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성민은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바로 흥원동으로 향했다.설이 지나고 신주시의 기온이 점차 따뜻해지고 있었다.오성민이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이혁재는 매일 오후 이승연을 휠체어에 태워 동네를 산책시키며 햇볕을 쬐었다.그는 오늘도 날씨가 좋아 이혁재가 이승연을 또 데리고 내려올 거라 확신했다.오성민은 그들의 집 앞에서 조용히 기다렸고 한참 후 마침내 이혁재가 휠체어를 밀고 나타났다.그는 바삐 벽 뒤로 몸을 숨겼다.그의 시야에는 휠체어에 앉아 있는 흰 원피를 입은 여자가 들어왔다. 이혁재는 휠체어를 밀며 천천히 산책로를 걸었고 가끔 몸을 숙여 그녀에게 다정하게 말을 건넸다.오성민은 사람을 불러 이혁재를 따돌릴 계획이었으나 그럴 필요 없어 보였다.이혁재가 고개를 숙이며 이승연에게 말했다.“너무 급히 내려와서 담요를 깜빡했네. 여보, 잠시만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여자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이혁재는 휠체어를 길가에 세워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방해되지 않도록 하고 바퀴에 잠금장치를 한 후 자리를 떠났다.오성민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달려갔다.“승연아!”이승연은 휠체어에 앉은 채 오성민에게 등을 돌리고 있었고 오성민은 그녀의 뒤에 서 있었다. 오랜만에 만나면서 마음이 두근거려 오성민은 선뜻 가까이 가지 못했다.“승연아, 나야. 날 기억하지?”이승연의 몸이 흠칫했지만 뒤돌아보지 않았다.오성민은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말했다.“네가 깨어났다는 걸 알고 계속 널 보러 오고 싶었어. 회복은 잘 되고 있어? 다리만 아직 회복되지 않은 거야?”이승연은 조용한 채 여전히 아무 움직임도 없었다.하지만 오성민은 그녀가 당장 도망가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목소리가 떨려왔다.“네가 아직 나에게 화가 나 있고 아직 나를 용서하지 않은 거라는 것도 알아. 그런데 승연아, 난 정말로 변했어. 지난 3년 동안 다른 여자를 만난 적 없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여전히 너란 걸 깨달았으니까.”“우리는 7년이라는 시간을 함께했어. 나는 네가 아직
이혁재는 싸늘하게 웃으며 말했다.“오성민, 꿈 깨지. 이번 생에 내 아내를 너에게 보여줄 일은 없을 거야.”오성민이 음산한 표정으로 무언가 말하려는 순간 이혁재가 먼저 말을 이었다.“오 변. 승연 누나가 그때 법정에서 어쩌다 다치게 되었는지 내가 모를 줄 알았어? 그 빚, 하루라도 잊은 적이 없었지.”이제 그 빚을 청산할 때가 되었다.“...”오성민의 눈동자가 빠르게 흔들렸다. 그는 줄곧 이혁재가 그 사실을 모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해 왔다.만약 그걸 이미 알고 있었다면 이혁재의 성격상 이렇게 오랫동안 참았을 리가 없었다.누군가 그에게 결정적인 순간까지 기다렸다 복수하라고 조언해 주는 사람이 있다면 몰라도.그게 누구인지 오성민은 잠시 생각하다 이내 답을 얻었다. 바로 자신을 신주시로 유인한 사람이었다.오성민의 미간에 미세한 주름이 잡혔다. 그는 더는 이혁재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돌아서서 빠르게 떠났다.그의 멀어지는 뒷모습이 지켜보던 이혁재의 눈에 살기가 가득했다. 그러다 시선을 거두고 옆을 바라보며 다시 평소처럼 차분한 모습으로 돌아갔다.오랜 방랑 끝에 주인에게 돌아온 떠돌이 강아지처럼 순종적이고 얌전했다.다만 방금 전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여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스스로 휠체어 바퀴를 돌리며 천천히 떠났다.이혁재는 약간 실망한 표정을 지었지만 곧 그 뒤를 따라 바싹 붙어갔다....빠르게 아파트 단지를 나온 오성민은 바로 공항으로 가서 신주시를 떠날 생각이었다.그의 운전사는 이미 차를 몰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고 그가 막 차 문을 열고 올라타려는 순간, 누군가의 거대한 손이 차 문을 다시 닫아버렸다.몇 명의 남자들이 그를 앞뒤로 둘러쌌다.“오성민 씨인가요?”오성민이 차분하게 물었다.“그러는 당신들은 누구죠?”앞장선 사람이 경찰증을 내보였다.“경찰입니다. 오성민 씨가 엄중한 범죄 사건과 관련이 있다는 제보를 받았어요. 경찰서에 가서 조사에 협조해 주시죠.”오성민은 애써 침착했다.“무슨 범죄 사건이죠? 내가
순간, 오성민의 턱 근육이 딱딱하게 굳었다.그가 용청을 떠나온 지 겨우 네다섯 시간이 지났을 뿐인데 비서까지 체포당하고 나서야 그는 자신이 완벽하게 준비된 함정에 빠졌다는 걸 알아챘다.그러나 오성민은 처음 듣는 내용이라는 듯 놀라운 척하며 물었다.“이런 일이 있었다니, 양현준이 자백했나요?”경찰은 되물었다. “오 변호사님 생각은 어떻습니까?”오성민은 경찰의 전략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경찰들은 자신들이 가진 정보를 전부 보여주지 않고 오성민이 그들의 패를 알 수 없도록 하여 그가 방심한 틈에 스스로 자백하도록 유도하려는 것이다.오성민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런 중대한 사건을 제가 어떻게 함부로 추측할 수 있겠어요? 하지만 경찰분들이 저까지 경찰서로 데려오신 걸 보면 양현준이 아마 저에게 지시를 받았다고 말했나 보죠?”경찰은 차분하게 되물었다. “자기 비서가 한 일을 오 변호사님께서 모를 리 없잖아요.”오성민은 손을 내보이며 말했다. “그는 제 비서일 뿐 제 분신이 아닙니다. 솔직히 말해서 부모도 자식이 뭐 하고 다니는지 모르잖아요. 우리는 단지 사장과 직원의 관계일 뿐입니다.”“근무 중에는 그를 통제할 수 있을지 몰라도 퇴근 후에 무슨 일을 하든 저에게 보고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정말 아무것도 모릅니다.”심문실은 유리로 되어 있으며 안에 있는 사람은 밖을 볼 수 없지만 밖에 있는 사람은 안을 볼 수 있다.‘사망했다’는 소문이 돌았던 유월영은 유리창 밖에서 안에 앉아 있는 오성민을 바라보고 있었다.역시 연재준이 말했던 대로 오성민은 매우 까다로운 인물이었다.변호사로서의 경력과 경험이 그에게 심문실에서도 냉정함을 유지할 수 있는 강단을 주었고, 타고난 의심이 많은 성격과 냉혹한 계산은 자신이 체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경찰 앞에서 머리를 굴리며 빠져나가려는 의지를 불어넣었다.심문실 안에서 경찰은 다시 물었다. “양현준은 유월영과 아무런 원한이 없는데 왜 최광일 한테 유월영을 공격하라고 지시했을까요?”오성민이 웃
오성민은 여전히 차분하고 침착한 표정을 유지했다.“저는 변호사입니다. 법을 가장 잘 지키는 시민이죠. 당연히 경찰 업무에 전적으로 협조할 것입니다. 제가 어디 사는지는 알고 계시니 경찰관님들이 필요하시면 언제든 찾아오시면 됩니다.”그는 일어나 두 명의 경찰관과 먼저 악수를 하고 나서야 심문실을 나와 경찰서를 떠났다.경찰서 앞, 한 차량 옆에서 유월영이 팔짱을 한 채 서 있었다.오성민은 안경을 고쳐 쓰고 걸어 내려가며 미소를 지었다.“유월영 씨, 무사하셔서 정말 다행입니다.”“정말 다행인가요? 왜 저는 오 변호사님이 어금니를 악물고 계신 것 같은 느낌이 들죠?”유월영이 오성민보다 더욱 활짝 웃으며 대꾸했다.“치아는 한번 망가지면 복구하기 힘들어요. 그래서 저는 항상 잘 관리하죠.”오성민은 그녀 앞으로 걸어가며 말했다.“고 대표님, 실례지만 절 좀 이해시켜 줄 수 있을까요? 절벽 아래 시체는 어떻게 된 건가요?”“절벽 아래 시체요?” 유월영은 짐짓 못 알아들은 척하며 뒤돌아 한세인을 바라보았다.한세인이 말했다.“오 변호사님이 말씀하시는 건 우리가 며칠 전에 계향동에서 했던 크라임씬 게임을 말씀인 것 같네요.”“아, 그거요.”유월영이 웃으며 말했다. “오 변호사님, 요즘 핫 한 크라임씬 게임 아시죠? 여러 플레이어가 등장하고 누군가는 경찰을 누군가는 시체를 연기하며 추리를 통해 범인을 찾는 게임이죠. 매우 재미있답니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우리와 함께하시는 것도 좋겠네요.”오성민이 허탈한 듯 웃었다.그는 줄곧 의심하고 있었지만 그 시체의 등장은 그의 의심을 더욱 확신하게 만들었다.게다가 이혁재가 이승연을 데리고 신주시를 떠난다는 소문 때문에 그는 더욱 고민할 시간이 없었다.조바심이 나자 그는 결국 신주시로 왔고 이곳에 발이 묶이게 되었다.유월영이 말했다.“게임은 양측의 조건이 균등해야 공평하고 재밌는 법이죠. 제가 신주시를 떠날 수 없듯이, 이제 오 변호사님도 여기를 떠날 수 없게 됐으니 우리 드디어 같은 판에서 제대로 맞붙
유월영이 절벽에서 뛰어내린 것은 사실 사전에 계획된 것이었다.그들은 운전기사 최광일이 계향동에 갑자기 나타난 것부터 수상하게 여겼다.이전에 노현재는 오성민의 부하들 손에서 그 납치범 일당인 운전기사 최광일을 빼앗아 왔다고 했다. 하지만 이렇게 중요한 증인을 빼앗겼는데도 오성민 측에서 더 이상 쫓아오지 않았으며 바로 그 점이 그들에게 의아하게 느껴졌다.이는 그들이 알고 있는 오성민의 성격과 전혀 맞지 않았기 때문이었다.때문에 최광일이 별장 단지에서 어슬렁거리는 게 정말 배후 조종자를 만나려는 것일 수도 있었지만 유월영을 유인하려는 함정일 가능성도 있다고 판단했다.만약 후자라면 운전기사 최광일은 미끼였고 그 뒤의 배후는 평소와 다르게 조용한 오성민일 수밖에 없었다.그래서 유월영은 두 가지 준비를 했다.만약 전자라면 최광일을 따라가 배후 조종자를 잡으면 되고, 후자라면 유월영은 “죽은” 척하면서 오성민을 신주시로 유인하려 했다.사전에 준비된 일이었기 때문에 유월영의 ‘절벽에서 뛰어내리기'는 위치, 거리, 높이까지 모두 계산된 것이었고 절벽 아래에는 그물을 준비해 그녀를 받아낼 수 있었다.하지만 그들은 연재준도 유월영을 따라 뛰어내리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그들은 다른 사람을 받아낼 준비를 전혀 하지 못했고 연재준은 그렇게 뛰어내리면서 자칫하면 정말 목숨을 잃을 뻔했다.한세인은 백미러를 통해 뒷좌석에 앉은 유월영을 힐끗 보았다.유월영은 오른손으로 이마를 받치고 왼손은 약간 뻣뻣하게 내려놓고 있었다.“거의” 죽을 뻔했다는 말은 위기 순간에 유월영이 그를 붙잡았기 때문이다.산수원에 도착하자 한세인은 앞으로 나서 벨을 눌렀다.문을 연 사람은 가정부였다.“누구를 찾으시나요?”한세인이 입을 열려고 하는 순간 부엌에서 약을 들고나온 강수영이 문 앞에 있는 유월영을 보더니 싸늘하게 물었다.“여기 왜 온 거죠?”유월영이 대답했다.“연 대표님 보러 왔어요.”강수영이 입을 삐쭉거리며 말했다.“정말 악어의 눈물이네요. 오빠 자고 있어요, 지금
두 사람은 순간 그 날밤으로 다시 돌아간 듯했다.그날, 겉으로 보기에는 유월영이 급하게 절벽으로 쫓기고 놈들에게 굴하지 않기 위해 아래로 뛰어내린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그곳은 그들이 미리 정해둔 지점이었다.그 지점 아래에는 유월영을 받쳐줄 사람들이 있었고 그녀가 뛰어내려도 거의 위험이 없었다.하지만 그들은 연재준도 함께 뛰어내릴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안전하게 그물에 걸린 유월영이 막 벗어나려고 하는 순간 “월영아!”하는 소리가 들렸고 이어서 “재준이 형!”이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리자 그녀는 급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밤의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그녀를 향해 몸을 던지는 모습을 보았다.유월영의 동공이 순간적으로 흔들렸다!이어 구출팀의 상황을 보고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젠장! 방향을 잘못 잡았어!”준비한 그물로는 그를 받쳐줄 수 없었다!예상대로 연재준은 그물 가장자리에 떨어졌고 이내 곧 끝없는 절벽 아래로 떨어질 위기에 처했다!유월영의 몸이 머리보다 먼저 반응하여 연재준의 손을 잡았다!연재준은 가파른 절벽에 매달린 채 그녀가 잡고 있는 손 하나에만 의지하고 있었다.그때가 연재준 죽음에 가장 가까이 간 순간이었다.그의 발 아래는 깊이를 알 수 없는 낭떠러지였고 그는 그 절벽 속에서 고개를 들어 위를 올려다보았다.자신의 손을 꼭 잡고 있는 유월영의 창백한 얼굴을 보자 연재준의 눈빛이 흔들렸다. 연재준은 그것이 두려움 때문인지 긴장 때문인지, 아니면 단순히 산바람에 시달려 하얗게 질린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그녀의 머리 위에는 초승달이 떠 있었고 연재준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그녀가 자신을 그렇게까지 죽기를 바라는 건 아니라는 생각에 그저 웃음이 나왔다.“월영아...”유월영의 부하들은 재빨리 연재준을 끌어올렸다. 그들은 함께 산속 움푹 파인 곳에 숨은 채 위쪽에서 비추는 손전등 불빛을 피할 수 있었다.유월영은 산벽에 기대어 가쁜 숨을 몰아 내쉬었다. 방금 생사를 오가는 순간을 겪은 후 그녀의 손과 발은 약간 저려 왔고 맞
연재준은 도저히 생각이 나지 않아 결국 인정하며 말했다.“더 이상 궁금하게 하지 말고 알려줘.”유월영은 그의 ‘애교'에 넘어가지 않고 입가에 살짝 웃음을 띠며 뒤돌아 계단을 내려갔다.“연 대표님, 상처나 잘 치료하세요. 저는 이만 가볼게요.”연재준은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이마를 찌푸리며 여전히 누구를 얘기하는지 알지 못했다.강수영은 유월영이 가져온 ‘병문안 선물'을 들고 계단을 올라오며 불평했다.“보나 마나, 동네 슈퍼에서 대충 산 거겠지? 추석 선물 세트도 아니고.”연재준도 보고는 웃음이 나왔다. 과연 유월영 답 다는 생각 했다.강수영은 그 물건들을 가정부에게 건네주며 물었다.“근데 오빠, 그렇게 그냥 보내버린 거야?”연재준은 방으로 돌아가며 말했다.“그럼 뭐? 남아서 저녁이나 같이 먹자고 할까?”강수영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두 사람 관계가 너무 애매하네, 누군가 옆에서 조금만 더 밀어주면 될 것 같은데.”연재준은 사촌 동생의 말을 무시한 채 핸드폰을 들어 하정은한테 전화를 걸었다.“하 비서, 혹시 내가 누군가를 해외로 보낸 적 있어?”하정은은 그 말의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했다.“...죄송합니다, 대표님,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연재준은 코를 살짝 만지며 말했다.“그게 기억이 안 나. 내가 누구를 해외로 보낸 적 있는지.”하정은은 잠시 생각하다가, 한 사람을 떠올렸다.“백유진 씨요. 3년 전쯤, 대표님께서 그분을 스위스로 보내셨죠. 대표님 어머님같이 지내시라고요.”연재준은 그 순간 머릿속에서 불현듯 뭔가가 스쳐 지나갔다.그는 깨달은 듯 바로 물었다.“월영 씨의 출국 정지는 풀렸나?”하정은이 대답했다.“풀렸습니다. 최광일이 인정했거든요. 그때 조우재가 유월영 씨한테 한 대 맞았을 때 그 일당들이 조우재 때문에 일이 그렇게 된 거라고 본때를 보여준다고 구타를 했는데 실수로 죽인 거라고 합니다.”그 운전기사는 이미 자백했지만 유월영은 방금까지도 그가 입을 열지 않았다고 말했다.“그러니까,
운전기사와 한세인은 유월영을 따라오지 않았다. 유월영은 두 사람에게 다른 일을 준비시키고 혼자 길을 나섰다.“내가 어디로 가는지 연 대표님께 보고해야 하나요?”“출국 금지가 풀렸다며,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어?”유월영은 잠시 멈칫하더니 되물었다.“내가 왜 연 대표님께 알려야 하죠?”연재준의 질문이 이어졌다.“당신은 내 이름을 대고 백유진을 속여서 귀국시켰어. 그녀에게 뭘 하려고 하는 거지?”유월영의 눈빛이 순간 번뜩이면서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무슨 중요한 일이라도 있어 따라오는지 했는데, 백유진 씨 때문이었군요. 그 여자는 정말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특별한 사람인가 보네요.”연재준은 더 이상 변명하지 않고 단호히 말했다.“나랑 백유진의 일은 당신에게 충분히 설명했어. 일부러 날 자극하려 하지 마. 지금 내가 알고 싶은 건 한 가지야. 백유진을 속여서 귀국시킨 이유가 뭐야?”유월영은 느긋한 말투와 장난기 어린 표정을 서서히 거두고 연재준의 추궁하는 듯한 시선을 똑바로 마주했다.두 사람이 서 있는 데는 고속도로 옆 자갈길로, 평소에는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곳이었다. 멀리 기차 철로가 보였고 기차가 소리를 내며 역으로 들어서고 있었다.소음이 잠잠해지자 유월영은 갑작스럽게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내 배속에 있던 아이를 위해 복수할 거예요.”해가 지고 있던 하늘은 순간 갑자기 회색으로 물들었다.두 사람은 마주 보고 서 있었고 주변에는 허리 높이의 잡초가 바람에 밀려 밀물처럼 출렁였다.유월영의 눈 속에 서린 증오는 가식이 아니었다.“나는 그 여자처럼 악독한 사람은 본 적이 없어요. 예전에는 그녀의 작은 장난을 그냥 넘어가려 했죠. 그런데 그녀가 바로 그 납치 사건의 주동자였어요. 이렇게 오랜 시간 숨어 지냈고 이제는 그 대가를 치러야 할 거예요.”연재준이 무겁게 물었다.“그래서 그 여자를 죽이기라도 하겠다는 거야?”유월영이 부정하지 않자 연재준의 턱이 순간 굳어졌다. 그는 성큼 다가가 그녀의 손목을 꽉 잡았다!“네가 다른 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