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구안은 담담한 표정으로, 그 눈빛에는 결연함이 서려 있었다. “황귀비를 잡아들인 것은 소인의 결정이옵니다. 그에 따른 죄책은 기꺼이 감수하겠사옵니다. 지금은 이 모든 진실을 밝혀야 할 때이옵니다.” 그러면서 그녀는 한 걸음 나아가 말을 이어갔다. “황귀비는 스스로 인정하였사옵니다. 그녀가 장미를 해하려 한 것은, 신비한 자에게 협박을 받았기 때문이라 하였사옵니다.”“그 신비한 이는 그녀의 죄를 빌미로 협박했사옵니다. 그리고 그 편지는, 이곳에 있사옵니다.” 봉구안은 한 봉투를 내밀었고, 소욱은 잠시 망설이더니 그 편지를 열었다. 봉구안은 이어 또 다른 봉투를 꺼내들었다. “몇 달 전, 정비도 이 신비한 자의 편지를 받았사옵니다.” “그 편지에는 소인의 아버지가 용화사 승려를 매수하여 명서를 조작한 사실이 적혀 있었사옵니다.” 소욱의 이마는 깊게 찡그려졌고, 그는 묵묵히 편지를 내려다보았다. 정비마저도 이 사건에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에 분노가 섞인 혼란이 그의 마음을 어지럽혔다. 봉구안은 침착한 태도를 유지하며 말을 이어갔다. “그리하여 소인과 정비는 힘을 합쳐 이번 정월 대보름날 밤, 그 신비한 자가 다시 방비전에 몰래 들어와 고발 편지를 남기려 할 때 그녀를 붙잡았사옵니다.” “그 신비한 자는 다름 아닌 맹교먹이었사옵니다.” 소욱의 눈썹이 떨렸다. 그는 그녀의 말을 믿기 어려웠다. 하지만 봉구안의 태도는 단호했고, 그녀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맹교먹이 정비에게 보낸 편지 역시 이곳에 있사옵니다.” “지금 폐하께서 보시고 있는 두 편지와 그 편지를 비교하시면, 그 글씨가 모두 동일인임을 알게 되실 것이옵니다. 이는 맹교먹이 봉장미를 해친 진범임을 증명하옵니다.” 소욱은 손에 든 편지들과 봉구안이 건넨 편지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믿고 싶지 않았지만, 글씨체가 분명히 일치했다. 맹교먹, 그토록 신뢰하고 중용했던 그녀가 어찌 이런 끔찍한 음모의 주모자일 수 있는가? 봉구안은 소욱의 침
봉구안의 차가운 얼굴에는 한 줄기 평온이 깃들어 있었다. 이는 마치 서릿발 속 매화가 한겨울을 이겨내고 피어난 듯하였다.“저 또한 맹가의 사람이옵니다.” 단출한 이 한마디가 천 층의 파도를 일으켰다. 소욱의 얼굴이 한순간 굳어졌다. 봉구안이 이어서 말했다. “저는 봉가에서 버림받은 몸이옵니다. 저를 거두어 기른 이는 다름 아닌 맹건 장군 부부였사옵니다.” 소욱은 즉시 깨달았다. 그가 예전부터 느껴왔던 그녀의 맹교먹에 대한 지나친 관심이 이제야 풀리는 순간이었다.알고 보니 그녀와 맹교먹은 같은 문하에서 배운 사제지간이었던 것이다. 그녀의 무공이 비범한 이유 또한 밝혀졌다. 스승이 맹건이라면 그럴 법도 했다.소욱은 그녀의 말을 끊지 않고 조용히 경청하였다. 그녀는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갔다. “봉장미 사건에 대해서 처음에는 교먹을 의심하지 않았사옵니다. 하지만 이후 여러 증거가 그 아이를 가리키고 있었사옵니다.” “저 또한 폐하와 마찬가지로 이해할 수 없었사옵니다. 저는 그 아이와 어릴 적부터 함께 자랐고, 우애가 돈독했으니 말입니다…”“어찌하여 저의 친여동생을 해칠 수 있었는 지 저는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었사옵니다.” “그러던 중 스승님의 입을 통해 알게 되었사옵니다.”“스승님께서 그 아이가 맹성주를 사칭하는 것을 허락한 이유는 집안의 노부인 때문이라 하였사옵니다.” “최근 몇 년간 노부인의 건강이 악화되자 스승께서는 노부인이 돌아가시면 맹성주가 전장에서 전사하는 것으로 계획을 세우셨사옵니다.” “허나 그렇게 되면 맹성주를 사칭한 이는 반드시 가짜 죽음을 맞이하여 맹 소장군이라는 신분을 버려야 했고, 이는 곧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해야 한다는 뜻이었사옵니다.” 봉구안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이것은 본래 그녀와 스승, 스승의 부인이 함께 세운 계획이었다. 그들은 그녀가 평생 맹성주의 껍데기 속에 갇혀 있기를 바라지 않았던 것이다. 다만 그녀는 중요한 부분을 의도적으로 모호하게 넘어갔다.
침전 안은 등불 하나 없이 어두웠고, 서로의 얼굴조차 분간하기 어려웠다. 그 암흑 속에서 한 남자의 낮고도 묵직한 음성이 울려 퍼졌다. “짐은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하였는데, 그대는 제법 편히 자는군.” “깨어난 듯하니 일어나시오.” 둘 다 무예를 익힌 몸인지라 그녀가 깼는지 안 깼는지, 그는 분명히 알고 있었다. 예를 차릴 수밖에 없던 봉구안은 곧장 자리에서 내려와 절을 올리려 하였다. 그러나 막 이불 끝자락을 들어 올리려던 그녀의 손을 남자가 단숨에 눌러 멈추게 했다. “그럴 필요 없소.” 그가 말하는 동안, 그녀의 손을 잡아 올리더니 뭔가를 쥐어 주었다. 봉구안은 감촉을 느껴 보았다. 그것은 분명 머리 장식인 비녀 같았다. 문득, 그녀는 전에 자진궁에서 그가 그녀에게 주려고 했던 그 봉황비녀를 떠올렸다. 받기를 망설이며 돌려주려 하였으나, 소욱이 말을 이었다. “앞으로 황후의 자리는 그대의 것이니, 더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지 마시오.” “이미 사람을 보내어 맹교먹을 조사하게 하였소. 그대가 준 증거가 사실이라면, 법에 따라 처단할 것이오.” “다만, 봉장미를 대신하여 시집온 일로 더는 소란을 일으키지 마시오.” 봉구안은 그의 말을 진지하게 듣느라 손에 쥔 비녀조차 신경 쓰지 못하였다. 사실, 황제가 진실을 알고 있으니, 교먹을 처벌하기에는 용호군을 해하려 한 죄목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래서 그녀는 이견을 품지 않았다. 그녀는 고개를 숙여 조용히 절하며 말했다. “폐하께서 신분을 감춘 죄를 묻지 않으시니, 성은이 만극하옵니다.” 갑자기 소욱은 그녀의 손을 덮어 감싸고, 그녀의 손과 비녀를 함께 쥔 채 말했다. “이제 만족한 것이오?” “그렇사옵니다.” 그녀는 빠르게 대답하였다. 그가 법대로 처리만 해 준다면, 그녀는 더 바랄 것이 없었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법으로 교먹을 단죄하는 것뿐이었으니 말이다.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소욱이 느닷없이 그녀의 침상 위로 올라왔다.
금오가 서쪽으로 기울고, 어전 안에서는 황제가 여전히 정무에 바쁘게 몰두하고 있었다. 진한길이 앞으로 나와 아뢰었다. “폐하, 신이 직접 시체들을 확인하고 검시관에게 부검을 명하였사옵니다. 그 결과, 그들이 죽기 전에 독침을 맞은 것이 분명하다는 사실을 밝혀냈사옵니다. 그 독침은 치명적이지는 않으나, 사람을 즉시 혼미하게 만드는 효능을 지녔사옵니다.” 소욱은 손을 멈추고 붓을 필산에 올려놓았다. 그의 눈빛은 어두워 알 수 없는 분위기를 풍겼다. “그래서 전군이 몰살당한 것이로군.” 그의 음성은 차분했으나, 듣는 자에게 섬뜩한 한기를 불러일으켰다. 영화궁. 밤이 깊은 후, 황제가 또다시 찾아왔다. 봉구안은 공손히 맞이하며 물었다. “폐하, 여기까지 오시다니 어인 일이옵니까?” 소욱은 바로 물었다.“황귀비는 지금 어디에 있소?” 봉구안이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폐하, 황 귀비를 보시고자 하시는 것이옵니까?” 소욱은 주인의 자리에 가만히 앉아 태연한 자세로 대답했다. “첫째, 짐이 귀비를 유배형에 처했건만, 그대가 귀비를 납치하여 짐의 뜻을 어겼소.” “둘째, 귀비는 중요한 증인이니 짐이 직접 확인해야 하오.” 봉구안은 담담하게 말했다. “폐하께서 귀비를 만나실 수 있도록 준비하겠사옵니다.” 소욱의 눈빛은 그녀를 꿰뚫어 보려는 듯 어두웠다. “짐이 언제 직접 가겠다고 했소? 진한길을 보내면 족하오.” 봉구안은 고개를 숙여 답했다. “알겠사옵니다.” 소욱은 화제를 돌리며 말했다. “황후의 곁에서 시중을 들던 시녀가 친정에 간 지도 시간이 꽤 흐른 것 같은데… 이제 돌아올 때가 되지 않았소?” 그는 그녀의 얼굴에서 미세한 표정 변화라도 포착하려는 듯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봉구안은 차분히 대답했다. “신첩은 연상이 어떤 상황인지 알 수 없으니 입궁 시기를 단정하기 어렵사옵니다.” 사실 그녀는 연상을 다시 궁으로 부르지 않을 생각이었다. 소욱은 냉소를 흘리며
황귀비가 실종된 후, 진한길은 황명의 따라 그녀를 찾으려 했으나 줄곧 단서를 찾지 못하였다. 설마했는데, 그녀가 황성 안에 갇혀 암흑천지의 밀실 속에서 지내고 있었다니… 한때 만인의 사랑을 받으며 화려함을 자랑하던 황귀비는 이제 뼈만 남을 정도로 수척해지고, 머리는 거지처럼 흐트러져 있었다. “여봐라! 폐하께서 너를 보내 나를 찾게 한 것이 맞느냐?” “폐하께서는 아직 나를 잊지 않으셨구나!” “어서 와서 나를 풀어주거라…!” 황귀비는 두 눈을 빛내며 그를 바라보았다. 드디어 이 날이 온 것이다! 드디어 이 지옥 같은 곳을 떠날 수 있는 것이다! 진한길은 그제야 그녀의 발이 쇠사슬에 묶여 있는 것을 보았다. 쇠사슬의 다른 한쪽은 벽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황후는 그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독한 사람이었다.황귀비의 눈빛은 간절했다. “이제는 더 이상 폐하의 총애를 바라지 않겠소. 그저 살아만 있고, 황궁 안에만 있고, 폐하의 곁에 있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오… 진한길, 거기 서서 무엇을 하는 것이오, 어서 움직이라니까!” 그녀는 진한길이 꼼짝도 하지 않자 다급해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진한길의 얼굴은 감정 하나 드러나지 않았다. “소신은 그저 폐하의 명을 받아, 봉가 아씨의 피살 사건을 조사하러 온 것입니다.” “몇 가지 묻고자 하니, 사실대로 대답해주시길 바라옵니다…”황귀비는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너… 너는 여기 왜 온 것이냐?” “조사 때문에 온 것이냐?” “단지 조사를 위해서란 말이냐!” “아니! 폐하께서 내가 이곳에 갇혀 있는 것을 아신다면 당연히 날 구해주셔야 하지 않느냐! 너 이 사기꾼 같으니! 이것도 황후의 짓이지? 황후가 널 매수한 게지?”황귀비는 절망하며 바닥을 주먹으로 내리치고, 울부짖으며 불만을 토로했다. 진한길이 이곳에 온 것은 오로지 사건을 조사하기 위함이었다. 황제는 황귀비를 어떻게 처리할지 명확히 말씀하지 않았다. 두 시진 후.진한길
“황귀비가 결백하다고 생각하시옵니까?”봉구안의 음성은 비정상적으로 평온했다. 소욱은 그녀 말 속에 깃든 감정을 감지하고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그는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사사로이 형벌을 가하는 것이 옳단 말이오?” 봉구안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시선은 맑고 담담하며, 어떠한 두려움도 없었다. “솔직히 말씀드리겠사옵니다. 제가 사사로이 형벌을 가하지 않았다면, 귀비는 이미 폐하께서 보낸 사람들에 의해 다른 도성에 편히 자리 잡았을 것이옵니다.” “폐하께서 귀비를 유배한다고 하셨으나, 속으로는 귀비를 위해 훌륭한 퇴로를 마련해 두셨사옵니다.” “저는 동생의 복수를 위해, 귀비를 빼앗아 올 수밖에 없었사옵니다.” 그녀의 말 속에는 소욱을 향한 비난이 담겨 있었다. 그가 공정하게 처단하지 않았다는 비난이었다. 소욱의 아름다운 얼굴에 불쾌한 기색이 떠올랐다. 봉구안은 그를 더 이상 자극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며 말투를 바꾸었다. “그러나 폐하께서 안심하셔도 되옵니다. 맹교먹의 일이 마무리되면 귀비를 풀어주겠사옵니다.” “뿐만 아니라, 귀비를 다시 황궁으로 들이도록 하겠사옵니다.” 소욱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그녀를 황궁으로 다시 데리고 온다니… 그게 대체 무슨 말인가! 문득 그는 그녀가 질투심에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의 차가운 눈빛에 약간의 부드러움이 스며들었다. 자신도 모르게 누그러진 것이었다. “빈정거리는 소리는 그만두시오. 귀비의 처분은 짐이 알아서 할 것이오.” 그러나 봉구안은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폐하께서 오해하셨사옵니다. 이는 제가 귀비에게 한 약속 때문이옵니다.” “진실이 밝혀지기만 하면, 귀비의 새로운 신분을 마련해 폐하의 곁에 머물 수 있도록 해주겠다고 말했사옵니다.” 순간, 소욱의 눈빛이 칼날처럼 날카로워지며 그녀를 사로잡았다. “그게 대체 무슨 소리지?” 그것은 묻는 것이 아니라, 위험을 경고하는 말투였다. 그녀가
소욱은 이 순간 맹교먹을 보자마자 죽은 용호군 장병들이 떠올랐다. “무슨 일이지?” 그의 시선은 맹교먹을 넘어 장공주를 향했다. 장공주는 눈빛이 날카롭게 변하며 봉구안을 노려보았다. “이번 일은 황후와 관련이 있사옵니다.” 봉구안은 여전히 고요하고 담담했다. 마치 이 일이 자신과 무관하다는 듯 평온하게 앉아 있었다. 장공주는 직설적으로 말을 꺼냈다. “폐하, 이 곁에 있는 황후는 진짜 봉장미가 아니옵니다!” 소욱의 표정이 급격히 냉랭해졌다. 그는 손짓으로 궁궐 안에 남아 있던 몇 안 되는 내관들을 물리치고, 장공주에게 반문했다. “누구의 헛소리를 들은 것이냐?” 장공주의 눈은 여전히 봉구안을 향해 차갑게 번뜩였다. “폐하, 저는 유언비어를 믿는 사람이 아니옵니다. 저의 성격은 폐하께서 더 잘 알지 않사옵니까?”“이 일은 제가 직접 조사한 것이옵니다.” “예전 봉가의 부인이 쌍생아를 낳았다는 사실이 있었사옵니다. 지금 황후의 자리에 앉아있는 저 여인은 봉가에서 버려졌던 자로, 봉가의 사람이 아니옵니다.” “그런데도 황후 자리에 앉아 있을 자격이 있겠습니까?” 봉구안은 소욱의 곁에 앉아 평온한 태도를 유지했다. 그녀는 이미 장공주가 자신의 신분을 의심하기까지의 경로를 짐작하고 있었다.분명 맹교먹이 장공주를 몰래 자극했을 것이다. 하지만 맹교먹이 모르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며칠 전, 그녀는 이미 황제에게 대리 혼인의 진상을 털어놓았다. 맹교먹은 봉구안을 주시했다. 그녀가 기억하는 사저는 늘 위험 속에서도 태연했다. 이것이 사저가 무서울 것이 없다는 뜻은 아니었다. 다만, 평범한 사람보다 감정을 더 잘 다스릴 뿐이었다. 그녀는 생각했다. 이번만큼은 사저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라고…특히 이 일은 봉가와 맹가가 관련이 있다. 사저의 성격이라면, 이 죄를 스스로 짊어지고 두 가문이 위험에 빠지지 않도록 할 것이 분명했다. 이번 판은 자신이 이긴 것이라 생각하여다. 맹교먹은 장공주를
소욱이 체포한 이는 바로 맹교먹이었다. 그의 시선은 얼음처럼 차갑고, 권위로 가득 차 있었다. “맹교먹, 너는 네 죄를 아느냐!” 교먹은 두 명의 호위에게 제압당한 채, 무의식적으로 봉구안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분명히 거론된 것은 대리 혼인을 둘러싼 일인데, 어째서 그녀가 체포되었단 말인가? “폐하, 신첩은 어떤 죄를 범했는지 알지 못하옵니다…” 장공주 역시 영문을 알지 못한 채 따졌다. “폐하, 이게 다 어찌 된 일이옵니까? 어찌하여 맹교먹을 잡으시는 것이옵니까?” 대리 혼인의 사실을 감히 다른 사람들에게 말할 수는 없으나, 장공주는 폐하의 혈육이니 사정을 알려야 했다. 맹교먹의 속임수에 휘말리지 않게 하려는 의도였다. 소욱은 한치의 주저함도 없이 말했다. “짐은 이미 황후의 대리 혼인 사실을 알고 있다.” 장공주는 더욱더 혼란스러워졌다. “폐하께서 이미 알고 계신다 하시면, 왜…” 소욱이 그녀의 말을 단호하게 끊었다.“공주는 봉장미가 어디로 갔는지 궁금하지 않는가?” “궁금하다면 맹교먹에게 직접 물어보면 될 것이다.”장공주는 멍한 표정으로 교먹을 바라보았다. “이게… 이게 무슨 말씀이옵니까?” 교먹의 표정은 더욱 어둡고 복잡해졌다. 그녀도 알고 싶었다. 이게 대체 어찌 된 영문인지! 황제가 이미 대리 혼인 사실을 알고 있었다니…대리 혼인이라는 것은 분명 황제가 크게 진노할 사안이 아닌가! 황후와 봉가를 문책해야 마땅한데, 어찌하여 자신에게 죄를 묻는단 말인가? 교먹은 황후를 날카롭게 바라보며 깨달았다. 사저가 뭔가를 꾸민 것이 분명했다! ‘언니…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장공주는 조바심 속에서 물었다. “폐하, 교먹이 무슨 일을 저질렀다는 것이옵니까?” 봉구안이 자리에 일어섰다. 그녀는 감정이 담기지 않은 차가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제가 대리 혼인을 강요받은 것은, 전부 제 동생 봉장미가 맹교먹에 의해 해를 당했기
현비의 눈엔 짙은 허망함이 어려 있었다."폐하, 폐하께서 단 한 번이라도 신첩을 이해하려 하셨더라면 아셨을 겁니다. 신첩은 본래 약리학에 정통했습니다.”“영비마마께 쓴 독은 신첩이 직접 조제한 것입니다. 하지만 의원이 제 몸을 고치지 못하듯, 신첩 또한 제 독을 온전히 해독하지는 못했습니다. 그저 몸속의 독성을 억누를 수 있을 뿐, 근본적인 치료는 불가능했습니다."더 할 말은 없다는 듯, 현비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소욱은 손짓으로 진한길에게 몸을 제압한 손을 풀라고 지시했다.양팔이 풀리자, 현비는 앞으로 푹 고꾸라지듯 무릎을 꿇고 이마를 바닥에 박았다. 그녀는 머리를 조아리며 간청했다."폐하, 제발 제 가족만은… 용서해주시옵소서."곁에서 지켜보던 진한길은 표정 없이 서 있었지만 마음 한켠에 얕은 동정이 스쳤다. 현비에게 분명 죄는 있었지만, 모든 시작은 모용란의 악행이었기 때문이었다.그러나 소욱의 시선은 여전히 냉담했고, 목소리는 단호했다."현비는 황제인 나를 속이고 궁중의 법도를 어겼다. 천형에 가두고 추후 처분을 기다리게 하라."현비는 이 결과를 받아들였다. 오히려 마음 한켠으론 안도했다. 그 죗값이 가족에게 미치지 않았으니 말이다.궁에서 끌려나가는 길에 현비는 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내뱉었다."하늘이… 이렇게 넓었구나."수년간 좁디좁은 궁궐 안에 갇혀 살며 늘 발밑만 바라봤던 그녀. 하늘을 올려다보는 법도, 마음을 여는 법도 잊은 채 살아왔었다. 그렇게 그녀는 스스로를 가두었고, 걸을수록 길은 좁아졌다.……현비가 다시 천형에 갇혔다는 소식은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궁 안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았지만, 정작 무슨 죄로 잡혀간 건지는 알지 못하였다.현비의 궁녀인 동하는 자녕궁 앞에 무릎을 꿇고 울며 태후께 간청했다.태후는 전각 안에서 목탁을 두드리며 마음을 가라앉히고 있었다.곁에서 시중들던 계 상궁은 태후가 독경을 마친 뒤 몸을 굽혀 조심스럽게 말했다."태후 마마, 동하 저 아이가 벌써 두 시진째 무릎 꿇고
현비는 텅 빈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며 중얼거렸다."영비마마와 폐하께서는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란 사이였지요. 그 시절, 마마는 후궁 중에서도 가장 총애를 받았습니다. 제 아버지는 제가 영비와 닮았다는 이유로 서둘러 저를 궁에 들여보내셨죠.”“궁의 모든 이들은 영비마마가 온화하고 현명하다고 칭송했었습니다. 저 역시 처음 입궁했을 땐 그렇게 믿었고요. 하지만 곧 마마의 진면목을 알게 되었습니다.”“겉으로는 자매처럼 지내며 장신구도 건네주고, 심지어 폐하를 뵐 때도 저를 데리고 가셨었죠."소욱은 그런 기억이 없었다. 그가 모용란을 후궁으로 맞이한 것도 정이 아닌 우정 때문이었다. 즉위 초창기 정사에 바빠 후궁을 찾을 여유도 없었다. 모용란이 어전 출입이 잦았던 것은 기억했지만, 그 자리에 현비가 있었다는 기억은 없었다.현비는 그의 표정을 보고, 그가 기억하지 못한다는 걸 알아챘다."폐하께서는 단 한 번도 저를 제대로 바라본 적이 없으셨습니다. 하지만 영비마마는 다르셨죠. 간택 당시 폐하께서 제 시를 칭찬하신 그 한마디가 마마에게는 큰 상처였습니다.”“폐하께는 그저 흘려 넘긴 말이었겠지만 저에겐 큰 기쁨이었고, 영비마마에겐 시기와 질투의 씨앗이 되었습니다."소욱은 더는 후궁들 사이의 질투와 다툼을 듣고 싶지 않았다. 그는 그런 다툼을 혐오했지만, 그것을 바꿀 힘은 없었다."모용란이 어떻게 너에게 독을 먹였느냐. 왜 그때 나에게 말하지 않았느냐."현비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마치 허탈한 이야기를 들은 듯 눈에 물기가 어렸다."그때 제가 폐하께 말씀드렸다면 과연 믿어주셨을까요? 폐하께서 영비마마를 벌하셨을까요?"소욱이 입을 열기도 전에, 그녀가 먼저 단언하듯 말했다."아니요. 폐하께서는 안 그러셨을 겁니다."그 말은 속삭임이 아니라, 분노 어린 한숨에 가까웠다. 그녀의 시선엔 실망과 원망이 가득했다."폐하, 저는 한 번도 폐하께서 현명한 군주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황후 마마께서 나타난 후에야 폐하께서는 조금씩 달라지셨습니다
이튿날 이른 아침, 소욱은 황궁으로 복귀했다.아침 조회 자리에서 신료들이 약쟁이 사건을 거론했다.“폐하, 각지에서 과도한 억제 조치가 이어지고 있사온데 약쟁이들이 그 틈을 타 소란을 일으켜 억울한 판결이 속출하고 있습니다. 무고한 지방 관원들이 연루되어 피해를 입고 있으니 부디 폐하께서 신중히 살펴주시옵소서.”소욱도 그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약쟁이들이 의도적으로 관료들의 집에 숨어들어 수사 대상이 되도록 만들고 사건을 키워 혼란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면 자신들은 혼란 속에 숨어 빠져나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하지만 그와 얽힌 관료들이 모두 무죄라고는 단정할 수 없었다. 결국 가장 확실한 방법은 대신들을 파견해 진상을 직접 조사하는 것이었다.조회가 끝난 후 소욱은 곧장 현흥궁으로 향했다.그가 입은 용포는 황제의 위엄을 더욱 드러냈고 냉랭한 분위기는 더욱 그를 권위 있게 만들었다.오랜만에 성상의 얼굴을 뵙는 궁인들은 일제히 무릎을 꿇고 외쳤다.“황제 폐하를 뵙습니다!”궁 안.궁녀 동하가 다급히 안으로 뛰어들었다.“마마! 마마! 폐하께서 오셨습니다!”현비는 탕약을 마시고 있던 중이었다. 얼굴은 병색이 완연했고 평소의 생기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뜻밖의 방문에 놀란 그녀는 눈빛에 당혹을 숨기지 못했다.폐하께서 왜 이곳에...그녀는 급히 약그릇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황제를 맞을 준비를 했다.소욱의 등장과 함께 전각 안이 시끄러워졌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위엄 넘치는 황제가 천천히 전각 안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바라보았다.그녀는 가볍게 입술을 다문 채 예를 올렸다.“신첩,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그간 강녕하셨습니까.”소욱은 말없이 자리에 앉았다. 잘생긴 얼굴 위엔 차가운 무표정이 드리워 있었다.그는 손짓 한 번으로 전각 안의 궁녀들을 물리고 현비만 남겨두었다.현비는 당황한 얼굴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폐하…”“내가 묻는 말엔 진실만을 말해야할 것이다.”소욱의 목소리는 단호했고 얼굴엔 엄중함이 어렸다.현비는 속내
황궁.현흥궁.현비는 병이 도지자 오래 지나지 않아 정신을 잃었다.그녀는 시녀 동하가 태후를 찾아가 홍련초를 구하려 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마마...”찰싹!갑작스레 손이 날아와, 동하의 뺨을 세차게 후려쳤다.당황한 동하는 그 자리에 굳어섰다.무엇이 잘못된 건지, 어째서 현비가 이토록 격앙된 건지 알 수 없었다.현비는 힘겹게 가슴을 짚으며, 쉰 목소리로 말했다.“나가.”동하는 현비의 기분이 몹시 나쁜가 보다 여기고 조용히 물러나려던 찰나, 누군가 궁 안으로 들어섰다.“황제 폐하의 명이다. 염 신의를 모셔와 현비마마의 병을 진찰하게 하라!”그 순간 현비의 얼굴빛이 확 변했다.겉으로는 태연한 듯했지만, 장막 너머의 목소리에 단호하게 응했다.“폐를 끼쳐 송구하네. 폐하께는 괜찮아졌다 전해주게.”그러나 염 신의는 말을 자르며 곧장 앞으로 나섰다.“마마, 폐하께서 직접 전하셨습니다. 반드시 병을 완쾌하라 하셨습니다.”그는 허락도 받지 않은 채 장막 앞으로 다가가 진맥을 청했다.“손을 내어주시옵소서. 진맥을 해야 합니다.”한동안 장막 안은 고요했다.잠시 후, 하얀 손 하나가 조심스레 틈 사이로 뻗어 나왔다.동하는 재빨리 비단 손수건을 꺼내 손목 위에 덮었다.여인의 살이 남성에게 닿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궁녀들은 눈치도 없이 염 신의에게 의자 하나 내주지 않았다.그는 묵묵히 허리를 굽혀 그대로 맥을 짚었다.현비는 말없이 입술을 꼭 다물고 있었다.잠시 후 염 신의는 맥에서 손을 거두며 말했다.“마마, 피 한 방울이 필요합니다.”그는 말하면서 옆에 있던 동하에게 바늘과 작은 사기그릇을 건넸다.동하는 조심스레 다가가 속삭였다.“마마, 소녀가 하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현비는 익숙한 듯 손을 내밀며 다정히 말했다.“괜찮아. 어서 하렴.”동하는 피를 모아 염신의에게 전해주었다.염 신의는 약상자를 열어 조그만 병 하나를 꺼냈다.그 안의 약가루를 그릇 위에 조심스레 부었다.그의 손길은 침착했고 집중력 넘쳤
모용가에 대한 조사는 여전히 제자리걸음이었다.소욱은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모용가를 은밀히 조사하라고 했을 때, 별다른 이상이 없다고 들었느냐.”“갑자기 왜 그 얘길 꺼낸 것이냐? 혹시…”그는 말을 끝맺지 않았지만, 봉구안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그녀는 모용가가 약쟁이 사건과 얽혀 있을 가능성을 의심하고 있었다.봉구안은 단정한 목소리로 답했다.“사형이 약쟁이 사건을 조사하기 시작한 시점은 폐하께서 즉위하신 이후입니다.”“그 말은 곧 선황제께서 돌아가시기 전부터 이미 약쟁이들이 활동하고 있었다는 뜻이지요.”“그 시점을 고려하면, 선황제께서 무언가 눈치채셨을 가능성도 있습니다.”“소첩은 그래서 모용가가 이 사건과 관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다만 어디까지나 제 추측일 뿐, 아직 뚜렷한 증거는 없습니다.”그녀의 말에 담긴 확신은 쉽게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소욱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그렇다면 지금 네 말은… 모용가를 억지로 몰아세우겠다는 것이냐.”농담조였지만, 소욱 역시 마음속으로 봉구안의 의심을 부정하지 못하고 있었다.선황제의 유언은 분명 모용가를 경계하고 있었다.하지만 지금껏 감찰을 맡은 자들이 어떤 흔적도 찾지 못했다는 건, 그들이 그만큼 은밀하게 움직였다는 뜻이었다.그런 점에서 모용가의 행적은 약쟁이들의 수법과 닮아 있었다.그 생각에 이르자 소욱의 눈빛에 서늘한 기운이 스쳤다.“사람을 더 붙이도록 하마. 이번엔 제대로 조사하게 하자.”그날 밤 소욱은 평소처럼 자유각에 머물렀다.궁 안의 일은 이미 손을 놓아도 될 만큼 정돈되어 있었고, 후궁의 일은 태후가 맡아 관리하고 있었다.빈들 또한 조용한 편이었으나, 단 하나. 약쟁이 사건만큼은 태후의 골칫거리였다.태후는 후궁들에게 자중할 것을 명하며, 그 본보기로 현비를 들었다.그날 밤 현비의 시녀 동하가 태후를 찾아와 다급히 울부짖었다.“태후마마, 제발 저희 마마를 살려주십시오!”이미 잠자리에 들었던 태후는 몸을 일으키며
봉구안은 자신이 직접 그려둔 지도를 꺼내어 소욱에게 펼쳐 보였다.“황성을 총타로 삼아 사방에 명령을 내리는 것. 이것이 바로 그들의 지령 경로입니다.”“그들의 평소 수법을 보면, 지금처럼 조정과 무림이 손잡고 그들을 압박하는 상황에서 가장 먼저 할 일은 모든 연락선을 끊고 총타부터 지키는 것이겠지요.”“그러기 위해서는 내부 인물들을 정리하는 게 먼저입니다.”소욱이 그녀의 말을 받아 이었다.“그렇다면 우리가 그 틈을 노려 분타부터 하나씩 무너뜨릴 수 있다는 뜻이로군.”봉구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그녀는 지도 위 몇 군데를 손가락으로 짚었다.“여기 표시된 곳들이 현재 저희가 확인한 그들의 은신처입니다.”“대부분 외진 산골이나 황량한 지역에 자리 잡고 있어요. 죽산진 근처 산속 동굴처럼 말이지요.”“폐하께서도 기억하시겠지요. 예전에 황성 도관 아래에서 많은 약쟁이들을 발견했을 때를요.”소욱은 그 일을 뚜렷이 기억하고 있었다.그때 봉구안은 약쟁이에게 상처를 입었고, 그가 그녀를 등에 업고 간신히 빠져나왔었다.봉구안의 눈빛이 차갑게 식어갔다.“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 도관 자체가 약쟁이의 은신처였을지도 몰라요.”“그리고 기억하시겠지요. 천룡회가 황성을 공격했을 때 약쟁이 대군을 풀었는데, 그 시각이 바로 늦은 밤이었어요.”소욱은 그녀가 전하려는 의미를 곧장 알아차렸다.그는 지도 위에 찍힌 지점들을 살펴보았다.“은신처의 위치와 약쟁이들의 활동 시각을 보면, 그 자들은 어둠 속 환경에 익숙한 존재들이겠구나.”봉구안은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어둡고 외진 곳이야말로 약쟁이들의 은신처로는 가장 알맞은 곳일 거예요.”“저희가 죽산진에서 약쟁이 소굴을 조사했을 때도, 산속 동굴 안은 손을 뻗어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만큼 깜깜했지요.”“강주에서 발견한 은신처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우연이라고 보기엔 너무 겹치는 것들이 많아요.”소욱은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그렇다면… 이 사실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겠느냐?”봉구안은 냉정한 눈빛
봉구안은 놀란 듯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황성에도 홍련초가 자란다고요?"소욱은 곧바로 진지하게 대답했다."누가 심었는지, 얼마나 되는지는 아직 모른다. 서쪽 교외에 사람을 보냈으니 곧 소식이 올 거야."봉구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에 잠겼다.소욱은 그녀의 그릇에 반찬을 더 담으며 말했다."일단 밥부터 먹으렴. 요즘 부쩍 더욱 말라 보이는구나. 아이를 품은 몸이라면 더 잘 챙겨야 하지."하지만 봉구안의 눈빛은 여전히 다른 데 머물러 있었다."혹시… 열무신의 소식은 아직도 없는거죠?"소욱은 묵묵히 고개를 저었다. 그는 서둘러 그녀가 더 걱정하지 않도록 화제를 돌렸다.소탁을 황성으로 데려온 뒤 그는 곧장 태의원을 불러 진찰을 받게 했다. 하지만 상처가 눈에 있는 탓에 회복이 쉽지 않았고 지금은 사실상 눈이 먼 사람처럼 지내고 있었다. 혼자 사는 데 어려움이 컸지만, 하녀를 붙여 주겠다는 제안도 번번이 거절했다.봉구안은 차분하게 물었다."폐태자께서는 지금 어디에 머물고 있나요?""마땅한 집을 하나 찾아 그곳에 머물게 하였다. 혹시나 있을 위험을 대비해 그림자 호위도 붙여 두었다."그가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은 단순한 걱정 때문만은 아니었다. 잠시 뜸을 들이던 소욱이 다시 입을 열었다."예전에 널 시중들던 연상을 혹시 기억하느냐?"봉구안은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되물었다."연상… 기억하죠. 그런데 갑자기 그건 왜 여쭤 보시는 거죠?"소욱은 다소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요 며칠 사이 그 아이가 소탁을 여러 번 찾아갔다는구나. 꽤 신경을 쓰는 듯했다."봉구안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그게 그렇게 문제될 일인가요?""그 아이는 아직 시집을 안 가지 않았느냐."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봉구안은 곧장 말을 끊으며 단호하게 말했다."제가 알기론 연상은 궁을 떠난 뒤 곧장 진가 저택으로 돌아갔습니다. 혼자서 글씨와 그림으로 생계를 꾸려 왔고요. 살림은 넉넉지 않지만 나름대로 삶의 방향은 확실합니다. 진가를 다시 일으켜 세우겠다는 뜻을
녕비는 자기가 무슨 심각한 말을 했는지도 모른 채 해맑게 웃으며 현비를 바라보았다.“언니, 우리 자매처럼 지냈잖아요. 그래서 말인데 남한테 덜미 잡히기 전에 차라리 폐하께 먼저 말씀드리는 게 낫지 않을까요? 어차피 결백한 사람은 당당해도 되는 법이지 않겠어요?”“홍련초는 그 자체로는 죄가 없는 약초예요. 죄가 있는 건 그걸로 독을 만든 자들이죠.”“언니처럼 착한 분이 약쟁이랑 엮일 리가 없잖아요, 그쵸?”그녀의 웃음은 현비의 눈에 유난히 싸늘하고 따갑게 느껴졌다.현비는 얼굴이 희미하게 질려가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녕비, 네가 의심하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해.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맹세컨대 내가 마시는 약은 약쟁이 사건과는 정말 아무 관련도 없어.”녕비는 굳이 대꾸하지 않은 채 조용히 말을 이었다.“제가 언니를 믿느냐 마느냐는 사실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중요한 건 폐하께서 어떻게 생각하시느냐죠.”현비는 한동안 침묵하다가 깊은 숨을 고르고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맞는 말이야.”“자, 할 말은 다 했으니까 전 이만 자녕궁으로 가볼게요. 태후마마께 기도드릴 시간이네요. 굳이 배웅하지 않으셔도 돼요.”녕비가 자리를 뜬 뒤, 곁에 있던 시녀 동하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마마, 녕비 마마 말씀이 틀린 것도 아니에요. 폐하께서 약쟁이 사건을 철저히 조사하고 계시다 하니, 홍련초가 얽히는 일은 아무래도 너무 커요.”현비의 눈빛에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그녀는 그저 이 궁 안에서 살아남고 싶었을 뿐이었다.그녀는 그 어떤 죄도 짓지 않았다. 정말로 아무 잘못도 없었다.“…종이랑 붓을 준비하거라. 폐하를 뵙기 전에 아버지께 먼저 편지를 써야겠다.”“예, 마마.”……그날 밤.자유각.소욱은 이날 밤도 자유각에 머물며 봉구안과 시간을 보내려 했다.그러나 대부분의 시간은 상소문을 검토하는 데 쓰였고 그녀 곁에 있어도 여유를 누릴 틈은 많지 않았다.그는 문서를 펼쳐든 채 농담처럼 말했다.“황제가 된 건, 아마 전생의 업보였던 모양
그해 봉구안은 스스로 천지설산에 올라 자욱화를 채취하려다 목숨을 잃을 뻔하였다. 그때 그녀를 구해준 이가 바로 염 신의였다.그 후 인연이 닿아 둘은 다시 만나게 되었고, 그 무렵 염 신의는 약쟁이 독의 해독제를 연구하고 있었다.이에 봉구안은 그를 황성으로 데려왔다.그는 예전에도 한 차례 해독제를 만들어낸 바 있었으나, 중독자들에게 써보았을 때 뚜렷한 효과는 없었다.하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진정한 해독제가 완성된 것이다.분명 기쁜 소식이었다.“염 신의 말로는, 홍련초 덕분에 그동안 풀지 못했던 원리를 비로소 깨달았다고 합니다.”“이미 중독자들에게 해독제를 복용시켰고 모두 회복되었습니다. 장순의 어머니까지도요.”장순은 아직 어린 유생이었으나, 과거 제후국들이 남제를 포위했을 당시 봉구안이 특별히 데려갔던 소년이었다.그는 적국을 향한 설전에서 통쾌한 활약을 펼친 바 있었다.그의 어머니는 오래전 약쟁이 독에 중독되어, 살아 있으되 정신이 나간 채 살아온 사람이었다.해독제가 생겼다는 건 의심할 여지 없이 경사였다.허나 좋은 일과 화는 언제나 함께 오는 법. 봉구안이 눈짓 하나만 보내도 소욱은 그녀의 속마음을 단박에 알아차렸다.그녀가 입을 떼기도 전, 소욱은 그녀의 팔을 가볍게 두드리며 오백에게 명을 내렸다.“사람을 붙여 염 신의를 철저히 보호하라. 해독제 이야기는 절대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하라.”오백은 곧장 명을 따랐다.밖에서 듣고 있던 진한길은 내심 고개를 갸웃거렸다.‘폐하께서는 왜 이렇게 오백을 쓰시는 걸까?’오백이 물러난 뒤, 소욱은 봉구안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해독제가 완성되었으니 약쟁이 독이 아무리 퍼져도 더는 위협이 되지 못할 것이다.”봉구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해독제는 결정적인 열쇠예요. 폐하, 문득 떠올랐는데… 담대연도 약쟁이 독에 중독된 사람이었죠?”소욱은 손을 들어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그 자에게도 해독제를 줄 것이다. 이제는 마음 놓고 쉴 수 있겠지?”“네.”봉구안도 지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