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식에는 프랑스 국립교향악단이 초청되어 연주하고 있었고 신부가 무대에 올라설 때 ‘time’의 선율이 연회장 전체를 감쌌다.이 곡은 유월영이 고른 것이었다. 결혼식 음악으로는 다소 경쾌하지 않지만 그녀와 연재준의 추억이 담긴 특별한 곡이었다.고등학교 시절, 그녀는 우연히 피아노실 앞을 지나가다가 ‘time’을 들었고 그때 그 곡을 연주한 사람이 바로 연재준이였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그의 연주를 칭찬했었다.유월영은 음악에 맞춰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드레스 자락이 그녀의 걸음에 맞춰 가볍게 흔들리며 마치 부드러운 달빛처럼 연회장의 모든 곳을 비추었다. 그녀의 입가에는 미소가 번졌고 눈에는 빛이 반짝이였다.모든 하객들의 시선은 약속이나 한 듯 신부에게 집중되었고 그녀가 천천히 한 걸음씩 나아가자 객석에서는 축복의 박수가 울려 퍼졌다.연재준은 원래 무대의 끝에서 신부를 기다리고 있었으나 유월영이 점점 다가오자 사회자의 말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바로 신부에게 다가갔다.몇 년 전, 매번 유월영이 그를 향해 달려갔었지만 3년 후, 이제는 매번 연재준이 그녀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이 결혼식뿐만 아니라 앞으로의 모든 일에서 그는 항상 그녀에게 먼저 다가갈 것이다.“월영아.”연재준이 다정하게 이름을 부르자 유월영이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두 사람은 함께 음악에 맞춰 사회자에게 다가가 서약을 약속했다.가난하거나 부유하거나, 병들거나 건강하든, 그들은 함께 손을 잡고 절대 헤어지지 않으며 죽음만이 그들을 갈라놓을 것이라고.연회장의 한구석에서 한 남자가 평온한 얼굴로 결혼식 무대를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박수가 울려 퍼지며 신랑은 신부에게 에로스 반지를 끼워주었고 신부는 눈물을 흘리며 그를 껴안았다.“1호 신랑분.”갑자기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현시우는 몸을 돌렸다.“1호라니?”신연우는 칵테일 한 잔을 그에게 건네며 말했다.“탈락한 1호 신랑.”그가 자신의 가슴을 가볍게 두드리며 이어 말했다.“탈락한 2호 신랑.”그제야
신연우가 그 앞에서 상자를 열어봤지만 현시우는 신경 쓰지 않았다.“수고해 줘.”신연우가 낮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이 사람 진짜...”잠깐 신랑이 되어본 신연우도 마음이 좋지 않은데 하물며 몇 년간 약혼했던 사람은 더욱 마음이 좋지 않으리라.결혼식을 눈앞에 두고 모든 게 뒤바뀌었다.현시우의 마음속 생각은 오직 그 자신만이 알고 있었고 아무도 그가 앞으로 유월영과 어떤 신분으로, 또 어떤 상태로 만날지 알 수 없었다.유월영은 어느새 한복으로 갈아입고 하객들에게 인사하고 있었다.비단 같은 소재의 연분홍색 저고리의 소매와 끝단에 금박으로 된 연꽃이 수놓아 있었고 넓고 풍성한 치마는 부드럽게 퍼져 실루엣을 연출했다. 긴 머리는 정교하게 올려 묶여 비녀가 비스듬히 꽂혀 있었고 노리개는 전통 매듭으로 제작되어 술이 가볍게 흔들리며 우아한 느낌을 자아냈다. 연재준의 한복도 유월영의 의상에 맞춰 제작되었다. 연하늘색 저고리의 소매 끝과 깃 부분에 금박으로 된 전통 무늬가 섬세하게 새겨져 있었고 걸을 때 자연스럽게 퍼지는 연한 아이보리색 바지는 단정하고 고급스러움을 더했다.두 사람은 테이블을 돌며 하객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올렸다. 신연우가 있는 테이블에 다다르자 유월영이 먼저 입을 열었다.“신 교수님.”신연우가 자연스럽게 두 사람과 잔을 부딪치며 말했다.“결혼 축하해요.”신랑, 신부는 서로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고마워요.”잔을 비우고 나서 신연우는 테이블 위에 놓인 술병을 다시 들어 그의 잔을 가득 채우며 말했다. “연 대표님. 저랑 한 잔 더 하시죠? 제가 그럴 자격 된다고 생각하는데요.”연재준이 신부를 빼앗은 데는 신연우의 도발이 있었기 때문이다.연재준은 순순히 뒤에 있는 웨이터가 들고 온 술병을 가져와 술잔을 가득 채웠다.“그럼요. 신 교수님, 감사해요.”연재준은 진심을 담아 말했다.신연우는 그와 잔을 부딪치고 술잔을 단숨에 비웠다. 그리고 다시 유월영을 바라보며 작은 상자를 꺼내서 연재준 앞에서 그녀에게 건넸다.“이건 시
연재준과 유월영이 테이블에 다가오자 이혁재가 호기심 어린 눈길로 물었다.“재준아, 잔에 있는 건 음료수야?”연재준이 술을 마실 수 없는 몸 상태라는 걸 주위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그래서 연재준은 음료로 술을 대신했고 잔을 들어 보이며 대답했다.“탄산수야.”유월영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제건 술이에요.”그녀는 취하고 싶을 땐 위스키 반병에도 취했지만 평소에는 주량을 가늠할 수 없었다.이혁재가 감탄했다.“역시 고 대표님이네요. 그러니까 재준아 이제는 고 대표님의 말을 잘 듣고 우리 ‘아내를 사랑하는 모임’에 가입하는 거야.”연재준이 잠시 생각하다가 물었다.“이 모임엔 너와 나만 있는 건가?”이혁재가 서지욱의 어깨를 감싸며 대답했다.“아니, 지욱이도 있지.”서지욱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난 빼줘.”이혁재가 놀란 얼굴로 서지욱의 아내 고사연을 향해 물었다.“거절한다네요? 고사연 씨도 들었죠?”서지욱의 아내 역시 고씨였다. 그녀는 우아하고 지적인 미모의 대명사이자 수백 년 전통을 보유한 도자기 명문의 후계자였다.고사연이 여전히 미소를 띤 채 남편 서지욱을 바라보았다.다만, 고사연을 잘 아는 사람들은 그녀의 미소가 더 아름다울수록 그 속에 숨겨진 의도가 더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서지욱이 급히 헛기침하고 아내를 끌어안으며 다정하게 말했다.“이 모임 이름부터가 좀 정신 상태가 안 좋아 보이지 않아?. 당신은 남편이 그런 상태가 되는 걸 원치 않겠지?”고사연은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듣고 있었다.서지욱은 친구 중에서 가장 노련한 처세술을 가진 사람이었으나 아내 앞에서는 항상 쩔쩔매었다.그는 오늘 밤 소파에서 자고 싶지 않았고 귀국 후에도 딸과 떨어진 채로 별거하고 싶지 않아 어쩔 수 없이 그 모임에 가입하겠다고 해서야 아내의 마음을 달래는 데 성공했다.이승연은 남편을 힐끗 보고 하이힐로 그의 발을 살짝 밟았다.“이혁재, 좀 창피하게 굴지 마.”유월영은 예전에는 이렇게 재미있는 사람들인 줄 몰랐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노현재가 씁쓸하게 웃었다.“신주시를 떠난 후 난 목표 없이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서 그냥 북유럽으로 여행을 갔었어.”“그러다 덴마크의 작은 술집에서 술을 마시고 있는데 옆 테이블에서 레온 그룹이 SAM을 인수하는 얘기를 하고 있더라고. 그 사람들이 의도적으로 레온 그룹에 새로 부임한 고민서에 대해 언급하고 있었지.”“그때 나는 그 의도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그냥 레온 가문과 고씨 가문이 묘하게 얽혀 있는 것 같아서 그냥 파리로 방향을 틀었던 거야. 그리고 그 고 대표라는 사람의 집 주소를 알아내서 집 앞에서 기다리다 결국 월영 씨가 집을 나오는 걸 보고서야 월영 씨가 아직 살아 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 그렇게 곁에서 일을 도와주게 됐어.”노현재가 당시 북유럽으로 간 이유는 여행하러 간 게 아니었다.그는 유월영의 죽음에 자신이 어느 정도 책임이 있다고, 만약 그가 그녀를 도망치게 도와주지 않았다면 그 뒤의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자책했었다.그래서 노현재는 현실에서 도피하려고 북유럽으로 갔지만 결과적으로 지금 돌아보면 너무나도 우연한 일이었다.레온 가문의 동향이 덴마크의 작은 술집까지 전해졌고 그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된 것이다.노현재는 의심스러운 눈빛을 보내며 말했다.“혹시 형이 사람을 시켜서 일부러 내가 월영 씨를 찾도록 유도한 거 아니야?”이 의심은 말이 안 될 것 같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애초에 유월영이 죽지 않았고 레온 가문에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면 연재준이 그런 계획을 세웠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그의 앞선 여러 계획을 보면 그는 정말 세심하고 철저하게 준비하는 사람임이 분명했다.연재준은 이실직고했다.“맞아.”역시나 하는 얼굴을 한 노현재를 바라보며 연재준이 이어 말했다.“나는 월영이가 생소한 레온 가문에서, 그 먼 낯선 곳에서 믿을 사람도 없이 힘들어할까 봐 걱정이었어. 그래서 네가 가서 월영이를 도와주기를 바랐던 거지.”노현재는 말문이 막혔다.“재준이 형, 형은 정말...그때 그 일은 형수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연재준의 페부에 다시 은은하게 통증이 퍼져왔고 그는 기침을 참기 위해 애썼다.‘여기서 이러면 월영이가 걱정할 게 뻔해.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 어떤 일이 있어도 이걸 망쳐서는 안 돼.’그는 익숙하게 호흡을 조절하며 기침을 억누른 뒤 조용히 진정했다.그때 뜸을 들이던 노현재가 이어 말했다.“그런데 검사 결과 임신이 아니었어. 그래서 샘플을 바꿀 필요도 없었고 그냥 형한테 있는 결과를 그대로 전달한 거야.”노현재는 연재준의 이글거리는 표정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계속해서 말했다.“하지만 월영 씨는 그 검사 결과를 믿지 못했고 여전히 자신이 임신했다고 생각했지.”연재준은 마음속으로 화를 가까스로 누르면서도 서지욱을 탓할 수 없었다.이런 중요한 얘기를 왜 끊어서 얘기하면서 사람 애간장을 태우는지 따지고 싶었지만 참았다. 그저 유월영이 다시 유산의 아픔을 겪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연재준이 입을 열었다.“임신하지 않았다고 하니 다행이네.”“그냥 작은 오해였던 거야.”노현재가 느긋하게 말했다.“두 사람 사이에 오해가 워낙 많았어야지. 이런 거 하나쯤은 별일도 아니잖아.”연재준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손에 든 빈 잔을 보며 말했다.“앞으로는 이런 오해 없을 거야.”그때 복도 끝에서 인기척이 들리자 연재준이 고개를 돌렸다. 유월영이 드레스를 들고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노현재는 손을 들어 유월영에게 인사하고 먼저 연회장으로 들어갔다.유월영이 가까이 다가와 호기심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현재 씨랑 무슨 얘기 했어요?”연재준은 그녀의 손을 잡고 반지를 문지르며 숨김없이 대답했다.“3년 전 그때 당신이 임신한 줄 알았다는 얘기.”유월영이 놀란 얼굴로 그를 바라보다 담담하게 대답했다.“전에 유산하고 몸이 많이 약해졌었어요. 그래서 건강검진을 받았고 특히 자궁 관련 검사를 했는데 의사 선생님이 다시는 임신하기 어렵다고 하더라고요.”연재준은 가슴이 저려왔다.그는 한숨을 쉬며 주위를 둘러본 뒤 유월영을 살짝 벽으로
립스틱은 장미색으로 부드럽고 은은한 느낌을 주어 그녀의 의상과 잘 어울렸다.유월영이 살짝 미소 지으며 말했다.“정말 여러모로 꼼꼼하네요.”연재준이 립스틱을 자신의 주머니에 넣고 그녀의 등을 감싸안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미안해.”유월영이 살짝 턱을 들어 그의 어깨에 기대며 물었다.“이번엔 또 뭐 때문에 미안한 거죠?”연재준이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그때, 당신 전화를 끊지 말았어야 했는데.”그가 전화를 끊지 않았다면 아마 유월영은 유산하지 않았을 것이고 두 사람의 아이는 세상에 태어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이 이야기가 꺼내지자 유월영의 마음은 다시 무거워졌다. 어떤 일들은 시간이 지나도 절대 희미해지지 않는다.연재준은 그녀의 마음을 알아채고 가만히 그녀의 등을 따라 부드럽게 쓸어내렸다.유월영이 물었다.“그때 왜 전화를 끊었던 거예요?”연재준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그때 왜 당신 전화를 끊었는지 기억이 안 나서 3년 전에 일부러 통신사에 가서 통화 기록을 조회해 봤어. 전화를 끊은 정확한 시간을 확인하고 그날 내 일정을 확인해 보니 그날은 한 모임에 참석했더라고.”“함께 식사하던 사람들은 신혼부부였는데 자신들의 연애 이야기를 자랑스럽게 떠들었어. 고등학교 때부터 알고 지내다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고 하면서. 당신도 알겠지만, 내 고등학교 시절은 그렇게 즐겁지만은 않았어. 그런 얘기를 들으면서 현시우와 당신이 생각났던 거야. 그러다 당신의 전화를 받고 홧김에 전화를 끊었던 것 같아. 잘 기억은 나지 않았지만.”그는 다시 한번 미안한 듯 말했다.“미안해.”유월영은 그의 설명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하지만 그녀는 연재준과 다시 시작하기로 결심한 상태였고 그 문제를 파고드는 건 서로에게 짐이 될 뿐이었다.그래서 유월영은 그의 품을 벗어나며 말했다.“이제 그 얘기는 묻어두죠.”연재준이 그녀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그러다 유월영이 갑자기 손을 들어 그의 머리를 가볍게 두드리며 나른하게 말했다.“복잡한 생
저녁의 연회는 정원 중심에 위치한 건물에서 열렸다.이곳은 레온 가문의 집주인들이 자주 사용하는 개인 연회 장소였다.건물 주변에는 크고 작은 꽃들이 어지럽게 자리를 잡고 있었고 미풍에 실려 장미 향기가 가득 퍼졌다.정문 앞에는 거대한 분수대가 있었고 밤이 되자 베르사유 궁전을 따 디자인한 분수대가 화려한 분수 쇼를 시작했다.소리와 빛 그리고 물의 특수 효과까지 더해져 조각상은 마치 생명력을 얻은 듯 보였고 손님들은 17세기 유럽 궁전의 화려함과 웅장함을 간직한 바로크 예술의 절정기를 경험할 수 있었다.연회장 내 역시 사치와 예술이 조화를 이루었다.1500개 이상의 크고 작은 크리스탈로 만들어진 샹들리에들이 행사장을 둘러싸고 있었고 벽과 바닥은 검은색 미러 타일로 마감되어 화려하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냈다.유월영과 연재준은 이 검은색과 금빛의 낭만적인 분위기 속에서 첫 춤을 추며 관객들의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그 후, 자유로운 사교 시간이 이어졌다. 손님들은 편안히 자리에 앉아 음식을 즐기거나 춤을 추거나 자유롭게 대화를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유월영은 칵테일을 한 모금 마시고 주위를 둘러보다 연회 부인과 눈이 마주쳤다.두 사람은 서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시작할 때가 되었다.연회 부인은 손에 와인 한 잔을 들고 우아하게 무대 위로 올라갔다.그녀는 보라색 긴 드레스를 입고 있었고 드레스는 심플했지만 화려한 다이아몬드 장식이 어깨를 감싸며 귀부인 같은 느낌을 주었다.무대 위에 놓인 마이크를 잡고 가볍게 기침하며 손님들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그 후, 미소를 지으며 말을 시작했다.“안녕하세요, 여러분. 바쁜 일정을 쪼개어 이렇게 저희 가문 결혼식에 참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여러분께 한 잔 올리겠습니다.”연회 부인은 술잔을 높이 들었고 하객들도 이에 답하며 잔을 함께 들었다.연회 부인은 품위 있게 말을 이었다.“오늘 저희가 부족한 점이 있었다면 너그럽게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준비한 만큼 모든 것이 완벽하지 않았던
“그 유명한 다니엘 부인은 레온 가문의 구세주이자 귀족 사회의 전설이었지만 동시에 제 악몽이기도 합니다. 농담이 아닌, 진짜 악몽이었습니다.”연회 부인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그녀는 연회 부인이라는 신분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후 이렇게 진지한 적이 거의 없었다.평소 화려하고 사치스러우며 유흥에 빠져 살던 그녀였지만 이 순간만은 자신의 과거를 차근차근 풀어놓기 시작했다.“천재는 자신과 다른 사람 사이의 차이를 잘 모르죠. 다른 사람들도 자신과 같을 거라고 자기 생각을 따라오지 못하는 사람들을 마치 쓸모없는 사람처럼 여기면서요. 제 어머니도 그랬습니다.”“제 어머니는 타고난 ‘상업 천재'였어요. 전 그런 사람을 본 적이 없었죠. 상업적 직감, 통솔 능력, 결단력까지 어디 하나 빠지지 않았습니다. 제 눈에는 그분보다 뛰어난 상인도 없었어요.”연회 부인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그래서 제 어머니는 제가 12살 때 옥스퍼드 사전보다 더 두꺼운 상업 이론서를 외우지 못했다고 제가 지능이 부족한 멍청이라고 생각했어요. 맙소사, 어떤 애가 12살에 그런 걸 외울 수 있겠어요? 그때 저는 글자도 제대로 읽지 못했는데 말이죠.”하객들이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그 자리에 있던 많은 사람들은 그 전설적인 여성을 기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여성은 상업계에서 어둠처럼 군림하는 존재였기 때문이다.연회 부인은 작게 한숨을 쉬고 이어 말했다.“내 어린 시절은 그런 어머니의 분노와 경멸 속에서 보냈어요. 아무리 그래도 그런 대우를 받으면 안 됐어요.”“그래서 저는 18살 때, 어느 비 오는 밤에 짐 싸서 집을 떠났어요.”“전 한국으로 향했고 그곳에서 대학도 다니며 같은 수준의 친구들을 만나 정상적인 학습 환경을 경험했죠. 그곳에서 저는 책 읽는 게 그렇게 무서운 일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어요. 매일 아침 기분 좋게 일어났고 심지어는 연애할 여유도 생겼죠. 가난한 남자와 함께요.”그 남자를 이야기할 때 연회 부인의 눈은 그녀 위의 크리스탈 조명보다 더 빛
“할 수 있지, 할 수 있어. 연이가 원하는 거라면 아빠는 꼭 해낼 거야.”윤영훈은 목이 메어 기쁨에 눈물을 흘렸다.주월향은 딸에게 그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았고 오히려 아빠가 누군지 알려주며 7년 동안 떨어져 있었음에도 딸이 그를 낯설게 느끼지 않도록 해줬다.‘이 세상에 이런 여자가 또 어디 있을까?’그러나 윤영훈은 주월향의 이런 행동이 자신을 받아들인다는 뜻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집안에 들어서자 연이가 활기차게 떠들었다.“엄마!”주월향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연이야, 배고프지? 어제 배추전 먹고 싶다고 했잖아? 방금 만들어서 아직 따뜻해. 간식이니까 너무 많이 먹으면 안 돼, 알았지?”아이가 환호하며 말했다.“고마워요, 엄마!”주월향은 윤영훈을 힐끗 보며 말했다.“당신도 먹어볼래요?”윤영훈은 그녀 쪽으로 다가가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월향아, 미안해...”“나한테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아도 돼요.”주월향이 그의 말을 끊었다.그리고 딸을 한 번 보더니 아이가 듣지 못하도록 마당으로 걸어 나갔다.윤영훈도 그녀를 따라 나갔다.주월향은 식물에 물을 주며 담담하게 말했다.“7년 전, 영훈 씨가 감옥에 가기 전에 우리 모녀를 위해 모든 걸 준비해 줬어요. 돈, 집, 차까지 모두 마련해줬죠. 게다가 내가 당신을 한 번 배신하기도 했으니 당신에게 상처 준 대가로 다 갚았다고 볼 수 있겠죠. 우리는 7년 전에 이미 정리됐어요. 그러니 서로에게 빚진 건 없어요.”윤영훈은 숙연한 마음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주월향이 돌아서서 그를 마주 보며 말했다.“이 7년 동안 내가 감옥 면회를 가지 않은 이유는 더 이상 먼저 다가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당신이 오늘 출소한다는 건 알고 있었고 그래서 한 번 더 기회를 주기로 했죠. 당신이 날 찾으러 오지 않았다면 그냥 이대로 끝났을 거예요.”“하지만 영훈 씨는 나를 찾아왔어요. 그래서 지금 당신한테 물어보고 싶어요. 여기 남을 건가요?”“...내가 여기 남아
“됐어요, 사촌 오빠, 얼른 가세요. 곧 비가 올 것 같아요. 이모와 이모부께는 제가 잘 지낸다고 전해주세요. 여기서 부족한 것 하나도 없으니 걱정하지 마시라고요.”‘사촌 오빠?’남자는 주월향의 남편이 아니라 사촌 오빠였다.거의 죽어가던 윤영훈의 마음이 한순간에 되살아났다.그는 참지 못하고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뻔했다.그러나 그 사촌 오빠가 집을 나서자 윤영훈은 재빨리 수박 덩굴 아래로 몸을 숨겼다.물론 그 남자가 남편이 아니라고 해서 주월향에게 남편이 없다는 뜻은 아니었다.하지만 이 반전만으로도 그는 잠시나마 안도감을 느꼈다.그때 머리 위의 수박잎이 갑자기 누군가에 의해 젖혀졌다.윤영훈은 순간 얼어붙었다. 본능적으로 얼굴을 가리고 도망치려 했지만 뒤에서 들려오는 청아하고 차분한 목소리에 그의 발걸음이 멈췄다.“내가 아까 한 말 못 들었어요? 곧 비가 올 것 같으니 빨리 벼부터 거두는 걸 도와줘요. 비 맞으면 이번 농사는 다 망해요.”윤영훈은 그 자리에 꼼짝 않고 서 있었다.주월향의 말투는 너무나도 자연스러워 마치 그가 7년 동안 감옥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잠깐 외출했다가 돌아온 사람처럼 들렸다.천천히 돌아선 윤영훈을 주월향은 담담하게 바라보며 갈퀴를 건넸다.“모두 한데 모아주세요. 내가 자루를 가져올게요.”윤영훈은 멍하니 그녀를 따라 집으로 들어갔다.그는 감옥에서도 농사일을 해봤기에 이런 일이 낯설지 않았다.하지만 일을 하다가도 자꾸 주월향의 눈치를 살폈고 그녀의 의도를 이해하려 애썼다.주월향이 입을 열었다.“지금 나는 온라인에서 요리 블로거로 활동하고 있어요. 팔로워가 몇백만 명은 되죠. 영상 편집이 아직 안 끝났으니 벼를 다 거두고 나면 이 앞에 초등학교에 가서 연이를 좀 데려와 주세요.”“지안 초등학교가 어디 있는지 알죠? 몰라도 괜찮아요. 핸드폰 내비게이션 켜고 찾아가면 돼요.”윤영훈이 여전히 멍하니 있자 주월향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내 말 들었어요?”“들었어...”주월향은 거둔 벼를 집 안으로 가져가며
윤영훈은 10년 형을 선고받았다.모범수로 인정받아 감형된 덕분에 실제 복역 기간은 7년 10개월이었다.출소하는 날, 그를 마중 나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감옥 문 앞에 서서 바라본 세상은 이미 많이 변해 있었다. 그의 모습도 더 이상 과거의 의기양양하고 자유분방했던 그 사람이 아니었다.윤영훈은 감옥 문 앞에서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출소를 반년 앞두고 그는 출소 후의 삶을 계획하려 애썼지만 막상 그 순간이 닥치자 머릿속은 텅 비어버렸다.윤씨 가문은 이미 몰락한 지 오래였다.2년 전, 그의 아버지는 감옥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교도관들의 배려로 그는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석할 수 있었다.그곳에서 그는 가난에 시달리는 친척들을 보았다.가문의 보호막 없이 근근이 살아가는 그들에게 윤영훈은 짐이 되고 싶지 않았다.그의 사촌 서정희는 출소 후 찾아오라 했지만 그녀에게도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윤영훈이 가장 만나고 싶었던 사람은 주월향이었다.그녀와 딸 연이를 보고 싶었지만 갑작스러운 등장이 그녀에게 폐를 끼칠까 두려웠다.게다가 그녀는 이미 자신을 만나고 싶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재판을 받던 날에도 주월향은 법정에 나오지 않았다.7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으니 그녀는 분명 새로운 삶을 시작했을 것이고 어쩌면 그녀 곁에는 그녀를 사랑하는 남자가 있을지도 모른다.남자가 없더라도 모녀는 안정적이고 풍족한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윤영훈은 감옥에 가기 전 그녀에게 충분한 재산을 남겼고 그녀가 이를 잘 활용했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그런 상황에서 자신의 등장은 적절하지 않았다.하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이 비열하다고 느꼈다.주월향을 한 번이라도 보고 싶다는 욕망을 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멀리서 그녀를 한 번 보기만 해도 만족하겠다고 다짐한 윤영훈은 감옥에서 일하며 모은 돈으로 기차표를 사서 그녀의 고향으로 향했다.그곳은 산과 물이 어우러진 작은 마을이었다.기차역에서 그녀의 집까지는 버스로 2시간
“그래도 돼?”강수영은 신현우가 미쳤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그는 정말로 그녀의 애인이 되었고 강수영은 반년 넘게 그와 몰래 관계를 이어갔다.강수영은 일부러 자신이 이미 남편과 이혼했다는 사실을 숨기고 매주 몰래 찾아오는 신현우를 지켜보며 즐거워했다.가끔 갑자기 여행을 떠나고 싶어지면 그녀는 짐을 싸서 바로 떠났다.그럴 때마다 신현우는 알림도 받지 못한 채 허탕을 치고 돌아가야 했다.친구들은 강수영이 신현우를 가지고 노는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녀는 이 상황을 즐길 뿐이었다.현재 신현우의 눈에는 질투와 시기가 가득 차 있었고 늘 당당하던 그의 얼굴에는 답답함과 우울함이 서려 있었다.강수영은 자신이 그의 곁에서 겪었던 모든 억울함과 상처를 이렇게 풀고 싶었다.이번 주, 강수영은 영국으로 떠날 예정이었고 신현우는 그녀가 남편을 만나러 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겉으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날 밤 강수영이 화장실에 가려고 일어났을 때 그는 거실에서 홀로 술병을 비우고 있었다.엉망이 된 그의 모습은 평소와 달리 초라해 보였고 강수영은 저도 모르게 마음이 조금 약해졌다.그녀는 오랜 시간 방치해둔 녹음기를 꺼냈다. 그건 예전에 신연우가 건넨, 신현우의 음성이 담긴 파일이었다.그녀는 당시 결혼 생활에 전념하고 싶어 듣지 않았던 녹음을 재생했다.녹음기에서는 술에 취한 신현우의 흐릿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그것은 강수영의 결혼식 날, 신현우가 취한 상태에서 남긴 말들이었다.신연우가 그를 말렸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수영이가 내 앞을 그렇게 지나갔어. 남편 팔짱을 끼고 날 쳐다보지도 않았어.”“내가 정말로 그녀를 신경 쓰지 않고,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을까? 아니야, 난 수영이를 좋아했어. 다만 그녀가 집으로 돌아가길 바랐을 뿐이야.”“나 때문에 부모님과 친구들과도 관계를 끊었잖아. 너무 어리석었어. 나는 그런 가치를 줄 만한 사람이 아닌데...”“다 내 잘못이야. 처음부터 더 깊은 관계로 나아가지 않았더라면 수영이가 이렇게 집착하지
두 사람은 서쪽으로 스위스 알프스를 찾아가 산맥의 낭만을 만끽하며 자연 보호구역에서 아름다운 야생동물들을 만났다.북쪽으로는 핀란드의 로바니에미와 캐나다의 퀘벡으로 향해 겨울 축제와 북유럽의 신비로운 매력을 경험하고 끝없이 펼쳐진 설원과 오로라의 장관을 즐겼다.그러던 중, 한 여행지에서 강수영은 신연우를 우연히 마주쳤다.오래된 친구라 할 수 있는 사이였기에 두 사람은 함께 저녁을 먹었다.식사 후, 신연우는 그녀에게 녹음 파일을 건네며 말했다.“이 안에는 우리 형의 음성이 들어 있어. 들을지 말지는 네가 결정해. 하지만 듣는다면 네 결혼 생활에 영향을 줄 수도 있어.”그는 이어 덧붙였다.“형이 요 몇 달 동안 상태가 많이 안 좋았어. 큰 병을 앓아 체중이 많이 빠졌고, 회사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어. 최근에서야 조금 회복됐지.”강수영은 특별히 반응하지 않고 녹음 파일을 받았지만 끝내 듣지 않았다.신혼여행을 마치고 부부는 지성으로 돌아와 결혼 후의 삶을 시작했다. 하지만 2년도 채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이혼 절차를 밟게 되었다.두 사람 사이에는 큰 갈등이 없었다. 강수영의 남편은 여전히 훌륭한 사람이었고 이혼의 원인은 문화적 차이와 생활 습관의 차이였다.한 사람은 한국식 사고방식으로, 다른 한 사람은 서양식 사고방식으로 자라며 서로 적응하려고 노력했지만 끝내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그들은 평화롭게 헤어졌고 이혼 후에도 좋은 친구로 남았다.부모의 잔소리를 피하기 위해 이혼 사실을 비밀로 하기로 합의한 후 강수영은 다시 전 세계를 여행하기 시작했다.그러다 각 나라, 각 도시에서 신현우를 계속 ‘우연히’ 마주치게 되었다.세 번째 만남에서는 더 이상 참지 못한 강수영이 그를 조롱했다.“신 대표님, 이렇게 한가하신 줄 몰랐네요. 왜 자꾸 저를 따라다니시는 거죠?”“따라다닌 게 아니야. 우연일 뿐이야.”“우연이 이렇게 자주 겹칠 리가 있나요? 제가 바보인 줄 아세요?”차가운 미소를 띤 강수영에게 신현우는 화제를 돌렸다.“넌 왜 여기저기 여행
‘소은혜’에서 다시 ‘강수영’으로 돌아온 후, 강수영은 그 차가운 남자와 더는 아무런 관계도 없을 것이라고 믿었다.한눈에 반했던 감정은 결국 그녀의 인생을 망쳤고 다시는 그 남자와 얽히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그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했다. 파혼하고 집을 떠나 이름까지 바꾼 채 명분 없이 그의 곁을 지켰지만 세상 사람들은 그녀를 부끄러움을 모르는 여자라며 손가락질했다.그러는 동안 그는 가문 배경이 잘 맞는 귀한 집 아가씨와 결혼 준비를 하고 있었다.그녀는 스스로를 명문가의 딸에서 천한 첩으로 전락시켰지만 그에게선 차가운 시선만 돌아왔다. 그녀가 바친 모든 것을 알면서도 그는 온기 한 줌 나눠주지 않았다.강수영은 결국 깨달았다. 그 감정을 고집한 자신이 문제였다는 것을.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야 했다.그녀는 강씨 집안의 딸로 돌아왔고 그는 여전히 신씨 가문의 장남으로 남아 있었다.부모님은 그녀를 위해 맞선을 주선했고 두 가문 모두에게 이로운 자리였다.강수영은 더 이상 부모님을 실망하게 하고 싶지 않아 기쁜 마음으로 맞선에 응했다.맞선 상대는 영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훌륭한 조건을 갖춘 사람이었다. 나이도 비슷했고 배경도 잘 맞았다.며칠간 그와 시간을 보내본 그녀는 그가 괜찮다고 느꼈다. 특히, 그가 그녀에게 첫눈에 반했다고 고백했을 때는 묘한 감정이 들었다.누군가를 좋아하는 것은 너무나 고된 일이었기에 이번에는 누군가가 자신을 좋아해 주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알고 싶었다.그렇게 두 사람은 3개월간 교제했고 큰 문제 없이 잘 맞았다. 비록 심장이 크게 뛰는 설렘은 없었지만 세상 대부분의 결혼이 ‘적당함’을 기반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그녀도 알고 있었다.그 기준에서 본다면 그와의 결혼은 충분히 합리적이었다.결국 두 사람은 약혼했고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그러나 결혼식 당일, 초대받지 않은 불청객이 나타났다. 바로 신현우였다.그의 등장에 강수영은 잠시 굳어졌지만 이내 미소를 띠며 신랑과 함께 술잔을 들었다.
방금 중성화 수술을 받은 고양이는 축 늘어져 있었다.이승연은 고양이가 우울증에 걸릴까 봐 걱정되어 이혁재에게 맡기기로 했다.“경험 있는 네가 좀 맡아줘.”이혁재는 황당했다.“내가 무슨 경험이 있다고 그래!”이승연은 그를 잠시 바라보더니 담담하게 말했다.“처지가 비슷하잖아.”화가 난 이혁재는 이승연을 들어 신발장 위에 올려놓고 곱게 바른 립스틱을 번지게 했다.“전혀 비슷하지 않거든!”이혁재의 사무실.이혁재와 연재준은 일 얘기를 하고 있었고 두 아이는 옆에서 놀고 있었다.그때 이혁재가 무심코 고양이에게 한마디를 건넸다.“호두야, 누나를 잘 돌봐야 해.”기어다니기 시작한 윤아는 갑자기 호두의 꼬리를 잡았다.호두는 성격이 온순하고 사람을 좋아했지만 꼬리만큼은 예외였다. 그런데도 이번에는 이혁재의 말 때문인지 꼬리를 잡힌 채로 억울한 듯 야옹 소리만 냈다.윤아는 깔깔 웃으며 꼬리 끝을 입에 넣으려 했고 그제야 호두는 꼬리를 빼내더니 아기에게 돌아서서 야옹 소리를 내며 경고했다.마치 “입에 넣으면 안 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그러자 윤아는 호두를 향해 돌진하며 그를 덮쳤다.두 아빠가 일을 마치고 아이들을 찾으러 갔을 때 윤아는 카펫 위에서 잠들어 있었고 호두는 듬직한 몸을 베개 삼아 윤아를 받치고 있었다.그 동화 같은 장면에 연재준과 이혁재는 저도 모르게 아빠 미소를 지었다.“고양이가 어린이를 알아본다더니 진짜인가 봐.”퇴근 시간이 되어 이혁재는 호두를 데리고 이승연의 사무실로 향했다.이승연은 호두를 품에 안고 기뻐하며 입을 맞췄고 이어 호두가 이혁재에게도 뽀뽀하도록 했다.갑작스러운 입맞춤에 이혁재는 고양이 털을 한가득 삼키고 서둘러 뱉어냈다.“퉤퉤퉤.”그 순간, 호두도 갑자기 토하기 시작했다. 단순히 흉내를 낸 게 아니라 실제로 무언가를 토해냈다.이혁재는 어이가 없어 발끈했고 이승연은 웃음을 참지 못해 의자에 쓰러지듯 폭소했다.사실 고양이는 털을 핥으며 스스로를 청소하는 습성 때문에 위에 털 뭉치가 생겨 종종 토하곤
작은 고양이는 케이지 구석에 웅크리고 있었고 치료로 인해 털이 대부분 깎인 채 볼품없는 모습이었다.이혁재가 싫은 소리를 내자 새끼 고양이는 힘겹게 눈을 떴다. 그리고 이승연을 알아본 듯 비틀거리며 케이지 가장자리로 다가와 그녀를 향해 야옹 울었다.이승연은 손가락을 내밀어 고양이를 살짝 만졌다. 그러자 고양이는 꿈틀거리며 그녀의 손가락에 머리를 가져다 대었다.그녀는 미소 지었고 이를 지켜보던 이혁재가 말했다.“여보, 얘 다 낫고 나면 집에 데려가 키우자. 이렇게 작고 못생긴 애가 혼자 힘으로 먹을 걸 찾기도 힘들고, 다른 고양이들이 받아주지도 않을 거야. 우리가 돌보지 않으면 얘 어떻게 살겠어.”이승연도 같은 생각이었다.두 달 후, 고양이는 건강을 회복했다.이혁재는 직접 고양이를 씻기고 구충한 뒤 집으로 데려갔다.시간이 지나면서 고양이는 털이 윤기 나게 자랐고 살이 올라 뼈만 앙상했던 이전 모습과는 완전히 달라졌다.결국, 고양이는 기름지고 윤기 나는 털을 자랑하며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 이혁재의 몸 위로 덮치는 대형 고양이가 되었다.“이런 젠장!”이혁재는 고양이의 기습에 또 당했고 숨이 턱 막힐 뻔했다.고양이가 도망치려 하자 그는 재빨리 붙잡아 들어 올리며 따졌다.“너 자신이 얼마나 무거운지 전혀 모르는 거야? 아니면 정말 날 깔아뭉개려고 작정한 거야?”고양이는 억울하다는 듯 야옹거리며 반응했다. 그러나 고양이가 이승연에게는 절대 이런 짓을 하지 않았기에 이혁재는 고양이가 일부러 자신을 괴롭힌다고 생각했다.고양이는 이승연이 일할 때 그녀의 발등 위에 앉아 체온으로 발을 따뜻하게 해주었다.그녀가 서류를 검토할 때는 네 발을 모아 단정한 자세로 그녀 곁에 앉아 ‘독서’에 동참했다.때로는 앞발로 서류를 톡톡 두드리며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중요한 코멘트’를 남기기도 했다.이혁재는 고양이를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고양이를 뒤집어 배를 위로 한 채 들어 올려 얼굴을 고양이 배에 묻고 한 번 흡입했다.고양이는 저항하며 네 발로
아이를 가지지 않기로 합의한 후, 이혁재는 정관 절제술을 받았다. 흔히 말하는 ‘피임 수술’을 통해 아이를 갖지 않겠다는 결정을 실행에 옮긴 것이다.이혁재는 이 일을 이승연에게 알리지 않았다. 관련 정보를 철저히 조사한 뒤, 직접 차를 몰아 병원으로 갔다.수술은 간단했고 외래 진료에서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수술을 마친 그는 바로 퇴원했고 그날 오후에는 몇 시간 동안 회의를 열기도 했다. 약간의 불편함이 있었지만 큰 문제는 없었다. 그리고 집에 돌아온 후에는 그 불편함조차 완전히 사라졌다.수술 후 한 달이 지나서야 이혁재는 가벼운 농담처럼 이 일을 이승연에게 털어놓았다.이승연은 한동안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평소 재빠른 두뇌 회전과 날카로운 눈치로 유명한 그녀였지만 이번에는 말을 잇지 못했다.이혁재는 그녀가 ‘수술’이라는 단어에 겁을 먹었다고 생각하며 웃었다. 혹시 일이 심각하다고 오해했을까 봐 그녀를 안고 달래며 자세히 설명했다.“여보, 내가 요즘 아이를 갖는 게 얼마나 두려웠는지 몰랐지? 피임을 해도 혹시 실수라도 생길까 봐 계속 걱정했어. 만약 사고가 생기면 낳든 낙태하든 둘 다 누나 몸에 무리가 갈 거잖아. 그래서 아예 근본적으로 위험을 없애는 게 낫다고 생각했어.”이승연은 그의 허리를 감싸안고 이마를 그의 가슴에 기대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도 이 수술 알아. 우리 아빠가 받았거든.”그녀는 차분히 이야기를 이어갔다.“그 시절에는 보통 여자가 피임 수술을 받곤 했는데 우리 아빠는 알아보니 여자가 받는 수술이 훨씬 위험하고 몸에 무리가 된다는 걸 알게 됐대. 그래서 엄마가 고생하는 걸 차마 볼 수 없어 자신이 받았지.”“아빠는 우리 동네에서 피임 수술을 받은 유일한 남자였고 사람들은 우리 아빠를 세상에 둘도 없는 좋은 남자라고 칭찬했어. 엄마도 복 받은 거라고 하셨고.”이혁재는 그녀가 아버지를 칭찬하며 은근히 자신도 칭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웃음을 터뜨렸다.그날 밤, 소파와 카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