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주, 관아 내부.관아의 관리들은 끼니도 거른 채, 수년간의 실종자 명단을 정리하느라 분주했다.실종자 관련 신고도 줄줄이 접수되고 있었다.황후가 강주에 와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오직 봉 대인뿐이었다.나머지 관리들은 전혀 눈치 채지 못했고, 몇몇은 봉 대인을 슬쩍 떠보았다.“봉 대인, 황후마마께서 서여국으로 가셨다던데요.”“그쪽에서 황제가 되셨다… 그런 이야기가 돌던데, 사실입니까?”봉 대인의 표정은 단호했다.“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가 어디 있소!”그러자 한 관리가 더 나섰다.“봉 대인, 이쯤 되면 숨기실 것도 없지 않습니까?”“다들 아는 얘기예요. 들은 바로는, 대인의 전부인 되시는 분께서 서여국 선황의 친동생이라던데요.”그 말에 봉 대인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그 역시 그런 소문을 들은 적 있었다.예전 봉구안에게 직접 물어본 적도 있지만, 당시 그녀의 반응만 보면 다 헛소문이라 여겼다.하지만 이렇게 또 다시 거론되자, 어쩌면 단순한 유언비어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스쳤다.그럼에도 ‘유씨’가 서여국 황실의 혈통이라는 건, 도저히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봉 대인은 발걸음을 곧장 봉구안에게로 옮겼다.유씨와 서여국의 관계… 이제는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했다.대청에는 부녀 둘만이 남았다.봉구안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한층 낮고 무거웠다.“말씀 들으신 그대로입니다. 소문은 사실이에요.”이미 온 세상이 다 알아버린 마당에, 더는 숨길 필요도 없었다.봉 대인은 두 눈을 부릅뜬 채 멍하니 서 있었다.“뭐라고…? 네, 네 어미가… 정말 서여국 전 황제의 여동생이었다는 말이냐?”“그럼, 유씨 댁 두 어른은… 너희 외가 말이다. 그분들이 친부모가 아니었던 것이냐?”봉구안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봉 대인은 그 자리에 그대로 굳어버렸다.자신이 외면했던 그 여인이… 황실 혈통이라니.그제야 떠올랐다.과거 유씨 댁 두 어른들은 유독 봉 부인에게 박했다.지금 생각해보니, 그녀가 친딸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봉 대인은
봉 대인은 소욱의 속마음을 알지 못했다.황제가 죄를 묻지 않으니 그저 안도의 한숨이 나왔을 뿐이다.다만 의외였던 건, 황후를 향한 황제의 애정이었다.이런 황당한 일도 아무렇지 않게 눈 감아주는 걸 보면, 딸을 얼마나 아끼는지 짐작이 갔다.자신 같았으면?절대 용납하지 않았을 터였다. 아내가 제멋대로 나랏일에 얽혀드는 일이라니, 그에게 있어서는 절대 상상도 못 하는 일이었다.“폐하의 너그러운 아량에 그저 감읍할 따름입니다.”“이번 일은 전적으로 저희 봉가에서 비롯된 것이온데… 신이… 신이 어찌 면목이 있겠습니까…”하지만 소욱은 봉 대인 앞에서도 봉구안을 향한 깊은 애정을 숨기지 않았다.“황후는 내게 더 많은 것을 참아주었다.”그녀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꿀이라도 묻어 있는 듯, 다정함이 묻어났다.봉구안은 시선을 피하듯 고개를 돌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봉 대인에게 말했다.“더 하실 말씀이 없으시다면 돌아가시지요.”“폐하와 저는 정사로 논의할 것이 있어 바쁩니다.”지금은 강주의 약쟁이 사건을 샅샅이 조사해야 할 시기였다.사마 신분으로 이토록 한가하게 돌아다니는 건 도리가 아니었다.봉구안은 봉 대인을 마주할 때조차 한 점의 온기도 비치지 않았다.친부녀 사이라기보다는 낯선 이와 응대하는 듯했다.봉 대인은 이제 그런 태도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했다.그는 뭔가 떠오른 듯 무심히 물었다.“서여국 일 말이다… 맹건은 알고 있느냐?”봉구안은 특별히 숨길 이유도 없다는 듯 덤덤히 답했다.“사부님은 북방에 계십니다. 아직 편지를 드리진 않았습니다.”그러나 그녀는 걱정하지 않았다.사부와 사모의 사람 보는 눈이라면, 이미 상황을 짐작하고도 남을 터였다.그 말을 들은 봉 대인은 눈에 띄게 입꼬리를 올렸다.하지만 곧 들키지 않으려 애써 눌렀다.‘허허, 결국 그 늙은 맹가 장군보다 내가 먼저 알았다는 거지. 역시 구안이는 나를 더 가깝게 여기는 게야.’‘말은 저래도, 속은 참 여린 아이라니까.’그는 어깨를 으쓱이며 흡족한 듯 대청을 나섰다.그
소욱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봉구안을 바라보았다.그녀와 자신 사이에 아이가 생기다니.그녀의 난임을 치료하겠다고 무애산까지 다녀왔고, 스승이 내려준 약도 꾸준히 복용했지만, 마음속 어딘가에선 이미 단념했던 터였다.그런데 지금… 그녀가, 그의 구안이가… 아이를 품었다.의원은 단호하게 말했다.“경사입니다. 태동은 아직 없으나 맥을 보건대, 한 달 남짓 된 태아의 맥이 맞습니다.”소욱의 눈빛이 반짝이며 환하게 빛났다.“좋다! 상을 주마! 여봐라, 어서 포상 준비를 해라!”진한길이 황제의 손짓에 따라 금화를 꺼내 의원 손에 쥐어주자, 의원은 그 자리에서 그만 다리가 풀릴 뻔했다.맥 하나 짚었을 뿐인데, 황금이 쏟아졌다. 그야말로 하늘에서 내린 횡재였다.의원이 물러간 뒤, 소욱은 참지 못하고 봉구안을 덥석 안아 올렸다.“구안아, 우리에게 아이가 생겼다. 우리 둘 사이에 아이가 생겼어!”봉구안은 미소 지으며 그의 입술 위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조용히 하십시오. 아이가 놀랍니다.”기쁘지 않을 리 없었다.하지만 태는 3개월이 지나야 자리를 잡는다고 했다.괜한 기대에 들떠 방심했다간, 모든 걸 잃을 수도 있었다.그래서일까. 봉구안은 들뜬 감정을 애써 누르며 담담히 반응했다.소욱은 그녀를 침상에 조심스레 눕히고, 이불을 배 위로 덮었다.작은 한기라도 스며들까, 손끝까지 세심했다.그녀의 손을 가만히 감싸쥐고, 입꼬리를 간신히 누르며 중얼거렸다.“이 아이는 강할거야. 우리를 닮아서 말이다.”한 달 전, 함께한 밤이 떠올랐다.그때 이미 그녀의 몸이 반응을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소욱은 자책하듯 고개를 떨궜다.“내가 좀 더 일찍 의원을 불렀어야 했는데… 미안하구나.”무애산의 스승은 치료에 시간이 걸릴 거라 했고, 그는 그 말대로 될 거라 믿었다. 아니, 사실상 기대를 내려놓았던 게 더 가까웠다.하지만 오늘, 모든 걸 뒤엎는 기적이 일어났다.그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배에 손을 얹었다.이 감정은 황위에 올랐을 때조차 느껴보지 못했던 벅참이었
“장군! 급보입니다! 장미 아가씨께서 치욕을 당해 자결하셨으니 속히 경성으로 복귀하여 큰아가씨 대신 혼인하라는 노부인의 명이 있으셨습니다!”남제(南齊)의 변경, 준마가 금방 녹은 시냇물을 힘차게 밟으며 미친 듯한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말을 탄 봉구안(鳳九顏)이 최전방에서 달리고 있었다. 흰색 소복에 검은 머리를 대충 비녀로 틀어 올린 그녀의 주변으로 귀티 나면서도 날카로운 분위기가 풍기고 있었다.그녀와 동생 봉장미는 쌍둥이였지만 이 시대에 여자 쌍둥이가 태어나면 불길한 징조였기에 그녀는 어릴 때부터 바깥을 떠돌며 자랐다.성품이 온화한 봉장미는 누구에게 원한을 살 여인이 아니었다.봉구안은 누가 그처럼 순수하고 착한 동생을 해하였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었다.하지만 그게 누구든, 범인의 가죽을 발라내서 개 먹이로 줄 것이다!호위대는 그녀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뒤에서 애타는 목소리로 소리쳤다.“장군, 벌써 강행군으로 말 두 마리가 죽었습니다. 전방에 객잔이 있으니 가서 좀 쉬고…”봉구안은 힘차게 채찍을 휘둘렀다.“따라오지 못할 거면 군영으로 꺼지거라! 이랴!”‘멍청한 놈들, 쉴 시간이 어디 있다고!’그녀의 어깨에 짊어진 것은 봉씨 가문 백여 명의 목숨이었다.호위대는 필사적으로 그녀의 뒤를 따랐다.상대는 북대영(北大營)에서 가장 빠르고 신출귀몰하기로 소문난 봉 장군이었다!그렇게 7일 후, 황성.봉가에서 일국의 황후가 나왔다는 것은 지고무상한 영광이었다.백성들은 천자의 혼인식을 구경하러 분분히 거리로 나왔다.하지만 영친 대오가 도착했지만 새신부가 나오지 않고 있었다.구경꾼들이 차츰 술렁이기 시작했다.“봉가의 장녀는 얼마 전에 산적들에게 끌려갔다가 봉가의 친위대가 출동하여 겨우 구해왔다고 들었는데 순결을 잃었을지도 모르는 여인이 어찌 일국의 황후가 될 수 있단 말이오?”“봉가의 여인들은 참 팔자도 좋소. 대대로 황후를 배출한 가문 아니오. 이런 든든한 집안이 우리 남제를 지켜주고 있어서 우리가 이런 태평 성세에 살고 있는
방 안에서 바깥의 소리를 듣고 있던 봉구안은 눈을 가늘게 치켜떴다.검사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봉가에는 이득이 될 게 없었다.황귀비는 봉가의 여식이 이미 순결을 잃었다는 것을 알고 일을 벌인 것이 분명했다.만약 봉장미의 대신인 그녀의 순결이 증명된다면 이 음모를 피해갈 수 있을지는 모르나, 필히 황귀비의 의심을 사게 될 것이다.만약 대체품 신분이 밝혀진다면 그것은 황실을 기만한 중죄이며 봉가는 화를 면치 못할 것이다.봉구안은 전방을 주시하며 창을 휘두르던 손으로 얼굴에 연지를 곱게 발랐다.사부께서는 그녀에게 병법과 관료가 해야 할 일들을 가르치셨다.사부의 부인인 사모께서는 그녀에게 안주인으로서의 도리와 처세술을 가르쳐 주셨는데 그 중에는 첩이 득실대는 귀족가의 뒷방에서 살아남는 법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때는 가르쳐 주시니 겸허히 배웠지만 그걸 쓰게 될 날이 오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그녀는 뒷방에 갇혀 살림이나 하면서 서방을 섬기는 여자보다는 이 나라의 곳곳을 누비며 영토를 넓히는 게 꿈인 사람이었다.그런데 결국 돌고 돌아 이런 날이 올 줄이야.태감과 그가 데려온 궁중 여관은 기세등등하게 봉 부인을 압박했다.“부인, 이건 황귀비 마마의 명령일세. 감히 명을 거부하겠다는 건가?”태감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비웃듯이 물었다.‘너희가 아무리 권세 가문이라고 하더라도 황실의 명을 어길 수는 없지! 깃털이 다 뽑힌 봉황은 닭보다도 못한 법이야!’그는 그런 생각을 하며 계속해서 음침한 얼굴로 봉 부인을 추궁했다.“이거 말로 해서는 안 되겠군! 그럼 날 너무 원망하진 마시게!”곧이어 그가 손짓하자 뒤를 따르던 궁중 시위대가 나섰다.봉 부인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봉가의 저택에서 법도를 무시한 채, 이런 무례한 일을 벌이다니!궁중 시위대가 봉 부인을 제압하려던 찰나, 창문 너머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우리 봉씨 가문은 대대로 황후를 배출한 가문으로 역사에 이름까지 올렸다. 그런데 그런 가문의 여식인 내가 순결을 의심받는 날이 오다니.”
자녕궁(慈寧宮), 태후의 처소.봉가의 일을 전해들은 태후는 흐뭇한 얼굴로 계 상궁을 바라보며 말했다.“작년 생일 연회에서 봉장미 그 아이를 보았을 때는 성격이 너무 유약하여 황후의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었지.”“그런데 오늘 일은 꽤나 영리하게 대처했군. 능연(황귀비 이름: 凌燕)의 측근에게 대놓고 면박을 주다니. 내가 그 아이를 너무 만만하게 생각했던 것 같구나.”태후의 최측근인 계 상궁은 어린시절부터 궁중에서 생활한 사람으로 후궁이 얼마나 험난한 곳인지 알고 있었다. 그녀는 조용히 태후의 찻잔에 따뜻한 차를 따르며 말했다.“폐하께서 황귀비를 편애하는 것은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니 황후께서 아무리 영리하신 분이라 할지라도 영소전과 대항하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어쩌면 오늘밤에 황귀비가 또 소란을 부릴 수도 있겠군요.”계 상궁은 어린 황후에게 딱히 거는 기대가 없었다.태후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자네 말도 맞아. 수완(琇琬,태후의 조카딸)이 입궁했을 때도 그랬지. 황상은 그 아이의 처소에 머무르기로 했는데 능연 그 요물이 아프다고 난리를 치면서 황상을 자기 처소로 불러갔었지.”“지금 생각해도 그 아이가 안타깝구나. 고모로서 아무 도움도 못 주고.”계 상궁은 조용히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폐하는 애증이 분명한 분이고 아직까지 후궁에서 황귀비를 대적할 비빈은 나온 적이 없지요. 황후께서도 아마 오늘 밤에 독수공방하게 될 것 같군요.”태후의 생각도 마찬가지였다.태후는 황제의 생모는 아니지만 어릴 때부터 황제를 길러준 사람이었기에 그의 성격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었다.영비를 향한 그의 집착과 죄책감은 전부 대체품인 능연에게로 갔다.선황의 유언장이 없었더라면 아마 황후의 자리도 진작에 황귀비 차지가 되었을 것이다.길시가 되자 봉구안은 금자수를 수놓은 혼례복에 황후의 상징인 왕관을 머리에 올리고 옥석으로 장식한 복도를 걷고 있었다.복도의 끝에는 마찬가지로 옥으로 된 계단이 기다리고 있었다.그녀가 십보 걸을 때마다 뒤를
황제가 오기로 되어 있으니 봉구안은 마지못해 다시 치장을 시작했다. 그런데 연상이 긴장한 탓인지 손을 덜덜 떨고 있었다.세 번째로 두피에서 통증이 느껴졌을 때, 봉구안은 더는 참지 못하고 싸늘하게 말했다.“내가 알아서 할 테니 넌 나가 있거라.”스승님 밑에서 변장술을 익힐 때 단장하는 법도 많이 익혔기에 그녀는 손쉽게 머리를 원래대로 복구했다.연상은 그녀를 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마마, 제가 한 것보다 더 예쁘네요.”그렇게 그들이 황제를 맞을 준비까지 다 마쳤을 때, 밖에서 전갈이 왔다.“마마, 황귀비마마께서 두통이 재발했다고 하여 폐하께서는 영소전으로 가셨사옵니다.”연상은 입만 뻐금거리며 말을 잇지 못했다.하필 황제가 궁으로 복귀하자마자 두통이 재발하다니!황귀비의 뻔한 수가 엿보였지만 아무도 뭐라 할 수 없었다.봉구안은 황귀비 얘기가 나오자 죽은 동생 봉장미가 떠올랐다.‘장미야, 무슨 수를 써서라도 언니가 복수해 줄게!’싸움에서 이기려면 적을 파악해야 하는 법.황귀비는 장기간 독보적인 총애를 받아왔으니 신변에 분명 무예가 강한 호위가 지키고 있을 것이다.경솔하게 움직일 수는 없었다.한편, 자녕궁.태후는 염주를 손에 쥐고 더듬으며 화를 삭히고 있었다.“혼인 첫날밤에 서왕을 신랑 대역으로 세웠다니! 대체 이게 다 무슨 일이더냐! 황상이 이런 황당무계한 일을 벌일 때까지 너희는 대체 뭘 하고 있었느냐!”궁녀는 고개를 푹 숙이고 대답했다.“소인은 정말 몰랐사옵니다.”황제가 유아독존에 제멋대로인 게 하루이틀이 아니고 태후의 말도 그에게는 통하지 않았다.하지만 이대로 가다 가는 천하 백성들에게 태후가 자식을 잘못 가르쳤다고 비난 받을 판이었다.태후는 화가 나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이 상황이 서럽고 무기력함에 빠졌다.“내 비록 황상의 생모는 아니지만 현명한 군왕으로 가르치려고 노심초사했건만…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을까…”그 모습을 본 시종들은 태후가 안타깝고 황제가 불효하다고 생각했다.그리고 불 난 집에 기름 붓는 소식
봉구안이 신혼방으로 돌아오자 아까까지 잔뜩 인상을 쓰며 싫은 티를 내던 최 상궁은 싱글벙글 웃으며 뜨거운 물을 준비하라고 시종들에게 일렀다.그러고는 감개무량해서 봉구안에게 말했다.“마마, 그동안 황귀비를 제외하고 폐하께서는 한 번도 다른 비빈들에게 밤시중을 명하지 않으셨습니다. 마마가 그 선례를 깨신 거예요!”연상은 갑자기 태도를 바꾼 최 상궁을 불만스럽게 바라보았다.궁에서 여자의 지위는 황제의 총애와 비례한다지만 존귀한 황후마저 거기에 포함될 줄이야.봉구안은 주저리주저리 떠드는 최 상궁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싸늘하게 말했다.“연상이만 남고 다들 나가 있거라.”내전이 조용해지자 연상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마마, 폐하께서 오시기로 한 것은 우리에게 좋은 일이긴 하나, 이렇게 되면 황귀비와 완전히 척을 지게 되는 거 아닌가요?”“부인께서는 저희에게 궁에서 적을 만들지 말고 조용히 지내라고 하셨사온데….”“어머니께서 장미에게도 그러라고 가르쳤더냐?”봉구안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연상을 바라보며 물었다.그녀는 이런 교육 방식을 찬성하지 않았다.사부와 사모께서는 그녀에게 은혜는 배로 갚고 원수도 배로 갚으라고 가르쳤고 어차피 한번 사는 인생, 유감을 남기지 말라고 하셨다.사실 봉 부인도 봉가에서 전해져 내려온 법도대로 자식들을 가르쳤다.봉가는 대대로 황후를 배출한 과문이었기에 유독 딸에게는 요구가 엄격했다.악기, 바둑, 그림, 서시 모든 방면에서 봉가의 딸은 남들보다 뛰어나야 한다는 명백한 요구가 있었다.그리고 사람들에게 덕을 베풀어 좋은 명성을 유지해야 했다.장미는 서신에서 자유롭게 어디든 갈 수 있는 언니가 부럽다고 하면서 황후가 되고 싶지 않다는 얘기를 매번 했었다.지금 생각해 보면 봉장미처럼 유순한 사람이 입궁하여 황후가 되었다면 주변의 시달림을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연상은 봉부의 하인들 중에서 봉구안의 진짜 신분을 아는 사람이었다.그녀는 주변을 경계하다가 다가가서 창문을 닫으며 말했다.“마마, 저희를 예의주시하는 사
소욱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봉구안을 바라보았다.그녀와 자신 사이에 아이가 생기다니.그녀의 난임을 치료하겠다고 무애산까지 다녀왔고, 스승이 내려준 약도 꾸준히 복용했지만, 마음속 어딘가에선 이미 단념했던 터였다.그런데 지금… 그녀가, 그의 구안이가… 아이를 품었다.의원은 단호하게 말했다.“경사입니다. 태동은 아직 없으나 맥을 보건대, 한 달 남짓 된 태아의 맥이 맞습니다.”소욱의 눈빛이 반짝이며 환하게 빛났다.“좋다! 상을 주마! 여봐라, 어서 포상 준비를 해라!”진한길이 황제의 손짓에 따라 금화를 꺼내 의원 손에 쥐어주자, 의원은 그 자리에서 그만 다리가 풀릴 뻔했다.맥 하나 짚었을 뿐인데, 황금이 쏟아졌다. 그야말로 하늘에서 내린 횡재였다.의원이 물러간 뒤, 소욱은 참지 못하고 봉구안을 덥석 안아 올렸다.“구안아, 우리에게 아이가 생겼다. 우리 둘 사이에 아이가 생겼어!”봉구안은 미소 지으며 그의 입술 위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조용히 하십시오. 아이가 놀랍니다.”기쁘지 않을 리 없었다.하지만 태는 3개월이 지나야 자리를 잡는다고 했다.괜한 기대에 들떠 방심했다간, 모든 걸 잃을 수도 있었다.그래서일까. 봉구안은 들뜬 감정을 애써 누르며 담담히 반응했다.소욱은 그녀를 침상에 조심스레 눕히고, 이불을 배 위로 덮었다.작은 한기라도 스며들까, 손끝까지 세심했다.그녀의 손을 가만히 감싸쥐고, 입꼬리를 간신히 누르며 중얼거렸다.“이 아이는 강할거야. 우리를 닮아서 말이다.”한 달 전, 함께한 밤이 떠올랐다.그때 이미 그녀의 몸이 반응을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소욱은 자책하듯 고개를 떨궜다.“내가 좀 더 일찍 의원을 불렀어야 했는데… 미안하구나.”무애산의 스승은 치료에 시간이 걸릴 거라 했고, 그는 그 말대로 될 거라 믿었다. 아니, 사실상 기대를 내려놓았던 게 더 가까웠다.하지만 오늘, 모든 걸 뒤엎는 기적이 일어났다.그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배에 손을 얹었다.이 감정은 황위에 올랐을 때조차 느껴보지 못했던 벅참이었
봉 대인은 소욱의 속마음을 알지 못했다.황제가 죄를 묻지 않으니 그저 안도의 한숨이 나왔을 뿐이다.다만 의외였던 건, 황후를 향한 황제의 애정이었다.이런 황당한 일도 아무렇지 않게 눈 감아주는 걸 보면, 딸을 얼마나 아끼는지 짐작이 갔다.자신 같았으면?절대 용납하지 않았을 터였다. 아내가 제멋대로 나랏일에 얽혀드는 일이라니, 그에게 있어서는 절대 상상도 못 하는 일이었다.“폐하의 너그러운 아량에 그저 감읍할 따름입니다.”“이번 일은 전적으로 저희 봉가에서 비롯된 것이온데… 신이… 신이 어찌 면목이 있겠습니까…”하지만 소욱은 봉 대인 앞에서도 봉구안을 향한 깊은 애정을 숨기지 않았다.“황후는 내게 더 많은 것을 참아주었다.”그녀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꿀이라도 묻어 있는 듯, 다정함이 묻어났다.봉구안은 시선을 피하듯 고개를 돌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봉 대인에게 말했다.“더 하실 말씀이 없으시다면 돌아가시지요.”“폐하와 저는 정사로 논의할 것이 있어 바쁩니다.”지금은 강주의 약쟁이 사건을 샅샅이 조사해야 할 시기였다.사마 신분으로 이토록 한가하게 돌아다니는 건 도리가 아니었다.봉구안은 봉 대인을 마주할 때조차 한 점의 온기도 비치지 않았다.친부녀 사이라기보다는 낯선 이와 응대하는 듯했다.봉 대인은 이제 그런 태도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했다.그는 뭔가 떠오른 듯 무심히 물었다.“서여국 일 말이다… 맹건은 알고 있느냐?”봉구안은 특별히 숨길 이유도 없다는 듯 덤덤히 답했다.“사부님은 북방에 계십니다. 아직 편지를 드리진 않았습니다.”그러나 그녀는 걱정하지 않았다.사부와 사모의 사람 보는 눈이라면, 이미 상황을 짐작하고도 남을 터였다.그 말을 들은 봉 대인은 눈에 띄게 입꼬리를 올렸다.하지만 곧 들키지 않으려 애써 눌렀다.‘허허, 결국 그 늙은 맹가 장군보다 내가 먼저 알았다는 거지. 역시 구안이는 나를 더 가깝게 여기는 게야.’‘말은 저래도, 속은 참 여린 아이라니까.’그는 어깨를 으쓱이며 흡족한 듯 대청을 나섰다.그
강주, 관아 내부.관아의 관리들은 끼니도 거른 채, 수년간의 실종자 명단을 정리하느라 분주했다.실종자 관련 신고도 줄줄이 접수되고 있었다.황후가 강주에 와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오직 봉 대인뿐이었다.나머지 관리들은 전혀 눈치 채지 못했고, 몇몇은 봉 대인을 슬쩍 떠보았다.“봉 대인, 황후마마께서 서여국으로 가셨다던데요.”“그쪽에서 황제가 되셨다… 그런 이야기가 돌던데, 사실입니까?”봉 대인의 표정은 단호했다.“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가 어디 있소!”그러자 한 관리가 더 나섰다.“봉 대인, 이쯤 되면 숨기실 것도 없지 않습니까?”“다들 아는 얘기예요. 들은 바로는, 대인의 전부인 되시는 분께서 서여국 선황의 친동생이라던데요.”그 말에 봉 대인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그 역시 그런 소문을 들은 적 있었다.예전 봉구안에게 직접 물어본 적도 있지만, 당시 그녀의 반응만 보면 다 헛소문이라 여겼다.하지만 이렇게 또 다시 거론되자, 어쩌면 단순한 유언비어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스쳤다.그럼에도 ‘유씨’가 서여국 황실의 혈통이라는 건, 도저히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봉 대인은 발걸음을 곧장 봉구안에게로 옮겼다.유씨와 서여국의 관계… 이제는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했다.대청에는 부녀 둘만이 남았다.봉구안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한층 낮고 무거웠다.“말씀 들으신 그대로입니다. 소문은 사실이에요.”이미 온 세상이 다 알아버린 마당에, 더는 숨길 필요도 없었다.봉 대인은 두 눈을 부릅뜬 채 멍하니 서 있었다.“뭐라고…? 네, 네 어미가… 정말 서여국 전 황제의 여동생이었다는 말이냐?”“그럼, 유씨 댁 두 어른은… 너희 외가 말이다. 그분들이 친부모가 아니었던 것이냐?”봉구안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봉 대인은 그 자리에 그대로 굳어버렸다.자신이 외면했던 그 여인이… 황실 혈통이라니.그제야 떠올랐다.과거 유씨 댁 두 어른들은 유독 봉 부인에게 박했다.지금 생각해보니, 그녀가 친딸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봉 대인은
봉 대인은 딸을 핑계 삼아, 강주의 특산 복숭아 누름과자를 들고 궁으로 들어왔다.하지만 봉구안은 소욱보다도 냉담했다. 얼굴엔 미소 하나 없었고, 목소리는 싸늘했다.“왜 오셨어요?”어젯밤 분명히 경고했다.요즘 강주는 어수선하니 조용히 사마부에 머물라고.그런데도 기어코 선물까지 들고 얼굴을 비추다니.봉 대인은 기가 죽은 듯 두 손을 꼭 움켜쥔 채, 고개조차 들지 못하고 황제와 황후 앞에 섰다.“저… 아니, 신이… 혹시 무슨 도움이 될까 하여 들렀습니다.”“그래도 한때 강주 사마였으니, 백성들 얼굴쯤은 익숙합니다.”봉구안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말투엔 그늘 하나 없이 냉정했다.“쓸데없는 짓 안 하시는 게 제일 큰 도움이에요.”그 말에 봉 대인은 더욱 풀이 죽었다.소욱조차 이번만큼은 봉구안이 지나치게 매정한 것 같았다.“좋은 마음에서 온 게 아니겠느냐. 그만 화 풀어라, 구안아.”소욱이 본인의 편을 들어주자, 봉 대인의 얼굴이 금세 환해졌다.그러나 소욱은 곧 공적인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요즘 실종자 수색이 한창이네.”“관아에서도 이 일에 집중하고 있지.”봉 대인은 그제야 눈빛이 살아났다. 곧장 예를 올리며 말했다.“신이 바로 나가 보겠습니다!”돌아서기 전, 그는 봉구안에게 조심스레 덧붙였다.“누름과자는 따뜻할 때 드셔야 제맛이지. 좀 먹어보거라.”봉 대인이 떠나자, 소욱이 조심스레 봉구안을 달랬다.“그래도 부친이지 않느냐. 걱정돼서 온 게 느껴졌다.”봉구안은 냉소를 머금은 웃음을 지으며 되물었다.“그게 느껴지셨어요?”소욱은 탁자 위의 누름과자를 집어 손에 쥐어주며 말했다.“이게 그 누름과자 아니냐.”소욱은 상자를 열며 중얼거리다가, 손을 멈췄다.“근데 이 과자…”봉구안이 고개를 들었다.“왜 그러십니까?”소욱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차갑지 않느냐. 이걸 어떻게 따뜻할 때 먹으라는 거지?”“게다가 다 부서졌지 않느냐. 대인은 말은 번지르르하게 해도, 속으로는 공 훈장이나 생각하고 있는 게 분명하구나.”
화살이 운산파 장문이 머무는 주실을 향해 날아들었다.문 앞을 지키던 대제자는 익숙한 듯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화살촉에는 짧은 서찰이 매달려 있었다.아직 잠들지 않았던 ‘구학’은 침상에서 몸을 일으켜 직접 화살을 걷어냈다. 서찰에는 역시나 약쟁이 수거 장소가 적혀 있었다.통상대로라면, 이 시점부터 바로 인원을 파견해 약쟁이를 인수하면 되었다.어둠 속, 나무 위에서 잠시 눈을 붙이고 있던 열무신이 문득 눈을 떴다. 방금 화살이 날아온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그림자는 몸을 숨기며 재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동작은 날렵했고, 무엇보다 운산파의 지형을 손바닥 보듯 꿰뚫고 있는 듯했다.열무신이 뒤쫓았지만, 검은 그림자는 여러 갈래로 갈라진 길을 자유자재로 이용하며 금세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 눈빛에는 차가운 전의가 서려 있었다.머릿속을 스친 건 오래전 실종된 친구, 맹성주의 얼굴이었다.복수하겠다는 그 의지가 지금껏 그를 버티게 한 힘이었다. 반드시 그들을 잡아내 맹성주를 대신해 복수를 하리라 다짐하였다.스윽! 스윽!어둠 속에서 연달아 화살이 날아들었다. 열무신은 몸을 틀어 회피했지만, 고개를 들었을 땐 이미 그림자는 사라진 뒤였다.그가 아쉬움에 이를 악물던 순간, 옆을 스쳐 지나가는 또 다른 그림자가 있었다. 봉구안이었다.그녀의 몸놀림은 열무신보다도 날쎄고, 판단력은 번개처럼 빨랐다. 폭풍처럼 망설임 없이 숲을 가로질렀다.두 시진 후, 숲 한가운데. 봉구안은 마침내 그림자를 따라잡았다.상대는 나무를 이용해 시야를 가리려 했지만, 오히려 그것이 오산이었다. 그의 속도는 둔해졌고, 그 틈을 봉구안이 놓칠 리 없었다.그녀는 그의 앞을 막아서며 손바닥으로 강하게 내려쳤다.쿵!그림자는 허공에서 떨어지는 낙엽처럼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봉구안은 몸을 틀며 허리춤에서 암기를 꺼내 날렸다. 화살은 정확히 그의 다리를 꿰뚫었다. 다친 다리로는 경공을 펼칠 수 없었고, 더 이상 도망칠 수 없었다.그녀는 정확히 착지하자마자 혈도를 찔
강주 관아는 황제의 명을 받자마자 성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조용히 무림 인사들에 대한 체포에 착수했다.봉 대인 역시 수행을 이끌고 나섰으나, 도리어 무림인들에게 제압당해 부상을 입고 말았다.때마침 그 길을 지나던 봉구안이 나서서 사태를 정리했다.그녀와 황제를 마주친 봉 대인은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폐하, 황후마마… 신하로서 면목이 없습니다.”“강주에 이토록 많은 일이 벌어졌건만, 모두 신의 직무유기 탓입니다…”하지만 봉구안은 차갑게 그를 바라보다 말을 잘랐다.“이제 그만하시죠.”“지금은 관아의 일부터 처리해야 할 때입니다. 수행들을 데리고 어서 돌아가십시오.”“괜히 발만 더 묶지 말고.”목소리는 냉정했고, 눈길은 무심했다.딸이 무정한 건 알고 있었지만 이토록 매몰찰 줄은 몰랐다.그래도 자신은 그녀의 아버지였다.진심으로 돕고 싶었고, 노력도 했건만… 왜 그 마음은 전혀 닿지 않는 걸까.그때, 소욱이 낮게 한마디를 던졌다.“황후가 돌아가라 했다.”“어서 돌아가는 게 좋겠구나.”“예, 폐하… 다만, 두 분께서 강주까지 오셨으니, 외진 객잔보다 사마부에 머무르시는 게…”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두 사람은 말을 돌려 떠나버렸다.그 자리에 남겨진 봉 대인은 이를 악물고 속으로 분을 삭였다.‘이런 딸을 낳아봤자 무슨 소용이람…’‘도움을 바라진 않았지만, 방해는 하지 말아야 할 거 아니냐!’그날 밤, 조정은 대대적인 체포에 나섰다.속아서 끌려온 자도 있었고 정체가 들켜 도망치다 잡힌 자도 있었으며 전진파처럼 자진해서 관아로 향한 경우도 있었다.관아는 이들의 신원을 하나하나 철저히 확인했다.조사 과정은 평소보다 훨씬 더 조심스럽고 날카로웠다.강주 관아 내부.소욱은 상좌에 앉아 있었고, 대신들은 한 줄로 선 채 땀을 흘리며 바닥에 무릎 꿇고 있었다.“폐하, 신들 또한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강주에서 약쟁이 사건이 벌어지고 있었다니… 반드시 조속히 수습하여 폐하와 백성들 앞에 죄를 씻겠습니다!”소욱의
열무신은 자리에 앉아 물을 한 모금 들이켠 뒤, 조용히 입을 열었다.“운산파에 잠입했을 당시엔, 별다른 수상한 움직임이 없었습니다.”“하지만 오늘, 구 장문으로 가장하고 있던 엄 장로가 정체불명의 밀서를 받았죠.”“그가 저에게 밀서를 맡기며, 이 일을 어찌할지 논의해 달라 전하더군요.”봉구안의 계획은 명확했다.밀서에 응해 약인 운송을 허락하는 척하며, 약쟁이들을 끌어들이는 것.가능하다면 사람과 물증을 함께 잡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었다.하지만 약쟁이들은 극도로 조심스러운 집단이었다.물건을 가로채는 건 몰라도 실체를 붙잡는 건 쉽지 않다.더구나, 봉구안의 마음을 무겁게 하는 의문이 하나 있었다.“비무대회가 끝나자마자 전진파가 조정과 협력해 약쟁이들을 토벌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그런데 곧바로 운산파에 밀서가 도착했다는 건, 약쟁이들이 소식을 아주 빠르게 파악했다는 뜻이죠.”동방세가 고개를 끄덕였다.“그 정도 속도라면, 이미 강주 안에 내통자가 있다고 봐야 하오.”“아니면…”그는 말을 흐리며 봉구안을 바라봤고, 그녀는 곧장 받아 말했다.“아니면 이번 비무대회에 참가했던 자들 중, 이미 약쟁이들 인물이 끼어 있었을 수도 있겠죠.”순간, 주위의 공기가 묵직해졌다.섬뜩한 예감이 현실로 다가오고 있었다.봉구안은 소욱을 돌아보았다.그는 즉시 명을 내렸다.“진한길, 인원을 모두 소집해라.”“이번 대회 참가자 전원의 신원을 철저히 조사할 것이다.”“예, 폐하!”열무신도 자리에서 일어섰다.“저도 동행하겠습니다.”동방세 역시 발을 내디뎠다.“나도 빠질 수 없지.”사람들이 하나둘 자리를 떠나자, 봉구안은 강림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객잔은 자네에게 맡기겠소.”강림은 물을 들이켜다 혀끝을 쿡 찌르는 짠맛에 찡그렸다가, 이내 익숙한 웃음을 지었다.“여긴 내 집이오. 걱정 말고 다녀오시오.”적극적으로 나설 마음은 없는 듯, 그는 조용히 자리를 지켰다.이번 수사는 백성의 불안과 혼란을 피하기 위해 조심스럽게 진행됐다.소욱은 관아
비무대회가 끝난 뒤, 각 문파는 남아 약쟁이 토벌 방안을 의논했다.한편, 봉구안과 소욱은 조용히 객잔으로 돌아왔다.가는 길에 소욱은 다시 본래 본인의 옷으로 갈아입었다.이번 비무대회를 위해 그가 감수한 고생이 적지 않았다.봉구안은 그의 수고를 떠올리며 조심스럽게 어깨를 주물러주었다.“오늘 정말 대단하셨어요.”그 한마디에 소욱은 절로 웃음이 지어졌다.그는 팔을 뻗어 봉구안을 품 안으로 끌어안고, 그녀를 무릎 위에 앉혔다.“널 위해 애쓴 보람이 있구나. 자, 어떻게 보답해줄 것이냐?”봉구안은 그의 목을 감싸 안고, 살며시 얼굴을 가까이했다.입술이 닿을 듯한 거리에서 고개를 살짝 돌려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오늘은 제가 직접 요리할게요. 맛있는 걸로 보답해드리죠.”소욱은 한 번도 그녀의 요리를 제대로 먹어본 적이 없다.하지만, 그녀의 요리 실력이 어떤지는… 동방세가 누구보다 잘 알 터였다.갑자기 소욱은 그녀를 번쩍 안아 들었다.“굳이 그럴 필요 없다. 너도 잘 알지 않느냐, 지금 나한테 필요한 게 무엇인지…”그의 눈빛은 뜨겁고, 의미는 명확했다.마침 강림의 객잔에는 아무도 없었고, 이 둘만의 시간이 허락된 상황이었다.봉구안이 대꾸할 틈도 없이, 소욱은 그녀를 안은 채 내실로 향했다.장막은 그의 발끝에 걷혀지고, 몇 벌의 옷가지가 문밖으로 던져졌다.방 안에서는 봉구안의 작고 낮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열다섯 판이나 싸우고도 또 힘이 남아도십니까? 일단 뭐라도 먹고…”그러나 그녀의 말은, 이내 그의 입맞춤에 막혔다.그 뒤로는, 오직 달뜬 숨결만이 조용한 방 안을 채웠다.……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 두 사람은 마침내 전투를 멈췄다.봉구안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챙겨 입었다.소욱은 깜짝 놀라 그녀의 손을 잡았다.“어디 가려는 것이냐?”어디선가 불안한 예감이 스멀스멀 밀려왔다.봉구안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말했잖아요. 오늘은 제가 요리하겠다고요.”그 말에 소욱은 그 자리에 망연히 서 있었다.아직도 요리할 기
“운산파, 풍고입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소욱은 눈앞의 상대를 바라보며, 그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흉살한 기운을 느꼈다. 풍고는 술에 취한 듯 흐릿한 눈으로 소욱을 노려보았다.“여자군…”그 음흉한 말투에는 분명한 경멸이 담겨 있었다.풍고의 악명은 이미 다른 문파에도 퍼져 있었다. 수법이 음험하고 독해, 전진파의 제자조차도 그를 상대하기 어렵다는 평이 자자했다. 하물며 이번은 그의 첫 시합이기도 했기에 체력 면에서도 절정이었다.그 모습을 본 벽력당 측 인사가 벌떡 일어나 외쳤다.“이건 너무하잖소! 애초에 싸움이 되겠습니까!”운산파 부장문은 그저 태연하게 웃었다.“풍고도 우리 운산파의 정식 제자입니다. 어찌 출전하지 못하겠습니까?”벽력당 인사가 다시 차선아를 부추겼다.“차 부장문, 이걸 그냥 넘기시려는 것입니까? 운산파, 이건 명백한 갑질이 아닙니까?”다른 문파 사람들도 거들었다.“풍고가 손을 쓰면 죽든 다치든 뻔한 일입니다! 차 부장문, 정말 제자를 아끼신다면 지금이라도 막으시는 게 좋을 겁니다. 무술 대회 하나로 또 사람이 죽을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풍고는 혀로 입술을 훔치며, 소욱을 노려보았다.“몸에서 좋은 냄새가 나는군요… 마음에 듭니다.”소름이 끼치는 말이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이미 겁먹고 물러섰을 상황이었다.하지만, 소욱이 누구인가? 어린 나이에 황제로 등극해 수차례 친정했고, 봉구안과 함께 강호를 누비며 구중탑의 흉인, 천룡회 교주, 지하 투기장의 악인들까지 직접 상대해왔다.그런 자들에 비하면 풍고는 그야말로 하찮은 졸개에 불과했다.시합대 아래서 차선아가 걱정스레 소욱을 바라보다가 봉구안을 향해 눈짓을 보냈다. 지금이라도 멈출지 묻는 신호였다.봉구안은 소욱의 눈빛을 마주하고, 그 안에 담긴 의지를 읽어냈다.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차선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전진파는 시합을 계속하겠습니다.”운산파 부장문이 비웃듯 중얼였다.“정말, 승부에 제자들의 목숨도 아까워하지 않는 여자군.”시합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