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욱은 확신하고 있었다.자신이 저지른 일이라면 절대로 잊지 않는다.그는 결코 영비를 건드린 적이 없었다!아무리 술에 취했다 하더라도, 그런 터무니없는 짓을 할 리 없었다.하지만, 영비에게는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어 보였다.그들은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랐고, 같은 스승 밑에서 배웠다.그가 황위에 오를 때 그녀는 전력을 다해 그를 도왔다.그런 그녀가 어찌 이런 어마어마한 거짓을 꾸며낼 수 있겠는가?영비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눈 속엔 깨진 슬픔이 가득했다.“폐하께서 기억 못 하셔도 괜찮사옵니다.”“그날 밤의 일은 본디 하나의 실수였사옵니다.”“소첩은 그것을 잊을 것이옵고, 폐하께서도 잊으시어 그것이 황후마마와 폐하 사이의 가시가 되지 않도록 하소서.”소욱은 갑작스레 자리에서 일어나며, 좁아진 시선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모용란, 그간의 십 수 년의 정을 봐서라도, 거짓으로 나를 속이지 마라. 그 아이가 정말로 나의 아이란 말이냐?”영비는 입술 안쪽을 꽉 깨물며,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소욱은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는 기분이었다.주먹을 꽉 쥐었다.어찌하여 이런 일이 일어난단 말인가!한참 침묵 끝에, 그는 단 한 마디를 내뱉었다.“이 일은, 절대 황후에게 알려져서는 안 된다.”영비는 고개를 끄덕이며 따랐다.“소첩은 비록 황후마마와 오래 지낸 사이는 아니지만, 마마께서 폐하와 소첩 사이에 무언가 있는 것을 절대 용납하지 못할 것임을 알고 있사옵니다”“사실 그날 밤의 실수를 제외하고는, 저희 사이는 깨끗하고 명백하옵니다.”소욱은 턱을 단단히 다물고, 얼굴에는 엄한 표정이 가득했다.그날 밤의 일이라면, 그는 단 한 마디도 듣고 싶지 않았다.그는 영비를 물리고 난 뒤, 말없이 앉아 있었다.책상 위의 상소문 속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술이 사람을 망치는구나!’“여봐라 거기 있느냐.”“신 진한길, 여기 있사옵니다!”비록 많은 시간이 지났지만, 조사해 보면 반드시 무언가 드러날 것이다.
장락궁 안.영비는 진왕과 그의 동조자들 간의 내밀한 서신과 증거를 소상히 황제 앞에 올렸다.“이 모든 증거는 아버지께서 찾아내신 것이옵니다. 아버지는 오래전부터 진왕의 속셈을 의심하시어, 겉으로는 그와 친분을 쌓는 척하며 이 명단을 입수하셨사옵니다.”영비가 제출한 증거들은 소욱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그는 서류를 검토한 뒤, 정색하며 말했다.“그대의 부친에게 큰 공이 있다.”영비의 눈에는 결연한 충성과 확신이 담겨 있었다.“충신은 제 부친의 본분이옵니다. 폐하께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다행이옵니다.”“폐하께서는 요 며칠 진왕 일로 매일 늦은 밤까지 고생하셨는데, 이제 조금이나마 쉴 수 있으실 것이옵니다.”사실 소욱이 오늘 장락궁에 온 이유는 영비가 손에 넣은 이 증거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그는 예전부터 전조를 관리하고, 영비는 온 가문을 동원하여 그를 도왔다.영비는 평범한 여인들과 달랐다. 겉보기엔 연약해 보였지만, 실은 단호하고 남다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곤 했다.그는 그녀를 첩이 아닌 참모로 여겼고, ‘후궁은 정사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원칙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예외로 여겼다.그러나 지금, 그의 마음은 달라져 있었다.이제는 황후 한 사람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느꼈다.떠나기 전, 소욱은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이런 증거는 앞으로 그대 부친이 직접 올리도록 하라. 전조와 후궁이 서로 얽히지 않는 것이 낫다.”영비는 살짝 놀란 기색을 보였으나, 곧 평온을 되찾고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알겠사옵니다. 폐하 뜻대로 하겠사옵니다.”그녀는 황제 앞에서 불만을 드러내지 않았다.그때, 밖에서 진한길이 문을 두드렸다.“폐하, 소신이 아뢸 일이 있습니다!”…“감옥에서 실종되었다고? 아니면 탈옥한 것이냐?”소욱의 이마는 잔뜩 찌푸려졌고, 그의 눈빛은 어둡고 날카로웠다.진한길은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아마도… 탈옥한 것 같사옵니다.”어쨌든 사람이 갑자기 사라질 수는 없으니 말이다.소욱의 눈은 더욱 차가워졌다.“이 일은 당분간 황후에
소욱의 호흡이 잠시 멈췄다. 그는 곧장 봉구안에게 다가가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궁에서 나가 그 검은 옷을 쫓겠다는 거지? 좋아, 허락하마.”그의 목소리에는 미세한 떨림이 섞여 있었다. “어떻게 조사하고 싶든 네 마음대로 해라.”봉구안은 흔들림 없이 그를 똑바로 응시하며 단호히 말했다.“검은 옷을 쫓기 위해서만은 아닙니다. 폐하, 이번에 떠나면 저는 돌아오지 않을 겁니다.”소욱의 가늘고 긴 눈이 살짝 감기더니, 약간의 분노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는 억지로 차분한 척하며 말했다.“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냐? 계약서에 분명 1년이라고 적지 않았느냐...”“폐하가 기억을 잘못하셨사옵니다. 6개월입니다.”봉구안은 손에 든 계약서를 그에게 건넸다.소욱은 즉시 계약서를 펼쳐 보았고, 냉정한 얼굴에는 놀람과 충격, 그리고 후회가 서렸다.계약서에는 정말 6개월이라고 적혀 있었다!하지만 그는 분명히 기억했다. 처음 약속했던 것은 1년이었다.그렇다면 가능한 설명은 하나뿐이었다.그녀가 ‘1년’을 ‘6개월’로 고쳐 쓴 것이다…소욱은 눈을 떨구고 감정을 억누르며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그의 검은 눈동자는 마치 차가운 물에 담긴 옥처럼 묵직하고 서늘했다.그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눈빛은 어두워졌고 미세한 냉기가 서려 있었다. 하지만 얼굴에는 억지 웃음이 떠올랐다.“황후, 이런 농담은 하지 마라.”“1년이면 1년이다. 네가 멋대로 고친 것은 인정할 수 없다.”봉구안의 눈은 여전히 차가웠고, 그녀의 태도에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저는 계약서를 믿사옵니다.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일 것이옵니다.”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종이가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소욱이 계약서를 바로 찢어버린 것이다.봉구안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소욱은 그녀의 어깨를 꽉 붙잡고 제왕의 위엄을 드러내며 불가항력적인 어조로 말했다.“내가 말했듯이 1년이다. 단 하루도, 단 한 시간도 줄일 수 없다!”봉구안은 바닥의 찢어진 종이를 냉담하게 바라보며 말했다.“잊으셨
연상이 내전을 들어섰을 때, 넘어져 있는 병풍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마마, 정말로 떠나실 건가요?”봉구안은 차분한 어조로 답했다.“그래. 진 씨 가문의 사건은 내 마음에 새길 것이다.”그 검은 옷은 진 대인마저 해쳤다.연상은 얼굴에 걱정을 띠며 물었다.“마마, 저는 폐하께서…”“폐하께서도 결국 납득할 것이다.” 봉구안의 눈빛은 깊은 어둠에 잠긴 듯했다.만약 필요하지 않았다면, 그녀 역시 이런 일이 세상에 알려지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그날 밤, 소욱은 밤새 잠들지 못했다.그의 마음속은 불타오르는 듯했다.그는 1년의 시간을 가졌다고 생각했으나, 그녀는 몰래 그것을 반년으로 바꿔놓았다!온 마음으로 그녀의 마음속에 천천히 다가가려 했건만, 그녀는 이미 떠날 계획을 세워놓은 것이다!세상에 어찌 그녀만큼 무정한 여인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다음 날.소욱은 조정 일을 마친 후, 영화궁으로 향했다.호위들은 철통같은 경계를 하고 있었다. 마치 이곳이 황후의 처소가 아닌 감옥과도 같았다.내전 안.그는 장자문 앞에 서서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얼굴에는 억제된 감정이 서려 있었다.봉구안을 보자, 그녀는 소박한 옷을 입고 있었으며, 머리에는 어떤 비녀나 장식도 없이 나무 비녀 하나로 머리를 틀어 올리고 있었다.그녀는 공손히 절을 올렸다. 신하의 예법이었다.소욱은 그녀에게 다가가며, 어젯밤보다 훨씬 부드러운 어조로 물었다.“아침상은 들었느냐?”봉구안은 여전히 평온한 얼굴로 대답했다.“예.”“짐은 이미 사람을 보내 그 검은 옷을 추적하게 했다. 머지않아 소식이 올 것이다.”말을 하며 그녀의 손을 잡으려 했으나, 그녀는 살짝 물러나 피했다.소욱의 목이 탁 막히는 듯했다. 그는 억지로 감정을 억눌렀다.“궁에서 이 오랜 시간동안 그대는 짐에게 아무런…”그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그녀는 단호히 대답했다.“없었사옵니다.”감정이란 망설임을 허용하지 않는 법.비록 그녀의 마음속에 망설임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녀는 철석같은 마음을 가진
구슬발이 쿵하고 열리며, 봉구안은 이윽고 침상 안으로 들여지려는 순간, 장막을 단단히 움켜잡았다. 그러나 힘이 부족해 끝내 장막은 그녀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갔다.소욱의 걸음이 계속되자, 장막이 완전히 닫혔다.그녀는 닫힌 장막을 보며 눈에 서린 기세가 한층 강렬해졌다.소욱은 그녀를 안은 채 침상 곁에 앉아 있었다.그는 세심하게 그녀의 머리를 묶은 나무 비녀와 비단 끈을 풀어냈다.검은 머리카락이 우수수 흩어지자, 그는 손가락으로 머리칼 사이를 부드럽게 지나며 그녀의 뒷머리를 받쳤다.그의 눈빛에는 복잡한 감정이 깃들어 있었다.“오늘은 원래 너와 잘 이야기하려 했다.”“비록 네가 약속을 지켜 1년을 채우고 떠난다 하더라도, 지금처럼 화가 나지는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너는 내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고, 너무나도 독단적이구나.”“그래서 나는 내 방식으로 너를 억지로라도 약속을 지키게 할 수밖에 없었다.”봉구안은 자신의 입술을 힘껏 깨물며 정신을 붙들어 매려 했다.소욱은 그녀가 무엇을 하려는지 눈치채고는 다시 한번 경고했다.“이미 말하지 않았느냐. 계속 내공을 억지로 쓰려 한다면, 네가 더욱 쇠약해질 뿐이다.”그는 말하는 도중 손가락으로 그녀의 옷깃을 풀었다.옷깃이 풀어지며, 그녀의 피부 위로 차가운 기운이 스며들었다.봉구안은 눈을 꼭 감으며 두 눈썹을 단단히 찌푸렸다.그녀의 귓가에는 차갑고 낮은 그의 목소리가 스며들었다.“네가 한 번은 내게 실용적인 것을 배우라고 했지 않았느냐.”“배우긴 배웠다만, 과연 내가 잘 배웠는지는 모르겠구나.”그가 손에 힘을 더하자, 그녀의 미간은 더욱 깊게 주름이 졌다.소욱은 갑작스레 몸을 뒤집어 그녀를 침상 위로 내리누르며 그녀를 응시했다.그의 붉어진 눈동자 속에는 무시당한 억울함과 강렬한 소유욕이 담겨 있었다.그의 얇은 입술이 그녀의 목덜미에 닿으며 귓가에 속삭이듯 말했다.“넌 결국 나를 떠나지 못할 것이다…”그러나 봉구안의 마음은 단호했다.그녀는 믿고 있었다. 이 장벽을 돌파하지 못할 리
봉구안이 깨어났을 때는 이미 정오를 훌쩍 넘긴 시각이었다.연상이 그녀 곁을 지키고 있었고, 눈에는 걱정이 가득했다.“마마, 몸은 어떠세요?”봉구안은 상체를 일으켜 앉으며 호흡을 고르고 내력을 운행해 보았다.내력은 회복되었으나, 몸은 여전히 심히 쇠약했다.그녀의 입술은 창백했고, 눈빛은 어딘지 모르게 아련했다.연상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마마, 부인께서 궁에 오셨습니다.”봉 부인은 봉구안을 설득하기 위해 직접 찾아왔다.얼굴에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으며, 한순간에 나이가 부쩍 들어 보였다.“너의 신분을 폐하께서 이미 다 아셨다.”“그분께서 너의 아버지를 궁으로 부르셨고, 네 사정을 모두 말씀하셨어.”“얘야, 어찌 이리 어리석게 굴었느냐?”“이미 폐하께 시집갔거늘, 어찌 다시 떠날 생각을 한단 말이더냐?”“폐하께서 너와 봉가와 맹가의 기군지죄를 묻지 않고도 1 년 약조를 받아들여 주셨거늘, 네 생각엔 이 일이 세상에 알려지면 누가 폐하를 탓하겠느냐?”봉구안은 뜻밖이었다.소욱이 모든 사실을 아버지에게 전했으리라곤 예상치 못했기 때문이다.그러나 그녀의 눈빛은 여전히 차가웠으며, 표정에는 감정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봉 부인의 말이 그녀의 마음에 닿지 않았음이 분명했다.봉 부인은 그녀를 도저히 어찌할 수 없었다.만약 이 자리에 봉장미가 있었다면, 분명 어미의 말을 들었을 것이다.봉 부인은 그녀의 목에 새겨진 흔적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폐하께서 너를 아끼는 마음은 세상에서 많은 이들이 바라고도 가지지 못하는 것이란다.”“넌 대체 무엇을 그리 고집하는 것이냐?”“여인이란 결국 시집을 가서 아이를 낳고 가정을 이루는 게 본분이란다.”“네가 그토록 오래 전장을 누볐다지만, 설마 평생 전장에서 살기를 바라는 것이냐?”“나와 네 아버지는 그저 네가 평안하고 무탈하기만을 바란다.”“제발 폐하께 그만 역정을 내거라. 폐하의 옆에 계속 있어주면 안 되겠느냐?”봉구안의 눈빛은 여전히 고요했다.“그분께서 어머니를 보내 이 말씀을 하라
소욱의 눈빛이 무겁게 가라앉았다.그는 바닥에 흩어진 깨진 도자기 조각을 한 번 보고 나서 곧바로 몸을 일으켰다.그의 커다란 그림자가 봉구안 위로 드리워졌다.“짐은 황제다.”“황제의 권위 아래 자유란 존재하지 않아.”“네가 분노하든, 불복하든, 이것은 네가 거스를 수 없는 일이다.”“내가 만약 너였다면, 이런 어리석은 방식으로 황제의 인내심을 시험하지는 않았을 것이다.”그의 목소리는 담담했으나, 그 안에는 반박할 수 없는 위엄이 서려 있었다.남방에서의 온화한 양보는 단지 황제의 신분을 잠시 내려놓은 결과로 그녀가 품게 된 착각일 뿐이었다.그의 본성은 여전히 강압적이고 폭군다운 군주였다.봉구안은 스스로를 비웃으며 말했다.“제가 선택할 권리를 주실 거라고 착각했나 봅니다.”그가 분노했던 것은 그녀가 스스로 계약 기간을 바꿨기 때문이 아니라, 처음부터 그녀의 떠남을 허락하지 않을 생각이었기 때문이었다.소욱은 그녀의 턱을 들어 올리고 위에서 내려다보며 말했다.“한 가지는 안심하거라.”“이 일은 너와 나 사이의 일이니…”“짐은 봉가에게든, 그 외 누구의 목숨이든 너를 협박하는 데 쓰지 않을 것이다.”“왜냐하면, 짐은 네가 다른 이들을 위해 짐에게 가식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지.”봉구안은 주먹을 굳게 쥐었다.…연상은 황제가 내전을 나서는 모습을 보고 급히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요 며칠 황제는 금방이라도 사람을 죽일 것 같은 살기를 풍겼다. 두려움 그 자체였다.그와 동시에, 전조 또한 평온하지 않았다.황제의 ‘옛 병’이 다시 도진 것이다.진왕의 양식 탈취 사건이 황제의 친심으로 다뤄졌다.이 사건에 연루된 관리들은 모두 오마분시의 극형을 받았다.심지어 진왕조차 사형을 선고받았다.태황태후는 이를 알고 진왕을 위해 황제에게 탄원했다.하지만 소욱은 냉담하게 대답했다.“모반을 꾀한 자에게 짐은 살아갈 길을 주지 않을 것이다.”“그리하면 마치 호랑이를 풀어 산으로 돌려보내는 것과 다름없지 않은가!”천옥 안.
태황태후는 눈앞의 사람을 보며 깜짝 놀라 물었다.“황후, 네가 방금 뭐라 했느냐!?”봉구안은 단호한 어조로 대답했다.“신첩, 스스로 폐위하길 청하옵니다.”전각 안에 있던 궁인들은 충격을 금치 못했다.황후마마께서 무슨 망령된 짓을 하시는 것인지?“건방진 소리 마라! 이런 말은 지금껏 들어본 적이 없구나! 황상은, 황상은 이 사실을 알고 있느냐…”봉구안은 숨김 없이 말했다.“황제 폐하께서는 허락하지 않으셨기에, 신첩이 마마의 의지를 구하러 온 것이옵니다.”태황태후는 사실 이 손자며느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하지만 이 일은 결코 간단하지 않았다.“진심으로 궁을 떠나고 싶다는 말이냐?” 태황태후가 물었다.봉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렇사옵니다.”“좋다. 내가…”태황태후의 말이 채 끝나기 전, 문 밖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이 일로 할마마마께서 수고하실 필요 없습니다.”태황태후가 고개를 들어보니, 황제가 어둡게 가라앉은 얼굴로 전각 안으로 걸어들어왔다.그 눈빛은 심지어 그녀를 향해서도 약간의 적의를 내비치고 있었다.“황상, 네가…”소욱은 봉구안의 허리를 감싸며 차갑고 매서운 눈빛으로 말했다.“황후가 짐과 다투다가 그런 헛소리를 한 것뿐입니다. 할마마마께 걱정을 끼쳐드렸습니다.”태황태후는 속으로 모든 것을 간파했으나,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고 소욱이 봉구안을 데려가도록 내버려 두었다.만수궁을 나선 후.소욱은 봉구안을 나무라지 않았다.다만 그녀의 손을 꽉 쥔 채 아무 말 없이 묵묵히 걸었다.영화궁에 이르러 소욱은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할마마마께서는 이미 폐후할 마음을 품으셨었지. 오늘, 그 바램을 이룰 뻔 했구나?”봉구안의 얼굴에는 미동조차 없었다.소욱은 그녀의 턱을 들어 올리며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게 했다.“그러니 다시는 이런 의미 없는 일을 하지 마라.”봉구안은 입가에 차가운 웃음을 띠었다.“제 마음은 변함이 없사옵니다.”소욱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그는 그녀가 웃는 것을 좋아했으나, 이 순간
은육은 지난번 천지설산에서의 실수를 만회하려고 황후가 시킨 일은 평소보다 더 열심히 했다.승상 쪽 이상한 움직임을 조사하기 위해 그는 매일 한 시진만 잠을 잤다.그러다가 드디어 이상한 점을 발견한 것이다.“마마, 어젯밤에 서여국 황제의 쌍둥이 동생이 몰래 승상부 뒷문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승상과 둘이 오래 이야기를 나눈 것 같아요. 저는 너무 가까이 갈 수 없어서 자세히 듣지는 못했는데 그들이 서여국 황제를 제거하려는 것 같습니다.”방 안의 비응군은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서여국에 큰 대란이 일어날 것 같았다.비응군 수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봉구안에게 예를 행했다.“소인이 보기에 서여국 내부에 대란이 일어날 것 같습니다. 서여국 황제는 스스로를 보전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니 저희의 제안에 답을 줄 수 없겠지요. 당장 남제로 돌아가셔야 합니다. 소식을 기다리는 건 저희들이 하겠습니다!”그들은 죽음을 각오할 수 있지만 소장군이 서여국에서 변을 당하게 할 수는 없었다.봉구안은 싸늘한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며 말했다.“대란이 우리에겐 기회일지도 몰라.”다음 날.봉구안은 다른 모습으로 위장하여 공시를 떼고 입궁했다.같은 궁인이 천택궁으로 그녀를 안내했다.내전에서 숙연이 황제의 시중을 들고 있었다. 그녀는 눈시울을 붉히며 흐느꼈다.“언니, 분명 방법이 있을 거예요. 제가 만 천하에 의원을 찾는다고 공시를 냈으니…”봉구안은 담담한 얼굴로 서서 대화가 끝나기를 기다렸다.잠시 후, 그녀에게 고개를 돌린 황제가 입을 열었다.“또 공시를 뗀 의원이 왔네?”숙연은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고 봉구안에게 시선을 돌렸다. 겉보기에 부드럽고 애수에 찬 눈동자에서 수상한 한기가 넘쳐흘렀다.서여국 황제는 사람을 물리고 봉구안만 내전에 남겼다.사람들이 밖으로 나간 후, 봉구안은 공손히 황제에게 예를 행했다.“폐하, 저입니다.”서여국 황제는 전혀 놀라지 않았다.그동안 그녀를 제외하고 공시를 뗀 자가 없었다.“짐의 소식을 기다리라 하지 않았느냐? 전
서여국 황궁을 떠난 후, 봉구안은 바로 객잔으로 돌아가지 않았다.서여국 승상은 비겁한 수단도 마다하지 않는 자이기에 더욱 조심해야 했다.그리하여 그녀는 기루에서 남풍관, 그리고 다시 기루에 들렀다. 기회를 엿봐서 의용술로 모습을 바꾼 뒤에 떠나기 위함이고 여기서 뭔가 알아낼 수도 있었다.이런 유흥업소는 정보가 가장 빠른 곳이기도 했다.기루.봉구안은 기생을 한 명 불렀다. 기생이 손님을 받는 것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 것을 알기에 봉구안은 보름 간 그녀를 독점하기로 하고 돈을 지불한 후에 방에서 가야금만 연주하라고 했다.이러면 그녀의 행적을 감추는데 유리할 것이다.단지 돈이 많이 들어간 것이 조금 씁쓸했다.이 기생의 일당은 은화 3냥이었는데 그녀가 묵는 객잔보다 더 비쌌다.다행히 기생이 말을 잘 듣고 아는 게 좀 있어서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공자, 그건 모르시나 봐요. 저희의 폐하께선 젊으셨을 때 중상을 입어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몸이에요. 폐하께는 쌍둥이 여동생뿐이니 아마 황위는 숙연 대인에게 물려주실 것 같아요.”봉구안은 생각에 잠겼다.“폐하의 병이 심각하냐?”“예. 이미 조회에 안 나오신지 좀 되었다고 해요. 승상께서 국무를 처리하고 계시죠.”봉구안은 술잔을 입가로 가져가며 무심한듯 말했다.“승상께서 권력을 독점하신다? 그럼 그 숙연 대인은 그걸 눈 뜨고 보고만 있었단 말이냐?”기생은 아무런 의심 없이 말했다.“소인이 여기 간판 언니에게서 들은 바로는 숙연 대인이 승상을 추천한 거랍니다. 자신은 한마음 한뜻으로 폐하를 보살피고 잠시 나랏일은 신경 쓰고 싶지 않다면서요.”봉구안의 눈빛이 묘하게 변했다.불필요한 의심을 피하기 위해 그녀는 더 이상 질문을 이어가지 않았다.“술이 괜찮네. 한 단지 더 내오거라.”“공자께서 마음에 드신다니 제가 같이 한잔 마셔드리겠습니다.”봉구안은 생각에 잠겼다.한쪽은 막강한 권력을 잡은 승상, 한쪽은 미래의 황제가 될 유력후보. 원래라면 서로 경쟁 관계이고 사이가 안 좋아야 마땅하지만 이
봉구안은 힘겨운 표정으로 답했다.“나리, 소인의 의술이 부족하여 방도가 없습니다.”그 말을 들은 숙연은 눈물을 흘렸다.“자네도 방법이 없단 말인가…”봉구안은 굳은 표정으로 예를 행했다.“소인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숙연도 만났으니 더 이상 귀찮은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황궁 입구에 도착하자 관복을 입은 여인 한명이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궁인이 말했다.“이분은 승상 나리입니다. 예를 행하셔야 합니다.”승상 조여란은 걸음을 멈추고 봉구안을 빤히 바라보았다.“네가 공시를 뗀 의원이야?”봉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예.”조여란은 손을 뻗어 그녀의 턱을 치켜올렸다.서여국에서 여인이 사내에게 이런 행위를 하는 것은 무례에 속하지 않았다.조여란은 황제보다 조금 나이도 어리고 더 말라 보였다.승상의 자리까지 올라간 여인이라서 그런지 그리 만만해 보이지 않았다.그녀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물었다.“왜 이렇게 빨리 나온 거지?”봉구안은 침착하게 답했다.“소인의 의술이 부족하여 폐하의 병을 고쳐드릴 수 없어서입니다.”조여란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부족한 의술로 공시를 뗐단 말이냐? 어디서 사기나 치던 놈이 궁에 뭐 도둑질할 게 없나 하고 들어온 건 아니고?”다른 사람이었으면 그 말을 듣고 크게 당황했겠지만 봉구안의 마음은 평온했다. 그녀는 땀을 닦는 척 이마를 훔치며 짐짓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폐하의 안위가 걱정되어 용기를 내본 것입니다. 다만…”조여란은 그녀를 홱 밀치고는 짜증스럽게 말했다.“궤변은 듣고 싶지 않다. 여봐라! 이 돌팔이를 끌고 가서 몸을 수색하라! 궁중의 물건을 도둑질한 게 없나 잘 확인하고 곤장 스무 대를 쳐라!”봉구안은 곤장은 두렵지 않았지만 몸을 수색한다면 여인의 신분이 드러나서 심문을 받게 될 것이다.시위가 다가오자 봉구안은 언성을 높여 물었다.“승상 나리의 말씀대로라면 제가 도둑질한 게 없어도 곤장을 피할 수 없다는 말입니까?”조여란은 거만하게 그녀를 바라보며 답했다.“물론이지! 의술도 변
봉구안은 멈칫하며 고개를 숙였으나 이내 침착함을 되찾았다.고개를 다시 들자 황색 침복을 입은 서여국 황제가 머리를 풀어헤친 채로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대략 사십 세 정도로 보이는 그녀의 얼굴에는 약한 주름이 져 있었지만 몸에서 풍기는 날카로운 기운은 여전했다.이런 황제가 나라를 지키고 있으니 서여국이 무너지지 않고 버티는 것 같았다.서여국 황제는 싸늘한 눈으로 봉구안을 노려보며 말했다.“자신의 황후를 서여국에 보내다니. 남제 황제는 참으로 대단한 사람이군. 짐이 널 죽일까 두렵지도 않은 모양이지?”더 이상 연기할 필요가 없었기에 봉구안은 대범하게 인정했다.“서여국 폐하를 뵙습니다. 이번에 귀국에 오게 된 건 남제의 황후가 아닌 사절의 신분으로 온 것입니다. 맹 소장군은 더더욱 아니지요.”“위장을 하고 뵙게 된 것은 국세가 흔들리고 있는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으니 양해해 주시길 바랍니다.”“하지만 저나 남제는 폐하께 무례를 범할 뜻은 없다는 말씀을 꼭 전하고 싶습니다.”서여국 황제는 여전히 검을 겨눈 채로 비아냥거렸다.“이미 무례를 저질러 놓고 양해를 바란다? 맹 소장군의 용맹함을 모르는 사람도 있나?”“남제 황제가 널 사절로 보냈는데 짐이 어떻게 안심할 수 있지?”봉구안은 날카로운 검 앞에서도 두려움 없이 여제를 향해 예를 취했다.“소신은 저희 폐하의 명을 받고 서여국 사절이라는 중임을 맡게 되었습니다. 이곳은 서여국 영토이니 폐하께 사신으로서의 예를 취하겠습니다.”“혹여 폐하께선 남제와 동맹을 맺을 생각은 있으신지요?”서여국 황제의 눈빛이 근엄해졌다.그녀는 검을 내리고 외투를 걸친 뒤에 긴 머리를 위로 올려서 묶었다.눈 깜짝할 사이에 그녀는 힘없는 황제에서 여제로서의 위엄을 되찾았다.곧이어 상석에 앉은 그녀는 봉구안에게 자리를 권했다.“서 있지 말고 앉아서 얘기하거라.”봉구안은 가져온 국서를 서여국 황제에게 내밀었다.“남제가 원하는 것은 간단합니다. 전쟁이 터지면 서여국 병사는 남제를 침범하지 않겠다는 약조만
8월 중순이 되자 태양의 열기는 더욱 뜨거워졌다.봉구안 일행은 순조롭게 서여국에 도착했다.여자가 대권을 잡은 서여국이었기에 거리를 활보하는 여인들이 꽤 많았다.순찰을 도는 수비군마저도 전부 여인이었다.예전의 서여국도 남자가 대권을 잡은 시기가 있었다.하지만 한차례 나라가 뒤집힐 정도의 전쟁이 있은 후 사내들은 모두 전장에서 죽고 여인들은 어쩔 수 없이 무거운 짐을 떠안게 되었다.나중에 사내들이 천천히 많아지긴 했지만 권력의 맛을 본 여인들은 잡고 놓으려 하지 않았다.황실은 여인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여인에게만 황위를 넘겨주었다.간택된 관료들도 대부분이 여인이었다.사내도 관료가 될 수는 있었지만 극히 적었고 실권을 잡을 수도 없었다.서여국의 여인들은 상위자가 여인이어야만이 이 대권을 영원히 이어갈 수 있을 거라고 굳게 믿었다.만약 사내가 대권을 잡는다면 판도가 완전히 바뀔 것이다.그래서 서여국 황제는 아들이 있지만 황위는 공주에게만 물려주기로 되어 있었다.봉구안은 몰래 온 사절이기에 대놓고 알현을 청할 수 없었다.그녀는 사람을 보내 서여국 내정을 자세히 알아본 후에 움직이기로 했다.조사를 나갔던 비응군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공자, 서여국 법도는 참으로 이상합니다. 현임 황제는 40세인데 슬하에 아들딸이 없어요. 법도대로면 방계 친척에게 황위를 물려줘야 하거나 적합한 후보가 없으면 능력이 있는 자에게 물려준다고 합니다.”황실의 성이 바뀌는 건 다른 나라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하지만 이건 모두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함이고 백성들에게 황위를 외족 여인에게 물려주더라도 절대 사내에게 물려주지 않겠다는 황실의 의지이기도 했다.다른 비응군이 계속해서 아뢰었다.“공자, 제가 알아본 바로 서여국 황제에게는 잃어버린 쌍둥이 여동생이 있는데 몇 달 전에 드디어 찾았다고 합니다. 현재 황제는 중병을 앓고 있고 아마 그 여동생이 유력 후보인 것 같습니다.”“성 안에 도처에 의원을 찾는다는 공시가 붙었습니다. 서여국 황제의 병세가 그
봉구안은 짐짓 안타까운 척 말했다.“자네한테 불공평한 일인 건 알아. 만약 원하지 않는다면…”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담대연은 약을 삼켜버렸다.순간 봉구안의 눈빛이 흔들렸다.남제를 멸망시키기 위해 이 정도까지 희생한단 말인가.식사가 끝난 후 두 사람은 작별을 고했다.봉구안이 말했다.“폐하께서는 태중의 아이한테 무슨 일이 생길까 걱정하여 나에게 푹 쉬면서 태교에만 집중하라고 하였다. 그러니 교무당도 가지 않을 것이다. 다른 볼일이 있다면 바로 폐하께 아뢰면 된다.”담대연이 말했다.“남제에는 유능한 인재와 장수가 많습니다. 저는 남제 백성도 아니니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도 폐하께서 받아들이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제가 남제를 위해 할 수 있는 건 완전한 거미줄 통로를 찾고 전쟁시기에 도움이 되는 것뿐이겠지요.”봉구안도 그 말에 동의했다.“자네가 거미줄 조사에 참여할 수 있도록 폐하를 설득하겠다.”그 후 담대연은 황후의 마차를 배웅했다.객잔으로 돌아가자 그의 부하가 조심스레 물었다.“공자, 저들이 곤란하게 하진 않았나요?”자리에 앉은 담대연은 가슴 부상을 만지며 싸늘한 표정을 지었다.‘황후가 정말 회임이라도 했단 말인가.’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남제 협공의 준비단계는 이미 마무리되어가는 단계였다.저들이 눈치채고 대비책을 세우려 할 때는 이미 늦었을 것이다.황궁.일찍이 정무를 끝낸 소욱은 영화궁으로 걸음했지만 어두컴컴한 궁전만 그를 반기고 있었다.내전으로 들어간 그는 궁인에게 한소리 하려고 했다.바깥 복도에 선 유사양은 저도 모르게 흠칫 어깨를 떨었다.왜 불을 밝히지 않은 것일까?갑자기 내전에서 황제의 신음소리가 들려왔다.유사양은 곧장 내전으로 달려갔지만 갑자기 나타난 만추가 그의 앞을 막았다.“유 태감, 폐하와 마마의 좋은 시간을 방해하시려는 겁니까?”유사양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불도 안 밝히고 무슨 좋은 시간을 보낸단 말인가.내전.소욱은 봉구안에게 밀쳐져 침상에 쓰러졌다. 그의 양손은 침
내실에 다른 사람이 없었기에 봉구안도 스스럼없이 소욱의 복부를 매만졌다.소욱은 숨을 꾹 참고 근육이 긴장된 상태를 유지했다.잠시 후, 봉구안은 좋아하는 장난감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눈썹을 치켜올리며 소욱을 바라봤다.“그렇게 바쁘신 와중에 언제 수련까지 하셨습니까?”소욱은 그녀의 손을 잡고 입을 맞추며 말했다.“하루의 시작은 아침에 있지. 외적이 호시탐탐 내 나라를 노리는데 짐도 건강한 몸상태를 유지해야 군사를 이끌고 싸우지 않겠느냐. 그래서 요즘 수련을 좀 했다. 어떠냐? 황후는 만족하느냐?”그는 그녀의 대답을 무척 기대하고 있었다.봉구안은 그의 귓가로 다가가서 얕은 숨결을 토해냈다. 평온했던 그의 호흡이 다시 가빠지기 시작했다.그녀가 귓가에 대고 말했다.“오늘 밤, 부군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소욱은 당장이라도 이 자리에서 그녀를 품고 싶었다.그는 큰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받치고 힘껏 그녀를 잡아당겨 입을 맞추었다.봉구안은 가볍게 그를 밀치고는 그의 건장한 어깨에 손을 얹고 가쁜 숨을 내쉬었다.두 사람은 술에 취한 것처럼 눈빛이 몽롱해졌다.소욱의 얼굴이 다시 다가왔을 때, 봉구안은 손가락으로 그의 입술을 막고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지금은 안 됩니다.”그 말에 소욱은 잘 훈련된 신병처럼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먼저 돌아가서 짐을 기다리고 있거라. 저녁에 영화궁으로 가겠다.”그는 태의의 권고도 잊지 않고 휴식에 주의해야 한다고 주의를 주었다.그날 오후, 봉구안은 잠깐의 휴식을 취한 후에 남자 복장으로 위장하고 궁을 나섰다.그림자 호위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녀를 지키고 있었고 무예를 잘하는 만추도 동행했다.황후와의 첫 외출이라 만추는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마차 안, 봉구안은 눈을 감고 휴식을 취하다가 눈을 뜨자마자 바짝 긴장한 만추를 보고 말했다.“긴장 좀 풀거라.”“예!”하지만 만추는 진짜로 긴장을 풀 수 없었다.황후의 안전과 직결된 문제라 한시라도 긴장을 늦출 수는 없었다.하물며 맹 소
봉구안은 서여국으로 떠나기 전에 꼭 해야 할 일이 있었다.“폐하, 담대연의 말 중에 하나는 맞는 것 같습니다. 전에 제가 비밀통로를 조사하러 갔을 때 폭파약에 당할 뻔한 적이 있지요. 필히 제가 그곳에 갈 것을 아는 자가 있었을 겁니다.”“어둠 속에 숨은 자의 목적은 거미줄을 파괴하는 것인지 아니면 약인의 단서가 발견되는 게 싫은 것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단순히 제 목숨을 노리는 것인지 철저히 조사가 필요합니다.”소욱은 진지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그리고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네가 비밀통로에 간다는 걸 아는 사람은 짐의 심복뿐이다. 그들은 엄격한 선발을 거쳐 선택된 자들이니 짐을 배신하진 않을 것이야. 하지만 절대적인 건 없고 네 안위에 직결된 일이니 내 그들을 엄하게 심문하겠다.”봉구안이 정색해서 말했다.“그들을 의심하는 것이 아닙니다. 심문하실 필요도 없어요. 그러다 호위들의 사기만 떨어집니다.”“제가 의심하는 건 누군가 몰래 저희를 감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궁중에 매복해 있거나 궁 밖에 몸을 숨기고 근처에서 주시하고 있을 수도 있지요. 신변인들 조사는 필요하지만 일단 외부부터 조사해야 합니다. 일만 생기면 신변인을 의심한다면 폐하께 충성을 다할 신하가 적어질 겁니다.”“그리고 동방세에게 이 일을 얘기해 두었으니 그가 몰래 비밀통로의 단서를 쫓고 있을 겁니다. 그에게서 연락이 오면 바로 보고하겠습니다.”소욱은 조용히 그녀의 말을 듣고 있다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잡고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역시 내 황후는 세심하군. 너 같은 황후와 혼인을 하다니, 짐은 참 운도 좋아.”봉구안은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폐하, 어쩐지 본인 자랑 같습니다.”말을 마친 그녀는 그의 품에 고개를 기댔다.“폐하, 제가 떠난 후로 너무 일에만 매진하지 마십시오. 남제는 곧 전례 없던 험난한 전장을 맞이하게 될 테니 체력을 비축해야 합니다.”소욱의 얼굴에 걱정이 스쳤다.그는 그녀를 꽉 안고 턱을 그녀의 정수리에 비비며
소욱은 서재에서 변방 전보를 보고 있었다.유사양이 조심스럽게 다가와 아뢰었다.“폐하, 황후마마께서 알현을 청합니다.”싸늘하게 식었던 소욱의 눈동자에 온기가 돌아왔다.봉구안이 안으로 들어서자 유사양은 조용히 자리를 비켰다.“어쩐 일로 왔느냐? 점심은 먹었고?”최근 소욱은 나랏일로 바쁘다 보니 그녀와 함께 식사를 즐긴지가 꽤 오래되었다.봉구안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에게 물었다.“폐하, 남부 쪽 상황은 어찌 돌아가고 있나요?”소욱은 손을 뻗어 그녀를 데리고 내실로 들어가며 말했다.“안 그래도 네가 이 일을 신경 쓸 거 같아서 말하려고 했다.”“남부군이 수화부로 향해 침공을 하고 있고 현재까지는 좋은 소식뿐이구나. 수화부의 후방은 불안정하다 보니 남강과의 전쟁이 점점 벅찰 테지.”“아마 곧 있으면 철퇴할 것으로 보인다. 남강의 위기는 쉽게 해결되었지만 짐이 가장 걱정하는 건 여전히 북연과 동산국이야.”봉구안은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저도 폐하와 이 일을 의논하러 들렀습니다.”그녀는 항상 휴대하고 다니는 지도를 꺼내 탁자에 펼쳤다.“저는 수화부 연합군이 침공하려는 국가가 남강뿐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그 말을 들은 소욱의 미간이 찌푸려졌다.봉구안은 손가락으로 지도의 여러 곳을 가리키며 계속해서 말했다.“수화부 연합군이 남강 침공이 승리한다면 다음 목적지는 남제가 될 것입니다.”“저희가 혼인한 둘째날에 동부 장군에게서 동부에 이상한 움직임이 있다는 서신을 받았습니다.”“동부, 남부, 그리고 북부에 위치한 북연까지…”봉구안은 고개를 들고 심각한 표정으로 소욱에게 말했다.“폐하, 이는 협동 공격입니다.”협동 공격이란 모든 나라가 연합하여 한 나라를 침공한다는 것을 의미했다.이런 상황은 소욱이 황제에 즉위했을 초기에도 있었던 일이었다.그때 각 나라들은 남제의 정권이 불안정한 틈을 타서 남제를 먹으려 시도했었다.나중에 장공주가 대하에 화친을 가면서 비로소 남제가 숨을 돌리고 역습을 노릴 기회가 되었다.만약 봉구안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