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현재는 소파 등받이를 잡고 바닥에서 일어섰다. 그는 완전히 도둑놈 같은 복장을 하고 있었다. 검은 옷에 검은 바지, 불빛이 없었다면 완벽하게 어둠 속에 녹아들었을 것이다.그는 일부러 여유를 부리며 투덜거렸다.“역시 상류 사회의 배운 사람들이군. 국수도 이렇게 조금 먹더라니. 당신 두 사람 양을 합쳐도 내 위를 채우기엔 모자란 것 같네.”현시우가 그를 쓰러뜨렸을 때 그릇에는 국물이 조금 남아있었고, 그 국물이 노현재의 점퍼에 다 쏟아졌다. 하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고 바로 점퍼를 벗어 한쪽에 던지며, 유월영에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그래서, 국수 더 있어?”유월영은 처음에 그가 누군가가 보낸 자객인 줄 알고 긴장했지만 다행히 아무 일도 없자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올 거면 그냥 오지 왜 이렇게 우리를 놀라게 하는 거예요? 한 비서와 지남 씨가 없어서 다행이에요. 그렇지 않았다면...”노현재는 자부심 가득하게 말했다.“그들이 있어도 날 이기지 못할걸.”“1대1로는 못 이기겠죠.”유월영이 강조했다.“하지만 우리가 바보도 아니고, 둘이 같이 덤비면 되잖아요. 두 명은 이길 수 없을걸요?”노현재는 잠시 생각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그건 그렇네.”현시우가 그들의 대화를 끊으며 물었다.“현재 씨는 어디서 왔어요?”노현재가 노래를 흥얼거리며 대답했다.“산골에서.”현시우는 그가 농담하는 줄 알고 굳어있던 얼굴에 한층 더 싸늘한 기운이 돌았다.노현재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도발적인 미소를 지었다.유월영은 급히 라는 손짓을 하며 현시우를 말렸다.“재현 씨가 농담하는 게 아니야. 그의 말이 맞아.”현시우는 잠시 멈추고 그녀를 바라보며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셋이 그렇게 어정쩡하게 대치하고 있는 게 좀 이상해서 유월영이 소파를 가리키며 앉아서 말하지 않겠냐고 제안했다.현시우는 움직이지 않았고 노현재는 바로 가서 소파에 앉았다.그는 탁자 위에 놓인 큐브를 보자 무심코 집어 들었다. 그건 가장 쉬운 3단 큐브였고, 그는
노현재는 밤낮으로 쉬지 않고 달려온 터라 피곤하고 졸렸다. 그래서 남은 국수는 없고 먹으려면 다시 끓여야 한다고 하자 귀찮다고 느끼며 결국 잠을 자러 갔다.그는 긴 소파에 자리를 옮겨 베개를 하고는 바로 잠에 빠졌다.유월영은 위층으로 올라가 이불을 가져와 노현재에게 덮어주고 현시우에게 자리를 떠나자고 손짓했다.창문을 지나며 유월영이 물었다.“아까 여기서 뭘 보고 있었어?”현시우는 창문 아래 벽에 있는 긁힌 자국을 가리키며 말했다.“어릴 때 나는 딱 이 정도 키였어. 언제쯤 커서 창턱을 넘어 밖의 풍경을 볼 수 있을까 늘 궁금해했지.”그는 다시 지금의 창문 높이를 가리키며 말했다.“그런데 지금 보면 창틀이 이렇게 낮잖아.”유월영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이제 내가 아까 한 말이 이해되지? 이런 오래된 물건들을 보면 나도 모르게 부모님의 흔적을 느낄 수 있다는 말.”현시우는 다정하게 웃으며 대답했다.“맞아.”2층으로 새벽의 한 줄기 빛이 비쳐 들어왔다. 밤이 끝나고 마침내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다.멀리 용청에 있는 오성민도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그는 병원에 있는 한 간호사를 많은 돈으로 매수해 마침내 이승연의 진료 보고서를 손에 넣었다.진료 보고서의 첫 문장은 “‘밤 11시 32분, 환자의 이름을 부르자 환자가 응답함’이라는 내용이었다. 오성민은 순간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다음 줄에는 “새벽 2시 22분, 환자가 눈을 뜨고 머리를 좌우로 흔들 수 있으며, 상하로 고개를 끄덕일 수 있음. 열 손가락이 모두 움직이며 다리에는 힘이 없음”이라고 기록되어 있었다.오성민은 그 소식을 보고 걱정해야 할지 아니면 웃어야 할지 몰랐다.그는 그 당시 이승연이 담당하던 사건의 원고를 부추겨 법정에서 이승연을 공격하고 그녀의 아이를 유산시키라고 교사하였다. 하지만 일은 그의 예상을 빗나갔고 이승연은 머리를 계단에 부딪히면서 3년 동안이나 혼수상태에 빠졌다.그 3년 동안 오성민은 매번 신주시에 올 때마다 이승연을 보러 가고 싶었지만 이혁재가 그럴
유월영도 현시우와 같은 생각이었다.한세인은 바로 어떻게 해야 할지 알았다. “그 남자 오늘 하루 종일 몇 채의 별장 사이를 배회하고 있었는데, 아마도 그 배후와 만날 준비를 하고 있는 것 같아요.”“대낮에 만나는 건 눈에 너무 띄니까, 아마 오늘 밤에 만날 거야.” 노현재는 귤껍질을 벗기며 말했다. “그럼 내가 오늘 밤에 가볼게요.”유월영은 잠시 생각한 후 말했다.“나도 같이 갈게요.”노현재는 눈썹을 치켜세우며 말했다.“월영 씨도 가겠다고요? 안 그래도 되는데, 날 못 믿는 거예요?”“그게 아니라 일이 좀 재밌게 흘러가는 것 같아서요.”유월영은 기억을 더듬었다. 계향동에는 서른 채 정도의 별장이 있었고 모두 이름이 있는 부자들이 사는 집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그 납치법의 배후에 도대체 누가 있을지 궁금해졌다.”현시우도 말했다.“재미있다면 나도 갈게.”노현재가 비꼬듯이 말했다.“우리는 이건 뭐 범인 잡으러 가는 건지 워크샵을 하러 가는 건지 모르겠네.”유월영이 현시우를 보며 말했다.“나랑 현재 씨만 가도 돼. 시우 씨 몸이 안 좋잖아.”현시우는 억울하다는 듯이 말했다. “내 몸 그렇게 허약한 거 아니야. 의사도 내가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고 그저 조금만 주의하면 된다고 했어. 2, 3년이면 완전히 회복할 거라 했으니 난 이미 괜찮아.”노현재는 그를 놀리며 말했다. “그러게 말이에요. 월영 씨가 자꾸 현 대표님 몸이 안 좋다고 해서 진짜로 현 대표님 어디가 불구라도 된 것처럼 들리잖아요.”유월영은 지팡이로 그의 종아리를 툭 치며 말했다.“그만해요.”그제야 노현재는 귤 한 조각을 입에 넣고 조용해졌다.유월영은 현시우를 보며 말 속에 다른 뜻이 있는 것처럼 말했다. “이런 작전은 사람이 많으면 안 돼. 사람 많으면 오히려 경계할 거야.”현시우는 바로 알아차리고 말했다. “알았어. 그럼 조심해.”노현재는 유월영과 현시우를 번갈아 보며 그들의 관계가 정말 놀랍다는 생각이 들었다.둘 다 많은 말을 하지 않아도 눈빛
노현재는 즉시 망원경을 들어 그쪽을 보았다.둥근 렌즈 속에 분명히 연재준의 모습이 보였다.그는 신경 써서 변장하거나 모습을 감추려 하지 않았고 평상시처럼 흰 셔츠에 검은 정장 바지를 입고 긴 코트를 걸치고 있었다. 마치 식사 후 산책을 하러 나온 것처럼 자연스러웠다.하지만 방금 유월영이 말했듯이 그는 산 정상의 별장에 살지 않았다.게다가 한밤중에 산책을 한다고 해도 산 정상에 있는 사람이 산 중턱까지 내려올 이유는 없었다.망원경을 쥔 노현재의 손에 힘이 들어가고 얼굴에 남아있던 느긋한 표정은 사라지고 진지하게 얘기했다.“재준이 형은 그 운전기사의 배후일 리 없어요.”“어떻게 그렇게 확신해요?”그들은 오늘 밤 배후의 주모자를 잡기 위해 여기에 온 것이다. 그리고 마침 연재준이 그 장소에 나타난 이상 그를 의심하는 것이 이상할 이유는 없었다.노현재가 단호하게 말했다.“장담해요. 재준이 형이 월영 씨를 납치하라고 했거나 인신매매되게 했을 리가 절대 없어요.”유월영은 대꾸하지 않고 그저 망원경 너머의 연재준을 주시했다.연재준은 한 건물 아래에 서서 가만히 서 있었다. 가끔 손목시계를 확인하는 모습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유월영의 가슴이 쿵쿵거렸다그때 노현재가 갑자기 말했다.“젠장, 저놈 도망가려고 해요.”유월영이 연재준을 주시하느라 미처 알아채지 못한 사이 운전기사가 오토바이에 올라타더니 속도를 내며 산으로 향했다.유월영은 망원경을 내려놓고 짧은 시간 안에 상황을 빠르게 판단한 후 말했다.“따라가요!”노현재는 그녀의 말을 듣고 즉시 차를 몰아 그를 추격했다.그러나 산속으로 들어갈수록 길이 점점 좁아지고, 나무가 빽빽해지면서 결국 더 이상 차로는 갈 수 없게 되었다.노현재는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재빨리 후진하려 했다.하지만 이미 늦었다.차 뒤쪽에 갑자기 한 무리의 남자들이 나타나 몽둥이를 들고 차의 뒷유리를 세게 내리쳤다!차는 방탄차가 아니어서 한 번의 타격에 유리가 바로 금이 갔다.노현재는 차 뒤의 사람들을
연재준이 아무리 조준을 잘한다고 해도 놈들의 숫자는 너무 많아 당해낼 수 없었다.한 놈을 쓰러뜨리면 또 한 놈이 달려 나왔다.연재준은 유월영을 데리고 후퇴하다 큰 나무 뒤로 숨었다.두 사람은 함께 쭈그리고 앉아 나무 몸통을 방패 삼아 숨었고 그는 다시 화살을 쏘아 측면에서 노현재를 공격하려는 건달 하나를 맞췄다.팔에 화살이 꽂힌 건달은 비명을 지르기도 전에 노현재에게 발로 차여 나무에 부딪혔다.노현재는 뒤돌아 자신을 구해준 연재준과 시선이 마주쳤다. 오랜만에 다시 연재준을 만난 그의 마음도 복잡했다.“재준이 형...”“설마 두 사람만 온 거야?”연재준은 앞에 있는 유월영을 내려다보며 말했다.“두 명이 이렇게 무모하게 그냥 오다니. 빨리 죽고 싶어 환장했어?”그의 숨결이 바로 유월영의 목뒤에 닿았다. 유월영은 눈살을 찌푸리면서 팔꿈치로 그의 복부를 가격하고는 그의 품에서 벗어났다.유월영은 연재준을 보며 말했다.“연 대표도 우리가 여기 왜 왔는지 알고 있어요?”“운전기사 최광일 잡으러.”유월영은 곧바로 물었다.“그럼 연 대표님은요, 여기 왜 왔어요?”“당연히 나도 그놈 잡으러 왔지.”연재준의 눈동자는 밤보다도 더 어두웠다.“설마 그놈이 비밀리에 만나러 온 사람이 나라고 의심하는 건가?”유월영은 그런 의심을 한 적은 있었지만 이내 의심을 접었다.그녀는 모든 무턱대고 모든 걸 그를 의심하는 건 아니었다. 그가 사람을 사주해 자신을 납치할 이유는 없다고 유월영은 판단했다.그러나 연재준은 그녀의 의심을 두려워한 듯 서둘러 해명했다.“난 그 운전기사가 출소하기 전부터 주시하고 있었어. 그래서 그와 친한 수감 동기를 매수해 일부러 경찰이 이미 조우제의 시체를 찾았고 지금 조사 중이라고 흘렸지. 만약 조우제를 그들이 죽였다면 살인죄로 다시 10년을 더 복역해야 한다고 말이야.”“그가 4년 동안 감옥에서 지냈으니 더는 감옥 생활을 견디지 못할 거라고 나는 확신했어. 조우제를 누가 죽였든 그는 자신이 연루될까 두려워할 거고 틀림없이 움직일
유월영은 연재준의 말을 무시하고 지형을 살피며 뛰쳐나갈 시간을 재고 있었다.그러나 연재준은 그녀의 손을 잡은 채 하늘로 화살을 쏘아 올리려고 했고 그건 그와 그의 부하들이 약속한 신호였다.유월영은 바로 그의 팔을 힘껏 눌러 그 화살이 빗나가게 하여 신호를 보내지 못하게 했다.연재준은 영문을 알지 못한 채 그녀를 바라보았고 유월영은 살짝 미소 지으며 말했다.“연 대표님, 죽기 무서우면 혼자 숨어 있어요. 우리를 방해하지 말고.”연재준은 한순간에 그 의미를 깨달았다.“당신 일부러 사람을 데려오지 않은 거구나.”유월영은 바쁜 와중에도 연재준을 한 번 힐끗 보고 그가 이렇게 빨리 이해하자 약간 놀랐다.그러나 그녀는 아무 설명도 하지 않고,나무 뒤에서 뛰쳐나가 연속으로 화살 두 발을 쏘아 놈들의 시선을 끌었다. 그런 다음 일어나 숲속으로 달려갔다.놈들의 목표가 유월영인게 분명해졌다. 그녀가 달리면 그들도 쫓아왔다.유월영은 달리면서 뒤로 화살을 쏘았고 다시 화살집을 더듬었을 때 안이 텅 빈 걸 확인했다.놈들도 그녀의 상황을 금방 알아차리고, 큰 소리로 웃으며 말했다.“저년의 화살이 다 떨어졌다! 겁먹지 말고 쫓아!”유월영은 그들에게 쫓겨 절벽 끝으로 몰렸고 뒤에는 더 이상 발 디딜 곳이 없었다.노현재는 그녀 앞을 가로막고, 다가오는 놈들을 노려봤다. 아마도 두 사람이 이제 죽을 운명이라 생각했는지 그 운전기사 최광일이 드디어 두 사람 앞에 나타났다.그는 손전등으로 유월영을 비추고 희번덕거리며 웃었다.“아, 네년이구나. 기억나. 그때 우리가 돈을 받고 너를 잡으러 갔지. 조우제가 여자에 눈이 멀어 목숨을 잃었지만 상관없어. 그가 그때 즐기지 못한 걸 내가 대신 즐겨줄게!”노현재는 손등으로 입가의 피를 닦아내며 더욱 야만적으로 웃으며 말했다.“혀가 뽑혀 나가는 걸 본 적 있어? 한번 당해볼래?”운전기사는 노현재의 눈빛에 겁을 먹었는지 잠시 주춤거렸다.그러나 이내 그들이 막다른 길에 몰려 있고 도망갈 수 없다는 걸 확신하자 다시 히죽거렸다.
최광일이 너무 횡설수설하자 핸드폰 너머의 남자가 호통쳤다.“무슨 일인지 똑바로 말해봐!”최광일은 물을 몇 번이나 꿀꺽꿀꺽 삼킨 후에야 자초지종을 제대로 설명했다.상대방이 다 듣고 나서 물었다.“같이 뛰어내린 사람은 누구야?”최광일은 미쳐버릴 것처럼 소리쳤다.“몰라요! 나 그 사람 모른다고요! 이제 어쩌면 좋죠? 당신들이 여자만 잡으면 조우제의 죽음이 나랑 상관없다는 걸 증인을 서준다고 했잖아요. 근데 이제 사람까지 죽었으니 나 완전히 망했어요!”그러나 상대방은 여전히 침착하게 타일렀다.“그 여자가 자살한 거라며. 그러면 네 책임은 없어. 지금 어디야? 내가 주소를 하나 줄 테니 그쪽으로 와. 내가 사람을 찾아 해외로 빼돌려줄 테니 걱정 말고.”그 말을 듣고 나서야 최광일은 조금 안심한 듯 밤길을 달려 그가 말한 곳으로 향했다.상대방은 전화를 끊고 다른 사람에게 연락해 최광일의 말한 내용을 확인한 후 서재 문을 두드렸다.안에서 들어오라는 말이 들리자 그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변호사님.”오성민이 고개를 들며 물었다.“어떻게 됐나?”비서가 말했다.“유월영이 절벽에서 뛰어내렸다고 합니다.”오성민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절벽에서 뛰어내렸다고?”비서는 고개를 끄덕였다.“최광일한테 보낸 사람들한테도 확인해 봤는데 모두 그 여자가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걸 직접 봤다고 합니다. 아래는 끝이 보이지 않는 낭떠러지라 살아남을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오성민은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손에 쥔 만년필을 휙휙 돌렸다.그는 최광일에게 바람을 넣어 자기 부하로 삼은 것도 유월영을 낚기 위해서였으며 그를 이용해 의도치 않은 사고로 유월영을 죽게 만들어 이 골칫거리를 완전히 해결할 생각이었다.그러나 뜻밖에도 유월영 스스로 절벽에서 뛰어내려 죽어버린 것이다.“정말 죽었다면 수고를 덜었군. 하지만 죽음이 너무 갑작스러워.”비서는 생각에 잠기며 말했다.“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눈앞에서 직접 그 여자가 뛰어내리는 걸 봤습니다. 날개라도 달린 게 아니라면
오성민은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바로 흥원동으로 향했다.설이 지나고 신주시의 기온이 점차 따뜻해지고 있었다.오성민이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이혁재는 매일 오후 이승연을 휠체어에 태워 동네를 산책시키며 햇볕을 쬐었다.그는 오늘도 날씨가 좋아 이혁재가 이승연을 또 데리고 내려올 거라 확신했다.오성민은 그들의 집 앞에서 조용히 기다렸고 한참 후 마침내 이혁재가 휠체어를 밀고 나타났다.그는 바삐 벽 뒤로 몸을 숨겼다.그의 시야에는 휠체어에 앉아 있는 흰 원피를 입은 여자가 들어왔다. 이혁재는 휠체어를 밀며 천천히 산책로를 걸었고 가끔 몸을 숙여 그녀에게 다정하게 말을 건넸다.오성민은 사람을 불러 이혁재를 따돌릴 계획이었으나 그럴 필요 없어 보였다.이혁재가 고개를 숙이며 이승연에게 말했다.“너무 급히 내려와서 담요를 깜빡했네. 여보, 잠시만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여자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이혁재는 휠체어를 길가에 세워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방해되지 않도록 하고 바퀴에 잠금장치를 한 후 자리를 떠났다.오성민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달려갔다.“승연아!”이승연은 휠체어에 앉은 채 오성민에게 등을 돌리고 있었고 오성민은 그녀의 뒤에 서 있었다. 오랜만에 만나면서 마음이 두근거려 오성민은 선뜻 가까이 가지 못했다.“승연아, 나야. 날 기억하지?”이승연의 몸이 흠칫했지만 뒤돌아보지 않았다.오성민은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말했다.“네가 깨어났다는 걸 알고 계속 널 보러 오고 싶었어. 회복은 잘 되고 있어? 다리만 아직 회복되지 않은 거야?”이승연은 조용한 채 여전히 아무 움직임도 없었다.하지만 오성민은 그녀가 당장 도망가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목소리가 떨려왔다.“네가 아직 나에게 화가 나 있고 아직 나를 용서하지 않은 거라는 것도 알아. 그런데 승연아, 난 정말로 변했어. 지난 3년 동안 다른 여자를 만난 적 없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여전히 너란 걸 깨달았으니까.”“우리는 7년이라는 시간을 함께했어. 나는 네가 아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