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욱의 눈빛이 무겁게 가라앉았다.그는 바닥에 흩어진 깨진 도자기 조각을 한 번 보고 나서 곧바로 몸을 일으켰다.그의 커다란 그림자가 봉구안 위로 드리워졌다.“짐은 황제다.”“황제의 권위 아래 자유란 존재하지 않아.”“네가 분노하든, 불복하든, 이것은 네가 거스를 수 없는 일이다.”“내가 만약 너였다면, 이런 어리석은 방식으로 황제의 인내심을 시험하지는 않았을 것이다.”그의 목소리는 담담했으나, 그 안에는 반박할 수 없는 위엄이 서려 있었다.남방에서의 온화한 양보는 단지 황제의 신분을 잠시 내려놓은 결과로 그녀가 품게 된 착각일 뿐이었다.그의 본성은 여전히 강압적이고 폭군다운 군주였다.봉구안은 스스로를 비웃으며 말했다.“제가 선택할 권리를 주실 거라고 착각했나 봅니다.”그가 분노했던 것은 그녀가 스스로 계약 기간을 바꿨기 때문이 아니라, 처음부터 그녀의 떠남을 허락하지 않을 생각이었기 때문이었다.소욱은 그녀의 턱을 들어 올리고 위에서 내려다보며 말했다.“한 가지는 안심하거라.”“이 일은 너와 나 사이의 일이니…”“짐은 봉가에게든, 그 외 누구의 목숨이든 너를 협박하는 데 쓰지 않을 것이다.”“왜냐하면, 짐은 네가 다른 이들을 위해 짐에게 가식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지.”봉구안은 주먹을 굳게 쥐었다.…연상은 황제가 내전을 나서는 모습을 보고 급히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요 며칠 황제는 금방이라도 사람을 죽일 것 같은 살기를 풍겼다. 두려움 그 자체였다.그와 동시에, 전조 또한 평온하지 않았다.황제의 ‘옛 병’이 다시 도진 것이다.진왕의 양식 탈취 사건이 황제의 친심으로 다뤄졌다.이 사건에 연루된 관리들은 모두 오마분시의 극형을 받았다.심지어 진왕조차 사형을 선고받았다.태황태후는 이를 알고 진왕을 위해 황제에게 탄원했다.하지만 소욱은 냉담하게 대답했다.“모반을 꾀한 자에게 짐은 살아갈 길을 주지 않을 것이다.”“그리하면 마치 호랑이를 풀어 산으로 돌려보내는 것과 다름없지 않은가!”천옥 안.
태황태후는 눈앞의 사람을 보며 깜짝 놀라 물었다.“황후, 네가 방금 뭐라 했느냐!?”봉구안은 단호한 어조로 대답했다.“신첩, 스스로 폐위하길 청하옵니다.”전각 안에 있던 궁인들은 충격을 금치 못했다.황후마마께서 무슨 망령된 짓을 하시는 것인지?“건방진 소리 마라! 이런 말은 지금껏 들어본 적이 없구나! 황상은, 황상은 이 사실을 알고 있느냐…”봉구안은 숨김 없이 말했다.“황제 폐하께서는 허락하지 않으셨기에, 신첩이 마마의 의지를 구하러 온 것이옵니다.”태황태후는 사실 이 손자며느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하지만 이 일은 결코 간단하지 않았다.“진심으로 궁을 떠나고 싶다는 말이냐?” 태황태후가 물었다.봉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렇사옵니다.”“좋다. 내가…”태황태후의 말이 채 끝나기 전, 문 밖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이 일로 할마마마께서 수고하실 필요 없습니다.”태황태후가 고개를 들어보니, 황제가 어둡게 가라앉은 얼굴로 전각 안으로 걸어들어왔다.그 눈빛은 심지어 그녀를 향해서도 약간의 적의를 내비치고 있었다.“황상, 네가…”소욱은 봉구안의 허리를 감싸며 차갑고 매서운 눈빛으로 말했다.“황후가 짐과 다투다가 그런 헛소리를 한 것뿐입니다. 할마마마께 걱정을 끼쳐드렸습니다.”태황태후는 속으로 모든 것을 간파했으나,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고 소욱이 봉구안을 데려가도록 내버려 두었다.만수궁을 나선 후.소욱은 봉구안을 나무라지 않았다.다만 그녀의 손을 꽉 쥔 채 아무 말 없이 묵묵히 걸었다.영화궁에 이르러 소욱은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할마마마께서는 이미 폐후할 마음을 품으셨었지. 오늘, 그 바램을 이룰 뻔 했구나?”봉구안의 얼굴에는 미동조차 없었다.소욱은 그녀의 턱을 들어 올리며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게 했다.“그러니 다시는 이런 의미 없는 일을 하지 마라.”봉구안은 입가에 차가운 웃음을 띠었다.“제 마음은 변함이 없사옵니다.”소욱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그는 그녀가 웃는 것을 좋아했으나, 이 순간
영화궁 밖.수많은 후궁들이 줄지어 꿇어앉아 있었다.그들 모두 황후를 위해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었다.황제께서 자신들에게 무심하신 것은 이미 익숙한 일이었으나, 황후마마처럼 훌륭하신 분께까지 그러하시다니!황후마마는 군량미를 보내기 위해 몸을 돌보지 않으셨건만, 결과는 어찌 되었단 말인가?영비가 궁으로 돌아오자마자 황후께 냉담해지셨고, 심지어 폐하께서 황후마마께 면벽 자숙을 명하셨다.이런 일을 겪고도 황후마마께서 심신이 지쳐 스스로 하당을 청하시고 궁을 떠나시길 구하신 것이 어찌 이상하단 말인가?폐하께서 억지로 황후마마를 붙들어 두시며 그 마음을 짓밟으시는 것은 참으로 분노를 일으키는 일이었다.후궁들은 마음을 합해 한목소리로 탄원하였고, 이렇게까지 하나로 뭉친 적은 없었다.그들 대부분은 명문가 출신으로, 이미 은밀히 집안에 소식을 전하여 전조에도 힘을 보태도록 요청하였다.소욱은 이 말을 듣고 어처구니없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러나 황후는 실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그가 황후를 붙잡아 두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하는 것도 본질적으로는 이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처음에는 후궁들의 행태를 무시하려 했으나, 그녀들이 외치는 소리는 지나치게 크고 비통한 기색이 역력했다.멀리서 들으면 황제가 붕어한 줄 알 정도였다!결국 소욱은 무겁게 명을 내렸다.“모두 물러가라!”그러나, 어명을 받은 호위들은 후궁들에게 손댈 엄두조차 내지 못하였다.그녀들은 단호한 태도를 보이며, 손을 대면 곧바로 ‘무례하다’고 소리쳤다.심지어 몇몇은 머리 장식인 발채를 목에 들이대며 죽음으로 저항하였다.이 전대미문의 상황에, 신하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 결국 천기를 울리며 돌아와 아뢰었다.“폐하, 신하들이 무능하여 대처할 수 없사옵니다.”자녕궁.장공주 역시 이 소식을 들었다.황후가 궁을 떠나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녀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빨리 옷을 갈아입혀라! 황제를 만나러 가야겠다!”장공주는 오래전부터 황후는 자유롭게 세상을 누비며
소욱은 알고 있었다.지금의 상황이 이렇게까지 번져버린 것은 모두 황후가 낮에 태황태후를 찾은 탓이었다.그는 그녀가 할마마마께 도움을 청하려는 줄로만 알았다.이제야 깨달았다. 그녀의 목적은 바로, 온 세상이 그를 규탄하게 만드는 것이었다.하지만 도대체 언제부터였단 말인가?후궁들조차 그녀를 이렇게까지 감싸게 된 것이!정말이지, 그녀의 능력은 대단했다.소욱은 내전으로 들어섰다.그곳에 태연히 앉아 있는 봉구안을 거칠게 끌어올리며 분노를 억누른 목소리로 물었다.“이게 바로 네가 원하던 광경이느냐?”봉구안은 아무런 감정이 담기지 않은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며 담담히 말했다.“이것은 시작일 뿐입니다.”“폐하께서 이대로 고집을 꺾지 않으신다면, 장차 폐하께 제 목숨을 청원할 이들은 백성과 장병들이 될 것이옵니다.”소욱은 자신을 비웃듯 헛웃음을 터뜨렸다.“대체 무슨 청원이란 말인가? 내가 너에게 해를 끼쳤다고 말하려는 것이냐?”“그렇다면 나는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억울한 자일 것이다!”“분명히 떠나겠다고 한 건 너였고, 나를 저버린 것도 너였다!”“나는 너에게 천 번 만 번 잘해 주었는데, 너는 마음이 돌처럼 차가워, 죽은 사람 하나만도 못하지 않았느냐!”봉구안은 여전히 고요한 얼굴로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그녀의 그 고요함이 그를 더욱 비참하고 화나게 만들었다.마치 자신이 혼자만 난리를 치는 ‘미치광이’처럼 보이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그녀의 침묵은 소욱의 분노를 더욱 자극했다.그는 이를 악물며 차갑게 말했다.“네가 나와 끝까지 싸우겠다면, 내가 너에게 이 남제의 태양이 누구를 위해 떠오르는지 보여주도록 하마!”…그날 밤.후궁들은 영화궁 밖에서 밤새도록 무릎을 꿇고 있었다.다음 날이 되자 전조의 대신들 몇몇이 차례로 상소를 올렸다.“폐하, 후궁의 일은 원래 신들이 간섭할 바가 아니지만, 황후께서는 모범적인 군후이십니다.”“전쟁 중에는 기도를 올리셨고, 그 뒤로는 군량미를 직접 보내셨사옵니다.”“이토록 어진 황후를 어찌 그렇게
궁문 밖은 수많은 백성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대체 무슨 일인가?”“모르겠네, 나도 막 와 보았네.”“들어 보니 황후께서 이혼을 청하셨다던데…”“뭐라고?! 이혼? 황후께서?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평범한 여인이라도 이혼을 청하려면 시댁의 온갖 압박을 견뎌야 하는데, 문벌 높은 집안에서는 ‘여인이 이혼할 수 없고, 단지 버림받을 뿐’이라 하지 않았던가.하물며 황후가 이혼을 청하다니!사람들은 입을 모아 중얼거렸다.“황후마마께서 미치신 게 분명해…”등문고 아래.봉구안은 단단한 눈빛으로 백성들 앞에 섰다.목소리는 우렁찼으며, 한 마디 한 마디가 울림이 있었다.“창천이시여!”“첫째로 고하옵나니, 혼인을 했으나 받들지 않으셨습니다.”“제후의 대례를 올리셨으나, 폐하께서는 신 대신 다른 이를 보내 혼례를 행하게 하셨사옵니다.”“둘째로 고하옵나니, 혼인을 하셨으나 믿지 않으셨습니다.”“초야에 들어가자마자, 폐하께서는 제 정결을 의심하시어, 봉가의 명예를 짓밟으셨사옵니다.”“셋째로 고하옵나니, 첩을 사랑하시고 아내를 멸시하셨습니다.”“혼인한 밤, 정실을 내버려 두고 비빈과 함께 밤을 보내셨으며, 황후의 인장은 비빈에게 맡기셨사옵니다.”“넷째로 고하옵나니, 아내를 방치하고 돌보지 않으셨습니다.”“폐하께서는 연이어 궁중에서 제 몫을 삭감하셨고, 그로 인해 저는 지참금까지 모두 소진하게 되었사옵니다.”“다섯째로 고하옵나니, 아내에게 폭력을 행사하셨습니다.”“궁에 들어온 지 1년이 넘었으나, 수시로 궁규를 필사하게 명하시고, 팔이 부러지게 하시고, 은침으로 몸을 찌르셨사옵니다.”“마지막으로 고하옵나니, 호랑이를 길러 화를 부르셨습니다.”“폐하의 방임이 후궁 황귀비를 제멋대로 굴게 하여, 그녀는 혼례 전 저를 납치하고 명예를 훼손하며 헛소문을 퍼뜨렸사옵니다…”“그만! 그만두거라!!”봉구안의 부친 봉 대인은 군중을 뚫고 앞으로 나왔다.관모는 삐뚤어져 있었으나 바로잡을 겨를조차 없었다.그는 막아서는 시위들을 향해 고함쳤다.“
소욱이 모습을 드러내자, 백성들은 두려워하거나 혹은 분노로 가득 찬 표정을 지었다.유사양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꾸짖었다.“대담하구나! 너희들은 폐하를 뵈었음에도 불구하고 어찌 예를 올리지 않느냐?”그러자 백성들은 즉시 무릎을 꿇고 예를 갖추었다.그러나 누군가는 약한 목소리로 외쳤다.“이혼…”소욱은 두 손을 뒤로 한 채 서 있었으며, 넓은 곤룡포가 바람에 펄럭였다.그의 시선은 봉구안에게 닿았다.“황후는 궁으로 돌아가시오!”그러나 봉구안은 그 자리에서 단호히 외쳤다.“폐하께서는 이혼을 허락해 주시옵소서.”소욱의 손은 단단히 움켜쥐어졌고, 손바닥의 상처는 지금 그의 천 갈래 만 갈래 찢긴 마음만큼 아프지 않았다.조금 전 황후가 말한 모든 것들.그는 들었다.그리고 그것이 모두 사실임을 부정할 수 없었다.그녀가 그로 인해 떠나고 싶어 한다면, 그들 사이에는 아직 희망이 있을지도 몰랐다.그가 저지른 상처를, 기필코 회복시킬 것이다.그러나 이혼? 그것만은 결코 허락할 수 없다!소욱은 분노에 차서 시위들을 쏘아보았다.“너희들은 다 죽었느냐!”유사양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폐하, 등문고의 규칙은 깨뜨릴 수 없는 것이옵니다.”소욱은 위엄 있는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이 등문고를 치워라!”이런 빌어먹을!그는 이 물건이 있는 걸 잊고 있었다.“폐하, 결코 그렇게 하셔서는 아니 되옵니다!” 몇몇 대신들이 극구 만류했다.“폐하, 등문고는 선조께서 세우신 것으로, 이를 없애는 것은…”“짐이 치우라 했다!” 소욱의 목소리는 반박을 용납하지 않았다.그러나 실상, 억울한 사람이 이 북을 칠 수 있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등문고는 그저 황실의 공정을 보여주기 위한 상징일 뿐이었다.시위들은 명령에 따라 등문고를 옮기고 봉구안을 에워쌌다.그러나 봉구안은 평온한 눈빛으로 소욱을 바라볼 뿐이었다.황후가 등문고를 친 일은 금세 온 세상에 알려졌다.선량한 사람들은 황후를 위해 목소리를 높였고, 오랜 세월 고통받아온 여성들은 황후의 처지를
태황태후는 진짜로 죽으려던 게 아니라 죽음으로 소욱을 압박하기 위함이었다.그걸 아는 소욱은 태의가 태황태후의 건강에 문제가 없다고 고하자마자 굳은 목소리로 경고했다.“할마마마, 굳이 짐을 이렇게 괴롭히셔야겠습니까.”태황태후는 침상에 누워 슬픔에 잠긴 눈으로 황제를 바라보았다.“폐하를 협박하는 게 아닙니다. 폐하가 안타까워서 그래요!”“조중의 일은 이 늙은이도 들었습니다. 그 아이 때문에 이 지경이되었는데도 그 아이의 진짜 속마음을 모르시는 겁니까?”“그 아이는 작정하고 궁을 떠나려는 겁니다. 폐하께선 그 아이를 마음에 품었고 옆에 두고 싶겠지만 그 아이는 아니에요.”“딴마음을 품은 여자를 어찌 옆에 묶어둔단 말입니까? 폐하, 선황의 원비 기억하십니까? 진심으로 황후를 아끼신다면 황후가 원비의 처지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을 거 아닙니까?”소욱은 순간 등골이 오싹했다.아름답지만 젊은 나이에 목숨을 잃은 원비는 선황이 가장 사랑하던 여인이었다.하지만 그 여인은 선황을 사랑하지 않았다.선황은 그녀를 강제로 궁에 머물게 하고 심지어 황후로 책봉할 생각까지 품었었다.하지만 입궁한지 3년만에 그녀는 싸늘한 주검으로 변해버렸다.원비 이야기는 황궁의 금지어였으나, 황실의 핏줄인 소욱은 그녀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원비는 칼로 자신의 얼굴을 긋고 긴 검을 자신의 배에 찔러넣었다. 그때의 원비는 회임 중이었다.뱃속의 아이와 함께 장렬하게 죽음을 택한 것이다.그는 선황이 그녀의 시체를 품에 안고 장례도 거부하고 이틀이나 슬픔에 잠겨 있던 모습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었다.그 뒤로 선황은 성격이 완전히 변했다.육신은 살아 있었지만 마음은 이미 죽은 상태였다.마음이 없는 사람은 누구에게나 매정했다.소욱의 머릿속에는 장렬히 죽어갔던 원비의 처참한 모습과 슬픔에 울부짖던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다.태황태후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선황께선 아들들에게 제왕은 정이 없어야 한다고 가르쳤지만 그건 본인이 사랑의 아픔을 겪었기 때문입니다.”“이 늙은이도 그때
악몽에서 깬 소욱은 더 이상 잠들고 싶은 욕구가 사라졌다.침상을 내린 그는 옷을 걸치고 곧장 영화궁으로 향했다.영화궁에 도착한 소욱은 바로 침전으로 들어가는 대신, 멍하니 밖에서 방 문을 바라보았다.이 시간이면 황후는 잠들어 있을 것이다.그가 들어가야 할지 주저하던 사이에 최 상궁이 다가왔다.최 상궁은 황후화 황제가 화해했으면 하는 마음에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폐하, 황후께서 말은 그렇게 하셔도 사실은 그냥 폐하께 서운한 일이 있어서예요. 소인이 괜한 소리를 하는 건 아니고, 황후께서는 자존심이 강하신 분이라 폐하와 영비마마께서…”소욱은 이상을 찌푸리며 최 상궁에게 물었다.“황후가 영비 때문에 화가 났단 말이냐?”최 상궁은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그럼요! 황후께서 평소에 폐하를 얼마나 생각하시는데요. 그게 아니라면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물자를 변방까지 운송했겠어요? 폐하께서 출정을 떠나신 동안, 마마께서는 폐하를 그리워하셨습니다. 하지만 영비마마가 돌아오시고 황후마마는 갑자기 돌변하셨죠. 이혼을 제기한 것도 그 시점이고요.”“만약 폐하께서 정말 과거의 일을 신경 쓰신다면 지금까지 기다렸다가 얘기를 꺼냈을 리가 없지요. 폐하, 소인의 말은 모두 사실입니다. 폐하께서 영비마마의 침전으로 가신 그날 밤, 황후마마도 그곳에 가셨습니다. 돌아오신 후, 표정이 안 좋으셨지요.”소욱은 미간을 확 찌푸렸다.그가 장락궁에 머문 그날 밤이라면 흑포가 탈옥한 날이었다.아마 흑포 때문에 그를 찾아갔을 것이다.하지만 최 상궁의 말도 일리가 있었기에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궁으로 돌아오기 전, 남부에 있을 때까지만 해도 황후는 멀쩡했다.그녀가 돌변한 건 궁으로 돌아온 후, 영비가 한때 회임했었다는 소식을 들은 후였다.그날 서재에서 그는 영비를 시켜 자신과 영비가 합방한 적 없다는 사실을 해명하게 했다.지금 생각해 보면 아주 조촐한 설명이 아닐 수 없었다.어쩌면 황후는 어릴 때부터 그와 함께 자란 영비가 그와 짜고 자신을 속이는 거라고 오해했을
대하국의 지원군은 초조함에 휩싸였다.곰곰이 생각해 보니, 아무리 옥석비가 있다지만, 겨우 소수 병력만 이끌고 있는 남제 황제가 그들의 10만 대군과 싸우려 하다니, 너무나 오만한 처사가 아닌가 싶었다.그러나 곧 이어진 광경은 그들에게 평생 잊을 수 없는 충격을 안겨주었다.땅이 갑자기 들썩이며 사방에서 수천의 병사가 솟아나 그들을 포위해 버렸다.대하국 선봉 지휘관은 망연자실했고, 후방 병사들은 무기를 움켜쥔 채 외쳤다.“장군님, 매복입니다!”소욱의 눈은 서늘하게 얼어붙어, 차갑기만 했다.“항복하는 자는 살려줄 것이다.”대하국 병사들은 전투용 쇠뇌를 준비하며 진영을 구축했고, 선봉 장수는 큰 소리로 외쳤다.“죽음을 각오하고 싸운다! 남제군을 모두 쓸어 버려라!”소욱의 얼굴은 차가운 기운으로 가득했고, 그는 손을 한 번 휘저었다. 그러자 멀리서 준비를 마친 궁수들이 일제히 화살을 쏘아올렸다.같은 시각, 북부에서는 북연의 10만 대군이 남제군의 기습을 받았다.맹건은 북방군을 이끌고 어디선가 나타났고, 그의 옆에는 옥석비가 자리 잡고 있었다.북연 병사들은 맹건을 알아보고 크게 놀랐다.“북방군은 이미 궤멸된 게 아니었나? 어째서 여기에 나타난 거지?”맹건은 흙 언덕 위에 서서 강렬한 눈빛과 함께 살기를 뿜어냈다.남제를 공격하는 여러 나라들이 한창 공세를 펼칠 때, 그는 이미 황제와 봉구안으로부터 비밀 지령을 받아두고 있었다.처음에는 북방을 포기하라는 명령이 너무 터무니없이 들렸지만, 곧 남제가 이미 ‘거미줄’로 불리는 비밀 통로를 구축해 놓았음을 알게 되었다.북방군은 패한 척하며 은밀히 거미줄 통로 속에서 숨었고, 그동안 백성들을 대피시키며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이제야말로 반격의 때가 온 것이다.맹건은 장검을 뽑아 하늘을 가리키며 외쳤다.“선조의 옥석비가 우리를 지키고 있다! 남제의 국토를 침범한 자들은 모두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갇혀 있던 늑대처럼 전의를 불태우던 북방군은 순식간에 몰려들어 포효했다.“돌격하라!”북연의 주
단춘의 손이 떨렸다.“뭐라고? 죽였다고?”보고하던 병사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고, 그는 무릎을 꿇으며 성 밖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 음병들이 지나간 후, 병사 수십 명이 살해당했습니다. 너무도 참혹한 광경이었습니다. 장군님, 어찌하면 좋겠습니까?”단춘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고 말았다.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그 자신도 답을 몰랐다.평생 사람과의 전투만 치러왔던 그에게, 이번에는 귀신과 싸워야 한다는 말인가.주국공부.시위병이 황제의 침실로 뛰어들어왔다.“폐하! 음병이 사람을 죽였습니다!”북연의 황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내가 말했지! 귀신이면 귀신도 베란 말이다! 당장 음병들을 모두 없애라!”황제의 광기는 이미 잘 알려져 있었지만, 이번에는 그 광기가 귀신을 향해 번졌다.시위병이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폐하, 그들은 음병입니다. 신출귀몰하며 잡으려 하면 금세 사라집니다.”“야간 경계 중인 우리 병사들이 수십 명 죽임을 당했고, 그들은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습니다. 도저히 손쓸 수가 없습니다!”북연 황제의 눈에 차가운 기운이 어렸다.설마, 이 선성에 진짜 귀신이 있다는 것인가?그는 고심하며 생각을 이어가다가, 무의식적으로 허리춤을 만지더니, 문득 얼굴이 굳어졌다.“내 옥쇄가 어디 갔느냐!”시위병들은 놀라며 어리둥절해했다.황제의 옥쇄가 사라졌다니!제국의 상징이자 중요한 물건이 어째서 사라진 걸까?……다음 날, 선성 밖.남제군은 성 안에서 음병이 나타났다는 사실과, 몇몇 적군이 죽임을 당했다는 소식을 들었다.이야기는 너무도 황당해서 믿기 힘들었다.본진 안.장수들은 일제히 갑옷을 입고 대기하고 있었다.봉구안도 차분히 갑옷을 두르고 있었다.머리가 빠른 자들은 이미 이 모든 것이 황후의 계략임을 간파했다.음병들은 분명 살아 있는 병사들이었다.남제군이 비밀 통로를 통해 이동한 전례가 있는 만큼, 선성 내부에도 비밀 통로가 있을 가능성이 컸다.음병으로 적군의 사기를 꺾은 만큼, 이제 공격 명령이 내려질 것이
귀신이 출몰했다는 한 병사의 외침에, 선성을 경계하던 병사들은 순간 굳어버렸다.텅 비었던 선성 내부의 광장에 갑자기 수많은 장병들이 나타난 것이다.그들은 남제 갑옷을 입고, 천둥소리가 어우러진 밤하늘 아래 규칙적으로 걸어갔다.그들 몸에서는 푸른빛이 뿜어져 나와 마치 유령처럼 보였다.성벽 위, 누군가 공포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음병이다! 음병이 나타났다!”음병이 길을 지나간다는 전설은 여러 나라에서 잘 알려져 있었다.사람들은 평소 죄를 짓지 않으면 한밤중에 귀신이 찾아와도 두렵지 않다는 말을 흔히 하곤 했다.하지만 현실에서는 비겁한 자들뿐만 아니라 겁이 많은 사람들도 귀신을 무서워했다.세상에는 겁이 많은 사람이 더 많았으니, 음병의 등장에 병사들은 모두 몸을 떨었다.그래도 그나마 용기를 내는 병사들이 장군에게 이 상황을 보고하러 갔다.음병들의 창백한 얼굴만 봐도 등골이 서늘해졌던 그 순간, 단춘 장군은 바로 갑옷을 챙겨 입고 성벽으로 나왔다.그조차도 음병을 실제로 본 것은 처음이었다.남제 장병들이 기괴하게 행진하는 모습을 보자, 단춘은 잠시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하지만 곧 정신을 가다듬고 병사들에게 단호히 명령했다.“고개를 돌려라! 눈을 감아라! 그들을 보지 말아라!”이는 오래된 전설에서 비롯된 말이었다.음병이 길을 지나갈 때 이를 보면, 음병들이 자신도 같은 동료로 착각해 데려간다는 것이다.여기서 데려간다는 건, 결국 목숨을 잃는다는 뜻이었다.귀신과 신령은 가까이하기보다는 멀리해야 했다.단춘 뿐만 아니라 다른 장수들 역시 병사들에게 같은 지시를 내렸다.천둥소리가 계속 이어졌고, 이는 번개의 울림인지 음병들의 말발굽 소리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한편, 북연의 황제는 선성의 국공부에서 자다가 바깥의 소리에 잠에서 깼다.“밖에 무슨 일이냐!”경호병이 급히 보고했다.“폐하, 음병이 나타났다고 합니다!”“음병?”황제는 가소롭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이건 틀림없이 남제의 계략이다. 무장을 갖춰라! 그 음병들이란 놈들을
성문이 잠긴 것은 자명했지만, 그 열쇠를 쥔 자가 누구인지 알 길이 없었다.명백한 것은 이 일이 연합군 내부의 소행일 리 없다는 것이다.즉, 그들 사이에 이미 남제의 첩자가 스며들었다는 뜻이었다.연합군은 차가운 소름이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것을 느꼈다.놀람이 가시자마자, 각 군대는 서로를 의심하기 시작했다.수화부 연합군은 대하국 동부 연합군을 비난하며 말했다.“첩자는 분명 당신들 안에 숨어있을 것이오! 동방군과 교전한 건 당신들밖에 없지 않소!”“우리 수화부는 남부에서 바로 온 병사들이란 말이오!”단춘은 즉각 반박했다.“북연 연합군도 마찬가지로 남제와 싸웠소!”“그리고 남부에서 왔다고 해서 첩자가 없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소?”“오히려 이미 섞여 들어왔을 가능성도 있소!”북연 황제는 이때 상대적으로 침착한 태도로 그들의 다툼을 제지했다.“그만하라! 너희의 소리가 귀를 찌르니 멈추거라!”“첩자가 어디에 있든 간에, 지금 중요한 건 적과 맞서 싸우는 것이다!”“성문이 잠겼다 해서 걱정할 필요는 없다.”“적도 성문을 뚫지 못하니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황제의 이 말은 언뜻 그럴듯하게 들렸지만, 단춘 같은 경험 많은 장수에게는 부족함이 있었다.단춘은 그의 의견에 의문을 제기하며 물었다.“폐하, 혹시 아직도 상황의 심각성을 모르고 계신 겁니까?”“저희가 성문을 나갈 수 없다는 건, 결국 여기서 갇혀 굶주림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이 말이 나오자, 군대는 순식간에 동요하기 시작했다.포위된 상황에서 가장 큰 문제는 식량이었다.남제군이 서두르지 않고 성을 공격하지 않는 것도, 시간을 두고 연합군의 식량을 고갈시켜 스스로 무너지게 하려는 전략임이 분명했다.……선성 밖.남제군은 자리를 잡고 주둔 중이었다.지휘소에서는 봉구안이 침착한 표정으로 앞으로의 계획을 구상하고 있었다.그녀의 시선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한 장군이 허리를 굽혀 물었다.“황후마마, 병사들이 선성을 언제 공격하냐고 묻고 있습니다.”봉구안은 그
선성 밖에서는 매서운 찬바람이 불고 있었다.수십만 남제 장병이 다양한 무기를 들고 군가를 부르기 시작했다.그 소리는 선성 위를 울려 퍼지며, 마치 갇혀 있던 거대한 짐승이 울부짖는 듯한 위압감을 주었다.성 안에서도 그 소리가 선성을 흔들 만큼 강렬하게 울렸다.봉구안은 전마를 타고 성벽을 응시하고 있었다.갑옷 아래 드러나는 그녀의 모습에서는 대단한 힘이 느껴졌다.성문은 이미 단단히 닫혀 있었고, 성 안에 있는 사람들은 누구도 도망칠 수 없는 상태였다.성루 위에서는 단춘이 놀란 얼굴로 멍하니 서 있었다.그 옆의 부장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장군, 저건 동방군입니다. 대체 어떻게 선성에 나타난 걸까요?! 분명 감주에 있어야 할 자들인데…”하늘에서 날아온 것도 아닐 텐데, 어찌 이런 일이 가능할까?북연의 황제는 성 밖 동방군의 존재에 크게 분노했다.그는 단춘의 옷깃을 움켜잡고 호통을 쳤다.“감주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고 하지 않았나?”“그런데 이게 대체 뭐냐! 단춘, 정말 잘도 해냈구나!”단춘은 당혹스러웠다.본인도 전혀 모르고 있던 일이었기에 황제의 질문에 답하지 못했다.그때 수화부 연합군이 비아냥거리며 말했다.“남제가 당신들을 속인 게 확실하군!”황제는 점점 격분하며 단춘을 더욱 매섭게 쏘아봤다.“동방군이 너희 뒤를 따라왔는데도 모르다니, 이런 실력으로 남제를 우리 북연과 나누겠다고? 정말 가소롭구나!”단춘은 황제의 손을 뿌리치며 반박했다.“폐하, 성 밖에 있는 건 일부 동방군에 불과합니다.”“게다가 우리 동부 연합군만 속은 것도 아닙니다.”“남부 연합군인 수화부는 어땠습니까? 그들이 남제군을 알아챘습니까? 똑같이 속았으면서 왜 저희에게만 책임을 묻습니까?”동부 연합군의 장수들도 이에 동조하며 목소리를 높였다.“남제의 계략은 워낙 교묘합니다. 감주를 언제 빠져나왔는지, 우리는 알 수 없었습니다.”“폐하, 북부 연합군이라고 해서 뒤따라오는 남제군을 완벽히 파악했다고 장담할 수 있습니까?”“그만들 하십시오.
강력한 적보다 무서운 것은 바로 어리석은 동맹이었다.단춘은 선성의 옥석비를 손에 넣고 싶었지만, 각자의 역할을 다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었다.그는 정정당당히 조유관을 공략하며 남제에 진입했다.그런데 수화부 연합군은 도대체 뭘 하는가?공격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이제 와서 동부 연합군의 성과를 가로채려는 것은 아닐까?그들의 이런 태도는 단춘을 화나게 했다.그렇다고 이미 도착한 연합군을 돌려보낼 수도 없었다.결국 단춘은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모두 들어라. 먹을 것도 쉬는 것도 뒤로 미뤄라.”“다른 나라보다 앞서 선성에 도달해야 한다!”“예!”……감주.대하국 연합군은 성 밖에서 남제 동부군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하지만 그들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남제 황후 봉구안이 이미 거미줄이라 불리는 비밀 통로를 통해 대군을 이끌고 빠져나갔다는 사실을 말이다.그녀는 소수의 병력을 남겨 감주에 대규모 병력이 주둔한 것처럼 보이게 했다.이 계책에 말려든 동부 연합군은 발이 묶이고 말았다.그 사이, 봉구안의 동부군은 비밀 통로를 통해 이미 묵성에 도착해 있었다.그곳에서 그녀는 동방세를 만났다.동방세는 거미줄 비밀 통로의 마지막 관문을 개조하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그는 고된 작업 중에도 농담을 잊지 않았다.“이번 거미줄 개조를 위해 황제께서 이 장군의 10만 대군을 내게 맡기셨소.”“덕분에 난 한동안 대장처럼 군림하며 유세를 떨었네.”황제가 보낸 인력 덕분에 그는 북부와 동부의 거미줄 비밀 통로를 효율적으로 개조할 수 있었다.이제 마지막 관문만 마무리하면 되는 상황이었다.봉구안은 그의 쇠약해진 모습을 보고 진심으로 고개를 숙였다.“동방세, 남제 장병들을 대신해 깊이 감사의 뜻을 전하네.”“선성으로 갈 계획이오?”동방세가 웃으며 물었다.봉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렇소.”동방세는 들고 있던 망치를 내려놓으며 말했다.“여기 작업만 끝내면 범진과 함께 선성에서 보도록 하세.”그는 선성에서 큰 전투가 벌어질 것을 직감
남강.서왕은 수화부 연합군의 갑작스러운 철수가 단순한 계략일 것이라 의심했다.하지만 밤중에 직접 확인한 결과, 그들의 철수는 패주와 다름없었다.식기조차 챙기지 못하고 떠난 흔적이 역력했으며, 모닥불조차 꺼지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조사를 거듭한 끝에, 수화부 연합군이 선성의 보물 이야기를 듣고 급히 이동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이 예기치 못한 상황에 서왕은 당황스러웠다.적군이 사라졌으니, 그는 계속 방어를 유지해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한편, 수화부 연합군은 선성을 향해 급히 북진하며 초조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병사들은 강추위를 뚫고 말을 달리며 얼굴에는 피로가 역력했다.선두에서 말을 탄 장수가 외쳤다.“장군의 명령이다! 속도를 더 내라!”병사들은 지친 표정으로 웅얼거렸다.“우리가 가봤자 보물이 우리 손에 들어올 것도 아닌데, 이렇게 서둘러야 하나?”“그러게! 선성 보물 얘기를 듣자마자 진지를 철수했지만, 보물은 얼마 되지도 않는다잖아. 그 유명한 옥석비도 하나뿐인데, 그게 우리 차지가 되겠어?”“명령이 내려왔으니 따를 수밖에. 우리가 무슨 선택권이 있겠어?”……동산국 황궁.동산국 황제는 어마장에서 여전히 기력이 넘쳤다.오십을 넘긴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는 연이어 과녁 중심을 명중시켰다.곁에 있던 신하가 조심스럽게 보고했다.“폐하, 수화부 연합군이 남강 공격을 포기하고 북상하여 조유관으로 향했다고 합니다.”조유관은 대하국 연합군이 최초로 돌파한 약점이었다.더 많은 연합군이 조유관으로 몰려드는 상황은 연합군에게 유리했다.그러나 그로 인해 남부 방면의 공격이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황제는 활을 내려놓았다.머리칼에는 은빛이 드리워졌지만, 여전히 강인한 모습이었다.그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담대연의 소식은 알아왔느냐?”“담대연은 여전히 남제에 억류되어 천옥에 갇혀 있습니다.”황제는 다시 활을 들어 두 개의 화살을 시위에 걸었다.한 번의 발사로 과녁을 뚫자, 곁에 있던 신하가 찬사를 보냈다.“폐하, 화살로 만물을
남강.서왕의 어깨는 부상으로 아파왔고, 완부옥은 표면적으로는 화목한 부부처럼 행동하며 그의 곁에 머물렀다. 그러나 막상 군막 안에 들어가면 두 사람은 마치 보이지 않는 벽으로 나뉜 듯 아무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완부옥은 저녁을 지나치게 많이 먹고 배가 부른 상태였다. 갑작스런 복통에 허리를 구부린 그녀를 보자, 서왕은 급히 다가와 그녀를 부축했다.“유화! 군의를 데려오라!”그는 완부옥의 뱃속 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게 아닌지 걱정했다. 하지만 완부옥은 그저 체한 것일 뿐임을 알고 있었다.“필요 없습니다! 괜찮으니까 신경쓰지 마십시오.”내심 불안했던 그녀는 거짓 임신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사용한 벌레가 최근에 제대로 일을 하지 않아 태아의 상태가 점점 불안정해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만약 군의가 와서 진찰을 하면, 모든 게 드러날 위험이 컸다.서왕은 그녀의 상태가 진정되는 것을 보고도 여전히 안심하지 못했다. 그녀를 침대에 앉힌 뒤,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아이는 괜찮은가?”그의 시선은 그녀의 배로 향했다. 완부옥은 워낙 마른 체형이라 배가 불러도 잘 티가 나지 않았다. 게다가 그녀는 느슨한 옷을 입고 그가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도록 했기 때문에 서왕은 그녀의 진짜 상태를 전혀 알지 못했다.일반적인 임산부라면 나타날 만한 불편함이 완부옥에게는 전혀 없었다. 이런 점들이 서왕에게 의심을 품게 했다.그의 눈빛은 점점 차가워졌다.“우리 아이한테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드디어 이 남자가 의심하기 시작한 걸까? 완부옥은 식은땀을 흘리며 속으로 초조해했지만, 겉으로는 여전히 평온한 얼굴을 유지했다.“어머,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아이는 아주 잘 지내고 있어요. 제가 어미인데, 대체 무슨 일이 있겠어요?”그녀는 손가락으로 그의 옷깃을 살짝 건드리며 다정하게 말했다.“마지막 기회를 줄 테니 솔직히 말해라.”그는 그녀를 뚫어지게 응시했다.완부옥은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등에서는 식은땀이 흘러내렸다.평소에는 성격이 부드럽던 이
대하 연합군은 묵성을 함락한 뒤, 곧바로 선성을 향해 진격했다.장수들 중 신중한 성격의 인물이 말했다.“단 장군, 지금까지의 남제 원정이 너무 순조롭습니다.”“선성에서 매복을 준비한 건 아닌지 염려됩니다.”단춘 역시 그럴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지만, 알려진 바에 따르면 동부군은 현재 감주에 주둔 중이었다.그는 전력을 선성으로 보내면서도 일부 병력을 감주로 보내 허위 공격을 감행하고, 동부군을 묶어두려는 계산을 하고 있었다.“만약 선성에 매복이 있다 해도, 우리의 10만 대군에 북부 연합군까지 합하면 수십만 병력인데, 선성 하나를 못 뚫는다는 게 말이 됩니까?”그럼에도 신중한 장수는 여전히 망설였다.“아무리 생각해도, 이번 남제의 전략은 적을 깊이 유인하려는 술책 같습니다.”“단 장군, 처음 계획대로 동부군을 견제하며 진격하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단춘은 인내심이 바닥난 듯 짜증을 드러냈다.“유인이라니? 남제가 그렇게 어리석어 감주를 내놓고 선성에 매복을 펼친다는 말인가?”“만약 남제가 유인책을 쓴다면,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감주로 끌어들이는 것이겠지!”“그리고 한 가지 더 알아둬라. 만약 북연이 먼저 선성에 도달해 옥석비를 차지한다면, 우리는 북연의 손발 노릇을 하게 될 거야!”“북연이 동부를 맡으라고 한 것은 그들이 다 해먹으려는 술책일 뿐이다.”“기다릴 테면 기다려 봐. 하지만 대하는 그렇게 바보처럼 속지 않는다!”선성은 반드시 차지해야 한다!북연 황제 역시 선성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그들은 남하하는 도중 남제 잔병들에게 여러 차례 매복 공격을 받았으나, 모두 격퇴시키며 계속해서 진격했다.남제군이 계속 후퇴하면서, 연합군의 사기는 높아졌다.그러다 어느덧 설날 전야가 되었다.하지만 그날은 평소와 달리 정적이 감돌았다.백성들은 해가 지자마자 일찍 집으로 돌아갔다.설날을 맞이하기보다는 다가오는 전란을 피해 숨으려는 모습이었다.황성.궁궐 안, 후궁들은 한자리에 모여 서로를 의지하며 밤을 지새웠다.그들은 한 손에 작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