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용선은 간절함을 담아 말했다.“소첩의 시녀 유서는… 애초에 저의 죄를 뒤집어쓰고 신형사로 끌려갔습니다.”“오늘 여기에 온 것은 저의 죄를 자백하고… 유서를 풀어주십사 간청드리러 온 것입니다.”봉구안이 어두운 표정으로 물었다.“죄가 있다면 벌을 받아야 한다는 이치 정도는 알고 있겠지?”모용선은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알고 있습니다. 소첩은 처벌을 달게 받겠습니다. 하지만 유서는 무고한 아이예요.”“소첩은 입궁한 이래 줄곧 집념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집념을 내려놓고 저 자신을 구하려 합니다.”봉구안은 담담히 말했다.“네가 원하는대로 해주겠다.”모용선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고 큰 절을 행했다.“황후마마, 소첩은 마마를 쓰러뜨리고 폐하의 총애를 독차지하려고 여러 번 시도했으나, 이제는 그게 잘못이라는 것을 압니다. 마마는 저의 무례함을 항상 너그러이 대해주셨고 저에게 잘해주셨습니다…”봉구안이 그녀의 말을 잘랐다.“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구나.”모용선은 고개를 들고 의아한 눈으로 황후를 바라봤다.봉구안은 평온한 얼굴로 그녀에게 말했다.“진실을 말할 생각이 없었으나 이제 이렇게 된 이상 너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너의 간청과 반성은 시기가 너무 늦었다. 두 달 전에 유서는 신행사에서 죽음을 맞이했다.”모용선은 순간 벼락맞은 기분이 들었다.“뭐… 뭐라고 하셨습니까?”봉구안은 계속해서 말했다.“그 아이가 나에게 서신을 남겼더구나. 간절하게 네가 좋은 사람이라고 잘 이끌어주라고 간청을 하였다.”“나도 그 아이가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보호하려고 했던 사람이 과연 그럴 가치가 있는지 궁금했다. 그러니 모용선, 너에게 잘해준 건 내가 아니라 유서 그 아이였다.”모용선은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져서 울먹이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유서… 그 아이가 어떻게… 저는 그럴 가치 없는 사람입니다. 제가 일부러 그 아이를 내치고 신형사에 보냈는데… 그 아이는…”봉구안은 연상을 시켜 유서의 서신을 가져오게 했다
식량 운성을 떠나기 전, 오백은 모든 조사와 준비를 미리 마쳤다.서양성 군수가 이번 여정의 가장 큰 장애물이었다.그는 검역을 핑계로 몰래 일부 군수물자를 탐오하고 있었는데 그 행위가 무척이나 괘씸했다.봉구안은 일단 먼저 시위를 시켜 통행증을 보여주게 했다.시위가 책임자로 보이는 관원에게 말했다.“여기 서왕 전하의 밀서가 있습니다.”그런데 그 관원은 바로 통행증과 밀서를 쳐내더니 더 기고만장한 태도로 호통쳤다.“서왕의 사람이라고 해도 여기 도착했으면 이곳 규정을 따라야지!”시위도 화가 나서 호통쳤다.“무엄하다! 서왕 전하의 밀서가 여기 있는데 어찌 이런 무례를 범하느냐!”짝!관원은 그대로 그 시위의 귀뺨을 쳤다.“무엄한 건 너지! 내 말 한마디면 너희는 이 성문을 절대 나갈 수 없는 거 몰라?”봉구안과 동행한 시위들은 황궁 금위군으로 황제의 심복들이었다. 황제는 출정하기 전 그들에게 무슨 일이 있어도 황후를 잘 보호하고 그녀의 지시를 따르라고 명하고 떠났다.상대의 적의를 느낀 그들은 본능적으로 황후를 보호하려는 마음에 검을 빼들었다.그 모습을 본 관원들은 오히려 더 건방지게 굴었다.“내 이럴 줄 알았어! 진짜 도적떼들이었네! 말해! 전에 사라진 식량들도 너희가 강탈한 거지!”봉구안은 싸늘한 목소리로 명했다.“검을 내려라.”시위들은 그녀의 지시에 따라 검을 내리면서도 살기등등한 눈으로 관원들을 주시했다.맨 앞에 선 관원이 싸늘하게 명령했다.“여봐라! 저들의 화물을 모두 내리거라!”그런데 그 말이 끝나기 바쁘게 검 한자루가 그의 목에 닿았다.너무도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미처 대비할 틈도 없었다.봉구안은 안정적으로 검을 잡고 상대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녀가 조금만 힘을 준다면 바로 그 관원의 목을 그어버릴 수 있었다.관원은 당황한 얼굴로 양손을 머리 위로 들었다.“이… 이러지 마! 진정해… 관원을 죽이는 것은 중죄라고!”봉구안이 싸늘한 목소리로 명령했다.“너희 군수를 데려오너라.”“아… 알았어!”관원은 발 빠른
진왕은 홧김에 새장을 바닥에 패대기쳤다.안에 있던 새가 날개를 펄럭이며 밖으로 날아가다가 벽에 부딪혀 그대로 추락했다.진왕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 새를 짓밟고는 말했다.“죽화총이라면 소욱이 그리도 아끼던 물건 아니냐. 그게 적국의 손에 넘어가지 않게 하려고 옆사람은 만지게도 못한다더니, 황후가 왜 그걸 갖고 있지?”“서왕과 군기감이 황제의 명을 어겼나 보군! 여봐라! 서왕부로 간다!”서왕부.진왕이 찾아와서 소란을 부릴 것을 미리 알고 있던 서왕은 집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죽화총이요? 저도 모르는 일을 진왕 전하께선 어찌 아셨을까요?”서왕은 특유의 서글서글한 미소를 지으며 진왕에게 물었고 진왕은 홧김에 책상을 쾅쾅 두드렸다.“황후에게 죽화총을 줘서 보내다니! 그러다 적국의 손에 넘어가기라도 하면 그 책임을 네가 질 것이냐! 당장 죽화총을 되찾아와야 한다!”서왕은 담담히 차를 마시며 답했다.“알겠습니다. 이 일은 제가 책임지고 철저히 조사하지요. 만약에 사실이라면 죽화총은 되찾아와야 합니다.”진왕은 꾸물거리는 서왕의 태도를 보며 조바심이 났다.“당장 사람을 파견해야 한다!”서왕이 유유히 물었다.“지금이요? 때가 너무 늦었지 않습니까. 성문도 닫혔을 텐데...”서왕이 일부러 시간을 끈다고 인식한 진왕은 홧김에 책상을 엎어버리고는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걱정 말거라. 내가 널 대신해 죽화총을 되찾아오겠다.”떠나는 진왕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서왕의 두 눈에 살기가 가득했다.시위 유화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전하, 진왕은 대놓고 황후마마를 치겠다는 소리 아닙니까. 막아야 하지 않을까요?”서왕이 그에게 되물었다.“넌 황후 일행이 어디까지 도착했는지 알고 있느냐?”순간 유화는 당황해서 입을 다물었다.식량 운반대가 순조롭게 남부에 도착하게 하기 위해 그는 며칠 전, 황후의 행적을 추적한 적 있었다.하지만 보낸 수하가 돌아와서 하는 말이 황후가 어디에 있는지 찾을 수 없다는 얘기였다.서왕은 침착하게 찻잔을 내려놓고 부드러운
눈앞의 사람을 바라본 소욱의 표정은 예전의 냉철함을 유지할 수 없었다.칠흑같이 검은 눈동자가 휘둥그레 커지고 저도 모르게 입술이 떨렸다.“황후! 네가 어찌…”경악한 건 진한길도 마찬가지였다.황후가 왜 이런 곳에 나타난 것인가!눈앞에 무언가 그림자가 스치고 가더니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황후의 앞으로 달려간 황제가 보는 앞에서 황후를 품에 안았다.그 모습을 본 진한길은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소욱은 그녀의 온기를 느끼려 더 으스러지게 끌어안았다.이 전쟁은 그가 치렀던 중에 가장 승부가 묘연한 전쟁이었다.북연의 태자는 병법대로 싸우는 게 아닌 잔인하고 음험한 수단만 취했다.봉구안이 그를 밀치자 그가 말했다.“조금만 안고 있게 해주렴. 너무… 춥구나.”때는 어느덧 9월, 황성은 날씨가 싸늘한 시간이지만 남부는 전혀 춥지 않았다.봉구안은 그를 밀치며 말했다.“일단 식사부터 하세요.”그는 괜찮을지 몰라도 그녀는 배가 고팠다.어제 밤새 수많은 적군을 처리하고 겨우 운수통로를 다시 장악한 그녀였다.오늘 낮에는 식량을 운반하고 오느라 한시도 쉬지 못했다.소욱은 그제야 이상함을 눈치채고 버럭 화를 냈다.“어찌하여 너에게 식량 운수 일을 맡긴 것이냐!”남제에 이리도 사람이 없단 말인가!일국의 황후를 전장에 내몰다니!봉구안은 아무렇지도 않은 말투로 말했다.“상황이 시급하여 어쩔 수 없었습니다.”소욱은 참지 못하고 다시 그녀를 안았다.이때, 덤벙대는 장수 한 명이 무턱대고 안으로 들어왔다.“폐하! 먹을 게 생겼습니다! 조정의 식량이 도착…”하지만 말을 끝맺기도 전에 황제의 싸늘한 시선이 날아왔다.다시 보니 황제와 황후가 서로 부둥켜안고 있었다.장수는 다급히 시선을 돌리며 짐짓 모르는 척 중얼거렸다.“폐하는 어디 계시지? 내가 막사를 잘못 찾았나? 주변이 어두워서 보이지를 않네.”소욱은 봉구안을 껴안은 그대로 그녀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넌 짐이 죽는 게 싫었던 것이다.”봉구안은 다시 그를 밀치고는 평온한 말투로 말했다.
남제와 북연 양군이 대립하고 있는 사이에는 광활한 죽음의 계곡이 있었다.지세가 준엄하여 수풀도 자라지 않아 죽음의 계곡이란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결국 어느 한쪽이 계곡을 건너기만 한다면 승리할 수 있는 구도였다.남제는 방어를 위주로 하고 북연은 인해전술을 썼다.지금 형세로 보면 북연이 약간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봉구안과 소욱은 몸을 숨기고 죽음의 계곡으로 다가가는 북연군을 바라보고 있었다.계곡의 바람은 뜨거운 열풍을 지니고 얼굴을 간지럽혔다. 봉구안은 북연군 깃발을 보며 싸늘하게 말했다.“적어도 한 달을 시간을 끌어야 합니다.”소욱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왜지?”봉구안이 말했다.“식량을 운반하기 전에 북연에 사람을 보냈었습니다. 이 전쟁의 근본적인 원인은 북연 태자에게 있습니다.”“그를 제압할 수 있는 사람은 북연 황제뿐이지요.”“북연 황제가 태자를 다시 불러들이길 바라는 것이냐?”소욱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북연 황제는 오랜 지병으로 앓아 누웠고 이미 목숨이 경각을 다투고 있다고 들었다. 그렇지 않다면 태자도 30만이나 되는 대군을 데리고 이 소란을 피우지도 않았을 테지.”봉구안은 자신의 추측을 말했다.“병세는 북연 태자가 대외적으로 말한 핑계일 겁니다. 북연 태자는 이 일이 있기 전까지 동궁에 구금되어 있었는데 갑자기 대권을 장악한 것부터 이상합니다.”소욱은 뭔가 떠오른 듯, 동공이 확 흔들렸다.“태자가 친부를 시해하였다고 생각하느냐?”봉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예.”소욱은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리고 흐뭇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전쟁 방면에서 짐은 너를 따라갈 수가 없구나.”봉구안은 멀리 보이는 횃불들을 바라보며 담담히 말했다.“폐하, 북연의 애가를 들어보신 적이 있나요?”소욱이 묘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말했다.“소장군은 적군을 흔들 수 있는 수단을 잘 알고 있군.”반 시진 후.남제의 대영에 북연의 애가가 울려퍼졌다.그 노래는 제사를 지낼 때 부르는 노래로 북연 사람이라면 다들
봉구안은 벌떡 몸을 일으키고 경계 어린 표정으로 소욱을 바라봤다.소욱은 전혀 잠기가 없는 얼굴로 담담히 그녀에게 물었다.“더 자지 않고 왜 깼느냐?”봉구안은 한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물었다.“왜 아직도 안 주무시고 계셨습니까?”“내일의 역공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봉구안은 속으로 투덜거렸다.‘이런 자세로 그런 말씀하지 마시라고요!’한편, 북연군 군영.북연 태자가 보낸 첩자가 돌아와 남제의 식량 운송대가 도착했다는 사실을 알렸다.그제야 그들은 왜 남제가 그렇게 힘차게 애가를 불렀는지 알 것 같았다.하지만 남제의 운송통로는 북연이 장악하고 있었는데 대체 어떻게 빠져나간 것일까?한참 후, 한 첩자가 그 답을 내놓았다.“태자 전하, 전해온 소식에 따르면 남제가 이미 운송통로를 다시 장악하고 우리 병사들을 모조리 죽였다고 합니다!”침상에 앉아 있던 북연 태자의 얼굴이 음침하게 굳었다.광기가 넘실대는 그의 얼굴에서는 진한 살기가 요동쳤다.“아군이 남제 군영과 대치하고 있는데 대체 무슨 수로 통로를 장악했단 말이냐!”그 첩자가 계속해서 아뢰었다.“현장에 잔여 독안개의 흔적이 보였습니다. 필히 남강인들이 몰래 돕고 있는 것입니다!”북연 태자는 냉소를 지었다.“남강이라. 하, 약소국 주제에 이리도 주제파악이 안 되다니!”“태자 전하, 남강은 이미 남제와 연맹을 맺었으니 아마 남제가 쓰러지면 자신들도 화를 면치 못할 것이 두려워서 나선 듯합니다. 남강이 이 전장에 끼어드는 게 싫으시다면 소신이 가서…”북연 태자는 단호하게 고개를 젓고는 거만하게 말했다.“고작 남강 따위를 내 무서워할 것 같으냐? 남제를 소탕한 다음에 남강놈들에게 본때를 보여줄 것이다!”맹목적인 자신감은 아니었다. 현재 20만이나 되는 병력이 남아 있는 상황에 남제를 집중 공격하는 게 승산이 있었다.그는 남제가 보급 물자를 받지 못한다면 얼마 버티지 못할 거라고 확신했다.부하가 할 말 많은 표정으로 쳐다보자 태자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또 무슨 일이냐?”“
이게 바로 하늘의 뜻인 걸까?남강 왕녀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서서 입술만 잘근잘근 씹었다.단지 하루 늦었을 뿐이다.만약 어제 식량을 가져왔더라면 남제의 황제와 혼인할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니 억울하고 분했다.조금 전까지 고고하고 교만하게 굴던 왕녀는 마치 서리 맞은 가지처럼 축 늘어져서 돌아갔다.진한길은 저도 모르게 식은땀을 훔쳤다.황후가 어제 늦지 않게 도착했으니 망정이지 고귀한 황제가 남강 왕의 사위가 될 뻔하지 않았는가.소욱의 얼굴에도 불쾌감이 가득했다.남강 핏줄이라 그런지 몰라도 참으로 당돌하고 주제 분별이 안 되는 여인이었다.“남강 왕녀요?”막사에서 소욱에게 자초지종을 들은 봉구안은 약간 놀랍다는 표정을 짓더니 말했다.“눈이 엄청 높다고 들었는데 왜 그랬을까요?”소욱이 발끈하며 반박했다.“짐이 어디가 못났다고!”일반인이었다면 모두가 남강 왕녀가 주제를 모른다고 욕했을 것이다.봉구안은 태연자약하게 해명했다.“폐하가 못났다는 얘기가 아니라 남강 왕녀는 보수파라서요. 일부일처제를 희망하고 절대 다른 여인과 부군을 공유하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니 폐하처럼 수많은 후궁을 거느린 황제는 보수파의 눈에는 절대 좋은 선택지가 아니지요.”사실을 말한 것이지만 소욱이 듣기에는 무척이나 불편했다.그는 울적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말했다.“너 역시 남강 왕녀처럼 보수파였던 거군.”봉구안은 바로 화제를 돌렸다.“오늘은 어떤 식으로 역공을 진행하실 겁니까?”소욱의 표정도 사뭇 진지해졌다.“3천 병력을 파견해 죽음의 계곡을 정면 돌파할 것이고 양측에 각 1만 병력을 배치해 엄호할 계획이다.”봉구안은 무표정한 얼굴로 사색에 잠겼다.“총 2만 3천 병력이로군요. 이 전역의 목표는요?”소욱이 단호하게 말했다.“북연군을 죽음의 계곡에서 몰아내는 것이다.”죽음의 계곡에 주둔 중인 북연군은 총 3만이었다.미치광이와 천재는 종이 한장 차이라고 했던가. 북연 태자는 겉보기에 그냥 인원수로 밀어붙이는 것 같아도 사실 상 대비
죽음의 계곡 높은 곳.전방에서 돌아온 진한길이 보고를 전했다.“폐하! 북연군이 화룡을 가동하고 있습니다!”소욱의 옆에 서 있던 손덕방 장군이 그 말을 듣고 바로 말했다.“폐하, 쌍방은 화기를 들지 않아야 서로 대등한 정도입니다.”“저희가 죽화총을 사용하니 북연 쪽에서 화룡을 내놓은 것이지요! 당장 죽화총을 철수해야 합니다!”소욱은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계속 공격하거라!”손덕방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미친 북연 태자가 진짜로 화룡을 가동한다면 다 같이 죽자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다른 장군들도 같은 생각이었다.죽음이 두렵지 않는 사람은 없다.화룡이 가동된다면 반경 백리 안에 생존자가 없게 되는데 지금 사정거리는 고작 십리 정도이니 다 같이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물론 그건 북연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아니나 다를까, 아무리 기다려도 화룡이 정식 가동되었다는 소식은 전해지지 않았다.네 시진 후, 전방에서 승전보가 들려와서야 장수들은 잠깐 숨을 돌릴 수 있었다.죽음의 계곡에 주둔 중이던 북연군은 절반의 사상자를 냈다. 사실 남제가 쳐들어올 때 곧바로 뒤로 철수할 수 있었지만 북연 태자는 계곡을 사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철수했다면 살 수 있는 병사들이었다.하지만 눈앞에는 남제군이, 뒤에는 병기를 들고 자신들을 겨누고 있는 아군이 있었다.그들이 철수한다면 아군의 손에 죽게 되는 상황이었다.어쩔 수 없이 만여명의 북연군은 꼭두각시처럼 어거지로 전장에 임했다.반면 북연 태자는 진작에 후방의 본진으로 돌아간 후였다.“태자 전하, 3만 대군이 전군복멸 되었습니다!”쾅!북연 태자는 치미는 짜증에 책상을 두드렸다.“우리가 3만이고 저쪽이 2만인데 어찌 졌단 말이냐!”옆에 있던 장군이 조심스레 말했다.“태자 전하, 저희 북연군 모두가 용맹하고 굳센 의지를 지녔습니다. 하지만 비열한 남제군이 신형 죽화총을 사용하는 바람에… 저희가 화룡을 꺼내들어도 전혀 기죽지 않더군요.”“죽음이 두렵지 않다는 건가.”북연 태자의 눈동자가 잔인
현비의 눈엔 짙은 허망함이 어려 있었다."폐하, 폐하께서 단 한 번이라도 신첩을 이해하려 하셨더라면 아셨을 겁니다. 신첩은 본래 약리학에 정통했습니다.”“영비마마께 쓴 독은 신첩이 직접 조제한 것입니다. 하지만 의원이 제 몸을 고치지 못하듯, 신첩 또한 제 독을 온전히 해독하지는 못했습니다. 그저 몸속의 독성을 억누를 수 있을 뿐, 근본적인 치료는 불가능했습니다."더 할 말은 없다는 듯, 현비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소욱은 손짓으로 진한길에게 몸을 제압한 손을 풀라고 지시했다.양팔이 풀리자, 현비는 앞으로 푹 고꾸라지듯 무릎을 꿇고 이마를 바닥에 박았다. 그녀는 머리를 조아리며 간청했다."폐하, 제발 제 가족만은… 용서해주시옵소서."곁에서 지켜보던 진한길은 표정 없이 서 있었지만 마음 한켠에 얕은 동정이 스쳤다. 현비에게 분명 죄는 있었지만, 모든 시작은 모용란의 악행이었기 때문이었다.그러나 소욱의 시선은 여전히 냉담했고, 목소리는 단호했다."현비는 황제인 나를 속이고 궁중의 법도를 어겼다. 천형에 가두고 추후 처분을 기다리게 하라."현비는 이 결과를 받아들였다. 오히려 마음 한켠으론 안도했다. 그 죗값이 가족에게 미치지 않았으니 말이다.궁에서 끌려나가는 길에 현비는 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내뱉었다."하늘이… 이렇게 넓었구나."수년간 좁디좁은 궁궐 안에 갇혀 살며 늘 발밑만 바라봤던 그녀. 하늘을 올려다보는 법도, 마음을 여는 법도 잊은 채 살아왔었다. 그렇게 그녀는 스스로를 가두었고, 걸을수록 길은 좁아졌다.……현비가 다시 천형에 갇혔다는 소식은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궁 안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았지만, 정작 무슨 죄로 잡혀간 건지는 알지 못하였다.현비의 궁녀인 동하는 자녕궁 앞에 무릎을 꿇고 울며 태후께 간청했다.태후는 전각 안에서 목탁을 두드리며 마음을 가라앉히고 있었다.곁에서 시중들던 계 상궁은 태후가 독경을 마친 뒤 몸을 굽혀 조심스럽게 말했다."태후 마마, 동하 저 아이가 벌써 두 시진째 무릎 꿇고
현비는 텅 빈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며 중얼거렸다."영비마마와 폐하께서는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란 사이였지요. 그 시절, 마마는 후궁 중에서도 가장 총애를 받았습니다. 제 아버지는 제가 영비와 닮았다는 이유로 서둘러 저를 궁에 들여보내셨죠.”“궁의 모든 이들은 영비마마가 온화하고 현명하다고 칭송했었습니다. 저 역시 처음 입궁했을 땐 그렇게 믿었고요. 하지만 곧 마마의 진면목을 알게 되었습니다.”“겉으로는 자매처럼 지내며 장신구도 건네주고, 심지어 폐하를 뵐 때도 저를 데리고 가셨었죠."소욱은 그런 기억이 없었다. 그가 모용란을 후궁으로 맞이한 것도 정이 아닌 우정 때문이었다. 즉위 초창기 정사에 바빠 후궁을 찾을 여유도 없었다. 모용란이 어전 출입이 잦았던 것은 기억했지만, 그 자리에 현비가 있었다는 기억은 없었다.현비는 그의 표정을 보고, 그가 기억하지 못한다는 걸 알아챘다."폐하께서는 단 한 번도 저를 제대로 바라본 적이 없으셨습니다. 하지만 영비마마는 다르셨죠. 간택 당시 폐하께서 제 시를 칭찬하신 그 한마디가 마마에게는 큰 상처였습니다.”“폐하께는 그저 흘려 넘긴 말이었겠지만 저에겐 큰 기쁨이었고, 영비마마에겐 시기와 질투의 씨앗이 되었습니다."소욱은 더는 후궁들 사이의 질투와 다툼을 듣고 싶지 않았다. 그는 그런 다툼을 혐오했지만, 그것을 바꿀 힘은 없었다."모용란이 어떻게 너에게 독을 먹였느냐. 왜 그때 나에게 말하지 않았느냐."현비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마치 허탈한 이야기를 들은 듯 눈에 물기가 어렸다."그때 제가 폐하께 말씀드렸다면 과연 믿어주셨을까요? 폐하께서 영비마마를 벌하셨을까요?"소욱이 입을 열기도 전에, 그녀가 먼저 단언하듯 말했다."아니요. 폐하께서는 안 그러셨을 겁니다."그 말은 속삭임이 아니라, 분노 어린 한숨에 가까웠다. 그녀의 시선엔 실망과 원망이 가득했다."폐하, 저는 한 번도 폐하께서 현명한 군주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황후 마마께서 나타난 후에야 폐하께서는 조금씩 달라지셨습니다
이튿날 이른 아침, 소욱은 황궁으로 복귀했다.아침 조회 자리에서 신료들이 약쟁이 사건을 거론했다.“폐하, 각지에서 과도한 억제 조치가 이어지고 있사온데 약쟁이들이 그 틈을 타 소란을 일으켜 억울한 판결이 속출하고 있습니다. 무고한 지방 관원들이 연루되어 피해를 입고 있으니 부디 폐하께서 신중히 살펴주시옵소서.”소욱도 그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약쟁이들이 의도적으로 관료들의 집에 숨어들어 수사 대상이 되도록 만들고 사건을 키워 혼란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면 자신들은 혼란 속에 숨어 빠져나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하지만 그와 얽힌 관료들이 모두 무죄라고는 단정할 수 없었다. 결국 가장 확실한 방법은 대신들을 파견해 진상을 직접 조사하는 것이었다.조회가 끝난 후 소욱은 곧장 현흥궁으로 향했다.그가 입은 용포는 황제의 위엄을 더욱 드러냈고 냉랭한 분위기는 더욱 그를 권위 있게 만들었다.오랜만에 성상의 얼굴을 뵙는 궁인들은 일제히 무릎을 꿇고 외쳤다.“황제 폐하를 뵙습니다!”궁 안.궁녀 동하가 다급히 안으로 뛰어들었다.“마마! 마마! 폐하께서 오셨습니다!”현비는 탕약을 마시고 있던 중이었다. 얼굴은 병색이 완연했고 평소의 생기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뜻밖의 방문에 놀란 그녀는 눈빛에 당혹을 숨기지 못했다.폐하께서 왜 이곳에...그녀는 급히 약그릇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황제를 맞을 준비를 했다.소욱의 등장과 함께 전각 안이 시끄러워졌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위엄 넘치는 황제가 천천히 전각 안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바라보았다.그녀는 가볍게 입술을 다문 채 예를 올렸다.“신첩,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그간 강녕하셨습니까.”소욱은 말없이 자리에 앉았다. 잘생긴 얼굴 위엔 차가운 무표정이 드리워 있었다.그는 손짓 한 번으로 전각 안의 궁녀들을 물리고 현비만 남겨두었다.현비는 당황한 얼굴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폐하…”“내가 묻는 말엔 진실만을 말해야할 것이다.”소욱의 목소리는 단호했고 얼굴엔 엄중함이 어렸다.현비는 속내
황궁.현흥궁.현비는 병이 도지자 오래 지나지 않아 정신을 잃었다.그녀는 시녀 동하가 태후를 찾아가 홍련초를 구하려 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마마...”찰싹!갑작스레 손이 날아와, 동하의 뺨을 세차게 후려쳤다.당황한 동하는 그 자리에 굳어섰다.무엇이 잘못된 건지, 어째서 현비가 이토록 격앙된 건지 알 수 없었다.현비는 힘겹게 가슴을 짚으며, 쉰 목소리로 말했다.“나가.”동하는 현비의 기분이 몹시 나쁜가 보다 여기고 조용히 물러나려던 찰나, 누군가 궁 안으로 들어섰다.“황제 폐하의 명이다. 염 신의를 모셔와 현비마마의 병을 진찰하게 하라!”그 순간 현비의 얼굴빛이 확 변했다.겉으로는 태연한 듯했지만, 장막 너머의 목소리에 단호하게 응했다.“폐를 끼쳐 송구하네. 폐하께는 괜찮아졌다 전해주게.”그러나 염 신의는 말을 자르며 곧장 앞으로 나섰다.“마마, 폐하께서 직접 전하셨습니다. 반드시 병을 완쾌하라 하셨습니다.”그는 허락도 받지 않은 채 장막 앞으로 다가가 진맥을 청했다.“손을 내어주시옵소서. 진맥을 해야 합니다.”한동안 장막 안은 고요했다.잠시 후, 하얀 손 하나가 조심스레 틈 사이로 뻗어 나왔다.동하는 재빨리 비단 손수건을 꺼내 손목 위에 덮었다.여인의 살이 남성에게 닿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궁녀들은 눈치도 없이 염 신의에게 의자 하나 내주지 않았다.그는 묵묵히 허리를 굽혀 그대로 맥을 짚었다.현비는 말없이 입술을 꼭 다물고 있었다.잠시 후 염 신의는 맥에서 손을 거두며 말했다.“마마, 피 한 방울이 필요합니다.”그는 말하면서 옆에 있던 동하에게 바늘과 작은 사기그릇을 건넸다.동하는 조심스레 다가가 속삭였다.“마마, 소녀가 하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현비는 익숙한 듯 손을 내밀며 다정히 말했다.“괜찮아. 어서 하렴.”동하는 피를 모아 염신의에게 전해주었다.염 신의는 약상자를 열어 조그만 병 하나를 꺼냈다.그 안의 약가루를 그릇 위에 조심스레 부었다.그의 손길은 침착했고 집중력 넘쳤
모용가에 대한 조사는 여전히 제자리걸음이었다.소욱은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모용가를 은밀히 조사하라고 했을 때, 별다른 이상이 없다고 들었느냐.”“갑자기 왜 그 얘길 꺼낸 것이냐? 혹시…”그는 말을 끝맺지 않았지만, 봉구안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그녀는 모용가가 약쟁이 사건과 얽혀 있을 가능성을 의심하고 있었다.봉구안은 단정한 목소리로 답했다.“사형이 약쟁이 사건을 조사하기 시작한 시점은 폐하께서 즉위하신 이후입니다.”“그 말은 곧 선황제께서 돌아가시기 전부터 이미 약쟁이들이 활동하고 있었다는 뜻이지요.”“그 시점을 고려하면, 선황제께서 무언가 눈치채셨을 가능성도 있습니다.”“소첩은 그래서 모용가가 이 사건과 관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다만 어디까지나 제 추측일 뿐, 아직 뚜렷한 증거는 없습니다.”그녀의 말에 담긴 확신은 쉽게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소욱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그렇다면 지금 네 말은… 모용가를 억지로 몰아세우겠다는 것이냐.”농담조였지만, 소욱 역시 마음속으로 봉구안의 의심을 부정하지 못하고 있었다.선황제의 유언은 분명 모용가를 경계하고 있었다.하지만 지금껏 감찰을 맡은 자들이 어떤 흔적도 찾지 못했다는 건, 그들이 그만큼 은밀하게 움직였다는 뜻이었다.그런 점에서 모용가의 행적은 약쟁이들의 수법과 닮아 있었다.그 생각에 이르자 소욱의 눈빛에 서늘한 기운이 스쳤다.“사람을 더 붙이도록 하마. 이번엔 제대로 조사하게 하자.”그날 밤 소욱은 평소처럼 자유각에 머물렀다.궁 안의 일은 이미 손을 놓아도 될 만큼 정돈되어 있었고, 후궁의 일은 태후가 맡아 관리하고 있었다.빈들 또한 조용한 편이었으나, 단 하나. 약쟁이 사건만큼은 태후의 골칫거리였다.태후는 후궁들에게 자중할 것을 명하며, 그 본보기로 현비를 들었다.그날 밤 현비의 시녀 동하가 태후를 찾아와 다급히 울부짖었다.“태후마마, 제발 저희 마마를 살려주십시오!”이미 잠자리에 들었던 태후는 몸을 일으키며
봉구안은 자신이 직접 그려둔 지도를 꺼내어 소욱에게 펼쳐 보였다.“황성을 총타로 삼아 사방에 명령을 내리는 것. 이것이 바로 그들의 지령 경로입니다.”“그들의 평소 수법을 보면, 지금처럼 조정과 무림이 손잡고 그들을 압박하는 상황에서 가장 먼저 할 일은 모든 연락선을 끊고 총타부터 지키는 것이겠지요.”“그러기 위해서는 내부 인물들을 정리하는 게 먼저입니다.”소욱이 그녀의 말을 받아 이었다.“그렇다면 우리가 그 틈을 노려 분타부터 하나씩 무너뜨릴 수 있다는 뜻이로군.”봉구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그녀는 지도 위 몇 군데를 손가락으로 짚었다.“여기 표시된 곳들이 현재 저희가 확인한 그들의 은신처입니다.”“대부분 외진 산골이나 황량한 지역에 자리 잡고 있어요. 죽산진 근처 산속 동굴처럼 말이지요.”“폐하께서도 기억하시겠지요. 예전에 황성 도관 아래에서 많은 약쟁이들을 발견했을 때를요.”소욱은 그 일을 뚜렷이 기억하고 있었다.그때 봉구안은 약쟁이에게 상처를 입었고, 그가 그녀를 등에 업고 간신히 빠져나왔었다.봉구안의 눈빛이 차갑게 식어갔다.“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 도관 자체가 약쟁이의 은신처였을지도 몰라요.”“그리고 기억하시겠지요. 천룡회가 황성을 공격했을 때 약쟁이 대군을 풀었는데, 그 시각이 바로 늦은 밤이었어요.”소욱은 그녀가 전하려는 의미를 곧장 알아차렸다.그는 지도 위에 찍힌 지점들을 살펴보았다.“은신처의 위치와 약쟁이들의 활동 시각을 보면, 그 자들은 어둠 속 환경에 익숙한 존재들이겠구나.”봉구안은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어둡고 외진 곳이야말로 약쟁이들의 은신처로는 가장 알맞은 곳일 거예요.”“저희가 죽산진에서 약쟁이 소굴을 조사했을 때도, 산속 동굴 안은 손을 뻗어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만큼 깜깜했지요.”“강주에서 발견한 은신처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우연이라고 보기엔 너무 겹치는 것들이 많아요.”소욱은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그렇다면… 이 사실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겠느냐?”봉구안은 냉정한 눈빛
봉구안은 놀란 듯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황성에도 홍련초가 자란다고요?"소욱은 곧바로 진지하게 대답했다."누가 심었는지, 얼마나 되는지는 아직 모른다. 서쪽 교외에 사람을 보냈으니 곧 소식이 올 거야."봉구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에 잠겼다.소욱은 그녀의 그릇에 반찬을 더 담으며 말했다."일단 밥부터 먹으렴. 요즘 부쩍 더욱 말라 보이는구나. 아이를 품은 몸이라면 더 잘 챙겨야 하지."하지만 봉구안의 눈빛은 여전히 다른 데 머물러 있었다."혹시… 열무신의 소식은 아직도 없는거죠?"소욱은 묵묵히 고개를 저었다. 그는 서둘러 그녀가 더 걱정하지 않도록 화제를 돌렸다.소탁을 황성으로 데려온 뒤 그는 곧장 태의원을 불러 진찰을 받게 했다. 하지만 상처가 눈에 있는 탓에 회복이 쉽지 않았고 지금은 사실상 눈이 먼 사람처럼 지내고 있었다. 혼자 사는 데 어려움이 컸지만, 하녀를 붙여 주겠다는 제안도 번번이 거절했다.봉구안은 차분하게 물었다."폐태자께서는 지금 어디에 머물고 있나요?""마땅한 집을 하나 찾아 그곳에 머물게 하였다. 혹시나 있을 위험을 대비해 그림자 호위도 붙여 두었다."그가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은 단순한 걱정 때문만은 아니었다. 잠시 뜸을 들이던 소욱이 다시 입을 열었다."예전에 널 시중들던 연상을 혹시 기억하느냐?"봉구안은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되물었다."연상… 기억하죠. 그런데 갑자기 그건 왜 여쭤 보시는 거죠?"소욱은 다소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요 며칠 사이 그 아이가 소탁을 여러 번 찾아갔다는구나. 꽤 신경을 쓰는 듯했다."봉구안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그게 그렇게 문제될 일인가요?""그 아이는 아직 시집을 안 가지 않았느냐."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봉구안은 곧장 말을 끊으며 단호하게 말했다."제가 알기론 연상은 궁을 떠난 뒤 곧장 진가 저택으로 돌아갔습니다. 혼자서 글씨와 그림으로 생계를 꾸려 왔고요. 살림은 넉넉지 않지만 나름대로 삶의 방향은 확실합니다. 진가를 다시 일으켜 세우겠다는 뜻을
녕비는 자기가 무슨 심각한 말을 했는지도 모른 채 해맑게 웃으며 현비를 바라보았다.“언니, 우리 자매처럼 지냈잖아요. 그래서 말인데 남한테 덜미 잡히기 전에 차라리 폐하께 먼저 말씀드리는 게 낫지 않을까요? 어차피 결백한 사람은 당당해도 되는 법이지 않겠어요?”“홍련초는 그 자체로는 죄가 없는 약초예요. 죄가 있는 건 그걸로 독을 만든 자들이죠.”“언니처럼 착한 분이 약쟁이랑 엮일 리가 없잖아요, 그쵸?”그녀의 웃음은 현비의 눈에 유난히 싸늘하고 따갑게 느껴졌다.현비는 얼굴이 희미하게 질려가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녕비, 네가 의심하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해.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맹세컨대 내가 마시는 약은 약쟁이 사건과는 정말 아무 관련도 없어.”녕비는 굳이 대꾸하지 않은 채 조용히 말을 이었다.“제가 언니를 믿느냐 마느냐는 사실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중요한 건 폐하께서 어떻게 생각하시느냐죠.”현비는 한동안 침묵하다가 깊은 숨을 고르고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맞는 말이야.”“자, 할 말은 다 했으니까 전 이만 자녕궁으로 가볼게요. 태후마마께 기도드릴 시간이네요. 굳이 배웅하지 않으셔도 돼요.”녕비가 자리를 뜬 뒤, 곁에 있던 시녀 동하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마마, 녕비 마마 말씀이 틀린 것도 아니에요. 폐하께서 약쟁이 사건을 철저히 조사하고 계시다 하니, 홍련초가 얽히는 일은 아무래도 너무 커요.”현비의 눈빛에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그녀는 그저 이 궁 안에서 살아남고 싶었을 뿐이었다.그녀는 그 어떤 죄도 짓지 않았다. 정말로 아무 잘못도 없었다.“…종이랑 붓을 준비하거라. 폐하를 뵙기 전에 아버지께 먼저 편지를 써야겠다.”“예, 마마.”……그날 밤.자유각.소욱은 이날 밤도 자유각에 머물며 봉구안과 시간을 보내려 했다.그러나 대부분의 시간은 상소문을 검토하는 데 쓰였고 그녀 곁에 있어도 여유를 누릴 틈은 많지 않았다.그는 문서를 펼쳐든 채 농담처럼 말했다.“황제가 된 건, 아마 전생의 업보였던 모양
그해 봉구안은 스스로 천지설산에 올라 자욱화를 채취하려다 목숨을 잃을 뻔하였다. 그때 그녀를 구해준 이가 바로 염 신의였다.그 후 인연이 닿아 둘은 다시 만나게 되었고, 그 무렵 염 신의는 약쟁이 독의 해독제를 연구하고 있었다.이에 봉구안은 그를 황성으로 데려왔다.그는 예전에도 한 차례 해독제를 만들어낸 바 있었으나, 중독자들에게 써보았을 때 뚜렷한 효과는 없었다.하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진정한 해독제가 완성된 것이다.분명 기쁜 소식이었다.“염 신의 말로는, 홍련초 덕분에 그동안 풀지 못했던 원리를 비로소 깨달았다고 합니다.”“이미 중독자들에게 해독제를 복용시켰고 모두 회복되었습니다. 장순의 어머니까지도요.”장순은 아직 어린 유생이었으나, 과거 제후국들이 남제를 포위했을 당시 봉구안이 특별히 데려갔던 소년이었다.그는 적국을 향한 설전에서 통쾌한 활약을 펼친 바 있었다.그의 어머니는 오래전 약쟁이 독에 중독되어, 살아 있으되 정신이 나간 채 살아온 사람이었다.해독제가 생겼다는 건 의심할 여지 없이 경사였다.허나 좋은 일과 화는 언제나 함께 오는 법. 봉구안이 눈짓 하나만 보내도 소욱은 그녀의 속마음을 단박에 알아차렸다.그녀가 입을 떼기도 전, 소욱은 그녀의 팔을 가볍게 두드리며 오백에게 명을 내렸다.“사람을 붙여 염 신의를 철저히 보호하라. 해독제 이야기는 절대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하라.”오백은 곧장 명을 따랐다.밖에서 듣고 있던 진한길은 내심 고개를 갸웃거렸다.‘폐하께서는 왜 이렇게 오백을 쓰시는 걸까?’오백이 물러난 뒤, 소욱은 봉구안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해독제가 완성되었으니 약쟁이 독이 아무리 퍼져도 더는 위협이 되지 못할 것이다.”봉구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해독제는 결정적인 열쇠예요. 폐하, 문득 떠올랐는데… 담대연도 약쟁이 독에 중독된 사람이었죠?”소욱은 손을 들어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그 자에게도 해독제를 줄 것이다. 이제는 마음 놓고 쉴 수 있겠지?”“네.”봉구안도 지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