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구안은 채 마르지도 않은 머리를 그대로 틀어올렸다.차가운 바람이 불어와 그녀의 치마가 흩날렸다.최 상궁은 그녀의 뒤를 따르며 안타까운 목소리로 말했다.“마마, 폐하께 변명이라도 해보지 그러셨습니까?”“이대로 폐하께서 마마를 오해하시게 그냥 둘 생각이십니까?”봉구안은 공허한 눈으로 전방을 주시하며 답했다.“상관없다.”어차피 그녀와는 다른 세상 사람이었다.편전.태의가 정비의 진맥을 보고 있었다.창가에 선 황제는 먼곳을 바라보고 있었다.정비는 착잡한 눈으로 사내를 바라보았다.황후가 떠난 후, 황제는 줄곧 거기 서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진맥을 마친 태의가 황제에게 아뢰었다.“폐하, 마마께선 찬 기운이 몸에 침입하여 많이 허약해진 상태입니다. 소신은 한기를 쫓는 약을 처방할 테니 절대 다시 바람을 맞거나 하시면 안 됩니다.”“그래, 알았다.”소욱은 뒤돌아서 정비를 바라봤다.똑같이 물에 빠졌는데 한 사람은 이처럼 허약하고 황후는 아무 일 없는 사람처럼 굴었다.무공을 연마한 자라서 다르다는 건가.태의를 물린 후, 정비는 가까스로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폐하, 황후께서는…”진실을 말하고 싶었지만 추홍이 마음에 걸렸다.두 사람의 말이 다르면 추홍은 거짓말을 한 것이 된다.그래서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말을 돌렸다.“호수가가 미끄러웠으니 황후께서 고의로 저를 민 것은 아닐 겁니다.”소욱은 이 얘기를 더 하고 싶지 않았다.그는 싸늘한 눈으로 정비를 바라보다가 말했다.“넌 몸을 추스르는데만 집중하거라.”정비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예.”황제가 떠난 후, 추홍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마마, 왜 황후의 편을 들려 하셨습니까? 사실 장공주께서 직접 지목하셨으니 마마께선 모른 척만 하시면…”정비는 고개를 들고 싸늘한 눈으로 시종을 바라보았다.“폐하께서 그리 쉽게 속아넘어갈 것 같으냐? 정말 장공주의 말을 믿었다면 진작에 황후를 처벌하였을 것이다.”“이런 상황에서 나까지 황후를 지목한다면 폐하께선 날 어떻게
영화궁.최 상궁은 깨 고소한 얼굴로 들어와서 아뢰었다.“마마, 흥혜궁 쪽에 큰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폐하께서 오랜만에 후궁을 찾으셔서 흥혜궁에 머물기로 하였는데 어떻게 된 영문인지 폐하께서 크게 화를 내고 돌아가셨답니다. 게다가 정비마마께 금족령까지 내리셨다는군요!”최 상궁은 신이 나서 말했지만 봉구안은 골치가 아팠다.그녀는 마지막으로 후궁의 업무를 마무리하고 있었다.최 상궁이 옆에서 떠들고 있으니 좀처럼 집중이 되지 않았다.“나가 있거라. 내 허락 없이는 아무도 들이지 말고.”최 상궁은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몰라 상처받은 얼굴을 했다.연상이 떠난 후로 줄곧 옆에서 정성껏 시중을 들었는데 자신을 봐주지 않는 상전에게 서운하기도 했다.봉구안은 그런 최 상궁을 무시하고 그쪽으로 시선도 주지 않았다.“안 나가?”뒤돌아선 최 상궁은 뒤에 서 있는 사람을 보고 놀라서 눈을 부릅떴다.근엄한 표정을 황제가 그곳에 서 있었다.그녀는 재빨리 예를 행했다.“소인, 폐하를 뵙습니다!”봉구안은 하던 일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황제를 바라봤다.소욱의 기억에 영화궁은 항상 적막한 곳이었다.의자에 앉은 그는 탁자에 놓인 온갖 간식들을 바라보았다.아마 최 상궁이 준비했을 것이다.최 상궁은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황제의 옆에서 주절주절 떠들었다.그에 반해 황후는 지시를 기다리는 궁녀처럼 가만히 자리만 지키고 있었다.최 상궁이 말이 많을수록 황후의 과묵함이 더욱 도드라졌다.결국 짜증을 못 이긴 소욱이 차갑게 호통쳤다.“물러가거라.”최 상궁은 그제야 다 안다는 표정으로 내전을 나가 문을 닫았다.소욱이 앞에 와서 앉은 뒤로 봉구안은 조용히 그를 관찰하고 있었다.그는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아 보였다.소욱은 펼쳐져 있는 후궁 장부를 보고 굳은 목소리로 물었다.“이 늦은 시간에 아직도 이런 것들을 보고 있느냐?”봉구안은 공손히 답했다.“예.”그는 진지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황후, 입궁한 이유가 무엇이냐?”봉구안의 눈가에 약간은 다른 감
소욱은 요즘 사방의 전란으로 인해 쉴 틈조차 없이 바쁜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영화궁의 침상에서 그는 오랜만에 깊은 잠을 청할 수 있었다. 흥혜궁.같은 시각, 정비는 욕조 안에 우두커니 앉아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그녀의 눈가는 이미 붉게 부어오른 상태였다.“결국, 나는…해내지 못했어.” 사람들은 모두 그녀가 황제에게 깊은 총애를 받는다고 믿었으나, 사실 황제는 단 한 번도 그녀를 가까이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어찌 황자를 가질 수 있겠는가! 오늘 밤, 그녀는 용기를 내어 황제에게 승은을 청했으나, 돌아오는 것은 황제의 냉랭한 눈빛뿐이었다.황제는 그녀의 청을 단칼에 거절하였다.“분수에 맞지 않는 망상을 하지 말거라.” ‘분수에 맞지 않다…’ 그 말은 즉슨 정비는 황자를 낳을 자격조차 없다는 뜻이 아닌가?“하하...” 그녀는 분노 끝에 그만 냉소를 터뜨렸다. 손으로 입을 틀어막아 황제를 향한 분노와 원망을 애써 억눌렀다.‘폐하께서는 정말로 무정하시구나…’ 욕실 밖에서 시중들던 추홍은 내내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였다. 오늘 밤, 그녀가 모시던 정비는 승은을 입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나, 황제는 단호히 돌아서고 말았던 것이다. … 영화궁.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봉구안은 잠을 청할 시간이 훌쩍 지났지만, 침상 위에는 이미 한 사람이 누워 있었다. 그가 언제 깨어날지 모르는 탓에 그녀는 작은 침상에서 하룻밤을 지내기로 마음먹었다. 한밤중에, 궁 밖에서 긴급한 전갈이 전해졌다. “폐하, 북방으로부터 전갈이 왔사옵니다!”봉구안은 순간적으로 잠에서 깨어나 몸을 일으켰다. 침상 위의 소욱 또한 눈을 떴다. 그는 한 손으로 휘장을 걷어내며, 맑고도 날카로운 얼굴을 드러내었다. 그는 곧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더니, 작은 침상에서 잠들어 있던 봉구안을 발견하였다. 그는 다소 쉰 듯한 목소리로 차갑게 말했다. “침상에서 자거라.” 이후, 그는 이내 밖으로 나
소욱은 기꺼이 술잔을 내려놓으며 부드럽고 평온한 어조로 말했다. “좋소, 황후의 말을 따르겠소.” 이게 어찌 된 일이지? 돌아온 황제의 대답은 그의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봉구안 역시 그가 이렇게 순순히 권유를 받아들일 줄은 예상치 못하였다. 그녀는 다만 황제가 과음하여 자신의 계획이 틀어질까 염려하였을 뿐이었다. 연회에 참석한 대신들은 감탄하며 말했다. “폐하, 이번에 조 나라가 크게 패하니 참으로 통쾌하옵니다!” “가짜 방어도를 이용하여 남제의 방어선을 뚫으려 했다니, 참으로 어리석은 자들이옵니다.” “폐하, 북방에는 ‘장기양’이라 하는 소년이 있사온데, 이번 전투에서 공로가 지대하였으니 장차 크게 쓰일 인재이옵니다!” “장기양이라 하였소? 어딘가 익숙하군. 혹시 그 옛날 현영석을 바친 그 소년이 아니오?” “바로 그 아이가 맞사옵니다!” 봉구안은 표정의 변화 없이 조용히 술을 들이켰다. 소욱의 눈에 장기양에 대한 흥미가 번뜩였다. 소환의 제자라면, 필시 범상치 않은 인물일 것이다. 그가 계속 조정을 위해 힘쓴다면, 조정도 결코 그를 홀대할 수 없었다.“짐의 뜻을 전하라. 오늘부로 장기양을 교위로 봉하노라!” “명 받들겠사옵니다!” 대신들은 한 목소리로 축하하였다. “폐하께서 젊고 유능한 인재를 얻으셨으니, 이는 곧 하늘이 남제를 보우하심이옵니다!” 소욱은 평소의 냉엄하고 위엄 있는 태도를 잠시 내려놓고 대신들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연회가 끝난 후, 봉구안은 황제와 나눌 말이 있었으나, 공교롭게도 소욱 역시 그녀에게 할 말이 있었다. “황후, 짐과 함께 자진궁으로 갑시다.” …자진궁. 그곳은 황제가 거처하는 곳인만큼, 엄숙하고도 침범할 수 없는 위엄을 지니고 있었다. 봉구안이 이곳에 발을 들인 것은 이번이 두 번째였다. 최 상궁은 황후를 따라 황제의 침전까지 오게 된 것만으로도 감격에 겨워하였다. 마치 처음 도성에 들어온 시골 여인처럼, 주변을 두리
소욱은 봉구안이 부정할 여지도 주지 않고 입을 열었다. “광한선을 기억하느냐?” “예전에 그 여자 자객의 몸에 뿌렸던 광한선이, 그대 몸에서도 발견되었소.” 봉구안의 머릿속에서 그때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그가 이어 말했다. “광한선은 사람을 추적하는 데 사용되는 물건이지. 일단 묻으면 삼일 안에 냄새가 사라지지 않고, 타인에게 옮겨가지도 않소.” 봉구안의 얼굴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설마, 그렇게 일찍 정체가 드러난 것이란 말인가? 소욱은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대는 날 구하기 위해 내공을 소모했소.”“또한, 내가 치명적인 약물에 중독되었을 때도 그대가 날 도와주었소.” “황후, 그대가 날 위해 한 일들을 나는 모두 알고 있소.” 봉구안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제가 폐하를 구한 것은 폐하께서는 일국의 군왕이시기 때문이옵니다.”“하지만 의심하지 않으셨사옵니까? 깊은 규수에 갇혀 지내던 여인이 어찌 무공을 익힐 수 있었는지를 말입니다.” 소욱은 차분히 입을 열었다. “나는 이미 사람을 시켜 조사했소.” “심지어 의심하기도 했소. 그대가 진정 봉장미가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하였소.”“추석 연회 그날 밤, 나는 그대와 그대의 부친이 혈연관계임을 증명하기 위해 친자 확인을 준비했었소.” “결과는 그대가 봉 대인의 친딸이라는 것이었소.” “그대는 비밀이 많지만, 나는 그것을 크게 신경 쓰지 않소.” 말을 마치며, 그는 손바닥을 펴고, 그 금빛 찬란한 비녀를 그녀 앞에 내밀었다. “나는 단 하나를 원하오.”“내게 진심을 다하고, 후궁을 잘 다스릴 황후. 봉장미, 나는 그대가… 충분히 만족스럽소.” “그러니 나는 기꺼이 그대를 받아들여, 나의 아내로 삼고자 하오.” 황제로서 그가 이처럼 낮은 자세를 취해 마음을 전한 것은 드문 일이었다. 다른 여인이라면, 기쁘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러나 봉구안은 비녀를 받지 않고 두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녀는 무거운 치마를 손으
봉구안은 굳건히 말했다. “전하, 소첩의 대체 혼인에 대하여 봉가에서는 실로 아는 바가 없사옵니다.” 소욱은 대답하지 않고, 그저 차갑게 그녀를 응시하였다. 마치 그녀의 혼까지 꿰뚫으려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들의 시선이 마주하자, 침전 안은 숨소리마저 들릴 만큼 고요해졌다. 분노에 차오른 그의 숨결이 점점 거칠어지는 소리만이 가득할 뿐이었다. 이윽고, 그는 그녀의 턱을 놓고 돌아섰다. 등진 채 두 손을 뒤로 하여 단단히 주먹을 쥔 모습에서, 그의 억누르는 분노가 드러났다. “이런 큰 일을 봉가에서 어찌 모른단 말이냐?” “대체 그대는 나를 얼마나 어리석게 본 것이오?” “아니면, 그대가 무슨 일을 꾸미더라도 내가 그대를 용서하리라 확신한 것이오?” “하지만, 그대는… 그대는 오늘밤, 이 사실을 말해서는 아니 되었소.” “그대는 모든 것을 망쳐놓았소!” 그는 날카로운 어조로 말하며 등을 돌린 채, 떨리는 손을 겨우 진정시키고 있었다. 그녀에게 내밀었던 봉황 비녀와, 애써 쌓아온 믿음과 마음이 모두 산산이 부서졌다. 소욱은 스스로 생각했다. 후궁들 간의 치열한 암투 속에서도 황후만큼은 다를 줄 알았다.그러나, 그녀도 결국 다르지 않았다. “폐하…” “그 입 다물거라! 지금 당장은 네 말을 듣고 싶지 않구나!” 소욱은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그녀를 질책하며 돌아섰다. 그러나 그녀의 고요한 눈빛을 마주하는 순간, 그는 문득 과거의 기억들이 떠올랐다. 그녀는 자신을 구하려고 독을 해독하며 중상을 입었고, 그를 품에 안고 말하였다. 당시 그녀는 그에게 분명 그의 아내가 되고 싶다고 하였다.그 모든 장면은 가식 없는 진심이었음이 분명했다. 한참 동안 침묵하던 소욱은 마침내 차분히 물었다. “그렇다면, 상처를 복원할 비밀 약재 또한 거짓이더냐?” 그는 그녀에게 얼마나 더 숨긴 진실이 있는지 알고 싶었다. 봉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소욱은 그녀를 응시하며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
봉구안은 담담한 표정으로, 그 눈빛에는 결연함이 서려 있었다. “황귀비를 잡아들인 것은 소인의 결정이옵니다. 그에 따른 죄책은 기꺼이 감수하겠사옵니다. 지금은 이 모든 진실을 밝혀야 할 때이옵니다.” 그러면서 그녀는 한 걸음 나아가 말을 이어갔다. “황귀비는 스스로 인정하였사옵니다. 그녀가 장미를 해하려 한 것은, 신비한 자에게 협박을 받았기 때문이라 하였사옵니다.”“그 신비한 이는 그녀의 죄를 빌미로 협박했사옵니다. 그리고 그 편지는, 이곳에 있사옵니다.” 봉구안은 한 봉투를 내밀었고, 소욱은 잠시 망설이더니 그 편지를 열었다. 봉구안은 이어 또 다른 봉투를 꺼내들었다. “몇 달 전, 정비도 이 신비한 자의 편지를 받았사옵니다.” “그 편지에는 소인의 아버지가 용화사 승려를 매수하여 명서를 조작한 사실이 적혀 있었사옵니다.” 소욱의 이마는 깊게 찡그려졌고, 그는 묵묵히 편지를 내려다보았다. 정비마저도 이 사건에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에 분노가 섞인 혼란이 그의 마음을 어지럽혔다. 봉구안은 침착한 태도를 유지하며 말을 이어갔다. “그리하여 소인과 정비는 힘을 합쳐 이번 정월 대보름날 밤, 그 신비한 자가 다시 방비전에 몰래 들어와 고발 편지를 남기려 할 때 그녀를 붙잡았사옵니다.” “그 신비한 자는 다름 아닌 맹교먹이었사옵니다.” 소욱의 눈썹이 떨렸다. 그는 그녀의 말을 믿기 어려웠다. 하지만 봉구안의 태도는 단호했고, 그녀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맹교먹이 정비에게 보낸 편지 역시 이곳에 있사옵니다.” “지금 폐하께서 보시고 있는 두 편지와 그 편지를 비교하시면, 그 글씨가 모두 동일인임을 알게 되실 것이옵니다. 이는 맹교먹이 봉장미를 해친 진범임을 증명하옵니다.” 소욱은 손에 든 편지들과 봉구안이 건넨 편지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믿고 싶지 않았지만, 글씨체가 분명히 일치했다. 맹교먹, 그토록 신뢰하고 중용했던 그녀가 어찌 이런 끔찍한 음모의 주모자일 수 있는가? 봉구안은 소욱의 침
봉구안의 차가운 얼굴에는 한 줄기 평온이 깃들어 있었다. 이는 마치 서릿발 속 매화가 한겨울을 이겨내고 피어난 듯하였다.“저 또한 맹가의 사람이옵니다.” 단출한 이 한마디가 천 층의 파도를 일으켰다. 소욱의 얼굴이 한순간 굳어졌다. 봉구안이 이어서 말했다. “저는 봉가에서 버림받은 몸이옵니다. 저를 거두어 기른 이는 다름 아닌 맹건 장군 부부였사옵니다.” 소욱은 즉시 깨달았다. 그가 예전부터 느껴왔던 그녀의 맹교먹에 대한 지나친 관심이 이제야 풀리는 순간이었다.알고 보니 그녀와 맹교먹은 같은 문하에서 배운 사제지간이었던 것이다. 그녀의 무공이 비범한 이유 또한 밝혀졌다. 스승이 맹건이라면 그럴 법도 했다.소욱은 그녀의 말을 끊지 않고 조용히 경청하였다. 그녀는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갔다. “봉장미 사건에 대해서 처음에는 교먹을 의심하지 않았사옵니다. 하지만 이후 여러 증거가 그 아이를 가리키고 있었사옵니다.” “저 또한 폐하와 마찬가지로 이해할 수 없었사옵니다. 저는 그 아이와 어릴 적부터 함께 자랐고, 우애가 돈독했으니 말입니다…”“어찌하여 저의 친여동생을 해칠 수 있었는 지 저는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었사옵니다.” “그러던 중 스승님의 입을 통해 알게 되었사옵니다.”“스승님께서 그 아이가 맹성주를 사칭하는 것을 허락한 이유는 집안의 노부인 때문이라 하였사옵니다.” “최근 몇 년간 노부인의 건강이 악화되자 스승께서는 노부인이 돌아가시면 맹성주가 전장에서 전사하는 것으로 계획을 세우셨사옵니다.” “허나 그렇게 되면 맹성주를 사칭한 이는 반드시 가짜 죽음을 맞이하여 맹 소장군이라는 신분을 버려야 했고, 이는 곧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해야 한다는 뜻이었사옵니다.” 봉구안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이것은 본래 그녀와 스승, 스승의 부인이 함께 세운 계획이었다. 그들은 그녀가 평생 맹성주의 껍데기 속에 갇혀 있기를 바라지 않았던 것이다. 다만 그녀는 중요한 부분을 의도적으로 모호하게 넘어갔다.
옥령산.양연삭은 어지럽게 얽힌 바위 틈에서 뛰쳐나왔다.병사들은 적을 만난 듯 경계태세에 들어갔다.동방세가 즉시 앞으로 나서며 혼자서 양연삭을 저지해, 그를 그냥 도망치게 두지 않았다.곧이어 산을 지키는 십이사명이 출동해 진을 결성하였고, 양연삭을 가두고 연달아 공격을 퍼부었다.봉구안 일행이 도착했을 때, 그들은 이미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다.격전은 바위를 산산조각 내며 이어졌다.병사들이 활과 화살로 공격했지만, 양연삭의 움직임이 너무 빨라 제대로 맞히기 어려웠다.봉구안은 가면을 쓰지 않고 본래 얼굴을 드러냈다.그때 양연삭은 소욱을 알아보았고, 더불어 맹성주도 알아차렸다. 바로 자신의 아들 양소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원수였다.맹성주가 아니었다면, 양소도 그렇게 비참한 꼴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양연삭의 가면 속 두 눈이 피처럼 붉게 물들었다.그는 즉시 십이사명의 포위를 뚫고 소욱과 봉구안을 향해 돌진했다.봉구안은 장검을 뽑아 정면에서 맞섰다.소욱과 동방세는 양쪽에서 협공했다.세 사람은 마치 화살처럼 날카로운 진형을 이루었다.진한길과 병사들은 황제를 지키기 위해 양연삭의 공격을 저지하며 방어 태세를 유지했다.양연삭의 목표는 분명했다. 먼저 소욱을 죽이고, 그다음 맹성주를 죽이는 것이었다.그는 전투 중 바위 파편에 의해 이미 중상을 입었으나, 그의 마공은 현장에 있는 그 누구도 대적할 수 없을 정도였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방해가 되는 한 사명을 붙잡아 그들의 내공을 전부 흡수했다.나머지 열한 사명이 분노하며 외쳤다.“마두야! 목숨을 내놔라!”동방세는 가장 먼저 봉구안의 이상함을 눈치챘다.그녀의 움직임은 지나치게 무모했다. 예전 같지 않았다.양연삭의 함정에 빠진 봉구안이 공격을 당할 위기에 처하자, 동방세가 다급히 외쳤다.“비켜! 소환!”양연삭이 이 말을 듣고 잠시 멈칫했다.소환?동방세가 맹성주를 소환이라 불렀다?설마… 맹성주와 소환이 같은 사람인가!?양연삭은 순간 타오르는 분노에 휩싸였다.새로운 원한과 옛 원한이
단회욱은 죽었다.사실 그는 이미 오래전에 기력이 다해 있었다.그동안 간신히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오직 그 다섯 해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다.하지만 이제, 그의 구안이 자립할 수 있게 되었고, 곁에는 친구와 연인이 있는 것을 본 이상, 자신이 더는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 그는 완전히 힘을 놓아버렸다.그는 이 생에 후회도, 원망도 없었다.단정의 울부짖는 소리가 고요한 밤을 찢어발겼다.온 왕부가 암울한 그림자에 휩싸였다.소욱은 뜰에 서서, 창백한 달을 올려다보았다.처음으로 마음이 불안해졌다.만약 단회욱이 살아 있었다면, 과연 자신이 이길 수 있었을까?그들과 단 며칠 함께했을 뿐이고, 나눈 말은 몇 마디 되지 않았지만, 그는 왜 봉구안이 과거에 단회욱을 그렇게 좋아했는지 알 것 같았다.이토록 온화한 군자는 죽는 순간까지도 타인을 생각했다.소욱은 봉구안이 단회욱 때문에 우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아 방으로 들어갔다. 마음이 너무 혼란스러웠다. 여러 가지 감정이 뒤섞여, 뭐 하나 잡히지도 않고, 마음이 좀처럼 안정되지 않았다....남산왕은 왕부에서 사람이 죽었다고 불길하게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단회욱을 위해 묻을 자리를 찾겠다고 나섰다.하지만 단정은 이를 거절했다.그는 형을 옥령산에 묻고 싶지 않았다.양연삭도 옥령산에서 죽었으니, 형이 죽어서까지 편히 쉬지 못하게 할 수 없었다.단정은 화장을 하고, 유골을 북방에 묻겠다고 했다.그곳은 형이 평생 가장 행복했던 곳이고, 형이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할 수 있었던 곳이었다.“형님께서는 살아 있을 땐 뜻을 이루지 못했지만, 적어도 죽어서만큼은 북방에 계셨으면 좋겠어요.” 단정은 고개를 숙인 채, 울음을 삼키며 봉구안에게 말했다.봉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단회욱의 시신이 화장되던 날, 소욱도 자리에 있었다.그의 시선은 내내 봉구안을 향하고 있었다.봉구안은 줄곧 무표정이었다. 두 눈은 이상하리만치 평온했다.마치 죽은 사람이 자신과 아무 상관없는 사람인 것처럼
“어찌 이런 일이!”봉구안은 손이 떨려왔다.의사가 말하길, 단회욱은 이미 오래 살지 못한다고 했지만, 그래도 아직 시간이 좀 남아 있었다.그녀는 전혀 준비되지 않은 채 그가 이 순간 세상을 떠난다는 현실을 맞닥뜨리고 말았다.봉구안은 곧장 남산왕부로 돌아갔다.문을 열고 들어서니 단회욱은 침상에 누워 기운이 점점 약해지고 있었다.준수한 얼굴엔 생기가 서서히 사라져 가고 있었다.단정은 침상 곁에 무릎 꿇고 그의 손을 꽉 잡고 있었다.“형, 형님! 잠들지 마세요! 겨우 형님을 구해냈습니다… 형님!”봉구안은 한 걸음 한 걸음 굳은 몸으로 다가가, 단회욱을 멍하니 바라보았다.그녀의 눈에는 깊은 안타까움이 서려 있었다.“오라버니…”침대 시트는 이미 그의 피로 붉게 물들었다.그는 그녀를 보며 부드러운 눈빛을 보냈다.마치 그녀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다는 듯, 두려워하지 않게 하려는 듯…“구안아, 난 괜찮아.”그는 힘겹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봉구안의 손은 미세하게 떨고 있었다.그녀는 그의 몸이 얼마나 큰 고통을 겪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심지어, 그에게는 숨을 쉴 때마다 마치 능지처참을 당하는 것 같은 고통이 따랐다.그녀는 마음이 풀리며 조용히 침상 곁에 앉았다.부드러운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정이는 제가 잘 돌보겠습니다. 천룡회도 이미 소탕했으니 더 이상 걱정하지 마세요. 이제… 이제는 마음 편히 쉬세요.”단회욱은 봉구안을 향해 한없이 부드러운 시선을 보냈다.그 안에는 한없는 사랑이 담겨 있었다.“구안아, 아직도 가끔씩 머리가 아프니? 미안해. 더는 약을 만들어 주지 못하겠구나… 너와 혼례를 올리지 못해서, 너에게 행복한 삶을 주지 못해서…… 매일 밤 너를 기다릴 남편이 되어 주지 못해서…”“미안해… 정말로, 널 평생 곁에서 지켜주고 싶었어.”“나는 이미 오래전에 버티기 힘들었어. 하지만 혹시, 혹시라도 죽기 전에 널 다시 볼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감사해… 하늘이 날 불쌍히 여긴 거야.”“정말 다행이야. 널 보고 갈 수 있
동방세가 웃으며 말했다.“좋소. 조금 고생하는 건 괜찮소만, 진짜 양연삭이 도망친다면 골치 아플 일이오.”한 시진 뒤, 봉구안은 남산왕부로 돌아왔다.그녀는 단회욱의 병세가 악화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서둘러 그의 방으로 향했다.침상 옆에 있던 단정의 표정은 몹시 어두웠다.“오늘 황제 폐하께서 형님을 찾아오셨습니다. 폐하께서 다녀가신 이후, 형님이 피를 토하셨습니다.”봉구안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고, 단회욱은 힘겹게 입을 열었다.“정이의 허튼소리를 듣지 말거라. 내 상태와 폐하는 무관하니...”“그저 내 몸이 너무 약해서 그런 것이다. 구안아, 교주의 시신은 찾았느냐?”봉구안은 차분하게 답했다.“혹시라도 누군가 도망쳤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병사들에게 지키게만 하고 시신을 파헤치지는 않았습니다. 오라버니, 너무 염려하지 마세요. 이렇게 많은 사람이 있는데 저희의 눈을 피해 도망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단회욱의 미간이 깊게 찌푸려졌다.“나는 교주가 그렇게 쉽게 죽지 않을 것 같아 걱정이야. 구안아, 반드시 조심하고, 방심하지 말거라.”“만약 정말 그가 도망쳤다면, 기억하거라… 만건성법은 너도 통제하기 어려울 것이다. 무엇보다 마음이 흐트러지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오발에… 쿨럭, 쿨럭!”단회욱은 너무 허약해 한 번에 말을 길게 이어갈 수 없었다. 몇 번 기침을 하더니 목에서 비릿한 기운을 느꼈다.그는 피를 토할 것 같다는 걸 깨닫고 고개를 돌려 봉구안이 보는 걸 피하려 했다.“구안아, 조금 쉬고 싶구나… 이만 침소로 돌아가거라.”그러나 그의 몸은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피가 샘처럼 목에서 솟구치며 터져 나왔고, 그는 손으로 입을 막았지만 피는 손가락 틈새로 흘러나왔다.“오라버니!” 봉구안이 자리에서 일어서려다 그 장면을 보고는 눈이 크게 휘둥그레졌다.“형님!” 단정도 급히 반응해 침대 아래에서 숙련된 동작으로 대야를 꺼내 들고, 형의 상반신을 살짝 일으켜 피를 뱉도록 도왔다.봉구안도 손수건을 꺼내 단
소욱이 방문하자, 단회욱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는지 크게 놀라지 않았다.그는 병색이 짙은 얼굴로 침대 머리에 기대앉아, 단정을 나무랐다.“정아, 무례하게 굴지 말거라. 너는 잠시 나가 있는 게 좋겠구나.”단정은 형이 폭군과 단둘이 있는 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그가 얼마나 잔혹한지 이미 익히 들어왔기 때문이었다.소욱은 방 안으로 성큼 들어와, 거침없이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너희 둘 중 누구든 들어도 상관없다. 내가 할 말은 숨길 것이 없으니...”단회욱은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예.”소욱은 자리에 앉아 기세를 내뿜으며 말을 이었다.“네 성을 보아하니 너는 단씨의 후손이구나.”“단씨 일족이 반역죄로 멸문당했지만, 너희 형제가 목숨을 건진 것은 하늘의 은혜다.”“봉구안, 그녀는 나의 황후다.”단정은 이 말을 듣자마자 버럭 소리를 질렀다.“폐하, 형수님은 더 이상 폐하의 황후가 아니십니다! 두 분께서 이혼하신 사실은 천하 사람들이 다 알고 있습니다!”소욱은 그를 차갑게 흘겨보았으나 더는 그를 탓하지 않았다.“황후를 생각해 너희 형제를 용서하려 한다. 이제부터는 천민 신분을 벗고 정식 신분을 되찾게 해 주도록 하마.”단정은 뜻밖의 선처에 어리둥절했다.폭군이 이렇게 관대한 이유는 그의 형에게 형수님을 포기하라는 암시를 주려는 것이 아닐까?병든 단회욱은 여전히 고운 품성을 유지한 채, 소욱에게 머리를 숙이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이번 일뿐 아니라, 지난번 구중탑에서 구해주신 은혜 또한...”그러나 소욱은 그의 말을 끊으며 단호히 말했다.“나와 너는 아무런 인연도 없다. 너를 구한 것은 오로지 황후 때문이다.”“나는 네가 황후와 다섯 해 약조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한 것을 알고 있다.”“하지만 내가 황후를 향한 감정도 결코 네 것보다 적지 않다.”“네가 빨리 몸을 회복해야 황후도 괴로움과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있을 터.”단회욱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지만, 그의 눈빛은 어딘가 쓸쓸하고 고통스러웠
봉구안은 추측했다.“남산왕 전하께서는 구중탑에 들어간 악인들이 봉맥을 양육하기 위해 희생된 줄 알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당시 태조께서는 옥석비의 살기를 평정하려고 생자를 희생시켜야 했습니다.”“그래서 그 악인들에게 왕공귀족의 의복을 입혀 황실 자손의 안전을 바꾼 것이죠.”하지만 왜 굳이 악인을 골랐던 것일까?곧 그녀는 그 해답을 알 수 있었다.첫째, 태조 황제가 아직 양심이 있어 이런 악인들은 어차피 십악불사, 어떻게 죽어도 그들에게는 큰 벌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둘째, 구중탑에 흉악범들을 가두면서 보물을 노리는 자들의 마음을 꺾고자 했으니, 누구도 감히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도록 했다.소욱은 고개를 끄덕이며 봉구안의 추측을 인정했다.“태조 황제는 남산왕에게 진실을 말하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껏 남산왕의 가문은 자신들이 봉맥을 지키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지.”봉구안은 담담하게 말했다.“그건 인간의 본능입니다.”“제왕으로서 자신이 단순히 돌덩이 하나를 두려워한다고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을 테니까요.”이 말을 하며 그녀는 또 다른 이야기를 꺼내지 않을 수 없었다.“회욱 오라버니께서 말하길, 양연삭이 진나라의 후손이라더군요. 그가 한 모든 일이 부국을 위해서였으며, 옥석비를 훔친 것 또한 전쟁에 사용하기 위함이라 했습니다.”소욱의 눈썹이 찌푸려졌다.“오라버니?”그녀가 그를 이렇게 부르는 게 참 친근하게 들렸다.소욱은 내심 불쾌했지만, 더 중요한 일이 있었기에 묻지 않았다.진나라.그가 다스리고 있는 이 강산은 남제 이전에는 진나라이었다.그러나 진나라는 이미 멸망한 지 200여 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부흥을 꿈꾸는 자들이 있다니.그는 본래 천룡회가 단지 강호의 마교로서, 고작해야 자신의 형제 중 누군가와 몰래 손잡고 권력을 빼앗으려는 정도일 줄 알았다.하지만 이제 진나라와 연관되었다면, 이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다.“그런 비밀을 단회욱은 어떻게 알았지?”소욱의 말에는 의심이 묻어났다.
봉구안은 자리에서 일어나 두 왕에게 예를 갖추었다.두 왕은 소욱에게 절을 올렸다.노왕은 온화한 표정을 짓고 봉구안을 향해 농담을 던졌다.“마마, 봉맥이 끊어진 것은 저도 안타까운 일이라 생각합니다. 마마께서 다시 황제 폐하께 시집을 가신다면…”봉구안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소욱도 그녀가 지금은 이런 이야기를 고려할 겨를이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괜히 이런 말을 꺼내면 그녀를 더 번거롭게 할 뿐이었다.그는 노왕의 말을 가로막았다.“본론부터 말하거라.”봉구안은 자신의 신분이 부적합하다고 느껴 물러나려 했다.하지만 소욱이 그녀의 팔을 붙잡으며 말했다.“굳이 나가지 않아도 된다.”“예.”남산왕이 공손히 입을 열었다.“폐하, 신과 부친이 찾아온 것은 보물과 옥석비에 대해 상의드리기 위함입니다. 구중탑이 무너져 그것들이 전부 지하에 묻혔는데, 이를 다시 발굴해야 할지 청하러 왔습니다.”소욱은 차분히 물었다.“옥석비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느냐?”남산왕은 답 대신 아버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그는 여전히 의문을 품고 있었다.이렇게 대단한 신물이 태조 황제가 억눌러두어야 할 물건이었다니.이전에 동방세가 했던 말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구중탑으로 숨겨둔 물건이라면, 결코 다시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겠는가.그러나 그의 기억 속 옥석비는 흉물이 아니었다.어쩌면 부친이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봉구안 또한 같은 의문을 품고 있었다.그러자 노왕이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제가 아는 바로는, 옥석비는 가히 건국의 공신이라 칭할 만 하다는 것입니다.”“당시 태조 황제께서 전장에 옥석비를 들고 나갔을 때, 그 어떤 적도 무찌를 수 있었습니다.”“가장 전설적인 것은 양수 전투였는데, 태조 대군이 포위당하고 패배가 확정된 상황에서 하룻밤이 지나자 적군이 싸우지 않고 물러났던 일도 있었습니다.”“사람들은 모두 그 옥석비의 전쟁신의 영혼이 현현했다고 하였습니다.”“그러나 남제 건국 이후, 그 옥석비에 붙어있던 영혼이
옆방.단회욱은 검은 피를 토해냈다.그는 단정의 어깨에 기대어 반쯤 누운 채, 마치 버드나무처럼 연약한 모습이었다. 얼굴은 창백하고, 한 쌍의 옥처럼 맑던 눈동자는 이제 흐릿해지고 있었다.그를 보며 봉구안은 많은 과거의 일들이 떠올랐다.그를 처음 만났을 때, 그녀는 그가 뼛속까지 따뜻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병사들의 희롱과 조롱에도 그는 얼굴을 붉히지 않고 늘 부드럽게 대했다.그는 군의관으로서 항상 인내심이 넘쳤다.그녀가 그를 좋아했던 이유는 그가 지닌 고요한 세월의 아름다움 때문이었다.그와 함께 있으면 그녀는 늘 마음이 차분해졌다.그래서 그가 천룡회의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았음에도, 그녀는 그의 선량함과 자애로움을 부정할 수 없었다.그런 것들은 꾸며낼 수 없는 것이다.그의 신분과 과거는 그가 선택할 수 없는 것.그녀는 한 사람을 좋아할 때 언제나 현재만을 바라보았다.그를 좋아했던 일에 대해 그녀는 후회하지 않았고, 원망도 없었다.봉구안은 둥근 의자를 가져와 침대 옆에 앉았다.한때 그를 다시 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막상 정말로 다시 보게 되자 수많은 말들이 허공으로 흩어졌다.그녀는 그에게 이 몇 년 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묻고 싶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그가 겪은 고통과 고난은 손수 적어낸 기록에 상세히 쓰여 있었다.“앞으로는... 모든 것이 다 좋아질 것이다.” 그녀의 목소리가 쉰 듯 갈라졌다.단회욱은 무거운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그녀를 바라봤다.그의 눈동자는 예전보다 한층 단단해진 냉엄함이 더해져 있었다.그녀의 옷은 흙과 먼지로 얼룩져 있었고, 손가락은 붕대로 감겨 있었다.그녀가 자신을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음을 알 수 있었다.예전에 그는 그녀가 자신을 위해 희생하지 않고도 행복하게 살아가길 바랐다.하지만 지금은 욕심이 생겼다.그녀를 다시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정말 다행이었다.단정은 두 사람의 눈빛을 한 번 훑어보더니, 단회욱을 눕혀놓고 말했다.“형님, 약을 좀 다려 올게요.”그가 있으면 둘이
얼마 지나지 않아 마침내 단회욱을 구해내는데 성공하였다.그의 모습을 보자마자 봉구안의 마음이 순간 떨렸다.단회욱은 많이 수척해진 상태였다. 한쪽 팔은 부러졌으며, 머리카락은 흐트러지고 잘생긴 얼굴은 생기 하나 없이 창백해져 있었다. 마치 생기를 잃은 시체처럼 입술은 하얗게 메말라 있었다.“형님!”단정은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렸다.“드디어, 드디어 형님을 찾았어요!”단회욱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움직이며 멀리 있는 봉구안을 바라보았다.봉구안은 곧바로 앞으로 나아갔다. 거의 무릎을 꿇다시피 하며 말했다.“오라버니…”단회욱은 따스한 미소를 지었다. 마치 햇살이 비치는 것처럼 온화했다.“구안아…”“폐하!”진한길이 놀라 외쳤다.봉구안은 급히 뒤돌아보았고, 몸이 저절로 움직여 그쪽으로 달려갔다.“폐하께서 어떻게 되신 겁니까!” 그녀는 다급히 물었다.그러나 소욱의 안전을 위해 가까이 다가가지는 못했다.진한길은 이를 악물며 말했다.“안전 구역에 틈이 생겨 폐하께서 낙석에 팔을 맞으셨습니다!”그때 아래에서 거친 목소리가 들려왔다.“과인은 괜찮다…”남산왕은 급히 외쳤다.“어서 사람을 구하라! 균형이 깨지면 안전 구역도 지탱하지 못하고 무너질 것이다!”만약 안전 구역이 무너지면, 그 이후의 위험은 상상하기도 어려웠다.단정은 황제가 죽든 말든 상관하지 않았다. 형님을 먼저 안전한 곳으로 옮기고자 그를 업었다.그러다 형님 얼굴에 찍힌 뺨 자국을 보고 순간 몸을 굳혔다.“형님, 누가 형님을 때린 겁니까!”단회욱은 이전에 흐릿한 의식 속에서 누군가에게 뺨을 맞았던 기억이 떠올랐다.그러나 그가 말했다.“누구든 상관없다…”그는 오로지 봉구안만 걱정하고 있었다. 시선은 줄곧 그녀에게 머물렀다.잠시 후, 소욱이 드디어 구조되었다.남산왕은 중얼거렸다.“하늘이시여… 고맙습니다. 덕분에 큰 사고를 피했습니다.”그러나 소욱의 상태는 좋지 않았다. 그의 팔은 옷과 살점이 뭉개져 엉망이었다.진한길은 마음이 아팠다.봉구안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