찻잔을 내려놓은 소욱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유유히 말했다.“싸우는 건 내가 아니야. 남강 왕 자네지.”“자네는 타고난 싸움꾼이야. 비록 작은 부족이긴 하지만 북연과 맞설 담량을 가졌어. 북연 대군이 남강을 도와 같이 남제를 공격하기로 합의를 보았겠지. 하지만 자네와 내가 손을 잡는다면 북연을 칠 힘이 얼마든지 있어. 남제는 남강에 죽화총 백 대를 지원하겠다. 그거면 북연의 5만 대군을 쉽게 물리칠 수 있을 거야.”“그렇게 되면 북연을 가지고 논 남강은 천하에 이름을 알리게 되겠지. 남강 왕, 아주 좋은 그림이지 않은가.”소욱의 구상은 전부 실현 가능성이 있는 것들이었다.남강 왕은 그의 말에서 자신이 이미 연극 무대에 올랐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남강이 북연과의 싸움에서 대승을 거둔다면 일약 영웅이 되는 그런 연극이었다.그렇게만 된다면 다른 국가들도 더 이상 남강을 얕잡아보지 않을 것이다.하지만 패배한다면 그야말로 나락으로 떨어지는 일이었다.남강 왕은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으며 침착하게 물었다.“5만 대군이 이곳에서 죽어나간다면 북연의 황제도 가만히 있지 않고 또 다시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올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남강은 어찌해야 합니까? 남제 폐하께서는 저희를 불구덩이로 떠미는 격이 아닙니까!”소욱은 미리 준비한 대사를 읊었다.“남강과 남제는 연맹을 맺고 남부에 견고한 방어선을 구축하면 돼. 북연이 다시 남강을 침공하려고 할 때에 남제에서 즉시 군을 파견해 그들의 천군만마를 막아줄 것이야.”남강 왕은 순간 피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북연의 5만 대군이라니, 참으로 매혹적인 제안이 아닐 수 없었다.하지만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남강 왕이 음침한 눈으로 소욱을 바라보며 말했다.“우리 남강에만 이득이 되는 제안이군요. 남제는 저희에게서 뭘 원하나요?”남제가 밑지는 장사를 할 리가 없었다.소욱은 매력적으로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남제가 원하는 것은 전장을 치르지 않고 승리하는 것이다.”그제야 남강 왕은 그의 의도를 알아
오백은 찾아낸 단서를 그녀에게 자세히 설명했다.“천용회가 금방 창설되었을 시, 보옥 한조각을 우연히 얻었다고 합니다. 몇몇 원로들은 보옥을 반지로 만들고 그 위에 칠색 보석을 끼워넣었다고 해요.”“반지를 보유한 자는 천용회에서도 꽤 높은 위치에 있는 인물로, 살인을 하더라도 절대 자기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강호에 떠도는 소문만 있고 실제로 그들을 본 자는 없었습니다. 이 반지도 정말 오랫동안 추적해서 겨우 찾아낸 단서입니다.”봉구안은 싸늘한 시선으로 전방을 응시했다.천용회가 이 사건에 연루되어 있었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몇 년 전 그 대란에서 다 죽은 게 아니었단 말인가.그녀가 신경 쓰이는 것은 과거 북부에서 그들이 죽이려던 사람이 맹 소장군이냐, 아니면 소환이냐였다.소환은 천용회와 원한이 있고 맹 소장군은 별다른 원한관계가 없었다.만일의 경우를 대비하여 봉구안은 오백을 통해 무림맹에 조심하라는 경고의 서신을 보냈다.어쩌면 천용회는 몰래 부흥을 계획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궁으로 복귀한 봉구안은 서신에 이 일을 써서 소욱에게로 전했다.서신을 보낸지 며칠 안 지나서 남부에서 전장 상황이 전해졌다.장공주는 영화궁으로 달려와 봉구안에게 기쁜 소식을 전했다.“이겼답니다! 남강은 병사를 물렸고 남제는 전장을 치르지도 않고 승리했답니다. 그리고 남강과 북연이 전장을 치렀는데 남강에서 5만 북연군을 전부 소멸했다고 합니다.”“또 있어요. 듣기로 북연에서도 죽화총을 사용하려고 했었는데 웅염이라는 인간이 그린 도면으로 만들어낸 죽화총은 한번 사용도 못해보고 전부 폭파했다고 합니다. 너무 통쾌하지 않습니까!”이 모든 것은 봉구안이 예상했던 바였다.이 기세대로라면 소욱은 곧 복귀할 것이다.어차피 이 전장에서 남제는 죽화총 백 자루만 빌려줬을 뿐이다.병사 한 명 희생하지 않고 남강 대군을 물리고 남강을 이용해 북연에 타격을 입힌 것이다.한편, 북연.북연 황제는 갑자기 고질병이 재발하여 태자가 나랏일을 대리하고 있었다.상
서왕은 문무백관들 앞에서 근엄한 얼굴을 하고 재차 물었다.“식량을 운반할 감독관을 자처할 사람 없는가?”평소의 온화하고 부드러운 표정은 온데간데없고 조급함만이 남았다.황제가 남부에서 고난을 겪고 있는 상황에 이리도 사람이 없다니 짜증이 안 날 수가 없었다.나랏일을 감독하는 업무를 맡지 않았더라면 친히 나가고 싶었다.“전하, 이미 여러 명의 감독관이 죽었습니다. 지금 시급한 건 식량을 강탈한 도적을 소탕하는 일입니다. 안 그러면 저희가 나선다고 해도 돌아올 수 없단 말입니다!”서왕 역시 이를 모르지 않았다.진작에 병사를 보내 도적을 소탕하게 했지만 아직까지 소식이 들려오지 않고 있었다.그렇다고 계속 이렇게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전쟁을 치르는데 식량은 필수 요소였다. 식량을 남부로 운반하지 못하고 있으니 시간을 끌수록 황제의 신변 안전이 걱정되었다.“송 장군…”서왕은 조급한 얼굴로 송 장군을 호출했다.“전하, 소신도 가기 싫은 게 아닙니다. 다만 소신은 전쟁터에서 병사를 파견하는 병법에만 능하지 정면에서 싸운 경험은 부족합니다.”“듣기로 도적들은 지형에 익숙하고 매복에 능하다고 하니 소신은 자신이 없습니다. 차라리 소신이 병사를 이끌고 남부로 나가는 것이 더 승산이 있지 않겠습니까.”또 한 명의 장수가 앞으로 나섰다.“전하, 소신 병사를 이끌고 남부에 지원을 가겠습니다.”파병지원도 시급한 문제였지만 서왕은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다.일찍이 두 달 전, 황제는 마지막 서신에서 남부에 파병하지 말라는 명확한 지시를 전했다.영화궁.장공주는 불만 가득한 얼굴을 하고 영화궁을 찾았다.내전에는 그녀와 봉구안 둘뿐이니 굳이 말을 가려서 할 필요도 없었다.“식량 운송 때문에 조정이 아주 시끄럽습니다. 하나같이 책임을 회피하려고만 하니, 어이구 겁쟁이들!”“서주성에 있는 진왕은 소식을 전해 듣고는 폐하의 신변 안전이 확실하지 않은 지금 나라에 주인이 없으면 안 된다는 명목을 내세우더니 꿈에 선황이 나타나셔서 나라를 감독하는 일을 맡아달
진왕은 고개를 빳빳이 들고 대전 안으로 들어왔고 그의 옆으로 호위무사 두 명이 따르고 있었다.그를 본 관원들의 반응은 각자 상이했다.누군가는 든든한 아군을 만난 것처럼 아부 섞인 웃음을 지었다.서왕의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다.“형님, 서주성에 계셔야 할 분이 황성엔 어쩐 일입니까. 폐하의 부름이 없이는 황성에 발을 들이지 못하게 되어 있지 않습니까.”나이 서른이 넘은 진왕은 선황의 장자였다.소욱은 즉위한 후, 왕권을 휘어잡기 위해 황위 경쟁에 이름을 올렸던 황자들에게 모두 영지를 하사하고 성 밖을 못 나가도록 조치했다.그런데 황제가 남부에서 조난을 당했다는 소문을 듣고 진왕이 야욕을 드러낸 것이다.서왕으로서는 그를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진왕은 아래턱을 매만지며 자신 있게 말했다.“태황태후의 명이 있었다!”서왕은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진왕은 성큼성큼 서왕의 앞으로 다가가더니 맹수의 이빨을 드러내고 비아냥거리듯 말했다.“폐하께서 위험에 처하셨다고 하여 태황태후께서 근심이 많으시다. 누군가가 이 기회에 권력을 탐하지 않을까 걱정해서 나를 황궁으로 불러 상황을 통제하라 하셨다.”“어쨌거나 폐하와 나는 피를 나눈 형제 아니겠더냐. 이 상황에서 믿을 수 있는 건 가족뿐이지. 내 아무리 무능하다고 해도 적어도 나는 폐하의 친 형님 아니더냐. 서왕 너는 뭐지?”서왕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잡았다가 다시 폈다.그리고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폐하께선 저를 믿으시어…”진왕이 냉소를 지으며 그의 말을 잘랐다.“하지만 너는 그런 신뢰를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더냐?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정녕 몰라?”“남부의 식량이 근 한달간 끊어졌고 폐하와 뭇 병사들은 우리가 가서 구원해 주길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넌 소극적이고 태만하게 직무에 임하여 여러 차례 식량 운반에도 실패했지. 그 많은 식량들은 다 어디 갔느냐?”“말로는 도적들의 소행이라지만 내가 보기엔 너 서왕의 뒷주머니에 들어간 게 틀림없다!”그 말이 나오자 여러 관원들이 동요하기 시
영화궁.서왕은 병풍을 사이에 두고 황후와 마주앉았다.“이렇게 되었습니다. 마마, 진왕이 계속 압박을 가하니 저도 어쩔 방법이 없었습니다.”“이번 식량 운송은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관건이니 인력은 필요한 만큼 말씀하세요.”“무슨 일이 있어도 식량이 안전하게 남부에 도착해야 합니다.”봉구안은 담담히 입을 열었다.“인원은 그리 많을 필요 없습니다. 하지만 믿을만한 자들이어야 하고 지시에 잘 따라야 합니다.”서왕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마마의 무공 실력이 뛰어나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요. 어쩌면 이번에 진왕이 나서서 식량 운반을 방해할 수도 있습니다.”“뚜렷한 목적이 있으니 마마께서 무사히 남부에 도착할 때까지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인원을 많이 데려가는 편이 안전합니다.”봉구안은 자기만의 생각이 있었다.“진왕에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조사를 해야 합니다. 식량 운반은 저에게 다 생각이 있습니다.”서왕은 공손히 고개를 끄덕였다.“예, 마마.”다음 날, 뭇 비빈들이 영화궁에 모였다.“마마, 정말 식량을 운반하러 떠나시는 겁니까?”“마마, 이런 일을 왜 굳이 마마께서 나서야 하나요? 남제에 쓸만한 사내가 그리도 없단 말입니까!”“너무 위험합니다. 가지 마세요, 마마!”비빈들은 진심으로 황후를 걱정하고 있었다.“하지만 아무도 식량 운반대를 이끌려 하지 않는다면 폐하는 어떻게 되나요?”아주 미약한 소리가 질문을 던졌지만 곧 다른 비빈들의 목소리에 묻혀 버렸다.그렇게 비빈들을 돌려보내고 봉구안은 녕비를 따로 불렀다.녕비는 이에 대해 약간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었다.봉구안이 정색해서 말했다.“내가 궁을 떠나 있는 동안 후궁 업무는 너와 현비가 맡아서 해야 할 것이다.”녕비는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신첩, 최선을 다하겠습니다.”곧이어 봉구안이 말을 이었다.“현비는 원가 몸이 안 좋으니 네가 해야 할 일이 많을 것이다. 그러니 그 성격 좀 죽이고
모용선은 간절함을 담아 말했다.“소첩의 시녀 유서는… 애초에 저의 죄를 뒤집어쓰고 신형사로 끌려갔습니다.”“오늘 여기에 온 것은 저의 죄를 자백하고… 유서를 풀어주십사 간청드리러 온 것입니다.”봉구안이 어두운 표정으로 물었다.“죄가 있다면 벌을 받아야 한다는 이치 정도는 알고 있겠지?”모용선은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알고 있습니다. 소첩은 처벌을 달게 받겠습니다. 하지만 유서는 무고한 아이예요.”“소첩은 입궁한 이래 줄곧 집념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집념을 내려놓고 저 자신을 구하려 합니다.”봉구안은 담담히 말했다.“네가 원하는대로 해주겠다.”모용선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고 큰 절을 행했다.“황후마마, 소첩은 마마를 쓰러뜨리고 폐하의 총애를 독차지하려고 여러 번 시도했으나, 이제는 그게 잘못이라는 것을 압니다. 마마는 저의 무례함을 항상 너그러이 대해주셨고 저에게 잘해주셨습니다…”봉구안이 그녀의 말을 잘랐다.“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구나.”모용선은 고개를 들고 의아한 눈으로 황후를 바라봤다.봉구안은 평온한 얼굴로 그녀에게 말했다.“진실을 말할 생각이 없었으나 이제 이렇게 된 이상 너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너의 간청과 반성은 시기가 너무 늦었다. 두 달 전에 유서는 신행사에서 죽음을 맞이했다.”모용선은 순간 벼락맞은 기분이 들었다.“뭐… 뭐라고 하셨습니까?”봉구안은 계속해서 말했다.“그 아이가 나에게 서신을 남겼더구나. 간절하게 네가 좋은 사람이라고 잘 이끌어주라고 간청을 하였다.”“나도 그 아이가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보호하려고 했던 사람이 과연 그럴 가치가 있는지 궁금했다. 그러니 모용선, 너에게 잘해준 건 내가 아니라 유서 그 아이였다.”모용선은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져서 울먹이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유서… 그 아이가 어떻게… 저는 그럴 가치 없는 사람입니다. 제가 일부러 그 아이를 내치고 신형사에 보냈는데… 그 아이는…”봉구안은 연상을 시켜 유서의 서신을 가져오게 했다
식량 운성을 떠나기 전, 오백은 모든 조사와 준비를 미리 마쳤다.서양성 군수가 이번 여정의 가장 큰 장애물이었다.그는 검역을 핑계로 몰래 일부 군수물자를 탐오하고 있었는데 그 행위가 무척이나 괘씸했다.봉구안은 일단 먼저 시위를 시켜 통행증을 보여주게 했다.시위가 책임자로 보이는 관원에게 말했다.“여기 서왕 전하의 밀서가 있습니다.”그런데 그 관원은 바로 통행증과 밀서를 쳐내더니 더 기고만장한 태도로 호통쳤다.“서왕의 사람이라고 해도 여기 도착했으면 이곳 규정을 따라야지!”시위도 화가 나서 호통쳤다.“무엄하다! 서왕 전하의 밀서가 여기 있는데 어찌 이런 무례를 범하느냐!”짝!관원은 그대로 그 시위의 귀뺨을 쳤다.“무엄한 건 너지! 내 말 한마디면 너희는 이 성문을 절대 나갈 수 없는 거 몰라?”봉구안과 동행한 시위들은 황궁 금위군으로 황제의 심복들이었다. 황제는 출정하기 전 그들에게 무슨 일이 있어도 황후를 잘 보호하고 그녀의 지시를 따르라고 명하고 떠났다.상대의 적의를 느낀 그들은 본능적으로 황후를 보호하려는 마음에 검을 빼들었다.그 모습을 본 관원들은 오히려 더 건방지게 굴었다.“내 이럴 줄 알았어! 진짜 도적떼들이었네! 말해! 전에 사라진 식량들도 너희가 강탈한 거지!”봉구안은 싸늘한 목소리로 명했다.“검을 내려라.”시위들은 그녀의 지시에 따라 검을 내리면서도 살기등등한 눈으로 관원들을 주시했다.맨 앞에 선 관원이 싸늘하게 명령했다.“여봐라! 저들의 화물을 모두 내리거라!”그런데 그 말이 끝나기 바쁘게 검 한자루가 그의 목에 닿았다.너무도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미처 대비할 틈도 없었다.봉구안은 안정적으로 검을 잡고 상대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녀가 조금만 힘을 준다면 바로 그 관원의 목을 그어버릴 수 있었다.관원은 당황한 얼굴로 양손을 머리 위로 들었다.“이… 이러지 마! 진정해… 관원을 죽이는 것은 중죄라고!”봉구안이 싸늘한 목소리로 명령했다.“너희 군수를 데려오너라.”“아… 알았어!”관원은 발 빠른
진왕은 홧김에 새장을 바닥에 패대기쳤다.안에 있던 새가 날개를 펄럭이며 밖으로 날아가다가 벽에 부딪혀 그대로 추락했다.진왕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 새를 짓밟고는 말했다.“죽화총이라면 소욱이 그리도 아끼던 물건 아니냐. 그게 적국의 손에 넘어가지 않게 하려고 옆사람은 만지게도 못한다더니, 황후가 왜 그걸 갖고 있지?”“서왕과 군기감이 황제의 명을 어겼나 보군! 여봐라! 서왕부로 간다!”서왕부.진왕이 찾아와서 소란을 부릴 것을 미리 알고 있던 서왕은 집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죽화총이요? 저도 모르는 일을 진왕 전하께선 어찌 아셨을까요?”서왕은 특유의 서글서글한 미소를 지으며 진왕에게 물었고 진왕은 홧김에 책상을 쾅쾅 두드렸다.“황후에게 죽화총을 줘서 보내다니! 그러다 적국의 손에 넘어가기라도 하면 그 책임을 네가 질 것이냐! 당장 죽화총을 되찾아와야 한다!”서왕은 담담히 차를 마시며 답했다.“알겠습니다. 이 일은 제가 책임지고 철저히 조사하지요. 만약에 사실이라면 죽화총은 되찾아와야 합니다.”진왕은 꾸물거리는 서왕의 태도를 보며 조바심이 났다.“당장 사람을 파견해야 한다!”서왕이 유유히 물었다.“지금이요? 때가 너무 늦었지 않습니까. 성문도 닫혔을 텐데...”서왕이 일부러 시간을 끈다고 인식한 진왕은 홧김에 책상을 엎어버리고는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걱정 말거라. 내가 널 대신해 죽화총을 되찾아오겠다.”떠나는 진왕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서왕의 두 눈에 살기가 가득했다.시위 유화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전하, 진왕은 대놓고 황후마마를 치겠다는 소리 아닙니까. 막아야 하지 않을까요?”서왕이 그에게 되물었다.“넌 황후 일행이 어디까지 도착했는지 알고 있느냐?”순간 유화는 당황해서 입을 다물었다.식량 운반대가 순조롭게 남부에 도착하게 하기 위해 그는 며칠 전, 황후의 행적을 추적한 적 있었다.하지만 보낸 수하가 돌아와서 하는 말이 황후가 어디에 있는지 찾을 수 없다는 얘기였다.서왕은 침착하게 찻잔을 내려놓고 부드러운
오백이 동산국의 손에 넘어갔다는 소식에 봉구안의 표정은 곧바로 냉엄해졌다. 소욱은 그녀의 손을 가만히 잡으며 말했다. “내가 너에게 일찍 말하지 않은 건, 네가…” “살아 있습니까?” 봉구안이 그의 말을 가로막으며 직접 물었다. 소욱은 그녀를 안심시키려 했다. “현재로서는 포로로 잡혀 있을 뿐,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듯하니 걱정 말거라. 이미 구출 작전을 진행하고 있으니, 머지않아 데려올 수 있을 것이다.” “오백의 일은 절대 마음 놓고 기다릴 수 없습니다.” 봉구안의 표정은 심각해졌다. 그녀는 자리에 일어나 소욱에게 말했다. “가장 빠른 방법은 단대연을 찾는 것입니다.” 그날 황제는 단대연을 급히 소환했다. 그날 당일.단대연이 어전에 들어서자, 황후 또한 그곳에 자리하고 있었다.회임한 듯한 작은 배를 살짝 드러낸 모습이었다. 봉구안은 회임한 경험은 없었지만, 수많은 임산부를 보며 체득한 모양인지, 정확하게 임산부의 걸음을 흉내 내고 있었다. 여유로워 보이지만, 항상 태아를 신경 쓰는 듯한 몸가짐이었다. 단대연은 공손히 두 사람에게 절을 올렸다. 며칠 전까지 단대연은 거미줄로 불리는 은밀한 조직의 잔당을 찾아다니며, 동방세와 긴밀히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최근 며칠 동안 그는 십방산의 해독제를 받기 위해 도성에 와 있었고, 진전 상황을 보고하려고 했다. 그러나 황제가 이렇게 급히 부를 줄은 몰랐다.봉구안은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단대연, 너의 도움이 필요하다.” “날 위해 나서줄 수 있겠느냐.”그녀는 무겁게 말을 꺼냈다. 단대연은 곧바로 물었다.“무슨 일이십니까? 말씀해 주십시오.”그의 태도는 진지하면서도 친근해, 마치 오랜 벗처럼 보였다.봉구안은 자연스럽게 말을 이어갔다. “몇 달 전, 나는 동산국의 비밀 상로 하나를 발견하였다.” “이 상로는 약쟁이 사건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의심되어, 사람을 보내 조사를 진행하였지. 허나 내가 동산국에 보낸 자가 동산국에 붙잡혔다는 소식
진한길이 떠난 뒤, 장순은 벅차오르는 감정을 억누르며 서둘러 집 안으로 뛰어들어갔다.침상 위에는 한 여인이 누워 있었다. 마치 죽은 사람처럼 눈을 감고 꼼짝도 하지 않았다.숨을 쉬고 있다는 것만 빼면, 그녀는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었다.장순은 침대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어머니의 손을 꼭 잡았다.그는 눈물을 억지로 참으며 힘겹게 말했다.“어머니, 제가 교무당에 들어가게 됐습니다.”“이제부터 매달 조정에서 제게 녹봉을 줄 것이라 합니다. 드디어 어머니의 약을 살 돈이 생겼습니다!”그의 모친은 오랫동안 병을 앓아왔지만, 돈이 없어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했다.장순이 과거시험에 목을 매고 관리가 되려 했던 이유도 어머니를 치료할 돈을 벌기 위해서였다.그에게 글을 읽고 과거에 급제하는 것 외에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올해 과거시험에 응시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지만, 황제가 갑작스레 시험 일정을 앞당겨버리고 말았다.그는 황제에게 크게 원망을 품었고, 그 분노를 풀기 위해 등불에 황제를 비방하는 시구를 써넣었다.등불들이 따로 팔릴 것이라 생각했지만, 시구가 연결된 것을 발견한 관아가 그를 붙잡았다.칠석날 관아에 잡혀간 그는 며칠 동안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그 시간 동안 그는 깊이 후회했다.그가 붙잡힌 동안 아무도 어머니를 돌볼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출소한 후에도 다시 붙잡혀 더 큰 벌을 받을까 두려워 마음을 졸이고 있었다.그러나 예상 밖으로 황제는 그를 벌하기는커녕, 교무당 입학을 허락하고 모친을 치료할 어의까지 보내주겠다고 했다.그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기뻤다.“이제부터는 황제 폐하를 찬양하는 시를 더 많이 써야겠습니다!”장순이 침상을 떠난 후에도 그의 모친은 미동조차 없었다.깨진 창문으로 차가운 바람이 들어와 그녀의 머리칼을 휘날리고, 어두운 입술 위로 햇살이 스며들었다.장순이 교무당에 들어간다는 소식은 곧 숙부님 집에도 전해졌다.칠석날 그를 꾸짖으며 거의 연을 끊으려 했던 숙부와 숙모는 황제의 은혜를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소욱은 봉구안의 대답에 눈빛이 따뜻하게 녹아내렸다.그는 그녀의 손을 놓기 아쉬운 듯 꼭 붙잡으며 말했다.“내일 바로 이 일을 공표하도록 하마.”그러나 봉구안은 차분히 말했다.“그렇게 서두르실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 남제의 사경이 불안정하니 우선 적군을 처리하는 것이 급선무입니다.”소욱은 고개를 끄덕였다.“네 말이 맞다. 그럼 이만 식사부터 하자구나. 이 일은 나중에 다시 논하자.”그는 그녀가 오랜 여정으로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했을 것이라 생각했다.봉구안은 배가 고파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이내 곧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말했다.“폐하께서 제 손을 붙잡고 계시니 제가 젓가락을 어떻게 쓰겠습니까?”소욱은 웃으며 답했다.“그럼 내가 친히 먹여주도록 하마.”“아닙니다.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봉구안은 그의 손가락을 재빨리 풀며 단호히 말했다.……궁으로 돌아가기 전, 봉구안은 먼저 처리해야 할 일이 있었다.성 외곽의 한 농가.뜰은 난장판이었다.개가 닭을 쫓아가고, 닭은 날아오르며 달걀은 땅에 떨어져 깨져 있었다.열 살쯤 되어 보이는 소년이 어른스럽게 뜰 구석에 앉아 대나무 바구니를 엮고 있었다.그의 발치에는 낡은 책 한 권이 놓여 있었다.소년의 이름은 장구단, 학명으로는 장순이라 불렸다.그는 낯선 사람들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경계하며 바구니를 내려놓고 벽에 기대 있던 막대를 집어 들었다.“누구를 찾으십니까!”진한길과 몇 명의 호위병들은 칼을 차고 서 있었고, 이 모습은 순박한 시골 마을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소년의 얼굴은 때가 묻어 칙칙했지만, 검은 눈동자는 날카롭게 빛났다.그는 진한길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이 사람이 평범한 이가 아님을 알아챘다.진한길은 소년의 사정을 이미 들어 알고 있었지만, 직접 보니 예상보다 훨씬 처참했다.지붕은 기와가 빠져 비 오는 날이면 물이 새기 일쑤일 것 같았고, 기둥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보였다.문 옆에 붙은 대련은 소년이 직접 쓴 듯했지만, 형편없는 종이와 먹물로 인해
소욱은 곧바로 봉구안을 일으키려 하며 물었다.“황후, 어서 일어나거라. 갑자기 왜 이러는 것이냐.”그녀가 비응군이 벌을 받을까 두려워하는 건지, 아니면 스스로 벌을 받겠다는 뜻인지 이해되지 않았다.어느 쪽이든 이렇게까지 격식을 갖출 필요는 없었다.하지만 봉구안은 일어나지 않은 채, 그대로 고개를 숙이고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폐하, 비응군을 북대영으로 돌려보내 주시옵소서.”소욱은 순간 미간을 찌푸렸다.그녀가 이 문제를 위해 이렇게까지 예를 갖추리라곤 생각지 못했다.그는 그녀의 팔을 붙잡아 일으키며 말했다.“구안아, 너와 나 사이에 이런 격식은 필요 없지 않느냐.”“비응군의 일이라면 그냥 내게 따로 부탁했으면 됐을 것이다.”그 말에 봉구안은 품에서 병부를 꺼냈다.그것은 서여국으로 출사하기 전, 소욱이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맡겼던 병부였다.봉구안은 그것을 항상 신중히 보관해왔고, 이제 남제로 돌아왔으니 마땅히 돌려줘야 한다고 생각했다.하지만 소욱은 병부를 받지 않았다.그는 무거운 어조로 말했다.“부부는 일심동체다. 나의 것은 너의 것이기도 하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명확히 구분하려 하느냐? 병부는 네가 계속 가지고 있어라.”그러나 봉구안은 단호히 말했다.“여인은 국정에 관여하지 않습니다. 하물며 병권은 더더욱 그렇습니다.”“이 병부는 폐하께 돌려드리는 것이 옳습니다. 조정 관료들이 알게 되면 쓸데없는 소란을 일으킬 것입니다.”소욱은 그녀의 고집에 결국 병부를 받아들였지만, 두 사람은 각기 다른 마음을 품은 채 조용히 있었다.방 안의 분위기는 이전처럼 부드럽지 않았다.소욱은 더 이상 식사에 집중할 수 없었다.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봉구안의 옆으로 다가가 앉으며 진지하게 말했다.“구안, 내가 너를 황후로 맞아들인 건 진심으로 너를 사랑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북대영을 자유롭게 이끌던 너에게 이 궁은 분명 답답한 곳이었을 것이다.”“너는 분명 억울했겠지.”“네가 소장군이었다면 전장을 누비며 공을 세우고, 심지어 봉왕이나 봉
황성.오늘의 망강루는 유난히 북적거렸다.소욱은 황후가 서여국에 출사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것을 우려했다. 특히 그녀의 가짜 회임에 대해 사람들이 눈치채는 일이 없도록 신경 썼다. 그 때문에 그는 궁 안에서 비응군을 위한 축하 연회를 열 수 없었다. 대신 궁 밖의 망강루를 빌려 연회를 준비했다. 1층에는 수십 개의 식탁이 놓였고, 비응군은 나눠 앉아 있었다.한편, 은위들은 따로 두 개의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그 누구도 은칠에게는 말을 걸지 않았다.그가 워낙 귀찮은 존재였기 때문이다.남제로 오는 길 내내 그는 멈추지 않고 글을 써댔다. 그 때문에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 욕은 욕대로 먹고, 매를 맞기까지 했다.은칠은 억울하기 그지없었다.황후의 출사 기록을 충실히 작성한 것은 자신인데, 얻어맞는 것도 자신이었다.이제야 깨달았다. 사관 노릇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하지만 이런 미움을 사는 역할도… 그는 여전히 감당해야 했다.2층, 별실.문 밖에서는 진한길이 경비를 서고 있었다.방 안에서는 황제와 황후가 단둘이 고요히 식사를 하고 있었다.강을 내려다보며 멀리까지 펼쳐진 풍경은 참으로 아름다웠다.봉구안은 서여국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서여국 황제에게는 몇십 년 전에 잃어버린 여동생이 있다고 합니다. 제게 자신의 여동생을 찾아달라고 부탁했어요. 이게 유일한 단서인데, 부러진 옥비녀 반쪽입니다."소욱은 그 이야기에 관심이 없다는 듯 무심하게 대답했다."사람을 찾는 일이면 본국에서 해결하면 될 일이 아니더냐? 서여국에는 사람이 없단 말이냐?"그는 그저 황후와 함께 식사를 하며 그녀를 위로하고 싶었다.그러나 봉구안의 마음은 여전히 국사에 있었다.그녀는 오히려 남제의 상황을 물었다."제가 없는 동안 담대연이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는 않았습니까?"소욱은 차분한 얼굴로 진지하게 말했다."첩보에 따르면, 겉으로는 남제를 도와 적을 막는 데 최선을 다하는 듯하지만…"그때 갑자기 바깥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소욱
봉구안은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눈앞에 보인 것은 온몸에 보랏빛 옷을 차려입고 눈에 띄게 화려한 소욱이었다.그녀는 잠시 할 말을 잃어 질끈 눈을 감았다.저 사람이 정말 자기 서방이 맞단 말인가? 그 위엄 넘치는 한 나라의 황제가 맞는지 의심스러웠다.봉구안은 못 본 척하고 조용히 자리를 뜨고 싶었다.하지만 소욱은 아내를 향한 그리움을 감추지 못하고 그녀를 향해 빠른 걸음으로 달려왔다. 그의 옷자락이 바람에 펄럭이며 흩날렸다.비응군은 눈치 있게 물러나 황후와 황제가 단둘이 만날 수 있도록 자리를 비켜주었다. 하지만 취사는 날카로운 눈으로 황후가 살짝 뒤로 물러서는 모습을 알아차렸다. “부인!”소욱은 흥분한 얼굴로 봉구안을 와락 끌어안았다.공공장소에서 그는 그녀를 황후라 부를 수 없었다.두 사람이 가까워지자, 봉구안은 그의 옷에서 풍기는 강한 향을 느꼈다. 그 향은 다소 자극적이었다.봉구안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누구신지 모르겠지만, 당장 제 몸에서 떨어지세요.”“구안아, 방금 뭐라고 했느냐?”그의 눈빛이 반짝였지만 어리둥절한 기색이 역력했다.봉구안은 억지로 웃으며 두어 번 헛기침을 했다.“아무것도 아닙니다.”차마 그에게 귀신에게 씌었냐고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그녀는 왜 이렇게 요란한 옷을 입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한 나라의 황제가 이토록 화려하게 차려입다니, 예전에 그가 자신에게 골라준 옷 색감은 아주 훌륭했다. 허나 정작 왜 본인은 이런 그릇된 선택을 하는 걸까.봉구안은 한 손으로 이마를 짚은 채 고개를 숙이고 걸었다. 마치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려는 듯했다.소욱은 그녀를 데리고 서둘러 가마에 올랐다.가마 안에서 그는 봉구안의 손을 꼭 붙잡고 입을 맞추며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그러나 봉구안은 손을 뿌리치며 그의 얼굴을 의심스러운 듯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그녀가 이렇게까지 의심스러워하는 이유는 단순했다. 이 사람이 진짜 소욱이 맞는지, 혹시 다른 누군가가 그의 얼굴로 변장한 것은 아
그 손님은 소년을 향해 노발대발하며 크게 소리쳤다. “야! 이 어린놈아! 돈을 냈으면 일을 해야지! 말귀를 못 알아듣는 것이냐?”“내가 '그대의 손을 잡고, 그대와 함께 늙어가리라'라고 써달랬으면, 그대로 쓰면 될 걸 왜 이리 말이 많아!” 소년은 창백하고 여위었지만, 붓을 움켜쥔 손과 목소리에는 단호함이 묻어났다.“안 되는 건 안 되는 겁니다! 그건 군가라고요. 전우들끼리 사용하는 것을 어찌 애첩에게 주는 시에 사용을 한단 말입니까!” “그 군가는 이리 함부로 쓸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손님은 이를 갈며 격분했다. “애첩? 지금 내 부인을 능멸하는 것이냐! 어린 게 버릇없이! 오냐, 좋다! 오늘 내 널 죽여버릴 것이다!” 소년은 물러서지 않고 맞받아쳤다. “절 죽인다 해도 나으리께서는 간부음녀를 하고 계신 것입니다! 간통한 남자와 음란한 여자라는 뜻이죠. 이미 아내가 있는 주제에 기생과 혼인하려고 하다니, 대장부로서 부끄러운 줄 아세요! 차라리 환관이 되는 게 낫겠습니다! 그러면 자식도 못 낳을 테니 말입니다!” 그의 말은 사람에게 짐승을 비유하는 것처럼 모욕적이고 날카로웠다. “이 꼬맹이,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지껄이는구나!” 손님은 얼굴이 시퍼렇게 질린 채 손을 올렸지만, 갑자기 그의 귀를 누군가 잡아챘다. “누구야! 감히 내 귀를…” 고개를 돌린 그는 자신을 잡은 이가 다름 아닌 그의 정실 부인이라는 걸 발견했다. 그는 예상치 못한 아내의 등장에 놀란 기색이 역력하였다. “내가 널 먹여 살리고, 궁 안에 들어가 시험 보라고 뒷바라지했더니… 감히 기방에서 여인을 만나러 다녀?” 그러고는 그녀는 소년을 향해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여보게, 정말 고맙네. 자네가 내게 알려주지 않았다면 난 끝내 이 사실을 알지 못했을 걸세. 이 사람이 이렇게 간악한 줄도 모르고 정말 당할 뻔했네.” 소년은 두 손을 모아 진지하게 인사했다. “별말씀을요. 악을 벌하고 선을 드러내는 건 누구나 해야 할 일입니다.”
봉구안의 표정이 굳어졌다. 취사가 이런 말을 꺼낼 정도라면, 아마 그의 생각만은 아닐 것이다. 이제 그녀는 남제의 황후가 되었고, 다시 군대를 이끌 기회는 없을 터였다. 취사는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고 모든 말을 털어놓았다. 죽을 각오로 한 이야기였다. "저희는 황후마마께서 조직하시고, 훈련시켜 주셨습니다. 전장에서 싸우기 위해서 말입니다.” “하지만 황궁 금군에 편입된 뒤로, 형제들은 길을 잃은 것처럼 방황하고 있습니다.” “비록 지금은 마마께서 소장군이 아니시지만, 황제의 깊은 신임을 받고 계시지 않습니까? 교무당에서 직책을 맡으실 수 있을 정도인데, 어찌 새로운 군대를 조직하지 못하시겠습니까?” “황후마마, 불경한 말인 줄 알지만, 서여국 황제의 말도 충분히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황제 폐하와 혼인하신 뒤로 실권이 없으시니, 이제 남은 건 자녀를 돌보고 내조하는 일뿐이겠지요." “그런데 이렇게 뛰어난 무예를 그냥 묵히시는 건 정말 안타깝습니다.” 봉구안은 차갑게 그의 말을 끊었다. "서여국 황제가 너를 찾아온 적이 있느냐?" 취사는 순간 얼어붙었다. 말실수를 했다는 걸 깨달았지만 이미 때는 늦은 후였다. 그는 솔직하게 고백했다. "그렇습니다. 저를 찾아와 설득하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서여국에 남게 도와달라고 부탁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마마의 뛰어난 무예 실력을 안타깝게 여기시며, 마마께서 권력을 가지실 수 있도록 설득해달라고 하셨습니다."봉구안은 손에 들고 있던 구운 생선을 다시 내려놓았다. 그녀는 술주머니를 들어 몇 모금 마셨다. 몸은 따뜻해졌지만, 마음은 공허해졌다. "너도 알다시피 남제와 서여국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황후가 군대를 이끌다니? 이 소식이 알려지면 조정의 신하들이 들고일어날 것이 뻔했다. 설령 소욱이 그녀를 아무리 용인한다고 해도,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을 허락할 리 없었다. 그녀 또한 소욱에게 부담이 갈만한 일을 할 생각은 없었다.
고인이 된 친부 이야기가 나오자, 서여국 황제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내가 어릴 적에, 아바마마께서는 병으로 세상을 떠나셨다.”“궁 안에는 아바마마의 용모파기조차 남아 있지 않다.”“나도 그분의 얼굴이 어떤지 기억나지 않는다. 꼭 용모파기가 필요하다면, 그 시절을 기억하는 노인들에게 물어봐야 할 것이다.”봉구안은 난처해졌다.용모파기가 없다는 건 외모에 대한 단서가 전혀 없다는 뜻이었다.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실낱같은 단서를 찾는 건 마치 모래사장에서 바늘을 찾는 것과 같았다.서여국 황제가 말을 이었다.“그때 나는 숙연과 겨우 두세 살이었다. 남자들이 반란을 일으켜 궁으로 들이닥쳤고, 어마마마께서는 혈통을 지키기 위해 나와 숙연을 궁 밖으로 내보내 숨기셨다.”“훗날 자매가 서로를 알아볼 수 있도록 옥비녀를 반으로 나누셨지.”“이것이 내가 가진 옥비녀의 반쪽이다.”황제는 흰 옥비녀의 반쪽을 꺼내 보였다. 비녀 머리와 일부 자루만 남은 상태였다.봉구안이 조심스럽게 물었다.“그렇다면 진짜 여동생 분께서 나머지 비녀 조각이 있다는 말씀이신가요?”서여국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렇다.”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반쪽 옥비녀와 비단 상자를 봉구안에게 건네며 말했다.“이것을 너에게 맡기마.”이는 서여국 황제가 봉구안을 깊이 신뢰한다는 표시였다.봉구안은 두 손으로 옥비녀를 받으며 차분한 눈빛을 띠었다. 그 눈빛에는 사람을 안심시키는 믿음직스러운 기운이 담겨 있었다.서여국 황제가 손목을 붙잡았다.봉구안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였다.서여국 황제는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소장군, 정말로 서여국에 남을 마음이 없느냐?”그녀는 끝내 포기하지 못한 듯 물었다.봉구안이 서여국에 충성을 맹세한다면, 섭정왕의 자리는 물론이고 그보다 더 높은 자리도 내어줄 의사가 있었다.멀리서 은칠이 붓을 들고 무언가를 쓰려 했지만, 은이가 이를 눈치채고는 단숨에 붓을 빼앗아 부러뜨렸다.은이는 부러진 붓을 내던지며 말없이 은칠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이렇게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