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월영이 대답했다.“맞아. 대부분은 원래 집에 있던 물건들이야. 어떤 것들은 너무 오래되어 썩어버려서 전혀 쓸 수 없었어. 그래서 옛날 디자인대로 새로 주문 제작한 거야.”현시우의 목소리가 약간 무거워졌다.“그렇게까지 할 필요 없잖아. 인생무상 새옹지마라고 지난 일은 지나간 대로, 망가진 건 망가진 대로 두는 게 좋아. 억지로 남겨두면 슬픔만 더할 뿐이야.”유월영은 현시우의 그 말이 너무 냉정하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국수를 삶으면서 말했다.“내 생각은 좀 달라.”“난 사실 부모님이 아주 낯설어. 그분들의 성격, 성향, 심지어 키와 외모까지도 전혀 모르고 있어. 그저 다른 사람들한테서 단편적으로 들은 얘기밖에 없지. 아무리 다른 사람들이 우리 부모님이 대단하신 분들이라고 알려줘도 나의 마음에 와닿지 않아.”“하지만 이 집에는 우리 부모님이 살았던 흔적이 있어. 가끔 벽의 흠집이나 탁자 위의 흠집을 무심코 만지면 마치 그들의 체온을 느낄 수 있을 것만 같아.”“그래서 난 그것들을 보존하는 게 가치 있다고 생각해.”“그래.”현시우는 그 자리에서 조용히 듣고 나서야 대답했다. 그는 오늘 밤 유난히 말이 없었다.그는 다시 생각에 잠긴 듯 창가로 가서 잠시 생각하더니 몸을 낮춰 웅크렸다.국수는 금방 준비되었고 유월영은 두 그릇 담아서 식탁에 올려놓았다.현시우가 아직 창 아래에 웅크리고 있자 유월영은 그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 궁금해서 다가갔다.“뭘 그렇게 보고 있어...”픽.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방 안의 불이 갑자기 꺼졌다.유월영은 잠시 멈칫했다.“전기가 나갔나?”오래된 집이라 전압이 불안정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곧이어 방안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고 검은 그림자가 방안에 언뜻거렸다.유월영은 즉시 경계 태세를 갖추고 현시우를 바라봤다. 자연히 낌새를 알아차린 현시우도 앉은 채로 조용히 단도를 빼냈다.두 사람은 모두 소리를 내지 않고 주위를 살폈다.곧이어 식탁 쪽에서 인기척이 나자 유월영은 재빨리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밖에서 들
노현재는 소파 등받이를 잡고 바닥에서 일어섰다. 그는 완전히 도둑놈 같은 복장을 하고 있었다. 검은 옷에 검은 바지, 불빛이 없었다면 완벽하게 어둠 속에 녹아들었을 것이다.그는 일부러 여유를 부리며 투덜거렸다.“역시 상류 사회의 배운 사람들이군. 국수도 이렇게 조금 먹더라니. 당신 두 사람 양을 합쳐도 내 위를 채우기엔 모자란 것 같네.”현시우가 그를 쓰러뜨렸을 때 그릇에는 국물이 조금 남아있었고, 그 국물이 노현재의 점퍼에 다 쏟아졌다. 하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고 바로 점퍼를 벗어 한쪽에 던지며, 유월영에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그래서, 국수 더 있어?”유월영은 처음에 그가 누군가가 보낸 자객인 줄 알고 긴장했지만 다행히 아무 일도 없자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올 거면 그냥 오지 왜 이렇게 우리를 놀라게 하는 거예요? 한 비서와 지남 씨가 없어서 다행이에요. 그렇지 않았다면...”노현재는 자부심 가득하게 말했다.“그들이 있어도 날 이기지 못할걸.”“1대1로는 못 이기겠죠.”유월영이 강조했다.“하지만 우리가 바보도 아니고, 둘이 같이 덤비면 되잖아요. 두 명은 이길 수 없을걸요?”노현재는 잠시 생각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그건 그렇네.”현시우가 그들의 대화를 끊으며 물었다.“현재 씨는 어디서 왔어요?”노현재가 노래를 흥얼거리며 대답했다.“산골에서.”현시우는 그가 농담하는 줄 알고 굳어있던 얼굴에 한층 더 싸늘한 기운이 돌았다.노현재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도발적인 미소를 지었다.유월영은 급히 라는 손짓을 하며 현시우를 말렸다.“재현 씨가 농담하는 게 아니야. 그의 말이 맞아.”현시우는 잠시 멈추고 그녀를 바라보며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셋이 그렇게 어정쩡하게 대치하고 있는 게 좀 이상해서 유월영이 소파를 가리키며 앉아서 말하지 않겠냐고 제안했다.현시우는 움직이지 않았고 노현재는 바로 가서 소파에 앉았다.그는 탁자 위에 놓인 큐브를 보자 무심코 집어 들었다. 그건 가장 쉬운 3단 큐브였고, 그는
노현재는 밤낮으로 쉬지 않고 달려온 터라 피곤하고 졸렸다. 그래서 남은 국수는 없고 먹으려면 다시 끓여야 한다고 하자 귀찮다고 느끼며 결국 잠을 자러 갔다.그는 긴 소파에 자리를 옮겨 베개를 하고는 바로 잠에 빠졌다.유월영은 위층으로 올라가 이불을 가져와 노현재에게 덮어주고 현시우에게 자리를 떠나자고 손짓했다.창문을 지나며 유월영이 물었다.“아까 여기서 뭘 보고 있었어?”현시우는 창문 아래 벽에 있는 긁힌 자국을 가리키며 말했다.“어릴 때 나는 딱 이 정도 키였어. 언제쯤 커서 창턱을 넘어 밖의 풍경을 볼 수 있을까 늘 궁금해했지.”그는 다시 지금의 창문 높이를 가리키며 말했다.“그런데 지금 보면 창틀이 이렇게 낮잖아.”유월영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이제 내가 아까 한 말이 이해되지? 이런 오래된 물건들을 보면 나도 모르게 부모님의 흔적을 느낄 수 있다는 말.”현시우는 다정하게 웃으며 대답했다.“맞아.”2층으로 새벽의 한 줄기 빛이 비쳐 들어왔다. 밤이 끝나고 마침내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다.멀리 용청에 있는 오성민도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그는 병원에 있는 한 간호사를 많은 돈으로 매수해 마침내 이승연의 진료 보고서를 손에 넣었다.진료 보고서의 첫 문장은 “‘밤 11시 32분, 환자의 이름을 부르자 환자가 응답함’이라는 내용이었다. 오성민은 순간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다음 줄에는 “새벽 2시 22분, 환자가 눈을 뜨고 머리를 좌우로 흔들 수 있으며, 상하로 고개를 끄덕일 수 있음. 열 손가락이 모두 움직이며 다리에는 힘이 없음”이라고 기록되어 있었다.오성민은 그 소식을 보고 걱정해야 할지 아니면 웃어야 할지 몰랐다.그는 그 당시 이승연이 담당하던 사건의 원고를 부추겨 법정에서 이승연을 공격하고 그녀의 아이를 유산시키라고 교사하였다. 하지만 일은 그의 예상을 빗나갔고 이승연은 머리를 계단에 부딪히면서 3년 동안이나 혼수상태에 빠졌다.그 3년 동안 오성민은 매번 신주시에 올 때마다 이승연을 보러 가고 싶었지만 이혁재가 그럴
유월영도 현시우와 같은 생각이었다.한세인은 바로 어떻게 해야 할지 알았다. “그 남자 오늘 하루 종일 몇 채의 별장 사이를 배회하고 있었는데, 아마도 그 배후와 만날 준비를 하고 있는 것 같아요.”“대낮에 만나는 건 눈에 너무 띄니까, 아마 오늘 밤에 만날 거야.” 노현재는 귤껍질을 벗기며 말했다. “그럼 내가 오늘 밤에 가볼게요.”유월영은 잠시 생각한 후 말했다.“나도 같이 갈게요.”노현재는 눈썹을 치켜세우며 말했다.“월영 씨도 가겠다고요? 안 그래도 되는데, 날 못 믿는 거예요?”“그게 아니라 일이 좀 재밌게 흘러가는 것 같아서요.”유월영은 기억을 더듬었다. 계향동에는 서른 채 정도의 별장이 있었고 모두 이름이 있는 부자들이 사는 집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그 납치법의 배후에 도대체 누가 있을지 궁금해졌다.”현시우도 말했다.“재미있다면 나도 갈게.”노현재가 비꼬듯이 말했다.“우리는 이건 뭐 범인 잡으러 가는 건지 워크샵을 하러 가는 건지 모르겠네.”유월영이 현시우를 보며 말했다.“나랑 현재 씨만 가도 돼. 시우 씨 몸이 안 좋잖아.”현시우는 억울하다는 듯이 말했다. “내 몸 그렇게 허약한 거 아니야. 의사도 내가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고 그저 조금만 주의하면 된다고 했어. 2, 3년이면 완전히 회복할 거라 했으니 난 이미 괜찮아.”노현재는 그를 놀리며 말했다. “그러게 말이에요. 월영 씨가 자꾸 현 대표님 몸이 안 좋다고 해서 진짜로 현 대표님 어디가 불구라도 된 것처럼 들리잖아요.”유월영은 지팡이로 그의 종아리를 툭 치며 말했다.“그만해요.”그제야 노현재는 귤 한 조각을 입에 넣고 조용해졌다.유월영은 현시우를 보며 말 속에 다른 뜻이 있는 것처럼 말했다. “이런 작전은 사람이 많으면 안 돼. 사람 많으면 오히려 경계할 거야.”현시우는 바로 알아차리고 말했다. “알았어. 그럼 조심해.”노현재는 유월영과 현시우를 번갈아 보며 그들의 관계가 정말 놀랍다는 생각이 들었다.둘 다 많은 말을 하지 않아도 눈빛
노현재는 즉시 망원경을 들어 그쪽을 보았다.둥근 렌즈 속에 분명히 연재준의 모습이 보였다.그는 신경 써서 변장하거나 모습을 감추려 하지 않았고 평상시처럼 흰 셔츠에 검은 정장 바지를 입고 긴 코트를 걸치고 있었다. 마치 식사 후 산책을 하러 나온 것처럼 자연스러웠다.하지만 방금 유월영이 말했듯이 그는 산 정상의 별장에 살지 않았다.게다가 한밤중에 산책을 한다고 해도 산 정상에 있는 사람이 산 중턱까지 내려올 이유는 없었다.망원경을 쥔 노현재의 손에 힘이 들어가고 얼굴에 남아있던 느긋한 표정은 사라지고 진지하게 얘기했다.“재준이 형은 그 운전기사의 배후일 리 없어요.”“어떻게 그렇게 확신해요?”그들은 오늘 밤 배후의 주모자를 잡기 위해 여기에 온 것이다. 그리고 마침 연재준이 그 장소에 나타난 이상 그를 의심하는 것이 이상할 이유는 없었다.노현재가 단호하게 말했다.“장담해요. 재준이 형이 월영 씨를 납치하라고 했거나 인신매매되게 했을 리가 절대 없어요.”유월영은 대꾸하지 않고 그저 망원경 너머의 연재준을 주시했다.연재준은 한 건물 아래에 서서 가만히 서 있었다. 가끔 손목시계를 확인하는 모습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유월영의 가슴이 쿵쿵거렸다그때 노현재가 갑자기 말했다.“젠장, 저놈 도망가려고 해요.”유월영이 연재준을 주시하느라 미처 알아채지 못한 사이 운전기사가 오토바이에 올라타더니 속도를 내며 산으로 향했다.유월영은 망원경을 내려놓고 짧은 시간 안에 상황을 빠르게 판단한 후 말했다.“따라가요!”노현재는 그녀의 말을 듣고 즉시 차를 몰아 그를 추격했다.그러나 산속으로 들어갈수록 길이 점점 좁아지고, 나무가 빽빽해지면서 결국 더 이상 차로는 갈 수 없게 되었다.노현재는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재빨리 후진하려 했다.하지만 이미 늦었다.차 뒤쪽에 갑자기 한 무리의 남자들이 나타나 몽둥이를 들고 차의 뒷유리를 세게 내리쳤다!차는 방탄차가 아니어서 한 번의 타격에 유리가 바로 금이 갔다.노현재는 차 뒤의 사람들을
연재준이 아무리 조준을 잘한다고 해도 놈들의 숫자는 너무 많아 당해낼 수 없었다.한 놈을 쓰러뜨리면 또 한 놈이 달려 나왔다.연재준은 유월영을 데리고 후퇴하다 큰 나무 뒤로 숨었다.두 사람은 함께 쭈그리고 앉아 나무 몸통을 방패 삼아 숨었고 그는 다시 화살을 쏘아 측면에서 노현재를 공격하려는 건달 하나를 맞췄다.팔에 화살이 꽂힌 건달은 비명을 지르기도 전에 노현재에게 발로 차여 나무에 부딪혔다.노현재는 뒤돌아 자신을 구해준 연재준과 시선이 마주쳤다. 오랜만에 다시 연재준을 만난 그의 마음도 복잡했다.“재준이 형...”“설마 두 사람만 온 거야?”연재준은 앞에 있는 유월영을 내려다보며 말했다.“두 명이 이렇게 무모하게 그냥 오다니. 빨리 죽고 싶어 환장했어?”그의 숨결이 바로 유월영의 목뒤에 닿았다. 유월영은 눈살을 찌푸리면서 팔꿈치로 그의 복부를 가격하고는 그의 품에서 벗어났다.유월영은 연재준을 보며 말했다.“연 대표도 우리가 여기 왜 왔는지 알고 있어요?”“운전기사 최광일 잡으러.”유월영은 곧바로 물었다.“그럼 연 대표님은요, 여기 왜 왔어요?”“당연히 나도 그놈 잡으러 왔지.”연재준의 눈동자는 밤보다도 더 어두웠다.“설마 그놈이 비밀리에 만나러 온 사람이 나라고 의심하는 건가?”유월영은 그런 의심을 한 적은 있었지만 이내 의심을 접었다.그녀는 모든 무턱대고 모든 걸 그를 의심하는 건 아니었다. 그가 사람을 사주해 자신을 납치할 이유는 없다고 유월영은 판단했다.그러나 연재준은 그녀의 의심을 두려워한 듯 서둘러 해명했다.“난 그 운전기사가 출소하기 전부터 주시하고 있었어. 그래서 그와 친한 수감 동기를 매수해 일부러 경찰이 이미 조우제의 시체를 찾았고 지금 조사 중이라고 흘렸지. 만약 조우제를 그들이 죽였다면 살인죄로 다시 10년을 더 복역해야 한다고 말이야.”“그가 4년 동안 감옥에서 지냈으니 더는 감옥 생활을 견디지 못할 거라고 나는 확신했어. 조우제를 누가 죽였든 그는 자신이 연루될까 두려워할 거고 틀림없이 움직일
유월영은 연재준의 말을 무시하고 지형을 살피며 뛰쳐나갈 시간을 재고 있었다.그러나 연재준은 그녀의 손을 잡은 채 하늘로 화살을 쏘아 올리려고 했고 그건 그와 그의 부하들이 약속한 신호였다.유월영은 바로 그의 팔을 힘껏 눌러 그 화살이 빗나가게 하여 신호를 보내지 못하게 했다.연재준은 영문을 알지 못한 채 그녀를 바라보았고 유월영은 살짝 미소 지으며 말했다.“연 대표님, 죽기 무서우면 혼자 숨어 있어요. 우리를 방해하지 말고.”연재준은 한순간에 그 의미를 깨달았다.“당신 일부러 사람을 데려오지 않은 거구나.”유월영은 바쁜 와중에도 연재준을 한 번 힐끗 보고 그가 이렇게 빨리 이해하자 약간 놀랐다.그러나 그녀는 아무 설명도 하지 않고,나무 뒤에서 뛰쳐나가 연속으로 화살 두 발을 쏘아 놈들의 시선을 끌었다. 그런 다음 일어나 숲속으로 달려갔다.놈들의 목표가 유월영인게 분명해졌다. 그녀가 달리면 그들도 쫓아왔다.유월영은 달리면서 뒤로 화살을 쏘았고 다시 화살집을 더듬었을 때 안이 텅 빈 걸 확인했다.놈들도 그녀의 상황을 금방 알아차리고, 큰 소리로 웃으며 말했다.“저년의 화살이 다 떨어졌다! 겁먹지 말고 쫓아!”유월영은 그들에게 쫓겨 절벽 끝으로 몰렸고 뒤에는 더 이상 발 디딜 곳이 없었다.노현재는 그녀 앞을 가로막고, 다가오는 놈들을 노려봤다. 아마도 두 사람이 이제 죽을 운명이라 생각했는지 그 운전기사 최광일이 드디어 두 사람 앞에 나타났다.그는 손전등으로 유월영을 비추고 희번덕거리며 웃었다.“아, 네년이구나. 기억나. 그때 우리가 돈을 받고 너를 잡으러 갔지. 조우제가 여자에 눈이 멀어 목숨을 잃었지만 상관없어. 그가 그때 즐기지 못한 걸 내가 대신 즐겨줄게!”노현재는 손등으로 입가의 피를 닦아내며 더욱 야만적으로 웃으며 말했다.“혀가 뽑혀 나가는 걸 본 적 있어? 한번 당해볼래?”운전기사는 노현재의 눈빛에 겁을 먹었는지 잠시 주춤거렸다.그러나 이내 그들이 막다른 길에 몰려 있고 도망갈 수 없다는 걸 확신하자 다시 히죽거렸다.
최광일이 너무 횡설수설하자 핸드폰 너머의 남자가 호통쳤다.“무슨 일인지 똑바로 말해봐!”최광일은 물을 몇 번이나 꿀꺽꿀꺽 삼킨 후에야 자초지종을 제대로 설명했다.상대방이 다 듣고 나서 물었다.“같이 뛰어내린 사람은 누구야?”최광일은 미쳐버릴 것처럼 소리쳤다.“몰라요! 나 그 사람 모른다고요! 이제 어쩌면 좋죠? 당신들이 여자만 잡으면 조우제의 죽음이 나랑 상관없다는 걸 증인을 서준다고 했잖아요. 근데 이제 사람까지 죽었으니 나 완전히 망했어요!”그러나 상대방은 여전히 침착하게 타일렀다.“그 여자가 자살한 거라며. 그러면 네 책임은 없어. 지금 어디야? 내가 주소를 하나 줄 테니 그쪽으로 와. 내가 사람을 찾아 해외로 빼돌려줄 테니 걱정 말고.”그 말을 듣고 나서야 최광일은 조금 안심한 듯 밤길을 달려 그가 말한 곳으로 향했다.상대방은 전화를 끊고 다른 사람에게 연락해 최광일의 말한 내용을 확인한 후 서재 문을 두드렸다.안에서 들어오라는 말이 들리자 그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변호사님.”오성민이 고개를 들며 물었다.“어떻게 됐나?”비서가 말했다.“유월영이 절벽에서 뛰어내렸다고 합니다.”오성민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절벽에서 뛰어내렸다고?”비서는 고개를 끄덕였다.“최광일한테 보낸 사람들한테도 확인해 봤는데 모두 그 여자가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걸 직접 봤다고 합니다. 아래는 끝이 보이지 않는 낭떠러지라 살아남을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오성민은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손에 쥔 만년필을 휙휙 돌렸다.그는 최광일에게 바람을 넣어 자기 부하로 삼은 것도 유월영을 낚기 위해서였으며 그를 이용해 의도치 않은 사고로 유월영을 죽게 만들어 이 골칫거리를 완전히 해결할 생각이었다.그러나 뜻밖에도 유월영 스스로 절벽에서 뛰어내려 죽어버린 것이다.“정말 죽었다면 수고를 덜었군. 하지만 죽음이 너무 갑작스러워.”비서는 생각에 잠기며 말했다.“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눈앞에서 직접 그 여자가 뛰어내리는 걸 봤습니다. 날개라도 달린 게 아니라면
“할 수 있지, 할 수 있어. 연이가 원하는 거라면 아빠는 꼭 해낼 거야.”윤영훈은 목이 메어 기쁨에 눈물을 흘렸다.주월향은 딸에게 그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았고 오히려 아빠가 누군지 알려주며 7년 동안 떨어져 있었음에도 딸이 그를 낯설게 느끼지 않도록 해줬다.‘이 세상에 이런 여자가 또 어디 있을까?’그러나 윤영훈은 주월향의 이런 행동이 자신을 받아들인다는 뜻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집안에 들어서자 연이가 활기차게 떠들었다.“엄마!”주월향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연이야, 배고프지? 어제 배추전 먹고 싶다고 했잖아? 방금 만들어서 아직 따뜻해. 간식이니까 너무 많이 먹으면 안 돼, 알았지?”아이가 환호하며 말했다.“고마워요, 엄마!”주월향은 윤영훈을 힐끗 보며 말했다.“당신도 먹어볼래요?”윤영훈은 그녀 쪽으로 다가가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월향아, 미안해...”“나한테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아도 돼요.”주월향이 그의 말을 끊었다.그리고 딸을 한 번 보더니 아이가 듣지 못하도록 마당으로 걸어 나갔다.윤영훈도 그녀를 따라 나갔다.주월향은 식물에 물을 주며 담담하게 말했다.“7년 전, 영훈 씨가 감옥에 가기 전에 우리 모녀를 위해 모든 걸 준비해 줬어요. 돈, 집, 차까지 모두 마련해줬죠. 게다가 내가 당신을 한 번 배신하기도 했으니 당신에게 상처 준 대가로 다 갚았다고 볼 수 있겠죠. 우리는 7년 전에 이미 정리됐어요. 그러니 서로에게 빚진 건 없어요.”윤영훈은 숙연한 마음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주월향이 돌아서서 그를 마주 보며 말했다.“이 7년 동안 내가 감옥 면회를 가지 않은 이유는 더 이상 먼저 다가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당신이 오늘 출소한다는 건 알고 있었고 그래서 한 번 더 기회를 주기로 했죠. 당신이 날 찾으러 오지 않았다면 그냥 이대로 끝났을 거예요.”“하지만 영훈 씨는 나를 찾아왔어요. 그래서 지금 당신한테 물어보고 싶어요. 여기 남을 건가요?”“...내가 여기 남아
“됐어요, 사촌 오빠, 얼른 가세요. 곧 비가 올 것 같아요. 이모와 이모부께는 제가 잘 지낸다고 전해주세요. 여기서 부족한 것 하나도 없으니 걱정하지 마시라고요.”‘사촌 오빠?’남자는 주월향의 남편이 아니라 사촌 오빠였다.거의 죽어가던 윤영훈의 마음이 한순간에 되살아났다.그는 참지 못하고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뻔했다.그러나 그 사촌 오빠가 집을 나서자 윤영훈은 재빨리 수박 덩굴 아래로 몸을 숨겼다.물론 그 남자가 남편이 아니라고 해서 주월향에게 남편이 없다는 뜻은 아니었다.하지만 이 반전만으로도 그는 잠시나마 안도감을 느꼈다.그때 머리 위의 수박잎이 갑자기 누군가에 의해 젖혀졌다.윤영훈은 순간 얼어붙었다. 본능적으로 얼굴을 가리고 도망치려 했지만 뒤에서 들려오는 청아하고 차분한 목소리에 그의 발걸음이 멈췄다.“내가 아까 한 말 못 들었어요? 곧 비가 올 것 같으니 빨리 벼부터 거두는 걸 도와줘요. 비 맞으면 이번 농사는 다 망해요.”윤영훈은 그 자리에 꼼짝 않고 서 있었다.주월향의 말투는 너무나도 자연스러워 마치 그가 7년 동안 감옥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잠깐 외출했다가 돌아온 사람처럼 들렸다.천천히 돌아선 윤영훈을 주월향은 담담하게 바라보며 갈퀴를 건넸다.“모두 한데 모아주세요. 내가 자루를 가져올게요.”윤영훈은 멍하니 그녀를 따라 집으로 들어갔다.그는 감옥에서도 농사일을 해봤기에 이런 일이 낯설지 않았다.하지만 일을 하다가도 자꾸 주월향의 눈치를 살폈고 그녀의 의도를 이해하려 애썼다.주월향이 입을 열었다.“지금 나는 온라인에서 요리 블로거로 활동하고 있어요. 팔로워가 몇백만 명은 되죠. 영상 편집이 아직 안 끝났으니 벼를 다 거두고 나면 이 앞에 초등학교에 가서 연이를 좀 데려와 주세요.”“지안 초등학교가 어디 있는지 알죠? 몰라도 괜찮아요. 핸드폰 내비게이션 켜고 찾아가면 돼요.”윤영훈이 여전히 멍하니 있자 주월향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내 말 들었어요?”“들었어...”주월향은 거둔 벼를 집 안으로 가져가며
윤영훈은 10년 형을 선고받았다.모범수로 인정받아 감형된 덕분에 실제 복역 기간은 7년 10개월이었다.출소하는 날, 그를 마중 나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감옥 문 앞에 서서 바라본 세상은 이미 많이 변해 있었다. 그의 모습도 더 이상 과거의 의기양양하고 자유분방했던 그 사람이 아니었다.윤영훈은 감옥 문 앞에서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출소를 반년 앞두고 그는 출소 후의 삶을 계획하려 애썼지만 막상 그 순간이 닥치자 머릿속은 텅 비어버렸다.윤씨 가문은 이미 몰락한 지 오래였다.2년 전, 그의 아버지는 감옥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교도관들의 배려로 그는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석할 수 있었다.그곳에서 그는 가난에 시달리는 친척들을 보았다.가문의 보호막 없이 근근이 살아가는 그들에게 윤영훈은 짐이 되고 싶지 않았다.그의 사촌 서정희는 출소 후 찾아오라 했지만 그녀에게도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윤영훈이 가장 만나고 싶었던 사람은 주월향이었다.그녀와 딸 연이를 보고 싶었지만 갑작스러운 등장이 그녀에게 폐를 끼칠까 두려웠다.게다가 그녀는 이미 자신을 만나고 싶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재판을 받던 날에도 주월향은 법정에 나오지 않았다.7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으니 그녀는 분명 새로운 삶을 시작했을 것이고 어쩌면 그녀 곁에는 그녀를 사랑하는 남자가 있을지도 모른다.남자가 없더라도 모녀는 안정적이고 풍족한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윤영훈은 감옥에 가기 전 그녀에게 충분한 재산을 남겼고 그녀가 이를 잘 활용했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그런 상황에서 자신의 등장은 적절하지 않았다.하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이 비열하다고 느꼈다.주월향을 한 번이라도 보고 싶다는 욕망을 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멀리서 그녀를 한 번 보기만 해도 만족하겠다고 다짐한 윤영훈은 감옥에서 일하며 모은 돈으로 기차표를 사서 그녀의 고향으로 향했다.그곳은 산과 물이 어우러진 작은 마을이었다.기차역에서 그녀의 집까지는 버스로 2시간
“그래도 돼?”강수영은 신현우가 미쳤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그는 정말로 그녀의 애인이 되었고 강수영은 반년 넘게 그와 몰래 관계를 이어갔다.강수영은 일부러 자신이 이미 남편과 이혼했다는 사실을 숨기고 매주 몰래 찾아오는 신현우를 지켜보며 즐거워했다.가끔 갑자기 여행을 떠나고 싶어지면 그녀는 짐을 싸서 바로 떠났다.그럴 때마다 신현우는 알림도 받지 못한 채 허탕을 치고 돌아가야 했다.친구들은 강수영이 신현우를 가지고 노는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녀는 이 상황을 즐길 뿐이었다.현재 신현우의 눈에는 질투와 시기가 가득 차 있었고 늘 당당하던 그의 얼굴에는 답답함과 우울함이 서려 있었다.강수영은 자신이 그의 곁에서 겪었던 모든 억울함과 상처를 이렇게 풀고 싶었다.이번 주, 강수영은 영국으로 떠날 예정이었고 신현우는 그녀가 남편을 만나러 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겉으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날 밤 강수영이 화장실에 가려고 일어났을 때 그는 거실에서 홀로 술병을 비우고 있었다.엉망이 된 그의 모습은 평소와 달리 초라해 보였고 강수영은 저도 모르게 마음이 조금 약해졌다.그녀는 오랜 시간 방치해둔 녹음기를 꺼냈다. 그건 예전에 신연우가 건넨, 신현우의 음성이 담긴 파일이었다.그녀는 당시 결혼 생활에 전념하고 싶어 듣지 않았던 녹음을 재생했다.녹음기에서는 술에 취한 신현우의 흐릿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그것은 강수영의 결혼식 날, 신현우가 취한 상태에서 남긴 말들이었다.신연우가 그를 말렸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수영이가 내 앞을 그렇게 지나갔어. 남편 팔짱을 끼고 날 쳐다보지도 않았어.”“내가 정말로 그녀를 신경 쓰지 않고,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을까? 아니야, 난 수영이를 좋아했어. 다만 그녀가 집으로 돌아가길 바랐을 뿐이야.”“나 때문에 부모님과 친구들과도 관계를 끊었잖아. 너무 어리석었어. 나는 그런 가치를 줄 만한 사람이 아닌데...”“다 내 잘못이야. 처음부터 더 깊은 관계로 나아가지 않았더라면 수영이가 이렇게 집착하지
두 사람은 서쪽으로 스위스 알프스를 찾아가 산맥의 낭만을 만끽하며 자연 보호구역에서 아름다운 야생동물들을 만났다.북쪽으로는 핀란드의 로바니에미와 캐나다의 퀘벡으로 향해 겨울 축제와 북유럽의 신비로운 매력을 경험하고 끝없이 펼쳐진 설원과 오로라의 장관을 즐겼다.그러던 중, 한 여행지에서 강수영은 신연우를 우연히 마주쳤다.오래된 친구라 할 수 있는 사이였기에 두 사람은 함께 저녁을 먹었다.식사 후, 신연우는 그녀에게 녹음 파일을 건네며 말했다.“이 안에는 우리 형의 음성이 들어 있어. 들을지 말지는 네가 결정해. 하지만 듣는다면 네 결혼 생활에 영향을 줄 수도 있어.”그는 이어 덧붙였다.“형이 요 몇 달 동안 상태가 많이 안 좋았어. 큰 병을 앓아 체중이 많이 빠졌고, 회사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어. 최근에서야 조금 회복됐지.”강수영은 특별히 반응하지 않고 녹음 파일을 받았지만 끝내 듣지 않았다.신혼여행을 마치고 부부는 지성으로 돌아와 결혼 후의 삶을 시작했다. 하지만 2년도 채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이혼 절차를 밟게 되었다.두 사람 사이에는 큰 갈등이 없었다. 강수영의 남편은 여전히 훌륭한 사람이었고 이혼의 원인은 문화적 차이와 생활 습관의 차이였다.한 사람은 한국식 사고방식으로, 다른 한 사람은 서양식 사고방식으로 자라며 서로 적응하려고 노력했지만 끝내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그들은 평화롭게 헤어졌고 이혼 후에도 좋은 친구로 남았다.부모의 잔소리를 피하기 위해 이혼 사실을 비밀로 하기로 합의한 후 강수영은 다시 전 세계를 여행하기 시작했다.그러다 각 나라, 각 도시에서 신현우를 계속 ‘우연히’ 마주치게 되었다.세 번째 만남에서는 더 이상 참지 못한 강수영이 그를 조롱했다.“신 대표님, 이렇게 한가하신 줄 몰랐네요. 왜 자꾸 저를 따라다니시는 거죠?”“따라다닌 게 아니야. 우연일 뿐이야.”“우연이 이렇게 자주 겹칠 리가 있나요? 제가 바보인 줄 아세요?”차가운 미소를 띤 강수영에게 신현우는 화제를 돌렸다.“넌 왜 여기저기 여행
‘소은혜’에서 다시 ‘강수영’으로 돌아온 후, 강수영은 그 차가운 남자와 더는 아무런 관계도 없을 것이라고 믿었다.한눈에 반했던 감정은 결국 그녀의 인생을 망쳤고 다시는 그 남자와 얽히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그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했다. 파혼하고 집을 떠나 이름까지 바꾼 채 명분 없이 그의 곁을 지켰지만 세상 사람들은 그녀를 부끄러움을 모르는 여자라며 손가락질했다.그러는 동안 그는 가문 배경이 잘 맞는 귀한 집 아가씨와 결혼 준비를 하고 있었다.그녀는 스스로를 명문가의 딸에서 천한 첩으로 전락시켰지만 그에게선 차가운 시선만 돌아왔다. 그녀가 바친 모든 것을 알면서도 그는 온기 한 줌 나눠주지 않았다.강수영은 결국 깨달았다. 그 감정을 고집한 자신이 문제였다는 것을.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야 했다.그녀는 강씨 집안의 딸로 돌아왔고 그는 여전히 신씨 가문의 장남으로 남아 있었다.부모님은 그녀를 위해 맞선을 주선했고 두 가문 모두에게 이로운 자리였다.강수영은 더 이상 부모님을 실망하게 하고 싶지 않아 기쁜 마음으로 맞선에 응했다.맞선 상대는 영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훌륭한 조건을 갖춘 사람이었다. 나이도 비슷했고 배경도 잘 맞았다.며칠간 그와 시간을 보내본 그녀는 그가 괜찮다고 느꼈다. 특히, 그가 그녀에게 첫눈에 반했다고 고백했을 때는 묘한 감정이 들었다.누군가를 좋아하는 것은 너무나 고된 일이었기에 이번에는 누군가가 자신을 좋아해 주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알고 싶었다.그렇게 두 사람은 3개월간 교제했고 큰 문제 없이 잘 맞았다. 비록 심장이 크게 뛰는 설렘은 없었지만 세상 대부분의 결혼이 ‘적당함’을 기반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그녀도 알고 있었다.그 기준에서 본다면 그와의 결혼은 충분히 합리적이었다.결국 두 사람은 약혼했고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그러나 결혼식 당일, 초대받지 않은 불청객이 나타났다. 바로 신현우였다.그의 등장에 강수영은 잠시 굳어졌지만 이내 미소를 띠며 신랑과 함께 술잔을 들었다.
방금 중성화 수술을 받은 고양이는 축 늘어져 있었다.이승연은 고양이가 우울증에 걸릴까 봐 걱정되어 이혁재에게 맡기기로 했다.“경험 있는 네가 좀 맡아줘.”이혁재는 황당했다.“내가 무슨 경험이 있다고 그래!”이승연은 그를 잠시 바라보더니 담담하게 말했다.“처지가 비슷하잖아.”화가 난 이혁재는 이승연을 들어 신발장 위에 올려놓고 곱게 바른 립스틱을 번지게 했다.“전혀 비슷하지 않거든!”이혁재의 사무실.이혁재와 연재준은 일 얘기를 하고 있었고 두 아이는 옆에서 놀고 있었다.그때 이혁재가 무심코 고양이에게 한마디를 건넸다.“호두야, 누나를 잘 돌봐야 해.”기어다니기 시작한 윤아는 갑자기 호두의 꼬리를 잡았다.호두는 성격이 온순하고 사람을 좋아했지만 꼬리만큼은 예외였다. 그런데도 이번에는 이혁재의 말 때문인지 꼬리를 잡힌 채로 억울한 듯 야옹 소리만 냈다.윤아는 깔깔 웃으며 꼬리 끝을 입에 넣으려 했고 그제야 호두는 꼬리를 빼내더니 아기에게 돌아서서 야옹 소리를 내며 경고했다.마치 “입에 넣으면 안 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그러자 윤아는 호두를 향해 돌진하며 그를 덮쳤다.두 아빠가 일을 마치고 아이들을 찾으러 갔을 때 윤아는 카펫 위에서 잠들어 있었고 호두는 듬직한 몸을 베개 삼아 윤아를 받치고 있었다.그 동화 같은 장면에 연재준과 이혁재는 저도 모르게 아빠 미소를 지었다.“고양이가 어린이를 알아본다더니 진짜인가 봐.”퇴근 시간이 되어 이혁재는 호두를 데리고 이승연의 사무실로 향했다.이승연은 호두를 품에 안고 기뻐하며 입을 맞췄고 이어 호두가 이혁재에게도 뽀뽀하도록 했다.갑작스러운 입맞춤에 이혁재는 고양이 털을 한가득 삼키고 서둘러 뱉어냈다.“퉤퉤퉤.”그 순간, 호두도 갑자기 토하기 시작했다. 단순히 흉내를 낸 게 아니라 실제로 무언가를 토해냈다.이혁재는 어이가 없어 발끈했고 이승연은 웃음을 참지 못해 의자에 쓰러지듯 폭소했다.사실 고양이는 털을 핥으며 스스로를 청소하는 습성 때문에 위에 털 뭉치가 생겨 종종 토하곤
작은 고양이는 케이지 구석에 웅크리고 있었고 치료로 인해 털이 대부분 깎인 채 볼품없는 모습이었다.이혁재가 싫은 소리를 내자 새끼 고양이는 힘겹게 눈을 떴다. 그리고 이승연을 알아본 듯 비틀거리며 케이지 가장자리로 다가와 그녀를 향해 야옹 울었다.이승연은 손가락을 내밀어 고양이를 살짝 만졌다. 그러자 고양이는 꿈틀거리며 그녀의 손가락에 머리를 가져다 대었다.그녀는 미소 지었고 이를 지켜보던 이혁재가 말했다.“여보, 얘 다 낫고 나면 집에 데려가 키우자. 이렇게 작고 못생긴 애가 혼자 힘으로 먹을 걸 찾기도 힘들고, 다른 고양이들이 받아주지도 않을 거야. 우리가 돌보지 않으면 얘 어떻게 살겠어.”이승연도 같은 생각이었다.두 달 후, 고양이는 건강을 회복했다.이혁재는 직접 고양이를 씻기고 구충한 뒤 집으로 데려갔다.시간이 지나면서 고양이는 털이 윤기 나게 자랐고 살이 올라 뼈만 앙상했던 이전 모습과는 완전히 달라졌다.결국, 고양이는 기름지고 윤기 나는 털을 자랑하며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 이혁재의 몸 위로 덮치는 대형 고양이가 되었다.“이런 젠장!”이혁재는 고양이의 기습에 또 당했고 숨이 턱 막힐 뻔했다.고양이가 도망치려 하자 그는 재빨리 붙잡아 들어 올리며 따졌다.“너 자신이 얼마나 무거운지 전혀 모르는 거야? 아니면 정말 날 깔아뭉개려고 작정한 거야?”고양이는 억울하다는 듯 야옹거리며 반응했다. 그러나 고양이가 이승연에게는 절대 이런 짓을 하지 않았기에 이혁재는 고양이가 일부러 자신을 괴롭힌다고 생각했다.고양이는 이승연이 일할 때 그녀의 발등 위에 앉아 체온으로 발을 따뜻하게 해주었다.그녀가 서류를 검토할 때는 네 발을 모아 단정한 자세로 그녀 곁에 앉아 ‘독서’에 동참했다.때로는 앞발로 서류를 톡톡 두드리며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중요한 코멘트’를 남기기도 했다.이혁재는 고양이를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고양이를 뒤집어 배를 위로 한 채 들어 올려 얼굴을 고양이 배에 묻고 한 번 흡입했다.고양이는 저항하며 네 발로
아이를 가지지 않기로 합의한 후, 이혁재는 정관 절제술을 받았다. 흔히 말하는 ‘피임 수술’을 통해 아이를 갖지 않겠다는 결정을 실행에 옮긴 것이다.이혁재는 이 일을 이승연에게 알리지 않았다. 관련 정보를 철저히 조사한 뒤, 직접 차를 몰아 병원으로 갔다.수술은 간단했고 외래 진료에서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수술을 마친 그는 바로 퇴원했고 그날 오후에는 몇 시간 동안 회의를 열기도 했다. 약간의 불편함이 있었지만 큰 문제는 없었다. 그리고 집에 돌아온 후에는 그 불편함조차 완전히 사라졌다.수술 후 한 달이 지나서야 이혁재는 가벼운 농담처럼 이 일을 이승연에게 털어놓았다.이승연은 한동안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평소 재빠른 두뇌 회전과 날카로운 눈치로 유명한 그녀였지만 이번에는 말을 잇지 못했다.이혁재는 그녀가 ‘수술’이라는 단어에 겁을 먹었다고 생각하며 웃었다. 혹시 일이 심각하다고 오해했을까 봐 그녀를 안고 달래며 자세히 설명했다.“여보, 내가 요즘 아이를 갖는 게 얼마나 두려웠는지 몰랐지? 피임을 해도 혹시 실수라도 생길까 봐 계속 걱정했어. 만약 사고가 생기면 낳든 낙태하든 둘 다 누나 몸에 무리가 갈 거잖아. 그래서 아예 근본적으로 위험을 없애는 게 낫다고 생각했어.”이승연은 그의 허리를 감싸안고 이마를 그의 가슴에 기대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도 이 수술 알아. 우리 아빠가 받았거든.”그녀는 차분히 이야기를 이어갔다.“그 시절에는 보통 여자가 피임 수술을 받곤 했는데 우리 아빠는 알아보니 여자가 받는 수술이 훨씬 위험하고 몸에 무리가 된다는 걸 알게 됐대. 그래서 엄마가 고생하는 걸 차마 볼 수 없어 자신이 받았지.”“아빠는 우리 동네에서 피임 수술을 받은 유일한 남자였고 사람들은 우리 아빠를 세상에 둘도 없는 좋은 남자라고 칭찬했어. 엄마도 복 받은 거라고 하셨고.”이혁재는 그녀가 아버지를 칭찬하며 은근히 자신도 칭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웃음을 터뜨렸다.그날 밤, 소파와 카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