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서준의 목소리와 함께 푸른 검광이 번쩍였다.매미 날개처럼 얇은 푸른 검광이 이 이국 강자의 목을 스쳐 지나갔다.그러자 목에서 피가 천천히 흘러내리며 바닷물 위로 떨어졌다.곧이어 이족의 머리가 바닥으로 떨어져 바닷속으로 가라앉았다.이족의 눈에는 끝없는 억울함과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남아 있었다.해외 강자인 자기가 이렇게 쉽게, 그것도 겨우 20대 초반의 청년에게 죽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맙소사... 이게 용존의 실력인가? 너무 공포스러운데?”“저 붉은 머리 녀석은 지의방 35위일 거야, 게다가 육급 정점 대종사잖아.”“내 눈으로 직접 보지 않았다면 용존이 육급 대종사를 이렇게 손쉽게 죽일 줄은 상상도 못 했을 거야.”바다 위에 있던 호국사들은 이 장면을 보고 차가운 숨을 들이마셨다.아무래도 이건 평범한 무인이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진서준은 이제 겨우 스물다섯 살이었고 스물여섯 살 생일도 아직 지나지 않았다.스물다섯에 이렇게 무시무시한 실력을 자랑하는 무인이 몇 년만 더 수련하면 아마 대한민국 전역에서도 그를 상대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다른 해외 강자들은 눈이 시뻘겋게 충혈되어 분노에 찬 목소리로 진서준을 향해 알아듣기 힘든 외국어로 소리를 질렀다.그 모습을 보니 다들 분노와 슬픔으로 뒤섞인 감정을 분출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아쉽게도 해외 이족의 감정 따위는 진서준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누가 개미 같은 존재의 희로애락을 신경 쓰겠는가?“선배님들, 이제는 물러나 쉬십시오. 남은 건 전부 저에게 맡기십시오.”진서준은 아직 전장에 서 있는 여덟 명 정도의 호국사들을 바라보며 정중한 목소리로 말했다.이들은 전부 몸을 던져 나라를 지키는 사람들이니 존경을 받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진 마스터, 조심하십시오. 저기 남은 놈들은 절대 약하지 않습니다...”한 호국사가 소리 내어 진서준을 경고했다.남아 있는 해외 이족은 총 아홉 명이었다.그중 가장 강한 자는 칠급 대종사였고 가장 약한 자도 오급 경지였다.진서준이 천용
만약 1분 안에 역천신을 죽이지 못하면 이 이족 지선은 누구도 막을 수 없게 될 것이다.진서훈 일행이 죽은 후, 그다음 차례는 진서준과 호국사들이 될 것이다.“아무래도 그 기술을 써야겠어...”진서훈의 얼굴에 처량한 미소가 떠올랐다.이를 들은 예천우를 포함한 세 사람이 크게 동요하기 시작했다.“이기든 지든 마지막 검 한 방에 달렸군.”세 사람은 진서훈의 등 뒤로 다가가 손바닥을 그의 등에 올렸다.곧이어 세 사람은 체내 모든 선천강기를 동시에 진서훈에게 전달했다.선천강기가 전달되자 진서훈의 몸은 풍선처럼 점점 부풀어 올랐고 예천우를 포함한 세 사람은 얼굴이 종잇장처럼 창백해져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다.진서훈의 손에 든 현철로 만든 유연검이 미세하게 떨리며 은은한 빛을 뿜어냈다.역천신은 온몸의 근육이 긴장되어 발끝부터 서늘한 기운이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하지만 역천신은 진서훈 일행을 방해하지 않았다.이건 강자인 역천신이 자기 자존심을 과시하는 일종 수단이었다.진서훈 네 명에게 어떤 방법을 쓰더라도 결코 자기를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똑똑히 보여주려는 것이기도 했다.“나머진 전부 너에게 맡기겠어...”예천우가 말을 마치자마자 힘없이 바다 위로 쓰러졌고 송경식과 최현우도 뒤따라 쓰러졌다.세 사람이 쓰러진 그 순간, 진서훈이 검을 내질렀다.그 검격은 마치 10급 태풍처럼 모든 것을 휩쓸며 끊임없이 울부짖었다.찰나의 순간, 바닷물과 밤하늘이 두 조각으로 갈라졌다.이 무시무시한 검기를 본 역천신은 전력을 다해 포효했다.“나 역천신이 너희 같은 개미가 주제넘게 나무를 흔든 처참한 결과를 알려주마!”역천신의 몸에서 빛이 쏟아져 나와 그의 양손으로 모여들었고 그 빛은 하나의 보호막으로 변해 역천신의 앞을 가로막았다.쾅!검광이 역천신이 보여준 지선의 힘에 부딪히자 사방으로 끝없이 거친 파도가 솟구쳤다.그 파도는 천 미터를 넘게 뻗어나가며 진서준과 해외 강자들마저 흔들리게 했다.다들 그 여파 속에서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며 자기가
자기 앞을 막아선 개미 한 마리를 보며 역천신은 순간 분노에 휩싸였다.“꺼져!”냉랭한 눈빛을 번뜩이는 역천신은 호통치며 손바닥을 내리쳤다.콰직!뼈가 부러지고 근육이 찢어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진서훈 앞을 가로막았던 칠급 대종사는 온몸의 뼈가 부러졌고 강기가 완전히 고갈됐다.그 대종사는 낡은 천 조각처럼 바다 위로 힘없이 떨어졌고 입에서 끊임없이 피가 쏟아져 나왔다.이 광경을 본 진서훈과 다른 사람들은 분노가 치밀어 올라 머리가 터질 정도였다.죽어가는 낙타가 살아있는 말보다 크다는 말이 이 상황에 딱 맞아떨이지는 것 같았다.지금 역천신은 팔 하나가 잘려 나가고 체내 지선의 힘도 많이 소모되었지만 이렇게 심각한 상처를 입었음에도 칠급 대종사가 상대할 수 없는 인물일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호국사와 지선 사이의 실력 차이는 이토록 크단 말인가?다른 호국사들 또한 이 순간 깊은 절망에 빠졌다.지선의 힘은 역시 호국사들이 감히 감당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다음 한 방으로 네 놈을 지옥으로 보내주마.”역천신의 음침한 얼굴에는 살기가 가득했다.진서훈은 가슴 속에 온갖 불만과 분노가 들끓었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죽음의 순간이 찾아오기를 조용히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역천신이 손을 들어 올리자 체내 지선의 힘이 그의 손바닥에 맴돌기 시작했다.진서훈의 머리를 날려 버리려는 그 순간, 또 다른 형체가 갑자기 진서훈 앞에 나타났다.“개미 같은 것들이 끝까지 제 주제도 파악하지 못하고 덤비는구나. 어디서 굴러온 놈이 감히 날 막아보겠다고 설쳐대?”방금도 개미가 불쑥 튀어나오더니 또 다른 개미가 튀어나오자 역천신은 가슴속의 분노가 폭발하기 일보 직전이었다.하지만 이번에는 진서훈의 표정이 달라졌다.눈앞에 나타난 사람은 어리숙해 보이는 청년이었기 때문이었다.“서준아, 너 미쳤어?”자기 손자를 본 진서훈은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진서훈은 죽어도 상관없지만 진서준은 절대 죽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조금 전의 칠급 대종사와는 다르게
역천신이 아니라 누가 되었든 간에 이 상황에서는 끝없는 분노가 치밀어 오를 것이다.역천신의 눈에는 오직 넘치는 분노와 살기가 가득할 뿐, 더 이상 긴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지금 역천신의 목표는 단 하나, 바로 자기 분수를 모르는 개미 같은 놈들을 반드시 모조리 죽이겠다는 것이었다.역천신의 유일한 손바닥 위로 날카로운 풍날들이 떠올랐다.이 풍날이 지나가는 곳이라면 그게 건물이든 가장 강력한 장갑차든 전부 갈기갈기 찢겨나갈 것이다.진서준은 평온한 눈빛으로 역천신을 바라보며 손에 들고 있던 참선검을 서서히 거두었다.“검을 거두다니... 왜 저러는 거지?”이 광경을 본 모두가 이해하지 못하자 진서훈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봉호전에서 이 녀석이 말했었어. 자기는 검도를 그다지 능숙하게 다루지 못한다고...”검도를 잘하지 못한다니, 모두가 어안이 벙벙해졌다.본인이 능숙하지 못한 방식으로 불과 몇 분 만에 아홉 명의 해외 강자를 처치했다고?이건 참 놀라운 일이었다.모두가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는 사이, 갑자기 진서준의 등 뒤에서 거대한 용 두 마리가 나타났다.이 두 마리의 용은 얼핏 보면 진서준의 몸속에서 자라난 것 같았다.우렁찬 용의 포효가 울려 퍼지자 하늘의 구름과 안개가 흩어져버렸다.곧이어 두 마리의 용은 다시 진서준의 몸속으로 사라졌고 그의 두 팔에 나타났다.진서준의 두 팔은 푸른 용과 붉은 용이 휘감고 있었고 그 빛은 이 어두운 밤을 대낮처럼 밝히고 있었다.“죽어!”역천신은 진서준의 두 마리 용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손에 모은 풍날을 내리쳤다.순간, 폭풍 같은 강풍이 만군의 힘을 담아 압도적인 기세로 진서준을 향해 돌진했다.“흩어져!”진서준의 목소리가 떨어지자 그는 전력을 다해 주먹을 내질렀다.쿵!풍날이 완전히 흩어진 순간, 진서준은 거대한 산처럼 미동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반면, 역천신은 뒤로 크게 한 걸음 물러났다.“이, 이럴 수가!”지선인 역천신이 한 걸음 물러난 모습을 본 모두가 눈알이 튀어나올 듯한 충격
만룡파천이라 불리는 이 기술은 장청결에 포함된 것이 아니었다.이 기술은 진서준이 자기 혈해를 각성시킨 후, 자연스럽게 진서준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이었다.그 느낌은 마치 태어날 때부터 몸에 새겨져 있었던 것 같았다.진서준은 이 사실을 깨달은 후, 거울을 들여다본 적이 있었다.그러자 거울 속에 진서준의 등에 하나의 붉은 빛이 나는 거대한 용이 새겨져 있는 듯한 모습이 비쳤다.혈해의 힘을 발동하면 그 거대한 용이 나타났고 그렇지 않으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현재 진서준의 힘으로는 최대 여섯 마리의 혈용을 응집할 수 있었다.그것도 천용 반지의 힘을 빌렸기에 가능한 일이었다.천용 반지가 없었다면 네 마리 혈용을 모으는 것만으로도 기력이 완전히 소진되어 기절해 버렸을 것이다.하늘에 떠오른 그 생동감 넘치는 여섯 마리 혈용을 바라보며 역천신은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역천신뿐 아니라 진서훈과 다른 이들 역시 숨이 턱 막혔다.“진용 혈맥이라니...”이 혈맥은 전설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전해지는 얘기로는 2천 년 전 대한민국 대륙을 통일한 초대 황제가 바로 진용 혈맥을 지녔다고 했다.그 후 2천 년 동안, 진용 혈맥은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진서준의 아버지인 진요한조차도 이 기술을 사용한 적은 없었다.“이 주먹에 죽는 것은 네게도 영광일 거야...”이 말과 함께 진서준의 모습은 사라졌다.여섯 마리 혈용이 압도적인 기세로 몰려오자 역천신의 얼굴에는 공포가 가득 찼다.역천신은 지금 태어나 처음으로 이런 절망적인 곤경에 빠지게 됐다.심지어 25년 전, 대한민국의 지선과 맞섰을 때도 이런 무력함은 없었다.‘말도 안 돼. 내가 이런 애송이에게 죽을 리 없어. 이 몸은 지선이란 말이야!’“애송이야, 누가 살고 죽을지는 아직 모르는 일이야!”말은 그렇게 했지만 역천신은 저도 모르게 마음속에 커다란 변화가 생기고 있었다.역천신은 스스로 세상에 본인의 생명을 위협할 자는 없다고 믿었으나 진서준의 이 주먹 앞에서 처음으로 패배를
호국사들은 신을 바라보는 눈빛으로 진서준을 보며 혀를 끌끌 찼다.진서준은 바람에 흩어진 역천신을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할아버지, 이제 돌아갑시다.”진서준이 모두를 모시고 돌아가겠다고 했으면 무조건 약속을 지킬 것이다.진서준은 무슨 일이 있어도 약속한 일을 책임지고 행동에 옮기는 사람이었다.“좋아, 우리 다 함께 돌아가자.”진서훈은 깊이 숨을 들이쉬며 말했다.진서훈이 막 몸을 돌리려는 순간, 뭔가가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진서준이 그대로 바다 위로 쓰러졌다.“진 마스터!”“서준아!”“진 청년!”진서준이 쓰러지는 모습을 본 진서훈 일행은 긴장한 기색으로 곧장 그에게 달려갔다.진서훈은 서둘러 진서준의 맥을 짚어보고는 한참 후에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다행이야. 단지 기력이 소진돼 기절했을 뿐, 큰 문제는 없어.”그 말에 다른 이들 역시 조마조마했던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진서준을 성도로 데려간 뒤, 진서훈 일행은 곧바로 진서준을 병원에 보냈다.그리고 진서훈 일행도 치료를 받기 위해 자리를 떠났다....“언니, 지금 한밤중인데도 진서준이 아직 안 돌아왔어. 설마...”허윤진 자매는 여전히 해변 별장에서 진서준이 무사하게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제발 그런 불길한 말 좀 하지 마.”허사연이 눈을 흘기며 나무랐다.“나도 그러고 싶어. 근데 벌써 거의 네 시간이 지났는데도 진서준이 안 돌아왔잖아. 난 혹시라도 진서준이...”허윤진은 말을 점점 흐리더니 이내 눈가가 붉어졌다.만약 진서준이 정말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허윤진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 수 없었다.진서준을 따라가는 것이 답일까?허윤진도 모든 걸 끝내고 싶었지만 아직 그녀에게는 허성태가 남아 있었다.아버지를 두고 떠난다면 아버지는 과연 어떻게 될까?허사연은 비록 겉으로는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몹시 불안했다.하지만 언니로서 허사연은 반드시 침착함을 유지해야 했다.“전화 한번 해볼게.”허윤진은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며 진서준에게 전
성도시 병원.창문에 걸린 별무늬 커튼 사이로 들어온 햇살이 잘게 쪼개져 진서준의 생기가 도는 얼굴 위에 점점이 내려앉았다.어젯밤 창백했던 모습과 비교하면 지금의 진서준은 평범한 사람처럼 건강을 되찾아 이질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의사 선생님, 상태가 어떻습니까?”검은 머리가 하얗게 변하고 얼굴엔 주름이 깊게 팬 진서훈이 우려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정말 놀라울 따름입니다. 이렇게 신체가 강인한 환자는 처음 봅니다.”진서준의 상태를 확인한 의사는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어젯밤 환자를 데려오셨을 때는 상태가 아주 악화한 상태였습니다. 환자의 장기가 거의 한계에 이르렀기에 저는 솔직히 오늘 밤을 버티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단 하룻밤 만에 정상인처럼 회복되다니, 도저히 믿을 수 없습니다.”진서준이 정상적인 상태로 완전히 회복됐다는 말을 듣고 진서훈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어젯밤 진서준을 병원에 데려온 뒤, 진서훈도 서둘러 상처를 치료하느라 여념이 없었다.몸 상태가 어느 정도 회복되자마자 진서훈은 바로 진서준의 상태를 확인하러 온 것이다.“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 환자가 깨어날 겁니다.”의사가 진서준의 상태를 확인하며 말했고 그 말을 들은 진서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그렇다면 참 다행이군요.”의사가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병상에 누워 있던 진서준이 천천히 눈을 떴다.진서준은 놀랍게도 어젯밤 몸이 산산이 찢어질 것 같던 고통은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고 대신 몸이 거의 회복된 것 같은 안정감을 느꼈다.어제 만용파천으로 역천신을 죽일 때, 진서준은 천용 반지의 힘 중 10분의 1을 사용했다.비록 10분의 1에 불과했지만 그 막대한 힘은 진서준의 몸을 자칫 산산조각 낼 뻔했다.그 순간, 진서준은 천용 반지의 엄청난 위력을 뼈저리게 깨달았다.10분의 1만으로도 이렇게 무시무시한 위력을 보일 수 있는데 그 힘을 전부 다 사용할 수 있다면 어떤 결과가 발생할지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서준아, 깨어났구나.
“그때가 되면, 신농은 전력을 다해 널 잡으려 들 거야.”진서훈이 무거운 말투로 말했다.진서준이 죽인 건 비록 중상을 입은 지선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진서준의 실력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충분히 보여줄 수 있었다.이 일은 너무 충격적인 일이기에 절대로 외부로 새어 나가서는 안 됐다.일단 외부에 퍼진다면 진서준은 평생을 쫓기며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알겠습니다.”진서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받아들였다.“그래서 우리 네 늙다리가 염치없게도 네 공을 빌려다 쓰려고 해.”진서훈은 미안한 얼굴로 조심스럽게 말했다.“할아버지, 제 안전을 위해 그러시는 거라는 걸 잘 압니다.”진서준은 담담히 받아들이며 미소를 지었다.“게다가 저는 명예에 연연하는 사람이 아니잖아요. 그리고 사실 할아버지들 네 분이 먼저 역천신에게 치명상을 입히지 않으셨다면 제가 어떻게 역천신을 처치할 수 있었겠습니까?”진서준의 말은 사실이었다.역천신이 중상을 입지 않았다면 진서준이 천용 반지의 힘을 빌린다고 해도 목숨을 부지할 수 없었을 것이다.진서준과 지선 사이의 격차는 단순한 재능이나 선법으로 메울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어젯밤 역천신과의 전투를 통해 진서준도 한 가지 확신을 얻었다.바로 이른바 지선이라는 인물은 전부 장청결에서 언급된 금단 수사라는 점이다.다만 이들은 진정한 선법을 익힌 수사와 비교하면 그 실력이 엄청나게 부족해 그저 가짜 금단 수사에 불과했다.“그럼 다행이야. 내가 사람을 잘못 보지 않았구나.”진서훈은 자기 턱수염을 만지며 흐뭇하게 웃었다.“좋아, 여기서 좀 더 쉬어. 난 이만 가볼게.”“잠깐만요, 할아버지. 혹시 휴대폰 좀 구해 주실 수 있을까요?”진서준은 집에서 자기를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을 허사연과 허윤진 자매를 잊은 적이 없었다.하룻밤 동안 연락 없이 사라진 자기 때문에 허사연 자매가 분명 걱정했을 것이다.혹여 허사연 자매가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이라도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최악의 상황이었다.“알겠어. 잠시만 기다려.”진서훈은 병실에서
“내가 가면 안 돼?”사실 진서준은 거절하려 했었다.르벨은 안개가 짙게 깔린 늪지대 같은 곳이라 진서준조차도 어디에 함정이 있을지 가늠하기 어려웠다.그러니 허사연이 온다면 다칠 가능성이 컸다.하지만 거절하면 허사연이 상처받을 게 뻔했다.“당연히 되지. 지금 위치 보낼게.”진서준은 단호하게 말하며 위치를 보냈다.자기 여자를 지킬 자신도 없으면서 강자들을 상대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자기야, 잘 자.”허사연이 애정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너도 일찍 자.”진서준이 다정하게 답했다.전화를 끊고 나니 진서준의 졸음이 싹 가셨다.진서준은 창가로 다가가 이 화려한 도시를 내려다봤다.“오씨 가문, 안씨 가문, 하씨 가문... 너희가 무슨 꿍꿍이를 꾸미든 난 전부 박살 낼 거야. 이번엔 반드시 나와 아버지의 정체를 밝혀내고 말겠어.”진서준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그렇게 별다른 사건 없이 밤이 지나갔다.다음 날 아침.진서준이 막 눈을 뜨자마자 도지아의 흥분한 외침이 들려왔다.“진서준, 됐어. 나 생겼어!”도지아는 눈 밑이 시커멓게 변해 있었는데 밤새 잠을 자지 않은 게 분명했다.진서준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물었다.“너 아직 처녀 아니었어? 대체 어떻게 임신한 거야?”“미친놈아, 임신은 개뿔, 무슨 헛소리야?”도지아는 얼굴이 빨개지며 진서준을 노려봤다.“그럼 왜 아침부터 난리야?”진서준이 되물었다.보통 사람이라면 이렇게 아침부터 흥분해 날뛰지 않을 것이다.“어제 네가 준 수련법 기억나지? 나 벌써 원기를 형성할 수 있게 됐어.”자기가 대단하다고 여긴 도지아는 자랑스럽게 선언했다.고작 하룻밤 만에 원기를 형성한 건 확실히 대단한 일이었다.“뭐? 그렇게 빠르다고? 너 타고난 천재 맞네?”진서준이 다소 의아한 표정을 보였다.보통 무인은 원기를 익히는 데만 최소 1년이 걸리는데 그것도 매일 꾸준히 수련할 경우에만 발생하는 일이었다.심지어 재능 있는 자들도 한두 달은 족히 걸린다.그런데 도지아는 단 하룻밤에 이 어려
“스위트룸은 따로 갈라져 있으니까 오해하지 마.”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며 도지아가 설명했다.“오해 안 해. 네가 그런 사람 아니라는 거 알아.”진서준이 무심하게 답했다.사실 둘은 황예은의 소개로 알게 되었을 뿐, 알고 지낸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진서준은 본인이 그 정도로 매력적인 남자라고 생각하지 않았다.스위트룸에 들어가자 도지아는 안쪽 방을 골랐다.“네 다리에 바른 연고에 아직 물 닿으면 안 돼. 되도록 샤워는 참아.”진서준이 슬쩍 주의를 줬다.“알았어.”도지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수건을 적셔 상반신만 가볍게 닦았다.그리고 거울에 비친 자기 몸매를 보자 진서준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이상한 감정이 들었다.‘내 몸매가 별론가? 아니면 내 얼굴이 부족한 건가? 예은과 비교하면 차이가 없다고 할 순 없네.’솔직히 외모만 놓고 보면 황예은을 이길 여자는 없었고 심지어 허사연조차도 약간 밀릴 정도였다.10분 후, 도지아는 가운을 입고 방에서 나왔다.진서준도 샤워를 마치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은 상태였다.“아까 얘기했던 거 계속할게. 내공 수련을 하려면 타고난 재능이 엄청 중요해.”진서준이 진지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재능 앞에서는 노력은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만약 네가 타고난 천재라면 빠르게 입문할 거고 아니라면 그냥 시간 낭비야.”감옥에 있을 때, 창욱 어르신이 진서준을 슬쩍 만져보더니 바로 천재라고 단언하며 무조건 제자로 삼겠다고 했었다.지금 돌이켜보면 그 말이 맞긴 했다.진서준이 연마하는 선법을 다른 사람이 똑같이 배운다고 해도 그 사람이 이 속도로 성장하는 건 불가능할 터였다.“알겠어.”도지아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내 재능부터 한번 확인해 줘.”“손 내밀어.”도지아는 조용히 손을 내밀었다.“잠시 후, 내가 너한테 원기 조금 밀어 넣을 거야. 그걸 느낄 수 있다면 넌 무도계에 발을 들일 자격이 있는 거고 못 느끼면 그냥 포기하는 게 나아.”진서준은 그렇게 말하며 도지아의 손목을 잡고 천천히 경락을 따라 원기를
“이게 무슨 천벌 받을 일이야, 기가 막히는구나.”아버지는 가슴을 쥐어뜯으며 한탄했다.“그래도 그렇지. 마약에 손댔다고 해서 어떻게 너를 팔아넘길 생각을 해? 그게 사람이야? 넌 민수 친누나잖아.”이게 바로 도지아 아버지가 가장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이었다.마약을 한 건 차라리 괜찮았다.그냥 도민수를 끌고 가서 반년 동안 재활센터에 처박아 두면 된다.하지만 도민수는 마약 때문에 도지아를 팔아넘겼다.이건 이미 인간이 할 짓이 아니라 짐승만도 못한 놈이었다.“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에요?”도지아는 부모님을 바라보며 물었다.“경찰에 신고해야지. 이 자식이 저지른 짓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해야 해.”도지아 아버지는 분노로 얼굴이 새빨개졌다.“당신 미쳤어요? 쟤 우리 친아들이라고요. 아들 인생 망칠 일이 있어요?”도지아 어머니는 깜짝 놀라며 황급히 휴대폰을 빼앗았다.“이놈은 더 이상 내 아들이 아니야. 그냥 짐승이야.”도지아 아버지는 분노의 고함을 질렀다.“우리 딸이 이놈 때문에 잘못될 뻔했잖아.”“지아가 없었으면 우리가 납치당했겠어요? 우리가 납치 안 당했으면 민수가 강제로 마약을 했겠어요? 그럼 이후의 일들이 벌어졌겠냐고요?”도지아 어머니는 여전히 아들을 감싸며 말했다.“당신 진짜 노망났어? 그러니까 지아를 그 개자식한테 넘기는 게 당연한 일이라고?”도지아 아버지는 아내를 믿을 수 없다는 듯 쳐다봤다.“둘 다 제 자식이에요. 아무튼 경찰 신고는 절대 안 돼요.”도지아 어머니는 도지아에게 애원했다.“지아야, 엄마가 부탁할게. 제발 신고하지 마, 응? 엄마가 약속할게. 다시는 민수가 이런 짓 못 하게 말이야.”솔직히 도지아는 어머니가 이런 반응을 보일 거라고 예상했기에 미리 결론을 내려두었다.“그럼 재활센터로 보내요. 난 집에서 나가서 살 거예요. 민수랑 다시는 마주치지 않을 거예요.”“안 돼, 지아야. 나가야 할 놈은 저 개자식이야. 넌 우리와 함께 있어야 해.”도지아 아버지가 간절하게 설득했다.“아빠, 엄마, 지금까지 키
조호는 동부 구역 귀도파의 두목이었다.그 지위는 노랑머리 청년의 상급 보스와 맞먹었다.그런 조호가 지금 한 청년 앞에서 이렇게 공손하게 행동하고 있었다.이것만 봐도 상대의 정체가 평범하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노랑머리 청년은 완전히 얼이 빠졌다.“진서준 씨, 이놈 어떻게 처리할까요?”조호가 고개를 숙이며 공손하게 물었다.“그냥 죽여. 이런 쓰레기는 살아 있어 봤자 사람들에게 해만 끼쳐.”진서준이 무심하게 대답했다.“뭐라고요? 호랑이님, 제발 살려주십시오. 이분도 제발 한 번만 기회를 주십시오.”노랑머리 청년은 그 말을 듣자마자 기겁하며 무릎을 꿇고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하지만 진서준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도지아 쪽으로 걸어갔다.“호랑이님. 저 삼생파 소속입니다. 우리 두목의 체면 봐서라도 한 번만 살려주세요.”노랑머리 청년은 무릎으로 기어가 조호 앞에 매달렸다.“나도 널 살려주고 싶어. 하지만 이건 진서준 씨 명령이야. 따를 수밖에 없어.”조호가 부하들에게 손짓하자 부하 두 명이 즉시 다가왔다.한 명은 검은 두건을 꺼내 노랑머리 청년의 얼굴을 뒤집어씌웠고 다른 한 명은 단단히 밧줄을 감아 그의 목을 조였다.노랑머리 청년은 공중에서 팔다리를 마구 휘저으며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30초 후 완전히 조용해졌다.“네 동생을 어떻게 할 생각이야?”진서준이 질문을 던졌다.“나도 몰라.”도지아는 초점 없는 눈으로 대답했다.친동생이 그깟 마약 한 봉지를 위해서 자기를 배신할 줄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도지아는 이제야 도민수의 눈에 자기가 마약 한 봉지보다도 가치 없는 존재였다는 걸 깨달았다.“이런 일이 없었던 걸로 하고 계속 모르는 척하는 것도 여러 방법의 하나야.”진서준이 제안했다.“하지만 한 번이 있으면 두 번도 있는 법이야. 다음에 또 이런 일이 생길 때, 난 아마 이곳에 없을 거야. 그때는 네가 스스로 보호할 줄 알아야 해.”진서준이 솔직하게 말했다.어떤 일이든 한 번 일어나면 두 번도 일어나기 마련이다.도민수는
다음 순간, 도민수의 시선은 흐릿해지고 완전히 환각의 세계로 빠져들었다.“자, 그럼 내가 먼저 할게. 이따가 너희도 실컷 즐겨.”노랑머리 청년은 눈에 불을 켜고 도지아에게 달려들 준비를 했다.그러나 바로 그때, 요란한 소리와 함께 누군가 별장 대문을 거칠게 걷어찼다.그와 동시에 천장의 전등이 박살 나며 순식간에 실내가 암흑으로 뒤덮였다.그리고 문 쪽에서 서늘한 한기가 흘러들어왔다.“누구야? 여기가 어딘 줄 알고 감히 여길 쳐들어와? 죽고 싶어?”노랑머리 청년은 분노에 이를 갈았다.딱 한 걸음만 더 가면 이 여자를 즐길 수 있었는데 누군가가 이 좋은 노릇을 방해한 것이다.그때, 별장 대문에서 어떤 남자의 실루엣이 나타났다.어둠 속에서 달빛을 받아 노랑머리 청년 일행은 그의 모습을 똑똑히 확인했다.“야, 너 뭐야? 여긴 네가 끼어들 자리가 아니야. 당장 꺼져.”노랑머리 청년은 버럭 화를 내며 소리쳤다.하지만 진서준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조용히 안으로 걸어왔다.그리고 바닥에 널브러져 환상에 빠진 도민수를 내려다보며 씁쓸하고 실망이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도박꾼, 술주정뱅이, 약쟁이... 이 세 부류의 말은 절대 믿어선 안 돼.”진서준이 나지막한 소리로 중얼거렸다.다행히 진서준은 이런 상황을 대비해 도지아에게 위치추적기를 달아두었다.“야, 내 말 들리지 않아? 뭘 멍때리고 있어?”노랑머리 청년은 씩씩거리며 다가오더니 진서준의 뺨을 갈기려 손을 치켜들었다.철썩!따귀 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노랑머리 청년의 몸이 팽이처럼 제자리에서 열 바퀴 가까이 빙글빙글 돌았고 진서준이 힘껏 걷어차자 새우처럼 접힌 채 바닥에 처박혔다.“웩!”노랑머리 청년은 쓰러진 채 입을 벌리더니 그 자리에서 어제 먹은 밥까지 모두 토해냈다.“형님, 괜찮으세요?”건달 하나가 달려와 노랑머리 청년을 부축했다.“저 개자식이... 다들 저놈 죽여버려!”노랑머리 청년은 분노에 차 똘마니들에게 명령했다.삼생파 두목인 노랑머리 청년은 정말 오랜만에 누군가에
노랑머리 청년의 말에 도민수는 속에서 분노의 불길이 치솟았다.“너 너무한 거 아니야?”도민수가 분노에 차서 소리쳤다.“너무해? 그게 네가 할 소리야?”노랑머리 청년은 도민수를 비웃으며 코웃음을 쳤다.“고작 마약 좀 얻겠다고 친누나를 바친 건 누구야? 대체 누가 더 개같은 짓을 한 거야?”노랑머리 청년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혀를 찼다.“솔직히 말해서 나도 너 같은 쓰레기 동생은 처음 봐.”주변에 있던 똘마니들도 박장대소했다.모두가 도민수를 한심한 광대 보듯이 쳐다봤다.“좋아. 영상 찍을게.”도민수는 이를 갈며 결국 받아들였다.“쯧쯧... 옛날에 많은 장군들이 여러 가지 수모를 견뎠다지만 넌 그 장군들보다 더 대단하네?”노랑머리 청년은 도민수가 이런 정도의 수모도 참을 수 있다고 하자 놀란 표정을 지었다.이건 거의 전대미문의 인내력이라고 볼 수 있었다.“저 여자 데리고 들어가.”노랑머리 청년이 도지아를 가리키며 말했다.“내 누나 건들지 마. 내가 직접 업고 갈 거야.”도민수는 치근덕거리는 건달들을 밀쳐내고 직접 도지아를 업었다.그렇게 도지아를 별장으로 데려오자 노랑머리 청년은 문을 잠그라고 지시했다.“잠깐, 너희 하 도련님은 안 오는 거야?”도민수가 서둘러 물었다.“그 녀석이 오면 우리가 이 짓을 할 수 있겠어?”노랑머리 청년은 도민수의 말에 코웃음을 쳤다.“너 설마 아직도 우리가 하 도련님을 위해서 일하는 거라고 착각하는 건 아니겠지? 틀려도 한참 틀렸어. 우린 그냥 이 여자를 신나게 맛보고 싶을 뿐이야.”도민수는 순간 멍해졌다.“그럼 나한테 마약을 먹인 것도 너희 결정이었어?”“그래, 그게 아니면 뭐겠어?”노랑머리 청년은 코웃음을 치며 말을 이었다.“너희 같은 평범한 집안 놈들은 우리 하 도련님 기억 속에 남을 가치도 없어.”“이 벼락 맞아 뒈질 개자식들아!”도민수가 꽉 쥔 주먹에서 우두둑하는 소리가 났다.“이 개자식이 누굴 욕하는 거야?”노랑머리 청년은 곧바로 발차기를 날려 도민수를 바닥에 나뒹굴게
“단순히 하경범의 동선을 조사하라는 것뿐이야. 너더러 그놈이랑 목숨을 걸고 싸우라는 게 아니야.”진서준이 조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사실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야. 나 혼자 여러 일을 대응하기 어려워 그런 거야. 다른 일이 없으면 내가 직접 그놈을 찾아갔을 거야.”조상규가 처참하게 죽는 모습을 떠올리며 조호는 이를 악물고 임무를 받았다.“알겠습니다, 진서준 씨. 사흘 내로 하경범의 일정을 조사해 보고하겠습니다.”“좋아, 그럼 일단 밥부터 먹자.”진서준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식사가 끝난 후, 조호 부자는 먼저 자리를 떠났다.그들이 나간 후, 오영수는 의심스러운 눈빛을 보였다.“저 자식 믿을 수 있는 겁니까? 하경범에게 달려가 밀고하면 어쩌려고 그러는 겁니까?”“그런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 일부러 저 녀석 앞에서 조상규를 죽인 겁니다.”진서준이 담담하게 말했다.“내가 마음만 먹으면 사람을 죽인다는 걸 알게 됐으니 감히 딴생각은 못 할 겁니다.”오영수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오영수도 인간 심리에 관한 책을 많이 읽어왔기에 진서준의 판단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혹시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하세요.”오영수가 입을 열었다.“저는 단 하나만 궁금합니다. 대장님 삼촌은 도대체 언제 돌아오는 겁니까?”진서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궁금한 걸 말했다.진서준의 목표는 오영수의 삼촌에게서 자기 가문에 대한 정보를 얻는 것이었다.그것이 아버지의 행방을 찾는 단서가 될 수도 있었다.“늦어도 모레면 돌아올 겁니다.”오영수가 대답했다.“셋째 삼촌이 돌아오면 바로 연락할게요.”“부탁할게요.”진서준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저녁 무렵.한 식당에서 둘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민수야, 오늘은 웬일이야? 왜 갑자기 밥을 사주려는 거야?”도지아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이건 도민수의 스타일이 아니었다.최근 도민수는 화약고처럼 사소한 일에도 폭발하기 일쑤였다.그런데 갑자기 자기를 불러 밥을 사준다고 하니 너무나도 이상했다.“
조호는 진서준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사람을 죽이는 걸 보고 앞으로 감히 다른 마음을 품지 않겠다고 다짐했다.조상규 같은 대종사조차 가볍게 정리되었는데 하물며 조호 같은 평범한 인간은 말할 것도 없었다.일행은 다른 방으로 자리를 옮겨 다시 식사를 시작했다.“진서준 씨... 잠시 후, 제가 모셔도 될까요?”치파오 여자는 일부러 허리를 숙이며 가슴골을 드러냈다.조상규가 죽으면서 여자는 기댈 곳을 잃었으니 이제는 새로운 든든한 버팀목이 필요했다.조호의 아들은 자기 밥만 쳐다보며 눈길을 감히 다른 데다 돌리지 못했다.괜히 이상한 시선을 줬다간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조금 전엔 일부러 조상규를 자극하려고 연기한 거야. 넌 가봐도 좋아.”진서준이 손을 휘저었다.치파오 여자는 매력적이었지만 진서준은 전혀 관심이 없었다.진서준에게는 이미 여자친구가 있었고 그것도 한 명이 아니었다.이 말을 듣자, 치파오 여자는 눈에 띄게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그럼 저는 문 앞에서 대기하겠습니다. 필요하신 게 있으면 언제든 말씀 주세요.”여자가 나간 후, 진서준이 입을 열었다.“대장님, 하씨 가문에 관해 얼마나 알고 있죠?”“하씨 가문이요?”오영수는 멈칫하더니 이내 고개를 저었다.“그다지 잘 알진 못합니다. 저는 군에서 지내는 시간이 많아서 집에 잘 안 들릅니다.”“그럼 너는?”진서준은 조호를 바라봤다.조호는 급히 젓가락을 내려놓고 입을 닦으며 대답했다.“저도 하씨 가문의 사업에 대해 조금 아는 정도입니다. 현재 르벨의 모든 카지노는 하씨 가문이 장악하고 있고 그 외의 누구도 끼어들 수 없습니다.”다른 지역에서는 사람들의 일상생활에서 의식주가 가장 중요했지만 르벨에서는 도박이 가장 중요했다.80세 노인부터 3살짜리 아이까지 누구나 도박을 했다.르벨 경제의 중심은 도박이었다.덕분에 하씨 가문은 지역 내 절대적인 권력을 쥐고 있었다.오씨 가문, 안씨 가문 같은 명문대가도 하씨 가문 앞에서는 고개를 숙여야 했다.“하경범이라는 인물을
“뭐가 무리야? 네 여자가 따라준 차를 마시면 앞으로 너희 둘의 관계가 완전히 끝난다는 뜻에서 절교차라고 생각하면 되겠네.”진서준이 웃으며 말했다.“진서준 씨가 큰형님이잖아요. 첫 잔은 큰형님이 먼저 드셔야죠.”“얼른 마셔. 마시지 않으면 널 죽일 거야.”진서준의 얼굴이 순간 냉랭하게 변했고 순식간에 분위기가 살벌해졌다.“진서준 씨, 농담이 심하시네요. 설마 차 한 잔 때문에 절 죽이겠습니까?”조상규가 여전히 억지로 웃었다.하지만 다음 순간, 조상규의 웃음은 영원히 얼굴에 굳어버렸다.진서준이 갑자기 손을 뻗어 아무런 예고 없이 젓가락을 던졌다.그 젓가락은 공기를 가르며 날아가 조상규의 가슴을 관통했다.펑!심장이 터지는 끔찍한 소리가 방에 울려 퍼졌다.조상규는 고개를 푹 떨구고 그대로 식탁 위에 쓰러졌다.조호 부자는 겁에 질려 다리가 풀렸고 슬금슬금 진서준과 거리를 벌렸다.‘이건 분명 미친놈이야. 자기 심기를 건드렸다고 사람을 마음대로 죽여?’처음부터 이런 놈인 줄 알았다면 차라리 아까 목숨을 내걸고 싸웠을 것이다.치파오 여자는 더욱 기겁하며 벌벌 떨면서 진서준을 쳐다봤다.“아가씨, 이제 네 남편은 죽었어. 그러니 이 차는 네가 대신 마시도록 해.”진서준이 치파오 여자를 바라봤다.“저, 저요?”치파오 여자의 얼굴이 순간 얼어붙었다.조상규는 차 한 잔을 마시지 않으려다 그대로 목숨을 잃었다.그럼 자기도 거부하면 그대로 죽을 게 아닌가?“왜? 설마 차 한 잔도 못 마시는 건 아니겠지?”진서준이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제발... 목숨만 살려주세요.”치파오 여자는 그대로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차에 독이 들어 있어요. 조상규가 저를 협박해서 저도 어쩔 수 없었어요. 전 정말 아무 죄도 없어요.”“뭐? 차에 독이 있다고?”조호 부자는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방 하나 더 잡아.”진서준이 무심하게 말했다.“네. 지금 당장 준비하겠습니다.”치파오 여자는 공포에 질린 채 황급히 방을 빠져나갔다.치파오 여자가