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월영이 눈쌀을 찌푸린다. 고등학교때부터 빚졌다니? 저게 무슨 헛소리지?같은 고등학교는 맞지만 유월영은 연재준의 이름만 들어봤을뿐 얼굴도 몇번 보지 못했는데 뭘 빚졌다는거지?또 시작이다. 저 말 끝마다 빚졌다는 소리.유월영이 생각하는 그대로 연재준에게 물으며 그를 뚫어져라 쳐다본다.버드나무잎같이 얇고 날카로운 입꼬리를 스윽 올리던 연재준은 이내 유월영의 손을 놓아주고는 옆 차문으로 내려버린다.이윽고 유월영을 거들떠 보지도 않은채 음식점 안으로 들어가는데.“......”이상하다 참.한숨을 푹 쉬고 뒤따라가는 유월영이다.밤 열시가 넘는 시간인지라 음식점엔 손님이 별로 없었고 연재준이 구석 자리에 잡자 웨이터가 바로 메뉴판을 가져다 준다.연재준은 메뉴판을 들여다 보지도 않고 말한다.“다 올려요.”메뉴 전부 다 주문하겠다는 뜻이다.뒤따라오던 유월영이 그 소리를 듣고는 이내 미간을 찌푸린다.“이런 식으로 복수하는거에요?”“왜? 아까워?”“너무 낭비인것 같아서 그래요.”셋이서 전 메뉴를 어찌 다 먹는단 말인가.연재준이 따뜻한 수건으로 손을 닦으며 웨이터에게 말한다.“몇개만 올리고 남은건 청소부 분들한테 줘요.”연재준에게 저런 선한 구석이 있다고는 믿지 않는 유월영이다.일부러 유월영을 골탕 먹이려는거겠지.더이상 싸울 힘도 없는 유월영이다. 하고 싶은대로 하라지 뭐.정산 깨끗이 하기 싫은건 본인 일이고 어차피 유월영이 그를 여기로 데리고 와 대접하는건 빚지기 싫어서다.연재준은 유월영이 미간에 감추고 있는 귀찮음과 짜증을 읽어냈는지 별안간 입을 연다.“서정희 때문에 도와준건지, 너 때문에 도와준건지 곁에 3년이나 있었으면서도 눈치 못 채?”경직된 유월영이 고개를 번쩍 든다. 남자의 어둡고 싸늘한 두 눈은 유월영을 매서운 기세로 추궁하고 있다.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유월영이다.그러니까 저 말은......별장에서든 룸에서든을 막론하고 전부 유월영을 도와주고 싶어 직접 나선거다?유월영은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는 이내 그날 밤 별장에서
연재준이 콧방귀를 뀌며 유월영이 건네주는 숟가락을 건네받는다. 유월영이 들어오는 하정은에게 손을 흔든다.“비서님, 여기요.”하정은이 미소를 띠며 다가와 합석한다.더이상 사적인 애기를 할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던 연재준은 그 뒤 단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는다.강뚝 근처에 자리잡고 있는 음식점은 식사를 마친 밤 열한시가 되니 인적이 드물다.차에 올라타려는 유월영을 연재준이 붙잡는다.“산책해, 소화가 할겸.”“사장님 늦었어요. 내일 출근해야 돼요 저.”연재준이 유월영의 손목을 잡은 손에 힘을 꽉 준다.“밥 먹고 바로 자는게 어딨어?” “사장님 참 아는게 많네요.” 유월영은 손을 빼냈지만 결국 어쩔수 없이 그를 따라 나선다.연재준은 쌀쌀한 밤바람에 기다란 옷깃을 흩날리며 마침 그림자로 유월영을 가린다.“괴상하게 시비 거는거야, 아니면 사랑 싸움하는거야?”“......”윤영훈의 입에 발린 대화 스킬은 아직 습득 못했나 보지? 대답하지 않는 쪽을 선택하는 유월영이다 .가뜩이나 서늘한 밤바람은 강뚝에선 더욱 살을 에일듯이 추워졌다. 겉옷을 입고 있었지만 여전히 추웠던 유월영은 두 손을 주머니에 넣고 꽉 움켜쥔다. 이런 날씨에 웬 말도 안 되는 산책이야?그러자 연재준이 끼고 있던 검정색 가죽 장갑을 건네준다.유월영은 이를 덜덜 떨며 장갑을 받아쥔다.장갑은 유월영보다 한참이나 컸고 안에 있는 보들보들한 털엔 아직도 연재준이 온기가 남아있어 마치 그의 손을 잡고있는것 같은 느낌을 줬다.그 느낌에 깜짝 놀라 장갑을 냅다 빼버리는 유월영이다.연재준은 어느새 저기 앞에까지 가 전화를 받고 있었고 통화 소리가 바람을 타고 유월영의 귓가에 흘러들어온다.“......서안 출장, 무슨 일인데. 조 비서가 도와줄거야.보기 드문 나긋한 목소리로 말하는걸 보면 한 사람 밖에 없다.백유진이다.뭔가 형체가 보일듯 말듯하던 생각이 순식간에 연기처럼 사라져 버린다.고개를 숙이고 그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떨어져 걷는 유월영이다.휴대폰을 꺼내든 유월영은 우연
유월영이 다녔던 고등학교는 신주시에서도 1, 2위 자리를 다투는, 명문가 자제들이 다니기로 소문난 “귀족학교”였다. 유월영이 그런 학교에 들어갈수 있었던거 우월한 성적때문이었다.명문가 도련님, 아가씨들로 넘쳐나던 학교는 오늘 어느 도련님이 운동기재들을 새로 바꿔준다거나, 내일 어느 아가씨가 음악교실 피아노를 새로 바꿔준다거나 하며 풍요로운 생활력을 과시하기가 일쑤였다.한때는 매일마다 누군가 전교생에게 디저트와 고급 버블티를 대접한 적도 있었다.쓸데없는 물건보단 먹는게 무엇보다 실용적이라고 생각했던 유월영은 그들의 대접에 감사해 했고 방과시간 내내 배가 두둑해져 있곤 했다.근데 대접했던게 누구였더라?“뭘 봐? 안 탈거야?”이내 시선을 거두고 차에 올라타는 유월영이다.내내 말이 없던 두 사람이지만 호텔에 거의 다 와갈때 연재준이 먼저 입을 열었다.“겨우 밥 한끼로 우리 사이 얽히고 설킨 감정들 무마시키려 하지마.”역시 그를 속일순 없었던 유월영이 모른척 묻는다.“사장님 아직도 뭘 바라세요?”연재준은 질문에 대한 대답은 커녕 동문서답을 한다.“그 뒤론 왜 안 췄어? 전문적으론 안 배웠고?”배우긴 했었다.꽤나 입에 풀칠할만했던 형편에 부모님은 세 자매의 취미라면 발벗고 나서 기회를 마련해주시곤 했었다.대답없는 유월영을 연재준이 놀려댄다.“현시우 떠나서?”깜짝 놀란 유월영이 눈이 휘둥그래져서 그를 바라본다.서안의 겨울이 제 아무리 춥다 한들 연재준의 얼음장같은 눈빛보단 덜 추울거다.“걔 없어서 안 춘다고 네가 그랬던것 같은데?”다른 사람이 이런 말을 했더라면 상대가 줄곧 유월영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며 이상한 마음을 품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그 말을 한 사람이 연재준이라면 타깃은 다름아닌 현시우로 바뀐다.앞서 영안에서 진작에 연재준이 현시우에게 적대심을 품고있다는걸 눈치챘었지만 한참이나 지난 사소한 일들 하나에까지 이렇게 집착하고 있을줄은 생각지도 못했다.유월영이 한참 뜸을 들이다 설명한다.“고2, 고3에선 공부압력때문에 배울
하긴, 서정희가 이틀밤 제대로 못 잔다면서 뭐라고 했으니까 다른데로 옮겨갔겠지.신주 연씨 가문 외동아들에 해운 그룹 사장이 그럴리가 없을테니까.혼자 방으로 올라간 유월영은 쉬지도 않고 바로 옷을 가지고 욕실로 들어간다.따뜻한 물이 몸을 타고 흘러내리며 하루동안 쌓인 피로를 쓸어내려간다. 오늘 하루 일들을 되돌아보는 유월영의 머릿속엔 유독 묘하고 이상한 연재준에 생각이 더욱 피어오른다.뭔가 진짜 달라진 느낌?그 생각에 얼굴에 물을 확 끼얹어버리는 유월영이다.자연속 많은 동물들은 사냥감을 유혹해 단번에 숨통을 끊기 위해 자신의 모습을 위장하기에 익숙하다. 이를테면 호수 아래의 악어나 숲 속의 호랑이처럼.거기에 좋은 인간으로 위장한 연재준도 포함해서 말이다.유월영은 연재준이 자신을 돌려세우기 위해 미끼를 던지고 있다고 여겼다.고등학교에 관한 거의 모든 기억을 끄집어 내봤지만 거기에 연재준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안 된다, 더 이상은 안 된다. 더 나아갔다간 그의 수에 넘어갈지도 모른다.유월영은 몸을 깨끗이 닦고 잠옷을 입은채 밖으로 나간다.......사실 유월영의 추측이 틀렸다.어젯밤 연재준은 늦게까지 드라이브를 하고 여전히 유월영이 있는 그 호텔에 묵었다.이튿날 아침, 뷔페로 가려는 그에게 하정은이 말한다.“유 비서님 오늘 급히 출근하셔서 종신 그룹 협력건 정리하시느라 아침도 거르셨습니다.”그 말에 갈 생각이 없어진 연재준은 바로 1층으로 내려가버린다.이내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마자 앞엔 서정희가 서있는다.서정희가 이국적인 이목구비를 뽐내며 미소를 지어보인다.“재준 씨, 마침 올라가려고 했는데. 아침은 먹었어요?”“아니.”연재준이 밖으로 걸음을 옮기자 서정희가 그의 뒤를 곧장 따라간다.“나도 안 먹었는데. 그러지 말고 우리 밖에서 먹어요. 호텔 조식은 별로라서 입에도 안 맞았을거잖아요.”연재준이 덤덤하게 말한다.“입에 안 맞을것도 없어.”“하긴, 재준 씨 가끔은 입맛 완전히 바뀔때도 있더라고요. 우리 만날때 길거리
유월영은 이틑날 오전 부회장과 약속이 잡혀있다.이른 아침부터 출근한 유월영은 법무부, 상업부와 간단한 회의를 마치곤 함께 부회장을 맞아주러 1층으로 내려간다.부회장이 더이상 계약을 파기시킬 엄두는 없다는걸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그의 체면을 깎아내릴순 없으니 말이다.마침 부회장의 차량을 보고 다가가려고 하는 찰나.“유월영 씨!”자신에게 다가오고 있는 서정희를 보며 미간을 찌푸리는 유월영이다.“할 말 있으니까 어디서 얘기라도 하죠?”“서 아가씨, 죄송합니다만 지금은 고객님 만나야해서 시간이 없네요.”“둘이서 얘기하기 싫으면 다 보는 앞에서 얘기할까요?”부회장은 어느새 차에서 내려있었고 유월영은 어쩔수 없이 매니저에게 먼저 가서 맞아주라는 눈짓을 해보인다. “아가씨, 첫째로 전 출근중이니 업무엔 방해되지 말아주시고요. 둘째로 저희 사이에 사적으로 나눌 대화 같은건 없으니 가주시죠.”말을 끝내고 부회장에게로 다시 돌아가려는 유월영의 손을 서정희가 덥석 잡아버린다!“유월영 씨! 일 저질러놓고 발뺌하는게 어딨어요! 나 신주로 쫓아버리라고 재준 씨한테 말한거 당신이잖아!”연재준때문에 찾아왔다는걸 진작에 알고 있은 유월영이 덤덤하게 말한다.“아가씨, 둘 사이 문제는 저랑은 상관없습니다. 원망할 사람은 따로 있으니 사장님한테 가서 말씀하셔야......”“나랑 재준씨 고등학교때 만났던거도 알고! 이번에 재회하려고 들어온것도 알면서! 일부러 우리 사이 이간질한거잖아!”서정희가 갑작스레 언성을 높인다.가뜩이나 인파가 많은 회사 입구에서 그렇게 고함을 질러더니 다들 자연스레 둘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워낙 가정교육도 잘 받았거니와 공사구분이 확실하던 서정희는 연재준의 매정한 거절에 이미 반쯤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주위를 둘러보던 유월영은 더는 이대로 있으면 안 된다 싶었는지 매니저를 부른다.“매니저님, 일단 아가씨 데리고 접대실로 올라가지죠. 전 얼른 따라갈게요.”매니저가 서정희를 붙잡아 끌어당긴다.“아가씨......”서정희가 그녀의 손을 딱
“......제가 계속 협상해서 빠른 시일내로 사인 받아내겠습니다.”할수 있는 약속이 이것밖에 없는 유월영이다.신현우가 잠시 유월영을 쳐다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인다.“하루 빨리 해내요.”“네.”뒤돌아 나가려는 유월영의 뒤통수에 신현우가 한마디 더 보탠다.“이번달 보너스는 없어요.”’“......”속으로 서정희를 미친년이라고 욕해대는 유월영이다.사무실에서 나와 자리로 돌아가서도 화는 쉽게 가라앉지 않는다.몇년동안 한번도 보너스를 깎인적도 없거니와 이번달은 SK그룹에 입사한 첫 달인데 계약도 못 따낸건 물론이오, 회사의 가십거리로 등극했으니 앞으로의 길이 순탄할리가 없었다!겨우 진정을 시킨채 목을 축이려 하지만 보온병은 텅 비어있었고 어쩔수 없이 탕비실로 걸음을 옮기는 유월영이다.자고로 탕비실, 화장실은 수군수군 가십을 떨기 가장 좋은 곳이 아니던가. 아니나 다를까 탕비실로 다가가니 두 동료가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방금 그 분 해운 서대리님 맞지? 대리님이 거짓말 할리는 없지 않나?”“그러니까 그 말은 유 비서님이 해운에서 나온게 연 사장님이랑 헤어져서다?”“헤어졌다고? 그건 남자친구 한테나 쓰는 말이지. 연 사장님은 여자친구라고 공개했던 사람이 없다고 들었는데?”“그럼 설마 공개적으로 알려지진 않은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건가?”“박수진이 그랬잖아. 신씨 가문 넷째 도련님 추천으로 바로 들어온거라고. 거기다가 윤 사장님까지. 쯧쯧, 우리 수석 비서님 쉽지 않으시겠네~”“......”윤영훈이 집쩍댔을때부터 이런 결과를 예상해왔던 유월영이지만 역시나였다.유월영은 또다시 도마에 오르는걸 막기 위해 탕비실로 들어가지 않고 다시 자리로 돌아간다.한참 뒤, 유월영이 연재준에게 문자를 보낸다.“사장님, 사장님 사람들 잘 관리하세요. 서대리 다시 한번 여기 와서 소란 피우면 신고할겁니다.”답장이 없는 연재준 대신 윤영훈의 메시지가 튀어나온다.“유 비서, 오늘 점심식사 어때요? 마침 유 비서 회사 근처라.”잠시 고민하던 유월영이
윤영훈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말한다.“당연하지, 내 동생인데.”“오늘 한 말 잊지 마.”이내 서정희는 매몰차게 전화를 끊어버리고 윤영훈은 화가 나면서도 어이 없었는지 웃음을 터뜨린다. 누가 서정희를 괴롭힐수 있기라도 할까?이모부, 이모 사이의 보물 같은 외동딸인데, 그런 살점과도 같은 딸을 감히 누가 생각없이 괴롭힐수 있단 말인가.......퇴근 뒤, 유월영이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지하철 역으로 걸어간다.조서희가 요즘 일은 어떻냐며 메시지를 보내왔던거다.기분이 별로였던 유월영이 그녀에게 오늘 일들을 하소연한다. 한 성깔하는 조서희는 속이 뻥 뚫릴 정도로 서정희를 신랄하게 욕해대더니 이내 이런 결론을 내린다.“연재준 좋아하는 사람들은 다 제정신이 아닌것 같아.”이를테면 백유진이나 서정희나......어?갑자기 말을 잘못했다는 생각에 정신이 번쩍 든 조서희가 다급히 입을 막는다.“읍, 넌 빼고.”“나 뺄 필요 없어. 나도 전엔 정상은 아니었지 뭐.”“젊었을때 쓰레기 같은 남자 안 만나는 여자들이 어딨냐. 넌 이미 빠져나왔으니까 포함시키면 안 되지.”유월영도 조금 기분이 풀렸는지 입꼬리를 스윽 올린다.이내 코너를 돌때 갑자기 앞을 막아선 건장한 체격의 남자 두 명에 본능적으로 휴대폰을 꽉 움켜쥐며 경계심을 곤두세우는 유월영이다.허나 그들은 그저 길을 물으려는 행인같다.“아, 안녕하세요. 길 좀 물을게요. 영안 빌딩 이 근처에 있는거 맞아요?”유월영이 그들의 휴대폰에 켜져있는 지도를 들여다본다.그리고는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데.“죄송합니다, 저도 잘 모르겠네요. 지도로 못 찾으시겠어요?”“지도 보고 온 건데 아무리 찾아봐도 모르겠네요.”금방 서안에 온 유월영 역시 알리가 없었다.“다른 분들한테 물어보시죠.”남자가 아랑곳하지 않고 휴대폰을 들이민다.“그럼 아가씨가 좀 봐줘요. 어느쪽으로 가야돼요?”유월영의 그의 휴대폰 지도를 터치한다.“보행자 모드로 바꾸면 화살표 뜰거예요. 그거 보시면서 따라가면 돼요.”“아!
유월영이 무뚝뚝하게 말한다.“사장님, 전 지하철 시간 맞춰야 해서요. 먼저 가겠습니다.”연재준은 유월영을 막아서지 않는다. 허나 겨우 몇미터 가지도 못한채 발목을 잡아끄는 경적소리에 의해 결국 멈춰서 복잡하고 짜증 섞인 심정으로 뒤를 돌아보는 유월여이다.연재준은 여전히 아무 말도 없이 가로등 불빛 아래 가만히 서있기만 한다.“......”뒤에서 경적소리를 울려대던 차주는 똑같은 숫자 배열로만 이루어진 값비싼 앞차 번호판을 보고는 연재준이 쉽게 건드릴만한 사람이 아니란걸 눈치챈것 같다.이를 꽉 깨문 유월영이 결국 차에 올라탄다.문이 닫히자 기사가 묻는다.“사장님, 어디로 모실까요?”“너한테 묻잖아.”유월영은 어쩔수 없이 자신의 휴대폰으로 지도를 켜 기사의 네비게이션에 입력해준다.“하 비서님은요?”“너한테 시비 건 사람 신주 데려다주러 갔어.”연재준이 다리를 꼬고 앉아서는 이마를 만지작거리며 말한다.“사과하려면 이 정도 성의는 보여줘야지.”......하정은이 서정희를 찾아낸 곳은 다름 아닌 바였다.서정희는 벌써 두 세병은 동낸듯 취기가 잔뜩 올라와있다.“아가씨.”“응?”서정희가 반쯤 풀린 눈으로 하정은을 바라본다.“하 비서네요. 하 비서가 여긴 웬 일로? 재준 씨가 보낸거예요?”“네, 서안에서의 업무는 끝나셨으니 저더러 오늘 밤으로 신주 데려다 주시랍니다.”“서안을 떠나라? 참나......”서정희가 몸을 비틀대며 일어난다.“나 안 가! 왜 내가 유월영한테 자리 내줘야 하는데? 싫다고!”“아가씨, 사장님 성격 아시잖아요. 하란대로 안 하는거 제일 싫어하십니다.”서정희가 또다시 소파에 털썩 주저앉는다.“......오늘 밤에 꼭 가야 돼요?”“네.”“근데 내일 무슨 날인지 알아요?”하정은이 고개를 저어보이자 서정희가 대답한다.“내일은 내 생일이라고.”잠시 주춤하는 하정은이다.“미리 생일 축하드립니다.”서정희가 고개를 들고 입술을 꽉 깨물며 하정은에게 묻는다.“생일만 보내고 다시 가면 안 돼요? 오빠가 말은
“할 수 있지, 할 수 있어. 연이가 원하는 거라면 아빠는 꼭 해낼 거야.”윤영훈은 목이 메어 기쁨에 눈물을 흘렸다.주월향은 딸에게 그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았고 오히려 아빠가 누군지 알려주며 7년 동안 떨어져 있었음에도 딸이 그를 낯설게 느끼지 않도록 해줬다.‘이 세상에 이런 여자가 또 어디 있을까?’그러나 윤영훈은 주월향의 이런 행동이 자신을 받아들인다는 뜻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집안에 들어서자 연이가 활기차게 떠들었다.“엄마!”주월향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연이야, 배고프지? 어제 배추전 먹고 싶다고 했잖아? 방금 만들어서 아직 따뜻해. 간식이니까 너무 많이 먹으면 안 돼, 알았지?”아이가 환호하며 말했다.“고마워요, 엄마!”주월향은 윤영훈을 힐끗 보며 말했다.“당신도 먹어볼래요?”윤영훈은 그녀 쪽으로 다가가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월향아, 미안해...”“나한테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아도 돼요.”주월향이 그의 말을 끊었다.그리고 딸을 한 번 보더니 아이가 듣지 못하도록 마당으로 걸어 나갔다.윤영훈도 그녀를 따라 나갔다.주월향은 식물에 물을 주며 담담하게 말했다.“7년 전, 영훈 씨가 감옥에 가기 전에 우리 모녀를 위해 모든 걸 준비해 줬어요. 돈, 집, 차까지 모두 마련해줬죠. 게다가 내가 당신을 한 번 배신하기도 했으니 당신에게 상처 준 대가로 다 갚았다고 볼 수 있겠죠. 우리는 7년 전에 이미 정리됐어요. 그러니 서로에게 빚진 건 없어요.”윤영훈은 숙연한 마음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주월향이 돌아서서 그를 마주 보며 말했다.“이 7년 동안 내가 감옥 면회를 가지 않은 이유는 더 이상 먼저 다가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당신이 오늘 출소한다는 건 알고 있었고 그래서 한 번 더 기회를 주기로 했죠. 당신이 날 찾으러 오지 않았다면 그냥 이대로 끝났을 거예요.”“하지만 영훈 씨는 나를 찾아왔어요. 그래서 지금 당신한테 물어보고 싶어요. 여기 남을 건가요?”“...내가 여기 남아
“됐어요, 사촌 오빠, 얼른 가세요. 곧 비가 올 것 같아요. 이모와 이모부께는 제가 잘 지낸다고 전해주세요. 여기서 부족한 것 하나도 없으니 걱정하지 마시라고요.”‘사촌 오빠?’남자는 주월향의 남편이 아니라 사촌 오빠였다.거의 죽어가던 윤영훈의 마음이 한순간에 되살아났다.그는 참지 못하고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뻔했다.그러나 그 사촌 오빠가 집을 나서자 윤영훈은 재빨리 수박 덩굴 아래로 몸을 숨겼다.물론 그 남자가 남편이 아니라고 해서 주월향에게 남편이 없다는 뜻은 아니었다.하지만 이 반전만으로도 그는 잠시나마 안도감을 느꼈다.그때 머리 위의 수박잎이 갑자기 누군가에 의해 젖혀졌다.윤영훈은 순간 얼어붙었다. 본능적으로 얼굴을 가리고 도망치려 했지만 뒤에서 들려오는 청아하고 차분한 목소리에 그의 발걸음이 멈췄다.“내가 아까 한 말 못 들었어요? 곧 비가 올 것 같으니 빨리 벼부터 거두는 걸 도와줘요. 비 맞으면 이번 농사는 다 망해요.”윤영훈은 그 자리에 꼼짝 않고 서 있었다.주월향의 말투는 너무나도 자연스러워 마치 그가 7년 동안 감옥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잠깐 외출했다가 돌아온 사람처럼 들렸다.천천히 돌아선 윤영훈을 주월향은 담담하게 바라보며 갈퀴를 건넸다.“모두 한데 모아주세요. 내가 자루를 가져올게요.”윤영훈은 멍하니 그녀를 따라 집으로 들어갔다.그는 감옥에서도 농사일을 해봤기에 이런 일이 낯설지 않았다.하지만 일을 하다가도 자꾸 주월향의 눈치를 살폈고 그녀의 의도를 이해하려 애썼다.주월향이 입을 열었다.“지금 나는 온라인에서 요리 블로거로 활동하고 있어요. 팔로워가 몇백만 명은 되죠. 영상 편집이 아직 안 끝났으니 벼를 다 거두고 나면 이 앞에 초등학교에 가서 연이를 좀 데려와 주세요.”“지안 초등학교가 어디 있는지 알죠? 몰라도 괜찮아요. 핸드폰 내비게이션 켜고 찾아가면 돼요.”윤영훈이 여전히 멍하니 있자 주월향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내 말 들었어요?”“들었어...”주월향은 거둔 벼를 집 안으로 가져가며
윤영훈은 10년 형을 선고받았다.모범수로 인정받아 감형된 덕분에 실제 복역 기간은 7년 10개월이었다.출소하는 날, 그를 마중 나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감옥 문 앞에 서서 바라본 세상은 이미 많이 변해 있었다. 그의 모습도 더 이상 과거의 의기양양하고 자유분방했던 그 사람이 아니었다.윤영훈은 감옥 문 앞에서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출소를 반년 앞두고 그는 출소 후의 삶을 계획하려 애썼지만 막상 그 순간이 닥치자 머릿속은 텅 비어버렸다.윤씨 가문은 이미 몰락한 지 오래였다.2년 전, 그의 아버지는 감옥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교도관들의 배려로 그는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석할 수 있었다.그곳에서 그는 가난에 시달리는 친척들을 보았다.가문의 보호막 없이 근근이 살아가는 그들에게 윤영훈은 짐이 되고 싶지 않았다.그의 사촌 서정희는 출소 후 찾아오라 했지만 그녀에게도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윤영훈이 가장 만나고 싶었던 사람은 주월향이었다.그녀와 딸 연이를 보고 싶었지만 갑작스러운 등장이 그녀에게 폐를 끼칠까 두려웠다.게다가 그녀는 이미 자신을 만나고 싶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재판을 받던 날에도 주월향은 법정에 나오지 않았다.7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으니 그녀는 분명 새로운 삶을 시작했을 것이고 어쩌면 그녀 곁에는 그녀를 사랑하는 남자가 있을지도 모른다.남자가 없더라도 모녀는 안정적이고 풍족한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윤영훈은 감옥에 가기 전 그녀에게 충분한 재산을 남겼고 그녀가 이를 잘 활용했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그런 상황에서 자신의 등장은 적절하지 않았다.하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이 비열하다고 느꼈다.주월향을 한 번이라도 보고 싶다는 욕망을 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멀리서 그녀를 한 번 보기만 해도 만족하겠다고 다짐한 윤영훈은 감옥에서 일하며 모은 돈으로 기차표를 사서 그녀의 고향으로 향했다.그곳은 산과 물이 어우러진 작은 마을이었다.기차역에서 그녀의 집까지는 버스로 2시간
“그래도 돼?”강수영은 신현우가 미쳤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그는 정말로 그녀의 애인이 되었고 강수영은 반년 넘게 그와 몰래 관계를 이어갔다.강수영은 일부러 자신이 이미 남편과 이혼했다는 사실을 숨기고 매주 몰래 찾아오는 신현우를 지켜보며 즐거워했다.가끔 갑자기 여행을 떠나고 싶어지면 그녀는 짐을 싸서 바로 떠났다.그럴 때마다 신현우는 알림도 받지 못한 채 허탕을 치고 돌아가야 했다.친구들은 강수영이 신현우를 가지고 노는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녀는 이 상황을 즐길 뿐이었다.현재 신현우의 눈에는 질투와 시기가 가득 차 있었고 늘 당당하던 그의 얼굴에는 답답함과 우울함이 서려 있었다.강수영은 자신이 그의 곁에서 겪었던 모든 억울함과 상처를 이렇게 풀고 싶었다.이번 주, 강수영은 영국으로 떠날 예정이었고 신현우는 그녀가 남편을 만나러 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겉으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날 밤 강수영이 화장실에 가려고 일어났을 때 그는 거실에서 홀로 술병을 비우고 있었다.엉망이 된 그의 모습은 평소와 달리 초라해 보였고 강수영은 저도 모르게 마음이 조금 약해졌다.그녀는 오랜 시간 방치해둔 녹음기를 꺼냈다. 그건 예전에 신연우가 건넨, 신현우의 음성이 담긴 파일이었다.그녀는 당시 결혼 생활에 전념하고 싶어 듣지 않았던 녹음을 재생했다.녹음기에서는 술에 취한 신현우의 흐릿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그것은 강수영의 결혼식 날, 신현우가 취한 상태에서 남긴 말들이었다.신연우가 그를 말렸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수영이가 내 앞을 그렇게 지나갔어. 남편 팔짱을 끼고 날 쳐다보지도 않았어.”“내가 정말로 그녀를 신경 쓰지 않고,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을까? 아니야, 난 수영이를 좋아했어. 다만 그녀가 집으로 돌아가길 바랐을 뿐이야.”“나 때문에 부모님과 친구들과도 관계를 끊었잖아. 너무 어리석었어. 나는 그런 가치를 줄 만한 사람이 아닌데...”“다 내 잘못이야. 처음부터 더 깊은 관계로 나아가지 않았더라면 수영이가 이렇게 집착하지
두 사람은 서쪽으로 스위스 알프스를 찾아가 산맥의 낭만을 만끽하며 자연 보호구역에서 아름다운 야생동물들을 만났다.북쪽으로는 핀란드의 로바니에미와 캐나다의 퀘벡으로 향해 겨울 축제와 북유럽의 신비로운 매력을 경험하고 끝없이 펼쳐진 설원과 오로라의 장관을 즐겼다.그러던 중, 한 여행지에서 강수영은 신연우를 우연히 마주쳤다.오래된 친구라 할 수 있는 사이였기에 두 사람은 함께 저녁을 먹었다.식사 후, 신연우는 그녀에게 녹음 파일을 건네며 말했다.“이 안에는 우리 형의 음성이 들어 있어. 들을지 말지는 네가 결정해. 하지만 듣는다면 네 결혼 생활에 영향을 줄 수도 있어.”그는 이어 덧붙였다.“형이 요 몇 달 동안 상태가 많이 안 좋았어. 큰 병을 앓아 체중이 많이 빠졌고, 회사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어. 최근에서야 조금 회복됐지.”강수영은 특별히 반응하지 않고 녹음 파일을 받았지만 끝내 듣지 않았다.신혼여행을 마치고 부부는 지성으로 돌아와 결혼 후의 삶을 시작했다. 하지만 2년도 채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이혼 절차를 밟게 되었다.두 사람 사이에는 큰 갈등이 없었다. 강수영의 남편은 여전히 훌륭한 사람이었고 이혼의 원인은 문화적 차이와 생활 습관의 차이였다.한 사람은 한국식 사고방식으로, 다른 한 사람은 서양식 사고방식으로 자라며 서로 적응하려고 노력했지만 끝내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그들은 평화롭게 헤어졌고 이혼 후에도 좋은 친구로 남았다.부모의 잔소리를 피하기 위해 이혼 사실을 비밀로 하기로 합의한 후 강수영은 다시 전 세계를 여행하기 시작했다.그러다 각 나라, 각 도시에서 신현우를 계속 ‘우연히’ 마주치게 되었다.세 번째 만남에서는 더 이상 참지 못한 강수영이 그를 조롱했다.“신 대표님, 이렇게 한가하신 줄 몰랐네요. 왜 자꾸 저를 따라다니시는 거죠?”“따라다닌 게 아니야. 우연일 뿐이야.”“우연이 이렇게 자주 겹칠 리가 있나요? 제가 바보인 줄 아세요?”차가운 미소를 띤 강수영에게 신현우는 화제를 돌렸다.“넌 왜 여기저기 여행
‘소은혜’에서 다시 ‘강수영’으로 돌아온 후, 강수영은 그 차가운 남자와 더는 아무런 관계도 없을 것이라고 믿었다.한눈에 반했던 감정은 결국 그녀의 인생을 망쳤고 다시는 그 남자와 얽히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그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했다. 파혼하고 집을 떠나 이름까지 바꾼 채 명분 없이 그의 곁을 지켰지만 세상 사람들은 그녀를 부끄러움을 모르는 여자라며 손가락질했다.그러는 동안 그는 가문 배경이 잘 맞는 귀한 집 아가씨와 결혼 준비를 하고 있었다.그녀는 스스로를 명문가의 딸에서 천한 첩으로 전락시켰지만 그에게선 차가운 시선만 돌아왔다. 그녀가 바친 모든 것을 알면서도 그는 온기 한 줌 나눠주지 않았다.강수영은 결국 깨달았다. 그 감정을 고집한 자신이 문제였다는 것을.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야 했다.그녀는 강씨 집안의 딸로 돌아왔고 그는 여전히 신씨 가문의 장남으로 남아 있었다.부모님은 그녀를 위해 맞선을 주선했고 두 가문 모두에게 이로운 자리였다.강수영은 더 이상 부모님을 실망하게 하고 싶지 않아 기쁜 마음으로 맞선에 응했다.맞선 상대는 영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훌륭한 조건을 갖춘 사람이었다. 나이도 비슷했고 배경도 잘 맞았다.며칠간 그와 시간을 보내본 그녀는 그가 괜찮다고 느꼈다. 특히, 그가 그녀에게 첫눈에 반했다고 고백했을 때는 묘한 감정이 들었다.누군가를 좋아하는 것은 너무나 고된 일이었기에 이번에는 누군가가 자신을 좋아해 주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알고 싶었다.그렇게 두 사람은 3개월간 교제했고 큰 문제 없이 잘 맞았다. 비록 심장이 크게 뛰는 설렘은 없었지만 세상 대부분의 결혼이 ‘적당함’을 기반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그녀도 알고 있었다.그 기준에서 본다면 그와의 결혼은 충분히 합리적이었다.결국 두 사람은 약혼했고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그러나 결혼식 당일, 초대받지 않은 불청객이 나타났다. 바로 신현우였다.그의 등장에 강수영은 잠시 굳어졌지만 이내 미소를 띠며 신랑과 함께 술잔을 들었다.
방금 중성화 수술을 받은 고양이는 축 늘어져 있었다.이승연은 고양이가 우울증에 걸릴까 봐 걱정되어 이혁재에게 맡기기로 했다.“경험 있는 네가 좀 맡아줘.”이혁재는 황당했다.“내가 무슨 경험이 있다고 그래!”이승연은 그를 잠시 바라보더니 담담하게 말했다.“처지가 비슷하잖아.”화가 난 이혁재는 이승연을 들어 신발장 위에 올려놓고 곱게 바른 립스틱을 번지게 했다.“전혀 비슷하지 않거든!”이혁재의 사무실.이혁재와 연재준은 일 얘기를 하고 있었고 두 아이는 옆에서 놀고 있었다.그때 이혁재가 무심코 고양이에게 한마디를 건넸다.“호두야, 누나를 잘 돌봐야 해.”기어다니기 시작한 윤아는 갑자기 호두의 꼬리를 잡았다.호두는 성격이 온순하고 사람을 좋아했지만 꼬리만큼은 예외였다. 그런데도 이번에는 이혁재의 말 때문인지 꼬리를 잡힌 채로 억울한 듯 야옹 소리만 냈다.윤아는 깔깔 웃으며 꼬리 끝을 입에 넣으려 했고 그제야 호두는 꼬리를 빼내더니 아기에게 돌아서서 야옹 소리를 내며 경고했다.마치 “입에 넣으면 안 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그러자 윤아는 호두를 향해 돌진하며 그를 덮쳤다.두 아빠가 일을 마치고 아이들을 찾으러 갔을 때 윤아는 카펫 위에서 잠들어 있었고 호두는 듬직한 몸을 베개 삼아 윤아를 받치고 있었다.그 동화 같은 장면에 연재준과 이혁재는 저도 모르게 아빠 미소를 지었다.“고양이가 어린이를 알아본다더니 진짜인가 봐.”퇴근 시간이 되어 이혁재는 호두를 데리고 이승연의 사무실로 향했다.이승연은 호두를 품에 안고 기뻐하며 입을 맞췄고 이어 호두가 이혁재에게도 뽀뽀하도록 했다.갑작스러운 입맞춤에 이혁재는 고양이 털을 한가득 삼키고 서둘러 뱉어냈다.“퉤퉤퉤.”그 순간, 호두도 갑자기 토하기 시작했다. 단순히 흉내를 낸 게 아니라 실제로 무언가를 토해냈다.이혁재는 어이가 없어 발끈했고 이승연은 웃음을 참지 못해 의자에 쓰러지듯 폭소했다.사실 고양이는 털을 핥으며 스스로를 청소하는 습성 때문에 위에 털 뭉치가 생겨 종종 토하곤
작은 고양이는 케이지 구석에 웅크리고 있었고 치료로 인해 털이 대부분 깎인 채 볼품없는 모습이었다.이혁재가 싫은 소리를 내자 새끼 고양이는 힘겹게 눈을 떴다. 그리고 이승연을 알아본 듯 비틀거리며 케이지 가장자리로 다가와 그녀를 향해 야옹 울었다.이승연은 손가락을 내밀어 고양이를 살짝 만졌다. 그러자 고양이는 꿈틀거리며 그녀의 손가락에 머리를 가져다 대었다.그녀는 미소 지었고 이를 지켜보던 이혁재가 말했다.“여보, 얘 다 낫고 나면 집에 데려가 키우자. 이렇게 작고 못생긴 애가 혼자 힘으로 먹을 걸 찾기도 힘들고, 다른 고양이들이 받아주지도 않을 거야. 우리가 돌보지 않으면 얘 어떻게 살겠어.”이승연도 같은 생각이었다.두 달 후, 고양이는 건강을 회복했다.이혁재는 직접 고양이를 씻기고 구충한 뒤 집으로 데려갔다.시간이 지나면서 고양이는 털이 윤기 나게 자랐고 살이 올라 뼈만 앙상했던 이전 모습과는 완전히 달라졌다.결국, 고양이는 기름지고 윤기 나는 털을 자랑하며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 이혁재의 몸 위로 덮치는 대형 고양이가 되었다.“이런 젠장!”이혁재는 고양이의 기습에 또 당했고 숨이 턱 막힐 뻔했다.고양이가 도망치려 하자 그는 재빨리 붙잡아 들어 올리며 따졌다.“너 자신이 얼마나 무거운지 전혀 모르는 거야? 아니면 정말 날 깔아뭉개려고 작정한 거야?”고양이는 억울하다는 듯 야옹거리며 반응했다. 그러나 고양이가 이승연에게는 절대 이런 짓을 하지 않았기에 이혁재는 고양이가 일부러 자신을 괴롭힌다고 생각했다.고양이는 이승연이 일할 때 그녀의 발등 위에 앉아 체온으로 발을 따뜻하게 해주었다.그녀가 서류를 검토할 때는 네 발을 모아 단정한 자세로 그녀 곁에 앉아 ‘독서’에 동참했다.때로는 앞발로 서류를 톡톡 두드리며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중요한 코멘트’를 남기기도 했다.이혁재는 고양이를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고양이를 뒤집어 배를 위로 한 채 들어 올려 얼굴을 고양이 배에 묻고 한 번 흡입했다.고양이는 저항하며 네 발로
아이를 가지지 않기로 합의한 후, 이혁재는 정관 절제술을 받았다. 흔히 말하는 ‘피임 수술’을 통해 아이를 갖지 않겠다는 결정을 실행에 옮긴 것이다.이혁재는 이 일을 이승연에게 알리지 않았다. 관련 정보를 철저히 조사한 뒤, 직접 차를 몰아 병원으로 갔다.수술은 간단했고 외래 진료에서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수술을 마친 그는 바로 퇴원했고 그날 오후에는 몇 시간 동안 회의를 열기도 했다. 약간의 불편함이 있었지만 큰 문제는 없었다. 그리고 집에 돌아온 후에는 그 불편함조차 완전히 사라졌다.수술 후 한 달이 지나서야 이혁재는 가벼운 농담처럼 이 일을 이승연에게 털어놓았다.이승연은 한동안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평소 재빠른 두뇌 회전과 날카로운 눈치로 유명한 그녀였지만 이번에는 말을 잇지 못했다.이혁재는 그녀가 ‘수술’이라는 단어에 겁을 먹었다고 생각하며 웃었다. 혹시 일이 심각하다고 오해했을까 봐 그녀를 안고 달래며 자세히 설명했다.“여보, 내가 요즘 아이를 갖는 게 얼마나 두려웠는지 몰랐지? 피임을 해도 혹시 실수라도 생길까 봐 계속 걱정했어. 만약 사고가 생기면 낳든 낙태하든 둘 다 누나 몸에 무리가 갈 거잖아. 그래서 아예 근본적으로 위험을 없애는 게 낫다고 생각했어.”이승연은 그의 허리를 감싸안고 이마를 그의 가슴에 기대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도 이 수술 알아. 우리 아빠가 받았거든.”그녀는 차분히 이야기를 이어갔다.“그 시절에는 보통 여자가 피임 수술을 받곤 했는데 우리 아빠는 알아보니 여자가 받는 수술이 훨씬 위험하고 몸에 무리가 된다는 걸 알게 됐대. 그래서 엄마가 고생하는 걸 차마 볼 수 없어 자신이 받았지.”“아빠는 우리 동네에서 피임 수술을 받은 유일한 남자였고 사람들은 우리 아빠를 세상에 둘도 없는 좋은 남자라고 칭찬했어. 엄마도 복 받은 거라고 하셨고.”이혁재는 그녀가 아버지를 칭찬하며 은근히 자신도 칭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웃음을 터뜨렸다.그날 밤, 소파와 카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