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혁재는 싸늘하게 웃으며 말했다.“오성민, 꿈 깨지. 이번 생에 내 아내를 너에게 보여줄 일은 없을 거야.”오성민이 음산한 표정으로 무언가 말하려는 순간 이혁재가 먼저 말을 이었다.“오 변. 승연 누나가 그때 법정에서 어쩌다 다치게 되었는지 내가 모를 줄 알았어? 그 빚, 하루라도 잊은 적이 없었지.”이제 그 빚을 청산할 때가 되었다.“...”오성민의 눈동자가 빠르게 흔들렸다. 그는 줄곧 이혁재가 그 사실을 모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해 왔다.만약 그걸 이미 알고 있었다면 이혁재의 성격상 이렇게 오랫동안 참았을 리가 없었다.누군가 그에게 결정적인 순간까지 기다렸다 복수하라고 조언해 주는 사람이 있다면 몰라도.그게 누구인지 오성민은 잠시 생각하다 이내 답을 얻었다. 바로 자신을 신주시로 유인한 사람이었다.오성민의 미간에 미세한 주름이 잡혔다. 그는 더는 이혁재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돌아서서 빠르게 떠났다.그의 멀어지는 뒷모습이 지켜보던 이혁재의 눈에 살기가 가득했다. 그러다 시선을 거두고 옆을 바라보며 다시 평소처럼 차분한 모습으로 돌아갔다.오랜 방랑 끝에 주인에게 돌아온 떠돌이 강아지처럼 순종적이고 얌전했다.다만 방금 전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여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스스로 휠체어 바퀴를 돌리며 천천히 떠났다.이혁재는 약간 실망한 표정을 지었지만 곧 그 뒤를 따라 바싹 붙어갔다....빠르게 아파트 단지를 나온 오성민은 바로 공항으로 가서 신주시를 떠날 생각이었다.그의 운전사는 이미 차를 몰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고 그가 막 차 문을 열고 올라타려는 순간, 누군가의 거대한 손이 차 문을 다시 닫아버렸다.몇 명의 남자들이 그를 앞뒤로 둘러쌌다.“오성민 씨인가요?”오성민이 차분하게 물었다.“그러는 당신들은 누구죠?”앞장선 사람이 경찰증을 내보였다.“경찰입니다. 오성민 씨가 엄중한 범죄 사건과 관련이 있다는 제보를 받았어요. 경찰서에 가서 조사에 협조해 주시죠.”오성민은 애써 침착했다.“무슨 범죄 사건이죠? 내가
순간, 오성민의 턱 근육이 딱딱하게 굳었다.그가 용청을 떠나온 지 겨우 네다섯 시간이 지났을 뿐인데 비서까지 체포당하고 나서야 그는 자신이 완벽하게 준비된 함정에 빠졌다는 걸 알아챘다.그러나 오성민은 처음 듣는 내용이라는 듯 놀라운 척하며 물었다.“이런 일이 있었다니, 양현준이 자백했나요?”경찰은 되물었다. “오 변호사님 생각은 어떻습니까?”오성민은 경찰의 전략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경찰들은 자신들이 가진 정보를 전부 보여주지 않고 오성민이 그들의 패를 알 수 없도록 하여 그가 방심한 틈에 스스로 자백하도록 유도하려는 것이다.오성민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런 중대한 사건을 제가 어떻게 함부로 추측할 수 있겠어요? 하지만 경찰분들이 저까지 경찰서로 데려오신 걸 보면 양현준이 아마 저에게 지시를 받았다고 말했나 보죠?”경찰은 차분하게 되물었다. “자기 비서가 한 일을 오 변호사님께서 모를 리 없잖아요.”오성민은 손을 내보이며 말했다. “그는 제 비서일 뿐 제 분신이 아닙니다. 솔직히 말해서 부모도 자식이 뭐 하고 다니는지 모르잖아요. 우리는 단지 사장과 직원의 관계일 뿐입니다.”“근무 중에는 그를 통제할 수 있을지 몰라도 퇴근 후에 무슨 일을 하든 저에게 보고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정말 아무것도 모릅니다.”심문실은 유리로 되어 있으며 안에 있는 사람은 밖을 볼 수 없지만 밖에 있는 사람은 안을 볼 수 있다.‘사망했다’는 소문이 돌았던 유월영은 유리창 밖에서 안에 앉아 있는 오성민을 바라보고 있었다.역시 연재준이 말했던 대로 오성민은 매우 까다로운 인물이었다.변호사로서의 경력과 경험이 그에게 심문실에서도 냉정함을 유지할 수 있는 강단을 주었고, 타고난 의심이 많은 성격과 냉혹한 계산은 자신이 체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경찰 앞에서 머리를 굴리며 빠져나가려는 의지를 불어넣었다.심문실 안에서 경찰은 다시 물었다. “양현준은 유월영과 아무런 원한이 없는데 왜 최광일 한테 유월영을 공격하라고 지시했을까요?”오성민이 웃
오성민은 여전히 차분하고 침착한 표정을 유지했다.“저는 변호사입니다. 법을 가장 잘 지키는 시민이죠. 당연히 경찰 업무에 전적으로 협조할 것입니다. 제가 어디 사는지는 알고 계시니 경찰관님들이 필요하시면 언제든 찾아오시면 됩니다.”그는 일어나 두 명의 경찰관과 먼저 악수를 하고 나서야 심문실을 나와 경찰서를 떠났다.경찰서 앞, 한 차량 옆에서 유월영이 팔짱을 한 채 서 있었다.오성민은 안경을 고쳐 쓰고 걸어 내려가며 미소를 지었다.“유월영 씨, 무사하셔서 정말 다행입니다.”“정말 다행인가요? 왜 저는 오 변호사님이 어금니를 악물고 계신 것 같은 느낌이 들죠?”유월영이 오성민보다 더욱 활짝 웃으며 대꾸했다.“치아는 한번 망가지면 복구하기 힘들어요. 그래서 저는 항상 잘 관리하죠.”오성민은 그녀 앞으로 걸어가며 말했다.“고 대표님, 실례지만 절 좀 이해시켜 줄 수 있을까요? 절벽 아래 시체는 어떻게 된 건가요?”“절벽 아래 시체요?” 유월영은 짐짓 못 알아들은 척하며 뒤돌아 한세인을 바라보았다.한세인이 말했다.“오 변호사님이 말씀하시는 건 우리가 며칠 전에 계향동에서 했던 크라임씬 게임을 말씀인 것 같네요.”“아, 그거요.”유월영이 웃으며 말했다. “오 변호사님, 요즘 핫 한 크라임씬 게임 아시죠? 여러 플레이어가 등장하고 누군가는 경찰을 누군가는 시체를 연기하며 추리를 통해 범인을 찾는 게임이죠. 매우 재미있답니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우리와 함께하시는 것도 좋겠네요.”오성민이 허탈한 듯 웃었다.그는 줄곧 의심하고 있었지만 그 시체의 등장은 그의 의심을 더욱 확신하게 만들었다.게다가 이혁재가 이승연을 데리고 신주시를 떠난다는 소문 때문에 그는 더욱 고민할 시간이 없었다.조바심이 나자 그는 결국 신주시로 왔고 이곳에 발이 묶이게 되었다.유월영이 말했다.“게임은 양측의 조건이 균등해야 공평하고 재밌는 법이죠. 제가 신주시를 떠날 수 없듯이, 이제 오 변호사님도 여기를 떠날 수 없게 됐으니 우리 드디어 같은 판에서 제대로 맞붙
유월영이 절벽에서 뛰어내린 것은 사실 사전에 계획된 것이었다.그들은 운전기사 최광일이 계향동에 갑자기 나타난 것부터 수상하게 여겼다.이전에 노현재는 오성민의 부하들 손에서 그 납치범 일당인 운전기사 최광일을 빼앗아 왔다고 했다. 하지만 이렇게 중요한 증인을 빼앗겼는데도 오성민 측에서 더 이상 쫓아오지 않았으며 바로 그 점이 그들에게 의아하게 느껴졌다.이는 그들이 알고 있는 오성민의 성격과 전혀 맞지 않았기 때문이었다.때문에 최광일이 별장 단지에서 어슬렁거리는 게 정말 배후 조종자를 만나려는 것일 수도 있었지만 유월영을 유인하려는 함정일 가능성도 있다고 판단했다.만약 후자라면 운전기사 최광일은 미끼였고 그 뒤의 배후는 평소와 다르게 조용한 오성민일 수밖에 없었다.그래서 유월영은 두 가지 준비를 했다.만약 전자라면 최광일을 따라가 배후 조종자를 잡으면 되고, 후자라면 유월영은 “죽은” 척하면서 오성민을 신주시로 유인하려 했다.사전에 준비된 일이었기 때문에 유월영의 ‘절벽에서 뛰어내리기'는 위치, 거리, 높이까지 모두 계산된 것이었고 절벽 아래에는 그물을 준비해 그녀를 받아낼 수 있었다.하지만 그들은 연재준도 유월영을 따라 뛰어내리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그들은 다른 사람을 받아낼 준비를 전혀 하지 못했고 연재준은 그렇게 뛰어내리면서 자칫하면 정말 목숨을 잃을 뻔했다.한세인은 백미러를 통해 뒷좌석에 앉은 유월영을 힐끗 보았다.유월영은 오른손으로 이마를 받치고 왼손은 약간 뻣뻣하게 내려놓고 있었다.“거의” 죽을 뻔했다는 말은 위기 순간에 유월영이 그를 붙잡았기 때문이다.산수원에 도착하자 한세인은 앞으로 나서 벨을 눌렀다.문을 연 사람은 가정부였다.“누구를 찾으시나요?”한세인이 입을 열려고 하는 순간 부엌에서 약을 들고나온 강수영이 문 앞에 있는 유월영을 보더니 싸늘하게 물었다.“여기 왜 온 거죠?”유월영이 대답했다.“연 대표님 보러 왔어요.”강수영이 입을 삐쭉거리며 말했다.“정말 악어의 눈물이네요. 오빠 자고 있어요, 지금
두 사람은 순간 그 날밤으로 다시 돌아간 듯했다.그날, 겉으로 보기에는 유월영이 급하게 절벽으로 쫓기고 놈들에게 굴하지 않기 위해 아래로 뛰어내린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그곳은 그들이 미리 정해둔 지점이었다.그 지점 아래에는 유월영을 받쳐줄 사람들이 있었고 그녀가 뛰어내려도 거의 위험이 없었다.하지만 그들은 연재준도 함께 뛰어내릴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안전하게 그물에 걸린 유월영이 막 벗어나려고 하는 순간 “월영아!”하는 소리가 들렸고 이어서 “재준이 형!”이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리자 그녀는 급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밤의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그녀를 향해 몸을 던지는 모습을 보았다.유월영의 동공이 순간적으로 흔들렸다!이어 구출팀의 상황을 보고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젠장! 방향을 잘못 잡았어!”준비한 그물로는 그를 받쳐줄 수 없었다!예상대로 연재준은 그물 가장자리에 떨어졌고 이내 곧 끝없는 절벽 아래로 떨어질 위기에 처했다!유월영의 몸이 머리보다 먼저 반응하여 연재준의 손을 잡았다!연재준은 가파른 절벽에 매달린 채 그녀가 잡고 있는 손 하나에만 의지하고 있었다.그때가 연재준 죽음에 가장 가까이 간 순간이었다.그의 발 아래는 깊이를 알 수 없는 낭떠러지였고 그는 그 절벽 속에서 고개를 들어 위를 올려다보았다.자신의 손을 꼭 잡고 있는 유월영의 창백한 얼굴을 보자 연재준의 눈빛이 흔들렸다. 연재준은 그것이 두려움 때문인지 긴장 때문인지, 아니면 단순히 산바람에 시달려 하얗게 질린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그녀의 머리 위에는 초승달이 떠 있었고 연재준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그녀가 자신을 그렇게까지 죽기를 바라는 건 아니라는 생각에 그저 웃음이 나왔다.“월영아...”유월영의 부하들은 재빨리 연재준을 끌어올렸다. 그들은 함께 산속 움푹 파인 곳에 숨은 채 위쪽에서 비추는 손전등 불빛을 피할 수 있었다.유월영은 산벽에 기대어 가쁜 숨을 몰아 내쉬었다. 방금 생사를 오가는 순간을 겪은 후 그녀의 손과 발은 약간 저려 왔고 맞
연재준은 도저히 생각이 나지 않아 결국 인정하며 말했다.“더 이상 궁금하게 하지 말고 알려줘.”유월영은 그의 ‘애교'에 넘어가지 않고 입가에 살짝 웃음을 띠며 뒤돌아 계단을 내려갔다.“연 대표님, 상처나 잘 치료하세요. 저는 이만 가볼게요.”연재준은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이마를 찌푸리며 여전히 누구를 얘기하는지 알지 못했다.강수영은 유월영이 가져온 ‘병문안 선물'을 들고 계단을 올라오며 불평했다.“보나 마나, 동네 슈퍼에서 대충 산 거겠지? 추석 선물 세트도 아니고.”연재준도 보고는 웃음이 나왔다. 과연 유월영 답 다는 생각 했다.강수영은 그 물건들을 가정부에게 건네주며 물었다.“근데 오빠, 그렇게 그냥 보내버린 거야?”연재준은 방으로 돌아가며 말했다.“그럼 뭐? 남아서 저녁이나 같이 먹자고 할까?”강수영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두 사람 관계가 너무 애매하네, 누군가 옆에서 조금만 더 밀어주면 될 것 같은데.”연재준은 사촌 동생의 말을 무시한 채 핸드폰을 들어 하정은한테 전화를 걸었다.“하 비서, 혹시 내가 누군가를 해외로 보낸 적 있어?”하정은은 그 말의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했다.“...죄송합니다, 대표님,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연재준은 코를 살짝 만지며 말했다.“그게 기억이 안 나. 내가 누구를 해외로 보낸 적 있는지.”하정은은 잠시 생각하다가, 한 사람을 떠올렸다.“백유진 씨요. 3년 전쯤, 대표님께서 그분을 스위스로 보내셨죠. 대표님 어머님같이 지내시라고요.”연재준은 그 순간 머릿속에서 불현듯 뭔가가 스쳐 지나갔다.그는 깨달은 듯 바로 물었다.“월영 씨의 출국 정지는 풀렸나?”하정은이 대답했다.“풀렸습니다. 최광일이 인정했거든요. 그때 조우재가 유월영 씨한테 한 대 맞았을 때 그 일당들이 조우재 때문에 일이 그렇게 된 거라고 본때를 보여준다고 구타를 했는데 실수로 죽인 거라고 합니다.”그 운전기사는 이미 자백했지만 유월영은 방금까지도 그가 입을 열지 않았다고 말했다.“그러니까,
운전기사와 한세인은 유월영을 따라오지 않았다. 유월영은 두 사람에게 다른 일을 준비시키고 혼자 길을 나섰다.“내가 어디로 가는지 연 대표님께 보고해야 하나요?”“출국 금지가 풀렸다며,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어?”유월영은 잠시 멈칫하더니 되물었다.“내가 왜 연 대표님께 알려야 하죠?”연재준의 질문이 이어졌다.“당신은 내 이름을 대고 백유진을 속여서 귀국시켰어. 그녀에게 뭘 하려고 하는 거지?”유월영의 눈빛이 순간 번뜩이면서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무슨 중요한 일이라도 있어 따라오는지 했는데, 백유진 씨 때문이었군요. 그 여자는 정말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특별한 사람인가 보네요.”연재준은 더 이상 변명하지 않고 단호히 말했다.“나랑 백유진의 일은 당신에게 충분히 설명했어. 일부러 날 자극하려 하지 마. 지금 내가 알고 싶은 건 한 가지야. 백유진을 속여서 귀국시킨 이유가 뭐야?”유월영은 느긋한 말투와 장난기 어린 표정을 서서히 거두고 연재준의 추궁하는 듯한 시선을 똑바로 마주했다.두 사람이 서 있는 데는 고속도로 옆 자갈길로, 평소에는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곳이었다. 멀리 기차 철로가 보였고 기차가 소리를 내며 역으로 들어서고 있었다.소음이 잠잠해지자 유월영은 갑작스럽게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내 배속에 있던 아이를 위해 복수할 거예요.”해가 지고 있던 하늘은 순간 갑자기 회색으로 물들었다.두 사람은 마주 보고 서 있었고 주변에는 허리 높이의 잡초가 바람에 밀려 밀물처럼 출렁였다.유월영의 눈 속에 서린 증오는 가식이 아니었다.“나는 그 여자처럼 악독한 사람은 본 적이 없어요. 예전에는 그녀의 작은 장난을 그냥 넘어가려 했죠. 그런데 그녀가 바로 그 납치 사건의 주동자였어요. 이렇게 오랜 시간 숨어 지냈고 이제는 그 대가를 치러야 할 거예요.”연재준이 무겁게 물었다.“그래서 그 여자를 죽이기라도 하겠다는 거야?”유월영이 부정하지 않자 연재준의 턱이 순간 굳어졌다. 그는 성큼 다가가 그녀의 손목을 꽉 잡았다!“네가 다른 건
연재준은 유월영의 행동을 이미 예측한 듯 재빨리 그녀의 팔을 반대로 잡았다. 균형을 잃은 그는 땅에 쓰러지면서도 그녀를 함께 끌어내렸다!두 사람은 풀밭에 떨어져 서로 엉켜버렸다.유월영은 곧바로 일어나려고 했지만 연재준은 먼저 몸을 돌려 그녀 위에 올라탔고 아무 말도 없이 그녀의 입술에 강제로 키스했다!유월영의 머리가 하얗게 질려왔다. 그녀는 두 손으로 그를 밀어내려고 했지만 연재준은 그녀의 입술을 놓아주지 않고 오히려 그녀의 입안을 휘저었다. 간신히 그를 떼어내자마자 그녀는 손을 올려 그의 뺨을 세차게 때리며 외쳤다.“연재준!”연재준은 날아오는 그 따귀를 고스란히 맞았지만 여전히 그녀 위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이마에 흩날린 머리카락이 그의 눈을 가렸고 그에게서 평소와는 다른 우울하고 집착적인 기운이 느껴졌다.연재준은 고개를 숙여 다시 그녀에게 키스를 했고 유월영은 그가 풍기는 한약 냄새에 싸여 치를 떨며 또 한 번 그의 뺨을 강하게 때렸다!연재준은 같은 자리에 연속으로 두 번 뺨을 맞았다. 그의 하얗고 잘생긴 얼굴에는 붉은 손자국이 선명하게 남았지만, 그는 아무 말 없이 그녀의 반항하는 손을 붙잡아 머리 위로 고정했다.그의 가슴이 유월영의 가슴을 눌러왔고 그의 다리가 유월영의 다리를 꼼짝 못 하게 했다.두 사람의 코끝이 서로 스치며, 얼마 지나지 않아 둘의 창백했던 입술은 짙은 붉은빛으로 변했다.유월영은 그의 압박에 숨이 막힐 것 같았고 그의 뜨거운 체온이 느껴졌다. 연재준은 갑자기 그녀의 셔츠 단추를 뜯기 시작했고 유월영은 그가 무슨 짓이라도 할까 두려웠다. 그가 정말 더 강제로 탐하려고 한다면 그 자리에서 그의 숨통을 끊어버리겠다고 다짐했다!하지만 연재준은 그녀의 쇄골을 깨물어 왔다. 마치 살점을 뜯어내려는 듯이.유월영은 온몸에 전해지는 고통에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었고 숨이 거칠어졌다. 그리고 그의 미친 듯한 심장박동 소리도 들려왔다.연재준은 지금 마치 그날 호텔에서처럼 미쳐버린 듯했다....그는 분명히 제정신이 아닌
“할 수 있지, 할 수 있어. 연이가 원하는 거라면 아빠는 꼭 해낼 거야.”윤영훈은 목이 메어 기쁨에 눈물을 흘렸다.주월향은 딸에게 그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았고 오히려 아빠가 누군지 알려주며 7년 동안 떨어져 있었음에도 딸이 그를 낯설게 느끼지 않도록 해줬다.‘이 세상에 이런 여자가 또 어디 있을까?’그러나 윤영훈은 주월향의 이런 행동이 자신을 받아들인다는 뜻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집안에 들어서자 연이가 활기차게 떠들었다.“엄마!”주월향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연이야, 배고프지? 어제 배추전 먹고 싶다고 했잖아? 방금 만들어서 아직 따뜻해. 간식이니까 너무 많이 먹으면 안 돼, 알았지?”아이가 환호하며 말했다.“고마워요, 엄마!”주월향은 윤영훈을 힐끗 보며 말했다.“당신도 먹어볼래요?”윤영훈은 그녀 쪽으로 다가가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월향아, 미안해...”“나한테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아도 돼요.”주월향이 그의 말을 끊었다.그리고 딸을 한 번 보더니 아이가 듣지 못하도록 마당으로 걸어 나갔다.윤영훈도 그녀를 따라 나갔다.주월향은 식물에 물을 주며 담담하게 말했다.“7년 전, 영훈 씨가 감옥에 가기 전에 우리 모녀를 위해 모든 걸 준비해 줬어요. 돈, 집, 차까지 모두 마련해줬죠. 게다가 내가 당신을 한 번 배신하기도 했으니 당신에게 상처 준 대가로 다 갚았다고 볼 수 있겠죠. 우리는 7년 전에 이미 정리됐어요. 그러니 서로에게 빚진 건 없어요.”윤영훈은 숙연한 마음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주월향이 돌아서서 그를 마주 보며 말했다.“이 7년 동안 내가 감옥 면회를 가지 않은 이유는 더 이상 먼저 다가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당신이 오늘 출소한다는 건 알고 있었고 그래서 한 번 더 기회를 주기로 했죠. 당신이 날 찾으러 오지 않았다면 그냥 이대로 끝났을 거예요.”“하지만 영훈 씨는 나를 찾아왔어요. 그래서 지금 당신한테 물어보고 싶어요. 여기 남을 건가요?”“...내가 여기 남아
“됐어요, 사촌 오빠, 얼른 가세요. 곧 비가 올 것 같아요. 이모와 이모부께는 제가 잘 지낸다고 전해주세요. 여기서 부족한 것 하나도 없으니 걱정하지 마시라고요.”‘사촌 오빠?’남자는 주월향의 남편이 아니라 사촌 오빠였다.거의 죽어가던 윤영훈의 마음이 한순간에 되살아났다.그는 참지 못하고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뻔했다.그러나 그 사촌 오빠가 집을 나서자 윤영훈은 재빨리 수박 덩굴 아래로 몸을 숨겼다.물론 그 남자가 남편이 아니라고 해서 주월향에게 남편이 없다는 뜻은 아니었다.하지만 이 반전만으로도 그는 잠시나마 안도감을 느꼈다.그때 머리 위의 수박잎이 갑자기 누군가에 의해 젖혀졌다.윤영훈은 순간 얼어붙었다. 본능적으로 얼굴을 가리고 도망치려 했지만 뒤에서 들려오는 청아하고 차분한 목소리에 그의 발걸음이 멈췄다.“내가 아까 한 말 못 들었어요? 곧 비가 올 것 같으니 빨리 벼부터 거두는 걸 도와줘요. 비 맞으면 이번 농사는 다 망해요.”윤영훈은 그 자리에 꼼짝 않고 서 있었다.주월향의 말투는 너무나도 자연스러워 마치 그가 7년 동안 감옥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잠깐 외출했다가 돌아온 사람처럼 들렸다.천천히 돌아선 윤영훈을 주월향은 담담하게 바라보며 갈퀴를 건넸다.“모두 한데 모아주세요. 내가 자루를 가져올게요.”윤영훈은 멍하니 그녀를 따라 집으로 들어갔다.그는 감옥에서도 농사일을 해봤기에 이런 일이 낯설지 않았다.하지만 일을 하다가도 자꾸 주월향의 눈치를 살폈고 그녀의 의도를 이해하려 애썼다.주월향이 입을 열었다.“지금 나는 온라인에서 요리 블로거로 활동하고 있어요. 팔로워가 몇백만 명은 되죠. 영상 편집이 아직 안 끝났으니 벼를 다 거두고 나면 이 앞에 초등학교에 가서 연이를 좀 데려와 주세요.”“지안 초등학교가 어디 있는지 알죠? 몰라도 괜찮아요. 핸드폰 내비게이션 켜고 찾아가면 돼요.”윤영훈이 여전히 멍하니 있자 주월향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내 말 들었어요?”“들었어...”주월향은 거둔 벼를 집 안으로 가져가며
윤영훈은 10년 형을 선고받았다.모범수로 인정받아 감형된 덕분에 실제 복역 기간은 7년 10개월이었다.출소하는 날, 그를 마중 나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감옥 문 앞에 서서 바라본 세상은 이미 많이 변해 있었다. 그의 모습도 더 이상 과거의 의기양양하고 자유분방했던 그 사람이 아니었다.윤영훈은 감옥 문 앞에서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출소를 반년 앞두고 그는 출소 후의 삶을 계획하려 애썼지만 막상 그 순간이 닥치자 머릿속은 텅 비어버렸다.윤씨 가문은 이미 몰락한 지 오래였다.2년 전, 그의 아버지는 감옥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교도관들의 배려로 그는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석할 수 있었다.그곳에서 그는 가난에 시달리는 친척들을 보았다.가문의 보호막 없이 근근이 살아가는 그들에게 윤영훈은 짐이 되고 싶지 않았다.그의 사촌 서정희는 출소 후 찾아오라 했지만 그녀에게도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윤영훈이 가장 만나고 싶었던 사람은 주월향이었다.그녀와 딸 연이를 보고 싶었지만 갑작스러운 등장이 그녀에게 폐를 끼칠까 두려웠다.게다가 그녀는 이미 자신을 만나고 싶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재판을 받던 날에도 주월향은 법정에 나오지 않았다.7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으니 그녀는 분명 새로운 삶을 시작했을 것이고 어쩌면 그녀 곁에는 그녀를 사랑하는 남자가 있을지도 모른다.남자가 없더라도 모녀는 안정적이고 풍족한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윤영훈은 감옥에 가기 전 그녀에게 충분한 재산을 남겼고 그녀가 이를 잘 활용했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그런 상황에서 자신의 등장은 적절하지 않았다.하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이 비열하다고 느꼈다.주월향을 한 번이라도 보고 싶다는 욕망을 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멀리서 그녀를 한 번 보기만 해도 만족하겠다고 다짐한 윤영훈은 감옥에서 일하며 모은 돈으로 기차표를 사서 그녀의 고향으로 향했다.그곳은 산과 물이 어우러진 작은 마을이었다.기차역에서 그녀의 집까지는 버스로 2시간
“그래도 돼?”강수영은 신현우가 미쳤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그는 정말로 그녀의 애인이 되었고 강수영은 반년 넘게 그와 몰래 관계를 이어갔다.강수영은 일부러 자신이 이미 남편과 이혼했다는 사실을 숨기고 매주 몰래 찾아오는 신현우를 지켜보며 즐거워했다.가끔 갑자기 여행을 떠나고 싶어지면 그녀는 짐을 싸서 바로 떠났다.그럴 때마다 신현우는 알림도 받지 못한 채 허탕을 치고 돌아가야 했다.친구들은 강수영이 신현우를 가지고 노는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녀는 이 상황을 즐길 뿐이었다.현재 신현우의 눈에는 질투와 시기가 가득 차 있었고 늘 당당하던 그의 얼굴에는 답답함과 우울함이 서려 있었다.강수영은 자신이 그의 곁에서 겪었던 모든 억울함과 상처를 이렇게 풀고 싶었다.이번 주, 강수영은 영국으로 떠날 예정이었고 신현우는 그녀가 남편을 만나러 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겉으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날 밤 강수영이 화장실에 가려고 일어났을 때 그는 거실에서 홀로 술병을 비우고 있었다.엉망이 된 그의 모습은 평소와 달리 초라해 보였고 강수영은 저도 모르게 마음이 조금 약해졌다.그녀는 오랜 시간 방치해둔 녹음기를 꺼냈다. 그건 예전에 신연우가 건넨, 신현우의 음성이 담긴 파일이었다.그녀는 당시 결혼 생활에 전념하고 싶어 듣지 않았던 녹음을 재생했다.녹음기에서는 술에 취한 신현우의 흐릿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그것은 강수영의 결혼식 날, 신현우가 취한 상태에서 남긴 말들이었다.신연우가 그를 말렸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수영이가 내 앞을 그렇게 지나갔어. 남편 팔짱을 끼고 날 쳐다보지도 않았어.”“내가 정말로 그녀를 신경 쓰지 않고,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을까? 아니야, 난 수영이를 좋아했어. 다만 그녀가 집으로 돌아가길 바랐을 뿐이야.”“나 때문에 부모님과 친구들과도 관계를 끊었잖아. 너무 어리석었어. 나는 그런 가치를 줄 만한 사람이 아닌데...”“다 내 잘못이야. 처음부터 더 깊은 관계로 나아가지 않았더라면 수영이가 이렇게 집착하지
두 사람은 서쪽으로 스위스 알프스를 찾아가 산맥의 낭만을 만끽하며 자연 보호구역에서 아름다운 야생동물들을 만났다.북쪽으로는 핀란드의 로바니에미와 캐나다의 퀘벡으로 향해 겨울 축제와 북유럽의 신비로운 매력을 경험하고 끝없이 펼쳐진 설원과 오로라의 장관을 즐겼다.그러던 중, 한 여행지에서 강수영은 신연우를 우연히 마주쳤다.오래된 친구라 할 수 있는 사이였기에 두 사람은 함께 저녁을 먹었다.식사 후, 신연우는 그녀에게 녹음 파일을 건네며 말했다.“이 안에는 우리 형의 음성이 들어 있어. 들을지 말지는 네가 결정해. 하지만 듣는다면 네 결혼 생활에 영향을 줄 수도 있어.”그는 이어 덧붙였다.“형이 요 몇 달 동안 상태가 많이 안 좋았어. 큰 병을 앓아 체중이 많이 빠졌고, 회사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어. 최근에서야 조금 회복됐지.”강수영은 특별히 반응하지 않고 녹음 파일을 받았지만 끝내 듣지 않았다.신혼여행을 마치고 부부는 지성으로 돌아와 결혼 후의 삶을 시작했다. 하지만 2년도 채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이혼 절차를 밟게 되었다.두 사람 사이에는 큰 갈등이 없었다. 강수영의 남편은 여전히 훌륭한 사람이었고 이혼의 원인은 문화적 차이와 생활 습관의 차이였다.한 사람은 한국식 사고방식으로, 다른 한 사람은 서양식 사고방식으로 자라며 서로 적응하려고 노력했지만 끝내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그들은 평화롭게 헤어졌고 이혼 후에도 좋은 친구로 남았다.부모의 잔소리를 피하기 위해 이혼 사실을 비밀로 하기로 합의한 후 강수영은 다시 전 세계를 여행하기 시작했다.그러다 각 나라, 각 도시에서 신현우를 계속 ‘우연히’ 마주치게 되었다.세 번째 만남에서는 더 이상 참지 못한 강수영이 그를 조롱했다.“신 대표님, 이렇게 한가하신 줄 몰랐네요. 왜 자꾸 저를 따라다니시는 거죠?”“따라다닌 게 아니야. 우연일 뿐이야.”“우연이 이렇게 자주 겹칠 리가 있나요? 제가 바보인 줄 아세요?”차가운 미소를 띤 강수영에게 신현우는 화제를 돌렸다.“넌 왜 여기저기 여행
‘소은혜’에서 다시 ‘강수영’으로 돌아온 후, 강수영은 그 차가운 남자와 더는 아무런 관계도 없을 것이라고 믿었다.한눈에 반했던 감정은 결국 그녀의 인생을 망쳤고 다시는 그 남자와 얽히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그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했다. 파혼하고 집을 떠나 이름까지 바꾼 채 명분 없이 그의 곁을 지켰지만 세상 사람들은 그녀를 부끄러움을 모르는 여자라며 손가락질했다.그러는 동안 그는 가문 배경이 잘 맞는 귀한 집 아가씨와 결혼 준비를 하고 있었다.그녀는 스스로를 명문가의 딸에서 천한 첩으로 전락시켰지만 그에게선 차가운 시선만 돌아왔다. 그녀가 바친 모든 것을 알면서도 그는 온기 한 줌 나눠주지 않았다.강수영은 결국 깨달았다. 그 감정을 고집한 자신이 문제였다는 것을.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야 했다.그녀는 강씨 집안의 딸로 돌아왔고 그는 여전히 신씨 가문의 장남으로 남아 있었다.부모님은 그녀를 위해 맞선을 주선했고 두 가문 모두에게 이로운 자리였다.강수영은 더 이상 부모님을 실망하게 하고 싶지 않아 기쁜 마음으로 맞선에 응했다.맞선 상대는 영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훌륭한 조건을 갖춘 사람이었다. 나이도 비슷했고 배경도 잘 맞았다.며칠간 그와 시간을 보내본 그녀는 그가 괜찮다고 느꼈다. 특히, 그가 그녀에게 첫눈에 반했다고 고백했을 때는 묘한 감정이 들었다.누군가를 좋아하는 것은 너무나 고된 일이었기에 이번에는 누군가가 자신을 좋아해 주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알고 싶었다.그렇게 두 사람은 3개월간 교제했고 큰 문제 없이 잘 맞았다. 비록 심장이 크게 뛰는 설렘은 없었지만 세상 대부분의 결혼이 ‘적당함’을 기반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그녀도 알고 있었다.그 기준에서 본다면 그와의 결혼은 충분히 합리적이었다.결국 두 사람은 약혼했고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그러나 결혼식 당일, 초대받지 않은 불청객이 나타났다. 바로 신현우였다.그의 등장에 강수영은 잠시 굳어졌지만 이내 미소를 띠며 신랑과 함께 술잔을 들었다.
방금 중성화 수술을 받은 고양이는 축 늘어져 있었다.이승연은 고양이가 우울증에 걸릴까 봐 걱정되어 이혁재에게 맡기기로 했다.“경험 있는 네가 좀 맡아줘.”이혁재는 황당했다.“내가 무슨 경험이 있다고 그래!”이승연은 그를 잠시 바라보더니 담담하게 말했다.“처지가 비슷하잖아.”화가 난 이혁재는 이승연을 들어 신발장 위에 올려놓고 곱게 바른 립스틱을 번지게 했다.“전혀 비슷하지 않거든!”이혁재의 사무실.이혁재와 연재준은 일 얘기를 하고 있었고 두 아이는 옆에서 놀고 있었다.그때 이혁재가 무심코 고양이에게 한마디를 건넸다.“호두야, 누나를 잘 돌봐야 해.”기어다니기 시작한 윤아는 갑자기 호두의 꼬리를 잡았다.호두는 성격이 온순하고 사람을 좋아했지만 꼬리만큼은 예외였다. 그런데도 이번에는 이혁재의 말 때문인지 꼬리를 잡힌 채로 억울한 듯 야옹 소리만 냈다.윤아는 깔깔 웃으며 꼬리 끝을 입에 넣으려 했고 그제야 호두는 꼬리를 빼내더니 아기에게 돌아서서 야옹 소리를 내며 경고했다.마치 “입에 넣으면 안 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그러자 윤아는 호두를 향해 돌진하며 그를 덮쳤다.두 아빠가 일을 마치고 아이들을 찾으러 갔을 때 윤아는 카펫 위에서 잠들어 있었고 호두는 듬직한 몸을 베개 삼아 윤아를 받치고 있었다.그 동화 같은 장면에 연재준과 이혁재는 저도 모르게 아빠 미소를 지었다.“고양이가 어린이를 알아본다더니 진짜인가 봐.”퇴근 시간이 되어 이혁재는 호두를 데리고 이승연의 사무실로 향했다.이승연은 호두를 품에 안고 기뻐하며 입을 맞췄고 이어 호두가 이혁재에게도 뽀뽀하도록 했다.갑작스러운 입맞춤에 이혁재는 고양이 털을 한가득 삼키고 서둘러 뱉어냈다.“퉤퉤퉤.”그 순간, 호두도 갑자기 토하기 시작했다. 단순히 흉내를 낸 게 아니라 실제로 무언가를 토해냈다.이혁재는 어이가 없어 발끈했고 이승연은 웃음을 참지 못해 의자에 쓰러지듯 폭소했다.사실 고양이는 털을 핥으며 스스로를 청소하는 습성 때문에 위에 털 뭉치가 생겨 종종 토하곤
작은 고양이는 케이지 구석에 웅크리고 있었고 치료로 인해 털이 대부분 깎인 채 볼품없는 모습이었다.이혁재가 싫은 소리를 내자 새끼 고양이는 힘겹게 눈을 떴다. 그리고 이승연을 알아본 듯 비틀거리며 케이지 가장자리로 다가와 그녀를 향해 야옹 울었다.이승연은 손가락을 내밀어 고양이를 살짝 만졌다. 그러자 고양이는 꿈틀거리며 그녀의 손가락에 머리를 가져다 대었다.그녀는 미소 지었고 이를 지켜보던 이혁재가 말했다.“여보, 얘 다 낫고 나면 집에 데려가 키우자. 이렇게 작고 못생긴 애가 혼자 힘으로 먹을 걸 찾기도 힘들고, 다른 고양이들이 받아주지도 않을 거야. 우리가 돌보지 않으면 얘 어떻게 살겠어.”이승연도 같은 생각이었다.두 달 후, 고양이는 건강을 회복했다.이혁재는 직접 고양이를 씻기고 구충한 뒤 집으로 데려갔다.시간이 지나면서 고양이는 털이 윤기 나게 자랐고 살이 올라 뼈만 앙상했던 이전 모습과는 완전히 달라졌다.결국, 고양이는 기름지고 윤기 나는 털을 자랑하며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 이혁재의 몸 위로 덮치는 대형 고양이가 되었다.“이런 젠장!”이혁재는 고양이의 기습에 또 당했고 숨이 턱 막힐 뻔했다.고양이가 도망치려 하자 그는 재빨리 붙잡아 들어 올리며 따졌다.“너 자신이 얼마나 무거운지 전혀 모르는 거야? 아니면 정말 날 깔아뭉개려고 작정한 거야?”고양이는 억울하다는 듯 야옹거리며 반응했다. 그러나 고양이가 이승연에게는 절대 이런 짓을 하지 않았기에 이혁재는 고양이가 일부러 자신을 괴롭힌다고 생각했다.고양이는 이승연이 일할 때 그녀의 발등 위에 앉아 체온으로 발을 따뜻하게 해주었다.그녀가 서류를 검토할 때는 네 발을 모아 단정한 자세로 그녀 곁에 앉아 ‘독서’에 동참했다.때로는 앞발로 서류를 톡톡 두드리며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중요한 코멘트’를 남기기도 했다.이혁재는 고양이를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고양이를 뒤집어 배를 위로 한 채 들어 올려 얼굴을 고양이 배에 묻고 한 번 흡입했다.고양이는 저항하며 네 발로
아이를 가지지 않기로 합의한 후, 이혁재는 정관 절제술을 받았다. 흔히 말하는 ‘피임 수술’을 통해 아이를 갖지 않겠다는 결정을 실행에 옮긴 것이다.이혁재는 이 일을 이승연에게 알리지 않았다. 관련 정보를 철저히 조사한 뒤, 직접 차를 몰아 병원으로 갔다.수술은 간단했고 외래 진료에서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수술을 마친 그는 바로 퇴원했고 그날 오후에는 몇 시간 동안 회의를 열기도 했다. 약간의 불편함이 있었지만 큰 문제는 없었다. 그리고 집에 돌아온 후에는 그 불편함조차 완전히 사라졌다.수술 후 한 달이 지나서야 이혁재는 가벼운 농담처럼 이 일을 이승연에게 털어놓았다.이승연은 한동안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평소 재빠른 두뇌 회전과 날카로운 눈치로 유명한 그녀였지만 이번에는 말을 잇지 못했다.이혁재는 그녀가 ‘수술’이라는 단어에 겁을 먹었다고 생각하며 웃었다. 혹시 일이 심각하다고 오해했을까 봐 그녀를 안고 달래며 자세히 설명했다.“여보, 내가 요즘 아이를 갖는 게 얼마나 두려웠는지 몰랐지? 피임을 해도 혹시 실수라도 생길까 봐 계속 걱정했어. 만약 사고가 생기면 낳든 낙태하든 둘 다 누나 몸에 무리가 갈 거잖아. 그래서 아예 근본적으로 위험을 없애는 게 낫다고 생각했어.”이승연은 그의 허리를 감싸안고 이마를 그의 가슴에 기대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도 이 수술 알아. 우리 아빠가 받았거든.”그녀는 차분히 이야기를 이어갔다.“그 시절에는 보통 여자가 피임 수술을 받곤 했는데 우리 아빠는 알아보니 여자가 받는 수술이 훨씬 위험하고 몸에 무리가 된다는 걸 알게 됐대. 그래서 엄마가 고생하는 걸 차마 볼 수 없어 자신이 받았지.”“아빠는 우리 동네에서 피임 수술을 받은 유일한 남자였고 사람들은 우리 아빠를 세상에 둘도 없는 좋은 남자라고 칭찬했어. 엄마도 복 받은 거라고 하셨고.”이혁재는 그녀가 아버지를 칭찬하며 은근히 자신도 칭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웃음을 터뜨렸다.그날 밤, 소파와 카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