적인 태도에 당황스러웠다.평소 좋은 일이 있으면 자신에게 돌아오지 않았고, 지금 같은 나쁜 일은 곧장 자신에게 씌워지니 억울하기만 했다.그러나 그는 냉정히 봉구안에게 예를 갖추며 말했다.“황후마마, 반드시 제 결백을 밝혀 주실 거라 믿습니다!”관 부인의 두 아들은 여전히 분노와 증오로 서봉을 노려보았다.봉구안은 서봉을 바라보며 냉랭한 음성으로 말했다.“저 자를 당장 잡아라!”명령이 떨어지자 병사들은 곧바로 서봉을 체포했다.관 부인은 만족스러운 듯 외쳤다.“서봉!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 죽음으로 반드시 그 죄 값을 치르게 될 것이다!”하지만 봉구안은 바로 다음 명령을 내렸다.“이곳에 있던 자 모두를 잡아라!”어젯밤 시신을 접한 이들은 모두 감금되어 조사 대상이 되었다.관 부인이 병사들에게 사슬을 차이자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그녀는 당황한 목소리로 외쳤다.“황후마마, 저는 억울합니다! 제가 독을 썼다니, 절대 사실이 아닙니다!”그녀는 머릿속에서 봉구안이 자신을 모함하려고 꾸민
군의 강달은 봉구안 앞에서 두려움에 떨었다. 그는 부상당한 몸을 웅크린 채 바닥에 엎드려 목숨을 구걸했다."황후마마, 억울합니다! 정말 억울합니다!"그러나 봉구안은 말없이 검을 꺼내 그의 목에 갖다 댔다.마침내 강달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이마에는 땀이 흘러내렸고, 얼굴은 긴장으로 가득했다."마마..."그는 간절한 눈빛으로 자신이 무죄임을 호소했다.하지만 봉구안의 표정은 바위처럼 단단하고 차가웠다."이 동대영 안에 잠입한 첩자가 몇이냐?"강달은 두려움에 몸을 떨며 고개를 저었다."소인은 모릅니다! 정말 모릅니다... 아!"말이 끝나기도 전에 봉구안의 검이 그의 한쪽 귀를 날려 버렸다.잘린 귀가 바닥에 떨어지며 피가 쏟아졌고, 강달은 고통에 몸을 떨며 울부짖었다."마마, 제발 살려주십시오! 정말 아무것도 모릅니다! 독도, 첩자도, 모두 제 일과는 무관합니다!"그러나 봉구안의 표정은 요동치지 않았다."아직도 모르겠다고? 그럼 나머지 귀도 필요 없겠군."검이 다시 번쩍였고, 강달은 본능적으로 바닥에 엎드려 용서를 빌었다."제발 안 됩니다! 안 됩니다! 마마, 제가 어리석었습니다. 그들이 많은 은자를 주고, 제 가족을 다른 나라로 피신시키겠다고 약속했을 뿐입니다. 부디 제 목숨만은 살려주십시오!"그의 울먹이는 말 속에는 자신이 선택한 길을 후회하지 않는 기색이 엿보였다.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인 남제는 멸망할 운명이라 그는 믿었다.그가 살아남기 위해 한 선택은 과연 잘못된 것일까?남제 백성으로서는 부끄러웠을지 몰라도, 가족을 지키려는 남편이자 아버지로서는 정당하다고 여겼다.강달의 변명에 은삼은 참지 못하고 일갈했다."너는 관 장군을 죽여 놓고도 무슨 염치로 목숨을 구걸하느냐!"봉구안은 강달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물었다."누가 널 매수했지?""그자는 항상 얼굴을 가리고 있었기에, 저는 그가 누군지 모릅니다.""그와 어떻게 연락했느냐?""그 자가 직접 저를 찾아왔습니다..."강달은 두려움에 떨며 대답을 이어갔다.봉구안의 냉정
현비의 눈엔 짙은 허망함이 어려 있었다."폐하, 폐하께서 단 한 번이라도 신첩을 이해하려 하셨더라면 아셨을 겁니다. 신첩은 본래 약리학에 정통했습니다.”“영비마마께 쓴 독은 신첩이 직접 조제한 것입니다. 하지만 의원이 제 몸을 고치지 못하듯, 신첩 또한 제 독을 온전히 해독하지는 못했습니다. 그저 몸속의 독성을 억누를 수 있을 뿐, 근본적인 치료는 불가능했습니다."더 할 말은 없다는 듯, 현비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소욱은 손짓으로 진한길에게 몸을 제압한 손을 풀라고 지시했다.양팔이 풀리자, 현비는 앞으로 푹 고꾸라지듯 무릎을 꿇고 이마를 바닥에 박았다. 그녀는 머리를 조아리며 간청했다."폐하, 제발 제 가족만은… 용서해주시옵소서."곁에서 지켜보던 진한길은 표정 없이 서 있었지만 마음 한켠에 얕은 동정이 스쳤다. 현비에게 분명 죄는 있었지만, 모든 시작은 모용란의 악행이었기 때문이었다.그러나 소욱의 시선은 여전히 냉담했고, 목소리는 단호했다."현비는 황제인 나를 속이고 궁중의 법도를 어겼다. 천형에 가두고 추후 처분을 기다리게 하라."현비는 이 결과를 받아들였다. 오히려 마음 한켠으론 안도했다. 그 죗값이 가족에게 미치지 않았으니 말이다.궁에서 끌려나가는 길에 현비는 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내뱉었다."하늘이… 이렇게 넓었구나."수년간 좁디좁은 궁궐 안에 갇혀 살며 늘 발밑만 바라봤던 그녀. 하늘을 올려다보는 법도, 마음을 여는 법도 잊은 채 살아왔었다. 그렇게 그녀는 스스로를 가두었고, 걸을수록 길은 좁아졌다.……현비가 다시 천형에 갇혔다는 소식은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궁 안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았지만, 정작 무슨 죄로 잡혀간 건지는 알지 못하였다.현비의 궁녀인 동하는 자녕궁 앞에 무릎을 꿇고 울며 태후께 간청했다.태후는 전각 안에서 목탁을 두드리며 마음을 가라앉히고 있었다.곁에서 시중들던 계 상궁은 태후가 독경을 마친 뒤 몸을 굽혀 조심스럽게 말했다."태후 마마, 동하 저 아이가 벌써 두 시진째 무릎 꿇고
현비는 텅 빈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며 중얼거렸다."영비마마와 폐하께서는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란 사이였지요. 그 시절, 마마는 후궁 중에서도 가장 총애를 받았습니다. 제 아버지는 제가 영비와 닮았다는 이유로 서둘러 저를 궁에 들여보내셨죠.”“궁의 모든 이들은 영비마마가 온화하고 현명하다고 칭송했었습니다. 저 역시 처음 입궁했을 땐 그렇게 믿었고요. 하지만 곧 마마의 진면목을 알게 되었습니다.”“겉으로는 자매처럼 지내며 장신구도 건네주고, 심지어 폐하를 뵐 때도 저를 데리고 가셨었죠."소욱은 그런 기억이 없었다. 그가 모용란을 후궁으로 맞이한 것도 정이 아닌 우정 때문이었다. 즉위 초창기 정사에 바빠 후궁을 찾을 여유도 없었다. 모용란이 어전 출입이 잦았던 것은 기억했지만, 그 자리에 현비가 있었다는 기억은 없었다.현비는 그의 표정을 보고, 그가 기억하지 못한다는 걸 알아챘다."폐하께서는 단 한 번도 저를 제대로 바라본 적이 없으셨습니다. 하지만 영비마마는 다르셨죠. 간택 당시 폐하께서 제 시를 칭찬하신 그 한마디가 마마에게는 큰 상처였습니다.”“폐하께는 그저 흘려 넘긴 말이었겠지만 저에겐 큰 기쁨이었고, 영비마마에겐 시기와 질투의 씨앗이 되었습니다."소욱은 더는 후궁들 사이의 질투와 다툼을 듣고 싶지 않았다. 그는 그런 다툼을 혐오했지만, 그것을 바꿀 힘은 없었다."모용란이 어떻게 너에게 독을 먹였느냐. 왜 그때 나에게 말하지 않았느냐."현비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마치 허탈한 이야기를 들은 듯 눈에 물기가 어렸다."그때 제가 폐하께 말씀드렸다면 과연 믿어주셨을까요? 폐하께서 영비마마를 벌하셨을까요?"소욱이 입을 열기도 전에, 그녀가 먼저 단언하듯 말했다."아니요. 폐하께서는 안 그러셨을 겁니다."그 말은 속삭임이 아니라, 분노 어린 한숨에 가까웠다. 그녀의 시선엔 실망과 원망이 가득했다."폐하, 저는 한 번도 폐하께서 현명한 군주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황후 마마께서 나타난 후에야 폐하께서는 조금씩 달라지셨습니다
이튿날 이른 아침, 소욱은 황궁으로 복귀했다.아침 조회 자리에서 신료들이 약쟁이 사건을 거론했다.“폐하, 각지에서 과도한 억제 조치가 이어지고 있사온데 약쟁이들이 그 틈을 타 소란을 일으켜 억울한 판결이 속출하고 있습니다. 무고한 지방 관원들이 연루되어 피해를 입고 있으니 부디 폐하께서 신중히 살펴주시옵소서.”소욱도 그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약쟁이들이 의도적으로 관료들의 집에 숨어들어 수사 대상이 되도록 만들고 사건을 키워 혼란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면 자신들은 혼란 속에 숨어 빠져나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하지만 그와 얽힌 관료들이 모두 무죄라고는 단정할 수 없었다. 결국 가장 확실한 방법은 대신들을 파견해 진상을 직접 조사하는 것이었다.조회가 끝난 후 소욱은 곧장 현흥궁으로 향했다.그가 입은 용포는 황제의 위엄을 더욱 드러냈고 냉랭한 분위기는 더욱 그를 권위 있게 만들었다.오랜만에 성상의 얼굴을 뵙는 궁인들은 일제히 무릎을 꿇고 외쳤다.“황제 폐하를 뵙습니다!”궁 안.궁녀 동하가 다급히 안으로 뛰어들었다.“마마! 마마! 폐하께서 오셨습니다!”현비는 탕약을 마시고 있던 중이었다. 얼굴은 병색이 완연했고 평소의 생기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뜻밖의 방문에 놀란 그녀는 눈빛에 당혹을 숨기지 못했다.폐하께서 왜 이곳에...그녀는 급히 약그릇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황제를 맞을 준비를 했다.소욱의 등장과 함께 전각 안이 시끄러워졌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위엄 넘치는 황제가 천천히 전각 안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바라보았다.그녀는 가볍게 입술을 다문 채 예를 올렸다.“신첩,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그간 강녕하셨습니까.”소욱은 말없이 자리에 앉았다. 잘생긴 얼굴 위엔 차가운 무표정이 드리워 있었다.그는 손짓 한 번으로 전각 안의 궁녀들을 물리고 현비만 남겨두었다.현비는 당황한 얼굴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폐하…”“내가 묻는 말엔 진실만을 말해야할 것이다.”소욱의 목소리는 단호했고 얼굴엔 엄중함이 어렸다.현비는 속내
황궁.현흥궁.현비는 병이 도지자 오래 지나지 않아 정신을 잃었다.그녀는 시녀 동하가 태후를 찾아가 홍련초를 구하려 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마마...”찰싹!갑작스레 손이 날아와, 동하의 뺨을 세차게 후려쳤다.당황한 동하는 그 자리에 굳어섰다.무엇이 잘못된 건지, 어째서 현비가 이토록 격앙된 건지 알 수 없었다.현비는 힘겹게 가슴을 짚으며, 쉰 목소리로 말했다.“나가.”동하는 현비의 기분이 몹시 나쁜가 보다 여기고 조용히 물러나려던 찰나, 누군가 궁 안으로 들어섰다.“황제 폐하의 명이다. 염 신의를 모셔와 현비마마의 병을 진찰하게 하라!”그 순간 현비의 얼굴빛이 확 변했다.겉으로는 태연한 듯했지만, 장막 너머의 목소리에 단호하게 응했다.“폐를 끼쳐 송구하네. 폐하께는 괜찮아졌다 전해주게.”그러나 염 신의는 말을 자르며 곧장 앞으로 나섰다.“마마, 폐하께서 직접 전하셨습니다. 반드시 병을 완쾌하라 하셨습니다.”그는 허락도 받지 않은 채 장막 앞으로 다가가 진맥을 청했다.“손을 내어주시옵소서. 진맥을 해야 합니다.”한동안 장막 안은 고요했다.잠시 후, 하얀 손 하나가 조심스레 틈 사이로 뻗어 나왔다.동하는 재빨리 비단 손수건을 꺼내 손목 위에 덮었다.여인의 살이 남성에게 닿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궁녀들은 눈치도 없이 염 신의에게 의자 하나 내주지 않았다.그는 묵묵히 허리를 굽혀 그대로 맥을 짚었다.현비는 말없이 입술을 꼭 다물고 있었다.잠시 후 염 신의는 맥에서 손을 거두며 말했다.“마마, 피 한 방울이 필요합니다.”그는 말하면서 옆에 있던 동하에게 바늘과 작은 사기그릇을 건넸다.동하는 조심스레 다가가 속삭였다.“마마, 소녀가 하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현비는 익숙한 듯 손을 내밀며 다정히 말했다.“괜찮아. 어서 하렴.”동하는 피를 모아 염신의에게 전해주었다.염 신의는 약상자를 열어 조그만 병 하나를 꺼냈다.그 안의 약가루를 그릇 위에 조심스레 부었다.그의 손길은 침착했고 집중력 넘쳤
모용가에 대한 조사는 여전히 제자리걸음이었다.소욱은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모용가를 은밀히 조사하라고 했을 때, 별다른 이상이 없다고 들었느냐.”“갑자기 왜 그 얘길 꺼낸 것이냐? 혹시…”그는 말을 끝맺지 않았지만, 봉구안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그녀는 모용가가 약쟁이 사건과 얽혀 있을 가능성을 의심하고 있었다.봉구안은 단정한 목소리로 답했다.“사형이 약쟁이 사건을 조사하기 시작한 시점은 폐하께서 즉위하신 이후입니다.”“그 말은 곧 선황제께서 돌아가시기 전부터 이미 약쟁이들이 활동하고 있었다는 뜻이지요.”“그 시점을 고려하면, 선황제께서 무언가 눈치채셨을 가능성도 있습니다.”“소첩은 그래서 모용가가 이 사건과 관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다만 어디까지나 제 추측일 뿐, 아직 뚜렷한 증거는 없습니다.”그녀의 말에 담긴 확신은 쉽게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소욱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그렇다면 지금 네 말은… 모용가를 억지로 몰아세우겠다는 것이냐.”농담조였지만, 소욱 역시 마음속으로 봉구안의 의심을 부정하지 못하고 있었다.선황제의 유언은 분명 모용가를 경계하고 있었다.하지만 지금껏 감찰을 맡은 자들이 어떤 흔적도 찾지 못했다는 건, 그들이 그만큼 은밀하게 움직였다는 뜻이었다.그런 점에서 모용가의 행적은 약쟁이들의 수법과 닮아 있었다.그 생각에 이르자 소욱의 눈빛에 서늘한 기운이 스쳤다.“사람을 더 붙이도록 하마. 이번엔 제대로 조사하게 하자.”그날 밤 소욱은 평소처럼 자유각에 머물렀다.궁 안의 일은 이미 손을 놓아도 될 만큼 정돈되어 있었고, 후궁의 일은 태후가 맡아 관리하고 있었다.빈들 또한 조용한 편이었으나, 단 하나. 약쟁이 사건만큼은 태후의 골칫거리였다.태후는 후궁들에게 자중할 것을 명하며, 그 본보기로 현비를 들었다.그날 밤 현비의 시녀 동하가 태후를 찾아와 다급히 울부짖었다.“태후마마, 제발 저희 마마를 살려주십시오!”이미 잠자리에 들었던 태후는 몸을 일으키며
봉구안은 자신이 직접 그려둔 지도를 꺼내어 소욱에게 펼쳐 보였다.“황성을 총타로 삼아 사방에 명령을 내리는 것. 이것이 바로 그들의 지령 경로입니다.”“그들의 평소 수법을 보면, 지금처럼 조정과 무림이 손잡고 그들을 압박하는 상황에서 가장 먼저 할 일은 모든 연락선을 끊고 총타부터 지키는 것이겠지요.”“그러기 위해서는 내부 인물들을 정리하는 게 먼저입니다.”소욱이 그녀의 말을 받아 이었다.“그렇다면 우리가 그 틈을 노려 분타부터 하나씩 무너뜨릴 수 있다는 뜻이로군.”봉구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그녀는 지도 위 몇 군데를 손가락으로 짚었다.“여기 표시된 곳들이 현재 저희가 확인한 그들의 은신처입니다.”“대부분 외진 산골이나 황량한 지역에 자리 잡고 있어요. 죽산진 근처 산속 동굴처럼 말이지요.”“폐하께서도 기억하시겠지요. 예전에 황성 도관 아래에서 많은 약쟁이들을 발견했을 때를요.”소욱은 그 일을 뚜렷이 기억하고 있었다.그때 봉구안은 약쟁이에게 상처를 입었고, 그가 그녀를 등에 업고 간신히 빠져나왔었다.봉구안의 눈빛이 차갑게 식어갔다.“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 도관 자체가 약쟁이의 은신처였을지도 몰라요.”“그리고 기억하시겠지요. 천룡회가 황성을 공격했을 때 약쟁이 대군을 풀었는데, 그 시각이 바로 늦은 밤이었어요.”소욱은 그녀가 전하려는 의미를 곧장 알아차렸다.그는 지도 위에 찍힌 지점들을 살펴보았다.“은신처의 위치와 약쟁이들의 활동 시각을 보면, 그 자들은 어둠 속 환경에 익숙한 존재들이겠구나.”봉구안은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어둡고 외진 곳이야말로 약쟁이들의 은신처로는 가장 알맞은 곳일 거예요.”“저희가 죽산진에서 약쟁이 소굴을 조사했을 때도, 산속 동굴 안은 손을 뻗어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만큼 깜깜했지요.”“강주에서 발견한 은신처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우연이라고 보기엔 너무 겹치는 것들이 많아요.”소욱은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그렇다면… 이 사실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겠느냐?”봉구안은 냉정한 눈빛
봉구안은 놀란 듯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황성에도 홍련초가 자란다고요?"소욱은 곧바로 진지하게 대답했다."누가 심었는지, 얼마나 되는지는 아직 모른다. 서쪽 교외에 사람을 보냈으니 곧 소식이 올 거야."봉구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에 잠겼다.소욱은 그녀의 그릇에 반찬을 더 담으며 말했다."일단 밥부터 먹으렴. 요즘 부쩍 더욱 말라 보이는구나. 아이를 품은 몸이라면 더 잘 챙겨야 하지."하지만 봉구안의 눈빛은 여전히 다른 데 머물러 있었다."혹시… 열무신의 소식은 아직도 없는거죠?"소욱은 묵묵히 고개를 저었다. 그는 서둘러 그녀가 더 걱정하지 않도록 화제를 돌렸다.소탁을 황성으로 데려온 뒤 그는 곧장 태의원을 불러 진찰을 받게 했다. 하지만 상처가 눈에 있는 탓에 회복이 쉽지 않았고 지금은 사실상 눈이 먼 사람처럼 지내고 있었다. 혼자 사는 데 어려움이 컸지만, 하녀를 붙여 주겠다는 제안도 번번이 거절했다.봉구안은 차분하게 물었다."폐태자께서는 지금 어디에 머물고 있나요?""마땅한 집을 하나 찾아 그곳에 머물게 하였다. 혹시나 있을 위험을 대비해 그림자 호위도 붙여 두었다."그가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은 단순한 걱정 때문만은 아니었다. 잠시 뜸을 들이던 소욱이 다시 입을 열었다."예전에 널 시중들던 연상을 혹시 기억하느냐?"봉구안은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되물었다."연상… 기억하죠. 그런데 갑자기 그건 왜 여쭤 보시는 거죠?"소욱은 다소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요 며칠 사이 그 아이가 소탁을 여러 번 찾아갔다는구나. 꽤 신경을 쓰는 듯했다."봉구안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그게 그렇게 문제될 일인가요?""그 아이는 아직 시집을 안 가지 않았느냐."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봉구안은 곧장 말을 끊으며 단호하게 말했다."제가 알기론 연상은 궁을 떠난 뒤 곧장 진가 저택으로 돌아갔습니다. 혼자서 글씨와 그림으로 생계를 꾸려 왔고요. 살림은 넉넉지 않지만 나름대로 삶의 방향은 확실합니다. 진가를 다시 일으켜 세우겠다는 뜻을
녕비는 자기가 무슨 심각한 말을 했는지도 모른 채 해맑게 웃으며 현비를 바라보았다.“언니, 우리 자매처럼 지냈잖아요. 그래서 말인데 남한테 덜미 잡히기 전에 차라리 폐하께 먼저 말씀드리는 게 낫지 않을까요? 어차피 결백한 사람은 당당해도 되는 법이지 않겠어요?”“홍련초는 그 자체로는 죄가 없는 약초예요. 죄가 있는 건 그걸로 독을 만든 자들이죠.”“언니처럼 착한 분이 약쟁이랑 엮일 리가 없잖아요, 그쵸?”그녀의 웃음은 현비의 눈에 유난히 싸늘하고 따갑게 느껴졌다.현비는 얼굴이 희미하게 질려가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녕비, 네가 의심하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해.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맹세컨대 내가 마시는 약은 약쟁이 사건과는 정말 아무 관련도 없어.”녕비는 굳이 대꾸하지 않은 채 조용히 말을 이었다.“제가 언니를 믿느냐 마느냐는 사실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중요한 건 폐하께서 어떻게 생각하시느냐죠.”현비는 한동안 침묵하다가 깊은 숨을 고르고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맞는 말이야.”“자, 할 말은 다 했으니까 전 이만 자녕궁으로 가볼게요. 태후마마께 기도드릴 시간이네요. 굳이 배웅하지 않으셔도 돼요.”녕비가 자리를 뜬 뒤, 곁에 있던 시녀 동하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마마, 녕비 마마 말씀이 틀린 것도 아니에요. 폐하께서 약쟁이 사건을 철저히 조사하고 계시다 하니, 홍련초가 얽히는 일은 아무래도 너무 커요.”현비의 눈빛에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그녀는 그저 이 궁 안에서 살아남고 싶었을 뿐이었다.그녀는 그 어떤 죄도 짓지 않았다. 정말로 아무 잘못도 없었다.“…종이랑 붓을 준비하거라. 폐하를 뵙기 전에 아버지께 먼저 편지를 써야겠다.”“예, 마마.”……그날 밤.자유각.소욱은 이날 밤도 자유각에 머물며 봉구안과 시간을 보내려 했다.그러나 대부분의 시간은 상소문을 검토하는 데 쓰였고 그녀 곁에 있어도 여유를 누릴 틈은 많지 않았다.그는 문서를 펼쳐든 채 농담처럼 말했다.“황제가 된 건, 아마 전생의 업보였던 모양
그해 봉구안은 스스로 천지설산에 올라 자욱화를 채취하려다 목숨을 잃을 뻔하였다. 그때 그녀를 구해준 이가 바로 염 신의였다.그 후 인연이 닿아 둘은 다시 만나게 되었고, 그 무렵 염 신의는 약쟁이 독의 해독제를 연구하고 있었다.이에 봉구안은 그를 황성으로 데려왔다.그는 예전에도 한 차례 해독제를 만들어낸 바 있었으나, 중독자들에게 써보았을 때 뚜렷한 효과는 없었다.하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진정한 해독제가 완성된 것이다.분명 기쁜 소식이었다.“염 신의 말로는, 홍련초 덕분에 그동안 풀지 못했던 원리를 비로소 깨달았다고 합니다.”“이미 중독자들에게 해독제를 복용시켰고 모두 회복되었습니다. 장순의 어머니까지도요.”장순은 아직 어린 유생이었으나, 과거 제후국들이 남제를 포위했을 당시 봉구안이 특별히 데려갔던 소년이었다.그는 적국을 향한 설전에서 통쾌한 활약을 펼친 바 있었다.그의 어머니는 오래전 약쟁이 독에 중독되어, 살아 있으되 정신이 나간 채 살아온 사람이었다.해독제가 생겼다는 건 의심할 여지 없이 경사였다.허나 좋은 일과 화는 언제나 함께 오는 법. 봉구안이 눈짓 하나만 보내도 소욱은 그녀의 속마음을 단박에 알아차렸다.그녀가 입을 떼기도 전, 소욱은 그녀의 팔을 가볍게 두드리며 오백에게 명을 내렸다.“사람을 붙여 염 신의를 철저히 보호하라. 해독제 이야기는 절대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하라.”오백은 곧장 명을 따랐다.밖에서 듣고 있던 진한길은 내심 고개를 갸웃거렸다.‘폐하께서는 왜 이렇게 오백을 쓰시는 걸까?’오백이 물러난 뒤, 소욱은 봉구안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해독제가 완성되었으니 약쟁이 독이 아무리 퍼져도 더는 위협이 되지 못할 것이다.”봉구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해독제는 결정적인 열쇠예요. 폐하, 문득 떠올랐는데… 담대연도 약쟁이 독에 중독된 사람이었죠?”소욱은 손을 들어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그 자에게도 해독제를 줄 것이다. 이제는 마음 놓고 쉴 수 있겠지?”“네.”봉구안도 지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