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월영은 그때의 납치 사건이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그것도 교통사고가 난 시점에서 갑자기 다시 거론된 것이 분명히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그녀는 병실을 힐끔 보며 이 일이 신연우의 차 사고와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의심했다.잠시 고민한 뒤 유월영은 경찰에게 말했다.“좋아요, 함께 갈게요.”한세인이 급히 말렸다.“아가씨, 경찰서에 가시면 안 됩니다. 제가 당장 서장님에게 연락할게요. 이건 너무 말도 안 되는 일이에요...”유월영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모든 시민은 경찰 수사에 협조할 의무가 있어요. 제가 떳떳한데 무서울 게 뭐가 있나요? 변호사에게 준비하라고만 하면 돼요.”그리고 덧붙였다.“시우 씨한테는 아직 말하지 마세요.”한세인이 여전히 걱정하자 유월영은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그제야 한세인은 경호원들에게 물러나라고 손짓했다.“알겠습니다.”그날 밤 경찰은 유월영은 바로 취조실로 데려갔다.유월영은 취조실에 들어온 게 이번이 두 번째였다.첫 번째는 3년 전, 서정희가 그녀를 모함했을 때였다.유월영은 지금도 구치소에 갇혀 있을 때 느꼈던 그 절망과 무력함을 기억하고 있었다.유월영의 마음에 불안감이 스쳤지만 여전히 부드럽고 상냥한 목소리였다.“그래서, 경찰관님들은 지금 제가 그때 몽둥이로 납치범을 실수로 죽였다고 의심하시는 건가요?”취조실은 감옥에 있는 접견실보다는 대우가 나았다. 적어도 차가운 철제 의자가 아니라 작은 소파가 있었다.그들은 아직 유월영에게 수갑을 채우지 않았지만 현재 사실 그녀는 형사 구류 상태였다.경찰관은 바로 핵심 질문으로 들어갔다.“당시 납치범이 살아있는 걸 확인했나요?”“아니요. 제가 조서 작성할 때도 명확히 말했듯이 당시 납치법 일당들이 돌아왔고, 저는 도망가야 해서 아무것도 확인할 수 없었어요.”유월영은 묻는 말에 모두 대답하며 덧붙였다.“하지만 저는 제가 갑작스럽게 납치를 당하고 유산까지 되기 직전이었는데, 그렇게 배고프고 지친 상황에서 심지
사건에 몰두해 있던 유월영은 경찰의 말에 생각을 잠시 멈추었다.‘연재준이 여기에 있다고?’‘3일 전만 해도 거의 피를 토하고 언제라도 응급실에 들어갈 것 같던 사람이 이렇게 빨리 회복된 건가?’‘벌써 청원에서 신주시로 개인 전세기로 왔나?’경찰관은 재빨리 일어나 밖으로 나갔고 유월영을 홀로 심문실에 남겨두었다. 유월영은 차라리 눈을 감고 사건에 대해 다시 생각하기로 했다.왠지 모르게 그녀는 납치범은 자신이 휘두른 그 몽둥이에 맞아 죽은 게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사람의 두개골은 인체에서 가장 단단한 부분이다. 뒤통수가 상대적으로 약하다고 해도 그녀는 전문적인 살인자가 아니었기에 그렇게 정확하고 강하게 때릴 수 없었다.만에 하나 납치범이 그녀 손에 죽었다고 하더라도 당시 상황에서는 그녀가 정당방위를 했을 가능성이 크지 않았을까?정당방위는 죄가 없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 경찰관이 돌아와 말했다.“유월영 씨, 이제 가셔도 됩니다.”유월영은 믿기지 않는 듯 경찰관을 바라봤다.이번엔 증거가 명확해 보였으며 최소 24시간은 갇혀 있어야 할 거라고 생각했다.경찰관이 덧붙였다.“하지만 사건이 해결될 때까지 신주시를 떠나시면 안 됩니다.”유월영이 작은 소파에서 일어나 물었다.“혹시 연재준이 담보로 날 풀어준 건가요?”경찰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유월영은 쓴웃음을 지으며 심문실을 나와 경찰서를 벗어났다.연재준의 차는 마당에 주차되어 있었고 한참 내린 눈은 차 위를 하얗게 덮었다.문을 열고 나오는 유월영을 발견하고 연재준은 차에서 내렸다.두 사람은 두세 미터 거리를 두고 있었으며 길옆의 가로등에 연재준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있었다.유월영은 계단 위에 서서 연재준을 바라봤다.그는 두꺼운 패딩을 입고 있어 살이 빠졌는지 알 수 없었지만 얼굴색은 청원에서 만났을 때보다 조금 나아 보였다.다만 뜻밖에도 연재준의 사촌 동생 강수영도 그 옆에 있었다.유월영은 손을 주머니에 넣고 천천히 계단을 내려와 그에게 다가갔다.“연 대표님, 지금쯤 병
연재준은 차를 두 대 준비해 왔다.하나는 여행용 고급 밴이고 또 하나는 승용차였다. 연재준은 강수영에게 먼저 승용차에 타라고 달랬다.강수영은 예전에 사촌오빠가 너무 차갑고 눈이 높아 결혼을 못 할 거라고 생각했었지만 지금 눈앞의 연재준을 보며 오히려 그가 너무 비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수영아.”연재준이 낮은 목소리로 달랬다.“그렇게 자존심 없어서야. 쯧.”강수영은 기분 나쁘다는 듯 발을 구르다 차에 올라탔다.연재준은 유월영과 함께 밴으로 향했다.뒷좌석에 앉아 팔짱을 끼고 화난 표정을 지은 강수영을 보고 하정은이 말했다.“아가씨도 유월영 씨한테 너무 화내지 마세요.”강수영은 흠칫하더니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나도 유월영 때문에 화내는 건 아니에요. 내 사촌 오빠가 자기 몸을 소중히 여기지 않아서 그런 거죠. 보증금이라면 내가 와도 되고 아니면 하 비서님이 와도 되잖아요? 우리가 연씨 가문의 이름을 대면 경찰서에서 우리를 모른 척하겠어요? 굳이 눈보라를 뚫고 여기까지 직접 올 필요가 없었잖아요.”더욱 속상한 건 연재준이 그렇게 했음에도 유월영은 그를 허수아비 보는 듯했고 강수영은 그걸 견딜 수 없었다.하정은은 뭐라고 하려다 끝내 말문을 닫았다. 그녀는 연재준과 유월영 사이에는 많은 일들이 있음을 알고 있었기에 유월영을 함부로 비난할 수 없었다.강수영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의사가 혹시 그 종양이 다시 전이되었다고 하지 않았어요?”하정은이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말했다.“전에는 수술할 수 없다고 했었는데 이제 수술할 수 있게 되었어요. 하지만...연 대표님은 지금 수술을 받지 않으시려는 것 같아요,”강수영이 다급하게 말했다.“왜요? 그런 건 미루면 안 되잖아요.”하정은은 앞에 있는 밴을 바라보며 걱정스러운 눈으로 이마를 찌푸렸다.밴은 넓어 탁자와 소파가 있었다.유월영은 작은 소파에 앉아 바로 포장을 풀었다. 포장된 그릇 뚜껑을 열자 죽에 뿌려진 참기름 향이 코를 찔렀다.원래 입맛이 별로 없던 유월영은 막상 냄새를 맡
유월영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저도 연 대표님이라고 말한 적 없어요.”그리고 이내 웃음을 거두고 설명했다.“그 차는 나를 향해 돌진했어요. 그러다 실패하자 저와 연관된 오래된 납치 사건을 다시 들춰냈어요. 그 때문에 제가 용의자로 지목되었고 신주시를 떠날 수 없게 되었죠. 이 두 가지 일은 모두 나를 겨냥한 거예요. 이들 사이에 반드시 연관성이 있을 거라고 믿어요. 배후자도 같은 사람이고요.”연재준은 듣고 있기만 할 뿐 끼어들지 않았다.그는 알고 있었다. 유월영이 그의 앞에서 아무 이유 없이 이런 분석을 하지 않을 것이었다. 두 사람은 아직 그럴만한 관계가 아니었다.역시나 유월영은 바로 다음 질문했다.“내가 기억하기론, 연 대표님 전에 저에게 납치범이 죽었는지 물었던 적이 있어요. 그때 왜 갑자기 그걸 물었나요?”유월영이 그의 차에 올라타고 그가 사 온 밥을 먹은 이유였다. 그녀는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연재준도 역시 방금 그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유월영은 연재준이 말이 없자 대수롭지 않은 듯 웃었다.“말하기 불편하다면 대답 안 해도 돼요. 강요하진 않아요.”말을 마치자마자 유월영은 바로 일어섰다.마치 원하는 대답을 얻지 못하면 1초라도 더 그와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은 듯했다.유월영이 망설임 없이 문 쪽으로 걸어가자 연재준은 돌아서서 그녀의 외투를 잡으며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말하기 불편하다고 한 적은 없어. 어떻게 말할지 생각하고 있었을 뿐이야. 성격이 왜 그렇게 급해?”유월영은 발걸음을 멈췄다.연재준이 말했다.“앉아봐. 전부 말해줄게.”최고급 밴 안에는 공간이 넓었고 냉장고 같은 시설도 갖추고 있었다. 유월영은 문 옆에 작은 와인 캐비닛이 있는 걸 발견하고 술이 들어 있는지 확인했다.“이 술 마셔도 돼요?”“마실 순 있어. 다만 날씨가 추우니 목이 마르면 포장해 온 따뜻한 국을 마시는 게 좋을 거야.”“허심탄회하게 얘기하려면 당연히 술이 더 어울리죠.”유월영은 곧바로 위스키 한 병을 꺼낸 후 유리잔을 가져와 자리에
연재준은 흠칫하다가 고개를 숙여 유월영의 손목을 잡고 있는 자기 손을 바라봤다. 그러다 이내 스스로 손을 놓았다.그는 위스키병을 들고 자신에게도 반 잔을 따랐다.잔을 손에 들고 연재준은 다시 한번 유월영을 향해 경고했다.“나는 농담하는 게 아니야.”유월영이 말했다.“연 대표님은 지금 저를 걱정하시는 건가요, 아니면 오성민을 걱정하시는 건가요?”연재준이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데?”그는 뜻밖에도 유월영에게 질문을 던졌다. 작은 탁자 하나를 사이에 두고 유월영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어두워 마치 무언가에 덮인 것처럼 어렴풋하게 빛났다.그가 단순히 별 뜻 없이 묻는 건지 아니면 정말 그녀의 대답을 기대하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그거야 뻔하죠.”유월영이 웃으며 말했다.“윤영훈이 저렇게 되고 오성민마저 쓰러진다면 연 대표님은 꽤 껄끄럽겠죠? 그저께 신 대표님과 두 시간이나 영상 통화를 하셨다면서요?”연재준이 멈칫했다.“당신이 그걸 어떻게 알아?”유월영이 어깨를 으쓱했다.“컴퓨터를 잘 다루는 친구가 있어요. 심심해서 연 대표님 회사의 방어 시스템에 도전해 보고 싶었다네요. 음, 대기업답더라고요. 그 친구가 한 시간 넘게 해킹했는데, 들어가자마자 두 분이 대화를 끝냈지 뭐예요. 별로 들은 내용은 없어요.”윤영훈의 일이 터지자 연재준과 신현우는 바로 연락을 주고받으며 대응 방안을 논의했다. 유월영은 두 사람을 도청하려 했으나 그들이 암호화된 네트워크를 사용하고 있어 들어가기 힘들었고 시도할 마음이 없어져 바로 그에게 이야기했다.이렇게 대놓고 말하는 것도 연재준에 대한 도발이었다.연재준은 말했다.“직접 나한테 물어봐, 내가 다 알려줄게. 굳이 그런 수고를 할 필요 없어. 게다가 우리 대화는 별거 아니었어. 그냥...”유월영이 손을 입에 대며 쉿 하는 소리를 냈다.“별로 궁금한 것도 아니니 굳이 꾸며내서 말해줄 필요 없어요.”“내가 이야기를 꾸며서 당신을 속일지 아닐지 어떻게 그렇게 확신해?”유월영은 이런
유월영은 말없이 차창 밖을 바라보았다.하얀 눈이 신주시를 은빛으로 덮었고 도로도 하얀 눈으로 덮여있어 원래 어떤 모습이었는지 가늠할 수 없었다.하지만 겨울이 가고 봄이 오면 눈이 녹으면서 모든 것은 원래대로 돌아갈 것이고 눈에 덮였던 모습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유월영은 시간이라는 게 참으로 신기한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것이 잊히기 마련이다.신호등이 파란불로 바뀌고 하정은은 이 신호등이 바뀌는 동안 유월영의 대답을 기다렸지만 대답이 없자 실망한 듯 한숨을 쉬고 다시 가속 페달을 밟았다.그러나 유월영이 입을 열어 하정은에게 되물었다.“내가 처음으로 유치장에 잡혀간 건 누구의 설계였죠?”하정은은 하마터면 브레이크를 밟을 뻔했다.유월영이 무표정하게 혼잣말했다.“바로 그 잘난 연재준 덕분 아니겠어요?”“연 대표는 당시 나를 돌아오게 만들려고 수를 써서 나를 유치장에 가뒀어요. 그리고 내가 정신적으로 무너졌을 때 구하러 나타났죠.”“‘흔들다리 효과'라는 말을 들어본 적 있어요? 사람이 절박한 상황에 처하면 자신을 구해준 사람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낀다고 해요. 그래서 그 사건 이후로 나와 연 대표 사이는 점점 다시 좋아지게 되었어요.”“그리고 그가 나와 화해하려고 그렇게 애썼던 이유는 유씨 집안에 접근해 장부를 손에 넣으려는 의도였어요. 이 모든 것은 그가 치밀하게 계획한 거였죠.”“그래도 하 비서님은 내가 그에게 매정하게 군다고 생각하나요?”허정은은 말문이 막혔다...유월영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차는 침묵 속에서 호텔에 도착했고 유월영은 차에서 내려 운전석으로 돌아가 차창을 두드렸다.“하 비서님. 계좌이체 해 드릴게요.”말을 마치고 유월영은 바로 돈을 이체해 주었고 하정은은 무심코 계좌에 들어가 확인했다. 유월영은 야근 수당을 아주 후하게 준 것이다.“하 비서님 수고하셨어요. 일찍 들어가 쉬세요.”말을 마치고 유월영은 미련 없이 뒤돌아갔고 잠시 멍하니 있던 하정은이 이내 외쳤다.“월영 씨.
유월영이 샤워를 마치고 침대에 누웠을 때는 이미 새벽 4시였다.오늘 유월영은 정말로 바쁘게 보냈고 여러 사람들을 만났다.먼저 청원에서 신주시로 돌아온 후 윤영훈을 만나러 가서 심호준의 연락처를 알아내서 이혁재에게 전달했다.그 후에는 카페에서 주월향과 작별 인사를 나누고 우연히 신연우를 만나 신연우 동생의 결혼선물을 대신 골라주었다.그리고 두 사람은 오후에 호텔로 돌아오다 교통사고가 났고 유월영은 병원에서 신연우를 5시간 동안 지키고 있다가 신현우와 신연준이 도착해서야 떠날 수 있었다.그러다 납치범의 살인 용의자로 야밤에 경찰서로 연행되어 심문을 받다가 연재준이 보증을 서서 풀려났었다.뒤이어 저녁에 있던 그 교통사고와 경찰의 심문은 모두 오성민이 자신을 겨냥한 것이라는 사실을 거의 확신하고 하정은이 그녀를 호텔까지 데려다주었다.너무 많은 일들이 한꺼번에 벌어진 탓에 그녀의 뇌는 계속 빠르게 돌아가며 정신이 더욱 또렷해졌다. 그러다 새벽이 밝아오기 전에야 유월영은 겨우 잠이 들었다.아침 9시가 채 되기 전, 유월영은 핸드폰 벨 소리에 잠이 깼다.그녀는 잠결에 본능적으로 핸드폰을 더듬었다.“...여보세요?”상대방이 물어왔다.“아직 덜 깼어?”유월영은 제대로 듣지 못하고 비몽사몽인 채로 물었다.“뭐라고요?”상대방은 그녀의 잠을 깨우지 않으려는 듯 속삭였다.“조금 더 자. 점심에 다시 전화할게.”“응...”유월영은 핸드폰을 내려놓고 다시 잠이 들었다. 그리고는 오후 12시 돼서야 잠에서 깼다.그리고 아침에 전화한 사람이 현시우라는 걸 알았다.‘한 비서가 어젯밤에 내가 경찰에 잡혀갔다는 사실을 시우 씨에게 말했나 보네...’유월영은 씻은 후 물을 한 잔 따라 발코니 앞에 섰다.그 순간, 핸드폰이 울렸다. 현시우였다.“시우 씨, 시간 맞추는 데 능하네. 10분만 빨랐어도 나 아직 안 일어났을 텐데.”“경찰서 쪽은 내가 말해두었어. 이제 함부로 널 데려가 심문하지는 않을 거야. 걱정하지 않아도 돼.”“알았어. 별로 걱정하지 않아.
연재준의 표정은 매우 평온했다. 그는 그저 문밖에서 말없이 유월영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유월영은 잠시 멈칫하더니 평소와 같은 말투로 전화 건너편 남자에게 말했다.“시우 씨, 나 두 끼나 굶었더니 배고프네. 지금 밥 먹으러 가려고, 나중에 다시 전화할게.”현시우는 알겠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유월영이 물었다.“연 대표님, 무슨 일이 신가요?”병원에 있던 연재준은 어젯밤 답장이 없던 메시지 때문에 참을 수 없어 그녀를 만나러 왔다.다만, 그는 이런 말을 듣게 될 줄은 몰랐다.연재준은 순간 부정하고 싶었고 심장의 한구석이 아려왔다. 그는 유월영을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전에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잖아.”유월영이 얼굴을 찡그리며 물었다.“뭐가요?”연재준의 눈동자는 마치 깊은 연못 같았다.“당신, 예전에 분명 나를 사랑한다고 했잖아.”“...”유월영은 갑자기 짜증이 밀려왔다.“오래된 일을 지금 꺼내서 무슨 의미가 있죠? 연 대표님, 이렇게 대낮에 나한테 와서 난동 부리는 건 좀 아니지 않나요?”연재준이 되물었다.“우리의 추억을 그저 그 새로운 연인을 기쁘게 하려고 사용하는 건 괜찮고?”유월영의 얼굴이 굳어졌다.“지금 나한테 따지는 거예요?”연재준이 웃으며 말했다. 그의 검은 눈동자에는 알 수 없는 감정이 깃들어 있었다.“내가 어떻게 감히 그러겠어? 나한테 그럴 자격이 있기나 할까?”문손잡이를 잡고 있던 유월영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와 더 이상 실랑이하고 싶지 않아 바로 문을 닫으려고 했다.그러나 연재준은 손을 뻗어 문을 막았다.그는 남자였고 힘이 그녀보다 더 셌다. 게다가 유월영이 방심한 틈을 타 그는 쉽게 그녀의 방으로 들어왔다.유월영은 본능적으로 두 발짝 뒤로 물러났다.“지금 뭐 하는 짓이에요!”연재준은 뒤로 돌아 문을 닫았다.유월영은 순간 움찔하며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여기는 제 방이에요. 이렇게 막 들어오는 건 무슨 경우인가요?”연재준은 그녀의 화장기 없는 얼굴을 바라보았다. 얼굴은 창백하고
“할 수 있지, 할 수 있어. 연이가 원하는 거라면 아빠는 꼭 해낼 거야.”윤영훈은 목이 메어 기쁨에 눈물을 흘렸다.주월향은 딸에게 그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았고 오히려 아빠가 누군지 알려주며 7년 동안 떨어져 있었음에도 딸이 그를 낯설게 느끼지 않도록 해줬다.‘이 세상에 이런 여자가 또 어디 있을까?’그러나 윤영훈은 주월향의 이런 행동이 자신을 받아들인다는 뜻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집안에 들어서자 연이가 활기차게 떠들었다.“엄마!”주월향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연이야, 배고프지? 어제 배추전 먹고 싶다고 했잖아? 방금 만들어서 아직 따뜻해. 간식이니까 너무 많이 먹으면 안 돼, 알았지?”아이가 환호하며 말했다.“고마워요, 엄마!”주월향은 윤영훈을 힐끗 보며 말했다.“당신도 먹어볼래요?”윤영훈은 그녀 쪽으로 다가가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월향아, 미안해...”“나한테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아도 돼요.”주월향이 그의 말을 끊었다.그리고 딸을 한 번 보더니 아이가 듣지 못하도록 마당으로 걸어 나갔다.윤영훈도 그녀를 따라 나갔다.주월향은 식물에 물을 주며 담담하게 말했다.“7년 전, 영훈 씨가 감옥에 가기 전에 우리 모녀를 위해 모든 걸 준비해 줬어요. 돈, 집, 차까지 모두 마련해줬죠. 게다가 내가 당신을 한 번 배신하기도 했으니 당신에게 상처 준 대가로 다 갚았다고 볼 수 있겠죠. 우리는 7년 전에 이미 정리됐어요. 그러니 서로에게 빚진 건 없어요.”윤영훈은 숙연한 마음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주월향이 돌아서서 그를 마주 보며 말했다.“이 7년 동안 내가 감옥 면회를 가지 않은 이유는 더 이상 먼저 다가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당신이 오늘 출소한다는 건 알고 있었고 그래서 한 번 더 기회를 주기로 했죠. 당신이 날 찾으러 오지 않았다면 그냥 이대로 끝났을 거예요.”“하지만 영훈 씨는 나를 찾아왔어요. 그래서 지금 당신한테 물어보고 싶어요. 여기 남을 건가요?”“...내가 여기 남아
“됐어요, 사촌 오빠, 얼른 가세요. 곧 비가 올 것 같아요. 이모와 이모부께는 제가 잘 지낸다고 전해주세요. 여기서 부족한 것 하나도 없으니 걱정하지 마시라고요.”‘사촌 오빠?’남자는 주월향의 남편이 아니라 사촌 오빠였다.거의 죽어가던 윤영훈의 마음이 한순간에 되살아났다.그는 참지 못하고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뻔했다.그러나 그 사촌 오빠가 집을 나서자 윤영훈은 재빨리 수박 덩굴 아래로 몸을 숨겼다.물론 그 남자가 남편이 아니라고 해서 주월향에게 남편이 없다는 뜻은 아니었다.하지만 이 반전만으로도 그는 잠시나마 안도감을 느꼈다.그때 머리 위의 수박잎이 갑자기 누군가에 의해 젖혀졌다.윤영훈은 순간 얼어붙었다. 본능적으로 얼굴을 가리고 도망치려 했지만 뒤에서 들려오는 청아하고 차분한 목소리에 그의 발걸음이 멈췄다.“내가 아까 한 말 못 들었어요? 곧 비가 올 것 같으니 빨리 벼부터 거두는 걸 도와줘요. 비 맞으면 이번 농사는 다 망해요.”윤영훈은 그 자리에 꼼짝 않고 서 있었다.주월향의 말투는 너무나도 자연스러워 마치 그가 7년 동안 감옥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잠깐 외출했다가 돌아온 사람처럼 들렸다.천천히 돌아선 윤영훈을 주월향은 담담하게 바라보며 갈퀴를 건넸다.“모두 한데 모아주세요. 내가 자루를 가져올게요.”윤영훈은 멍하니 그녀를 따라 집으로 들어갔다.그는 감옥에서도 농사일을 해봤기에 이런 일이 낯설지 않았다.하지만 일을 하다가도 자꾸 주월향의 눈치를 살폈고 그녀의 의도를 이해하려 애썼다.주월향이 입을 열었다.“지금 나는 온라인에서 요리 블로거로 활동하고 있어요. 팔로워가 몇백만 명은 되죠. 영상 편집이 아직 안 끝났으니 벼를 다 거두고 나면 이 앞에 초등학교에 가서 연이를 좀 데려와 주세요.”“지안 초등학교가 어디 있는지 알죠? 몰라도 괜찮아요. 핸드폰 내비게이션 켜고 찾아가면 돼요.”윤영훈이 여전히 멍하니 있자 주월향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내 말 들었어요?”“들었어...”주월향은 거둔 벼를 집 안으로 가져가며
윤영훈은 10년 형을 선고받았다.모범수로 인정받아 감형된 덕분에 실제 복역 기간은 7년 10개월이었다.출소하는 날, 그를 마중 나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감옥 문 앞에 서서 바라본 세상은 이미 많이 변해 있었다. 그의 모습도 더 이상 과거의 의기양양하고 자유분방했던 그 사람이 아니었다.윤영훈은 감옥 문 앞에서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출소를 반년 앞두고 그는 출소 후의 삶을 계획하려 애썼지만 막상 그 순간이 닥치자 머릿속은 텅 비어버렸다.윤씨 가문은 이미 몰락한 지 오래였다.2년 전, 그의 아버지는 감옥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교도관들의 배려로 그는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석할 수 있었다.그곳에서 그는 가난에 시달리는 친척들을 보았다.가문의 보호막 없이 근근이 살아가는 그들에게 윤영훈은 짐이 되고 싶지 않았다.그의 사촌 서정희는 출소 후 찾아오라 했지만 그녀에게도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윤영훈이 가장 만나고 싶었던 사람은 주월향이었다.그녀와 딸 연이를 보고 싶었지만 갑작스러운 등장이 그녀에게 폐를 끼칠까 두려웠다.게다가 그녀는 이미 자신을 만나고 싶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재판을 받던 날에도 주월향은 법정에 나오지 않았다.7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으니 그녀는 분명 새로운 삶을 시작했을 것이고 어쩌면 그녀 곁에는 그녀를 사랑하는 남자가 있을지도 모른다.남자가 없더라도 모녀는 안정적이고 풍족한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윤영훈은 감옥에 가기 전 그녀에게 충분한 재산을 남겼고 그녀가 이를 잘 활용했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그런 상황에서 자신의 등장은 적절하지 않았다.하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이 비열하다고 느꼈다.주월향을 한 번이라도 보고 싶다는 욕망을 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멀리서 그녀를 한 번 보기만 해도 만족하겠다고 다짐한 윤영훈은 감옥에서 일하며 모은 돈으로 기차표를 사서 그녀의 고향으로 향했다.그곳은 산과 물이 어우러진 작은 마을이었다.기차역에서 그녀의 집까지는 버스로 2시간
“그래도 돼?”강수영은 신현우가 미쳤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그는 정말로 그녀의 애인이 되었고 강수영은 반년 넘게 그와 몰래 관계를 이어갔다.강수영은 일부러 자신이 이미 남편과 이혼했다는 사실을 숨기고 매주 몰래 찾아오는 신현우를 지켜보며 즐거워했다.가끔 갑자기 여행을 떠나고 싶어지면 그녀는 짐을 싸서 바로 떠났다.그럴 때마다 신현우는 알림도 받지 못한 채 허탕을 치고 돌아가야 했다.친구들은 강수영이 신현우를 가지고 노는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녀는 이 상황을 즐길 뿐이었다.현재 신현우의 눈에는 질투와 시기가 가득 차 있었고 늘 당당하던 그의 얼굴에는 답답함과 우울함이 서려 있었다.강수영은 자신이 그의 곁에서 겪었던 모든 억울함과 상처를 이렇게 풀고 싶었다.이번 주, 강수영은 영국으로 떠날 예정이었고 신현우는 그녀가 남편을 만나러 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겉으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날 밤 강수영이 화장실에 가려고 일어났을 때 그는 거실에서 홀로 술병을 비우고 있었다.엉망이 된 그의 모습은 평소와 달리 초라해 보였고 강수영은 저도 모르게 마음이 조금 약해졌다.그녀는 오랜 시간 방치해둔 녹음기를 꺼냈다. 그건 예전에 신연우가 건넨, 신현우의 음성이 담긴 파일이었다.그녀는 당시 결혼 생활에 전념하고 싶어 듣지 않았던 녹음을 재생했다.녹음기에서는 술에 취한 신현우의 흐릿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그것은 강수영의 결혼식 날, 신현우가 취한 상태에서 남긴 말들이었다.신연우가 그를 말렸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수영이가 내 앞을 그렇게 지나갔어. 남편 팔짱을 끼고 날 쳐다보지도 않았어.”“내가 정말로 그녀를 신경 쓰지 않고,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을까? 아니야, 난 수영이를 좋아했어. 다만 그녀가 집으로 돌아가길 바랐을 뿐이야.”“나 때문에 부모님과 친구들과도 관계를 끊었잖아. 너무 어리석었어. 나는 그런 가치를 줄 만한 사람이 아닌데...”“다 내 잘못이야. 처음부터 더 깊은 관계로 나아가지 않았더라면 수영이가 이렇게 집착하지
두 사람은 서쪽으로 스위스 알프스를 찾아가 산맥의 낭만을 만끽하며 자연 보호구역에서 아름다운 야생동물들을 만났다.북쪽으로는 핀란드의 로바니에미와 캐나다의 퀘벡으로 향해 겨울 축제와 북유럽의 신비로운 매력을 경험하고 끝없이 펼쳐진 설원과 오로라의 장관을 즐겼다.그러던 중, 한 여행지에서 강수영은 신연우를 우연히 마주쳤다.오래된 친구라 할 수 있는 사이였기에 두 사람은 함께 저녁을 먹었다.식사 후, 신연우는 그녀에게 녹음 파일을 건네며 말했다.“이 안에는 우리 형의 음성이 들어 있어. 들을지 말지는 네가 결정해. 하지만 듣는다면 네 결혼 생활에 영향을 줄 수도 있어.”그는 이어 덧붙였다.“형이 요 몇 달 동안 상태가 많이 안 좋았어. 큰 병을 앓아 체중이 많이 빠졌고, 회사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어. 최근에서야 조금 회복됐지.”강수영은 특별히 반응하지 않고 녹음 파일을 받았지만 끝내 듣지 않았다.신혼여행을 마치고 부부는 지성으로 돌아와 결혼 후의 삶을 시작했다. 하지만 2년도 채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이혼 절차를 밟게 되었다.두 사람 사이에는 큰 갈등이 없었다. 강수영의 남편은 여전히 훌륭한 사람이었고 이혼의 원인은 문화적 차이와 생활 습관의 차이였다.한 사람은 한국식 사고방식으로, 다른 한 사람은 서양식 사고방식으로 자라며 서로 적응하려고 노력했지만 끝내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그들은 평화롭게 헤어졌고 이혼 후에도 좋은 친구로 남았다.부모의 잔소리를 피하기 위해 이혼 사실을 비밀로 하기로 합의한 후 강수영은 다시 전 세계를 여행하기 시작했다.그러다 각 나라, 각 도시에서 신현우를 계속 ‘우연히’ 마주치게 되었다.세 번째 만남에서는 더 이상 참지 못한 강수영이 그를 조롱했다.“신 대표님, 이렇게 한가하신 줄 몰랐네요. 왜 자꾸 저를 따라다니시는 거죠?”“따라다닌 게 아니야. 우연일 뿐이야.”“우연이 이렇게 자주 겹칠 리가 있나요? 제가 바보인 줄 아세요?”차가운 미소를 띤 강수영에게 신현우는 화제를 돌렸다.“넌 왜 여기저기 여행
‘소은혜’에서 다시 ‘강수영’으로 돌아온 후, 강수영은 그 차가운 남자와 더는 아무런 관계도 없을 것이라고 믿었다.한눈에 반했던 감정은 결국 그녀의 인생을 망쳤고 다시는 그 남자와 얽히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그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했다. 파혼하고 집을 떠나 이름까지 바꾼 채 명분 없이 그의 곁을 지켰지만 세상 사람들은 그녀를 부끄러움을 모르는 여자라며 손가락질했다.그러는 동안 그는 가문 배경이 잘 맞는 귀한 집 아가씨와 결혼 준비를 하고 있었다.그녀는 스스로를 명문가의 딸에서 천한 첩으로 전락시켰지만 그에게선 차가운 시선만 돌아왔다. 그녀가 바친 모든 것을 알면서도 그는 온기 한 줌 나눠주지 않았다.강수영은 결국 깨달았다. 그 감정을 고집한 자신이 문제였다는 것을.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야 했다.그녀는 강씨 집안의 딸로 돌아왔고 그는 여전히 신씨 가문의 장남으로 남아 있었다.부모님은 그녀를 위해 맞선을 주선했고 두 가문 모두에게 이로운 자리였다.강수영은 더 이상 부모님을 실망하게 하고 싶지 않아 기쁜 마음으로 맞선에 응했다.맞선 상대는 영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훌륭한 조건을 갖춘 사람이었다. 나이도 비슷했고 배경도 잘 맞았다.며칠간 그와 시간을 보내본 그녀는 그가 괜찮다고 느꼈다. 특히, 그가 그녀에게 첫눈에 반했다고 고백했을 때는 묘한 감정이 들었다.누군가를 좋아하는 것은 너무나 고된 일이었기에 이번에는 누군가가 자신을 좋아해 주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알고 싶었다.그렇게 두 사람은 3개월간 교제했고 큰 문제 없이 잘 맞았다. 비록 심장이 크게 뛰는 설렘은 없었지만 세상 대부분의 결혼이 ‘적당함’을 기반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그녀도 알고 있었다.그 기준에서 본다면 그와의 결혼은 충분히 합리적이었다.결국 두 사람은 약혼했고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그러나 결혼식 당일, 초대받지 않은 불청객이 나타났다. 바로 신현우였다.그의 등장에 강수영은 잠시 굳어졌지만 이내 미소를 띠며 신랑과 함께 술잔을 들었다.
방금 중성화 수술을 받은 고양이는 축 늘어져 있었다.이승연은 고양이가 우울증에 걸릴까 봐 걱정되어 이혁재에게 맡기기로 했다.“경험 있는 네가 좀 맡아줘.”이혁재는 황당했다.“내가 무슨 경험이 있다고 그래!”이승연은 그를 잠시 바라보더니 담담하게 말했다.“처지가 비슷하잖아.”화가 난 이혁재는 이승연을 들어 신발장 위에 올려놓고 곱게 바른 립스틱을 번지게 했다.“전혀 비슷하지 않거든!”이혁재의 사무실.이혁재와 연재준은 일 얘기를 하고 있었고 두 아이는 옆에서 놀고 있었다.그때 이혁재가 무심코 고양이에게 한마디를 건넸다.“호두야, 누나를 잘 돌봐야 해.”기어다니기 시작한 윤아는 갑자기 호두의 꼬리를 잡았다.호두는 성격이 온순하고 사람을 좋아했지만 꼬리만큼은 예외였다. 그런데도 이번에는 이혁재의 말 때문인지 꼬리를 잡힌 채로 억울한 듯 야옹 소리만 냈다.윤아는 깔깔 웃으며 꼬리 끝을 입에 넣으려 했고 그제야 호두는 꼬리를 빼내더니 아기에게 돌아서서 야옹 소리를 내며 경고했다.마치 “입에 넣으면 안 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그러자 윤아는 호두를 향해 돌진하며 그를 덮쳤다.두 아빠가 일을 마치고 아이들을 찾으러 갔을 때 윤아는 카펫 위에서 잠들어 있었고 호두는 듬직한 몸을 베개 삼아 윤아를 받치고 있었다.그 동화 같은 장면에 연재준과 이혁재는 저도 모르게 아빠 미소를 지었다.“고양이가 어린이를 알아본다더니 진짜인가 봐.”퇴근 시간이 되어 이혁재는 호두를 데리고 이승연의 사무실로 향했다.이승연은 호두를 품에 안고 기뻐하며 입을 맞췄고 이어 호두가 이혁재에게도 뽀뽀하도록 했다.갑작스러운 입맞춤에 이혁재는 고양이 털을 한가득 삼키고 서둘러 뱉어냈다.“퉤퉤퉤.”그 순간, 호두도 갑자기 토하기 시작했다. 단순히 흉내를 낸 게 아니라 실제로 무언가를 토해냈다.이혁재는 어이가 없어 발끈했고 이승연은 웃음을 참지 못해 의자에 쓰러지듯 폭소했다.사실 고양이는 털을 핥으며 스스로를 청소하는 습성 때문에 위에 털 뭉치가 생겨 종종 토하곤
작은 고양이는 케이지 구석에 웅크리고 있었고 치료로 인해 털이 대부분 깎인 채 볼품없는 모습이었다.이혁재가 싫은 소리를 내자 새끼 고양이는 힘겹게 눈을 떴다. 그리고 이승연을 알아본 듯 비틀거리며 케이지 가장자리로 다가와 그녀를 향해 야옹 울었다.이승연은 손가락을 내밀어 고양이를 살짝 만졌다. 그러자 고양이는 꿈틀거리며 그녀의 손가락에 머리를 가져다 대었다.그녀는 미소 지었고 이를 지켜보던 이혁재가 말했다.“여보, 얘 다 낫고 나면 집에 데려가 키우자. 이렇게 작고 못생긴 애가 혼자 힘으로 먹을 걸 찾기도 힘들고, 다른 고양이들이 받아주지도 않을 거야. 우리가 돌보지 않으면 얘 어떻게 살겠어.”이승연도 같은 생각이었다.두 달 후, 고양이는 건강을 회복했다.이혁재는 직접 고양이를 씻기고 구충한 뒤 집으로 데려갔다.시간이 지나면서 고양이는 털이 윤기 나게 자랐고 살이 올라 뼈만 앙상했던 이전 모습과는 완전히 달라졌다.결국, 고양이는 기름지고 윤기 나는 털을 자랑하며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 이혁재의 몸 위로 덮치는 대형 고양이가 되었다.“이런 젠장!”이혁재는 고양이의 기습에 또 당했고 숨이 턱 막힐 뻔했다.고양이가 도망치려 하자 그는 재빨리 붙잡아 들어 올리며 따졌다.“너 자신이 얼마나 무거운지 전혀 모르는 거야? 아니면 정말 날 깔아뭉개려고 작정한 거야?”고양이는 억울하다는 듯 야옹거리며 반응했다. 그러나 고양이가 이승연에게는 절대 이런 짓을 하지 않았기에 이혁재는 고양이가 일부러 자신을 괴롭힌다고 생각했다.고양이는 이승연이 일할 때 그녀의 발등 위에 앉아 체온으로 발을 따뜻하게 해주었다.그녀가 서류를 검토할 때는 네 발을 모아 단정한 자세로 그녀 곁에 앉아 ‘독서’에 동참했다.때로는 앞발로 서류를 톡톡 두드리며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중요한 코멘트’를 남기기도 했다.이혁재는 고양이를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고양이를 뒤집어 배를 위로 한 채 들어 올려 얼굴을 고양이 배에 묻고 한 번 흡입했다.고양이는 저항하며 네 발로
아이를 가지지 않기로 합의한 후, 이혁재는 정관 절제술을 받았다. 흔히 말하는 ‘피임 수술’을 통해 아이를 갖지 않겠다는 결정을 실행에 옮긴 것이다.이혁재는 이 일을 이승연에게 알리지 않았다. 관련 정보를 철저히 조사한 뒤, 직접 차를 몰아 병원으로 갔다.수술은 간단했고 외래 진료에서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수술을 마친 그는 바로 퇴원했고 그날 오후에는 몇 시간 동안 회의를 열기도 했다. 약간의 불편함이 있었지만 큰 문제는 없었다. 그리고 집에 돌아온 후에는 그 불편함조차 완전히 사라졌다.수술 후 한 달이 지나서야 이혁재는 가벼운 농담처럼 이 일을 이승연에게 털어놓았다.이승연은 한동안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평소 재빠른 두뇌 회전과 날카로운 눈치로 유명한 그녀였지만 이번에는 말을 잇지 못했다.이혁재는 그녀가 ‘수술’이라는 단어에 겁을 먹었다고 생각하며 웃었다. 혹시 일이 심각하다고 오해했을까 봐 그녀를 안고 달래며 자세히 설명했다.“여보, 내가 요즘 아이를 갖는 게 얼마나 두려웠는지 몰랐지? 피임을 해도 혹시 실수라도 생길까 봐 계속 걱정했어. 만약 사고가 생기면 낳든 낙태하든 둘 다 누나 몸에 무리가 갈 거잖아. 그래서 아예 근본적으로 위험을 없애는 게 낫다고 생각했어.”이승연은 그의 허리를 감싸안고 이마를 그의 가슴에 기대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도 이 수술 알아. 우리 아빠가 받았거든.”그녀는 차분히 이야기를 이어갔다.“그 시절에는 보통 여자가 피임 수술을 받곤 했는데 우리 아빠는 알아보니 여자가 받는 수술이 훨씬 위험하고 몸에 무리가 된다는 걸 알게 됐대. 그래서 엄마가 고생하는 걸 차마 볼 수 없어 자신이 받았지.”“아빠는 우리 동네에서 피임 수술을 받은 유일한 남자였고 사람들은 우리 아빠를 세상에 둘도 없는 좋은 남자라고 칭찬했어. 엄마도 복 받은 거라고 하셨고.”이혁재는 그녀가 아버지를 칭찬하며 은근히 자신도 칭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웃음을 터뜨렸다.그날 밤, 소파와 카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