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군! 급보입니다! 장미 아가씨께서 치욕을 당해 자결하셨으니 속히 경성으로 복귀하여 큰아가씨 대신 혼인하라는 노부인의 명이 있으셨습니다!”남제(南齊)의 변경, 준마가 금방 녹은 시냇물을 힘차게 밟으며 미친 듯한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말을 탄 봉구안(鳳九顏)이 최전방에서 달리고 있었다. 흰색 소복에 검은 머리를 대충 비녀로 틀어 올린 그녀의 주변으로 귀티 나면서도 날카로운 분위기가 풍기고 있었다.그녀와 동생 봉장미는 쌍둥이였지만 이 시대에 여자 쌍둥이가 태어나면 불길한 징조였기에 그녀는 어릴 때부터 바깥을 떠돌며 자랐다.성품이 온화한 봉장미는 누구에게 원한을 살 여인이 아니었다.봉구안은 누가 그처럼 순수하고 착한 동생을 해하였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었다.하지만 그게 누구든, 범인의 가죽을 발라내서 개 먹이로 줄 것이다!호위대는 그녀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뒤에서 애타는 목소리로 소리쳤다.“장군, 벌써 강행군으로 말 두 마리가 죽었습니다. 전방에 객잔이 있으니 가서 좀 쉬고…”봉구안은 힘차게 채찍을 휘둘렀다.“따라오지 못할 거면 군영으로 꺼지거라! 이랴!”‘멍청한 놈들, 쉴 시간이 어디 있다고!’그녀의 어깨에 짊어진 것은 봉씨 가문 백여 명의 목숨이었다.호위대는 필사적으로 그녀의 뒤를 따랐다.상대는 북대영(北大營)에서 가장 빠르고 신출귀몰하기로 소문난 봉 장군이었다!그렇게 7일 후, 황성.봉가에서 일국의 황후가 나왔다는 것은 지고무상한 영광이었다.백성들은 천자의 혼인식을 구경하러 분분히 거리로 나왔다.하지만 영친 대오가 도착했지만 새신부가 나오지 않고 있었다.구경꾼들이 차츰 술렁이기 시작했다.“봉가의 장녀는 얼마 전에 산적들에게 끌려갔다가 봉가의 친위대가 출동하여 겨우 구해왔다고 들었는데 순결을 잃었을지도 모르는 여인이 어찌 일국의 황후가 될 수 있단 말이오?”“봉가의 여인들은 참 팔자도 좋소. 대대로 황후를 배출한 가문 아니오. 이런 든든한 집안이 우리 남제를 지켜주고 있어서 우리가 이런 태평 성세에 살고 있는
방 안에서 바깥의 소리를 듣고 있던 봉구안은 눈을 가늘게 치켜떴다.검사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봉가에는 이득이 될 게 없었다.황귀비는 봉가의 여식이 이미 순결을 잃었다는 것을 알고 일을 벌인 것이 분명했다.만약 봉장미의 대신인 그녀의 순결이 증명된다면 이 음모를 피해갈 수 있을지는 모르나, 필히 황귀비의 의심을 사게 될 것이다.만약 대체품 신분이 밝혀진다면 그것은 황실을 기만한 중죄이며 봉가는 화를 면치 못할 것이다.봉구안은 전방을 주시하며 창을 휘두르던 손으로 얼굴에 연지를 곱게 발랐다.사부께서는 그녀에게 병법과 관료가 해야 할 일들을 가르치셨다.사부의 부인인 사모께서는 그녀에게 안주인으로서의 도리와 처세술을 가르쳐 주셨는데 그 중에는 첩이 득실대는 귀족가의 뒷방에서 살아남는 법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때는 가르쳐 주시니 겸허히 배웠지만 그걸 쓰게 될 날이 오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그녀는 뒷방에 갇혀 살림이나 하면서 서방을 섬기는 여자보다는 이 나라의 곳곳을 누비며 영토를 넓히는 게 꿈인 사람이었다.그런데 결국 돌고 돌아 이런 날이 올 줄이야.태감과 그가 데려온 궁중 여관은 기세등등하게 봉 부인을 압박했다.“부인, 이건 황귀비 마마의 명령일세. 감히 명을 거부하겠다는 건가?”태감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비웃듯이 물었다.‘너희가 아무리 권세 가문이라고 하더라도 황실의 명을 어길 수는 없지! 깃털이 다 뽑힌 봉황은 닭보다도 못한 법이야!’그는 그런 생각을 하며 계속해서 음침한 얼굴로 봉 부인을 추궁했다.“이거 말로 해서는 안 되겠군! 그럼 날 너무 원망하진 마시게!”곧이어 그가 손짓하자 뒤를 따르던 궁중 시위대가 나섰다.봉 부인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봉가의 저택에서 법도를 무시한 채, 이런 무례한 일을 벌이다니!궁중 시위대가 봉 부인을 제압하려던 찰나, 창문 너머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우리 봉씨 가문은 대대로 황후를 배출한 가문으로 역사에 이름까지 올렸다. 그런데 그런 가문의 여식인 내가 순결을 의심받는 날이 오다니.”
자녕궁(慈寧宮), 태후의 처소.봉가의 일을 전해들은 태후는 흐뭇한 얼굴로 계 상궁을 바라보며 말했다.“작년 생일 연회에서 봉장미 그 아이를 보았을 때는 성격이 너무 유약하여 황후의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었지.”“그런데 오늘 일은 꽤나 영리하게 대처했군. 능연(황귀비 이름: 凌燕)의 측근에게 대놓고 면박을 주다니. 내가 그 아이를 너무 만만하게 생각했던 것 같구나.”태후의 최측근인 계 상궁은 어린시절부터 궁중에서 생활한 사람으로 후궁이 얼마나 험난한 곳인지 알고 있었다. 그녀는 조용히 태후의 찻잔에 따뜻한 차를 따르며 말했다.“폐하께서 황귀비를 편애하는 것은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니 황후께서 아무리 영리하신 분이라 할지라도 영소전과 대항하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어쩌면 오늘밤에 황귀비가 또 소란을 부릴 수도 있겠군요.”계 상궁은 어린 황후에게 딱히 거는 기대가 없었다.태후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자네 말도 맞아. 수완(琇琬,태후의 조카딸)이 입궁했을 때도 그랬지. 황상은 그 아이의 처소에 머무르기로 했는데 능연 그 요물이 아프다고 난리를 치면서 황상을 자기 처소로 불러갔었지.”“지금 생각해도 그 아이가 안타깝구나. 고모로서 아무 도움도 못 주고.”계 상궁은 조용히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폐하는 애증이 분명한 분이고 아직까지 후궁에서 황귀비를 대적할 비빈은 나온 적이 없지요. 황후께서도 아마 오늘 밤에 독수공방하게 될 것 같군요.”태후의 생각도 마찬가지였다.태후는 황제의 생모는 아니지만 어릴 때부터 황제를 길러준 사람이었기에 그의 성격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었다.영비를 향한 그의 집착과 죄책감은 전부 대체품인 능연에게로 갔다.선황의 유언장이 없었더라면 아마 황후의 자리도 진작에 황귀비 차지가 되었을 것이다.길시가 되자 봉구안은 금자수를 수놓은 혼례복에 황후의 상징인 왕관을 머리에 올리고 옥석으로 장식한 복도를 걷고 있었다.복도의 끝에는 마찬가지로 옥으로 된 계단이 기다리고 있었다.그녀가 십보 걸을 때마다 뒤를
황제가 오기로 되어 있으니 봉구안은 마지못해 다시 치장을 시작했다. 그런데 연상이 긴장한 탓인지 손을 덜덜 떨고 있었다.세 번째로 두피에서 통증이 느껴졌을 때, 봉구안은 더는 참지 못하고 싸늘하게 말했다.“내가 알아서 할 테니 넌 나가 있거라.”스승님 밑에서 변장술을 익힐 때 단장하는 법도 많이 익혔기에 그녀는 손쉽게 머리를 원래대로 복구했다.연상은 그녀를 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마마, 제가 한 것보다 더 예쁘네요.”그렇게 그들이 황제를 맞을 준비까지 다 마쳤을 때, 밖에서 전갈이 왔다.“마마, 황귀비마마께서 두통이 재발했다고 하여 폐하께서는 영소전으로 가셨사옵니다.”연상은 입만 뻐금거리며 말을 잇지 못했다.하필 황제가 궁으로 복귀하자마자 두통이 재발하다니!황귀비의 뻔한 수가 엿보였지만 아무도 뭐라 할 수 없었다.봉구안은 황귀비 얘기가 나오자 죽은 동생 봉장미가 떠올랐다.‘장미야, 무슨 수를 써서라도 언니가 복수해 줄게!’싸움에서 이기려면 적을 파악해야 하는 법.황귀비는 장기간 독보적인 총애를 받아왔으니 신변에 분명 무예가 강한 호위가 지키고 있을 것이다.경솔하게 움직일 수는 없었다.한편, 자녕궁.태후는 염주를 손에 쥐고 더듬으며 화를 삭히고 있었다.“혼인 첫날밤에 서왕을 신랑 대역으로 세웠다니! 대체 이게 다 무슨 일이더냐! 황상이 이런 황당무계한 일을 벌일 때까지 너희는 대체 뭘 하고 있었느냐!”궁녀는 고개를 푹 숙이고 대답했다.“소인은 정말 몰랐사옵니다.”황제가 유아독존에 제멋대로인 게 하루이틀이 아니고 태후의 말도 그에게는 통하지 않았다.하지만 이대로 가다 가는 천하 백성들에게 태후가 자식을 잘못 가르쳤다고 비난 받을 판이었다.태후는 화가 나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이 상황이 서럽고 무기력함에 빠졌다.“내 비록 황상의 생모는 아니지만 현명한 군왕으로 가르치려고 노심초사했건만…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을까…”그 모습을 본 시종들은 태후가 안타깝고 황제가 불효하다고 생각했다.그리고 불 난 집에 기름 붓는 소식
봉구안이 신혼방으로 돌아오자 아까까지 잔뜩 인상을 쓰며 싫은 티를 내던 최 상궁은 싱글벙글 웃으며 뜨거운 물을 준비하라고 시종들에게 일렀다.그러고는 감개무량해서 봉구안에게 말했다.“마마, 그동안 황귀비를 제외하고 폐하께서는 한 번도 다른 비빈들에게 밤시중을 명하지 않으셨습니다. 마마가 그 선례를 깨신 거예요!”연상은 갑자기 태도를 바꾼 최 상궁을 불만스럽게 바라보았다.궁에서 여자의 지위는 황제의 총애와 비례한다지만 존귀한 황후마저 거기에 포함될 줄이야.봉구안은 주저리주저리 떠드는 최 상궁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싸늘하게 말했다.“연상이만 남고 다들 나가 있거라.”내전이 조용해지자 연상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마마, 폐하께서 오시기로 한 것은 우리에게 좋은 일이긴 하나, 이렇게 되면 황귀비와 완전히 척을 지게 되는 거 아닌가요?”“부인께서는 저희에게 궁에서 적을 만들지 말고 조용히 지내라고 하셨사온데….”“어머니께서 장미에게도 그러라고 가르쳤더냐?”봉구안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연상을 바라보며 물었다.그녀는 이런 교육 방식을 찬성하지 않았다.사부와 사모께서는 그녀에게 은혜는 배로 갚고 원수도 배로 갚으라고 가르쳤고 어차피 한번 사는 인생, 유감을 남기지 말라고 하셨다.사실 봉 부인도 봉가에서 전해져 내려온 법도대로 자식들을 가르쳤다.봉가는 대대로 황후를 배출한 과문이었기에 유독 딸에게는 요구가 엄격했다.악기, 바둑, 그림, 서시 모든 방면에서 봉가의 딸은 남들보다 뛰어나야 한다는 명백한 요구가 있었다.그리고 사람들에게 덕을 베풀어 좋은 명성을 유지해야 했다.장미는 서신에서 자유롭게 어디든 갈 수 있는 언니가 부럽다고 하면서 황후가 되고 싶지 않다는 얘기를 매번 했었다.지금 생각해 보면 봉장미처럼 유순한 사람이 입궁하여 황후가 되었다면 주변의 시달림을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연상은 봉부의 하인들 중에서 봉구안의 진짜 신분을 아는 사람이었다.그녀는 주변을 경계하다가 다가가서 창문을 닫으며 말했다.“마마, 저희를 예의주시하는 사
소리를 들은 연상은 바로 내전으로 달려왔다.“마마, 무슨 일이시옵니까...”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침상에서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나가!”사내의 목소리에 연상은 크게 당황하며 사람을 부르려 하였다.이때, 안으로 달려온 태감이 급급히 그녀의 입을 틀어막으며 낮은 소리로 호통쳤다.“멍청한 것, 폐하가 안에 계신데 이 무슨 소란이더냐!”연상의 두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폐하? 사람을 죽이면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던 그 폭군?’침실 안.사내는 한손으로 봉구안의 어깨를 잡고 다른 한손으로는 비수를 잡은 그녀의 손목을 꽉 움켜쥔 채, 시선을 내리깔고 잡아먹을 것 같은 표정으로 봉구안을 내려다보았다.봉구안은 상대를 던져버리려다가 황제라는 것을 깨닫고 반항을 멈추었다.주변이 어두워서 그녀는 사내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하지만 그에게서 진동하는 살기는 진짜였다.“황후, 해명이 필요하지 않겠느냐?”낮게 깔린 그의 목소리에서는 진한 살기가 진동하고 있었다.평범한 여자였다면 지레 겁을 먹고 우물쭈물했겠지만 봉구안는 숨소리조차 흐트러지지 않고 태연히 답했다.“그 일이 있은 후로 살기 위해 비수를 항상 가까운 곳에 두었습니다. 일부러 폐하께 무례를 범하려던 것은 아니었습니다.”그녀는 봉장미가 아니었기에 동생의 나긋나긋하고 온화한 말투까지는 모방할 수 없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시종일관 딱딱했다.마치 자신의 부군이 아니라 아무 상관도 없는 타인에게 상황을 설명하는 것 같은 말투였다.설명을 들은 사내는 크게 코웃음치고는 그녀의 손에서 비수를 빼앗고 몸을 일으켰다.봉구안은 어슴푸레한 달빛을 빌어 용포를 풀어헤친 사내의 모습을 조용히 관찰했다.그는 장난감을 손에 쥔 것처럼 비수를 요리조리 돌리며 관찰했다.침실 안에 삭막한 정적이 흐르고 있었다.봉구안은 몸을 일으키고 사내와 일정거리를 유지한 뒤에 사내의 동향을 주시했다.이때, 사내는 갑자기 몸을 비틀더니 손에 들고 있던 비수를 그녀의 목에 가져다댔다.봉구안은 피하지도, 거부하지도
어차피 한번은 경험해야 할 일이었고 예상 범주를 크게 벗어나진 않았다.솔직히 폭군에게 첫날밤을 바치는 것보다 차라리 이 방법이 더 나았다.적어도 치욕스럽게 사내의 밑에 깔리지 않아도 되니까.봉구안은 하얀 치마자락을 찢어 손수건 대신 침대에 받쳤다.그리고 한손으로는 치마자락을 들고 한손에는 비수를 들었다.이미 하기로 한 일이지만 본능적으로 거부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그녀는 그냥 전장에서 부상당한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어차피 어릴 때부터 수많은 부상을 이겨내며 살아온 그녀였다.곧이어 그녀는 칼잡이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그 순간 갑자기 뻗어나온 손이 그녀의 팔목을 잡았다.봉구안은 미간을 확 찌푸리며 상대를 바라보았다.소욱은 그녀의 손에서 비수를 빼앗고 아까보다 더 싸늘하게 식은 목소리로 말했다.“정말 멍청하기 짝이 없군.”챙그랑!말을 마친 그는 비수를 침대 밖으로 던져버렸다.“어차피 네가 순결한 몸인지 아닌지 짐은 아무런 관심이 없다.”“이렇게까지 해가며 황후의 자리를 지키고 싶다면 더 이상 멍청한 짓은 하지 말거라. 예를 들면 짐이 영소전에 있는 걸 뻔히 알면서 짐을 만나겠다고 거기까지 찾아오지 말란 말이다.”봉구안은 이를 악물었다.폭군은 그녀가 관심을 끌려고 찾아간 거라 생각하고 그녀에게 본때를 보여주려고 일부러 하기 싫은 걸음을 한 것이었다.어차피 밤시중을 들라는 말을 강조한 것도 일부러 그녀를 농락하기 위함일 것이다.참으로 잔인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었다.‘이런 방식이 당신의 애정을 갈구하는 사람에게는 소용 있을지 몰라도 나한텐 안 통하지.’그녀는 처음부터 황제의 총애를 바라고 입궁한 게 아니니 오히려 그녀가 원하던 상황이었다.봉구안은 신속히 옷섶을 여미고 공손히 예를 갖추었다.“폐하, 신첩이 생각이 짧았습니다. 다시는 폐하의 총애를 바라지 않겠습니다.”“폐하께서 황귀비를 애정하시는 마음은 잘 알았습니다. 신첩 앞으로 귀비를 친자매처럼 여기고 폐하를 대하는 것처럼 정성을 다해 귀비를 대할 것이옵니다.”그
봉구안의 얼굴 그 어디에도 초췌하거나 상심한 기색이 없었다. 그녀는 황후만 입을 수 있는 화려한 예복을 입고 고고한 자태를 뽐내며 자녕궁 대문 앞에 나타났다.청초하지만 싸늘한 기운을 담고 있는 눈동자는 감히 범접할 수 있는 상위자의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피부는 황성 여자들이 추구하는 것처럼 창백하리만치 하얀 얼굴이 아니라 건강한 윤기가 나고 분홍빛을 띠는 홍조가 생기를 더했다.청초하지만 귀티가 넘치는 오관은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처럼 아름답고 고귀한 분위기를 뽐내고 있었다.영비와 닮은 비빈들만 봐온 궁인들은 경국지색의 미모를 보자 눈앞이 환해지는 느낌이 들었다.황성 제일 미녀라는 소문에 걸맞게 그녀에게서는 비범한 기운이 풍기고 있었다.반면 봉구안은 자신의 얼굴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강호를 떠돌기 시작한 순간부터 그녀는 변장을 하고 생활했다.미모는 그녀에게 짐만 될 뿐이었는데 특히나 군영에서 더욱 심했다.사모는 그녀가 아까운 얼굴을 괴롭힌다고 꾸중했지만 그녀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봉구안의 뒤를 따르는 연상은 저절로 어깨가 올라가고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대청으로 들어간 봉구안은 태후의 앞에서 허리를 굽혀 예를 올렸다.“신첩, 어마마마를 뵈옵니다.”태후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말했다.“황후, 예의 차릴 것 없으니 편히 앉거라.”곧이어 태후는 주동적으로 황제 얘기를 꺼내며 봉구안을 위로했다.“황상은 정무가 바쁘셔서 황후에게 조금 소홀히 하더라도 너무 서운해하지 말거라.”봉구안은 담담히 대답했다.“예, 어마마마.”그녀와 대화를 나눌수록 태후는 황후가 예상처럼 살갑지 않다는 것을 발견했다. 마치 안면근육이 굳은 것처럼 딱딱하고 태생이 웃을 줄 모르는 사람 같았다.분명 연회 때 봤을 때는 전혀 그렇지 않았는데 전혀 다른 사람처럼 굴었다.사실 상 봉구안은 웃음이 적은 사람이었다.어릴 때는 그녀의 웃음 한번 본다고 사모가 짖꿎은 장난도 많이 쳤지만 그녀는 유치하다고만 느꼈을 뿐이다.나중에 장군이 되면서 여자인 것을 들
“구원하려면 저 진천뢰를 먼저 해결해야 해. 특히 그 죽화총까지도…”이를 생각하며 이 장군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조묘안.마 대인이 갑자기 방 문을 발로 차고 들어왔다.“폐하, 폐하께서 저희를 전부 속이셨군요! 무슨 새 황제라니, 사실은 조정에 있는 반란군들을 끌어내려 하셨던 거죠?”방금 그는 소식을 들었다. 성 안에서 이미 다수의 대신들이 체포되었는데, 모두 태자를 옹립하려 했던 자들이었다.그리고 천옥의 내부 첩자들 역시 체포되었다.심지어는 그날 바로 참수된 자도 있었다.소욱은 냉혹한 눈빛으로 먼 곳만 응시하고 있었다.마 대인은 냉소하며 말을 이었다.“하지만 너무 저희를 얕보셨습니다.”“폐하께서 죽인 자들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곧 교주가 북연군을 이끌고 남제를 공격할 것입니다!”“오늘 밤, 폐하께 잊을 수 없는 하루를 선물해드릴 것입니다. 폐하의 형제들과 비빈들을 하나하나 죽여버릴 것입니다!”“저희를 속인 대가가 어떤지 곧 알게 되실 겁니다!”말을 마치며 그는 명령을 내렸다. 왕자들과 후궁들이 밖으로 끌려 나왔다.밤하늘 아래 칼날이 차가운 빛을 발하고 있었다.왕자들은 모두 필사적으로 외쳤다.“폐하! 저희를 구해 주십시오! 제발요!”조묘 밖.이 장군은 정병들과 함께 근처 풀숲에 숨어 있었다.그는 오늘 밤 습격을 준비하며 먼저 문을 지키는 반란군을 기습해 기절시키고, 그 후 몰래 잠입해 반란군을 일망타진하려 했다.위험이 따르지만, 이렇게 해야만 했다.안쪽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은 이 장군은 상황이 좋지 않음을 직감했다.반란군도 이미 정보를 입수해 서둘러 움직이려는 듯했다.이로 인해 문을 지키던 반란군들까지 경계 태세를 갖추게 되었다. 상황은 더욱 좋지 않은 쪽으로 흘러가기 시작하였다.이 장군이 고민하고 있을 때, 한 호위가 낮은 목소리로 알렸다.“장군, 저쪽에서 누군가 옵니다.”이 장군은 즉시 손짓하며 명령했다.“숨어라!”그들이 어둠 속에 몸을 숨기자, 달빛 아래 우아한 자태의 여인들이 허리를 살랑이며 천천히
“너희들, 누구냐!”모용란의 두 손은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고, 그녀의 눈에는 고통과 불굴의 의지가 서려 있었다. 그녀는 천으로 얼굴을 가린 그들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소리쳤다.그 무리의 우두머리는 칼에 묻은 피를 천천히 닦아내며 말했다.“우리 주인의 성은 소씨이시다.”소...모용란은 그 순간 무엇인가를 떠올렸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남자를 바라보았다.“너희들, 혹시 폐하의 은위병인 것이냐?”황제의 곁을 지키는 은밀한 경호대, 은위병.그래서, 황제가 이들을 보낸 것인가?아니, 그럴 리 없다.이들이 자신이 이곳으로 올 것을 어떻게 알았단 말인가?설마, 황제가 이미 모든 것을 계획해둔 건가!그렇게 생각하자, 모용란은 등골이 오싹해졌다.그녀는 마 대인에게 신호를 보내려고 했지만, 이미 손이 없어진 그녀에게는 그럴 방법이 없었다.사당.이 장군이 매일 식사를 준비해 사당에서 이리 떨어진 곳에 두면, 그 음식은 반란군이 가져갔다.황제가 갇힌 지도 벌써 보름이 지났다.선성의 방어선은 붕괴되었고, 주국공은 비밀리에 선성으로 귀환했다.북연과 남제 사이에는 전쟁의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신방 안반란군의 감시를 받는 곳에서, 식사는 비빈들에게도 배급되었다.혼란을 방지하기 위해 태후가 직접 음식을 분배했는데, 원래라면 여기서 가장 신분이 높은 태황태후에게 우선적으로 배급되어야 했다.하지만, 태후가 음식을 건네자마자, 녕비가 그걸 낚아챘다.“고모님, 먼저 드세요! 남은 건 저와 언니가 나눠서 드리겠습니다!”태황태후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고, 태후는 태황태후를 잠시 바라보다가 길을 막으려는 장공주에게 말했다.“어머니, 이러다 정말 쓰러지십니다…”장공주와 녕비는 좌우에서 태후를 부축하며 한쪽으로 데려갔다.녕비는 돌아보며 태황태후를 힐끗 쏘아보았다.‘죽어버린 늙은 할망구! 왜 굶어 죽질 않는 거야!’“아무것도 하지도 않으면서, 맨날 불평만 해대고, 그래도 먼저 먹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까?”“생사가 걸린 일 앞에는 본래 모두가
갑작스레 나타난 새 황제를 마주하자, 마 대인은 모든 것을 내던진 채 정면으로 나섰다.더는 숨기지 않고 직설적으로 말했다.“소욱 황제는 우리 손에 있습니다! 황제 폐하의 목숨을 구하고 싶다면 당장 교서를 작성하여 진정한 태자에게 황위를 물려주십시오!”그는 부하들에게 아이를 데려오게 했다. 그러고는 사람들 앞에서 외쳤다.“이 아이야말로 소욱 황제의 친아들입니다. 며칠 전, 이미 황제 폐하와 재회를 했습니다……”말이 끝나기도 전에, 서왕이 단호히 꾸짖었다.“건방지다! 황위 계승이 어찌 이런 어린아이 장난 같단 말이냐!”서왕의 호통에 이어 이 장군이 분노하며 꾸짖었다.“대담한 환관 놈! 아무 아이나 데려와 황실 자손이라니, 우리를 바보로 아느냐!”병사들 역시 웃음과 비아냥으로 덧붙였다.“환관 놈아, 저 아이는 네 양자가 아니냐!”마 대인의 얼굴이 울그락불그락하게 변했다.“너희들 모두 믿지 않는구나! 좋아, 그렇다면 소욱 황제를 저 세상으로 보내겠다! 서왕 전하, 이 장군, 두 분께서 모르는 사실이 있습니다.”“이 곳 조묘에는 제가 미리 진천뢰를 설치해두었습니다…”그 순간, 새 황제가 갑자기 무릎을 꿇으며 사당을 향해 큰 절을 올렸다.“선황 폐하! 신은 폐하께서 맡기신 뜻을 잊지 않았습니다! 폐하께서 말씀하시기를, 제가 황위에 오르는 날이 폐하께서 소장군과 황천길을 떠나는 날이라 하셨지요. 소자, 이제 폐하를 정중히 배웅해드리겠습니다!”그는 당황하여 펄쩍 뛰며 긴 손가락을 흔들며 외쳤다.“애송이! 너! 잡것! 그 입 닫지 못하겠느냐! 어떻게 감히 황… 아니, 황제 폐하를 저주한단 말이냐! 서왕, 이 장군, 이런 불효한 새황제를 너희들이 인정한단 말이냐? 설마 너희들이 소욱 황제의 죽음을 바라는 것이냐!”서왕은 애석한 표정을 지으며 한숨을 쉬었다.“이 모든 것이 선황 폐하의 뜻이오. 나는 따를 수밖에 없다네.”마 대인은 얼굴이 자주빛으로 물들며 울부짖었다.“아아…!”도대체 이 자들은 무슨 생각으로 이런 일을 꾸미고 있는 것인가!
진동하는 천둥 같은 소리의 폭발음이 들리자, 왕자들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갑자기 왜 폭발한 거야!”“폐하께서 동반 자결을 하려는 게 분명해! 우리를 함께 묻으려는 거라고!”“아니야! 누가 됐든 제발 나를 내보내라! 나는 아무 잘못이 없단 말이다!”궁중에 갇혀 있던 후궁들도 서로를 끌어안고, 불안하게 문 쪽을 응시했다.그때, 조묘 대문 밖에서는 마 대인이 숲을 향해 날카로운 목소리로 외쳤다.“나와라! 너희를 이미 다 봤다!”그러나 숲속에 숨어있던 병사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마 대인은 위협적으로 소리쳤다.“방금 들은 폭발음, 너희도 들었겠지? 다시 나오지 않으면, 이 안의 모두를 죽여버릴 것이다!”마 대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이 장군이 앞으로 나섰다.“이 망할 환관 놈!”달빛 아래에서 마 대인은 미소를 머금은 채 교만하게 말했다.“오, 이게 누구십니까? 이 장군 아니십니까!”“여기서 큰절을 올립니다!”“장군님, 폐하께서 몇몇 왕자들과 국사를 논하고 계신 중이라, 저는 태황태후의 명으로 여길 지키고 있습니다.”“장군님께서 이렇게 군사를 이끌고 오시다니… 설마 반란이라도 일으키실 생각이십니까?”이 교활한 자가 도둑이 매를 들고 도둑 잡으라 외치는 모습에, 이 장군의 얼굴은 분노로 새빨개졌다.“퉤! 천하의 뻔뻔한 놈 같으니! 네놈들 같은 반역자들, 당장 물러서지 않으면 내 칼에 죽게 될 것이다!”마 대인은 태연하게 목소리를 길게 늘렸다.“장군님, 제가 분명히 말했지요? 태황태후의 명이라구요. 그런데도 이렇게 몰아붙이시다니, 과연 누가 반역자인지 궁금하군요!”이 장군은 주먹을 꽉 쥐고, 눈에 살기가 가득 찼다.옆에서 참모가 작은 목소리로 그를 말렸다.“장군님, 흥분을 가라앉히십시오. 방금 터진 진천뢰는 우리에게 보내는 경고일 겁니다.”이 장군은 참모의 조언을 받아들여 잠시 물러섰다.현재 이곳의 상황은 이미 서왕에게 보고한 상태였다.황제를 구출하기 위한 방법은 철저히 논의해야 했기에 섣불리 움직일 수 없었다.
조묘는 반란군에게 완전히 포위되어 있었고, 그들의 진영에는 수많은 진천뢰가 심겨져 있었다. 그 누구도 그 위험 구역을 넘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한편, 묘 안에 갇힌 왕족들은 불평이 끊이지 않았다.“내가 뭐라 했더라? 관여하지 말자고 했지! 그런데 굳이 나를 끌고 왔단 말이야!”“그래, 맞다! 애초에 태황태우께서 태자를 책봉하겠다길래 우리가 뭘 하러 왔냐고! 결국 지금처럼 반란군에게 갇히다니, 이게 무슨 치욕인가!”그들은 평소 황족으로서 호화로운 생활에 익숙했다. 하지만 이제는 모두 한 방에 몰려 있으니 아주 우스운 꼴이었다. 방 한가운데 놓인 유일한 침대는 제일 고집이 센 숙왕이 차지하고 있었다. 나머지 사람들은 바닥에 눕는 수밖에 없었다.황제가 포로로 잡혔다는 소식은 곧장 소문으로 퍼졌고, 당일에 이미 서왕도 소식을 접했다. 서왕은 즉시 명을 내려, 궁중에 남아 있는 내통자를 소탕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로써 이 노력을 지휘할 이 장군이 대군을 이끌고 구원에 나섰다.이 장군은 병력을 거느리고 조묘에 가까워졌다. 그러나 그는 급히 구출 작전을 개시하지 않고 적정을 확인하기 위해 시간을 썼다.역시나 이상한 점이 있었다.엄밀히 따지면, 태황태후와 여러 왕들의 친위병 수가 반란군보다 훨씬 많았다. 평소 같았다면 이 정도의 난동은 금세 진압할 수 있어야 했다. 그런데 지금은 오히려 반란군에게 제압당한 꼴이었다.“정찰대를 보내라!” 이 장군은 단호하게 명령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정찰병이 돌아왔다.“장군! 조묘 안팎에 진천뢰가 설치되어 있습니다!”이 장군의 표정이 즉각 무겁게 변했다.진천뢰라니... 그렇다면, 친위병들이 섣불리 움직이지 못한 이유도 납득이 갔다.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결단을 내렸다.“좌우의 병력은 물러나라. 최소한의 병력만 남기고 나머지는 적을 자극하지 말라!”군대의 중심인 중군은 주력 병력이었으며, 병사 수가 상대적으로 적었다. 이 장군은 정예로 이루어진 부대로 신중하게 접근하려 했다.조묘 안에서는 이미 날이 어두워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마 대인이 날쌘 동작으로 발을 뻗어 그 진천뢰를 걷어차 버렸다. 덕분에 내시들이 진천뢰에 불을 붙이지 못했다.그는 입을 벌린 채 소리쳤다.“다들 조묘 안으로 들어가십시오!”“죽고싶다고해서 마음대로 죽을 수는 없는 법입니다!”“그렇게 쉽게 죽일 줄 아셨습니까?”그야말로 모두 미쳐버렸다!황제를 포함한 모두가 조묘 내에 있는 방에 갇혔다.태황태후와 후궁들은 한 방에 갇혔고, 태황태후의 얼굴은 어두운 빛으로 가득 찼다.그녀는 계속해서 중얼거렸다.“나는 정말 몰랐다. 영비가 반역자들과 손을 잡을 줄이야…”그녀는 끊임없이 후회와 자책으로 중얼댔지만, 이를 이해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그녀의 말은 녕비의 화를 돋구었다.녕비는 도저히 참지 못하고 태황태후를 향해 거칠게 소리쳤다.“태황태후마마! 그만 좀 하십시오!”“뭘 그렇게 무고한 척하십니까! 마마께서 나쁜 놈들을 도와주지만 않았어도 우리가 이렇게까지 되었겠어요? 병드신 지도 오래됐는데 왜 아직도 죽지 않고 살아계신 것입니까!”태황태후는 믿을 수 없다는 듯, 평소 자신에게 공손하던 후궁이 이렇게까지 소리를 지르다니.“너, 감히… 무례하다!”태후는 녕비를 품에 안으며 그녀를 감싸안았다.“태황태후마마, 녕비도 너무 놀라셨기에 실언을 한 것뿐입니다.”“흐흑…” 방 구석에서 한 후궁이 엉엉 울면서 말했다.“나, 나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진작에 출궁할걸… 궁궐의 경비가 철저하다더니, 어떻게 반역자들이 우릴 이렇게 끌고 갈 수 있는 건가요!”현비가 그녀를 부드럽게 달래며 말했다.“겁먹지 마세요. 이 일도 지나갈 겁니다. 폐하께서 방법을 찾아주실 거예요.”장공주는 눈에 분노가 가득 찼다.“죽어 마땅한 모용란! 천룡회와 손을 잡고 멩 소장군을 죽이다니! 반드시 내 손으로 죽일 것이야!”태후가 막으려 했지만, 장공주는 벌떡 일어나 태황태후에게 다가가 그녀의 옷깃을 움켜쥐고 분노하며 외쳤다.“당신은 알고 있었던 거죠! 그렇죠? 맹
왕가의 조묘는 장엄하고 위엄 있는 장소였지만, 현재는 반역자들에게 점령당한 상태였다.“놓으시오... 제발! 날 만지지 마시오!”한 후궁이 땅바닥에 눕혀진 채 발버둥치며 울부짖고 있었다.그녀가 필사적으로 저항할수록 반역자들의 태도는 더욱 오만해졌다.갇혀 있던 우리 안에서 장공주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그 여인을 건드리지 마라! 어서 나를 풀어주거라! 나는 장공주다!”장공주는 생각했다. 만약 맹 소장군이 여기에 있다면, 그도 반드시 자신을 희생해서 이들을 구했을 것이다.궁녀로서 살아가는 이들은 황제에게서 외면받으며 이미 충분히 불쌍한 삶을 살았다. 그런데 이제 이런 수모까지 당해야 하다니, 참으로 가증스러웠다.태후는 딸의 외침을 듣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녀는 급히 장공주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으며, 딸을 꼭 끌어안았다.한편으로는 옆에 있는 녕비도 품에 안으며, 마치 암탉이 병아리를 품듯 필사적으로 지키고 있었다.마 대인은 음침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장공주를 끌어내라!”장공주는 황제의 친누이였다.태후의 마음속에서 경고음이 울렸다.안 돼!누구도 그녀의 딸을 건드릴 수 없다!태후는 죽을 각오를 다지려던 찰나, 갑자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네가 그들을 전부 죽인다 해도, 난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소욱의 반응은 극도로 냉정했다.그의 시선은 멀리, 먼 곳을 향해 있었다.“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이미 너희들에게 죽임을 당했다.”“내가 황위를 포기하기를 바란다면, 소환을 돌려줘야 할 것이다.”녕비는 놀란 눈으로 황제를 바라보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들었느냐! 폐하께서 얼마나 무정한지!”“우리가 왜 폐하를 위해 고통받아야 하느냐! 너희들은 참으로 어리석구나!”그녀의 외침이 있은 후, 조금 전까지 땅바닥에 억눌려 옷이 거의 벗겨질 뻔했던 후궁이 기운을 쥐어짜며 악을 질렀다.“맞아! 왜 우리를 괴롭히는 것이냐!”“그들은 궁에 들어온 지 여러 해가 지났건만, 단 한 번도 황제의 총애를 받은 적이 없었다!”“폐하께서
이 말이 떨어지자, 원래도 갈피를 잡지 못하던 사람들은 이젠 완전히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하지만 소욱만은 침착하고 태연했다.황제로서, 태산이 무너져도 얼굴을 바꾸지 않을 정도의 평정심을 가져야 했다.그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소아에게 독을 쓴 이유가 다 있었군…”“첫째는 소환을 제거하기 위해서, 둘째는 주국공을 선성에서 떠나게 만들어 선성을 무주 상태로 만들려 한 것이군. 천룡회, 너희는 정말로 일석이조로 움직였구나.”마 대인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역시 폐하께서는 남들과는 다르게 생각이 빠릅니다.”“하지만 아쉽게도… 이제야 눈치 채신 게, 너무 늦었군요!”그는 냉정한 표정으로 바뀌며 말했다.“북연 대군이 남제를 공격할지 말지는 전적으로 폐하께 달려 있습니다.”“지금 즉시 태자를 책봉하고, 퇴위하십시오. 그러면 제가 신호를 보낼 것입니다. 북연군은 신호를 보면 즉시 철수할 것입니다.”“하지만 만약 그러지 않으신다면… 남제가 위험에 빠지는 일이 벌어질 것입니다!”“지금 선성이 무주 상태가 되면서, 남제는 이미 둘로 나뉘었습니다. 북부와 서부의 대군이 지원을 올 수 없으니, 북연군은 중부로 곧바로 진입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황성을 직격할 수도 있죠! 폐하,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태황태후는 분노하여 외쳤다.“무엄하다! 북연이 너에게 얼마나 큰 이익을 주었기에, 너는 감히 네 나라를 이렇게 배신하느냐!”태자 책봉과 퇴위는 분명히 다르다.그들이 이런 계획까지 품고 있을 줄이야!그녀는 분노로 가득 찬 눈으로 모용란을 노려보았다.“란아! 너도 이들과 한패란 말이냐!”모용란은 고통스러운 가슴을 움켜쥐고 답했다.“고모님, 원망하지 마세요… 제가 이렇게 하는 것도 모두… 아이를 위해서입니다.”마 대인은 무릎을 굽혀 아이의 얼굴을 만지며 웃음을 터뜨렸다.“태자 전하, 미래의 남제의 군주께 인사드립니다.”아이는 무슨 일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천진난만한 얼굴로 마 대인을 바라보았다.마 대인은 다시 일어나 소욱을 바라보며
조묘 밖은 모두 태황태후의 친병들로 가득 차 있었다.이 병사들은 선제께서 그녀에게 남겨준 군사였다.태황태후는 차마 이렇게 쓰게 될 줄 몰랐지만, 오늘만큼은 황제를 압박하지 않을 수 없었다.황제가 무정하고 무리한 짓을 먼저 시작했으니, 그녀는 깊이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태황태후의 늙고 주름진 얼굴에는 결연한 기색이 드리워졌다.“황상, 오늘 네가 태자를 세우지 않으면, 할미는 절대로 네가 떠나는 걸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그녀는 이어 왕자들에게 말했다.“너희들도 모두 나와 뜻을 같이해야 한다! 내가 이렇게 하는 건 남제를 지키기 위함이다!”모든 신하와 왕자들도 황제가 지나치다고 생각했기에, 이번만큼은 태황태후의 편을 들었다.“저희도 동의합니다. 태황태후께서 옳으십니다! 황제 폐하, 태자를 세우십시오!”이때 무용하게 보였던 모용란이 아이의 손을 잡고 용감히 앞으로 나왔다.그녀는 두려움 없이 황제 앞으로 걸어가며 말했다.“폐하, 태황태후께서 이렇게 하시는 건 모두 폐하를 위한 일입니다.”“폐하께서 불귀산에 가시겠다는 고집을 부리시면, 그 어른께서 어찌 마음 편히 계실 수 있겠습니까?”“우리 아이를 태자로 세우기만 하신다면, 폐하께서 더 이상 근심하실 일도 없을 것입니다.”“폐하…”그녀는 황제 가까이 다가선 뒤,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폐하, 폐하의 생모께서 왜 돌아가셨는지 기억하시지요?”“만약 태자를 세우지 않으신다면…”“제가 그 진실을 온 천하에 폭로해도 괜찮으시겠습니까?”소욱은 그녀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그대로 그녀에게 손바닥을 내리쳤다.이 한 방은 사정없이 내리쳐져 모용란이 몇 걸음 뒤로 밀려났고, 속이 찢어질 듯 고통스러워 보였다.“어머니!” 아이는 그녀를 향해 달려가며 두려움에 떨었다.아이의 눈에는 두려움과 분노가 서려 있었고, 소욱을 향해 증오 어린 눈길로 노려보았다.이때 마 대인이 나서서 모용란을 지켰다. 그는 음흉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황제 폐하, 소인은 폐하께서 빨리 결단을 내리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