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황태후는 진짜로 죽으려던 게 아니라 죽음으로 소욱을 압박하기 위함이었다.그걸 아는 소욱은 태의가 태황태후의 건강에 문제가 없다고 고하자마자 굳은 목소리로 경고했다.“할마마마, 굳이 짐을 이렇게 괴롭히셔야겠습니까.”태황태후는 침상에 누워 슬픔에 잠긴 눈으로 황제를 바라보았다.“폐하를 협박하는 게 아닙니다. 폐하가 안타까워서 그래요!”“조중의 일은 이 늙은이도 들었습니다. 그 아이 때문에 이 지경이되었는데도 그 아이의 진짜 속마음을 모르시는 겁니까?”“그 아이는 작정하고 궁을 떠나려는 겁니다. 폐하께선 그 아이를 마음에 품었고 옆에 두고 싶겠지만 그 아이는 아니에요.”“딴마음을 품은 여자를 어찌 옆에 묶어둔단 말입니까? 폐하, 선황의 원비 기억하십니까? 진심으로 황후를 아끼신다면 황후가 원비의 처지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을 거 아닙니까?”소욱은 순간 등골이 오싹했다.아름답지만 젊은 나이에 목숨을 잃은 원비는 선황이 가장 사랑하던 여인이었다.하지만 그 여인은 선황을 사랑하지 않았다.선황은 그녀를 강제로 궁에 머물게 하고 심지어 황후로 책봉할 생각까지 품었었다.하지만 입궁한지 3년만에 그녀는 싸늘한 주검으로 변해버렸다.원비 이야기는 황궁의 금지어였으나, 황실의 핏줄인 소욱은 그녀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원비는 칼로 자신의 얼굴을 긋고 긴 검을 자신의 배에 찔러넣었다. 그때의 원비는 회임 중이었다.뱃속의 아이와 함께 장렬하게 죽음을 택한 것이다.그는 선황이 그녀의 시체를 품에 안고 장례도 거부하고 이틀이나 슬픔에 잠겨 있던 모습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었다.그 뒤로 선황은 성격이 완전히 변했다.육신은 살아 있었지만 마음은 이미 죽은 상태였다.마음이 없는 사람은 누구에게나 매정했다.소욱의 머릿속에는 장렬히 죽어갔던 원비의 처참한 모습과 슬픔에 울부짖던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다.태황태후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선황께선 아들들에게 제왕은 정이 없어야 한다고 가르쳤지만 그건 본인이 사랑의 아픔을 겪었기 때문입니다.”“이 늙은이도 그때
악몽에서 깬 소욱은 더 이상 잠들고 싶은 욕구가 사라졌다.침상을 내린 그는 옷을 걸치고 곧장 영화궁으로 향했다.영화궁에 도착한 소욱은 바로 침전으로 들어가는 대신, 멍하니 밖에서 방 문을 바라보았다.이 시간이면 황후는 잠들어 있을 것이다.그가 들어가야 할지 주저하던 사이에 최 상궁이 다가왔다.최 상궁은 황후화 황제가 화해했으면 하는 마음에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폐하, 황후께서 말은 그렇게 하셔도 사실은 그냥 폐하께 서운한 일이 있어서예요. 소인이 괜한 소리를 하는 건 아니고, 황후께서는 자존심이 강하신 분이라 폐하와 영비마마께서…”소욱은 이상을 찌푸리며 최 상궁에게 물었다.“황후가 영비 때문에 화가 났단 말이냐?”최 상궁은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그럼요! 황후께서 평소에 폐하를 얼마나 생각하시는데요. 그게 아니라면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물자를 변방까지 운송했겠어요? 폐하께서 출정을 떠나신 동안, 마마께서는 폐하를 그리워하셨습니다. 하지만 영비마마가 돌아오시고 황후마마는 갑자기 돌변하셨죠. 이혼을 제기한 것도 그 시점이고요.”“만약 폐하께서 정말 과거의 일을 신경 쓰신다면 지금까지 기다렸다가 얘기를 꺼냈을 리가 없지요. 폐하, 소인의 말은 모두 사실입니다. 폐하께서 영비마마의 침전으로 가신 그날 밤, 황후마마도 그곳에 가셨습니다. 돌아오신 후, 표정이 안 좋으셨지요.”소욱은 미간을 확 찌푸렸다.그가 장락궁에 머문 그날 밤이라면 흑포가 탈옥한 날이었다.아마 흑포 때문에 그를 찾아갔을 것이다.하지만 최 상궁의 말도 일리가 있었기에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궁으로 돌아오기 전, 남부에 있을 때까지만 해도 황후는 멀쩡했다.그녀가 돌변한 건 궁으로 돌아온 후, 영비가 한때 회임했었다는 소식을 들은 후였다.그날 서재에서 그는 영비를 시켜 자신과 영비가 합방한 적 없다는 사실을 해명하게 했다.지금 생각해 보면 아주 조촐한 설명이 아닐 수 없었다.어쩌면 황후는 어릴 때부터 그와 함께 자란 영비가 그와 짜고 자신을 속이는 거라고 오해했을
소욱은 황후를 꽉 안고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황후, 짐은 너를 속이지 않았다. 영비의 아이는 짐의 것이 아니었어. 증거를 찾았다. 네가 못 믿을까 봐. 이제 짐은 드디어 내 결백을 증명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 짐을 떠나지 말거라.”말을 마친 그는 떨리는 손으로 궁인들에게서 확보한 증거를 그녀에게 내밀었다.봉구안은 멍하니 있다가 그의 손을 밀쳐냈고, 그 순간 종이에 적힌 진술서들이 바닥으로 떨어졌다.가을바람이 창문 안으로 들어와 종이가 흩날렸다.소욱은 급급히 진술서들을 줍다가 표정이 굳었다.그 순간 그는 갑자기 정신이 들어 진술서들을 버리고 눈앞의 사람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는 그의 눈동자가 빨갛게 붉어졌다.그는 여전히 갈린 소리로 그녀에게 물었다.“짐의 결백 여부를…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이냐.”봉구안은 진술서들을 바라보며 그에게 말했다.“굳이 이런 일을 하실 필요는 없었습니다. 저는 한 번도 폐하와 영비 때문에 떠난다고 말한 적 없습니다.”지금까지도 소욱은 그녀가 왜 떠나려 하는지 이유를 알지 못했다.소욱의 눈가에 그림자가 드리웠다.“알고 있었다. 네가 짐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상대가 짐이 아닌 단회욱이었더라면 넌 절대 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을 테지.”“짐은 영비와 나 사이에 아이가 있었다는 얘기를 듣고 초조해졌었다. 짐이 진짜로 그 아이를 품었고 그 일 때문에 네가 떠날까 봐.”“너에게 그 일을 숨길까 생각도 했었다. 아니면 진실을 다 조사한 후에 너에게 얘기할 생각이었지.”“하지만 진실이 어떻든, 너에게 솔직히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드디어 그 증거를 찾았는데… 너는 전혀 동요가 없구나.”그는 그제야 그들 사이에 이미 미래가 없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너무 급한 마음에 최 상궁의 헛소리를 그대로 믿었던 것이다.소욱은 가까이에 있지만 닿을 수 없는 여인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그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었지만 침묵이 곧 답이었다.그녀는 진실이 어떻든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한참이 지난 후,
황제는 그날 이후로 병을 앓았다.태의는 고뿔에 걸렸다고 말했으나 소욱은 정무를 하루도 빠지지 않았다.그렇게 12월이 되던 어느 날, 이혼 교지가 드디어 내려졌다.연상은 기쁨에 겨워 봉구안에게 말했다.“마마, 드디어 떠나실 수 있겠네요!”그녀는 진심으로 황후를 위해 기뻐했다.전에 황제의 행실을 보고 황후가 평생 이 궁에 구금을 당하는 건 아닐까 걱정했던 그녀였다.다행히도 황제는 결국 생각을 바꿔 황후를 놓아주기로 한 것이다.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은 폐후가 아닌 이혼이라는 점이었다.역사를 통틀어 황제와 이혼한 황후는 없었다.연상과는 달리, 최 상궁은 구슬피 울었다.“마마, 어찌 이리 고집을 부리시는 겁니까! 왜 굳이 궁을 떠나시려는 거예요!”최 상궁은 복도에 주저앉아 오열했다.지나가던 궁인들이 그녀를 부축했지만 그녀는 듣지도 않았다.내전 안.봉구안은 약간 굳은 표정으로 교지를 빤히 바라보았다.평화로운 이별, 그녀가 바라던 상책이었다.이렇게 되면 봉씨 가문과 연상을 비롯한 궁인들에게는 아무런 영향이 없을 것이다.소욱과 그녀는 이제 아무 사이라도 아니라는 것을 만 천하가 알게 될 것이고 이는 황후의 실종보다는 귀찮은 일들을 덜었다.하지만 그녀의 마음은 고요하기만 했다. 어쩌면 그녀는 마음을 억누르는데 도가 텄을지도 모른다.봉구안의 짐은 많지 않아서 보따리 하나로 해결되었다.일각이 지난 후, 그녀는 출궁 준비를 마치고 교지를 들고 영화궁을 나왔다.영화궁 밖, 진한길이 굳은 표정을 하고 대문 앞에 서 있었다.황후를 본 그는 착잡한 표정으로 그녀를 빤히 바라보다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소인 감히, 마마께서 생각을 돌리시기를… 청합니다.”이는 그가 처음으로 황제의 허락을 받지 않고 청한 일이었다.봉구안은 담담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내 길은 전방에 있다.”그러니 뒤돌아볼 수가 없었다.잠깐의 동요는 있었지만 그걸 위해 평생을 헌신할 자신도 없었다.진한길은 그녀의 결연한 표정을 바라보며 갈린 목소리로 말했다.“
소욱은 마치 긴 잠에서 깨어난 모습이었다.그의 옷매무새는 약간 흐트러져 있었고 머리도 아무렇지 않게 하나로 묶은 모습이었다.그의 입술은 푸른빛을 띄고 있었는데 마치 큰 병을 앓고 일어난 사람처럼 생기 한점 없었다.유사양은 그의 옆에서 조마조마한 얼굴로 그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반면 진한길은 침착하게 황제를 위해 화살을 건넸다.소욱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노려보며 다시 활시위를 당겼다.“폐하, 아니되옵니다!”뭇 비빈들이 봉구안의 앞을 막아서려 했다.죽음을 두려워하는 녕비는 처음에 나설 생각이 없었지만 몰려오는 다른 비빈들에 의해 등 떠밀려 앞으로 나가게 되었다.그녀는 짜증이 몰려왔다.사실 가장 짜증 나는 사람은 황제였다.“폐하! 봉장미를 다치게 하면 안 됩니다!”녕비가 목을 놓아 소리질렀다.모용선도 평소의 온화한 목소리 대신, 목에 힘을 주어 소리쳤다.“군주의 약속은 천금보다 귀하다고 했습니다! 폐하, 이혼 교지를 내리신 마당에 지금 약속을 번복하시려는 겁니까?”가빈은 소욱의 앞에 무릎을 꿇고 큰절을 올렸다.“폐하, 신첩이 이렇게 빌게요! 황후마마를 죽이시면 안 됩니다!”누각 위, 활시위를 당기고 있는 소욱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그는 시뻘겋게 충혈된 눈으로 봉구안을 바라보았다.슉!화살이 날아와 그녀의 등 뒤로 뻗은 길에 꽂혔다.황제는 마치 신들린 것처럼 다시 화살을 뽑아들었다.진한길은 황제가 황후를 다치게 하려는 것이 아님을 알기에 평온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이건 어쩌면 황후를 대신해 자신이 무정한 군주라는 것을 모두에게 증명하기 위한 의식일 수도 있었다.또 어쩌면 그만의 특별한 작별 방식일지도 모른다.봉구안도 그걸 잘 알고 있었기에 두려움 없는 얼굴로 그를 향해 작별 예를 행했다.“소인, 남제의 태평성세와… 폐하의 안녕을 기원합니다.”말을 마친 그는 곧장 앞을 향해 걸어갔다.넓은 복도는 백보도 채 가지 않아 끝이 났다.왔던 길을 다시 돌아가고 있지만 마음은 올 때와 사뭇 달랐다.누각 위.소욱은 공터
봉 부인은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며 물었다.“너… 뭐라고 했니? 집에 안 가? 그럼 어딜 가려고!”봉 대인은 치미는 화를 못 이겨 발을 구르며 소리쳤다.“가긴 어딜 가겠어? 거기에 돌아가려는 거겠지!”거기란 맹씨 가문을 가리키는 말이었다.봉구안이 담담히 말했다.“천하는 크고 하늘과 땅을 집으로 간주하며 살겠습니다. 예전처럼 저 같은 딸은 없다고 생각해 주세요.”말을 마치 그녀는 바로 등을 돌렸다.그렇게 단호하고 결연할 수가 없었다.등 뒤에서 봉 대인의 욕설과 봉 부인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이런 불효녀 같으니라고! 좋아! 어디 나가서 죽든 상관 안 하마!”“나리, 그만하세요!”“뭘 그만해! 일국의 황후 자리를 내치고 떠돌이 생활을 하겠다잖아! 내가 저걸 애당초 물에 빠뜨려 죽였어야 했어!”심장이 안 좋은 봉 대인은 가슴을 붙잡고 통탄했다.“나리! 나리!”봉 부인은 잽싸게 약을 꺼내 그의 입에 넣어주었다.봉 대인은 떠나는 딸의 뒷모습을 뚫어져라 노려보았지만, 그녀는 고개 한번 돌리지 않았다.‘불효막심한 것 같으니라고!’황궁 십리 밖.누군가가 봉구안의 앞을 막았다.그녀를 따르던 오백이 검을 빼들었으나, 상대는 공손히 그녀에게 예를 행했다.“봉 낭자, 장공주께서 한번 뵙자고 하십니다.”장공주는 봉구안을 송별하기 위해 정자에 술과 안주를 준비했다.황후를 보내는 건 아쉽지만 그래도 황후가 드디어 자유를 얻게 된다는 것에 기뻤다.둘은 정자에 마주앉았고 나머지 인원들은 밖에서 대기했다.“소장군, 한잔 하시게.”장공주는 술 한잔을 따라 봉구안에게 건넸다.봉구안은 습관처럼 술잔을 가져가서 코끝에 대고 향을 맡았다.장공주는 준비한 가야금을 꺼내며 그녀에게 말했다.“내 소장군을 위해 한곡 연주하겠소.”봉구안은 그녀의 손을 잡으며 고개를 저었다.“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저 먼 길을 떠나야 합니다.”장공주는 아쉬운 표정으로 그녀에게 물었다.“어딜 이리 급하게 가시오? 혹여 내 도움이 필요하진 않소?”자리에서 일어선 봉구
소욱은 문 앞에 서서 내전으로 들어가지 않고 있었다.마치, 저 문을 열지 않으면 그의 황후가 여전히 안에 있다고 위로를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연상의 소리를 들은 그가 갈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너마저도 버리고 갔단 말이냐.”연상은 목소리에 힘이 없는 그를 보고 가슴이 쓰렸다.사랑의 아픔이 이리도 지독하다니.소욱이 영화궁에서 하루를 보내는 사이, 서재의 상소문은 쌓여만 갔다.그 일을 전해들은 영비는 직접 영화궁으로 찾아왔다.하지만 황제는 창가에 서서 멍하니 마당의 나무만 바라보고 있었다.궁인들 말로는 그는 이미 이곳에 하루를 서 있었다고 한다.이제 저녁식사를 할 시간인데도 그는 아무도 방해하지 못하게 명을 내렸다.연상은 영비가 들어가는 것을 보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그녀는 영비가 어서 황제를 모시고 돌아갔으면 하는 마음이었다.황제가 여기 있으니 모든 게 불편했다.소욱의 옆으로 다가가 조심스레 말했다.“폐하, 마음이 많이 안 좋으신 것 압니다. 하지만 이제 놓아주기로 하셨으니 마음을 다잡아야지요.”“황후는 이미 떠났는데 이리 옥체를 돌보지 않으신다면…”“네 아이, 짐의 아이가 아니다.”그는 바깥을 바라보며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영비의 눈가에 당황함이 스치더니 곧이어 무릎을 꿇었다.그녀는 무서웠던 그날이 떠올랐는지 호흡마저 거칠어졌다.“폐하께서 출정을 나가시기 전날 밤에 많이 취하신 상태로 자진궁에 돌아가셨습니다. 신첩은 폐하를 밤새 보살폈고요.”“날이 밝은 후 신첩은 자진궁을 나가다가… 어떤 자에게 나쁜 일을 당했습니다.”소욱은 과정을 따지지도,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지도 않고 침묵만 지켰다.영비는 고개를 들고 눈물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그자는 미혼향을 사용했습니다. 신첩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옷매무새가 흐트러진 채로 냉궁에 누워 있었지요.”“나중에 그자를 찾아서 제 손으로 죽여버렸습니다. 하지만 이미 일어난 일을 되돌릴 수는 없었지요.”“신첩 역시 여인입니다. 결백을 지키고 싶었어요. 그래서 아이
10일 후, 남제의 변방.오백은 싸늘한 표정을 짓고 있는 봉구안에게 조심스레 말했다.“소장군, 지금 돌아가도 늦지 않습니다.”그는 봉구안이 냉혈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오히려 그녀는 정과 의리를 굉장히 중시하는 사람이었다.돌아갈 집이 있는데 굳이 방랑할 이유도 없었다.아무도 소장군의 고초를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는 이해할 수 있었다.흑포의 말처럼 이미 천용회는 이미 그녀를 오랜 시간 주목하고 있었다. 그들은 언젠가부터 이미 가면 아래 맹 소장군의 진짜 얼굴을 알고 있었고 지금의 황후가 바로 맹성주라는 사실마저 알고 있었다.최근의 조사에 따르면 천용회는 이미 서서히 살아나고 있었고 이제 곧 그들의 교주가 출관할 거라고 했다.맹성주를 눈엣가시로 여기는 놈들이고 소환이라는 신분은 과거 천용회를 쑥대밭으로 만든 인물이니 아마 그쪽에서 알게 되는 건 시간문제였다.나중에 천용회가 복수를 한답시고 달려든다면 봉구안 주변 인물들도 화를 입을 가능성이 컸다.봉구안이 집으로 돌아가지 않는 이유도 봉가의 사람들을 지키기 위함이었다.황제에게도 그랬다. 매정하게 떠났지만 그건 그녀의 진심이 아니었다.사실 그녀가 진심으로 떠나고 싶었다면 황궁의 시위들은 그녀를 막을 능력이 없었다. 굳이 만 천하에 황제와 황후가 감정싸움으로 이혼했다는 사실을 알릴 필요가 없었다.오백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봉구안은 항상 겉으로는 하나만 보여주고 뒤에서 묵묵히 열을 하는 사람이었다.그녀와 오랜 시간 함께한 그마저도 그녀의 진짜 속마음을 다 헤아릴 수는 없었다.그가 보기에 봉씨 가문과 절연하고 황제와 그 난리를 피운 수는 너무도 과했다.하지만 그녀는 지키고 싶은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목숨마저 내놓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단 한번이라도 그는 소장군이 무거운 짐을 내려놓기를 바랐다.오백이 말했다.“폐하께 천용회가 소장군을 제거하려 한다는 사실만 설명하면 폐하께서 지켜주실 겁니다. 그분이 천용회를 소탕하실 텐데 왜 굳이 모든 책임을 혼자서 짊어지시려는 겁니까?”봉구안
현비의 눈엔 짙은 허망함이 어려 있었다."폐하, 폐하께서 단 한 번이라도 신첩을 이해하려 하셨더라면 아셨을 겁니다. 신첩은 본래 약리학에 정통했습니다.”“영비마마께 쓴 독은 신첩이 직접 조제한 것입니다. 하지만 의원이 제 몸을 고치지 못하듯, 신첩 또한 제 독을 온전히 해독하지는 못했습니다. 그저 몸속의 독성을 억누를 수 있을 뿐, 근본적인 치료는 불가능했습니다."더 할 말은 없다는 듯, 현비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소욱은 손짓으로 진한길에게 몸을 제압한 손을 풀라고 지시했다.양팔이 풀리자, 현비는 앞으로 푹 고꾸라지듯 무릎을 꿇고 이마를 바닥에 박았다. 그녀는 머리를 조아리며 간청했다."폐하, 제발 제 가족만은… 용서해주시옵소서."곁에서 지켜보던 진한길은 표정 없이 서 있었지만 마음 한켠에 얕은 동정이 스쳤다. 현비에게 분명 죄는 있었지만, 모든 시작은 모용란의 악행이었기 때문이었다.그러나 소욱의 시선은 여전히 냉담했고, 목소리는 단호했다."현비는 황제인 나를 속이고 궁중의 법도를 어겼다. 천형에 가두고 추후 처분을 기다리게 하라."현비는 이 결과를 받아들였다. 오히려 마음 한켠으론 안도했다. 그 죗값이 가족에게 미치지 않았으니 말이다.궁에서 끌려나가는 길에 현비는 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내뱉었다."하늘이… 이렇게 넓었구나."수년간 좁디좁은 궁궐 안에 갇혀 살며 늘 발밑만 바라봤던 그녀. 하늘을 올려다보는 법도, 마음을 여는 법도 잊은 채 살아왔었다. 그렇게 그녀는 스스로를 가두었고, 걸을수록 길은 좁아졌다.……현비가 다시 천형에 갇혔다는 소식은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궁 안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았지만, 정작 무슨 죄로 잡혀간 건지는 알지 못하였다.현비의 궁녀인 동하는 자녕궁 앞에 무릎을 꿇고 울며 태후께 간청했다.태후는 전각 안에서 목탁을 두드리며 마음을 가라앉히고 있었다.곁에서 시중들던 계 상궁은 태후가 독경을 마친 뒤 몸을 굽혀 조심스럽게 말했다."태후 마마, 동하 저 아이가 벌써 두 시진째 무릎 꿇고
현비는 텅 빈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며 중얼거렸다."영비마마와 폐하께서는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란 사이였지요. 그 시절, 마마는 후궁 중에서도 가장 총애를 받았습니다. 제 아버지는 제가 영비와 닮았다는 이유로 서둘러 저를 궁에 들여보내셨죠.”“궁의 모든 이들은 영비마마가 온화하고 현명하다고 칭송했었습니다. 저 역시 처음 입궁했을 땐 그렇게 믿었고요. 하지만 곧 마마의 진면목을 알게 되었습니다.”“겉으로는 자매처럼 지내며 장신구도 건네주고, 심지어 폐하를 뵐 때도 저를 데리고 가셨었죠."소욱은 그런 기억이 없었다. 그가 모용란을 후궁으로 맞이한 것도 정이 아닌 우정 때문이었다. 즉위 초창기 정사에 바빠 후궁을 찾을 여유도 없었다. 모용란이 어전 출입이 잦았던 것은 기억했지만, 그 자리에 현비가 있었다는 기억은 없었다.현비는 그의 표정을 보고, 그가 기억하지 못한다는 걸 알아챘다."폐하께서는 단 한 번도 저를 제대로 바라본 적이 없으셨습니다. 하지만 영비마마는 다르셨죠. 간택 당시 폐하께서 제 시를 칭찬하신 그 한마디가 마마에게는 큰 상처였습니다.”“폐하께는 그저 흘려 넘긴 말이었겠지만 저에겐 큰 기쁨이었고, 영비마마에겐 시기와 질투의 씨앗이 되었습니다."소욱은 더는 후궁들 사이의 질투와 다툼을 듣고 싶지 않았다. 그는 그런 다툼을 혐오했지만, 그것을 바꿀 힘은 없었다."모용란이 어떻게 너에게 독을 먹였느냐. 왜 그때 나에게 말하지 않았느냐."현비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마치 허탈한 이야기를 들은 듯 눈에 물기가 어렸다."그때 제가 폐하께 말씀드렸다면 과연 믿어주셨을까요? 폐하께서 영비마마를 벌하셨을까요?"소욱이 입을 열기도 전에, 그녀가 먼저 단언하듯 말했다."아니요. 폐하께서는 안 그러셨을 겁니다."그 말은 속삭임이 아니라, 분노 어린 한숨에 가까웠다. 그녀의 시선엔 실망과 원망이 가득했다."폐하, 저는 한 번도 폐하께서 현명한 군주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황후 마마께서 나타난 후에야 폐하께서는 조금씩 달라지셨습니다
이튿날 이른 아침, 소욱은 황궁으로 복귀했다.아침 조회 자리에서 신료들이 약쟁이 사건을 거론했다.“폐하, 각지에서 과도한 억제 조치가 이어지고 있사온데 약쟁이들이 그 틈을 타 소란을 일으켜 억울한 판결이 속출하고 있습니다. 무고한 지방 관원들이 연루되어 피해를 입고 있으니 부디 폐하께서 신중히 살펴주시옵소서.”소욱도 그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약쟁이들이 의도적으로 관료들의 집에 숨어들어 수사 대상이 되도록 만들고 사건을 키워 혼란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면 자신들은 혼란 속에 숨어 빠져나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하지만 그와 얽힌 관료들이 모두 무죄라고는 단정할 수 없었다. 결국 가장 확실한 방법은 대신들을 파견해 진상을 직접 조사하는 것이었다.조회가 끝난 후 소욱은 곧장 현흥궁으로 향했다.그가 입은 용포는 황제의 위엄을 더욱 드러냈고 냉랭한 분위기는 더욱 그를 권위 있게 만들었다.오랜만에 성상의 얼굴을 뵙는 궁인들은 일제히 무릎을 꿇고 외쳤다.“황제 폐하를 뵙습니다!”궁 안.궁녀 동하가 다급히 안으로 뛰어들었다.“마마! 마마! 폐하께서 오셨습니다!”현비는 탕약을 마시고 있던 중이었다. 얼굴은 병색이 완연했고 평소의 생기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뜻밖의 방문에 놀란 그녀는 눈빛에 당혹을 숨기지 못했다.폐하께서 왜 이곳에...그녀는 급히 약그릇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황제를 맞을 준비를 했다.소욱의 등장과 함께 전각 안이 시끄러워졌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위엄 넘치는 황제가 천천히 전각 안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바라보았다.그녀는 가볍게 입술을 다문 채 예를 올렸다.“신첩,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그간 강녕하셨습니까.”소욱은 말없이 자리에 앉았다. 잘생긴 얼굴 위엔 차가운 무표정이 드리워 있었다.그는 손짓 한 번으로 전각 안의 궁녀들을 물리고 현비만 남겨두었다.현비는 당황한 얼굴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폐하…”“내가 묻는 말엔 진실만을 말해야할 것이다.”소욱의 목소리는 단호했고 얼굴엔 엄중함이 어렸다.현비는 속내
황궁.현흥궁.현비는 병이 도지자 오래 지나지 않아 정신을 잃었다.그녀는 시녀 동하가 태후를 찾아가 홍련초를 구하려 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마마...”찰싹!갑작스레 손이 날아와, 동하의 뺨을 세차게 후려쳤다.당황한 동하는 그 자리에 굳어섰다.무엇이 잘못된 건지, 어째서 현비가 이토록 격앙된 건지 알 수 없었다.현비는 힘겹게 가슴을 짚으며, 쉰 목소리로 말했다.“나가.”동하는 현비의 기분이 몹시 나쁜가 보다 여기고 조용히 물러나려던 찰나, 누군가 궁 안으로 들어섰다.“황제 폐하의 명이다. 염 신의를 모셔와 현비마마의 병을 진찰하게 하라!”그 순간 현비의 얼굴빛이 확 변했다.겉으로는 태연한 듯했지만, 장막 너머의 목소리에 단호하게 응했다.“폐를 끼쳐 송구하네. 폐하께는 괜찮아졌다 전해주게.”그러나 염 신의는 말을 자르며 곧장 앞으로 나섰다.“마마, 폐하께서 직접 전하셨습니다. 반드시 병을 완쾌하라 하셨습니다.”그는 허락도 받지 않은 채 장막 앞으로 다가가 진맥을 청했다.“손을 내어주시옵소서. 진맥을 해야 합니다.”한동안 장막 안은 고요했다.잠시 후, 하얀 손 하나가 조심스레 틈 사이로 뻗어 나왔다.동하는 재빨리 비단 손수건을 꺼내 손목 위에 덮었다.여인의 살이 남성에게 닿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궁녀들은 눈치도 없이 염 신의에게 의자 하나 내주지 않았다.그는 묵묵히 허리를 굽혀 그대로 맥을 짚었다.현비는 말없이 입술을 꼭 다물고 있었다.잠시 후 염 신의는 맥에서 손을 거두며 말했다.“마마, 피 한 방울이 필요합니다.”그는 말하면서 옆에 있던 동하에게 바늘과 작은 사기그릇을 건넸다.동하는 조심스레 다가가 속삭였다.“마마, 소녀가 하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현비는 익숙한 듯 손을 내밀며 다정히 말했다.“괜찮아. 어서 하렴.”동하는 피를 모아 염신의에게 전해주었다.염 신의는 약상자를 열어 조그만 병 하나를 꺼냈다.그 안의 약가루를 그릇 위에 조심스레 부었다.그의 손길은 침착했고 집중력 넘쳤
모용가에 대한 조사는 여전히 제자리걸음이었다.소욱은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모용가를 은밀히 조사하라고 했을 때, 별다른 이상이 없다고 들었느냐.”“갑자기 왜 그 얘길 꺼낸 것이냐? 혹시…”그는 말을 끝맺지 않았지만, 봉구안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그녀는 모용가가 약쟁이 사건과 얽혀 있을 가능성을 의심하고 있었다.봉구안은 단정한 목소리로 답했다.“사형이 약쟁이 사건을 조사하기 시작한 시점은 폐하께서 즉위하신 이후입니다.”“그 말은 곧 선황제께서 돌아가시기 전부터 이미 약쟁이들이 활동하고 있었다는 뜻이지요.”“그 시점을 고려하면, 선황제께서 무언가 눈치채셨을 가능성도 있습니다.”“소첩은 그래서 모용가가 이 사건과 관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다만 어디까지나 제 추측일 뿐, 아직 뚜렷한 증거는 없습니다.”그녀의 말에 담긴 확신은 쉽게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소욱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그렇다면 지금 네 말은… 모용가를 억지로 몰아세우겠다는 것이냐.”농담조였지만, 소욱 역시 마음속으로 봉구안의 의심을 부정하지 못하고 있었다.선황제의 유언은 분명 모용가를 경계하고 있었다.하지만 지금껏 감찰을 맡은 자들이 어떤 흔적도 찾지 못했다는 건, 그들이 그만큼 은밀하게 움직였다는 뜻이었다.그런 점에서 모용가의 행적은 약쟁이들의 수법과 닮아 있었다.그 생각에 이르자 소욱의 눈빛에 서늘한 기운이 스쳤다.“사람을 더 붙이도록 하마. 이번엔 제대로 조사하게 하자.”그날 밤 소욱은 평소처럼 자유각에 머물렀다.궁 안의 일은 이미 손을 놓아도 될 만큼 정돈되어 있었고, 후궁의 일은 태후가 맡아 관리하고 있었다.빈들 또한 조용한 편이었으나, 단 하나. 약쟁이 사건만큼은 태후의 골칫거리였다.태후는 후궁들에게 자중할 것을 명하며, 그 본보기로 현비를 들었다.그날 밤 현비의 시녀 동하가 태후를 찾아와 다급히 울부짖었다.“태후마마, 제발 저희 마마를 살려주십시오!”이미 잠자리에 들었던 태후는 몸을 일으키며
봉구안은 자신이 직접 그려둔 지도를 꺼내어 소욱에게 펼쳐 보였다.“황성을 총타로 삼아 사방에 명령을 내리는 것. 이것이 바로 그들의 지령 경로입니다.”“그들의 평소 수법을 보면, 지금처럼 조정과 무림이 손잡고 그들을 압박하는 상황에서 가장 먼저 할 일은 모든 연락선을 끊고 총타부터 지키는 것이겠지요.”“그러기 위해서는 내부 인물들을 정리하는 게 먼저입니다.”소욱이 그녀의 말을 받아 이었다.“그렇다면 우리가 그 틈을 노려 분타부터 하나씩 무너뜨릴 수 있다는 뜻이로군.”봉구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그녀는 지도 위 몇 군데를 손가락으로 짚었다.“여기 표시된 곳들이 현재 저희가 확인한 그들의 은신처입니다.”“대부분 외진 산골이나 황량한 지역에 자리 잡고 있어요. 죽산진 근처 산속 동굴처럼 말이지요.”“폐하께서도 기억하시겠지요. 예전에 황성 도관 아래에서 많은 약쟁이들을 발견했을 때를요.”소욱은 그 일을 뚜렷이 기억하고 있었다.그때 봉구안은 약쟁이에게 상처를 입었고, 그가 그녀를 등에 업고 간신히 빠져나왔었다.봉구안의 눈빛이 차갑게 식어갔다.“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 도관 자체가 약쟁이의 은신처였을지도 몰라요.”“그리고 기억하시겠지요. 천룡회가 황성을 공격했을 때 약쟁이 대군을 풀었는데, 그 시각이 바로 늦은 밤이었어요.”소욱은 그녀가 전하려는 의미를 곧장 알아차렸다.그는 지도 위에 찍힌 지점들을 살펴보았다.“은신처의 위치와 약쟁이들의 활동 시각을 보면, 그 자들은 어둠 속 환경에 익숙한 존재들이겠구나.”봉구안은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어둡고 외진 곳이야말로 약쟁이들의 은신처로는 가장 알맞은 곳일 거예요.”“저희가 죽산진에서 약쟁이 소굴을 조사했을 때도, 산속 동굴 안은 손을 뻗어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만큼 깜깜했지요.”“강주에서 발견한 은신처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우연이라고 보기엔 너무 겹치는 것들이 많아요.”소욱은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그렇다면… 이 사실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겠느냐?”봉구안은 냉정한 눈빛
봉구안은 놀란 듯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황성에도 홍련초가 자란다고요?"소욱은 곧바로 진지하게 대답했다."누가 심었는지, 얼마나 되는지는 아직 모른다. 서쪽 교외에 사람을 보냈으니 곧 소식이 올 거야."봉구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에 잠겼다.소욱은 그녀의 그릇에 반찬을 더 담으며 말했다."일단 밥부터 먹으렴. 요즘 부쩍 더욱 말라 보이는구나. 아이를 품은 몸이라면 더 잘 챙겨야 하지."하지만 봉구안의 눈빛은 여전히 다른 데 머물러 있었다."혹시… 열무신의 소식은 아직도 없는거죠?"소욱은 묵묵히 고개를 저었다. 그는 서둘러 그녀가 더 걱정하지 않도록 화제를 돌렸다.소탁을 황성으로 데려온 뒤 그는 곧장 태의원을 불러 진찰을 받게 했다. 하지만 상처가 눈에 있는 탓에 회복이 쉽지 않았고 지금은 사실상 눈이 먼 사람처럼 지내고 있었다. 혼자 사는 데 어려움이 컸지만, 하녀를 붙여 주겠다는 제안도 번번이 거절했다.봉구안은 차분하게 물었다."폐태자께서는 지금 어디에 머물고 있나요?""마땅한 집을 하나 찾아 그곳에 머물게 하였다. 혹시나 있을 위험을 대비해 그림자 호위도 붙여 두었다."그가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은 단순한 걱정 때문만은 아니었다. 잠시 뜸을 들이던 소욱이 다시 입을 열었다."예전에 널 시중들던 연상을 혹시 기억하느냐?"봉구안은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되물었다."연상… 기억하죠. 그런데 갑자기 그건 왜 여쭤 보시는 거죠?"소욱은 다소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요 며칠 사이 그 아이가 소탁을 여러 번 찾아갔다는구나. 꽤 신경을 쓰는 듯했다."봉구안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그게 그렇게 문제될 일인가요?""그 아이는 아직 시집을 안 가지 않았느냐."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봉구안은 곧장 말을 끊으며 단호하게 말했다."제가 알기론 연상은 궁을 떠난 뒤 곧장 진가 저택으로 돌아갔습니다. 혼자서 글씨와 그림으로 생계를 꾸려 왔고요. 살림은 넉넉지 않지만 나름대로 삶의 방향은 확실합니다. 진가를 다시 일으켜 세우겠다는 뜻을
녕비는 자기가 무슨 심각한 말을 했는지도 모른 채 해맑게 웃으며 현비를 바라보았다.“언니, 우리 자매처럼 지냈잖아요. 그래서 말인데 남한테 덜미 잡히기 전에 차라리 폐하께 먼저 말씀드리는 게 낫지 않을까요? 어차피 결백한 사람은 당당해도 되는 법이지 않겠어요?”“홍련초는 그 자체로는 죄가 없는 약초예요. 죄가 있는 건 그걸로 독을 만든 자들이죠.”“언니처럼 착한 분이 약쟁이랑 엮일 리가 없잖아요, 그쵸?”그녀의 웃음은 현비의 눈에 유난히 싸늘하고 따갑게 느껴졌다.현비는 얼굴이 희미하게 질려가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녕비, 네가 의심하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해.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맹세컨대 내가 마시는 약은 약쟁이 사건과는 정말 아무 관련도 없어.”녕비는 굳이 대꾸하지 않은 채 조용히 말을 이었다.“제가 언니를 믿느냐 마느냐는 사실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중요한 건 폐하께서 어떻게 생각하시느냐죠.”현비는 한동안 침묵하다가 깊은 숨을 고르고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맞는 말이야.”“자, 할 말은 다 했으니까 전 이만 자녕궁으로 가볼게요. 태후마마께 기도드릴 시간이네요. 굳이 배웅하지 않으셔도 돼요.”녕비가 자리를 뜬 뒤, 곁에 있던 시녀 동하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마마, 녕비 마마 말씀이 틀린 것도 아니에요. 폐하께서 약쟁이 사건을 철저히 조사하고 계시다 하니, 홍련초가 얽히는 일은 아무래도 너무 커요.”현비의 눈빛에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그녀는 그저 이 궁 안에서 살아남고 싶었을 뿐이었다.그녀는 그 어떤 죄도 짓지 않았다. 정말로 아무 잘못도 없었다.“…종이랑 붓을 준비하거라. 폐하를 뵙기 전에 아버지께 먼저 편지를 써야겠다.”“예, 마마.”……그날 밤.자유각.소욱은 이날 밤도 자유각에 머물며 봉구안과 시간을 보내려 했다.그러나 대부분의 시간은 상소문을 검토하는 데 쓰였고 그녀 곁에 있어도 여유를 누릴 틈은 많지 않았다.그는 문서를 펼쳐든 채 농담처럼 말했다.“황제가 된 건, 아마 전생의 업보였던 모양
그해 봉구안은 스스로 천지설산에 올라 자욱화를 채취하려다 목숨을 잃을 뻔하였다. 그때 그녀를 구해준 이가 바로 염 신의였다.그 후 인연이 닿아 둘은 다시 만나게 되었고, 그 무렵 염 신의는 약쟁이 독의 해독제를 연구하고 있었다.이에 봉구안은 그를 황성으로 데려왔다.그는 예전에도 한 차례 해독제를 만들어낸 바 있었으나, 중독자들에게 써보았을 때 뚜렷한 효과는 없었다.하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진정한 해독제가 완성된 것이다.분명 기쁜 소식이었다.“염 신의 말로는, 홍련초 덕분에 그동안 풀지 못했던 원리를 비로소 깨달았다고 합니다.”“이미 중독자들에게 해독제를 복용시켰고 모두 회복되었습니다. 장순의 어머니까지도요.”장순은 아직 어린 유생이었으나, 과거 제후국들이 남제를 포위했을 당시 봉구안이 특별히 데려갔던 소년이었다.그는 적국을 향한 설전에서 통쾌한 활약을 펼친 바 있었다.그의 어머니는 오래전 약쟁이 독에 중독되어, 살아 있으되 정신이 나간 채 살아온 사람이었다.해독제가 생겼다는 건 의심할 여지 없이 경사였다.허나 좋은 일과 화는 언제나 함께 오는 법. 봉구안이 눈짓 하나만 보내도 소욱은 그녀의 속마음을 단박에 알아차렸다.그녀가 입을 떼기도 전, 소욱은 그녀의 팔을 가볍게 두드리며 오백에게 명을 내렸다.“사람을 붙여 염 신의를 철저히 보호하라. 해독제 이야기는 절대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하라.”오백은 곧장 명을 따랐다.밖에서 듣고 있던 진한길은 내심 고개를 갸웃거렸다.‘폐하께서는 왜 이렇게 오백을 쓰시는 걸까?’오백이 물러난 뒤, 소욱은 봉구안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해독제가 완성되었으니 약쟁이 독이 아무리 퍼져도 더는 위협이 되지 못할 것이다.”봉구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해독제는 결정적인 열쇠예요. 폐하, 문득 떠올랐는데… 담대연도 약쟁이 독에 중독된 사람이었죠?”소욱은 손을 들어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그 자에게도 해독제를 줄 것이다. 이제는 마음 놓고 쉴 수 있겠지?”“네.”봉구안도 지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